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불과 얼음』 [청춘의 서재]

이찬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금 오늘의 청춘이 가장 애타게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따스한 위로가 아닐까. 88만원 세대의 한없이 작아진 꿈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맞서 몸부림치는 그들은 상처투성이에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인다. 오늘의 청춘은 사회와 가족의 보호망이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무거운 자신의 삶을 단지 혼자서 감당해야 할 뿐이다. 그러한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어떤 이는 생활전선을 위한 노동과 적금 통장에, 어떤 이는 미래를 위한 수험서와 처세서에 온 마음을 쏟아 붓는다. 야망을 위해 싸우던 기성세대들에 비해 자신이 쉴만한 빈 자리를 위해 싸우는 오늘의 청춘들의 모습에는 서글픔이 어려 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세상에 용감히 맞서기 위해 인문ㆍ사회 서적들을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나 자신은 그만 더욱 작아지고 만다. 위안과 자신감이 필요한 청년에게 “세상을 알아라! 이렇게 싸워라! 용기를 내라!”고 말하지만 마치 ‘긍정의 힘’을 갈파하는 목사님과 무슨 다른 말을 하는지 솔직히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라는 진심어린 충고가 우울한 이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위축된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지 가운데서 올바른 선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곁에 있어’ 주는 것일 텐데 말이다. 청춘은 너무 힘겨워 자신의 삶을 결단해나갈 기력조차 없으며, 자신의 어려움을 말할 힘조차도 없다.

그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위로할 방법은 없을까? 자신의 아픔을 말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기쁨을, 희망을, 자신의 소중함을, 자신 안에 보물이 간직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하게 만들어줄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나는 청춘에게 시를 권한다. 그 가운데서도 청춘의 생명을 테두리지어 압박하지 않고 청춘 곁에 한 걸음 뒤로 머물러,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기다려주는 시를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존을 위한 대비의 몸부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춘에게 넉넉한 여백과 여운으로 다가서는 시 한 편은 삶에 작은 빈 자리를, 작은 마음의 여유와 안식처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불과 얼음』의 첫 시는 「목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전원적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샘 치러 나가 볼까 합니다;

그저 물 위의 나뭇잎이나 건져 내려구요

(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

 

엄마소 옆에 있는 어린

송아지를 데리러 가려구 해요. 너무 어려서

엄마소가 핥으면 비틀거리지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

 

이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 무엇을 말하려 하면서도 아마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저(only)’ 말할 뿐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불과 얼음』 마지막의 해설을 훔쳐보면 프로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시는 …… 반드시 대단한 해명이 아니라 혼란과 맞선 잠정적 머무름에서 끝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란 스스로의 결정이나 결정당함 혹은 확정적인 해명에 둘러싸여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말처럼, 삶의 평온이란 해명과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가벼운 망설임과 혼란 가운데, 기대 가운데 머물러 있음 속에서 빈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첫 번째 시 「목장」 또한 저자의 대단한 해명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기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집착하기보다는 아무런 기대 없이, 들려오는 시의 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가운데 그 색채들 가운데 고요히 쉴 것을 권유한다. 이 시를 읽으며 상상 속에서 그저 기분 속에서만이라도 나뭇잎이나 건져 내는 한가로운 여유를, 오래 걸리지 않는 동행을, 비틀거리는 어린 송아지의 가냘픔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걸어 보지 못한 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

 

이 시의 생략된 뒷 부분에서 주인공은 결국 하나의 길을 택하고 그 이유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한숨지으며 이야기한다. 여러 갈래의 길에서 고뇌하는 꿈이 많은 청춘에게 이 시는 참으로 많은 공감을 전해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갈래 길들을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한 청춘에게 이 시가 동병상련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맞는 길인지 주저하고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지만 주인공의 한숨은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결코 꿈을 위한 용기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현실적인 선택이든 이상적인 선택이든 그 무엇도 우리에게 그것이 올바른 선택임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은 이 시를 읽는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곁에서 같이 걸어가 줄 뿐이다. 단지 곁에 함께 걸어가 주는 것… 불안하고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과연 곁에서 기다려주고 고독한 시간을 함께 나눠줄 친구가 있는 것일까.

이 시를 읽으면 내가 겪었던 작은 방황의 경험이 생각난다. 대학생 시절 선후배 몇 명과 함께 하는 소규모 공부 모임에 속해 있었는데, 처음으로 후배를 맞이하면서 그 모임의 운영자 자리를 맡게 되었다. 비록 몇 명만이 모인 자리이지만 회의를 진행하고 주도하는 자리를 처음 맡았던 터라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회의 자리에서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열등감으로 인한 위축감에 극도로 시달렸다. 그래서 회의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2학년 선배가 되어서 공부로나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나 내가 선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너무나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과연 학생으로서 내가 택했던 꿈을 이룰 수 있는지, 이루기 위한 준비는 아무것도 못하고 귀중한 시간만 낭비한 건 아닌지, 이러다 졸업 후 자기 앞가림도 못하게 되지나 않을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감으로 생각이 멈추고, 말을 못하고, 말을 더듬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매일 나를 지진아나 바보라고 자학하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우울증과 대인기피의 모습까지 보였던 내게 친구들과 선배들이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를 해 주었지만 그 말을 듣는 그 순간만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듯 느껴질 뿐 돌아서면 다시 원점의 불안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었다. 그나마 친한 친구가 곁에서 놀아주려 하고, 같이 밥 먹고, 집에 놀러와 같이 자고 할 때면 그 순간만은 마음의 불안이 진정되곤 하였다.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괴로움을 극복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장소는 학교 화장실 변기 위였다. 나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선후배들로부터 도망치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세상에서 도망쳐 피신한 곳은 고요한 화장실 안이었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아픈 머리를 감싸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였는데, 그 공간은 그야말로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신입생 시절부터 밖으로만 배울 것을 찾아다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고, 선배들과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이때의 화장실 안에서의 기억처럼 오로지 안으로 나 자신을 향해 스스로 찾아 나섰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괴로워하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던 순간 보았던 번뜩이는 섬광은 그 동안의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문제와 불안과 망설임을 해결하는 어떠한 방법으로서 ‘무엇’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스스로 그 ‘무엇’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경험은 바로. 말하자면. 나 ‘스스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자신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그대로, 생긴 모습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험이었다. 나는 오직 있을 뿐이지 내가 어때야 하고 어떻게 비춰질 지에 대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힘들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경험했던 그것이 어쩌면 바로 실존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실존은 책에서도, 선배들의 조언에서도, 친한 친구의 위로 가운데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안 혼자만의 불안과 고독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모습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던 시간의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에게 어떤 충고와, 어떤 길이 정말 맞는지에만 의존하던, 아니 억눌려만 있던 나였다. 내가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세상의 가르침들과 수능 문제를 풀어 대학에 들어가면서까지 나에게 부과되었던 5지선다의 ‘무엇’은 바로 나의 있는 그대로의 ‘있음’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들은 당시의 어린 나에게 그 이후부터도 미래의 자신의 삶의 길이라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따라올 것이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을 발견한 나는 포기하지 않고 세상 가운데 쓰러지지 않으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선택지를 강요하는 명령과 심문은 청춘을 더욱 아프게 한다. 청춘의 슬픔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스스로의 슬픔을 돌볼 빈 자리 가운데서 스스로 구원될 수 있다. 그 빈 자리는 청춘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그 빈 자리에서 청춘은 스스로 모두 말할 수 있다. 넉넉한 삶의 여백 가운데 청춘은 자신의 본래적인 온 모습을 대면하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창조할 기회와 용기를 얻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살아 있음은 자라날 수 있고, 살아 있음의 기쁨이 춤출 무대가 마련될 수 있다. 늦은 밤 어둠을 바라보며 입에 문 담배 연기의 적막한 시간처럼. 청춘이여! 시의 여백 속에서 삶의 여백 속에서. 한순간만이라도 나의 위안을, 나의 용기와 꿈을 되찾아보자! 그리고 시를 써보자.

섬세한 삶의 감각을 찾는 연습 7-② [色 다른 책읽기]

박혜정 (산책자 에디터)

두툼해도 단숨에 읽히는 책이 읽는가 하면, 얄팍해도 읽는 도중 읽기를 멈추어 가며 생각에 잠기게 되는 책이 있다. <무미 예찬>을 만들고 있을 때에는 교정지를 보고 있다가도 문득 눈을 들어 허공을 보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구체적인 생각을 몰아간 것은 아니었다. 교정지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느슨한 행간과 넉넉한 여백, 전체적으로 건조하면서도 색이 적은 담채화처럼 적당한 물기가 있던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유가 내 눈길도 어떤 ‘생각 사이의 여백’으로 향하도록 했던 것이다.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인 <무미 예찬>은 그런 책이었다.

사실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는, 학부 졸업 정도의 교양 수준에다 당시 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초보편집자에게는 제법 어려운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도 <무미 예찬>은 그보다 묵직하고 사회적인 에쎄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를 만든 후에 시작한 책으로 앞의 책들보다는 미학적이고, 지식보다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즉 편집자로서의 나와 독자로서의 나 양쪽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와 주었던 책이다.

