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④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④

??? 일시: 2012. 5. 12. (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 <세한도>에 피어나는 생명의 기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와 『주역』-

강연:? 조민환 교수 (춘천교대)

 

 

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는 강원도 정선 두위봉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평 용문사에 1,100년 된 은행나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두위봉 주목나무가 1400년 된 것으로 밝혀졌다. 천 년 이상 살아온 나무도 놀랍지만, 아프리카 바오밥 나무의 수령은 최고 5,000년가량 된다. 인류사로 어림잡아도 5,000년이라는 시간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만년을 넘게 산 나무가 있다면 과연 믿어지는가?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그런 나무가 있다. 무려 12,000년 이상을 산 이 소나무의 이름은 ‘므두셀라’. 그는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모습으로 5,000년, 고목의 모습으로 아직도 7,000년째 살고 있다. 줄기가 죽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잎이 나고 해마다 1cm씩 성장한다.

우주에 호응하는 법을 깨친 것일까? 오래 산 나무들이 견뎌온 시간은 기적을 넘어선다.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지혜가 있는 것만 같다. 세월을 간직한 나무 대부분은 잎이 풍성하지도 않고 줄기가 곧지도 않다. 심지어 고목의 색은 검고 가지들은 꺾여 흉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무의 중심 줄기마저도 거센 비바람에 둥글게 패이고 버티다가 결국 꺾이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바위틈에 자라거나 땅 위에 누워 자라기도 한다. 심하게 아플 때면, 알 수 없는 혹주머니 하나 다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벌레의 등살에 차가운 시멘트로 덧칠되기 수차례, 세월이 길수록 나무색은 짙어지고 나이테는 조금씩 늘어난다. 이것이 긴 세월을 이겨낸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노송 ⓒ조민환

5월 12일, 상상마당을 찾은 조민환 교수는 나무의 이 당연한 자연스러움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명의 원리를 찾아 옛 그림들을 주역으로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그가 강연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림과 사진은 그래서 푸르고, 바른, 평이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줄기가 부러지거나 움푹 패여 보기만 해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김정희,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23.7*108.2cm, 조선시대(19세기), 한국 개인 소장조민환 교수는 이러한 노송의 모습이 특히 추사의에 자세히 묘사되었다고 본다. 원래 사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유명하지만,에서의 노송은 자연의 강인한 정신도 담고 있다. 얼핏 보기에 힘없고 초라해 보이는 노송이 꺾이고 휘어져도 생명을 멈추지 않는다.

▲ 김정희 <세한도>,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23.7*108.2cm

“가지가 잘리고 옆으로 휜 나무는 고난을 극복하며 위로 자라려 한다. 하지만 위로부터 몰려온 풍파로 말미암아 다시 엄청난 고통의 시기를 보낸다. 나무는 닥친 시련을 또 다시 극복해야만 하는 생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조민환 교수는 말한다.

처음에 노송 줄기는 옆에 있는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위로 곧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너무 바른 탓인지 거센 풍파를 이겨낼 힘이 없어 꺾이고 만다. 이제 노송의 다른 줄기 하나가 굵게 자라지만, 다시 몰려온 풍파에 휘어지고 이도 힘에 부쳐 점점 가늘어진다. 시련이 계속될 때마다 아래로 향하는 줄기, 그럴 때마다 다시 솟구치는 새로운 줄기. 이렇게 굽이치길 몇 차례, 마침내 노송에게도 희망의 봄은 싹튼다. 그런데 이 봄은 사그라질 줄 모르는 봄이다. 가지 끝에 난 희미한 솔잎들은 겨울이 되어도 생명으로 거듭난다. 마치 추사의 인생길처럼 말이다.

고단함 속에 숨어있는 강인함, 이름없는 수많은 고목과의 가지가 간직한 기적의 힘이다. “가지는 미약하지만, 나무는 그 미약함을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조민환 교수의 말대로 바로 여기에서 그 기적의 힘이 발현되고 있다.

끝자락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힘

자연이 보여주는 강인함은 생명력의 회복 또는 극복에 있다. 꺾일듯 꺾일듯하지만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 고목 줄기는 생명 줄기로 재탄생한다. 조민환 교수는 이러한 만물의 이치가 주역의 ‘지뢰복괘’(地雷復卦)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긴다.

‘지뢰복괘’는 땅에 우레 같은 힘이 솟구치는 형상이다. 맨 위에 음 세 개가 땅을 상징한다면, 맨 아래에 양 하나가 봄을 채비한다. 홀로 애쓰는 양의 움직임은 우레의 놀라운 힘을 상징한다. 양의 기운으로 비로소 음의 기운이 다하니 절기로 따지면, 동지(음력 11월, 양력 12월 22일)다. 고난과 어둠이 다해야 양이 회복(復)하므로 이 괘는 머지않아 언 땅에 봄이 올 형세다. 추위의 절정이 지난 후 봄의 기운이 싹트는 것처럼, 우레의 힘은 땅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뚫고 올라온다. 봄이 오기까지 하나의 ‘양’(_)이 고된 시련을 희망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지뢰복괘’는 미미한 작은 기적으로부터 큰 기적으로 변해가는 생명의 ‘길’(吉)한 이치다.

불사조 같은 자연의 강인함 ? 사군자

자연의 강인함은 주역 사상뿐 아니라 인간의 예술혼에도 담겨있다. 조민환 교수는 사군자를 고난과 역경을 품어낸 자연정신이 예술로 승화된 것으로 본다. 가장 쉬운 사군자의 예가 5만 원권 지폐 뒷면에 담긴 매화와 대나무이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 같지만, 사실 이 그림은 이정의와 어몽룡의가 겹쳐졌다.
월매도(왼쪽)와 풍죽도(오른쪽)대나무의 상징은 푸른 잎과 곧은줄기다. 여름날 대나무가 가장 시원하고 싱그럽게 느껴진다. 한편 이른 봄부터 피어나는 매화는 봄의 전령사다. 설사 눈이 내리더라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풍기는 향기가 더욱 그윽하고 청아하다.

대나무는 땡볕 더위에도 마르지 않고, 매화는 강추위에도 여지없이 자신의 생명력을 뿜어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들은 어두운 시간을 인동초처럼 감내해야 했다.와는 바로 그런 시절의 그림이다. 바위 위에 단단히 서 있는 대나무, 그는 매서운 북서풍을 맞이함에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매화나무는 상한 밑동 아래로부터 가지 세우는 일을 밤에도 그치지 않는다. 둥근 달이 그의 고독한 일을 알고 찾아와 가지 끝을 향해 길을 내준다. 그들은 고난을 의미 있게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사군자의 굳건한 정신은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추사의에 절묘하게 녹아있다.

▲ 추사 김정희ⓒ간송미술관

난초는 환경에 좌우됨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은은한 향기와 청초한 자태를 간직한다. 선비들은 그런 난초의 고고하고 순수한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데 추사의은 다르다. 난초의 줄기들은 섬세하고 세련되게 그려지지 않았다. 필선이 너무 단순한 나머지 무성하게 자란 잡초 같다.

또한, 이 그림에서 점들은 여기저기 들쑥날쑥 찍혀있다. 겨울에 얼어붙은 줄기일까? 이 난도 향기를 풍길 수 있을까? 그림에서 꽃 모양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줄기 대부분이 진한 먹색으로 강하게 그려졌다. 묵색의 명암대비가 뚜렷하다. 흐릿한 색의 문양들은 마치 잡초 같은 난 줄기를 둥그렇게 감싸는듯하다. 난 줄기는 일반적으로 얇고 긴 선모양으로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추사의 것은 바늘처럼 삐쭉삐쭉, 억세고 거칠다. 그런가 하면 난 아래 글자들은 난초가 뿌리 내린 땅을 연상시킨다. 윗줄에 있는 글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보면, 조민환 교수의 말대로 흙표면이 고르지 않은 언덕모양이다.

그는 이런 추사의 미학을 ‘문자 예술’이 보여주는 ‘화제의 조형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조형미가 추사의 필법에 어우러져 있다고 말한다. “온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오.” 조민환 교수가 말한 바로 이 화제에 ‘간’(干)자는 원래 아래 획이 짧은 것이지만, 위에 획보다 길게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위, 아래가 뒤바뀐 것이다. 한겨울 돌덩이처럼 단단히 얼은 얼음이 온 세상을 길쭉하게 누은 듯 뒤덮은 형태라고 그는 해석한다. 추위가 극에 달해 쇠하려는 순간, 사람의 손끝(人)에서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고 싹이 솟아날 태세다(春). 즉, 양기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모양새다. 바람(風) 속에서도 벌레들은 벌써 봄을 감지하고 땅 위로 나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봄소식에 이내 어깨춤이 절로 나 (乃), 마음이 미소 짓는다 (心).

