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광대, 안병대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청춘의 서재]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의 인연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안병대 씨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안병대 씨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 안병대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원형극장의 회전 무대 관람하듯 입체적인 내용 전개,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는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죽이고 사랑하리라’ 핏빛 사랑의 파국, 천성만 남은 ‘왕’과 ‘광대’는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양의 ‘양심’과 이리의 ‘욕망’을 지닌 나약한 인간,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담한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집트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지젝·아감벤 등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조은평 (건국대학교 강사)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민주주의라는 신은 죽었는가?

대학 시절,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설명해 보라는 시험 문제를 접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니체의 그 유명한 선언을 두고 힐난하듯 농담하던 기억은 남아있다. ‘원래 있지도 않았던 신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거지?’ 혹시 니체는 ‘우리가 꿈꾸며 기대하던 그런 과거의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던 건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을 술자리에서 주고받던 기억 말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난장 펴냄)라는 책을 접했을 때, 불현듯 먼저 머릿속에 스치던 생각도 바로 이런 거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하는 질문에도 역시 두 가지 방식의 답변이 가능하지 않을까? ‘원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죽긴 뭘 죽냐?’, 아니면 ‘우리가 꿈꾸며 투쟁해 왔던 민주주의는 이제 죽어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는 답변 말이다.

물론 이 책의 원제목은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에?>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회자되고 현실화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진단하려는 취지다. 이에 비해 번역서가 새로 설정한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생각엔 오히려 더 적절해 보인다. 원래의 책 제목에 응답한 여덟 명의 사상가들(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로보예 지젝)이 제기한 문제의식도 단순히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진단한다기보다는 그 단계를 훨씬 더 뛰어넘어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사회’ 자체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


어떤 사상가들은 원래 ‘민주주의’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거나 단지 사건이나 운동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 구체적인 실체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원래 없었기에 죽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본다. 또 다른 사상가들은 우리가 꿈꾸며 목도하고 있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저 텅 빈 기표이거나 완전히 변질돼서 소수가 이끌어가는 과두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민주주의자를 자처한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85쪽)인 셈이다. 더구나 이제는 이념의 갈등과 현실의 냉전으로 대표되던 20세기는 지나갔기에, 더 이상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도 자처한다. 하지만 바로 ‘탈-이데올로기 시대라고 자처하면서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조르조 아감벤 등 지음, 김상운·홍철기·양창렬 옮김, 난장 펴냄). ⓒ난장

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또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할 때, 대체 ‘민주주의자’란 뭘 뜻하는 것일까? 자유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공화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식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통해 각자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구분하려 하지만, 대체 이러한 수많은 ‘민주주의들’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공통 분모는 뭘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의 본뜻에 주목한다. ‘인민(demos)의 통치(cratie)’라는 뜻을 지닌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단어에.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처럼 특정한 정체(통치 형태)와 통치 원리를 뜻하는 용어들과는 전혀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일부나 어떤 대타자가 아니라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87쪽)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민의 자기 통치’를 뜻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으로 인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배해야 하는지, 또 자신들의 주권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는 바가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나라가 대부분 민주주의라고 자처하지만, 그저 대의 민주주의, 입헌 정치, 정당 정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 아울러 자유로운 시장을 기반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서로 내세울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통치 형태가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보장해 주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에서는 전 지구적인 자본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경제 질서뿐 아니라 한 국가의 경제 정책도 좌우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힘과 결탁한 전문 정치인들이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인민의 통치를 대신해 준다고 떠벌려 댄다.

인민의 통치’를 봉합해온 민주주의(?)


단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근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쌍둥이 형제와 결합해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날개로, 여러 가지 배제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인민 통치’의 사건들과 기억들을 억압하고 봉합하면서 대의 민주주의나 공화정이라는 상징으로 정착되어 온 것이 바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브라운의 지적처럼,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합리성만이 소위 자유 민주주의적 제도의 기반처럼 강조되면서 “국가는 공공연히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경영 관리 운용의 구현체로 탈바꿈”(90쪽)해 버렸다. 또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노예와 여성을 배제했던 것처럼 근대 민주주의도 경쟁에서 도태당한 빈민을 배제하면서 성장해 왔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서구 민주주의는 불법 거주자나 이주 노동자를, 또는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가정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성역을 보호하려 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는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사건들과 운동들을 억압하고 그 기억들을 봉합하면서 오늘날의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로, 또는 ‘공화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로스가 ‘민주주의’라는 랭보의 시를 언급하면서 강조했던 1871년 5월 파리 코뮌의 몰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당시 “파리 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 이들은 그동안 견고히 존재해온 위계적, 관료적 구조 대신에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적인 조직 형태와 절차를 도입했다.”(153쪽)

이런 면에서 파리 코뮌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이자 소규모로 코뮌을 실현했던 역사였다. 그럼에도 파리 코뮌은 당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참칭한 부르주아-공화주의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게다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의 패배를 가져온 이 대학살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제3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결국 랭보의 ‘민주주의’라는 시는 당시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 실험이 어떻게 봉합되었는지, 또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문명화된 나라(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로스의 말대로, “실제로 서구의 정부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됐다. 그 단어가 예전에 간직했던 해방의 울림을 완전히 제거한 채 말이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그리고 말하자면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161~162쪽) 과연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실험이 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고 봉합된 것일까? 또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는 민주주의가 왜 역설적으로 ‘인민 없는 통치’가 된 것일까?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가?


물론 지배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상징적으로 전유해 온 탓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에서 제기하는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바로 이 측면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곧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사회는 무슨 수로 자기-제도화하며, 제도화된 것의 자동 보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66쪽)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제도화된 현재의 역설적인 ‘인민 없는 통치’의 상황에서 사회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첫 번째 질문은 ‘민주주의’가 주체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바디우가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재해석하면서 비판하는 지점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 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3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 ‘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 “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 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

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또한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주체나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아마도 이 지점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재점유하는 투쟁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랑시에르의 말대로 “정치적 투쟁들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131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현재의 ‘민주주의’에서 껍데기들을 걸러내는 체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민주주의적인 권력이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공통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150쪽) 말하자면 그 누구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등의 전제를 놓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할 능력을 지녔다고 규정된 사람들(전문가, 정치인, 혁신적인 자본가)과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해지는 사람들”(150쪽)로 끊임없이 사회의 위계를 구분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기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명분 속에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정권 교체를 원하는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정말? 혹시 우리는 어려운 나의 살림살이가 좀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누군가를 욕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노와 불만 때문에,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꾸며 이명박 대통령을 욕망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이 CEO의 마인드로 경쟁력 있고 살기 좋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욕망의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됐고, 그 때문에 절실히 후회하면서 절망에 빠져봤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좀 더 국민을 배려하고 함께 잘사는 사회를 이루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지도자를? 제발! 이제는 어떤 지도자를 꿈꾸고 욕망하기보다는 시스템과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인민의 자기 통치’가 현실화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말이다.