‘에쎄essais’ 시리즈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에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양한 에쎄가 존재하지만 누군가에게 에쎄 시리즈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목부터가 ‘에쎄Les Essais’인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예로 들곤 한다. 어느 인류학 연구 논문 못지않은 학술적 성과를 담고 있는 <슬픈 열대>는 “내가 이 일을 결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라는 지극히 내밀한 어조의 수필 문체로 시작된다. 자신의 감정, 지식, 경험들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문체로 서술했기에 담고 있는 내용들이 논문이나 보고서만큼이나 단단하게 쌓아올려지는 지적인 에세이, 그것이 에쎄라고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에세이’라고 하면 인생사나 감상을 주로 표현한 부드럽고 감성적인 글들(또 다른 수필의 분류로 따지자면 ‘미셀러니’ 정도의 글)을 떠올리기 때문에 ‘에쎄’라는 단어도 종종 그런 선상에서 이해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에쎄 시리즈’라고 해서 읽기 편한 수위의 책으로 생각하고 골랐는데 왜 이렇게 학술적인가라는 독자의 불만을 간혹 듣곤 한다. 글의 형식에 대한 개념이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그런 불만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편집자로서 간단히 웃어넘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런 불만을 감안하고 보았을 때, <무미 예찬>은 약간 유화되어있는 한국 독자의 ‘에세이’ 개념에도 제법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참신한 시선을 보여주는 프랑수아 줄리앙을 소개할 때 ‘푸른 눈을 가진 동양학자 중 가장 독보적인 학자’라는 표현을 쓴다. 서양인이 동양에 대한 책을 썼다고 생각하면, 오리엔탈리즘이 가미된 편견이나 열광이 아니면 정말이지 성실하고 딱딱한 학술 연구 외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차츰 버리게 되었다. ‘동양 문화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라는 생각보다는 ‘동양 문화에 속하지 않은 눈으로 보니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들을 본다’ 는 생각이 강해진 것이다. 사실 동양 문화에 속해있다고 해도 속도감 넘치고 자극이 가득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저 의식만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중국 문화의 면면들이 던져준다. 현대인이 너무도 당연시 하는 것, 개성과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진부한 덕’, 즉 ‘중용’을 담백한 삶의 태도라는 형태라고 해석해낸 대목은 중용이라는 개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준다.

불어로는 ‘맛없음,싱거움fadeur’ 으로 번역되는 ‘담淡’의 개념은 불어에서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어 저런 대체어를 썼을 정도로 서양에서는 낯선 개념이었을 테지만, 프랑수아 줄리앙은 그 개념을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미, 담백함의 풍경은 정말로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아주 가까운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급스러우면서도 가장 소박한 모든 풍경 속에 ‘담’이 있다.

나로서는 이 책에 종종 등장하는 ‘물 맛’이니 ‘흰 돌을 삶아 먹는’ 중국 선인들의 이미지에서 담담하고 산뜻한 흰색에 대한 여러 가지 글들이 떠오른다. 일단 박완서가 <개성사람 이야기>에서 쓴 흰색에 대한 글. “어머니는 버선만 보고도 어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개성사람 버선은 옥시설처럼 희고, 서울사람 버선은 푸르뎅뎅하게 희고, 일산·금촌사람 버선은 불그죽죽하게 희다고 했다. 옥시설은 어머니가 완벽한 흰색에 바치는 최고의 찬사인데,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소설가인 강경애도 손빨래를 하며 흰 옷을 더욱 희게 빨아내는 데 크나큰 희열을 느낀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다보면 흰색을 넘어 담백한 심상에 대한 글들도 떠오른다. ‘슴슴한’ 국수를 사랑한 백석의 시,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고 하는 피천득의 <수필>로 생각이 이어진다.

현대의 풍경을 둘러보아도 ‘담’을 느낄 수 있다. 아파트에 질린 현대인들은 흰 문종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문살의 그림자가 가장 큰 인테리어 요소이며 가구로 가득차지 않아 아름다운 한옥의 아름다움에 다시 집중하곤 한다. ‘슈퍼 노멀’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가장 표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이 탁월하다는 것 역시 의식하고 있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가 가장 단순한 스타일과 옅은 화장을 고수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가?

이 책의 원제 Eloge de la fadeur를 거의 그대로 옮긴 <무미 예찬>이 큰 고심 없이 자연스럽게 가제에서 최종 제목으로 결정된 것도 알려 두고 싶다. 문화적인 사안이든 정치적인 사안이든, 시쳇말로 ‘까는’ 행위가 ‘쿨한’ 트렌드가 되어버린 시대에 무언가를 예찬하고 있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제목에 ‘예찬’이라는 단어가 붙은 책이 제법 많다. 미셸 투르니에의 <예찬>부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프란츠 카프카의 <여행자 예찬>에 이르기까지 멋진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 <무미 예찬>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陰?禮讚>인데, 한국판은 <그늘에 대하여(눌와, 2005)>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일본 문화가 곳곳에서 그림자와 그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을 해석한 글이 있는 책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수준 높은 미학을 맛볼 수 있는 ‘동양의 에쎄’ 라 할 만하다.

<무미 예찬>은 중국 문화에 대한 책이지만 담백한 취향과 삶에 관한 포괄적인 책으로 더 다가온다. 싱거움이나 비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이 모든 자극을 단호히 떨쳐버리라거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라는 방햐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가장 감지하기 어려운 맛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에,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우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음식에서 배어나오는 미묘한 맛을 즐기는 사람을 미식가라고 한다. 자극적인 맛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둔하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금방 파악할 수 있는 뚜렷한 자극만 추구하는 둔한 사람을 진정한 삶의 향유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넓게 퍼져 있는 동시에 가장 미세하게만 느낄 수 있는 맛, 가장 까다로우면도 가장 폭넓은 삶의 취향을 찾는 감각을 이 책을 통해 연습해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허공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박혜정 (산책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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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일곱 번째 책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펴냄)으로, 김익균(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안세환(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박혜정(산책자 편집자)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바깥에 대한 사유와 초월하지 않는 담백함 7-① [色 다른 책읽기]

김익균 (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서구적 세계의 바깥으로서 중국

『무미예찬(無味禮讚)』의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이 책의 존재를 모르는 동안에도 나는 이 책을 요청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어떤 면이 독자인 ‘나’를 자극한 걸까?

책을 읽을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책읽기 행위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람 즉 저자와 독자(리뷰어)의 만남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짧으나마 통성명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책의 저자인 프랑수아 줄리앙은 프랑스의 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고 중국학을 전공했다. 나는 남한에서 성장했으며 남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국문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남한의 정체성은, 중국의 영향을 장기지속 해온 동시에 서구화와 식민화의 복잡한 체험으로 교착된 ‘조선’의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어낸 산통의 과정, 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남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로 나는 해방 이후 혹은 한국전쟁 이후의 십여 년간의 서정주 시를 공부하고 있다. 해방 이후에서 사일구 이전까지 서정주의 시가 얻은 국민적인 호응과 부침의 과정을 살펴보면 당대 남한의 ‘세계감’을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시 프랑수아 줄리앙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후에 중국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중국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서양 전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각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옮긴이의 설명을 좀 더 참조해 보면 프랑수아 줄리앙이 속해 있는 서구적 세계의 바깥이란, “언어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서양과 무관하게 형성된 독자적인 세계인바 인도-유럽 언어권의 바깥, 서양 역사 및 문화의 영향권 바깥-따라서 인도나 이슬람 문화는 제외되었다-그리고 연구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 전통을 지닌 세계”였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이 곧 중국이었다는 것이다. 서구가 그동안 행한 중국에 대한 탐구가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중첩된 어떤 것이었다면 프랑수아 줄리앙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덧붙이고 있는 셈이다.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하나의 ‘세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프랑수아 줄리앙이 ‘서구적 세계의 바깥’으로 생각하는 ‘중국’의 특징을 그대로 남한의 그것으로 연상하거나 동양 삼국의 잃어버린(혹은 되찾아야 할) 과거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수아 줄리앙에게 바깥인 것은 ‘우리’에게도 바깥이며, 50년대의 서정주에게도 바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근대적 신분제 하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즉 근대의 노동자 혹은 소비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인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개진한 담(淡)의 원리는 지금-여기에 있는 실체(혹은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 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서구적 세계의 바깥’의 잠재태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단적으로 말해서 이 세계는 중국이나 동양 삼국이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소유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무미(無味)’라고 옮겨진 단어는 중국어의 ‘담(淡)’에 부여된 가치를 괄호친 의미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불어로 ‘fadeur’라고 옮겼고 한글로는 담백하다,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영어로는 ‘blandness’라고 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라고 한다. 담은 “특수한 시각(문체론적 심리적 윤리적 시각 등등)이 아니라 전체적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중국인들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하나의 ‘세계’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세계가 지금 존재하는 실체인가는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경험이 서구적 근대의 세계를 상대화 하는 개연성을 제공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가령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이 상반된 두 가지 현실이며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모방이라는 생각, 천구(天球)들의 음악이든 천사들의 음악이든 간에 음악이 다른 어떤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서구적 세계관은 ‘담(淡)의 가치가 주도하는 세계’ 쪽에서는 낯선 것이 될 것이다. 담(淡)의 세계에는 현실 세계와 그 너머의 바깥이라는 구분이 없다. “섬세함의 정도 차이” 즉 감각이 지각할 수 있는 것과 정신이라는 좀 더 예민한 ‘기관’이 요구되는 것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비가시적인 것들이 서구에서처럼 초월적 세계에 속하지 않고 연속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철학에는 존재론이 없다. 내가 보기에, 고대 중국 사상을 (그리스 사상과 대비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무미 혹은 담(淡)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맛의 성질은 그 특수한 성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퍼져나가는 힘에 있다.”

“무미의 미덕은 우리의 정신을 사물의 더 근본적인 국면과 일치시키는 데 있다. 어떤 맛도 다른 맛보다 특별히 더 우리를 유혹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작용하는 모든 잠재태들 가운데 ‘대등한’ 균형을 유지하며 -그것이 제(齊)이다-존재에 내재하는 논리로 하여금 스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다.” “담(淡)의 기초는 그저 엷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강인함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인바, “담은 감지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초입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그것은 감지할 수 있게끔 드러나는 즉시 그 초월적인 조화로움으로 돌아간다. (…)담은 사물들이 차별화되지 않는 것 속으로 돌아갈 때, 사물들이 그 변별적 특성들을 잃어버리고 차이를 흡수하며 혼돈을 향할 때 비로소 그것들에 대해 말한다. 담은 측량할 수 없는 성질이자, 그래서 필연적으로 덧없으며(…) 일체의 체계적 모색을 피하며, 손을 잡아 붙들 수도 없다.”

