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세 명의 대학생이 『자본론』을 읽기 위해 모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자본론』을 읽으며 더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본론』을 읽으면서 읽은 내용이나 이들에게 남은 살아있는 얘기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남기려한다.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내가 읽는 『자본론』]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얼마 전 아주 어린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형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 수년 전이었기에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다. 근황을 묻고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변화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함께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고, 우리 모두 달라져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형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의 역경을 한참 설명하더니 “내가 살아보니 인간이란 게 다 그렇더라… 사람이 원래 그런 거야..”라며, 흔한 꼰대식 조언을 무심하게 던졌다. 그 순간 문득 든 엉뚱한(?) 생각,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탐구해도 규명해내지 못했던 (인간에의) 정의를 저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꼴에 철학을 전공한다고, 내 머릿속엔 나름의 철학적 의문이 샘솟은 것이다.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왜 웃느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형의 얼굴 너머로 더욱 커다래진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도대체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한 계기로 시작된 철학적 의문은 이후 수일간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의 답을 찾고자 여러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던 명쾌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서양철학은 대부분 ‘신’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인간을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동양철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사조나 ‘실존주의 철학’ 등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듣는가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내 궁금증을 명쾌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종의 인간적 특성에 집중하는 문학적 사조의 느낌이 강했으며, ‘실존성’이나 ‘자유의지’ 같은 인간의 추상적 특성을 무조건적으로 전제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명료한 존재론적 해석 방식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래 『자본』1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테두리 밖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마르크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였다. 『경제학 철학 수고』의 내용적 얼개까지 확인하자, 비로소 머릿속에 분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 맞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내 궁금증 역시 절대적/고정적 실체를 요구하는 본질주의적 발상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조심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정적 실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특질을 토대로 인간 본성의 방향성만을 시사하고 있었다. ‘유(類)적 존재’ 그리고 ‘노동’이라는 두 키워드는 기존 철학 사조들의 인간관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관이 질적으로 상이함을 암시했다. 마르크스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로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를 분명히 한 후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인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더불어 인간을 수동적 존재나 조건적/의존적 존재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넓게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본인이 근 몇 년간 꾸준히 탐닉해온 『자본』의 사상적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類)적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 ‘노동’은 인간의 본성과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인가?

반가운 만남 속 우연한 계기로 머릿속에 스며든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문득 찾아온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의문은, 본인을 휘감아 흔들었다. 나는 본질주의적 사고의 오류를 경계해가며 해답에 관한 힌트를 찾아 나갔다. 기존의 관심을 계기로 다시 들여다본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와 그 속에 묘사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경제학, 사회학, 또는 혁명적 정치학으로만 서술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저에 있던 인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철학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는 체계적 논의를 통해 인간 존재를 해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유(類)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담은 비교적 직접적인 개념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자 ‘類’는 ‘무리 지음’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어서 그 숨은 의미를 어렴풋이 암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무신론적 유물론자이자 헤겔 좌파였던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으로 그가 먼저 사용했던 ‘유(類)적 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유(類)적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은 마르크스 철학이 기존의 절대주의적 관념론의 인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 존재의 실체적 본질을 고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의 철학들을 비판하는 개념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철학에서 인간을 ‘종(種)’으로 설명하는 경향성을 비판한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학문적 조류는, 인간의 종(種)적 본질을 찾아 모든 개별 인간에게 하향식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론적 고전 철학의 흐름이 그릇된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앙상블:ensemble2)’로서 존재함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개개인의 인간이 그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형태의 어떤 종(種)적 본질만으로 형성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릴 적 동네 형을 오랜만에 만나 별다른 종(種)적 목적성 없이도 마주 앉아 웃고 떠들 수 있던 것은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맥락 위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적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생물학적 속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능동적, 의식적 존재인 셈인데, 이는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도 증명된다. 우리 주위의 개인적 인간들이 동물적, 종(種)적 본성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님, 우리 엄마, 내가 아끼는 친구들을 비롯해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은 종(種)적 본질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맥락의 총체로서 오늘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논의를 출발시킨 동네 형과 나 역시도 서로에게 사회적 맥락을 제공하며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類)적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실천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인간은 종(種)적 본성에만 지배받는 동물들과는 달리, 유(類)적 성격과 종(種)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의식적 사회 활동과 능동적 행위를 실천해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방향성이 나에게는 일종의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 존재나 도덕 등 조건적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으며, 매력적인 이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편, 포이어바흐에 의해 유(類)적 존재의 개념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오히려 포이어바흐를 비판하기도 했다. 포이어바흐가 설명하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적인 대상으로서 묘사될 뿐, 실천적 주체로서 설명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특히 더욱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種)적 특성을 고정적/실체적인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고, 유(類)적 성격이라는 특질로써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유(類)적 성격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계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 불변하는 실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 종(種)의 유(類)적 성격에 의거한 사회적 맥락의 총합으로 구성됨을 시사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인간의 본성적인 사회성과 능동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처럼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상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유(類)적 존재 개념 속 의미의 맥락이 모호하기 때문에 후대에 숱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고정적 실체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일각에서는 마르크스가 인간에게 유(類)적 성격을 부여한 것 자체가 인간의 고정적/실체적인 종(種)적 본질을 규정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구조주의적 시각에서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했으며, 훗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본인은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전반에서 매우 핵심적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 자본주의 비판의 단초로서 그의 사유 배후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결고리는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노동’은 마르크스 인간관의 이해를 돕는 두 번째 키워드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속 궁극적 문제의식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적 행위로서 ‘노동’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유 방식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입장이라면 의문이 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버텨내는 노동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행위가 된다는 것인지 의아할 테다. 앞서 마르크스는 직접적인 신체의 욕구와 본능적 생산 활동에 지배받는 동물과 인간, 또는 동물적 존재와 인간을 명백히 구분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자연 전체의 다양한 사물과 관계한다는 면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한 인간의 삶과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동물적 행위와는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오히려 자유롭다. 또 인간의 의식과 의지의 형성에 관계한다. 이때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의지적 노동의 행위는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유(類)적’ 성격의 행위일 테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만물에 ‘창조적 노동’을 행함으로써 ‘유(類)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자연을 확장하여 창조하거나 구체화하는 창의적 존재로 설명된다. 인간은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상화시키며 또 이 같은 대상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며 자신의 모습을 직관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속에서 의식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노동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특질이라 보았다.

따라서 노동 행위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라, 본디 인간의 ‘유(類)적’ 성격을 실현해내고 확인하는 즐겁고 자발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의 개념을 처음 접하고서 그의 사상 자체가 굉장한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의 ‘노동’론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이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지 암시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인간 특질로서의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 및 강압은 ‘노동 소외’3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외’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본질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는데,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성적 특질로서의 ‘노동’이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졌음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 행위’는 창조적으로 인간의 유(類)적 본성 혹은 의식적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보기 어렵다. 그저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수동적, 강압적, 비자발적 과정이 오늘날의 ‘노동’이다. 아끼던 형님을 몇 년 만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강압적 노동의 사회적 압박이 (예를 들면 취업 혹은 취업을 위한 대입 등) 나와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취직 문제로 수년간 고통 받았다던 형님의 씁쓸한 회상처럼, 우리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의 압박에 시달리며,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했고, 이제 어디에서도 ‘인간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리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서술을 마주하며 느낀 의문스러움은 ‘인간 노동’이 소외되어왔음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겠다.

본래의 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덧붙여보겠다. 앞선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 역시도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인간의 본성이자 유(類)적 특질을 드러내는 ‘노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가치’를 창출해내게 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는 이 ‘가치’(인간 노동)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에서, 줄곧 ‘인간 노동’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애초에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 ‘인간 노동 일반’에 있음을 전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적 상식이나 효용가치설의 기본적 구조와는 완전히 상이한 파격적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인간 노동’이 어떻게 기능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치의 착취에 놓이게 되는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인간 노동’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인간 본성으로서의 ‘노동’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노동’을 중심에 두고 ‘노동가치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애(愛)와 휴머니즘적 양상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사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나 인간 본질에 관한 논의는 마르크스&엥겔스 철학의 초기 저작에서 주로 등장했으며, (위와 같은 경제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게 되는) 후기로 갈수록 이는 사라지게 된다. 짙은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였던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후기로 발전해가며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이나 추상적인 헤겔식 독일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의 변모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앞선 논의의 견해들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들이 (후기에도) 여전히 ‘유(類)적’ 존재로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류의 본성적 경향성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점 격이었던 『독일 이데올로기』4의 면면에서 때때로 드러난다고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5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전, 후기 저서를 막론하여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활동성 및 실천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밑바탕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인간 노동’에의 논의가 핵심적 토대를 이뤄왔음은 물론이다.

이병창, 『독일 이데올로기』1・2, 먼빛으로, 2019.

이 같은 맥락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존재론적 측면에서만 유(類)적 대상으로 파악했을 뿐, 실천적 행동의 맥락에서 인간을 유(類)적 (감성적)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유(類)적’ 혹은 ‘감성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포이어바흐는 ‘유(類)적’ 존재 개념을 다수의 개별자를 단순히 결합시키는 내적인 보편성/통일성으로 파악했다. 즉 사회적 총체로서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맥락 속 계급 관계 등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관념론의 흔적을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인간의 본성을 실체적, 대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던 점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포이어바흐가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며, 사회 속의 인간적 계급 구조 형성의 필연성 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질이란 ‘유(類)적’ 성격과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대로 고정된 실체로서 형이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성격과 실천적 형태의 동적 인간 행위인 ‘노동’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명료화한다. 능동성과 창조성을 중요한 본래적 특질로 지닌 인간은, 사회성을 토대로 그 본성을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인간관에 흡족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자나 관념적 가치(이를테면 ‘자유의지’, ‘실존성’)에 의존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는 결이 다른 이론적 견해를 보였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인 인간적 관점에서 자신만의 인간관을 정립했기에 그렇다.

또한, 나는 그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서도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실례를 알고 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매우 반가운 만남이었음에도 동네 형님과 나는 무척 많이 달라져 있었고, 이는 우리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본질이 실체로서 고정되어있었다면, 형과 나는 예전처럼 본성적으로 통해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따라 구성됨을 설명했고 나는 내 생활세계에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로서 어떠한 실체도 고정화하지 않았던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강조한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역동적(능동적) 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갈망하던 종류의 인간관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사견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아마 그러한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여기까지 이끌 수 있음에 글을 쓰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색은 오늘날에도 어리고 미숙한 예비 철학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확장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근래에 공부 중인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생각(인간관)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는지 가늠할 기회를 얻어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유는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여기, 내게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인간관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철학자들과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필자 본인이 인간 본성에 대해 추측하는 바가 정확한 사실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하며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굉장한 의미가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외부의 객체적 존재들을 명확히 인식하겠는가.

비록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이 의문만 연속되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가치 있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논의를 이쯤에서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위 나와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각자 스스로의 견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일까?”


  1. 마르크스&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고전서

  2. 여기서 ‘앙상블:ensemble’은 불어인데, 독일인 마르크스가 흔한 독어 표현 대신 불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 마르크스가 ‘하나’로서의 합일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독일(독어)의 신비주의적 흐름의 뉘앙스에서 벗어나, 전체 속에 다양성과 개체성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소외’ 혹은 ‘인간 소외’ 현상의 양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2.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 3.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 4. 유(類)적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노동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생산물의 지배권, 노동 과정의 통제권, 동료 인간과의 본성적 화합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나아가 유(類)적 인간의 본성 자체도 소외당하고 있는 셈이다.

  4.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한다고 한다.

  5. 헤겔 철학은 기존의 사유 방식과는 달리 절대자 혹은 신을 역사 속에서 발전, 변화하는 주체적 존재로 묘사했다.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읽는 『자본론』]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은 노동을 해왔다. 수렵을 하고 채집을 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이전의 노동 형태와 현재의 임금 노동에 차이가 있다면,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전의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이 내 것이었고 임금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우리의 신체를 판다. 회사든 공장이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안에 머문다. 우리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월말에 들어오는 월급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자를 ‘자유로운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노동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것이고, 기저에서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of) 것이다.

