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말, 맹자의 말[천하무적 맹자왈]

공자의 바른 말[正言]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둑질하는 백성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공자왈
“당신이 도둑질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상을 주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게요.”
“…”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제자 자로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서 정치를 하려 합니다. 위나라에 가시면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공자왈
“반드시 윗사람의 명분부터 바로 잡아야지.”
“글세, 이렇다니까. 선생님, 그딴 건 뭣하러 바로 잡습니까?”
“모르면 잠자코 있거라. 명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어진다.”
“…”
공자는 위나라에서도 벼슬할 마음이 없었나 보다.

 

공자의 초상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왈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합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도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게다. 모름지기 통치자를 바로잡으려 하면 벼슬하기 어려운 법이니.

등용되기 위해서 이리 저리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다. 그게 공자의 바른 말이다.

맹자의 직언(直言)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신하의 도리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신하 말입니까? 동성지신(同姓之臣 : 왕과 같은 성씨로서 신하 노릇하는 사람, 왕과 혈연이기 때문에 때에 따라 왕이 될 수도 있다) 말입니까? 아니면 이성지신(異姓之臣 : 다른 성을 가진 신하) 말입니까?”
“우선 같은 성씨를 가진 신하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맹자왈
“동성지신은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간하고 간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바꿔 치웁니다.”
“…!”
왕의 얼굴색이 안정을 찾은 뒤에 다시 이성지신에 대해 물었다.
“이성지신은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간하고 간해도 듣지 않으면 떠납니다.”
“…”
이러니 맹자가 제나라에서 끝내 벼슬하지 못한 게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제나라 선왕은 맹자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까? 아마도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대답이었을 게다. 그럼 맹자는 상투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는 않다. 맹자도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제나라가 등나라에 가까운 설나라에 공격용 성을 쌓자 등나라 문공이 걱정하면서 맹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나라가 설나라에 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공격해올까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왈
“목숨을 걸고 지키든가 아니면 떠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
등나라 문공은 속으로 ‘이것도 조언이라고 하는가?’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봐도 맹자의 이야기는 조언이라기엔 너무나 무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곧이곧대로 일러준 말이다. 도리가 본래 이런 것이다. 도리를 벗어나 뭔가를 하려하면 마침내 상앙이나 이사, 한비자처럼 권모술수에 빠지게 된다.

맹자의 고국인 추나라가 이웃 노나라와 싸워서 패했다.
추나라 목공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의 신하 33명이 이번 전쟁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죽이자니 이루 다 죽일 수 없고 그대로 두자니 윗사람이 죽는 것을 구하지 않은 것이 미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왈
“임금께서는 백성들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이 이제야 보복을 한 것입니다.”
“…”
자신의 고향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다. 그저 곧이곧대로 대답하니 통치자로서는 당연히 듣기 괴롭다.

상앙의 허튼 소리[浮言]

강대국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던 상앙은 일찍이 양나라 혜왕 밑에 있었지만 등용되지 않자 앙심을 품고 진나라 효공을 찾아갔다. 상앙은 효공의 측근이었던 경감의 소개로 효공을 만났다.

첫 번째 대면이 끝나고 나자 효공은 경감에게 “그대가 소개한 자는 미친 놈이야. 어찌 쓸 수 있겠는가?”하고 크게 꾸짖었다. 경감이 그대로 전하자 상앙은 한 번 더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 만남이 끝나고 나자 효공은 이번에도 경감을 꾸짖었다. 경감이 다시 상앙을 꾸짖자 상앙은 한 번 더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앙을 세 번째 만나고 난 뒤 효공은 경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소개한 객은 훌륭한 사람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다.”

상앙이 다시 효공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며칠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효공이 싫증내지 않았다. 나중에 경감이 상앙에게 어떻게 임금의 환심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상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에 나는 요순의 정치 곧 무위를 근간으로 하는 제도(帝道)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했지요. 임금께서 하품을 하며 들은 체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두 번째 만날 때는 인의를 종지로 삼는 왕도(王道)정치를 이야기했더니 이번에도 임금께서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세 번째는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패도(覇道)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했더니 임금께서 크게 관심을 보이고 좋아하시더군요. 그래서 네 번째 만남에는 다시 가혹한 법률로 백성들을 통치하여 나라를 강하게 하는 법술을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저리 좋아하시는 겁니다.”

진나라 효공이 원했던 정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말 할 것도 없이 ‘강국지술(强國之術)’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상앙이 원했던 정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거 없다. 상앙은 그저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뿐이다. 그래서 제도, 왕도, 패도, 법치를 차례대로 말한 것이다. 뭐든지 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마천이 그가 한 말을 두고 허튼 소리[浮說]라고 낮추어 볼 만 하다.

한비자의 난언(難言)

상앙이야 출세에 눈이 어두웠으니 그렇다 치고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공족 출신 사상가였던 한비자는 어떨까? 그는 한 마디로 유세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규정했다.

“유세의 어려움은 나의 식견이 유세할 만한가 아닌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말재주가 뛰어난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말을 잘 못하여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운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오직 유세의 상대인 군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 거기에 내 말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유세의 상대가 고명한 도리를 숭상하는데 실리를 가지고 유세하면 하급의 인물로 보고 천시할 것이다. 반대로 상대가 이익을 좋아하는데 고명한 도리로 유세하면 세상일에 어두운 자라 여겨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세의 상대가 속으로는 이익을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고명한 도리를 좋아하는데 이런 경우에 고명한 도리로 유세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멀리할 것이고, 이런 경우에 실리로 유세하면 몰래 그 계책을 쓰면서도 겉으로는 버릴 것이다…”

그럼 한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고명한 도리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이익을 챙길 수 있게 유세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권력자의 변심이란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비자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용(龍)이란 짐승은 유순할 때는 살살 달래서 타고 놀 수도 있다. 하지만 목 아래에 거꾸로 돋아난 비늘 역린(逆鱗)이 있는데 자칫 그걸 잘못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물어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유세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세하는 방법에 밝았던 한비자도 진나라에 갇혀 그 잘난 유세술을 제대로 한 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으니 사마천이 슬피 여길 만하다.

하지만 나는 한비자가 자신을 유세술을 펼칠 기회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을 안다. 모름지기 권력자의 변심은 그가 스스로 미자하의 여도지죄(餘桃之罪)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런 까닭이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아래에서 상대의 기분에 맞추려고 애쓰는 사람은 권력자에게 하절(下節)로 폄하되어 유세에 성공하지 못할뿐더러 설혹 운이 좋아 유세에 성공하더라도 두고두고 오욕의 삶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일찍이 정이천이 신불해나 한비자는 천박하고 비루하다(申韓則淺陋易見)고 낮게 평가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럼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에다 수행하는 제자 수백 명과 함께 위세 당당하게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밥 얻어먹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 다 했던 맹자는 어떤 방법으로 유세했을까? 맹자는 일찍이 송구천에게 유세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맹자왈
“남이 알아주더라도 떳떳하고 당당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뿐이다. 옛 사람들은 뜻을 얻어서는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쳤고, 뜻을 얻지 못해서는 몸을 닦아서 세상에 드러났다. 곤궁하면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 사람들과 함께 선을 실천한다. 곤궁해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고 영달해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천년의 금서, 맹자[천하무적 맹자왈]

가장 오래된 책의 운명.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서는 무엇일까? ‘시서’다. 그런데 시서는 가장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시서는 시경과 서경을 합쳐서 일컫는 말인데, 시경은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민간에 널리 암송되었던 시를 모아놓은 책이고 서경 또한 그 무렵을 전후한 역사 기록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둘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자 유가를 대표하는 문헌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책과 가장 오래된 금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결국 모든 책은 누구에겐가 금지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음을 일러주는 셈이다. 게다가 그 책들이 유가를 대표하는 문헌이라는 점은 유가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금지했던 자는 역설적이게도 시서의 전문가 순자로부터 유가의 세례를 받았던 이사(李斯)였다. 화란의 씨앗은 유가의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의 말을 빌리면 이 두 책은 ‘옛 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난〔以古非今, 道古以害今〕’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 맞는 말이다. 천하가 이미 진나라로 통일된 마당에 이런 저런 말이 많은 유가는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게다가 이사는 본디 유가에 맺힌 원한이 있었다.

일찍이 스승 순자에게 유가의 인의가 무용하다고 논쟁을 걸었다가 “근본은 팽겨쳐 두고 말단만 뒤지는 바로 너 같은 자들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것〔今女不求之於本 而索之於末 此世之所以亂也〕”이라고 인격적 모독을 받지 않았던가. 그는 진나라로 떠나면서 순자에게 이렇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부끄럽기는 비천보다 더한 게 없고 슬프기로는 가난보다 더 심한 게 없습니다.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면서 세상을 비난하고 이익이 싫다고 하는 일 없이 몸을 맡기는 것은 선비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莫大於卑賤 而悲莫甚於窮困 久處卑賤之位 困苦之地 非世而惡利 自託於無爲 此非士之情也〕.”

스승 순자에게 선비답지 못하다고 칼을 던지고 떠난 셈이다. 순자가 그에게 뭐라고 말해주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진나라를 말세로 규정했던 스승 순자에게 보란 듯이 천하를 진의 제국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인의의 무력함을 직접 보여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진시황제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말했다〔昧死言〕, 인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떠받드는 책을 불태우고 그 추종자들을 생매장하라고.

죽음을 무릅쓰는 집요함은 아무래도 스승에게 버림 받은 콤플렉스가 작용한 듯하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이렇게 이사의 개인적 한풀이가 강하게 작용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분서’는 책을 불태운다는 뜻이고 ‘갱유’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한다는 뜻이다. 책만 불태우면 될 것을 왜 사람까지 생매장했을까? 문(文)과 헌(獻)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다. 흔히 문헌(文獻)으로 붙여 쓰는 ‘문’과 ‘헌’은 본래 ‘전적’과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자를 담는 가장 훌륭한 매체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튼 이사는 시황제에게 시서와 백가의 말을 기록한 책은 모두 불태우도록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불태우지 않을 책으로 의약과 복서 그리고 농사일 따위를 기록한 실용서를 꼽았다.

이 당시 맹자의 책 또한 불태워졌을 것이다. 맹자는 시서백가의 말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실용서에 포함되는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시서처럼 구체적으로 지목되면서 불살라지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른바 맹자는 당시까지 시서와 같은 경(經)의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맹자가 경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송나라에 접어들어서 당시까지 12경이었던 유가문헌을 13경으로 확정하면서부터이고 맹자의 수난은 맹자가 경으로 확정되고 나서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면서 일어났다.

엽기적인 탄압

역사에 기록된 가장 엽기적인 맹자 탄압 사건은 명대에 이르러 일어났다. 주인공은 무한의 권력자였던 명태조 주원장이다. 어느 날 그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

그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짐작하는 대로 그는 맹자를 읽고 있었다. 어떤 대목이 그를 그렇게 광분하게 했을까?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고 한 대목!

그가 보기엔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형벌에 ‘대’자가 붙으면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
주원장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추한 용모 만큼이나 더러운 성질로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되고나서도 족히 5만명은 죽인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이 비천한 시절 절에서 머리 깎고 청소한 이력이 부끄러웠던 걸까. 자신의 빛나는 머리를 풍자한다고 하여 모든 문서에 ‘光’자를 못 쓰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전당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그가 바라던 대로 나중에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조가 망할 때까지 제사를 받아먹었으니 죽지 않고도 영예를 길이 누렸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다.

유삼오는 모두 260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장을 삭제하고 172개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했다. 맹자 맞아?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27년(1394)에 반포되어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12년(1414) 성조의 명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아무튼 절대권력을 원했던 주원장이 맹자를 탄압한 것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적절했다 할 것이다. 최소한 맹자가 절대 권력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제대로 알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나라 공안기관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불온문서 검토대상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적이 있다. 선정자가 목적에 비추어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을 바로 알아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최근에도 21개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적이 있다. 개중에는 이게 왜 불온서적인지 알 수 없는 책도 있었다. 게다가 어떤 지식인은 자기 책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하지 않은 것을 두고 자신의 미온적인 삶을 반성하기도 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 공안기관이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이제라도 맹자를 불온서적 목록에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맹자의 임금 길들이기[천하무적 맹자왈]

나도 감기 걸려서.

맹자가 막 제나라 왕을 만나기 위해 조정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제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이렇게 전했다.
“과인이 마땅히 선생을 먼저 찾아가서 뵈어야 하겠지만 불행히 감기에 걸려서 바람을 쏘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조정으로 나와 주시면 어떨까 하는데 그리해 주실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맹자왈
“마침 저도 감기에 걸려서 조정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맹자는 동곽씨 집으로 조문하러 간다. 따라 나섰던 제자 공손추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어제 병으로 조정에 나가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오늘 이렇게 조문하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은 듯합니다.”

맹자왈
“어제 병이 오늘은 나았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조문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맹자가 조문하러 간 사이 숙소에서는 난리가 났다. 맹자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나라 왕이 의원을 보내온 것이다. 제자들은 우선 이렇게 말했다.
“어제 왕명이 있었는데 병 때문에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가 오늘 아침 일찍 달려가셨습니다. 지금쯤 아마 도착하셨을 겁니다.”