추사의 문체 하나하나에는 그림의 까닭이 담겨있다. 그에게서는 글과 그림의 경계가 무너져 화제의 형상미가 생동한다. 보이지 않는 힘은 난의 굵은 힘이다. 어두운 땅속에 묻혀있는 ‘양’(_)의 기운이 아지랑이 되어 피어난 천심(天心)이다. 그래서 ‘천심난도’다. 난이 꽃 필 때까지, 고목에서 새싹이 날 때까지 어려운 시간 동안 자연에는 고난을 ‘아는’ 지혜가 있다. 이것이 곧 조민환 교수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전하고자 한 ‘지뢰복괘’의 숨은 뜻은 아닐까.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청춘의 고전 시즌2]-③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③

??? 일시: 2012. 4. 28.?(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Negation, 否定)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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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김성우 교수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계’와 ‘치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물음을 듣고 혹시 누군가 바로 ‘흐르는 시간’과 ‘녹아내리는 치즈’를 연상해냈다면, 그는 어쩌면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화가, 달리만큼 창조적인 상상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 치즈 한 조각,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는 치즈의 하얀 맛과 녹아 흐늘거리는 촉감, 시기와 때마다 돌고 도는 하루해와 수적으로 반복되는 1년, 2년… 이렇게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세계, 그리고 입과 손으로 당연하게 느껴지는 감각 세계를 함께 담아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간의 ‘정지’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시계), 즉 기억된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림에서 흐느적흐느적 흘러내리듯 늘어진 시계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시간 모습을 넘어선다. 생각의 단편인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마치 그림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기억되겠지만, 그때의 기억된 시간은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머지않아 내용을 잃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사막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4월 28일, 김성우 올인고전학당 소장은 이렇게 기억과 시간의 초현실적인 모습을 담은 달리의 그림을 갖고 상상마당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달리의 그림을 이성의 한계를 넘은 “능동적 상상력으로 포착한 예술”이라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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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력이 달리에게 능동적 예술의 힘이 됐을까?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무질서한 조합을 보여준다. 김성우 교수가 꼬집어내었듯 이 그림은 이성의 통제 없이 창작자 위주로 그린 것이지 사실 세계를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 밀로의 <비너스> 여신상처럼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너스 여신상은 사실미에 바탕을 두면서 아름다운 인간을 8이라는 미적 비율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역시 별의 사실적인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빛나는 별의 색감은 그러면서 가슴에 박히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인물묘사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 빛의 효과를 이용해 우리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정감을 전달한다.

반면 달리의 그림은 수학적이거나 고전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미의 맛을 보여준다. 눈감은 사람,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바다와 땅, 사막, 고정된 사각형 모양의 대지, 그 위를 역설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시계의 시간밖에 없다. 친숙한 사물들이 묘사되지만 서로 다른 맥락들이 만나 ‘시간의 운동’이라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성우 교수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적인 신비스러움을 자극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화가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달리의 그림을 두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감상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의 무의식 세계를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그림이 1931년도 작품임을 고려하면, 이때는 무의식이론의 거장 프로이트가 이미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은 때이고, 그의 정신분석학연구가 세계?역사적으로 인정받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 정권의 수립으로 정신분석 서적출판 금지처분이 아직 내리기 전이기도 하다. 즉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생과 사가 무수히 교차하는 전쟁의 폭풍이 지나기 전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천재라고 부른 달리(1904-1989), 그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적 창작력은 그럼에도 그가 지켜보았던 전쟁의 아픔과 인간사의 비극 내지는 정치적 허무와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인다. 달리는 오히려 정치적 현실과 무관한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는 “예술은 사실주의의 거울이 아니다. 그래서 창 없이도 사회를 표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꿔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생계 요구는 물론 필연이지만, 진정한 예술은 이데올로기나 상황에 좌우되는 사회적 창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사회 그 자체, 거시적으로 삶 근저에 놓인 인간사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론적, 역사적 존재이다. 단순한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난해한 예술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 예술 그 자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의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김성우 교수는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그의 말처럼 “자율성과 사회적 사실 사이”에서 생겨나는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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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1903년에 태어난 아도르노는 시대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 있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어서 미국으로 이주를 가야만 했고 전쟁이 끝나고서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하였다. 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시대와 철학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과 『미학이론』(?sthetische Theorie 1970, 미완성)을 저술하였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학이란 칸트나 헤겔이 보여준 것보다 좀 더 예술적인 것이었다. 칸트는 물리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승화시켜 창조적으로 규칙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리켜 예술적 재능이라고 하였다. 독일에 쾰른 성당이나 이탈리아에 두오모 성당은 제한된 양의 길이와 넓이를 초월한 수학적 건축미로 탄생한 것이다. 또 바티칸에 피에타상(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은 힘의 숭고미를 역학적으로 보여준다. 산과 바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건축이나 조형의 예술미는 본래의 형식을 무제약적으로 넘어서는 숭고미에 속한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미적 판단력이 자연미를 시공간적 형식을 통해 인식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념적으로 느끼고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구상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칸트의 이러한 관점은 이후 아도르노의 예술철학 형식미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예술성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이미지화이다. 아도르노의 견해로 이 미적인 능력은 조건과 한계를 넘고 넘어 또 새롭게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부정'(Negation, 否定)의 원리에 기인한다. 대상이나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예술적 창조력은 바로 이 부정의 과정, 비동일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은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가 얘기했듯 명확하게 헤겔 변증법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변증법이란 예컨대 씨앗이 새싹을 내고, 자라서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정-반-합의 방식으로 정신도 처음에 단순한 존재의 상태에서 점차 생성변화의 상태로 그리고 완성된 상태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윽고 다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말하자면 헤겔 변증법이다.

아도르노 변증법은 나와 타자,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개인과 사회, 과거와 미래 등등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차이’로 인정하는 데에 그 독창성이 있다. 각각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기존의 것에 대한 관계를 통찰함으로써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 틈을 본 것이다. 변화 자체의 조건을 수용하는 아도르노는 그래서인지 인간과 자연을 도구화, 사물화의 대상, 즉 변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합리적인 이성에 치중되거나 광적인 파시즘(나치주의)은 인간의 왜곡된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김성우 교수가 말한 바로는 “사물을 정복하거나 노예화하는 것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음악, 춤에 지나치게 동화, 동일화”되는 것은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매몰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리의 경우 그의 특이한 콧수염, 그가 보여주었던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퍼포먼스, 때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전위예술 등은 미메시스 충동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한 자연미는 달리의 추상화 중에서도 특히 <기억의 지속>에서 생생히 구현되었다. 그림 속에 시계를 비롯한 여러 요소의 조합은 아도르노의 “흩어져 있는 것들의 비폭력적인 종합(Konstellation)”을 가리킨다. 달리의 모방적 자율성은 분명 예술의 무사회성이다. 또한, 그림 속 시계의 존재와 움직임은 마치 화해를 위해서 화해에 대한 모든 기억의 흔적마저 지우는듯하다. 규정된 사회, 규정된 삶과 현실에 대한 규정적인 부정, 이러한 아도르노의 예술관이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김성우 교수는 이번 강연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와 아도르노의 미학의 연결점에서 그가 강조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러므로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맹자와 장자가 만난다면? [맹자와의 대화 8]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제선왕과 양혜왕, 맹자에게 러브콜하다

김시천: 맹자는 양나라 혜왕(惠王)을 비롯하여 제나라 선왕(宣王)과도 대화를 합니다. 맹자 당시에 혜왕이나 선왕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 등에 견줄 수 있는 강국의 왕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일개 사상가에 지나지 않는데, 맹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제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전호근: <맹자>에도 나오듯이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 대해 기대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래서 제나라에 가서 출사(出仕)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벼슬을 못하고 ‘객경’(客卿)이 됩니다. ‘경’이라면 오늘로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이지만 임시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임명된 것이죠. 제나라 선왕이 맹자를 통해 지방관에 대한 보고를 받기까지 합니다. 왕이 맹자를 상당히 신임했던 것이고, 맹자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 또한 굉장히 뻣뻣하게 굴고 말대꾸도 하고 했지만 제나라 선왕이 굉장히 착한 군왕으로 왕도정치의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연나라를 침략한 문제로 인해 갈라서게 되지만 맹자가 떠나면서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나라 선왕이 소 한 마리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잘 계발하면 백성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쉽다고 본 것입니다.

김시천: 아마도 <맹자>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이야기를 고르라면 바로 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사람이야기로 바로 거기에서 맹자는 ‘측은지심’에 관한 논의를 꺼내지요.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제사에 쓰일 소를 잡으러 가는데 소가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서는,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하는 내용이지요. 맹자는 이것을 보고 그 때 느꼈던 측은지심을 백성에게 정치로 펼치는 것이 왕도정치라고 권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선왕이 맹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나요? 초강대국의 왕이니만큼 둘 사이의 대화가 편안했을까요?

전호근: <맹자>를 보면 선왕이 솔직하게 자신은 여자를 밝히고, 재물을 탐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맹자에게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다른 왕들과는 분명 다른 면모가 있었기에 비록 맹자가 선왕을 떠나기는 했지만, 떠나면서까지 맹자는 선왕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선왕도 맹자를 붙잡으면서 만종의 봉록을 줄테니 맹자아카데미를 만들자고 제안하니까 맹자가 이를 거절하죠. 옛날에는 십만 종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만종을 받으라는 거냐며 떠났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바란 것이었죠. 맹자 당시에는 진나라보다 제나라가 훨씬 강대국이었고, 선왕은 왕도정치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김시천: 대단히 높게 평가를 했군요. 마치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전세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기대했었죠. 맹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도 선왕이 좀 다르긴 달랐나 보네요. 그럼 양혜왕의 경우는 어땠나요? <맹자>의 첫 부분에서 보듯, 처음 만난 양혜왕에게 맹자는 “하필이면 왜 이익을 말하느냐?” 하며 다짜고짜 따지지 않았습니까?