많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자의 자유에 초점 맞추기를 좋아한다. 노동자 자신도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고, 자본가도 노동자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채용공고들 중 어느 곳에 지원할지 선택할 수 있다. 서점에서 알바할지 식당에서 서빙을 할지 고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까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고등학생 동창 중 최저시급이 7,530원이었을 때, 시급 5,50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일한 친구가 있다. 시급은 적지만 위치로나 근무 시간으로나 그 친구한테는 그나마 최적의 알바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최저시급 이하로 임금을 주는 곳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은 친구니까, 이는 착취라고 할 수 없을까? 아니다. 명백한 착취다. 친구더러 ‘네가 선택했으니까 너는 착취당하는 게 아니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다. 마찬가지로 편의점 알바를 했을 때다. 졸업한 고등학교 근처의 편의점에서 약 2주간 일한 적이 있다. 나는 계산대 지키는 일이 아니라 물건이 들어오면 선반에 진열하고 창고에 정리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해서 1시간만 일해도 체력이 바닥났다. 4시간 동안 천천히 하면 됐을 것을, 내 속도에 따라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이라 늘 2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갔다. 두 시간이면 당시 시급으로는 약 15,000원이다. 하지만 2시간 일해서 15,000원 받고,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께 그만둬야겠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게 한 시간 만큼의 임금은 제하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고등학생 때 받은 나름의 노동교육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찾아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부당하다고.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긴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나는 분명 노동을 했으니 내가 노동한 만큼의 임금은 주시는 게 맞다고. 어림없었다. 퇴짜를 맞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할까 고려했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나에게 없었다. 5만 원을 떼였다. 약 8시간 동안의 노동이 공중분해 된 것이었다. 내가 작은 빵집의 사장이었다면 8시간 동안 빵을 만들면 그 빵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이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명제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진정한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권리라고. 노동력밖에 가지지 못한 노동자는 결국에는 어떤 걸 선택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감내해야 한다.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free of) 노동자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노동의 노예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나를 위한 노동’으로 보았다. 노동의 과정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의 직접적인 생존과 나의 잠재력 실현의 수단이다. 그래서 노동이란 내가 필요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길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조절할 권리도 나에게 있어야 한다. 현대의 임금 노동에서 후자의, 나를 위한 노동의 요소들은 전부 제거되고 전자의,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노동만 남아버렸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퇴근해서야 조금의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는 이러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퇴근 후의 시간뿐이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국회의원과 정책 입안자들이 ‘완전고용’의 구호는 사실 틀렸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나 양적으로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다운 노동을 원한다. 하지만 이 요구는 너무나도 자주 무시당한다.

인간다운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요새 떠오르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란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직은 개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최근에 정부에서 실행한 재난지원금 정책이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조금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재난지원금을 통해서 우리는 만약에 기본소득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기본소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6년이었다. 내가 새내기가 된 해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이 개최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뭣도 모르고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봉사단에 지원해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스텝이 되었다.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발표자와 청중이 몰려왔는데 스텝의 특권은 강의실들을 기웃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에 애써 귀 기울여 보니,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썩 괜찮게 느껴졌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토지가 인류의 공동재산이라는데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해 쓸 만한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땅을 해당 농부의 소유로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땅의 개간자가 토지의 소유자가 되는데, 이때, 페인은 그 소유자가 땅의 진짜 주인인 공동체에 빚을 지는 것이라고 봤다.1 토지뿐만 아니라 대기와 데이터, 기술과 같은 유무형의 다른 재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우리가 진정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강렬히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맞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공동의 것인데 왜 누구는 그걸 가지고 부를 축적하고 누구는 굶주려야 하지? 우리의 노동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지?’ 그 이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회가 날 때마다 조금씩 공부를 했다. ‘기본소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유토피아적 세계. 하지만 알고 보니 기본소득은 또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출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s://basicincomekorea.org/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에서 내가 쫓아다니던 한 미남이 있는데, 브라질에서 온 길고 검은 곱슬머리의 ‘마르코’였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즐겨보던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서 이집트 파라오 군대를 이끌던 내 이상형과 똑 닮았었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한테 어렵게 말을 걸어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집에 가서 그의 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자기 소개란에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들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던 나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르코가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기본소득은 좌파에 의한, 그리고 좌파를 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본소득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물론 진보와 보수에서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보수는 기본소득 발상이 출발했던 ‘권리’의 개념보다는 ‘효용’에 더 집중한다. 생산력은 점점 증가하는데, 소비 주체는 줄어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순환의 위기에 대한 대안쯤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대신 복지의 축소를 주장하면서 시장 이윤의 재분배에 개입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기대하는 것이다. 진보 측에서는 기본소득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신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평등, 그리고 인간다운 삶 등이 진보 스타일 기본소득의 목적이다.

그러나 양측의 찬성 견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양측의 반대도 드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복지병을 걱정하거나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유발하고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 안에서는 논쟁이 더 복합적이고 치열한데, 진보에서 기본소득에 반대를 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부의 분배’라는 사회적 당위를 실현하는 방법이 기본소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부의 분배가 부자들에게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이 국가에서 주는 소득의 수혜자가 되면 국가의 주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통제를 받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는데, 이 주장은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오히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기회가 열린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맑시즘(Marxism)으로 넘어가면, 그 안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이 갈린다.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주장한 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이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견도 있고, 기본소득이 실시되어도 자본주의는 존속되며, 생산수단이 노동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주체성을 잃고 오히려 사회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해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에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마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을까? 혹은 취직할 나이가 되었으니,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엄두도 못 내기에 다음 생으로 미뤄두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걱정으로 의미 없는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이 뛰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시민정치에 더 많은 참여를 하거나 금요일 저녁,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밥을 차려줄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아무리 달콤한 상상일지라도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입장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양 입장을 전부 고려하면, 기본소득 시나리오의 결말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살아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자기가 좋아했던 소파 의자 위에 앉아 턱을 괴며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기본소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골똘히 고민할 것이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2012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던 다니엘 헤니는 기본소득이 결코 답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기본소득은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나와 공동체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삶에 관한 질문이다. 나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한 번에 해결할 답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대신,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되고, 이 질문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답이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새내기 때 자원 활동했던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관중 중에 일본에서 온 사회학 교수와 그 제자도 있었다. 순진했던 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제자가 웃어 보이면서 ‘그것은 누구나의 꿈이지요.’라고 했던 게 기억에 진하게 남는다.


<참고문헌>

다니엘 헤니・필립 코브체 저, 원성철 역,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 오롯, 2016.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천관율, 「진짜 뉴딜은 기본소득이다」,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1.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20~24쪽.

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내가 읽는 『자본론』]

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사회 대부분의 거래에 돈을 사용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돈은 중요하다. 돈이 많으면 좋다.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은 먹어야만 살 수 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돈벌이를 스스로 못하는 사람이 다 큰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이유도 이런 돈의 중요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막상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돈 버는 일이 즐거운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부양해야 할 사람의 안녕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지 돈 버는 일 자체가 즐겁지는 않다. 당장 내 주위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겠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님도 가족 부양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말씀하시지 그 자체가 즐겁다는 이야기는 안 하신다. 엄청 중요한 돈인데, 왜 막상 그 중요한 돈을 버는 과정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일까?

 

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돈 버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돈 버는 사람 중 절대다수는 임금노동자이거나 소상공인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판매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번다. 자신의 노동력과 돈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과 돈의 교환은 다른 교환과는 좀 다르다. 즐겁게 돈을 벌 수 없는 이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과정을 살펴보자.

 

교환은 왜 발생할까? 교환은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남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나에게는 필요하지만 남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기 위해 발생한다. 마르크스는 이걸 좀 어려운 말로 “모든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고, 그것의 소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사용가치다.”1라고 표현했다. 쌀농사를 짓는 나에게는 남아있는 쌀이 필요가 없지만 닭이 필요하고, 닭을 기르는 옆집 사람은 닭고기가 질려서 쌀이 필요하다면, 나와 옆집 사람은 자연스럽게 쌀과 닭을 교환할 것이다.

 

이런 교환이 누적되다 보면 사람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쌀을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보니, 쌀을 원하는 옆집 사람이 아니면 바로 교환을 할 수가 없다. 당장 나는 옷이 필요한데 만약 옷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쌀이 아니라 생선을 원하면 나는 옷을 구하기 위해 쌀이 필요한 어부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겪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환에 사용하는 상품들 전부의 가치 측정수단으로서 화폐(돈)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화폐가 등장하고, 교환과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화폐가 집적되어 자본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번다.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상품은 원소유자에게는 쓸모가 없기에 교환과정에 들어가 상품이 되어 돈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쓸모가 없으면서 남에게는 쓸모 있는 그런 상품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많이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밖에 팔 게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고, 소상공인이 된다. 문제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노동력은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죽은 사람은 일을 할 수 없다. 노동력은 인간의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실상 자신에게 매우 필요한 생명력을 파는 일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와 상관없이 당장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당장 나와 내가 부양하는 사람들의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팔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노동력은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들과는 다르게 원소유자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돈을 버는 걸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뇌와 근육을 원하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고 본인의 바람과 관계없는 곳에 써야 하는 현실이 우리가 오늘도 아침부터 출근이 싫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그 사이의 간극에서 당장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이 소유한 공장, 상점, 사무실에서 소모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지루해지는데,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기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까?

 

물론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현대 문명이 발생하기 전부터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수렵채집을 해야 했다. 또 인간은 자신이 살 집도 지어야 했고 자신이 입을 옷도 만들어야 했다. 아마 모든 노동을 로봇이 수행하고 그 과실을 온전히 인간이 향유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행해야 하는 노동은 너무하지 않은가? 자급자족 사회,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교환만이 존재했던 사회는 지금보다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노동이 자신에게만 인정받으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다시 한 번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렇다.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이 과연 타인에게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생산물이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않느냐는 오직 상품의 교환만이 증명할 수 있다.”2 내가 일을 해서 만들어낸 물건으로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게 나에게 만족을 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에게 필요한지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며 살아가는 지금 사회에서 내 노동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곧 자본이 그 노동을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노동이 자본에게 유용해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대가로 임금을 받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보다 자본의 필요에 자신의 삶을 맞춘다. 우리 주변만 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직장 일정에 자신의 하루 계획부터 연간 계획까지 맞춰야 하는 직장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 미래 노동력을 더 잘 팔기 위해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다.

 

자본은 사회 전체의 공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관심사 밖의 일이다. 자본은 인간 개인이나 사회보다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 가치 증식에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래서 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불리는데 필요한 인간 노동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투기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다 사회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공공부문 노동자나 기간산업 종사자보다 더 보상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자본 증식에 대한 기여도가 그러한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땀 흘리는 일상의 노동은 그 보상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하는 ‘가변자본’에 불과하다. 땀, 심지어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이런 노동에 대해 기적과 같은 대가는 없다. 그나마 그런 노동의 기회조차 부여잡기 힘든 시대. 여기에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래 우리 인간이 교환을 시작한 이유는 사실 우리 인간에게 그 교환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그 과정을 통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역으로 인간이 자본의 필요에 따라 교환과정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주식시장의 흐름에 따라 사회 전체가 출렁이는 지금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이런 현실이 과연 긍정적인 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 지금의 현실은 꾀 안 부리는 사람들이 힘들여 일해서 생산하는 재화와 가치들을 자본의 하수인들이 복잡하고 어려우며 자신의 손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금융상품을 통해 갈취하는 지옥도이다. 그래서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이다.

 

착취론 같은 거창하게 들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우리 주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열심히 팔아 모은 돈을 어디다 쓰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 사회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라고 표현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죄다 집세 내느라 부동산 투기자본한테 피땀 흘려 번 돈을 뜯기고, 어쩌다 돈 좀 모아 주식 몇 주 사면 투기세력의 시장 널뛰기로 혼란한 시장 틈바구니에서 투자금을 투기세력들한테 다 뜯기는 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현실이다.

 

그럼 거꾸로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돈벌이가 즐거울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의 공공복리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투기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보람차게 돈벌이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간극을 줄이고, 그 간극을 교란하는 불로소득을 최소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그 중요한 돈을 즐겁게 벌 수 있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을 읽고 쓰는 글이지만 『자본론』에 구체적이고 세세한 답이 있진 않다. 이 연재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본론』이 모든 문제에 답을 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자본론』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사회였던 때에 나온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금의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가치하다고 규정짓는 건 과도한 처사이다. 오히려 『자본론』의 서술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욱 놀랍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노랫말이 있다. 나는 수천 년의 인류 문명을 기초부터 지탱해온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명력과 노동력을 온전히 자신과 우리 모두의 공영을 위해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새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새로이 도래할 일하는 자들의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1.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112쪽.

