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세 명의 대학생이 『자본론』을 읽기 위해 모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자본론』을 읽으며 더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본론』을 읽으면서 읽은 내용이나 이들에게 남은 살아있는 얘기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남기려한다.

어른들은 몰라요~ [내가 읽는 『자본론』]

2021년 ‘내가 읽는 『자본론』’ 스무 번째 글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어른들은 몰라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지난 2019년, 대한민국의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이 만19세에서 만18세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것은 광복 이후 세 번째 선거권 제한 연령 조정이자, 청소년의 참정권 쟁취를 위한 무수한 투쟁들이 단면적으로 가시화된 일이었다. 필자는 2019년 3월을 지나며 만19세가 되었기에 실제적 변화를 체감할 순 없었지만, 이 연령 기준 조정을 두고 여러 현장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던 나의 스물 살 시기는 아직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내 주위에서도 연령 조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미성숙한 청소년이 벌써 정치에 참여해서 좋을 것이 없다.”라고 얘기하거나 또 다른 이들은 “참정권은 국민의 기본적, 보편적 권리이므로 청소년을 이 기본적 권리에서 배제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령 하향 조정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는 전자의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만한 지점을 시사한다.

우선 전자의 주장은 ‘장유유서’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동북아 문화권 특유의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 나이주의) 문화와 맞닿은 견해라 판단된다. 연령에 따라 정해지는 위계질서와 그 규범에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복종해왔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을 불완전한, 혹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또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종종 발견한다. 에이지즘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연령-차별적 문화 속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은 자연히 여러 억압에 놓이게 된다. 이 같은 억압의 양태는 개별적 개체로서의 아동과 청소년, 또 우리 사회 분업 체계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도맡는 구성원으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을 동시에 옥죄고 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피억압과 더불어 ‘노동자’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은 성인 노동자의 그것보다 더욱 무겁고 커다란 억압의 사슬을 발목에 차게 되었다.

추상화 된 사변적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을 떠올려보자. 당장 우리가 여러 가지 종류의 판·구매와 소비, 거래, 교환 등을 실현하는 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사회적 분업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청소년과 아동들은 어떠한 상태에서 근로하게 될까? 우선, 대부분의 대한민국적인 문화가 그러하듯, 에이지즘 문화가 그 관념적(관습적) 기반을 이룬 사업장에서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차별과 부당대우에 놓여있다. 이들의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유로 이들을 향한 공격적 발언과 차별적 행위가 큰 거리낌 없이 (연장자들에 의해) 자행될 것임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추론 가능한 종류의 현상이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상품 노동력에 관한 부분에서 포착된다. 에이지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아동·청소년-노동자는 충분히 숙련되지 못한 노동력의 판매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종류의 편견을 지닌 고용주들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성인 노동자가 같은 시간 동안 수행하는 노동보다 질이 낮은 노동만을 수행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이는 사실이다. 특정한 노동의 행위 경험과 이에 대한 능숙도가 비례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의 특수한 형태와 개별적 상황에 따라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성인 노동자들에 비해 더욱 우수한 역량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편견이다. 고용주들은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업무적 미성숙을 빌미로 시간적 크기가 성인 노동자의 그것보다 훨씬 큰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노동력을 성인 노동자의 노동력 가격과 비슷한 가격에 구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같은 값에 아동·청소년 노동자를 성인 노동자보다 오래 고용하고자 하는 셈이다. 언뜻 보면 이는 등가거래로 보일 수도 있다. 아동이나 청소년이 판매하는,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품질의 상품임에 동의하는 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질이 떨어진다는 식의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이유로 어린 ‘노동력’의 가치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고용주들의 음흉한 속셈은 커다란 오류를 낳는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에 적용되는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 상품에 투여(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의 총합으로 책정된다. 즉, (아동·청소년의 노동력의 가치량은 상품 노동력 생산에 투여된 모든 가치량의 합임에도 불구하고) 아동·청소년들이 판매한 노동력이 그 구체적 행위(노동) 과정(구매자/고용자의 상품 사용 과정) 끝에 이끌어내는 물적(양적) 생산성이 (성인노동자의 그것에 비해) 낮다는 이유로, 본래 가치의 양보다 적은 가치를 아동·청소년의 노동력 가격표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력의 질적 문제를 빌미로 자행 되는 (시간적 양이) 과도한 노동이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지속적으로 강제 될 경우, 이는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일상의 재생산’을 방해하며, 나아가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생명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더불어 어린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노동량을 부여하는 것은 고용주가 노동자의 (손에서 창조된) 가치를 앗아가는 착취의 정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력을 판매한 노동자의 삶이 재생산 될 수 있게 하는 생활수단의 양적 크기와 같다. 따라서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지속적으로 과다 노동을 강제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증가하며 이는 이들이 판매하는 상품 노동력의 가치 증대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테면 과도한 노동으로 야기된 질병이나 성장저하와 같은 건강상 문제들이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일상과 그 재생산을 방해하게 될 경우, 고용주가 이들에게 지급해야할 이들 노동력의 값어치는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다음날 출근을 위한 기본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상품으로서 기능 할 수 있는 정상적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양 역시 (건강 문제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어린 노동자들의 개인적 사정 따위엔 관심이 없다. 노동력의 가격표는 그대로일 것이고, 이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치착취의 정도가 더욱 증대됨을 의미한다.

『자본』Ⅰ-상 제3편 제10장의 노동일 부분을 통해 우리는 수백 년 전 지구반대편 영국에서도 나이와 권위를 빌미로 한 아동·노동자에 대한 억압이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1 저자 마르크스는 1860년대 영국의 <아동노동 조사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를 인용하여 당시 영국에서 자행 되고 있었던 아동-노동자에의 착취와 억압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노동량을 9~12세의 소년들이 수행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나 고용주의 이와 같은 권력 남용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

소년들을 주야 교대로 일시키는 방법은 ……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이 노동시간은 많은 경우 소년들에게 잔혹할 뿐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시간이다.

……

정상적 노동일이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 반까지 계속되는 어느 압연공장에서 일하는 한 소년은 일주일에 나흘 밤은 적어도 8시 반까지 일했다… 그리고 이것이 6개월간 계속되었다. 다른 한 소년은 9세 때는 가끔 1교대 12시간 노동을 3회 연속했고, 10세 때는 이틀 낮, 이틀 밤을 계속 일했다.

……

12세의 또 한 소년은 스테이블리에 있는 어느 주물공장에서 2주일 동안 계속 아침 6시부터 밤 12까지 일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2

 

위 내용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당시 영국의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은 너무도 가혹하고 처참했다. 자본과 그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고용주 자본가는 불변자본3 및 생산수단이 빈둥거리며 그 쓸모를 잃게 될까 극도로 염려한다. 자본가가 구매한 생산수단 속의 가치는 생산수단이 사용되지 않는 한 쓸모없이 낭비되며, 이는 자본가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이 때문에 자본은 본능적으로 기계를 비롯한 자신의 여러 생산수단들을 잠시도 가만히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본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근본 속성은, 노동자를 24시간 제한 없이 착취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동일한 노동자의 노동력을 하루 종일 밤낮없이 착취하는 것은 생물의 육체적 차원에서 불가능하다. 여러 노동자들의 고용주인 자본가들은 고민 끝에, 노동자들을 밤과 낮으로 나누어 교대로 착취하고자 했다. 이 발상에서 비롯한 야간 노동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극도의 비인격적 노동 환경으로 내몰았다. 물론 야간노동에 내몰렸던 노동자들이 모두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인에 비해 주체적 결정권이 부족한 아동과 청소년들은, 고용주 혹은 부모나 기타 어른들의 나이에 근거한 차별과 그 강압으로 말미암아 반강제적으로 위와 같은 고용 형태와 노동 환경에 순응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거의 모든 아동과 청소년들은 야간 노동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 의지로 이 같은 작업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위와 같은 비인간적 형태의 참혹한 착취가 성인에 비해 아동에게 더욱 심각한 건강과 병태 생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은 더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 이와 같은 교대제 또는 윤번제는 영국 면공업의 왕성한 성장기에 성행했으며, 현재에도 특히 모스크바의 면방적 공장에서 성행하고 있다. …… 이런 곳에서 노동과정은 6일간의 노동일 동안에는 매일 24시간 계속될 뿐 아니라, 일요일에도 거의 24시간으로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는 남녀의 성인과 아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동과 소년들의 나이는 ‘8세’부터(일부의 경우에는 ‘6세’부터) 18세까지의 모든 나이층에 걸쳐 있다. …… 약간의 부문들에서는 소녀와 부인도 남자 종업원과 함께 야간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

야간노동의 일반적인 나쁜 영향들을 당분간 무시하면, 24시간 중단 없이 계속되는 생산과정은, 예컨대 앞에서 말한 매우 긴장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부문들[각 노동자의 공인된 노동일은 대체로 주야를 불문하고 12시간으로 되어있다]에서는 표준노동일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 그러나 이 한계를 넘는 과도노동은 다수의 경우 영국 공식보고서의 말을 빌린다면, ‘참으로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

[제강공장인 네일러 앤드 빅커즈사의 공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 미만 소년들의 야간노동 없이는 우리 일은 잘 될 수가 없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생산비의 증가다. …… 숙련공과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소년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 미만 소년들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면 막대한 곤란이 생길 것이다. 최대의 곤란은 ……비용 증가다. …… 손실은 공장주의 부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노동자]들은 당연히 그 손실을 부담하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4

 

실상 자본가는 자신의 손실을 극도로 꺼려하여 손실 문제의 책임 소재를 노동자에게 전가 하려고 하는데, 보통의 노동자 역시 손실을 부담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기에, 결국 이를 감당하여 손실을 메꾸는 몫은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실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근본적 계급 관계 때문에 자본에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으로 연령이 낮은 아동·청소년이라는 점 때문에 복합적인 착취의 위험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에이지즘의 문화 구조, 그리고 이념적 권력 관계의 작용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에게 두 가지 교차적 차원에서의 불이익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이지즘을 자본주의적 착취와 버금가는 불의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보다 정합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나이주의 문화와 자본주의 속 에이지즘의 양태에 대해 분석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 오늘 내가 쓰고 있는 글의 목적은 에이지즘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나이에 따른 위계(권력) 형성이 바람직한지 논함에 있지 아니하다. 이를 위해선 너무나도 엄밀하고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증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내 논의의 범위는 실제적 현상에 드러난 에이지즘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영향들을 고민해보는 수준에 국한하기로 했다. 에이지즘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명료화 할 수 없다고 해서 이 글이 무의미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과거(1800년대)의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탐구해온 자본주의적 착취와 에이지즘적 불평등의 결합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1년 지금 세상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대한민국을 휘감았던 ‘열정페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열정페이’란 젊은 구직자들이나 청년들에게 극단적 저임금 혹은 무임금으로 노동을 시키며, 기술력의 교육이나 열정 창출 등을 지급했음을 주장하는 기성세대 고용주들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인터넷 지식백과에선 ‘열정페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무급 또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주 적은 월급을 주면서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태를 비꼬는 신조어다. 즉, 취업을 희망하는 취업준비생을 무급 혹은 저임금 인턴으로 고용하는 관행으로 2014년 유명 의류 업체와 소셜커머스 업체 등 몇몇 기업의 부당한 청년 고용 실태가 보도되면서 이 용어가 부각됐다.”5

“열정페이(熱情Pay)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줬다는 구실로 청년 구직자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적게 줘도 된다는 관념으로 기업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경험이 되니 적은 월급(혹은 무급)을 받아도 불만 가지지 마라,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라는 태도를 보일 때 이를 비꼬는 말이다. 이 말에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로 치달은 사회 분위기에 대한 냉소가 담겼다.”6

 

‘열정페이’란 현대의 청년-노동착취를 우습고 엉성하며 얼토당토아니한 포장지로 포장하는 셈이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용주가 ‘열정페이’를 지급하고자 억지를 부리는 대부분의 경우는 청소년 및 청년층이 노동력 판매하는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 1800년대 영국 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아동들보다는 조금 더 넓은 스펙트럼의 연령대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면서도 이를 통해 깨닫는 중요한 점은 나이주의 문화에 근거한 권력 구조를 토대로 발생하는 심화된 형태의 노동 착취가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 계속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현대엔 사회가 더욱 첨단화 되어감에 따라 착취를 고도화 하는 에이지즘적 억압이 더욱 교묘하고 세밀한 양상으로 첨예화 된 것으로 보인다. 저출산과 수명의 연장으로 사회 지배층-피지배층 간의 연령적 단절은 더욱 뚜렷해졌고, 이는 나이주의 위계 질서와 권력 구조를 공고화 했다. 또 이 때문에 위와 같은 복합적이고 결합적인 피착취 대상의 연령적 범위는 더욱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용주 계급과 기득권층을 구성하고 있는 연장자들은 사회적 권력과 기득권적 지위를 보다 더 공고히 했으며, 이는 더 많은 아동/청소년/청년을 억압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생애 주기’의 기준으로 과거엔 ‘한창 일할 시기’에 막 진입하곤 했던 젊은이들은 이제 일자리를 쉬이 구하지 못하게 되었고, 사회적 권력에서 더욱 더 소외됨으로써 절박하고 간절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일전엔 정상적 성인 노동자로 취급 받던 젊은 20대 노동자들이 이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이주의적 경향에 의해) 보다 심화된 노동 착취적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열정페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신조어의 등장은 단지 추상적·사변적 유행어나 가벼운 말장난의 등장 정도로 판단할 수 없다. 실제로 내 주위에도 이 같은 ‘열정페이’의 사례들이 너무나 빈번하고 흔하게 존재하고 있다. 먼저, 아동 청소년이나 젊은 청년 계층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하고자 하는 사업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제도로 ‘수습’, ‘실습’, ‘교육’ 등의 방법들이 사용되는데, 이는 ‘열정페이’가 의미하는 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습생’, ‘실습생’, ‘교육생’ 따위의 이름표를 달게 된 어린 노동자는 보통 수습이나 교육, 실습 기간 동안 합의된 급여보다 적은 급여(심각한 경우엔 무급여)에 일하게 된다. 연장자인 고용주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 노동자들에게 기술력 이전 및 각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제시하며 이 노동착취의 관례를 적극 옹호한다. 더불어 고용주들은 ‘실습 제도’에 노동자가 쓸 만한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는 것인지 시험해보는 의의도 있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해당 노동력이 성에 차지 않으면 수습(실습)기간 전후에 고용주 마음대로 얼마든 (일방적으로) 해고해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중고교시절, 청소년의 입장에서 수습기간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했던 아르바이트-계약들을 숱하게 경험 했다. 그때는 생각의 한계로 지금 같은 문제의식은 없었지만, ‘대체 교육과 급여의 지급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의아함은 분명 들었다. 즉 고용주가 미래에 그럴듯한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구입하고 싶어 어린 노동자에게 교육 또는 실습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는 어디 까지나 고용주 자신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당연히 계약된(합의된) 동일한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 맞지 않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좀 더 면밀히 현실을 들여다보면, 알바생 실습, 교육 제도 정도는 양반이다. 그래도 이 경우엔 수습기간이 끝나면 이러한 노동 착취를 어느 정도는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재학 중인 대학 내외에 존재하는 특정 매장(사업장)에서 훨씬 더 충격적인 노동 현장들을 목격해왔다. ‘크루’, ‘지기’ 등의 그럴듯한 이름을 부여 받은 ‘무급’ 대학생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매장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로 내 주위에 즐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알아보니 이들은 수익금을 기부하거나 자신들의 학부를 위해 쓰거나 하는 비영리적 성격임을 밝히고 있었고, 특정한 한 명의 고용주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를 어디론가 통째로 흩날려버리고 있었고, 이는 노동의 의미와 그 중대한 가치에 대한 심각한 훼손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학 시절 해맑게 웃으며 자발적으로 ‘열정페이’를 실현해낸 젊은 구직자들이 머리가 희끗한 대고용주들 눈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겠는가. 이 어린 노동자들의 무급 노동을 일종의 협동 조합식 기업 운영으로 포장하려해도, (노동-생산과정의 통제력은 자신들이 지닐지 몰라도) 결국 노동의 생산물 혹은 노동력이 창조해낸 가치를 이들이 소유하지 못하므로 합리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더불어 노동자의 유(類)적 본질 그 자체도 소외되고 훼손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이 행위자의 의식적, 창의적, 자발적, 인간적 행위일 때에는 그 자체만으로 노동 행위자를 만족시키고, 인간의 능동적 행위임에 해당 노동에 인간의 유(類)적 본질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노동의 대가로서의 가치가 필요 없게 된다. 노동 자체가 이미 인간적 목적이며 대가를 필요로 하는 수단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노동은 생계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그 본질적 의미는 이미 퇴색되었고, 그 과정의 결정권과 통제력마저 이미 노동자의 손을 떠났으며, 노동자로 하여금 그저 대가로서의 가치만을 바라게 한다. 내가 언급한 대학생 무임금 노동의 경우엔, 노동의 과정 자체는 노동자들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는 의식적 창의적 행위로 구성되지만, 노동의 목적 자체가 노동자 스스로의 욕구 충족이나 만족을 위함이 아니고, 노동의 생산물을 노동자가 소유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당 노동이 수단으로 기능하여 노동자가 어떠한 가치를 (노동의) 대가로 지급 받게끔 하는 것(임금 노동) 또한 아니다.]