이렇게 둘러댄 뒤 사람을 풀어 맹자에게 절대 숙소로 돌아오지 마시고 조정으로 가시라고 전했다. 물론 그런다고 조정으로 달려갈 맹자가 아니지만 제자들이 하도 간곡하게 말하는 통에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지는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누구보고 오라 가라 해

맹자의 이 처신을 두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왕은 맹자를 공경했는데 맹자는 왕을 공경하지 않았다는 거다.

[맹자 초상]
맹자왈
“제나라 사람 가운데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이 없다. 제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왕에게 인의(仁義)를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인의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제나라 왕은 함께 인의를 이야기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겨서이다. 그런데 나는 인의가 아니면 왕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경추씨라는 지식인이 이렇게 따졌다.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임금이 부르시면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달려가셨다는데 당신은 임금이 부르는데도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신 겁니까?”

맹자왈
“그건 아니지요. 천하에 존귀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말하자면 벼슬과 나이와 덕망입니다. 조정에서는 벼슬이 최고요, 고을에서는 나이가 제일이고 백성들 다스리는 데는 덕망이 가장 존귀합니다. 지금 제나라 임금이 나보다 나은 것은 그저 벼슬 하나뿐입니다. 어찌 하나 가진 사람이 둘 가진 사람한테 오라 가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사건 이후 맹자를 만나고 싶었던 임금들은 모두 먼저 맹자를 찾아간 뒤에야 만날 수 있었다. 예컨대 등나라 문공은 세자였을 적 맹자를 만나기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나 맹자가 머물고 있던 송나라로 가야 했다.

어찌 장창 따위가

물론 맹자의 이런 처신 때문에 맹자가 만나지 못한 임금들도 있다. 노나라 평공이 그랬다. 본디 노나라 평공은 악정극의 소개로 맹자를 만나기로 약속해 두었다. 그래서 막 궁궐 밖으로 나가려 하던 참에 측근이었던 장창이라는 자가 이렇게 말하며 평공을 말렸다.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제후의 신분으로 필부를 만나기 위해 몸을 가벼이 움직이십니까? 맹자가 현자라고 생각해서입니까? 맹자는 현자가 아닙니다. 맹자는 자기 어머니의 상(喪)을 아버지의 상보다 후하게 치른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존귀한데 상례를 치를 때 그것을 무시한 겁니다. 그러니 현자가 아니지요.”

이렇게 해서 평공은 맹자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맹자의 제자였던 악정극이 들어와 평공에게 왜 맹자를 만나러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평공이 맹자가 현자가 아니라서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자 악정극은 이렇게 대꾸했다.
“맹자가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는 아주 가난했고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형편이 좀 나아졌기 때문에 상의 후박에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현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공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맹자는 평공을 만나지 못했다. 악정극은 맹자를 만나 이렇게 전했다.
“본디 임금이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으나 측근 신하 중에 장창이라는 자가 있어서 임금을 막았습니다.”

맹자왈
“임금이 나를 만나도록 주선한 사람도 있고 그것을 막은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실제로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야. 어찌 장창 따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맹자는 자기를 방해한 장창을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장창이 자신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고 그에 앙심을 품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넓은 거처에 산다며 대장부론을 거침없이 펼치는 맹자의 스케일에 걸맞은 처사다. 사소한 일에 앙심을 품고 죽자고 달려들어 인생을 낭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하늘 탓? 하늘의 뜻!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고집 센 늙은이마냥 늘 뻣뻣하게만 군 건 아니다. 제나라 선왕에게 왕도정치의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던 맹자는 뜻이 맞지 않아 떠나면서도 국경 부근의 마을에서 사흘이나 묵은 뒤에야 제나라를 떠났다. 은근히 선왕이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윤사라는 자가 맹자를 이렇게 비난했다.
“천릿길을 찾아와 왕을 만나보고 뜻이 맞지 않아서 떠나는데 어찌하여 사흘 밤이나 묵는가?”

맹자왈
“천릿길을 찾아와 왕을 만난 것은 내가 바라서 그리 한 것이지만 뜻이 맞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어찌 내가 바란 것이겠는가. 내 어쩔 수 없어 떠나는 것이다. 사흘 밤을 묵고 떠나지만 내 마음으로는 오히려 너무 빠른가 싶다. 왕이 만약 나를 등용한다면 어찌 제 나라 백성만 편안하겠는가.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왕이 잘못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 것이다. 임금에게 간했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발끈해서 화난 모습을 얼굴에 다 드러내고, 또 떠나게 되었다고 당장 그날 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간 뒤에 묵을 곳을 찾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일이다.”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면서 섭섭한 기색을 보이자 충우라는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옛날, 선생님께서는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니 섭섭해 하시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 때 하신 말씀과 어째서 달리 행동하시는지요.”

맹자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백 년마다 왕도가 천하에 베풀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왕도가 베풀어진 지 이미 700년이나 지났고 백성들의 왕도에 대한 열망도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런데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어찌 섭섭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무래도 하늘이 아직은 천하를 다스릴 생각이 없나보다. 만약 천하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나를 놔두고 그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또 뭘 섭섭해 할 것이 있겠는가?”

결국 맹자는 뜻을 얻지 못했고 그런 상황을 하늘의 탓이 아닌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 자신이 기회를 얻지 못해도, 그 때문에 왕도가 베풀어지지 않아도 결코 상심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좌절을 모르는 맹자다.

6.2 지방 선거가 끝났다. MB정권은 선거를 위해 천안함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영웅만들기로 희화화하고, 1번 어뢰의 역사적(?) 발굴로 북한을 선거판에 끌어들이고, 급기야 무상급식을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각종 기만책을 내놓더니만 결국엔 국민들의 된서리를 맞았다.

자기 지역의 대표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는 태생적으로 보수적 가치를 쫓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도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에서 완패했다.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다. 맹자에 따르면 하늘의 심판이기도 하다. 맹자는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듣는 것을 듣는다.”고 했으니. 맹자가 지금 MB정권을 보면 뭐라 할까?

맹자왈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살고 거스르는 자는 죽는다(順天者存 逆天者亡).”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맹자의 동문서답[천하무적 맹자왈]

맹자가 동문서답을?

맹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맹자열전]인데 겨우 137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중에 진시황제가 된 진왕 영정을 암살하려 했던 칼잡이 형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 무려 3,000자를 넘게 소비한 사마천이 어째서 맹자에게는 겨우 137자만 할당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137자의 기록만으로도 맹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에는 충분하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맹자는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깨우친 뒤에 양나라와 제나라에 가서 유세했지만 그들은 모두 맹자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모든 나라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차지하는 데만 몰두했는데 맹자는 끝내 도덕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맹자는 당시 제후들이 요구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당시 제후들의 질문에 엉뚱한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여러 회원들과 함께 [맹자]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맹자]를 처음 읽는 후배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맹자는 늘 왕들이 물은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얼결에 ‘맹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지한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을 했구나 싶었다. 아마 질문했던 사람은 내가 무성의한 대답을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맹자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정말 고금에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동문서답의 일인자다. 적어도 당시 군왕들과의 대화에서는.
어디 한 번 예를 들어 보자.

이익은 없다, 인의가 있을 뿐

맹자가 혜왕의 초빙을 받아 양나라에 갔다. 혜왕은 맹자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께서 천릿길을 멀다 않고 우리나라에 오셨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 주시겠습니까?”

맹자 왈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이익을 묻는데 인의로 대답한 것이다. [맹자] 개권벽두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 주장은 [맹자]가 끝날 때까지 한결 같은 어조로 이어진다.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맹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부터 한 대 세게 얻어맞은 혜왕은 이번에는 맹자를 자신의 화려한 별궁으로 초대했다. 아마도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왕의 별궁은 울창한 숲 속에 있었는데 높고 화려한 누대 아래에 깊은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맹자가 도착해 보니 못가에는 백조와 기러기가 느긋하게 날아오르고 고라니와 사슴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혜왕은 그런 자신의 수집품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 같은 현자도 이런 걸 즐깁니까?”

맹자 왈
“현자라야 이런 걸 즐길 수 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걸 가지고 있어도 즐기지는 못하지요.”

“…”

이번에는 혜왕이 맹자에게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했다. 포부라지만 그 당시 군왕들의 속셈은 뻔했다.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고 결국에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혜왕은 바로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돌려 이야기했다.

“본디 우리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했던 나라임은 선생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과인의 시대에 이르러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영토가 깎이고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한번 설욕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맹자 왈
“사방 백 리의 영토만으로도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

그래도 혜왕은 맹자를 잘 대해주었다. 그래야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가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던 혜왕이 죽고 난 뒤 새로 왕이 된 양왕은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맹자를 박대했고 그 결과는 이렇게 처참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내가 양왕을 만났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임금 같질 않고, 가까이 가보니 위엄이 없더군. 그런데 이자가 갑자기 ‘천하가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묻질 않겠나? 아, 그래서 내가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고 대답해줬지. 그랬더니 군침을 삼키며 ‘누가 통일할 수 있을까요?’ 묻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최소한, 당신 같이 사람 막 죽이는 자는 통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해줬지.”

맹자는 양왕을 거의 임금취급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패도는 아는 게 없어

이번에는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만났다. 선왕은 일찍이 패자였던 제나라의 환공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패자가 되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 맹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패업에 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맹자 왈
“공자의 문하에서는 패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도 그만두지 말고 뭔 말이라도 해보라 하시면 왕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흔히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갖다 붙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따위의 수사가 맹자에겐 절대 없다. 도리어 대답하기 전에 안 좋은 질문이라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잽을 먼저 날린다. 물론 패도에 대해 물었는데 왕도로 대답했으니 질문에 대답도 안 해 준 셈이다.

선왕의 얼굴은 아마 벌게지지 않았을까? 민망해진 선왕은 할 수 없이 질문을 바꿔서 왕도에 관해 물어봐야 했다.

“저… 저 같이 덕이 부족한 사람도 왕도 정치를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제가 들으니 왕께서 소 한 마리 끌려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소는 놓아주고 양으로 대신하라고 하셨다지요? 그 정도로 어진 마음이면 충분히 왕도정치를 베풀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소가 아까워서 그런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저는 왕께서 정말 소가 불쌍해서 그리했다는 것을 압니다.”

“아, 그렇군요. 선생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소는 그렇게 아끼면서 어째서 백성들은 아끼지 않습니까?”

“…”

이번에는 어째 잘 나간다 싶더니 결론은 또 선왕이 잘못했다는 말이다. 뭔 말을 못한다. 이래서야 왕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사람같지 않은 자에게 보내는 맹자의 말씀

그래도 양나라 혜왕과 제나라 선왕은 맹자 덕분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사실 이들은 당시의 군왕들 중에서 그리 뛰어난 이들은 아니었다. 맹자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제나라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 같은 이들, 그리고 초나라 장왕, 진나라 목공 정도가 당시의 뛰어난 군왕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양나라 혜왕이나 제나라 선왕의 이름이 이들보다 더 널리 알려진 건 오로지 맹자와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성현과 대화 상대가 된 이름값을 생각하면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욕을 먹었거나 말거나 간에.

요즘도 어떻게 하면 맹자에 한 번 걸쳐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해 볼까 하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맹자]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서도 맹자는 단골로 인용되는데 내가 알기로 유시민, 정동영, 정몽준 같은 유명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구의원이나 시의원들도 맹자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한 적이 있다. 효과는 그리 신통찮은 듯하다. 대부분 [맹자]를 엉뚱한 뜻으로 곡해하거나 한자를 잘못 쓰는 등 제대로 읽지 않은 티가 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이 맹자에 나오는 말이라면서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선, 인용한 구절은 맹자가 아니라 [주역]에 나오는 말일뿐더러 내용 또한 소통 부재의 이명박 대통령이 인용할 만한 구절이 아니다.

또 표절작가 전여옥씨는 [일본은 없다]가 표절로 판결나자 심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맹자를 인용하면서 “하늘은 장차 큰일을 할 사람에게 반드시 시련을 안겨준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스로 표절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가 그것이 하늘이 내린 시련이라고 둘러대니 진짜 동문서답하고 앉았다고 할 수밖에. 대체 자신의 표절을 억울한 시련으로 여기는 그런 자가 저지를 ‘큰일’이란 게 뭘까? 그에게 꼭 어울리는 말을 맹자가 이미 하긴 했다.

맹자 왈
“사람 같지 않은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일 수 있겠는가?(不恥不若人 何若人有)”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 admin@admin.com

민중미술 담론 비판(2)[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2. 민중미술 양식의 문제

민중미술 진영이 모더니즘 미술 진영보다 한 발 앞선 것은 미술이론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원리적이면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 구상 미술 문제

민중미술은 그 양식에 있어서 이른바 ‘민중적 리얼리즘’을 제창한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은 추상미술 대신 ‘구상 미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서구에서 한껏 발달하고 있는 각종 아방가르드적인 기법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여실한 리얼리즘만은 아닐 터이다. 이에 관련해서 최열은 맨 먼저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을 매우 진보적인 이론으로 꼽는다.

