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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고 호혜주의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고 호혜주의이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다.

 

우리는 앞서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Eigennutz)에서 나 자신의 유용을 위해서만 합의에 동의한다.”(351)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지만 ‘서로 서로’ 사용하므로 ‘서로에게’ 자기향유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의무는 결국 나에 대한 나의 의무이고 이것이 에고이스트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러한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고 상호적 자기 향유라고 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힘의 증가를 지향한다.

 

“그리고 내가 같은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나는 개인이 실현할 수 있었던 권능보다, 합의를 통해 내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의 권능을 통하여 내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하여, 의심할 바 없이 그와 의사소통을 한다. 이러한 유대에서 나는 내 힘의 상승만을 본다. 그리고 오로지 유대가 증가된 힘인 한에서만, 나는 유대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유대는 어떤 –연합(Verein)이다.” 349

 

이렇듯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신의 힘의 증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증가라는 조건에서만 유대를 유지하므로, 이러한 조건에 어긋나면 에고이스트는 유대, 혹은 연합을 중지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 사라지거나 폐지되는 관계를 지양한다. 유대, 연합의 관계 맺기는 힘의 증가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힘의 증가는 왜 일어나는가? “나는 모든 감정이 있는 존재와 공감(Mitgefühl)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의 기분 좋음이 또한 나를 기분 좋게 한다.”(324) ‘공감’하는 존재이기에 힘의 증가도 가능하다. 공동의 권능을 통하여 나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이 유대이자, 연합이다. 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에고이스트 사랑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앞서 에고이스트 사랑은 ‘서로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스트 사랑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낭만적 사랑과 에고이스트의 사랑을 구별해야 한다.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이미 그 내용을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낭만적 사랑은 무엇인가? 낭만적 사랑은 위선이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자기기만, 대상을 위한 대상의 사랑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애국심’이라고 설교했다. 우리의 모든 낭만적 사랑은 같은 양식으로 움직인다. 말하자면 언제나 위선 혹은 오히려 어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uneigennützigen Liebe)이라는 자기기만(Selbsttäuschung),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은 나를 위한 것-정확히 말해서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um Meinetwillen)-이 아니라 대상을 위한 것이다.” 327

 

우리 시대에 ‘위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 곧 ‘자기기만’, 대상을 위한 대상의 사랑을 위하여 맹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 7월,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의 제정ㆍ공포에 따라 행정자치부에서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여 새로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규정하였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초기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이고 1974년 이후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맹세는 지난 1972년 당시 문교부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해 왔다. 그런데 국가가 개인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전근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35년 만에 시대흐름을 반영한 내용을 담게 됐다고 한다. 과연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을까? 이 맹세는 충성의 맹세를 일방적으로 ‘고취시키는 교육’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교육을 신성한 것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번에 썼던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을 상기해 보자. 이러한 교육은 ‘자기결정’에 의한 것, 곧 나다움이 아니라, 신성한 것에 굴복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훈육되는 것이고 신성한 것, 곧 “조국과 민족”이든 “정의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인데, 이는 ‘자기 굴복’, ‘자기비하’이다. 이러한 신성화에 대해 슈티르너는 신성한 대상에 대한 ‘신성모독’, ‘탈신성화’,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선포를 통해 ‘나다움’을 찾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대상의 사랑, 조국애이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슈티르너는 그러한 고정된 자아로 자신을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 무’라는 유일자로 자신을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주장으로 이 맹세문을 나를 위한 맹세문으로 변주하면 어떨까?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내 유일성 앞에 자기결정과 자기의지의 자율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해야만 하는 나에 대한 관심보다 나를 위한 나의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에고이스트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기 힘을 증가시키는 관계 맺기가 에고이스트 사랑이니까. 보다 정확히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 점에 관해 조금 더 주목해 보자.

 

  1. 사랑은 호혜주의이다.

우선 슈티르너가 ‘호혜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해 보자.

 

교류는 호혜주의(Gegenseitigkeit)이고, 개별자의 행위이며, 개별자의 콤메르키움(commercium)이다. (239)

 

강당처럼, 그렇게 교도소는 틀림없이 일종의 사회, 협동조합, 공동체를 만들지만(예를 들어, 노동 공동체), [241]결코 어떤 교류도, 어떤 호혜주의도, 어떤 연합(Verein)도 만들지 못한다.

 

정리하면, 교류, 호혜주의, 연합, 콤메르키움(commercium)은 하나의 묶음이다. 콤메르키움은 상업, 교류를 뜻한다. 이렇듯 호혜주의는 교류, 연합의 원리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맥락에서 교류, 호혜주의, 연합, 콤메르키움을 같은 범주로 분류하고 사회, 협동조합, 공동체를 다른 범주로 구분한다. 전자는 ‘자기 유용성’에 의지하면서 ‘호혜주의’를 요구한다. 그럼 후자의 범주는 어떤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 “‘친절’(Liebesdienste), 자비, 연민 등등”이다.

 

차라리 나는 그들의 ‘친절’, 자비, 연민 등등에 의존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자기 유용성에 의지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기 유용은 호혜주의를 요구하고(당신이 나에게 하듯, 그렇게 나도 너에게), 아무것도 ‘헛되이’ 행동하지 않고, 노력하여 획득하고 –보상을 치르고 얻을 것이다.(347)

 

또한 에고이스트 사랑은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확실히 도로 돌려줄 수 있지만,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Gegenliebe)에 의해서만 지불될 수 있다(“가는 호의가 있으면 오는 호의가 있다”;속담).348

 

  1. 에고이스트 사랑은 취득자의 사랑이다.

 

또한 슈티르너가 말하는 사랑은 ‘주는 사람, 선물을 주는 사람, 애정이 깊은 사람’(Liebevollen)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얻는 사람’(Nehmenden), 혹은 무엇을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 곧 ‘취득자’(Aneignenden)(346)의 사랑이다. 슈티르너는 ‘Nehmenden’와 ‘Aneignenden’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곧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학위를 취득하다.”는 것은 학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독일어 ‘Aneignenden’에 주목해 보자. 이 단어의 동사 ‘aneignen’는 ‘무엇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영어 본에서 ‘appropriator’로 옮겼다.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에 원인을 두고 있는 그런 사랑이다. 이 단어는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이 노동자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고 노동의 결과물을 자본의 소유로 이전하는 모습을 말할 때 주로 섰다.”([생각하는 마르크스], 백승욱, 북콤마, 97쪽)

다르게 생각해 보자. ‘Aneignenden’을 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취득자’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와 자기 능력의 결과물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는 그런 사람이다. 더 이상 주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취득자의 사랑이다. ‘취득자’는 ‘소유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취득자는 자기 유용성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와 그 능력의 결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형식적으로 주어진 법률적 주어짐,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슈티르너는 주장하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 맺기는 자기 유용성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무엇이 모두의 소유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적 소유는 쓸모없다. 사회적 소유는 개인의 소유로 전용되어야 쓸모 있다.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드는 것이 보다 근원적이지 않을까?

