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을 사랑하는가? yes도 no도 아닌 진동 상태! [철학자의 서재]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철학자의 서재]
정성훈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세대론도 멘토링도 힐링도 아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이후 21세기의 청춘이 처한 처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년층 학자들의 술자리에선 요즘의 20대가 자기들의 청춘 시절보다 힘들게 사는가 아닌가,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의 주제로 격론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힘든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이들이 멘토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술자리 논쟁에서 청춘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고 철학이라는 힘든 길을 가려는 학생들에게 세태에 흔들리지 말라는 멘토링을 해주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은 “내가 가르쳐온 20대를 과연 하나의 세대로 묶을 수 있는가?”와 “내가 저들의 처지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나의 조언은 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가?”였다.
오늘날의 청춘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나는 왠지 그 멘토라는 사람들이 쓴 책들을 읽어보기는 싫었다. 그들이 아무리 따뜻한 시선을 가졌고 그들이 아무리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성공한 사람 혹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성공과 성장을 강요받는 청춘에게 의도하지 않은 기죽이기 효과를 갖는 것 같았다.
세대론이나 멘토들이 쓴 책들을 외면해오다가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구입한 책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이다. 일단 저자 엄기호가 요즘 청춘들을 기죽이는 전설의 시대인 80년대 학번이 아니라 ‘낀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학번이라는 점, 게다가 의사도 변호사도 교수도 아닌 박사과정 수료의 시간강사라는 점에 끌렸다. 수업 보고서를 통해 이 책을 함께 쓴 덕성여대와 연세대 원주캠퍼스의 학생들이 이 선생에게 기죽거나 혹은 선생을 과도하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대대로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이 책이 세대론에 대한 책이 아니며, 20대에 관한(about) 책도, 20대에게(to) 쓰는 책도 아님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이 “지난 2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라고, 학생들은 선생과 ‘with’의 관계에 있는 “시대에 대한 앎의 지적 파트너”라고 말한다(20쪽).
그렇다면 이 책은 혹시 요새 유행하는 대화를 통한 힐링을 목표로 하는 서적은 아닐까? 하지만 학생들의 글과 선생의 분석 혹은 비평이 이어지는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이 크게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잉여’라고 ‘한심하다’고 자조하는 그들의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선생도 이들에게 자기긍정을 요구하거나 잉여의 조건을 변혁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역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책을 함께 만든 지적 파트너들 사이의 거리, 불일치 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선생의 시선을 역설에 이르게 한다. 선생은 중고등학교의 폭력과 억압을 부정적으로 보여준 후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약력을 보면 그는 대안학교 선생도 했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 한다”는 고백도 한다. 그리고 폭력적 교육과 비폭력적 교육의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116~121쪽).
또한 그는 서사적 사랑을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는 청춘을 위해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163쪽). 몸을 최고의 아이템으로 여기고 다이어트에 몰두하는 세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성적 상품화에 대한 인권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 “그들의 귀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겹고 고리타분한, 후지고 하나 마나한 말씀이 된 것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한다(185쪽). 그래서 책 제목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아니오’로도 읽을 수 있고 ‘예’로도 읽을 수 있다.