전호근: 그렇죠. 제 선왕과는 달리 양나라 혜왕에 대해서는 도덕적 평가가 높지 않습니다. 맹자는 양 혜왕에 대해 ‘불인한 군왕’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양 혜왕이 “동쪽으로는 제나라와 싸웠는데 패해서 태자가 죽었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와 전쟁을 해서 7백 리를 잃었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에 욕을 당했다. 죽은 자들을 위해 한 번 설욕해볼까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라고 하자, 맹자가 “사방 백 리만 갖고도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시천: 대단히 까칠했군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맹자를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양혜왕도 상당한 사람이었던 듯싶네요. 요즘 같은 민주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간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전호근: 더한 것은 그 아들에 대해서입니다. 양 혜왕이 죽은 뒤에 즉위한 양왕에 대해서는 최악의 평가를 합니다.

김시천: 도대체 뭐라 말했기에 최악이라고 하시나요?

전호근: 이렇게 말합니다. 멀리서 보니 임금 같지도 않고, 가까이서 보니 왕다운 위엄도 없는데 그런 자가 만나자마자 졸지에 허튼 소리부터 하는구나 하며 최악의 평가를 내립니다. 양왕은 아마도 맹자 한 번 박대한 죄로 이만큼 심한 대접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맹자>에 그렇게 기록된 죄로 2,000년이 훨씬 넘도록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그에 비하면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평가한 것은 맹자로서는 최대의 평가였습니다.

 

맹자와 장자가 만났다면?

김시천: 그렇군요. 헌데 <맹자>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자주 듭니다. 철학사에서는 유가와 도가가 늘 논쟁했고 서로 각축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사실 거의 동시대를 살았고 살던 곳도 서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장자>와 <맹자>에는 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이것이 참으로 철학사의 수수께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호근: 맹자는 생몰연대가 분명합니다. 또한 장자는 <사기열전>의 ‘노장열전’에 보면 제나라 선왕과 양나라 혜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동시대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장자> ‘천하’ 편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저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동시대인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김시천: 하하하! 역시 선생님다운 논법이에요. 같은 시대를 살았고 바로 이웃 지방에 살았는데 서로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분명하다’고요? 참으로 맹자식의 언변입니다. 자, 그 이유를 들어야겠네요!

전호근: 맹자의 세상은 ‘천하’(天下)이고, 장자의 세상은 ‘강호’(江湖)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노는 물이 다른 거죠. 맹자가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를 다스려서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죠. 이때 ‘천하’는 질서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하는 당시 중국의 공간이고, 장자는 그런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장자 식의 표현대로 ‘방외지사’(方外之士)인 것이죠. 그런 식으로 노는 물이 다르니까 서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없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또 당시에는 장자가 <장자>라는 책을 쓰고, 맹자가 <맹자>라는 책을 써서 서로 바꿔볼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죠.

김시천: 그것 참 그럴 듯하네요.

전호근: <논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있었던 책이었죠. 말씀으로 기억되어 있다가 기록된 책이었죠. <장자>나 <맹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당시 텍스트가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가를 이해하면 이렇게 서로 비판하고, 이야기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맹자와 장자가 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가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초절정의 고수, ‘공자’같은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방내’(方內)와 ‘방외’를 두루 섭렵하면서 말이죠.

김시천: 공자가 방내와 방외를 두루 섭력했다는 것은 선문답이네요! 물론 저도 그 점은 동의합니다. 적어도 한 제국 이후의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렇게 생각되는 인물이었죠. 그러나 맹자와 장자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선생님 말씀처럼 텍스트의 형태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호근: 물론 그것은 가능한 한 가지 추정의 방식이긴 하죠.

김시천: 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철학사’라는 것을 통해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을 배우기에 공자, 노자, 맹자, 장자는 거의 대등한 위상과 의미를 갖는 것처럼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장자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장자라는 인물은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생존 당시에는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오히려 그가 이름을 남긴 것은 재상까지 지낸 그의 친구 혜시(惠施)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이것은 그의 책 <장자>와는 별 개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맹자는 생존 당시 천하의 강대국들의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살았던 풍운아였다면, 장자는 한적한 시골에서 그다지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여생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가끔 재상 친구 혜시와 벗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맹자의 가슴 속에 천하를 호령하는 기개가 담겨 있었듯이 장자의 가슴 속에도 우주를 꿰뚫는 도(道)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결국 그 도는 문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겠죠.

전호근: 그 또한 충분히 그럴듯한 얘기로군요!

(계속 이어집니다)

 

 

공자와 맹자는 호랑이 선생님? [맹자와의 대화 7]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부드러운 공자, 성깔 있는 맹자?

김시천: 지금까지는 <맹자>와 관련된 역사와 주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맹자>의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논어>에서는 당시의 유력한 정치가들 즉 제후(諸侯)들이 등장하더라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공자의 독무대이거나 공자의 제자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태반을 이룹니다.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 지금도 쓰이는 말로, ‘공자 문하의 뛰어난 현인 10인’(孔門十哲)이나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72인’(72제자) 혹은 그의 제자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삼 천 여 명의 제자’(三千弟子)와 같은 표현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맹자>의 첫 편은 ‘양혜왕’입니다. 그는 당시 제(齊) 나라의 위왕(威王), 선왕(宣王)과 같이 천하의 이름을 떨친 중흥 군주였습니다. <맹자>는 이런 당시의 쟁쟁한 인물들과 만나 대화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등의 대통령과 두루 만나 대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늘어놓지요. 간 큰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논어>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에서 그런 점은 아주 특징적입니다. 공자의 경우는 직접적인 논쟁이 없었죠. 다만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피한 경우는 종종 있어요. 어쩌면 <논어>에서는 공자와 상대가 될 만한 논객이 없었다고 봐야 하겠죠. <장자>에서는 그런 논쟁이 대단히 많이 나오죠. 특히 <장자>에는 그의 친구이자 논쟁의 상대였던 혜시(惠施)라는 인물도 있었죠.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김시천: 오죽했으면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왜 그렇게 논쟁을 좋아하느냐고 따지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맹자는 ‘부득이’(不得已) 해서 그렇다고 바로 부인하기는 했지만요. 바로 그 점이 또 <논어>와 다른 점인 듯합니다. <맹자>에서는 ‘만장’이나 ‘공손추’와 같이 제자들의 이름이 편명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논어>의 경우도 그렇기는 하지만, <논어>는 첫 구절을 따서 이름을 지었기에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논어>와 <맹자>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호근: <논어>에는 제자들끼리 토론한 편이 따로 있어요. ‘자장’ 편이 바로 그것이죠. 또 ‘자하 왈’ 이라거나 ‘자유 왈’처럼 공자의 제자가 혼자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제자들끼리 논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자들이 공자와 논쟁하는 부분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어요. 그에 비하면 맹자는 여러 사람과 논쟁을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과도 논쟁이 있었어요. 이 점은 공자와 아주 다른 점이죠.

<논어>에도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바로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자로(子路)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로의 경우에도 그가 공자와 대등한 대화자로서 논쟁한다기보다는 공자에게 무턱대고 대들다가 심하게 욕을 먹는 장면들이죠.

 

호랑이 선생님 공자, 논쟁의 달인 맹자

김시천: 자로가 심하게 당한 이야기 하나 들려주시지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욕을 먹었나요?

 

전호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로가 “위(衛) 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초빙하고자 한다면, 가셔서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 잡겠다”고 답합니다. 그때 자로가 “참 답답한 선생님! 꼭 이렇다니까!” 하며 대꾸를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야비하구나, 자로야!” 라고 나무랍니다. 아마도 공자가 직접 저술했다면 더욱 리얼한 표현을 했을 텐데, <논어>가 공자의 제자의 제자가 저술한 것이어서 전반적으로 온유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자도 상당히 성격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봅니다.

 

김시천: 매우 온화한 스승의 상으로만 알려진 공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군요! 정말 공자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나요?

 

전호근: 미생고라는 사람이 매우 정직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빌리러 오자 이웃에게 가서 꾸어서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를 일러 “부정직하다”고 비난합니다. 자기에게 없으면 그만이지 이웃에게 꾸어서 빌려주는 것은 은혜를 훔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죠. ‘월권’과 같은 것에 굉장히 예민했던 공자였던 것이죠.

이런 공자의 한 성격이 자로와의 대화에서 상당 부분 드러납니다. 공자가 온유하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는 하지만 자공이 잘난 체를 하자 “안회와 너 둘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며 비교하는 아주 좋지 않은 교육방법도 취했습니다.

 

김시천: 자로가 상당히 당황했겠네요. 실제로 <논어>에는 자로가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논어>는 그래도 <맹자>나 다른 문헌들에 비해 논쟁을 찾아보기 어렵죠. 왜 그런 것일까요?

 

전호근: 기록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공자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었죠. 유자나 증자의 경우에도 <논어>의 기록자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공자의 제자들 위상까지 같이 높이게 된 것이죠. 만약 <맹자>도 맹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다면 만장이나 공손추가 같이 높아지는 텍스트로 <맹자>가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 <맹자>는 맹자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런데 제가였던 공손추가 은근히 논쟁을 좋아하는 맹자를 비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맹자의 말은 참으로 대범하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의 공저자라고도 볼 수 있는 제자 공손추가 “밖에서 선생님을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유가에서는 본래 논쟁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공손추의 말에 맹자가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바로 요임금, 순임금을 들어가며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맹자> 속의 자로, 악정자

전호근: 그래서 <맹자>의 대화는 대체로 승부가 있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임금들과의 대화에서도 여지없이 바로 말을 잘라버리는 것이 맹자입니다. 나라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제나라 환공, 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를 닮고 싶다고 한 왕에게 맹자는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잘라버립니다.