“김윤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매우 진보적인 수준에 도달한 이론이다. 그는 ‘구상미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대상(현실)에 대한 인식을 중요시한다. ②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③ 자연의 질서대로가 아니라 의미내용에 따라 화면을 구성한다. ④ 개인의 주관적 ? 정서적 표현을 배제하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역사관이나 세계관과 관련되는 것이다.’ (…) 이것은 사실주의 이론의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작실천의 부재였으며 당시 경향적인 미술가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구상미술론이 확고한 창작방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김윤수,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계간미술』, 1981. 겨울)을 참조한 최열의 정리. 최열,『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1991), 184쪽.)

최열이 소개하고 있는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리얼리즘이 소박한 재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기법의 원리를 핵심적으로 잘 정돈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소련에서 1934년 [사회주의 작가회의]를 통해 그 이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알려지게 되는 네 가지 규칙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가) 프롤레타리아적일 것 : 예술은 노동자들에 관련된 것이어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 전형적일 것 : 인민의 일상생활의 전형을 담은 장면들을 그려야 한다. 다) 사실적일 것 : 재현적인 의미에서 사실적이어야 한다. 라) 당파적일 것 : 국가와 당의 목적을 지지해야 한다. 등의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①에서 현실을, 만약 민중을 프롤레타리아로 보고 민중의 현실로 읽는다면, ①은 가)와 바로 직결된다. 그리고 ②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총체적인 파악’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에서 제시하는 ‘전형성’이다. 또 ③에서 ‘의미내용’은 다)에서 제시하고 있는 ‘재현적인 의미’와 일정하게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④에서 말하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라)에서 말하는 ‘국가와 당’이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 양쪽이 서로 직결된다.

김윤수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할 때,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당시 한국적 상황에 맞게 나름대로 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윤수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적인 것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라든가 포토몽타주와 같은 팝 아트적인 기법들을 일정하게 허용함으로써 민중미술의 지속성을 향한 격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윤수가 신학철의 몽타주기법을 대단히 높이 산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중적 순정주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다음과 같이 민중미술의 구상미술의 경향에 서구적인 경향이 가미된 것에 대해, 예컨대 표현주의 양식이라든가 극사실주의 양식 혹은 초현실주의 양식을 결합한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이 경향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적 한계 혹은 현실인식의 한계와 더불어 표현양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양식의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특징은 그 현실인식의 한계와 결합하여 형상화 작업을 매우 추상적인 데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의 작품화면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삶의 구체성, 동시대적인 구체성, 사회적 삶의 총체적 개괄성과 그 인간의 전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최열(1991), 188쪽.)

이러한 최열의 입장은 민중의 예술적 상상력과 감각이 반드시 도식화된 전형성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편으로 민중의 예술적 자질 자체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폄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2) 민중적 리얼리즘론

구상미술론에 이어 좀 더 구체적으로 민중미술의 양식을 구체화하고자 한 논의가 ‘민중적 리얼리즘론’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민중미술이 노동투쟁의 현장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선 라원식의 주장이 들어볼 만하다.

“민족미술의 내용 즉 주제, 제재, 소재는 민족의 현실을 토대로 나와 너의 삶,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찾아지는 것 (…) 민중의 미의식, 정서를 체화한 작품, 다시 말해 민중의 꿈과 사랑, 의리와 인정, 분노와 회한, 저항과 절규, 재생과 부활, 희구와 염원 등등을 폭넓게 담아내면서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을 요구한다.”(라원식, 「민족민중미술의 창작을 위하여」(『민중미술』, 공동체, 1985) 중에서. 최열(1991), 219-220쪽에서 재인용.)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 한국에서의 이른바 진보 진영의 모든 활동들은 설사 계급적인 소외의 체제적인 극복을 그 목적으로 주장한다 할지라도 일정하게 민족의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구도가 마치 비켜가는 쌍곡선처럼 대립되는 측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쪽을 함께 아우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라원식 역시 민족미술의 방향을 대략 제시하면서 민중미술이 표현해야 할 주제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역시 리얼리즘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더군다나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야만 진정한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품이라 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용문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이 점에 있어서 민중미술의 방법론이 가장 힘겨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민중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민족미술 내지는 민중미술을 추구하면서 여러 관련 작가들은 ‘분단’, ‘6 ? 25’, ‘일제강점의 만행’, ‘한국전쟁의 비참함’, ‘광주민중항쟁’, ‘유격대 투쟁’, ‘노동현장의 고통’, ‘농민생활’, ‘4 ? 19’, ‘민족통일’, ‘빈민생활’, ‘이산가족’, ‘신식민성’ 등을 주제로 선택하여 작업에 임했다.

이런 와중에 민속그림이 민중미술에 대해 그 기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정하게 모델로 작동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그런 차원에서 조선후기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는 이미 1970년 어간에 김지하가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관해 최열이 전하는 원동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원동석은 민속그림을 곧바로 민중미술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역사적 존재로서 민중을 정식화한 다음, ‘민중예술은 역사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소외의 압제로부터 탈출하려는 총체적 삶의 표현이며, 민속예술에서 그 뿌리를 찾아 공동적 삶의 염원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다음 그 뿌리를 조선 후기의 민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탈춤, 마당굿, 민요와의 접속에서 오늘날 민중예술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미술에서 ‘민화와 접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원동석,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일과 놀이 1』, 일과놀이, 1983) 중에서. 최열(1991) 229쪽 재인용 및 참조.)

탈춤, 마당굿, 민요 등은 분명 1980년대 민중예술에서 약방 감초처럼 전국적으로,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확산되고 있었다.(이를 당시의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순치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의 뿌리를 잘라내 버리려고 한 것이 이른바 ‘국풍’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미술 영역에서 이 같은 성격의 민중예술을 찾아야 할 터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고, 이에 원동석은 조선조 후기의 ‘민화’를 적극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민화가 대중적으로도 여러모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이에 따른 평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원동석은 같은 글에서 조선 후기 민화(문인화도 포함)의 양식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추려냈다.

“① 대상의 대소, 비례관계 무시 ② 공간의 상하, 원근의 무시 ③ 공간의 분할과 연속의 임의성 ④ 역원근법과 삼원법의 병용 ⑤ 시점의 이동에 따른 물상전개의 다면화와 물상 표현의 상괘성 이탈 ⑥ 시간의 동시성 표현 ⑦ 주제설정의 이중삼중적 결합에 따른 이미지 복합의 자유로움 ⑧ 색채 표현의 대비효과 및 화면의 평면화에의 복귀 ⑨ 전달의 간결성, 명확성, 즉흥성”(최열(1991) 231쪽에서 재인용)

원동석이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는 민화(문인화 포함)의 이런 특징들은 그 자체로 보면, 분명 근대 이후 서양미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대단히 아방가르드하고 그래서 모더니즘적이기도 한 특징들이다.

3. 민중 예술가론

1984년 원동석이 「민중미술의 논리와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민중미술에 대해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미술’이라고 규정했을 때 ‘민중에 의한’이란 것을 강조하게 되면 민중이 곧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에 다음과 같은 사안들이 제기된다.

1) 공동체적 신명 문제

민중미술이 전체 민중예술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그 나름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집단 창작 내지는 집단 미술의 향유 문제였다. 이에 관련된 것 중에 대단히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공동체적인 신명 문제다. 이는 주로 마당놀이를 통한 복합적인 민중예술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부산에서 주로 활동을 한 채희완의 연구가 심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천적 과제는 결속을 강화(예술의 문제와 사회적 삶의 문제 – 지은이)하는 공동체 의식과 적에 대한 대결을 강화하는 갈등의식, 이 두 가지로 요약되는 민중적 사회의식 ? 이는 갈등을 통한 통합을 거쳐 다시금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표현상으로서는 풍자적 해학, 해학적 풍자, 웃음과 눈물의 미적 유화, 한을 뚫고 나오는 역동적 신명 등으로 표출된다. ? 의 예술적 승리라는 예술 사회학적 기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오늘의 사회문제를 공동체적 관점의 표적으로 부각시키고 거기에서 성취된 사회인식을 행동화하는 오늘의 ‘삶의 축제’로 정착시키는 일임에 다름이 아니다.”(채희완, 「역사적 지속성의 질긴 숨결」(『마당』, 1983. 12) 중에서. 최열(1991), 205쪽에서 재인용.)

채희완이 제시하는 민중의식과 이에 의거한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삶 자체를 가장 넓은 의미의 예술적인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결의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작품과 관객 혹은 작가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이 없이는 작품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매체 미술’에서 소폭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채희완이 제시하는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아예 전체적으로 상호작용이 관통하는 그런 예술이다.

2) 미술의 주체인 민중

1983년 8월 이후 ‘광자협’(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은 ‘시민미술학교’를 열면서 민중이 미술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시인만이 시를 쓰고 화가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바람직한 예술은 다른 사람의 생존의 체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서로 공유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바야흐로 정직하고 튼튼한 민중예술이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최열(1991), 196쪽 참조.)

한편 ‘광자협’의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민족과 민중의 관점을 지키고 반민족, 반민중 세력을 비판하는 방식에 있어서 민족과 민중의 잠재된 생명력이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형식은 내용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범주가 아닌 소재적 함정으로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형식을 세련된 기교나 탁월한 회화적 질서 개념이 아니라 민중적 정서를 갖는 내용과 그것을 담는 그릇의 뜻이다.”(최열, 「80년대 미술운동의 한계와 극복」(『시대정신』1권, 일과놀이, 1984) 중에서. 최열(1991), 199쪽.)

그런가 하면, 1983년 7월 창립 예행전을 가지면서 창립된 ‘두렁’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술을 위한 미술이거나 생활에 미를 심기 위한 미술이 아닌 ‘삶에 기여하는 미술’이 되기를 노력한다. 사회와 미술을 유기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기적 개인주의의 온상인 강조된 전문성을 경계하고, 공동 작업을 지향한다. (…) 개방적인 공동작업과 민중과의 협동적 관계는 전문성의 공동생활과 미술행위의 민주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 그림’을 지향한다.”(두렁, 「산그림을 위하여」(『산그림』, 두렁, 1983) 중에서. 최열(1991) 202-203쪽에서 재인용.)

미술 작업이 전문가들만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창작 집단 ‘두렁’의 이러한 입장은 아방가르드적인 창조 활동을 통해 기왕의 지배적인 체제를 지향하는 일체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양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적인 정신과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일부 예술 천재들에 의한 아방가르드를 제시한 것과 완전히 대립된다.

이러한 ‘두렁’의 민중적인 집단 창작 정신은 그 형식에 있어서 오늘날 시민참여형의 공공미술 내지는 사회예술의 선구적인 모범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이러한 미술들이 확보해내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심층에서의 삶의 질을 암암리에 선도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대략 정리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예술은 항상 이중적인 긴박감 속에서 그 현존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민중적인 삶이 일상에 있어서 체제의존적인 측면이 강한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예술이 지닌 아방가르드 정신을 뒷받침한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지닌 감각적인 힘으로써 민중적인 삶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예술을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가 하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일컫자면, 일정하게 스스로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분리해 냄으로써 오히려 그 민중의 삶으로 스며들어가고, 스스로를 민중의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래를 향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과 삶 간의 역리적인 역동성을 가장 신랄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민중미술 진영을 형성한 여러 입장들이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내보인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그저 예술을 바라보는 전략적인 관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에 따른 전술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아쉬운 것은 벌써 20-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되돌아 볼 때,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하나의 학적 체계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전체 맥락 속에서 최고도의 난맥상을 보이는 한국 미술의 모습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민중미술이야말로 미술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인 삶 간에 목숨을 건 가장 뜨거운 긴장감을 연출했기에, 그 다기한 정신과 실천에 대해 굳건한 예술철학적인 바탕 위에서 학적인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더라면 그 파급력은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영역에까지 크게 미쳤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서 깊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민중미술 담론 비판(1)-범 모더니즘 비판 [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민중미술의 이론적인 입장은 우선 외래의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모더니즘은 비단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를 중심으로 한 그린버그식 후기모더니즘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본격 모더니즘이나 20세기 중반의 후기모더니즘, 그리고 그 이후 6-70년대를 풍미한 반(反)모더니즘적인 미니멀리즘, 팝 아트, 개념미술 등을 지시한다. 그 바탕에는 한국 현실의 당시의 역사적 ? 정치적 ? 사회경제적 상황을 철저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특정 상황에 입각한 예술 사회학적 입장이 작동하고 있었다.