  2.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112쪽.

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내가 읽는 『자본론』]

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나는 지금, 집 근처 24시 카페에 앉아있다. 끝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커피를 타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홀을 치우는 저 알바생분은 아마 새벽 파트타임 알바인지 매일 밤 내게 커피를 건넨다. 너무도 분주한 그가 안쓰러워질 때쯤 문득 이 곳에 일하는 알바생들은 과연 근로의 대가로 얼마를 지급받는지 알고 싶어졌다. 곧장 ‘알바천◯’에 접속해 확인한 결과, 이 곳에서 근무하는 알바생들이 1시간에 받는 급여는 놀랍게도 법정 최저시급인 8,590원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필자도 알바를 꾸준히 해왔다. 학교 앞 고깃집, 오목교역 앞 디저트 카페, 그리고 가장 최근까지 근무했었던 경희대 정문의 어느 회덮밥 집까지,., 알바 근무가 얼마나 고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 알바생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순간 마음이 아팠다. 저렇게나 열정적으로 걸레질을 하는 데도 최저시급을 받는다니,,, 그렇다면 저 열정적인 노동의 대가를 과연 얼마로 책정해야 합리적이고 정확한 수치라고 할 수 있을까? 시급을 1만원으로 인상하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커피 한 잔에도 정성을 쏟는 저 알바생분의 노력과 열의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정당한 것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취급 받는다. 뭐 이 지점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값어치이다. 21세기 현재, 세계 주요 국가들은 고용주가 노동력을 구매할 때 노동자에게 지불해야할 시급의 최저 기준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으며, 이후의 가격 책정 및 가격의 변동과 흥정은 자본주의 하의 여타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즉 주류경제학의 기본적 메커니즘으로서 ‘효용가치설’을 기반으로, 수요-공급의 원리에 충실한 법칙성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많아지면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하고, 반대로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줄어들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승한다. 현실 속 노동력의 값어치 책정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법칙도, 가치 척도도 없으며,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화폐화 된 노동력의 값어치가 변화할 뿐이다. 내가 노동하는 강도와 양, 방식과 메커니즘은 그대로인데, 저 알바생분이 제공하는 커피의 질도, 양도, 맛도 그대로인데, 외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시급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무언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우리가 판매하고, 또 직접 행함으로써 판매가 완료되는 우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가, 별개의 외부상황에 의해 그 가격과 가치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미심쩍은 현실에, 나는 적지 않은 의문을 품는다. 우리가 알바 근무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해결해야할 몇 가지 핵심적인 의문이 있음은 명백하다. 나아가 오늘의 논의를 빌어 필자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잘 것 없는 우리 같은 알바생들이 이런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선, 먼저 첫째로, 경제적인 ‘가치’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찰해야할 것이다. 이어서 ‘가격’과 ‘가치’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급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다뤄져야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늘 그래왔듯,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을 꺼내어 이 의문들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본다면, 놀랍게도 늘 그랬듯 힌트가 될 만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저서 『자본』Ⅰ-상 제1편 제1장에서 우리의 의문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제1편 제1장 ‘상품’에서 가치의 형성과정과 상품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또 제2장 ‘교환과정’과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에서는 앞선 논의에서 형성된 가치가 화폐형태로 거래되는 과정과 상품의 교환과정 및 화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다룬다. 먼저 제1장에서 그들이 심도 있게 고찰하는 가치 및 화폐 형성의 역사적 맥락을 토대로 우리의 첫 번째 의문 속 ‘경제적 가치’의 형성과정에 대해 자세히 탐구해보고자 한다. 사실 그들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기에는 문체가 너무나도 난해하고 그 내용 역시 현학적이기에, 필자가 읽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어갈 생각이다.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표현 방식 속의 근본 원리와 핵심적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읽고 이해함에 큰 무리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가치’의 형성을 역사적인 흐름에서 고찰하려면, 우리는 응당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 가 봐야한다. 물물 교환이 성행하던 원시 사회에서 상품이나 시장, 가치와 같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대의 사람들은 우연적 만남을 통해 물물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물건의 교환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는 우연의 형태로 단순한 개별적 형태이며, ‘경제적 가치’의 [제1형태]라로 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교환하고자 하는 물건의 가치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물건에 의해 표현되고, 이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거래를 전문으로 다루는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교환을 이어갔기에 물건의 정확한 가치를 책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서로 간의 교환을 승인 할 때의 척도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인데, 본인이 가지고 온 물건에 들인 노력과 정성을 어림잡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에 비교하는 과정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우리가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물물교환 할 때도, 내가 공을 많이 들인 소중한 물건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거저주운 물건과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상식이다.

거래가 조금 더 활발해지면 앞선 단계를 넘어선 두 번째 가치형태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제1형태]에서는 상대방의 물건으로만 내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수동적인 과정이 반복 되어 특정한 이들이 특정한 물건을 지속적으로 교환과정에 내놓는다면, 물물교환 장에 나온 모든 이들은 그 특정한 물건을 통해 자신들의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게 된다. 이를테면 매번 손수 만든 아메리카노 커피를 가지고 나오는 이가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과 교환 될 수 있는 아메리카노 커피의 양을 고려해 자신의 물건에 대한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 특정한 물건은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이 상황을 [제2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 물물교환 단계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교환의 장이 형성되고, 교환과정과 가치의 형태가 조금 더 발달하면, 앞선 등가물이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게 된다. 즉, 앞서 우연적이며 상이한 개별적 교환 사건들의 종합으로, 사람들이 물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던 등가물이 그 기능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산과정 전반에서부터 비단과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물건을 생산하며, 비단의 양으로 자기 물건의 가치를 예측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더불어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물건을 비단과의 교환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상황이 비단(일반적 예시) 생산의 활성화와 맞물려 시간적, 공간적으로 크게 증대된다면 비단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등가물로 기능을 하게 된다. 비단이 노력/정성의 양, 그리고 ‘가치’를 어림잡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제작한 이후 비단에 비추어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비단을 얻는 상황을 먼저 고려하며 자신의 물건을 만들게 된다. 가치의 이러한 형태가 [제3형태]이고, 비단이 금과 같은 본격적인 화폐 형태로 변모하는 순간부터 [제4형태] : ‘화폐 형태’로 변화한다.

이러한 가치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이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상품’이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상품’의 개념을 탐구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비단(일반적 예시)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만들어 이를 실제로 비단(혹은 화폐)과 교환하는 상황은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해 물건을 만들고, 거래 과정을 통해 이를 실제로 교환하게 되면, 그 물건은 비로소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상품은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유용성이 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필자의 위 서술은 한 가지 비밀을 더 암시하고 있다. 바로 상품에 내재된 가치가 두 종류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카페 의자가 매우 불편하다고 느끼던 찰나이기에, 이 의자를 예시로 삼아 보겠다.—  의자도 분명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도 질적으로 상이한 두 종류의 가치를 내포한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사용가치’다. 이는 의자의 기능과 관련된 것으로, 앞서 말한 상품의 사회적 유용성에 기인한 ‘쓸모’이며, 각 물건에 따라 기능적 특수성을 띤다. 의자는 사람이 앉아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드러낸다. 두 번째로, 의자는 ‘가치일반’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혹은 ‘가치일반’이란 의자의 교환(거래)이 가능케 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비록 조금 불편하지만, 이 의자 역시도 분명히 상품으로서 거래와 교환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척도로?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기준으로 이 의자는 교환될 수 있었을까?

‘경제적 가치’의 형성 과정은 바로 그 척도로서의 ‘가치일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과정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 물물교환 시절부터 화폐형태의 등장까지, 교환의 장에 나온 이들이 항상 고려했던 것은 물건 제작에 투여한 노력과 정성이었다. 즉 의자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척도이자 기준으로서의 ‘가치일반’은 노력과 정성, 다시 말해 의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인 것이다. 이 의자를 판매한 이가 의자를 만드는데 투여한 노력에 걸맞은 가치를 돌려받기 희망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상식이고 자명한 것이다. 요컨대, 상품 속에는 두 가지 형태의 ‘가치’가 내포되어 있으며, 교환과 거래를 가능케 하는 ‘가치일반’은 상품에 투여된 노력,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겠다. 사실 이는 우리의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핵심적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경제적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자본』은 가치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책을 펼쳐들며 ‘노동일반이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 위에 약간의 첨언을 얹어보자면, 상품에 이질적인 두 개의 가치가 내재되어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동 역시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을 가지게 된다. 의자만의 특수한 기능, 즉 사용가치(유용성)를 만드는 특수한 실제적 노동과, 교환의 척도가 되는 가치일반을 창조하는 노동일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노동 역시 두 측면으로 분화되며, 노동일반과 그 속에서 창조되는 가치일반은 추상적 / 관념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반면 앞서 말했듯, 특수한 실제 노동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용가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또 실질적인 유용성의 형태를 띠게 되는 셈이다.

‘경제적 가치’란 노동에서 나온다는 역사적 고찰과 함께 첫 번째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렇다면 화폐의 양으로서의 가격과 가치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의식중에 상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하곤 한다. 이는 올바른 판단이 맞을까? ‘이디◯ 커피’의 아메리카노가 지닌 가치는 3,200원의 가격으로 온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을까? 앞서 언급한 [제3형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물 자체가 ‘일반적 등가물’로 변하며 모든 상품들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즉 앞선 예시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또는 비단)는 일반적 등가물이 되며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직접적·사회적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노 커피(일반적 등가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상품이 이와 같은 성격을 얻지 못하기에 이뤄진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에서만 형성 가능하다.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의 이 아메리카노 커피의 역할은 모든 상품들이 차지할 수 있다.