한편에서는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은 박근혜를 막기 위해서 지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딱 그 이유 말고는 아직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다. 박근혜를 막아내고 이명박 정권을 심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스스로 해방된 자들이 될 수 있는 우리 인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체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그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그런 기대는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일지도 모르니!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례 1. 추석 연휴 귀성길에 어떤 묘한 가족을 목격했다.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와부부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하철이 터미널에 도착하는 내내 각자의 핸드폰에만 몰두해 있었다. 아이는 게임을 했고, 엄마는 인터넷을 했고, 아빠는 카카오톡을 했다. 셋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조차도 안내 방송을 듣고 각자 짐을 들고 내릴 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 셋이 왜 티셔츠까지 맞춰 입었는지 궁금했다.
#사례 2. 10대들을 상대로 ‘당신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1위는 ‘핸드폰을 꺼놓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히다

나는 아직 2G 핸드폰을 사용한다. 굳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쓰던 것을 쓸 뿐이다. 그런데 내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아직까지 사용하다니, 대단하다”고 말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뚝심이 있다고도 말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왜 고장 나지도 않은 기존의 것을 버리면서까지 ‘신상‘을 사는 것일까? 대체 왜 ‘신상’에 둔감하지 못한 것인가? 왜 소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하는가? 바로 그것이 세련되고, 혁신적이고, 시대에 충실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상’들이 나를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2의 설문 조사에서 영화관에서의 단 두 시간도 핸드폰을 꺼놓기 싫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핸드폰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핸드폰을 꺼놓는 것을 세상과의 단절, 고립으로 느끼는 듯하다. 핸드폰이 곧 세계와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바로 옆의,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과의 연결보다는 ‘저기’ 멀리의 어떤 사람과의 연결을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인내와 타협과 소통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접속’과 ‘차단‘이 번복 가능한 아주 가벼운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례 1의 가족처럼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례 1의 가족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가족의 화목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는 핸드폰이라는 프라이버시 요새 안에서 무전으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얼굴을 맞대고 직접 대화를 통해 귀찮고 더디고 힘겨운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 없이 말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인간관계에 영속성은 수반되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피상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인간관계도 이제 질보다 양이 우선시된다. 이렇듯 그들은 협소한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혀버렸고, 또 다시 광장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사실상 점차 변화해온 인간의 의사소통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마치 은행 주도로 이루어지는 업적들과 마찬가지로 그 손실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반해서 그 이득은 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양쪽 경우 모두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피해‘도 정말 드물게 생기는 이점들에 비해서 오히려 한쪽에만 보다 더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 같다.” (51쪽)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이토록 편리해진 세계의 불안한 이면을 꼬집는다. 이제 세계는 실체 대 실체가 아닌, 그래서 어떤 위험성도 어떤 고통도 없이 섬세하고 가벼운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가상의 네트워크가 즐비하다.
‘워크맨’의 최초 판매자들은 “당신은 결코 다시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고독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 관계가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하게 되면 언제든 ‘삭제’ 버튼 하나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의 인간관계에서처럼 “이제 혼자라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요구에 노출되어서 위협당할 필요도 없다. 희생하라거나 타협하라는 요구에 위협당할 필요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식의 요구에 응할 필요도 없다.”(29쪽)
하지만 바우만은 결국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의존하는 것은 동료들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겨진 공허감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워크맨이라는 작은 친구는 얻었지만, 정작 동료들의 진짜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인터넷은 어떤가? 바우만은 우리가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놓쳐버렸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고독할 시간도, 필요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도망치려고만, 기피하려고만 애쓰던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분노도 예술도 철학도 모두 고독안에서 태동한다.

 

유동하는 세계는 잔인하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Liquid Modern World)’는 바우만의 개념이다. 그는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처럼 유동적인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도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이다. 그는 마흔네 편의 편지를 통해 지금은 막스 베버가 말한 “강철 외투”가 아닌 “가벼운 외투”의 시대임을 천명한다.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선택이든 가벼운 외투를 걸치듯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또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식 인간관계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동한다는 것, 액체성이라는 것은 일견,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 어떻게 나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잔인함을 뜻한다.
“유동하는 근대의 문화는 ‘함양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유혹해야만 하는 고객들을 갖고 있다.” (162쪽)
속눈썹 감모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성형 수술을 판매하고, 그저 약간의 수줍음도 사회 불안 장애라는 이름을 붙여 의료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이다. 쇼핑하지 않는, 혹은 소비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된 인간으로 분류해 버린다.
“철학자 다니 로베르 뒤푸르가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지구의 한계점까지 자기 영토를 밀고 나가서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모두 상품으로 채우려 할 뿐 아니라, 아래로도 깊이 파고들어가 이전에는 사적인 일들에 불과했던 것을 상업적으로 수익성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 물에 대한 권리나 인간 게놈 유전자에 대한 권리, 살아남은 생물종이나 아기, 인체 조직들에 대한 권리에 이르기까지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다 상품으로 만들려 하고, 예전에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몫이었던 주체성이나 섹슈얼리티 같은 것들도 상품처럼 판매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재활용하려 한다.” (206쪽) 하지만 자본주의의 파도가 넘실대는 근대는 이렇듯 집요하고 잔혹한 모습을 은폐하려 애쓴다.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단행되는 해고와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 예비 노동자의 어두운 삶 또한 노동의 유동성, 유연성이라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이름에 가려져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단순한 표류 이상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힘겹게 자맥질한다.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사이에서

이러한 유동하는 근대에 맞서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우만의 제안은 책의 마지막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편지 44.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에서 카뮈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다. 카뮈는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그 전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타인들을 위한 삶, 즉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택한다. 반면 시시포스는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그 인간적 곤경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에 끌리게 된다. 카뮈는 이 둘을 병치시키며 “나는 반항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시시포스의 곤경에는 프로메테우스가 발을 들여놓아도 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무의미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그 안에 개입하는 순간, 시시포스는 노예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 실천가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바우만은 카뮈가 “그 어떤 운명도 경멸(상황을 무시하는 태도)을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는 법이다”고 말했다면서, 그는 체념과 싸우며, 무관심을 찌르며,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카뮈는 우리에게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며, 우리가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를 설정하고 항상 주시해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즉, 바우만은 카뮈를 통해 ‘나’만이 아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시시포스의 형벌과 노역의 세계로 들어가 시시포스를 변화시키듯, 힘을 합쳐 이 자본주의와 유동성의 근대에 반하면 원자화된 개인들의 가짜 보호막을 걷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우리는 다시 친밀감과 영속적인 관계를 위한 그 지난한 좌절과 상처의 시간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이상 답답하고 지루한 위협의 시간, 믹소포비아(Mixophobia, 이질 공포증)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비참의 시간, 아름다운 상흔의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귀찮고, 두려워했던 그 인간관계의 좌절과 상처가 장애물이 아니라 사실은 견고하고 영속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하나의 필수요소인 것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우리는 조금의 상처도 주고받지 않는 산뜻한 관계를 꿈꾸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한 관계, 언제든 처분되고 또 손쉽게 포기할 수 있는 관계, 즉 아무것도 아닌 관계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충분히 상처받고, 좌절하며, 번뇌하고, 인내하며, 분노하고, 반항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지 말자. 고독할 기회조차 잃은 자는 진정으로 고립된 세계를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청춘의 서재]

, 에드워드 사이드, 김석희 역, 살림 2001.

