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자본론 에세이-6, 제10장: 노동일 ) [내가 읽는 『자본론』]

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누구나 평생의 고독과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흔히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구멍을 채울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 다르다. 어떤 이는 그 구멍이 신(神)의 자리라 하고, 다른 이는 사랑, 혹은 소울메이트의 자리라고 한다. 누구는 자연과 일치하는 삶의 자리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코 채워지지 못하기에 그저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고독이 있는 반면에, 요즘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공허나 외로움은 무척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현대의 공허는 마음에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무언가가, 두꺼운 고무마개 같은 것으로 막고 있어서 질식당하는 느낌이랄까. 구멍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고무마개는 그렇지 않다. 그건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최근 6~7주 동안 일종의 생활 실험을 진행했다. 청년 중 대다수가 여가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넷플릭스, 인터넷 쇼핑 등과 같이 화면을 통한 활동을 하면서 보내는데, 우리는 처음에 그러한 생활방식이 우리 공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디어에 찌든 ‘한심한’ 우리의 생활습관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실험의 제목을 ‘화면과 단절하고 새로운 것과 연결하기’로 정하고, 각자의 규칙을 세워 실험을 진행해봤다. 실험의 핵심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 그리고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보자는 것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실험은 실패에 가까웠다.

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회복하고 싶은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유대감이었기 때문에 실험 기간 최대한 많은 시간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거나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 5일 출근하는 데다, 통근 3시간, 아침에 준비하는 시간과 씻고, 자고, 최소한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시간을 빼면 24시간 중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3시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면 시간을 5시간 반으로 잡았을 때 가능한 얘기다. 나는 그 3시간을 주로 녹취록 푸는 알바와 글을 쓰고 강아지와 노는 시간 등에 할애하며 보냈다.

실험을 시작했으니, 이제 그 3시간을 사람에게 할애해야 했다. 나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평일 저녁에 약속들을 끼워 넣고, 주말까지도 사람들로 꽉꽉 채웠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 당연히 좋았지만, 같이 있는 내내 나를 짓누르는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나는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너무나도 피곤해서 친구들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이들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도 해주지 못했으며 많은 시간을 내주지도 못했다. ‘내일 출근해야 해서’, ‘집에 가서 또 할 일이 많아서’라는 말들로 늘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 후 홀로 집에 가는 길이면 뭔가 찜찜하고, 함께했음에도 부재(不在)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와서는 밀린 일을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그러면, 다음날 출근해서 졸음을 견디려고 몸속에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붓는다.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마음이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좋아지고, 머리가 수시로 지끈거렸다. 그러다 보니 정신상태도 그리 온전치 못했던 것 같다. 좋자고 하는 실험이었는데 삶이 더 망가졌다. 그리고 나는 더 외로워졌다.

‘현대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은 우정이고 연대고 뭐고, 불가능한 삶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빈 공간을 아무리 채우고 싶어도 불가능한 삶. 이토록 지치고 피곤한데 다른 사람의 삶에 진정으로 귀 기울 힘이 남을까. 사람이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소비가 채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 앞이 막막했다. 지금이야 겨우 인턴이라 몇 개월만 지나면 다시 조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겠지만, 나중에 생계를 위해 노동하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텐데, 그 안에서 내 삶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사람도, 감각도 흐릿해진 삶을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그저 화면을 들여다보며 공허함을 견뎌내는 일에 익숙해질까.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해답을 찾아가던 중 나는 조금 더 무기력해졌다. 처음에는 내 습관과 마음가짐만 바꾸면 덜 외로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여가는 나의 것이 아니었고, 다음날 출근해서 일할 상태로 내 몸을 되돌려놓는 일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여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거나, 느긋이 앉아 독서를 하는 것 등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모해서는 안 되었다. 집에서 충전 중인 핸드폰을 집 밖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몸은 오로지 ‘충전’이라는 것에, 집이라는 공간에 메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노동을 해야만 하므로 구멍을 채우는 것은 개인의 몫일지 몰라도,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은 구조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쓰는 다이어리의 월간 페이지를 펼쳐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온다. 31개의 네모난 칸이 기대되고 설레는 날들이 아니라 마치 통과하고 이겨내야 하는 퀘스트(Quest)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오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침을 맞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매일 매일의 끝에 나는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유와 우정일까, 풍요로움일까. 혹은 암 덩이처럼 불어나는 고립감뿐일까.

 

『자본론』 제10장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히 설명한다. 10장은 ‘노동일’에 관한 장인데, 노동자의 하루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마르크스가 친절히 설명해주는 장이다. 먼저,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일은 하루 24시간 전체를 포함하는데, 그중에서 노동력이 다시 봉사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약간의 휴식시간은 뺀다.”

