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광해>는 ‘강제 천만’? 관객 끈 진짜 이유는?[철학자의 서재]

<광해>는 ‘강제 천만’? 관객 끈 진짜 이유는?[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 <맹자>

박영미(한양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영화가 대신하다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쯤 되면 각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고, 그것은 서로 비교되어야 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그 정책들이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지금쯤 우리는 각 후보자들, 아니면 캠프들의 치열한 정책 공방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지금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둘 곳 없는 정치적 욕망을 한 편의 영화에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광해>가 개봉한다고 할 때도, 관객 수가 500만 1000만을 넘는다고 할 때도 나는 이 영화를 봐야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일단 이 영화의 제작사와 배급사가 평소에 마땅치 않았고, 주연 배우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스크린을 독점한 대기업이 이때쯤은 이런 것이 잘 먹힐 거라며 쳐놓은 그물 같아서 그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기 싫었다는 것이 가장 컸다. 그런데 어느 평론가가 ‘<광해> 강제 천만 사태’라고 명명하듯이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끄는지는 궁금했다.

진짜 왕 노릇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 ⓒ홍익출판사

진짜 왕은 정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웠고 그에게 정치는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파워 게임이었다. 그러나 광대 출신 가짜 왕은 대역 왕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가고 함께 아파한다. 일일 드라마처럼 누가 봐도 빤한 대립 구도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월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자신의 먹성 때문에 끼니를 거를지 모를 나인들을 걱정하며, 중전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염려하는 그에게 점점 마음이 끌려간다.

제 선왕이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을지를 묻자, 맹자는 백성들을 잘 보호해 주면 가능하며 제 선왕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양으로 바꾼 사례를 들면서 “왕의 은혜가 동물에게 미칠 정도로 충분하면서도 그 공적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실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44~48쪽)

맹자는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는 시작이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라고 말한다. 소에 대한 연민은 비록 그 대상을 양과 바꾸는 것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곤경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느끼게 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바로 공감의 마음이다. 그리고 소에게도 미친 왕의 공감의 마음과 그 실천(양으로 대체함)이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은 왕이 ‘못하는 것이 아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곤궁에 공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를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책이지만 그래도 소의 곤경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진 당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격려이기도 하다.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내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어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내 아이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한다.”(상동) 그리고 이렇게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목표로 한다. 맹자에게 정치의 시작과 끝은 공감, 즉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느낌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너에게로, 너의 마음이 나에게로 경계 없이 다가서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맹자는 차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라고 한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토대한 정치이며,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이 확충되어 실천된 정치인 인정(仁政)이다. 영화에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가짜 왕의 진짜 마음, 측은지심이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가짜 광해는 진짜 광해가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땅과 세금 문제인 대동법과 대외 관계 문제인 등거리 외교를 실행한다. 공감이 정치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여긴 맹자이지만 그 마음만으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한 마음만으로 정치를 행하기는 부족하다고, 제도도 스스로 실행될 수는 없다.”(187~190쪽) 정치가의 선한 마음은 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제도 역시 정치가의 선한 마음이 없이 실행되기 어렵다.

“인仁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계의 확정이 바르지 않으면 정전의 토지가 균등하지 못하고, 토지의 수확에서 얻는 봉록 역시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144~149쪽)

정전(井田)은 국가에서 백성에게 토지를 나눠줄 때 우물 정(井)으로 구획하는 것으로, 아홉 조각 중 여덟 조각은 사전(私田)으로 1가구당 한 조각씩 분배하고 남은 한 조각은 공전(公田)으로 함께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낸다. 맹자는 토지 분배방식으로 정전제를 주장하는데, 정전제는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근간이 된다.

조세는 정전제에서 공전을 공동 경작하여 내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조법을 적용하고 따로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천하의 농부들이 모두 기뻐하며 그 나라의 땅에서 농사 짓기를 원할 것이다.”(104~105쪽) 정전제와 9분의 1 조세 제도를 통해 맹자는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조법은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액이 달라지므로 국가에게는 재정의 항상성이 문제가 되지만, 국가가 풍년과 흉년에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국가는 토지와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야 한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홀아비라고 하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라고 하며, 늙고 자식이 없는 이를 독거노인이라 하고, 어린데 부모가 없는 이를 고아라고 한다. 이들은 천하에 곤궁한 백성으로 그 처지를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이다. 문왕은 인한 정치를 펼 때 이 네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보살폈다.”(67~69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의 확충은 정치가 최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토지, 세금, 복지 제도를 갖춘 후에 교육이 필요하다.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51~55쪽) 맹자는 인간다움의 확충이 백성에게는 안정된 생업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또는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의 계급적 인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제도를 통한 안정된 생활이 우선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성이 공감의 주체다

가짜 광해는 명에 파병하고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신하들에게 “적당히들 하시오. 대체 이 나라가 누구 나라요?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다”고 일갈한다. 이쯤 되면 진짜 왕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진짜 왕은 이미 세습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백성과 공감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자이다. 진짜가 사실은 가짜였고 가짜가 진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판단해 정치권력을 맡기는 것은 누구일까? 맹자에게 그것은 백성의 선택이다.

양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곳의 백성들을 하동으로 이주시키고 노약자들에게 식량을 풀어 구제해줍니다. 하동 지방에 흉년이 든 경우에도 그렇게 합니다. 다른 나라를 보면 저처럼 마음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줄어들거나 내 나라의 백성들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36~39쪽)

양 혜왕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했던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다고 자부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자신보다 잘 통치하는 것 같지 않은 이웃 나라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로 옮겨 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한다. 그에게 통치는 백성에 대한 시혜이고, 백성은 자신의 소유물로 더 많은 수가 확보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양 혜왕에게 맹자는 그의 태도가 전쟁에서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을 보고서 비겁하다고 비웃는 것”과 같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시혜를 좋은 통치 행위라고 생각하는 왕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나라를 옮겨 가면서까지 함께 해야 할 왕은 아니라는 백성들의 정확한 판단과 선택이다.

왕의 진짜/가짜 마음과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백성은 공감에 반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내는 주체다. 바로 정치의 주체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하찮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209쪽)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위임한 정치권력의 회수를 선택할 수 있다. “인을 해치는 자는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는 잔인하게 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남을 해치고 잔인하게 구는 사람은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일 뿐이다.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인 걸과 주를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73~74쪽)

영화 <광해>의 ‘강제 천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요일 저녁 TV를 틀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리더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역시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누군가 이번 정권을 지나면서 대통령에게 ‘감성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으며, ‘감성적 능력’은 아픔을 가진 사람의 그 아픔에 가 닿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처럼 영화 <광해>의 천만 관객 돌파는 가짜 ‘광해’의 진짜 마음에 대한 공감과 환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정치인들의 모습에 대한 질책을 의미할 것이다.

의도한 것이었는지 프로그램의 시작은 ‘나는 비정규직이다’였다. 임금 노동자의 50퍼센트가 비정규직인 대한민국, 그들의 아픔은 수많은 또 다른 아픔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아픔을 함께 나눌 정치와 정치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그런 정치와 정치인을 요구하고 가질 자격이 있는가? 정작 나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함께 나누지 않으면서 영화처럼 진짜 마음을 가진 왕이 나타나 좋은 정치를 해준다면 그것을 누리고만 싶은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임을,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한 영화 <광해>는 설레고, 슬프고, 아픈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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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철학자의 서재]

‘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철학자의 서재]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는?

K씨의 한탄을 들어보자.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사리 공부해서 간신히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나는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명예퇴직을 당하고 말았다. 퇴직금이 있었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장래와 부부의 노후 대비를 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퇴직금의 반은 주식투자를 하는 데에, 반은 부동산 투자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러나 주식은 반 토막이 났고 은행 융자를 끼고 구매했던 부동산은 폭락해서 결국 경매 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빚은 남아 결국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여 잔혹한 채권추심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난 정말 한평생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내 스스로 성실한 자라고 자부해왔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빚도 못 갚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게으름뱅이이고 이 사회의 기생충인 것만 같다. 아, 난 비도덕적인 인간이다. 도대체 내 삶은 뭐란 말인가!”

K씨의 사례는 요즘 들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K씨가 죽일 놈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 자체에 대한 혼란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K씨에게 상황이 어쩌다 그리 된 것인지를 매끄럽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도대체 빚을 진 것과 K씨의 재앙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K씨는 대표적인 투자 실패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K씨의 투자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니까 모든 책임은 K씨가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개인적 선택으로 환원해서 설명 가능한 것일까? 공공부채며 국가부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외환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한 것 또한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알다시피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 현상을 합리적 선택을 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채권자에게 채권추심을 당할 때 K씨와 채권자 간의 관계는 이미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다. K씨의 삶 전체가 채권자의 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어찌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교환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주류 경제학은 부채에 의해 생기는 실존의 고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폐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주류 경제학은 삶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아주 나쁜 학문이다. 몇 가지 수리모델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빚의 노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메디치미디어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은 K씨의 경우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빚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노예란 자유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라자라토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주류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통해 주류 경제학이 진정한 사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또한 이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라자라토의 책은 경제 문제를 다루지만 경제학 서적은 결코 아니다. 그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의 문제를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 및 가타리를 가로지르면서 현대 경제를 ‘부채 경제’로 규정한다. K씨의 사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그 같은 가로지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신자유주의란?