민중미술 진영의 논객들이 보여주었던 이러한 태도는 그러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상황의 긴박함에 의거해 일정하게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현실 상황이 일변할 때(예컨대, 쉽게 전망할 수는 없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문민정부에 의거한 민주화가 달성된다거나 소련 해체를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든가 하는 상황의 변화) 지속적으로 예술적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을 도외시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예컨대『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1991)라는, 민중미술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역사적 보고와 더불어 필자 나름의 입장을 담은 비판적 평가를 담은 책을 낸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미학과 이념의 부재는 여전했고 현대주의[즉 모더니즘]에서는 미니멀리즘이라 해서 최소한의 예술, 가령 가능한 한 그리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색면이나 흔적만 남기는 방향으로 획일적인 형식주의가 만연하였다. 거기에 동어반복적이고 현학적인 용어를 개입시켜 철학적 근거를 조작해 나가는 논리부재의 이론이 성행하면서 동양 고전을 교묘하게 차용, 사이비 동양사상을 과시하여 새로운 미학적 이념을 형성해 낸 듯한 인상을 꾸며 냈다.”(160쪽)

이 글은 특히 한국에서 1970년 후반기에 해외진출과 더불어 힘을 발휘했던 흔히 모노크롬 회화로 불리는 단색회화의 흐름을 직접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단색회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모더니즘의 진영에서 제시한 여러 단색회화에 대한 해석들을 보자면, 한국의 단색회화가 결코 서구의 모더니즘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동양 전통 내지는 한국 전통의 사상에 입각한 것인 양 분식(粉飾)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적 미니멀리즘’, ‘범자연주의’, ‘우주적인 흰색’ 등의 개념을 조성해서 일종의 사이비 형이상학적 놀음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작태’에 대한 최열의 공격은 그 자체로 볼 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와 대립해서 과연 민중미술에 대해 어떤 확고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최열이 소개하고 있는 민중미술 이론가 중 최고의 선배격인 김윤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저 일시적으로 상상의 세계, 추상적인 가교의 미적 질서의 세계로 데려간다는 의미의 해방이 아니라 삶을 위협하고 현실의 구체성을 가리고 있는 장막으로부터 진실을 체감하고 확인케 함으로써 인간과 현실의 풍부함을 다시 발견하게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예술은 언제나 구체적인 생의 진실과 자유 그리고 휴머니즘에서 규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협하는 갖가지 요소는 예술에 대한 폭력에 다름없다.”(김윤수, 「폭력과 예술」(『다리』, 1972. 2.)에서. 최열(1991), 162쪽에서 재인용.)

휴머니즘적인 예술론이 제시되고 있다. 예술에 대한 김윤수의 관점이 상당히 깊이가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술을 인간 해방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이 글에서 김윤수는 인간 해방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 삶 일반이 지닌 추상적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삶의 구체적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전자를 모더니즘적인 해방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리얼리즘적인 해방이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해방은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본질적인 구분이다. 우연한 탄생과 필연적 죽음 사이에서 영위되는 인간 삶 자체가 지닌 부조리함으로부터의 해방이 전자의 방향이라면, 구체적인 사회역사적인 현실에서 주어지는 사회적인 모순으로부터의 해방이 후자의 해방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자의 해방은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과의 투쟁이고, 후자의 해방은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조건과의 투쟁이다. 이 두 가지 투쟁은 본래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후자의 투쟁, 즉 현실적인 조건과의 투쟁이 주된 목표로 설정될 수 있거니와, 김윤수는 이러한 점을 예술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김윤수가 두 가지의 투쟁이 본질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인 양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김윤수의 민중미술적인 투쟁 전략은 70년대 초 당시의 박정희 독재와 긴밀하게 결합되었거나 혹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전개되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질곡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어쩌면 필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과의 투쟁 역시 함부로 방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이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인류가 낳은 풍부하고 깊이 있는 문화예술의 유산의 힘을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상당히 정곡을 찌르는 듯한 필설을 통해 민중미술의 전략을 설정한 이러한 김윤수의 기본적인 입장은 역시 민중미술의 이론가인 원동석에게 연결되어 그 실천적인 원리가 이렇게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며 문화의 주체자도 역시 민중이다. 살아 있는 민족문화의 발현은 주체자가 스스로 민중이 되는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 민중미술이란 민중 속에서 진실을 찾고 이를 확인하려는 예술이며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민중의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의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개발되는 것이다.”(원동석,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1975)에서. 최열(1991), 163쪽에서 재인용.)

민족의 실체를 민중이라고 한 점에서 원동석은 민족 개념을 민중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민중적 민족’으로 정립하고 있다. ‘민중적 민족’ 개념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민족 개념이 있다. 그것은 ‘국가적 민족’ 개념이다. 국가적 민족 개념은 국가주의적인 하향적 정치 체제에서 흔히 동원되는 민족 개념이다. 히틀러가 제시한 아리안주의, 스탈린이 제시한 슬라브 민족주의, 박정희가 이순신을 내세워 강조했던 민족주의, 현재 북한에서 작동하고 있는 민족주의 등이 그러하다. ‘국가적 민족’은 그 자체 민중으로서의 민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볼 때, 1975년 당시 이미 이렇게 민족의 실체를 민중으로 본 원동석의 민족 개념은 80년대 한국 사회를 진동시킨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의 측면을 바탕으로 역시 분단과 외세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서 당시 큰 이슈가 되었던 민족투쟁의 측면을 아우를 수 있는 제언이라 할 수 있다.

원동석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중의 현실 속으로 파고드는 예술을 제안하는 데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민중적인 진실’이라는 것이다. 인용문에만 의거해서 볼 때, 민중의 진실에 관해서는 요령 있게 제안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원동석은 민중의 진실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인 소외, 즉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에 의해 오히려 억압받고 지배받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엄혹한 사상 검열과 탄압의 상황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민중 개념을 정확하게 발설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원동석은 한국의 예술보다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직접적인 정치사회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시절, 그 우회 전략으로서 예술을 공격 대상 영역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예술에 대한 그의 애착을 간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원동석이 1970년대 후반의 상황에서 위 인용문이 담긴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이라는 글을 발표한 것은 그 역사적인 의의가 대단하다 할 것이다. 뒤이어 발표된 원동석의 글에 대해 최열은 그 핵심을 이렇게 정돈하고 있다.

“원동석은 또한 1977년에 이르러 「한국추상미술의 외세주의」제하의 논문을 발표하여 형식주의와 획일주의에 빠진 현대주의 미술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는 추상미술의 이웃 없는 내면세계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자유는 관념의 유희이며 공허한 것이라고 하면서 추상미술은 서구의 것이건 우리의 그것이건 모두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밝혀 놓았다.”(163쪽)

최열의 이 해석에 의하면, 원동석이 추상미술의 모더니즘을 ‘이웃 없는 내면세계의 자아 충족’이라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가 자신의 유아론적인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추상미술의 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원동석의 규정에 대해 설사 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자라 할지라도 쉽게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원동석이 모더니즘적인 예술관이 그렇게 내면세계의 자아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 한편으로 대대적인 자본주의의 흐름과 적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은 가능할 것이다.

만약 모더니즘 미술이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상품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러한 비판을 피해가고자 한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중 미술 역시 자본주의적인 상품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비판함직한 반모더니즘적인 서구의 개념 미술에서 예술의 자본주의적인 상품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는 사실 등을 통한 반박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민중미술 진영의 논객들은 당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모더니즘 계열의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전격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정확한 입지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의 모더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민중적 리얼리즘의 입장과 아울러 외세배격의 민족자주의 입장도 일정하게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원동석이 저 앞에서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다.’라고 하고, 또 여기에서 ‘추상미술은 서구의 것이건 우리의 그것이건 모두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제언을 했던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김윤수나 원동석의 입장에 대해 최열은 이상적 순수주의에 입각한 듯 선언적이고 개념일변도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현실과발언’ 및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의 선언문이 보여 주는 미술운동의 성격은 매우 도덕적인 예술가의 현실에 관한 비판 및 그것을 통한 기여로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그것은 그러나 기존 미술계의 고답적이고 폐쇄적이며 도피적인 유희, 자족적 탐미라는 형태에 대한 거부이며 기존질서, 즉 정치 ? 경제 ? 사회적 과제에 대한 정확한 검증 없이 소박한 체제내적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개량주의 혹은 문화주의적 차원의 한계를 고스란히 진 것이었다.”(최열, 「현단계 민중미술의 위상」(『동덕여대신문』, 1986. 8. 30) 중에서. 최열(1991), 170쪽에서 재인용.)

1979년과 1980년을 거치면서 창립된 ‘현발’과 ‘광자협’의 입장에 대해 최열이 ‘소박한 체제내적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개량주의 혹은 문화주의적 차원의 한계를 고스란히 진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글을 쓸 당시인 1980년대 말의 상황이 일변했기 때문이다.

‘힘전’ 탄압 사건에 이어 1985년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이 결성되어 상당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어서 1987년 6월 항쟁이 있고 난 뒤 ‘민미협’에 일정하게 대립하면서 1988년 ‘민미련건준위’(민족민주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가 뜨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개량주의’ 혹은 ‘문화주의’ 등의 딱지는 이른바 ‘배신자’ 비슷한 뜻을 지닐 정도로 나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최열은 ‘민미협’보다 ‘민미련건준위’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민미협’의 입장을 이렇게 폄하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다음 호에 ‘민중미술 담론 비판(2)-민중미술 양식의 문제’가 이어집니다.(편집자)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미술계의 민주화 운동과 민중 미술의 탄생과 전개[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의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와 연결되는 글입니다.(편집자)

이런 와중에 미술계라고 해서 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미술가들이야말로 이런 억압적인 정치 ? 사회 상황에서 가장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이들이야말로 본래 자유와 그에 따른 상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 부류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선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룹이 ‘현실동인’과 ‘현실과 발언’이다. 그 외 1980년대에 들면서 너무나도 많은 미술인들이 저항과 투쟁의 기치를 내걸고서 조직을 만들어 싸웠기 때문에 그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1) 현실동인

197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969년, ‘현실동인’ 창립전이 선언문만 남긴 채 강력한 억압에 의해 좌초되고 만다. ‘현실동인’은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윤(1946-1986), 임세택, 오경환 등에 의해 현실을 반영한 사실주의적 회화를 추구하려는 그룹이었다. 이들이 그룹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이들보다 4-5년 선배인 김지하 시인(1941- )과 김지하 시인이 선배로 모시던 미술 평론가 김윤수(1936- )의 자극이 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실동인’의 창립선언문을 기초한 인물이 김지하였고, 교열을 맡은 인물이 김윤수였다. 이 선언문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 핵심만 따 내어 보기로 한다. 선언문은 현실, 현실의식, 현실주의 등에 관해 정의를 내리고, 현실주의의 의의는 물론 그 구체적인 기법과 방안까지 다소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약을 하자면, 사물과 생과 상황 속에서 대립하고 충돌하고 발전하는 모순의 작용에 의해 현실은 힘과 힘의 운동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역학은 현실주의의 기본 기법이며, 갈등은 이러한 현실 모순의 공간적 반영 형식인 동시에 시각적 구성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지하가 추구하는 미술과 김윤수가 추구하는 미술이 다소 방향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김지하는 대체로 민족주의적인 미술을 강조하는 반면, 김윤수는 리얼리즘 미학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지하는 대중적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통해 미술에서 현실을 반영하되 서구 미술을 무비판적으로 모방을 해서는 안 되며 전통을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윤수는 현대인이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의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소외 현상이 예술에도 반영됨으로써 예술과 대중이 분리되는 부작용을 낳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반인간적 ? 반대중적 ? 반사회적인 태도를 버리고 사회와 개인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안점이 다소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민중 주체의 민족 문화운동’이라고 하는 대의에 뜻을 같이 한 것은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용기를 북돋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현실과 발언

‘현실동인’이 처참하게 당한 뒤 이어진 유신말기의 엄혹한 정치 ? 사회 상황은 현실의 반영을 주장하는 미술 운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1979년 기존 미술계의 내적인 문제점은 물론이고 미술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개혁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운동이 준비되었다.

이른바 ‘현실과 발언’이라는 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이 그룹은 ‘현실동인’의 정신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그 사이 10년이라는 제법 긴 세월이 흐른 탓에 많은 인물들이 창립에 참여했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 창립에 미술 이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어지는 모든 민중 미술 계열의 그룹들에 공통된 특징으로 자리 매김 된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에 참가한 미술 이론가는 성완경, 최민, 원동석, 윤범모 등이었고, 작가로는 임옥상, 오윤, 김정헌, 김용태, 노원희, 민정기, 심정수, 신경호 등이었다. 이들은 1980년 10월 정부 산하의 미술관인 문예진흥원에서 창립전을 열기로 했고,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군부의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다. 문제가 어찌 없었겠는가. 미술관측이 이들의 작품을 두고 미술이 아니라느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있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전시장 문을 폐쇄했다. 작가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개막행사를 시도하였고 미술관측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시장의 전원을 꺼버렸다. 전시장은 촛불로 조명을 대신했으나 그 역사적인 전시는 30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내용이 어떠하건, 적어도 이미 결정된 예술 전시회를 신군부가 이렇게 탄압한 것 자체만 보더라도 ‘현실과 발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한다. 결국 이들은 작업보다 수색과 도주, 구금, 그리고 고문과 투옥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감수하면서 행동하는 미술가로 거리에 나서야 했다.

이들은 “미술가에게 있어서 현실은 예술 내부적인 수렴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예술 외부적 충전의 절실함으로 확대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미술가의 의식과 사회현실의 만남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현실 인식의 각도와 비판의식의 심화, 자기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통찰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회복 및 미래의 긍정적 현실에 대한 희망을 추구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미술인들에게 사회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을 요구했다.

아울러 “누가 발언자이며 무엇을 향한 발언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작가와 관람객 간의 주객 문제를 반성할 것을 촉구했고, “기존의 표현 및 수용 방식의 비판적인 극복”을 주문함으로써 사회 현실을 사는 관람 수용자와 발언자로서의 작가 간의 상호작용을 촉구했다.