 

요컨대 2021년 현재에도 어린 노동자들은 노동자-일반이 당하는 착취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부당하게 착취당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착취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가 나열한 모든 종류의 실제 노동착취 현장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아동/청소년/청년 노동자들이 경험하게 될 냉혹한 현실이라 단언하겠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이가 제법 차 고용주가 나이주의 권력을 이용하기 부적합한 노동자들은 이전의 노동 경험을 근거로 실습(교육) 등의 착취적 경험에서 면제되며, ‘젊은 시절의 경험’ 등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될 무임금 노동의 새 희생양 후보에서도 제외된다. 이쯤 되면 이미 내가 굳이 『자본』 속 옛 사례들까지 꺼내어 문제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이 모든 실례들이 『자본』 속 사례들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영국 및 유럽 각지에서 자행 되었던 아동·청소년 노동 착취가 껍데기만 바꾼 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당연히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린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히) 급여 대신 지급 받아야 할 대가로서의 가치로 보기 어렵다. 이들에게 필요한건 사라진 임금의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기술력의 교육이 아니라, 인간적 노동 환경 보장과 노동 가치의 온전한 반환으로서 누릴 수 있게 되는 인간적 ‘성장’과 학술적 ‘교육’의 기회다. ‘교육’은 고용주의 핑계 거리가 아니라 어린 노동자들의 권리로 기능해야 한다.

『자본』 속 서술들 역시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본문에서 제시하는 19세기 영국의 사례들은 2021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봐도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현대의 알바생 실습 제도와 유사한 사례들이 제시되어있음에 매우 놀랐다. 이를 조금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인노동자들이 소년들에게 베푸는 지도는 소년들의 임금의 일부로 계산되며 …… 성인 노동자들은 소년들의 노동을 비교적 싸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소년들의 야간 노동이 금지된다면) 각 성인노동자는 자기 이득의 절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

바꾸어 말해 샌더슨사는 성인노동자들의 임금 일부를 소년들의 야간 노동에 의해 지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급해야할 것이다. …… 이리하여 샌더슨사의 이윤은 약간 감소할 것인데, …… 이 사실이 샌더슨사로 보아서는 소년들이 자기 일을 낮에는 배울 수 없다는 훌륭한 이유인 것이다.

……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계설비가 놀고 있는 탓으로 생기는 손실은 주간작업만 하는 공장이라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 만약 용광로의 불을 끄지 않으면 연료가 낭비될 것이고, …… 그리고 용광로 그 자체도 온도 변화로 말미암아 망가지게 될 것이다.‘(※이에 대한 저자 마르크스의 반응※ 그런데 동일한 용광로인 노동자들은 주간노동과 야간노동의 교대에 의해 조금도 망가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1865, 제85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조사위원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규칙적인 식사시간이 보장되는 결과 약간의 열량이 현재보다 더 낭비될 수는 있다. …… 그러나 유리공장에서 일하는 성장기에 있는 아동들이 마음 놓고 식사하며 먹은 것을 소화하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결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나라의 유리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력의 낭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 그처럼 더운 공기 속에서 그처럼 힘든 일을 하는 아동들에게 수면은 절대로 필요한 것인데, 아동들은 이 수면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뛰어놀거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시간을 조금도 얻지 못한다. …… 이 짧은 수면까지도 밤에는 아이들 자신이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중단되며, 낮에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잠이 깨기 때문에 중단된다.

……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 초안 작성자인 트리멘히어와 터프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년‧소녀‧부녀자들이 주간 또는 야간의 근무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량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7

 

인용문의 사례는 기술력 교육이 필요한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며, 성인 노동자들은 해당사항이 없다. 이를 통해 고용주는 임금의 지출을 줄일 수 있고, (어린 노동자들 덕분에 이익을 얻는) 성인 노동자들은 어린 노동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는 명목 아래 보조적 노동력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어린 노동자들의 생명력은 소실되고 궁극적으로 노동-가치 착취를 극대화한다. 이런 상황이 1865년 영국과 2021년 대한민국에 모두 존재한다.

1800년대 영국의 공장에서는 위와 같은 착취적 노동 제도들을 바탕으로 온갖 핑계를 만들며 아동·청소년 및 부녀자들을 24시간 주야 교대 근무제로 내몰고 있었다. 공장주들은 (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24시간 공장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실습 제도를 내세워 아동과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성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형태의 노동 제도의 치명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오히려 이를 통해 약간의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모든 부분에서 1800년대의 영국의 공장 노동 실태와 현재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청년 노동 현장은 공통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200여 년 전의 영국 아이들과 현재 대한민국 아동·청소년 모두 공통적으로 나이주의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의 피해자들인 셈이다.

나는 『자본』에 보이는 과서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의 실태가 지금 아동과 청소년들이 겪는 노동 현실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로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 열거한 문제들을 에이지즘의 담론과 직결 시킬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에이지즘이 아동 및 청소년 노동착취의 과정에서 직접적 역할을 하며 뚜렷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의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노동 현장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또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추가적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이는 이들의 노동력 가치를 앗아가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이 에이지즘에 기반을 해 있던 그렇지 아니하던, 어린 노동자들의 근로를 더욱 버겁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만만하게 여겨지는 낮은 연령의 피착취 계급으로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실제적 노동 상황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며, 그 불평등한 현실을 분석적으로 밝혀내고 이에 맞서 싸워낼 당위를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선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투쟁이 특정 정체성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과거의 어느 때에 아동이었고 청소년이었다. 아동·청소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 결코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서 계급성을 저해할만한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할 계급투쟁의 가열한 함성 속에, 이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위한 뜨거움을 조금 더 도드라지게 섞어내도 되지 않을까. 청소년과 아동의 인권을 위한 용기 있는 투쟁들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되찾아오고 있듯이, 아동과 청소년들의 노동권 또한 다시 되찾아올 수 있게끔, 시대적 소명을 깨우친 모두가 들끓는 목소리를 모아야만 할 것이다.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구시대의 옛 어휘로 남기를 소망하며,

“이젠 어른들도 알아야만 한다.”


  1. 물론 이런 억압은 당연히 ‘자본의 노동자 억압’ 일반을 그 바탕으로 두고 있으며, 이에 부차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2.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Ⅰ 상, 비봉출판사, 2015, 345~349쪽.

  3. 생산수단을 구입하는 데에 사용된 자본의 부분을 일컫는 말로, 생산과정에서 추가로 창조 되는 잉여의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 자본의 부분을 의미한다. 불변자본은 생산수단의 구입으로 자본에서 구체적 생산수단의 형태로 그 양태를 탈바꿈하며, 이 생산수단에 체현 되어있는 가치를 그대로 생산물에 이전할 뿐 추가적 가치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4.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Ⅰ 상, 비봉출판사, 2015, 345~354쪽.

  5. 「열정페이」, 시사상식사전 –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각, 2015.03.0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569963&cid=43667&categoryId=43667〉.

  6. 「열정페이」, 위키백과, 2020. 5. 30.,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C%A0%95%ED%8E%98%EC%9D%B4〉.

  7.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Ⅰ 상, 비봉출판사, 2015, 354~356쪽.

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자본론 에세이-6, 제10장: 노동일 ) [내가 읽는 『자본론』]

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누구나 평생의 고독과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흔히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구멍을 채울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 다르다. 어떤 이는 그 구멍이 신(神)의 자리라 하고, 다른 이는 사랑, 혹은 소울메이트의 자리라고 한다. 누구는 자연과 일치하는 삶의 자리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코 채워지지 못하기에 그저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고독이 있는 반면에, 요즘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공허나 외로움은 무척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현대의 공허는 마음에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무언가가, 두꺼운 고무마개 같은 것으로 막고 있어서 질식당하는 느낌이랄까. 구멍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고무마개는 그렇지 않다. 그건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최근 6~7주 동안 일종의 생활 실험을 진행했다. 청년 중 대다수가 여가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넷플릭스, 인터넷 쇼핑 등과 같이 화면을 통한 활동을 하면서 보내는데, 우리는 처음에 그러한 생활방식이 우리 공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디어에 찌든 ‘한심한’ 우리의 생활습관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실험의 제목을 ‘화면과 단절하고 새로운 것과 연결하기’로 정하고, 각자의 규칙을 세워 실험을 진행해봤다. 실험의 핵심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 그리고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보자는 것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실험은 실패에 가까웠다.

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회복하고 싶은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유대감이었기 때문에 실험 기간 최대한 많은 시간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거나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 5일 출근하는 데다, 통근 3시간, 아침에 준비하는 시간과 씻고, 자고, 최소한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시간을 빼면 24시간 중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3시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면 시간을 5시간 반으로 잡았을 때 가능한 얘기다. 나는 그 3시간을 주로 녹취록 푸는 알바와 글을 쓰고 강아지와 노는 시간 등에 할애하며 보냈다.

실험을 시작했으니, 이제 그 3시간을 사람에게 할애해야 했다. 나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평일 저녁에 약속들을 끼워 넣고, 주말까지도 사람들로 꽉꽉 채웠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 당연히 좋았지만, 같이 있는 내내 나를 짓누르는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나는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너무나도 피곤해서 친구들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이들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도 해주지 못했으며 많은 시간을 내주지도 못했다. ‘내일 출근해야 해서’, ‘집에 가서 또 할 일이 많아서’라는 말들로 늘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 후 홀로 집에 가는 길이면 뭔가 찜찜하고, 함께했음에도 부재(不在)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와서는 밀린 일을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그러면, 다음날 출근해서 졸음을 견디려고 몸속에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붓는다.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마음이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좋아지고, 머리가 수시로 지끈거렸다. 그러다 보니 정신상태도 그리 온전치 못했던 것 같다. 좋자고 하는 실험이었는데 삶이 더 망가졌다. 그리고 나는 더 외로워졌다.

‘현대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은 우정이고 연대고 뭐고, 불가능한 삶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빈 공간을 아무리 채우고 싶어도 불가능한 삶. 이토록 지치고 피곤한데 다른 사람의 삶에 진정으로 귀 기울 힘이 남을까. 사람이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소비가 채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 앞이 막막했다. 지금이야 겨우 인턴이라 몇 개월만 지나면 다시 조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겠지만, 나중에 생계를 위해 노동하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텐데, 그 안에서 내 삶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사람도, 감각도 흐릿해진 삶을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그저 화면을 들여다보며 공허함을 견뎌내는 일에 익숙해질까.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해답을 찾아가던 중 나는 조금 더 무기력해졌다. 처음에는 내 습관과 마음가짐만 바꾸면 덜 외로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여가는 나의 것이 아니었고, 다음날 출근해서 일할 상태로 내 몸을 되돌려놓는 일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여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거나, 느긋이 앉아 독서를 하는 것 등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모해서는 안 되었다. 집에서 충전 중인 핸드폰을 집 밖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몸은 오로지 ‘충전’이라는 것에, 집이라는 공간에 메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노동을 해야만 하므로 구멍을 채우는 것은 개인의 몫일지 몰라도,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은 구조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쓰는 다이어리의 월간 페이지를 펼쳐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온다. 31개의 네모난 칸이 기대되고 설레는 날들이 아니라 마치 통과하고 이겨내야 하는 퀘스트(Quest)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오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침을 맞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매일 매일의 끝에 나는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유와 우정일까, 풍요로움일까. 혹은 암 덩이처럼 불어나는 고립감뿐일까.

 

『자본론』 제10장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히 설명한다. 10장은 ‘노동일’에 관한 장인데, 노동자의 하루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마르크스가 친절히 설명해주는 장이다. 먼저,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일은 하루 24시간 전체를 포함하는데, 그중에서 노동력이 다시 봉사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약간의 휴식시간은 뺀다.”

 

자본가의 시각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기 생에 전체에 걸쳐 노동력 이외에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노동자에게는 물론 휴식과 여가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간은 사실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바쳐지는 충전의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그리하여 우리가 신체의 성장과 건강의 유지에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즐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식사마저도 다음 노동을 위한 연료가 될 뿐이다. 마치 기계에 기름을 부어주듯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평균 식사시간이 12분뿐이라는 택배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1 노동일 안에 운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의 최대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더 밀어붙이게 되는데, 아예 노동자의 수명을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탐욕스러운 농업경영자’가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을 맞바꾸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1

토지의 비옥도는 땅의 ‘기(氣)’와 같은 개념이다. 땅의 에너지는 일정량만 있어서, 다음 해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으면 땅의 기운이 전부 소멸하지 않을 방식으로만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작물에 따라, 어떤 땅은 한 번 농사지으면 소모된 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7년이 필요하기도 하다. 땅의 힘을 한꺼번에 다 써버리거나, 땅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 땅은 죽게 된다.

하지만 농업경영자에게는 땅의 수명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역시 천지에 널린 것이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농업경영자가 땅의 기를 전부 사용해 최대의 이윤을 창출한 후, 죽은 땅을 내버려 두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듯이, 자본가도 노동자의 수명을 길고 가늘게 유지하는 것보다는, 짧고 굵게 끝내려고 한다. 노동자의 노동을 최대한도로 쓰다가, 노동자가 나가떨어지면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 자본가에게는 더 효율적이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노예무역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했다. 노예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노예의 노동이 있어야만 지장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노예 소유자는 노예를 당연히 인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가 죽으면 당장 자신의 삶도 지속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노예는 외국의 ‘흑인사육장’에서 값싸게 보충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재료의 목적이 ‘소모되는 것’이듯, 그때부터 노예의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는 대신,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낸 후, 죽기라도 하면 다른 노예를 사 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노예무역 이후, 천지에 널린 것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노예의 수명은 그가 생존할 때의 생산성보다 덜 중요하게 되었다”2

 

생명과 맞바꾼 이 노예무역의 효율 중심 원리가 현대를 사는 내게 낯설지 않음이 가슴 아프다. 이 원리는 개인이 삶의 풍부한 면모들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존재의 가치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노예무역과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노동자가 죽었고, 2020년 상반기만 해도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만 470명이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잊고 살아서 ‘노동자가 죽었다’는 말에,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가 죽은 것처럼 느끼지만, 노동자의 죽음은 친구와 가족의 죽음, 나의 죽음과 같은 말이다. ‘노동자가 죽었다’와 ‘사람이 죽었다’는 같은 말이다. 산재만 불합리한 죽음으로 볼 수 있을까. 자살과 교통사고까지도 모두 다 생산효율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재’가 아닐까.