이러한 세계의 특징을 프랑수아 줄리앙은 상당히 풍부한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듯이’ 사례들을 살펴볼 수 있다.(동양인 혹은 남한의 독자들이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라는 고자세로 이 책을 읽는다면 프랑수아 줄리앙이 공들여 탐색해 보이는 ‘새로운 세계’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 “예스런 담백함에는 진정한 맛이 들어있다. 대제사의 탕에 간을 맞출 필요가 어디 있으리요.”라는 구절을 읽으며 예스러운 취향에 대한 호불호를 거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탕의 담백한 맛이 진정한 맛으로 인정되는 세계의 가치관과 철학의 체계를 이해하고 지금-여기 남한은 그 체계 바깥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담백한 맛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주장은 강하게 논증되기보다는 풍부한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지고 있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례들에서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일 것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지적했듯 “음미(吟味)”라는 말이 갖는 읽기와 먹기 사이의 유사성은 “(서구의 지적 시각에서처럼) 의미를 해독하기보다 그에게 외적으로 주어지는 물질성(즉 텍스트를 이루는 말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바깥인 중국은 바깥이 없는 세계다?

『무미예찬(無味禮讚)』(혹은 프랑수아 줄리앙)의 출발점은 고대 중국이 프랑수아 줄리앙이 속한 세계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의 판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판명하다고 전제한 것들이 과연 그러한지 묻는 것은 논외로 한다면, 역으로 ‘우리’에게 그것이 판명한가를 묻는 일이 요청된다. 서구는 우리의 바깥인가? 혹은 고대 중국은 우리의 바깥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프랑수아 줄리앙이 ‘발견한’ 중국은 바깥이 없는 세계라는 점일 것이다. 서구의 바깥에 대한 프랑수아 줄리앙의 탐구는 바깥이 없는 세계로서의 중국을 산출한다. 그렇다면 담(淡)의 체계인 중국적 사유에서 바깥은 사유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프랑수아 줄리앙이 발견한 세계는 서구적 방법으로 만든 서구의 대립항이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밀고나가는 것은 전공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도록 하고 나는 남한의 건국 과정에서 나온 ‘우리’의 탐색이 『무미예찬(無味禮讚)』과 어떻게 서로 비출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싶다. 그 시기에 서정주는 『귀촉도』, 『서정주시선』, 『신라초』를 내놓은바 ‘국민시인’ 혹은 ‘시의 정부’, ‘부족 방언의 족장’ 등으로 호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서정주가 모색한 이 시세계는 현실의 긴장, 갈등, 고통이 없는 세계로 비판받아 왔다. 비판자들은 시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를 요구했는데 그것은 고통의 너머에 놓인, 발견해야 할 이데아로서의 세계에 대한 전제와 분리되지 않았다. ‘저기’가 없다면 ‘여기’의 고통은 선명한 이미지를 갖지 못하는 것이 서구적 근대 미학이지 않은가.

이에 비해 서정주가 해방 이후 ‘신라의 내부에 대한 한 모색’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근대의 미적 세계 바깥에 대한 모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주는- ‘우리’가 그렇듯이- 어떤 혼동 속에서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주가 간혹 역사적 실체라는 허상에 얽매였다면 그것은 ‘판명한 바깥’에 대한 프랑수아 줄리앙의 자의식과 맺는 모종의 차이를 생산하지 않느냐고 나는 묻고 싶다. 물론 그 차이를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배운 논리를 적용해보면 이 차이는 서구적인 안과 밖의 차이가 아닌 중국적인 ‘담’의 중심과 가장자리의 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서정주(와 청록파)로 대변되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대한민국 건국의 중추가 되었던 세대가 탐구한 세계이다. 그것은 일본에 의해 형성된 식민지 근대화를 30년 안팎의 한 생애를 통해 체현한 1910년대 생인 세대가 그 세계의 바깥을 꿈꿨던 경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주는 건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구적 가치에 대한 환멸이 심화되고 서구의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탐색하려고 노력했다. 간혹 고대사를 실체화하는 오류에도 빠져 가면서, 서정주는 서구적 가치와 유불선의 가치 그리고 더 옛날의 샤머니즘(서정주의 용어로는 영통과 혼교)을,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를 통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시로 체현하려 했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학자로서 그리고 판명한 바깥에 선 자의 강점을 가지고 그려낸 담(淡)의 세계는 50년대 극동의 한 시인이 그려낸 ‘신라의 내부’와 서로 비추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담의 세계 바깥에서 담의 세계를 그려보는 프랑수아 줄리앙과 이미 담의 세계 바깥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순간적으로 망각하며 시를 통해 담의 세계로 들어가 보는 서정주의 모색은 담의 세계를 재구하기 위해 마주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담(淡)의 체계에서는 현실의 바깥으로 나가는 초월이 없다’고 요약해 본다. 내가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는 남한의 50년대에 서정주 (세대)와 신세대의 시적 정신을 초월(의 고통)이 없는 세계의 모색과 초월을 단행하려는 고통의 실천 사이에 두는 내 문제의식에 새로운 자극을 줬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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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일곱 번째 책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펴냄)으로, 김익균(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안세환(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박혜정(산책자 편집자)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제2차 인문학 페스티벌”(8. 20-21), 대천 해수욕장에서 책읽기 잔치 열려

작년 2010년에 처음으로 열린 <인문학 페스티벌>에 이어 올 해에도 보령(대천)에서 보령 책익는 마을(촌장 박종택)의 주최 주관으로 <제2차 인문학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2010년에는, 박인희(안양대 강의교수)의 김명진(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 이진남(숙명여대 교수), 류호철(안양대 강의교수), 이정모(과학저술가),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종필(고등과학연구원), 편상범(고려대 강사), 전중환(경희대 교수), 이재현(동덕여대 교수), 이명현(천문연구원 연구원), 강양구(프레시안 기자)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는 물론 과학, 종교,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의가 한창 휴가철인 8월 13-14일 이틀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당시 인문학 페스티벌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시민과 학생이 세미나룸을 가득 채웠고, 아침부터 하루종일 계속되는 강의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의 열기는 내내 뜨거웠다.

처음에는 몇 명의 독서모임으로 출발한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팀으로 이루어져 매월 저자를 초청하여 모두가 읽고 강의와 토론을 하는 <저자초청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2010년부터는 집중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강의와 토론의 축제로서 <인문학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올 해에는 2010년에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페스티벌의 성격을 약간 변화시켜, 저자토론회와 접목시켜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참여하기로 정해진 강사진은, 김주일(정암학당 연구원)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를 비롯, 최시현(소설가), 장시복(경제학자), 이종수(문학저술가), 김태권(만화가) 등이 자신의 저술을 중심으로 강의하고 토론하는 축제가 마련하고, 8월 20-21일 이틀에 걸쳐 대천 한화콘도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아래의 글은 ‘보령 책익는 마을’의 황선만(보령 책익는 마을 전 촌장)이 <제1차 인문학 페스티벌>을 마친 후에 <보령신문>에 기고한 글 “2010보령 인문학페스티벌을 마치고”을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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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뻘 되는 친척분은 내게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직장은 잘 다니고 있는지, 사는 집은 어떤 곳인지, 아이들은 공부를 잘 하는지, 돈 벌이는 괜찮은지 등등 친척 어른으로서 궁금한 점이 많았는가 보다. 그런데 헤어지면서 하시는 말씀이 날 잠시 머뭇거리게 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잘 살아야 되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야 돼! 알뜰하게 돈 잘 벌게.”

우리네 생활 속에서 의례적이고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고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공과 돈이 등치관계라는 주장은 교과서에만 등장하지 않을 뿐 우리네 삶의 공간에는 도그마와 같은 명제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문화행사도 돈벌이가 되어야 하고, 국회의원도 돈을 벌 줄 알아야만 한다. 청소년들의 공부의 목적은 명문대를 가는 것이고, 그것도 고액 연봉의 직장으로 취업 잘되는 학과를 가는 것이다.

인문학 페스티벌이 만들어진 의도 속에는 그런 고민이 들어있다. 우리네 장롱 속에 숨어버린 것 같은 ‘가치’라는 단어를 꺼내서 펼쳐들고 다양한 무늬의 ‘성공’의 길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몇몇 학자와 저자를 모시고 책익는마을의 조촐한 토론회를 생각했는데 횡재수가 온 것이다. 참여하겠다는 분이 12명이나 기별이 온 것 아닌가. 그동안 저자초청 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10여 차례 진행해온 우리들은 별 이의없이 ‘보령시민들과 함께하는 만남의 장’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뿔사! 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12명의 강의를 넉넉하게 배치할 수가 없었다. 몇 분은 오시지 말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기간을 하루 이틀 더 늘릴 수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1시간 강의 10분 휴식에 12시간 연강이라는 수험생 시간표가 나오고 말았다.

게다가 제목을 붙이는 것 또한 고민거리였다. 도대체가 한 단어로 표현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겸연쩍은 일이지만 12강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주제를 포괄하는 단어를 생각했고 그 결과물이 인문학 페스티벌이었다. 책익는 마을의 저자초청토론회가 ‘인문학’ 중심이었고 우리들의 월별 선정도서 또한 그러하기에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구미를 확, 땡겨왔다. 그리고 인문학페스티벌이라는 제목만 읽어보고 찾아올 위인이 어디있겠는가. 이야기 주제와 강사프로필이 있으니 사전에 생각해볼 여유는 충분할 것이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에게 사전에 자세히 안내하는 차원에서 강사의 소속, 저서, 강의주제, 자세한 시간 안내까지 포스터, 전단지 등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듣고 싶은 강의만 들어도 상관없으니 주제와 강의시간을 살펴서 원하는 강의시간별로 참석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넣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을 맞춰서 원하는 강의에 참여했는데, 12강을 계속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떤 강의시간에는 넓은 세미나실에 보조의자까지 채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에 일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귀한 시간들을 아낌없이 배려하는 것을 볼 때 시민들의 지적 욕구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참여자는 보령시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인천, 수원, 부여에서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고, 익산과 천안에서도 다녀갔다. 또 어떤 사람은 보령시 홈페이지에 난 홍보를 보고 대구에서 올라와 1박2일 동안 꼬박 강의실을 지켰다.

