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8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8월 월례발표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후기: 박은미 (건국대)

 

 

 

어렵다. 책 제목 너무 멋있는데 멋있는 만큼 내용이 어렵다. 토론 사회를 맡은 죄(?)로 6만원이 넘는 거금을 책값에 투여하고 두꺼운 책을 마주 했다. ‘으와 좋겠다, 광제형은…이렇게 멋있는 강해서를 내시다니! 나는 흉내도 못 내겠는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강연회에서 나는 사회를 보느라 내 질문을 삼켜야 했다. 열띤 질문을 비집고 사회자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후기라기보다 사회자의 못 다한 질문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이해가 맞는가 하는 확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후설 연구서로 『의식의 85가지 얼굴』(그린비), 퐁티 연구서로『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등을 써오신 내공으로 이제 퐁티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사르트르 강해까지 쓰셨으니 현상학을 거의 다 훑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으로는 쓰지 않으셨지만 하이데거와 푸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사르트르에까지 이르셨으니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철학의 제 1의 물음이 ‘도대체 이 모든 것은 왜 존재하는가?’임은 철학에 관심 가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이 문제가 궁금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사실은 이 질문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리도 외로운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든 모르든 말이다. 자기 안의 어두움이나 막막함을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왜 존재해서 이렇게 고통스럽냐는 말이닷!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은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특히나 이 질문을 상당히 성실히 물고 늘어진 역작이라 생각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즉자 존재의 우연성’을 열심히 입증하고 있다. 존재는 단적이다. 존재가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은 인식에서 나온다. 이 놈의 존재는 인식과 상관없이 ‘그저 있다’.

ⓒ 박영미

“존재는 그 자신으로 꽉 차 있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존재는 그 자신에게 불투명하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존재가 스스로를 의문시한다면 이미 그 존재는 그저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제 선생님은 강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존재의 충만으로 보고, 그 존재의 감압에 의해 의식 즉 대자가 생겨난다고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쉽게 표현할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를 기를 때 나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행복하다’고 의식하지 못했다. 지나놓고 보니 행복했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고 재주를 하나씩 늘려 갈 때마다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 성장에 순수하게 기뻐하면서도 나 스스로 기뻐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도 생활비 걱정, 어르신들 걱정이 있었으니 다른 걱정거리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기뻤던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인식은 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늦게 찾아오기 때문인 것 같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영국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한지 어쩐지 판단할 새 없이 그 순간 충분히 행복해서 행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행복하기에 바빠 행복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참으로 인식에로 저주 받았다. 행복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행복이 달아날까봐 무서워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 순간에 대한 걱정을 미리 당겨 함으로써 행복을 상실한다. 행복할 때 그저 행복하면 좋을 것이다. 슬플 때 그저 슬프면 될 것이다. 왜 나는 슬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편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이 맞다. 인간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표상 때문에 괴롭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면 되고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중뿔나게도 그 놈의 인식을 해댄다.

그러니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이라는 책 제목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렇게 이해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런데 인간 인식이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즉, 존재로만 충만하지 않게 되는 순간, 간극이 현상적으로 존재해버린다. 그래서 이 간극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해진다. “즉자라는 존재 속에는 최소한의 공백(le moindre vide)도 없다. 즉 무가 끼어들 수 있는 최소한의 틈(la moindre fissure)도 없다.” 존재에 이 놈의 무를 집어넣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다. 이 놈의 무를 집어넣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두면 될 것을!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로 살면 될 것을! 그게 바로 해탈일 것인데 말이다….

무를 집어넣지 않으면 현존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순간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대자적인 신적인 경지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의 삶을 이끄는 우리로서는 끝없이 존재와의 완연한 일치를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조광제 선생님의 설명은 해탈 열반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나도 잊고 너도 잊고 나와 너의 관계도 잊는 순간을 인간은 영원히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런 순간을 단지 순간으로서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므로!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P.S. 조광제 선생님께서는 박은미 선생님의 질의에 대해 ‘잘 이해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학술1부장)

“나는 왜 엄친아가 아닌가” 수치심 키우다가는 결국…[철학자의 서재]

?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자책 속에서 배회하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바라던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의욕을 갖고 링에 올랐지만 연타를 얻어맞고 주먹을 날려보지만 매 번 헛방만 날리는 복싱 선수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보내는 시간도 많아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서점으로 향한다. 볼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둘러본다. 늘 보는 전공서적들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기만 한다. 오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으므로. 대신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이리저리 둘러본다. 한참을 지나도 별 소득이 없어 그만 나가서 한의원에서 침이나 맞자고 생각하던 그 때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내가 내 편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과 함께 시선은 그 책에 멈추었고 어느새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자신을 책망하는 횟수가 전보다 잦아지던 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예상해본다. 나의 이익, 혹은 의지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사례들을 다룬 것일까? 과거에 한 행동을 후회하고 돌아보는 내용일까? 아니면 분열적 자아정체성을 말한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외로움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내 예상이 빗나갔어도 좋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미덕이고 그것이 자기발전의 덕목인 줄 알던 내게 냉정한 자아비판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이려고 해도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본격적으로 저자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정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의 TED 강연은 조회수가 900만을 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도 심리 분야 최장기 베스트 1위였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힐링 코드로도 읽히고 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강연으로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아 TED 담당자로부터 ‘스토리텔러’로 소개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 매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복지학 연구자로서 수년간 수백 명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면서 얻은 결과를 애정을 가지고 풀어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학술적 노력도 많이 기울여진 책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강연 주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수치심’이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이 책의 주제이자 브레네 브라운의 평생 연구 주제다. 저자는 이 ‘수치심’을 나의 가장 큰 적이 나 자신이 되는 이유로 지목한다. 따라서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관련 사례 제시와 분석을 통해 밝히고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분석을 바탕으로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수치심’은 연구자인 저자만 흥미를 갖는 단순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심리적 고통이 심해 치료사나 상담사를 찾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 서로 관계 맺고 사는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모두의 이야기다. 이제 왜 그런지 살펴보겠다.
 
 

2. 수치심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36쪽) 이 정의에서 눈에 띄는 말은 ‘소속감’, ‘가치’다. 수치심은 어딘가로 숨고 싶은 일시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과 연결되며 이 고립감 역시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결되면서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더 나아가 항구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수치심은 나의 ‘존재’ 자체와도 연결되는 감정, 스스로의 결점 때문에 나의 ‘존재’도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치심은 그 결점 때문에 존재의 가치조차 깎아내리는 감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죄책감과 구분한다. 죄책감은 ‘행동’에 국한된 것인데 반해 수치심은 ‘존재’로 확대된다. 이를 테면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한 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이고, ‘나는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야, 난 바보 같고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다.(43쪽)

잠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책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바보’, ‘머저리’, ‘못된 놈’ 따위의 비하적인 말을 쏟아 내며 머리를 쥐어박거나 스스로를 때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행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또한 자기반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통념 속에 이끌려 행위 자체를 넘어서 나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 좋은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쉽게 하게 된다. 물론 반성 없는 삶은 잘못된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없고 더 큰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행위에 대한 반성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해버리는 것도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어떤 잘못을 했다고 수치심까지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은 내 마음 속이 아닌 외부의 환경에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 떠올려보자. 우리는 교육을 목적으로 혹은 상대방의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치심을 자극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적 목적을 위한’ 선의를 내세우지만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은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기 십상이다. 학습 열등생이든 실적이 떨어지는 회사원이든 오랫동안 가사만 돌보던 전업주부든 누구에게도 성적이나 실적을 향상하라고 사회로 나아가 자아를 찾으라고 한답시고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비하는 발언을 한다면 오히려 결과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 충격으로 마음을 닫고 위축되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그 고통을 발산할 수 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개개인의 내면이나 개별적인 상호접촉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25쪽)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는 어떤 문화일까? 우리는 ‘사람이란 자고로 ~~~해야 한다’, ‘~~~이 좋은 것이다’라는 유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은연 중 이런 말들은 우리 삶의 잣대가 된다. 문제는 그 잣대가 과도하고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할 때 발생한다.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 언제 어디서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슈퍼맨, 일과 가사 모두를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 언제나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심성도 착한 모범생 등등. 이런 것들은 상업적 욕망에 의해 가공되었거나 주변의 지나친 기대에서 나온 이미지들이다. 수치심은 내가 이런 기준에 미달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할 때 생겨난다. 완벽해 보이는 혹은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힘겨울 때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 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면 수치심은 점점 자라난다.
 