마르크스, 엥겔스와 베를린 TV타워

노동일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의 일상이 얼마만큼이나 우리의 것이 아닌지 실감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못난 자신만을 스스로 자책하고 있다.

한 가지 이야기로 올해의 마지막 에세이를 마무리하려 한다. 최근에 읽은 홍은전의 『그냥, 사람』3이란 책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사회는 장애인의 부양의무를 그 가족에게 지운다. 하지만, 장애인이 홀로 생활하고 이동하기 힘든 사회에서 장애인의 부양의무가 지워진 가족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개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감당하라고 강요하니 학대와 폭력과 방치가 다반사다. 라면을 끓여 먹다 불이 나서 다친 동생과 세상을 떠난 형의 이야기가 ‘가정사’를 넘어 사회적 문제인 이유, 치솟는 청년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나약한 ‘멘탈’이 아닌 이유,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일이 해당 기업의 회장만의 잘못이 아닌 이유는 이 모든 일이 사실, 못난 개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한 개인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연대하고 보살피는 사회가 필요하다.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뿐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지금은 다소 일그러지긴 했어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민주정치를 한다.

만약에 모든 건물과 시설, 교통수단이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구조로 되어있었다면, 사회의 돌봄이 가정의 보육 부담을 덜어줬다면, 청년들이 어렸을 적부터 서로 경쟁만 하도록 부추기는 교육과 구조가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의 휴식과 안전이 법으로 보장되었다면, 우리는 이토록 홀로 버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죽음이 일상이 되어 무감각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20년은 코로나-19와 장마의 해이기도 했지만, 전태일 열사 50주기이기도 하다. 전태일은 더 이상의 전태일이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전태일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외롭고 아프다.

2021년은 2020년과 달랐으면 좋겠다. 우정과 연대가 가능한 일상의 여유를 위하여,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착취해왔던 자본주의의 효율 중심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죽음이 곧 사회의 죽음임을 모두가 알아서 어떤 사람도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그리고 그 누구도 홀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있는 삶을 위하여.

 

그 첫걸음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부터 통과시켜야 한다.

 

출처: http://nomoredeath.kctu.org/measure/contents.php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홈페이지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내가 읽는 『자본론』]의 2020년 연재를 마칩니다. 2021년 다음 연재가 시작될 때까지 잠시 쉽니다.

 


  1. 『자본론』, p.359.

  2. 『자본론』, p.360.

  3.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있었던 그가, 그간 한겨레에 투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책.

마감알바에 숨겨진 비밀 [내가 읽는 『자본론』]

마감알바에 숨겨진 비밀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필자는 축구를 상당히 좋아한다. 직접 하는 것, 보는 것 모두 좋아한다. 축구 관련 기사들도 자주 찾아본다. 응원하는 팀의 경기는 직접 보거나 하다못해 하이라이트 영상이라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린다. 축구팬 최재식에게 축구를 볼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을 꼽아보라면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 혹은 역전골이 터질 때, 연장전의 치열한 공방, 승부차기의 정적을 꼽을 것이다. 아마 필자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 순간 피치 위의 선수들은 정말 힘들겠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그 힘듦을 이겨내고 한 발짝 더 뛰는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에 열광하게 된다. 축구선수들도 팬들이 있기에 자신들이 존재함을 알 것이고, 그래서 힘들어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극적인 승부를 만든다.

그런데 만약 축구선수들이 경기를 뛴 시간만큼만 돈을 받는다면? 그것도 정규시간 90분 안에서만 돈을 받는다면? 말하자면 축구선수들이 정규시간 90분 중 경기를 뛰는 시간동안은 분당 10,000원의 돈을 받기로 계약한 것이다. 그리고 추가시간과 연장전, 승부차기는 가외시간으로 쳐 돈을 안 받고도 뛰어야 한다. 정규시간 70분 뛴 선수는 700,000원의 돈을 받게 된다. 정규시간 70분경에 교체 투입된 선수는 90분경까지 20분을 뛰고 200,000원의 돈을 받는다. 90분 풀타임을 뛰고 추가시간 5분을 더 뛴 선수는 950,000원이 아닌 900,000원을 받아야 한다.

말이 안 된다. 교체 투입된 선수가 아니고서야 모든 선수들은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힘든 게 당연하다. 더 힘든 것도 서러운 데 그 시간만큼 돈도 못 받으면 정말 그 선수는 억울해서 어떻게 살까?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축구팬 최재식은 전날 축구장에서 본 명승부에 취한 채 다음 날 아르바이트 작업장에 출근했다. 15시부터 23시까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 최재식으로 일하는 그는 14시 30분에 미리 작업장에 도착하여 업무 준비를 한다. 15시가 되기도 전에 전 타임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돕던 그는 15시부터 같은 시간대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와 둘이 23시까지 일을 한다. 분명 식당 입구에는 ‘22시 30분 주문 마감, 23시 영업 종료’라고 적혀 있건만, 오늘도 어김없이 22시 31분에 술에 취한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온다. 그나마 오늘 온 손님들은 소주 5병과 함께 1시간 만에 떠나셨다. 손님들이 있을 때 작업장 마감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30분은 더 마감일을 해야 퇴근할 수 있다. 작업장 문 밖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벌써 23시 57분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15시부터 23시까지 8시간 분의 임금만 받기로 구두계약을 했기에 추가로 지급받는 임금은 없다. 법은 그렇지 않다지만, 근로계약서 써주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집에 가서 축구게임이나 해야지’ 생각하며 아르바이트 노동자 최재식은 다시 축구팬 최재식으로 변한다.

작업장 마감 시간 아르바이트, 소위 ‘마감알바’는 그 시간대가 아르바이트 시간대 중 최악으로 꼽힌다. 일단 할 일이 많다. 작업장 청소, 하루치 정산(만약 정산을 하다가 장부에 구멍이 나면 아르바이트 노동자 임금에서 깎이기도 한다), 문단속 등등이 모두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직원이 해야 할 일이다. 차라리 일만 많으면 좋겠는데 식당이나 술집 마감알바면 영업 종료 시각이 되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 손님들을 잘 달래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해도 제 시각에 퇴근할 수 있으면 참 다행이다. 이래저래 일들을 하다 보면 원래 퇴근하기로 한 시간대는 훌쩍 지나있기 마련이다. 추가근로수당도 없다. 근로계약서 제대로 쓰고 근로기준법 지키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이 나라에 없다시피 하니까. 힘든 일을 많이, 그것도 오래 하면서 돈도 못 받는 시간대의 아르바이트가 바로 마감알바이다. 마치 공짜로 추가시간을 뛴 축구선수처럼 억울할만한 사람들이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인 것이다. 일은 다른 시간대보다 더 힘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도 한도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냥 힘들게 보이기만 하는 마감알바에 또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비밀 이야기 전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 더 나아가 일을 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은 왜 일을 할까?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를 사고, 옷을 사고, 집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가끔 놀러 다니고 학비를 충당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애인이랑 데이트하는 것도 다 돈이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니 마감알바라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먹여 살리고 있다. 언뜻 보면 반대로 보일 것이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함으로써 노동자들과 그가 부양해야 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순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면 고용주들은 왜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할까? 우리가 일을 하는 게 고용주들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게 아닐까? 만약 어떤 노동자가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면 그 10시간을 일해서 만드는 가치 중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10시간어치 전부일까? 적어도 5시간 정도의 몫은 고용주들이 가져갈 수 있으니 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것일 터이다.

물론 고용주들도 충분히 똑똑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중 일부,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본인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노동자들에게 준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고용주 본인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필요노동시간’, 그리고 이 때 행하는 노동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고용주, 즉 자본가가 가져갈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 이 때 행하는 노동을 ‘잉여노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노동자들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간다. 우선 본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만약 노동자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면 그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식 교육이나 노후 대비도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취미나 문화생활을 할 여유도 있어야 하고, 가끔 놀러갈 돈도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 본인이 위의 일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밑에서 일을 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나머지 가치들은 자본가들이 가진 자본을 불리는 데에 들어간다. 그래서 필요노동이든 잉여노동이든 노동자들이 행하는 것이지만, 실상 그 노동을 소유하는 건 자본가들이 된다.

마르크스 『자본론』

‘잉여가치율’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에게 잉여가치율(rate of surplus-value)은 “가변자본의 (중략) 가치증식의 비율 또는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1를 뜻한다. 쉬운 말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자본이 자기 자신을 불리기 위해서 생산과정에 새롭게 집어넣은 가치를 분모로, 그 결과 새로이 생성된 가치를 분자로 하는 비율이 바로 잉여가치율이다. 100원을 투입하여 200원의 가치가 만들어졌다면, ‘(200-100)/100=1’, 이 경우 잉여가치율은 100%가 된다.

잉여가치율은 사실상 ‘잉여노동/필요노동’과 같다. 그리고 잉여가치율이 커질수록 자본가가 가져가는 몫도 커진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잉여가치율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잉여가치율은 비율이기 때문에 그것의 분모를 줄이거나 분자를 키우면 그 크기가 커지게 되어 있다. 즉 다른 조건이 같다면 필요노동을 줄이거나 잉여노동을 늘릴 때 잉여가치율은 커진다. 여기서는 필요노동을 줄이는 것보다 잉여노동을 늘리는 데에 집중해보자. 작업장 사장에게는 축복이고 마감알바 담당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는 비극인 마감알바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우선 필요노동은 거의 고정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필요한 가치가 널뛰기를 타진 않기 때문이다. 어제는 하루에 필요한 열량이 세 끼 밥으로 충분했는데, 오늘은 열두 끼의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즉 필요노동이 고정된 상황에서 노동의 총량을 늘리면 늘어난 노동의 양은 전부 잉여노동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제 노동시간을 늘리면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남을 알게 되었다. 마치 축구경기의 추가시간이나 연장전, 승부차기와 같이 계속해서 그 끝이 미뤄지는 마감알바는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데에 최적화된 아르바이트 노동 시간대이다. 물론 여기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아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돈을 받고 일하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마감알바의 비밀은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힘듦이 단지 그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에 있음이 아니라, 자신의 주머니에 떨어지는 가치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행동하는 자본의 본성에 있음을 알 때 드러난다. 그냥 밤에 진상 손님이 와서 마감이 힘들다는 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진상 손님이 와서 그 진상 손님을 처리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 수고의 대가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결국 그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고용하는 점주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하루하루 고단하게 장사해서 먹고 사느라 사장이 직접 마감까지 다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나에겐 대답이 있다. 그런 영세자영업자들 위에 또 다른 자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장사가 조금만 잘 되어도 임대료를 팍팍 올리는 건물주, 손해는 가맹점에게 떠넘기면서 이윤은 악착같이 뜯어가는 프랜차이즈 본사, 오히려 자신들의 소비자에게 갑질하는 거대 유통망, 통 큰 경영을 하겠다면서 좁아터진 골목 한편에 있는 슈퍼 옆에 편의점을 내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투 등등……. 이런 상황에서 영세자영업자들은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들이 일해서 번 돈을 거대자본에게 바쳐야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은 거대하기만 하고 거창하기만 한 말이 전혀 아니다. 당장 어머니 아버지가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이고, 학교 친구는 매일 마감알바 하느라 등골이 휜다고 신세한탄하며, 자주 가던 단골 식당이 어느새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하는 게 일상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너무 익숙해서 이게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익숙함에 속아버렸다.

익숙함을 거둬내고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게 새로이 보일지도 모른다. 마감알바라는 일상도 알고 보니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지 않았던가. 새롭게 보이는 세상은 무섭고 낯설게 보일 게다. 그래서 그냥 모른 채 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면 모험을 떠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잠시 익숙함을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글 중간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관해 잠시 언급했다. 언급했듯 삶을 유지하는 것에는 의식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필자는 이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생물인 이상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목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으며 감성을 가지고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의식주 이외의 것도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상상력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힘을 모을 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의지가 실현되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바뀐 세상에서는 내 친구가 마감알바로 고통 받지도 않을 것이며, 행복하게 장사하던 사장님이 계시던 단골가게가 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하다 죽고 다치는 사람도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


  1. 칼 마르크스 지음, 『자본론Ⅰ 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286쪽.

우린 모두 특별해 [내가 읽는 『자본론』]

우린 모두 특별해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인간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특별함을 지닌 자립적이고 창의적인 개별 개체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간의 꽤 많은 감성-에세이들은 개별적 인간 개체의 특수함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히 어루만지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다. 하나 (개별적 존재자의 자존감을 제고하는 개체적 특별함뿐만 아니라) 기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별함을 갖는다. 어떤 개체건 상관없이, 인간 일반이 지니는 고유한 특수함이 있다는 의미다. 인간만의 특별한 성질은 오랜 시간 과학, 신학, 문학, 인문학 등의 학문적 분야를 넘나들며 매우 흥미로운 탐구 소재로 기능해왔다. 오늘 다루어보고 싶은 인간의 특별함은, 독특하게도 경제학적 논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각각의 상이한 개체성을 지닌 개별적 인간들은 서로 다른 특수한 영역에서 이 사회의 경제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개별적 인간 개체는 그 특수성을 말미암아 세상의 다양한 층위에서 경제적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개별 인간 각자의 개인적 사정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어떠한 종류의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면, 인간이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의 경제학적 특별함을 찾는 것이 오늘 글의 주목적이기에 그렇다. 논의의 목적의식을 다시금 상기하며, 인류(인간 일반)를 인격적으로 대표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인간’씨를 임의로 상상해보자. 우리의 ‘인간’씨는 경제학적으로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을까? 분명 그의 특별함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별함일 것이다.

이 사회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경제학적 문제들은 경제적 ‘가치’의 생산과 교환, 증식, 축적 등의 복합과 그 순환에 비롯한다. ‘인간’씨는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특별한 성질을 띤다. 우선, 모든 경제학적 논의의 출발이 될 ‘가치’의 생산은, 오로지 ‘인간’씨의 노동 일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씨가 행하는 여러 종류의 노동들의 특수한 구체적 형태(이를테면 망치질하는 노동, 재봉틀을 다루는 노동,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 노동 등)를 잠시 제거했을 때, 우리는 ‘인간’씨의 ‘노동 일반’만이 추상적 형태로 응고되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노동 일반’이 바로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힘의 원천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노동1으로(노동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의 창조는 ‘인간’씨만이 해낼 수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경제적 행위다.

‘인간’씨의 사회적 유용 노동으로 잉태되어 여러 가지 외형의 모습을 드러낸 ‘가치’들은 저마다 상이한 개성과 특수한 쓸모를 자랑한다. 각자의 유용성을 한참 뽐내던 이 ‘가치’들은 이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기를 겨루기를 위한 (가치)교환의 장으로 향할 것이다. ‘인간’씨는 훌륭한 통찰력으로 이 과정을 미리 예측하여 어느 시점부턴 자신에게 필요한 ‘가치’가 아닌 교환을 위한2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인간’씨가 만든 가치의 겉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실제로 다른 ‘가치’와 교환된다. 타인의 사용을 위해 생산되어 교환의 과정을 거치는 (유용성, 다시 말해 사용가치를 지닌) ‘가치’를 우리는 ‘상품’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간’씨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쓸모를 지닌 여러 종류의 상품들을 생산해낸다.