김운하 / 소설가.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 연구원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은 타인의 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생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서 기쁨과 슬픔, 실패와 방황과 좌절, 꿈과 현실의 마찰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고뇌들, 예측 불가능한 행운과 불운들을 읽으며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는 굳센 의지와 신념, 치열하거나 심오한 사유가 드러내 주는 인간성의 고귀한 높이에 찬탄하며 경외심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젊은 시절에 전기류를 더 많이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크게 후회스럽다.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그 암울하고 잔인한 시대를 살아가며, 오직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바깥의 문제에만 온통 몰두한 나머지 정작 한 개인으로서 ‘나는 무엇인가?’ 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관해선 사실상 거의 도외시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자아 정체성의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삶의 정체성 문제라고 해도 상관 없다. 나는 마치 무조건 물에 뛰어들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그것이 수영인줄로만 아는 사람처럼, 세상이라는 바다에 겁 없이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런 이유로 내 청춘의 방황은 남들보다 더 길어졌고, 더 힘들었고, 더 우스꽝스런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만일 내 청춘기에 타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기록들을 거울삼아 더 깊이 좀 더 자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고 어리석게 좌충우돌 하지는 않았을까?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커튼 Le Rideau』이라는 책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특히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방황이라고 보는데, 방황 가운데서도 특별한 방황이라고 쓰고 있다. 청춘의 방황이 하필 왜 특별하단 말인가? 그 이유는 청춘은 방황하면서도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기 때문이다. 또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 청춘은 인생을 산 경험이 너무 짧기 때문에 아직 삶과 세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둘째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거기에 딱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가엾게도 청춘은 자신이 이중적인 무지에 빠져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쿤데라는 청춘의 방황을 방황 자체로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청춘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후에 거리를 두고 뒤를 돌아보게 될 때다.

나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과 표류의 긴 시간의 끝에서야 겨우 그런 모든 경험들이 갖는 의미를 뼈아프게 이해하게 되었으니. 내가 처음『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원제 Out of place)』을 읽으며, 무엇보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리라.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서 엉뚱하게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된 것은 그만큼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

어쩌면 이 한 문장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드의 자서전은 독특하게도, 어린시절부터 삼십대 초반 청춘의 나이에서 끝난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인 94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5년만인 99년도에 가서야 힘겹게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책이 되었다. 2003년 9월, 백혈병이 끝내 그의 삶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68년 동안의 한 생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치명적인 병과 싸우는 와중에도 2000년에는 이스라엘의 무력사용에 항의하기 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달려가 레바논 국경의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이 회고록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현재의 생활과 당시의 생활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고 싶은 욕구였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간격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가치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오직 명백한 사실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역사와 상황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지만 추억이나 대화를 통해 이따금 되살아날 뿐 기본적으로 회상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상황은 또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조차도 기억과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는 것. 인간의 삶은 비록 시간 속에서 허망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망각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삶은 절대적인 소멸이 아닌 어떤 지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시간과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사이드는 고통스런 병상 위에서 이 책을 기록해 나갔지만, 지나온 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망각의 위험에 처한 기억의 간격들에 글쓰기라는 수단으로 연약한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삶이 가져다 주는 여러 곤란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가를 다시 깨달았다고 썼다.

사실 에드워드 사이드란 이름은 무엇보다 그가 1978년에 발표한 책『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이라는 저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서구 중심적 음모와 편견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그 책 이후 서구에서나 한국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도 역사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이후 서구 문화와 제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서구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 해왔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그가 맞서 투쟁하고자 했던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의 책『오리엔탈리즘』은 사실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 자신의 삶의 편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도 그런 인간적인 면들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영국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출생했다. 1947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가족들은 모두 이집트로 이주했고, 1950년대 말에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가족은 아랍인이지만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이집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윤택하게 살았고, 프린스턴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의 교수로,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자 카톨릭 세례를 받은 미국 국적을 가진 그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이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며, 경계인일 뿐이라는 불안은 젊은 시절 내내 그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팔레스타인은 평생 이중적인 감정을 안겨주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근원” 이었던 그 문제는 회고록을 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에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 “비통한 느낌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자아” 내는 원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아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혼란스런 균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영국의 한 왕자 이름에서 딴 에드워드라는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이 조합된 그 이름에서조차 그가 평생 살게 되는 그런 ‘경계인’ 적인 삶의 정체성이 마치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경계인으로 생각했고, 또 끝까지 한 명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조화를 이루는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쳐 투쟁했다. 억압과 배제가 없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며 온몸을 던져 그 꿈을 위해 싸웠다. 제국주의나 서구 중심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지만, 삶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어떤 권위나 권력, 경계 짓기에도 순응하길 거부하는 비타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서전에서 고체처럼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나 정체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한 줄기 흐름, 끊임없이 경계를 벗어나 바깥에 머무르려는 도저한 흐름의 연속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나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어떤 통일된 단일한 정체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정체성이란 것을 현재 주어져 있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 혹은 창조를 통해 형성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낯선 미지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시절의 모든 방황과 표류를 수락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방황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형성하고 실패와 오류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탐색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했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끝까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 집중력, 위험의 감수,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의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내가 사이드의 자서전에서 새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상 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이방인이 되길 거부하지 않았던 한 정신의 편력.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5년 만에 치르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 누구는 절대 안 되는지 또 어떤 정당은 국민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정국이다.

물론 선거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지켜진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선거란 거짓말쟁이들의 잔치이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하며, 그 외면 자체가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진행되었던 선거의 역사를 숱하게 많이 경험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지만 늘 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은 색 정당 깃발로 뒤덮였다.

수십 년을 같은 색깔 표시로 뒤덮인 한반도의 지도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지형도가 깨질 수도 있음을 이미 확인한 전례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

공포의 사회, 전체주의 정치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1951년),(1958년),(1961년) 등을 통해 격동의 20세기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1968년 학생 운동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20세기를 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 부분이다(역자 서문, 8쪽). 전체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한다. 이렇게 대중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폭력의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릴 적부터 움츠리고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안 된다. ‘묻지 마 살인’과 흉악한 범죄들 때문에 거리는 감시 카메라 속에 가두어졌다.

2012년 9월 12일 오후 1시 21분 현재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성폭행’ 키워드 기사는 8만1602건에 달한다. 같은 키워드의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5167건, 2008년에는 7627건 검색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1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강간(성폭력범 포함) 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1만3634건, 2008년 1만5094건, 2010년에는 1만9939건이었다.