 

3. 공감과 유대로 수치심을 떨쳐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수치심의 정의 중 한 단어에 주목해본다. 그것은 ‘소속감’이다.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내가 세상 어디에도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감은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에도 해를 주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저자는 강연에서 미국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비만, 중독, 약물남용 등이 수치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타인에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고립감을 동반한 수치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좋지 않은 감정을 타인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왜 공연히 폭식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그르치며 타인을 해치기까지 할까?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디에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되므로 위험한 것이다. 나의 상태, 나의 마음에 대한 타인과의 공감은 그래서 당연히 수치심의 해결책이 된다. 공감을 위해선 말하는 사람의 용기와 듣는 사람의 자비가 중요하다. 용기 있게 말하고 자신의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사람은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시야를 더 넓혀서 본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어 단절과 고립감도 해소할 수 있다. 듣는 이는 ‘나도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공감을 해야 한다. 자칫, ‘비평자’의 태도로 상황을 해설하거나 평가하려 들거나 심지어 심한 말로 자존감을 허무는 언사를 한다면 수치심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말한 사람은 그 자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단절과 고립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이 회고록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너 착한 놈이다’라는 말만 들었어도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선생님은 돈을 안 가져왔다고 욕설을 하며 ‘빨리 꺼지라’ 했고 그 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변명이 섞여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학생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선생님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악마’를 자라게 했고 결국 그 학생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범죄자가 되었다. 이 경우는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이 개인의 심리적 고통을 넘어서서 사회 문제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을 보여준다. 반면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낸 한 유명 프로파일러는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비슷한 환경에서도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두어서도 그것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차분히 돌아보아 그 원인을 찾아내서 감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경험을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두었다가 만약 수치심이 유발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빨리 빠져나오도록 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졌는데 저 혼자만 이겼다고 웃는 아큐의 자기기만적 ‘정신승리’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도 주변으로부터 벽을 쌓는 길이다. 용기 있기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타인과의 공감을 형성해서 유대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문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완벽주의도 나를 수치심에 빠뜨리는 덫이다. 앞에서 말한 모델, 슈퍼맨, 슈퍼우먼, 다재다능한 모범생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 매우 어려운 모습이다. 당연히 누구나 될 수 없다. 누구나 결핍이 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성장의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결핍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강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271쪽) 실제로 저자는 현장에서 학생들에게도 강점을 찾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엄격한 태도, 완벽을 강요하는 풍토 속에서 수치심을 방지하고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되어 수치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4. 나를 괴롭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라

이 책의 논조는 균형적이고 포괄적이다. 우선 연구서이면서 교양서이고 심리서이면서 사회문화서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별하면서 과도한 문제의식에 빠지는 원인을 지적해서 과한 자기반성이 자기붕괴로 나가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들이 불행하게 느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 원인을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찾아낸다. 개별적인 대화나 마음 다잡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동시에 유대감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며 누구나 소속감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특정한 출신, 종교, 국적, 혈연 등 집단정체성에 기대어 형성되는 ‘전형화’는 개인에게 덧씌운다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지적한다. 그 대신 공감을 매개로 공동의 노력과 개인의 심리회복 노력을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 나도 스스로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완벽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문화비평적 시야에서 지적하는 데 그치거나 저항하자고 선동하는 대신 완벽주의 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일러준다.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대화하고 매체를 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능숙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미덕이라고만 간주되었던 엄격한 자아비판, 의도가 좋다는 핑계로 묵인되거나 권장되기까지 한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과 훈육 등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유익하지는 않다. 붕괴될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르는 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대화하는 일에 우리는 여전히 서투르고, 모두를 해치는 삶의 방식들도 방치되어 있다. 그 후과는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크고 작은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 나조차 내 편이 아니게 만드는 익숙한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이성이 짓밟은 그들의 외침, “침묵을 지킬 순 없었니?”[철학자의 서재]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

 

송종서(한반도 동북아 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4년 8월 말에 어떤 ‘거인’이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그때 나는 중국 양쯔강(揚子江)의 중류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몇 년째 졸업 논문을 준비하다가 그곳의 여름을 견디다 못해 잠시 고국으로 피서를 와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늦여름 저녁 무렵 서울에서 거인과 마주앉았을 때 그는 땅거미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두 거인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너와 느낌을 나누고 싶다. 그림책이라 금세 읽지만, 조금씩 천천히 읽어도 좋아.”

 

▲(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디자인하우스

거인과 마주 앉았던 장소나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이제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가 건넨 책의 표지를 보면서 느낀 이상야릇한 기분은 아직도 뚜렷하다. <마지막 거인>(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묘하다. 거인이 거인에 관한 책을 주다니. 실상 그의 겉모습은 ‘거인’과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키도 크지 않고 몸집도 왜소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먹는 양이 적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확실히 모든 면에서 거대한 느낌을 준다. 때문에 나는 그를 무의식적으로 거인이라 여겼고, 이 느낌은 나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 누구나 이런 거인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 ‘거인’이라 부르든 ‘영웅’이라 부르든 자신이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을 간직하고 산다. 그날 <마지막 거인>이라는 책을 선물해준 사람이 내게 바로 그런 거인이다. 내 거인이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비장한 제목이 지금도 현실의 내 거인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날 자신이 건넨 동화책을 애지중지 바라보던 저녁 어스름 속의 거인은 슬프고 가라앉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그는 푸르스름한 황토색 표지 속에서 널따란 등을 드러내고 저 멀리 구름인지 아득한 산악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거인 안탈라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이제 다시 보면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안탈라의 등허리와 팔다리와 뺨은 온통 어지럽고 복잡한 무늬와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마지막 거인의 문신이 내 거인 속으로 옮겨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피부는 대기의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살랑거리는 미풍에도 몸을 떨었고, 금갈색 태양 빛에도 이글거렸으며, 호수의 표면처럼 일렁이다가, 폭풍 속 대양처럼 장엄하고 어두운 색조를 띠기도 했습니다.” (46쪽)

거인은 지평선만큼이나 평온한 목소리로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낯선 사물을 마음속에 들이는 데 민첩하지 못한데다, 자꾸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거인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거인과 책 속 거인의 유사한 느낌에 자꾸 사로잡혀서일까. 흙의 빛깔을 닮은 그 거뭇하고 거칠한 음성과 동화책 표지를 물들인 황토 빛깔이 한눈에 겹쳐지면서 주변 공기가 뭉쳐진 느낌이랄까,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거인들이 사는 나라

처음 선물로 받은 날 밤에 멋진 그림들에 빠져 연신 책장을 넘겨보기는 했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학술 자료들과 논문 걱정으로 이야기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크리스마스가 돼서야 이 동화책을 보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저자가 12~13세 어린이를 생각하고 지은 동화책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화라고 느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화자(話者)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가 되었다. 나는 탐험가이자 지리학자로서 1849년 9월 29일 아침에 동인도 회사의 낡은 무역선을 타고 영국을 떠나 흑해의 원천에 있는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갔다. 나를 거인족의 나라로 이끈 것은 이전에 부둣가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거인족의 어금니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금니 뿌리 안쪽에 새겨진 미세한 지도였다.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천신만고를 겪었다. 수많은 희생과 죽을 고비를 넘고 겨우 도착한 그 골짜기는 거인들의 묘지였다.

나의 탐험은 순전히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학자로서 이제껏 누구도 얻지 못한 최고의 성취감과 빛나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계곡의 지형도를 제작하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일일이 세어 본 해골의 수는 백 십여 개였지만, 땅 속에 더 많이 묻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두개골에는 기이한 돌덩이가 모자처럼 얹혀 있어 제례 의식의 대상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전부 다 삼사천 년 전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종족이 전멸하게 된 이유만이 여전히 풀어야 할 신비로 남아 있었지요.” (36쪽)

거인족의 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 바로 문신이었다. 거인족의 몸에는 혀와 이까지 포함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구불구불한 선, 소용돌이 선, 뒤얽힌 선, 나선, 그리고 극도로 복잡한 점선들로 이루어진 정신없이 혼란한 금박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환상적인 미로에서 식별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무, 식물, 동물, 꽃, 강, 바다의 모습이 그것이다. 거인 아홉 명의 몸 전체에 그려진 그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문명과 그 적들

나는 가장 키가 큰 안탈라의 등에 그려진 아홉 명의 거인들 틈바구니에서 열 번째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내 실크 해트는 19세기 서유럽 남자의 상징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최초의’ 학문적 성과를 적잖이 이룩했다. 그 성과들은 유럽인의 눈으로 본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고 쓴 것이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 모든 대륙을 우리는 ‘탐험’을 한다는 구실로 거침없이 넘어 들어갔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원주민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면 살육의 대상일 뿐이다. 하마터면 나도 “사람 머리를 절단 내는 기이한 습성을 가진” 와족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우리는 세계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들을 죽여야 했다. 원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은 그렇게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구상 모든 대륙의 80퍼센트가 유럽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신(神)의 은총을 받지 못한 그들의 ‘쓸모없는 땅’에 복음을 전파했고, 신에게 제사 의식(cult)을 거행했으며, 그곳을 쓸모 있는 땅으로 경작(cultivate)했다. 이것을 ‘문화(culture)’라고 부르거나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한다. 이런 선진적인 유럽인이었기에 내 모습은 항상 ‘실크 해트’로 상징된다.