인류 혹은 인간 일반, 즉 ‘인간’씨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별함은 ‘인간’씨가 만들어내는 상품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씨가 교환의 과정에 조심스레 내미는 상품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인간’씨가 들이미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그 탄생 과정과 생산 과정의 성격이 흡사하다. 예컨대, 나무토막이라는 원료를 손에 쥔 ‘인간’씨가 망치와 톱을 비롯한 각종 기계와 장치를 도구로 이용해 나무 테이블이라는 상품을 제작해내는 과정을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상품들은 위와 같은 형태의 생산 과정과 유사한 단계를 거쳐 생산된다. ‘인간’씨가 노동수단(도구)을 활용하여 노동대상에 투여한 노동을 통해 제작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씨의 여러 상품 중에는 이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생산된 특이한 종류의 상품도 존재하며 이 특별한 상품은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이 상품의 이름은 ‘노동력’이다.

‘인간’씨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특별함을 상품으로 삼는다. ‘노동’을 통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단순히 추상적 행위인 ‘노동’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노동’의 행위능력과 그 힘을 시간 단위로 상품화한 ‘노동력’을 판매하는 셈이다. ‘인간’씨의 인기 상품 ‘노동력’은 나무 테이블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다. 상품 ‘노동력’은 노동대상이 되는 원료(혹은 천연적 노동대상 or 보조재료)에 노동수단을 도구로 활용해 인간 노동을 투하하는 방식으로 생산된다고 보기 어렵다. 상품 ‘노동력’은 그 힘의 원천인 노동자의 생활 영위와 그 생활의 안정적 재생산을 통해 생산된다. 즉 어느 노동자가 다음날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 완료할 수 있게끔 이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쉬게 하는 모든 과정에 투여된 ‘가치’들이 상품 ‘노동력’이 생산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인간’씨의 삶 유지 그 자체가 상품 ‘노동력’의 생산과정이며, ‘노동력’은 ‘인간’씨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의 상품화로 볼 수 있다.

‘인간’씨의 특별함이 빚어낸 상품 ‘노동력’은 그 제작자와 마찬가지로 매우 특별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상품, 예컨대 나무 테이블처럼 평범한 생산과정을 거쳐 탄생한 상품은, 정상적인 교환 거래의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의 양과 그 비율에 따라 교환되며 거래를 완료한다. 이를테면, 50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A라는 상품이 거래의 장에 나왔을 때, 25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B라는 상품 2개와 교환 되거나 100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상품 C 1/2개와 교환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품 A가 지닌 50만큼의 가치를 대표하는 화폐3와 교환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무 테이블과 유사한 종류의 탄생 과정을 거친 상품들은 자신이 내포한 자신의 경제적 ‘가치’의 크기와 동일한 크기의 ‘가치’(혹은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닌 상품 or 화폐) 와 교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일반이 지닌 특별함의 상품적 화신인 ‘노동력’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특별한 성질을 다시금 암시한다.

물론 ‘인간’씨의 상품 ‘노동력’ 역시도 처음 교환 과정에서 거래될 때에는 자신이 지닌 가치와 같은 크기의 ‘가치’를 그 대가로 지불받기로 한다. 하지만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판매 완료되는 시점은 판매자의 실제적 ‘노동 행위’가 구매자의 의지에 따라 완전히 사용되는 시점인데, 바로 이 시점에서 ‘노동력’의 특별한 성격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반적 거래에서 판매자는 자신의 상품이 지닌 ‘가치’를 구매자의 소유로 넘겨줌으로써 이미 (구매자에게) 지급받은 지불값의 등가를 지불한다.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을 판매한 후, 자신이 직접 ‘노동’함으로써 그 거래(등가의 지불)를 완료한다.4 하지만 웬걸? 노동자가 자신의 상품 판매 과정을 완료하기 위해 행하는 실제 ‘노동’ 과정에서,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전달해야 할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게 된다. 다시 말해, (거래 이행 과정에서) 상품 ‘노동력’은 자신의 값어치이자 스스로 내포한 ‘가치’의 크기보다 더욱 큰 크기의 ‘가치’를 생산해내는 셈이다. 구체적 상황으로 예시 사례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평균적으로) 1시간에 10만큼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 노동자가 삶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생활수단에 들어있는 ‘가치’는 30이며,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는 6시간의 노동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실제로 어느 노동자가 구매자에게 자신의 상품 ‘노동력’의 6시간어치를 판매하고 그 대가로 6시간 ‘노동력’이 내포한 가치 30을 돌려받았다고 가정하자. 이 30은 이전에 노동자가 6시간 노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먹고 자고 싸고 입고 휴식한 모든 과정에 체현되어있는 ‘가치’(사회적 유용 노동 시간)의 총합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 ‘노동력’의 판매를 마무리하기 위해 구매자의 요구대로 6시간 동안 실제 노동을 행한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노동자는 6시간 ‘노동’의 실제 이행 과정에서 60만큼의 ‘가치’를 창조해낸다. 분명히 30만큼의 ‘가치’를 교환하기로 하여 시작된 거래였다.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6시간 ‘노동력’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가치(노동시간5), 즉 6시간짜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와 등가의 크기인 30을 지불했다. 노동자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30만큼의 ‘가치’를 지닌 6시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매자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은 판매와 그 구체적 이행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생산해낸다. 30의 ‘가치’는 ‘노동력’의 특별함에 의해 60의 ‘가치’로 증식되었다.6

요컨대, 오직 인간만이 생산할 수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든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 ‘노동력’이 이렇게 기이한 ‘가치’의 증식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증식된 ‘가치’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한 구매자에게 돌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 구매자들은 이 오묘한 현상을 진작 꿰뚫고 이처럼 추가적으로 발생한 ‘가치’들을 꾸준히 차곡차곡 축적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요상한 공통점을 지닌 ‘악질 구매자’들이 등장한다. 그 스스로 인간-일반에 속하면서도 미리 포착해낸 ‘인간’씨의 특별함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악질 구매자들은 대부분의 개체적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는 다른, 온종일 빈둥대면서도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이 낳는 ‘가치’ 증식을 파악하고서는 타 개체적 인간들의 일반적(‘인간’씨-스러운) 특성을 몰래 활용해 침대에 누워 배를 불리게 된 것이다.

현실 세상에서 어떤 인간 개체는 위의 거래 속 구매자의 기능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인간은 ‘노동력’의 판매자로 기능하기도 하며, 그 중간에 위치한 여러 애매한 인간 개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그 모든 개체적 인간들의 공통적 특성이다. 인간 일반으로서의 (경제학적) 특별함은, 이 특수한 상품 ‘노동력’을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언제 어디서든 생산해낼 수 있다는 점에 그 핵을 둔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특별한 상품을 언제 어디서든 만들어 판매할 수 있음은 우리 모두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다시금 곱씹게 한다. 모든 인간은 경제적 ‘가치’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고 유의미한 존재요, 이 ‘가치’를 언제든 스스로 증식시킬 수 있는 특수한 상품 ‘노동력’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점에서 또한 작지 않은 특별함을 함의하는 바다. 우리는 모두 실로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인류를 구성하는 인간 일반의 이러한 특별함은 매우 독특한 형태로 경제학적 담론의 곳곳에서 포착되며, 경제학적 측면에서의 휴머니즘적 사유의 근거를 구축했다. 이에 노동가치설,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인간’씨만의 특별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논의의 기본적 토대를 다져왔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며, 앞선 논의에서 등장한 상품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설명하여 ‘노동력’이라는 개념이 함의하는 바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했다. 이들은 ‘노동력’의 구매자이자 증식된 ‘가치’의 주인을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들로 상정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구체화하는데, 이때의 자본가들이 바로 앞서 등장한 악질 구매자들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력’의 개념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가치’를 만드는 노동계급과 이를 앗아가는 자본가 계급의 대립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필연적임을 주장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은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독점하거나, 거대한 생산수단으로 언제든 탈바꿈할 수 있을 만한 양의 자본을 지닌 계급이다. 이때 생산수단이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인간’씨의 노동과정에서 노동의 대상과 도구로 기능했던 것들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노동수단으로서의 공장과 기계들, 노동대상으로서의 원료와 천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자본을 손에 쥔 채, 심오하게 머리를 굴린다. 이들은 자본의 일부를 생산수단(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의 구매에 투여하고,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앞선 예시에서의 ‘인간’씨가 되는 격)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에 투여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따르면 자본가가 생산수단에 투여하는 자본의 부분은 ‘불변자본(不變資本 : constant capital)’으로 명명된다. 이는 자본가의 자본 중 생산수단으로 전환된 부분은 생산 과정에서 ‘가치’의 양을 그대로 이전할 뿐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반대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자본의 부분은 ‘가변자본(可變資本 : variable capital)’으로 칭해진다. 이는 자연히 ‘노동력’에 투여된 자본의 부분은 등가물을 재생산해내는 것을 넘어서, 초과분(잉여가치)을 생산하며 기존 자본의 ‘가치’ 양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셈이 된다. [초과분으로 되는 잉여가치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다시 한 번 정독해보라. 이는 선행된 논의에서 이미 살펴본 ‘인간’씨의 ‘가치’ 증식 능력과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Ⅰ 제3편 제8장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를 조금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자본 중 생산수단[원료,보조재료,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불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자본의 이 부분은 불변의 크기로부터 끊임없이 바뀔 수 있는 크기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노동과정의 관점에서는 객체적 요소와 주체적 요소[즉 생산수단과 노동력]로 구별되는 바로 그 자본요소들이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위에서 드러나듯,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에 대해 진작부터 탁월한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가변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일반의 신비한 능력과 그 특별함이 낳은 상품 ‘노동력’을 명료화했다. ‘노동력’의 개념은, 나아가, 경제학적 담론 속에 숨어있는 휴머니즘의 요소로서 구실 해왔음이 자명하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 일반이 지닌 특별한 성격이 경제학적 문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적으로 해명한 셈이다.

 

다소 갑작스럽지만, 잠시 숨을 고를 겸 ‘맛있는’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노릇노릇하고 부드러운, 폭신하면서도 고소한 빵을 떠올려보라. 현대인들의 보편적 간편식으로 자리매김한 이 ‘빵’은 어떻게 식품으로서 완성될까? 밀가루와 강력분, 달걀과 이스트, 그리고 약간의 견과류를 모두 더하면 빵이 되는 것일까? 이 재료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당장이라도 빵집에 달려가 구매할 수 있는 따끈따끈하고 몽실몽실한 빵으로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이 같은 추정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재료들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무언인가. 몇 번이고 언급했던 ‘가변자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 다름 아닌 인간 일반의 ‘노동력’이 밀가루/달걀/이스트 따위의 불변자본을 ‘빵’이라는 완성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이야말로 이 사회 모든 경제적 활동의 주역이자 경제적 가치 증식의 원천이 되는 바다. 우리 입안으로 뜨거운 풍미를 안기는 ‘빵’조차도 이 같은 경제학적 비밀을 암시하고 있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기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특별함을 예리하고 기민하게 체계화하고자 했던 학술적 조류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차고 넘쳤다. 이 글에서 이미 설명했듯, 경제학적/사회학적 영역에서 일렁였던 휴머니즘의 물결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제하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인간만의 특별함에 주목한 마르크스주의는 독특한 종류의 휴머니즘을 그 중심축으로 경제학-사회학-정치학-철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적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의 사유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씨들에게 작지 않은 의미로 작용하리라.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정책과 맞물려 심각한 노동권 박탈 상황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의 절규가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울려 퍼졌다.”

······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이주노동자들은 오후 6시까지 근무하던 사업장에서 이제는 수당도 없이 9시까지 근무하고, 과거보다 적은 월급을 받아도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옮길 수도 없다합법화가 이주노동자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후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 독소조항에 대한 개정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7

  

지난해 노동권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던 광주·전남지역 청소년들과 이주민들의 사연이 공론화됐다. 이들은 법과 근로자의 권익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폭언·폭행·체불·성희롱 등에 시달리면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열악한 노동 조건에 순응해야만 했다. 청소년·이주민의 노동을 보호할 법적·제도적 장치도 미흡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임금 체불을 당하거나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청소년이 노동당국에 신고해도 사업주는 밀린 급여만 주면 그만이다. 처벌 규정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도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이동 제한노동력 단기순환 정책에 따라 사업주의 권한에 종속되고 있다.”8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 전반에서 항상 ‘자본’과 ‘노동계급’의 필연적 대립을 시사해왔다. 그리고 그 예언에 답변이라도 하듯, (위 기사들의 내용대로)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서도 ‘가변자본’의 구체적 형태인 ‘노동력’, 그리고 그 ‘노동력’의 소유자이자 판매자인 모든 ‘인간’씨, 즉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다각적 착취가 이미 참담한 수준에 이르렀다. 축복과도 같은 인간의 특별함은 이를 가변자본으로 착취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악질적인 자들에 의해 크게 위협 받고 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6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인 가운데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해고 및 권고사직을 권유받은 비율은 전체 중 68.1%에 달했다고 22일 밝혔다이들에게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해고시점을 선택하게 했다. 그 결과, 코로나 이후 해고를 당한 비율은 무려 30.2%로 조사됐다. 즉 해고 경험자 10명 중 3명의 해고 시기는 코로나 이후였다는 것이다.”

······

코로나 이후 해고방식으로는 부당해고‘(33.5%), ‘정리해고‘(33.0%), ‘권고사직’(27.9%) 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부당해고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하는 것으로서, 코로나 이후 정당한 해고사유가 없거나 정식 해고절차를 밟지 않은 각종 부당해고에 따라 노사간 분쟁을 겪는 기업도 늘고 있다.”9

 

더욱이 근래에 발생한 코로나-팬데믹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그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자본의 소유주들께서는 불변자본(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계시며, 이를 볼모로 삼아 재난 상황에 고통 받는 가변자본의 주인공들을 더욱 옥죄고 있다. 불변자본은 한 명의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의 독점적 소유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가변자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외에 생계를 연명할 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가 계급에 완전히 종속된다. 자본가 계급 내의 어떤 특정한 자본가 한 명만이라도 자신의 특별한 상품을 구매해주기를 바라며 -또 이를 통해 삶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동자들은 자본가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줄기차게 구매자-비록 악질적인 구매자일지라도-를 물색할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이도 자본가 계급의 바깥에서 거대 불변자본을 굴리며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는 없으며, 자본의 소유주들은 이 같은 (불변자본에의)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마음껏 부려먹고, 또 물건 다루듯 함부로 대하고 있다. ‘인간’씨의 특별함은 ‘자본’의 성장스토리와 그 역사 속에서 점점 훼손되어왔고, 급기야는 사회적 모순의 핵심적 기제로 기능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에서 이용당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다. 이 사실은 이미 수없이 설명되고 논의되어왔으며, 오늘 이 글에서도 다시금 인간의 특별함에 대해 길고 긴 서사를 반복했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충분히 특별하다. 더욱이 각자의 특수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체적 인간은 또 얼마나 특별한가. ‘인간’은 ‘인간’이므로 이미 특별하며, 그에 더하여 한명 또 한명 각각의 특성으로 인해 더욱더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오늘 하루를 살아내며,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다면 이는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유별났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며, 당신의 정서적 상태가 그 원인적 요소일 가능성 역시도 크지 않다. 어쩌면 이미 당신은 이 사회 속에서 당신의 특별함을 잃어버려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1. 물론 이때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형태의 유용 노동이어야 할 테다.