범죄 발생 비율보다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9월 6일자 인터뷰에서 여성학자 권인숙은 “성범죄 보도의 증가가 ‘공안 통치’를 향한 위정자의 욕망 그리고 언론의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정권은 성폭력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부활시키겠다고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전체주의적 정치 기조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니 현 정권과 크게 정치색이 달라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렌트가 살아있다면 21세기 한국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할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 강의의 대부분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대한 재구성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칸트의 인간학 역사철학 등에서 보이는 정치사상을 고루 잘 소개하고 있다. 칸트가 미적 판단 대상을 예술작품, 자연과 같은 ‘사물’들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르게 아렌트의 미적 판단 대상은 ‘정치 행위’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미 칸트의?<판단력 비판>에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내재해있다고 보았다(첫 번째 강의).

아렌트는 자신의 관심사는 “복수의 인간(men)이며 진정한 목표는 사교성”(네 번째 강의)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복수의 인간에 관하여 칸트가?<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칸트의 미학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복수의 인간을 아렌트는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상의 존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 상식과 공통감(sensus communis)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음 ; 자율적이지 않음, 심지어 사유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동반을 필요로 함 =??<판단력 비판>제1부의 미적 판단.” (67쪽)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단수의 인간을<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룬다. 칸트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판단력 비판>의 인간은 이미 앞선 두 비판서의 대상인 원자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다.

아렌트는 만약 칸트에게 왜 단수의 사람(Man)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men)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칸트는 그들이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일곱 번째 강의)이라고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를 향유하는 인간은 결코 자기 금고에 예술 작품을 가둬놓고 혼자서 음미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 가슴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에서 타인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서로 소통하는 순간 예술 작품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며 인간은 복수의 인간이 된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생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음을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나’는 불완전한 자아일 뿐이다. 아렌트는 아래와 같은 칸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공공성이 필수임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90쪽)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수적인 공적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는 칸트 철학을 가져와 인간 정신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상상력이다. 칸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미적 공감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아렌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정치적 사안을 공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확장된 정신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도 바로 이 확장된 정신을 통한 공적 소통에 의해 가능했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이었다.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린다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는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이다. 흔히 ‘무관심적 관심’으로 번역되는 칸트의 이 용어는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이다. 내가 갖고 싶은 신상품에 자꾸 눈길이 가거나 땅장사가 전국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무사심적 관심을 미적 경험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모나리자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112쪽). 관찰자만이 사태를 목격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치 고대철학자들이 철학은 노동하지 않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유하는 삶, 관찰하는 삶, 관조하는 삶만이 전체를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22쪽).

관찰자 앞에서 광경은 전체로서의 역사이며, 이 광경의 참된 주체는 어떤 “무한”을 향해 “진행하는 일련의 세대들” 가운데 있는 인류이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인류의 목적지는 영원한 진보이다.” (118쪽)
칸트의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그려져 있다. 비록 개별 인간은 후퇴하기도 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듯도 보이지만 종으로서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칸트에게 있으며 아렌트가 그것을 보았다. 그 종착지는 ‘누구도 자신의 동료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인류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들 간의 평화’이다. 관찰자는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이다.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칸트는 사람들이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찰자는 오직 복수로만 존재하며 관찰자는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료 관찰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을 잃어버린 인간은 칸트에게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공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이 갖지 않는다. 본래 공통감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지 않고서는 공통감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공통감을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이다. 나에게 다가 오지 않는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는 버려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도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민중의 살림이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먹고사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표심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경제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리는 경제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다.

아렌트는 공통감을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여기에서의 감각이란 몸으로 부딪히는 행위자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반성의 결과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설하고 싶은 비전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하여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다.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군 감축을 주장하는 것,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 교육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답게 살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이는 나라의 기둥이기 때문에 나라가 돈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통할 공동체 감각이다. 관찰자로서 반성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감각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이며 아렌트가 칸트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박정희가 그립다고? 홉스에게 물어봐![청춘의 서재]

박정희가 그립다고? 홉스에게 물어봐![청춘의 서재]

안광복(중동고등학교 교사·철학 박사)

* 본 기사는 8월 10일자 [프레시안 books] 를 재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철학자 칸트는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를 나눈다. ‘도덕적 정치가’란 ‘정치꾼’이다. 한마디로, 도덕을 허울 삼아 자기 잇속만 좇는 치들이다. 반면, ‘정치적 도덕가’는 참된 정치인이다. 그들은 원칙과 명분에 따라 비전을 펼친다. 사람들의 미움을 사 벼랑 끝까지 몰리더라도, 그들은 해야 할 말을 한다.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끌릴까? 언뜻 보면 정치적 도덕가일 듯싶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파트값, 땅값 올려주겠다는 공약으로 표를 긁어모은 정치인이 얼마나 많던가. 어느 시대나 평등과 배려를 앞세우는 자들은 늘 ‘마이너리티’였다. 시민들은 이익을 채워주겠다는 정치가들에 혹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은, 세상은 더 살기 좋고 바람직하게 바뀔까?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기란 쉽지 않다. 지난 세월, 살림살이 피게 해주겠다며 큰 소리쳤던 권력자들을 많이 겪어봤던 탓이다. 물론,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타협을 이끄는 작업이다. 그러나 윤리와 비전을 좇지 않는 정치는 발전이 없다. 늘 ‘이익 나눠 먹기’ 수준에 머무르는 정치는 결국 주저앉고 만다. 칸트가 늘 도덕과 원칙을 강조했던 이유다.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오월의봄 펴냄)는 이런 식으로 울림을 준다. 책의 딸림 제목은 ‘우리의 눈으로 본 철학사’이다. 말 그대로, 책은 서양 철학자들의 이론을 우리 현실에 비추어 풀어낸다. 그만큼 설명은 절절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2010년, 유로존은 가입 국가들에게서 7000유로를 끌어 모으려 했다. 그리스의 국가 파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금 계획은 점점 커져서, 지금은 무려 1조 유로를 마련하려 한단다. 왜 유로존은 그리스를 애써 도우려 할까? 그리스 국민들을 위해서?

책의 ‘로크’ 편을 쓴 박영균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구제 금융의 목적은 그리스의 국채에 투자한 은행들을 보호하는 데 방점이 있단다. 프랑스 3대 은행은 그리스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미국의 은행들은 여기에 빚보증을 섰다. 그리스가 무너지면, 손해는 고스란히 힘센 나라들에 돌아갈 테다.

이런 모습이 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본주의의 뿌리에는 로크의 ‘사회 계약설’이 깔려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세워졌다. 사람들이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권력자를 세우고 복종하기로 약속했다는 뜻이다.

만약 국가가 내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때는 어떨까? 나아가 내 재산을 빼앗으려 든다면? 로크는 당연히 국가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저항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명만큼이나 중요하다. 내 돈을 가로채려는 국가는 내 목숨을 위협하는 강도일 뿐이다.