역설적 상태란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을 뜻하는 진동 상태이다. 사랑을 예로 들자면, 모든 파트너는 서로 사랑한다는 규정과 함께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동시에 내릴 수 있다. 연애 기간이라 불리는 시간 동안 한시도 의심의 여지없이 열정을 불태운 커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기간 내내 서로를 연인이라 부르는 것은 탈역설화를 위한 노력, 즉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헤어지자’라는 말을 되도록 내뱉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엄청나게 높아진 시대인 ‘현대(modern)’에는 아무리 권위적인 규범이나 질서라 하더라도 결코 역설적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놀라울 정도로 견고한 질서 – 화폐경제, 법의 지배, 대의제 민주주의, 일반 교육 등등 – 가 유지되어온 이유는 진리, 권력, 화폐, 법, 인권 등의 가치가 탈역설화 메커니즘을 잘 발달시켜왔고 그것이 학문, 정치, 경제, 법 등 각 고유 영역에 따라 잘 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선생과 학생들의 글 속에서, 특히 각 장의 마지막에 선생이 던지는 의문을 읽으면서, 더 이상 탈역설화가 쉽지 않은 시대 상황을 읽어내었다. 민주주의의 정당성, 인권의 정당성,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숭고함 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지만 의문에 처해지는 것, 돈과 사랑의 경계, 진리와 돈의 경계 등이 희미해져버리는 것 등이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청춘의 변화이다. 아니 세대론을 넘어서서 본다면 우리 시대의 변화이다. 사실 중년층이 청춘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고스란히 더 이상 20대의 자신처럼 살고 있지 않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옛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이것이야말로 대안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변화를 어느 정도는 감수하는 태도 혹은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쩌면 모호한 듯 보이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내뱉은 정치적 주장이나 도덕적 판단에 대해 수시로 이차 관찰을 하면서 역설적 상태 속에서 진동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현대성의 위기
현대 사회는 그 이전 시대의 사회들과 비교해 너무나 비개연적인 일들을 달성해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하는 일, 전혀 다른 수준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같은 종류의 학교에 다니면서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선생으로부터 함께 배우는 일, 출신 가문과 무관하게 학교를 통해 쌓은 경력에 기초해 조직에서 역할을 부여받는 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라도 진리의 영역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평범한 문외한으로 취급받는 일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달성된 것들이며, 그래서 쉽게 다시 역설에 처할 수 있다. 현대성은 그 현대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 논리의 귀결로 위기에 이르게 된다.
사랑을 예로 이 위기를 짚어보자.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권기돈 외 옮김, 새물결 펴냄)을 읽어보면, 사랑의 코드화의 출발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즉 두 파트너 모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덕(virtue)이나 아름다움이 사랑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한다’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부정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때, 현대적 연애가 성립한다. 그리고 사랑은 성애와 결혼을 함축하되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은 돈, 권력, 진리 등과 무관해짐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부정의 가능성들 덕분에 엄기호가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말하는 사랑의 서사가 가능해진다.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다시 도전하고 맺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등등이 이어질 수 있으며, 이 서사에서 사랑 바깥의 요인들은 원인으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이렇듯 부정의 가능성 위에 성립했던 사랑은 이제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는 도전에 처하게 된다. 사랑 혹은 친밀성이 어차피 거래라는 분석, 그런 거래를 주선하는 정보업체의 등장, 서사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결혼에 이르기 어렵기에) 즉각적 성애를 추구하는 경향, 자기서사가 불가능한 인격들의 등장 등이 그러하다. 임시적인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엄기호의 질문도 그런 도전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런 도전에 대응하는 태도에는 정답이 있는가? 이런 도전을 순수한 사랑의 훼손이라고 도덕의 타락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고리타분한 자,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매달리는 자, 영원한 사랑이라는 사기극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자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도전을 그대로 수용하는 자는 속물, 인격성의 포기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두 극단 사이에서 뭔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대안들 중 보편화 가능한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랑이 거래라는 도전 앞에서, 임시적 사랑도 사랑이라는 도전 앞에서, 나는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답할 수 없는 역설에 처한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이 책을 현대의 역설 혹은 현대성의 위기의 징후로 읽는다면, 이 책은 요즘의 20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서사를 추억으로 간직한 40대도 지금 사랑의 역설로 괴로워하며 살 수 있으며 임시적 사랑으로 서사적 사랑의 관념에 도전하며 살 수도 있다. 또한 퇴직당한 후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은 이 책에 나오는 대학생들처럼 자신들을 ‘잉여’라고 부를지 모른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견고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액체 현대”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한국적 맥락에서는 87년에 성립된 현대를 위협하고 있다. 아주 쉽게 ‘탈현대’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역설에 처한다. 인권, 민주주의, 사랑, 일반 교육 같은 것들을 나는 고루하게 고수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요즘의 20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는 중년층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