  2. 사회의 일반적 틀 속에서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 쓸모를 제공하는 ‘가치’를 뜻한다.

  3. ‘화폐’ 역시도 일종의 ‘상품’

  4. 또한, 이때 ‘노동’ 행위와 그 힘의 시간적 양을 상품화한 ‘노동력’의 구체적 유용성(쓸모)은 노동자에 실제적/구체적 ‘노동’ 행위에서 말미암아진다.

  5. 이 경우에 6시간짜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는 30이므로, 6시간 노동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동자의 삶을 재생산하는 데에 3시간(즉 30 만큼의 가치) 분량의 노동시간(가치)이 투여된 셈이다.

  6. 이 같은 현상은 실제 수치와 비율을 달리하더라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상품 ‘노동력’은 그 스스로의 생산에 투여된 ‘가치(노동시간)’보다 더 큰 ‘가치(노동시간)’을 실제 판매과정(노동과정)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7. “이주노동자, 노동권 침해 심각 – 강제추방과 고용허가제가 부르는 인권침해 사례 발표”(고근예), <인권운동사랑방>, 2004. 02. 04., <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67264>

  8. “[취약계층 노동 실태]<상> 인권·노동권 침해에 내몰리는 청소년들”(신대희 기자), <중앙일보>, 2018. 01. 01., <https://news.joins.com/article/22248863>

  9. “코로나로 인한 직원 해고 잇따라, 부당해고>정리해고>권고사직 순”(김강한 기자), <조선일보>, 2020. 07. 2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2/2020072200761.html>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내가 읽는 『자본론』]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지난 8~9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등의 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의사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한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내가 속한 세대와 나 자신에 대한 성찰도 많이 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를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그 세상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언론에서 의사파업과 자주 같이 묶이는 것이 ‘인국공 사태’이다. 내가 접한 수많은 칼럼과 기사들에서는 이 두 사건이 같이 언급되며 청년세대의 이기심과 잘못된 공정관념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나는 역시 그 비판에 동의했다. 우리 세대가 공정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세대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청년세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나는 조금씩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비난들이 다소 ‘불공정’하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청년 개개인들의 이기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 ‘이 시국에 어떻게 파업을 할 수 있냐’며, 인국공 사태에 관해서는 ‘같이 살 방법을 모색해야지, 시험으로 얻은 권위만을 진정한 공정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 얕은 사고’라며.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며 수없이 한숨을 쉬었지만,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경쟁의 틀 안에서 자라야 했던 우리는 가족 안에서,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을까요?

세대들은 서로로부터 독립된 게 아니라서, 다음 세대는 반드시 이전 세대의 거울일 수밖에 없다. 이전 세대가 어떤 가치를 추구했고, 어떤 싸움을 벌여왔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모습이 달라진다. 모든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번 의사파업은 코로나19 이전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이 생명을 얼마나 함부로 다뤄왔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창궐 이후로 우리 모두가 생명과 연대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되었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어땠나? 나는 세월호 사건을 기억한다. 아직도 기업이 안겨준 수십억 빚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삼성 백혈병 사태를,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구의역 김 군의 죽음에서 멈추지 않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산재, 노동자들의 죽음을, 그 뒤에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무능한 국가를 생각한다. 마땅히 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회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해 다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수많은 약자를 떠올린다. 기성세대에 감히 송구한 발언을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어떤 윤리와 미덕도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세대가 유일하게 약속받은 것은 1등이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보장이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1등이 되어야 해고될 걱정 없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언젠간 내 집을 갖고, 내 집만이 아닌 내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여러 다른 집도 가질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내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1등이 되려고 했다.

그러니 청년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정의 개념은 당연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더 빨리, 더 멀리 뛰어야 하는 경주에서는 당연히 그 누구도 옆 사람과 함께 뛰려고 하지 않는다. 청년세대가 잘못된 공정을 쫓고 있다면, 그 공정의 틀을 제공한 기성세대도 함께 반성해야 한다. 공생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공생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모든 이의 노동이 존중받고, 모든 이의 생명이 존엄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이토록 이기적일 필요가 있었을까.

자본론 제8장과 제9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과정 중에 가치가 변하지 않는 ‘불변자본’과 가치가 변하는 ‘가변자본’을 구분하여 착취가 어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 결론은 가변자본 중 노동자의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의 몸이 움직이는 동안 노동자는 자신이 버는 임금 이외의 가치들도 창출하는데, 그 가치는 자본가가 다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이 자본론의 해설은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거의 마흔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잉여가치 발생 및 착취의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다. 직접 읽어보길 권장하지도 않는다. 같은 부분을 7시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다 가져가더라도, 노동자가 충분히 먹고살고, 또 건강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그 누구도 불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의 발생을 문제 삼았던 이유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 착취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 비추어 보자면, 과로에 시달리는 택배 노동자들(나는 최근에 택배 노동자들이 택배 분류작업을 직접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의 빌어먹을 ‘빠름’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값싼 배달료가 목숨 값이 되어버린 배달 플랫폼 라이더들, 방학에도 수업 준비를 하고 연구를 해야 함에도 학기 중에만 월급을 받는 시간강사들 등의 착취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윤 앞에 이들 자신의 안전과 건강은 늘 뒷전이다.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지만, 어쩐지 살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고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긴 후에 쭉 지켜본 한국 사회는 격변의 사회였다. 하지만 어쩐지 수많은 ‘격변’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담론은 개인의 윤리와 잘못에 대한 논의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이번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난데없이 재활용 분리수거라니.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으나, 최근에 어떤 기사를 통해 접한 플라스틱 재활용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되는 플라스틱 중 아주 낮은 비율만 재활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에는 재활용 비용이 너무 비싸다거나, 기업이 플라스틱과 다른 소재를 섞어 재활용이 불가능해진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플라스틱이 재활용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왔다. 나라에서는 분리수거를 적극 격려하고, 기업에서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이라고 선전을 하니 비닐도, 페트병도 열심히 분류하고 음식물이 묻은 플라스틱은 깨끗이 씻어서 배출했다. 플라스틱만이 아니라 종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떼어도 잘 떼어지지 않는 택배 운송장의 마지막 코너까지 긁어내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난감하게 비닐과 종이가 섞인 포장을 둘로 열심히 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로벌화 된 기후변화 이슈에 대응하는 것은 윤리적 개인이었고, 개인일 뿐이었다. 국가나 기업은 마치 치어리더처럼 재활용을 격려만 하는 동안 개개인은 환경에 대한 죄의식과 일종의 의무감으로 모든 짐을 짊어졌다.

기후변화 얘기에 아직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의사파업으로 돌아가 보겠다. 최근 의대생들이 거부했던 의사 국시를 다시 보게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정부는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고, 사람들은 고소해했다. ‘그거 봐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설치랬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나도 이제 와서 이미 지나간 의사국시를 허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윤리적으로 잘못한 죄인’들에 대해 처벌을 내린다는 심정으로 고소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씁쓸해해야 한다.

청년들의 주식투자 열풍에 한탄하는 글들도 요즘 많이 접하게 된다. 집이 없는 청년들은 주식투자를 한다. 누군가가 이미 너무 많은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청년들 사이에서 또 한창 인기 있는 것은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부류의 에세이, 자기개발서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고,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고, 죽고 싶어도 괜찮고, 우울해도 괜찮고, 가진 게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물론 정말 다 괜찮다. 자신의 감정과 처지를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인지하고, 또 그것에 대해 위로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치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치유는 없고, 위로만 난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 이 시국에서도 정부나 정치인들이나 기업들이 하는 말은 다 위로의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진짜 공정이라느니, 공생이라느니, 경제성장의 회복이라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개천절, 국무총리는 경축사를 하며 이런 말들을 했다:

 

“정부는 올해 9월 우리의 국가목표로 ‘포용국가’를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설명하신 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단 한 명의 국민도 차별받지 않고 더불어 사는 나라가 포용국가입니다. 포용국가로 가려면 정부와 정치가 제도를 만들며 이끌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일상에서 하실 일도 많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약자를 돕는 일이 그것입니다. 포용국가의 길을 정부는 착실히 가겠습니다. 정치와 국민 여러분께서도 동행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이것 또한 단군 할아버지께서 꿈꾸신 홍익인간의 길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더 씁쓸해지지 않으려 채널을 돌렸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치(治)’를 우리는 ‘다스릴 치’로 많이들 생각해왔지만, 「맹자, 마음의 정치학」의 저자이자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인 배병삼 선생님은, 그 ‘치’에는 다스린다는 의미보다 치유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즉,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위로만 준다면 그것은 그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 최대한 많은 표를 받아 최대한 많은 국민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는 특정 가치와 방향성을 가지기보다 그때그때 더 커지는 목소리들에 휩쓸리기 쉽다. 하지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정치는 다르다. 그런 정치는 병든 부분이 어디인지 명확히 짚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설정한다.

87년생의 초선의원인 정의당 장혜연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국공 문제를 공정 이슈로 보는 것은 담론 바꿔치기에 가깝다. 진짜 근원적 해답은 좋은 일자리가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애당초 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비정규직으로 쓰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기성세대가 된 86세대에 대해서는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민주화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를 청산하고 우리가 맞은 과제들에 용감히 부딪혀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돼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라고 말했다.1

나는 이 글로써 의사파업의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당신들 잘못이라고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다. 세대 간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기만 하면 또 다른 단절과 또 다른 갈등이 생길 뿐이다. 나는 다만, 이번 사태의 본질이 엘리트주의에 빠진 기득권 청년들과 이들이 속한 집단의 이기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시스템이 문제라고. 우리는 코로나19 속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1등들이 생명과 연대가 아닌 자신들의 기득권만 주장했을 때 우리는 온 국민이 위기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경쟁교육, 그리고 성장 중심주의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실질적으로 공정하고, 실질적으로 평등한 정책들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를 확고히 선언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선언을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성세대와 정치권의 결단력 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동안 기고만장했던 기업의 책임을 따진다.

마음이 조급하다. 청년이 기성세대가 된 세상은 지금 같지 않아야 한다. 아마 백신이 나오고 인류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린 다시 예전 그 방식대로 살아나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19 이전의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감히 솔직해지자면, 기존의 사고방식을 우리 사회가 스스로 버리는데 필요한 시간만큼 코로나가 우리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한다. 1등이 아니어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노동이, 1등이 아니어도 존엄하다고 가르쳐주는 교육이, 자연을 돌보지 않고는 풍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현실이 될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의 그 날이 너무 멀리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1. 2020-10-09, 이정민, 「[이정민의 직격인터뷰] “잘못 인정하는 게 리더,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 회복해야: 87년생 초선의원이 86세대에 던지는 고언”」, 『중앙일보』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내가 읽는 『자본론』]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1.  어느 여름 날

 

2020년 어느 여름 날, 늦은 아침 집 앞 도로를 달리는 마을버스의 엔진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의자에 걸려 있는 옷을 주워 몸에 걸친다. 코로나19가 무서운 나는 가방과 함께 마스크를 챙긴 다음 집 밖으로 나선다. 학교로 향하는 길,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텀블러에 받아간다. 정문 옆 대학병원 입구로 의료용품을 실은 수레가 향한다. 그 뒤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학교에 들어서니 길목 곳곳을 서걱서걱 쓰는 빗자루 소리가 들린다. 교통정리를 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뒤로 하고 학교 건물로 들어간다. 어차피 수업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 하지만 행정실에 들러야 해서 학교에 왔다. 행정실 방문 전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켠다. 수업을 들었는지 잠을 잤는지 잘 모르겠다만 수업은 끝이 나고, 행정실로 가서 내가 다음 학기 졸업이 가능한지 마음 졸이며 확인을 받는다. 다행스럽게도 졸업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 바친 돈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에 가기는 좀 그렇다. 배달음식어플을 켜고 무슨 음식을 주문할지 고민해본다. 고민은 복잡했지만 답은 언제나 그렇듯 자장면이다. 요청사항에 ‘양파 많이 주세요’라고 적은 뒤 배달이 오기 전 한 숨 자기로 한다. 아차, 배달주소를 잘못 입력했다. 재빨리 음식점에 전화를 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으로 배달 주소 변경할게요. ㅎㅎ’ 조금만 늦었으면 점심 먹으러 다시 집에 갈 뻔 했다. 배달이 왔다. 후루룩 자장면을 먹는다. 다 먹고 그릇을 내놓으려 보니 요즘은 중국음식점도 일회용 그릇을 쓰나 보다. 지구 생태와 환경에 죄를 지었다는 아픔에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에 일회용 그릇을 버린다. 달력을 보니 <e 시대와 철학> 원고 마감일이 코앞이다. 밀린 자본론 에세이 연재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쓰레기통 비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아침 해가 뜨고 있다. 아까 학생회실 소파에서 10분만 잔다는 게 열 시간이 되었나보다. 내 인생 이래도 괜찮을까?

 

위의 글은 2020년 여름 어느 날을 살아가는 가상의 인물이 쓴 하루 일기이다. (절대 필자 본인 인생을 묘사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일기 내용을 보면 참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여러 노동자들이 엿보인다.

한 번 간단하게 나열해보자. “버스기사, 바리스타, 택배기사, 의사, 간호사, 미화원, 수위, 강사, 행정교직원, 배달원, 콜센터 직원 등…….”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들만 해도 이정도이다. 이들이 하는 일들은 그 형태도 방법도 결과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이름 아래 묶인다. “노동자”

 

2. 노동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 생산을 위해 쓰이는 노동을 단순화하여 분석한다. 실상 『자본론』 1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탐구하는 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치의 원천을 ‘노동력’이라 규명하였다. 그 노동력을 투입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노동’이다.

노동은 노동을 행하는 사람과 노동환경의 구성, 노동과정의 끝에 나올 완성품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가진다.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버스기사와 망가진 에어컨을 수리하기 위해 가정집 출장을 다니는 에어컨 정비공, 이 둘의 노동형태가 다름은 자명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서로 다른 이들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상호 비교·분석된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기능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함으로써, 가치[대상화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자기를 증식하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1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노동의 형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노동이 가치를 증식시켜 자본을 불려준다면 자본가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만큼 재생산될 수 있게 하면 된다.

다시 다른 입장에서,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입장으로 가보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형태의 노동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본가들에게 인간 철수, 영희, 바둑이는 없다. 그들은 이 세 명의 인간을 노동자 1, 노동자 2, 노동자 3으로 본다.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이 열악한 이유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를 자본가와 나눠가져야 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해고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본가에게 종속된 ‘노동자’이기 때문이지 ‘방직’노동자라서, ‘청소’노동자라서, ‘IT’노동자라서, ‘사무’노동자라서가 아니다.

 

3.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서 ‘전노협’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건설운동의 영향을 받아 1990년 결성된 단체로, 이름 그대로 전국 노동조합들의 협의회, 상위단체였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전노협 진군가’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가사 중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2이라는 대목을 인용하고자 전노협을 언급했다. 필자의 부족한 깜냥으로 생각하기에,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를 이 구절이 잘 나타낸다고 봐서이다.

작업장이 어디에 있든, 그 작업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들은 전노협 아래에 뭉치고자 하였다. 이는 활동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 모든 활동들이 노동이고, 그 노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포항 제철소에서 쇳물 사이를 누비는 노동자와 광주 자동차공장에서 볼트를 조이는 노동자, 새벽같이 서울 빌딩숲을 오가며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노동자와 대전 국가연구단지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 모두가 같은 노동조합 상급단체 아래에서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앞 2.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인 이유는 그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어떤’ 노동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특정한 노동에 종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을 한다.