그러나 내가 만난 거인족은 유럽인들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우선, 그들은 미지의 땅을 탐험할 때 내가 가장 중시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그러므로 거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은 그야말로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과 처음 만난 때를 회상해 보면, 나는 거인들의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한 나머지 정신을 잃었다. 그 짧은 순간 내가 환영처럼 본 것은 나를 향하여 기울어지던 거대한 돌기둥의 그림자였고, 환청처럼 들은 것은 그 돌기둥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노래였다. 거인들은 이방인인 나를 정성껏 돌봐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그 모든 악몽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꿈으로 변해”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돌봐 주었다. 또 내게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알려주고 그들의 음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

“거인들은 식물, 흙, 바위를 아주 가끔 먹었습니다. 난 그네들이 운모판 가루를 뿌린 편암으로 맛있는 파이를 만들거나 장밋빛 석회 조각을 앞에 놓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준비 과정을 비밀에 붙여 가며 자기들이 특별히 만들어 낸 국을 맛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큰 강의 진흙처럼 혀에 엊혀 화산의 용암처럼 불타오르다가 숲의 부식토 같은 뒷맛을 남겼습니다.” (48쪽)

거인들의 몸에 그려진 나무, 꽃, 짐승, 강, 바다의 무늬와 형상은 그들이 한밤중에 하늘을 향해 부르던 노래에 대지가 화답해 그려 준 “악보“였다. 노래가 우주를 향한 기도였다면 문신은 우주 자연의 응답이었다. 나와 유럽의 탐험가들이 미지의 땅을 정복하면서 그림 그리고 문명을 새기는 존재라면, 거인족은 대자연의 신비를 노래하며 그림 ‘그려지는’ 존재다.

“(…)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뒤섞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유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가냘픈 변주, 순수한 떨림, 맑고 투명한 비약으로 장식된 낮고 심오한 음조로 짜여 있었지요. 무심한 사람의 귀에나 단조롭게 들릴 그 천상의 음악은 한없이 섬세한 울림으로 내 영혼오성의 한계 너머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연히 나는 오래 전부터 별들의 움직임과 하늘을 세심하게 관찰해 오던 터였지요. 그래서 일종의 이중어 사전을 기획하고는 각각의 별자리에 상응하는 음악의 소절을 붙여 주었습니다.” (42쪽)

나, 루트모어 아치볼드 레오폴드는 이 거인들의 문신을 “진정한 노래”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결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한 덕담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이제 남은 일은 그들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학문적인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학술은 내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내 숭고한 학문이 저 고귀하고 아름다운 거인족을 파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인족의 파멸은 내가 “신들의 축복을 받은” 덕분으로 거인의 골짜기를 발견한 뒤 “학문의 숭고한 임무”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생생한 인상을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그려” 낸 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거인의 눈물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거인족의 노래와 더불어 지낸 지 열 달이 지나면서 나는 런던의 밤하늘이 그리워졌다. 비록 거인족의 삶은 굳건하고 완벽해 보였지만 내가 그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감미로운 노래와 몇 날이고 계속되는 힘겨루기 퍼레이드에 그만 진력이 났다. “거인 친구“들은 이런 내 심정의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침 그들도 사랑을 나누고 깊고 오랜 잠을 자야만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제각기 작은 호박 조각을 나에게 선물했고 거기에 소중한 마법의 힘을 실어 주는 듯했습니다. 난 점토 찰흙으로 만든 조그만 조각품을 끈에 매달아 일일이 걸어 주었습니다. 거인 친구들이 그토록 자주 웃으며 바라보았던, 우스꽝스런 실크 해트를 쓴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었지요. 안탈라와 제울은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저를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난 눈물에 젖은 거인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54쪽)

내가 이 책의 화자가 되어서 진술하는 마지막 말은 여기까지다. 그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암시했듯이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것은 화자에게 너무도 익숙한 거인 안탈라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나온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그것이다.

만약 저자가, 거인족의 나라를 떠나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면 이 책이 1990년대 프랑스의 각종 어린이 도서 부문, 문인 협회, 도서관 협회, 나아가 독일, 미국의 여러 문예 잡지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힘은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저질러 온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학문과 이성이 기실 어떻게 세계를 마름질했는가를 성찰하고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성찰은, 이 책의 화자가 그랬듯이 왜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생긴 뒤에야 나오는 걸까?

죄 없는 인류를 수없이 살해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주의자들이 모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뒤늦은 후회나 반성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의미 있는 작용을 일으키려면 지식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도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만행과 유사한 강대국의 폭력은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세계화’니 ‘자유 무역’이니 하며 형태를 바꾸어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의 권리를 침해한다. 학문에 종사하고 지식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폭력의 형태와 얼개는 점점 더 세련되고 복잡해진다. 나의 거인이 내게 이 책을 선물한 이유를 요즘에야 조금 알 것 같다.

전쟁 선포했던 북한, 사실은 세계평화를 원한다![철학자의 서재]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

 

이정은(연세대학교 외래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불안한 사회에 살면서도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안한 정세 때문에 외부 투자자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나라가 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종군 기자를 급파하게 만드는 나라가 있다. 외부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난리법석인데, 정작 내부에서는 조용한 일상만 반복되는 이 나라, 그래서 급파된 종군 기자들이 본국으로 송출할 전쟁 기사를 쓰지 못하는 이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

급파된 종군 기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이해당사자인 이 나라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전쟁 불감증에 걸려있기라도 한 것인가? 무덤덤함을 일상적 태도로 만든 요인이 있을 테고, 그 요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상상 가능하다.

전쟁 도발 운운하는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원한다기보다는, 전 세계인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관심과 신경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다. 도발 가능성이 높은 집단도 평화와 안정을 갈망한다는 것에 귀추를 주목해 보자.

무서운 전쟁 무기나 핵무기는-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도-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대국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의 사태를 위한 대비용이다. 전쟁 대비는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지켜낸다는 데 목적이 있지, 전쟁 도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강한 몸짓은 평화를 실현하고 싶다는 우회적 몸짓이다.

우회적 몸짓은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그들을 한 국가(state)로 인정해달라는 것, 달리 말하면 침략국 지위를 벗어나서 독립 국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정당한 국가로서 소통하는 국제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렇듯 ‘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전쟁을 운운하게 할 만큼 중요하다. ‘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끊임없이 구사하는 점에 주목하면,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형태와 그로 인해 펼쳐지는 국제 관계는 ‘국가’라는 단위와 국가 수준의 상호 소통을 필히 요구한다.

▲(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자본 팽창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의 고유성과 근원성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고진은 문학 비평을 통해 국가 논의를 점차로 구체화해 나간다. 특히 후기로 이어지는 <트랜스크리틱>(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나 <세계 공화국으로>(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도식을 만들고,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역할과 평화로운 국가 관계를 구현하는 방법, 즉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고진은 그러한 고민과 사상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인터뷰 형식으로 출판된 <정치를 말하다>(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보여준다.

