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자본론 에세이-4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작년 여름에 한 선배랑 대화를 나누던 중, 선배가 난데없이 뱃사람과 듀공의 이야기를 해줬다. 항해를 떠나 오랫동안 여자에 굶주린 뱃사람들은 듀공을 잡아다 강간하고 나서 그 고기를 먹고, 남은 잔해는 도로 바다로 던지곤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듀공이 느꼈을 감정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뱃사람들을 비난했고 선배는 “성욕은 있고, 여자는 없는데 그럼 어떡해. 나는 뱃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데?”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선배가 나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듀공을 좀 닮은 것 같네?” 이 일로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동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불쾌하기보다는 실감이 안 났다. 자기가 내뱉은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픈 말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말들을 하다니. 그때 처음 깨달았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은 절대 듀공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구나. 평생 고기를 잡아다 팔고, 먹곤 했던 뱃사람에게는 듀공 역시 그냥 자신이 낚은 수천 마리의 고기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넣은 이유는 ‘대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자본론 제7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대상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가치가 증식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다. 나는 이중 가장 핵심은 ‘노동의 대상화’라고 판단하였다. 노동이 대상화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노동만이 아닌 자연과 여성의 대상화를 함께 다루고, 그런 대상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본론 7장을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먼저 대상화되기 이전의 노동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자기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이 구간을 그냥 읽으면, 마치 노동 그 자체가 자연을 착취하는 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동물들을 떠올렸을 때 위와 같은 노동에 대한 설명은 생태계의 모든 생물에게 해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스스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꽃가루를 채취하는 꿀벌이나, 지렁이를 파먹고 나뭇가지로 둥지를 트는 새도 마찬가지다. 이때 이루어지는 노동에서 자연과 인간의 생존은 직결된다. 인간은 자연의 것을 가져가되 결코 파괴할 수는 없다. 자연이 파괴되면 생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임금노동 이전의 노동이란 자기의 몸과 자연을 대등하게 보살피는 것이었다. 다만,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노동 간의 차이점은 동물은 노동을 본능적으로 하지만, 인간은 노동 행위 이전에 일종의 구상을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 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위의 말을 정리하면, 노동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노동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또 그 목적에 맞게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또 노동자는 목적에 맞게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목적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탁월한 성질이지만, 그 성질 때문에 대상화가 발생하기 쉽다. 노동의 목적이 ‘자연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난 것’을 가공하여 받는 임금이 목적이 될 때, 자연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연의 안위는 더 이상 나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을 최대한 착취해서 임금을 많이 받는 것만이 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대상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 대상화를 영어로 한 ‘objectification’의 한국어 뜻풀이는 ‘(사람에 대한) 객관화[대상화], (사람을) 물건 취급함’으로 나와 있다. 대상화는 ‘타자화’, ‘사물화’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상화를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어떤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이 특정 사물의 가치로 등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상화가 다른 존재에 나의 주관을 객관화하여 씌우는 것을 의미할 때, 대상화된 존재는 본연으로서의 의미와 맥락이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주관을 객관화한 실체로만 유의미하다. 노동의 대상화는 그래서 사실상 살아있는 노동을 죽여서 사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화폐가 등장하고,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오직 임금노동만이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됨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연도 대상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이 담당했던 가사노동의 경우는 타인에게 판매될 수 있는 노동이 아니었다. 가사노동은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남성의 노동에 자연스럽게 우위가 발생했고, 가사노동은 폄하의 대상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여성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유일하게 여성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여성의 성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적 특성에 따라, 여성의 신체 역시 대상화되었다.