 

사진출처 http://demos-archives.or.kr/content/306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4. 노동운동을 한다!

 

필자 주변에는 노동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필자 역시 노동 현장 혹은 노동운동 현장을 몇 번 직접 경험했었다. 사람들은 노동현장에서 여러 부류로 나뉜다. 우선 노동현장의 사람들은 크게 노동자와 사용자로 나뉜다. 여기서 사용자는 논외로 치고, 같은 노동자라도 법적으로 어떤 고용형태를 가지냐에 따라 정규직 노동자가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또 노동자들은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도입부의 일기에 나온 것처럼 각자 다른 이름을 가진다. 버스를 운전하는 운수노동자는 버스기사, 학교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노동자는 청소부, 이렇게. 혹은 노동숙련도에 따라 숙련노동자, 미숙련노동자라는 이름표를 다는 경우도 있다.

노동운동의 큰 목표 중 하나는 이렇게 이질적인 겉모습들을 가진 수많은 노동자들을 하나의 대오로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들리는 구호 중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3이라는 구호가 있다. 이 구호는 노동자이지만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곳곳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구호이자, 사회 주류가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범주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이라는 외연 아래에 한데 묶는 구호이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대오로 뭉칠 때 그들은 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조직된 모든 노동자 수의 합 그 이상의 시너지로 나타난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의 범위를 넓히고, 노동자 조직이 포괄하는 노동자의 수와 범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감히 필자가 노동운동이 그렇게 전개된 이유를 짐작하자면, 쪽수가 곧 힘이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수록 그 조직이 단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이 유효했고 유효한 이유는 각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형태가 모두 다를지라도 그들이 모두 ‘노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오늘 뒤풀이 비용은 조합비로 결제하겠습니다.”

 

필자도 나름 조직된 노동자의 힘을 직접 느껴 본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보일 수도 있겠는데, 필자는 회식자리에서 그 힘을 느꼈다. 노동운동 현장을 따라다니다 보면 필자도 투쟁 마무리 회식에 스리슬쩍 합류할 때가 있다. 참 감사하게도 필자는 아직 얻어먹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다. 돈을 안 버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아마 그 현장에 함께했던 노동자 개개인들과 필자가 일대일로 만난다면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밥을 사줄 수 있을까? 그분들이 일해서 돈을 번다고 살림이 풍족할 리가 없다. 빠듯한 가계부이지만 그분들이 나 같은 ‘룸펜’에게 밥을 사주실 수 있는 이유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회식들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임금에서 각출한 조합비로 처리되기 마련이다. 아마 그 조합비가 없었다면 나는 밥을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연재 글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현대 한국의 대학생이 쓰는 글’이라는 연재의 주제와 조금은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연재분의 핵심 글 꼭지였던 『자본론』 제1권 제3편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읽으며 노동의 껍데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끊임없이 생각났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를 장악한 뒤 노동과정에서도, 가치증식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을 담지하고 있는 하나의 살덩어리로만 여겨져 왔다. 그들이 하나의 전인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노동력의 담지자로 취급당해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뭉쳐야만 했다. 노동해방의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상을 상상해본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 ‘노동계급’이라는 단어를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해방 그 이후에야 사람들은 노동력의 담지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노동자로서 생활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소 주변에 노동자 가족, 이웃, 친구를 두고 있는 사람, (99% 확률로) 노동자가 될 사람으로서 느끼는 점들이 많았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나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며 두서없이 그 느낌들을 적어봤다. 그럼에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떤 ‘노동자’가 아니라 ‘어떤’ 노동자라는 관점의 시각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았을 때 느낀 그 절망과 공포에 맞서 싸우는 ‘조직된 노동자’들을 존경한다. 그들 중 몇몇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노동한다. 자신의 일만 하면 참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탄가루 날리는 발전소에서, 쇳물 흐르는 용광로에서,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바이러스 감염자들 앞에서 자신을 갈아 넣는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는다.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사장님 나빠요 [내가 읽는 『자본론』]

사장님 나빠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은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형성된다. ‘노동가치설’이란 경제적 가치 창조의 근원이 ‘인간노동’임을 전제하는 경제학적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에 앞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유를 학술적으로 체계화해왔으며, ‘노동가치설’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등장으로 그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상에 내놓은 경제학 고전서 「자본」은 자본주의 구조를 지탱하는 경제학적 메커니즘과 현상적 모습 이면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속 (가치)착취의 원리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 속 노동가치설을 통해 (경제학적 이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사유 전반을 담아냈다. 마르크스 철학의 근간이 되는 인간애의 사유를 비롯해, 사회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그 필연성 역시 그의 저술 「자본」 속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경제학 비판 서적’ 「자본」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적 대립 양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내의 계급적 모순의 필연적 양태는 익히 아는 것처럼 자본가 계급(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이때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에서 악역을 도맡는) 부르주아지들이 바로 착취를 자행하는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 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피착취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굉장히 거칠게 풀어내 요약한 이 같은 서술을 처음 접한 이들이라면 이처럼 파격적이고 대립적, 갈등적 분석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다. 먼저, 본인의 경우엔 자본가 계급이 과연 절대적 악역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 경제적 가치가 오로지 노동자의 손에서만 탄생하는지 되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도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자본가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에 의문을 품을 수 있으며, 자본가 역시도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오늘 이러한 의구심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볼 작정이다.

필자의 절친한 친구 김 모 군은 현재 술집에서 야간 알바를 하고 있다. 김군은 종종 본인에게 자신이 알바를 하는 도중에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한다. 그 여러 에피소드에 압도적인 출연 비율을 보이는 이가 있고, 그는 바로 김 군의 고용주인 술집 사장님이다. 친구 김 군은 사장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전하곤 하는데, 보통은 그 맥락이 “사장님 나빠요”하는 식의 뉘앙스인 경향이 많다. 사장님은 은퇴 후 현재의 매장을 오픈하셨으며, 편의점 점장도 맡으시는 등 다방면의 사업에 뛰어든 중년의 남성으로 보인다.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분이라는 친구의 담담한 말투 뒤에는 종종 푸념이 따라오곤 한다. 사장님이 너무나도 예민하고 엄격하셔서 잔소리와 업무 간섭이 심하시다는 것이다. 친구는 일하는 건 알바생인데 사장님은 일도 안하면서 너무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사실 가게 자체가 사장님의 소유에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며, 사장님이 입버릇처럼 하신다는 말씀을 내게 들려준다. “너네 테이블 닦는 것보다, 관리하고 총괄 감독하는 책임자의 업무가 훨씬 힘든 거야, 알어? 건너편 고기집 사장도 주말 지나면 몸져눕고, 회사들도 사장이 애 안 쓰면 안 굴러가. 이재용이 봐 얼마나 고생하는데” 필자는 이 말을 듣자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사장님의 말대로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세계의 사장님들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상황인 것인지, 또 이를 정말로 행하고 계시는지 실로 궁금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가정을 두었을 때, 사장님들의 관리 감독의 업무 또한 가치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 지출의 형태는 다소 독특하지만, 어찌되었든 사회적 유용노동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관리와 감독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서적 노동이 단순 육체노동보다 버거운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기타의 노동가치설에서도 복잡한 정신적 노동으로 창조된 가치에 [질적으로 상이한 여타 노동들과의 (노동)강도 비교를 통한] 양적 가감을 부여하는 등 정신적 노동 강도에 대한 고려 역시 빼놓지 않는다. 더욱이 대규모 자본을 굴리시는 사장님들이 아닌 이상 (소규모 자영업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실제로 노동 현장에 참여하는 정도가 더욱 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군의 고용주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허나, 필자가 궁금해 하는 문제는, 해당 발언의 절대적 옳고 그름이나 적절성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논의에서 좀 더 명확히 밝히고픈 부분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자본가로 칭해지는 이들이 관리, 감독 등의 업무를 통해 노동자들의 노동에 버금가는 근로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과 맞닿아있다. 김 군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모든 고용주들이 그토록 고된 관리, 감독의 노동을 도맡고 있음을 일반화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 역시도 우리 사회내의 경제적-가치를 직접 창조해내고 있는지 거시적 경제학 담론의 차원에서 함께 면밀히 관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관리, 감독 등의 정서적 노동이 육체적 노동의 강도보다 더욱 고된 것인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현실 속,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의 노동들 사이의 강도 비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서적 차원의 관리, 감독의 노동이 여타의 육체적 노동들 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세계 곳곳의 사장님과 회장님들께서 그러한 노동들을 실제로 수행하고 계시는지에 관한 문제다.

매우 중요한 두 번째 유의점은, 우리의 논의가 미시적 사례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례에서 특정한 자본가는 그 어떤 노동자보다 많은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고찰에선 그것이 사회의 평균적 수준으로 일반화 될 수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자본가도 고된 노동을 수행하는가” 하는 식의 의문은 파편적인 낱개 사례들의 종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가 품은 의문은 “우리 사회 내에서 자본가 계급 또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며, 그 의문의 차원은 거시적 영역으로 넓혀져야 한다.

필자가 진지하게 탐구하고자하는 모든 의문은, 자본가, 즉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배제하고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자본가로 규정하는 이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규정되는 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한다. 그저 돈이 많다고 자본가인가? 개인 사업장을 차리면 모두 자본가인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장님은 모두 부르주아지인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할 것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생산수단! 다름 아닌 ‘생산수단’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의문들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생산수단’이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하여 통칭하는 개념이다. 노동자의 노동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요구되는데, 첫 번째가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 활동이요,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각각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다. 인간노동은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합목적적 활동(노동)을 실현해내게 되는데, 이때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천연적 존재들이 노동대상이다. 또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 중 이미 인간노동이 투여되어있는 존재들은 원료로 칭해지는데, 이들 또한 노동대상이 된다.

한편 노동수단은 노동자가 자신의 활동(노동)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매개체로 사용하는 도구적 존재를 의미한다. 예컨대, 김 모군 이 술집 테이블을 닦기 위해 사용한 행주부터 시작하여, 바구니, 항아리, 통, 각종 기계, 관, 돌도끼, 칼, 망치, 혹은 토지 그 자체 등 인간노동의 실현 과정에서 도구로 작용하는 (상이한 발전 정도의) 모든 존재들은 노동수단이 된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자본」 Ⅰ 상 제3편 제7장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나타남을 밝혔다. 즉,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되는 셈이다.

‘생산수단’ 개념은 어떻게 자본가 계급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우선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 ‘생산수단’ 개념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게 됨을 주장했는데, 이때 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적 기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그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이며,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으로 초상위계층에 속한) 극소수의 부르주아지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물질적 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을 규정하는 핵심적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많은 돈(자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이 많다고해서 전부 다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이 직접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에 착수하지 않으며,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과 자신이 구매한 (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결합을 도모한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만남을 통한 물질대사의 작용 결과로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잉여가치들의 축적을 통해 자본가들은 가만히 앉은 채로 자신의 자본을 눈덩이처럼 불린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무산계급으로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 (피억압) 계급이자, 대다수의 대중들로 이뤄진 민중의 계급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노동 계급의 인민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 역시, 본디 로마제국 시대에 군에 입대시킬 자신들의 아들(proles – 라틴어) 외엔 어떠한 부도 갖지 못한 무산계급을 조롱하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 사업장을 차리고 독자적 사업을 운영하는 모든 사장님들은 전부 다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가? 자신의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진) 사장님들 중에는 재벌가 대기업 회장님들도 있지만, 동네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직접 운영하는 자영업자분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생산수단을 토대로 자신의 자본을 축적 내지는 확장시켜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소규모 자본(소규모의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작은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대기업 회장님들과 유사한 형태의 방법으로 부를 쌓고는 있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직접 가치 창조의 현장에 뛰어든다.