라자라토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 그 신물 나는 소리를 또 듣는구나’ 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나 금융 자본주의쯤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는 시장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금융 경제’라는 규정조차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온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라자라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부채 경제’이다. 즉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경제라는 표현은 불평등한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은폐하며, 자본이 개개인을 포획하는 양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채’와 관련해서 이 같이 급진적인 규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자라토의 대답은, 자본주의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채무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부채를 무한한 부채가 되도록 전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의 부채는 유한한 부채였다. 나는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만 빚을 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나의 부채는 이제 상품으로 둔갑한다. 나의 부채는 금융에 의해 또 다른 상품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파생 금융 상품이다. 이런 전유 과정을 통해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단순한 일 대 일 관계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의 관계로 전환된다. 나의 실존을 부채를 통해 통제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채권자가 아니라 블록화된 금융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의 부채 관계는 금융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 무한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같이 부채가 전면적으로 확장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자라토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공공 부채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1970년 이래 중앙은행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금융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본은 국가의 금융 정책 없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 라자라토의 분석이다. 즉 은행의 활동을 증대시키고 자본을 집중화한 것은 바로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를 ‘부채 경제’로 칭하는 건 단순히 금융이 확장되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조차 금융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주식에 의해 금융 자산으로 간주되고, 기업의 생산조차 금융과 공생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리스 등의 신용 대출 메커니즘과 전적으로 함께 기능한다. 자동차를 구매할 때 구매액 전부를 내고 구입하는 사람은 소수가 아니던가.

이런 분석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채를 대대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씨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건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채무자를 양산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 여전히 가능한가?

라자라토의 분석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복지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재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늘어난 국가부채와 공공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실상 민간 기업의 수익성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사회에 강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정책 아니었던가. 그리고 현재 MB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시민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자라토는 복지 국가의 이념이 부채 경제 속에서 변형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 자본의 개혁을 위한 도구였던 ‘복지 국가’는 권위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복지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뉴딜 정책이란 불가능하다. (…) 개혁적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라자라토는 민영화 정책을 통한 복지 정책이란 사실 자본의 구속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한국의 경우 저소득 계층을 위해 ‘햇살론’과 같은 신용 대출 상품을 마련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개개인은 국가에 의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 무한한 채무 관계를 맺게 된다. 말로는 복지 혜택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채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현재의 복지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민영화 정책은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소수의 금융 자본 블록에게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언제나 채무자를 배려하기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의사 결정 과정과 분배 과정에서 현재의 부채 경제가 공공성을 배제한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라자라토는 이런 분석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그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펴냄)에 의존해서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석한다. (사실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이 대목이 이 책의 압권이다.) 빚을 진다는 것은 이미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행위에서 빚을 지고 있다. 이를테면 “신용 카드의 사용은 영구적 부채를 확립하는 신용 관계의 자동적 개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채무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라자라토가 주목하는 것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부채 경제 아래서 부채는 채무자에게 내면화된 고통이 되며 부채에 대한 책임감은 죄책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채 경제는 약속의 도덕과 죄의식의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의 배면에는 신자유주의가 개개인을 ‘자기 경영자‘가 되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라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K씨가 퇴직금을 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을까? 퇴직금만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K씨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이제 퇴직금을 운용해서 이윤을 추구한다. 일종의 개인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K씨는 자기 경영자로서 자신의 투자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부채 의식을 통해 개개인의 주체를 통제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대출은 정치 경제가 한 인간의 도덕성에 간섭하는 판단이다. (…) 대출 시스템에 속하는 인간 안에서 철폐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돈으로 변화한다. 즉 다시 말해 돈이 인간으로 육화된다. 인간의 개체성, 인간의 도덕성은 상업적 상품인 동시에 돈의 실존적 재료로 변모한다. 돈의 영혼이 소유하는 육체, 재료는-이제 더 이상 돈과 종이가 아니라-나의 인격적 실존,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사회적 덕성, 나의 사회적 평판이다. 대출은 가치를 돈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살,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다.”

이것은 라자라토가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의 육성이다. 라자라토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해서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속하고 있는가는 보여주려 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임금노동·시장·상품은 물론, 공동체 및 인간 마음의 가장 고귀한 감정까지도 경제적 ‘가치’ 생산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채 경제는, 개개인이 ‘자신과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윤리적 노동 자체’까지 착취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K씨의 리스크는 K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우리는 엄청난 삶의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리스크는 이제 개인적 차원에서 관리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된 지금, 개개인이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까지 분석해서 자기를 경영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K씨에게 ‘당신이 실패한 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자라토는 우리 앞에 놓인 이런 문제의 지평을 보아야 채권자-채무자라는 왜곡된 권력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자라토에게서 그 밖의 구체적인 대안을 듣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떤 개혁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가? 빚에 의해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삶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부채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제의 진실>
이관형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경제의 진실>(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을 놓고 쓴 이 글은 서평이 아니다. 철학(미학)을 공부하는 자가 경제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떠들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보고 느낀, 좌충우돌하는 생각조각들을 늘어놓으련다. “이런 조각글 싫어하세요? 미안합니다.”(착한 나) “꼬우면 읽지 말든가!”(김어준) “답답하면 니들이 쓰든지!”(기성용)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한마디로 출세한 경제학자다. 게다가 백수(白壽)를 누렸으니 여러 면에서 부러운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버클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쳤다. 미국경제학회장, 경제인연합회장에다가 대통령 클린턴의 경제 선생이었다. 이렇게 강단과 현실 정치의 양 분야에서 공히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는 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출간 당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책이다. 그의 ‘쩌는’ 스펙 얘기는 이쯤하자. 아무리 방자한 글쓰기를 획책했더라도 제목으로 내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잘나가 봐서 아는데 경제는 사기야

그는 경제가 사기란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총체적 사기란다.

먼저 ‘자본주의’를 ‘시장(체제)’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사기다. 이런 말 바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주는 역사적,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에는 기업이 권력을 지니는데 기업의 권력은 자본가(혹은 주주)가 아니라 경영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하면 경제 권력이 ‘자본가’라는 게 딱 떠오르는데 ‘시장’이라고 말하면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은폐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역사적’ 개념임에 비해 ‘시장’은 ‘초역사적’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자! 쭈-욱, 이대로!”

‘소비자 주권’도 사기다. 소비자가 조종, 통제되는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라 봉이란 말씀? 딩동댕.”

‘노동의 즐거움’도 사기이다.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필수다. 일에서 해방된 부자는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다. “일해서 돈벌어. 누가 벌지 말래냐? 나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말이야!”

여가는 부자들에게는 용납된다. 가난한 이들이 여가를 즐기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없는 놈이 여가생활은 무슨···하여간 꼴값을 떨어요.”

현대 기업은 고루한 ‘관료주의’를 비난하지만 이 또한 사기다. ‘생동감 넘치는 기업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대기업화한 오늘날의 기업은 자신이 바로 ‘관료주의’에 처해 있다. 게다가 소유자나 주주의 권한은 예의 그 ‘경영’에서 배제된 허울뿐인 이미지만 지닐 뿐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선진 경제 제도라 좋은 거라던 경제학 교과서의 말씀이 뻥이라는.”

나아가 기업 권력은 고삐가 풀린 상태다. 기업 권력은 관료화한 경영자의 몫이다. 이러한 관료주의가 기업의 업무와 보수를 통제한다. 자기 업무의 감시자는 사실상 자기이다. 자기에게 보수를 주는 이도 자기이다. 감시는 지나치게 없고, 보수는 지나치게 많다. “생선을 고양이에게! 그것도 셀프무한리필로!”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이 나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사기다. 공공 부문의 이름 아래 공사 협력 체제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민간 부문이 일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도 민간 기업이 대행한다. “로보캅이 현실로, SF가 다큐로!”

금융계는 사기가 만연된 세계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직업은 사람들이 좋아할 기대를 이야기해준다고 해서 두둑한 보상을 받는다. “하나의 예. 보험 많이 드셨어요? 아유 든든하시겠네. 근데 한번 확인해 보세요. 진짜 많이 주는 건지. 아니, 주기는 하는 건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명성도, 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만 주력했을 뿐 경기 조절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우아한 현실 도피로서 사기일 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버냉키 사임 예정(2014년) 기사가 올라와 있다. 그나마 그린스펀보다는 백배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허긴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쩝.”

기업 권력의 사기 행각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부패한 회계 보고도 사기다. 현대 사회에서 경영진이 행사하는 기업 권력은 민간 부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으로까지 확장된다. 기업 권력은 국방 정책, 환경 정책, 조세 정책도 좌우한다.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도 기업 권력의 로비를 당한 군대나 정부에 의해 배척당한다. 군산복합체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고만해라. 백날 피켓 들고 떠들어도 나 니들 말 안 듣다. 니들이 나한테 돈을 주니, 나 옷 벗고 난 다음에 갈 자리를 주니? 비켜라. 바쁘다. 업체 분들과 회식 있다.”

