실천인문학 ? 삶을 고민하고 가꾸는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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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고민하는 인문학.

인간은 누구나 풍족하게 살고 싶고, 편리하게 생활하고 싶어 한다. 풍족함과 편리함에 대한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런 욕망을 얼마만큼 합리적으로 조율하면서 충족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론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잉여욕망, 즉 거품욕망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말해야 한다.
‘사람은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 – 나는 진실로 무엇으로 살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참으로 오래된 물음들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정신없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진부한 이야기들이고, 어쩌면 사치스럽고 한가한 허영이고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물음들은 일생 동안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문득문득 떠오르거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예외는 없다. 우리 ‘영혼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 통념의 가치를 추구하며 그냥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통속적인 물질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관계에 들어서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영혼의 물음을 내팽개친다. 오히려 통속적인 사회적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노심초사하고 더 발버둥친다. 우리는 이 ‘영혼의 물음’에 정면으로 답해야 한다. 이 영혼의 물음은 양심의 소리이기도 하고, 철학적으로 ‘존재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 소리를 듣고 물음에 답하는 것을 우리는 ‘삶의 근원적 성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너도 나도 웰빙을 말한다. 어느덧 웰빙은 질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질 높은 상품의 대명사가 되었다. 웰빙 설렁탕까지 있으니 오죽하랴. 웰빙은 삶의 질을 오로지 상품의 가치로 환원하여, 한 달에 몇 번의 외식을 하며, 상품화된 문화 공연을 몇 차례 관람하며, 유기농 채소와 과일 혹은 등 푸른 생선을 먹느냐 그렇지 않느냐, 운동을 하느냐 런닝 머신을 어떻게 활용하는냐 등등을 이용해 객관적 지표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웰빙 상표가 아니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는 인식이 암암리에 우리들 의식에 스며들었다.

웰빙인 삶의 질은 곧 행복일 텐테, 행복이 오로지 객관적 지표로 치환되어, 주관적 심리 상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가치를 완전히 찬탈해 버렸다. 웰빙은 문자 그대로 ‘존재의 최적 상태’, 즉 인간 존재가 가장 인간 존재다움을 뜻한다. 그리고 존재다움은 존재(인간)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사회) 속에서 최적의 가치를 실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다움은 존재와 세계, 인간과 사회의 합리적인 관계에서 빛과 향기를 발하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운 ‘사회적 가치’인 것이다. 여기서 웰빙, ‘품격 있는 삶의 방식’을 말할 수 있다.

존재(있음)는 무(없음)에 대한 존재요, 삶은 죽음에 대한 삶이다. 웰빙(well-being)은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웰빙이다. 품격 있는 삶은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데에서 온다. 몇 백년 몇 천년의 삶은 우리 인간에게 없다. 그래서 반성과 성찰의 삶을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이제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말할 수 있다.

삶의 현장과 인문정신

인문학은 다음의 세 가지 역할(혹은 영역)의 연관성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첫째, 인문학의 순수 연구활동이다. 인문학 각 분야의 이론 연구와 작품 활동을 의미한다. 둘째, 인문학의 응용 연구활동이다. 문화(모든 문화 혹은 문화적 표현은 인간 삶의 가치와 그 고민을 다루기 때문), 민주주의의 실질화, 시민사회의 윤리 등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셋째, 인문학과 현실 사회의 합리적ㆍ실천적 결합에 관한 일이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이 현실 사회에서 꽃피울 수 있는 실천적인 활동을 전면화해야 한다.

우리의 논의는 이 세 번째의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삶이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우리의 삶의 과정은 그 자체로 소중한 사상이며 이념이고,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 스스로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도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인 우리, 우리인 나’라는 공동체적 의식을 갖는다. 이것이 인문학의 핵심인 인문정신이다.

이런 인문정신에는 뚜렷이 자각된 주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주거의 불안정, 생활의 유목성과 의존성, 심리적 불안, 삶의 박탈감과 체념 등등은 한마디로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공통된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각된 주체의식이 엄청나게 약화되어 있다.

인문정신을 매개로 한 만남은 교육자든 피교육자든 주체의식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이런 인문정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이 더불어 어우러지는 삶의 모둠판 속에서 빛과 향기를 발한다. 이 삶의 모둠판에는 좌초하고 분노하며 환멸을 느끼면서 욕망과 꿈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열정에 가득찬 행위들이 있다. 그래서 갈등과 대립이 있다.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것은 서로의 생각과 의견에 다름이 있음이요, 생각과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똑같이 인정하고 평가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화와 소통과 만남을 통해 하나의 삶의 모둠판에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삶의 현장은 개인들의 다양성의 가치가 인정되고 단절 없는 소통이 이루어지며 공동체 의식을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다. 인문학을 통한 만남도 이런 것이다.

삶을 나누고 가꾸는 인문학

주체의식의 자각은 개인적 깨침으로도 가능하고 종교적 귀의를 통해서도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 혹은 옹골찬 노력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인문정신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인류의 다양한 역사적 축적물이 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문정신이 가치 있는 세상살이의 내용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학적 체계의 형식을 인문학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인문정신은 세상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한,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항상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정신은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다시 회복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인문학 교육과정은 함께 진지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이런 인문정신을 서로 일깨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각된 주체의식도 영롱한 삶의 사상도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거의 폭력적 수준에 가까운 경제적 물질적 욕망과 이해관계 속에서 일관되게 정신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란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통상 말하는 소외계층의 사람들은 자의든 아니든 사회 시스템에서의 일탈 혹은 주변화로 인해 체념에 가까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주체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보통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통념의 가치에 내몰리면서 모르는 사이에 주체의식을 상실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통념의 가치에 따르게 되면 돈과 지위만을 추구하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면서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되고, 그래서 통념의 가치를 추구하고 획득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면 여지없이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여기에는 정신적 가치가 자리할 곳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인문정신이 오염되고 말살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가치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인문정신의 상실은 자연스레 사회적 윤리의식의 부재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질적 가치와 이기주의적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교육의 측면에서나 가치의 측면에서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개인의 능력과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사회와는 분명히 거리가 멀다. 국가 윤리나 국민 윤리가 아닌 시민사회의 윤리가 부재하고 실종된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강하게 지켜 왔던 인문정신의 와해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문학의 교육과정은 유행도 아니요, 특정 계층에 국한된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인문학의 인문정신은 물, 공기와 동일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정신적 사회적 가치다. 물과 공기가 오염되면 정수기와 여과기를 거치듯이, 인문정신이 오염되면 인문학적 교육과정을 거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닐까.

물론 여기서 인문학적 교육과정이란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교육행위나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 구성원들 상호간에 교육적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오염된 물과 공기를 들이켜고 있으면서 오염된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오염되어 있지 않다고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문학 교육을 통한 인문정신 공유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이때 그 교육과정은 제도교육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함께 다듬고 가꾸어가는 과정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기동(경희대 철학과) / admin@ad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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