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애인을 사랑하는가? yes도 no도 아닌 진동 상태! [철학자의 서재]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철학자의 서재]

 

정성훈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세대론도 멘토링도 힐링도 아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이후 21세기의 청춘이 처한 처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년층 학자들의 술자리에선 요즘의 20대가 자기들의 청춘 시절보다 힘들게 사는가 아닌가,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의 주제로 격론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힘든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이들이 멘토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술자리 논쟁에서 청춘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고 철학이라는 힘든 길을 가려는 학생들에게 세태에 흔들리지 말라는 멘토링을 해주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은 “내가 가르쳐온 20대를 과연 하나의 세대로 묶을 수 있는가?”와 “내가 저들의 처지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나의 조언은 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가?”였다.

오늘날의 청춘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나는 왠지 그 멘토라는 사람들이 쓴 책들을 읽어보기는 싫었다. 그들이 아무리 따뜻한 시선을 가졌고 그들이 아무리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성공한 사람 혹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성공과 성장을 강요받는 청춘에게 의도하지 않은 기죽이기 효과를 갖는 것 같았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세대론이나 멘토들이 쓴 책들을 외면해오다가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구입한 책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이다. 일단 저자 엄기호가 요즘 청춘들을 기죽이는 전설의 시대인 80년대 학번이 아니라 ‘낀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학번이라는 점, 게다가 의사도 변호사도 교수도 아닌 박사과정 수료의 시간강사라는 점에 끌렸다. 수업 보고서를 통해 이 책을 함께 쓴 덕성여대와 연세대 원주캠퍼스의 학생들이 이 선생에게 기죽거나 혹은 선생을 과도하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대대로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이 책이 세대론에 대한 책이 아니며, 20대에 관한(about) 책도, 20대에게(to) 쓰는 책도 아님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이 “지난 2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라고, 학생들은 선생과 ‘with’의 관계에 있는 “시대에 대한 앎의 지적 파트너”라고 말한다(20쪽).

그렇다면 이 책은 혹시 요새 유행하는 대화를 통한 힐링을 목표로 하는 서적은 아닐까? 하지만 학생들의 글과 선생의 분석 혹은 비평이 이어지는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이 크게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잉여’라고 ‘한심하다’고 자조하는 그들의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선생도 이들에게 자기긍정을 요구하거나 잉여의 조건을 변혁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역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책을 함께 만든 지적 파트너들 사이의 거리, 불일치 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선생의 시선을 역설에 이르게 한다. 선생은 중고등학교의 폭력과 억압을 부정적으로 보여준 후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약력을 보면 그는 대안학교 선생도 했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 한다”는 고백도 한다. 그리고 폭력적 교육과 비폭력적 교육의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116~121쪽).

또한 그는 서사적 사랑을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는 청춘을 위해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163쪽). 몸을 최고의 아이템으로 여기고 다이어트에 몰두하는 세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성적 상품화에 대한 인권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 “그들의 귀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겹고 고리타분한, 후지고 하나 마나한 말씀이 된 것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한다(185쪽). 그래서 책 제목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아니오’로도 읽을 수 있고 ‘예’로도 읽을 수 있다.

역설적 상태란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을 뜻하는 진동 상태이다. 사랑을 예로 들자면, 모든 파트너는 서로 사랑한다는 규정과 함께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동시에 내릴 수 있다. 연애 기간이라 불리는 시간 동안 한시도 의심의 여지없이 열정을 불태운 커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기간 내내 서로를 연인이라 부르는 것은 탈역설화를 위한 노력, 즉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헤어지자’라는 말을 되도록 내뱉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엄청나게 높아진 시대인 ‘현대(modern)’에는 아무리 권위적인 규범이나 질서라 하더라도 결코 역설적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놀라울 정도로 견고한 질서 – 화폐경제, 법의 지배, 대의제 민주주의, 일반 교육 등등 – 가 유지되어온 이유는 진리, 권력, 화폐, 법, 인권 등의 가치가 탈역설화 메커니즘을 잘 발달시켜왔고 그것이 학문, 정치, 경제, 법 등 각 고유 영역에 따라 잘 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선생과 학생들의 글 속에서, 특히 각 장의 마지막에 선생이 던지는 의문을 읽으면서, 더 이상 탈역설화가 쉽지 않은 시대 상황을 읽어내었다. 민주주의의 정당성, 인권의 정당성,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숭고함 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지만 의문에 처해지는 것, 돈과 사랑의 경계, 진리와 돈의 경계 등이 희미해져버리는 것 등이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청춘의 변화이다. 아니 세대론을 넘어서서 본다면 우리 시대의 변화이다. 사실 중년층이 청춘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고스란히 더 이상 20대의 자신처럼 살고 있지 않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옛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이것이야말로 대안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변화를 어느 정도는 감수하는 태도 혹은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쩌면 모호한 듯 보이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내뱉은 정치적 주장이나 도덕적 판단에 대해 수시로 이차 관찰을 하면서 역설적 상태 속에서 진동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현대성의 위기

 
현대 사회는 그 이전 시대의 사회들과 비교해 너무나 비개연적인 일들을 달성해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하는 일, 전혀 다른 수준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같은 종류의 학교에 다니면서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선생으로부터 함께 배우는 일, 출신 가문과 무관하게 학교를 통해 쌓은 경력에 기초해 조직에서 역할을 부여받는 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라도 진리의 영역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평범한 문외한으로 취급받는 일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달성된 것들이며, 그래서 쉽게 다시 역설에 처할 수 있다. 현대성은 그 현대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 논리의 귀결로 위기에 이르게 된다.

사랑을 예로 이 위기를 짚어보자.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권기돈 외 옮김, 새물결 펴냄)을 읽어보면, 사랑의 코드화의 출발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즉 두 파트너 모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덕(virtue)이나 아름다움이 사랑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한다’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부정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때, 현대적 연애가 성립한다. 그리고 사랑은 성애와 결혼을 함축하되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은 돈, 권력, 진리 등과 무관해짐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부정의 가능성들 덕분에 엄기호가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말하는 사랑의 서사가 가능해진다.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다시 도전하고 맺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등등이 이어질 수 있으며, 이 서사에서 사랑 바깥의 요인들은 원인으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이렇듯 부정의 가능성 위에 성립했던 사랑은 이제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는 도전에 처하게 된다. 사랑 혹은 친밀성이 어차피 거래라는 분석, 그런 거래를 주선하는 정보업체의 등장, 서사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결혼에 이르기 어렵기에) 즉각적 성애를 추구하는 경향, 자기서사가 불가능한 인격들의 등장 등이 그러하다. 임시적인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엄기호의 질문도 그런 도전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런 도전에 대응하는 태도에는 정답이 있는가? 이런 도전을 순수한 사랑의 훼손이라고 도덕의 타락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고리타분한 자,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매달리는 자, 영원한 사랑이라는 사기극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자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도전을 그대로 수용하는 자는 속물, 인격성의 포기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두 극단 사이에서 뭔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대안들 중 보편화 가능한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랑이 거래라는 도전 앞에서, 임시적 사랑도 사랑이라는 도전 앞에서, 나는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답할 수 없는 역설에 처한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이 책을 현대의 역설 혹은 현대성의 위기의 징후로 읽는다면, 이 책은 요즘의 20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서사를 추억으로 간직한 40대도 지금 사랑의 역설로 괴로워하며 살 수 있으며 임시적 사랑으로 서사적 사랑의 관념에 도전하며 살 수도 있다. 또한 퇴직당한 후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은 이 책에 나오는 대학생들처럼 자신들을 ‘잉여’라고 부를지 모른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견고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액체 현대”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한국적 맥락에서는 87년에 성립된 현대를 위협하고 있다. 아주 쉽게 ‘탈현대’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역설에 처한다. 인권, 민주주의, 사랑, 일반 교육 같은 것들을 나는 고루하게 고수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요즘의 20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는 중년층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평생 ‘을’인 운명, 우리는 벌레다![철학자의 서재]

?카프카의 <변신>[철학자의 서재]

 

윤지선 (한철연 회원·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갑을관계 속, 을의 퇴행 관찰기

 

2013년 남양유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하여 불평등하고 위압적이던 갑을관계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대한민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팽배한 갑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 불평등한 신분 사회로부터 얼마만큼 나아갔는가? 갑을관계란 본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자율적인 두 계약 주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 사이를 규정짓는 힘의 관계가 출발선에서부터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의 구도로 불평등하게 설정됨으로써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이익과 권리의 배분 또한 불합리한 방식으로 한쪽에만 편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갑을관계 논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상하종속의 위압적이고 불공정한 권력 구도 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로서, 과연 대한민국은 과거 전근대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갑을관계란 자본주의적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재편성하고 있진 않는지 심각히 되물어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은 폭력적 갑을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노동자, 을-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퇴행 관찰일지에 해당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전에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에서 보험담당관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육체적·심적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 왔으며 상해를 입은 그들이 망치를 들고 가서 회사에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회사 측에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사회적 안전장치도 보장되지 않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카프카는 노동 소외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지옥을 발현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묵시록을 써내려간 예언자이기도 하다.