강사들도 행사의 의도에 공감해서인지 자신의 강의시간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청중으로 앉아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참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약간은 우려했던 과학 관련된 강사들의 강의내용도 행사의 제목을 의식해서인지 순수자연과학에 치우치지는 않았다. 솔직히 이날의 인문학페스티벌이 전공학자들의 세미나도 아니고 이른바 대중강연 아닌가. 아무리 수준을 맞춘다하여도 주제에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부족할 터이고, 어떤 청중에게는 넘칠 것 아닌가. 배정된 시간이라도 넉넉했다면 좀 나았겠지만 강의시간표를 받아든 누구라도 예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강사들이 자신의 강의 앞뒤에도 자리를 지켜주어서 관심있는 사람들과의 개별적 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흐믓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책익는마을의 저자초청 토론회처럼 선정도서를 읽은 사람에 한해 참가하고 30분 저자의 강의에 90분 질의응답으로 이어지는 토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런식으로 그렇게 많은 강사들을 만날려면 우리들 일상을 참으로 많이 할애해야 했을 것이다.

1박2일 동안 이어진 릴레이 강의를 듣고 다소 피곤해진 몸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연세 지긋한 한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유익한 시간들이었어. 우리가 젊어지는 느낌이었고 행복했어.”

도대체 내가 왜 이틀 동안 아니, 준비해온 한 달 동안 생업도 소홀히 하면서 왜 그렇게 달뜬 나날을 보냈을까. 책익는 마을 회원들은 또 무슨 이득을 보자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나누고 후원금까지 내면서 달려왔을까. 직장에서 휴가를 내면서까지 참여했다는 낯선 청중들은 또 어떤 열정이 있기에 그런 용기를 내었을까. 그 자리는 흔히 만나는 ‘금융자산관리법’ 강의도, 돈 많이 번 유명인사의 ‘인생 성공법’ 강의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진중하고 고리타분해서 우리가 학창시절에 얼핏 스쳐갔을 뿐 대체로 거들떠보지 않는 어려운 주제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 열정을 지적인 욕구,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고미숙은 『호모쿵푸스』에서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에게 ‘책읽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해야하는 시대이기에,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 끝!’이라고 하는 세상이기에 나는 행복해지는 조건으로 인문학적 독서를 소망한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의 성적을 다 늙어서까지 외고 다니면서 자신의 두뇌가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들을 흔히 만난다. 또 학교 때 성적이 안 좋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책과는 인연이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만나곤 한다. 모두가 잘못된 성장기가 만들어준 허상이다. 한 번 책을 함께 읽고 터놓고 만나보라. 나이도 학력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도 전제하지 말고 책을 놓고 함께 토론해보라. 권위와 잘난체를 소거하고 함께하는 공부가 얼마나 따스한 인간애를 샘솟게 하고 행복한 기운이 넘쳐나게 하는지를 경험해보시라. 우리나라 근대적 사유의 물꼬를 튼 연암 박지원은 13살 연하인 박제가와 평생 벗으로 함께했다. 책을 읽는 공부는 누구나가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다양한 무늬를 한 역동적 행복의 길을 만날 수 있다.

2010보령 인문학 페스티벌은 보령 시민들의 그런 공부를 향한 열정을 확인하는 계기에 다름 아니었다. 평생교육이라해서 실용적 기능을 배우는 것 만이 어찌 평생교육이겠는가. 아니, 우리는 대학에서까지 기업에서 요구하는 기능 중심의 스펙 쌓기 공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성인사회에 독서가 필요하다. 사회인으로 시작하는 그 시점이야말로 비로소 진짜 공부를 해야하는 출발점이다. 마지막 강의를 듣고 일어서는 그 순간에 내 마음속에는 읽고 싶은 책이 여러 권 떠올랐다. 또 이틀 동안 특별한 기능을 익히지도 않았고 대단한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지만 뿌듯한 기운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보령신문 2010년 8월 24일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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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e시대와 철학>에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를 연재하는 보령 책익는 마을의 인문학 축전이 인문학과 삶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시민 축전으로 자리매김되기를 바라며, 이에 소식을 알립니다.

일시 및 장소 : 2011년 8월 20-21일 대천 한화콘도 세미나실

참고 문의 및 연락처 : 017-432-9558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thinders

주술은 나의 일상에 숨어있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박종택 (보령 책익는 마을 촌장)

 

방사능비가 내리는 아침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그건 희곡의 제목이고 나는 날씨에 따라 변하는 존재로 아침에 눈을 뜨기 전에 비가 오는지의 여부 정도는 몸으로 느낀다. 그것은 때로는 슈퍼컴퓨터와 인공위성에 의지한 일기예보 보다 정확하다. 늙어서 그렇다고?

개구리가 많았던 시절, 개구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울고, 제비가 낮게 날면 농부들은 논의 물고를 터놓았고, 어머니는 아침에 종달새가 높이 나는 것을 보고는 2km 거리에 있는 학교로 향하는 나의 등하교 길을 걱정하지 않으셨다. 기상과학을 공부하지 못한 나의 어머니와 농부들의 예측이 미신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개구리의 피부가 습도에 민감하고 대기의 기압에 따라 새와 헬리콥터의 비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비를 느끼며 일어나서 일본 원전사고와 오늘 강우의 연관성에 관하여 인터넷을 검색한다. 결론은 ‘인체에 해롭지 않으니 비 맞지 마십시오.’라는 전문가의 유능한 견해다. 어느 신문사를 막론하고 본질 보다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기사화 할 뿐이다. 넝마를 시간과 돈을 주고 구매하는 현실이다. 물론 나는 넝마를 돈 주고 사지는 않지만 가끔은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아이가 응아가 급하다고 할 때마다, 그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며 신문을 활짝 편다. 물론 이쯤에서 오감을 넘어 예지 능력과 예감이 발달한 분이라면 식사직전에는 이런 ‘응아’ 이야기가 나오는 글은 절대 읽지 않으리라 믿는다. 각설하고 화장실에 앉아 배설의 쾌락을 만끽하며 시원한 결정을 내린다. 강우에 의한 방사능 피폭의 유무에 관계없이 하루 종일 불안해할 수도 있는 아이 엄마의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아이의 유치원 등원을 거부한다. 오늘 하루 더불어 놀아줄 아이들과 집단놀이가 사라지게 됨을 예감한 아이가 아빠에 집착하며 출근을 저지한다. 나는 자본주의와 느림의 미학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아이의 미래를 위하여 전쟁놀이를 선택한다. 점보블럭으로 성을 쌓고 나는 도깨비 가면을 쓰고 아이는 파워레인저 가면을 쓴 뒤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던 두 시간 동안의 전쟁에서 아이를 두 번 울리고 밥상 앞에서 평화협정을 제안한다. 경제 논리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나의 행동은 혀를 찰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오늘 아침의 두 시간은 훗날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며 회고할 때 감미로운 행복으로 기억되는 좋은 시간이리라 믿는다.

 

점심시간에 본 미술작품에 대한 소고

친구와 함께 방사능 낙진이 우려되는 빗속을 뚫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살림집을 개조한 식당의 방을 보니 사방에 집주인이 취미로 그렸다는 그림이 가득하다.

함께 한 친구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교단에 섰다가 미술입시학원을 운영했던 관계로 이야기 소재가 궁색하지 않다.

“이 분은 대범한 사람은 아닐걸. 여백을 두려하는 것을 보니 소심하고 꼼꼼하되 사람은 좋을 것 같아.” 라고 말을 건넨다.

“학식이 많지는 않으나 시골 선비 같은 사람일걸. 정통 미술을 가르치려면 힘 좀 들어야 할 걸.” 하고 말을 받는다.

잠시 후 음식을 내어 온 주인장의 얼굴을 살펴보니 아까 둘이서 나누었던 대화와 다를 바 없이 ‘굽히지 않되 불친절 하지는 않은 소박한 분’이시다. 점심을 맛있게 들고 나서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료증과 명분 없는 봉황무늬 새겨진 감사패 무리를 살펴보고 밖으로 나온다.

친구가 끽연을 즐기는 사이 어제 마신 주님의 은총으로 발길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을 살펴보니 생각해서 꾸민 물건들이 치워 버려야 시원 할 상황이다. 이 식당에 걸린 여백 없는 그림들과 주인에게서 느낀 인상, 오직 한 기관에서 발행한 수많은 수료증, 화장실의 불필요한 물건들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점심시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생물학적 시각으로 보이는 그 자체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차를 몰고 식당을 벗어나면서 오만방자하게 오늘날의 미술을 들었다 놓는다. 기능은 있지만 예능은 없고, 학력은 있으되 학식은 없고, 수업은 있으되 교육은 없는 자들이 미술교육의 전방에 서서 유해한 방사능을 살포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현실의 출처는 미대 입시제도에서 그 근본을 찾고 싶다. 홍익대 미대가 수년전부터 입시 제도를 변경하기는 했지만 미대 입시의 실기고사는 석고 데생이 중심이다.

오늘날 석고 데생으로 미대 입시를 치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밖에 없다. 미대 지망생들은 고등하교 내내 석고상만 바라보다 대입 실기고사를 치르게 되고 대학은 석고 데생의 숙련공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양성된 기능공이 강단에 서게 되면 ‘美術’의 개념부터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술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뛰어난 상상력과 발상의 참신함이지 기능이 아니다. 기능은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전시장에 서서 <무제>라는 제목 앞에서면 경멸과 분노를 느낀다. 그 작품을 제작한 본인도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도를 품고 진행되었는지를 모른다면 핵물리학자가 방사능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정신병자가 변기를 묶어 끌고 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만든 사람도 무엇인지 모르는 <무제>에서 관람자가 뭔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은 정신적 피폐를 불러오는 악성 방사능이다. 그림 자체에 제작 의도와 의미, 그리고 상징이 결여 되어 있다면 미술작품이 벽면의 벽지만도, 화장실 벽의 타일만한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왜 대개의 사람이 미술에 관해서라면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 젓게 만드는가?