3) 민족미술협의회

‘현실과 발언’에 이어 ‘임술년’, ‘두렁’, ‘삶의 미전’ 등이 1980년대 초반을 달궜고, 이들 외에 각 지방마다 일정하게 대학이나 지역문화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민중 미술의 열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전문미술가 조직들이 곳곳에서 형성되었고, 전체적으로는 민중 미술 혹은 민족 미술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에 가장 먼저 중심 역할을 한 큰 조직이 바로 1985년에 11월 22일에 창립총회를 해서 결성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이었다.

민미협이 결성되는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있었던 ‘힘전’ 사건을 살펴보아야 한다. 1985년 7월 13일부터 35명의 작가가 출품한 ‘힘전’이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면서 8일째 되던 날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5명이 들이닥쳐 전시중인 그림을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결국 전시장을 폐쇄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힘전탄압대책위원회’를 당장 꾸리고, 곧이어 이를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로 바꾸어 전국적인 운동 단체의 지원 하에 전례 없는 대대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구금된 5명의 작가들은 즉심에서 풀려났다.

참고로 이때 당국이 문제 삼았던 작가와 작품명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손기환의 ‘타! 타타타타!’, 박영률의 ‘비극의 역사, 80. 5. 광주’, 장명규의 ‘X도 못하냐’, 박불똥의 ‘1980. 5. 17. 생’, ‘핫라인’, ‘경찰의 보호감시 아래 서울 목동주민들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다’, 김우선의 ‘이불을 꿰매면서’, ‘김의기 열사 신장도’, 두렁의 공동작품들인 ‘사랑’, ‘산자여 따르라’, ‘구속된 내 친우를 생각하며’, ‘노동자의 힘’, ‘대우 어패럴 해산’, ‘연대투쟁’, ‘이렇게 슬기롭게’, ‘당신은 당국의 노동대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모두 26점이었다고 한다.

이 ‘힘전’ 사건을 바탕으로 결성된 것이 바로 ‘민미협’이다. 이는 미술계에 민족미술진영이 정식으로 규합하여 힘을 모은 첫 모임이라 할 것이다. 대표에 손장섭, 대의원으로는 지역과 단체의 대표성을 고려해 16명(강요배, 김방죽, 김영동, 김우선, 박건, 박불똥, 박상대, 박진화, 박충금, 손기환, 송만규, 이종구, 이홍원, 박흥순, 황재형, 홍성담)을 선출하고, 대위원회의는 운영위원 11명(강대철, 강행원, 김정헌, 문영태, 박석규, 성완경, 신학철, 여운, 유홍준, 주재환, 황효창)을 추천하여 총회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운영위는 박용숙, 김윤수, 원동석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민미협’은 이른바 민중미술의 초대 결집체이기 때문에 그 선언문이 중요하다. 내용은 이렇다.

첫째, 민족분단의 현실과 삶을 갈라놓는 제도적 억압 장치와 방해공작으로부터 벗어나서 냉엄한 통찰과 행동을 통하여 공동체적 삶, 통일의 삶으로 가는 길을 다 같이 모색하는 일이며
둘째, 민족미술의 창조적 발전을 향한 다양하고 통일적인 이론과 실천을 통하여 참신한 참미술인들을 발굴하고 여러 장르의 풍성한 작품의 수확을 거두는 일이며
셋째, 창조나 수용이 조화롭게 만나지며 함께 나누는 통로로써 민중적 삶을 함께 하는 수용의 운동과 교육의 실천방법을 다각적으로 확대하는 일이며 넷째로, 본 협의회의 회원 상호간의 친목도모, 권익옹호, 복지향상 등 제반 사업 활동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홍보하고 실천할 것이다.

선언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민족분단을 극복한 통일의 삶을 강조한 것과 민중적 삶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명칭이 ‘민중미술협의회’라 하지 않고 ‘민족미술협의회’라고 한 것은 미술인들이 지닐 수 있는 계급의식이란 것이 그다지 강할 수 없는 데 반해, 창조성을 생명으로 하는 미술인으로서는 우리 스스로의 민족 미술에 대한 의식은 쉽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민미협’이 결성되기 이전에는 막연하게 통칭 민중 미술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물론 ‘민중’이란 말을 통해 ‘계급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쪽이 나름대로 득세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민중’이냐 ‘민족’이냐, 아니면 ‘민중으로서의 민족’이냐 하는 등의 입장 차이가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활동에 있어서는 민중미술 계열과 민족미술 계열이 나뉜 것으로 보인다. 민중미술 쪽은 노동현장을 지원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예술변혁 운동보다는 사회변혁 예술운동에 치중하게 된다. 이 진영의 논객으로는 라원식, 이태호, 심광현, 이영철, 박신의, 최석태, 장해솔 등이 있다. 이들은『시각매체론』(우리마당)을 통해 그들 나름의 비평적 시각과 이론을 모아 발표한다.

한편 1988년에 이르러 민족미술 진영이 힘을 발휘하면서 ‘민족민주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건준위)를 발족하게 된다. 이들은 평양축전 참가투쟁과 ‘평축 축하그림’ 사건 등을 통해 일부 작가가 구속되기도 하는 등 해서 서서히 ‘민미협’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아 간다. ‘민미련’의 기관지는 『미술운동』이었다.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민미협’과 ‘민미련건준위’라고 하는 두 거대 단체가 이른바 민중미술계 내에서 내부 투쟁을 한 셈이다.

두 조직은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1990년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들 운동권 미술인 조직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3. 주요 작가들

1) 오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오윤은 특히 칼 맛을 잘 드러내는 목판화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판화는 평범한 대중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단순화하여 힘찬 윤곽선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나무의 풍부한 재질감과 고도로 숙달된 칼놀림으로 여백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오윤의 작업 방식은 사회적으로 힘없는 자로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자들의 모습을 결코 수동적이거나 비관적인 방식의 모습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희망적이며 내면에서부터 몸 전체로 드러나는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게 된다. 인민 대중의 고통을 그리되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고 그 내면에서부터 강렬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1970년대 초반, 경주나 지리산에 심취하고 민족의 전통 종교인 증산교에 빠져들어 토속적인 것이나 대중적인 삶의 뿌리, 기에 대한 정열 등을 심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오윤의 개인적인 편력은 김지하의 민족예술론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김지하가 주장하는 바, 민중을 주체로 하는 민족미술의 실현으로서 현실주의(사실주의 내지는 리얼리즘이라 달리 부를 수도 있음)를 지향한다.

오윤은 1970-80년대 많은 저항 지식인들의 시집이나 저작의 표지 그림을 많이 그려주었다. 특히 그가 그린 ‘칼노래'(1985)는 각종 사회를 더럽히는 악이나 부정적인 것들을 혁파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부패, 사악, 오염, 가난, 요괴 등을 민중의 날카롭고 강력한 칼로 다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윤의 ‘원귀'(1980년대 초반)는 분명 광주민주화항쟁의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면서 그 살인자들을 고발하는 그림임에 틀림없다.

2) 신학철

신학철(1943- )은 1970년대 ‘AG’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미술 양식들, 예컨대 초현실주의, 오브제, 꼴라주, 단색회화 등, 이른바 전위적인 작품 양식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이렇게 이른바 민중미술 쪽으로 선회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유명한 미술 작품들이 전해오는 위대함을 동경했고, 그러한 예술의 위대함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위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서는 그런 위대함에 다다르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974-5년경부터 ‘나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고, 자신의 신체를 통한 직접적인 체험의 중요성과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여러 초현실주의적인 오브제나 꼴라주를 하게 된다.

그는 회화적인 묘사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데 1979-80년 쯤에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본 한국 100년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사진들에 들어 있는 한민족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근대사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에 ‘한국근대사’ 시리즈를 그리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신학철은 평론가 김윤수의 눈에 띄게 되고, 김윤수가 추구하는 사실주의 미학의 현대적인 변용을 충족시키는 작가로 평가받게 된다. 김윤수는 적극적으로 신학철을 평가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민중미술을 통해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된다.

신학철의 ‘한국근대사-3’을 보면, 사진을 그대로 붙여 활용한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 그보다도 은유와 상징의 처리 기법이 너무나 기기묘묘해 설명할 거리가 많다.

특기할 것은 그의 ‘모내기'(1987)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내기’의 초가집이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라는 혐의로 1989년 8월 17일 구속되어 1989년 11월 15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검찰의 대법원의 항소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지방법원으로 환송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방법원 환송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았으나 본인은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그러나 1999년 11월 26일 상고를 기각 당했다. 그러나 다시 불복하여 유엔인권위원회에 재소했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한국의 법무부에 사건을 심의하고 있는 동안 ‘모내기’ 작품을 파기하지 말 것을 통보하였다. 결국 2000년 8월 15일 법무부는 사면을 했다.

3) 임옥상

“더 나아지기 위해 어둡고, 칙칙하고, 질척이는 곳을 더듬어 넘어지고 꺼져야 한다. 인습의 굴레, 역사의 층, 철학의 늪, 예술의 허위, 문명의 우상, 그 모두를 헤쳐 맞서자. 이 세계에 한 인간으로 부딪쳐보자.”

1979년 임옥상(1950- )이 그의 작업노트에서 한 말이다. 임옥상은 역사 인식에 의거해 사회 현실을 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 그의 ‘보리밭II'(1983)에서 잘 나타나듯, 그의 그림은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구축을 한다. 그러면서도 붓질 등의 표현 기법은 철저히 사실주의적이다. 그의 초현실적인 측면은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예기치 않게 통념을 확 찌르고 들어오는 힘을 갖도록 한다. 그 힘은 우리네들이 흔히 잊고자 하는 힘들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 없도록 하는 힘이다.

4) 박불똥

비판적 리얼리즘을 위한 포토콜라주의 완전한 대가이다. 본명은 박상모인데, 불꽃이 탁탁 하고 소리를 내면서 튈 때 일으켜지는 불똥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 자신이 붙인 이름이 발불똥이라고 한다.

가장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1988년의 ‘코화카염콜병라’라는 오브제 작품이다. 코카콜라병에 미국 국기를 찢어 입구를 쑤셔 막아 만든 화염병이다. 가히 패러디와 풍자의 최고 일인자라 할 수 있다.

5) 홍성담

1989년 7월 평양에서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의 여대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떠들썩했던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의 슬라이드가 북한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명박 정권 하의 지금도 그랬으면 하고 바라고 이명박 정권에서 언필칭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지난 두 정권의 시절이라면 그 그림 내용에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비록 1987년의 대 격변을 거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군사 정권의 연장이었던 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홍성담(1955- )이 있었다. 그는 광주 5·18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금남로를 뛰어다녔고, 광주시내버스에 페인트로 일련번호를 매기며 5·18에 미술로 ‘복무’했던 화가이다. 공안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이제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한 불순분자가 된 것이다.

이른바 ‘민해운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 평양에 보내진 것이었다. 걸개그림은 세로 2.5미터에 가로 7미터 그림 11폭이 이어진 즉, 가로 77미터의 초대형이었다. 동학혁명에서 일제강점기, 6·25, 5·18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사건 11개가 나누어 그려졌다. 1989년 6월 홍성담은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L.A.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으로 보냈다. 작품은 이미 한양대학교에서 열렸던 집회에 내걸렸다가 경찰이 불태워 없앤 뒤였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민해운사’ 중 홍 화백이 직접 그린 광주민중항쟁 부분에 대해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반미, 반파쇼, 반봉건 투쟁의 시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하여 제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김선수 · 윤종현 변호사 등 홍 화백의 변호인단은 화가의 미술작품이 과연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변론 요지서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보장된 절대적 기본권”이라며 “국가형벌권이 화가의 작품 활동에까지 행사된다면 표현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라고 반박했다.

안기부와 검찰은 홍성담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간첩죄), 회합통신, 금품수수 혐의 등 총 7개의 혐의를 적용, 기소했고 홍성담은 1심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홍성담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간첩죄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변호인 접견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이뤄진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인 접견권 보장을 명시한 이 판결은 당시 공공연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던 수사기관의 위법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영장 발부 이전의 불법 구금과 수사기관에서의 고문과 가혹 행위 등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행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간첩죄 등 5개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에 대해서는 그 죄를 인정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홍성담에 대한 상고심 주심대법관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다.

“우리들의 살과 피를 조국이 더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량과도 관계없이 출옥하는 그날까지 제가 이를 악물고 가슴에, 이 좁은 가슴이나마 시퍼런 정의 신념으로 건강하게 징역살이를 할 것입니다.”