▲ <변신·시골의사>(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용주와 노동자, 임대주와 세입자, 남성과 여성, 프랜차이즈 대기업과 대리점주들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강자는 더 강하게 약자는 더 약하게 진화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약자, 을들의 도태·퇴화관찰지인 동시에 강자, 갑들의 괴물적인 몸 불리기에 관한 이면의 기록서이기도 하다. 매일 이른 새벽 출장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잠을 설치며 깨어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신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갑의 갖은 감시와 억압, 부당한 권력행위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무게마저 초경량화되어 취급되는 을의 처지가 점차 퇴화되고 도태되는 벌레로의 퇴행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대한 문어발식 확장과 가진 자들의 폭식증적 몸 불리기와는 반대로 뼈와 살이 노골노골해질 정도로 착취당하는 약자들에겐 뼈와 살이 한 겹으로 녹아든 것 같은 딱딱한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벌레로의 진화만이 남은 것인가? 일하는 벌레, 돈 버는 벌레, 착취당하는 벌레로의 고단한 삶에 두 눈을 꿈벅이며 곪은 상처를 핥으며 ‘억울하면 갑이 되어라’라는 문구에 세뇌되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다만 나약한 자기 탓-못 배운 탓, 못 가진 탓, 못난 탓-으로 여기며 자기분노를 되삼키게 하는, 이 멋진 자본주의 정글에서의 약자 수난기가 우화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사회경제적 생존게임에서 착취되고 도태된 약자가 유일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은 자신의 방이며 가정이다. 자기 방 안에 유폐되어 일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히키코모리도 카프카적 의미의 벌레로의 퇴행의 한 형태이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영역인 자신의 방은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명예퇴직자, 장애인, 노인들의 쉼터인 동시에 외부 활동 영역이 철저히 제한된 감옥으로서 기능한다. 벌레가 되어 피할 도리 없이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 그레고르 잠자의 위기는 곧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위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가계부채의 덫, 가족구성원의 무덤

 

“부모님이 지고 있는 빚만 갚아드릴 수 있는 돈만 모아진다면, 아마도 5~6년쯤 지나야 될 일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결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일어나야만 한다. 기차가 5시에 출발하니까” (<변신·심판-세계명작131>(유한준 옮김, 대일출판사 펴냄) 16쪽)

벌레로 변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그레고르 잠자의 고뇌에 찬 되뇌임을 읽으며 마치 현재 대한민국의 소시민의 걱정거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국내 가계부채가 1000조를 육박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부채를 권하는 사회, 부채가 필수악인 된 사회이다. 자녀 사교육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위해, 내집 마련을 위해, 장가를 가기 위해, 노후 대책을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이른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영원한 약자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대출을 감행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출근을 채근하러 온 지배인의 가정방문에 온 집안 식구들은 잠자의 결근으로 인해 행여 그가 해고를 당하여, 사장에게 진 부채를 갚지 못해 모두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부채의 도식은 포식자의 덫의 도식과도 유사하다. 포식자, 가진 자가 던져놓은 미끼인 고리대금을 자신을 위한 달콤한 미래의 양식으로 착각하여 다가오는 피식자, 못 가진 자들의 헛된 희망은 단시간 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으로 바뀐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출처: louisien.com


 

그레고르 잠자는 부채의 덫에서 온 가족을 살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앙상한 다리들과 더듬이로 이루어진 낯선 몸뚱이를 이끌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직원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자기변호를 쉴새 없이 읊조리며 자기 방문을 열고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 출몰한다. 더 이상 쓸모 없게된 앙상한 벌레로 퇴화한 그의 출몰에 지배인은 아연실색하여 도망치고 가족들은 힘겹게 기어 나온 그를 다시 방 안으로 쫓아버린다. 그는 하루 아침에 한 집안의 가장에서 일할 수 없는 불구자로 바뀌어 방 안에 감금되어 버리고 만다. 벌레로서의 낯선 사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레고르에게 과연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다 퇴화한다. 그러나 복지 사각지대는 오롯이 가족이 책임진다?

 
‘인간은 항상 진화하고 성장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25세를 기점으로 노화를 시작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적·정신적으로 퇴화하며 그렇게 서서히 소멸의 시점으로 다가간다. 젊은이로 사는 것보다 노인으로 인생을 사는 시기가 훨씬 길어진 인간에게 육체적·지적인 퇴행은 명백한 자연의 이치이다. 소위 ‘정상인’으로 판명된 자들에게 신체적 운동 능력이 둔화되고 지적인 활성화가 더뎌지는 퇴행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더디게 진화하는 자들에게 유난히 혹독한 나라이다. 장애인들, 노인들, 무직자들,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우리사회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방 안에만 숨어산다.

타인들과 소통하는 언어를 잃고 소위 ‘정상인’의 습성들을 망각해나가는 벌레로 퇴행한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진화의 속도에서 이탈된 사람들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그레고르의 누이와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의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위해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들어내는데,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초상화 액자 하나만은 사수하고자 고군분투한다. 비록 모든 사회적 소통 수단-상호 대화와 자기 실현 가능성을 잃고 직립보행에서 기어 다니는 처지로 바뀐 그이지만,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가 가진 존엄성의 마지막 보루로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만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가격당하고 만다. 진화의 속도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주는 먹이를 먹고 조용히 순응하는 밥벌레로서 충실한 것이다.

절대적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이렇게 일체의 사회적 삶에서 유리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내던져 진다. 오로지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조력 없이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장애인들과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들은 가족들과의 소통에서도 철저히 제외된 채 방목과 사육을 당한다. 그레고르의 늙은 아비는 수위로 재취업하고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바느질삯으로 가정을 돕고 어린 누이는 학업을 이어나가지 않고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 빚을 갚고 가정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시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돌보야만 한다. 방 안에 유폐된 그레고르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홀린 듯 기어 나와 거실에서 음악을 향유하다가 집 안의 하숙인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벼랑끝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가 가족 공동의 평안과 미래를 좀먹는 위협 요소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예전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혀 곪고 부패하여 그가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온가족은 오랜만에 나들이를 떠나고 한결 가벼워진 미래를 향해 기지개를 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한 사회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위와 복지에 무관심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때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그들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끝내는 가족조차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몰락하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카프카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묵시록과도 같다. 약육강식의 사회, 가계 부채의 덫, 복지 사각지대의 유일한 보루로서의 가족의 희생, 사회적 약자들의 도태 등과 같은 화두는 탐욕스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들이기에, 카프카의 <변신>은 오늘도 여전히 현대적이다.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8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8월 월례발표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후기: 박은미 (건국대)

 

 

 

어렵다. 책 제목 너무 멋있는데 멋있는 만큼 내용이 어렵다. 토론 사회를 맡은 죄(?)로 6만원이 넘는 거금을 책값에 투여하고 두꺼운 책을 마주 했다. ‘으와 좋겠다, 광제형은…이렇게 멋있는 강해서를 내시다니! 나는 흉내도 못 내겠는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강연회에서 나는 사회를 보느라 내 질문을 삼켜야 했다. 열띤 질문을 비집고 사회자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후기라기보다 사회자의 못 다한 질문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이해가 맞는가 하는 확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후설 연구서로 『의식의 85가지 얼굴』(그린비), 퐁티 연구서로『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등을 써오신 내공으로 이제 퐁티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사르트르 강해까지 쓰셨으니 현상학을 거의 다 훑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으로는 쓰지 않으셨지만 하이데거와 푸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사르트르에까지 이르셨으니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철학의 제 1의 물음이 ‘도대체 이 모든 것은 왜 존재하는가?’임은 철학에 관심 가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이 문제가 궁금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사실은 이 질문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리도 외로운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든 모르든 말이다. 자기 안의 어두움이나 막막함을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왜 존재해서 이렇게 고통스럽냐는 말이닷!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은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특히나 이 질문을 상당히 성실히 물고 늘어진 역작이라 생각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즉자 존재의 우연성’을 열심히 입증하고 있다. 존재는 단적이다. 존재가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은 인식에서 나온다. 이 놈의 존재는 인식과 상관없이 ‘그저 있다’.

