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세 명의 대학생이 『자본론』을 읽기 위해 모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자본론』을 읽으며 더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본론』을 읽으면서 읽은 내용이나 이들에게 남은 살아있는 얘기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남기려한다.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마르크스의 『자본』, 이른바 『자본론』이라 불리는 책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신의 머릿속을 불현 듯 스치는 불온서적이 있다면 유추하는 그것이 맞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얼핏 들어본 거 같은데… 마르크스 어쩌고 하는 고전책 아냐?” 정도의 배경 지식이 담긴 답변도 거의 듣기 힘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올해로 만 20세가 되는 대한민국의 2000년생 남자다. 물론 제목의 ‘김필진’도 동일 인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 나이 또래의 대한민국 사람에게 2020년 1월 현시점에서 『자본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면 더욱 저조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래도 개중에는 소싯적 신문의 정치면 사설 좀 읽어왔다며 그 불온서적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 요즘에 바로 그 『자본론』 읽어요.” 그들의 대답은 비교적 비슷할 것이고 예측 가능하다. 빨갱이냐고 묻거나 아직도 그걸 읽는 사람이 있냐고 답할 것이 확실하다. 21세기 현재, 스스로 좌파임을 자부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외면 받는 책이 바로 『자본론』이다. 그걸 읽고 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이 말이다. 왜? 나는 왜 『자본론』을 읽고 공부하는 것일까?

‘금기’ 나는 금기라는 벽과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에 싸움쟁이였다.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놓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공을 찼고, 학급 내 주먹질 다툼은 월례행사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 주차된 차의 백미러를 깨먹는 일 정도는 큰 사건도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범적이고 올바른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왔고, 꽤나 반항적인 편이었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모습에 속을 태우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나의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학생으로서의 쇄신을 위해, 목동 7학군으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나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을 살던 곳을 떠나 첫 교복을 입게 된 동네는 내가 살아왔던 곳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나를 인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목동의 치열한 학구열은 나의 평범한 하루하루들을 옥죄어왔다. 버티기 버거웠다. 학교를 안 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신경성 복통에 하루를 멀다하고 입원했음은 물론이요, 우울증에 불안-강박증, 심리 상담까지, 몸도 마음도 상했고 그야말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 시기도 있었다. 내 학창시절은 산산조각이 났고, 중학교 시절에 사귄 친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많이 다퉜다. 아버지의 이사 결정이 내 삶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씩 커가며,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사회적 괴물이 아버지의 그러한 판단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생김과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엄청난 놈의 존재를 피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본론』은 이 무렵에 내가 접한 여러 종류의 불온서적 중 하나였다.

『자본론』과 나의 첫 만남은 내가 살아온 맥락 위에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 당시에는 『자본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공부하지는 못하였으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김수행 선생님께서 지으신 『자본론 공부』 등의 가벼운 책들로 흥미를 키워갔다. 결정적으로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술, 이를 테면 『공산당 선언』이나 『독일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수고』의 요약문 등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의 고통과 불만, 피해의식을 보듬어 내 잘못이 아님을 다독여준 것은 다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털보 할아버지와 ‘소외론’이었다. 나는 그들의 휴머니즘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의 눈에 그러한 책들은 그야말로 파격이었고, 내 안에 꿈틀대던 금기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었다. 금기의 벽은 사회에 대한 나의 반항심만으로는 꿈적도 않더니, 내 손에 낫과 망치가 쥐어진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자본론』이 내 머리 속에 들어오자, 금기의 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공차는 것을 좋아하던 반항아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 끝에 결국 벽을 넘어서고야 만 것이다.

누구보다 시끄러운 사춘기를 보내고 어느 새 나는 대학생, 새내기의 문턱에 있었다. 그렇게 앙망했던 경희대학교에 입학해 보니, ‘이까짓 대학이 뭐라고 나는 그렇게 망가졌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학교를 쉬거나 그만두기도 했고 가족들과 갈등을 겪기도, 사랑하는 것들을 잃기도 했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던 이유는 결국 대학 입시에서 시작되었었기에 더욱 허망했다. 그토록 강요받던 ‘인서울 4년제’, ‘국내 TOP10 대학’은 그 무엇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허망함으로 방황하던 첫 학기, 나는 교양 수업으로 수강하게 된 ‘고전 읽기 : 『자본』’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는 완전히 아물지 못한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내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또 공부하고 싶은 것들, 내가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내가 싸워내야 할 것들이 보다 명료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계속 나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기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그간 꾸준히 놓지 않았던 『자본론』 등 여러 불온서적을 또 다시 꺼내든 나는, 우울한 이 세상의 무자비함에 당하고만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신입 생활은 『자본』과 함께하게 되었다.