<맹자>는 논쟁에서 승부가 갈리는 방식으로 대화가 전개되기에, 상대적으로 <논어>에 비해 제자들이 부각되기는 힘든 문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스승의 상을 부각시키는 면모가 강한 <논어>와 달리, <맹자>는 논쟁의 승패를 염두에 둔 구성이기에 제자가 부각되기 어려웠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갑니다.

공자의 제가 가운데는 벼슬을 한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맹자의 제자들은 어떤가요?

 

전호근: 맹자의 제자 중에는 악정자(樂正子) 정도가 벼슬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외는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김시천: 아하! 그 악정자 말씀이로군요. 공자에게 늘 면박당했던 자로처럼 맹자에게 면박을 당했던 그가 벼슬을 했었군요.

맹자가 제 나라에 있을 때 악정자가 자오(子敖)와 함께 제 나라게 갔다가 맹자에게 인사를 가죠. 그런데 맹자는 악정자를 보자마자 “그대로 나를 찾아왔나?” 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왜 그러시냐고 악정자가 되묻자 맹자는 언제 왔느냐고 묻고 악정자는 어제 왔다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자 맹자는 어제 왔다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따집니다. 그제야 악정자는 묵을 곳을 정하지 못해 그렇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한 성깔하며 이렇게 말하지요. “그대는 그렇게 배웠는가? 묵을 곳을 정한 다음에 어른을 찾아뵌다고 배웠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맹자는 무척이나 인간적인 면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맹자의 제자 가운데는 벼슬에 나아간 사람이 별로 없군요. 이는 공자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군요.

 

전호근: 공자의 제자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재상까지 했던 자공이 유명하죠. <사기열전>의 ‘중니열전’에는 자공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자학당의 든든한 후원자기이도 했었죠. 그런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공자학당은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죠. 맹자에 이어지기까지 공자학당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이 더 알려졌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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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 / 자로상

(계속 이어집니다)

 

인간의 본성,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맹자와의 대화 6]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맹자의 성(性), 당근과 채찍을 거부하다!

 

김시천: 자, 이 지점에서 다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먼저 <맹자>에서 인간 본성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은 맹자가 고자(告子)와 한 논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당시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매우 다양했었나요?

 

전호근: <맹자>에 보면 당시의 인간 본성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모두 다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는, <맹자>가 고자라는 사람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를 모두 말하게 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 가공으로 만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자의 주장이 계속 바뀐단 말이죠.

 

김시천: 어떤 학자들은 맹자와 인간 본성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에서 고자가 도가(道家)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고자가 인간을 생물학적 본성에 바탕하여 이해하고 있다면, 맹자는 이념적이고 당위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요. 전 이 점이 오해하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서구적 개념인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의 구도를 들이대면서, 영국의 철학자 무어(G. E. Moore)가 말하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한 논변의 대표가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맹자>에서 고자가 대변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는 어떤 것인가요?

 

전호근: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고자’ 상편에서 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 물이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흐르니, 인간의 본성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자 맹자가 그것은 틀렸다고 하면서, “물은 참으로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지만 상하(上下)의 구분도 없는가?” 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맹자가 반박하는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맹자의 반박이 논리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똑같은 얘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논리적으로 완전한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고자가 물을 비유로 들었기 때문에 맹자가 같은 비유로 받아친 것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김시천: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사실 그 부분에서 맹자는 이렇게 받아치지요. “지금 손으로 물을 탁하고 쳐서 튀게 하면 그렇게 튄 물이 우리 이마에까지 오르게 할 수 있고, 또 흐르는 물을 역행시키면 산으로 오르게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여기서 ‘세’(勢)를 말합니다. 이 ‘세’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타자의 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맹자>가 구분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본성의 선악이라기보다 사실은 그 성(性)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당근과 채찍으로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 맹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똑같이 헌혈을 한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것을 맹자는 ‘본성’이라고 보았다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헌혈을 하는 행동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 맹자의 본지(本旨)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을 파고 든 것이 법가(法家)의 생각 아닌가요? 인간은 당근으로 유인할 수 있고 또 채찍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형벌’(刑罰)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맹자>는 바로 그러한 힘에 의존하는 권력의 부당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왕도정치는 곧 측은지심의 발현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겠죠!

 

생장하여 열매 맺는 뿌리가 바로 ‘성’이다

김시천: 그 외에 다른 구분도 있었지요? 사람을 구분하는 논의도?

 

전호근: 그렇죠! 고자는 또, “어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어떤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맹자가 “모든”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못 박아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하고 어떤 사람은 선하다면 악한 사람은 배제하고 선한 사람하고만 살아야 되겠지요. ‘악의 축’이 따로 있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죠. 또 고자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고자가 말합니다. 그러자 맹자가 또 비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냥 선하다,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선설’을 주장하면 인간의 ‘악행’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잖아요? 그것이 문제인데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재질’(才質)의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라는 글자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재才’는 땅 속에 숨어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잠재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성’인 것입니다.

 

김시천: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아이린 블룸이라는 미국의 학자는 <맹자>의 ‘성’ 개념이 식물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맹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도 생물학적이라는 말이지요. 더 나아가 사라 알란이라는 영국의 갑골문학자는 고대 중국에 식물과 물(水)의 은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이를 두고 ‘뿌리 은유’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시게히사 쿠리야마라는 학자는 이런 점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 출현한 한의학의 독특성이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인간을 살아서 움직이는 나무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환자를 치유하는 의사는 정원사나 농부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에 씨앗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은 재밌는 일 같습니다. 그것은 생장하여 열매를 맺는 그 무엇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본성과 재질을 논하게 되면, 그 이후 다양한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나요?

 

전호근: 그렇죠. 맹자의 본성론을 ‘재질’ 그 자체로만 보아서 비판을 하게 되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후에 송(宋) 나라 시대에 인간의 본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나누어 본 것이 이에 해당하죠. 물론 우리는 맹자가 ‘기질지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죠. 왜냐하면 철학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형성되지 않은 개념으로 맹자를 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대의 학자들은 그런 오류들을 간혹 저지릅니다. 인간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성’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행은 기질의 잘못이지 본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송대 학자들이 이끌어 낸 결론이었죠!

 

김시천: 그래도 송대 학자들은 ‘성선설’을 지키고자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전호근: 어쨌든 이런 식으로 <맹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여덟 가지 입장을 고자나 그의 제자의 입을 통해 나열하며, 하나 하나 맹자가 비판을 합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한 맹자의 ‘성선설’이 논리적으로 입증이 된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맹자>를 따라가다 보면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진화론, 우생학 그리고 <순자>의 성악설

전호근: 오히려 저는 수많은 악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시대에 맹자가 왜 그처럼 끝까지 ‘성선설’을 놓치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맹자는 그런 점에서는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개인이 처한 시대에 대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이 선하다는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견지했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김시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논의를 하더라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전 오늘날 유행하는 진화론 담론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 신진화론의 선두 주자인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차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로 이해된 사회진화론과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차드 도킨스 자신은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발언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용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네거티브’입니다. 분명 바꾸거나 극복해야 할 어떤 실체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맹자>에게는 그런 방식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 포지티브라는 점, 그것이 맹자의 수사학이 갖고 있는 위대함이라고 봅니다. 절대로 적이 내 논의를 써먹을 수 없도록 한다는 점이 맹자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선설’이라는 담론이고,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를 살린 위대한 학자가 맹자라고 봅니다.

 

전호근: 진화론이나 사회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짝짓기’로 귀결되는데, 인간이 자기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고 얘기되는 것이죠.

제가 읽었던 어떤 프랑스 소설에서는 한 남자가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단 한 명도 자기의 친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식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가르치고, 사랑으로 돌보면서 죽을 때에도 전 재산을 다 물려주고 갑니다. 윌슨과 같은 진화론이나 짝짓기 논리에서 본다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죠.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나라의 전화(田和)는 자기의 집에 180명의 후궁과 부하들에게서 낳은 자식까지 두었답니다. 그래도 모두 자기의 친자식처럼 거두어 살고 나주에 나라까지 다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것은 자식이고 아니고 간에 모조리 권력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시천: 다시 <순자>로 돌아가 보면, 순자가 성선설을 비판하며 성악설로 간 것을 저는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를 근대 서구의 토마스 홉스와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홉스는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는 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리바이어던>을 통해 전제군주를 옹호합니다. 마찬가지로 순자도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강력한 군주의 역할을 강화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똑같이 ‘성악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 여기서 성선과 성악 가운데 어느 이론이 맞느냐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순자>가 성악설을 편 이후 한 나라 때에는 희한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불길한 날에 태어난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영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적으로 강화될 때 그런 행위는 더욱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미국에서 우생학이 유행하며 수많은 가난한 남성들에게 강제로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수술을 했던 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역사적 규모는 다르지만 사건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전 그래서 철학자의 수사에서도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전략이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사진자료] 순자 / 리바이어던

(계속 이어집니다)

공자의 두 얼굴: 정통 , 이통 [맹자와의 대화 5]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성호 이익, <순자>는 또 다른 정통이다!

김시천: 선생님은 분명 <맹자>가 <순자>에 비해 공자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보시는 듯 합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전호근: 텍스트를 기준으로 보면 <순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논어>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여러 갈래로 해석이 됩니다. 흔히 고주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논어집해>에 보면 ‘時習’을 “때에 맞추어 익힌다”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주희는 “無時不習” 즉 “어느 때이든 익히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합니다. 또 <논어>는 ‘학이’(學而) 편으로 시작하여 ‘요왈’(堯曰) 편으로 끝나고, <순자>는 ‘권학’(勸學) 편에서 시작하여 ‘요문’(堯問) 편으로 끝납니다.