사기의 끝은 전쟁이며 그것을 피할 길은 없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 ⓒ지식의날개

갤브레이스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최고 권력은 대기업 권력이다. 그리고 그 대기업은 주주나 자본 소유자가 아니라 경영자의 수중에 있다. “한국의 재벌이 주주 혹은 자본가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경영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우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기업의 공헌은 경제적 성공, 심지어는 문명화한 성공의 일반적인 척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회적 성공이 더 많은 자동차와 더 많은 텔레비전과 더 다양한 옷들과 더 많은 소비재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더 치명적인 무기의 소유도 성공의 빼놓을 수 없는 척도가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업적을 평가하는 척도다.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 즉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보호받지 못하는 시민들의 건강, 군사적인 행동과 죽음의 위협은 성공을 평가하는 데 포함되지 않는다. “오래되고 찌그러진 차를 타고 다니니까 나를 무시하냐? 이런 차 탄다고 내가 루저로 보이냐고? 내가 분리 수거나 등산 쓰레기 가져오기, 애완견 배설물 치우기 열심히 하는 건 안 보이냐?” 그랬더니 나더러 이런다. “너 루저 맞거든.”

경기 침체기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불경기에 저소득층은 교육과 의료, 기본적인 가계 수입 등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 지출을 삭감한다. 오히려 소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소비를 할 사람에게는 이를 박탈하는 정책이 지속된다. 그동안 경기가 호전되어왔을 때조차도 어떤 분명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서 (경기 호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불경기에는 소비 활동을 할 빈곤층이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확실한 효과를 낸다. 그렇지만 이는 쓸모없는 동정에 불과하다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반면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종종 세금 감면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박한 필요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소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돈을 확실히 소비할 빈민들은 이런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 돈을 저축할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만 이런 보상이 주어진다. “부자 감세 철회하라. 부유세 거둬라. 공공 복지저소득층 지원 정책 확충하라. 그래야 경제가 산다.”

미국 얘긴지 한국 얘긴지 모를 이야기가 이어진다. 끝에 이르러 그의 이야기는 현대 문명의 파국을 예언하는 묵시록으로 바뀐다.

소위 문명화된 삶은 인간의 업적을 찬미하는 하얀 거탑이지만 그 정상에는 영원히 감돌고 있는 거대한 먹구름이 있다. 인간의 진보는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왔다. 나(갤브레이스)는 이제 독자들에게 슬프지만 의미심장한 진실을 남기고자 한다. 문명은 과학, 의료, 예술 그리고 경제적 복지에서 수 세기 동안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문명은 또한 무기개발과 전쟁의 위협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대량살육은 결국 문명이 가져 온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과 폭력, 문명화된 가치의 정지, 전쟁 직후의 무질서와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탈출구는 없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아예 아니무니다, 내가 잘못된 건가?

이 책의 원제는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결백한 사기의 경제학)”이다. 갤브레이스는 경제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기 행각을 ‘결백한 사기(innocent fraud)’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노센트(innocent)’를, 이 책의 역자처럼 ‘결백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를 따르기로 한다. 이 말을 갤브레이스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쓴다. ①’적법한, 즉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②’의도하지 않은, 즉 사기를 치려고 사기를 친 것이 아니다.’ 만약 ①의 뜻만 지녔다면 아마도 대기업 경영자들은 법망은 피했을지언정 도덕적 비난만큼은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②의 뜻도 지닌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②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갤브레이스의 말에서 대강을 취하자면 이러하다. 이런 사기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업 권력, 기업 경영자들은 법적인 책임은 (법이 이들의 것이니) 차치하고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아니 물어 봤자 헛수고다. 이들은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힘이 있고 부유한 자들의 이익을 명료한 견해(논리)를 바탕으로 지지한다. (흔히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듯이) 이들의 이런 지지를 경제적 동기나 다른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기가 사기인 줄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가카’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한 말이 추호의 거짓도 없는 그의 진심임을 깨닫는다. 이쯤 되면 절망이다. 이런 절망에 빠졌던 또 한 사람의 탄식이 떠오른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赦 :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34) 그가 그를 섬긴다니 그는 그를 사하시길.(‘가카’는 장로님) 그러나 그가 섬기지 않았던 그들은 그를 사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가카가 물러나도, 심지어는 여야가 뒤바뀌어도 ‘가카들’은 여전히 권세 있는 세력으로 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기에도 세 차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갤브레이스에게 물었다. “당신(갤브레이스)처럼 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못 막는 사기를 나더러, 우리더러 어쩌라고? 진실이니 뭐니 하면서 당신만 양심적인 척하는데 이거야말로 사기 아냐? 대안은 하나도 안 써놓고 말이야.”

사기로 점철된 현대 경제가 결국 현대 문명 자체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더니 책의 마지막에서 불쑥 이런 말을 던진다. “이 글에 기술된 (…) 문제들은 (…)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이 문제들은 이미 그렇게 해결되어 왔다.” 이 문장이 대안이라면 유일한 대안이다. 근데 이 양반 기억력이 참 까마귀다. 책의 대부분을 비관적 전망(‘전쟁은 피할 수 없고 현실의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으로 일관하다가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단다. 아니 그렇게 해결되어 왔단다. 이게 다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의 돌출 발언을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학자니까 진실을 보여주는 거 이상은 못하겠어. 그리고 난 죽으러 가야하거든. 당신들은 살아야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 문제들은 당신들이 해결해봐. 인류는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여기까지 왔거든. 아마 당신들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경제가 사기라는 게 뭐 그리 새로운 말인가? 당신(갤브레이스) 글에서 일부 새롭게 얻은 내용이 없진 않지만 대개 알거나 느끼거나 하고 살아왔거든 나도. 당신이 던진 문제에 답은 나도 못 내겠고 ‘사기’ 얘기나 더 하고 끝내지 뭐.”

갤브레이스는 경제가 사기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예술이 사기라고 했다. 한술 더 떠 푸시킨은 삶 자체가 사기라고 했다. 요즘은 통 볼 수가 없지만 어린 시절 이발소에 갈 때마다 기도를 하는지 이삭을 줍는지 하는 사람들 그림 옆에는 예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붙어 있지 않았던가?

사실 세상이 사기라고 본, 보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제 뜻대로 세상을 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세상을 산,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사기라고 여긴,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백남준의 예술=사기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흔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선사(禪師)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 예술은 선사의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러니 예술은 사기다. 그렇다고 백남준이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은 전혀 아니다. 손가락을 통해 우리는 달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손가락이 달이 아니라 하여 손가락을 가짜이며 무가치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예술=사기론은 여기서 끝. 근데 인터넷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 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선사가 일갈한다. 제자가 답한다. “손가락이 너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하하. 이 글 올린 사람, 누군지 보고 싶다. 성철스님 대 김성동(소설가)으로도, 모던 대 포스트모던으로도 아무튼 여러 가지로 읽힌다. “방금 말한 거 무슨 뜻인지 독자 여러분들 잘 모르시겠지요? ㅋㅋ 담에 써먹어야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낭만주의의 영향 하에 성장하여 리얼리즘으로 나아간 푸시킨의 문학은 이 둘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사조를 껴안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기투성이인 ‘슬픈 현재’를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한다. 이는 그의 문학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추방당하고, 차르(Czar)에 도전한 데카브리스트를 후원하느라 감시를 당하고, 자신의 부인을 차지하려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속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말처럼 그는 현실을 견뎠다. 그렇지만 그 견딤은 결코 수동적인 견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슬픈 현재’에 맞서 자신의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하려는 적극적 견딤이었다. 결국 그에게 ‘현재는 슬픈 것’이었으나 그의 ‘마음이 살던 미래’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문인으로 올려놓는다.

백남준의 ‘사기’는, 예술이라는 가상(손가락)을 통해 본질(달)을, 감각적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념을, 미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런 나의 해석은 헤겔식이다. 백남준이 헤겔에 동의할 것 같으냐고? 이경규식으로 답하겠다. “별(들)에게 물어봐”, 백남준은 별이 되었으니.)

푸시킨의 ‘사기’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갈구하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니 어쩌면 이성을 지니게 된 대가로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 아닐까?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우리가 왜 삶을 사기라고 느끼는가를 경제라는 구체적 현상을 통해 보여준다. 즉 사기는 그저 느낌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에 만연한 것이다.

백남준의 사기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부정적’이다. 예술의 사기는 추구되어야 한다. 경제의 사기는 부정되어야 한다. 푸시킨의 사기는 ‘숙명적’이다. 우리는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남준의 사기와 푸시킨의 사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술가가 아니니까. 숙명이니까. 경제의 사기는? 이것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결백한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마침 대선이 코앞이다. 복지니 경제 민주화니 하는 여러 말들이 오간다. 대선의 최대 화두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했다. 아마 여기서 ‘시장’은 대기업, 재벌을 뜻하는 것이리라. 노 전 대통령의 말에 분노하거나 절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분노 혹은 절망했던 것인가? 그의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이 맞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옳은 말이 곧 옳은 행동인 것은 아니다. 나는 물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정도로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과 똑같은 말을 갤브레이스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이미 권력은 대기업과 대기업 경영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갤브레이스가 말하는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당장 닥친 지금의 대선 국면에서라면 어떻게 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백한(이노센트·innocent)’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 유로 존 떠나라!” 칸트의 대답은…[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 임마누엘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박지용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유럽 재정 위기 속 민족과 민중

“그리스는 유로 존을 떠나라!” 유럽 선진국의 상당수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외치고 싶겠지만 당당하게 소리 내어 외치지는 않는다. 축적된 세계의 부를 최전선에서 누려오면서, 스스로 계몽된 시민이라 생각하는 자의식과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내심 그리스가 그냥 알아서 유로 존에서 나가줬으면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독일에서 계속 미루어 왔던 유럽안정화기금(ESM)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합헌이라는 결정이 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 지원에 대한 독일 국내 정치의 논의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충분히 알려져 있다. 재정 지원을 둘러싸고 진행된 독일의 국내 정치 상황은 아무래도 기독교민주당(CDU)과 자유당(FDP)을 위시한 보수 정당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은 슈뢰더 집권 이후 줄곧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해왔다. 그런 와중에 자유당(FDP)은 시장과 정치가 분리되어야 하며, 금융 시장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이 재정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피력해왔다. 재정 위기를 둘러싸고 이렇게 정치적인 입장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다시 유로화 통합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복고주의 입장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독일과 프랑스에서 절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정치적으로는 극우주의가 득세할 수 있는 형세인 것이다. 그리스에서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작금의 국가 부도 위기의 책임이 선진 유럽 국가들에 있다는 책임 전가 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유럽 재정 위기는 단지 경제 문제를 넘어서 정치의 위기를 낳을 소지가 산재해 있다.