한반도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일본도 대미 관계에서 국가의 자존심과 굴욕적 상황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민족적 자존심을 우리랑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진은 고민의 출발점을 1960년대 ‘일미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을 벌였던 상황에서부터 설명한다. 그는 이 세대를 유럽의 68세대와 같은 세대라고 규정한다. 일본의 학생 파워가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신좌익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발휘되었으며, 이 당시에 ‘국가’와 ‘네이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한미 관계도 국가 간 문제와 남북 민족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면서 우리네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 간 상호 인정의 틀에서 동등한 한미 관계 문제를 고민하게 됐지만, 아직도 미진한 면이 많다. 하지만 남북 문제에 뒤따르는 민족 문제는 한반도가 고진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전쟁 발발과 관련된 세계 평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평생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그 뒤의 행보를 이끌어간 사상적 변화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를 말하다>는 우리네 삶을 위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진은 “일본이 메이지 이래로 봉건 사회에 존재했던 자치적인 개별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전부 전체 사회로 흡수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달성”(153쪽)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중간 계급이 지속적으로 소멸했고 ‘대의제는 귀족정’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몽테스키외의 주장에 비추어 보면, 중간 계급의 소멸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고진은 “중간 세력이 일본에서 거의 소멸한”(156쪽) 2000년을 돌아보면, 일본은 데모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주의 실현에서 맹점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바다 건너 한국에는 데모가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표한다.

고진은 중간 계급이 소멸하면 민주 정치가 점차 전제 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는데, 이런 우려를 한국 사회에도 적용하거나 예단할 수 있을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진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 행위’를 찾는다. 그는 “대의제만으로는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실제 아메리카에서는 데모가 많습니다. 선거 운동 그 자체도 데모 같은 것입니다. 데모와 같은 행위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160쪽)라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팽창이 극에 달하고 있어서 국가가 자본으로, 정치가 경제로 환원되며, 국가와 정치가 자본과 경제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상황이기에 더욱 더, 고진은 자본과 구별되는 국가 및 네이션(민족)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한다.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국가라는 단위의 독립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잘 생각해 보면,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를 펼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세계적 차원의 평화라는 착상이 없이는 자국의 평화도 보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진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면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하는 데 통찰력을 주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심취한다. 칸트의 세계 시민 사회와 세계 국가를 ‘세계 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발전시키면서 ‘트랜스크리틱’을 펼쳐 나간다.

그는 9.11 이후에 특별히 더 국가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국가의 본질과 기원을 추적하면 “국가는 처음부터 다른 국가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간 경계가 해체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다른 국가와 무관하게 일국만의 국가 지양”(99쪽)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아나키스트적 공산주의가 국가와 민족 문제에 걸리면 자꾸 넘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기반으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탐구해야 하며, 그래서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사회와 세계국가’로 나아간다.

왜 칸트인가? 고진은 공산주의라고 해도 ‘어떤 이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이념을 강력하게 설정할 때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마르크스에게도 공산주의 이념은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칸트가 말하는 ‘구성적 이념’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구성적 이념으로 오인했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고진은 이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 나간다.

칸트가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을 구별하는 것은 규제적 이념에 구성적 이념을 적용할 때 이성의 폭력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이자 이성의 폭력’이다.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구성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이념을 휘두르다 스스로 좌절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념 일반에 대한 원망”(72쪽)을 터뜨리는데, 그 결과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칸트와 마르크스의 규제적 이념과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것 때문에 칸트와 마르크스를 통한 ‘트랜스크리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진은 자신의 복안을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비판을 받아들인 후에 코뮤니즘이라는 형이상학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가 불가결했던 것입니다.”(74쪽)

물론 고진이 칸트를 결정적으로 도입한 것은 정치적 대안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자본주의 팽창, 신자유주의 효과는 경제 문제와 정치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사태는 1970년대 선진국에서 발생한 이윤율 저하, 만성 불황이라는 위기에서 시작”(126쪽)되었는데, 지금 상황은 선진국의 내구 소비재 보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새로운 자본주의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고진이 보기에, 이런 활로를 개척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대한 의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신제국주의”(126쪽)라고 진단한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 ⓒ송태욱

자본 팽창 속에서 신제국주의를 포착하는 고진이 ‘국가와 네이션’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고민과 맞물려서 고진이 지적하는 것이 걸프 전쟁(1991년)이다. “소련의 붕괴, 냉전 구조의 붕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 걸프 전쟁”(76쪽)이었고, 국가 간 대항 세력이 없으면, 일방적 국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구 평화론은 혁명을 목도하면서 전쟁 위협을 뼈저리게 느낀 칸트가 결국 국제 관계는 평화 운동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평화 실현은 국가 관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 공화국’이라는 국제적 대안이 있어야 현실력을 갖는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진이 이렇듯 칸트를 대안으로 삼은 데는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칸트 이면에는 윤리를 ‘주관적 문제’로만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75쪽)로도 생각한다는 자각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성의 근간으로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주장하는 데,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타인을 목적으로 대우할 수 없는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 구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를 타개하고자 “상인 자본을 게재시키지 않는,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76쪽)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다. 그리고 칸트는 아무리 정의로운 사회라고 해도, 경제적 궁핍이 심각하면, 인간의 목적성과 존엄성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본다. 경제적 궁핍을 해소하는 대안이 필요하며, 그것은 정치 행위를, 그래서 국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풍요로움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각 공동체를 ‘한 국가’라는 단위로 인정하고, 국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국제 관계와, 국제 관계의 연합된, 통일된 이념적 장치-물론 규제적 이념적 장치-로서 세계 공화국을 고찰해 보자.

그렇다면 전쟁과 분쟁을 원한다는 북한에게도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될 수도 있다. 우회적 몸짓을 통해 평화를 보여주는 북한, 이런 우회적 몸짓을 읽어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우회적 몸짓을 애써 무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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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 & 나치 식 경례, 학생들을 욕하지 마라!

김일옥·한상언의 <욕심쟁이 왕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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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01. 반성하다.

‘철학자의 서재‘에 원고를 싣기로 했다. 갚지 못한 원고 빚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철학 공부’를 업으로 삼겠다고 나섰다면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쓴 소리’가 되든지 ‘단 소리’가 되든지 혹 ‘잔소리’가 되든지 간에 말이다. 나는 철학함의 진의(眞意)가 적어도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튼 천장 끝까지 책이 빽빽하게 쌓여 있어. 뭐, 이깟 책을 도둑놈이 삶아 먹겠어? 아니면 이불처럼 덮고 자겠어? 도둑놈은 ‘책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지. (13쪽)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먼지 쌓인 책장을 꼼꼼하게 뒤진다. 서평소개할 책을 고르는 엄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마주한 자리다. 먼저 너무 가벼워 보이는 책들은 넘어간다. 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철학자다움(?)’이 살포시 풍기는 그런 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무겁지 않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어야 한다. 학위논문 준비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티를 좀 내줄 수 있는 주제라면 완벽한 선택일 테지.

▲(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 ⓒ별숲

물론 ‘철학자의 서재’에 별도의 투고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은 전혀 없다. 다만 ‘철학자’라는 주체와 ‘서재’라는 공간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오묘한 시너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도 철학자인가?’에 대한 성찰(?)을 먼저 해야 하고, ‘서재’라기엔 너무 초라한 책장 앞에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을 뒤져야 한다. 과하지 않아서 좋은, 묵향(墨香)이 솔솔 나는 그런 책을 찾기 위해서.

글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게 눈꼴이 시었지만 도둑놈은 꾹 참았어. (15쪽)

소름이 돋았다. 문득 학부 시절 후배의 절규가 떠올랐던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고, 좀 멋져 보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포장하면서 가식을 떨려고 분주히 움직이다가 문득 10년도 더 지난 그때,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게로 왔다. 예리한 비수는 깊은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철학자들의 심오한 시부렁거림에 기죽지 말지어다.” 반성해야지.

#02. 동화를 읽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책은 가장 최근에 몰입해서 읽었던 책으로 하자. 이왕이면 중간에 포기한 책 말고 끝까지 정독했던 책으로 하자. 그리고 읽어가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나가자. 그래서 택한 책이 <욕심쟁이 왕도둑>(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진진한 도둑놈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동화의 매력이란 생각보다 놀라웠다.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배울 수 있었는데, 먼저 내 어휘 능력의 형편없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였다는 것. 대학에서 강의깨나 한다고 자부했는데 생소하고 헷갈리는 어휘들을 만난 것이 여러 차례다. 가장 놀랍고 창피했던 때는 ‘알나리깔나리’가 표준어라는 사실을 난생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웃음) 혹시 당신은 아직도 ‘얼레리꼴레리’가 표준어라고 생각하시는지?