로크의 저항권은 신자유주의와도 맥이 닿는다. 국가는 경제 활동에 주재 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규제와 통제는 경제를 죽일 뿐이다. 국가는 범죄를 막는 역할만 하면 된다. 능력껏 알아서 자유롭게 이익을 좇을 때, 살림살이는 가장 피어나게 되어 있다.

이 논리에 따라 지금의 ‘유럽 구제 금융 사태’를 바라보자. 거대 은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붓는 일이 정당할까? 세금도 결국 시민들의 ‘재산’이다. 힘 센 몇몇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의 돈을 함부로 써도 될까? 시민들은 지금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내 돈도 담겨 있을 공적 자금을 쏟아 붓는 국가에 ‘저항’해야 할까, 협력해야 할까? 로크의 ‘저항권’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행동은 달라질 테다.

로크는 시민들의 건전한 정신을 믿었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들은 ‘공적(公的) 이성’을 갖추고 있다.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도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양보와 타협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믿음 위에서 굴러간다.

하지만 지은이는 “로크는 더 이상 미국 독립 선언서’를 만들어냈던 혁명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풀려난 경제는 어떻게 되었던가? 과연 ‘공적 이성’에 따라 사회는 조화롭게 흘러갔던가? 오히려 고삐 풀린 탐욕이 세계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을 뿐이다. 지금의 현실을 이겨내려면, 자본주의의 재산권,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뿌리가 되는 로크의 사상부터 제대로 짚어보아야 한다.
▲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이렇듯,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는 서양의 철학자들을 지금의 현실로 불러들인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가 피어나는 이유다. 책에는 2012년의 우리 현실을 빗대어 말하는 부분이 많다. 서양 근대는 절대 왕정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싹트던 시기였다. 우리 역시, 오랜 군부 독재 끝에 민주주의가 피어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게다가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 서양 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우리 현실과 절실하게 겹친다.

홉스를 예로 들어보자. 홉스는 사회 혼란을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들이 무질서와 폭력을 막기 위해 지도자를 세웠다고 상상한다. 이 지도자는 <성경> 속 괴물, ‘리바이어던’과 같다. 감히 맞서려 했다간, 누구라도 목숨을 잃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힘세다는 뜻이다. 이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옥죌 때 질서는 잡힌다.

홉스가 꿈꿨던 지도자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개발 독재 시대 권력자들이 이렇지 않았던가. 그들은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시민들이 독재에 지지를 보냈다. 홉스는 시민들의 강력한 독재자는 시민들의 ‘합의’에 따라 세워진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물론, 그에게서 독재자란 ‘왕’이었다.) 홉스의 주장은 개발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겠다.

하지만 ‘홉스’ 편을 집필한 한길석은 이는 ‘도착적 민주주의’일 뿐이라며 헛웃음을 짓는다. 홉스의 주장이 맞다고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심각하다. 시민들은 독재자에게 따르겠다고 합의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기 보존(conatus), 즉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회는 모래알처럼 되어 버린다. 국가는 나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줄 때만 가치가 있다. 국가와 나의 관계는, 보안 회사와 개인 간의 계약과 비슷한 모습이다. 당연히 절절한 애국심이 자라날 까닭이 없다. 사람들은 다른 시민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아도 애써 무관심하려 할 테다. 사회를 꾸리는 목적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독재 국가에서 이기적인 시민이 늘어나고 부패가 판을 치는 까닭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서양의 근대는 과학과 민주주의가 싹트던 때였다. 과학은 종교와 맞서며 ‘합리적인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민주주의는 절대 왕정과 힘을 겨루며 자유와 평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지배가 흔들리는 곳에는 혼란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양 근대의 철학자들은 질서를 잡아줄 ‘새로운 정치 원리’를 찾는 데 오롯이 매달렸다. 과학이 펼치는 합리적인 사고는 철학자들이 비전과 가치를 새로이 다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는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생생하게 살려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고 부르짖던 시절이 있었다. 잘 살아보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가 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우리에게는 사회를 이끌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책의 ‘루소’ 편을 집필한 김광호의 말은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를 이끄는 원리는) 주권자의 자의(恣意)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비전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는 과연 가슴 부풀게 하는 공통의 비전과 가치가 있을까? 이상(理想)이 없는 삶은 생존 논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돈과 이익만 좇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순간, 더 이상 행복은 곳간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사회와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 가치와 이상을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를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다.

 

 

숭고의 존재론/칸트 숭고론의 탈(반)칸트적 해석/김상현 [5월 월례발표회]

?[2012년 5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논문 제목: 숭고의 존재론/칸트 숭고론의 탈(반)칸트적 해석
발표자: 김상현 (서울대)

 

칸트의 ‘숭고론’으로부터 칸트를 벗어나다

후기: 박영미(학술1부장, 한양대 외래교수)

 

 

서양의 근대를 대표하는 칸트에서 근대의 균열 또는 근대를 벗어날 새로운 모색이 보여진다고 발표자는 말한다. <숭고의 존재론-칸트 숭고론의 탈(반)칸트적 해석>에서 칸트의 숭고론에 숨어 있는 진리에 대한 재고찰 가능성을 논의한다. 칸트적 입장에 대한 반칸트적 또는 탈칸트적 해석을 통해 인식능력들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진리 규정에서 벗어나 인식능력들의 균열과 그 균열의 틈새에서 삐져나오는 존재 진리의 다른 국면들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표는 칸트 숭고론에 국한되지 않고 칸트의 판단 전반과 그 속에서의 상상력의 역할과 가능성을 토론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는 우리가 칸트를 이해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의미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칸트 속에서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의 진리를 반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간론과 사회론의 새로운 길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이는 그에게도 아직 큰 숙제인 것 같았다. 아쉽지만 그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이렇게 오고가는 대화에서 글에서는 다 읽어낼 수 없었던 한 연구자의 고민과 열정이 전해졌다.

 

2.

발표의 전반부 내용은 칸트의 숭고론에 대한 이해이다. 칸트에게 숭고의 감정은 불쾌가 쾌로 전환되는 데서 오는 일종의 환희이다. 숭고는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된다. 수학적 숭고는 대상의 공간적 크기에 대한 감정으로, 대상의 공간적 크기는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마주치는 감정상의 크기가 무한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숭고이다. 역학적 숭고는 대상이 가진 힘의 크기에 대한 감정으로, 매우 강력한 위력을 가진 대상과 만나게 되었을 때 감성적?신체적 능력은 이 대상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공포(불쾌)의 원천이 되며 이 불쾌감은 곧 존경(경외)로 전환된다. 역학적 숭고의 예로 칸트는 절벽에 서 있을 때, 거대한 폭풍우와 마주하게 됐을 때를 제시한다.