이를 보면 <순자>는 완연하게 <논어> 텍스트를 흉내 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앞의 ‘권학’ 편에 나오는 “군자 왈~”의 군자(君子)도 공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배움은 잠시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희의 해석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순자도 공자의 일부를 가져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공자 이후의 유가 전통을 순자로 보면 왕충, 왕안석으로 이어져서 띄엄띄엄 명맥을 잇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비정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유학자 성호 이익은 ‘이통’(異統)이라 표현하면서, 순자를 정통은 아니지만 ‘다른’ 정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시천: 그것 참 재미있는 표현이로군요! ‘이통’ 즉 또 다른 정통이다. 그러니까 이단이 아니라 ‘이통’이라는 말이군요. 성호 이익의 독창성이 이런 데에서도 드러나는군요. 이제 우리는 정통과 이단이란 배타적 도식보다 정통과 이통이라는 성호 이익 식의 구분법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전호근: 그렇지만 <맹자>의 유가 전통은 한유, 왕안석, 정이천, 장재 등 연속적으로 죽 이어지기 때문에 철학사를 기술할 때는 <맹자>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한결 더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공맹’(孔孟)은 맹자에 의해 구상된 것이기는 했지만, 순자에 비해 이렇게 일컫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고, 우리나라 학술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김시천: 분명 전국시대 후기는 순자의 학문 즉 순자 계통의 유가가 널리 유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하지만 후한(後漢) 시대로 넘어가면서 <순자>에 대한 논의도 잠잠해 지게 됩니다. 왕충이나 왕안석과 같은 특이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순자>는 그다지 각광받는 유학자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물론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주된 요인이겠지만요. 그런데 현대 중국에 들어와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서 <순자>가 다시 부상하기도 합니다. <한비자>와 함께 사제가 나란히 진보적인 유물론자로 다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자>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는 것은 조선조의 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조선 유학에서 <한비자>나 <순자>는 별 가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하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른바 20세기의 ‘철학사의 시대’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공자 이후 맹자-순자를 대등한 유가의 두 가지 계보로 본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 등으로 양자를 대비시켜가며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양자를 대등하게 바라보는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20세기의 시각은 과거와는 다른 아주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현대 중국의 공자 속에 가려진 순자의 얼굴

김시천: 공자 사후에 유가가 다양한 분기를 이루었을 텐데, 순학(荀學) 계열이 한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요?

 

전호근: 진(秦) 나라 이후에도 진 나라가 만들어 놓은 구조가 남아 있었겠죠. 법가 사상이 가진 진보성은 군현제나 법의 공정성을 확보한 점, 수구 봉건 귀족들의 척결 등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점은 너무나 인민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적대적인 성격 때문에 큰 재앙에 부딪혀 망하고 만 것이었죠.

한 나라의 고조 유방(劉邦)은 말로는 진나라의 법규를 모두 폐지할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는 진 나라의 통치방식을 한동안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협서율’ 같은 법률, 즉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만 해도 처벌하는 법률도 상당 기간 존속하다 폐지합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들의 텍스트를 만들어놓은 후에 폐지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순자>나 법가류의 은밀한 통치방식을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활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김시천: 그렇습니다. 사실 한 나라가 진 나라의 통치방식을 모두 폐지했다고 하지만,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 나라는 진 나라의 법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합니다. 물론 한 문제(文帝)처럼 아주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실제 한 나라 초기는 황제권을 강화해 나아가는 역사가 대세였죠. 그러다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면 ‘원심정죄’(原心定罪)라는 법 이론까지 마련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뜻이죠. 마음속으로 역심(逆心)을 품어도 죄가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크릴은 한 나라 초기에는 살아남기 위해 학자들이 유가나 법가이면서 ‘도가’(道家)인 척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무제 이후 유가가 득세를 하게 되니까 그 이후에는 법가와 도가가 유가인척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하고요. 우리가 아는 철학사는 사실 거의 소설에 가까운 논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호근: 현대 중국에서도 한 나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중국 지식인들은 ‘공맹’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추세입니다. 5?4운동 때만 하더라도 공자는 봉건의 유물로 중국의 근대를 방해하는 인물로 보았죠. 당시 노신을 비롯해 꽤 타당한 비판을 받았었죠.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에는 지주계통을 위한 논리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었죠. 문화혁명 때에는 인텔리를 비롯해 ‘공맹’은 오곡(五穀)이 뭔지도 모르고 노동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비판 받았습니다.

그러다 난데없이 80년대 들어서 유학부흥의 바람이 불고, 2008년 북경올림픽을 기점으로 장예모 감독이 3천 명의 공자 제자들을 내세워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루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공자 부활을 내세우다 2010년에는 주로 조폭 역할을 했던 배우 주윤발을 내세워 활도 쏘고 하는 강력한 공자를 영화로 찍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중국의 내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1년 1월 11일 11시에는 드디어 천안문 광장에 9.5미터의 공자 동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맞은편에 세워진 모택동은 6미터의 높이였습니다. 어떤 컨셉으로 공자 동상이 만들어졌는가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중국예술문화원장이라는 사람이 “기세등등하게 만들었다”고 답을 하더군요. 이러한 공자는 “순자 식의 공자”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공자라고 이름 붙인다고 똑같은 공자는 아니라는 것이죠.

 

(계속 이어집니다)

사진설명 : 성호 이익 / 성호 이익 묘소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책익는 마을 회원 / 원진호내과 원장)

 

얼마 전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의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읽었다.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 분 때문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요즘 책익는 마을에서 <노자도덕경> 공부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강의자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하여 권하기에 뜻에 따라 행동에 옮긴다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천수를 누린 중국 철학자 펑유란

펑유란은 1895년에 태어나서 1990년에 사망하였다. 96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 육서로 신리학의 체계를 세웠다.’

삼사와 육서는 이 분의 저작물로 삼사는 <중국철학소사>, <중국철학사>, <중국철학사신편>이고, 육서는 36년에서 48년 동안의 항일전쟁시기에 쓴 정원육서를 말한다. 삼사는 철학사 학자로서 “따라서 설명하는 것(照着講)” 이었고 정원육서는 철학자로서 “이어서 설명하는 것(接着講)”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신리학은 펑유란의 사상체계를 통칭하는 것이라 한다.

펑유란은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학과정 시절에 논리학에 흥미를 갖으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과 특히 철학은 인기도 없고 돈도 안 되는 학문인가 보다. 베이징대학 입시원서를 받는 안내원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 걸 보면 말이다. 어떻든 그는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1915년에 입학하고 1919년에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유학을 가 죤 듀이의 문하에서 철학을 연구한다.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

펑유란의 초창기 철학적 고민의 출발은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였다. 중국이 왜 서양보다 뒤쳐졌는가 하면 당시 보통의 논리는 이렇다. 우선은 중국이 서양에 비해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졌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았고 탐구하고 극복할 과제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행복은 맘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자연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을 극복하고 개조하는 분야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중국이 당시에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도 정신문명을 중시하는 태도가 있고 동양에서도 물질문명을 중시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본성은 본디 같은 것이고 사상도 모두 같다고 펑유란은 보고 있다. 이 논증을 그는 그의 박사논문에 쓰고 나중에 <인생철학>이라는 책에 싣는다. 이 책에서 그는 세상의 주요 사상들을 개괄하면서 총 열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천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고 어느 쪽이 좋고 나쁜가, 어느 쪽을 더 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유파들을 나누었다. 이 분류에서 동서양 사상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라고 본다. 서양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새 것인 사회로 진화되면서 물질문명적인 문화가 주도적인 것이 되고, 중국은 헌 것에 머물면서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문명이 주도적인 체 남아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근대화가 되면 중국에도 옛 것과 다른 근대철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중국철학사의 구분: 자학(子學) 시대와 경학(經學) 시대

근대화라는 것이 서구를 따라 가는 것이긴 하지만 똑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반봉건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고민하였고, 중국 철학사를 집필하면서 옛것에서 새것을 발견하고 중국고유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유심론자였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혁명이후 많은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깊은 신뢰를 얻는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자학(子學)시대와 경학(經學)시대로 나누었다. 춘추전국시대인 子學時代는 지존이 없이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평등하게 각 학파가 논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이렇게 백가쟁명의 시대가 되었던 사회적 배경은 당시 통치를 담당했던 귀족이 쇠락하고 원래 있던 사회규범이 붕괴하고(禮崩樂壞), 사회제도가 해체된다.(天下無道) 당시 귀족을 위해 봉사했던 지식인 무리들이 원래의 자리를 잃고 민간으로 흘러든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최하층을 이루었지만 사민(四民)의 으뜸이 된다.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고 팔면서 생계를 도모하고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것이 발전하여 학파를 이루고 백가쟁명의 국면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경학시대는 유교가 지존이 되고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면서 경직된 사회체제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철학이 계승해야할 시대로 자학시대를 꼽았다.

 

신리학: 보편과 특수

그의 철학체계인 신리학은 보편과 특수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리’(理)가 사물 속에 있다는 것, 즉 보편이 특수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사물의 보편과 그 사물은 있으면서 같이 있고 없으면 같이 없는 것이다. 사물의 특수는 감각의 대상이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사물의 보편은 사유의 대상이며 실험실 속에서 그런 보편을 추상해 낼 수 없다. 이를 개념화 하면 ‘구체적 보편’이라 한다. 구체적 보편의 내포는 ‘리’이고 외연은 ‘사물’이다. 리와 사물, 내포와 외연은 원래 함께 있다. 사람의 사유가 그것들을 분석할 때 분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 두 분야를 헷갈려 해서 이의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란 사람의 사유가 추상의 방법을 통해 사물로부터 분석해 낸 것일 뿐이고 굳이 존재의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리’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리는 사물이고 사물은 곧 리라고 할 수 있다.