ⓒ 박영미

“존재는 그 자신으로 꽉 차 있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존재는 그 자신에게 불투명하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존재가 스스로를 의문시한다면 이미 그 존재는 그저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제 선생님은 강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존재의 충만으로 보고, 그 존재의 감압에 의해 의식 즉 대자가 생겨난다고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쉽게 표현할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를 기를 때 나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행복하다’고 의식하지 못했다. 지나놓고 보니 행복했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고 재주를 하나씩 늘려 갈 때마다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 성장에 순수하게 기뻐하면서도 나 스스로 기뻐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도 생활비 걱정, 어르신들 걱정이 있었으니 다른 걱정거리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기뻤던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인식은 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늦게 찾아오기 때문인 것 같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영국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한지 어쩐지 판단할 새 없이 그 순간 충분히 행복해서 행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행복하기에 바빠 행복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참으로 인식에로 저주 받았다. 행복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행복이 달아날까봐 무서워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 순간에 대한 걱정을 미리 당겨 함으로써 행복을 상실한다. 행복할 때 그저 행복하면 좋을 것이다. 슬플 때 그저 슬프면 될 것이다. 왜 나는 슬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편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이 맞다. 인간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표상 때문에 괴롭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면 되고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중뿔나게도 그 놈의 인식을 해댄다.

그러니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이라는 책 제목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렇게 이해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런데 인간 인식이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즉, 존재로만 충만하지 않게 되는 순간, 간극이 현상적으로 존재해버린다. 그래서 이 간극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해진다. “즉자라는 존재 속에는 최소한의 공백(le moindre vide)도 없다. 즉 무가 끼어들 수 있는 최소한의 틈(la moindre fissure)도 없다.” 존재에 이 놈의 무를 집어넣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다. 이 놈의 무를 집어넣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두면 될 것을!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로 살면 될 것을! 그게 바로 해탈일 것인데 말이다….

무를 집어넣지 않으면 현존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순간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대자적인 신적인 경지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의 삶을 이끄는 우리로서는 끝없이 존재와의 완연한 일치를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조광제 선생님의 설명은 해탈 열반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나도 잊고 너도 잊고 나와 너의 관계도 잊는 순간을 인간은 영원히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런 순간을 단지 순간으로서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므로!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P.S. 조광제 선생님께서는 박은미 선생님의 질의에 대해 ‘잘 이해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학술1부장)

“나는 왜 엄친아가 아닌가” 수치심 키우다가는 결국…[철학자의 서재]

?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자책 속에서 배회하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바라던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의욕을 갖고 링에 올랐지만 연타를 얻어맞고 주먹을 날려보지만 매 번 헛방만 날리는 복싱 선수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보내는 시간도 많아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서점으로 향한다. 볼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둘러본다. 늘 보는 전공서적들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기만 한다. 오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으므로. 대신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이리저리 둘러본다. 한참을 지나도 별 소득이 없어 그만 나가서 한의원에서 침이나 맞자고 생각하던 그 때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내가 내 편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과 함께 시선은 그 책에 멈추었고 어느새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자신을 책망하는 횟수가 전보다 잦아지던 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예상해본다. 나의 이익, 혹은 의지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사례들을 다룬 것일까? 과거에 한 행동을 후회하고 돌아보는 내용일까? 아니면 분열적 자아정체성을 말한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외로움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내 예상이 빗나갔어도 좋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미덕이고 그것이 자기발전의 덕목인 줄 알던 내게 냉정한 자아비판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이려고 해도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본격적으로 저자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정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의 TED 강연은 조회수가 900만을 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도 심리 분야 최장기 베스트 1위였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힐링 코드로도 읽히고 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강연으로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아 TED 담당자로부터 ‘스토리텔러’로 소개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 매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복지학 연구자로서 수년간 수백 명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면서 얻은 결과를 애정을 가지고 풀어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학술적 노력도 많이 기울여진 책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강연 주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수치심’이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이 책의 주제이자 브레네 브라운의 평생 연구 주제다. 저자는 이 ‘수치심’을 나의 가장 큰 적이 나 자신이 되는 이유로 지목한다. 따라서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관련 사례 제시와 분석을 통해 밝히고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분석을 바탕으로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수치심’은 연구자인 저자만 흥미를 갖는 단순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심리적 고통이 심해 치료사나 상담사를 찾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 서로 관계 맺고 사는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모두의 이야기다. 이제 왜 그런지 살펴보겠다.
 
 

2. 수치심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36쪽) 이 정의에서 눈에 띄는 말은 ‘소속감’, ‘가치’다. 수치심은 어딘가로 숨고 싶은 일시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과 연결되며 이 고립감 역시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결되면서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더 나아가 항구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수치심은 나의 ‘존재’ 자체와도 연결되는 감정, 스스로의 결점 때문에 나의 ‘존재’도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치심은 그 결점 때문에 존재의 가치조차 깎아내리는 감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죄책감과 구분한다. 죄책감은 ‘행동’에 국한된 것인데 반해 수치심은 ‘존재’로 확대된다. 이를 테면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한 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이고, ‘나는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야, 난 바보 같고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다.(43쪽)

잠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책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바보’, ‘머저리’, ‘못된 놈’ 따위의 비하적인 말을 쏟아 내며 머리를 쥐어박거나 스스로를 때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행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또한 자기반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통념 속에 이끌려 행위 자체를 넘어서 나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 좋은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쉽게 하게 된다. 물론 반성 없는 삶은 잘못된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없고 더 큰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행위에 대한 반성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해버리는 것도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어떤 잘못을 했다고 수치심까지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은 내 마음 속이 아닌 외부의 환경에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 떠올려보자. 우리는 교육을 목적으로 혹은 상대방의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치심을 자극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적 목적을 위한’ 선의를 내세우지만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은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기 십상이다. 학습 열등생이든 실적이 떨어지는 회사원이든 오랫동안 가사만 돌보던 전업주부든 누구에게도 성적이나 실적을 향상하라고 사회로 나아가 자아를 찾으라고 한답시고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비하는 발언을 한다면 오히려 결과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 충격으로 마음을 닫고 위축되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그 고통을 발산할 수 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개개인의 내면이나 개별적인 상호접촉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25쪽)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는 어떤 문화일까? 우리는 ‘사람이란 자고로 ~~~해야 한다’, ‘~~~이 좋은 것이다’라는 유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은연 중 이런 말들은 우리 삶의 잣대가 된다. 문제는 그 잣대가 과도하고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할 때 발생한다.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 언제 어디서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슈퍼맨, 일과 가사 모두를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 언제나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심성도 착한 모범생 등등. 이런 것들은 상업적 욕망에 의해 가공되었거나 주변의 지나친 기대에서 나온 이미지들이다. 수치심은 내가 이런 기준에 미달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할 때 생겨난다. 완벽해 보이는 혹은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힘겨울 때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 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면 수치심은 점점 자라난다.
 
 

3. 공감과 유대로 수치심을 떨쳐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수치심의 정의 중 한 단어에 주목해본다. 그것은 ‘소속감’이다.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내가 세상 어디에도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감은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에도 해를 주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저자는 강연에서 미국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비만, 중독, 약물남용 등이 수치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타인에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고립감을 동반한 수치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좋지 않은 감정을 타인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왜 공연히 폭식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그르치며 타인을 해치기까지 할까?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디에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되므로 위험한 것이다. 나의 상태, 나의 마음에 대한 타인과의 공감은 그래서 당연히 수치심의 해결책이 된다. 공감을 위해선 말하는 사람의 용기와 듣는 사람의 자비가 중요하다. 용기 있게 말하고 자신의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사람은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시야를 더 넓혀서 본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어 단절과 고립감도 해소할 수 있다. 듣는 이는 ‘나도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공감을 해야 한다. 자칫, ‘비평자’의 태도로 상황을 해설하거나 평가하려 들거나 심지어 심한 말로 자존감을 허무는 언사를 한다면 수치심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말한 사람은 그 자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단절과 고립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이 회고록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너 착한 놈이다’라는 말만 들었어도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선생님은 돈을 안 가져왔다고 욕설을 하며 ‘빨리 꺼지라’ 했고 그 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변명이 섞여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학생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선생님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악마’를 자라게 했고 결국 그 학생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범죄자가 되었다. 이 경우는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이 개인의 심리적 고통을 넘어서서 사회 문제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을 보여준다. 반면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낸 한 유명 프로파일러는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비슷한 환경에서도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두어서도 그것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차분히 돌아보아 그 원인을 찾아내서 감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경험을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두었다가 만약 수치심이 유발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빨리 빠져나오도록 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졌는데 저 혼자만 이겼다고 웃는 아큐의 자기기만적 ‘정신승리’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도 주변으로부터 벽을 쌓는 길이다. 용기 있기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타인과의 공감을 형성해서 유대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문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완벽주의도 나를 수치심에 빠뜨리는 덫이다. 앞에서 말한 모델, 슈퍼맨, 슈퍼우먼, 다재다능한 모범생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 매우 어려운 모습이다. 당연히 누구나 될 수 없다. 누구나 결핍이 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성장의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결핍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강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271쪽) 실제로 저자는 현장에서 학생들에게도 강점을 찾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엄격한 태도, 완벽을 강요하는 풍토 속에서 수치심을 방지하고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되어 수치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4. 나를 괴롭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라