정치와 경제가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은 “유로화가 망하면 유럽이 망한다”고 밝힘으로써 유로 존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유로화를 살리는 것이 유럽을 살리는 길인가? 유럽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유럽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화폐 통합과 유럽의 공동체

최근 독일 ZDF 대담 프로그램에서 사회민주당(SPD)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일의 진정한 정치인이라 추앙받는 헬무트 슈미트는 유럽 위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간명하게 밝혔다. 방송 내내 그는 그에게만 허용된 담배를 물고 힘주어 말했다. “독일이 유로의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이유는 역사적인 책임에 기인한다.”

독일이 홀로코스트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이 떠안아야 할 특별한 역사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슈미트가 언급한 이 대담한 발언은 왜 독일인들이 그에게 큰 존경심을 보이는가를 알게 한다. 게다가 방청객으로 참석한 많은 청년들에게 “너희 할아버지의 일에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교훈조로 훈계했고, 청년들도 현자의 지혜를 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명해진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미트는 궁극적으로 “유럽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구체적인 정치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 보다 높은 유럽의 진보”라 말했지만,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정치적 과제가 되기 어렵다. 지금 상황에서는 눈앞에 닥친 발등의 불을 끌 응급처치를 찾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 왜 유럽은 화폐 통합을 시도했는가? 슈미트도 지적하고 있는 바, 유럽의 선택은 규모의 경제학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달러화의 위력과 급성장 일변도의 위안화, 이에 대한 대항마로서 유럽은 뭉쳐서 유로화로 통합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려는 결정을 내렸다. 이념적으로 유럽 통합은 과거보다 진일보한 지평의 자유를 선택했지만, 실상은 그저 경제 통합을 통한 몸집 부풀리기가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만약 유럽의 통합이 그저 화폐 통합만을 위한 것이고 또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이 형세는 그야말로 기괴한 모양이 된다. 화폐는 단일한 경제 체제의 몸을 관통하는 혈액과 같은 것인데, 작금의 유럽 통합은 한 몸에 정치체의 머리가 여럿 달린 메두사가 된 것이다. 머리가 여럿이니 몇 개가 잘린다 해도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시키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린 머리는 자신을 자른 머리를 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이 머리들을 안정시킬 기제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의 위기는 곧 정치의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유럽 스스로의 자율적인 자기 결정, 다시 말해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유럽은 경제 통합만을 주요 의제로 고려한 채 통합을 정치적으로 선택했을 뿐 경제 통합이 파생시킬 정치적인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급한 불이 어떻게 꺼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향후 유럽이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정치적인 고민이 가중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유럽이 앞으로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하는지를 모색할 때, 칸트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럽의 미래와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지구 반대편 변방의 한 철학자가 주제넘게 세계의 중심 유럽에 대해, 그것도 유럽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 사건에 대해 견해를 가진 사람은 세계 시민이다. 그 사건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나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자유를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라 했다.

칸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공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기가 발휘되는 데에는 분노의 감정이 결부된다. 나의 일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사정에 분노하는 것이 바로 학자(배운 사람)로서 간주되는 세계 시민의 용기인 것이다.

칸트는 그 이전에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던 타인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했다.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이 감내해야 했던 부당함에 대해, 칸트가 보여준 분노는 배운 사람에게 요구된 용기라는 미덕이다. 칸트는 당시 가까운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해서나 대서양 건너 미국 독립에 대해 세계 시민적 견지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1795년 출간된 칸트의 저작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는 정치적 주제를 담고 있고 있으며, 평화에 대한 철학자의 관점이 개진되어 있다. 우선, 칸트의 정치철학은 근대 자연법 사상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된다.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계약론적인 전통은 칸트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 저작에서 드러나는 칸트만의 차별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임마누엘 칸트 지음, 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칸트는 홉스가 제안한 ‘자연 상태로부터 계약을 통한 사회 상태’라는 발상을 수용하지만, 홉스와 달리 평화가 법적으로 강제된 안정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칸트에 있어서 정치란 ‘실행하는 법학’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칸트의 이해 방식에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시민 사회 혹은 경제적 영역(자본주의와 시장)을 정치적인 고려 대상으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정치의 의미와 역할을 도덕 철학의 협소한 영역으로 제한했다는 비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정치의 철학적인 원리를 보편적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응일 수 있다. 홉스가 제안한 평화 상태는 국가 내 내전을 강제하는 모델인데 반해, 칸트는 궁극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다시 말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국가들 간의 평화 상태 즉 국제법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저작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더라도,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 정부를 인정하고 평화 조약을 맺은 바젤 조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들 간의 전쟁은 전쟁 시기 중에서라도 잠정적으로 전쟁 이후에 체결될 평화를 염두에 두고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는 실제적인 경험으로부터는 입증할 수 없는 이념적인 것이다. 곧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흥망성쇠, 전쟁과 평화가 교차된 것이므로 전쟁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이념적인 수준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칸트가 그려본 영원한 평화를 위한 최소 조건은 모든 나라들이 공화적인 법적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환대’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세계 시민 사회의 철학자로 격상되고 있다. 국가들 상호 간에 전쟁이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시민권은 서로 간에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원칙을 넘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두렵고 이질적인 이방인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제를 담는 적극적인 원칙이다.

역으로는 뿌리 깊은 공동체에 접근할 때, 스스로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칸트가 말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것이다. 이 권리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위해 모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것 없이는 평화도 달성될 수 없다. 이 권리는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손님으로 대우받을 것을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으며 그저 상호 간의 방문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바다 건너 희소 자원을 교류하려고 방문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방문하려 할 것이다. 육상 생물인 인간이 지구 위에 발붙일 땅을 가질 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경제적 기반이 붕괴 직전인 그리스에서 많은 사람들은 삶을 찾아 자신이 발 딛을 땅을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더 안정된 나라에서 찾을 것이다.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네오 나치는 평화의 적이며, 인류와 인간성의 적이다. 그들을 기꺼이 환영할 마음과 여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정치인 헬무트는 과거의 독일의 교훈을 통해서 미래의 독일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서 유럽의 미래, 평화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의 차이점/신승철 [1월 월례발표회]

?[2013년 1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의 차이점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생각의 빈칸

후기: 윤지영( 명지대 강사)
?

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에서 신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단절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약과 도약의 에너지를 퍼 올리게 한다. 13개월이라는 연속성이 아니라 새로운 해의 1월 앞에서 우리는 생각의 빈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빈칸 앞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대결 구도는 그 논쟁점의 풍요로움만으로도 매혹적이었다.

신년 모임과 함께 진행된 1월 월례 발표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의 참석 하에서 토론과 논의의 장이 펼쳐졌다. 2013년이란 새로운 해에 어떻게 현실 좌표축을 재구성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의 이론 틀 안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

신승철 선생님의 이 논문은 라캉의 욕망 개념의 보수성을 날카로이 비판하고 있다. 라캉의 욕망 개념이 여전히 거세의 법에 종속되어 있음으로써 엄마-아빠-아이라는 삼자적 가족 관계의 이데올로기성에서 벗어나 있지 못함을 드러낸다. 정상화의 메커니즘으로서 무엇을 병리화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는 여전히 욕망의 생산성과 생성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은 물론 이를 억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승철 선생님은 라캉의 욕망은 예속 집단을 양산하지만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는 주체 집단을 생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속성과 자발성의 포지션이 명확하게 이분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권력과 저항은 분리된 두 포지션으로 고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과 유동성으로 접점과 모순항을 양가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지대이기 때문이다.