『자본론』은 개인적인 내 정서의 흐름과 밀접히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대학생, 성인, 사회인으로서 내가 만난 세상은 내 경험과는 무관하게 『자본론』의 필요성을 꾸준히 증명해주었다. 알바생으로서, 대학생으로서, 국민으로서, 철학전공자로서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자본론』으로 명쾌히 답변이 가능한 미스터리들이 많았다.

우선 대한민국의 20대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알바와 같은 실제적 임노동 상황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던 2019년 한 해 동안 꾸준히 알바를 해왔다. 2020년에도 알바를 계획 중인데, 최저시급이 오른다고 한다. 뭔가 이상했다. 2020년의 최저시급 인상은 진작부터 결정되어 있었을 터인데, 나는 2019년 한해 8,350원의 최저 시급에 내 노동력을 판매했다. 그렇다면 내 노동력과 교환되어야할 값어치만큼의 최저임금이 8,590원으로 사전에 판단/책정되었던 것은 2019년이나 혹은 그 이전일 것이고, 이를 토대로 2020년의 최저임금인상을 예정해둔 2019년 당시에도 나는 (그 보다 적은 값인)8,350원에 내 노동력을 판매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차익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내 노동력의 값은 분명히 고정되어 있을 텐데 왜 엉뚱한 이들이 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 노동력의 값어치는 8,350원이 맞는가? 8,590원이라고 단언할 수는 있는가? 나는 매달 매해 항상 똑같이 노동력을 생산해 판매하는데, 해가 바뀐다고 그 교환의 등가 값어치가 바뀌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수많은 궁금증과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알바 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누구 하나 명쾌히 답을 주지 못했다. 내 질문으로 인해 비슷한 의문을 함께 품게 된 친구도 있었다. 『자본론』은 이에 대해 간단하고도 무서운 대답을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었다. “가격은 가치와 다른 것이고, 내 노동력의 가치는 불변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본론』은 설명하고 있었다.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2873529925

 

이 같은 『자본론』의 예리한 통찰은 나아가 대학생으로서 김필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김필진에게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우선 『자본론』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서 마르크스는 ‘물신숭배’에 대한 언급을 제법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물신숭배’란 단적으로는 사회적 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물건에 인격을 부여해, 물건이나 상품 그 자체를 숭배하거나 인격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니며 그 대상이 상품(물건)에서 일종의 상품인 ‘화폐’로 바뀐 ‘화폐 물신성’ 또한 함께 설명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어렵고 와 닿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하면 그 참된 의미와 현실성을 체감하기 힘들다. 다만 위의 서술처럼 간단하게나마 그 핵심 의미를 인지하고 우리 주위의 현실 세상을 둘러본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자본론』 속의 ‘물신성’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극도로 고도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더욱 더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결국엔 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XX브랜드의 상품은 정말 우아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YY 회사의 제품은 그 스스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우수하다.” 등등. 사실 이러한 문제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아도, 위와 같은 주위의 사례들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다. 돈과 상품이 그 자체로 처음부터 어떤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돈과 상품의 신비성을, 그것들을 인격화하여 숭배함으로서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돈과 상품이 불러오는 이로움을 돈과 상품 자체에 내재된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성’의 환상은 일반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면화 되어왔다. 특히 돈과 상품에 예민한 20대 대학생들을 둘러보면 그 양상을 더욱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본론』은 우리가 무의식에 내포하고 있던 그릇된 환상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저술과 자본주의적 ‘물신성’에 대한 고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로 자본주의적 모순의 맥을 꿰뚫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내용이 이러한 일반론적 원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포괄적 메커니즘에만 포커스를 두는 것은 아니다. 『자본론』의 여러 파트에서는 당대 유럽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자본주의적 착취의 실태를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부분은, (간단히 말해서) 영국 북부의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하기 위해, 아일랜드나 영국의 각종 농업지의 갈 곳 없는 이들과 농민들을 마음대로 잡아다 날라서 노동력의 공급을 증폭시켰다는 내용이다. 사안의 비인간성과 잔혹함뿐만 아니라 내가 해당 내용을 인상 깊게 여기는 까닭은 그 현재성에 있다.