 

항일 전쟁시기 시난연합대학의 교편생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5.4운동을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1923년에 중국으로 되돌아와 허난성 중저우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자신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찾아 베이징 옌징 대학으로 옮기고 28년 칭화 대학으로 옮겨 대학의 개혁에 참여 한다. 33년 휴식년에는 유럽을 여행하고 당시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방문한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쟁시기에 접어들고 그는 38년부터 45년까지 피난처인 시난연합 대학에서 교편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국민당 정부 하에 있었는데 갈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항일전쟁과 관련하여 대학과 학생이 정부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진다. 44년 12월1일에는 급기야 수류탄 피폭에 의해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펑유란은 교직을 맡고 있는 위치에서 당시 권위를 갖고 있는 교수회의를 통해 이 사태를 수습한다. 그는 강경파와 보수파의 주장을 둘 다 만족시키지 못했으나 그래도 파국을 막은 것으로 스스로 자위를 한다.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9월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이 혁명의 혼란 속에 빠져 들자 그의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에 눌러 있기를 권고한다. 그는 왕찬의 등부루에 나오는 문구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雖信美而非吾土ㅁ, 夫胡可以久留.)를 인용하며 48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펑유란은 자신은 반동중국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중국 공산정권하에서 철학자로 살아가기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는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사상개조를 해 나간다. 이 점에 있어 자서전에는 매우 솔직한 자기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주역>의 건괘 문언전의 “글을 지어 진실함을 세운다”(修辭立基誠.)를 인용하면서 지식인의 글쓰기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정녕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73년 林彪비판운동에서 공자비판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행동이 진실된 대중노선에 따른 것인지 군중에 영합하기 위해서 행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 선(線)은 진실함(誠)과 거짓(僞)에 의해 나뉠 것인데 당시 자신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일보 전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지 못한 점, 자신이 더 받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기쁜 마음도 있어 이는 군중에 영합한 측면이 있었다고 진솔하게 이야기 한다.

52년 중국당국이 대학의 모든 철학과를 없애고 베이징대학만 남겨두는 조치를 취하자 베이징대학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서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는데 홍위병들의 지식인 탄압으로 시련을 겪는다. 책에는 이 상황이 담담히 서술되어 있지만 문화대혁명의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상당히 심한 극좌적 횡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살아나는 중국을 보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펑유란의 학문적 자세

그의 학문적 자세는 어떠했을까? 그는 시경에 나오는 말 “주가 비록 오랜 나라이지만 그 사명은 새롭다”(周雖舊邦,其命維新.) 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오래된 나라의 정체성과 개성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사명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이러했기에 보수파와 진보파 둘 사이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후배 학자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남길까? 그는 “불이 옮겨 가니 꺼질 줄을 모른다”(火傳也, 不知其盡也.) 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한 지식은 진리의 불꽃이라 그 연료를 끊임없이 대 주어야 계속 연소되고 이어질 수 있다. 그 역할을 한 이들이 철학자요 시인, 문학가, 예술가, 학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료삼아 피를 토하듯이 저작물들을 남겨 왔고 또한 본인도 그렇게 하려 했다고 한다. 후대에 남기는 저작물을 쓰는 각오는 이러 해야 한다. “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더 뽑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촛농이 마른다.” 즉 누에는 생명을 바쳐 실을 토해내고 초는 목숨을 다하여 빛을 내는 것처럼 분투하며 살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위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를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책을 덮으며 책의 겉면에 있는 펑유란의 초상화를 들여다본다. 청말 민국 초에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중국공산혁명을 보았으며 그 정권하에서 유심론 철학자로 살아왔던 그. 그의 백년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 사람은 모두 같다는 평등의식, 여행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학자로서의 성찰과 분투, 삶에 대한 소박함, 낙관성 그리고 솔직함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 적응하는 현실주의와 타협주의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언행에서 중국 중심의 문화주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수차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지조 있는 지식인의 삶을 포기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이영희 선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알아 가는 것은 내게는 매우 유익하다. 반면교사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이다. 가슴에 듬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을 간직한 채 책을 책장에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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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펑유란 지음,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관한 원진호(책익는 마을 회원/원진호내과원장) 님의 글입니다.

 

맹자, 공자의 제자 중궁을 ‘따’ 시키다! [맹자와의 대화 4]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오늘날의 <맹자> 읽기

김시천: 그럼 이야기를 바꾸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자>나 <장자>, <한비자>나 <묵자>와 같은 고전들과 비교할 때 <맹자>는 다소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백가의 경우 설명이나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읽기가 어려운데, <맹자>는 번역만 잘 되어 있으면 잘 읽혀지거든요. 그래서 <맹자>는 연구서보다 원저가 더 많이 읽혀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가장 잘 읽혀지는 책이면서, 실제로 <맹자>가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전호근: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맹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안병주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맹자> ‘공손추’편에 보면 “일은 옛 사람의 절반만 하고, 효과는 반드시 옛사람보다 두 배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일컬어 한 말이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만큼 열심히 하지 않고 적당히만 해도 지금의 두 배로 평가받는 시대라는 뜻이었죠. 그러므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안병주 선생님은 그것을 <맹자>같은 고전을 읽는 것에 비교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웬만큼 맹자를 읽고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데, 요즘 같으면 맹자를 읽는 사람이 없어서 그 절반만 읽어도 두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요즘도 <맹자>를 읽다보면 안병주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김시천: 구태여 연구서를 보지 않아도 잘 읽힌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맹자>에 대한 연구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해설이 필요하지 않으니 연구서를 들추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서구 학계에서 최근 <맹자> 연구가 활발한 것에 비하면, 이는 맞는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최근 <맹자>와 관련된 연구 성과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만한 성취가 있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전호근: 요즘 맹자의 ‘혁명론’을 떠올릴 때에는 성대출판부에서 나온 <유교의 민본사상>이란 책을 꼽고 싶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맹자 혁명론과 관련된 ‘민본사상’(民本思想)이 충분히 다루어졌고, 그만큼 영향도 끼쳤다고 보기 때문에 꼽고 싶습니다. 또 몇 년전에 김시천 선생이 서평을 썼던 이혜경 선생님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도 꼽고 싶어요. 물론 이혜경 선생님의 책은 저와 <맹자>를 보는 관점은 달라요. 보시다시피 저의 입장에서 <맹자>는 보수주의자로 보이지 않거든요. 비록 견해나 관점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 책이 갖는 가치는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그럼 번역서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가장 추천하고 싶은 번역서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전호근: 번역서로는 이을호 선생님의 <한글 맹자>, 박경환 선생님의 <맹자>, 성백효 선생님의 <맹자>를 꼽을 수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을호 선생님의 책은 이미 1970년대에 출간된 것이어서 최근에 나온 책들과 똑같은 점수를 주어서는 안 되겠죠. 다산연구자로서의 이을호 선생님의 다산의 <맹자요의>에 관한 견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의미가 있었죠. 성백효 선생님의 책은 전통 한학자로서 한 글자, 한 글자 축자번역을 한 것으로는 오역이 가장 적습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박경환 선생님은 연구자로서의 깊이가 있는 맹자 번역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성악설, <맹자>를 비판하다

김시천: 이제 본격적으로 <맹자>의 사상적인 부분을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비하여 맹자의 ‘성선설’을 말합니다. 분명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맹자의 ‘성선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논의합니다. 하지만 맹자와 순자가 토론을 벌인 적은 없었지요. 물론 이것은 철학사를 서술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두 사상가가 마치 토론을 한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오히려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맹자> 텍스트를 읽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맹자>는 자기와 동시대이거나 그 앞 세대의 사상과 대결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자를 서술하면서 맹자와의 차별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맹자를 이야기하면서 순자와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성을 고려하면서 순수하게 <맹자> 주석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호근: <맹자>는 한(漢) 나라 때까지는 유가로서 제자(諸子)에 속합니다. 그러다가 조기가 주석서를 내면서 재평가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순자와의 비교도 중요합니다. 순자가 <비십이자>(非十二子) 편을 통해 공자를 제외한 모든 학자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맹자가 순자와 토론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맹자의 견해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순자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순자의 비판이 맹자 이후의 학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그 지점은 분명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전호근: 중요한 것은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는 점입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 철학사 속에서 확인된 것이 순자의 비판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그 이상의 전거가 나와야 뒤집을 수 있는 것이죠. 비록 맹자의 ‘성선설’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100% 입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맹자>에도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죠.