ⓒ박영미

프랑스 철학계에서 제대로 된 사상적 엄밀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타리의 개념들을 재평가할 수 있는 논문이라 할 수 있다. 기호-흐름이라는 개념을 통해 라캉의 의미론-팔루스라는 전제적 기표를 축으로 한 협착적 기호화 과정을 비판할 수 있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본인역시 라캉이 규정하고 있는 남근 이성 중심적 언어 질서에서 어떻게 벗어나 새로운 언어 형식을 모색하는가란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안에서 가타리의 비기표적 기호론은 퍼스의 우연성의 경제학과 알튀세르의 만남의 위상학과 더불어 새로운 언어 형식-의미의 열린 양태와 부유, 표류라는-을 구상하는 데에 커다란 영감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평을 통해 본인은 가타리의 개념들이 포스트 휴먼적 사상 지류와도 이어질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타리가 생태계라는 표현을 통해 더 이상 인간 질서로서의 상징계에 포박당하지 않는 탈 인간주의적- 인간이란 거대 서사의 폭력성과 한계를 드러내는 트랜스 휴먼적, 포스트 휴먼적 사유와 실천 양식 등을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미

신선생님의 발표와 본인의 논평은 미리 주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피드백과 질문의 질문들에 의해 비예측적으로 논의가 확장되기도 심화되기도 한 점이 흥미로웠다. 라캉이 제시한 쥬이상스 (jouissance)가 여전히 협착적 쾌락인가 아니면 팔루스란 고정점, 누빔점을 파기해 버리는 분리적, 저항적, 혁명적 지점인가에 대한 논의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않은 채 갈등과 긴장성이란 생동적 힘을 품고, 열린 논의의 장으로 미끄러져 갈 수 있었다. 이러한 팽팽하면서도 상호 교류적인 토론의 장을 통해 혁명적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 나아가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항해할 사유의 모험과 궤적들이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철학이 끊임없는 생성과 창조의 과정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빈칸들을 남겨둬야 하는 비움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의 빈칸에서 예측치 못한 영감이 솟구치고 앎의 견고한 단선체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열과 파열의 힘을 가타리는 접속과 배치라는 용어를 통해 드러내며 나아가 욕망이란 복합적 다면체들의 스펙트럼을 펼쳐내길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무능해서 실업자? 넌 유능해서 사장이니?[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의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회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자기의 이익과 관계가 있다. 경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가깝게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고, 형편이 좋은 사람은 치부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고, 대다수 소상인은 경제가 잘 되어야 자기 수입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치, 경제 엘리트를 제외하고 일반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업, 일자리이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만 사람이고,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다. 일종의 예언서(!)인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영호 옮김, 민음사 펴냄)은 서구 서점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프킨에 따르면 미래 세계에서는 노동이 없어지고 전자 통신 서비스가 종래의 노동을 담당하니, 그곳에서 일자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은 ‘노동의 유연성’, 즉 노동자의 안정된 생활을 저해하는 해고, 비정규직 문제를 방기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 지음, 김교신 옮김, 동문선 펴냄)의 저자들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공화국(프랑스)의 가치가 노동하는 인간에 의해 그 토대를 놓았으니, 새로운 시대의 구상도 여전히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들을 위해 준비하기를 호소하고 있다.

▲(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 지음, 김교신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저자들에게 자유주의 국가나 복지 국가 간의 단절이나 불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노동의 사회를 재고하고 시민의 유대를 다시 세워야 한다면 적어도 ‘노동의 종말’의 형식이 아니다. 죽은 것은 노동이 아니다. 다만 산업이 만들어준 일자리가 기술 혁명에 저항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공화국은 지속적인 창조 속에서 노동의 구체적인 형태와 조건들을 갱신해야 한다. 노동을 재조직하고 노동 시간을 줄이고 대인 서비스 분야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 노동의 배척에 맞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시 노동이다.

노동 문제 해결이 공화국의 가치에 근거할 때, 저자들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도 연관된다.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거나 우리의 상황과 다르다고, 또는 저자들이 책을 만들면서 대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주제가 집중되지 못했다 해서 관심을 멈추지는 말자.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면, 더 나은 사회를 계획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동할 권리

인간 노동은 자본주의 시민 사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문제에서 다시 해답의 기초가 된다. 근대적 노동의 탄생과 함께 시민 사회가 탄생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시민 사회, 자유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의 발달과 함께 탄생하였다. 따라서 사회는 노동에 빚지고 있거나 노동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노동 문제 역시 노동의 전사와 시민 사회의 전사를 염두에 두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때 분배와 복지의 문제의 경우, 성공한 경제 엘리트들의 비뚤어진 주장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노동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터무니없다. 그것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는 의미라거나,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거나, 일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라면, 현실은 그 반대임을 입증한다. 상징적으로 보면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 그리고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 탄생한 근대 사회는 개인으로서의 시민과 생산자라는 이중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동의 지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 생산적인 노동과 시민권의 관계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근대 시민은 노동을 함으로써 그 존엄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와 서비스의 생산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 속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우리의 생활 방식, 사회적 지위와 부부구성하는 개인들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등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관계를 던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해보려는 노력을 기피하게 만든다.

종말을 기술 혁명의 덕분으로 보면서 노동의 종말을 찬양하는 자들은 확인된 사실과 규범을 혼동한다. 확실히 오늘날에는 전보다 적은 시간을 일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실로부터 노동이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거나 가치를 잃었다거나 공동생활을 조직하는 기능을 잃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노동은 여전히 노동하는 이들에게나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나 똑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은 물질생활을 보장하고, 우리를 사회라는 시간과 공간에 연결시키면서 조직해 주는 수단이다. 직업과 관계된 노동 시간은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그 의미를 부여해 준다. 한 세기마다 발생하는 노동 시간의 감소가 규범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일할 준비가 된 젊은이들 또한 일자리, 무엇보다도 진정한 일자리를 원한다.

오늘날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기술 발전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기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법과 목적의 변증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기술은 수단으로 남아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발전시키며 인간은 기술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이 강제 수용소를 만들 수도 있다. 기계 그 자체는 현실에 적용된 지능의 고도의 집약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목적 그 자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기계의 상용은 정치와 도덕의 감독 하에 있어야 한다.

저자들은 복지 국가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유에 대한 권리와 신뢰에 대한 권리를 보증할 것을 모색한다. 과거에 복지 국가는 경제 발전, 완전 고용 그리고 시민들의 존엄성의 원천을 구성해 온 임금 제도의 확산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재정의 위기는 사회적 위기를 초래한다. 적자나 실업으로 인해 분담금을 내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보상 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울타리 안에 존재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될 위기에 처해 있다.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사회 보장 제도는 모든 구성원에게 이롭도록 구성해야 하고 자금 역시 효과적으로 지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공동 세상에 대한 소속감으로 이해되는 공민 정신의 재건 없이는 연대적이고 구세주적인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민적 차원에 호소할 때, 공통의 가치관에 의거할 때에만 복지 국가의 존재와 그 가치관이 약자들에 대한 권리 양도를 정당화하게 된다.

엘리트와 시민 사이의 대립, 또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척의 문제는 공화국, 즉 사회의 가치에 근거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무능력하기 때문에 무직자가 된다고 하면 성공한 엘리트들이 약자들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 이는 부정적 개인주의 사회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 두렵다.

배척되는 현상의 뿌리들은 기술 변화와 관련이 깊다. 사회는 기술 변화가 직업의 구조를 바꿀 때 재조직된다. 경제적 발전은 일자리에 많은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산업 사회가 변하고 있다 해도 노동의 직종별 분류로 불평등을 분석하기에 충분하다. 일자리 없는 이들의 지위는 사회적 보호와의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경제적 질서 내에서 볼 때, 한 사람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빼앗기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생산하는 사람들이 활동이 없는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의 특권 문제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시민들의 사회는 모든 사람들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불평등은 합법성의 토대, 모든 시민들의 지위의 평등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고용주가 다섯 배, 여섯 배 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라면 문제가 된다. 서로의 월급이나 세금의 양을 보자면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은 일종의 카스트(특권)를 형성하고 있다.

카스트 개념은 민주 사회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 뇌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도덕적으로는 책임이 있지만, 죄인이 아닌’ 지도층에 속한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규범 하에 있지 않다는 것, 중대한 과실을 저지르고도 죄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대기업 경영자가 엄청난 소득을 올리면서 소득을 줄여 세금을 낸다면 그는 시민들과는 다른 생활 방식과 금전 평가를 지닌 특권 계급이다. 이는 사회를 약화시키는 일이다.

엘리트와 약자 시민 사이의 대립이 드러났다면, 그 해소책은 강자의 정서 변화와 관련이 깊다. 경제에서 이중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시민 사회의 이상은 기회의 균등이지 결과의 균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이상은 현실적인 효과를 낳는다. 정치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사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줌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참여 열정을 높인다. 그리고 이 경우 약자 보호 원칙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노동에 부여된 가치, 물건을 만들면서 자연을 통제하고 과학적 지식의 결과들을 거기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오랜 계획을 상기하자. 이 계획은 칼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노동에 부여된 가치가 우리의 특징이다.

“인간은 물건을 만들면서 현실적으로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존재로 드러난다. 생산하는 것, 그것은 창조적인 종으로서 인간의 삶이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

모든 이는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 즉 ‘한 개인은 그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하며, 다른 이들도 ‘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를 해치는 것이 특히 실업, 배척과 관련되어 겪은 체험들이다. 물론 가장 높은 지위를 보장해 준 사회에서는 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했다. 노동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사회적 지위는 더 낮다.

퇴직자들은 예외이다. 퇴직자의 존엄성은 실업자의 경우와 다르다. 직장을 가져야만 사회적 규범에서 시민이기 때문이다. 굴욕감을 느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휴가 중이거나 여가를 갖는 것과 다르다. 일해야만 감각을 조정해 주는 시간까지도 그에게는 파괴적이다. 퇴직자는 노동했으므로 퇴직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실업자는 이런 느낌조차 갖고 있지 않다. 모욕을 겪을 뿐이다.