얼마 전 선배를 통해 알게 된 ‘고용허가제’라는 제도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자본」에 등장하는 위의 영국의 사례와 닮아있다. 2020년 현재 고용노동부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제도인 ‘고용허가제’는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일을 하고자 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공장주나 사업주들이 고용노동부에 노동력 공급을 요청하면 고용노동부에서 지원 받은 이주노동자들을 선별해 뽑은 뒤 양측을 연결해 사업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 해외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게 될 곳이 어떠한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자기의 고용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근로하게 되며, 자신이 일할 직장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또 이직은 3번으로 제한되며, 이를 어길 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다.

한마디로 강제노동에 가까운 이러한 제도는, 스스로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 아직도 『자본론』에 등장할법한 말도 안 되는 노동법이 살아 있음에 매우 분개한다.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위와 같은 제도를 떠받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계속해서 『자본론』을 읽고 ‘고용허가제’와 같은 비인간적 착취 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가야할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론』은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재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앞서 제시한 ‘최저시급’과 ‘고용허가제’의 두 가지 사례는 그 현재성의 단편적이고 구체적인 양태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사례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의미에서 내가 『자본론』을 계속 공부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현실적 동기도 존재하는데, 내가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비판 서적인 『자본론』에서 철학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자본론』의 전체를 관통하는 ‘노동가치설’은 논의의 시작부터 ‘가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를 동반한다. 물론 ‘노동가치설’이 철학적 이론이거나,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이 되어야만 학설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실제적인 ‘가치’의 형성과정이 그 근본 맥락의 시발이다. 다만 경제학의 주류가 ‘효용가치설’이고 ‘가치’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보편적 관념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가치’의 참된 의미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노동가치설’에 다가가기 위한 첫 단추로서 필요할 것이다. 그냥 아무 일이나 한다고 해서 전부 다 가치를 만드는 노동인 것은 아니며, 가격이 높고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서 그 상품의 ‘가치’가 높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깊은 사색과 고찰 속에서만 일반적인 경제상식의 문을 깨부수고 나올 것이다.

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에 의해서 형성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식의 인간애의 사유는 충분히 공부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린 시절 한창 교복 입던 때의 나를 따뜻하게 달랬던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자본론』의 커다란 맥락과 흐름에도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자본론』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다.

지금까지 『자본론』에 관한 이야기는 내 개인의 삶과 그 외부에 실재하는 자본주의 세계 간의 관계망에서 서술을 해봤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일들을 구체적 사례로 삼아,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를 설명하고자 노력했고, 또 같은 맥락에서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내가 『자본론』을 계속해서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필연성의 이유와, 현실적/현재적 유효성의 이유,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20대로서 내가 살아왔던 삶은 마르크스주의 인식에서 사회의 불의와 맞닿아있었으며, 『자본론』은 그러한 문제의 본질과 그 현실적 해결법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그리고 현재성이 충분한 책이었다. 그것이 내가 계속 『자본론』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하는 동기이기도 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는 영향력 있는 큰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가치설은 전 세계의 경제학도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 이제는 커다란 계급적 혁명도 일어나지 않으며, 화폐물신화는 이미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읽는다. 뉴스와 신문, 정치인과 이웃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주입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가장 최선의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정녕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시스템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착취와 억압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걸까? 다양한 관점을 견지해보고, 열정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져본다면, 이 세상은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인간의 살아 숨 쉬는 가능성을 정치와 철학 속에서 찾고 싶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자본론』을 권할 것이다.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난 뒤에야 맛볼 수 있는 떨림,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뜨거운 열정과 버무려진 그 떨림에, 2000년생 김필진은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자본론 에세이1) [내가 읽는 『자본론』]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세 명의 대학생이 『자본론』을 읽기 위해 모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자본론』을 읽으며 더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본론』을 읽으며 읽은 내용이나 이들에게 남은 살아있는 얘기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남기려한다.

