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3가지 방법 :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⑩

Spread the love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3가지 방법: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⑩

 

강사 : 박기순(충북대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 이론을 개조하고 쇄신하려는 시도들 중 “사실상 최후의 것”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전화(轉化)라는 정치적 문제의식 속에서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우리시대의 사상가였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많은 철학적 논제들과” 비판의 무기가 될 개념들을 지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런데 현실을 정치하게 분석해 낼 수 있는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비(非)교조성’을 강조했던 그의 작업은 어쩌면 그 이론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알튀세르적인 효과와 영향이라는 면에서 오늘날 더욱 논쟁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치열했던 이론적 투쟁은 완수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고,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후세대에 의해 비판적으로 전유(傳諭)되고 계승되고 있다.”

또한 알튀세르가 추구하던 비결정론적이며 비환원론적인 이론적 경향과 이단적이고 개방적인 지적 태도로 인해 그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됨으로써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강좌의 열 번 째 강의에서는 충북대학교 철학과 박기순 교수의 안내로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서의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를 만나 보았다. 이번 강의의 고갱이는 그들이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 묶일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또한 어떤 거리에서 알튀세르를 ‘계승’하거나 ‘극복’하려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사유하는 법을 배운 직간접적인 제자들이면서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그를 극복하려고 하는, 생존하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들 중 가장 각광 받는 세 명의 철학자들을 알튀세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자.

 

▲ 박기순 충북대교수 ⓒ프레시안

그런데 ‘알튀세르와 함께’ 우리 시대의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 아니 정치 자체에 관해 사유하고 있는 그들이 우선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맑스주의로 대표되었던 정치적 운동과 해방의 이념이 가졌던 난점과 실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 내부에 만연한 경제 환원론적인 입장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적 작업을 이어 받은 그들에게 주어진 보다 분명해진 사유 과제는, 사회 각 부문이나 경제적인 영역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를 독자적인 작동 원리를 가진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대상화하고 개념화할 때 드러나는 난점은 분명한 것이었다. 고유한 영역으로서 ‘정치 자체’로의 회귀는 “현실에서는 정치의 소멸”, 즉 정치를 단순히 행정 기능과 국가 관리의 역할로 축소시키고 사회적?경제적 갈등의 조정으로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정치 개념의 협소화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자본의 침식과 그로 인해 공동체가 가진 정치적인 역량의 침체와 쇠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고착화된 사유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과 급진성을 보존하며, 그것을 어떻게 양화시키거나 희석시키지 않고 정치의 고유성과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가 가진 주요한 문제 틀은 “정치의 개조, 혹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의 가능성”을 ‘정치적 주체성’이 가진 의미와 한계 속에서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인권의 정치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에게 맑스 혹은 맑스주의는 “우회할 수 없는 지점으로서 그에게 근본적인 사유의 지평을 제공”했다. 그는 맑스주의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드러낸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의 극복을 여전히 맑스주의의 지평 속에서 사유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스승인 알튀세르의 작업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도달한 지점, 즉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가진 난점에서부터 그의 독자적인 사유를 개진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이라는 테제가 가진 난점에 대한 답변이다. 즉, 알튀세르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경제적 생산관계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한 장치이자 물질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요소로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고 그 재생산의 메커니즘은 설명하지만, 그 전화는 설명할 수 없는 기능주의적인 이론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에 대립되는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과, 그가 강조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양립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발리바르는 이 난점을 ‘초개인성(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주체화가 집단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은 어떤 관계들과 공동체성의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개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다.

또한 발리바르는 맑스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의 체험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같은 근대적인 이념들에서 보이는 보편성의 형식을 드러내며, 피지배자들의 이 가상적 보편성의 경험은, 단순한 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편성의 이념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보편성의 정치’,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권 개념에 근거한 근대정치의 전화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설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획득되고, 상실되고, 재규정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권’ 개념이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재정식화를 요구하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민권’ 개념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인권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인권은 그 내용상 미결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에서 법적 합의를 통해 시민권의 형태로 규정될 수밖에 없지만, 그 본성상 늘 시민권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권리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인권 개념의 난점은 그것이 시민권과 전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결별할 수도 없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인권 개념은 데리다가 정의(justice)에 관해 말한 것 처럼 어떤 ‘무한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민주주의와 동의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인권 개념 속에서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권이 무한성으로서 이해되는 한, 그것에 기초해 있는 민주주의 또한 무한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 원리이자 정치의 원리로서의 이 인권을 ‘평등한 자유’ 또는 새로운 조어로서 ‘평등-자유(?galibert?)’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했다. 박 교수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함축하여 서로의 요구를 제한하지 않는 요구의 절대성을 표현한다. 둘째, 평등-자유는 보편성을 함축하여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되는 인권, 즉 권리의 보편화를 함축한다. 셋째, 평등-자유는 정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발리바르에 있어 “인권, 민주주의, 정치는 모두 동의어”가 된다. 그에게 인권은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서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인 개념으로만 설명되던 ‘전(前)-정치적’ 단계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계기’로서, 즉 ‘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되는 권리이다.