이 책의 논조는 균형적이고 포괄적이다. 우선 연구서이면서 교양서이고 심리서이면서 사회문화서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별하면서 과도한 문제의식에 빠지는 원인을 지적해서 과한 자기반성이 자기붕괴로 나가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들이 불행하게 느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 원인을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찾아낸다. 개별적인 대화나 마음 다잡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동시에 유대감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며 누구나 소속감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특정한 출신, 종교, 국적, 혈연 등 집단정체성에 기대어 형성되는 ‘전형화’는 개인에게 덧씌운다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지적한다. 그 대신 공감을 매개로 공동의 노력과 개인의 심리회복 노력을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 나도 스스로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완벽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문화비평적 시야에서 지적하는 데 그치거나 저항하자고 선동하는 대신 완벽주의 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일러준다.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대화하고 매체를 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능숙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미덕이라고만 간주되었던 엄격한 자아비판, 의도가 좋다는 핑계로 묵인되거나 권장되기까지 한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과 훈육 등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유익하지는 않다. 붕괴될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르는 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대화하는 일에 우리는 여전히 서투르고, 모두를 해치는 삶의 방식들도 방치되어 있다. 그 후과는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크고 작은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 나조차 내 편이 아니게 만드는 익숙한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이성이 짓밟은 그들의 외침, “침묵을 지킬 순 없었니?”[철학자의 서재]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

 

송종서(한반도 동북아 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4년 8월 말에 어떤 ‘거인’이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그때 나는 중국 양쯔강(揚子江)의 중류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몇 년째 졸업 논문을 준비하다가 그곳의 여름을 견디다 못해 잠시 고국으로 피서를 와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늦여름 저녁 무렵 서울에서 거인과 마주앉았을 때 그는 땅거미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두 거인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너와 느낌을 나누고 싶다. 그림책이라 금세 읽지만, 조금씩 천천히 읽어도 좋아.”

 

▲(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디자인하우스

거인과 마주 앉았던 장소나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이제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가 건넨 책의 표지를 보면서 느낀 이상야릇한 기분은 아직도 뚜렷하다. <마지막 거인>(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묘하다. 거인이 거인에 관한 책을 주다니. 실상 그의 겉모습은 ‘거인’과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키도 크지 않고 몸집도 왜소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먹는 양이 적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확실히 모든 면에서 거대한 느낌을 준다. 때문에 나는 그를 무의식적으로 거인이라 여겼고, 이 느낌은 나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 누구나 이런 거인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 ‘거인’이라 부르든 ‘영웅’이라 부르든 자신이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을 간직하고 산다. 그날 <마지막 거인>이라는 책을 선물해준 사람이 내게 바로 그런 거인이다. 내 거인이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비장한 제목이 지금도 현실의 내 거인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날 자신이 건넨 동화책을 애지중지 바라보던 저녁 어스름 속의 거인은 슬프고 가라앉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그는 푸르스름한 황토색 표지 속에서 널따란 등을 드러내고 저 멀리 구름인지 아득한 산악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거인 안탈라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이제 다시 보면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안탈라의 등허리와 팔다리와 뺨은 온통 어지럽고 복잡한 무늬와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마지막 거인의 문신이 내 거인 속으로 옮겨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피부는 대기의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살랑거리는 미풍에도 몸을 떨었고, 금갈색 태양 빛에도 이글거렸으며, 호수의 표면처럼 일렁이다가, 폭풍 속 대양처럼 장엄하고 어두운 색조를 띠기도 했습니다.” (46쪽)

거인은 지평선만큼이나 평온한 목소리로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낯선 사물을 마음속에 들이는 데 민첩하지 못한데다, 자꾸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거인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거인과 책 속 거인의 유사한 느낌에 자꾸 사로잡혀서일까. 흙의 빛깔을 닮은 그 거뭇하고 거칠한 음성과 동화책 표지를 물들인 황토 빛깔이 한눈에 겹쳐지면서 주변 공기가 뭉쳐진 느낌이랄까,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거인들이 사는 나라

처음 선물로 받은 날 밤에 멋진 그림들에 빠져 연신 책장을 넘겨보기는 했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학술 자료들과 논문 걱정으로 이야기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크리스마스가 돼서야 이 동화책을 보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저자가 12~13세 어린이를 생각하고 지은 동화책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화라고 느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화자(話者)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가 되었다. 나는 탐험가이자 지리학자로서 1849년 9월 29일 아침에 동인도 회사의 낡은 무역선을 타고 영국을 떠나 흑해의 원천에 있는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갔다. 나를 거인족의 나라로 이끈 것은 이전에 부둣가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거인족의 어금니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금니 뿌리 안쪽에 새겨진 미세한 지도였다.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천신만고를 겪었다. 수많은 희생과 죽을 고비를 넘고 겨우 도착한 그 골짜기는 거인들의 묘지였다.

나의 탐험은 순전히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학자로서 이제껏 누구도 얻지 못한 최고의 성취감과 빛나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계곡의 지형도를 제작하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일일이 세어 본 해골의 수는 백 십여 개였지만, 땅 속에 더 많이 묻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두개골에는 기이한 돌덩이가 모자처럼 얹혀 있어 제례 의식의 대상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전부 다 삼사천 년 전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종족이 전멸하게 된 이유만이 여전히 풀어야 할 신비로 남아 있었지요.” (36쪽)

거인족의 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 바로 문신이었다. 거인족의 몸에는 혀와 이까지 포함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구불구불한 선, 소용돌이 선, 뒤얽힌 선, 나선, 그리고 극도로 복잡한 점선들로 이루어진 정신없이 혼란한 금박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환상적인 미로에서 식별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무, 식물, 동물, 꽃, 강, 바다의 모습이 그것이다. 거인 아홉 명의 몸 전체에 그려진 그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문명과 그 적들

나는 가장 키가 큰 안탈라의 등에 그려진 아홉 명의 거인들 틈바구니에서 열 번째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내 실크 해트는 19세기 서유럽 남자의 상징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최초의’ 학문적 성과를 적잖이 이룩했다. 그 성과들은 유럽인의 눈으로 본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고 쓴 것이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 모든 대륙을 우리는 ‘탐험’을 한다는 구실로 거침없이 넘어 들어갔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원주민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면 살육의 대상일 뿐이다. 하마터면 나도 “사람 머리를 절단 내는 기이한 습성을 가진” 와족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우리는 세계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들을 죽여야 했다. 원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은 그렇게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구상 모든 대륙의 80퍼센트가 유럽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신(神)의 은총을 받지 못한 그들의 ‘쓸모없는 땅’에 복음을 전파했고, 신에게 제사 의식(cult)을 거행했으며, 그곳을 쓸모 있는 땅으로 경작(cultivate)했다. 이것을 ‘문화(culture)’라고 부르거나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한다. 이런 선진적인 유럽인이었기에 내 모습은 항상 ‘실크 해트’로 상징된다.