이렇게 노동, 자연, 그리고 여성. 이 세 영역의 대상화는 노동자는 기계라는, 자연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는, 여성은 인격체 없는 남성의 자위기구라는 환상을 우리 사회에 심어놨고, 그 결과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주검과 코로나19, 최근에 겪은 이례적인 장마와 전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 그리고 ‘곤란한’ 페미니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터지고 사람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우리 사회가 드디어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본질적인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이번에 내놓은 뉴딜 정책의 경우, 여전히 성장주의가 그 핵심에 있고, 디지털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디지털화를 통해 대면 상호작용과 이동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친환경적인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태에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다른 에너지를 줄이고 전기사용을 확대하거나 친환경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환경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상 전기자동차의 보급화는 환경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만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 오히려 주행거리와 운행 빈도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또 우리는 자동차만 친환경으로 바꾸면 되는 줄 아는데,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가 차지하는 도시 인프라 자체에서 발생하는 탄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친환경 연료는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친환경 에너지 자체도 고민해볼 지점이 많다. 우리나라 태양열 에너지의 경우, 땅이 좁아서 산을 깎아내는 식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는데, 에너지 확보를 위해 산을 깎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 않는가.

디지털화가 대안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대면의 비대면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인간상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면하여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납작한 청각과 시각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개입을 하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상대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특정 순간에 흘렀던 음악을 머릿속에 평생 저장해두어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상대가 다리를 떠는지, 팔짱을 끼는지를 봄으로써 불편함을 포착하기도 하고, 눈과 입의 미세한 떨림, 움직임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공감능력을 형성하고, 타인과 유대를 맺어왔다. 하지만 모든 상호작용이 비대면화 되면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에 화면이라는 벽을 놓게 되는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TV 속 광고와 인스타그램에 속아왔듯이, 우리는 화면으로 보이는 것에 우리의 상상만 덧입히게 되지, 실제로 상대를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N번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해자들은 화면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화면이라는 평평한 창을 통해 접해왔던 수많은 과장되고 허구적인 상(像)들 때문일 것이다. 화면 앞에서 질주하는 그들의 욕망을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든 화면은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평평한 것이기에.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대체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교육 역시 입시경쟁에 의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일. 더불어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은 예컨대 소규모 학급을 운영하고, 더 넓은 교실과 더 많은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효율 논리에 따르면 이런 방안들이 논의될 리 없다. 디지털화, 비대면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곳곳에서 이토록 빠르게 적용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값싸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지, 옳고 이성적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진정한 최선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풍요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성장 중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벗어 던져야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성장 자체에 착취가 내포되어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땅이든, 자본은 무언가를 갉아 먹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재선으로 당선된 프랑스 파리시의 시장(市長)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장 ‘안 이달고’는 ‘파리를 위한 선언’으로 도시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파리를 위한 선언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핵심적인 것들만 나열해 보겠다.

 

⓵ 파리 전역 운행속도 30km/h 제한

②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③ 디지털 광고판 퇴출

④ 에어비앤비 주택 사들여 저렴한 공공임대

⑤ 파리시민의 식량주권 확보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 대안적 가축 사육 지원 정책 마련)

 

이달고 시장의 철학은 도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그리고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달고 시장은 파리를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도시로 만들어 자연과 사람이 숨 쉬는 도시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달고 시장의 이러한 정책 취지에 파리 시민이 공감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시장 Anne Hidalg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ne_Hidalgo_(3).JPG © Remi Jouan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반(反)성장의 삶은 개개인이 혼자서는 달성하기 힘들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개개인은 시스템의 이탈자가 되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달고 시장이 했듯이 시스템과 제도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어 국가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변화가 있어야만 다른 삶이 가능하다.

 

결론이다. 앞서 살펴봤듯, 임금노동에서 시작해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경제적 파편들로 잘게 잘게 쪼개졌다. 그리하여 노동과 여성과 자연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해왔다. 사회는 노동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착취자인 뱃사람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와 각종 자연재해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피해자들의 눈을 응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당장의 방역과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눈은, 앞으로 우리가 듀공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멀리,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야 한다. 죽은 듯 보였던 것들은 사실 전부 살아있기에. 내려오자. 대상화의 단상에서 생(生)이 있는 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