이러한 숭고판단은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에 의해 성립된다. 숭고판단은 인식판단에서 상상력이 지성의 개념에 적합하도록 직관의 다양을 종합할 뿐 그 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고, 취미판단이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와 조화’에 의해 성립되는 것과 다르다. 숭고에 있어서 상상력은 무능력하다. 그러나 상상력의 무능력은 인식능력들 간에 적절한 위계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 상상력의 무능력은 그 자체로 이성능력에게는 합목적적이며 이로써 위계의 조화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는 수직관계의 조화이다. 이러한 숭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칸트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이성의 탁월성이자 상상력의 무능함 또는 이성과 상상력의 위계에 따른 질서이다.

발표의 후반부에서 발표자는 칸트 숭고론에 내재하는 역설의 탈근대적 가능성을 언급한다. 먼저 J. F.리오타르가 칸트의 숭고론을 인식능력들의 조화보다는 분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칸트에게서 이성이란 이념능력을 말하며, 이념이란 ‘직관으로 현시할 수 없는 개념’을 말한다. 그리고 상상력이란 ‘현시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이 이성의 이념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의 숭고론은 칸트 자신이 의도하고자 한 대로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을 많이 포함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진리와 가상의 문제이다. 발표자는 이로부터 리오타르가 지적했던 칸트의 인식론적 역설과 유사하게, 존재론적 역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에게서 판단이 성립하는 과정의 핵심은 상상력과 지성(또는 이성)의 관계이다. 사물 자체로부터 촉발된 직관을 감성이 수용하지만, 감성이 수용한 직관을 개념과 관련하여 종합하는 것은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념(이념) 능력인 지성(이성)은 상상력이 종합한 그 표상에 대해 규정을 내려 판단(인식)을 종결짓는다. 칸트는『판단력 비판』에서 판단력을 ‘특수를 보편에 포섭시키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보편이 주어져 있는 경우’인 규정적 판단력과 ‘보편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인 반성적 판단력으로 구분한다.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의 언급은 상상력이 지성이나 이성의 입법으로부터 벗어나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이 세계에 있어서 인간 경험의 모든 국면이 범주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경험의 도덕적 차원과 미감적(감성적) 차원은 이론적 지성에 의해 영원히 은폐된 존재의 어떤 국면을 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발표자는 초험적 진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숭고판단의 상상력이 가장 그 진리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 다시 묻는다. 우리는 진리가 항상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항상 이것과 저것의 다름 그리고 그 다름들 중에서 옳은 것과 틀린 것을 명확히 할 수 있음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만약 진리의 참모습이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고 이성으로도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우리 지산의 판단이나 인식들을 평가하고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력이 지성이나 이성으로부터 벗어날 때 일순간이나마 초험적 진리가 드러날 수 있듯이, 일체의 법칙이나 이념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그 자체로서의 우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3.

월례발표회는 새로운 글만을 발표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발표된 글도 다시 토론할 수 있다. 이번처럼. 김상현 선생님의 논문은『시대와 철학』제22권 1호(2011년 봄호)에 실려 있다. 발표형식은 4월부터 시도하기 시작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지루할 수 있는 논문 발제를 과감히 없애고 사회자가 준비한 질문을 통해 발표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번처럼 이미 발표된 논문인 경우 미리 논문을 읽고 온 후 사회자의 꼼꼼한 정리와 질문 그리고 발표자의 답변을 듣고, 중간 중간 참석자의 질문이 더해지면서 딱딱한 발표형식에서 벗어나 마치 세미나를 하고 있는 듯 편안하게 발표하고 참여할 수 있었다. 기존의 발표형식과 새로운 발표형식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앞으로 월례발표회는 새로운 발표형식을 토대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청춘의 서재]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청춘의 서재]

소율(자유기고가)

 

간소한 문장은 깊이 우려낸 녹차의 맛과 비슷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는다.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상대방의 손을 잡는 행위와 동일하다. 밑줄은 독자가 저자에게 보내는 공감, 동의, 지지, 환희, 동맹을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식이다. 당연히 좋은 책일수록 밑줄을 긋는 횟수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밑줄을 칠 문장보다 밑줄을 치지 않을 문장이 더 많을 때 밑줄을 긋게 된다. 왜냐하면 밑줄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면 길수록 밑줄은 어느새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은 우승할 확률1%인 대책 없는 80년대 삼미 야구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미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팀이기보다는 야구를 취미로 즐기는 사회인 야구 동호회 성격이 강한 팀이었다. 선수 이름도 슈퍼스타에 어울리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최강타, 전태풍, 백두산 같은 멋진 이름 대신 금광옥과 장명부 그리고 패전 전문 마무리 투수 감사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금광옥은 새로운 사과 품종 이름 같았고, 장명부는 일본의 인기 만화 데쓰노트를 한국식 이름으로 지으면 어울릴 만한 이름 같았다. 그리고 감사용은 감사용 다음에 선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다가오는 한가위엔 고객 여러분의 정성에 보답하고자 저희가 감사용 선물을 준비했어요.

슈퍼맨 망토 입고 야구를 하는 정신없는 구단답게 꼴찌는 삼미의 몫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기록은 대부분 삼미가 기록했다. 한 시즌 최다 연패, 한 시즌 최소 승률, 한 경기 최대 점수차 역전패, 한 경기 최다 병살타, 한 경기 최다 홈런 허용, 한 경기 최다 사사구 허용, 특정 구단 상대 최다 연패 등등. 하지만 박민규는 승률 1%의 꼴찌 팀 삼미에 주목했다. “승리한 경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지만 패배한 경기에서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특급 투수 크리스 매튜스의 말이다. 꼴지로 출발한 삼미는 다음 시즌에 기똥차게 변신을 한다. 최종 성적은 1위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2위였다. 그는 만화적 세계와 농담과 명랑으로 꼴찌와 실패의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개나 줘 버려! 낄낄거려도 좋고, 깔깔거려도 좋고, 데구르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데구르르 굴러도 좋은 소설이었다. 아, 재미있다 !

나는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책에 밑줄을 단 한 번도 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인 내가 저자인 박민규에게 보내는 야유가 아니며 그의 문장과 서사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아니다. 첫 페이지 첫 문장 첫 음절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길게 이어질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의 밑줄이 길다. 그만큼 박민규의 서사는 압도적이다. 그 동안 주류 문단의 젠체하는 문장, 뒷짐지고 훈계만 하려는 꼰대들의 서사, 당대를 외면한 낭만적 후까시와 후일담, 징징거리는 신경 쇠약 직전의 신파, 쓸데없이 무게 잡는 우울, 이 세상 모든 트라우마의 주범은 모두 폭력적 아버지라고 말하는 뻔한 가족 서사에 진절머리가 났던 시절에 읽은 이 소설은 시시껄렁한 잡담과 명랑으로도 깊이 있는 문학의 향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작품이었다. 장정일의 소설들이 시시해질 무렵 등장한 박민규은 싱싱해 보였다. 진정한 슈퍼스타는 박민규였다.