 

 

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모든 일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나는 2008년에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교실 앞에 앉아 우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셨고, 우리의 시험은 우리만의 동화를 써서 내는 거였다. 이렇듯, 맨날 숲에서 뛰어놀고, 흙 놀이를 하며 나무를 타다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첫 중간고사 광경은 나한테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험을 볼 때 우리는 가림판을 책상 가운데에 세워놔야 했고, 옆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셨다. 시험은 아주 엄격한 일종의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복도에서 쉬고 있는데, 그 당시에 제일 친하게 지냈던 지희가 내게로 왔다. 지희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보경아, 우리 같이 63빌딩에서 뛰어내릴래?”하고 물어봤다. 깜짝 놀라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중간고사를 망해서 그렇다고 한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했던 그 친구의 말과 표정은 아직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겨우 12살이었다. 우리 사회에 뭔가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쉬는 시간에도 수학의 정석을 푸는 애들을 보면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이 어엿한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독일의 친구들은 수영을 배우고, 숲으로 현장학습을 나가며 시 쓰는 법을 배우면서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한국의 나는 의자에 꼭 붙어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순간 엄청난 공포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불안함과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맞물리면서 친구들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노트필기 하나 보여주지 않는 치사함, 등수와 내신 등급에 대한 사소한 거짓말들, 그리고 질투가 다분했다. 제일 친했던 친구는 나한테 “너 그렇게 살다가 좋은 대학 못가.”라는 말을 밥 먹듯 했다. 나는 공부를 못해서 돈을 내고 방과 후 수업을 들어야했는데, 어떤 아이들은 ‘특별반’에서 심화 수업을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본 아이들은 지쳐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섞이면 왠지 당당하고 반짝였다. 저렇게 똑똑해져만 가는 친구들을 언제 따라잡나 싶었다. 정말 내 인생은 망하게 될까? 전교 135등이라는 내 등수는 지지리도 나를 괴롭히고 우울 속으로 몰아넣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도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다. 어른들은 일하느라, 친구들은 공부하느라 바빴다. 모두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듯했다. 외로웠다.

 

  고등학교는 혁신학교에 다녔는데, 사실 학교가 나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혁신학교가 내가 원했던 고등학교가 아니어서(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어 고등학교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배정표를 받을 때 친구들과 함께 엉엉 울고 난리를 쳤다. 거짓말 안 하고 그 학교에 배정받은 모든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졸업식 때는 슬퍼서 울어야 하는데, 우리는 중학교 3년이 끝나는 걸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걱정만 했다. 그 당시 설립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던 혁신학교는 날라리들이 많고 공부 못하는 애들만 가는 학교라서 거길 가면 인생이 망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입학생들이 1년 내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첫 수업시간, 사회과목 선생님께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들고 오셨다. 사탕을 하나하나 까서 학생들 입에 넣어주셨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보자.’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나는 혁신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에는 종이 위에 찍히는 성적표 말고도 중요한 가치가 많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NGO 동아리에 들어가서 공정무역과 시민단체에 대해 배우며 따뜻한 가슴을 배우지 못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다른 모든 것들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예쁘다는 것도 배웠다. 학교에서 ‘날라리’라고 낙인찍어 소외시키는 애들은 그 누구보다 생각과 고민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한 친구는 종이를 별모양으로 오리더니 “너는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적어서 나에게 줬다. 그 별은 아직도 내 일기장에 붙어있다. 공부를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선생님들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한 학생이라도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정말 많이 노력해 주셨다. 그 덕에 학생들도 나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놀았다. 옆 학교가 소위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의 이름만 현수막에 내걸 때, 우리 학교는 전교생의 이름이 적힌 거대한 무지개색깔 현수막을 달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졸업식 때 하는 수상도, 전교생이 각자 하나의 상을 받을 수 있게끔 기획했다. 나는 ‘미스코리아상’을 받았다. 예뻐서가 아니라 세계를 평화롭게 하라고.