1990년 1월 30일 1심 선고공판에서 7년 선고를 했을 때, 최후진술로 홍성담이 했던 말이다. 그는 최초로 남북의 문화예술 자주교류를 성사시킨 통일화가로 불린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 저서『오월에서 통일로』(청년사, 1990)와 작품집『해방의 칼꽃』(풀빛, 1990)을 냈다. 홍성담을 높이 평가하는 최열은 그를 1980년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민중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남겼다고 말하면서 그의 인격적인 면모에 있어서도 개인주의나 행세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품성이 단호하고 야멸차면서도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4. 대강 정리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 미술이 낳은 가장 세계적인 자생적 미술 양식이다. 자생적이라 함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현실과 현장에서 빚어지는 여러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들을 스스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된 내용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양식(良識)과 양심에 따라 진실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중미술에 대한 이러한 가치와 중요성을 어쩌면 짐짓 또 어쩌면 몰라서 그냥 무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 강의를 기화로 필자도 독자도 다 함께 민중미술의 탄생과 흐름을 통해 한국 미술의 비극적인 열정과 힘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민중미술에 힘을 쏟았던 여러 미술가들은 현재에도 대체로 오늘날 이슈가 되는 여러 문제의 현장을 찾아서 현실의 미술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그들의 자생적인 창조적인 상상력과 나름의 분명한 현실 인식이 결합된 결과 항상 그렇게 열심히 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더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 다음번에는 ‘민중미술 담론 비판’을 연재할 것이다.(필자)

**저작권 문제로 작품들을 실을 수 없습니다. 참고할 작품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독자들의 양해와 저작권에 대한 깊은 분노의 공유를 바랍니다.(편집자)
홍성담, ‘대동세상’(1985, 목판화)
홍성담 관련, ‘민족해방운동사 중 광주민중항쟁도’(1989)
오윤, ‘칼노래’(1985, 목판화)
신학철, ‘모내기’(1987, 캔버스에 유채)
신학철, ‘한국근대사-3’(1981, 캔버스에 유채)
박불똥,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1990, 사진콜라주)
박불똥, ‘코화카염콜병라’(1988, 혼합매체)
두렁, ‘만상천하’(1982, 걸개그림)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한국현대미술사 개관]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

들어가는 말

앞으로 몇 회를 거듭해서 연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번 한국 민중미술의 연재를 기화로 해서 한국현대미술을 그 시초에서부터 개관하고자 한다. 철학 전문 단체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발간하는 ‘웹진’에 한국 미술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나아가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글에서 심도 깊은 분석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략의 기본적인 교양 정도로 여기기 바란다.

사실 이 글을 연재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필자가 지난 2년간 대구에 있는 ‘수성아트피아’에서 미술관련 강의를 하면서 이미 마련되어 있는 강의록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의였기 때문에 그다지 근본적인 분석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가 그럴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강의를 염두에 둔 표현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양해 바란다. 한국현대미술을 차례로 하되, 먼저 한국이 낳은 거의 유일한 독창적인 미술인 민중미술을 살펴봄으로써 여러분의 관심을 얻은 뒤, 다시 한국현대미술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의 한국미술에까지 되돌아오고자 한다.

1. 한국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

1) 상황

역사는 여러 ‘물줄기’를 낳는다. 그 ‘물줄기’들은 서로 다투면서 결국에는 새로운 ‘물줄기’들을 낳고, 그 새로운 ‘물줄기’들은 결국 새로운 다툼을 낳는다. 역사가 빠져버린 현재란 있을 수 없다. 현재는 이미 늘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역사를 어떻게든 함께 끌고 간다. 현재가 없는 역사도 없지만, 역사가 없는 현재도 없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생각을 ‘역사주의’라는 이름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제아무리 역사가 다변화한다 할지라도 역사 전체를 관류(貫流)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진리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주의’에는 이 같은 ‘본질주의’가 대립한다. 역사를 강조하게 되면 본질이 훼손되는 경향이 있다. 그 반대로 본질을 강조하면 역사가 퇴색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강조하면 민족의 문제가 생겨나고 그 역사를 누가 어떤 계층에서 주도하는가 하는 주도 세력과 관련하여서는 민중의 문제가 생겨난다. 그 반면, 본질을 강조하면,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시대적인 주도 세력은 본질적인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임시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에서 서양풍의 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10년 일본으로 유학 간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1915년 일제 강점의 조선으로 돌아 온 뒤부터로 잡는 것이 관례다. 그 이후 21세기 오늘날 팝 아트류의 미술들이나 미디어 아트가 전개되는 데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서양미술은 여러 갈래로 전개되어왔다.

하지만, 싸잡아 말하자면, 한국 민중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미술은 서양에의 유행을 뒤늦게 수입한 것들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우리네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미술계만의 미술’, ‘아카데미즘적인 저들만의 미술’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작가 개개인의 목숨을 건 열정이 스며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바탕에는 이러한 경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 미술사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주도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결국 앵포르멜이나 단색회화 등의 모더니즘 계열이었다. 이들은 미술에 어느 특정 계층이나 어느 특정 민족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예술적인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내세운다. 그런 까닭에 실제로 미술을 창작하는 작가나 미술을 받아들이는 관람객이 어떤 사람인가, 즉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입장을 갖는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색이 중요한가 아니면 선이 중요한가를 그 자체로 다루고, 미술 재료 자체의 질감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 미술 재료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한가를 그 자체로 다룬다.

그런데 1980년대 민중미술이 나타나 전혀 다른 미술 작업의 판을 만들었고, 당시 제도권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발휘하던 이들 모노크롬(단색화)의 흐름과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그런 가운데, 그동안 일천했던 미술에 관한 이론들도 아울러 개발되기 시작했다.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계의 모더니즘적인 미술과 관련 사상에 대해 대대적인 도전을 하고 어쩌면 치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상처를 입혔다.

민중미술은 미술인들과 미술을 애호하고 향유해야 할 사람들이 지금 당장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가를 크게 염두에 두었다. 더 나아가 미술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지금 당장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가를 특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 현실은 폭압적인 비민주적 군사독재와 이를 뒷받침하는 남북분단에 따른 비자주적인 외세의존의 정치에 의거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 긴급한 현안이었고, 이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뒤따랐다.

거의 20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의 거센 물결에 의해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최고의 독재자인 박정희가 가장 믿었던 심복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일거에 막을 내린다. 민주화의 열기를 잠재우고 장기 집권을 획책하면서 1972년 선포된 유신은 한국의 1970년대를 최대한 억압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주범이 피살된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의 기쁨은 잠시였고 전두환 일당을 필두로 한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과정에서 5 ? 18 광주민주항쟁이라고 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감행했다. 이에 민주화의 열기는 일거에 지하로 가라앉는 듯 했으나 결국은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 체육관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호헌을 철폐시키고 일반 시민의 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뽑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두환의 동지인 노태우 정권으로 귀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독재와 민주운동은 여러모로 격돌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불행한 사건들이 줄어 이어 일어났다. 감시, 추적, 수배, 연금, 투옥, 비밀 살해, 분신 등 학교에서나 사업장에서 그리고 정치권에서 끊임없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미술계라고 해서 완전히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면서 대학마다 사복경찰과 이른바 ‘백골단’이라고 하는 특수무술경관들이 가득 차 있었고, 학내 곳곳에서 숨바꼭질하듯이 아슬아슬한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 1985년을 기점으로 대학 내에는 대대적인 이른바 운동권 세력들이 심지어 학과 단위로 생겨나 민주화의 열망을 불태웠다.

한편에서는 민주화의 방향을 소외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기본적이면서 현 단계 가장 주요한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켜 외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현 단계 가장 주요한 것이라 했다. 오늘에 이르러 전자는 주로 ‘참여파’라 일컫고, 후자는 주로 ‘자주파’라 일컫는다. 이 두 양 진영의 각각의 주된 개념은, 전자의 경우 ‘계급’이었고, 후자의 경우 ‘민족’이었다. 아직도 이 일은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지 않은 데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현재의 한국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필자의 원고 분량이 너무 많은 관계로 이번 호에서는 민중미술 발생의 시대적 배경에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민중미술의 탄생과 전개, 그리고 주요 작가들에 대한 글이 이어질 것입니다.(편집자)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admin@admin.com

‘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 [청춘의 고전 시즌2]-②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②

??? 일시: 2012. 4. 14.?(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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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근원’과 여성의 몸

– 구스타브 쿠르베의〈세상의 근원〉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자의 시선 –

 

강연:?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법적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명 영화감독이 이 작품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한 바 있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인 법학자가 표현의 자유와 음란물 판단 기준에 관한 법적 토론을 목적으로 이 작품을 블로그에 게재한 후, 법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을 여성주의 철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청춘의 고전(2) ‘그림에 say’의 두 번째 강연자로 나선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이하 이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주의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여성 철학자이다. 이교수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지금까지 줄곧 논문과 책들을 통해서 여성주의에 관한 일관된 철학적 담론을 제기하고 확산시키고 있다. 이교수가 이번 강연에서 주제로 제시한 것은 ‘쿠르베의과 여성의 몸’이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은 곧 ‘세상의 근원이 여성의 성기임’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성기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 서사를 통하여 ‘여성의 성기는 세상의 근원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결국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이 답으로부터는 아무런 추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이 물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답하는 것은 그 ‘무엇’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이교수의 답은 이것이었다. “여성의 성기는 ‘없음’이다.” 이 답은 단순한 추론을 넘어선 차원의 해석이다. 이 해석은 쿠르베의 작품에서부터 “여성의 성기는 ‘없음’이다.”라는 명제가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점에서 추론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 앞에선 감상자의 단순한 느낌도 아니다. 이 해석은 그러한 차원을 넘어선 철학적 해석이다.

▲ 이현재 서울시립대 HK 교수 ⓒ프레시안(민정훈)

1. 쿠르베의 시선

이교수가 여러 수강생들에게 쿠르베의 작품을 보여주고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 지를 물었을 때, 수강생들이 답한 느낌은 다양했다. 강의실에는 지난 첫 번째 강의에서처럼 남녀노소의 다양한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만큼 답도 다양했다. 이교수는 수강생들의 반응을 살핀 후, 크리스틴 오르방이 쓴 소설 『세상의 근원』(함유선 역, 열린책들, 2001)을 소개하면서 쿠르베가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쿠르베의 시선을 이야기하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 소설을 통해서 이교수가 찾아낸 시선은 여성의 몸을 마치 법의학자와 같이 보는 시선이다. 즉, 치밀하게 계산하고 분석하고 철저하게 따져보는 시선이다. 그러면서 대상을 완전히 주관에 따라서 만들어 내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단지 화가 쿠르베의 시선이라기보다는, 남성적인 시선이다. 그리고 이 남성적인 시선이 대상을 규정하는 서양 철학의 근본 원리이다. 이 남성적인 시선을 통해서 대상을 보아왔기 때문에 서양 철학은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이 이교수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 시선이 서양 철학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철학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를 도식화 해왔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는 사실 서양 철학이 은폐하고 있었던 소위 불편한 진실이었다. 이교수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둘로 나누면서 이 둘을 수평적인 둘이 아니라, 위계적인 둘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서양 철학에 의해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위에 있는 위계적인 이분법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적인 이분법의 의미가 은폐되어 있는 철학의 근본 개념들이 바로, 이성과 감성, 마음과 몸, 문화와 자연의 구분이다. 이 구분에서 앞에 있는 것이, 플라톤 이래로, 줄곧 뒤에 있는 것에 대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고 이교수는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이교수는 “앞에 있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를 정립하는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이었으며, 그에 반해서, 후자의 것은 전자에 의해 정립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말하면서, “서양 철학사에서 이성적인 것은 항상 남성적인 것이었고, 감성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남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에 앞서는 위계적인 이분법을 고수하기 위해서 서양 철학이 끊임없이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남성적인 것의 근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의 근원, 마음의 근원, 문화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이 근원을 정립하고자 할 때 철학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사실 ‘남성적인 것의 근원은 다름 아니라 남성적인 것에 있다’라는 결론이다. 그 남성적인 것이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서양 철학이 탐구하였던 것이 바로 남성적인 것의 근원을 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 고귀한 것,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 이상적인 것에 두는 것이었다. 그 근원은, 간단하게 말해서, ‘있음’과 ‘없음’ 중에서 ‘있음’이며, ‘있음’ 중에서도 ‘꽉 차 있음’이다. 그래서 이교수에 따르면, 서양의 철학은 바로 이 ‘꽉 차 있음’에서 출발해서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는 것을 정립한 것이다. 그 근원으로부터 위계질서를 세우면, 사유와 세계는 보편성, 완전성, 절대성에 따라 법칙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철학은 남성 우위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부터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이 바로 남성 우위의 철학이었다”고 이교수는 말하였다.

ⓒ프레시안(민정훈)

2. 쿠르베의 혁명성과 한계

이교수는 쿠르베를 양가적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는 혁명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계였다. 우선, 쿠르베는 남성적인 것의 시선이 감추고 있던 진실을 들추어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쿠르베가 들추어낸 진실은 남성적인 것의 시선을 아무런 미화나 신비화 없이 추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즉, 높은 곳, 천상적인 곳, 이상적인 곳으로 향하던 남성적인 것의 시선을 낮은 곳, 지상적인 곳, 구체적인 곳으로 되돌리면서 남성적인 것의 시선이 지닌 문제를 사실적으로 들추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쿠르베가 여성의 성기가 세상의 근원임을 보여줌으로써, 이전까지 믿어왔던 남성적인 것의 근원이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성적인 것이었다는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성들이을 보고 느끼는 불편함은 곧 세상의 근원이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임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남성 우위의 도식이 위협 받는 불안감에 기인한다고 이교수는 설명하였다. 여기서 쿠르베는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데, 그 한계는 사물을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대상이 되게끔 하는 남성적인 시선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그려진 여성의 몸은 마치 해부학 실험실에 놓여 있는 죽은 몸 혹은 덩어리로 보이게 하며, 그러하기에 여성의 몸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앞에 고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림에서 그려진 여성의 몸은 가슴에서부터 성기까지 잘라졌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입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쿠르베의 시선은 여전히 대상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과거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이교수는 지적하였다.