책의 뒤표지에는 요약된 넉 줄의 이야기와 배경 삽화가 있었는데 동화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것은 마치 영화 광고에 ‘영화헤살꾼(스포일러, spoiler)’이 버젓이 등장해서 줄거리를 줄줄 읊어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만약 실제로 그런 광고가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많은 어른들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이런 과도한 친절(?)이 책을 읽고 싶도록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동화는 줄거리 자체가 재밌어서 어른들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13년 전,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 이후 아주 오랜만에 단숨에 읽은 책이다.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도 아니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의 ‘슬픔’도 아니었다. 순전히 소소한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꼼꼼하게 정독을 해도 30분이면 다 읽는 분량이지만. 집 근처 도서관에서 아이보다 더 동화책에 열중했던 엄마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나중에 터졌다. 읽기는 재밌게 읽었는데 막상 서평을 쓰려고 생각하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라고 했던가? 서평을 쓰겠다고 컴퓨터를 켜고 맨 처음 했던 짓(?)이 국립국어원에 접속해서 ‘도둑’의 사전적 의미를 찾는 것이라니. 사람은 쉽게 안 변하나보다.

‘욕심쟁이 왕도둑’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걸렸다.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헤아리기 어려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제목을 보여주고 의미를 추측해보도록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재미나다. “그러니까 결국 왕이 도둑놈이라는 거 아니야? 때가 때이니만큼 그런 의미로 나온 책 아니겠어?”, “도둑놈 성씨가 왕씨(王氏) 아니야?”

#03. 도둑맞은 학생들

▲ 논란을 불러일으킨 합성사진.

얼마 전의 일이다. 모 대학 디자인학과 학생들이 만든 합성사진 한 장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배경으로 삼아 나치 식의 경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는 어른들을 경악케 했다. 문제의 모 대학이 강원도에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3년째 출강을 하는 학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수업을 통해 만났던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체로 수업에 충실했으며 밝고 명랑했다. 전체적인 학업 분위기도 좋아서 수업 내내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만한 심각한 철부지 집단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욱일승천기’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깃발로 일본의 군국주의의 야욕을 형상화한 깃발이 아니던가? 위안부 문제처럼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이 아직 해결되지도 않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전범의 상징을 도용할 수 있는가?

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 주, 씩씩거리면서 학교로 향했다. 강사 휴게실에서 앉아서 어떻게 혼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강사의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 아니 어떻게 욱일승천기로 디자인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라며 들어가는 강의마다 잔소리를 해댄다는 것이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학생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문제의 사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치 식의 경례 모습은 실제로 연출한 것이고, 배경은 컴퓨터 작업을 통해 삽입된 것이다. 만약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넣지 않고 단지 나치 식의 경례만을 사진에 담았다면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와 나치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라면 어땠을까?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공격은 ‘나치 식의 경례’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었던 학생들의 잘못이라는 게 결국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의 무게감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함에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서 이 둘의 함의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별다른 의식 없이 혼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접근은 달라져야 한다.

2005학년도 수학능력시험부터 국사 과목은 선택과목으로 전락했다. 필수 과목이 아닌 이상 학생들이 공부할 이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도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과목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당시에 이들은 모두 초등학생들이었다. 일제강점기도 모르면서 ‘뽀로로‘만 좋아한다고 역정을 내시는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다면 달라졌겠지만 대부분의 초등학생 중에 ‘일제강점기’ 따위에 관심을 두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우리의 역사는 늘 선택과목이었다. 즉, 그들에게 근현대의 슬픈 역사는 머나먼 이야기로 치환된다.

교양으로라도 일제강점기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보통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현재 연세가 90이 넘으신 분들이다. 문제의 학생들과는 7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둘이 만나서 당시의 아픔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럼 텔레비전이나 영화, 책에서 배울 수는 없을까?

일본의 극우 세력이 과거의 만행을 합리화할 때, 우리는 입으로만 ‘역사 왜곡 하지마라’고 떠들어댄다. 정작 자기 나라 아이들에게도 필수로 내세우지 못하는 역사 따위를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가르치든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역사를 배울 기회조차 빼앗긴 아이들과 그것을 빼앗은 도둑놈. 배우지도 않은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고도 틀렸다고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과 그런 비판을 하고 있는 도둑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도 치욕이다.” <논어> 중 ‘태백’ (황희경 옮김, 시공사 펴냄)

동화책 한 권 읽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욕심쟁이 왕도둑>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동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참 다행이지만 현실과는 너무 다른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나뿐일까?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나 해방된 이후에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불길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진정성’ 타령만 하지 말고, 나만의 정치 시작하자![철학자의 서재]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휠체어 한 대 열 변호사 부럽지 않다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며, 대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례로 많이 인용되곤 한다. 얼핏 보면 클린턴의 구호는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시장은 이미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를 바탕으로 서술되는 모든 주장들은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장은 마치 블랙홀처럼 작용한다. 복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 시장의 잣대에 의해 고려 대상이 되는가 하면 교육 문제가 시장의 논리에 파묻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의식의 물신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며, 의식의 물신화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의식의 물신화는 우리 삶의 문제를 시장의 결정에 맡겨 버리고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현상이 하나 있다. 비중 있는 재계 인사가 범법 행위와 연관된 피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면 휠체어에 의존한 모습을 보이거나 입원을 핑계로 사법 처리 일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형사 사건에 연루될 경우 변호사보다 의사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연해 있는 방법이다. 설명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울 것 없던 사람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고, 풀려나게 되면 모든 병이 순식간에 완치되는 기적을 너무 기뻐서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최근에는 몇몇 재벌이 재산 헌납이라고 하는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재력가인 대통령 후보까지도 대선 후 재산 헌납을 약속하기도 했다. 재산 헌납 약속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보고 초등학생들에게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면 자기 용돈을 털어 피자 사주겠다는 공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푸념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근본적인 좌절감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현재의 삶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경제적 가치의 독점이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독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 모두 돈 잘 벌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그래서 오히려 절망스럽다.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희망은 삶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신의 책 <불안한 현대 사회>(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에서 현대의 불안 요인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는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탈주술화(탈종교)의 경향과 더불어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둘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삶의 목표들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관한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가치가 삶의 모든 의미를 대체하고 있으며, 도구적 이성의 만연 역시 시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시장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것 역시 시장의 구조적인 메커니즘 안에서의 자유일 뿐 시장을 벗어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시장은 종교를 대체하고 이성의 기준이 되고 정치를 사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 사회가 다시 종교적인 도덕적 지평의 회복을 통해 이러한 경향성에 저항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의 다원성 혹은 다양성을 아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가치를 고수하는 종교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 역시 종교의 역할에로 논의를 집중하지는 않는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의 불안을 도덕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진부한 도덕 만능주의로 경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경제 논리의 가치 독점적 전횡과 시장의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정치의 복원 혹은 복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다룰 수 있는 영역이며,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과 요구를 삶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의제 정치의 논리 하에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지를 주지도 않으면서 기업에게만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주곤 한다. 사용자에게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면 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비용도 늘어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해고도 자유로우며 고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저렴한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계약의 두 주체인 사용자와 노동자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부당 노동 행위가 적발되어도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개인별로 소송을 벌이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루한 법적 분쟁이 이루어지는 사이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들은 부모님 집에 맡겨진다. 이미 국가의 법이 이런 지경에서 노동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연대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 삶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가?

 