유일자를 설명하거나 의미하는 많은 말들 중에 유일자는 취득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일자는 취득자이고 소유자이다. 어떤 능력의 소유자는 자신의 창조자이다. 이것이 나다움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취득자인가?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인가? “너는 너의 창조물(Geschöpf)로 존재”하는가?(39) 나는 나를 창조하는 창조자이자 내가 창조한 창조물인가?

에고이스트(Egoist) 사랑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Egoist) 사랑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에고이스트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고 자기 유용성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간디의 일화를 얘기하면 좋을 것 같다. 간디 생애 말년에 어떤 서양기자가 간디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평생 남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적인 생애를 살아왔느냐”라고. 이 질문에 간디는 뭐라고 했을까? 간디는 자기희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간디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서 살았다고 보는 것은 전혀 오해인데, 그 이유는 남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이웃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내 조국이 독립해야만 자기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간디는 에고이스트이다. 현상적으로는 타인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에고이스트이다.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에고이즘인데, 에고이즘(egoism)을 흔히 이기주의로 번역하기 때문에 에고이즘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자아(ego)는 ‘자기 존중 혹은 자기 중요성’(self-esteem or self-importance)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고 에고이스트는 자아주의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기존의 에고이스트라는 말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에고이스트를 ‘유일자’라고 말했다. 곧 유일자는 자아주의자이다. 그럼 자아주의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분명히 인간이 “이타적”행위를 할 때조차, 개인의 모든 행위의 근본 원인은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아주의자의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나에게 모든 것이고 나를 위하여(Meinethalben) 모든 것을 한다.(179)

 

예를 들어 가족 사랑이 보통 ‘효성’(Pietät)으로 이해되었듯이, 가족사랑은 어떤 종교적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조국에 대한 사랑(Vaterlandsliebe)을 ‘애국심’이라고 설교했다. 우리의 모든 낭만적 사랑은 같은 양식으로 움직인다. 말하자면 언제나 위선(die Heuchelei) 혹은 오히려 어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uneigennützigen Liebe)이라는 자기기만(Selbsttäuschung/self-deception),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은 나를 위한 것-정확히 말해서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um Meinetwillen)-이 아니라 대상을 위한 것이다. 327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애인과의 사랑은 어떨까? “그러나 내가 애인의 이마 위의 슬픈 주름살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그래서 나를 위하여, 나는 애인의 이마에 입 맞추어 통증을 제거한다.”(325) 이렇듯 심지어 사랑도 자기 유용성이다. 다시 말해 에고이스트간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다. 또한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은 ‘자기기만’이다. ‘애국심’은 자기기만이고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다. 흔히들 ‘Eigennutz’(selfishness)를 이기주의로 번역하는데,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에고이스트가 무엇에 합의하는 이유는 자기 유용성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의 이익(meines eigenen Nutzen)을 위해서만, 곧 자기 유용성(Eigennutz)selfishness에서 합의에 동의했다. 351

 

이제 ‘Eigennutz’(selfishness)는 ‘내 자신의 이익’(meines eigenen Nutzen)이고 영어로 my own benefit을 의미한다. 또한 Eigennutz단어에 해당하는 영어는 selfishness인데 이는 self(자기) + ish(적인) +ness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단어를 ‘자기 유용성’으로 번역하였다. 자기 유용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슈티르너의 글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단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에고이즘의 의식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사랑이 나에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랑이 나를 즐겁게 하기에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나는 어떤 ‘사랑의 계율’도 알지 못한다. 나는 모든 감정이 있는 존재와 공감(Mitgefühl(fellow-feeling))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Qual)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quält), 그들의 기분 좋음(Erquickung)이 또한 나를 기분 좋게 한다(erquickt).(324)

 

자기 유용성의 이해관계, 관심은 세계를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이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도록, 내 자기 유용성(Eigennutz)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Interesse)이 있다.”(342) 이러한 자기 유용성은 성인에 이른 ‘자기중심적 관심’(egoistisches Interesse)에서 가능하다.(14) 또한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유용성에 따른 사랑은 상호간의 관계이다. 존재와의 공감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자기 유용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기 유용성은 다른 존재와의 공감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기 유용성은 언제나 상호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조금 더 확인해보자.

 

2.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지만 서로 서로사용하므로 서로에게자기향유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이 자기 유용성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곧 자기 유용성은 에고이스트 서로에게 해당한다는 것이다. 자기 유용성이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에고이스트의 사랑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용성, 이용이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에고이스트 상호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zueinander) 어떤 관계만을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사용할 수 있음,(Brauchbarkeit/usableness) 쓸모가 있음(Nutzbarkeit/utility), 유용(Nutzens/use)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einander) 아무런 의무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의무가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나에게 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331)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Eigennutz/selfishness)에서 솟아나고, 자기 유용성의 침대로 몰려들어 다시 자기 유용성에 이른다.(328)

 

나는 세계와 인간을 이용한다네 (benutze(utilize))!(330)

나는 내 열정의 자양분을 위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애인을 선택하지 않는다. 애인은 항상 다시 내 열정의 자양분으로 원기가 난다. 애인에 대한 모든 내 염려는 내 사랑의 대상에만 해당되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만 해당되며, ‘열렬하게 사랑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330)

 

이렇듯 슈티르너는 사람의 관계를 ‘서로 서로’ 유용성으로 보고 있다. ‘서로 서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유용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유일자의 의미가 확장된다. 유일자는 단독자가 아니라 서로 서로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자에게 “교류(Verkehr)는 세계향유(Weltgenuss )이고 내 -자기향유(Selbstgenuss)의 일부를 이룬다.”(358) 서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자기향유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에고이스트간의 관계는 서로에게 자기향유를 위한 수단이다. 슈티르너에게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에게 이용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향유하는 것이다. “내 사랑의 대상을 향유한다(geniesse)”(330)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을 이용하는 것은 향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말하자면 ‘서로 서로’(zueinander) 이용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자기향유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용’은 향유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자기향유가 사람의 관계이므로 사랑도 서로의 자기향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슈티르너가 강조하듯이 ‘서로에게’ 의무가 없다. “내가 당신에게 의무가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나에게 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의 의무 또한 대상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나의 의무이다.

 

3. 사랑은 따로 또 같이’, 자기 유용성이란 수단이고 동시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이다.

 

사람의 관계를 상호간의 유용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관계를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따로따로’ 자기 유용성이면서 동시에 ‘함께’ 자기향유이어야 한다. 함께하는 자기향유는 에고이스트 간의 동등한 자율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함께하는 자기향유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사랑의 관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잠시 사람 관계를 서로간의 사용으로 이해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려보자.

