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내가 읽는 『자본론』]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지난 8~9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등의 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의사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한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내가 속한 세대와 나 자신에 대한 성찰도 많이 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를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그 세상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언론에서 의사파업과 자주 같이 묶이는 것이 ‘인국공 사태’이다. 내가 접한 수많은 칼럼과 기사들에서는 이 두 사건이 같이 언급되며 청년세대의 이기심과 잘못된 공정관념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나는 역시 그 비판에 동의했다. 우리 세대가 공정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세대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청년세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나는 조금씩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비난들이 다소 ‘불공정’하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청년 개개인들의 이기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 ‘이 시국에 어떻게 파업을 할 수 있냐’며, 인국공 사태에 관해서는 ‘같이 살 방법을 모색해야지, 시험으로 얻은 권위만을 진정한 공정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 얕은 사고’라며.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며 수없이 한숨을 쉬었지만,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경쟁의 틀 안에서 자라야 했던 우리는 가족 안에서,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을까요?

세대들은 서로로부터 독립된 게 아니라서, 다음 세대는 반드시 이전 세대의 거울일 수밖에 없다. 이전 세대가 어떤 가치를 추구했고, 어떤 싸움을 벌여왔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모습이 달라진다. 모든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번 의사파업은 코로나19 이전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이 생명을 얼마나 함부로 다뤄왔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창궐 이후로 우리 모두가 생명과 연대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되었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어땠나? 나는 세월호 사건을 기억한다. 아직도 기업이 안겨준 수십억 빚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삼성 백혈병 사태를,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구의역 김 군의 죽음에서 멈추지 않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산재, 노동자들의 죽음을, 그 뒤에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무능한 국가를 생각한다. 마땅히 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회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해 다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수많은 약자를 떠올린다. 기성세대에 감히 송구한 발언을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어떤 윤리와 미덕도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세대가 유일하게 약속받은 것은 1등이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보장이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1등이 되어야 해고될 걱정 없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언젠간 내 집을 갖고, 내 집만이 아닌 내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여러 다른 집도 가질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내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1등이 되려고 했다.

그러니 청년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정의 개념은 당연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더 빨리, 더 멀리 뛰어야 하는 경주에서는 당연히 그 누구도 옆 사람과 함께 뛰려고 하지 않는다. 청년세대가 잘못된 공정을 쫓고 있다면, 그 공정의 틀을 제공한 기성세대도 함께 반성해야 한다. 공생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공생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모든 이의 노동이 존중받고, 모든 이의 생명이 존엄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이토록 이기적일 필요가 있었을까.

자본론 제8장과 제9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과정 중에 가치가 변하지 않는 ‘불변자본’과 가치가 변하는 ‘가변자본’을 구분하여 착취가 어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 결론은 가변자본 중 노동자의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의 몸이 움직이는 동안 노동자는 자신이 버는 임금 이외의 가치들도 창출하는데, 그 가치는 자본가가 다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이 자본론의 해설은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거의 마흔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잉여가치 발생 및 착취의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다. 직접 읽어보길 권장하지도 않는다. 같은 부분을 7시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다 가져가더라도, 노동자가 충분히 먹고살고, 또 건강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그 누구도 불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의 발생을 문제 삼았던 이유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 착취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 비추어 보자면, 과로에 시달리는 택배 노동자들(나는 최근에 택배 노동자들이 택배 분류작업을 직접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의 빌어먹을 ‘빠름’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값싼 배달료가 목숨 값이 되어버린 배달 플랫폼 라이더들, 방학에도 수업 준비를 하고 연구를 해야 함에도 학기 중에만 월급을 받는 시간강사들 등의 착취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윤 앞에 이들 자신의 안전과 건강은 늘 뒷전이다.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지만, 어쩐지 살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고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긴 후에 쭉 지켜본 한국 사회는 격변의 사회였다. 하지만 어쩐지 수많은 ‘격변’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담론은 개인의 윤리와 잘못에 대한 논의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이번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난데없이 재활용 분리수거라니.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으나, 최근에 어떤 기사를 통해 접한 플라스틱 재활용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되는 플라스틱 중 아주 낮은 비율만 재활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에는 재활용 비용이 너무 비싸다거나, 기업이 플라스틱과 다른 소재를 섞어 재활용이 불가능해진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플라스틱이 재활용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왔다. 나라에서는 분리수거를 적극 격려하고, 기업에서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이라고 선전을 하니 비닐도, 페트병도 열심히 분류하고 음식물이 묻은 플라스틱은 깨끗이 씻어서 배출했다. 플라스틱만이 아니라 종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떼어도 잘 떼어지지 않는 택배 운송장의 마지막 코너까지 긁어내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난감하게 비닐과 종이가 섞인 포장을 둘로 열심히 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로벌화 된 기후변화 이슈에 대응하는 것은 윤리적 개인이었고, 개인일 뿐이었다. 국가나 기업은 마치 치어리더처럼 재활용을 격려만 하는 동안 개개인은 환경에 대한 죄의식과 일종의 의무감으로 모든 짐을 짊어졌다.