노동 쟁의 시 적용되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연대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제한은 재개발과 관련된 쟁의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있다. 정부의 공권력은 항상 인정된 소유권만 보호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여하의 노력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입자와 지주들 간의 분쟁에서 지주들은 용역을 고용하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지만 세입자들의 경우 자발적인 연대 세력의 도움도 금지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당연히 소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정책들과 무관할 수 없다. 토지건물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들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세입자들의 생존권은 무형적인 것이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노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졌던 사업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재산권에 대한 보호라는 명분으로 기업이 노조에 대해 파업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행위는 정당한 노동 기본권조차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우 정치적 연대조차도 제한을 받는다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은 재산권 행사자들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흔히 복지를 거론한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가난한 독거 노인들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악용해 싼 값에 파스사고 그것을 팔아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인 양 보도되는 현실에서 복지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급기야는 2008년 2월부터는 파스 유가 국민건강보험에서 비급여 약물 보조제로 지정되었다. 복지 정책이 마치 부유층의 자비를 강제하고 그 덕에 사회적 약자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약자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시장주의자들의 도덕적 자부심만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비용을 더 많이 책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비굴하게 만들어야 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공항이나 고속도로와 항만 등과 같이 공적인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회 간접 자본을 많이 이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업과 부유층이다. 복지는 엄연히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동점심의 윤리나 이타심과 같은 원리로 설명되는 도덕적인 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해 줄 유효한 수단을 마련하는 단서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도덕적 관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상류층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강화하고 부자들의 자선이나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 등을 촉구하는 긍정적 힘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접근은 그것을 실천하는 개인을 칭찬할 만한 근거일 뿐 시장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 지도층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선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내일 다시 그들의 자선을 기다려야 하는 사정은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결코 자기 결정의 자유와 끝까지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정성에 호소하는 태도가 자칫하면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등의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은 모두 정치적 행위의 영역이다. 또한 그것은 직업적 정치인들의 정치가 아닌 자기 결정의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정치를 의미한다.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 보이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 혹은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시장에서의 삶은 인간의 정치적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각자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는 듯하지만 시장 안에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허구다. 시장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산된다는 점에서 다원화된 기준들이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만 다원주의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정치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을 고려하면서도 다양한 삶의 가치를 고양해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역할들은 정부 주도의 계몽이나 정책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홍보 등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는 분명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 속에서 당당한 생존권의 향유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목표는 결과로서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 결정의 자유를 실천함으로써만 자기 결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아주 적게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과 연관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의 투표권조차도 실질적으로는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투표 시간 연장 문제도 정치권의 셈법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몇 년에 한번 주어지는 투표권의 행사는 유효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삶의 문제가 정치적 일정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와 선거 기간 사이는 대중들에게 근본적으로 정치적 실천의 휴지기에 불과하다. 정치가 정치 엘리트들의 직업적인 행위를 일컫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태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결정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라면 정치적 실천이나 정치적 행위는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정치의 한계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로 극복되어야 한다.

손톱만큼의 우월함으로 연대를 비웃지 마라?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사회적 연대가 보장을 받아야 한다. 정당 간의 정치 공방이 아닌 엘리트 정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공세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공세’는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닌 권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는 기득권에 대항해서 정치적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유일한 힘이자 수단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노예제를 200여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요령 중에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노예들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예속적인 노예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가능성은 연대에서만 비롯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를 예방하는 유효한 수단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차별성을 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주가 소작농을 관리할 때 마름을 두거나 소작농 간에 차별을 두어 연대를 예방했듯 노예주들은 노예들의 처지에 차등을 두어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영세 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은 모두 연대를 어렵게 하고 불신을 형성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연적인 것일까? 아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도의 운영을 도움으로써 결국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마저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의도적이다. 노동자의 권익이나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 전반의 제반 문제는 외면한 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이해에만 매몰된 노동 운동은 연대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없으며 연대를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노동 운동이 노동 운동 이외의 정치적 행위 결사들로부터 불신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노동 운동은 정치적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질서에 대한 편승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문제를 파업의 머리끈 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결국 집단 이기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의 도덕성 문제로 해결할 수는 없다.

연대는 연대 세력들 중 가장 열악한 처지의 세력들에게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 이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자의 자기 결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 가장 시급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 우선성을 두는 연대의 조건이 확립되어야 하며, 그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 해결의 결정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관철될 때 소득 증가보다는 자연 갯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픈 어민의 삶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유지될 것이며, 실직자의 자녀들이 상급학교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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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기종’도 모르고 ‘스펙’ 쌓으면 뭐해?

미셸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김정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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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 없는 ‘자기 계발’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펴냄)에서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자기 계발서 수요의 구조적인 조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근대’는 모든 개인에게 ‘입신’과 ‘출세’를 과제로 삼게 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의 개별 주체로서의 권리와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직장에서 남들과 교통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인정과 성공이라는 재화는 제한되었으므로 남들보다 나은 개인의 자원(즉 학벌과 교양 같은 상징 자본, 화법과 사교술 같은 테크닉)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같은 필요의 총칭이 ‘처세’이다. (…)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대학생이나 재테크에 열중하는 주부만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모든 ‘자기’들은 ‘자기’의 모든 것,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아보고(알기, 성찰), 관리하고(관리, 경영), 발전하게 하기 위해(계발, 자조) 노력한다.” (<1960년을 묻다>, 377~379쪽)

흔히 말하는 ‘각자도생’의 일환으로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을 읽는 셈이다. 그런데 관리하든 발전하든 간에 매뉴얼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제품 인식이 먼저이다. 무턱대고 엉뚱한 기종에 다른 매뉴얼을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인데, ‘자기 계발서’라는 실행 지침서를 적절히 사용하려면 자신의 ‘기종’부터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계발’하려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또한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낸다고 할 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1982년 버몬트 대학에서의 강의에서, 성의 금기와 제약 등을 다루면서 금기를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선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강의가 담긴 책 <자기의 테크놀로지>(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은 금지를 지키든 위반하든 간에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해야하는 의무를 갖게 됨을 들춰낸다. 그렇지만 자기 계발에 대해서도 그러할까. 우리는 각자도생을 위한 ‘자기 계발’의 강요 앞에,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먹고 살려고 하는 수 없이 내맡겨 버리는 체념은 아닐까.

 

▲(미셸 푸코 지음, 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근대 개인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요구되는 ‘자기 계발’은, 푸코의 분석을 이용하자면 ‘자기 해석‘과 관련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무엇을 어떻게 스스로 계발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가 계발된다고 해도 계발되는 것은 ‘처세’이지 자신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진리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장치가 강제되지 않는 한 진실만을 말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란 도무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줄로 알았는데 막상 성취되니 실은 그걸 원한 게 아닌 경우를 겪곤 하지 않는가.

대번에 연상되는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흔히 주제 파악을 하라는 즈음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델포이의 이 신탁은 인생에 관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기술적인 권고, 즉 신탁을 듣기 위해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네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지 말라’를 의미하였다. 다른 해설자의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신탁소에 조언을 청하러 갈 때 정말 질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을 의미했다.” (38~39쪽)

그러나 물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신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당연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960년을 묻다>에서 전형화되어 드러나듯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다.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보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이 배려해야 하는 자기란 무엇인가?”

 

푸코는 자기를 해석하는 일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주목한다. 고대에 자기인식이 자기 배려에 따른 것이며, 이때의 자기 배려란 영혼을 돌보는 행위에 신경 쓰는 일이라고 정리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몸이지 자신이 아니며, 하물며 몸이 사용하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더욱이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 누구나 의문을 갖는, 영혼을 돌본다는 게 대체 무얼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얼마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혼을 돌보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제시한 점이다. 얼핏 자신을 돌보는 건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무관심일 듯싶은데, 오히려 자신에 대한 배려야말로 정치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영혼은 신성한 요소(영혼의 원리, 혹은 본질)에 대하여 관조해야 한다. 이렇듯 신성한 관조 속에서 영혼은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기반을 설립하는 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정당한 정치 행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원리이며,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영혼이라는 신성한 요소를 관조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가가 될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배려를 추구하는 행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은 정치 활동과 결합되었다.” (48~49쪽)

한나 아렌트가 ‘말하기의 무능력, 생각하기의 무능력, 판단하기의 무능력’이 만연하는 악을 만든다고 말했듯,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규칙’을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일일 뿐 아니라 공적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의 양자택일

 

겉보기에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관심은 흔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구분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연 얼마나 현재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뤄볼 문제이다.

푸코에 따르면,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I>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영혼에 대한 인식이고, 이는 정당한 행위 혹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관조와 연관됨을 드러냈음에도 이미 고대에도 플라톤의 해결책과는 달랐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다. 말기 헬레니즘과 제정시대에 이 문제는 별도의 대안책으로 제시되었다. 즉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 (49쪽)

흔히 연상되는 자기에의 전념이 내면으로의 침잠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배려는 새로운 자기 체험을 포함한다. 자기 체험의 새로운 형식이 출현한 시대는, 내성이 점차 세분화되었던 기원전 1, 2세기이다. 글쓰기 작업과 의미심장한 관찰 사이에 연관관계가 생겨났다. 생활과 기분, 독서에 세부적인 주의가 기울여졌고, 자기 체험은 글쓰기 행위에 의해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험 영역의 문이 열린 것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 정신의 움직임, 자기 분석에 대한 (…) 세세한 관심이다.”(52쪽)