칸트가 <윤리 형이상학 기초 놓기>(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n: Digitale Bibliothek Band 2: Philosophie, 75면)에서 실천적 정언명령의 정식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Person)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간성(Menschheit)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brauchest)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강조는 옮긴이]

 

이 글에서 옮긴이가 강조한 부분에 주목해 보자. 곧 ‘…만’, ‘항상 동시에’ ‘사용하다’라는 중요한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문구는 왜 들어가 있는 것일까? 칸트가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은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칸트는 사람 관계에서 상호 수단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말”라는 말은 “인간성을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상호 수단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단적인’ 이란 말은 ‘나의 욕구와 행복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이란 의미이다. 슈티르너의 사랑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관계가 오로지 상호 수단적으로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슈티르너의 사랑에 대한 논의로 가져와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라는 수단이고 동시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자기향유라는 목적은 자아 외부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아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모두의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존중하라는 말이라면, 슈티르너는 각자의 자아 안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이 동등하게 존재하고 이것을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하여 행위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것”(117), 자아의 상호 존중, 그것이 에고이스트 사랑일 것이다. 또한 이것이 자유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기결정에 의한 자유,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172)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의 사랑은 자유로운가? 다시 말해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이었는가? 나는 그대에게, 그대는 나에게 따로 또 같이 자기 유용성이었고 자기향유이었는가?

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소유는 소유자가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나다움의 추구는 자기결정이며, 자신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고정된 자아를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슈티르너 책 제목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소유의 의미, 곧 ‘유일자의 소유’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맑스가 주장하는 ‘개인적 소유’의 의미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전의 글에서 소유는 ‘힘’과 관계 맺고 있음을 다시 상기해 보자. 아래의 글을 다시 음미해 보자.

 

내 힘(Macht)은 내 소유(Eigentum)이다.

내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내 힘은 나 자신이고 내 힘에 의하여 내 소유이다.[203]

 

슈티르너는 소유를 힘과 연관시키고 힘에 의한 내 소유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소유는 어떠한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는 소유를 ‘자신의 사용’(Eigennutz)과 연관시킨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의 사용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342)

 

소유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와 교류하고자 한다. 그에게 세계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하는(schalte und walte) 내 소유이다.”(102) 결국 세계가 자신의 사용으로서 관계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소유로서 사용할 수 있었던 수단과 조직만을 얻으려고” 애쓴다.(348)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그 당시의 문명 비판을 하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을 문명화된 세계의 유행품(Modeartikel)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65) 그래서 그는 다시 묻는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65)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은 소유자로서의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를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schalten können) 어떤 목적이 중지하는 곳,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이 하나의 고정된 목적 혹은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66) 그래서 그는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다시금 소유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소유는 감각적 재산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소유의 현실화는 다름 아닌 ‘권능’에 따라서 작동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재산들, 곧 감각적 재산들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들은 내 것이고 나는 내 –권능(Gewalt)의 척도에 따라 소유자로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리한다(schalte).(274)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슈티르너는 프루동을 비판한다. 이를테면 바로 그 땅의 유용은 여전히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nach Belieben schalten kann) 그의 소유라는 것이다.(276) 나아가 “소유는 어떤 것(물건, 동물, 인간)에 대한 무제한의 지배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에 의하여 ‘나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Ich schalten und walten kann nach Gutdünken).(279) 여기서 ‘지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배는 “힘”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이다. 또한 지배는 추상적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Herrschaft)[“”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 강조는 옮긴이]는 인간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der Mensch)이 개개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왕국, 즉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Einzelne)이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 즉 세계를 소유물로서 지배한다.(151)

 

  1. 소유는 개개인이 실질적 주인이 되는 것이고 개개인의 힘과 능력의 현실화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힘’을 ‘능력’(dynamis)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dynamis’는 철학사적 연원을 갖는 말로 그리스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모순된 두 가지 뜻으로 분화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를 의미한다.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며,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유 개념은 현실적이고 실질적 결과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슈티르너가 염려하는 것은 ‘너의 고유한 자아’(Dein eigentliches Ich)이다.(31) 고유하다는 것은 남과 구별되는 나만의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주장하는 “너의 독특함(Absonderlichkeit)이나 특질”(Eigentümlichkeit)(228쪽;이 단어는 한번 사용된다)을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잠시 ‘소유’(Eigentum)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왜냐하면 슈티르너가 소유를 ‘특질’이란 단어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의 소유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단어는 영어로 property인데, 이 영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proprius이다. 이는 ‘남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어원은 ‘고유한’, ‘독특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어 Eigentum의 형용사형 eigentümlich는 ‘소유의’라는 뜻과 함께 ‘고유한’, ‘독특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소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는 자신만의 독특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과 함께 앞서 확인했듯이 소유를 ‘힘’과 ‘능력’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종합하면, 소유자는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힘과 능력에 따른, 혹은 그 편차에 따른 실질적 소유자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힘과 능력에 따라 그 성취도는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주권과 권리를 요구하는 주장이 소유적 자유주의의 출현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 혁명은 모든 인간은 property가 있든 없든 평등하다는 주장에서 출발했다. 자기를 대표할 소유가 없는 자라고 해도 소유가 있는 자와의 사이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되며, 그것이 자유이고 평등이라는 생각이다. 그 때의 자유는 property에 기초하지 않는다.”(백승욱 지음, <생각하는 마르크스>, 북콤마, 2017, 95)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의 소유 개념은 영국식 소유 개념과 맞닿아 있다. 앞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소유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현실 영역으로 논의를 구체화하면 어떨까?

 

  1. 소유: 슈티르너와 맑스가 이해하는 자본가

 

슈티르너는 시민계급의 정부(지배)하에서는 노동하는 자들은 소유하는 자들, 곧 자본가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자본가를 국가의 재산이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zu ihrer Verfügung haben), 특히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들로 이해한다.(126) 그래서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Der Staat ist ein – Bürgerstaat, ist der status des Bürgertums.)(같은 쪽)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를 맑스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맑스는 <자본>1권(167쪽 두 번째 단락에서 168쪽 첫 단락까지)에서 자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인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인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다.”(167f., Michael Heinrich, <Wie das Marxsche «Kapital» lesen?>, Teil 2, 강조는 미하엘 하인리히(M. H.))

미하엘 하인리히는 유통 G – W – G‘의 객관적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목적으로 만드는 사람, 따라서 가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본가라고 한다. 미하엘 하인리히는 위 구절을 두 가지 해석하는데 우선 한 가지만 살펴보자.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맑스가 정확하게 서술했듯이, 자본가는 화폐소유자(Geldbesitzer)이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을 실제로 자유로이 처리하는 사람은 그 사물의 소유자가 아닐지라도 그 사물의 점유자(Besitzer)이다. 그러니까 화폐를 이용하기 위해 화폐를 꾸어준 그 사람 역시, 혹은 지배인에게 낯선 능력이라는 가치증식을 위임한 그런 사람도 자본가로서 기능한다.