자영업자들이 직접 노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해당 작업장의 피고용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고용주(자본가)가 노동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피고용 노동자들과 함께) 인간노동을 투여함으로써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존에 상정한 자본가 계급의 근본적 특질과는 동떨어져있는 현실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주인인 고용주가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직접 투여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인격적 전형인 대기업 회장님들과의 괴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노동력을 구매하고 이를 자신의 생산수단과 결합시킴으로써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자본가들과 유사하지만, 자신들도 그 노동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 운영하는 자본의 규모가 비교적 작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적 자본가들과는 구별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분석과 이론을 사상적으로 구체화해나가던 시기 전후에도 이러한 소(小)부르주아지들은 존재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러한 독특한 계급적 집단을 ‘쁘띠 부르주아’로 칭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과는 분명하게 배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대자본가들을 비롯한 [자본가 일반]과도 계급적 이해의 불일치를 보이게 된다. 생산구조의 기본적 구성 원리상 쁘띠 부르주아 역시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대자본가들에 의한 억압에 놓인다. 예컨대,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독점적 대자본(대기업)에 의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흡수되며, 소규모의 중소자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남는 경우에도 하청제도나 대기업의 원료 독점, 불합리한 세금/금리 부담 등을 말미암아 이윤의 일정부분을 대기업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선 노동자 계급이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해야함을 주장하는 견해가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하고 시장이 침체된 요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피해 역시 대부분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짊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영업자들이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찾자면, 우선 MP3 플레이어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세계최초의 MP3 MPman ‘F10’ 사진출처: https://it.donga.com/3476/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디지털 캐스트’는 1996년 MP3를 처음 개발해낸 심영철씨와 황정하 사장을 필두로 MP3플레이어의 세계 최초 발명과 특허 등록까지 완료했었다. 이때 삼성 계열사인 새한미디어에서 생산과 마케팅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해 특허권의 공동 소유를 요구했고, 국제적 마케팅과 대량 생산을 위해 디지털 캐스트측은 이를 수용했었다. 하지만 새한미디어는 특허권이 공동 소유가 되자마자 디지털캐스트를 배신하고 MP3 플레이어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캐스트는 직원들의 급여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무너졌고, 결국 황정하 사장은 특허권을 미국 회사인 다이아몬드사에 매각하여, 미국인들이 세계 최초라고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 사의 MP3플레이어가 탄생하게 된다. 새한미디어 역시 특허무효소송을 걸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남은 특허권 지분까지도 미국의 아이리버사로 매각된다. 결국 MP3플레이어의 특허권은 전부 미국의 대기업으로 흡수된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납품가 후려치기, 계약금 미지급, 결제 미루기 등으로 유망 중소기업이었던 정산산업을 부도로 이끈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의 사례나, 28년간 성실히 냉장고 부품을 생산해 납품한 하청업체의 중국 투자를 강요하였다 발주물량을 줄여 해당 업체를 위기로 내몰고 이후 헐값에 인수를 시도한 삼성전자의 사례 또한 별반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횡포의 유형은 다르지만, LG생명과학은 중소기업 비타민하우스의 유망한 인재들을 단기간에 대거 빼오는 식으로, 현대중공업은 중소기업 테크마레에서 개발해 특허 낸 선박 구성품을 무단으로 복제해 사용하는 식으로 중소기업을 짓밟았으며,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대기업과 대자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위 갑질을 일삼고 있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대자본들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이 일차적으로 타격을 흡수함에 따라 위기에도 덜 흔들리게 되고, 기반이 불안정한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사업 전반에 걸쳐 고스란히 그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쁘띠 부르주아들은 그 스스로 부르주아지적 사고와 자본가적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다. 쁘띠 부르주아지들 또한 생산의 기본적 메커니즘 상 노동자 계급과 근본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들은 대기업과 대자본으로 대표되는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이해관계와도 일정부분 대립함으로써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특수한 중간 계급으로 취급된다. 초기의 의문처럼 우리 주위의 사장님들 역시 가치를 창조하는지, 또 현대 사회에서 자본가의 감독 역할과 관리 업무를 노동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기존 관념 속 부르주아 계급(대기업을 바탕으로 한 자본가 계급 일반)과 현대 사회에서 그 출현이 더욱 두드러진 쁘띠 부르주아 계급을 분리해서 사유할 수 있어야만 2020년 현재의 자본가 계급의 역할을 ‘노동’ 혹은 ‘가치 창조’의 관점에서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격상되자 당분간은 가게 형편이 어려우니 알바 출근하지 말라는 고기집 사장님과 스마트폰 및 가전제품을 생산해내는 모 회사 회장님의 이해관계는 분명히 다를 테니 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과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했으니, 이제 이 구분을 우리의 의문에도 적용해보자. 이전에는 대충 얼버무려 점철되어있던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사이의 간극을 비로소 파악해낸 지금, 다시 “자본가 계급도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하는가”하는 질문을 마주해보겠다. 이제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부르주아지의 경우와 쁘띠-부르주아지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먼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경우엔 쁘띠 부르주아지가 직접 노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특수한 사업장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고용주 쁘띠 부르주아지는 저마다 다른 강도로 노동과정에 직접 개입한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자영업자들 혹은 중소자본가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경우에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펼쳐지는 가치 창조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가치를 일정 부분 직접 창조해낸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했으며 이를 활용하여 잉여가치의 창출을 도모하기에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직접 노동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본가 계급 일반]과는 차별성을 띤다. 한마디로 현대의 일반적인 쁘띠 부르주아는 ‘인간노동일반’의 지출을 통해 직접 가치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경우에 따라 중소기업의 사장님, 식당 주인, 식료품 도매업체 대표 혹은 (김 모 군의 사장님처럼) 술집 주인 등을 맡고 있으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상이한 강도와 다양한 질적 형태로 구성된 각자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본가 계급 일반의 전형인 대자본가들, 대기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한 사장님과 회장님들을 어떠실까. 이들은 기존의 일반적 관념 속 자본가 계급의 보편적 상 그 자체이자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자본가들과 대기업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직접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매우 자명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삼X전자의 이모 회장님께서 전자 제품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지시, 지휘의 업무, 감독의 업무, 관리의 업무 등 그 어떤 형태의 노동도 대자본가들의 몫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자본으로 지시, 지휘, 감독, 관리 따위의 업무를 대신 도맡을 노동력을 구매한다. 단순 노동자들을 고용함과 동시에 관리나 감시의 역할을 수행할 노동자들을 별도로 고용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자본가들과 같은 편으로 보이는 감시, 감독의 노동자들, 이를테면 대기업 임원진 및 전문 경영인 등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을 수행할 뿐 똑같은 노동자다. 물론 이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분명히 단순 노동자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의 강도나 임금의 수준, 착취의 정도 등 여러 부분에서 단순한 형태의 노동자들보다는 양질의 대우를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이들 역시도 대자본가 회장님들의 감시, 감독을 대신 행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쁘띠 부르주아로 분류되는 소자본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가치를 만들기도 한다. 김 군의 사장님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을 이루는 대자본가들과 대기업 회장님들은 자신의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의 물질대사를 멀리서 지켜볼 뿐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결론을 맺기 전에, 처음으로 돌아가 김 군의 일터에 계시는 사장님의 말씀을 다시 곱씹어보겠다. 사장님들이 행하는 노동의 버거움을 시사했던 김 군의 고용주, 사장님의 말씀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일단 (힘듦의 정도는 객관화가 어렵지만) 사장님들이 실제로 노동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김 군의 고용주와 유사한 형태의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및 소자본가(쁘띠 부르주아)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처럼 사장이 애를 쓰지 않고는 그 어느 사업장의 (가치)생산과정도 원활히 굴러갈 수 없다는 말씀은 현대 사회의 모든 사장님들께 일반화시키기에 부적절했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가 고찰했듯, 부르주아 계급은 일반적 양태와 (소자본가들로 구성된) 쁘띠 부르주아로 나뉘었다. 김 군의 사장님과 이해관계가 유사한 쁘띠 부르주아지 집단 내에서는 김 군의 사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분 또한 자신의 경험적 한계에 근거해 이러한 발언을 하셨으리라. 하지만 이모 회장과 같은 대기업의 대자본가들에게는 이 같은 주장이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은 노동 일선에 결코 참여하지 않으며, 나아가 자본가 계급 일반이 노동 과정에 참여한다는 발상은 실제적 양상과는 괴리가 컸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부르주아지들은 절대로 직접 노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관리, 감독이 없어도 분명히 누군가(노동자) 이를 대신함으로써 생산과정을 원활히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자본가의 노동으로 사업장이 돌아감을 시사했던 김 군 고용주의 발언이 (쁘띠 부르주아의 경우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 군의 사장님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 계급 일반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셨고, 이 때문에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게 아닐까 싶다. 쁘띠 부르주아는 분명히 직접 가치를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의 자본가들 모두가 가치 창조 과정(=노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운영구조를 대중이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가 알지 못하는 과정에 대기업 대자본가들의 노동이 투여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은폐된 과정이 존재한다한들, 대자본가들의 노동은 쁘띠 부르주아지들의 직접적 노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일 것이다. 더욱이 강도의 측면에서도 결코 비교할만한 수준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결론을 짓자면, 우리 사회 내 많은 사장님들이 직접 노동을 하고 계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 모든 자본가(혹은 고용주, 혹은 사장님)들의 표준적인 계급적 표본이 아니었으며, 그저 쁘띠 부르주아였을 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경우엔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질적 노동과정에 대기업 사장님들이 개입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한 사유의 과정 속에 우린 부르주아 계급 형성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산수단’의 개념을 포착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쁘띠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일반을 분리해냈다.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향성 속에 우리는 오늘의 논의를 통해 좀 더 세밀한 관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더불어 노동과정 전반을 자본가의 관점에서 사유해봄으로써, 우리의 근로 과정에 사장님들이 어떻게 개입하고 계셨는지 심도 있게 분석해볼 수도 있었다.

일상적 사례를 통한 자본주의적 구조&생산관계의 명료화 과정을 가능케 해주었던 김 군을 떠올려본다. 글을 마무리하는 대로 김 군에게 연락을 취해 필자에게 들려준 에피소드를 글에 담았음을 밝히고 이를 게재해도 좋을지 물어볼 참이다. 소재를 제공해주었음에 감사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우스운 질문도 하나 덧붙여야겠다. “ 너네 사장님보다 더 나쁜 사장님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을래?”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자본론 에세이-4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작년 여름에 한 선배랑 대화를 나누던 중, 선배가 난데없이 뱃사람과 듀공의 이야기를 해줬다. 항해를 떠나 오랫동안 여자에 굶주린 뱃사람들은 듀공을 잡아다 강간하고 나서 그 고기를 먹고, 남은 잔해는 도로 바다로 던지곤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듀공이 느꼈을 감정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뱃사람들을 비난했고 선배는 “성욕은 있고, 여자는 없는데 그럼 어떡해. 나는 뱃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데?”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선배가 나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듀공을 좀 닮은 것 같네?” 이 일로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동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불쾌하기보다는 실감이 안 났다. 자기가 내뱉은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픈 말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말들을 하다니. 그때 처음 깨달았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은 절대 듀공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구나. 평생 고기를 잡아다 팔고, 먹곤 했던 뱃사람에게는 듀공 역시 그냥 자신이 낚은 수천 마리의 고기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넣은 이유는 ‘대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자본론 제7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대상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가치가 증식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다. 나는 이중 가장 핵심은 ‘노동의 대상화’라고 판단하였다. 노동이 대상화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노동만이 아닌 자연과 여성의 대상화를 함께 다루고, 그런 대상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본론 7장을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먼저 대상화되기 이전의 노동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자기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이 구간을 그냥 읽으면, 마치 노동 그 자체가 자연을 착취하는 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동물들을 떠올렸을 때 위와 같은 노동에 대한 설명은 생태계의 모든 생물에게 해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스스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꽃가루를 채취하는 꿀벌이나, 지렁이를 파먹고 나뭇가지로 둥지를 트는 새도 마찬가지다. 이때 이루어지는 노동에서 자연과 인간의 생존은 직결된다. 인간은 자연의 것을 가져가되 결코 파괴할 수는 없다. 자연이 파괴되면 생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임금노동 이전의 노동이란 자기의 몸과 자연을 대등하게 보살피는 것이었다. 다만,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노동 간의 차이점은 동물은 노동을 본능적으로 하지만, 인간은 노동 행위 이전에 일종의 구상을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 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위의 말을 정리하면, 노동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노동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또 그 목적에 맞게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또 노동자는 목적에 맞게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목적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탁월한 성질이지만, 그 성질 때문에 대상화가 발생하기 쉽다. 노동의 목적이 ‘자연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난 것’을 가공하여 받는 임금이 목적이 될 때, 자연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연의 안위는 더 이상 나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을 최대한 착취해서 임금을 많이 받는 것만이 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대상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 대상화를 영어로 한 ‘objectification’의 한국어 뜻풀이는 ‘(사람에 대한) 객관화[대상화], (사람을) 물건 취급함’으로 나와 있다. 대상화는 ‘타자화’, ‘사물화’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상화를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어떤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이 특정 사물의 가치로 등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상화가 다른 존재에 나의 주관을 객관화하여 씌우는 것을 의미할 때, 대상화된 존재는 본연으로서의 의미와 맥락이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주관을 객관화한 실체로만 유의미하다. 노동의 대상화는 그래서 사실상 살아있는 노동을 죽여서 사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화폐가 등장하고,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오직 임금노동만이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됨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연도 대상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이 담당했던 가사노동의 경우는 타인에게 판매될 수 있는 노동이 아니었다. 가사노동은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남성의 노동에 자연스럽게 우위가 발생했고, 가사노동은 폄하의 대상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여성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유일하게 여성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여성의 성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적 특성에 따라, 여성의 신체 역시 대상화되었다.

이렇게 노동, 자연, 그리고 여성. 이 세 영역의 대상화는 노동자는 기계라는, 자연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는, 여성은 인격체 없는 남성의 자위기구라는 환상을 우리 사회에 심어놨고, 그 결과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주검과 코로나19, 최근에 겪은 이례적인 장마와 전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 그리고 ‘곤란한’ 페미니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터지고 사람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우리 사회가 드디어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본질적인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이번에 내놓은 뉴딜 정책의 경우, 여전히 성장주의가 그 핵심에 있고, 디지털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디지털화를 통해 대면 상호작용과 이동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친환경적인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태에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다른 에너지를 줄이고 전기사용을 확대하거나 친환경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환경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상 전기자동차의 보급화는 환경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만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 오히려 주행거리와 운행 빈도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또 우리는 자동차만 친환경으로 바꾸면 되는 줄 아는데,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가 차지하는 도시 인프라 자체에서 발생하는 탄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친환경 연료는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친환경 에너지 자체도 고민해볼 지점이 많다. 우리나라 태양열 에너지의 경우, 땅이 좁아서 산을 깎아내는 식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는데, 에너지 확보를 위해 산을 깎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 않는가.

디지털화가 대안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대면의 비대면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인간상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면하여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납작한 청각과 시각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개입을 하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상대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특정 순간에 흘렀던 음악을 머릿속에 평생 저장해두어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상대가 다리를 떠는지, 팔짱을 끼는지를 봄으로써 불편함을 포착하기도 하고, 눈과 입의 미세한 떨림, 움직임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공감능력을 형성하고, 타인과 유대를 맺어왔다. 하지만 모든 상호작용이 비대면화 되면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에 화면이라는 벽을 놓게 되는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TV 속 광고와 인스타그램에 속아왔듯이, 우리는 화면으로 보이는 것에 우리의 상상만 덧입히게 되지, 실제로 상대를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N번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해자들은 화면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화면이라는 평평한 창을 통해 접해왔던 수많은 과장되고 허구적인 상(像)들 때문일 것이다. 화면 앞에서 질주하는 그들의 욕망을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든 화면은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평평한 것이기에.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대체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교육 역시 입시경쟁에 의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일. 더불어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은 예컨대 소규모 학급을 운영하고, 더 넓은 교실과 더 많은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효율 논리에 따르면 이런 방안들이 논의될 리 없다. 디지털화, 비대면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곳곳에서 이토록 빠르게 적용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값싸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지, 옳고 이성적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진정한 최선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풍요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성장 중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벗어 던져야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성장 자체에 착취가 내포되어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땅이든, 자본은 무언가를 갉아 먹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재선으로 당선된 프랑스 파리시의 시장(市長)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장 ‘안 이달고’는 ‘파리를 위한 선언’으로 도시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파리를 위한 선언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핵심적인 것들만 나열해 보겠다.

 

⓵ 파리 전역 운행속도 30km/h 제한

②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③ 디지털 광고판 퇴출

④ 에어비앤비 주택 사들여 저렴한 공공임대

⑤ 파리시민의 식량주권 확보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 대안적 가축 사육 지원 정책 마련)

 

이달고 시장의 철학은 도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그리고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달고 시장은 파리를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도시로 만들어 자연과 사람이 숨 쉬는 도시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달고 시장의 이러한 정책 취지에 파리 시민이 공감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시장 Anne Hidalg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ne_Hidalgo_(3).JPG © Remi Jouan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반(反)성장의 삶은 개개인이 혼자서는 달성하기 힘들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개개인은 시스템의 이탈자가 되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달고 시장이 했듯이 시스템과 제도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어 국가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변화가 있어야만 다른 삶이 가능하다.

 

결론이다. 앞서 살펴봤듯, 임금노동에서 시작해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경제적 파편들로 잘게 잘게 쪼개졌다. 그리하여 노동과 여성과 자연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해왔다. 사회는 노동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착취자인 뱃사람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와 각종 자연재해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피해자들의 눈을 응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당장의 방역과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눈은, 앞으로 우리가 듀공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멀리,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야 한다. 죽은 듯 보였던 것들은 사실 전부 살아있기에. 내려오자. 대상화의 단상에서 생(生)이 있는 대지로.

손님이 왕? [내가 읽는 『자본론』]

손님이 왕?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엄청난 생산력과 유통망을 가졌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능력은 서울 한복판 대로변에서부터 두메산골 잡화점까지 뻗친다. 어딜 가나 쇼윈도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들은 잠재적 소비자인 행인들의 시선을 끌며, 그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지갑을 열기 위한 노력에 맞서기는 참으로 어렵다. 결국 지름신이 강림하고 어느새 지갑 안에 갇혀있던 신용카드가 계산원의 손에 쥐어진다. 우리는 생산할 때보다 소비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를 통해 이 사회의 모두가 평등하다고 되뇐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는 항상 속삭인다.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너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법이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왕으로 만든다. ‘손님은 왕이다!’ 모두가 소비자인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세상,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를 얻는다. 배가 고프면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을 사먹고, 몇 주에 한 번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가 되면 미용실을 방문해 머리카락을 손질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과정이 소비이고, 거기서 얻는 만족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다음 봉급일만을 바라보며 일한다. 돈을 쓸 때 우리는 왕이니까.

 

소비는 짜릿하고 기분 좋은 행위이다. 원하는 사용가치를 얻은 우리는 행복하다. 또 원하는 사용가치를 찾아가는 그 순간 자체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 과정에서 주인의식을 느낀다. 애X스토어에 방문하여 최신 아X폰을 둘러볼 때 점원들에게 받는 대접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왕이라도 된 것 마냥 만들어준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격언이 잘 실현될 때 소비자로서 우리는 주인의식을 느끼며 만족한다.