사회적 타당성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일반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역사적으로는 ‘금’이 차지해왔다. 나아가 ‘금’처럼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독점적인 등가형태가 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화폐 상품’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금이 화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금은 자신에게 체현된 노동일반의 양을 척도 삼아 다른 모든 상품들을 견줄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역할을 도맡아 왔다. 위의 언급에서 가치의 [제4형태]는 바로 ‘화폐형태’였다. 이는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하는 구체적 상품으로 정해졌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일반적 등가형태가 최종적으로 상품으로서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를 통해 화폐형태로 전환된 것이 [제4형태]이다. 화폐의 기능을 하는 금에 의해 표현되는 단순한 형태가 바로 ‘가격형태’이며, 길고 긴 역사적 과정 속에, 드디어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가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메리카노 커피에 붙은 3,200원이라는 가격표를 이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금이 아니며, 금과는 질적으로 매우 상이해졌다. ‘금’은 화폐로 기능을 시작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투여된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통해 가치의 척도를 대변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5만원권 속 신사임당은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대변하지 않으며, 노동일반으로서의 ‘경제적 가치’의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또 어떤 가치(사회적 노동일반)를 직접 담아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화폐는 자신이 직접 가치(투여된 노동일반의 양)를 지님으로써 가치의 척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가치를 대변할 뿐이며, 가치의 관념적 도량형의 역할만을 도맡게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변천 속에 사람들은 화폐(혹은 금)가 본래 어떤 가치(가치의 척도로 기능할 수 있는 신비한 성질)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분명한건 오늘 내가 건넨 3,200원과 3,200이라는 수적 표현은 실제로 어떤 실질적 가치일반(노동일반)의 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관념화된 척도로서 ‘3,200원’이라는 가치의 관념적 양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의 대가로 지불한 3,200원은 실제 ‘경제적 가치(=노동일반의 응고량)’의 양이 아니라 관념적 ‘가격 형태’이며, 가치와 가격은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가격 형태’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가치일반의 양과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음에 기인했지만, 이제 우리는 화폐와 그 가격형태를 그저 관념적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즉 가격이 상품에 투여된 가치(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대변해준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 속 상품의 가격 형태는 수요 공급의 주류경제학 논리에 따라 수시로 변모한다. 똑같은 가치를 담은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내일 새벽에는 갑자기 달라진 ‘가격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졌던 첫 번째 의문, 즉 ‘경제적 가치’의 원천에 대한 궁금증은 ‘노동일반’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했고, 나아가 이는 ‘가치’와 ‘가격 형태’의 근본적인 의미 차이와 맥락의 구분을 암시한다. 우리가 두 번째로 묻고자 했던 ‘가치’와 ‘가격’의 관계 역시도 어느 정도 해명이 된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의 시급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우리의 시급은 어떻게 판단해야할까? 논의의 서두에서 얘기했듯,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여타의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작용한다. 알바 시급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명료히 하려면 시급의 대가로 우리가 사장님들에게 판매하는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더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이라면, 앞서 말했듯, 다른 상품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속에 내재된 가치를 평가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상품의 경제적 가치를 무엇으로 해명했는가? 바로 ‘인간노동일반’이다. 즉 아메리카노 커피에 투여된 인간의 추상적 노동일반의 양이 그 가치를 표현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가치를 측정해야한다. 다소 난해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의 논리와 그 정합성에 의거했을 때. 상품 ‘노동력’의 가치는 그 생산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필자도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낯설고 해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우리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해보자. 오목교역 24시 이디◯ 커피의 알바생분이 사장님에게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는 알바생이 상품 ‘노동력’을 위해 준비한 모든 노동 및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알바생은 오늘의 근로를 위해 잠을 잤을 것이고, 기본적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기도 하며 나름대로의 노동을 이어왔을 것이다. 밥이나 배달음식을 먹고, 샤워를 하거나, 보다 말끔한 모습을 위해 이발도 하며 머리 손질에 공을 들였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시간이 이디◯ 커피 사장님이 구매한 알바생의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알바생분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를 위해 그 생산과정에서 준비한 모든 노동과 그 시간만큼의 노력의 합은 그의 상품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유 방식이지만, 눈을 감고 조금만 고민해보면, 우리의 마지막 의문을 명쾌히 해결해줄뿐더러, 노동력과 시급의 관계 전반에 대한 탁월한 해답이 떠오를 것이다. 그 해답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이 지닌 특수한 성질에 대한 인지에서 출발한다. ‘노동’은 인간의 본성적, 본질적 행위일뿐더러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 과정에서 더욱 특별한 성질을 드러낸다. 이디◯ 커피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한 상품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대가를 급여로 지급받고, 실제로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력’의 판매를 이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거래가 되는 한편, 구매자의 상품 사용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게 된다.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고,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의 (구매자를 위한) 실제 노동 이행을 통해서 상품 교환의 거래가 완료되기 때문이다.

이디◯ 커피 새벽 알바생분(‘노동력’의 판매자)은 걸레로 테이블을 닦는 등 노동을 이행함으로써 시급의 대가를 지불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사장님에게 만들어 제공하는 셈이다. 시급의 양은 알바생분이 판매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와 같은 크기, 같은 양일 것이다. 하지만 저 분(알바생)은 자신이 지불받은 시급, 즉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 =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준비한 알바생분의 노동시간 = 시급이 제공해야하는 가치의 양]인 상황에서,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의 대가로 돌려받은 가치의 양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봐도, 우리가 알바를 할 때, 그 날 알바 근무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생산)한 시간만큼만 당일 근로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일함으로써 그 판매를 완료하기 위해 우리가 전날 종일 준비했던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구매자의 사용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논의이나 간단히 말하면, 커피숍의 알바생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위해 이전에 투여한 노동시간보다 단 1시간이라도 더 많은 양의 노동을 근로 과정에서 행하는 순간 잉여가치의 형성과 이에 대한 착취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지점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먼저, 화폐 형태(가격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알바 시급이 수십만 알바생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 상황 속에서는 어떠한 알바생도, 아니 어떠한 노동자도, 사장님에게 제공하기 위해 준비한 상품 ‘노동력’ 속에 녹아있는 (준비과정/생산과정 속)노동시간 만큼만 근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일하기 위해 준비한 시간보다 더 일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가치’가 ‘노동일반’에서 창조되는 한, 자본주의적 분업-생산체계는 알바생들과 노동자들이 만드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착취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기저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십 개의 아메리카노 커피를 탄생시킨 저 장인은, 만약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시급을 돌려받았다고 해도, 그 가치의 배에 달하는 양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출처 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86348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어렵고 난해했던 논의와 우리의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복잡한 고찰을 이쯤에서 줄이고, 다시 새벽녘의 이디◯ 커피에 앉아보자. 사실 어느 가게든 요즘의 알바 시급은 최저시급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초반에 알아본 것처럼 저 알바생분들 역시 2020년 기준 법정 최저시급은 8,590원선에서 자신의 1시간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을 것이다. 근 몇 년간 법정 최저시급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전 논의에 따르면, 이는 정말 납득이 어려운 상황으로 풀이될 수 있다. 우선 몇 년째 꾸준히 이 카페를 방문하는 입장에서, 작년 말에도 저 알바생분은 근무를 했고, 오늘 밤과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내게 제공했으며, 지금 현재도 예년과 비슷한 양의 노동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알바생분은 2019년에는 8,35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했고, 올해 들어 지금은 8,59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최저시급이 오름과 동시에 저분이 ‘노동력’ 판매를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을 쏟아 붓기라도 한 것인가? 그러면 모든 노동자들은 최저 시급의 인상과 동시에 ‘노동력’ 생산에 더 많은 노동을 투여하는가? 둘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저 분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가치를 지닌 ‘노동력’을 생산함에도, 이 대가로 시급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권에 의해 결정된 정치적 의사결정이며, 실제로 ‘가치’가 거래되는 양상과는 무관하다. 대체 어떤 가격표가 알바생들의 ‘노동력’에 담긴 가치를 제대로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인가? 8,350원? 8,590원? 아니면 9,000원? 알바생분의 1시간 ‘노동력’ 가치의 ‘가격 형태’는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책정되는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권리로,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노동력’의 값어치와 그 기준 척도를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의문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 알바생들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그 적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더불어 ‘가치’의 거래 현장과는 무관한 상품 ‘노동력’의 법적 ‘가격 형태’ 책정에 대해 정치권으로부터 어떠한 해명도 듣지 못했다. 설령 시급의 ‘가격 형태’가 알바생 및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지닌 가치와 정확히 동일한 값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가 추가로 생산하게 되는 잉여의 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자본의 착취 역시 필연적인 수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필자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가치’의 정확한 표현 방법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지도 못했고, 정치권과 제도권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들을 조정할 권한을 돌려받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대학생 신분인 알바생들이 이토록 커다란 ‘가치’의 문제와 ‘착취’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알바생들은 ‘가치’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착취는 왜 발생하는지, 또 우리의 시급은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진지한 문제인식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의 알바생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화폐와 가치에 관한 사회적 환상에 휩쓸리지 않고, 8,590원 속에 숨어있는 착취의 알고리즘을 포착해야한다. 어떠한 구체적 방식으로 ‘가치’의 참된 의미를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지 줄기차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우린 이미 ‘경제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고, 우리 내의 시급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호도되는지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 해내야할 과제들 역시도 분명해졌다. ‘경제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지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이 지니는 구조적 착취의 모순을 이해하고 분노해야할 것이다. 그 모든 저항과 문제제기의 시발점은 파란 모자의 이디◯ 커피 알바생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시급 8,590원에 있다. 당신의 시급은 어떠한가? 오늘 당신의 시급은 안녕한가?

임금 격차에 관한 단상(자본론 에세이3, 「2장: 교환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임금 격차에 관한 단상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임금격차는 왜 존재할까? 나는 고등학생 때 이것이 늘 궁금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대기업 회장이 동네 미용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그래서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언제나 CEO, 의사 또는 교수가 미용사보다 많았다. 하지만 대기업 회장이 얼마나 ‘멋진’ 일을 하기에 우리 동네 미용사 언니보다 몇백억 배의 연봉을 받고 대학교수는 왜 비정규직 강사보다 아홉 배가량 더 많은 돈을 버는 걸까?

나는 머리카락이 반곱슬이라 1년에 두 번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펴줘야 하는데, 머리카락이 반곱슬이라는 것은, 비가 올 때 「해리 포터」 속 ‘해그리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빗기지도 않고, 제멋대로 엉켜서 머리카락이 자주 빠지기도 한다. 머리를 펴는 비용은 미용실에 따라 제각각이다. 머리 길이에 따라 10만 원 안팎이다. 반곱슬이 아닌 사람들은 이 가격을 두고 겨우 미용실 가는데 10만 원이나 쓰냐며 깜짝 놀란다. 그러면 나는 새로 한 머리 때문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죄인이 된 것처럼 조금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지난달 다시 한번 미용실을 찾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미용실이 나의 사치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들으면 ‘겨우’ 미용실에 큰돈을 썼다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1. 해그리드. 출처: https://thewiki.kr/w/%EB%A3%A8%EB%B9%84%EC%9A%B0%EC%8A%A4%20%ED%95%B4%EA%B 7%B8%EB%A6%AC%EB%93%9C

 

먼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머리를 펴는 작업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작업인지, 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2) 약품을 발라 모발을 연화(軟化)하는 작업을 한다.

3) 다시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4) 매직기로 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씩 붙잡고 쫙 펴준다.

(이 단계가 제일 오래 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단계이다. 머리카락이나 두피를 태우지

않으면서도 곱슬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펴줘야 하기 때문이다.)

5) 머리가 펴진 상태가 고정될 수 있도록 과산화수소수를 머리에 발라 중화한다.

6) 또다시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인터넷에서는 15단계로 설명하고 있지만1, 여기서는 분량상 생략한다. 총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과정이다. 세 시간 동안 미용사가 내 머리를 펴는 손짓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는데, 바로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용사의 손이 가위질, 빗질, 다림질에 분주하게 움직였고 내 머리카락은 그런 미용사의 손안에서 계속 변화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모든 곳에서 타인의 노동을 경험하고 또 직접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생한 노동으로 와닿은 것은 어쩐 일에서인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간단발인 나는 7만 9천 원을 지불했다.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 가치만큼의 살아있는 노동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노동의 가격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삼아 타인에게 판매함으로써 먹고살게 되었다. 이렇게 노동자는 상품소유자가 되고, 고용주는 노동의 구매자가 되었다.

문제는 이거다: 어떤 인간의 노동이 다른 인간의 노동보다 몇억 배의 가치를 가지는 게 합리적일까? 같은 종류의 노동이면 이를 판단하는 게 조금은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곰돌이 눈에 단추를 끼우는 일에서 하루에 100개의 단추를 끼운 사람이 70개만 끼운 사람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철도 노동자의 임금과 대기업 회장의 임금 격차는 합리적인가?

자본론 제2장의 핵심은 화폐(어떤 상품의 가격)가 두 상품 사이를 이어줄 뿐, 상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폐는 두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 복잡한 관계 도식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노동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의 노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판매되어 화폐가 수중에 들어와야 비로소 우리의 노동은 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예컨대 누군가가 신발공장에서 노동한다면, 그것은 신발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신발을 만들어 번 돈으로 쌀을 사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목적은 노동의 산물인 신발을 다른 상품인 쌀과 교환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쌀을 파는 사람에게는 신발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화폐가 등장하게 되었다. 화폐는 서로 다른 노동의 가치를 통일된 단위로 치환시킨다. 쌀을 파는 사람이 내가 만든 신발을 원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에게 내 신발을 판 화폐로 쌀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화폐는 우리의 생활을 아주 편리하게 해준 셈인데, 애초에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의 가치가 단순화되면서 그 사이에는 물신이 끼어들 자리도 생겨버렸다.

그림 2. 1923년, 지폐에 풀을 발라 벽지로 이용하는 남성. 출처: http://historicphotographs.blogspot.com/2013/04/using-banknotes-as-wallpaper-during.html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감자 하나의 가격은 500억 마르크, 빵은 한 조각에 800억 마르크였다고 한다. 당시 벽지 가격도 너무 올라서 사람들이 벽지 대신 지폐를 벽에 발라야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가격이다. 이전에는 감자 하나에 1마르크(현재 약 0.5유로에 해당하는 가격)도 안 했을 텐데 무려 500억 마르크라니.