저자들은 노동조합의 역할을 명료히 한다. 노조는 공무원들이나 준 공무원들을 대변하지만 실업자와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방향으로 간다면 노조가 파시스트로 불리게 될 것이다. 실업자의 모욕, 일상의 권태, 절대 고독으로 귀착하는 사회적 교환의 둔화는 안타깝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결국 통합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노동이 없다면 통합도 없다. 완전 고용을 체험하지 못하는 임금 노동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허약성을 의미한다. 사회를 (프랑스) 공화국 체제로 회복하는 것, 즉 시민의 유대를 재건하는 취지의 정치적 결정-노동을 위한 결정-이 필요하다. 유급 노동은 개인의 총체적 안정에 필요한 하나의 조건이되 일자리와 연결된 자기주장, 독립, 사회적 교류의 장인 동시공동체의 유대 방법이다. 여기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드러난다.

기업은 경제학적 기관만이 아니다. 합리적인 경영에 의해 인간과 기계를 모으고 통합하는 장소로서 사회의 중심을 구성한다.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학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따라서 기술 덕에 기업이 발전했다면 마땅히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은 일정부분 사람들의 일자리를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보 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동생활의 분야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욕구, 진정한 욕구에 주목해 보자. 유아, 청소년이나 노인뿐만 아니라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성인들을 도와주는 일자리의 광맥은 무한하다. 예를 들어 문제아는 과밀 학급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 반에 열 명만 앉혀 놓는다면 이 문제는 사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른 나라, 기업과의 생산 경쟁이라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교육, 사회 보장, 문화 분야에서 무한정 필요로 하는 그 일자리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공유해야 할 가치들

경쟁(력)이라는 말은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 시책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맨 앞자리에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거나 권력과 결탁한 기업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희생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기업-외국 기업-간의 경쟁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새로운 사회경제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쟁이라는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들은 리프킨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 대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산업 사회의 최후를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를 넘어선 하나의 사회를 생각하고 3차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 발전은 사회의 자본에 근거한다.” (81~82쪽)

이에 대하여 저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산업 사회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할 때, 리프킨이 대인 서비스 분야, 즉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위를 발전시키려면 물건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동시에 만족스런 임금은 자국 물건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경쟁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기술 발전과 노동을 통하여서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부를 창조하는 연금술은 없다. 오늘 우리가 경쟁력이 있다 해서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똑하다. 따라서 희생양으로만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경쟁력은 기술 발전과 노동에서 나온다.

경쟁력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이 노동을 위한 기업 연결망, 일종의 사회적 통신망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역할을 우리 사회에서는 일용 용역 회사가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끄럽고 약한 사회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제안은 우리의 용역 회사의 역할과 다르다. 임금 노동자는 생산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이 망의 기업들은 각기 새로운 형태의 고용을 보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임금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요구와 생산조직의 유연성에 대처할 수 있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리프킨은 사회 보장 자본의 출자에 대해 질문하자 ‘기술적 재산에 대한 세금’을 제안했다. 저자들은 이에 동의한다. 보충하여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 시민 사회는 노동의 사회와 함께 출발했다.
– 모든 기술은 이전 시대의 노동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 오늘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은 노동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자본도 마찬가지이다. 이 유산들은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 보완하자면 신기술은 개인이나 기업의 것이되, 기술자를 교육시켜 키워 준 사회의 것이요, 기업을 키워준 사회의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사회적 자본, 즉 기술 발전 세금은 가능하다.

공화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의 사상은 계몽적 이성에 대한 신뢰와 모럴의 힘에 대한 신뢰였다. 역설적이게도 정치, 경제인들의 윤리적 둔감성은 공화국에 대한 합리적 경영을 표방한다. 외적으로는 개발과 경쟁이라는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내적으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자본을 사용했다.

친구들이여, 딸들과 아들들아, 선거의 승리를 전쟁의 승리나 왕조반정의 성공 정도로 보면서 공화국의 부를 약탈하고 논공행상하듯 국가의 부를 먹어치우는 자들에게 분노하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는 말자.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들을 해결하자. 억울한 가난과 생존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자.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한 사회의 체제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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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쌓은 욕망의 성(城)[청춘의 서재]

그들이 쌓은 욕망의 ‘성(城)’[청춘의 서재]

카프카 <성>

 

길혜연(건국대학교 강사)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밀고 간다

 

아이와 어른, 아직 어느 쪽에 자신을 두어야 할지 망설이는 젊은이들이 지나간다. 삶에 대한 애정과 불신이 뒤섞이고, 희망과 절망이 수없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오늘 밤도 여전히 바쁘고 화려한 도시 속으로 사라진다. 무거운 짐을 인 택배 배달 청년이, 칼바람을 맞으며 자장면을 배달하는 젊은이가 지나간다. 내 눈엔 애처로워 보이는데 그들은 당당하기만 하다. 인생의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오늘도 그들은 무한히 성을 향하고, 무한히 성을 쌓아올리고 있다.

그들이 지향하는 곳, 멀리 마천루의 불빛이 찬란하게 켜진다. 일군의 불빛이 모여 하나의 발광체가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얽힌 그 빛의 성전은 흡사 카프카의 ‘성’을 닮았다. 오래 바라보기에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다.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카프카의『성』이라는 책 때문이 아니라, 그 책과 연관된 이십 대의 내 복잡한 심경 때문이다. 이제 젊은 날의 서재에서 이 책을 꺼내보고자 한다. 거기에 K처럼 길을 잃고 서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힘을 가진 자는 충돌하면서 솟아오른다

 

…그는 또 앞으로 걸어나갔다. 길은 길다랗게 뻗어있었다. 마을의 큰 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통해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접근하는 듯하면서 짓궂게 구부러지곤 했다. 어쨌든 성에서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무지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결국에는 이 길이 성으로 구부러져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K는 줄기차게 걸어갔다. 이런 희망이나마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21p)

나는 스물네 살 무렵에 카프카를 읽었다. 카프카를 읽는 일은 매우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아마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직한 회사에서 그 즈음 실직하지 않았다면, 작가라는 직업을 동경하지 않았다면, 세계명작전집에 카프카가 섞여 있지 않았다면 그 어려운 카프카 읽기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80년대의 격렬했던 정치 상황이 지나갔지만 90년대 초반은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그러나 내 또래 대학생들이 반미와 독재 타도를 외칠 때 그것에 귀 기울이기엔 내 처지가 매우 불안정했다. 실직으로 생계가 막연했고, 고졸이라는 학벌은 어디를 가나 목을 조여 왔다. 한편으로는 기술을 배워 말단 경리직원에서 번듯한(?) 의상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나름으로는 현실적 꿈이 있었다. 퇴직금의 절반을 털어 복장학원에 1년 장기등록을 하고 열심히 다녔다.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유예기간인 1년 동안 꿈에도 그리던 ‘시간’이라는 것이 생겨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줄을 그으며 한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변신』과 다르게 카프카의 『성』을 읽고 있으면 길고 긴 백일몽에 동참한 듯했다. 깊은 밤, 토지 측량기사인 K는 눈에 묻힌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는 성으로부터의 의뢰를 받고 이 마을에 찾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으로 들어가 성의 주인이든 하인이든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일거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일이 계속해서 꼬이고 얽히면서 K의 입성은 지체된다.

당시 세계명작전집 100권을 독파하고자 한 이유가 있었다. 기술을 배워 1년 안에 기능인이 되고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마음 한 켠에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 비평을 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작가들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 세계명작전집 읽기는 대학에 들어가 할 일을 미리 해두고자 했던 준비 과정인 셈이었다. 그리고 곧 거의 전부를 읽을 수 있었다. 『마의 산』이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장편이 힘들기는 했어도, 인내한 만큼의 정신적 보상을 받곤 하였다. 그러나 카프카의 『성』에 이르자 내 발걸음도 지체되기 시작했다.

K는 성 아랫마을에 머물면서 성에 이르는 길을 모색한다. 마을의 중심을 차지한 성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만큼이나 격리되고 먼 곳이다. 성의 주인인 백작을 실제로 본 사람도 없고, 책에 그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K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와 관점 속에서 백작의 실체를 짐작할 뿐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마을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다. 외지에서 온 건축기사에게 호의와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경계하고 인색하게 군다. 그들의 지지부진한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도저히 이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과 K와의 관계가 수평으로 얽히기 시작한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화상과 될 수 있는 자화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때일 것이다. 턱없는 의지와 용기가 그 사실을 무마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희망적인 자화상을 완성하기에 1년은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나 하나만은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학원을 다니면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을 무기와 능력이 내게 없다는 사실도 씁쓸하지만 이내 깨닫기 시작했다. 책읽기에 내적, 외적 압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이다.

마블게임의 징검다리처럼 K와 성 사이에 관리들, 여관집 주인, 그의 조수로 배당된 두 명의 쌍둥이, 교사와 면장, 아말리아와 프리다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점점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승전결의 잘 다듬어진 스토리 구조를 취하지 않으므로 이들의 관계와 사건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건의 중심으로 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성격, 그들의 대사 또한 집중을 방해한다. 그래서 K가 성에 들어가기 힘들듯이, 책읽기는 가다 서다 돌다를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 읽었어도 읽지 않은 기분, 처음 읽음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 독백과 서사가 교차하고, 허구와 사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책읽기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다.

