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걸음 고치는 법, 걸어야 한다![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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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 테일러가 엮은 <불온한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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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아(부산대학교 비정규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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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함께 걷고 쓴다는 것

 

지독시리 걷고 또 걷는 한 친구는 ‘엉덩이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보였고,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했던 것으로 보이는 또 한 친구는 ‘발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말을 했다. 그들의 각오와 다짐이, ‘발’과 ‘엉덩이’ 또는 ‘길’과 ‘방’ 사이에서 한참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도 질책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미 공유하고 있었고, 각기 자신의 색깔로 도구로 자신의 생활 방식과 공부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지난 2월 2일 부산 중앙동에 있는 ‘모퉁이 극장‘에서 니시야마 유지의 <철학에의 권리> 다큐멘터리 상영과 ‘문턱 없는 지식의 실험장’ 토론회가 있었다(☞바로 가기). 니시야마 유지와 함께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은 ‘연구 모임 aff-com’이었고, 토론자는 ‘공간초록‘에서 활동하는 ‘연구 모임 비판과 상상력’의 이수경과 나, 부산과 광주를 오가며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기채생 감독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엉덩이로 글을 쓰는 일과 발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친구들의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푹 하고 웃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그 부위로 글을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있으니 마음이 묵직했는데, 그건 그런 다짐을 하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일들과 고민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앞으로 그들이 겪고 감당해야 할 노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손’으로만 하던 일을 ‘엉덩이’나 ‘발’로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고단함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이에 더해 손을 쓸 수 있는데 의식적으로 엉덩이나 발을 사용하는 것도 상상해보라. 손을 쓰고 싶은 유혹, 편한 대로 하고 싶은 유혹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참 힘든, 몸을 바꾸는 일. 대학의 공부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자신의 전공 공부에만 급급해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닫힌 몸을, 가지각색의 경험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내뱉는 몸들을 향해 여는 일.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며 홀로 있던 몸이, 성가시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몸들 사이로 들어가 서로 부딪히고 섞이는 일. 그와 더불어 쓴다는 것은 그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상처받은 채로(그리고 어쩌면 그와 동시에 상처주면서) 함께-있고 또 함께-걷는 그 고단한 과정을 기록하는 일. 그날 내가 친구들의 말을 통해 공유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몸의 변화, 함께 걷고 쓰는 몸으로의 변화를 향한 욕망(또는 두려움)이다.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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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 ⓒ이후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찾다가 근처에 꽂혀 있던 이 책 <불온한 산책자>(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를 펼치게 되었고 결국 찾던 책 말고 이 책을 빌렸다. 제목에 혹했던 것도 같은데, 결정적으로 1년 전쯤에 (아마도)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기획한 강연 중에 조현준의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강연이 있었는데, 그 강연에서 봤던 영상이 기억나서 빌렸다(☞바로 보기).

그리고 <철학에의 권리> 상영과 토론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도 이 책을 빌리는 데 한몫했다. 이 책은 제목(원제는 Examined Life : Excursions with Comtemporary Thinkers)에서 알 수 있듯이 8명의 철학자들과 산책하며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며, 그 산책을 담은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도 있다. 감독인 애스트라 테일러가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눈 철학자들(주제)은 코넬 웨스트(진리), 아비탈 로넬(의미), 피터 싱어(윤리), 콰메 앤서니 아피아(세계시민주의), 마사 누스바움(정의), 마이클 하트(혁명), 슬라보예 지젝(생태),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상호 의존)인데, 이 글에서 다룰 것은 마지막 장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뿐이다.

