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읽는 『자본론』]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은 노동을 해왔다. 수렵을 하고 채집을 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이전의 노동 형태와 현재의 임금 노동에 차이가 있다면,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전의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이 내 것이었고 임금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우리의 신체를 판다. 회사든 공장이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안에 머문다. 우리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월말에 들어오는 월급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자를 ‘자유로운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노동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것이고, 기저에서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of) 것이다.

많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자의 자유에 초점 맞추기를 좋아한다. 노동자 자신도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고, 자본가도 노동자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채용공고들 중 어느 곳에 지원할지 선택할 수 있다. 서점에서 알바할지 식당에서 서빙을 할지 고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까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고등학생 동창 중 최저시급이 7,530원이었을 때, 시급 5,50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일한 친구가 있다. 시급은 적지만 위치로나 근무 시간으로나 그 친구한테는 그나마 최적의 알바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최저시급 이하로 임금을 주는 곳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은 친구니까, 이는 착취라고 할 수 없을까? 아니다. 명백한 착취다. 친구더러 ‘네가 선택했으니까 너는 착취당하는 게 아니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다. 마찬가지로 편의점 알바를 했을 때다. 졸업한 고등학교 근처의 편의점에서 약 2주간 일한 적이 있다. 나는 계산대 지키는 일이 아니라 물건이 들어오면 선반에 진열하고 창고에 정리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해서 1시간만 일해도 체력이 바닥났다. 4시간 동안 천천히 하면 됐을 것을, 내 속도에 따라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이라 늘 2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갔다. 두 시간이면 당시 시급으로는 약 15,000원이다. 하지만 2시간 일해서 15,000원 받고,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께 그만둬야겠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게 한 시간 만큼의 임금은 제하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고등학생 때 받은 나름의 노동교육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찾아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부당하다고.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긴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나는 분명 노동을 했으니 내가 노동한 만큼의 임금은 주시는 게 맞다고. 어림없었다. 퇴짜를 맞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할까 고려했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나에게 없었다. 5만 원을 떼였다. 약 8시간 동안의 노동이 공중분해 된 것이었다. 내가 작은 빵집의 사장이었다면 8시간 동안 빵을 만들면 그 빵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이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명제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진정한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권리라고. 노동력밖에 가지지 못한 노동자는 결국에는 어떤 걸 선택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감내해야 한다.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free of) 노동자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노동의 노예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나를 위한 노동’으로 보았다. 노동의 과정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의 직접적인 생존과 나의 잠재력 실현의 수단이다. 그래서 노동이란 내가 필요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길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조절할 권리도 나에게 있어야 한다. 현대의 임금 노동에서 후자의, 나를 위한 노동의 요소들은 전부 제거되고 전자의,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노동만 남아버렸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퇴근해서야 조금의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는 이러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퇴근 후의 시간뿐이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국회의원과 정책 입안자들이 ‘완전고용’의 구호는 사실 틀렸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나 양적으로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다운 노동을 원한다. 하지만 이 요구는 너무나도 자주 무시당한다.

인간다운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요새 떠오르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란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직은 개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최근에 정부에서 실행한 재난지원금 정책이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조금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재난지원금을 통해서 우리는 만약에 기본소득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기본소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6년이었다. 내가 새내기가 된 해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이 개최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뭣도 모르고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봉사단에 지원해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스텝이 되었다.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발표자와 청중이 몰려왔는데 스텝의 특권은 강의실들을 기웃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에 애써 귀 기울여 보니,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썩 괜찮게 느껴졌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토지가 인류의 공동재산이라는데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해 쓸 만한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땅을 해당 농부의 소유로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땅의 개간자가 토지의 소유자가 되는데, 이때, 페인은 그 소유자가 땅의 진짜 주인인 공동체에 빚을 지는 것이라고 봤다.1 토지뿐만 아니라 대기와 데이터, 기술과 같은 유무형의 다른 재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우리가 진정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강렬히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맞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공동의 것인데 왜 누구는 그걸 가지고 부를 축적하고 누구는 굶주려야 하지? 우리의 노동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지?’ 그 이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회가 날 때마다 조금씩 공부를 했다. ‘기본소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유토피아적 세계. 하지만 알고 보니 기본소득은 또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출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s://basicincomekorea.org/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에서 내가 쫓아다니던 한 미남이 있는데, 브라질에서 온 길고 검은 곱슬머리의 ‘마르코’였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즐겨보던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서 이집트 파라오 군대를 이끌던 내 이상형과 똑 닮았었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한테 어렵게 말을 걸어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집에 가서 그의 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자기 소개란에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들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던 나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르코가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기본소득은 좌파에 의한, 그리고 좌파를 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본소득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물론 진보와 보수에서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보수는 기본소득 발상이 출발했던 ‘권리’의 개념보다는 ‘효용’에 더 집중한다. 생산력은 점점 증가하는데, 소비 주체는 줄어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순환의 위기에 대한 대안쯤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대신 복지의 축소를 주장하면서 시장 이윤의 재분배에 개입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기대하는 것이다. 진보 측에서는 기본소득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신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평등, 그리고 인간다운 삶 등이 진보 스타일 기본소득의 목적이다.

그러나 양측의 찬성 견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양측의 반대도 드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복지병을 걱정하거나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유발하고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 안에서는 논쟁이 더 복합적이고 치열한데, 진보에서 기본소득에 반대를 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부의 분배’라는 사회적 당위를 실현하는 방법이 기본소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부의 분배가 부자들에게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이 국가에서 주는 소득의 수혜자가 되면 국가의 주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통제를 받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는데, 이 주장은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오히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기회가 열린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맑시즘(Marxism)으로 넘어가면, 그 안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이 갈린다.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주장한 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이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견도 있고, 기본소득이 실시되어도 자본주의는 존속되며, 생산수단이 노동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주체성을 잃고 오히려 사회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해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에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마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을까? 혹은 취직할 나이가 되었으니,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엄두도 못 내기에 다음 생으로 미뤄두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걱정으로 의미 없는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이 뛰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시민정치에 더 많은 참여를 하거나 금요일 저녁,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밥을 차려줄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아무리 달콤한 상상일지라도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입장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양 입장을 전부 고려하면, 기본소득 시나리오의 결말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살아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자기가 좋아했던 소파 의자 위에 앉아 턱을 괴며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기본소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골똘히 고민할 것이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2012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던 다니엘 헤니는 기본소득이 결코 답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기본소득은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나와 공동체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삶에 관한 질문이다. 나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한 번에 해결할 답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대신,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되고, 이 질문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답이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새내기 때 자원 활동했던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관중 중에 일본에서 온 사회학 교수와 그 제자도 있었다. 순진했던 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제자가 웃어 보이면서 ‘그것은 누구나의 꿈이지요.’라고 했던 게 기억에 진하게 남는다.


<참고문헌>

다니엘 헤니・필립 코브체 저, 원성철 역,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 오롯, 2016.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천관율, 「진짜 뉴딜은 기본소득이다」,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1.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20~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