그러나 내가 만난 거인족은 유럽인들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우선, 그들은 미지의 땅을 탐험할 때 내가 가장 중시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그러므로 거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은 그야말로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과 처음 만난 때를 회상해 보면, 나는 거인들의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한 나머지 정신을 잃었다. 그 짧은 순간 내가 환영처럼 본 것은 나를 향하여 기울어지던 거대한 돌기둥의 그림자였고, 환청처럼 들은 것은 그 돌기둥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노래였다. 거인들은 이방인인 나를 정성껏 돌봐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그 모든 악몽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꿈으로 변해”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돌봐 주었다. 또 내게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알려주고 그들의 음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

“거인들은 식물, 흙, 바위를 아주 가끔 먹었습니다. 난 그네들이 운모판 가루를 뿌린 편암으로 맛있는 파이를 만들거나 장밋빛 석회 조각을 앞에 놓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준비 과정을 비밀에 붙여 가며 자기들이 특별히 만들어 낸 국을 맛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큰 강의 진흙처럼 혀에 엊혀 화산의 용암처럼 불타오르다가 숲의 부식토 같은 뒷맛을 남겼습니다.” (48쪽)

거인들의 몸에 그려진 나무, 꽃, 짐승, 강, 바다의 무늬와 형상은 그들이 한밤중에 하늘을 향해 부르던 노래에 대지가 화답해 그려 준 “악보“였다. 노래가 우주를 향한 기도였다면 문신은 우주 자연의 응답이었다. 나와 유럽의 탐험가들이 미지의 땅을 정복하면서 그림 그리고 문명을 새기는 존재라면, 거인족은 대자연의 신비를 노래하며 그림 ‘그려지는’ 존재다.

“(…)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뒤섞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유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가냘픈 변주, 순수한 떨림, 맑고 투명한 비약으로 장식된 낮고 심오한 음조로 짜여 있었지요. 무심한 사람의 귀에나 단조롭게 들릴 그 천상의 음악은 한없이 섬세한 울림으로 내 영혼오성의 한계 너머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연히 나는 오래 전부터 별들의 움직임과 하늘을 세심하게 관찰해 오던 터였지요. 그래서 일종의 이중어 사전을 기획하고는 각각의 별자리에 상응하는 음악의 소절을 붙여 주었습니다.” (42쪽)

나, 루트모어 아치볼드 레오폴드는 이 거인들의 문신을 “진정한 노래”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결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한 덕담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이제 남은 일은 그들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학문적인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학술은 내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내 숭고한 학문이 저 고귀하고 아름다운 거인족을 파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인족의 파멸은 내가 “신들의 축복을 받은” 덕분으로 거인의 골짜기를 발견한 뒤 “학문의 숭고한 임무”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생생한 인상을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그려” 낸 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거인의 눈물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거인족의 노래와 더불어 지낸 지 열 달이 지나면서 나는 런던의 밤하늘이 그리워졌다. 비록 거인족의 삶은 굳건하고 완벽해 보였지만 내가 그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감미로운 노래와 몇 날이고 계속되는 힘겨루기 퍼레이드에 그만 진력이 났다. “거인 친구“들은 이런 내 심정의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침 그들도 사랑을 나누고 깊고 오랜 잠을 자야만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제각기 작은 호박 조각을 나에게 선물했고 거기에 소중한 마법의 힘을 실어 주는 듯했습니다. 난 점토 찰흙으로 만든 조그만 조각품을 끈에 매달아 일일이 걸어 주었습니다. 거인 친구들이 그토록 자주 웃으며 바라보았던, 우스꽝스런 실크 해트를 쓴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었지요. 안탈라와 제울은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저를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난 눈물에 젖은 거인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54쪽)

내가 이 책의 화자가 되어서 진술하는 마지막 말은 여기까지다. 그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암시했듯이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것은 화자에게 너무도 익숙한 거인 안탈라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나온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그것이다.

만약 저자가, 거인족의 나라를 떠나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면 이 책이 1990년대 프랑스의 각종 어린이 도서 부문, 문인 협회, 도서관 협회, 나아가 독일, 미국의 여러 문예 잡지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힘은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저질러 온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학문과 이성이 기실 어떻게 세계를 마름질했는가를 성찰하고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성찰은, 이 책의 화자가 그랬듯이 왜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생긴 뒤에야 나오는 걸까?

죄 없는 인류를 수없이 살해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주의자들이 모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뒤늦은 후회나 반성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의미 있는 작용을 일으키려면 지식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도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만행과 유사한 강대국의 폭력은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세계화’니 ‘자유 무역’이니 하며 형태를 바꾸어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의 권리를 침해한다. 학문에 종사하고 지식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폭력의 형태와 얼개는 점점 더 세련되고 복잡해진다. 나의 거인이 내게 이 책을 선물한 이유를 요즘에야 조금 알 것 같다.

전쟁 선포했던 북한, 사실은 세계평화를 원한다![철학자의 서재]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

 

이정은(연세대학교 외래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불안한 사회에 살면서도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안한 정세 때문에 외부 투자자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나라가 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종군 기자를 급파하게 만드는 나라가 있다. 외부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난리법석인데, 정작 내부에서는 조용한 일상만 반복되는 이 나라, 그래서 급파된 종군 기자들이 본국으로 송출할 전쟁 기사를 쓰지 못하는 이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

급파된 종군 기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이해당사자인 이 나라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전쟁 불감증에 걸려있기라도 한 것인가? 무덤덤함을 일상적 태도로 만든 요인이 있을 테고, 그 요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상상 가능하다.

전쟁 도발 운운하는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원한다기보다는, 전 세계인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관심과 신경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다. 도발 가능성이 높은 집단도 평화와 안정을 갈망한다는 것에 귀추를 주목해 보자.

무서운 전쟁 무기나 핵무기는-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도-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대국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만약의 사태를 위한 대비용이다. 전쟁 대비는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지켜낸다는 데 목적이 있지, 전쟁 도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강한 몸짓은 평화를 실현하고 싶다는 우회적 몸짓이다.

우회적 몸짓은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그들을 한 국가(state)로 인정해달라는 것, 달리 말하면 침략국 지위를 벗어나서 독립 국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정당한 국가로서 소통하는 국제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렇듯 ‘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전쟁을 운운하게 할 만큼 중요하다. ‘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끊임없이 구사하는 점에 주목하면,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형태와 그로 인해 펼쳐지는 국제 관계는 ‘국가’라는 단위와 국가 수준의 상호 소통을 필히 요구한다.

▲(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자본 팽창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의 고유성과 근원성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고진은 문학 비평을 통해 국가 논의를 점차로 구체화해 나간다. 특히 후기로 이어지는 <트랜스크리틱>(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나 <세계 공화국으로>(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도식을 만들고,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역할과 평화로운 국가 관계를 구현하는 방법, 즉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고진은 그러한 고민과 사상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인터뷰 형식으로 출판된 <정치를 말하다>(가라타니 고진·고아라시 구하치로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보여준다.

한반도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일본도 대미 관계에서 국가의 자존심과 굴욕적 상황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민족적 자존심을 우리랑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진은 고민의 출발점을 1960년대 ‘일미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을 벌였던 상황에서부터 설명한다. 그는 이 세대를 유럽의 68세대와 같은 세대라고 규정한다. 일본의 학생 파워가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신좌익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발휘되었으며, 이 당시에 ‘국가’와 ‘네이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한미 관계도 국가 간 문제와 남북 민족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면서 우리네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 간 상호 인정의 틀에서 동등한 한미 관계 문제를 고민하게 됐지만, 아직도 미진한 면이 많다. 하지만 남북 문제에 뒤따르는 민족 문제는 한반도가 고진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전쟁 발발과 관련된 세계 평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평생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그 뒤의 행보를 이끌어간 사상적 변화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를 말하다>는 우리네 삶을 위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진은 “일본이 메이지 이래로 봉건 사회에 존재했던 자치적인 개별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전부 전체 사회로 흡수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달성”(153쪽)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중간 계급이 지속적으로 소멸했고 ‘대의제는 귀족정’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몽테스키외의 주장에 비추어 보면, 중간 계급의 소멸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고진은 “중간 세력이 일본에서 거의 소멸한”(156쪽) 2000년을 돌아보면, 일본은 데모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주의 실현에서 맹점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바다 건너 한국에는 데모가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표한다.

고진은 중간 계급이 소멸하면 민주 정치가 점차 전제 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는데, 이런 우려를 한국 사회에도 적용하거나 예단할 수 있을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진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 행위’를 찾는다. 그는 “대의제만으로는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실제 아메리카에서는 데모가 많습니다. 선거 운동 그 자체도 데모 같은 것입니다. 데모와 같은 행위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160쪽)라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팽창이 극에 달하고 있어서 국가가 자본으로, 정치가 경제로 환원되며, 국가와 정치가 자본과 경제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런 상황이기에 더욱 더, 고진은 자본과 구별되는 국가 및 네이션(민족)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한다.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국가라는 단위의 독립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잘 생각해 보면, 자국의 안정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를 펼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를 실현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세계적 차원의 평화라는 착상이 없이는 자국의 평화도 보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진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면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하는 데 통찰력을 주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심취한다. 칸트의 세계 시민 사회와 세계 국가를 ‘세계 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발전시키면서 ‘트랜스크리틱’을 펼쳐 나간다.