실제로 미술이 우리의 일상적 삶의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미술만큼 눈에 보이도록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예술이 없는 데도 미술은 뜻 모를 개념들과 추상적 관념만이 난무할 뿐이다. 각종 전시회도 그들만의 잔치로서 유파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축하를 받고 그들의 찬사를 듣는 행사일 뿐이다. 일반인들에게 곤혹스런 그림을 걸어 놓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은 잔칫집에 오기 전에 먹을 것을 싸서 오든가 굶으라는 논리다.

 

내 주변 그림과의 주술적 소통

점심식사로 목구멍에 풀칠을 한 후, 나의 직업인 풀칠을 위하여 작업장으로 돌아온다. 나는 현재 표구(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장황, 장배, 표장, 배첩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어(死語)에 가깝다.)와 액자(이것도 일본말이다.) 제작으로 인해 진정한 풀칠을 하며 산다. 고객이 그림 선택의 조언을 구하면(어차피 듣지 않을 것이면서), 자신의 눈을 믿고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선택하기를 권한다. 라이벌인 부자 친구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은 잊으라고 권한다. 그 친구가 돈이 많은 것이지 안목이 높은 것은 아니니까.

 

그럼 전시장에서 그림을 감상 할 때 어떻게 보아야 잘 보는 것인가?

아내를 고를 때 옆집 남자의 눈으로 고르고, 남편을 고를 때 위층 여자의 시선으로 골랐는가? 마음으로 보라, 자기중심으로 보라, 내 영혼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라. 좋은 것은 좋고,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모든 작품에 동일한 시간을 배려하지 말라. 모든 친구와 똑같이 친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시간을 할애하며 살고 있는가? 마음이 이끄는 작품에게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자. 이성이 마음에 들 때 혼자서 끙끙 앓으며 바라만 보았는가? 친구나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가? 전시장에는 큐레이터와 작가라는 친구가 그대를 돕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다.

 

그림 구매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옷을 구매할 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게 된다. 그 옷을 입으면 단아해 보이기 때문에, 또는 듬직해 보이기 때문에, 섹시해 보이기 때문에, 경쾌해 보이기 때문에, 세련되어 보이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선택의 까닭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옷이란 편하고 따뜻하기만 하면 돼’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이 옷 색상은 더워 보여, 이 옷 스타일은 추워 보여’ 정도는 따져보기 마련이다.

그림 구매도 말 그대로 구매다.

우리는 과시용으로 더운 나라에 살면서 밍크코트를 구매하고 3,000켤레의 구두를 사서 모았던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즐기고 느끼기 위하여 그림을 구매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이 가장 현명한 감식안이다.

 

야심한 밤, 칼을 빼어든다

방사능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밤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집어 든다. 수일 전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음)을 사훈으로 정했는데, 서예작품 보다는 독특하게 서각작품으로 걸고 싶다는 주문이 있었다. 그 주문에 따라 표피적인 감각과 알량한 수준의 손재주로 나무를 판다. 내 얄팍한 생각으로는 나무속에 숨어 있는 글을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서각작품인데, 나의 재주는 글씨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파내는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나의 감각과 감성이 부족하니 마부작침의 자세로라도 각을 해야 할 텐데 시장논리가 작용하여 도끼를 가는 것이 아니라 도끼날만 갈고 만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작품의 상업성, 작품의 환금성이라는 단어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보고 작가가 아닌 잡가(雜家)라 부른다. 고객에게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고 가액(價額)과 임금을 받는 상업성이 뚜렷한 잡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 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어차피 요즘 세상은 작품의 질과는 별 상관없이 풍부하고 번뜩이는 상상력과 감각적 문장을 구사하고, 세련되고 현란한 말재주를 소유한 사람이 작가여.”

“예술은 하나의 형식이나 내용으로 정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예술의 불확실성이 또 다른 예술적 행위를 이끄는 원동력이야.” 하며 내 귀도 못 알아들을 소리를 내 입으로 중얼거린다.

각이 끝나고 아크릴 물감을 짜기 시작한다. 원래 의도는 금분을 사용할 예정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시장성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몰아낼 시간이다. 간단히 날려 칠하고 인테리어 수준으로 마무리 한다. 이 때 쯤 목소리를 높여 중얼거려야 한다.

“의뢰하신 분께서 원청회사가 부도나는 통에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시고 ‘이번이 마지막 재기의 기회일 것 같다’고 했으니 기를 돋우는 주술적 의미에서 강렬한 빨강색을 써 봤어.”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 한다. 그런데 왜 이 순간 ‘예술은 사기다.’ 라는 백남준씨의 말이 떠오르는 거지? 그건 그렇고 어제 술 마신 것이 24시간도 넘었는데 왜 서각 하는 내내 방귀가 계속 나오는 거야? 일본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의 영향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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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김융희 지음, <예술, 주술적 세계와의 소통>(책세상 펴냄>에 관한 박종택 책익는 마을 촌장의 글입니다.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광대, 안병대 [청춘의 서재]

연효숙 (아주대 연구교수)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의 인연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안병대 씨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안병대 씨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 안병대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원형극장의 회전 무대 관람하듯 입체적인 내용 전개,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는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죽이고 사랑하리라’ 핏빛 사랑의 파국, 천성만 남은 ‘왕’과 ‘광대’는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양의 ‘양심’과 이리의 ‘욕망’을 지닌 나약한 인간,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담한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집트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

나에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갖는 의미란? 6-① [色 다른 책읽기]

김택중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연구강사)

 

어린 시절의 화두 ‘진화론’

명색이 서평이니만큼 서평 대상 도서에 대한 소개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보편타당한 전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진화’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내 어린(어리석은) 시절, 화두나 다름없었던 것이 바로 이 ‘진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득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글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려 하는 점,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미리 양해 구하고자 한다.

나름 철이 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렸던 고등학생 시절, 그 때까지 세상살이에 무슨 심각한 불만이 없던 나에게도 마침내 ‘의문’이라는 것이 하나 생겼더랬다. 딴에는 꽤 진지한 의문이었는데, 생물 교과서를 읽다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 실려 있음을 포착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즉, 19세기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생물은 오직 생물을 통해서만 이어진다는 생물속생설이 확립된 뒤로 자연발생설은 폐기되었다는 설명에 이어 그 유명한 ‘밀러-유레이 실험’이 소개되더니 생명의 기원은 결국 자연발생적이라는 자가당착적인 내용이 등장했던 것이다. 앞에서는 자연발생설을 실컷 오류라고 선언해 놓고 바로 뒤에서는 다시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니?!!

물론 지금은 이 앞뒤 맞지 않는 모순된 설명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도대체 이 모순을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혜성처럼 내 앞에 출현한 것이 소위 ‘창조과학’이었다. 집안이 3대를 이어 내려온 통짜배기 기독교도(신교도) 집안이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자연히 습득한 기독교 문화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간 알게 모르게 신앙의 갈등을 겪었던 나로서는 과학적 증거가 기독교 신앙과 성경 기록을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이 제2의 복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요컨대 창조과학에 따르면 생명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된 ‘밀러-유레이 실험’은 거짓과학일 뿐이므로 그냥 무시해버리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들도 책에서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듯이 신앙은 신앙 차원에서, 과학은 과학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19세기 말 개항 이후 수입된 기독교의 주류가 하필 ‘성경 무오류성’을 끔찍이도 챙기는 미국 보수교단들의 기독교였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이들 교단은 성경의 기록이 모두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므로 내용상에서도 오류가 전혀 없다는 이른바 ‘성경 문자주의’를 개인 신앙의 진실성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으로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경의 문자적 기록에 집착했다. 그러므로 신이 세상을 창조했음을 엄숙한 어조로 선포하는 성경의 첫 장에서부터 벌써 이들은 굳이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과학적 사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듯이 개항 이후 20세기에 접어든 뒤로도 한국에서 진화론 자체가 본격적인 학문적ㆍ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로 진화론은 우파적인 진보주의의 자장 안에서 장려되기까지 했으며, 서양 문명의 압도적인 우세 가운데 기독교도들에게조차 자명한 과학적 사실로서 불가피하게 수용되었다. 반면 성경 무오류성 신학에 기초한 기독교 보수교단들은 20세기 초 미국의 성경 문자주의자들, 즉 근본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분리주의 노선을 선택하여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개인 신앙을 추구하는 쪽으로 후퇴해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역전되어 한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도들이 공세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즈음이었다.

 

창조과학에서 과학으로

1980년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일단의 한국 기독교도 과학자들이 미국 창조과학계의 대부 격인 헨리 모리스 등의 영향 아래 창조과학의 세례를 듬뿍 받고 귀국한 시기였다. 이들에 의해 성경 문자주의는 과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의도치 않은 재부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미국의 창조과학계를 주도한 이들 상당수의 신학적 성향이 문자주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이─물론 선량한 의도에서 비롯되었겠지만─전국의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간증 형식을 빌려 정력적으로 창조과학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기독교도 대중은 이들의 공세적인 ‘과학적 간증’을 경청하면서 크게 안심하였고, 안심하면 할수록 거꾸로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폭은 넓어져만 갔다. 이것이야말로 창조과학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이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의 과학계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간 자명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던 생물 진화를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본의 아니게 창조과학측이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진화론은 창조과학자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공식 석상에서 단 한 차례도 부정되었던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진화론은 한국 사회에서 창조과학이라는 종교적 프리즘을 통해 비로소 재조명되었고, 또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그만큼 한국 학계의 진화론에 대한 이해 수준이 피상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1988년 국내의 한 TV 패널토론에 출연하여 진화론측 토론자들에게 맹공을 퍼붓고 이들을 수세로 몰았던 창조과학자들의 전투적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럼에도 어쨌든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유사과학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로써도 쉽게 반증이 된다. 즉, 창조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도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도여야만 창조과학을 수용할 여지가 생긴다.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이 자청해서 창조과학을 수용하거나 나아가 창조과학자가 된 사례는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다.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진화학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비기독교도나 무신론자의 입장을 취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전혀 없다. 성경 문자주의를 신봉하지만 않는다면 설사 기독교도라 할지라도 무리 없이 진화학자나 진화론자가 된 사례를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생물학자 전방욱이 바로 그러한 한 예이다.