야구란 본질적으로 실패와 어긋남의 서사이다. 3할 타자란 10번 대결해서 7번 실패하고 겨우 3번 성공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의 법칙으로 보자면 3할은 실패한 승률이다. 10번 대결해서 3번 성공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3할 타자를 훌륭한 타자라고 자랑한다. 이렇듯 야구는 백전백승의 세계가 아니고 승자 독식의 세계도 아니다. <3승 7패의 세계>이다. “7패나 했어?”의 세상이 아니라 “ 3승이나 했어!”의 세상이다. 맹추, 띨띠리, 멍충이, 해삼, 멍게, 말미잘의 세상이다.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라 !

1%의 승자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불행한 시대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등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꼴등에 대한 따스한 위로와 공감이다. 이상적인 사회란 일등이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꼴찌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시대는 한 명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 > 은 이 시대 청춘들에게 헛스윙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얼핏 이 위로는 상투적인 스포츠 서사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방점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지지에 있다. 사실 역경을 극복하고 이룬 기적 같은 성공 스토리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박민규는 성공이 아닌 실패에 밑줄을 긋는다. 7패 다음에 3승이 찾아온다고, 7패 다음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8패 뒤에 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외로워도 슬퍼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들장미 소녀 캔디가 되라고, 말랑말랑한 것은 딱딱한 것보다 더 힘이 세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채찍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이 시대의 불안은 당신 탓이 아니며 당신의 무능 또한 당신 탓이 아니다. 그런 위로의 말이 간절한 시점이다.

엄청나게 빠른 직구를 자랑하는 투수의 공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공은 딱딱한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으로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온다. 니체는 말했다. 고통이 영혼을 갉아먹을수록 웃음을 잃지 마라. 나는 당신이 헛스윙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도 돌아서서 씨익 웃었으면 한다.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은 마른 잡초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청춘의 서재]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청춘의 서재]

 

박지용(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혁명가의 삶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노예혁명가 스파르타쿠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로베스 피에르, 파리코뮌의 극좌파 블랑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전사 체 게바라. 이 외에도 한참을 더 열거할 수 있는 이들 혁명가의 삶에는 혁명을 위한 열정과 저항의 파토스가 있다. 혁명가를 혁명가이게끔 하는 어떤 종류의 뜨거움이 있다. 이들 혁명가의 뜨거움이 대중의 심장을 끓어오르게 하고 진동시킨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분노로 떨려야 혁명은 일어난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살펴 본 혁명들은 저항하기 힘든, 압도적으로 거대한 체제를 적으로 삼고 있다. 폭력 혁명으로 전복된 체제는 폭력으로 반동화되며 이 과정에서 폭력의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지난한 폭력의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파리코뮌의 몰락까지 근 1세기의 달하는 근대사에서 집약된다.

그런데 전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가 있다. 이 혁명의 다름은 ‘그게 무슨 혁명이야’라는 반응을 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피를 뜨겁게 하지 않는 냉철한 사유의 혁명, 적과 마주대해 무력으로 싸우지 않는 혁명, 그럼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 혹시 깊은 산 속에서 일으키는 자아의 혁명을 말하려는 게 아닌가라고 짐짓 의심할 수 있다. 이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는 스콧 니어링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에 철두철미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삶은 다른 의미에서 혁명적일 수 있다. 이 혁명은 정치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지는 않으나 체제의 전복을 다르게 실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체제의 부도덕성에 대한 분노라는 반대급부의 소진적인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냉철한 사유와 삶의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작은 혁명에 관한 모범적인 사례이다. 이 혁명은 자본주의적 삶을 거부하고도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현실화시킨 그의 삶 자체이다. 어찌보면 니어링의 삶과 사상은 정치적인 투쟁이나 분노의 파토스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그가 미국 좌파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적인 성찰이나 계획에 대한 집착은 혁명적 파토스와는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다.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가치를 조화시키고 복원시키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것은 자연에 기초한 삶이었다. 노동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자연에 대한 신뢰와 지식이 있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을 그는 20년 동안의 전원생활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계획과 연구의 필요성은 자손대대로 농부로 살아온 이웃과의 대조에서 잘 드러난다. 이웃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만 어설픈 농부인 니어링보다도 못한 결실을 낳는다. 계획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관성대로 살아온 삶을 살게 되지만, 삶과 일을 계획하고 통제할 경우 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교훈이 남는다. 물론 이러한 보편적인 행위 원칙들은 전원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혁명운동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점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대도시에서의 정치 투쟁을 포기하고, 전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한 그들의 삶이 혁명에 대한 발상의 새로움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버몬트의 전원생활에서 니어링 부부가 추구한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생활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는 목적은 자본축적이 아닌 단순히 먹고 사는 데 있었다. 이윤이 없는 생활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농사를 지어서 전혀 남는 것이 없는 바는 아닐테지만 남겨서 돈을 모아두고 그 돈으로 또 뭔가를 해서 또 남기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이자 생활 습관일 따름이다. 이렇듯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이 감정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하면서 불안을 벗어나려는 축적의 몸부림에 허덕인다.

그런데 니어링은, 마치 성경의 한 대목처럼 ‘자연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라는 배포 큰 태도를 보인다. 사실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볼 때, 불안한 삶을 더욱 불안하게 느끼게 하고 또 달래주는 것이 모두 그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은퇴 후의 삶? 실직 후의 삶? 미리부터 대비해야 한다는 불안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비하고 또 축적해야 한다는 외침은 실상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불안한 삶에 대한 위안은 자본의 축적과 투자로만 달래질 수 있지만 그도 녹록치는 않다.

20년의 삶 동안 니어링 부부는 스스로의 자기평가 속에서 그들의 선택이 정당했다는 점과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삶이 극복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부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농업공동체는 니어링의 제안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갔다. 대안이라는 말 자체는 제한적인 가치를 갖는다. 말 그대로 대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혁명가가 목가적 전원생활에 도취한 것일 뿐이라거나, 혁명의 의미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시킨 혁명의 변절자라고 섣불리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성공적으로 제시된 대안은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으로 확산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작 자본주의적 삶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그러한 삶의 가능성에 대해 다수의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으로서, 하나의 대안적 사례로서 니어링의 삶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작은 혁명인 것이다. 실상 두려운 것이 자본주의 이후의 삶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상실감 혹은 공허감은 아닌가. 니어링은 도시를 떠나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보험과 저축이 없어도 삶은 만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체질적으로 충돌을 통한 돌파보다 우회함을 선호하는 성격들이 있다. 혁명에 대한 열정보다는 냉철한 분석과 진단을 선호하는 경향들도 각기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목표는 같으며, 그들이 공유하는 적대전선은 자본주의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농촌에 가서 살아볼까라는 생각에 그치지 말고, 니어링이 전해주는 사례를 예시로 삼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청춘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추천서[청춘의 서재]

청춘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추천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기든스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이지영(광운대 강사)

 

 

 

길거리를 거닐거나, 요즘 유행하는 커피 전문점에서 차 한잔을 마시거나 캠퍼스를 지나갈 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거나 머리를 맞대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청춘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로스로서의 사랑은 분명 청춘만의 특권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전까지의 사랑은 사실상 불법이다. 중고등 학생의 신분에 있는 이들의 연애는 기성 세대의 눈에는 아직도 금지의 대상이다. 암묵적인 합의이긴 하지만 연애 상대로서의 짝 만들기는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결혼 이전까지만 사회에서 환영받으며 허용된다. 10대의 사랑은 학업과 미래에 치명적으로 방해가 되는 일, 소위 싹수가 노란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기혼자의 사랑은 실제로 불법이다. 결혼 서약은 법의 이름으로 보호되며, 기혼자의 사랑은 그러한 법을 위반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이 막 사회로 진출한 20대가 주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인 까닭이다. 청춘들이 사랑에 빠진 모습은 보기에 좋고,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사랑하기’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일이란 사실은 한두 번만 연애를 해봐도 알게된다. 즉 사랑은 애틋하고 달콤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고 쓰디쓴 것이다.