그는 9.11 이후에 특별히 더 국가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동체 관계에서는 ‘국가’가 본질적임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분석하면서 국가의 본질과 기원을 추적하면 “국가는 처음부터 다른 국가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간 경계가 해체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다른 국가와 무관하게 일국만의 국가 지양”(99쪽)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아나키스트적 공산주의가 국가와 민족 문제에 걸리면 자꾸 넘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기반으로 ‘국가를 넘어서는 대안’을 탐구해야 하며, 그래서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사회와 세계국가’로 나아간다.

왜 칸트인가? 고진은 공산주의라고 해도 ‘어떤 이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이념을 강력하게 설정할 때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마르크스에게도 공산주의 이념은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칸트가 말하는 ‘구성적 이념’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구성적 이념으로 오인했기 때문에 소련식 사회주의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고진은 이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 나간다.

칸트가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을 구별하는 것은 규제적 이념에 구성적 이념을 적용할 때 이성의 폭력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이자 이성의 폭력’이다.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구성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이념을 휘두르다 스스로 좌절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념 일반에 대한 원망”(72쪽)을 터뜨리는데, 그 결과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나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칸트와 마르크스의 규제적 이념과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것 때문에 칸트와 마르크스를 통한 ‘트랜스크리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진은 자신의 복안을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비판을 받아들인 후에 코뮤니즘이라는 형이상학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가 불가결했던 것입니다.”(74쪽)

물론 고진이 칸트를 결정적으로 도입한 것은 정치적 대안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자본주의 팽창, 신자유주의 효과는 경제 문제와 정치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사태는 1970년대 선진국에서 발생한 이윤율 저하, 만성 불황이라는 위기에서 시작”(126쪽)되었는데, 지금 상황은 선진국의 내구 소비재 보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새로운 자본주의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고진이 보기에, 이런 활로를 개척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대한 의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신제국주의”(126쪽)라고 진단한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 ⓒ송태욱

자본 팽창 속에서 신제국주의를 포착하는 고진이 ‘국가와 네이션’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고민과 맞물려서 고진이 지적하는 것이 걸프 전쟁(1991년)이다. “소련의 붕괴, 냉전 구조의 붕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 걸프 전쟁”(76쪽)이었고, 국가 간 대항 세력이 없으면, 일방적 국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구 평화론은 혁명을 목도하면서 전쟁 위협을 뼈저리게 느낀 칸트가 결국 국제 관계는 평화 운동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평화 실현은 국가 관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 공화국’이라는 국제적 대안이 있어야 현실력을 갖는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진이 이렇듯 칸트를 대안으로 삼은 데는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칸트 이면에는 윤리를 ‘주관적 문제’로만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75쪽)로도 생각한다는 자각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성의 근간으로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주장하는 데, 타인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타인을 목적으로 대우할 수 없는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 구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를 타개하고자 “상인 자본을 게재시키지 않는,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76쪽)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이다. 그리고 칸트는 아무리 정의로운 사회라고 해도, 경제적 궁핍이 심각하면, 인간의 목적성과 존엄성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본다. 경제적 궁핍을 해소하는 대안이 필요하며, 그것은 정치 행위를, 그래서 국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풍요로움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각 공동체를 ‘한 국가’라는 단위로 인정하고, 국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국제 관계와, 국제 관계의 연합된, 통일된 이념적 장치-물론 규제적 이념적 장치-로서 세계 공화국을 고찰해 보자.

그렇다면 전쟁과 분쟁을 원한다는 북한에게도 독립된 국가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될 수도 있다. 우회적 몸짓을 통해 평화를 보여주는 북한, 이런 우회적 몸짓을 읽어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우회적 몸짓을 애써 무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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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 & 나치 식 경례, 학생들을 욕하지 마라!

김일옥·한상언의 <욕심쟁이 왕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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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01. 반성하다.

‘철학자의 서재‘에 원고를 싣기로 했다. 갚지 못한 원고 빚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철학 공부’를 업으로 삼겠다고 나섰다면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쓴 소리’가 되든지 ‘단 소리’가 되든지 혹 ‘잔소리’가 되든지 간에 말이다. 나는 철학함의 진의(眞意)가 적어도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튼 천장 끝까지 책이 빽빽하게 쌓여 있어. 뭐, 이깟 책을 도둑놈이 삶아 먹겠어? 아니면 이불처럼 덮고 자겠어? 도둑놈은 ‘책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지. (13쪽)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먼지 쌓인 책장을 꼼꼼하게 뒤진다. 서평소개할 책을 고르는 엄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마주한 자리다. 먼저 너무 가벼워 보이는 책들은 넘어간다. 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철학자다움(?)’이 살포시 풍기는 그런 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무겁지 않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가볍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어야 한다. 학위논문 준비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티를 좀 내줄 수 있는 주제라면 완벽한 선택일 테지.

▲(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 ⓒ별숲

물론 ‘철학자의 서재’에 별도의 투고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은 전혀 없다. 다만 ‘철학자’라는 주체와 ‘서재’라는 공간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오묘한 시너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도 철학자인가?’에 대한 성찰(?)을 먼저 해야 하고, ‘서재’라기엔 너무 초라한 책장 앞에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을 뒤져야 한다. 과하지 않아서 좋은, 묵향(墨香)이 솔솔 나는 그런 책을 찾기 위해서.

글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게 눈꼴이 시었지만 도둑놈은 꾹 참았어. (15쪽)

소름이 돋았다. 문득 학부 시절 후배의 절규가 떠올랐던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고, 좀 멋져 보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포장하면서 가식을 떨려고 분주히 움직이다가 문득 10년도 더 지난 그때,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게로 왔다. 예리한 비수는 깊은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철학자들의 심오한 시부렁거림에 기죽지 말지어다.” 반성해야지.

#02. 동화를 읽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책은 가장 최근에 몰입해서 읽었던 책으로 하자. 이왕이면 중간에 포기한 책 말고 끝까지 정독했던 책으로 하자. 그리고 읽어가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나가자. 그래서 택한 책이 <욕심쟁이 왕도둑>(김일옥 글, 한상언 그림, 별숲 펴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진진한 도둑놈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동화의 매력이란 생각보다 놀라웠다.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배울 수 있었는데, 먼저 내 어휘 능력의 형편없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였다는 것. 대학에서 강의깨나 한다고 자부했는데 생소하고 헷갈리는 어휘들을 만난 것이 여러 차례다. 가장 놀랍고 창피했던 때는 ‘알나리깔나리’가 표준어라는 사실을 난생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웃음) 혹시 당신은 아직도 ‘얼레리꼴레리’가 표준어라고 생각하시는지?

책의 뒤표지에는 요약된 넉 줄의 이야기와 배경 삽화가 있었는데 동화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것은 마치 영화 광고에 ‘영화헤살꾼(스포일러, spoiler)’이 버젓이 등장해서 줄거리를 줄줄 읊어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만약 실제로 그런 광고가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많은 어른들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이런 과도한 친절(?)이 책을 읽고 싶도록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동화는 줄거리 자체가 재밌어서 어른들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13년 전,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 이후 아주 오랜만에 단숨에 읽은 책이다.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도 아니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의 ‘슬픔’도 아니었다. 순전히 소소한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꼼꼼하게 정독을 해도 30분이면 다 읽는 분량이지만. 집 근처 도서관에서 아이보다 더 동화책에 열중했던 엄마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나중에 터졌다. 읽기는 재밌게 읽었는데 막상 서평을 쓰려고 생각하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라고 했던가? 서평을 쓰겠다고 컴퓨터를 켜고 맨 처음 했던 짓(?)이 국립국어원에 접속해서 ‘도둑’의 사전적 의미를 찾는 것이라니. 사람은 쉽게 안 변하나보다.

‘욕심쟁이 왕도둑’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걸렸다.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헤아리기 어려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제목을 보여주고 의미를 추측해보도록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재미나다. “그러니까 결국 왕이 도둑놈이라는 거 아니야? 때가 때이니만큼 그런 의미로 나온 책 아니겠어?”, “도둑놈 성씨가 왕씨(王氏) 아니야?”

#03. 도둑맞은 학생들

▲ 논란을 불러일으킨 합성사진.