창조과학측이 공격했고 무디어진 검이나마 지금도 여전히 휘두르며 공격하고 있는 진화론은 기실 알고 보면 허버트 스펜서류의 우파적 논리, 즉 사회진화론으로 각색된 일종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 찰스 다윈이 구상하고 제시했던 진화론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그러나 창조과학측은 현재도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사회적 해악의 진원지로 진화론을 지목하면서 찰스 다윈과 진화론을 분별없이 비난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창조과학이 이처럼 사회 전면에 등장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내가 알기로는 미국과 한국 밖에 없다. 미국도 그러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던 까닭은 창조과학이 대체로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회의 세에 편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에 걸쳐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에는 노골적인 근본주의 경향 대신 미국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복음주의라는 한층 세련되고 완곡해진 형태의 신학 사조가 등장하였다. 미국에서 이 복음주의는 레이건 공화당 정부의 집권과 맞물리면서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미국 사회의 기류를 타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는 복음주의가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사회를 기독교의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형태로 발화되었다. 다소 느슨한 방식으로 전개된 이 비공식적이고 범교파적이었던 개혁 운동의 지도자들은 그간 사회, 즉 세속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교회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사회를 수용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였다. 나아가 이들은 학문의 각 분야 또한 기독교의 시선으로 접근해 들어가 재해석하고자 했는데, 이 때 신앙의 과학적 정당성이라는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 우연히도 창조과학이었다.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상당수가 국내 창조과학의 출발점인 ‘한국창조과학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계되어 있었던 데에 기인한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내부적으로 진화론 대신 창조과학을 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도들 상당수가 결과적으로 자연과학적 상식에 무지한 무리가 되어 갔다면, 그 사이 한국의 진화학계는 서구 학계의 논의들을 흡수하면서 차분히 내실을 다져 나갈 수 있었다. 이 책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는 사실상 그러한 내실화의 한 열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진화 담론을 주도해 왔던 서구의 학자들이 아닌 한국의 각 분야 학자들이 찰스 다윈과 진화론을 소화해낸 상태에서, 그간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진화론자들의 논리를 지나칠 정도로 편식해 온 한국의 독자 대중에게 ‘변화(다양성)’와 ‘우연(무목적성)’을 핵심으로 한 진화론의 과학적ㆍ사상적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라면 미덕일 것이다. 다만 대담 형식의 책이므로 진화론이나 주변 학문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하기엔 다소 미흡하다는 태생적 약점을 안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

나는 애초 창조론에 대한 변증을 목적으로 진화론에 다가선 위인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의 굴레를 벗어난 지금, 창조론은 아스라한 과거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사실 성경에 근거한 부동의 진리를 앞세워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자연의 일부 메커니즘을 초자연적 존재, 곧 신에 의탁하여 그때그때 해소하려는 입장이 과연 과학의 영역에 속할 수 있는지 나로선 의문이다. 그러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수사학적 차원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와 그닥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전지전능한 성경의 창조주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비유하는 나의 이러한 발언이 창조과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특정 종교의 경전 내용을 전제로 한 과학’이 더 괴이하고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이는 ‘창조과학’이 ‘지적 설계’로 옷을 바꿔 입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들도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적 설명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계속 변한다. 변하지 않고 정체돼 있으면 그건 이미 과학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정설에 기초하여 계속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과학 활동이 아니라 포교 활동에 해당한다. 창조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진화론은 변해 왔고, 지금도 논쟁을 거듭하면서 계속 변하고 있다. 이렇듯 진화의 메커니즘을 풀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 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과학의 ‘자연주의’적 접근 방식은 지극히 정당하다.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동양철학자 김시천이 적절히 언급했듯이 자연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으로 보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자연주의 말이다.

끝으로, 주제넘은 짓 같지만 의학과 생물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이든 창조의 과학화든 그 해명에 몰두하고 있는 분들께 바라는 것 한 가지 조심스레 언급하고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내 경험상 진화론자든 창조론자든 생명 현상을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분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개인적인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특히 공학 분야를 전공하신 분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진화론의 입장에 선 분들은 부지불식간 유물론에 기초하여 사람의 몸을 기계로, 창조론의 입장에 선 분들은 부지불식간 영육 이원론에 기초하여 사람의 몸을 썩어 없어질 것으로…. 그러나 내가 보기에 생명 현상이란 그렇게 쉽게 단정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생명 현상에 경이를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지는 놀라운 생명력과 인내력 때문이다. 자신의 탐구 대상에 대한 존중은 학자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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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섯 번째 책은, 최종덕 교수가 역사학자 임지현, 생물학자 전방욱, 의철학자 강신익, 동양철학자 김시천과 대담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으로 김택중(인제대 의대 연구강사), 강경표(중앙대철학과 대학원 박사수료), 백준수(인천석남초등학교 교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진화론, ‘좌우’의 두 날개로 날다 6-② [色 다른 책읽기]

강경표 (중앙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진화론에도 색깔이 있고 좌우가 있다!

과학에도 색깔이 있다. 정치판에서나 등장하는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가 과학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아니면 과학계도 좌파, 우파를 따진다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색깔이 없을 수는 없다. 과학이 항상 중립적이라면 그야말로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못하다. 특히 진화론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거의 독학으로 진화생물학을 공부해 왔다. 철학을 전공하고 있기에 대학원에서 진화생물학 공부와 관련된 도움을 받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책 읽기부터 시작했다. 국내?외 여러 서적들을 읽으며 내가 알게 된 사실은 국내의 진화생물학논의가 상당히 우(右) 편향적이라는 점이다. 한쪽으로 쏠린 저울의 균형을 위해서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 진화생물학 논의도 있어야만 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야 말로 이 사회가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라는 책에 ‘진보적 혹은 좌파적 진화론 인문서(人文書)’ 라는 별칭으로 불러보고자 한다. 물론 이런 식의 별칭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진화생물학에는 좌우라는 두 가지 입장이 분명 존재한다. 특히 한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입장 차이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어쩌면 진화생물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많지 않은 국내 상황에서 정치적 논의가 포함된 진화생물학을 구분하는 일은 지금까지는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중의 관심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진화생물학 관련 서적들의 인기 속에 짭짤한 수익과 명성을 즐거워하며 진화생물학이 상당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화생물학의 좌우 논쟁은 70년대 E. O. 윌슨의 <사회생물학>이라는 책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책에서 생물학은 유전학이나 분자생물학 같은 생물학에서 분화되어 발전한 학문 영역을 아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는 사회과학도 생물학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개체란 유전자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한편 그 당시 미국에는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의 영향으로 생물학계에도 이념적으로 좌파를 선언하는 학자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R. 레빈스, R. 르원틴, S. J. 굴드가 대표적인데 레빈스와 르원틴은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기존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고, 다윈의 진화론과도 모순된다고 비판하면서 ‘변증법적 생물학’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학자인 굴드는 생물학계의 ‘칼 세이건’이라고도 불리는데, 대중적 글쓰기에 능했던 그는 여러 종의 대중과학서를 통해 사회생물학이 지닌 정치적 위험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진화생물학을 서구로부터 수입하고 연구하면서도 그것이 가진 정치적 위험성을 알리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는 못했다. ‘제 얼굴에 침 뱉기’라도 되는 듯 흉이 될 만한 것들을 숨기고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치장을 그만두고 반성의 첫걸음으로 좌우의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때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의 좌파 진화생물학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작은 논쟁의 불씨를 당기다

내가 보기에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은 이러한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난 국내의 첫 저술이다. 물론 지금까지 색깔 있는 번역서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국내 학자가 펴낸 책으로서는 최초라고 본다. 5인의 특색 있는 학자들이 3년의 세월을 보내며 완성한 이 책은 분명 진화생물학 좌파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최종덕, 임지현, 전방욱, 강신익, 김시천이 대담한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에 대한 첫 반응도 역시 이러한 색깔이 주목되어 나왔다. 2010년 8월 23일 출간 직후 나온 장대익 교수의 비판적 서평이 그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진화론 제자백가… 다윈의 선택은?”(프레시안 2010. 8. 27)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좌파 진화생물학 진영에 대한 포문을 연다. 이 글에서 장대익 교수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라는 꼬리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진화론 논쟁이 이념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봐 와서 그런지 이젠 좀 그런 비판에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요”라는 말로 이 책이 가진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고 한다.