이렇게 특정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이 놓인 경제 관계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화폐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화폐 형태로 임금을 받는 살아있는 노동도 그래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과평가되는 일이 발생한다. 임금에는 살아있는 노동의 가치만이 아닌 각종 사회적 믿음과 제도들에 대한 환상들도 은근슬쩍 개입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그리고 이들 임금의 차이는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노동의 차이는 아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이유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가치가 낮은 노동을 하거나, 더 빈약한 비중의 살아있는 노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면서 비정규직 안에 포함된 노동이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체 가능성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은 더 낮은 가치의 노동으로 취급되어 임금을 최소한으로 받는 것이 정당화된다. 사회에서 사람들 간 경쟁을 존속시키고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같은 종류의 노동을 하는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임금 격차가 심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샤넬 가방이 홍대 수제 가방 장인이 만든 가방과 다른 점은 브랜드의 여부뿐이다. 그리고 앞선 글에서 이미 우리는 그러한 명품이 환상임을 다뤘다. 사회가 특정 개인에게 주는 타이틀, 그리고 그로 인해 마치 엄청난 가치가 그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과 같은 느낌도 역시 모두 환상이다.

갑질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최근에 있었던 경비원 폭행 사건이나 조금 더 오래된 ‘땅콩회항’ 사건을 통해, 사회가 붙여준 타이틀(지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착각을 심어주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갑과 을은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과 을은 지위와 임금의 차이로 결정된다. 왕권 시대에 왕들은 신의 은총을 받아 고귀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박박 우길 수라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갑’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들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은 살아있는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은총도 받지 않았고 마법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갑에게 있는 거라곤 ‘갑’이라는 이름뿐이다. 앞서 자주 이야기했듯, 다양한 직업으로 나타나는 갑이라는 타이틀은 살아있는 노동 위에 씌워진 거품일 뿐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줄일 수 있겠다. ‘갑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갑의 노동이 아닌 사회시스템이다.’

백번 양보해서 갑이 을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갑이 을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근거나, 몇억 배나 더 되는 임금을 받을 근거는 없다. 하지만 갑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고, 을을 부리길 좋아한다.

나는 모든 노동이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동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노동이 우리 삶의 큰 부분이며 우리가 타인의 노동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임금노동이 공동체를 개개인으로 쪼개놓고 경쟁하도록 부추기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붙들어주는 것이 나와 타인의 노동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노동이 다른 이의 노동보다 훨씬 더 특별하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갑과 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 역시 내 생각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도리어 생존을 위협하는 사회상에 비통해했기에, 마르크스는 물신의 허울을 걷어내어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노동이 진정 보답받기를 꿈꿨을 것이다.

자본론을 읽고 화폐가 주는 가치가 환상임을 깨달아도 우리는 수많은 ‘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도 신은 우상의 숭배를 끊임없이 경고하고 백성에게 고난을 주어야만 했다) 임금 격차가 노동의 가치의 차이를 반영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리라.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임금 격차는 항상 있을 것이고 갑의 횡포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지(知)와 행(行)의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지난여름 독일에 사는 친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기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언니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독일에서 변호사 플랫폼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의 양도 엄청나게 많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의 50%가 다 세금으로 나간다는 얘기도 함께 알려줬다. 처음에 눈이 동그래져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빠와 나의 표정이 ‘50% 세금 대목’에서 조금 김이 새는 것처럼 보였는지, 친구는 세금으로 절반이 빠져나가도 열심히 일한 만큼의 돈은 남아서 괜찮다고, 우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살아있는 노동’이란 단어를 이 글에서 몇 번이나 언급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살아있는 노동이 본질로서 임금에 반영되고 나머지 물신은 벗겨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가 생존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답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난 5월에는 또 다른 친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는 우리가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어 감옥에 수감 되었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가능했던 이유는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얽힐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박근혜를 대신할 보수는 많다) 사회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촛불혁명이란 단어가 왠지 늘 불편했지만,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던 탓에 친구의 말을 듣고 속이 시원했다. 그렇다. 진정한 혁명이란 반드시 본질에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법이다. 수개월 동안 많은 시민이 광화문 거리로 나온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주거의 불평등, 갑질 등 수많은 사회문제는 결국 다 임금 격차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임금 격차가 완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촛불혁명이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1. https://kjsi0203.wordpress.com/2008/07/24/%EB%B3%BC%EB%A5%A8%EB%A7%A4%EC%A7%81-%EC%9D%B4%EB%A1%A0/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내가 읽는 『자본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혹자는 말한다. 공상에 젖은 좌파들은 성공할 수 없다고. 나는 스스로 꽤 좌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비판에, 냉소에, 조소에 쉽게 반박할 수 없다. 마르크시즘에 미래가 있을까? 분명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가 21세기에, 그것도 한국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지하게 그를 ‘패션좌파’1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다. 68혁명이 남긴 신좌파적 상상력은 더 이상 강력하지도, 도발적이지도, 유혹적이지도 않다. 적색(사회주의)과 녹색(생태), 보색(여성), 무지개(퀴어) 등2의 성장과 강화는 서로의 조화(연대)에서 가능하지만 지금 연대의 정신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좌파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精緻)한 설계도를 제시하지 못한다. 일단 기존 사회를 해체하는 게 곧바로 새로운 질서의 정립으로 이어지지 못함을 많은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전(全)지구적 폭격은 우리의 삶 속에서 대안사상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황폐화시켰다.

 

노동은 계속해서 액화(液化)되어간다. 플랫폼 노동자, 초단기계약직, 프리랜서들은 노동하지만 온전한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고, 그렇게 노동계급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계급투쟁’은커녕, 노동계급의 단결, 아니 노동계급의 형성도 어려운 세상이다. 계급의식의 자각이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파편화, 개인화, 원자화된다.3 공동체 밖에서 인간들은 자유롭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자유는 자본에 착취당할 자유이다. 다시 말해 이 자유는 하루 12시간, 주 6일, 정해진 작업장 없이 일할 것을 강제하는 계약서에 ‘자발적으로’ 서명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공상에 젖은 좌파들’은 아직도 대공장시대에나, 혹은 전후(戰後) 호황경제 때나 가능했을법한 대안들을 내놓는다. 그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도 하지 않는다. 2020년 현재 정치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비교하여 어떠한 우위도 점하고 있지 못하다. 변화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 소위 구좌파들은 시쳇말로 ‘빻았고’4, 정체성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신좌파들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토대를 볼 줄 모른다. 정말 이 시대의 좌파적 대안은 지금의 주류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좌파들이 무력해지고, 공상적이라고 비판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정확한 분석의 부재와 참신한 상상력의 실종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분석과 상상력의 부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을 지금의 지배적 사상에 빼앗긴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한다.

 

자유는 원래 좌파의 것이 아니었고, 평등한 세상이 자유로울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자유는 인간들의 평등한 상호관계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 자유가 ‘인간 존재의 자유’라면 말이다.

 

자본주의가 뿌리박은 자유주의는 신체에서 뻗어 나온 소유권이라는 사고에 천착하여 재산의 축적과 사용이 자유로운 사회가 진정 자유롭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은 결국 돈 많은 사람이 돈 쓸 자유에서 시작해 자본이 무한정 자가 증식할 수 있는 자유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당노동행위를 강제하는 계약서에 서명할 자유만 가지게 된다. 이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다. 그저 자본의 자유이다. 그리고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를 착취하여 성장하는 자본의 자유는 불평등을 낳는다. 또한 불평등 없이는 자본의 자유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이상의 불평등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용인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그 옛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얼핏 언급하고 넘어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association of free individuals)’부터 시작하자! 낡은 유물을 다시 꺼낸다고 여기지 말아 달라. 지금의 문제제기는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이라는 좌파의 기본정신에서 어긋나, ‘자유와 평등’을 ‘자본의 자유와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평등’으로 해석하는 통념5을 깨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먹고사는 걱정을 떨쳐버려야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당연하게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먹을 몫을 스스로 소유해야 한다. 여기서의 소유는 자신이 소비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즉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당장 내가 먹을 만치 밥을 할 수 있는 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소비재의 소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내가 갓 지은 밥을 남이 먹으면 나는 당연히 배가 차지 않는다. 내가 소비할 것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유는 어떠한가? 앞문단의 논리대로라면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 즉 자본의 자유 역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단지 자신이 소비할 것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긴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임노동자와 소상공인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 임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의 소유는 자본의 부스러기로 구성된다. 생산수단에서 생겨난 가치가 일부 임노동자들에게 돌아가고, 그 가치가 다시 소상공인들에게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사용가치의 이전이 일어난다. 그 사용가치를 일부 소유하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소유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생산수단에 노동을 투하하여 나오는 가치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가져간다. 그리고 그 가치는 다시 자본에 축적되어 규모가 커진다. 가치가 나오는 구멍을 쥔 게 자본가들이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영위할 사용가치들은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에 자본의 사적 소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다른 사용가치의 소유나 가치의 부스러기의 소유가 종속된다.

 

앞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다. 그 목구멍으로 넘길 밥을 만들거나 혹은 교환해올 사용가치, 또는 가치가 자본에 종속된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이라는 언명에서 소유의 평등은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이어야 한다.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할 때 우리가 소비할 사용가치도, 교환의 척도로 이용할 가치도 평등하게 나눠지고, 그래야 인간이 자유로워진다.

 

생산수단을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할 것인지 의문일 수 있다. 생산수단을 전부 쪼개어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산업의 집적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생산력, 효율성의 향상이 불가능할뿐더러, 큰 산업을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은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로 가능해진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가능해진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공동의 생산수단을 다양한 개인들이 함께 활용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개인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노동으로 의식하며 사용하는 사회구성체이다. 여기서 구성원들이 생산한 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사회적 노동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회구성체의 총생산물 일부는 다시 공동의 생산수단을 보충하는 데에 쓰이고, 나머지는 사적으로 분배된다. 이 분배의 기준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얼마나 노동하였는지’로 결정된다. 이 사회구성체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억압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모두의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걱정은 줄어든다. 자신이 일한 만큼 가지기 때문에, 일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이 소비할 사용가치를 얻을 수 있다.6

 

위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자유와 평등’을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으로 해석할 때 가능하다. ‘자본의 자유와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평등’에서는 불가능하다. 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유와 평등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사용가치의 소유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류의 기반에서는 주류적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파, 또는 대안사상은 자신들이 공상적이라는 냉소를 받게 된 배경을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주류가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거꾸로 주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좌파와 대안사상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보다 세련되고 과학적이기에 지금 주류의 시선이 주류가 되었고, 좌파가 세상을 보는 눈은 주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주류의 논리적 기반에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기에 사태의 근원을 발본색원할 수 없게 한다. 새로운 기반을 다져야 한다. 아무리 마르크스가 철학이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고 했을지라도, 그 말의 전제에는 ‘과학적이고 엄밀한 분석’이 있다. 대안사상만의 과학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그것이 ‘좌파는 공상적’이라는 냉소를 떨쳐버릴 가장 근원적인 방법이다.

 

앞 문단이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과학적이고 정밀한 좌파의 논리적 기반과 세계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기존의 것이 모두 쓸모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또한 그 위에서만이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개를 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해서는 공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안은 체제 밖에서 체제를 조망하고, 체제 안에서 체제를 타격할 때 실현된다. 토대의 변화에 상부구조의 변화가 연동된다고 하지만, 거꾸로 우리가 허위의식을 벗어던질 때 토대의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가 평등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피하여 평등에서 자유가 비롯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론』은 나에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하나의 무기를 제공했다. 인간의 자유는 소유의 평등에서부터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서두에 서술한 냉소에 맞설 정확한 분석과 참신한 상상력의 부활을 위해, 지금까지 자본의 자유에 억압당한 인간 존재를 위해, 아래와 같이 외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자본에게 억압을.

 


  1. 명확한 계급적 의식과 실천 없이 좌파적 생활양식 및 정치적 지향을 단지 유행하는 패션을 따르듯 멋으로만 소비하는 사람들을 에둘러 비꼬는 말이다.

  2. 당연히 이 정체성들과 가치의 연대에는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정체성들과 가치(장애, 인종, 평화 등)가 포함된다.

  3. 혹은 인간이 파편화, 개인화, 원자화되는 사회에서 계급의식의 자각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4. 예의 없거나 낡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un-PC한, un-Political Correctness) 사람들을 형용하는 속어이다.

  5. 심지어 ‘좌파’들조차도 이러한 해석을 벗어나지 못한다.