영상을 볼 당시에는 자막이 없어 거의 못 알아들었는데 책장을 펼쳐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의 대화를 읽으니, 그 사이 여러 장소에서 경험했던 것들과 그 경험이 가져다준 고민들이 떠오른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때 머물렀고 여전히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머물고 싶은 몇몇 장소들이 있다. ‘공간초록’과 ‘생각다방산책극장’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산대학교 분회’가 그것이다(‘헤세이티’와 ‘모퉁이극장’도 빠뜨릴 수 없다). 장소들마다 만남의 성격도 색깔도 다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갖가지 대화(간단한 소개에서부터 내밀한 고민까지)나, 무언가를 함께 시도하면서 나눈 즐거움과 주고받은 상처와 괴로움이 끊임없이 나와 우리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 고민들 중 하나. ‘철학’은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입 밖으로 꺼내지만, 꺼내자마자 나에게도 뭔가 어색한 말인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물건인 것처럼 그것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물을 때면(이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오늘의 책 제목에 있는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때때로 “철학이 뭔가요?”라고 웃으며 묻는 이들에게 나는 거의 항상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 속으로 ‘지금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인지도’라고 웅얼거리기도 하는데, 가장 골치 아픈 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묻게 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 “전공으로 철학을 한다는 건 또 뭔가?” 학교에서 소위 철학 공부한다고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꽤나, 그것을 발음할 때 특히나 더, 과장되어 있다고 예전부터 느꼈는데, 요즘엔 더 그렇다.

또 하나. 이 시대가 또는 우리 사회가 혼자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곳이라는 것을, 무섭지만, 많은 이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상식이 통용되는 곳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시나’ 둘러보니 곳곳에 이곳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이들이 작은 섬들을 만들고 있다. 앞서 말했던 장소들이 그나마 나와 연이 닿은 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함께-사는-방식’을 생활 속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본이라는 격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집스레 그리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고, 고립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손을 내밀며 이 장소들을 지키고 있다.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이 만나면 조화보다는 갈등이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그곳에 오기 전의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일수록 더 즐겁게 활동하고 더 공고하게 모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뭐 어쨌든 무난하든 곤란하든 이 장소들에서 사람들은 서로 말을 나누는 방법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삶을 나누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느 장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학교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말하고 만나는 방식을 살펴보니 이곳만큼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곳이 없다. 말을 하는데 말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적고, 인간을 고립시키는 사회 구조를 비판해서 그런지 자기 자신을 여는 방법은 전혀 모르거나 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삶이 아니라 살아남음만이 남아 있는 시대를 한탄하며 문을 잠그고 그나마 이곳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 사는 곳과 사람은 닮는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 그런지 더 가혹하게 말하게 된다.

나는 대략 15년 동안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비정규교수노조 천막 농성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발이 아파 병원에 가니 신경이 눌렸단다. 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데 의사가 결정적으로 걸음걸이를 바꾸도록 노력하란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의식하지 않아도 발 바깥쪽이 아프니 힘이 저절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좀 나아지니 걸음걸이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그렇게 걸으니 또 아파서 요새는 열심히 안짱걸음으로 걸으려고 노력한다(15년 간 안짱걸음으로만 걸었으면 팔자로 걷는 연습을 해야 됐을까?). 아픈 것도 싫지만 걷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도, 아파서 다리를 저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귀찮다. 어쩌겠는가. 걷고 싶으면 괴로워도 다시 배우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걷기 위한 조건

 

“나는 걸으며 지나치는 모든 것을 즐깁니다.” (314쪽)

수나우라가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움직이는 데서, 움직이면서 느낄 수 있는 변화들에서, 그 변화들이 주는 앎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누리는 모든 것들이,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 자족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는 게 두 사람의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움직일 때 외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려면 특정한 종류의 표면과 신발, 날씨가 필요하죠. 심지어는 내면적으로도 특정한 방식의 보행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보행력은 우리 안에서 충분히 작동할 수도,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315쪽)