슈티르너나 맑스는 자본가를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가혹하리만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혹은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라는 슈티르너의 견해에 대해 맑스의 비판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일이데올로기>의 완역과 함께 충분히 논의해 볼 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1. 소유는 개인적 소유이다. 그런데 현실은?

 

요약하자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유일자의 소유는 개인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때 말하는 개인적 소유는 힘과 능력을 의미하면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실화되는 소유를 의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유 개념을 통하여 보다 유일자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유일자는 다른 사람과 구분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힘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그것이 그의 ‘특질’(Eigentümlichkeit)이며 그를 소유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맑스가 <자본> 1권 7편에서 말하는 ‘개인적 소유’(individuelle Eigentum; 이 단어는 그가 한번 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다)와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소유가 현실화 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 소유, 곧 개인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비판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없다.”(126)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슈티르너는 “우리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하였다.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개인적 소유의 현실화를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이 기계와 같은 노동에 얽매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노예제와 흡사한 것이 된다. 공장노동자(Fabrikarbeiter)가 12시간 이상을 죽어라고 노동해야 할 경우, 그는 인간이 되는 것을 빼앗긴다. 모든 노동은 인간이 만족해야 한다는 목표를 지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인간 역시 노동에 있어서 전문가(Meister)가 되어야 하며 인간은 하나의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압정공장에서 꼭지만 끼우고 철사를 빼내기만 하는 등등의 일만을 하는 사람은 기계적으로 기계처럼 일을 한다. 즉 그는 불완전한 단편으로 머물 뿐, 결코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 그의 노동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단지 그를 피곤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노동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만들어진 산물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즉,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 노동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이용당한다(착취당한다exploitiert).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얼핏 보면 맑스의 글로 오해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노동은 어떤가? 총체성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기계와 같은 노동인가? 교양이 있는 정신의 향유인가? 우리는 사회를 이용하는가? 아니면 사회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이 책에서 ‘공장노동자’란 단어는 한번 언급된다. 그렇지만 가벼운 말이 아니다. 18세기 이래, 공장의 숙련공을 수공업에서 일하는 도제나 비숙련 육체노동자와 구별하게 해주는 말로 등장했다. 이미 1845년의 프로이센 기업 규정에는 도제와 보조 노동자를 위한 규정을 명확하게 공장 노동자로 확대시켰다. 이것은 수공업과 공장 노동이 기업(Gewerbe)이란 개념 아래 통합된 데에서 도출된 귀결이었다.(코젤렉 개념사 사전 10, 142-7) 나아가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가장(pater familias)에 대한 가족 구성원(Glied der famlilia)처럼 인식되었다. 또한 군주국가의 모델 역시 노동자의 입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가장-종, 군주-신하, 사령관-졸병이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요구는 19세기 말까지도, 그리고 이를 넘어서까지도 ‘부르주아’ 사회 하부에서 봉사하는 계층이라는 케케묵은 개념이 근대 산업사회 체제 안으로 이월되었다는 사실을 타나낸다.(같은 책 176-7쪽) 짧은 그의 말을 오래 음미해 보자. 소유는 개인의 실질적 소유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역사는 희생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이다.[197-198]

나다움과 국가기계의 힘 관계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다움과 국가기계의 힘 관계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왜 나답지 못하는가?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개념을 통하여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나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172] 그렇다면 자기결정에 대한 갈망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것은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때문에 일어나는 갈망이다. 자기결정에 대한 갈망은 자기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또한 슈티르너가 이해하는 ‘자기부정’은 ‘자기폐지’이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65, 228]이며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220]이다. 나아가 가장 완전한 자기 부정은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이다.[172] 결국 나다움은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유일자는 ‘구속되지 않은 자아’(das zügellose Ich)이며 우리 근원이고, 항상 우리 내부의 비밀로 남아있다.[219]

그런데 자기부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것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Mutlosigkeit)에 의해 –겸 손(D e m u t)”[슈티르너는 여러 가지 강조를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이렇게 철자를 늘려 쓰는 것도 일종의 강조 표현이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344] 그러니까 자기부정은 그 자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은 약해지는 것을 모순으로 본다면, 자기부정은 자신의 ‘단념’, ‘용기 없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다시금 나다움을 찾기 위해 “자신의 대담한 행위, 자신의 의지, 자신의 가차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자신을 이끈다.[220]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나다움의 철학은 ‘자기부정’, ‘자기폐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에서 자기인정, 자기실현, 자기에게 유용함으로, 자신의 의지로 향하고 있다. 나다움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문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나다움의 철학이 ‘충동’(Trieb)과 어떻게 연결되어 논의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를 추구하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충동(Trieb)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39)

 

먼저 위 문장을 음미해 보자. 슈티르너는 분명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충동’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말하는 제대로 이해된 충동이 있다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앞 문장만으로 이해하면, 우선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는 ‘자기폐지’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자기폐지는 자기부정이고 나다움의 포기이다. 그러니까 자기실현은 자기를 벗어나지 않은 노력과 염려이며, 이것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충동이고 나다움의 실현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제대로 이해된 충동은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다.

 

2. 나다움은 자기중심적 충동(Trieb),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이다.

 

‘충동’이란 단어로 표상되는 것, 이를테면 성충동의 ‘충동’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충동 개념을 괄호치고 먼저 슈티르너가 말하는 충동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 그가 말하는 충동 개념을 더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을 확인해 보자. 그가 말하는 충동은 다양하게 논의된다. 말하자면 충동은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selbstsüchtigen Trieben)”[107]이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고 제대로 된 충동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이라는 일종의 심연(Abgrund)은 광명과 인도의 빛(Leitstern)없는 일종의 카오스이지 않는가!(178)

 

슈티르너는 인간에 대한 흔하고 전통적인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한다. 그에게 충동은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이다. 질서보다는 혼돈을 자신의 충동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다양하게 대답하는 것, 심지어 ‘일종의 심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단일한 인간존재에 대한 규정을 피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말하는 존재론이 ‘창조적 무’라는 것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충동 개념은 ‘동기’(Antriebe)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정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충동을 ‘가장 다양한 욕망’(Gelüste/appetites)의 그릇일 뿐이라고 한다.[18][Gelüste의 어원인 Lust의 의미는 쾌감, 유쾌; 즐거움, 욕망 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충동은 ‘동기’이고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 ‘자기중심적 충동’이고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며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 곧 “일종의 카오스”, ‘가장 다양한 욕망의 그릇’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충동이다. 그런데 충동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음 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충동은 ‘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중심적 충동(Trieb)이 충분한 힘(Kraft,강조는 옮긴이)을 갖지 못한 어떤 개인의 경우에,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하고, 가족의 입장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자세를 취한다 기타 등등.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 한다.’(242)

 

3. 자기중심적 충동은 충분한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충동에 결정적인 것은 ‘힘’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어떤 개인의 경우에,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을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충동은 ‘힘’과 맞닿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충동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중심적 충동,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이 현실화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나다움, 자기실현은 힘의 소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한 힘의 현실화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슈티르너의 책 제목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러면 유일자는 힘의 소유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힘(Macht)-그것은 나 자신이고, 나는 힘이 있는 자(Mächtige)이고 힘의 소유자(Eigner)이다.”[231] 나다움은 –소유자(Eigners)의 묘사일 뿐이다.[188] “나는 나의 권능(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412) 또한 자유는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172] 것이고 이것이 나다움이다. 이렇게 볼 때, 나다움은 항상 힘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하고, 가족의 입장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효성’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지금까지의 교육과 교양, 도덕적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요구가 아니라, ‘가족의 요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내 위에서 나를 지배하는 어떤 힘, 이러한 것이 신성한 것이다. 어떤 힘이 이렇게 신성한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신성한 것이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것을 자신의 지배자로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앞서 확인했듯이 유일자, 혹은 나다움은 ‘나의 권능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412] 나다움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어떤 것은 창조적 무라는 슈티르너의 존재론에서 해체되고 지양된다. ‘창조적 무’라는 개념을 아래의 글과 함께 음미해 보자.