  6. 다만 일할 수 없는 구성원들에게의 분배 방식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내가 읽는 『자본론』]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2016년 여름, 대한민국 교육부의 어느 정책기획관은 교육부 직원들,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가 했던 발언은 아직도 유행어처럼 우리 주위에서 종종 회자된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 시켜야 한다.” 그의 발언에 모티브가 된 것은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원로 언론인 이강희의 명대사였다. 극 중 이강희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부 관료 입에서 실제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현실에 많은 대중들은 자신이 개돼지 가축임을 비꼬듯 자처하며 해당 정책기획관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법과 제도를 손봐야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은 세간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저들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새삼스레 말 한마디에 화가 난 것일까? 국민과 민중들이 개돼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슷한 맥락의 위 두 대사는 아마 대한민국 민중의 우매함을 비아냥대는 권력의 ‘근거 있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기득권은 물질적 정신적 양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서와 사고를 지배하고 그 표출 양상을 예상하여 통제 정도를 조절하고 있기에 ‘근거’가 충만한 자신감이라 칭할만하다. 이들의 발언에 담긴 의미와 맥락은 분명하다. 그들이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며, 대다수의 국민들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언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거짓된, 혹은 잘못된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 그래서 잘못된 팩트에 국민들이 화가 난 것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게끔 하는 사회 구조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가축 취급당한 것에 화가 난 것일 뿐이며 이강희와 교육부기획관의 자신감이 전제한 지배 구조가 실재함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대중들을 한낱 가축으로 전락 시키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대중들이 정말 가축이라도 된 것 마냥, 자신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회에 순응하고 살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inistry_of_Education(South_Korea).jpg

 

나는 이 의문을 해소해줄 첫 실마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 찾고자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묻고 싶다. 혹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교실에만 있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단어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사상이나 이념의 일반적인 의미와 등치시켜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의 용례에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사회적 모순의 발달에 따라 실재를 ‘전도’시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왜곡시키기 위한 관념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허위의식’ 정도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를 기저에 두는 까닭은, ‘이데올로기’가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모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창출을 돕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랑스의 유물론자들 및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에 영향을 받아, 헤겔의 전도된 국가 개념과 종교에 관한 개념을 비판하는 데에서 그 본격적인 시발점을 구축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에 의해 이론적 개념으로 부상했으며,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윤리적 측면 등 다양한 외연을 띠며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이 그들 자신을 향한 ‘개돼지 대우’의 토양으로서 근본적 사회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도구로써 손색이 없는 셈이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르면 근현대적 시점에서는 궁극적(본질적) 실재의 현상 형태인 자본주의적 사회가 바로 이데올로기 형성의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이데올로기’를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전도’ 작용을 매개하게 된다. 이 세상의 실재와 그 본질적 관계들을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생산의 영역이다. 허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인 관계들을 은폐하고 현상 형태일 뿐인 자본주의 사회를 중심으로 관념 체계를 형성, 설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의식 또한 전도시키게 된다. 후기 자본주의 속 강대국이자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난 나. 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온 몸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우리가 개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안개처럼 가리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말이다.

한편 바로 그 생산의 영역으로서 경제적 부분에 관하여 우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존재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이 사회의 99%를 개돼지로 만드는 구조적 메커니즘과 직결되기에 그렇다. 더불어 우리는, 경제적 생산성을 향한 집착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 원리이자, ‘개돼지’계급과 이들을 착취하는 계급이 계속적으로 ‘갈등-공존’하게하는 기본적인 알고리즘임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즉 이 사회의 근본적 계급 구조와 이를 망각하게 하는 ‘생산성’에 관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이 가축 취급을 받는 이유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본질적 구조와 계급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며,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미화하고 은폐하고자 한다.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자본의 증식 욕구는 많은 척도들을 경제적 척도로 일원화 시켰고, 경제적/물질적 성공에 대한 열망은 곧 ‘생산성’과 ‘효율’에 대한 집착과 그 이데올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한한 욕구의 생성과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나도 노력하면 대중들을 들쥐 취급할 수 있는 달콤한 자리에 오르는 희망이 샘솟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의 문제 따위는 고이 접어 장롱에 넣어 두게 되었을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집약되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정치적(권력적) 욕구의 성취와 경제적 성공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기득권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다음 세대로부터 ‘어찌 하면 더욱 큰 생산성을 이끌어 낼까’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 ‘경쟁’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한정된 가치를 가지려면 싸우고 갈등하여 승리하고 쟁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쟁’에 착수한 이들은 사실 자신들 모두가 나눠가지고도 남을만한 양의 재화와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전쟁에 뛰어들었다. 더욱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같은 ‘참전’을 성실한 삶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전시 상황에서 그 누가 ‘개돼지적’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하랴. ‘이데올로기’라는 안개는 본질을 가리는 데에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경쟁’은 실재의 전도와 관념의 전도를 매개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대표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일 뿐이다.

권력과 기득권은 이 밖에도 여러 측면의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의문을 통제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에 경도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득권의 이 모든 관념적 유인책에 현혹되어 자신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계급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관념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과 속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자본주의 경쟁 사회 속의 부속품이 된 개별 인간들뿐이었다. 가축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적 삶은, 일반 대중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기득권에 서기 위한 경쟁은 민중들 내에서 갈등을 야기하며, 일종의 시합의 장을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과정 속에서 주인과 가축으로 나뉘는 사회구조의 본질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방해하고 은폐한다. ‘잉여가치 착취’의 구조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한 대중의 지각을 막는 것이다. 대중들의 관념을 전도시키는 셈이다. 민중들은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민중계급/노동계급 내부에서의 갈등과 경쟁 및 혐오와 차별을 이어간다. 기득권과 자본가들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영원히 가축일 수밖에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들 내부에 끊임없이 갈등과 혐오와 경쟁을 유발시킨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젠더갈등, 소수자혐오 등도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모두는 연대해야하며, 개나 돼지가 아님을 다 함께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시대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눈이 멀어 지속적으로 기득권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확산시키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정교하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또 다른 개념을 등장시키며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물신성’이 그것이다. 『자본』의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 ‘물신성’ 개념을 언급한다. 같은 의미를 지니는 ‘물신숭배’는 영어로는 fetishism으로 풀이된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물건의 내재된 속성인 것처럼 은폐하여, 물건에 소유자의 인격을 투영하거나 물건 그 자체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물신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물건의 내재된(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적 힘을 의미한다. 이는 경제적 영역에 집중적으로 적용되는 커다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특성을 설명한 프랑스의 드브로스의 저작은 데이비드 흄의 영향과 더불어 마르크스가 ‘물신성’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물신숭배(fetishism)의 직접적 어원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사용한 ‘페티쉬’라는 개념인데, 그 의미 또한 같은 맥락 위에서 대상을 상징하는 물건에 성적 욕망을 느끼는 감정과 관계한다.

『자본』을 통해 제시되는 두 가지 물신성은 ‘상품 물신성’과 ‘화폐 물신성’이다. 상품 물신성은 노동생산물이 ‘상품 형태’를 띨 때 발생한다. 이는 상품 형태가 사회적 생산관계를 은폐하여 사람이 아닌 물건들이 관계를 맺는 상황처럼 보이게 만든다. 상품생산자는 생산관계의 물화(물질화, 물건화)를 마치 어떤 한 상품이 생산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른 대상물과 교환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능력은 마치 물리적 속성처럼 상품이 본래 가지는 성질처럼 느껴진다. 즉 ‘상품 물신성’은 상품에 인격을 투영해 사람이 상품 대하기를 실제 인격체처럼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폐 물신성은 금이 화폐로 변한 역사의 과정을 알지 못한 채, 화폐(금) 자체에 가치가 내재된 것으로 오해할 때 발생한다. 즉 어떤 특정한 일반적 등가물 상품이 화폐(금)가 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의 발달을 인지하지 못하고, 거꾸로 모든 상품이 금으로 교환될 수 있게 하는 금의 화폐적 속성이 금의 본성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믿는 오해가 화폐 물신성을 야기한다. 화폐 물신성도 마찬가지로, 화폐 자체에 인격과 능력이 부여되어 화폐 그 자체가 인격화, 목적화되는 현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물신성의 두 양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크게 낯선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 특히 ‘물신성’은 계급적 구조가 현대인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현실을 가장 여실히 증명하는 동시에, 대중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대중들은 온갖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실재의 생산관계와 사회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같은 온갖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여기까지의 내 글을 읽고, ‘그래서 이 글은 민중이 개돼지가 맞다’는 걸 말하려 쓴 것 아니냐는 언짢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간이 이 모든 구조에서 벗어날 능력을 잠재하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완전히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민중이 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돼지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자 이 모든 이야기들을 엮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통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정밀하게 작용하는 지를”, “왜 우리가 개돼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또한 이 글을 읽음으로서 단 한 사람의 대중이라도, 우리가 언제든 레밍이 될 수 있는 이 모든 사회적 구조를 자각하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가축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난 멸시받고 괄시받는 99%의 세계인이 언젠가는 이 모든 구조적 불의를 알아채고 함께 그것에 대항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레밍도, 개도, 돼지도 아닌 존엄하고 가능성 넘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것 이면의 일그러진 것(자본론 에세이2 – 1장: 상품) [내가 읽는 『자본론』]

 

반짝이는 것 이면의 일그러진 것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내가 즐겨 입던 바지가 있다. 신축성이 아주 뛰어나고 춥지 않을 만큼 두꺼우며 덥지 않을 만큼 얇아서 4계절 내내 입을 수 있었던 바지였다. 바지의 큰 주머니 안에는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있어서 동전이나 열쇠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 편리했다. 그 바지에 유일한 단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 바지가 아주 잘 찢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지가 찢어지면, 같은 가게에 가 같은 바지를 샀다. 비싼 가격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바지는 3개월 정도 입고 다니면 어김없이 같은 부위가 찢어졌다. 사이즈가 나한테 작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같은 바지를 새로 사고 버리기를 4번쯤 반복한 뒤, 나는 다시는 그 바지를 사지 않았다. 내 애정과 신뢰에 매번 실망만 안겨주는 바지에 이제는 질려버린 것이다.

나는 그 바지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바지는 대체 왜 이렇게 잘 찢어지는 걸까? 이 바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대체 어떤 기업이 이렇게 잘 찢어지는 바지를 만들고 싶어 할까? 어렸을 때 엄마는 종종 직접 내가 입을 바지를 만들어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늘 가장 질긴 천을 사서 절대 찢어질 일이 없도록 박음질을 촘촘하게 했다. 하지만 이 바지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에 관해 알게 되었다. 패스트 패션이란,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나와 바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최신유행의 의류를 세계적인 수준에서 짧은 주기로 만들어내고 저가로 대량생산·판매하는 상표와 업종을 말한다. 주로 젊은 층이 소비하는 H&M, ZARA, GAP 그라고 Benetton과 같은 기업들이다. 이들은 빨리 입고 버릴 수 있도록 낮은 질과 가격의 옷을 생산해낸다. 그래야 사람들이 옷을 빨리 버리고 곧 또 새 옷을 산다. 그게 이들 산업이 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러한 패스트 패션 산업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환경에 미치는 예부터 몇 가지 들어보자. 말하자면 사실 끝도 없다. 패스트 패션 산업에서 하나의 면(綿)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3,000ℓ의 물이 필요하고, 레이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간 865억 그루의 나무가 희생된다. 버려진 면이 환경에서 분해되기 시작하기까지는 80년이, 폴리에스터는 수백 년이 걸린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패스트 패션 의류를 5번 내외로 입고, 35일 이내에 버린다.1 북미에서만 1년에 120억 톤의 의류 폐기물이 발생한다고 한다.2