 

김시천: 물론입니다. <맹자>의 언어는 분명 일면 신비주의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그가 말하는 ‘호연지지’(浩然之氣)에 대한 장황한 수사는 신비한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장엄한 이야기를 보면, 그런 것을 꼭 신비주의적이라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범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분명, 일종의 ‘호연지기’와 같은 하늘과 땅을 꽤 채울만한 기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전호근: 오늘날 우리가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가장 중시하는 <중용>(中庸)은 대체로 자사(子思)의 저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자사라는 인물은 <맹자>와 더불어 ‘사맹학파’(思孟學派)라고 합니다. 그런데 순자는 이 둘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1993년 중국의 곽점(郭店) 지역에서 발굴된 초간(楚簡) 즉 대나무 쪽으로 만들어진 문서 가운데 ‘성자명출’(性自命出)과 같은 문헌에도 부분적으로 상당히 일치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없는 얘기를 짜 맞춘 듯한 흔적이 있다고 의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발굴된 문헌과 순자가 이야기 한 것, 자사와 맹자가 주장한 것들이 상당히 아귀가 맞는다고 봅니다. 자사와 맹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또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고증을 통하면 맹자가 자사에게 직접 배웠다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자사가 죽은 지 60년 후에 맹자가 등장하므로 자사와 맹자가 같은 시대에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사와 맹자의 관련설, <중용>에 나오는 내용이 <맹자>에 그대로 인용된다는 점 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김시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전호근: <중용>에는 “진실성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가 <맹자>에서는 “진실성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誠者人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지’(誠之)가 ‘사성’(思誠)으로 바뀌어 있지만, 글자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맹학파라는 것은 실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순자의 맹자 비판이 맹자를 계승한 후학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김시천: 어쩌면 그 지점에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고 봅니다. 당시의 법가 사상가 가운데 이름을 떨쳤던 한비자(韓非子) 그리고 진(秦)의 재상이 되어 천하를 통일하는데 일조했던 이사(李斯)가 순자의 문하에서 나올 수 있었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엄밀히 보면 한비자와 이사 같은 이들은 순자의 유학(儒學)은 계승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정치의 수단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순자를 잇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유가의 도통론(道統論)과 <맹자>

김시천: 그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분기점은 언제라고 할 수 있나요?

 

전호근: 그 다음으로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가 ‘도통론’을 이야기 합니다. ‘도의 근원을 밝히다’라는 뜻의 유명한 글 <원도>(原道)에 따르면, 맹자는 도통의 핵심 인물입니다.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까지 주욱 ‘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가 맹자가 죽음으로써 도통이 끊어졌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한유는 자신이 그것을 이어받겠다고 얘기합니다. 또한 <사서>(四書)라고 해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들어 맹자 부활의 신호탄을 쏜 것이 바로 한유였습니다. 이러한 한유의 사상을 송대(宋代) 유학자들이 이어갑니다. 순자, 조기, 한유에 이어 범중엄(范仲淹),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마광과 왕안석이 활약했던 북송 시대에도 맹자의 지위가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이천도 맹자를 그냥 성인이라고 하지 않고 ‘아성지아’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성인이고, 아성은 안연이고, 아성지아는 맹자, 즉 대현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맹자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았는데 남송 시대에 이르러 주희가 등장하면서 맹자의 지위가 확고부동해 진 것입니다.

 
주희(朱熹)김시천: 동아시아의 유학 전통은 흔히 ‘공맹’(孔孟)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공순’(孔荀)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즉 공자와 맹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공자와 순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의 철학사 서술에서는 맹자와 순자가 비슷한 것처럼 말하지만,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이런 비교는 안 되는 것이었죠. 한나라 후한 때까지는 순자는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다가 삼국시대 이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거의 현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문헌으로 보아도 <맹자>는 ‘경’(經)의 지위에까지 올라갔지만, 순자는 여전히 ‘제자’(諸子)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맹자와 순자를 평가하는 후대의 인식의 차이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맹’이 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유지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상적 함축은 무엇인가요?

 

전호근: 그야말로 <맹자>가 만든 구상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는 자기 자랑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은 거의 성인이라고 하자 맹자는 성인은 공자도 감당 못했는데, 내가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답합니다. 그러자 공손추가 그렇다면 공자의 제자 중에 누가 성인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맹자는 끝까지 대답을 안 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대답을 회피하죠. 그리고 맹자는 내 소원은 공자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공맹’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공맹’이란 표현이 같은 논조로 거론된 것은 <장자>였습니다. <장자> ‘천하’편은 장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순자>의 ‘비십이자’ 편만큼이나 천하의 사상가들의 장단을 말한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추로지사’(鄒魯之士)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추나라와 노나라는 바로 맹자와 공자의 고향입니다. 즉 말 그대로 ‘공맹’을 뜻하는 것이죠. 이런 표현도 ‘공맹’이라는 말이 나온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한유(韓愈)한유에 이르면 ‘철환천하’(轍環天下) 즉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한다는 말을 써서 공자를 일컬었는데, 이것도 원래는 맹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맹자가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녔는데 그로 인해 공자의 덕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천하에 공자를 드러내 밝히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방식으로 보면 맹자는 스스로 공자와 자신을 잇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논어>에는 공자 문하의 가장 뛰어난 현인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최고라 할 덕행(德行)을 이룬 인물로 <논어>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을 거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 네 명의 제자 가운데 ‘중궁’을 뺐습니다. 중궁은 바로 ‘순자’의 스승이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은 순자에게, 세 명은 맹자에게 온 셈이죠.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맹자의 정통성은 순자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맹자』, 그 읽기의 역사 [맹자와의 대화 3]

전호근 / 김시천 대담

과거의 <맹자>, 현대의 <맹자>

김시천: 전통 사회의 통치자들에게 <맹자>는 상당히 파격적인 책으로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맹자>의 주석자 가운데는 왕안석(王安石)처럼 정치적 실력자인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체로 사대부(士大夫) 즉 통치계급의 성원이면서 동시에 문인(文人) 혹은 오늘날의 지식인에 해당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전 연구는 주로 대학의 상아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 또는 학술적 연구로서 다루어집니다. 이러한 연구의 성격 변화는 고전의 성격 자체에 상당히 다른 특성을 갖게 만듭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차이점을 느끼고 계신지요?

전호근: 이른바 ‘강단철학’을 말하는 것이죠. 저는 <맹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 ‘맹자철학’이 대학 강단에서 학술적으로만 다루어지다 보니까 한계를 많이 드러낸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논어>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굉장히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으로 전통학자들이 활발하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강단에서 연구자의 입장에서 다루다보니 그야말로 “책상머리에서 공부하는 학이시습지”로 해석되는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맹자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죠.

<맹자>의 가장 유명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역시 그의 ‘성선’(性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 본성을 다루는 것은 덕치(德治)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 즉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를 생각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말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 입증이 될 리가 없지요. 입증이 되지 않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맹자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은, 강단철학에서 비롯되는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맹자>를 강의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맹자>의 판본, 조선의 <맹자대전>

김시천: 다른 책들에 비해 <맹자>는 판본상의 논란은 비교적 적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썼는가에 대한 논의는 약간 있는데, 일반적으로 세 가지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맹자 자신이 썼다는 송대 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죠. 그리고 만장(萬章)이나 공손추(公孫丑)와 같이 맹자의 제자가 썼다는 한유(韓愈)의 주장이 있고, 세 번째가 맹자와 제자들이 함께 썼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판본은 어떤 판본인가요?

전호근: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이래 <사서대전>본 <맹자>가 압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영락대전>본이라고 하는데,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죽은 뒤 영락제(永樂帝, 1360~1424)가 왕이 된 뒤에 대규모 사업을 벌여 편찬한 책입니다.

판본과 관련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가 있어요. 어느 날 <맹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盡心下)라는 부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주원장은 몹시 화를 내며 <맹자> 책을 불태워버리라고까지 명령합니다. 그 때 전당이라는 신하가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오히려 영광이다”라고 하며 저항하니까 할 수 없이 다른 신하에게 <맹자절문>을 짓게 만들어서 그것으로 시험을 치르도록 합니다. 즉 <맹자>의 절반 정도를 날려버린 것이죠. 전체 260개의 장중에서 80개의 장을 빼버린 것입니다. <맹자>의 내용들이 전제군주들에게 얼마나 위험스럽게 비쳐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 후 한동안 <맹자절문>이 유행하다가 영락제가 황제가 되고 나서 호광(胡廣)이라는 학자에게 <사서대전>을 편찬하게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맹자대전>으로서, 우리가 흔히 읽는 <맹자집주>는 주자의 집주이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주자의 집주를 다시 해석한 방식으로, 맹자 원문과 주자의 주석과 그것을 다시 해설한 ‘소’를 붙인 것이 <맹자대전>본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부터 간행되어 유행하던 것을 조선에서 그대로 가져와서 내각본으로 각인해서 읽었던 것입니다.

김시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한학(漢學)을 하는 분들이 처음 접하는 책이 바로 그 <사서대전>이지요. 저도 한문 공부를 할 때 처음 샀던 책이 바로 영인본 <대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철학도 ‘조선유학’의 연장에 있다고 볼 측면도 있겠군요.

전호근: 그런데 중국의 것과 조선조의 것에는 판본상 차이가 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방점’을 찍어서 끊어 읽기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났는데” 다음에 방점을 찍고 그리고 다음 구절이 시작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내각본 <사서대전>에는 그런 방점을 다 빼버렸습니다. 서지학자들 주장으로는 중국에서 찍은 방점을 조선시대 학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빼버린 것이며, 이는 한심한 일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문제의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중국 판본은 모두 목판본이었습니다. 목판본의 경우 점과 같은 것은 그냥 하나 그려 넣으면 되는 단순한 일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금속활자 본을 썼습니다. 금속활자에서는 점을 하나 넣으려면 따로 하나를 새겨 넣어야 했습니다. 점이 붙은 글자를 따로 새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점을 생략하고 외관상의 미를 고려하여 아름다운 글자만 새겨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온 내각판 <사서대전> 본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옛 선인들의 <맹자> 읽기

김시천: 그렇다면 판본이 아니라 주석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희의 <맹자집주>외에 여러 가지 주석서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평소 <맹자> 주석서 가운데 ‘왕안석’의 것을 읽어보고 싶은데 실종되어 아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을 제외하고, <맹자>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눈길이 가는 주석서를 몇 가지 고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호근: 우선 가장 이른 후한(後漢)의 조기(趙岐, 108~201)주를 꼽을 수 있죠. 조기는 당시에 상당히 명망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나 원소와 같은 시대 인물입니다. 당연히 맨 처음 주석이므로 <맹자장구(孟子章句)>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래 <맹자>는 7편이 아니라 11편이었다고 하는데, 조기가 4편을 맹자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고 해서 외편으로 빼버렸습니다. 이 외서에 해당하는 내용은 ‘성선변(性善辯)’, ‘문설(文說)’, ‘효경(孝經)’, ‘위정(爲政)’ 네 가지였는데 조기가 이들을 제외하고 7편으로 묶어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판본이 정해진 것입니다.