 

자본가의 시각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기 생에 전체에 걸쳐 노동력 이외에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노동자에게는 물론 휴식과 여가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간은 사실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바쳐지는 충전의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그리하여 우리가 신체의 성장과 건강의 유지에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즐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식사마저도 다음 노동을 위한 연료가 될 뿐이다. 마치 기계에 기름을 부어주듯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평균 식사시간이 12분뿐이라는 택배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1 노동일 안에 운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의 최대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더 밀어붙이게 되는데, 아예 노동자의 수명을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탐욕스러운 농업경영자’가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을 맞바꾸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1

토지의 비옥도는 땅의 ‘기(氣)’와 같은 개념이다. 땅의 에너지는 일정량만 있어서, 다음 해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으면 땅의 기운이 전부 소멸하지 않을 방식으로만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작물에 따라, 어떤 땅은 한 번 농사지으면 소모된 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7년이 필요하기도 하다. 땅의 힘을 한꺼번에 다 써버리거나, 땅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 땅은 죽게 된다.

하지만 농업경영자에게는 땅의 수명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역시 천지에 널린 것이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농업경영자가 땅의 기를 전부 사용해 최대의 이윤을 창출한 후, 죽은 땅을 내버려 두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듯이, 자본가도 노동자의 수명을 길고 가늘게 유지하는 것보다는, 짧고 굵게 끝내려고 한다. 노동자의 노동을 최대한도로 쓰다가, 노동자가 나가떨어지면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 자본가에게는 더 효율적이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노예무역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했다. 노예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노예의 노동이 있어야만 지장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노예 소유자는 노예를 당연히 인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가 죽으면 당장 자신의 삶도 지속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노예는 외국의 ‘흑인사육장’에서 값싸게 보충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재료의 목적이 ‘소모되는 것’이듯, 그때부터 노예의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는 대신,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낸 후, 죽기라도 하면 다른 노예를 사 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노예무역 이후, 천지에 널린 것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노예의 수명은 그가 생존할 때의 생산성보다 덜 중요하게 되었다”2

 

생명과 맞바꾼 이 노예무역의 효율 중심 원리가 현대를 사는 내게 낯설지 않음이 가슴 아프다. 이 원리는 개인이 삶의 풍부한 면모들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존재의 가치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노예무역과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노동자가 죽었고, 2020년 상반기만 해도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만 470명이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잊고 살아서 ‘노동자가 죽었다’는 말에,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가 죽은 것처럼 느끼지만, 노동자의 죽음은 친구와 가족의 죽음, 나의 죽음과 같은 말이다. ‘노동자가 죽었다’와 ‘사람이 죽었다’는 같은 말이다. 산재만 불합리한 죽음으로 볼 수 있을까. 자살과 교통사고까지도 모두 다 생산효율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재’가 아닐까.

마르크스, 엥겔스와 베를린 TV타워

노동일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의 일상이 얼마만큼이나 우리의 것이 아닌지 실감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못난 자신만을 스스로 자책하고 있다.

한 가지 이야기로 올해의 마지막 에세이를 마무리하려 한다. 최근에 읽은 홍은전의 『그냥, 사람』3이란 책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사회는 장애인의 부양의무를 그 가족에게 지운다. 하지만, 장애인이 홀로 생활하고 이동하기 힘든 사회에서 장애인의 부양의무가 지워진 가족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개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감당하라고 강요하니 학대와 폭력과 방치가 다반사다. 라면을 끓여 먹다 불이 나서 다친 동생과 세상을 떠난 형의 이야기가 ‘가정사’를 넘어 사회적 문제인 이유, 치솟는 청년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나약한 ‘멘탈’이 아닌 이유,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일이 해당 기업의 회장만의 잘못이 아닌 이유는 이 모든 일이 사실, 못난 개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한 개인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연대하고 보살피는 사회가 필요하다.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뿐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지금은 다소 일그러지긴 했어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민주정치를 한다.

만약에 모든 건물과 시설, 교통수단이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구조로 되어있었다면, 사회의 돌봄이 가정의 보육 부담을 덜어줬다면, 청년들이 어렸을 적부터 서로 경쟁만 하도록 부추기는 교육과 구조가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의 휴식과 안전이 법으로 보장되었다면, 우리는 이토록 홀로 버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죽음이 일상이 되어 무감각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20년은 코로나-19와 장마의 해이기도 했지만, 전태일 열사 50주기이기도 하다. 전태일은 더 이상의 전태일이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전태일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외롭고 아프다.

2021년은 2020년과 달랐으면 좋겠다. 우정과 연대가 가능한 일상의 여유를 위하여,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착취해왔던 자본주의의 효율 중심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죽음이 곧 사회의 죽음임을 모두가 알아서 어떤 사람도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그리고 그 누구도 홀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있는 삶을 위하여.

 

그 첫걸음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부터 통과시켜야 한다.

 

출처: http://nomoredeath.kctu.org/measure/contents.php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홈페이지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내가 읽는 『자본론』]의 2020년 연재를 마칩니다. 2021년 다음 연재가 시작될 때까지 잠시 쉽니다.

 


  1. 『자본론』, p.359.

  2. 『자본론』, p.360.

  3.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있었던 그가, 그간 한겨레에 투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