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금서, 맹자[천하무적 맹자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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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책의 운명.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서는 무엇일까? ‘시서’다. 그런데 시서는 가장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시서는 시경과 서경을 합쳐서 일컫는 말인데, 시경은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민간에 널리 암송되었던 시를 모아놓은 책이고 서경 또한 그 무렵을 전후한 역사 기록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둘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자 유가를 대표하는 문헌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책과 가장 오래된 금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결국 모든 책은 누구에겐가 금지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음을 일러주는 셈이다. 게다가 그 책들이 유가를 대표하는 문헌이라는 점은 유가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금지했던 자는 역설적이게도 시서의 전문가 순자로부터 유가의 세례를 받았던 이사(李斯)였다. 화란의 씨앗은 유가의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의 말을 빌리면 이 두 책은 ‘옛 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난〔以古非今, 道古以害今〕’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 맞는 말이다. 천하가 이미 진나라로 통일된 마당에 이런 저런 말이 많은 유가는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게다가 이사는 본디 유가에 맺힌 원한이 있었다.

일찍이 스승 순자에게 유가의 인의가 무용하다고 논쟁을 걸었다가 “근본은 팽겨쳐 두고 말단만 뒤지는 바로 너 같은 자들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것〔今女不求之於本 而索之於末 此世之所以亂也〕”이라고 인격적 모독을 받지 않았던가. 그는 진나라로 떠나면서 순자에게 이렇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부끄럽기는 비천보다 더한 게 없고 슬프기로는 가난보다 더 심한 게 없습니다.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면서 세상을 비난하고 이익이 싫다고 하는 일 없이 몸을 맡기는 것은 선비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莫大於卑賤 而悲莫甚於窮困 久處卑賤之位 困苦之地 非世而惡利 自託於無爲 此非士之情也〕.”

스승 순자에게 선비답지 못하다고 칼을 던지고 떠난 셈이다. 순자가 그에게 뭐라고 말해주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진나라를 말세로 규정했던 스승 순자에게 보란 듯이 천하를 진의 제국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인의의 무력함을 직접 보여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진시황제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말했다〔昧死言〕, 인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떠받드는 책을 불태우고 그 추종자들을 생매장하라고.

죽음을 무릅쓰는 집요함은 아무래도 스승에게 버림 받은 콤플렉스가 작용한 듯하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이렇게 이사의 개인적 한풀이가 강하게 작용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분서’는 책을 불태운다는 뜻이고 ‘갱유’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한다는 뜻이다. 책만 불태우면 될 것을 왜 사람까지 생매장했을까? 문(文)과 헌(獻)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다. 흔히 문헌(文獻)으로 붙여 쓰는 ‘문’과 ‘헌’은 본래 ‘전적’과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자를 담는 가장 훌륭한 매체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튼 이사는 시황제에게 시서와 백가의 말을 기록한 책은 모두 불태우도록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불태우지 않을 책으로 의약과 복서 그리고 농사일 따위를 기록한 실용서를 꼽았다.

이 당시 맹자의 책 또한 불태워졌을 것이다. 맹자는 시서백가의 말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실용서에 포함되는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시서처럼 구체적으로 지목되면서 불살라지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른바 맹자는 당시까지 시서와 같은 경(經)의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맹자가 경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송나라에 접어들어서 당시까지 12경이었던 유가문헌을 13경으로 확정하면서부터이고 맹자의 수난은 맹자가 경으로 확정되고 나서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면서 일어났다.

엽기적인 탄압

역사에 기록된 가장 엽기적인 맹자 탄압 사건은 명대에 이르러 일어났다. 주인공은 무한의 권력자였던 명태조 주원장이다. 어느 날 그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

그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짐작하는 대로 그는 맹자를 읽고 있었다. 어떤 대목이 그를 그렇게 광분하게 했을까?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고 한 대목!

그가 보기엔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형벌에 ‘대’자가 붙으면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
주원장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추한 용모 만큼이나 더러운 성질로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되고나서도 족히 5만명은 죽인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이 비천한 시절 절에서 머리 깎고 청소한 이력이 부끄러웠던 걸까. 자신의 빛나는 머리를 풍자한다고 하여 모든 문서에 ‘光’자를 못 쓰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전당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그가 바라던 대로 나중에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조가 망할 때까지 제사를 받아먹었으니 죽지 않고도 영예를 길이 누렸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다.

유삼오는 모두 260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장을 삭제하고 172개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했다. 맹자 맞아?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27년(1394)에 반포되어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12년(1414) 성조의 명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아무튼 절대권력을 원했던 주원장이 맹자를 탄압한 것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적절했다 할 것이다. 최소한 맹자가 절대 권력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제대로 알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나라 공안기관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불온문서 검토대상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적이 있다. 선정자가 목적에 비추어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을 바로 알아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최근에도 21개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적이 있다. 개중에는 이게 왜 불온서적인지 알 수 없는 책도 있었다. 게다가 어떤 지식인은 자기 책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하지 않은 것을 두고 자신의 미온적인 삶을 반성하기도 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 공안기관이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이제라도 맹자를 불온서적 목록에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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