이제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는 일상생활의 “하찮고 세부적인 사항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세부사항이 바로 우리 자신-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55쪽)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의 올바른 행위나 정당한 행위를 사색하며 관조하는 일이 제거된다. 이는 로마 제정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있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면, 이제 “자신을 보다 잘 배려하려면 정치와 결별하여야 했다.” “정치 생활과 무관계한 자기 자신에의 배려의 보편성”(57쪽)이 등장한다. 이것을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는 “영구적인 의학적 배려가 되었다. 한순간의 그침도 없는 의학적 배려는 자기에의 배려의 핵심 사항의 하나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57~58쪽)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자기 배려 모델이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계발 그리고 그 대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볼 시간이다. 아마도 큰 무리 없이 ‘자기 계발’에의 몰두는 몰정치적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올바른 행위를 숙고하고 판단하며 고민하는 일은 매우 불편할뿐더러 인간관계의 갈등을 초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 개발과 원만하고 인상적인 대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에서 어떻게 올바름에 대한 고민의 틈이 있겠는가. 당장 능률적인 일처리와 협력 관계를 재고한다면, 올바름을 머릿속에 떠올릴 새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거나 그릇된 일이라는 클레임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지는 식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돌볼 만큼 한가롭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삭제할수록 일처리는 능률적이다. 정당한 행위의 관조도 없이, 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 계발’되고 있는 셈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자신의 죄를 사하고 진정한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중세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는 이미 결별한 시대에 살고 있는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도식이 성립한다면, 자기 계발되면 될수록 자기 배려와는 멀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이지만, 그것은 글쓴이의 능력을 벗어나 있는 일임을 고백하면서 다음의 문제제기를 음미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푸코가 자기를 다루는 기술의 역사 혹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역사를 탐구하게 된 것은 베버의 의문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을 진실된 원리에 기초하여 규제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금욕에 대한 이성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금욕에 승복해야 하는가?”

푸코의 의문은 이러했다.

“특정한 종류의 금기가 어떻게 특정한 종류의 자기 인식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가?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에 관하여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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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다 더 ‘행복한’ 우리 마을에 놀러오세요![철학자의 서재]

유창복의 <우린 마을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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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부산대학교 비정규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춤추는 숲>과 함께 사는 삶

 

지난 2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 나는 동료들과 공부 모임을 하는 공간이자 매월 마지막 목요일이면 ‘초록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 초록’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여유가 없어 공부 모임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 영화제는 (육아하는 입장에서) 더더욱 언감생심이었죠. 2월 말 영화제를 기점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모든 곳에 가능한 한 참여하겠다고 목표로 삼았지만 절반의 성공에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두 돌 된 아이를 달고 간 길이라 영화가 시작되고는 30분을 넘기기 어려웠거든요.

보고 싶었으나 다 보지 못했던 그 영화는 서울 마포의 성미산 공동체에 대한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이었지요. 공동체 문제는 현재 나의 삶이나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내게 언제부턴가 새롭게 풀어가야 하는 오래된, 그러나 미지의 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또 덮어 두었던 문제가 성미산 아래 마을의 골목골목을 여기저기 소개하는 경쾌한 자전거의 속도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어차피 영화를 다 보지 못했으니 영화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사는 삶을 모색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만 말해 둡시다.

애초에 그들은 공동 육아를 위해 모였고 그것이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그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요컨대 성미산 공동체 사람들은 사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그냥 감내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적인 공적 영역 속으로 휘발시켜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미지의 공동의 삶의 방식을 발굴하려 했고, 또 그 이후의 것들(도시에서 마을을 이뤄 산다는 새로운 공동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7년의 지난한 시간을 아마도 영화는 매우 함축적으로밖에 보여주지 못했을 겁니다.

같은 것을 소유/소비하는 것과 공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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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복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물론 성미산 공동체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에도 화명동에, 반송에, 물만골에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삶 가운데 공통적인 것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얼핏 생각해도 이 함께 살아가는 존재 조건에서 면제된 이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를 볼까요? 우리들은 동일한 물건들을 소유/소비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스마트폰, 스키니진, 백팩, 브랜드 러닝화 등의 동일한 물건들로 공통적인 외형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동일한 종류의 물건을 소유/소비하는 방식은 아주 개별적일 뿐입니다. 이때 개별성이란 서로 소통되지도 않고, 관계 맺지도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소유/소비 방식은 싸고 질 좋은 물건이거나 비싸더라도 브랜드가 품질을 보증해줄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공통적인 가치는 삼성이냐 애플이냐, 나이키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어디서 왔고(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도 공통적이네요)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는 모르기도 하지만 관심사 밖이기도 합니다. 이런 단기적 소유와 묻지 마 소비는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즉, 나도 동일한 물건을 소유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요(물론 이런 관점이 스마트폰이 우리 삶의 내용과 형식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개별화하는 이 도시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이 찾은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나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고,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결국 유창복이 쓴 <우린 마을에서 논다>(또하나의문화 펴냄)을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

글쓴이 유창복은 사고로 부모 형제를 잃은 처형의 아이 아빠가 되면서 공동 육아의 터전으로 성미산 자락을 찾아든 이들 중 한 사람이지요. 그는 처음부터 마을 일에 참여적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모인 이들은 아이들 먹을거리와 아이들 교육을 남다르게 고민하면서 마포두레생협, 도토리방과후학교를 만들면서 조금씩 마을의 기본적인 삶이 구성되면서 함께 해나게 되죠.

그런데 그 터전이 갑자기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명목은 서울시상수도본부에서 성미산에 배수지 건설 사업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당시 성미산 땅주인이었던 한양대학교재단의 부동산 개발을 위해 성미산이 헐린다는 것이었죠. 그때 글쓴이는 자신은 몇 번 오르지 않던 성미산이 아이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동산”이라는 것을, 아이의 고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성미산 지키기는 주민 서명에 들어간 2001년 8월부터 상수도 사업본부가 서울시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업 철회를 밝히는 2003년 10월에 이르는 지난한 시간을 겪습니다. 그동안 마을에 들어온 이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공감과 지지는 120일 동안의 산상 철야 농성 과정에서, 서울시가 주민을 몰아내기 위해 보낸 용역 깡패를 막아내고 끝내 성미산을 지켜내면서 새로운 이웃으로, 다정한 마을 주민으로 다시 만나게 되지요.

물론 해피엔딩은 없습니다. 성미산의 위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거든요. 이후 새로운 땅주인이 된 홍익대학교재단이 주민 반대 끝에 홍익대학교 부속 초·중·고등학교를 짓게 되고 그 갈등과 민원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또 다시 기숙사를 설립한다고 해 새로운 갈등을 예고하고 있지요.

‘성미산 마을 축제‘, 마을 문화 공간인 ‘성미산 극장‘,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 대안 카센타인 ‘성미산차병원’, 동네 유기농 식당 ‘성미산밥상’, ‘마포FM’, 공동주택전문기획사인 마을 기업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등 이 마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새로운 공간과 실험적인 시도들에 대한 찬사나 부러움은 여기서 접어둘게요.

애초에 나의 의문으로 돌아가면 성미산 마을 공동체의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 ‘성미산’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자연재로서의 산인 성미산이 아니죠. 함께 살며 놀며 기억을 만들고 오랜 시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하고 투쟁하며 함께 지켜냈던, 시간과 함께 보냈던 장소로서의 성미산이지요. 그런 것은 손에 잡히는 유형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변치 않는 동일한 것으로 유폐되어 있을 수도 없는 것이죠. 같이 기억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매번 달라지고 공유하고 있지만 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계속해서 덧붙여갈 수 있을 뿐이죠.

 

뜻은 있으나 목적은 없는

 

우리는 그동안 숱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시대 가장 대표적인 공동체가 이념적 공동체와 종교적 공동체였다면 전자는 이미 그 생명을 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귀농을 꿈꾸는 이들은 소비와 쓰레기의 순환에 갇힌 도시를 피해 농촌으로 가지만 그들이 거기서 또 다른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성미산 공동체에서 주목하는 것은 “성미산 마을은 비전 세우고 쫓아간 게 아니라, 일상의 필요에 따라 마을 일을 하면서 능력들이 성장한 사례”라는 점입니다. 20~30명 규모의 공동 육아 울타리만으로 육아가 끝나는 것이 아니듯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이 하나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깨닫는 과정에서 애초에 생각지 않았던 일들을,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전인미답의 길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고 있는 것일 뿐인 거죠.

최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방식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의 내용을 논의하고, ‘공통적인 것’을 규명하는 데 관심이 많고 저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은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개인화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인 공통성을 토대로 연결되고 구성된 존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나의 토대를 이루고 내가 연결되어 있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 공통적인 것을 이미 주어진 것이며 사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 역시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삶의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니 어느 하나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더군요.