그래서 이교수는 “쿠르베가 여성의 성기를 세상의 근원으로 발견했지만, 그 여성의 성기는 결핍, 없음으로 규정된다”고 말하였다. 여기에는 남성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철학적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데, 그 논리는 바로 ‘있음’으로부터 ‘없음’을 규정하는 이분법적 규정이다. 이교수는 ‘있음’과 ‘없음’을 기호로 표현하면, A와 ~A가 된다고 언급하면서, ‘없음’은 다름 아니라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자가 곧 남성이고 후자가 곧 여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면서 프로이트가 주목한 것은 바로 “남성의 성기는 ‘있음’이고, 그 ‘있음’이 ‘있지 않음’으로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남성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형성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그 ‘없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음’은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신비감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되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없음’ 대해서 이교수는 라캉의 말을 인용하면서 깜깜한 동굴, 구멍, 비어 있음을 통해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무엇을 안다는 것은 곧 알지 못하는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그 대상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식은 곧 정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곧 서양의 주류 철학사이자 서양 중심의 문명 형성사였다. 다시 말하면, ‘있음’을 통해서 ‘없음’을 정복하여 대상화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곧 철학을 통한 계몽의 과제이자 문명의 발달 과정이었다. 이 과정의 근저에 깊게 흐르고 있는 것이 남성 우월주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교수는 “‘있음’으로서의 남성은 구멍, 비어 있음, 무지의 세계를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없음’이 주는 공포감과 불안을 남성은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없음’으로서의 여성의 몸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프레시안(민정훈)

3. 남성/여성의 위계적인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플라톤 이래로, 육체는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고, 인간은 가지적인 세계인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해 육체를 영혼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서양 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고 이교수는 말하였다. 그러면서 이교수는 “여성을 비본질적이고 종속적이기만 한 육체로 보았다는 통념에 문제가 있음을”지적하면서, 여성주의 철학자들이 여성에 대한 이러한 종속적 규정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고자 노력해왔고 그 성과를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 세 가지 가능성을 찾는 핵심은 여성의 몸이 위계적으로 구분되어 오직 남성만 자기규정성을 가지고 있는 ‘있음’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없음’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자체적인 힘을 가지며 스스로 자기 규정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개념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위의 노력을 통해서 여성의 몸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남성적 담론을 넘어선 새로운 담론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성과가 마련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교수는 “위계적인 이분법을 넘어서서 ‘여성의 몸’이라는 개념의 능동적인 자기 규정성을 찾는 것이 여성주의 철학자의 과제”였다고 언급하면서, 이 개념을 찾기 위해 전 세계의 여성주의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 왔음을 이교수는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를 플라톤의 ‘코라(chora)’, 이리가레의 ‘두 입술’, 그로츠의 ‘뫼비우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즉, 위의 세 개념을 통해서 남성/여성의 위계적인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규정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이 가능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강의 자료를 통해 준비해 왔으나 아쉽게도 약속한 강의 시간이 다 되어, 이 교수는 개략적인 설명을 통해 언급한 이후에 강의를 마무리했다.

강의가 끝난 후 곧바로 이어진 질문 시간에는 다양한 수강생들의 열띤 질문이 이어졌고 이교수는 하나하나 충실히 답하였다. 질문은 계속 이어져 8개의 질문과 답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진지하고 열의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열의는 다음 강연까지도 이어질 것이다. 다음 세 번째 강연은 4월 28일 6시에 상상마당 4층 강의실에서 열리며, ‘살바도르 달리의 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이라는 주제로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이 강연자로 나선다.

후기: 김민수 (한철연 회원)

세한의 계절(歲寒之時)에 느끼다 [청춘의 고전 시즌2]-①

? [청춘의 고전 시즌2 /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①

??? 일시: 2012. 3. 24.?(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세한의 계절(歲寒之時)에 느끼다

– 추사의 <세한도>와 사마천 ‘사기’ 속의 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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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전호근 (경희대 교수)

 

“우리의 삶 속으로 추위가 온다는 것은 시련인데, 시련이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 날씨가 추워졌을 때 삶의 가치가 비로소 드러난다.”(전호근 교수)

봄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토요일이라 젊은 청춘들로 북적대는 홍대 앞에도 여지없이 바람은 세차게 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휘감고 돌아 나갔다. 오전에 인왕산 자락에 갔었다가 휘몰아치는 돌풍을 만났던 필자는 ‘저 바람도 인왕산의 소나무를 한 바퀴 돌아 나왔겠지’라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처음 찾아간 상상마당의 복합적인 건물 구조가 익숙하지 않아 간신히 계단을 찾아 4층 강의 공간으로 올라갔을 때가 5시 35분이었다. 한 눈에 들어온 넓은 강의 공간에는 5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책상이 14개나 두 줄로 줄지어 있었고, 그 뒤로 간이 의자가 30여개 넘게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유리창 밖의 세찬 바람과 가지런히 놓인 책상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보이는 뒤쪽의 간의 의자에 앉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두 쪽이 강의 원고를 천천히 읽으며 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우산을 접듯, 바람을 접고 들어온 수강생들이 앞의 책상에서부터 하나 둘 씩 자리를 채웠고, 필자가 앉은 자리 앞에도, 옆에도 그리고 뒤의 맨 마지막에도 수강생들이 가득 찼다. 시간이 임박하여서는 급히 온 수강생들이 바람을 닫는 소리로 분주하였지만, 이내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오늘부터 시작하게 될 <청춘의 고전2-‘그림으로 읽는 철학>의 첫 강좌 – 추사의 <세한도>와 사마천 ‘사기’ 속의 공자 – 를 기다렸다.

6시가 되자 상상마당의 프로그램 기획 담당자가 인사말을 건넸다. 수강생들 중에는 지난해 <청춘의 고전1-영화로 읽는 철학>을 듣고 또 온 사람이 꽤 많았다. 잠시 후 기획 담당자가 예고한 6시 10분이 되자 드디어 오늘의 강사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렇게 하여 <청춘의 고전2-‘그림으로 읽는 철학>의 첫 강좌가 시작되었다.

‘인문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라는 세간의 표현이 무색하게 홍안의 청년에서부터 백발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수강생들이 자리를 꽉 메운 강의실의 풍경에 전호근 교수도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이렇게 많이 올지 몰랐습니다.” 다산, 연암, 추사의 원전 강독 강좌에 정평이 난 전호근 교수가 대중 강연에 나와 처음 던진 인사말이었다.

“인문학은 어려운 학문입니다. 그리고 제 강의도 그렇습니다.”라고 운을 떼며 전 교수는 곧바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인문학이 기성복을 사듯 몸에 맞는 적당한 것을 쉽게 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옷을 지어서 입는 것이라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 가며 직접 옷을 지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전교수의 설명이었다. 물론 그 옷을 만드는 과정에는 애써 짠 옷을 풀었다가 다시 짜는 실패의 경험도, 서툰 바느질에 손끝이 찔리게 되는 아픔의 경험도 함께 들어 있다.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 겪는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일상생활에 쫓기면서 기성복을 골라 입듯이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고전은 불편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멀리 있으면서도 낮선 ‘어떤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전은 진리만을 말할 뿐인데, 진리와 멀어지게 된 거리가 고전을 어렵게 만든다. 고전 읽기의 어려움 정도는 현존 상황에 대한 익숙함 정도와 비례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 교수는, 『논어(論語)』를 예로 들어, 역사적으로 분서갱유를 당한 과거의 금기가 오늘날에도 ‘공자가 죽어야한다’ 혹은 ‘공자는 멍청이의 원조이다’라는 터무니없는 말로서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 시각에서 언급하면서, “우리가 고전을 어떻게 읽느냐가 바로 ‘고전’의 수준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좋은 책이란 현실이 진리를 외면할 때 금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역사적으로 우리의 선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고전을 읽어왔는지 안다면, 그 앎 속에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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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한도에 담긴 조선시대의 불멸의 정신

전 교수가 세한도에서 읽은 것은 조선시대의 ‘불멸의 정신’이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불멸의 정신은 다름 아니라 성리학의 ‘리(理)’이며 이것이 사대부의 정신이었는데, 그 마지막 정신이 세한도에 있다”는 것이다. 창 밖의 세찬 바람도 저 멀리 달아나게 할 정신. 그 정신이 이 세한도에 있다는 것이다. 추사는 단지 ‘그림’만을 잘 그리는 제자보다는 먹이 스며들듯 정신이 깃든 ‘문자향’을 잘 드러낸 제자를 사랑하였다는데, 그 이유를 전 교수는 추사가 그 어느 것보다 더 높게 추구한 불멸의 정신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 교수는 ‘추사의 세한도가 왜 명작인가?’라는 물음에 대에 대해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단지 ‘그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향(香)’이라 할 수 있는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 교수가 강의 자료로 가져와 보여준 추사의 세한도 그림에는 우선 흰 여백이 있었다. 그리고 여백 한 가운데에 갈필로 그려진 소나무 두 그루와 문이 정면으로 나 있으면서 비스듬히 놓인 집이 있었고, 왼쪽에는 잣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오른쪽 상단에는 그림의 제목인 세한도(歲寒圖) 글씨가 있었고, 그 옆으로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에게 준다는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이어서 추사(秋史)의 또 다른 대표적 호(號)인 완당(阮堂)이라는 글씨와 함께 본명인 정희(正喜)라 씌여진 낙관이 찍혀 있었다. 오른쪽 하단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이 낙관처럼 찍혀 있었다. 그 이외에 어떤 세찬 바람은 없었다. 4층 강의실 너머로 가로수들을 심하게 흔드는 바람보다 훨씬 더 거센 제주도의 바람이 불었을 법한데, 세한도에 바람은 없었다. 추사의 정신 속에는 바람이 이미 지나간 이후였다.

전 교수는 세한도가 그려진 때가 세밑 겨울이 아니라 의외로 여름이었다고 한다. 나무도 실제 소나무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전교수는 조선 문인화의 정수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언급하면서, ‘진경(眞景)’은 “눈에 보이는 단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둘러본 이후에 생긴 ‘참눈’으로 일체를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참눈’은 바로 문인(文人)의 정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교수는 겸재(謙齋)가 진경으로 산수를 보았듯, 추사가 세한을 보듯,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진경(眞景)으로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전 교수는 하나의 예를 들었다. 예는 봉은사 판전현판(殿板, 1856) 글씨로 낙관부의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 암시하듯 추사의 마지막 글씨이다. 전 교수에 따르면, 이 글씨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보면 그저 초등학생 친구가 쓴 글씨로 “똥 싸질러 놓은 듯한 글씨”일 뿐이다. 이 말은 예전에 초등학생이었던 전교수의 딸이 추사의 글씨를 보고 했던 말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무거운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붓의 무게마저 내려놓은 노인의 마음으로 보면 “해탈하고 나서야 알 듯한 글씨”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전 교수의 어느 벗이 일전에 대화를 나누다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 예를 들면서, 전 교수는 “그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삶을 통한 체험의 무게와 작품의 내면에 깊이 닿는 ‘순간의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체험의 무게가 무겁지 않으면 작품 내면의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을 뚫고 나가는 ‘해탈’인데, 추사의 마지막 작품에는 그 ‘해탈’의 경지 즉,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도달한 경지가 있다는 것이 전 교수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전 교수는 이런 설명은 아무리 애써 말해도 작품을 보는 감상자에게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작품 앞에 마주선 감상자가 직접 자신의 경험 속에서 느끼는 그 ‘순간’을 반드시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면 말이란 쓸모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사의 세한도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림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어쩌고 저쩌고’ 말(say)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 쓸모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전교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서 혹은 렘브란트의 말년의 자화상 앞에 설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언급하였다. 흔히들 모나리자에 대해서 색체의 원근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혹은 눈썹이 없어 미완성 때문이라는 등등의 말, 램브란트가 빛을 만들기 위해서 계란 흰자를 사용했다는 등의 말로서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경험의 ‘순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 교수는 고흐가 친구화 함께 미술전시관에 갔다가 램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1665년 작) 앞에 서서 몇 시간을 꼼짝 안하고 서 있다가 친구에게 “내가 이 그림을 2주 동안 계속 감상할 수 있다면 나의 수명 중에 10년을 줄여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작품을 볼 때에는 그러한 ‘순간’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덧붙여, 전 교수 “나의 경우에는 10분쯤 줄여도 좋을 것”이라고 말하며, “어쨌든 10년이든 10분이든 수명을 줄여도 좋다고 인정한다는 대단한 것 아니냐”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유발하면서 청중과 호흡하는 강의를 진행해 나갔다.