이제 노동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세계적으로 6명의 노동자 중 1명이 의류산업에서 일한다. 그중 80%가 여성이고, 이들 중 2%만이 생계를 꾸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 패스트 패션 산업은 개발도상국의 가장 값싼 노동만을 사용한다. 개중에 아동노동도 포함된다. 노동자 대부분은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실제 사례로는 2013년 4월에 발생한 방글라데시의 의류공장 붕괴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Dakha)의 의류공장이었던 ‘Rana Plaza’가 붕괴되어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 1,100여 명이 사망하고 2,500명가량이 부상을 당한 참사였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어린 여성이었다. 방글라데시는 봉제 의류산업의 신흥 강국으로, 높아진 중국의 인건비를 대체할 인력시장을 찾던 서구 의류업체들의 진출지였다. 방글라데시의 시간당 임금은 24센트로 중국의 1달러 26센트3 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2013년의 사고가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첫 사고는 아니었다.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 230여 개의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해 5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꼭 건물 붕괴의 위험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은 의류를 제조할 때 들어가는 각종 화학물로 인해 건강에 위협을 느끼며 노동해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은 피부질병, 호흡곤란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데4,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던 당시의 노동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옷을 사러 매장 안으로 들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바지 앞에 섰을 때, 지금 내가 알아차린 것과 다르게 패스트 패션에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또 그때는 앞으로 내가 자본론 에세이를 쓰면서 패스트 패션 산업에 대해 이토록 긴 설명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나의 이런 경험은 바로 마르크스가 1장에서 이야기하는 ‘물신’ 개념과 직접 관계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 걸쳐 여러 상이한 생산물이 어떻게 화폐라는 공통된 옷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들이 놓인 사회적 관계가 표백되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그렇게 표백된 생산물들은 마치 복잡한 연애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백마 탄 왕자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오직 나만을 위해 나타난 왕자. 우리는 이 왕자가 우릴 비참한 현실로부터 구원해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마르크스는 우리의 환상을 깨고 왕자의 연애사를 낱낱이 밝혀냈다. 알고 보니, 왕자는 성에서 바로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 아니라 여러 장소와 여러 사람을 거쳐 많은 짓(?)을 저지른 후 나에게로 왔다. 그리고 왕자의 종착지는 내가 아니다. 그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우린 감쪽같이 속았다. 왕자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왕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품이고 왕자의 ‘복잡한 연애사’는 상품을 생산한 노동자, 그리고 모든 생산과정을 일컫는다. 왕자에게 아직 남은 ‘가야 할 길’은 상품이 내 손을 거쳐 간 후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상품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물신)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여러 사회적 관계가 얽혀있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는 물신을 환상, 또는 허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물건의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그 전과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선 알 필요가 없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세컨핸드(중고) 옷을 꽤 즐겨 입는 편이다. 1년에 몇 번 동묘나 광장시장, 명동의 중고 옷가게들을 돌면서 내가 좋아하는 밝고 강렬한 색감과 독특한 무늬를 가진 옷들을 건진다. 대개 거기서 판매되는 옷들은 거의 누가 입은 게 티가 나지 않는 중고 옷들이지만, 그중 몇은 헤진 데가 있거나, 희미한 얼룩이 져 있거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그게 세컨핸드 나름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는다. 내가 교환학생을 다녀온 헝가리의 경우, 중고의류산업이 꽤 크다. 중고의류를 전문으로 다루는 ‘Humana’, ‘Creme’과 같은 체인들이 부다페스트 도심에만 수십 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세일하는 날이면 매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사람 중 중고 옷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갔던 것이라 찝찝하다는 이유에서다. 그 사람들은 깔끔한 새 옷을 사는 걸 선호한다. 물론, ‘손을 거쳐 갔다’는 것이 중고 옷과 새 옷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새 옷도 누군가의 손을 전혀 거쳐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옷을 비롯한 모든 ‘새’ 상품은 상품사슬(Commodity Chain)을 거친다. 세계화 시대에서 그 사슬의 길이는 어마어마하다. 청바지 브랜드 ‘Calvin Klein’은 “나와 캘빈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요(Know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5라고 광고하지만, ‘나와 캘빈 사이’에는 사실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디자인된 데님은 베냉에서 자란 목화로 만들어져 독일에서 만든 염료를 사용해 이탈리아에서 직조되고 염색된다. 이 데님은 청바지로 가공되기 위해 바다 건너 튀니지에 보내지고 나중에 프랑스 소재 일본 기업에서 만든 지퍼를 달게 된다. 청바지의 주머니 안감으로 사용된 면은 파키스탄에서 재배된 목화가 사용되었고, 버튼은 독일에서 만든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황동을 위한 구리는 나미비아에서, 아연은 호주에서 왔다. 청바지를 만드는 실은 영국, 터키, 헝가리에서 만들어졌고, 스페인에서 염색되었으며, 이 실을 위한 폴리에스테르 섬유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청바지는 영국 리버풀의 한 의류 매장에 입고되어 소비자에게 판매된다.6 이 어마어마한 상품사슬은 인간사슬이기도 하다. 청바지의 모든 생산과정에는 노동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청바지 생산에 기여한다. 우리 중 누구는 세컨핸드 의류가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쳤다는 이유로 찝찝해하지만, 이처럼 새 옷도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에게 안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찝찝하지 않지만, 그래서 또 우리는 어떤 상품이 생산되기 전과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2만 원 내고 청바지를 사서 3개월 입고 버리면 끝이다. 더 이상 내가 지고 있는 빚은 없다.

물신을 인스타그램으로 이해하면 쉽다. 상품의 가격은 핸드폰의 좁은 화면을 통해 인스타그램이 선별하여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미지에 불과하다. 화려한 이미지 뒤에,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과정이나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가려져 있다. 다음 이미지들은 한때 온라인에서 화재가 되었던 이미지들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wrenkitchens.com/blog/kitchen-lived-perception-vs-reality/

인스타그램 속에서 보여 지는 것과 현실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풍자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아주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과 상황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우리가 사진을 올릴 때는 그러한 것들을 곧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의 가장 좋은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내보이고 싶어 한다. 내가 팔로우 하고,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대신 삶의 파편으로서의 이미지들만 올리고 또 보면서 우리 모두의 삶은 퍽 괜찮은 삶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불평한다.

자본론을 읽으면, 마르크스가 특정 현상의 역사성을 살피는 걸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착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화폐가 생겨나기도 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착취가 발생하게 된 긴 역사든, 청바지가 나에게로 오기까지의 짧은 역사든 그 과정을 무시할 때 물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착취를 눈감아주며 개인을 단절시켜 서로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느끼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백마 탄 왕자는 연애사가 복잡하다. 이상한 놈한테 당하지 않으려면 캐물어야 하듯이 우리는 반짝이는 것 뒤의 일그러진 것, 인스타그램 사진 너머의 현실, 상품 이면의 노동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허핑턴 포스트, 「The Problem With fast Fashion」, https://www.huffpost.com/entry/problem-fast-fashion_n_57ebfeafe4b0c2407cdb22c0

  2. https://www.bwss.org/fastfashion/

  3. 배윤정,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 사례로 알아본 기업의 사회적 책임」, CGS Report, 2013-11

  4. Shwowp, 「The Dark Side of the Fast Fashion Industry」, http://www.shwowp.com/the-dark-side-of-the-fast-fashion-industry/

  5. 광고의 맥락상 의역하면 섹슈얼한 의미다.

  6. 조철기, 「일곱 가지 상품으로 읽는 종횡무진 세계지리」, 서해문집, 2017-06-21

나의 무기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나의 무기 『자본론』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독어판 서문에서 순진한 독일 독자들에게 일갈하는 대목이다. 『자본론』이 나온 지 벌써 150여 년이 지났지만, 또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은 『자본론』의 배경인 유럽이 아니라 대한민국 땅이지만, 이 일갈은 2020년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물론 전 세계 사람들 모두에게도 ̄ 유효한 언명이다. 『자본론』의 문제의식은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각자가 살아가는 조건이 다른 만큼, 『자본론』도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나의 조건에서, 2020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자본론』을 읽고, 그에 관한 글을 쓸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러기에 앞서, 나와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과 『자본론』에 관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현재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반대한다. 또한 『자본론』이 가진 문제의식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은 지금까지 결코 해소된 적 없으며, 앞으로도 자본주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딱히 『자본론』을 읽어서 이런 ‘빨갱이’가 된 건 아니다. 『자본론』은 나의 그러한 사상적 입장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게 해주는 숫돌이지, 결코 경전이 아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기에 굳이 그 두껍고 문체도 건조한 『자본론』을 꾸역꾸역 읽은 것일 게다.

그럼에도 『자본론』은 내 인생의 책 중 한 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가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가졌던 여러 문제의식에 공명해주는 가장 강력한 책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사회에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 처음에는 그냥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철이 들어가면서 ‘그냥 그런가봐’ 하면서 복권당첨을 꿈꾸며 자기 앞에 닥친 일에만 신경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덜 철이 들었나보다. 부러움과 동정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세상에 대한 분노는 인생에 대한 의문으로, 인생에 대한 의문은 체제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내 주변 환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내 주위에는 항상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회는 항상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도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런 사회의 선전이 곧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명문대 출신들에게 고액과외를 받을 때 그들은 동네 허름한 보습학원을 전전했고, 다른 친구들이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닐 동안 동네PC방에서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나름 여유로운 형편의 친구들은 집에서 용돈도 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할 때,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제대로 된 자기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대학은 꿈도 못 꾸었으며, 중·고등학교도 어영부영 다니고 바로 사회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이 말이 정말 싫다.

대학에 와서 더 적나라하게 느꼈다. 지갑이 두꺼운 사람과 지갑이 얇은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다르다. 요즘 시대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들 한다. 그런데 진짜 밥을 굶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다. 단 몇 천원이 아쉬워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비싼 서울 방값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서 고시원을 전전하고 친구 하숙집에 몰래 얹혀살다시피 하는 대학생이 2020년 대한민국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미래는 밝은 꿈이 아니라 어두운 현실이다. 20대의 꿈도 지갑이 두꺼워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러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노력만으로 이러한 삶을 벗어나려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해야 한다. 학교 수업 외 모든 시간 노동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 공부도 해야 한다. 점점 가진 자에 대한 부러움은 시기로 변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은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망적인 고민으로 변해갔다.

더 가진 자에 대한 시기와 덜 가진 자에 대한 동정은 돈 못 별면 사람대접 못 받는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그랬다. ‘내 고민의 근원에는 자본주의가 있구나.’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다 『자본론』을 읽게 되었다. 그냥 열심히 읽었다.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읽었다. 1권을 다 읽었다. 별 답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다. 일상의 당연했던 문법들이 낯설어졌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설명할 하나의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200년 전 태어난 털북숭이 독일인 아저씨에 공명하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자본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본론』을 철 지난 헛소리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보았다. 여전히 일만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어디선가는 4차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세상이 어찌되든 간에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와 같은 대학생들 역시 정교하게 따져본 적도 없고 투철한 계급의식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미래에 임노동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기업체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른 빈부격차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해소될 여지도 없어 보인다. 아직까지 『자본론』은 현재 그리고 어느 정도의 미래까지 우리가 처했고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는 동의하는 사람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들을 앞에 두었을 때의 나의 심정을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문구가 대변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자본론』을 펼쳐들고 읽으라 강제하고 싶었다. 당신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게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필요한지 알고 있냐고, 왜 남들 살라는 데로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처음의 분노처럼 계속해서 감정이 끓어 넘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론』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은 책도 아니고, 진리가 담긴 경전은 더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고민하기보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는 기회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치열하고 엄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쓴다.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배우면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바람이 크다.