물론 장대익 교수의 비판적 서평에는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가 가진 문제점들 또한 비교적 잘 지적되어 있다.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겠지만 책이 완성되기까지 3년 동안 감수가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러운 정도의 오기와 근거가 불명확해 보이는 수치들 그리고 논리적 비약이 있는 사실 관계들은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퇴색시키는 정도는 아니다. 또한 지적한 내용들은 내가 보기에 모두 수정이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장대익 교수의 서평을 보면서 기대했던 것은 최종덕, 강신익 두 학자와의 열띤 논쟁이었다. 나만의 기대인지는 몰라도 이 기회를 통해 우로 치우친 진화생물학이 이와 다른 입장의 진화생물학이라는 무게 추에 의해 균형 잡힌 진화생물학으로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으면 하는 희망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후학으로서 선배 학자들의 멋진 토론을 보았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는 그런 논쟁은 없었다. 하지만 논쟁의 불씨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라는 책을 통해 생길 수 있었다는 의미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작지 않은 성과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또 다른 좌파를 위하여

좌파 진화생물학이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진영과 불편한 대화를 시작할 쯤 또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왔다. 문제는 마르크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이 책의 구성이 야기한 문제일 수도 있다. 실상 최종덕 교수는 과학철학자이고 임지현 교수는 역사학자이며, 전방욱 교수는 생물학자, 강신익 교수는 의철학자, 김시천 선생은 동양철학자이다. 대담집이라는 특성과 함께 5인의 각기 다른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과 결부된 진화론을 이야기하다보니 그 구성이 다채롭기는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진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임지현 교수와 최종덕 교수의 대화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라는 시대 상황으로부터 진화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임지현 교수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는 필자 본인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된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또 다른 이들이게는 불편한 점이 있었나보다. 유범현 선생은 “진화론, 변화의 과학이 세상을 말하다”(레프트21 40호 2010. 9. 11)라는 장문의 서평을 통해 “이 책의 대담자들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진화론 이해를 왜곡하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 것은 분명 이러한 맥락의 반응이다.

대학 때 잠시 접해본 마르크스의 몇몇 서적들로, 나로서는 감히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좌파=마르크시즘’이라는 절대 공식이 통하는 한국 사회에서, 또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마르크스가 상당히 신성시되는 상황에서 두 대담자의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가 한국의 좌파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좌파적 진화생물학 인문서(人文書)’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내 입장에서, 좌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게다가 마르크스를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임지현 교수의 논의들은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게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같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면서도 의심스런 눈초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범현 선생의 서평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임지현 교수가 유범현 선생의 서평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새로운 시도가 주는 즐거움

내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를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사실 최종덕 교수와 강신익 교수가 ‘생태주의적 진화론’을 논한 부분과, 김시천 선생과 동아시아 전통 담론과 진화론적 사유가 함께 논의되는 부분이었다.

진화생물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도브잔스키는 “진화를 빼고 나면 생물학은 무의미하다”라고 말했다. 내가 진화생물학을 처음 접하던 시절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생물학에서 진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큰 것인지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강신익 교수의 의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와, 아직은 조금 거칠게 보이는 ‘생태주의적 진화론’이라는 개념은 도브잔스키의 말 만큼이나 묘한 매력이 있다. 사실 나는 ‘생태주의적’ 이라는 수식어가 이미 진화생물학에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극적으로 수식어를 붙임으로해서 진화의 지평이 좀 더 명확하고 균형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생태’ 라는 말을 통해 개체의 진화생물학이 아닌 전체의 진화생물학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단연 동양철학자 김시천 선생과의 대담 부분이다. 과학이나 서양학문을 전공한 다른 대담자들과 달리, 과학자도 아니고 서양 학문을 연구한 학자도 아닌 김시천 선생의 대담을 보며, 나는 인문학자의 길을 다시금 생각한다. 학문의 기준이 동양과 서양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구조로 양분된 사회에서 김시천 선생의 시도가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 교육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생각을 바꾼 터였다. 내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비교적 단순하다.

어느 날 한국철학사에 관한 저술을 읽다가 목차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없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한국철학사에는 한국의 현대철학이 없었다. 실학에서 끝나버린 한국철학사, 그 때 내가 느꼈던 공허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서양의 현대 철학자가 지껄이는 뜻 모를 소리를 부러워하며 책을 읽어대고, 지껄여봤지만 정작 내가 속한 사회의 현대철학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현실을 마주한 순간 내 생각은 바뀌었다. 내가 김시천 선생의 대담을 유심히 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동양철학에 대한 파격적인 재해석과 당당함, 진화론과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나가려는 의지, 이것이 내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를 통해 본 김시천이다.

 

진화론, 이제 좌우의 두 날개로 날 수 있었으면!

내가 다윈을 만난 것은 10여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환경 윤리를 전공하고 싶어 석사과정을 시작했지만 본의 아니게 ‘칸트 철학’을 전공하면서 혼자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진화생물학 공부를 시작했다. 순수한 인문학도인 내가 거의 독학으로 해 온 공부이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닫게 된 것은 ‘장님이 코끼리 잘못 더듬으면 밟혀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석사를 마칠 무렵 공부에 대한 심한 회의가 들었다. 그 와중에 학교 공부와는 거의 별로도 읽기 시작한 몇 권의 책들 중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이라는 책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진화생물학 내부의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거리를 두게 된 것이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현재도 나는 진화생물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주된 관심사는 진화론적 윤리학을 수립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공생, 협력 같은 공진화와 그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것은, 나의 공부과정에서 중요했던 그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 라는 책의 번역자가 전방욱 교수라는 사실을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를 읽고나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전방욱 교수가 번역한 여러 책들을 읽으며 공부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창피하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당시 전방욱 교수의 번역서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공부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최종덕 교수를 굴드의 추종자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내가 최종덕 교수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석사논문의 주제를 칸트의 공간 개념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리학에서 말하는 공간 개념에 관한 책들을 보게 되었고, 그 중 하이젠베르크의 얇은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의 번역자가 바로 최종덕 교수였다. 실제로 최종덕 교수는 물리학을 공부한 후 독일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철학적 연구로 학위를 취득한 학자이기도 하다. 석사 이후 굴드의 책을 포함한 진화생물학 책들을 읽으며 공부를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덕 교수가 독일 유학시절부터 진화론을 연구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최종덕 교수는 자의든 타의든 한국 땅에서는 ‘좌파적’ 입장의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간에 내가 보기에 최종덕 교수는 최소한 자신이 연구하는 진화생물학의 깨끗하지 못했던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라는 과거를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몇 안 되는 지식인이다. 또한 진화생물학의 논의가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좌파 진화생물학의 무게 추의 역할을 이 땅에서 해 주고 있다는게 나의 소견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는 과학저술이면서 인문학 저술이다. 또한 대담자의 전공이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 견해와 통찰이 녹이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무척 어려운 책이다. 또한 아직까지는 좋은 서평보다는 비판적 서평이 앞서는 글이기도 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이지만 진화생물학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불씨가 되어, 우리 학계와 사회에서 진화론의 넓은 담론 영역에서 좌우의 균형이 잡힌 학문적 논의가 살아날 수 있는 계기의 역할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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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섯 번째 책은, 최종덕 교수가 역사학자 임지현, 생물학자 전방욱, 의철학자 강신익, 동양철학자 김시천과 대담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으로 김택중(인제대 의대 연구강사), 강경표(중앙대철학과 대학원 박사수료), 백준수(인천석남초등학교 교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아니! 이런 만남이 있을 줄이야 6-③ [色 다른 책읽기]

백준수 (인천석남초등학교 교사)

 

인문학은 어떻게 진화론과 만나는가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교훈을 담고 있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한다.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 영화 중 제목으로 세인들의 이목을 끈 영화도 많다. 영화 제목이 참신하거나, 충격적이거나. 필자가 보기에는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같은 영화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는 제목에서 풍기는 영화 이미지가 강렬하게 느껴지고, <마더>라는 영화는 제목을 <엄마>로 하지 않고 영어로 정한 것이 감독의 의도가 있음을 관객들은 쉽게 눈치 챈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책 제목을 통해 지은이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하여 책을 선택하는 독자도 많이 있다. 최종덕 교수가 네 학자와 대담하여 펴낸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가 그러한 경우라고 여겨진다. 책 제목만 보고도 책을 펴낸 의도와 내용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특히 “진화론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진화했는가”라는 부제는 독자들의 시선 끌기에 더 효과적이다.

최종덕 선생은 진화론을 논의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화론을 논의한 이유는 현대 생물학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그 사유구조의 인문학적 접근법을 찾는 데 있을 거예요. 우리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에서 어떻게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바로 궁극적인 방향이겠죠” (399쪽)

한국의 인문학을 대표할 만한 학자들이 진화론의 과학적 이해와 인문사회학적 의미를 비교 분석하여 밝히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동양철학도 진화론과 만날 수 있다니!

특히 동양 철학을 전공한 김시천 선생의 관점에서 진화론을 비교한 부분은 매우 이채롭다. 서양 과학을 동양철학 입장에서, 그것도 과학 관점이 아닌 철학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점이그러하다. 다만, 진화론적 사유와 동양철학적 사유의 유사성을 찾으려는 것은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 알의 작은 씨앗 속에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는 생명의 잠재성이 담겨 있듯이, 인간 성선의 바탕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씨앗이 적당한 습기와 햇빛을 받지 못하면 온전한 나무가 될 수 없듯이 사람도 성선을 완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321쪽)

“고대 중국인의 사유 속에는 논리적 진리체계보다는 모든 사람이 경험적으로 공유하는 공통의 은유 체계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고대 중국적 사유를 복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하죠. 그런 점에서 생물학적 사유구조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322쪽)

동양철학 사유의 독창성이 자연현상에 은유하여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고 하여, 동양철학과 진화론의 유사성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좀 더 깊이 있는 고민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진화론, ‘겸손의 과학’을 가르치다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은 유한한 생명의 시간 동안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왜 인간이 병에 걸리게 되는지 근본적인 질문은 매우 타당하다. 진화의학은 질병과 건강이 서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존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의 질서에 근거한 주장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자연을 정복하려 하거나, 종속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인간에게 돌아오는 재난의 부메랑이 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강신익 선생이 주장하는 과학에 붙여야 할 수식어가 겸손함이어야 한다는 것은 의미 있다. 진화의학을 ‘겸손의 의학’이라고 한다면, 과학을 통해 이뤄낸 성과로 인간 스스로 오만함에 빠지는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으리라.

“진화의 관점이 미래의 생명을 살리는 일과 직결된다는 것은 생각이 중요하죠. 다만, 진화의 방향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한 과학의 증세라고 봐요. 진화는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서 가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니까요.”(204쪽)

강신익 선생의 촌철살인 같은 말에 6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사태가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 우리 사회는 감식안이 전혀 없었다. 사이비 학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혹세무민을 자행하고 있었다. 진화의 관점을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인문학적 사유방식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창이 된다고 본다.