 

나는 매순간마다 자신을 그때그때 최초로 정립하거나 창조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립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뿐이고, 내가 나 스스로를 정립하는 순간(Moment)에만 다시 내가 정립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창조자인 동시에 창조자의 창조물인 것이다.[167]

 

자아는 전제되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를 정립하는 순간에만 정립된다. 이러한 자아의 창조적인 힘으로 자아가 정립됨으로써만 자아는 존재한다. “자아라는 존재의 핵심은 그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힘이고 이러한 힘에 따라서 자신의 창조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R. Ruzicka, Selbstentfremdung und Ideologie, Zum Ideologieproblem bei Hegel und den Junghegelianern, Bonn 1977, S. 96] 유일자는 끊임없는 창조적 무에서 생성, 소멸, 다시 생성하는 것이다. 자아의 힘은 소유이고 나에게 소유를 주는 자아의 힘이 자기 자신이며, 자아의 힘은 자아의 힘에 의하여 나의 소유라는 자아를 정립한다.

 

나의 힘(Macht)은 나의 소유(Eigentum)이다.

나의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나의 힘은 나 자신이고 나의 힘에 의하여 나의 소유이다.[203]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자아의 힘과 비아(非我)의 힘의 관계에 의하여 자아로 정립할 수도 있고 자아로 정립될 수도 없다. 비아의 대표적인 모습은 국가, 곧 국가기계, 경찰행정이다.

 

4. ‘구속되지 않은 자아와 국가기계

 

앞서 확인했듯이 유일자는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난다. 요약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자기결정에 의한 것이다. 자기결정은 자유이다. 이렇게 보면, 나다움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은 소유자의 묘사일 뿐이라는 점이다. 나다움을 추구하는 모습 중 하나가 ‘구속되지 않은 자아’(das zügellose Ich)[219]이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자신의 대담한 행위, 자신의 의지, 자신의 가차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사람”[220]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다움, 힘, 자유의 문제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의무, 국가의 자기유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억제이다.

 

국가기계(Staatsmaschine)는 자신의 고유한 동기(Antriebe)를 결코 따르지 않는 단일한 정신의 톱니바퀴 장치(Räderwerk)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국가의 검열, 국가의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해 억압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억제(Hemmung)를 국가의 의무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억제가 자기유지(Selbsterhaltung)의 참된 의무이기 때문이다.”[250]

 

이처럼 국가는 자기 결정하는 유일자처럼 자신의 동기를 따르지 않는다. 국가는 ‘단일한 정신의 톱니바퀴 장치’를 움직이므로 ‘국가기계’이다. 자기유지가 국가의 참된 의무이다. 국가의 자기유지는 검열,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한 억압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자유가 나다움이고 ‘자기결정’이라면 국가는 검열,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한 ‘자기유지’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기유지(Selbsterhaltung)는 인간의 역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자기유지는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의 자기유지는 나다움의 파괴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할 만한 것은 ‘경찰 행정’이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 슈티르너가 말하는 경찰 행정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경찰 행정”(Polizei)에 속하는 것은 군인, 모든 종류의 관료, 예를 들어 사법부, 교육 등등, 간단히 말해 모든 국가기계이다.[126] 여기서 말하는 ‘경찰 행정’(Polizei)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찰’이 아니다. “‘Polizei’은 흔히 경찰을 의미하지만 18세기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씌어졌는데, 오늘날의 내정(內政)이라든지 국가행정이라고 할 만한다.”(강성화, 『헤겔 『법철학』』,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99쪽)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가 말하는 경찰 행정은 국가기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 행정이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국가권력이 하나로 집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국가기계는 권력이 아니라 권력‘들’이다. 국가기계의 힘은 다양한 힘으로 편재된다. 따라서 유일자는 다양한 힘으로 편재된 힘들과의 관계 속에 끊임없는 ‘반역자’일 수밖에 없다. 힘들이 두루 퍼져 어느 곳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나다움의 추구 또한 단일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푸코 또한 이러한 힘들의 편재 때문에 혁명보다는 저항을 권고했다.

또한 슈티르너는 국가기계, 곧 경찰 행정을 자기 내면의 감시, 양심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인간을 일종의 ‘비밀-경찰 행정-국가’(Geheimen-Polizei-Staat)로 만들어왔다. 간첩과 엿듣는 사람인 ‘양심’은 마음의 모든 가벼운 움직임을 감시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인간에 ‘양심의 문제’, 다시 말해 경찰 행정의 일(Polizeisache)이다.”[97쪽] 여기서 국가기계는 우리가 앞서 보았던 국가기계의 의무, 곧 감시, 검열, 경찰 행정에 의한 억압이라는 ‘처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처벌에서 내면적인 훈육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팬옵티곤(panopticon)’을 떠올릴 수 있다. 경찰 행정은 벤담의 팬옵티곤처럼 내면의 감시자로 보편화된다. 철두철미하게 완전히 경찰 행정의 성품(Polizeigesinnung)을 꽂아 넣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을 연습하는 사람이다.[220]