그렇지만 “육아·교육·먹을거리·생활필수품·놀이·소통 등 어느 것 하나 도시의 빠듯한 살림살이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절실한 생활의 필요를 느껴 시장에 가 보니 마땅한 해결책도 없다. 있어도 지나치게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 국가를 쳐다보니 아예 관심이 없거나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채다. 어떻게 하나? ‘시장과 국가가 해 주지 않으면 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다’.” 이것이 바로 성미산 마을의 역사를 만드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절실한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 직접 해결하는 거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질 않지만 여럿이라면 가능하다. 공동의 필요를 느낀 여럿이 협동하면 뭐든 된다. 한 번의 성공적인 협동은 또 다른 협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협동이 오히려 번거로울 때도 많다. ‘차라리 혼자 하고 말지’할 때가 많을 정도로. 원활한 소통 경험은 협동의 성능을 높이고 성공률을 높인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삶을 원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지만 성미산 공동체가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이, 그 가능성의 모델이 되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허나 책을 읽을수록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현재의 삶의 방식에 불만이 많다면, 그래서 나-우리의 삶을 바꾸는데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의 이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더 읽을거리

윤태근의 <성미산 마을 사람들-우리가 꿈꾸는 마을, 내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을>(북노마드 펴냄), <우린 마을에서 논다>가 마을 1세대의 투쟁과 소개에 많이 할애되어 있다면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두 번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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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랑 원한다면, ‘하나 되자’고 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뤼스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

 

김세서리아(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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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랑, 하나가 된다는 것?

 

사랑해요”란 말이 아직도 서툴고 낯설게 느껴진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사랑’은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말이 되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홈쇼핑 교환인의 멘트에서부터 유치원 아이들의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재잘거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 카피 등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 그 대상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할 때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의미는 가까움, 친밀함의 의미이다.

이러한 때문에 우리에게 종종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 이해된다. 너와 나 사이의 다름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뭉쳐지고 거듭나는 것, 내 것이 네 것 되고 네 것이 내 것 되는 경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이해하는 속에서는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되는 것, 그들 간의 차이가 남아 있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한 때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불완전하다. 자연히 우리는 완전하였던 상태로의 복원을 소원한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됨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의 추구이다.

▲(뤼스 이리가레 지음, 정소영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플라톤의 <향연>(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펴냄)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에 대한 논리는 하나됨의 사랑을 보여주는 전형일 것이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며, 사랑에 의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힘입어 사랑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된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라는 생각은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만큼 혼자인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데올로기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민족애, 동포애, 형제애는 각 구성원이 하나임을 과시하는 사랑의 표식이며,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큰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한 몸 이미지를 지닌 상상의 공동체가 된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것은 자주 혹은 때때로 가장 최상의 원리처럼 생각되곤 한다. 동일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 안에 어떠한 대립도 나타나지 않는 통일적인 힘을 상정하며,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힘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한 몸 되기의 힘이고, 사랑은 소통의 힘이며, 한 몸이 되어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차이, 사랑

 

하지만 통일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인’하나’의 원리는 사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하나’가 되는 방식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이룰 수 없다. ‘하나’라는 영원하고 통일적인 힘은 유일무이한 진리를 등장시키고, 그것과 다른 종류의 것들은 강제로 흡수해버리거나 아니면 미리 마련된 기준에 의해 나머지 것들을 지평 밖으로 내쳐 버리는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하나 됨은 가까움의 극단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움을 최극단까지 몰고 가면 결국 그 가까움에는 어떤 거리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실 진정한 가까움이나 다가감이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는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없으며, 그러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내 방식대로 길들이거나 나에게로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항간의 말은 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나 됨이 폭력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부자가난한 자, 어린이와 어른,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제1세계 백인 중산층 여성과 유색 무산자 계급의 여성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사실은 평등이 아니라 평등을 가장한 차별이며 온전한 소통도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소통을 가장한 하나 됨의 막힘 논리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을 동일화하는 의식은 종종 노인들이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이나 잠재력을 얼마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노인과 젊은이 간의 소통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인생의 어느 특수한 단계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의미를 무시하고 간과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실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을 동일화하려는 사고는 노인들의 특수성이나 능력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가치를 젊은 사람의 기준에서 측정하기 때문에 젊은이에 못 미치는 체력 혹은 능력을 가진 노인은 유용성의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노인들이 갖는 혜안이나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니는 감정의 특수한 효과들은 무시되고, 노년은 개인적인 발전이 침체되는 운명으로 낙인찍힌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일화하는 것,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동일화하는 것, 예컨대 젠더를 고려하지 않는 것 역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빚어낸다.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어린이를 그저 작은 어른으로 취급해버림으로써 어른의 일에 어린이를 가담시킨다. 또 장애인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일화하는 것은 장애인의 상황을 더 열악한 데로 전락시켜 버린다. 남녀의 같음을 강조하는 것 역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일성 혹은 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젠더의 관점에서 가장 비판받을 수 있다.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 이성이 전제된 남성의 유형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요구하면서 여성의 특수한 경험을 무시하게 되고, 그러한 속에서 남녀 간의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간격, 소통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의 접촉이 핵심일 것이다. 이때 가까움, 친밀성을 뒤섞는다든지 융합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이, 다름을 인정하고, 거리두기, 간극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접촉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타자가 나와 차이난다는 것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타자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각각을 우리 자신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닿아왔던 그 부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을 이리가레는 감각적인 어루만짐, 가까움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움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에 다다랐다가는 다시 그것을 닫고 물러나야 함에서 찾는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접촉, 어루만짐, 가까움 이런 단어 옆에 간격, 차이, 다름이라는 단어들을 함께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간격이란 이미 드러난 것을 통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그저 삼켜버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재발견하고 타자를 재발견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것으로서의 간격, 안-사이, 사이-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게 향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즉 나에게 익숙한 공간-시간이 아닌 다른 공간-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소통이라는 말에는 모든 것이 교환되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포기되어야 함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고, 전체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은 소통을 불가능한 상태로 모는 것이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의 내밀함을 침해하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을 지킴으로써 사이의 친밀함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은 소통의 방식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타자에게 말을 하면서도 어떻게 타자를 놓아둘 것인가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타자가 타자로 존재하고 계속 그렇게 남아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관계, 머물기 그리고 사랑의 도(道)
사랑하는 데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일종의 도를 터득해야 할까? 뤼스 이리가레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사랑의 길>(정소영 옮김, 동문선 펴냄)에서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 부분이 갖는 관계의 원래 자리를 일구어야 하며, 그 일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고, 이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배경을 그려 보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리가레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은 우리가 현재 믿고 쓰는 묘사적이고 서술적인 언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언어들로는 이미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물, 이미 과거의 사실이거나 말해진 것을 통해 과거로 밀려난 인물이나 사물에 상응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무언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 과거의 것과 현재나 미래의 것이 서로 만나는 장을 마련하는 일, 또 그것을 표현할 말이나 몸짓, 맞아들이고 축하하며 지금 현재와 미래에 그것을 일굴 만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리가레에게서 이러한 작업은 인간 되기, 관계 맺기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은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주체와 함께 전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전체와의 연결이 아니다. 인간 되기, 관계 맺기란 맹목적으로 자신을 전체 안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를 공들여 만들어온 주체가 스스로 그 일을 해온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어떻게’라는 방식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모종의 제스처가 없이 타자와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가레는 타자와의 관계를 이루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몸짓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상응하는 실제적 내용을 표현할 제스처,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차별화된 세계를 타자에게 제안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체가 타자에의 친근함, 세계에의 친근함을 찾는 것은 거리를 극복함으로써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다르게 자신의 자율성 속에서 존재하는 능력을 통해서이다. 또한 이것이 생겨나는 데 있어서 타자의 역할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일어나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임을 밝힌다. 이러한 속에서 주체는 구성되고 타자 역시 구성된다. 주체는 자신을 인간으로 구성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주관성의 객관성을 구성한다. 타자를 위한 자리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자리를 자신 안에 마련하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보면 사랑이란 인간 되기의 작업이며 이는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는 두 주체에 의해 건설된다. 나와의 관계에서 네가 생겨나려면 나는 타자가 신뢰할 수 있는 그의 존재에 대한 성실함을 확보해야 한다. 그 시간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너와 나 자신 모두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함께 전유하기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동반한다. 타자에게 다가가는 법, 우리 안의 타자와 우리 사이의 타자와 함께 갈 가까움의 장소를 마련하는 법, 그리고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사랑의 도이며, <사랑의 길>이 보여주는 하나의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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