 

과학이 사회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전방욱 선생은 황우석 사태는 과학이 사회적 가치를 왜곡한 전형적 사례라고 갈파한다. 유전자를 통해서 진화라든가 인간의 본성, 사회 현상을 해석하려는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사회적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체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된다면 인간 에 대한 존중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지금보다도 더 극단적 자본주의가 팽배해진다면 과학윤리에 기반을 둔 생명존중 사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사회적 가치를 훼손한 자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진보의 사전적 의미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전방욱 선생은 진화론과 진보의 개념은 다르다고 말한다. 다윈의

[월례발표회 참관기] 김원열 선생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에 관하여

?[2011년 6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발표자: 김원열

 

김원열 선생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한철연이 단체로서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국사회의 운동에 많이 기여해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더구나 다양한 분파들의 활동에 각기 연계되면서도, 한철연 속에 심각한 분파적 갈등이 없이 서로 친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남들은 이것이 너무 혼란스럽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거꾸로 생각한다. 그런 분파적인 개입들 때문에 한철연이라고 내부 갈등이 없을 수 있었겠나? 하지만 그런 갈등을 잠재우면서 내부적인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철연 회원들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무엇이 바로 한철연의 철학이 아닐까?

한철연은 단순히 사회운동의 분파들의 통합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사회철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출발했으나 한철연은 철학의 통일전선을 이룬 것은 이미 초창기에서부터이었다. 다양한 철학이 한철연 속에 함께 어울려 풍요함을 마련해 주고 있다. 고대철학, 실존철학, 동양철학,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최근의 탈포스트주의(라캉, 지젝) 등. 더구나 한국철학계의 고질 중의 하나이었던 지연과 학연의 한계도 그동안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한철연의 성과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필자는 거침없이 대답하고 싶다.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넘어선다는 것, 그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이라면 한철연이 바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차이를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잠들어 있는 무규정적인 동일성이다. 차이를 상대적인 차이로서만 인정한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무차별성이다. 한철연의 철학은 차이가 차이로서 조화를 이루는 통합이 아닐까?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과 눈이 없는 사람이 함께 가듯이 말이다.

2.

최근 이런 한철연의 철학이 후퇴하는 조짐을 보여 필자는 안타깝다. 사회 운동의 분파적 갈등이 한철연 내부에 서서히 축적되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가 서로 대화를 단절시키고, 서로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듯하다. 비웃음처럼 보이는 엷은 미소들이 떠돈다. 한철연과 더불어 활동해 오던 많은 철학도(비사회철학전공자)들이 어느새 멀리서 한철연의 활동을 관망하는 듯하다. 그런 둔중한 움직임의 반면에서 한철연 내부에는 특정한 경직된 목소리가 강하게 들려온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아직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우선 생각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심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싶다. 원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쪽이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쪽은 슬금슬금 기어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한철연의 움직임이 둔중해 진 것이 아닐까? 이제 이명박 정권 초기의 충격을 사람들이 많이 극복한 듯하다. 멀지 않아 경직된 듯한 목소리가 줄어들 것이고 다시금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고 활기 있게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필자는 이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철연이 다시금 다양한 분파, 다양한 철학들 사이에 활발한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침 한철연의 월례발표회에서 분열된 진보세력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과 관련해 발표회를 마련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철연 운영위에서 갑자기(?) 필자를 이 자리의 사회로 임명했다. 무조건적인 통합론자 중의 하나인 필자에게 기꺼이 사회를 맡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선택이 아닐 수 없어 필자는 며칠이고 고민해 왔다. 사회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사회에 임하기로 했다.

3.

필자의 기대와 달리 한철연 내부에서 이런 토론에 대해 냉담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참여인원이 기대와 달리 소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짐작할 수 있다. 통합을 거부하는 마음은 통합에 대한 토론도 거부하려 하겠지. 이런 짐작은 필자의 선입견일까?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상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철학도들이 남의 얘기를 들어줄 생각도 못할 만큼 편협해졌단 말인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 너무 아득하다는 느낌 때문에 필자는 암담해졌다.

발표자 김원열 선생은 ‘진보 통합 시민회의’의 공동대표이라서 그런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통합의 움직임을 일어난 그대로 정리하여 주었다. 발표문의 내용은 그런 진행과정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웠다. 그런 가운데 김원열 선생은 통합의 필요성과 방식에 관한 시민회의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설명해 주었다. 김원열 선생의 발표에 따르자면 통합의 필요성은 바로 선거승리라는 목표와 직결되어 있었다.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은 합법적인 진보정당의 불가피한 요구이고, 여기서 최대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권에 대항하는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에 즈음해서 이루어지는 선거연합은 불안정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단합이 필요한데, 이 과정을 발표자는 두 단계로 상정했다. 하나는 바로 진보대통합이다. 이것은 아마도 계급(또는 민중)적인 단결을 목표로 하는 통합이다. 여기서 핵심은 곧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다. 물론 이 통합은 양자를 넘어서는 모든 진보주의자의 대통합을 목표로 한다. 이런 통합을 전제로 하여, 장차 일종의 ‘인민전선’(정치적 공동책임 즉 정책연대와 공동정부)을 형성하는 것이 다음 단계의 과정으로 상정되어 있는 듯하다.

인민전선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르주아 민주 세력(민주당)이 자신의 헤게모니에 한계를 느낀다는 말이 된다. 거꾸로 그만큼 민중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멀지 않아서 민중세력이 부르주아 민주 세력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서구는 이미 20세기 초에 이런 헤게모니의 이동을 겪었는데, 이제 한국사회도 이런 이동의 기점에 서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진보세력의 대통합은 헤게모니의 이동을 촉진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긴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4.

김원열 선생의 발표의 중점은 이 두 과정 가운데 우선적인 과정인 진보대통합에 있고,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결합에 있다. 재결합에서 논의의 중점은 널리 알려진 대로 두 가지라 한다. 하나는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패권주의의 문제이다. 김원열 선생은 이런 문제에 관한 충분한 통의가 이루어졌고 일정한 합의가 가능했으며, 남은 문제는 충분히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잘되어 갈 거라는 예상이다.

결론적으로 김원열 선생은 앞으로 진보통합의 관점을 세 가지로 제안했다. 하나는 단순하게 분열된 두 집단의 통합을 넘어서 모든 진보세력이 통합되는 대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통합이 이루어져야 공고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상층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이런 통합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원열 선생의 발표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이순응 선생의 논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순응 선생은 통합이 선거승리라는 어쩌면 진보주의자들의 전체 목표에서 부차적인 과정에 불과한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를 의심한다. 설혹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선거승리를 위해 진보세력이 대중들로부터 정권을 위임받을만한 신뢰와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묻는다. 다시 말하자면 진보세력이 단독으로 승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칙과 이론의 차이를 가진 진보의 두 세력 사이의 통합은 가능하겠는가 묻는다. 원칙이 없는 선거승리를 위한 통합이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응 선생의 논점은 다양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문제는 어쩌면 단순하다. 이미 진보의 승리를 위한 혁명적인 코스에 대한 논의나, 단독적인 선거 승리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오래 전에 정리(해결이 아니라, 일단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순응 선생 자신도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문제는 거래를 통한 통합이 원칙이 없는 통합이라서 불안정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김원열 선생이 이미 통합의 장기적인 전망이라는 개념으로 암시했다. 다만 김원열 선생은 이런 장기적인 전망이란 현재로서는 오직 통합 이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오히려 당면한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통합의 필요성이 통합을 더욱 현실적으로 할 것이라 본다.

결국 논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다. 이론적인 차이를 가진 세력들끼리 통합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이다.

5.

필자는 사회자로서 이번 토론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원칙 없는 통일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필자가 제기했던 문제를 말해 보자. 먼저 전제할 것은 필자도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손에 잡힌다면 답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하늘은 답이 없는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 것이니까.

사실 민중운동이 출현한 이래로, 민중세력의 두 집단이 부딪혀 왔다. 노동자와 농민,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의 대립이다. 이런 대립은 한편으로는 식민지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며, 합법적인 현실주의와 혁명주의의 대립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당 내 엘리트층인 지식인층과 조직적인 대중의 대립이다. 이는 또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와 집중주의의 대립이기도 한다.

민중운동의 역사를 보면 이런 대립이 모든 역사에서 점철되었는데, 두 집단 사이에 대립이 없다면 그것도 무기력한 정당이 되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된다면 그 후유증은 파국적인 된다. 레닌 시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마오 시대 소비에트노선과 인민민주주의노선의 대립도 그런 일환이다. 유감스럽게도 일제 시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역사는 이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분열되어 결국은 종파주의 전락하고 말았다.

필자는 어떻게 본다면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과의 대립도 이런 오랜 역사적 분열을 이어받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이런 분열이 각각의 집단 속의 구성원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 운동 자체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문제는 원칙적으로 분열은 불가피한데 그것을 극복하여 통합을 이루지 않고서는 민중운동은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피한 원칙적 분열 앞에서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런 자가당착적인 모순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서 심각한 철학적인 문제로 나서게 된다. 일제시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필자 역시 고민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6.

다행하게도 토론은 심각한 상처 없이 그저 문제를 자각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문제를 문제로 안다는 것만 해도 소크라테스가 늘 철학의 제 일보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이미 철학에서의 제일보는 디디게 되었다. 철학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역사가 움직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지면 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통합에 대해 낙관적이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민중운동의 통합이지 진보의 통합인가?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민중의 개념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이 나오면서 갑자기 민중 개념이 사라지고 진보라는 개념이 이를 대체해 왔다. 그런데 진보란 이념의 차원이 아닌가? 역사는 계급의 역사라는 관점을 지킨다면, 필자는 진보라는 말 대신 다시 민중이라는 말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런 경우 비로소 민중계급의 다양한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이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