다시금 질문해 보자! 나는 얼마나 나다운가? 나는 자유를 추구하는가? 나는 자기결정적인 존재인가? 나는 자기결정적인 나의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내 안에 또 다른 경찰 행정의 품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분명한 것은 “내가 ‘순종해야’(kuschen)만 하는 동안에” “국가가 광채가 나는 데 반해, 나는 결핍에 시달린다.”[234]는 것이다. 힘의 관계에서 나의 힘과 국가의 힘은 이렇듯 모순적이다. 국가의 자기유지는 나다움의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은 나다움이 아니고 자기부정의 부정이 나다움이다. 국가의 자기유지의 부정이 나다움이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인형의 집에서 노라와 반역자인 유일자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은 그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에서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노라의 이야기를 한다. 왜 갑자기 슈티르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입센을 언급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센의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의 모습이 ‘유일자’의 모습, 곧 나다움의 추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인 노라는 슈티르너가 말하는 노라의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라고 할 수 있다.(407)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에 대한 반역으로 탈신성화 혹은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했다. 신성모독은 곧 나다움을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이다. 그렇다면 입센은 이 희곡에서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가출을 선택하는 ‘노라’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자아 각성과 자아실현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은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차용한다. 그의 문학에서 노라를 자아 각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노라는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자의식,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염상섭의 초기 문학에서 그는 “가네코 우마지의 자연주의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성’이라는 개념에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반역자’라는 개념을 접합하여, 개성의 자각을 사회의 억압기제에 대한 ‘반역’으로 변형시키면서 정치 미학적 색채를 가미한다.… 주인공 이인화는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로 지성과 행동이 분열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동경에서 경성으로 여행하는 동안 제국 일본의 다양한 억압기제를 확인하고, ‘자기 반역’을 통한 주체 재정립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이인화는 정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역자로 거듭나야 함을 역설한다.”(민족문학사연구 / 52권, 권철호)

이를 통해 우리에게 그동안 너무나 시,공간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유일자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까운 시간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혁명인가 반역인가!

 

먼저 다시금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저항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를 만들지 못할 때, 그러한 경우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은 반역이다. 그는 우선 슈티르너는 ‘혁명과 반역’(Revolution und Empörung)을 구분하다. 그리고 혁명은 상황의 전복,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 혹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따라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행위라고 말하고, 반역은 불가피한 결과로서 실질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을 경험했는가? 우리의 역사에서 몇 번의 혁명이 있었고 그 혁명을 속에서는 우리는 어떤 존재였고, 지금은 또한 어떠한가? 우리는 여전히 그것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슈티르너는 “반역(Empörung)이라는 말을 그 말의 어원학상의 의미와 관련하여 선택한 것이고, 또한 형법에서 금기시된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주석 96) ‘empor’는 부사로 “위로, 높이”라는 뜻이고 분리동사의 전철로, ‘위로·높이’의 뜻이다. 동사 ‘empören’은 ‘올리다, 누구에게 반항하다’라는 뜻이다. ‘개’라는 말과 연결되는 견유(犬儒)학파의 디오게네스(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를 슈티르너도 인용한 바 있다)의 기념비에 새겨진 개처럼 낮은 것을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보았듯이, 기존에 높은 것은 고정관점, 위계질서 등인데, 슈티르너는 바로 이것을 낮추고자 겸손하지 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관심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 개처럼 낮은 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들, 유일자들, 노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유일자를 무(無) 위에 놓는다는 것은 유일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지금 현실에서 개처럼 낮은 유일자를 ‘높게’(empor) 하는 것이 유일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이윤, 자유로운 경쟁을 주창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개개인들의 가치를 추구하여 나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슈티르너는 반역의 의미를 다시금 유일자의 철학이 추구하는 나다움으로 연결시킨다. 제도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계하는 유일자의 모습을 그는 나다움을 찾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다움이라는 표현은 자기 소유자임을 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반역은 무장봉기(Schilderhebung)가 아니라 제도(Einrichtungen)로부터 야기되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일어서는 개인의 어떤 반항(Erhebung), 어떤 번영(Emporkommen)이다. 혁명은 새로운 제도를 목표로 한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54)

 

위 문장에서 ‘제도’(Einrichtungen)와 ‘설계하다’(einrichten)라는 단어로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앞 문장은 설계하는 것을 ‘내버려두는(lassen)’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으면 삶을 설계하는 것은 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슈티르너는 반역을 “현존하는 것(Bestehende)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곧 “나의 목표는 기존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나의 고양(Erhebung)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에게 그리고 나의 나다움(Eigenheit)에 어떤 자기중심적인 나다움(Eigenheit)이라는 올바로 상태”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계속하여 나다움을 주장한다. “반역(Empörung)은 기운을 차리는 것을 요구하거나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emporzurichten)을 요구한다.”(같은 곳) “가난한 사람들이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그들은 단지 자유롭게 되고 소유자가 될 것이다.”(288)

결론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보다 반역이고, 반역은 반항(Erhebung)이고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 곧 번영(Emporkommen)이다. 그래서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282) 다시 말해 자신의 번영(Emporkommen)을 위한 반항(Erhebung)이고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이라는 소유자가 되는 것은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가능한 것이다.

 

 

반역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익숙한 가치를 다르게 평가할 줄 알 때, 그때야 비로소 반역은 가능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재치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슈티르너가 주장했듯이, 신성한 것은 낯설고 친숙한 것이다. 신성한 것은 두 대립적 규정이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신성한 것은 운동이고 모순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가치체계가 소리 없이 굳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반역은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라는 테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변주되었다. “나는 의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셸링)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카뮈) 그렇다면 슈티르너에게는 어떻게 변주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슈티르너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그를 익살꾸러기 광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분노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온갖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 얽힌 그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충고하고 도덕적 영향력을 고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보자. “너나 잘 하세요” 대립으로 드러난 경멸!

 

 

경멸받지 말고 나를 경멸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라!

 

니체는 국가, 시대, 계급, 문화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구토감이 초인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는데(프리드리히 니체, 박성현 옮김,『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심볼리쿠스, 2012, 19쪽 주석 참조),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도 모든 신성한 것들, 곧 국가, 민족, 자유, 도덕 등등에 대해 신성모독과 경멸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와 그리스도 시대는 대립적인 목표를 끝까지 추구한다. 그런데 전자는 실재를 이상화하려하고(idealisieren), 후자는 이상을 실현하려하며, 전자는 ‘신성한 정신’을 얻으려고 애쓰고, 후자는 ‘거룩한 육체’를 얻으려고 애쓴다. 따라서 전자는 실재에 대한 둔감으로, 곧 ‘세계경멸’(Weltverachtung)로 종결한다. 그러나 후자는 이상(Idealen)의 벗어던짐으로, 곧 ‘정신의 경멸’(Geistesverachtung)로 끝나게 될 것이다.”(407)

 

그는 ‘세계경멸’과 ‘정신의 경멸’을 넘어서는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375)을 주장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니체가 말하는 ‘건너가기’라고 할 수 있다. 곧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이다.(『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21) 이렇게 보면, ‘자기극복’은 ‘내려가기’와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행위를 ‘내려가기’(Untergang)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는 사람을 저는 사랑합니다. 미덕은 내려가기를 감행하겠다는 의지이며 초인에 대한 갈망을 담고 날아가는 화살이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22) 니체에게 이 단어는 반복되는 말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를 변증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대립된 두 개의 규정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추상적인 것(민중,인류)과 구체적인 것(나)은 대립된 것이다.