고통스럽고 좌절할 때보다, 미약하나마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을 때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만다. 의상디자인 학원은 십 개월여를 견디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무능함도 무능함이었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혼한 언니와 군에 간 동생에게 생계를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대학에 입성하고자 했던 나의 욕망도,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의지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면서 지배하는 연관 관계가 생을 주도한다. K의 의지를 꺾는 것은 관리들의 비협조와 마을 사람들의 악의, 조수들의 무능함만이 아니다. 편하고 익숙해진 마을 분위기, 주점 아가씨인 프리다와의 사랑도 그의 발목을 잡는다. 안락함을, 질서를, 권력을, 사랑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K의 여정처럼 무한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성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K가 우왕좌왕할 때, 나는 답답함과 허탈함, 심지어는 분통을 느끼며 책읽기를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지체’의 의미, 그 거대한 ‘성’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훨씬 후였다.

우리는 자신의 성을 쌓을 의무가 있다

 

실존적, 종교적, 정치적 등 여러 관점과 차원에서 카프카의 『성』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몽환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는 논의만은 사실이 아니다.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질서와 사랑 그리고 행복을 바라는 이념 너머 인간 사이에 뿌리 깊게 얽힌 현실적 삶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작가가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생계라는 욕망을 위해 성에 들어가고자 했던 K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성이라는 장소를 지키고자 했던 많은 이들의 욕망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에 대한 보호와 질서의 간절함이 ‘성’이라는 절대적 권력이 되면서 일개 건축기사의 방문을 방해하고, 그의 여정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현실적이라 함은 이 성을 향한 욕망이 어디서 어떻게 실현되느냐에 따라 곧 수직적 가족 질서가 될 수도 있고, 맹목적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무소불위의 국가의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먹을 것이나, 살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까하는 불안감이 우리를 바쁘게 한다. 열정이나 희열을 느낄 때보다 오히려 기쁨과 열정을 바라는 의지가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절박함과 간절함이 욕망을 낳는다. 각자의, 그리고 각각의 욕망은 다양하고 힘이 세다. 욕망은 사랑으로, 돈으로, 때론 지식과 명예로 둔갑하기도 한다. 욕망의 실타래는 서로 엉키면서 견고해지고, 풀리지 않을 때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풍요와 궁핍, 불안과 희망이 계속되는 한 욕망의 성은 어딘가에서 계속 축조될 것이며, 그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크고 막강해질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성급히 답을 구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답은 K의 여정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포기하거나 절망해선 안 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자신이 추구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욕망이 더 깊고, 크게 성을 구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개인적이든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이끌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곧 정치적인 활동이며, 사회적 행위이며, 선과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고, 문학이 아닌 철학을 전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 안에 들어갔느냐고. 그러나 그 질문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나의 욕망은 이제 다른 쪽의 희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추구하는 그 삶에 카프카의 유령이 질기게 나를 따라붙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윤지영 [9월 월례발표회]

?[2012년 9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d?construction du phallogocentrisme)
발표자:?윤지영(서울시립대) 회원

 

놀리면 상처받는다

후기: 한길석( 한철연 교육부장)

 

 

지난 9월 21일 (금) 5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에서는 윤지영 (서울 시립대) 선생의 “남근 이성 중심주의의 해체(d?construction du phallogocentrisme)”라는 논문을 가지고 월례발표회를 진행했다. 참석자는 7명이었는데 행사 관계자와 비관계자의 비율은 대략 50대 50이었다. 남녀 성비로 따지면 2대 5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따라서 머릿수를 기준으로 볼 때 논전은 이미 남성팀의 필패. 갑자기 가족오락관의 공정한 성비가 부러워지는 상황이다.

윤지영 선생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지 얼마 안 된 분으로 고국에서 자신의 박사논문에 담은 생각을 학문 동지들과 나눌 수 없는 답답증에 시달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자리가 한철연 월례 발표회인데, 월례 발표회는 원래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 지 오래라 더 답답해지지나 않았으려나? 이번 자리는 참석율을 높이려고 발표문을 미리 공개했으나 회원들은 여전히 공사다망한 관계로다가 대표 선수들만 입장하게 됐다. 순전히 주관적인 분석이지만 아무래도 제목이 너무 ‘쎄서’ 남성들의 기운이 승한 한철연에서는 초큼 거북살스러웠으려나? 무섭기두 하구. 평자 또한 제목에서부터 야코 죽고 들어갔다.

ⓒ박영미

이 발표문은 기존 철학자들의 생각을 충실히 읽어내고 해석하는 ‘독후감’류의 논문 형식에서 벗어나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언어로 서양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한국 학계의 경직된 도제식 학문 태도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발표문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윤지영 선생의 글은 서구 전통 철학의 사유 방식에 대한 비판과 개조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춤추는 사유”를 제안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의 주류 전통 철학은 동일성 사유 방식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것을 이분법적 위계 관계로 분류함으로써 전개되었다. 이 글은 주류 철학의 이분법적 위계 관계가 “새로운 개념화” 전략에 의해 비판적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발표자는 “인식론적 백색화 작업(blanchitude ?pist?mique), 발기성 로고스(logos erectile), 전 방위적 시점의 무와 빈칸으로서의 팔루스 ( phallus comme vide en surplomb), 전율하는 공허와 무로서의 언어 양식(langage comme vide vibrant), 사건성으로서의 의미화 작업(sens-?v?nement), 유희하는 몸(corps-joueur),얼굴 형상의 탈구(d?visag?isation),주체의 유동화 (fluctuation subjectivante), 이멘Hymen 경제학의 해체 (d?shym?nisation), 하이브리드성(hybridit?)이란 개념 창출 작업” 등으로 나열하면서 글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용어들은 거의 윤지영 선생 본인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발표자는 서구 철학적 인식 주체가 자랑하는 특유의 객관성 및 보편성이 사실은 “몸으로 상징되는 정념, 충동, 리비도, 정동 에너지들을 지우고 은폐하는 행위”로서의 백색화 작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백색의 이면에는 다양한 색깔의 질적 속성들이 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면적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서구 중심적 인식틀을 깨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발표자는 전망한다.

또한 발표자는 전통 철학에서 강조하는 로고스가 유동적 사유를 제한한다고 비판한다. 유연성이 결여된 사유는 자신의 관점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로고스의 폭력성을 “발기성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발표자는 발기성 로고스의 기운이 여성적인 것과의 비판적 대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여성적인 것은 “여성의 본질성과 실체성을 상정하는 토대주의적 관점에서 발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기성 로고스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일 듯하다.

서구 철학은 자기의 질적 특색을 지우는 백색화 작업을 통해 시점의 내용성을 비움으로써 모든 시점을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내용 없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시점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방위적 시점의 무(vide en surplomb)”의 시점은 “타자를 일방적으로 포섭, 축소, 환원하고자” 한다. 발표자는 이 폭력성으로부터의 구제가 “전율하는 무로서의 언어”를 창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남근 중심적 언어가 질서를 부여하고 판별, 분류하는 판관으로서의 언어였다면, 새로운 언어 형식은 의미의 실험성을 재시도하는 놀이의 장이다.” 구제는 끊임없이 전개되는 비판적 언어 놀이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경험되는 순간이다.

ⓒ박영미

논평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이 글은 동일성 논리에 기초하고 있는 위계적 사유의 폭력이 서구 철학의 전통을 지배하고 있음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서구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적 독해의 얼개만을 간략하게 나열했다는 데에 있다. 차라리 발표자가 제시한 여러 가지 구제적 개념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해서 논의를 전개했다면 좀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예를 들어 인식론적 백색화의 맨얼굴을 계보학적 작업을 통해 폭로한다든가, 남근적 사유가 생활세계의 근저에 어떻게 정착되고 내밀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등의 논의 말이다. 물론 이 글이 완성된 단편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장편 저술을 위해 아이디어를 정리한 것이라면 평자의 이러한 염려는 괜한 잔소리일 뿐이겠다.

또 하나 해묵은 의문을 들어보겠다. ‘인식이 과연 실천을 담보해주는가’라는 것이다. 분명히 아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지만, 문득 큰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실천적 개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전통적 사유에 대항해 비판적 인식의 유희를 펼치는 것은 사유의 타성을 교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과 해체의 유희는 유희로 끝나버릴 수 있다. 해체놀이의 현장에서는 법열에 전율할 수는 있지만, 놀이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이 깨달음의 기쁨을 지속시키기란 쉽지 않다. 해체적 사유의 유희라는 인식론적 전략은 개인에게는 상당한 혁명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개인적 앎의 혁명을 이웃과 함께하고 사회로 외화시키는 것은 유희적 사유로서의 인식 전략만으로는 힘에 부쳐 보인다. “주류적 인식 틀이 가진 한계를 날카로이 드러내며 이에 저항하는 정치적 인식론”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인식의 정치’를 전개하는 우리는 언제나 ‘인식의 정치’ 너머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이 글이 박사논문을 축약한 것이어서 발표문 자체에는 정밀한 논의 보다는 문제 의식과 기본 입장을 전개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적 상황에서의 ‘인식론적 백색화 작업’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가 진행된다면 좋겠다는 제안에 대해 발표자는 긍정적으로 반응해줬다. 말놀이적 해체작업은 인식론적 작업에 기운 것은 아닌가라는 논평자의 비판에 대해 발표자는 말놀이적 해체작업 자체가 이미 실천적 행위이기 때문에 인식론적 작업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논평자는 여전히 이런 입장의 실효성을 미심쩍어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합리적 담론 형식이 지니고 있는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말놀이적 해체작업으로 대항하는 것은 토론합리주의에 대한 메타비판으로서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체 놀이가 기대하는 정치적 효과는 말놀이적 해체 작업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산출될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뭥미’라든가 ‘잘났네,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어리둥절 반 비아냥 반의 반응을 야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앞보다는 뒤의 반응이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 말놀이의 골계가 내적 성찰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비웃음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는 것이다. 말놀이라는 해체적 작업이 인식적 차원에서의 남근은 해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지적 차원의 남근은 비합리적이게도 더욱 곤두서게 만들 수도 있다. 너무 지나친 비관주의가 아니냐고? 하지만 남근중심주의는 단지 생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비관주의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남근성은 인간의 정신 속에 오래도록 자리하여 사회 제도, 개인의 습벽으로 굳어졌다. 나쁜 습관은 안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는다. 새로운 인식과 그에 걸맞는 대안적 행위의 지속적 실천이 뒤따라야 고쳐질까 말까하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회와 개인의 무의식 속에 속속들이 깃든 저 남근성의 업장이 의식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말놀이로 과연 씻어질까? 정리하자면, 말놀이적 해체 작업이 신선하기는 해도 그것을 전가의 보도로 삼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논평자의 바램이다. 오늘의 교훈, 놀리면 상처받는다.