 

‘에로스’를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과 연애 경험담에 대해 글을 쓰게 한다. 짧은 에세이에서 이십 대 초중반 나이 대의 청춘들은 대체로 상대를 통해 정신적인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을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생각하며,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것보다는 잔잔하고 로맨틱한 사랑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상대에게 잘 해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청춘들 또한 많다. 하지만 한 눈에 매료된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것도, 상대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도 모두 어렵다. 게다가 설사 짝 만들기에 성공하더라도 사랑에 빠진 이들의 설레임과 상대에 대한 집중력은 서서히 줄어들기 마련이다. 또 운명적 만남임을 증명하는 듯했던 마음의 일치는 불일치로 변화하며 이는 상호 불신과 불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전 같지 않은 태도에 연인의 마음이 변한 것 같아 섭섭하다, 또 변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편집증, 스토커 같아 답답하고 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연애

 
파이드로스 표지

초기의 두 사람의 마음의 일치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개성의 자연스러운 일치에서 온다기 보단,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적(?) 양보와 희생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춘의 연애 사업이 흔히 반복되는 실패, 실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즉 청춘의 연애 사업은 힘들고 괴롭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단지 외사랑의 가슴앓이로 끝나 괴롭고, 상대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힘들고, 상대의 사랑이 도에 넘치는 집착인 듯해서 두렵고, 잘 맞는 줄 알았던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문제가 된다. 생각이 이런 문제에까지 미치면 사랑이 과연 마음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로맨틱한 일인지, 과연 아름답기는 한 일인지 의문스럽다.

 

물론, 사랑은 분명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란 짝을 찾고, 그러기 위해 이성 교제를 전폭적으로 허용 받은 청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마음의 진솔함, 진심, 헌신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랑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랑은 분명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상호 작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 사회적으로 규제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러한 규제의 대상에는 사랑하는 이들의 행위와 마음의 형식 또한 포함된다. 모든 사회는 구성원들의 정신과 행위, 생활 양식을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각자 변화무쌍한 마음을 가진 서로 다른 개성의 소유자들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직,간접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고 살아가는 이상 사랑은 그냥 진실된 마음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연구와 공부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의 사랑은 관념 안에서의 이상적 사랑의 모습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그토록 많은 갈등과 문제를 불러일으키는지,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등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여기 아름다운 사랑과 인생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일독하기 권하며, 간단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사랑 공부의 첫 걸음으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만한 것도 없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는 연애학의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이 책의 반에 가까운 분량이 사랑하는 이의 악덕, 즉 연애의 부작용 분석으로 채워져 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연인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자 하며 자신을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 외의 것에 관심을 두어 그것을 탐구하고 연마하는 것을 싫어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들을 만나는 것도 못 마땅해 한다. 즉 말하자면 연애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발전과 전인격적 성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실컷 상대의 독립과 발전을 가로막다가 더 이상 연인에게 매력을 못 느끼게 되면 이별을 궁리하며 헤어지고 그때부터 갑자기 태도가 돌변, 그동안 자신이 상대에게 준 것들을 아까워하며 후회할 뿐더러 사람을 잘 못 본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상대를 비난하기 일쑤이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부덕함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읽다보면 이 책을 같이 읽은 대부분의 청춘들의 표정이 굳는다, 한두 번 쯤 연애를 경험 해본 이들 중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이 틀렸다고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비난하는 사랑하는 이의 부덕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인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플라톤은 이런 사랑의 모습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정의한 사랑을 시적으로 풀이해보자면 에로스로서의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곧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상대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면 사랑의 부작용, 부덕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그러한 사랑은 상대와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고전주의자 중의 고전주의자인 플라톤의 해법은 당신이 발견한 아름다움 너머,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안 변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란 것이다.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머물러 단지 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가진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아끼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영혼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면 설사 둘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신체는 비록 멀어지되 서로의 영혼은 영원히 결합한 채로 남게 되리란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행태와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은 매우 날카로우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깨우침을 준다. 하지만 그 해법과 결론은 범상한 우리들이 따라가기엔 매우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그 따듯함을 느껴보고 싶을 뿐 아니라, 그의 앞날을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신체적, 정신적 욕망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사람의 발전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름다운 사랑에 일정 정도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단 것은 사실일 테지만 어느 한 측면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기본 정서와 가치관에 부적합하다. 그렇다, 강물만 멈추면 썩는 것이 아니다. 탐구 및 연구 또한 멈추면 고리타분해지고 시대에 부적합한 것이 된다. 이때 필요한 책이 기든슨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다. 기든슨은 이 책에서 사랑이 진실한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당한 일임을 보여준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말했듯이 사랑과 연애, 결혼 등등의 모든 것이 사실은 시대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든슨은 소설 등에 나타나는 사랑의 행태 뿐 아니라 풍부한 사회학적 데이터들을 전거로 들면서 시대와 사회가 어떻게 우리의 사랑의 모습에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분석한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 남녀 간의 평범한 결혼과 그 유지에 사랑의 요소는 거의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자유 연애 자체가 부정된 시기였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가? 우리 시대에 사랑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성 혁명을 가능하게 한 과학 기술의 발전, 폭 넓은 사회적 자유의 허용,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등에 힘 입은 바가 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적인 남녀 간의 사랑과 결합을 위한 해법에 대해 기든슨은 여성들 보다는 남성들이 더 위기일뿐더러 남자들이 더 할 일이 많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더 이상 제도적인 것도 아니고, 어느 일방의 희생에 의해 가능할 수도 없다. 사랑은 남녀 간의 상호적 소통을 전재로 하는 것이자, 함께 둘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신의 개인사를 재구성하는 능력과 자신의 이야기와 정서를 표현하는 능력인데, 사회에서 요구되고 부과된 교육 방식의 차이로 인해 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의 마음을 수용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랑이 필요한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은가? 청춘이여, 공부하고 노력하라!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게 됨으로써 상대를 더욱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함께 아름다운 사랑과 생을 만들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