 

우리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즉 소비를 통해 왕이 되려고 노력하며 돈을 버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C-M-C’로 정식화한다. C는 상품(앞의 C와 뒤의 C는 다른 상품), M은 화폐이다. 상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내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한다. 여기서 C는 사용가치로 존재한다. M은 교환과정을 간략하게 만든다는 화폐 본래의 속성에 충실한 화폐, 화폐로서의 화폐이다.

 

원래 ‘C-M-C’는 물물교환의 연속인 ‘C1-C2-…-Cn’에서 비롯되었다. 나에게 필요 없는 사용가치를 다른 사용가치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사용가치를 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물물교환의 불편함이 화폐를 불러왔고, 화폐가 물물교환의 과정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시켜 ‘C-M-C’라는 사슬이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C-M-C’는 사용가치가 목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자본의 목적은 사용가치가 아닌 자본의 증식, 즉 가치증식이다. 화폐가 목적인 것이다. 자본의 정의부터가 그러하다. 아무리 많은 돈이 쌓여있더라도 그 돈들이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을 더욱 크게 불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구두쇠’일 뿐 자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아까 논의한 C-M-C로 설명할 수 없다.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자본으로 시작하여 자본으로 끝난다. 그런데 처음의 자본보다 나중의 자본이 줄어들어 있으면 이 과정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증식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M-C-M′(M′=M+ΔM)’ 자본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그 상품을 다시 팔아 자신의 몸집을 더욱 크게 불린다. 끝의 M′은 원래의 자본에 자본의 증가량이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고리대와 같이 M-M′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자. ‘쌀을 팔다.’ 어떤 의미의 말일까? 물론 이 문장은 쌀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른 용법이 있다. 돈을 주고 쌀을 살 때에도 쌀을 ‘판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쌀을 산다’는 것은 쌀을 팔고 돈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용례의 기원에 대한 여러 설들 중, 과거 화폐경제가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 그 이전 시대 상거래의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던 쌀과 화폐를 교환하는 과정을 쌀 중심적으로 바라보아 그런 용례가 성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돈을 불려야 하는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은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고, 다시 상품을 팔아 화폐를 사는 게 아닌가? 이를 C-M-C와 엮으면 우리는 돈이라는 물건을 팔아 사용가치를 대가로 받는 판매자인 건 아닐까? 즉 우리는 자본이 만든 물건을 사는 데에 집중하여 우리를 소비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돈을 팔고, 자본이 돈을 사는 건 아닐까?

 

자본이 스스로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도 아니다. 자본은 우리에게서 ‘돈’을 사옴으로써 몸집을 불려야 하는데, 그 돈을 사기 위해서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그 상품을 사올 때 팔았던 돈의 가격 그대로 되파는 건 자본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돈을 팔아 상품을 사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은 곧 자본가가 아닌 우리들이다. 결국 우리는 상품을 팔아 사는 돈보다, 상품을 살 때 파는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자본이 몸집을 불리는 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에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M-C-M′ 중에서 상품을 만드는 C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왕이 아니다. 자본이 손님(=소비자)이고 우리가 판매자이기 때문에 자본이 왕이 된다. 또 우리는 자본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산한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몫을 남에게 빼앗기는 사람은 왕이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은 노예에 가깝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언명에 현혹되어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허위의식에 덮였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우리를 왕으로 생각하던 소비의 과정에서도 최후의 승자는 자본이었다. 자본주의는 모두가 노력하면 그만큼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과정이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모두가 소비자, ‘손님’이기에 평등하다고 강조했지만 그것은 사기였다. 자본은 그저 우리에게서 싼 값으로 돈을 사오기 위해 ‘손님은 왕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고 다른 자본과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소비자임에 동시에 어디서는 계산원으로, 어디서는 경비원으로, 어디서는 미화원으로 존재한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은 우리가 손님이 아닐 때에는 왕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평등은 속 빈 강정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주인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 그 평등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평등이거나 비슷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평등이다. 조지 오웰은 동구권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러한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 격언을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어떤 인간은 더욱 평등하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멋진 말 뒤에는 사실 우리에게서 우리의 몫을 빼앗아가는 고약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숨어있던 것이다. 손님이 왕인 세상보다, 그냥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손님일 때에만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멀쩡한 세상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왕으로 살고 싶지도 않고, 노예로도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소박한 이 바람이 실현되기까지 요원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내가 읽는 『자본론』]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얼마 전 아주 어린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형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 수년 전이었기에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다. 근황을 묻고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변화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함께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고, 우리 모두 달라져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형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의 역경을 한참 설명하더니 “내가 살아보니 인간이란 게 다 그렇더라… 사람이 원래 그런 거야..”라며, 흔한 꼰대식 조언을 무심하게 던졌다. 그 순간 문득 든 엉뚱한(?) 생각,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탐구해도 규명해내지 못했던 (인간에의) 정의를 저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꼴에 철학을 전공한다고, 내 머릿속엔 나름의 철학적 의문이 샘솟은 것이다.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왜 웃느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형의 얼굴 너머로 더욱 커다래진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도대체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한 계기로 시작된 철학적 의문은 이후 수일간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의 답을 찾고자 여러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던 명쾌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서양철학은 대부분 ‘신’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인간을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동양철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사조나 ‘실존주의 철학’ 등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듣는가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내 궁금증을 명쾌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종의 인간적 특성에 집중하는 문학적 사조의 느낌이 강했으며, ‘실존성’이나 ‘자유의지’ 같은 인간의 추상적 특성을 무조건적으로 전제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명료한 존재론적 해석 방식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래 『자본』1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테두리 밖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마르크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였다. 『경제학 철학 수고』의 내용적 얼개까지 확인하자, 비로소 머릿속에 분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 맞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내 궁금증 역시 절대적/고정적 실체를 요구하는 본질주의적 발상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조심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정적 실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특질을 토대로 인간 본성의 방향성만을 시사하고 있었다. ‘유(類)적 존재’ 그리고 ‘노동’이라는 두 키워드는 기존 철학 사조들의 인간관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관이 질적으로 상이함을 암시했다. 마르크스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로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를 분명히 한 후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인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더불어 인간을 수동적 존재나 조건적/의존적 존재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넓게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본인이 근 몇 년간 꾸준히 탐닉해온 『자본』의 사상적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類)적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 ‘노동’은 인간의 본성과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인가?

반가운 만남 속 우연한 계기로 머릿속에 스며든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문득 찾아온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의문은, 본인을 휘감아 흔들었다. 나는 본질주의적 사고의 오류를 경계해가며 해답에 관한 힌트를 찾아 나갔다. 기존의 관심을 계기로 다시 들여다본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와 그 속에 묘사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경제학, 사회학, 또는 혁명적 정치학으로만 서술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저에 있던 인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철학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는 체계적 논의를 통해 인간 존재를 해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유(類)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담은 비교적 직접적인 개념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자 ‘類’는 ‘무리 지음’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어서 그 숨은 의미를 어렴풋이 암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무신론적 유물론자이자 헤겔 좌파였던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으로 그가 먼저 사용했던 ‘유(類)적 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유(類)적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은 마르크스 철학이 기존의 절대주의적 관념론의 인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 존재의 실체적 본질을 고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의 철학들을 비판하는 개념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철학에서 인간을 ‘종(種)’으로 설명하는 경향성을 비판한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학문적 조류는, 인간의 종(種)적 본질을 찾아 모든 개별 인간에게 하향식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론적 고전 철학의 흐름이 그릇된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앙상블:ensemble2)’로서 존재함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개개인의 인간이 그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형태의 어떤 종(種)적 본질만으로 형성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릴 적 동네 형을 오랜만에 만나 별다른 종(種)적 목적성 없이도 마주 앉아 웃고 떠들 수 있던 것은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맥락 위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적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생물학적 속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능동적, 의식적 존재인 셈인데, 이는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도 증명된다. 우리 주위의 개인적 인간들이 동물적, 종(種)적 본성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님, 우리 엄마, 내가 아끼는 친구들을 비롯해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은 종(種)적 본질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맥락의 총체로서 오늘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논의를 출발시킨 동네 형과 나 역시도 서로에게 사회적 맥락을 제공하며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類)적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실천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인간은 종(種)적 본성에만 지배받는 동물들과는 달리, 유(類)적 성격과 종(種)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의식적 사회 활동과 능동적 행위를 실천해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방향성이 나에게는 일종의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 존재나 도덕 등 조건적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으며, 매력적인 이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편, 포이어바흐에 의해 유(類)적 존재의 개념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오히려 포이어바흐를 비판하기도 했다. 포이어바흐가 설명하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적인 대상으로서 묘사될 뿐, 실천적 주체로서 설명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특히 더욱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種)적 특성을 고정적/실체적인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고, 유(類)적 성격이라는 특질로써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유(類)적 성격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계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 불변하는 실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 종(種)의 유(類)적 성격에 의거한 사회적 맥락의 총합으로 구성됨을 시사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인간의 본성적인 사회성과 능동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처럼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상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유(類)적 존재 개념 속 의미의 맥락이 모호하기 때문에 후대에 숱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고정적 실체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일각에서는 마르크스가 인간에게 유(類)적 성격을 부여한 것 자체가 인간의 고정적/실체적인 종(種)적 본질을 규정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구조주의적 시각에서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했으며, 훗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본인은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전반에서 매우 핵심적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 자본주의 비판의 단초로서 그의 사유 배후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결고리는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노동’은 마르크스 인간관의 이해를 돕는 두 번째 키워드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속 궁극적 문제의식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적 행위로서 ‘노동’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유 방식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입장이라면 의문이 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버텨내는 노동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행위가 된다는 것인지 의아할 테다. 앞서 마르크스는 직접적인 신체의 욕구와 본능적 생산 활동에 지배받는 동물과 인간, 또는 동물적 존재와 인간을 명백히 구분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자연 전체의 다양한 사물과 관계한다는 면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한 인간의 삶과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동물적 행위와는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오히려 자유롭다. 또 인간의 의식과 의지의 형성에 관계한다. 이때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의지적 노동의 행위는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유(類)적’ 성격의 행위일 테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만물에 ‘창조적 노동’을 행함으로써 ‘유(類)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자연을 확장하여 창조하거나 구체화하는 창의적 존재로 설명된다. 인간은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상화시키며 또 이 같은 대상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며 자신의 모습을 직관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속에서 의식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노동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특질이라 보았다.

따라서 노동 행위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라, 본디 인간의 ‘유(類)적’ 성격을 실현해내고 확인하는 즐겁고 자발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의 개념을 처음 접하고서 그의 사상 자체가 굉장한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의 ‘노동’론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이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지 암시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인간 특질로서의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 및 강압은 ‘노동 소외’3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외’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본질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는데,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성적 특질로서의 ‘노동’이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졌음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 행위’는 창조적으로 인간의 유(類)적 본성 혹은 의식적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보기 어렵다. 그저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수동적, 강압적, 비자발적 과정이 오늘날의 ‘노동’이다. 아끼던 형님을 몇 년 만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강압적 노동의 사회적 압박이 (예를 들면 취업 혹은 취업을 위한 대입 등) 나와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취직 문제로 수년간 고통 받았다던 형님의 씁쓸한 회상처럼, 우리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의 압박에 시달리며,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했고, 이제 어디에서도 ‘인간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리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서술을 마주하며 느낀 의문스러움은 ‘인간 노동’이 소외되어왔음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겠다.

본래의 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덧붙여보겠다. 앞선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 역시도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인간의 본성이자 유(類)적 특질을 드러내는 ‘노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가치’를 창출해내게 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는 이 ‘가치’(인간 노동)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에서, 줄곧 ‘인간 노동’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애초에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 ‘인간 노동 일반’에 있음을 전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적 상식이나 효용가치설의 기본적 구조와는 완전히 상이한 파격적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인간 노동’이 어떻게 기능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치의 착취에 놓이게 되는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인간 노동’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인간 본성으로서의 ‘노동’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노동’을 중심에 두고 ‘노동가치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애(愛)와 휴머니즘적 양상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사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나 인간 본질에 관한 논의는 마르크스&엥겔스 철학의 초기 저작에서 주로 등장했으며, (위와 같은 경제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게 되는) 후기로 갈수록 이는 사라지게 된다. 짙은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였던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후기로 발전해가며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이나 추상적인 헤겔식 독일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의 변모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앞선 논의의 견해들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들이 (후기에도) 여전히 ‘유(類)적’ 존재로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류의 본성적 경향성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점 격이었던 『독일 이데올로기』4의 면면에서 때때로 드러난다고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5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전, 후기 저서를 막론하여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활동성 및 실천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밑바탕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인간 노동’에의 논의가 핵심적 토대를 이뤄왔음은 물론이다.

이병창, 『독일 이데올로기』1・2, 먼빛으로, 2019.

이 같은 맥락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존재론적 측면에서만 유(類)적 대상으로 파악했을 뿐, 실천적 행동의 맥락에서 인간을 유(類)적 (감성적)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유(類)적’ 혹은 ‘감성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포이어바흐는 ‘유(類)적’ 존재 개념을 다수의 개별자를 단순히 결합시키는 내적인 보편성/통일성으로 파악했다. 즉 사회적 총체로서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맥락 속 계급 관계 등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관념론의 흔적을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인간의 본성을 실체적, 대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던 점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포이어바흐가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며, 사회 속의 인간적 계급 구조 형성의 필연성 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질이란 ‘유(類)적’ 성격과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대로 고정된 실체로서 형이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성격과 실천적 형태의 동적 인간 행위인 ‘노동’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명료화한다. 능동성과 창조성을 중요한 본래적 특질로 지닌 인간은, 사회성을 토대로 그 본성을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인간관에 흡족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자나 관념적 가치(이를테면 ‘자유의지’, ‘실존성’)에 의존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는 결이 다른 이론적 견해를 보였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인 인간적 관점에서 자신만의 인간관을 정립했기에 그렇다.

또한, 나는 그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서도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실례를 알고 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매우 반가운 만남이었음에도 동네 형님과 나는 무척 많이 달라져 있었고, 이는 우리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본질이 실체로서 고정되어있었다면, 형과 나는 예전처럼 본성적으로 통해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따라 구성됨을 설명했고 나는 내 생활세계에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로서 어떠한 실체도 고정화하지 않았던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강조한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역동적(능동적) 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갈망하던 종류의 인간관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사견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아마 그러한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여기까지 이끌 수 있음에 글을 쓰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색은 오늘날에도 어리고 미숙한 예비 철학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확장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근래에 공부 중인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생각(인간관)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는지 가늠할 기회를 얻어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유는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여기, 내게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인간관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철학자들과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필자 본인이 인간 본성에 대해 추측하는 바가 정확한 사실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하며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굉장한 의미가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외부의 객체적 존재들을 명확히 인식하겠는가.

비록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이 의문만 연속되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가치 있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논의를 이쯤에서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위 나와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각자 스스로의 견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일까?”


  1. 마르크스&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고전서

  2. 여기서 ‘앙상블:ensemble’은 불어인데, 독일인 마르크스가 흔한 독어 표현 대신 불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 마르크스가 ‘하나’로서의 합일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독일(독어)의 신비주의적 흐름의 뉘앙스에서 벗어나, 전체 속에 다양성과 개체성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소외’ 혹은 ‘인간 소외’ 현상의 양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2.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 3.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 4. 유(類)적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노동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생산물의 지배권, 노동 과정의 통제권, 동료 인간과의 본성적 화합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나아가 유(類)적 인간의 본성 자체도 소외당하고 있는 셈이다.

  4.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한다고 한다.

  5. 헤겔 철학은 기존의 사유 방식과는 달리 절대자 혹은 신을 역사 속에서 발전, 변화하는 주체적 존재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