 

“민중과 인류의 가라앉음(Untergang)은 나를 떠오름(Aufgange)으로 초대할 것이다.”(238)

 

나다움의 가라앉음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의기소침Mutlosigkeit)에 의해 -겸손(Demut)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344) 결국 나의 가라앉음은 인류의 떠오름이고 그것은 겸손이라는 나의 단념과 나의 자기부정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나의 떠오름, 나다움의 떠오름을 위해서는 겸손을 벗어나야 한다. 자기극복은 나의 떠오름이고 세계극복(Weltüberwindung)(25)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맑스의 파악으로 본다면, 자본의 잉여가치 창출의 떠오름은 나의 가라앉음이다. 유일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유일자=비인간적 인간이다. 유일자=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고 인간다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꾸로 인간다움의 ‘부정’은 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는 나다움의 긍정을 위하여 인간다움을 부정해야 한다. 유일자는 상이한 사람이다.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다. 그래서 상이한 사람들의 부정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비동일성의 부정은 인간이다. 곧 비동일성의 부정은 동일성이다. 결국 인간은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 칼 맑스가 물신숭배를 비판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공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적인 노동이 다양한 노동과 교환된다는 것, 곧 추상적 인간노동의 대상화, 다시 말해 교환가치 속에서 상이한 노동과의 동일성은 비동일성의 추상성이기 때문이다.

유일자를 비동일성이라고 이해한다면, 비동일성의 부정, 곧 자기극복의 모습은 유일자의 또 다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을 유일자의 태도로 제시하는데, 다시 말해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는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lung) 등등 이다. 경멸의 내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경멸받고 있는 것, 경멸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거꾸로 경멸받지 않아야 하는 것, 경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니체는 ‘거대한 경멸’의 대상으로 행복, 미덕, 이성, 정의, 연민 등을 거론한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일자의 태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경멸하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를 무(無)로 되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훨씬 더 신성한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님, 무관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린이 같은 사람의 태도는 대상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 곧 주체가 대상과 여전히 관계 맺고 주체가 그 대상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음’이다. 신성함은 신성함에 대한 선포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신성모독은 신성함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가능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다시 자기의지와 나다움으로 위계질서에 맞서라

 

우리는 앞서 유일자라는 존재론을 통해서, 하이데거에 앞서 유일자가 ‘염려’하는 것은 ‘고유한 자아’이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그런데 고유한 자아는 피히테가 말하는 ‘절대적 자아’가 아니다. 그리고 고유한 자아를 염려하는 것은 내가 ‘나다움’을 나에게 마련해주는 것이며, 이는 해방과 구별되는 근원적인 자유인 자기해방이며, 곧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전권을 주는 것이라는 전권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라고 하였다.(39) 자기 자신을 염려하는 않는 자는 자기폐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나에게[Mir] 불쾌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나이가 들고 나에게 욕지기가 나서, 나는 나에게 어떤 공포이며, 혹은 나는 나에게 결코 충분하지 않고 결코 나에게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자기폐지(Selbstauflösung) 혹은 자기비판이 일어난다.(201)

 

자기폐지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는 노예근성, 헌신(Dienst),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182)인데,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에게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1)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자기만족으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나다움이고 자유이며, 자기해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기폐지, 자기부정과 대립하여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를 주장한다. 그에게 자기부정의 가장 완전한 자기부정은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의 지배이다. 사유(Denken)보다 의지(Will)를 중시하는 관념론 정신의 활동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나는 의지(의욕)한다. 고로 존재한다”(Ich wille, also bin Ich)라고 말한 셸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노예 신분의 멍에, 통치권의 구속, 귀족들(Aristokratie)과 군주들의 속박, 욕망(Begierden)과 열정(Leidenschaften)의 지배.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Willens),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는 확실히 자유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self-denial])이다. 더구나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나다움(Eigenheit)을 요구한다.(172)

 

이렇게 볼 때, 자기의지는 자기결정이며 이러한 자유는 우리에게 ‘나다움’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자기부정은 자신의 사용이 아님(Uneigennützigkeit)과 같은 의미이다(228) 이렇게 보면 자기인정은 자신의 사용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용은 자기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 이후에 니체 또한 인간을 “이성과 육체 그리고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의 총체”로 이해하고 이러한 “총체적 존재(Die Gesamtheit)에 대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Das Selbst) 혹은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런 존재를 니체는 ‘신체’라고 부른다.”(백승영, 『철학, 죽음을 말하다』, 164) 다시 슈티르너로 돌아와 보면, 그는 이러한 자기의지의 자유가 나다움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다움은 자기가 무엇을 할 자격, 권리, 전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 곧 ‘자기 전권위임’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verleug) 사람만이,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을 연습하는 사람만이”(220) “참, 인류 등등과 같은, 모든 더 높은 본질은 우리보다 상위에(über) 있는 어떤 본질(Wesen)”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40). 슈티르너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일자의 염려를 상기하도록 한다. “네가 매 순간에 존재하듯이, 그렇게 너는 너의 창조물(Geschöpf)로 존재하고, 그리고 바로 이러한 “창조물”에서 너는 너 자신을, 곧 창조자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40) 슈티르너의 이러한 주장 이후에 니체(1844-1900)는 위버멘쉬(Übermensch)를 인간의 삶의 목적으로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고 극복하는(über-sich-hinaus-gehen, sich-überwinden),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sich-schaffen)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결코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며, 현 상태의 유지(erhalten)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승(steigen)으로서의 변화를 경험하는 존재이다.”(백승영, 『철학, 죽음을 말하다』, 165)

그런데 니체와 유사하게 슈티르너는 사람들이 참된 것을 신성한 것,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된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über sie geht’s nicht hinaus)”(38)고 말한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유일자는 신성한 것, 곧 참된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적 자유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의 원리, 곧 인간을 넘어서지 않는(über das Prinzip des Liberalismus, den Menschen, nicht hinausgeht)”다고 비판한다(136). 그리고 그는 유일자를 표현하고 있는 “자기실현은 코뮨과 공산주의 범위를 넘어선다(hinausgreifen)”(303)고 주장한다. 자기실현은 유일자의 모습인데, 곧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 자기(능력의) 실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민중이 ‘민중의 존엄을 능가하는(über seine Majestät hinausragen) 사람들을 억압한다(237)고 비판하는데, 여기서 존엄을 능가하는 사람은 에고이스트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사회를 넘어서고 극복해야(über sie hinausgehen und sich erheben)”한다고 주장하고 있다(343). 또한 그는 에고이스트의 역사를 말하는데, “남아 있는 세계사에서 자신의 소유(Eigentum)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넘어서는(geht übers Christliche hinaus) 것이다”(411). 말하자면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는 이러한 모든 추상적인 것, 자신 위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사람이다.