 

▲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KT&G 상상마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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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사, 태사공, 공자의 세한(歲寒)

“우리가 세한도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단지 그림의 이렇고 저러한 면이 아니라 그 그림 속에 담긴 추사의 생각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전 교수는 세한도의 발문(跋文)을 읽기 시작하였다. 세한도의 발문은 단지 천만리 밖 먼 곳에서 여러 해에 걸쳐 책을 구해다가 추사의 유배지인 제주도에 가져온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기록한 단순한 발문이 아니다. 발문에는 추사가 느낀 세한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이 발문이 소나무와 잣나무 두 그루와 집 한 채가 있는 그림과 함께 세한도라는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추사의 발문에는 옛 성인인 태사공(太史公)과 공자(孔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낀 세한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태사공은 이르길, ‘권세와 이익으로 만난 관계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고 나면 사귐 또한 끝난다.(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流)’고 했다. 그대 또한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스스로 도도히 흐르는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이 말은 곧, 태사공의 시대에도 그렇고 추사 당대에도 그러하듯,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좇아 그것을 얻기 위해 마음과 힘을 그토록 허비하는데, 그러한 권세와 이익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바다 멀리 초췌하고 바싹 마른 늙은 추사에게 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아가는 듯 하는 제자 이상적을 고맙게 여겨 추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전교수는 태사공의 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감내해야 했던 세한의 계절은 곤궁함이고 누추함이고 고독함이었다. 전 교수는 “우리는 누구를 볼 때, 그 사람이 이룬 훌륭한 성취만을 보고 그 사람의 삶을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추사의 실질적인 삶은 비참했다고 언급한다. 전 교수는 비참했던 추사의 제주도 유배 생활은 당시 그가 남긴 수많은 서간들에 잘 드러나 있다고 언급하면서, 가족들과 친지들에 보낸 서간들에는 기가 막히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숱한 풍토병과 눈병에 시달려 약을 구해달라고 하는 등등의 구구절절한 내용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추사는 겨울에는 한풍으로, 여름에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고난과 역경의 삶을 연명해야 했었다.

추사의 세한도에 담긴 단아하고 굳건한 정신은 단지 도도하고 강건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배로 올 수밖에 없었던 세상의 풍파, 즉 세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세한의 계절에서부터 비롯해서 세한의 계절을 이기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이 흔들림 없는 ‘불멸의 정신’이다. 그 정신이 흔들림 없이 표현된 것이 다름 아니라 세한의 이후에도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두 그루, 그리고 고즈넉한 집이다. 이렇게 보면, 추사의 세한도에는 세한의 계절을 모두 거치면서도 그 시간을 이겨내고 극복한 숭고미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 정신에는 세한의 계절에 놓인 세계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태사공에 이어서 전 교수는 발문에 적힌 공자의 말을 읽어나갔다. “공자께서 이르시길,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고 하셨다. 이 말은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구절을 태사공이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온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비로소 깨끗한 선비가 드러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언급하면서 인용한 것이며, 이 말을 다시 추사가 발문에서 인용하여 적은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 추사는 발문에서,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통틀어 시들지 않으니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歲寒之前) 그대로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일 뿐이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歲寒然後)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일 뿐인데, 성인께서는 단지 날씨가 추워진 뒤의 소나무와 잣나무만을 칭찬하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이어서 제자인 이상적이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그리고 추워진 후에도 변함없는 것을 언급하면서, 추사는 “그렇다면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겠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적고 있다.

전 교수는 세한지전(歲寒之前)과 세한연후(歲寒然後)를 구분하면서, 소나무와 잣나무가 날씨가 추워진 이후에도 여전히 굳게 푸르른 것은 변함없는 ‘인(仁)’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전교수는 직접 강의 자료로서 준비해온 사마천의 「백이열전」 중의 한 글을 읽으면서 탐욕스러운 재물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인덕을 쌓고 개끗하게 행동했던 백이, 숙제(伯夷, 叔齊)의 ‘인(仁)’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공자의 70명 제자 중 유독 배우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훌륭했다는 ‘안연(顔淵)’의 이야기를 했다. 비록 백이, 숙제는 굶어 죽고, 안연도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여 끝내 일찍 죽고 말았지만, 깨끗한 선비는 세상의 권세가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부귀를 가볍게 여겼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전교수는 온 세상이 어지러워진 이후에야 그 속에서 깨끗한 선비가 드러남을 백이, 숙제, 안연을 통해서 이야기 한 것이다. 이렇듯, 추사가 태사공과 공자와 함께 느낀 세한의 의미는 곧, 세한의 계절을 겪은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문인(文人)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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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날씨가 추워진 이후(歲寒然後)에 먼 곳에서 찾아온 벗

공자는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사람이 알아주지 못해도 노엽게 생각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고 말했다. 사람이 알아주지 못해도 노엽지 아니한데, 날씨가 추워진 이후(歲寒然後)에도 먼 곳에서부터 벗이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아마도 추사는 멀리서부터 찾아온 제자 이상적과 그가 스승의 오래된 벗으로부터 구해 온 책들을 보며, 젊은 시절에 청나라 연경에서 함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 기쁜 시간을 함께 보낸 스승과 벗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전 교수는 강의 마무리 즈음에 이르러, ‘먼 데서 찾아 온 벗’이라는 화두를 꺼내며 ‘1984년 5월 어느 날… 버디 있어 먼 데서 찾아오니…’라고 적힌 강의 프리젠테이션 화면을 띄웠다. 1984년 5월 어느 날은 전 교수가 눈물을 흘렸던 직접적인 체험이 담겨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종로 어느 골목에서 젊은 날의 전 교수가 눈물을 흘렸던 날이었는데, 그 이유는, 코를 따갑게 만들며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자욱한 최루 가스 때문이었다. 아울러 전 교수가 눈물을 흘렸던 그 날은 또한 때마침 방문하여 종로 인근에 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그 가스로 인해 눈물을 흘렸던 날이었다. 그 때, 요한 바오로 2세가 어느 연설장에서 한 첫 말이 “버디 있어 먼 데서 찾아오니….”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전교수의 추측에 따르면, ‘버디 있어’라고 잘못 발음한 것을 보니 누가 원고를 대신 써준 것이 아니라, 교황이 직접 썼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오면서 “2,500년이라는 시공간을 관통해서 왔었다”고 말하였다. 전교수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는 논어를 읽고 감명이 들어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를 첫 인사말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 곳에서부터 찾아온 벗을 너무 즐겁게 반겨서 최루 가스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전 교수가 개인적 체험을 거론한 것은 단지 주관적일 뿐인 한 때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전교수는 사마천의 어느 한 문장을 기억하여 말하면서, 역사가는 “지나간 일을 기록함으로써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述往事思來者)”라고 말하였다. 즉, 역사가의 서술 작업은 과거를 정확하고 진실하게 기술함으로써 과거 속에 올바른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역사 서술은 문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회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역사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우리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아울러 미래 또한 아무런 전망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교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 전교수는 4.19세대들은 후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알리는 데 성공했다면, 5.18세대들은 후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 속에 담긴 성과와 과오를 알려주는 실패했다고 언급했다.

전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당대의 뛰어난 사람을 벗으로 사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교수는 이런 의미에서 “당대의 뛰어난 벗이 있어 직접 찾아갈 수 있다면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러나 만약 당대의 뛰어난 벗이 없다면, 옛 사람을 벗으로 사귈 수 있다”고 말한다. 옛 사람을 벗으로 사귀는 것이 곧 역사를 읽는 것이자 역사 속에 오래도록 남은 고전을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이덕무(李德懋)가 “책을 읽다가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너무나 아쉬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늦은 시간까지도 강의실을 가득 메운 수강생들에게 “우리는 책을 읽다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전교수는 이 물음에 대해서 “만약 이 기준에서 볼 때, 우리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면, 우리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먼 곳’이란, 단지 지리적으로 이동 거리가 먼 곳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벗이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쫓아 자신의 온 정열을 쏟으면서도 벗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먼 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먼 곳’이란, 시공간적 의미에서, 단지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의 사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래 전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그의 생각을 문헌을 통해서 읽고 헤아리고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벗은 아주 가깝게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교수는 고전이란 바로 우리가 벗으로 여긴다면 아주 가까울 수 있으면서, 그 반대로는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언급한다.

날씨가 추워진 이후에 추사에게 찾아온 벗은, 먼 곳에서부터 어렵게 책을 구해서 제주도로 찾아온 제자 이상적뿐만 아니라, 그 책을 전해준 당대의 벗들, 그리고 그 책 속에 담긴 아주 오래된 벗들이었다. 이 벗들을 만나 즐거운 마음에, 세한연후(歲寒然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가는 것을 알게(知) 된다는 공자의 말을 빌어, 추사는 비록 거리는 멀리 있지만 가까이 온 벗을 반긴 것이다. 그러면서 그 반가운 마음을 추사는 새한도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이 새한도를 받은 이상적이 그해 연경에 찾아가 추사의 벗들에게 그 마음을 보였을 때, 그 벗들 또한 즐겁고 반가운 마음에 서로들 찬시(讚詩)를 덧붙여 썼던 것이다. 우리도 세상살이의 풍파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벗들은 세한연후에야 비로소 ‘먼 곳’에서부터 찾아온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더라도 바람이 지나간 연후에는 벗이 찾아온다.

전 교수는 강의 중반부에서 “예술가가 외롭고 고독한 존재인 줄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을 하였는데, 어쩌면 우리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임을 정녕 몰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진지한 ‘순간’을 삶에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혹은 불편한 진실로 여기고 살아간다. 전 교수의 말 속에는 전 교수가 추사의 ‘세한도’를 통해서 전해주고 싶은 결론이 암시되어 있었다. 즉, 우리가 외롭고도 고독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세상의 추운 한파를 견뎌 낼 때, 세한연후(歲寒然後)에는 먼 곳에서 벗이 오는 기쁜(樂)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강의실 밖에는 여전히 봄꽃을 시샘하는 세찬 바람이 불어 가로수는 흔들렸다. 하지만, 새한도 안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강의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안 전교수는, ‘세한의 계절(歲寒之時)에 느끼다’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지며, “우리의 삶 속으로 추위가 온다는 것은 시련인데, 시련이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 날씨가 추워졌을 때 삶의 가치가 비로소 드러난다.”라는 말로 강의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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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찬 바람을 뚫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온 벗

이윽고 강의의 여운이 남겨진 가운데, 청중의 질문 순서가 이어졌다. 첫 번째 질문은 “못된 사람이 잘 사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못된 것은 못된 것이라고 서술하는 것이 역사이고 사마천은 그렇게 했다. 사마천은 역사 속에 미래를 담은 것인데, 지금의 우리 상황은 사마천의 시대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역사를 서술하는 것 이외에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좀 더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이상적이 가져온 책은 추사가 원했는가? 아니면 이상적이 알아서 가져온 것인가?”였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둘 다 맞다고 할 수 있다. 추사는 연경에 있던 벗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최신의 책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데, 제자 이상적이 그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 그 외에 세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고, 전교수는 차례대로 답하였다. 질문자 중에서는 일산에서 고등학생과 함께 온 어머니도 있었다.

‘너는 홍대 앞 클럽 가니? 나는 홍대 앞에서 철학한다.’라는 다소 시대상을 반영한 도발적인 문구로 상상마당+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청춘의 고전>이 지난해 ‘영화+철학’으로 시즌1을 마친데 이어 올해 ‘그림+철학’으로 시즌2를 시작하였다. 시즌2의 제목은 ‘그림에 say’이다. 필자는 ‘그림’에 대해서 어떻게 ‘말(say)’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미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전호근 교수가 강의 중에 말했던 바와 같이,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없다면 부차적인 것이거나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인데, 어떻게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선 감상자의 미적 체험이 없이는 보일 수 없는 그림을 누군가가 말로서 대신 체험하게 해 준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밖에 부는 바람 때문일지 아니면 시대적 요청일지, 여하튼 아직은 모를 어떤 힘에 의해 ‘그림에 say’라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실험에 필자 또한 타의 반, 자의 반 쓰기로 약속한 ‘글쓰기(write)’를 시작하였다. 글쓰기에서 좋은 문장을 얻기 위해서는 손의 힘을 빼는 것이 필요할 터인데, 아마도 이것이 필자가 ‘그림에 say’를 쓰는 것에 더욱 더 필요할 것 같다.

소위 인문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를 겪는 동안 학자들은 현실과 대중에 다가가지 못했던 자기반성을 시도하였고, 이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멀리 있는 것으로만 여겼던 ‘벗들’을 찾아 나섰다. 춘삼월이라 하지만 아직 봄꽃을 시셈하는 세찬 바람이 불어옴에도 불구하고, 그 바람을 뚫고서 상상마당 4층 강의실로 우산을 접듯 바람을 접고 ‘벗들’이 들어왔다. 벗이 있어서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만약 그렇다면 마치 제자 이상적이 먼 곳에서 찾아왔을 때 추사가 세한도를 건네며 고마움을 표현했듯이, 이제 우리의 선학자들도 ‘벗들’에게 어떤 울림의 말을 해서 고마움을 표현할지 기대해 볼 일이다. 울림이 클 때 벗들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學而時習之說也).

 

후기: 김민수 (한철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