수나우라의 말에 보태어 그는 우리 내부의 보행력마저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자족적인 몸이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있고, 함께 걸을 수밖에 없는데, 희한하게도 이 사회는 혼자 살아남으라고 윽박질하니 어찌 견뎌낼 거냐고, 거기서 버텨내기 힘드니 이런 곳을 만드는 것 아니겠냐고, 아까 말했던 장소들 중에 한 곳에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이런 장소들을 ‘피난처’로 여기고, 누군가는 ‘진지’로 여기는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특정한 목적 또는 정체성을 정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보다도 우선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일들을 감당하고 즐기면서 서로의 생각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게 가능해야 사람들도 다시 모이는데, 참 어려운 문제다. 모여야 방법도 익히는데, 모이려면 이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수나우라가 지적한 장애인 공동체딜레마와 유사하다. 우선 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커브컷(훨체어 사용자를 위해 인도와 도로에 설치된 장치)이 대부분의 장소에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등의 “물리적 접근성”에 대한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어 “사회적 접근성과 수용성”도 높아질 것인데, 사회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수나우라의 지적에 응수하며 버틀러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접근성이 보장된 다음에야 효과적인 주장도 할 수 있다.” (319쪽)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걷기 위한 조건을 갖춘 장소를 만들기를 바란다면, 괴로움을 감당하며 모일 수밖에 없고 오류를 반복하며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과 현실

 

부산에 있는 이 장소들은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만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함께 있는 법을 배우기 힘든 사회에서 나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생겨났다. 이런 활동을 누군가는 제도의 바깥으로 나간다고 표현하지만, ‘공간초록’에서 만난 J가 항상 지적하듯이, 소위 안과 바깥은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또는 몸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방식에 따라 삽시간에 그곳은 안이 되기도 밖이 되기도 한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장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타협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피폐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피로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거나 ‘우리와 안 맞으니까 또는 우리는 여력이 없으니까 그들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몸짓과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어떤 몸이 ‘우리에게 맞지 않게’ 움직인다고 내치는 일은, 그곳이 제도 안이든 밖이든 보수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진보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 같다. 특히 그 몸이 ‘우리보다 취약할’ 경우 그런 일은 더 쉽게 일어난다. 이런 극단적인 일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일을 함께 시작하고 진행시켜 나갈 때 어긋나는 의견들을 감당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아, 만나고 모이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들지만, 만들어진 장소를 열고 지키는 일, 즉 함께 걷는 과정은 더욱 힘들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를 보고 듣고 읽으면서 그 대화에서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눈에 띈다. 그럴 때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곱씹으며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한걸음 더 밀고 나가는데, 이런 태도도 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버틀러가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사회적 공간에서 움직이는 일이에요.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움직임, 당신이 살 수 있게 돕고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을 표현하게 하는 그런 움직임 말입니다. 이 사회적, 공적 공간에서 당신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요? 당신이 안고 있는 사회적 제약은 어느 정도인가요? 낙인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어떤 움직임 같은 것들, 그러니까 당신의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 제약 같은 것 말입니다.” (320쪽)

수나우라는 질문에 딱 맞는 대답 대신, 카페에서 커피 잔을 입에 물고 테이블로 옮긴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일의 어려움은 입으로 잔을 물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입으로 잔을 무는 데서 온다. 그는 그 일이 힘든 이유가 “우리의 움직임에는 규범화된 기준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손은 물건을 주거나 집어 들거나 악수를 하는 데 사용하고 입은 마시거나 입을 맞추거나 이야기하는 데 사용한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카페에서 커피 잔을 손이 아니라 입으로 옮기게 되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을 벗어난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배운 내용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죠. 우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방식에 따라 몸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생각조차 잘하지 않죠.” (321쪽)

다시,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문득 술자리에서 누군가 반쯤은 비꼬듯이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번역하면 이렇다. 함께 걷는 것은 온갖 어긋남을 수반하는 일이며 어긋남을 수용하기란 불편하고 힘든 일인데, 왜 혼자 걷지 않고 함께 걷는가? 당신도 편해지기를 원하지 않는가, 아니 편해지기 위해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데, 생각하니 질문만 하나 더 늘었다. 어긋나고 부딪히고 내쫓고 내쫓기고 상처받고 상처주면서도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는 바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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