저는 <맹자>를 맹자가 직접 썼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읽어보면 맹자가 직접 쓰지 않고 한 다리 건너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거든요.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필치를 보면, 다른 사람이 받아 적었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맹자가 직접 썼다고 보는 것이 글을 보는 입장에서 내린 판단입니다.

조기의 <맹자강구>에 이어 또 신주(新注)라고 할 수 있는 주희의 주석이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맹자집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청나라 때의 초순(焦循)이 쓴 <맹자정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맹자요의>도 의미 있는 주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다산의 것보다 초순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시천: 다산의 <맹자요의>보다 오히려 초순의 <맹자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전호근: 다산의 <맹자요의>는 맹자 전체를 완전히 주석한 것이 아닙니다. 초순의 <맹자정의>는 맹자 전체를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주나 신주에서도 보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청나라 때 수많은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볼 때 다산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산도 자기 시대에 철저했지만 <맹자> 부분에 있어서는 초순이 더욱 자기 시대에 철저했다고 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는 아직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고 있다. [맹자와의 대화 2]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지금의 승자독식사회가 ‘전국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김시천: 세 번째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가만히 들어보면 국내에서 맹자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 듯합니다. 오히려 최근 서구학계에서 맹자와 순자의 ‘심성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 현실에서 맹자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정치적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요즘에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와 관련하여 전통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맹자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전호근: 지금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책이 자기계발서나 경영서, <손자병법> 경영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손자병법>은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자에게는 강하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그런 식의 자기계발과 경영, 처세술이 확산되는 사회에서는 맹자 식의 자기계발과 경영이 설 자리가 없어지겠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맹자가 가치 있다고 봐야겠죠.

 

김시천: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국시대’(戰國時代) 즉 전쟁이 판치는 세상에서 널리 인기를 얻었던 책을 지금도 널리 읽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 또한 전국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해요. 당시는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우리는 개인간의 살벌한 군비 경쟁, 스펙 경쟁이지요. ‘승자독식사회’라는 말은 ‘전국시대’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사례의 하나로,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한비자’를 들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역대 중국에서 내내 환영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비림비공’운동이 일어나면서 재평가되어 비로소 철학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4, 5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은, 오늘날 우리가 고대 중국철학사를 서술할 때 한비자가 대등한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른바 ‘객관적으로’ 서술합니다. 저는 이러한 서술 방식과 달리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백가’는 모두 좋은 책인가?

김시천: 아마도 이런 생각은, 전호근 선생님을 만나 ‘맹자’를 재발견하게 된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맹자’가 민주주의 사회에 가장 적합한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천대받고 있는 상황이 통탄스러운데, 왜 현실에 접목시키기에 가장 좋은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학문적 관심이 적고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호근: 맹자가 살았던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맹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시 천하의 모든 군왕들이 다른 나라를 쳐서 빼앗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존중받았겠죠. 그런 사람을 바라고 양나라 혜왕(惠王)도 맹자를 초빙했던 것인데, 맹자와 같은 사람이 와서 혜왕도 상당히 당황했을 겁니다.

맹자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에도 물론 공동체의 이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끝없이 ‘이익’(利)을 부정하고 ‘인의’(仁義)를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대도 바로 맹자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선생님의 이야기는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제자백가가 모두 ‘고전’이므로 모두 의미가 있다는 식의 해석과 평가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책이 팔리는 것을 보면, <손자병법>과 <맹자>가 팔려나가는 숫자는 비교가 안 됩니다. 손자병법이 처세서로 몇 십만 부씩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논어> <맹자>를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일종의 ‘투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전호근: 사실 <손자병법>과 같은 책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부하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사랑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만 하고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쓸 데 없는 사랑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관을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판매를 늘리는 데 직결되죠.

 

김시천: 우리 사회에서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이야기와 같은 것 같습니다. 저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첫 장을 읽다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케인이 휩쓴 마을에서 상인들이, 물건의 예전 가격을 너무 올려 폭리를 취하는 상황을 두고서, 어떤 가격이 적정하고 바람직한가에 대한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토론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요. 내가 살던 동네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려 당장 급한 것들을 사러 수퍼에 갔더니, 수퍼마켓의 주인이 가격을 몇 배씩 올려 폭리를 취하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이 상황은 가격과 공정거래를 논하기 전에 이미 삶의 극한 상황이고, 그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비인간적인 행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상황을 논의하는 것이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학문적 논제가 될 만 할까요? 그것은 이성의 후퇴이고, 도덕성의 상실이며, 인간성 파괴의 상황입니다.

제가 볼 때 <정의란 무엇인가>의 그 이야기는, 얼어붙은 지성이자 병든 지성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소설가 장정일 선생님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런 통렬한 비평을 하기도 했지요! 무엇이 정말 논의할 만한 문제인지를 판단해내는 것이 지성이고, 그것을 기르기 위해 읽는 것이 고전이라는 입장에서 저는 전호근 선생님이 정상적인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 철학과 정치의 사이에서

김시천: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맹자’의 일화는 ‘맹모삼천지교’입니다. 심지어 ‘맹부삼천지교’라는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그렇지만 근대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맹자>는 일반적으로 철학책, ‘맹자’는 철학자로, 혹은 세밀하게 ‘윤리이론가’로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평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이런 분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호근: 우리가 철학자라고 할 때 철학자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맹자’를 철학자라고 하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윤리이론가라는 측면에서만 철학자를 바라본다면 저도 똑같이 맹자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을 반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莊子)가 공자나 맹자의 유가사상을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면의 덕이 훌륭한 사람이 성인이고, 덕이 있는 사람이 밖으로 천하를 다스려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성외왕을 실현했던 사람은 공자 이전 사람으로서, 요임금, 순임금, 탕임금, 우임금, 문왕, 무왕과 같은 이들은 자기가 왕이었기 때문에 직접 다스리기만 하면 되었죠.

그러나 공자부터는 임금이 아니므로,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있는 임금을 교화시켜서 자기가 바라는 정치를 구현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죠. 그럴 경우에는 ‘정치가’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철학의 영역 속에 정치를 포함시킬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성선설’을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으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철학의 폭이 넓어지겠죠. 그렇지만 만약 철학의 폭이 넓어지지 않고 윤리에 국한시킨다면 맹자를 철학자라고 분류하는 것 자체가 맹자를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도 맹자의 평생 목적이 ‘백리흥왕지도’라고 표현했습니다. 백 리의 영토만으로 ‘왕도’를 일으킨다는 것이죠. 천 리 이상이 되어야 ‘패도’로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 백 리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백리흥왕지도라는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 과제였다면 그런 경우에 맹자는 ‘정치인’으로 분류해야 하겠죠.

저는 철학이라는 개념에서 ‘정치’를 배제하고 나아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사회철학 영역에서 바라볼 때에는 정치는 곧 철학이고, 철학이 곧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근대인이 아니었다

김시천: 기존의 유학에 대한 평가는, 정치는 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규정 방식은, 유학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폐쇄하는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의 우선성이 있을 때 윤리는 당연히 정치가 지도받아야 될 원리가 되고, 거꾸로 읽는 것이 오히려 맹자를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주석’과 오늘날의 철학 및 다양한 담론들을 다루는 ‘학술적 연구’ 사이에 괴리감이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고전 연구를 하시면서 맹자에 대한 다양한 주석들을 접하며 느낀 점과, 현대학자들이 근대적 방식으로 맹자를 연구하는 것에서 어떤 차이점을 느끼시나요?

 

전호근: 전통적 주석이라는 것은 우연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명저’가 전해집니다. 그런 주석가들을 통해 맹자를 바라보면 이들은 자기 앞사람들의 견해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전통 주석가들의 탁월성이 있다고 봅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오히려 그런 철저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앞선 시대의 결과물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그런 논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또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문헌의 섭렵 범위라든지, 텍스트를 장악하는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깝습니다. 다만 전통 주석가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말하는 ‘근대’라는 초유의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다산도, 연암도 ‘근대’라는 표현은 썼지만 ‘근대인’은 아니었거든요. 그들의 글쓰기나 주장 속에 근대를 지향하고 중세를 깨뜨리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근대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전혀 엉뚱하게 보기도 하고, 시대를 잘못 읽기도 하고 역사성이 취약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적인 학문 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꽤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제도권에서 학문을 하게 되면 역사나 연대의 전후, 시간의 흐름과 같은 제도권의 훈련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방식은 전통 시대의 학자들이 지금 시대의 학자들을 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일장일단이 있기는 한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전통 주석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일본이나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가 얘기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분위가 있는데 이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