 

바디우와 진리의 정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발리바르에 비해 1960년대에 알튀세르가 개진했던 이론적 편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유산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의미를 가진 철학적 개념들을 생산한다. 박기순 교수에 따르면, “이 전유와 계승이 무엇보다도 잘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주체(sujet) 혹은 주체성의 문제이다.” 즉, 알튀세르는 정치를 “어떤 특정한 원리나 조건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귀결이 아니라”,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구조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진영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는 바디우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으로 설명되는 이러한 입장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바디우에게 있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전체를 거부하는 ‘다양체(le multiple)’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체’는 어떤 원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어떤 정치적 ‘사건’의 효과와 귀결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문제에 있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주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것’의 사유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었다.

특정하게 주어진 어떤 체계의 원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사건은 어떤 해석의 대상도 아니며 오직 명명의 대상일 뿐이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렇게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승인으로서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이 명명된 사건의 귀결들에 대한 탐색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명의 귀결들과 효과들로서 사후에 구성되어지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것 즉, ‘진리(v?rit?)’이며, 바디우는 이 과정을 ‘진리절차’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이 사건에 의존해 있는 요소들을 구별하여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이 모든 절차를 ‘충실성(fid?lit?)’이라고 개념화하며, 이 진리절차를 구성하는 국지적 지점들을 ‘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디우에게 정치를 통해 구현되는 “진리는 이렇게 전투적 주체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보듯이 그 사건이 경과되면 정치적 급진성의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며 그것의 영향력도 안정화에 접어들지만 말이다.

현대철학에서 거의 폐기된 ‘진리’ 개념을 새롭게 비틀어서 바디우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건’을 통해서만 생산되어 잠시 드러나는 그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에 표상될 뿐이다. 그리고 진리를 생산해 내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의 작업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으며, 그저 진리에 무관심하게 고유한 활동에 전념하여 그 사건을 통해 진리의 명명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작업이 된다. 그런 면에서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를 사유하는 장소나 정치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들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자기발생적 사유 활동,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 없는 주체성’ 개념을 맑스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자면, 그것은 주어진 상황인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입장을 취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곧 입장의 정당화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해당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선언’과 그에 뒤따르는 ‘행위’들로 대변되는 ‘전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는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비정합적인 전체에 붙여진 하나의 비어 있는 이름이며,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들은 독특한 정치적 사유들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맑스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정합적 이론 체계를 가진 맑스주의의 한 경우로서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지적 투쟁 또한 “정치에 대한 하나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와 비분리의 정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할의 논리’와 부르주아 기득권 세력이 늘 사용하는 ‘지배를 위한 언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랑시에르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대중은 스스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랑시에르는 정치적 계몽주의, 정치적 주체에 의한 정치적 해방이라는 인식을 애초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근원적 평등’은 정치적 목표의 도달점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치적 분할에 관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입장인 것이다.

박 교수는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동안의 은둔 작업 끝에 내어 놓은이라는 저작을 통해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은 자본이 규정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부정하고 가장 정치적인 행위를 보장하는 자율성을 획득했음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낮-노동과 밤-휴식의 반복이라는 ‘시간’의 분할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통제하고 존재양식을 규정하려 했던 자본의 규율에 저항하여,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토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자각했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화와 그 역량에 관한 질문과 답변에서 박 교수는, “정치적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각성과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힘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랑시에르에 따르면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맑스주의의 전통은 (현실 맑스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이제 실패로서 체험되고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주의의 실패는 한 사상적 조류의 패배를 넘어서 “역사의 진보와 혁명에 대한 믿음의 붕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 붕괴로부터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것은 먼저 “정치에로의 회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의 종말”이다.

즉, 경제적인 힘(생산력)과 사회적인 힘(계급 실천)과 그것의 결합에 의한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식화된 “믿음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사회 및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성으로의 회귀를 추동”했지만, 실상 이러한 흐름은 현실 속에서 정치의 고유한 공간을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의회, 정부기관, 사법기관”으로 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이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들의 업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탈정치화에 맞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재사유하려고 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 재사유의 출발점은 젊은 시절의 지독한 스승이었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지점이었다.

 

다르게 사유하기의 어려움

강의와 질의응답은 세 시간이나 이어졌지만, 이 시간 동안 대표적인 포스트 알튀세리안들로 불리는 걸출한 현대 철학자들의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축약으로 인한 오해의 덫을 감수하며) 일반인 수강생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강생들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통해 방금 익힌 새로운 개념과 입장들을 곧바로 현실과 역사 문제에 적용하여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개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근거로 그 개념의 적합성을 따지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보는 과정은 더 오랜 시간과 열정을 요구한다.

초코파이로 저녁의 허기를 달래가며 강사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이 강좌의 모든 수강생들과 더불어 필자도 생각의 지도를 넓혀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오늘날 ‘진보 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이 지향하고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이 어떻게 편협한 파벌주의나 전체주의적 문화와 한 몸이 될 수 있는지를 목도하면서, 나의 언어로 그것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되풀이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사유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에 대한 불감증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심의 부족, 곧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며 질타했던 ‘반성하지 못하는 삶’은 저 숱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민중의 고난을 낳고 파렴치한 악덕을 쌓아 왔던가.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