팽목항 세월호 리본, 출처: pixabay

  나의 학창시절이 이대로만 마무리되었다면 아마 『자본론』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4월 16일,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세월호가 침몰했으나 전원 구조됐다고 했다. 안심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주로 희생된 사람들은 동갑내기 또래들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가 제시하듯 그 어떤 구조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통신내용 조작도 이루어졌으며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부재했다. 이마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 관심을 두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슬펐을 뿐이고, 구조되지 못했던 게 아니라 구조되지 않았던 것이기에 분노했을 뿐이다. 가슴이 아픈 사람들이 좌파라면, 나는 기꺼이 한 명의 좌파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내 삶과 모든 가치관을 540° 뒤집어 놓았다. 그 이후로 나는 삐딱해져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호 사건은 내 마음에 일종의 공포심과 조급함을 심었다. 이것 때문에 때로는 숨을 제대로 쉬는 것도 힘들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정부가 보인 모습들, 그리고 사회의 일부가 취한 행동들(일베의 어묵 먹기나, 폭식 투쟁, 어버이 연합의 시위와 같은)은 17살 머리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루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가다 한 무리가 작은 집회를 열고 있기에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나보다’하고는 가까이 가서 봤는데 어버이 연합이었다. 그 사람들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유가족들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절 팔을 45도 위로 쭈욱 뻗더니(나치가 연상되었다), 함께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눈에 보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미어졌다. 자식이 있어 본 적 없는 나도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아프지 않은 걸까.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는 순진했다. 지금이야 그런 장면들을 마주칠 때 그러려니 하고 말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애니메이션 같은 데서 보면 푸르른 하늘과 녹음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이 마녀의 저주에 의해 회색으로 변하고 식물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들이 있다. 나에게 세월호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삶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건을 겪으니까 그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용 자동차 부당해고 사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월세를 못 내, 그것도 자기 피붙이들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고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전쟁 난민과 아파도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수치화되는 중요한 모든 무형의 것들, 교육을 둘러싼 허무한 정치적 싸움들, 사회가 손을 잡아주지 못한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정당화시키는 정치를 봤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왜 우리의 삶은 이 모양인가?

 

  어처구니없는 이 사회를 만들어낸 원인들은 여럿이 있겠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목격해 온 불행의 파편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내가 어렴풋이 내린 커다란 결론은 ‘자본주의사회’였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이토록 고독해지고 치열한 삶을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교육의 문제, 노동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 복지와 권리의 문제, 심지어 인간의 외로움마저 모든 것은 결국 자본과 연결되었다. 화폐로 인해 우리 삶은 풍요롭고 간단해졌지만, 그것은 점점 거대해지면서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들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세상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장밋빛 혁명을 꿈꾸기도 했다. 혁명은 쉬워보였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수천 명의 학생을 모으고 서울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세우자. 대학에 들어가면 운동권에 들어가서 자본주의와 불평등 교육의 뿌리를 뽑고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회를 만들자! 이렇게 다짐했다. 정말 쉬울 줄 알았다. 물론 그때 내가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거라곤 사실 ‘자본’ 그리고 ‘혁명’과 같은 키워드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마르크스를 사랑했고, 마르크스가 알고 보니 아주 추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스스로 자신은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했고, 대학에 다니면서 맑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허세 가득한 얼간이라는 걸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제를 잘 파악하는 게 1순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자본론』을 정말 읽기 시작했다. 『자본론』을 손에 잡은 것은 가슴이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한 발악이자, 이걸 읽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이었다.

 

  지금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에 찌든 대학생일 뿐이다. 세상을 바꾼다고 대학에 왔지만 오히려 그 세상과 점점 괴리되는 아이러니도 겪는 중이다. 머리에 든 건 많아졌지만, 무기력도 그만큼 일상이 되었다. 배운 대로 살기란 쉽지 않다. 공부는 심지어 이가 알 낳듯, 마음에다가 얄궂은 오만을 낳는다. 게다가 무뎌진 탓에 ‘세상이 정말 그렇게 잘못됐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의 통증이 이젠 식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짜 사랑은 강렬했던 첫사랑 이후의 잔잔한 바다와 같은 사랑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도 그렇다. 마르크스가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하게 분석했던 자본, 그런 그의 사투에서 나는 여전히 작은 희망을 본다. 고민조차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사이에는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자본이 증식하는 속도나 방법들은 변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비집고 들어와 일상을 미묘하게 지배하고 있는 방식은 비슷하다. 그 연결고리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알아가면서 비록 내가 혁명은 일으키지 못할지언정 나의 삶과 내 주변은 바꿔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뭉뚝하되 꾸준한 가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