기후변화 얘기에 아직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의사파업으로 돌아가 보겠다. 최근 의대생들이 거부했던 의사 국시를 다시 보게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정부는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고, 사람들은 고소해했다. ‘그거 봐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설치랬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나도 이제 와서 이미 지나간 의사국시를 허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윤리적으로 잘못한 죄인’들에 대해 처벌을 내린다는 심정으로 고소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씁쓸해해야 한다.

청년들의 주식투자 열풍에 한탄하는 글들도 요즘 많이 접하게 된다. 집이 없는 청년들은 주식투자를 한다. 누군가가 이미 너무 많은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청년들 사이에서 또 한창 인기 있는 것은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부류의 에세이, 자기개발서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고,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고, 죽고 싶어도 괜찮고, 우울해도 괜찮고, 가진 게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물론 정말 다 괜찮다. 자신의 감정과 처지를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인지하고, 또 그것에 대해 위로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치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치유는 없고, 위로만 난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 이 시국에서도 정부나 정치인들이나 기업들이 하는 말은 다 위로의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진짜 공정이라느니, 공생이라느니, 경제성장의 회복이라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개천절, 국무총리는 경축사를 하며 이런 말들을 했다:

 

“정부는 올해 9월 우리의 국가목표로 ‘포용국가’를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설명하신 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단 한 명의 국민도 차별받지 않고 더불어 사는 나라가 포용국가입니다. 포용국가로 가려면 정부와 정치가 제도를 만들며 이끌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일상에서 하실 일도 많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약자를 돕는 일이 그것입니다. 포용국가의 길을 정부는 착실히 가겠습니다. 정치와 국민 여러분께서도 동행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이것 또한 단군 할아버지께서 꿈꾸신 홍익인간의 길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더 씁쓸해지지 않으려 채널을 돌렸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치(治)’를 우리는 ‘다스릴 치’로 많이들 생각해왔지만, 「맹자, 마음의 정치학」의 저자이자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인 배병삼 선생님은, 그 ‘치’에는 다스린다는 의미보다 치유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즉,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위로만 준다면 그것은 그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 최대한 많은 표를 받아 최대한 많은 국민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는 특정 가치와 방향성을 가지기보다 그때그때 더 커지는 목소리들에 휩쓸리기 쉽다. 하지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정치는 다르다. 그런 정치는 병든 부분이 어디인지 명확히 짚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설정한다.

87년생의 초선의원인 정의당 장혜연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국공 문제를 공정 이슈로 보는 것은 담론 바꿔치기에 가깝다. 진짜 근원적 해답은 좋은 일자리가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애당초 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비정규직으로 쓰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기성세대가 된 86세대에 대해서는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민주화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를 청산하고 우리가 맞은 과제들에 용감히 부딪혀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돼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라고 말했다.1

나는 이 글로써 의사파업의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당신들 잘못이라고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다. 세대 간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기만 하면 또 다른 단절과 또 다른 갈등이 생길 뿐이다. 나는 다만, 이번 사태의 본질이 엘리트주의에 빠진 기득권 청년들과 이들이 속한 집단의 이기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시스템이 문제라고. 우리는 코로나19 속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1등들이 생명과 연대가 아닌 자신들의 기득권만 주장했을 때 우리는 온 국민이 위기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경쟁교육, 그리고 성장 중심주의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실질적으로 공정하고, 실질적으로 평등한 정책들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를 확고히 선언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선언을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성세대와 정치권의 결단력 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동안 기고만장했던 기업의 책임을 따진다.

마음이 조급하다. 청년이 기성세대가 된 세상은 지금 같지 않아야 한다. 아마 백신이 나오고 인류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린 다시 예전 그 방식대로 살아나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19 이전의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감히 솔직해지자면, 기존의 사고방식을 우리 사회가 스스로 버리는데 필요한 시간만큼 코로나가 우리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한다. 1등이 아니어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노동이, 1등이 아니어도 존엄하다고 가르쳐주는 교육이, 자연을 돌보지 않고는 풍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현실이 될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의 그 날이 너무 멀리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1. 2020-10-09, 이정민, 「[이정민의 직격인터뷰] “잘못 인정하는 게 리더,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 회복해야: 87년생 초선의원이 86세대에 던지는 고언”」,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