 

 

우리 아이들이 차라리 탈선했으면 싶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

이 책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시민단체가 ‘등대지기 학교’라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09년 4-5월에 <시사IN>에 중계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교육 평론가 이범,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 이우학교 교감 이수광, 사이버대학교 상담학부 교수 신을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기숙, 인고 서원 대표 허아람,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송인수 등 총 일곱 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강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의식 문체를 사용하며 현장의 반응도 기록하고 있어 독자가 마치 청중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 만큼 이 책은 주제에 비해 생동감 있고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힌 바 ‘아이들을 스스로 공부하는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동시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을 끝장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이남수, 신을진, 허아람의 강의는 주로 전자의 취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범, 이수광, 조기숙의 강의는 주로 후자에 초점을 맞춘 강의였다. 마지막으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공동대표인 송인수의 강의는 이 운동의 존재가치와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공부 못하는 나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왜냐면 바로 내가 무지막지한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을 벗어난 학습을 사교육이라 정의한다면 외국 학교에 보내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사교육이 있겠는가? 내가 바로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송구스럽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송인수 대표의 세상을 바꾸는 순서에 나는 제1영역, 제4영역에 속하는 부류인데, 이 부류는 현 교육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새로운 정책을 갈망하면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자구책을 세우는 경우로 현실주의자라 칭한다. 이 부분에서 발가벗은 임금님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또한 읽는 내내 답답하였다. 조기숙 교수의 강의에 밝힌 바, 최다 수업시간, 최고의 사교육비, 공교육비가 GDP의 4.5%,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국가경쟁력, 대학경쟁력, 국민의 행복지수가 모두 낮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해 200명이상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며, 자살이 10대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는 현실이다. 또한 현 정부의 공교육 강화정책이 사교육과 경쟁하고, 결국에 가서는 사교육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시골의 대표 고등학교가 서울의 유명 영어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고 결국 학생들의 영어성적이 늘었다는 것이 공교육의 사교육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방과 후 수업과 활동이 사교육비 비용을 줄였다고는 하나 사교육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방과 후 수업을 경험하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느낀 부모가 64%나 된다지 않나. 또한 돈 있는 집안의 학생들은 아예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사회, 경제문제를 도외시 한 채 교육문제만 따로 떼어 정책과 제도적 접근만을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도시와 부자에게 날개 달아주는 사교육

이렇듯 부끄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면서 이 분들이 제시하는 핵심은 두 가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핵심은 대학입시에 있고 대학입시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사회경제모순과 철저히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학벌사회, 대학서열주의, 그리고 유교적 과거제의 전통 등이 결국 대학입시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인생이 바뀐다는 신화 이면에는 일등주의, 획일주의, 물질만능주의라는 가치가 내재화 되어 있다. 사회양극화, 경제불평등, 공정치 못한 사회라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학생과 학부모를 더욱 경쟁으로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쟁구도 하에서는 시골은 도시에, 빈자는 부자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 사교육이 도시와 부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꼴이다. 이 책에서 강사들은 현실을 분석하고 다양한 정책과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꼼꼼히 그것들을 읽다보면 그래도 현 수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강사들은 특히 아이의 적성을 파악 못 하고 스스로의 가치부재 혹은 혼란으로 우왕좌왕하는 부모의 모습을 지적한다. ‘엄마표’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는 알파맘과 베타맘 사이에 끼어있는 주변맘의 혼란스러움을 분석하였다. 이우학교 교감이신 이수광은 부모의 여섯 가지 유형을 예로 들면서 위로는 탈주형, 질주형이 있고, 좋은 방향으로 역방형, 유목형이 있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동화형, 순응형이 우리의 대다수 모습이라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보다 부모가 더 문제고 교육자체보다 사회가 더 문제라는 사실이다. 부모가 평생 공부할 자세가 안 되었다면? 부모가 성찰하고 분투하고, 연대하고 소통하지 않는 삶을 사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올바른 공부를 지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면 아무리 공교육이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어도 우리의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단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지고, ‘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반발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의 문제는 결국 부모와 어른, 사회의 문제라는 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교육과 공교육, 연대는 불가능할까?

나는 사실 사교육과 공교육의 대결구도가 악과 선의 구도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 일등주의, 하나의 가치만 중시하는 획일주의를 조장하는 체계가 잘못된 것이라 인정한다면 사교육이나 공교육은 똑같은 선상에서 평가될 대상일 뿐이다. 잘못된 가치를 조장하는 사교육이 나쁘다면 그런 사교육을 닮아가는 공교육도 나쁘다. 공교육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키워주는 사교육은 다안성 측면에서 옳다. 공교육의 고유한 영역인 바른 품성을 갖는 인성과 인권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옳다. 그런 측면에서 사교육과 공교육은 반목하고 경쟁할 수 있는 존재지만 연대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연대가 주류가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은 하지 말자. 정상을 향해 일렬로 빽빽하게 서 있는 주류의 시스템은 그 사이와 경계에서 휘젓고 다니는 소수의 연대세력에 의해 부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을 향해 서 있는 모든 이가 어느 순간 뒤로 돌아 자신들 앞에 펼쳐진 드넓은 대양을 보게 된다면 정상에서 온갖 폼을 다 재고 있던 그 허무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깃발을 내리지 않겠는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 책의 여는 글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묻어나있다. 또한 이 책의 저자인 일곱 분의 강사들 면면이 참으로 뛰어난 사교육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또한 진정한 공교육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벌써 저자들 속에 모종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분들이 있기에 각성된 대중이 모이고 이들이 세상을 개혁하는 소수가 될 것이라 확신해 본다.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특히, 인디고서점 허아람 대표의 글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의 속에 소개된 책들을 모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책장에 꽂아놓고 저걸 언제 읽어야지 노려볼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이 인디고서점의 활동에 녹아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시골에 사는 나는 줄곧 이런 생각을 해 왔다. ‘강남의 아이들처럼 따라 하면 우린 백전백패다. 우린 뭔가 다른 모습으로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의 근거는 처지와 환경이 다른 우리가 강남의 부모들의 가치관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떻게 우리 시골아이들을 창의력 있고 리더쉽이 뛰어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책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읽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들을 금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문고전 독서였다.’ 내가 속해 있는 ‘책익는마을’도 사교육 좀 했으면 싶다. 그야말로 사회적 사교육!, 아이들에게 책 사주고 읽으라고만 하는 사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독서가가 되고 멘토가 되어 그들과 같이 해 줄 수 있는, 친구이며 스승이며 선배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지배계급이 되어 자기 삶에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그들과 맞장을 뜰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키워주는 것 말이다.

그런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이수광 교감의 강의에서 요즘 아이들 유형이라는 내용이 있다. 제도적 학습능력과 지적 호기심이라는 변수에 따라 체제순응형인 똑똑이, 체제동의형인 엄친아, 그리고 체제무감각인 잠돌이, 그리고 제도권 공부는 못 하지만 지적호기심은 왕성한 탈선아가 있단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그것을 보장하는 부모의 역할, 사회의 역할이 있었으면 한다. ‘책익는 마을’의 사회적 기여도 이런 맥락에서 설계되었으면 한다.

‘세상의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중심을 무너뜨린다. 우리 시골아이들에게 중심으로 가라는 것은 맨주먹인 채 전쟁터로 내모는 것과 같다. 주변에서 놀게 하자. 그야말로 탈선하게 하자. 물론 이 말은 내말이 아니다. 이우학교 이수광교감의 인용글이다.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 줄 것이다.’

이 말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나, 바로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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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첫째 글로서 <굿바이 사교육>(이범 외 지음, 시사 IN 펴냄)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광대, 안병대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청춘의 서재]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의 인연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안병대 씨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안병대 씨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 안병대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원형극장의 회전 무대 관람하듯 입체적인 내용 전개,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는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죽이고 사랑하리라’ 핏빛 사랑의 파국, 천성만 남은 ‘왕’과 ‘광대’는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양의 ‘양심’과 이리의 ‘욕망’을 지닌 나약한 인간,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담한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집트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