얼마 전의 일이다. 모 대학 디자인학과 학생들이 만든 합성사진 한 장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배경으로 삼아 나치 식의 경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는 어른들을 경악케 했다. 문제의 모 대학이 강원도에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3년째 출강을 하는 학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수업을 통해 만났던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체로 수업에 충실했으며 밝고 명랑했다. 전체적인 학업 분위기도 좋아서 수업 내내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만한 심각한 철부지 집단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욱일승천기’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깃발로 일본의 군국주의의 야욕을 형상화한 깃발이 아니던가? 위안부 문제처럼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이 아직 해결되지도 않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전범의 상징을 도용할 수 있는가?

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 주, 씩씩거리면서 학교로 향했다. 강사 휴게실에서 앉아서 어떻게 혼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강사의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 아니 어떻게 욱일승천기로 디자인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라며 들어가는 강의마다 잔소리를 해댄다는 것이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학생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문제의 사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치 식의 경례 모습은 실제로 연출한 것이고, 배경은 컴퓨터 작업을 통해 삽입된 것이다. 만약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넣지 않고 단지 나치 식의 경례만을 사진에 담았다면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와 나치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라면 어땠을까?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공격은 ‘나치 식의 경례’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었던 학생들의 잘못이라는 게 결국 ‘나치 식의 경례’와 ‘욱일승천기’의 무게감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함에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서 이 둘의 함의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별다른 의식 없이 혼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접근은 달라져야 한다.

2005학년도 수학능력시험부터 국사 과목은 선택과목으로 전락했다. 필수 과목이 아닌 이상 학생들이 공부할 이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도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과목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당시에 이들은 모두 초등학생들이었다. 일제강점기도 모르면서 ‘뽀로로‘만 좋아한다고 역정을 내시는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다면 달라졌겠지만 대부분의 초등학생 중에 ‘일제강점기’ 따위에 관심을 두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우리의 역사는 늘 선택과목이었다. 즉, 그들에게 근현대의 슬픈 역사는 머나먼 이야기로 치환된다.

교양으로라도 일제강점기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보통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현재 연세가 90이 넘으신 분들이다. 문제의 학생들과는 7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둘이 만나서 당시의 아픔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럼 텔레비전이나 영화, 책에서 배울 수는 없을까?

일본의 극우 세력이 과거의 만행을 합리화할 때, 우리는 입으로만 ‘역사 왜곡 하지마라’고 떠들어댄다. 정작 자기 나라 아이들에게도 필수로 내세우지 못하는 역사 따위를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가르치든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역사를 배울 기회조차 빼앗긴 아이들과 그것을 빼앗은 도둑놈. 배우지도 않은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고도 틀렸다고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과 그런 비판을 하고 있는 도둑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도 치욕이다.” <논어> 중 ‘태백’ (황희경 옮김, 시공사 펴냄)

동화책 한 권 읽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욕심쟁이 왕도둑>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동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참 다행이지만 현실과는 너무 다른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나뿐일까?

일제의 치하에 있을 때나 해방된 이후에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불길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진정성’ 타령만 하지 말고, 나만의 정치 시작하자![철학자의 서재]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휠체어 한 대 열 변호사 부럽지 않다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며, 대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례로 많이 인용되곤 한다. 얼핏 보면 클린턴의 구호는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시장은 이미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를 바탕으로 서술되는 모든 주장들은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장은 마치 블랙홀처럼 작용한다. 복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 시장의 잣대에 의해 고려 대상이 되는가 하면 교육 문제가 시장의 논리에 파묻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의식의 물신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며, 의식의 물신화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의식의 물신화는 우리 삶의 문제를 시장의 결정에 맡겨 버리고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현상이 하나 있다. 비중 있는 재계 인사가 범법 행위와 연관된 피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면 휠체어에 의존한 모습을 보이거나 입원을 핑계로 사법 처리 일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형사 사건에 연루될 경우 변호사보다 의사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연해 있는 방법이다. 설명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울 것 없던 사람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고, 풀려나게 되면 모든 병이 순식간에 완치되는 기적을 너무 기뻐서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최근에는 몇몇 재벌이 재산 헌납이라고 하는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재력가인 대통령 후보까지도 대선 후 재산 헌납을 약속하기도 했다. 재산 헌납 약속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보고 초등학생들에게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면 자기 용돈을 털어 피자 사주겠다는 공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푸념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근본적인 좌절감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현재의 삶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경제적 가치의 독점이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독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 모두 돈 잘 벌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그래서 오히려 절망스럽다.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희망은 삶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신의 책 <불안한 현대 사회>(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에서 현대의 불안 요인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는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탈주술화(탈종교)의 경향과 더불어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둘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삶의 목표들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관한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가치가 삶의 모든 의미를 대체하고 있으며, 도구적 이성의 만연 역시 시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시장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것 역시 시장의 구조적인 메커니즘 안에서의 자유일 뿐 시장을 벗어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시장은 종교를 대체하고 이성의 기준이 되고 정치를 사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 사회가 다시 종교적인 도덕적 지평의 회복을 통해 이러한 경향성에 저항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의 다원성 혹은 다양성을 아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가치를 고수하는 종교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 역시 종교의 역할에로 논의를 집중하지는 않는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의 불안을 도덕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진부한 도덕 만능주의로 경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경제 논리의 가치 독점적 전횡과 시장의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정치의 복원 혹은 복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다룰 수 있는 영역이며,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과 요구를 삶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의제 정치의 논리 하에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지를 주지도 않으면서 기업에게만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주곤 한다. 사용자에게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면 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비용도 늘어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해고도 자유로우며 고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저렴한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계약의 두 주체인 사용자와 노동자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부당 노동 행위가 적발되어도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개인별로 소송을 벌이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루한 법적 분쟁이 이루어지는 사이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들은 부모님 집에 맡겨진다. 이미 국가의 법이 이런 지경에서 노동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연대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 삶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가?

 

노동 쟁의 시 적용되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연대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제한은 재개발과 관련된 쟁의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있다. 정부의 공권력은 항상 인정된 소유권만 보호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여하의 노력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입자와 지주들 간의 분쟁에서 지주들은 용역을 고용하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지만 세입자들의 경우 자발적인 연대 세력의 도움도 금지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당연히 소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정책들과 무관할 수 없다. 토지건물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들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세입자들의 생존권은 무형적인 것이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노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졌던 사업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재산권에 대한 보호라는 명분으로 기업이 노조에 대해 파업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행위는 정당한 노동 기본권조차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우 정치적 연대조차도 제한을 받는다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은 재산권 행사자들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흔히 복지를 거론한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가난한 독거 노인들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악용해 싼 값에 파스사고 그것을 팔아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인 양 보도되는 현실에서 복지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급기야는 2008년 2월부터는 파스 유가 국민건강보험에서 비급여 약물 보조제로 지정되었다. 복지 정책이 마치 부유층의 자비를 강제하고 그 덕에 사회적 약자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약자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시장주의자들의 도덕적 자부심만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비용을 더 많이 책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비굴하게 만들어야 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공항이나 고속도로와 항만 등과 같이 공적인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회 간접 자본을 많이 이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업과 부유층이다. 복지는 엄연히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동점심의 윤리나 이타심과 같은 원리로 설명되는 도덕적인 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해 줄 유효한 수단을 마련하는 단서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도덕적 관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상류층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강화하고 부자들의 자선이나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 등을 촉구하는 긍정적 힘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접근은 그것을 실천하는 개인을 칭찬할 만한 근거일 뿐 시장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 지도층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선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내일 다시 그들의 자선을 기다려야 하는 사정은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결코 자기 결정의 자유와 끝까지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정성에 호소하는 태도가 자칫하면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등의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은 모두 정치적 행위의 영역이다. 또한 그것은 직업적 정치인들의 정치가 아닌 자기 결정의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정치를 의미한다.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 보이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 혹은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시장에서의 삶은 인간의 정치적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각자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는 듯하지만 시장 안에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허구다. 시장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산된다는 점에서 다원화된 기준들이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만 다원주의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정치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을 고려하면서도 다양한 삶의 가치를 고양해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역할들은 정부 주도의 계몽이나 정책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홍보 등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는 분명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 속에서 당당한 생존권의 향유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목표는 결과로서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 결정의 자유를 실천함으로써만 자기 결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아주 적게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과 연관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의 투표권조차도 실질적으로는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투표 시간 연장 문제도 정치권의 셈법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몇 년에 한번 주어지는 투표권의 행사는 유효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삶의 문제가 정치적 일정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와 선거 기간 사이는 대중들에게 근본적으로 정치적 실천의 휴지기에 불과하다. 정치가 정치 엘리트들의 직업적인 행위를 일컫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태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결정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라면 정치적 실천이나 정치적 행위는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정치의 한계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로 극복되어야 한다.