맨손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순 없다. 나 혼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끊임없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도구가, 무기가 필요하다. 나는 『자본론』이 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자본론』은 무려 시대의 삶을 바꾸었다. 그런 책은 드물다.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계속되는 한, 『자본론』은 그 대안을 모색하는 길잡이로서 가장 유의미한 논의로 남을 것이다. 지난 150년간 그래왔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본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의 원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수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세계가 지속되는 한 『자본론』의 생명력은 결코 다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경우가 아닌 우리 삶의 작은 조각에서도 『자본론』은 우리의 무기가 되어준다. 대학 못 가면 인간 대접 못 받는 사회가 절망적이라면, 그래서 꾸역꾸역 대학 갔더니 졸업하고 취직도 안 되는 현실이 지긋지긋하다면, 인간을 돈으로만 보는 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면, 겨우겨우 취직하니 일만 하다 죽을 것 같다면, 이 이상한 삶을 끝장낼 무기로 『자본론』을 사용해보자. 답을 얻지는 못해도 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 글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자, 내 친구들을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나는 집도 없이 한 끼 한 끼 겨우겨우 먹고 살아가는 내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자본론』을 나의 무기로 삼아 나아가겠다. 언젠가 세상은 나아지겠지만, 또 나아져야만하겠지만, 그 과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갈려나가는 순간의 연속일 터이다. 그 희생과 헌신에 나의 보잘것없는 노력도 함께할 것을 다짐해본다.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마르크스의 『자본』, 이른바 『자본론』이라 불리는 책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신의 머릿속을 불현 듯 스치는 불온서적이 있다면 유추하는 그것이 맞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얼핏 들어본 거 같은데… 마르크스 어쩌고 하는 고전책 아냐?” 정도의 배경 지식이 담긴 답변도 거의 듣기 힘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올해로 만 20세가 되는 대한민국의 2000년생 남자다. 물론 제목의 ‘김필진’도 동일 인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 나이 또래의 대한민국 사람에게 2020년 1월 현시점에서 『자본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면 더욱 저조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래도 개중에는 소싯적 신문의 정치면 사설 좀 읽어왔다며 그 불온서적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 요즘에 바로 그 『자본론』 읽어요.” 그들의 대답은 비교적 비슷할 것이고 예측 가능하다. 빨갱이냐고 묻거나 아직도 그걸 읽는 사람이 있냐고 답할 것이 확실하다. 21세기 현재, 스스로 좌파임을 자부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외면 받는 책이 바로 『자본론』이다. 그걸 읽고 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이 말이다. 왜? 나는 왜 『자본론』을 읽고 공부하는 것일까?

‘금기’ 나는 금기라는 벽과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에 싸움쟁이였다.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놓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공을 찼고, 학급 내 주먹질 다툼은 월례행사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 주차된 차의 백미러를 깨먹는 일 정도는 큰 사건도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범적이고 올바른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왔고, 꽤나 반항적인 편이었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모습에 속을 태우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나의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학생으로서의 쇄신을 위해, 목동 7학군으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나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을 살던 곳을 떠나 첫 교복을 입게 된 동네는 내가 살아왔던 곳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나를 인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목동의 치열한 학구열은 나의 평범한 하루하루들을 옥죄어왔다. 버티기 버거웠다. 학교를 안 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신경성 복통에 하루를 멀다하고 입원했음은 물론이요, 우울증에 불안-강박증, 심리 상담까지, 몸도 마음도 상했고 그야말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 시기도 있었다. 내 학창시절은 산산조각이 났고, 중학교 시절에 사귄 친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많이 다퉜다. 아버지의 이사 결정이 내 삶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씩 커가며,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사회적 괴물이 아버지의 그러한 판단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생김과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엄청난 놈의 존재를 피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본론』은 이 무렵에 내가 접한 여러 종류의 불온서적 중 하나였다.

『자본론』과 나의 첫 만남은 내가 살아온 맥락 위에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 당시에는 『자본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공부하지는 못하였으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김수행 선생님께서 지으신 『자본론 공부』 등의 가벼운 책들로 흥미를 키워갔다. 결정적으로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술, 이를 테면 『공산당 선언』이나 『독일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수고』의 요약문 등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의 고통과 불만, 피해의식을 보듬어 내 잘못이 아님을 다독여준 것은 다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털보 할아버지와 ‘소외론’이었다. 나는 그들의 휴머니즘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의 눈에 그러한 책들은 그야말로 파격이었고, 내 안에 꿈틀대던 금기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었다. 금기의 벽은 사회에 대한 나의 반항심만으로는 꿈적도 않더니, 내 손에 낫과 망치가 쥐어진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자본론』이 내 머리 속에 들어오자, 금기의 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공차는 것을 좋아하던 반항아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 끝에 결국 벽을 넘어서고야 만 것이다.

누구보다 시끄러운 사춘기를 보내고 어느 새 나는 대학생, 새내기의 문턱에 있었다. 그렇게 앙망했던 경희대학교에 입학해 보니, ‘이까짓 대학이 뭐라고 나는 그렇게 망가졌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학교를 쉬거나 그만두기도 했고 가족들과 갈등을 겪기도, 사랑하는 것들을 잃기도 했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던 이유는 결국 대학 입시에서 시작되었었기에 더욱 허망했다. 그토록 강요받던 ‘인서울 4년제’, ‘국내 TOP10 대학’은 그 무엇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허망함으로 방황하던 첫 학기, 나는 교양 수업으로 수강하게 된 ‘고전 읽기 : 『자본』’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는 완전히 아물지 못한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내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또 공부하고 싶은 것들, 내가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내가 싸워내야 할 것들이 보다 명료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계속 나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기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그간 꾸준히 놓지 않았던 『자본론』 등 여러 불온서적을 또 다시 꺼내든 나는, 우울한 이 세상의 무자비함에 당하고만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신입 생활은 『자본』과 함께하게 되었다.

『자본론』은 개인적인 내 정서의 흐름과 밀접히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대학생, 성인, 사회인으로서 내가 만난 세상은 내 경험과는 무관하게 『자본론』의 필요성을 꾸준히 증명해주었다. 알바생으로서, 대학생으로서, 국민으로서, 철학전공자로서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자본론』으로 명쾌히 답변이 가능한 미스터리들이 많았다.

우선 대한민국의 20대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알바와 같은 실제적 임노동 상황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던 2019년 한 해 동안 꾸준히 알바를 해왔다. 2020년에도 알바를 계획 중인데, 최저시급이 오른다고 한다. 뭔가 이상했다. 2020년의 최저시급 인상은 진작부터 결정되어 있었을 터인데, 나는 2019년 한해 8,350원의 최저 시급에 내 노동력을 판매했다. 그렇다면 내 노동력과 교환되어야할 값어치만큼의 최저임금이 8,590원으로 사전에 판단/책정되었던 것은 2019년이나 혹은 그 이전일 것이고, 이를 토대로 2020년의 최저임금인상을 예정해둔 2019년 당시에도 나는 (그 보다 적은 값인)8,350원에 내 노동력을 판매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차익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내 노동력의 값은 분명히 고정되어 있을 텐데 왜 엉뚱한 이들이 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 노동력의 값어치는 8,350원이 맞는가? 8,590원이라고 단언할 수는 있는가? 나는 매달 매해 항상 똑같이 노동력을 생산해 판매하는데, 해가 바뀐다고 그 교환의 등가 값어치가 바뀌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수많은 궁금증과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알바 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누구 하나 명쾌히 답을 주지 못했다. 내 질문으로 인해 비슷한 의문을 함께 품게 된 친구도 있었다. 『자본론』은 이에 대해 간단하고도 무서운 대답을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었다. “가격은 가치와 다른 것이고, 내 노동력의 가치는 불변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본론』은 설명하고 있었다.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2873529925

 

이 같은 『자본론』의 예리한 통찰은 나아가 대학생으로서 김필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김필진에게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우선 『자본론』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서 마르크스는 ‘물신숭배’에 대한 언급을 제법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물신숭배’란 단적으로는 사회적 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물건에 인격을 부여해, 물건이나 상품 그 자체를 숭배하거나 인격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니며 그 대상이 상품(물건)에서 일종의 상품인 ‘화폐’로 바뀐 ‘화폐 물신성’ 또한 함께 설명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어렵고 와 닿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하면 그 참된 의미와 현실성을 체감하기 힘들다. 다만 위의 서술처럼 간단하게나마 그 핵심 의미를 인지하고 우리 주위의 현실 세상을 둘러본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자본론』 속의 ‘물신성’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극도로 고도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더욱 더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결국엔 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XX브랜드의 상품은 정말 우아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YY 회사의 제품은 그 스스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우수하다.” 등등. 사실 이러한 문제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아도, 위와 같은 주위의 사례들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다. 돈과 상품이 그 자체로 처음부터 어떤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돈과 상품의 신비성을, 그것들을 인격화하여 숭배함으로서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돈과 상품이 불러오는 이로움을 돈과 상품 자체에 내재된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성’의 환상은 일반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면화 되어왔다. 특히 돈과 상품에 예민한 20대 대학생들을 둘러보면 그 양상을 더욱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본론』은 우리가 무의식에 내포하고 있던 그릇된 환상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저술과 자본주의적 ‘물신성’에 대한 고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로 자본주의적 모순의 맥을 꿰뚫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내용이 이러한 일반론적 원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포괄적 메커니즘에만 포커스를 두는 것은 아니다. 『자본론』의 여러 파트에서는 당대 유럽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자본주의적 착취의 실태를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부분은, (간단히 말해서) 영국 북부의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하기 위해, 아일랜드나 영국의 각종 농업지의 갈 곳 없는 이들과 농민들을 마음대로 잡아다 날라서 노동력의 공급을 증폭시켰다는 내용이다. 사안의 비인간성과 잔혹함뿐만 아니라 내가 해당 내용을 인상 깊게 여기는 까닭은 그 현재성에 있다.

얼마 전 선배를 통해 알게 된 ‘고용허가제’라는 제도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자본」에 등장하는 위의 영국의 사례와 닮아있다. 2020년 현재 고용노동부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제도인 ‘고용허가제’는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일을 하고자 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공장주나 사업주들이 고용노동부에 노동력 공급을 요청하면 고용노동부에서 지원 받은 이주노동자들을 선별해 뽑은 뒤 양측을 연결해 사업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 해외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게 될 곳이 어떠한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자기의 고용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근로하게 되며, 자신이 일할 직장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또 이직은 3번으로 제한되며, 이를 어길 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다.

한마디로 강제노동에 가까운 이러한 제도는, 스스로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 아직도 『자본론』에 등장할법한 말도 안 되는 노동법이 살아 있음에 매우 분개한다.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위와 같은 제도를 떠받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계속해서 『자본론』을 읽고 ‘고용허가제’와 같은 비인간적 착취 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가야할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론』은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재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앞서 제시한 ‘최저시급’과 ‘고용허가제’의 두 가지 사례는 그 현재성의 단편적이고 구체적인 양태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사례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의미에서 내가 『자본론』을 계속 공부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현실적 동기도 존재하는데, 내가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비판 서적인 『자본론』에서 철학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자본론』의 전체를 관통하는 ‘노동가치설’은 논의의 시작부터 ‘가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를 동반한다. 물론 ‘노동가치설’이 철학적 이론이거나,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이 되어야만 학설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실제적인 ‘가치’의 형성과정이 그 근본 맥락의 시발이다. 다만 경제학의 주류가 ‘효용가치설’이고 ‘가치’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보편적 관념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가치’의 참된 의미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노동가치설’에 다가가기 위한 첫 단추로서 필요할 것이다. 그냥 아무 일이나 한다고 해서 전부 다 가치를 만드는 노동인 것은 아니며, 가격이 높고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서 그 상품의 ‘가치’가 높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깊은 사색과 고찰 속에서만 일반적인 경제상식의 문을 깨부수고 나올 것이다.

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에 의해서 형성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식의 인간애의 사유는 충분히 공부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린 시절 한창 교복 입던 때의 나를 따뜻하게 달랬던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자본론』의 커다란 맥락과 흐름에도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자본론』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다.

지금까지 『자본론』에 관한 이야기는 내 개인의 삶과 그 외부에 실재하는 자본주의 세계 간의 관계망에서 서술을 해봤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일들을 구체적 사례로 삼아,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를 설명하고자 노력했고, 또 같은 맥락에서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내가 『자본론』을 계속해서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필연성의 이유와, 현실적/현재적 유효성의 이유,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20대로서 내가 살아왔던 삶은 마르크스주의 인식에서 사회의 불의와 맞닿아있었으며, 『자본론』은 그러한 문제의 본질과 그 현실적 해결법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그리고 현재성이 충분한 책이었다. 그것이 내가 계속 『자본론』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하는 동기이기도 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는 영향력 있는 큰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가치설은 전 세계의 경제학도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 이제는 커다란 계급적 혁명도 일어나지 않으며, 화폐물신화는 이미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읽는다. 뉴스와 신문, 정치인과 이웃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주입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가장 최선의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정녕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시스템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착취와 억압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걸까? 다양한 관점을 견지해보고, 열정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져본다면, 이 세상은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인간의 살아 숨 쉬는 가능성을 정치와 철학 속에서 찾고 싶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자본론』을 권할 것이다.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난 뒤에야 맛볼 수 있는 떨림,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뜨거운 열정과 버무려진 그 떨림에, 2000년생 김필진은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