손톱만큼의 우월함으로 연대를 비웃지 마라?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사회적 연대가 보장을 받아야 한다. 정당 간의 정치 공방이 아닌 엘리트 정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공세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공세’는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닌 권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는 기득권에 대항해서 정치적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유일한 힘이자 수단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노예제를 200여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요령 중에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노예들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예속적인 노예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가능성은 연대에서만 비롯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를 예방하는 유효한 수단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차별성을 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주가 소작농을 관리할 때 마름을 두거나 소작농 간에 차별을 두어 연대를 예방했듯 노예주들은 노예들의 처지에 차등을 두어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영세 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은 모두 연대를 어렵게 하고 불신을 형성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연적인 것일까? 아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도의 운영을 도움으로써 결국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마저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의도적이다. 노동자의 권익이나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 전반의 제반 문제는 외면한 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이해에만 매몰된 노동 운동은 연대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없으며 연대를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노동 운동이 노동 운동 이외의 정치적 행위 결사들로부터 불신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노동 운동은 정치적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질서에 대한 편승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문제를 파업의 머리끈 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결국 집단 이기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의 도덕성 문제로 해결할 수는 없다.

연대는 연대 세력들 중 가장 열악한 처지의 세력들에게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 이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자의 자기 결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 가장 시급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 우선성을 두는 연대의 조건이 확립되어야 하며, 그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 해결의 결정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관철될 때 소득 증가보다는 자연 갯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픈 어민의 삶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유지될 것이며, 실직자의 자녀들이 상급학교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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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기종’도 모르고 ‘스펙’ 쌓으면 뭐해?

미셸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김정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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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 없는 ‘자기 계발’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펴냄)에서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자기 계발서 수요의 구조적인 조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근대’는 모든 개인에게 ‘입신’과 ‘출세’를 과제로 삼게 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의 개별 주체로서의 권리와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직장에서 남들과 교통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인정과 성공이라는 재화는 제한되었으므로 남들보다 나은 개인의 자원(즉 학벌과 교양 같은 상징 자본, 화법과 사교술 같은 테크닉)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같은 필요의 총칭이 ‘처세’이다. (…)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대학생이나 재테크에 열중하는 주부만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모든 ‘자기’들은 ‘자기’의 모든 것,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아보고(알기, 성찰), 관리하고(관리, 경영), 발전하게 하기 위해(계발, 자조) 노력한다.” (<1960년을 묻다>, 377~379쪽)

흔히 말하는 ‘각자도생’의 일환으로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을 읽는 셈이다. 그런데 관리하든 발전하든 간에 매뉴얼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제품 인식이 먼저이다. 무턱대고 엉뚱한 기종에 다른 매뉴얼을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인데, ‘자기 계발서’라는 실행 지침서를 적절히 사용하려면 자신의 ‘기종’부터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계발’하려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또한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낸다고 할 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1982년 버몬트 대학에서의 강의에서, 성의 금기와 제약 등을 다루면서 금기를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선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강의가 담긴 책 <자기의 테크놀로지>(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은 금지를 지키든 위반하든 간에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해야하는 의무를 갖게 됨을 들춰낸다. 그렇지만 자기 계발에 대해서도 그러할까. 우리는 각자도생을 위한 ‘자기 계발’의 강요 앞에,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먹고 살려고 하는 수 없이 내맡겨 버리는 체념은 아닐까.

 

▲(미셸 푸코 지음, 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근대 개인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요구되는 ‘자기 계발’은, 푸코의 분석을 이용하자면 ‘자기 해석‘과 관련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무엇을 어떻게 스스로 계발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가 계발된다고 해도 계발되는 것은 ‘처세’이지 자신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진리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장치가 강제되지 않는 한 진실만을 말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란 도무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줄로 알았는데 막상 성취되니 실은 그걸 원한 게 아닌 경우를 겪곤 하지 않는가.

대번에 연상되는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흔히 주제 파악을 하라는 즈음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델포이의 이 신탁은 인생에 관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기술적인 권고, 즉 신탁을 듣기 위해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네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지 말라’를 의미하였다. 다른 해설자의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신탁소에 조언을 청하러 갈 때 정말 질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을 의미했다.” (38~39쪽)

그러나 물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신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당연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960년을 묻다>에서 전형화되어 드러나듯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다.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보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이 배려해야 하는 자기란 무엇인가?”

 

푸코는 자기를 해석하는 일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주목한다. 고대에 자기인식이 자기 배려에 따른 것이며, 이때의 자기 배려란 영혼을 돌보는 행위에 신경 쓰는 일이라고 정리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몸이지 자신이 아니며, 하물며 몸이 사용하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더욱이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 누구나 의문을 갖는, 영혼을 돌본다는 게 대체 무얼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얼마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혼을 돌보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제시한 점이다. 얼핏 자신을 돌보는 건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무관심일 듯싶은데, 오히려 자신에 대한 배려야말로 정치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영혼은 신성한 요소(영혼의 원리, 혹은 본질)에 대하여 관조해야 한다. 이렇듯 신성한 관조 속에서 영혼은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기반을 설립하는 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정당한 정치 행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원리이며,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영혼이라는 신성한 요소를 관조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가가 될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배려를 추구하는 행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은 정치 활동과 결합되었다.” (48~49쪽)

한나 아렌트가 ‘말하기의 무능력, 생각하기의 무능력, 판단하기의 무능력’이 만연하는 악을 만든다고 말했듯,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규칙’을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일일 뿐 아니라 공적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의 양자택일

 

겉보기에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관심은 흔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구분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연 얼마나 현재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뤄볼 문제이다.

푸코에 따르면,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I>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영혼에 대한 인식이고, 이는 정당한 행위 혹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관조와 연관됨을 드러냈음에도 이미 고대에도 플라톤의 해결책과는 달랐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다. 말기 헬레니즘과 제정시대에 이 문제는 별도의 대안책으로 제시되었다. 즉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 (49쪽)

흔히 연상되는 자기에의 전념이 내면으로의 침잠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배려는 새로운 자기 체험을 포함한다. 자기 체험의 새로운 형식이 출현한 시대는, 내성이 점차 세분화되었던 기원전 1, 2세기이다. 글쓰기 작업과 의미심장한 관찰 사이에 연관관계가 생겨났다. 생활과 기분, 독서에 세부적인 주의가 기울여졌고, 자기 체험은 글쓰기 행위에 의해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험 영역의 문이 열린 것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 정신의 움직임, 자기 분석에 대한 (…) 세세한 관심이다.”(52쪽)

이제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는 일상생활의 “하찮고 세부적인 사항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세부사항이 바로 우리 자신-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55쪽)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의 올바른 행위나 정당한 행위를 사색하며 관조하는 일이 제거된다. 이는 로마 제정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있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면, 이제 “자신을 보다 잘 배려하려면 정치와 결별하여야 했다.” “정치 생활과 무관계한 자기 자신에의 배려의 보편성”(57쪽)이 등장한다. 이것을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는 “영구적인 의학적 배려가 되었다. 한순간의 그침도 없는 의학적 배려는 자기에의 배려의 핵심 사항의 하나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57~58쪽)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자기 배려 모델이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계발 그리고 그 대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볼 시간이다. 아마도 큰 무리 없이 ‘자기 계발’에의 몰두는 몰정치적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올바른 행위를 숙고하고 판단하며 고민하는 일은 매우 불편할뿐더러 인간관계의 갈등을 초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 개발과 원만하고 인상적인 대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에서 어떻게 올바름에 대한 고민의 틈이 있겠는가. 당장 능률적인 일처리와 협력 관계를 재고한다면, 올바름을 머릿속에 떠올릴 새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거나 그릇된 일이라는 클레임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지는 식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돌볼 만큼 한가롭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삭제할수록 일처리는 능률적이다. 정당한 행위의 관조도 없이, 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 계발’되고 있는 셈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자신의 죄를 사하고 진정한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중세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는 이미 결별한 시대에 살고 있는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도식이 성립한다면, 자기 계발되면 될수록 자기 배려와는 멀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이지만, 그것은 글쓴이의 능력을 벗어나 있는 일임을 고백하면서 다음의 문제제기를 음미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푸코가 자기를 다루는 기술의 역사 혹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역사를 탐구하게 된 것은 베버의 의문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을 진실된 원리에 기초하여 규제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금욕에 대한 이성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금욕에 승복해야 하는가?”

푸코의 의문은 이러했다.

“특정한 종류의 금기가 어떻게 특정한 종류의 자기 인식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가?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에 관하여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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