또한 슈티르너는 글의 첫 머리에서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하는데, 그곳에서 ‘생존투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주인과 노예, 곧 승자는 주인이고 패자는 노예라고 하면서 “몽둥이가 사람을 이기거나(überwindet) 사람이 몽둥이를 제압하는가이다”(9)라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결국 그는 유일자를 통해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노예의 삶, 곧 몽둥이가 사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의 삶, 곧 우리가 몽둥이를 극복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채찍의 권력(Macht)’에 대해 ‘우리들의 –반항(Trotz), 반항적인 용기(trotziger Mut)’를 “우리들의 부동심(不動心)(Ataraxie), 다시 말해 의연함, 대담성, 우리들의 거스르는 힘(Gegengewalt), 우세(Übermacht), 정복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면, 곧 “우리가 스스로 느껴서 깨닫는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전에 극복할 수 없었던(unüberwindlich)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인다.”(10) 또한 슈티르너는 ‘어떤 병적 욕망, 어떤 열정 등등으로 타락한 누군가’에 대해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하길 원하고 있다(374). 나아가 슈티르너의 유일자의 모습은 니체의 창조적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힘(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Nichts)에서 다시 태어난다.”(412) 니체의 위버멘쉬와 너무도 닮아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니체의 위버멘쉬는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너무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슈티르너의 유일자의 모습과 니체의 위버멘쉬는 너무나 닮아 있다. 아무튼 이렇듯 슈티르너는 ‘나다움’의 추구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위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존재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며, 이러한 태도 중에 ‘겸손’을 통해 위계질서에 맞서고 궁극적으로 위계질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하여 겸손을 버리는 것이다.

 

  1.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라

 

그의 ‘자아’에 대한 추적은 계속하여 ‘나다움’과 연결되어 사유된다. 그는 사회에 의해 나의 나다움(Eigenheit)을 제한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은 내가 동경하고, 숭배하고, 숭상하고, 존중하기 때문이고,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없음(Mutlosigkeit)”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주장한다(344). 단순히 단념, 자기부정, 용기없음이 아니라 모든 ‘나의’ 단념, ‘나의’ 자기부정, ‘나의’ 용기없음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강조는 필자). 이렇게 볼 때, 자기부정을 벗어나는 길은 자아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러한 ‘나다움’의 제한에는 겸손(Demut)이 존재하는 것이다. Demut는 독일어로 ‘국가, 피상적인 것’을 숭배하다(dienen)는 뜻이다.<Heinz Messinger und Der Langenscheidt-Redaktion, Langenscheidts Grosswörterbuch, Langenscheidts KG, Berlin und Mnchen, 1989, S.269, S.276.> 또한, 이 단어는 영어본에서는 humility이다. ‘humility’는 라틴어 ‘겸손’(humilitas)에서 유래한다. 이 명사는 형용사 평편한(humilis)과 관련된다. 이 단어는 겸손한, 낮은(humble)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humus로 이끌어낸 것인데, humus는 대지(earth), 땅(ground)이라는 뜻이다.< Dictionary.com Unabridged (v 1.1). Random House, Inc. 23 Sep 2008. Dictionary.com http://dictionary.reference.com/browse/humus.> 또한 라틴어 homo에서 비롯된 영어가 human이고 humble(겸손한, 천박한, 낮추다)도 같은 어원을 지고 있으므로 인간이 ‘대지에 머리를 숙여’ 인간의 ‘겸손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슈티르너는 겸손이 오히려 나다움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겸손은 또 다른 정신에 대한 복종, 위계질서(Hierarchi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슈티르너에게 겸손(humilitas)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지칭한다. 인간(homo)는 국가, 종교, 신과 비교하여 대지(humus)이므로 천한 것, 낮은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마치 신을 숭배하듯이 추상적인 것을 숭배한다. 나아가 자기부정은 체념과 갈망의 냉각으로 이어진다.

 

이제 체념(Entsagung)의 습관은 너의 갈망(Verlangen)의 격정을 냉각시키고, 너의 청춘의 장밋빛은 -더없는 행복의 빈혈증 가운데서 퇴색되어간다.(67)

 

또한 그는 생각의 지배를 ‘무자비한 위계질서’(Hierarchie)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위계질서에 대한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원래 Hierarchy는 그리스어인 hierarkhia는 ‘성자의 지배’를 의미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조직 원칙을 이루었다. 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순위를 나누고, 또한 성직자는 교황을 최상위로 하여 주교, 사제, 부제의 단계가 정해져 있다. 또 세속의 국가도 중세에는 교회의 인가 아래에서만 그 통치권을 얻어, 제왕도 교황 아래의 한 단계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엄중한 상하의 단계적 조직을 하이어라키라고 한다.(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그것은 얼핏 보면 생각하지 않음이다. 그러나 생각에 지배는 내가 생각에 굴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자유롭다면 나는 생각들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 때 나는 생각들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굴복의 이유는 자아의 굴복이기에 굴복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의 생각하지 않음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에 굴복하기 때문에, 생각들이 자유롭다면, 그렇다면 나는 생각들의 노예이고, 나는 생각들에 대한 어떤 강제력도 갖지 못하며 생각들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가지려고 하고, 생각들로 꽉 차 있으려고 하지만, 동시에 나는 생각 없이 존재하려 하고, 생각의 자유 대신에 생각하지 않음으로 나를 지킨다.(388)

 

위 글을 다시 보면 생각들에 지배되는 상황, 곧 생각들의 노예인 경우는 내가 생각들에 대한 ‘강제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맑스가 노동의 소외, 강제노동을 비판한 것 또한 노동에 대한 통제가 노동자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슈티르너는 그 비판의 길이 사유에 대한 것이므로 비판의 ‘결’ 또한 다른 것이다. 맑스는 노동의 소외에 대한 지양을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면, 슈티르너는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고, 생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생각하지 않음은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신성모독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생각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지배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고 경멸하고 조롱하여 그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다시 아래의 글을 통해 위계질서의 의미를 이해해 보자.

 

그러나 생각과 이념의 힘, 이론과 원리(Theorien und Prinzipien)의 지배(Herrschaft), 정신의 위엄(Oberherrlichkeit), 요컨대 위계질서는 성직자들로서, 다시 말해 신학자, 철학자, 정치인, 속물, 자유주의자, 교사, 고용인, 부모, 아이, 부부, 프루동, 조르주 상드(George Sand), 블룬칠리(Bluntschli) 등등으로 있는 동안 지속된다 등등.(392-393)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위계질서는 “생각과 이념의 힘(Macht), 이론과 원리(Theorien und Prinzipien)의 지배(Herrschaft), 정신의 위엄(Oberherrlichkeit)”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과 이념의 ‘’, 이론과 원리의 ‘지배’, 정신의 ‘위엄’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 지배, 위엄으로 등장할 때가 문제인 것이다(강조는 필자). 곧 “위계질서는 생각의 지배(Gedankenherrschaft), 정신의 지배다! ”(79) 슈티르너와 동시대를 살면서 가혹하게 비판했던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판이란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을 통해 전복되어야 하며, 이론 또한 그것이 대중을 휘어잡을 때만 물질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385) 이러한 주장은 물질적 힘(Gewalt)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이론이 대중과 결합되면 물질적 힘이 된다는 측면에서 슈티르너의 주장과 반쯤 공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맑스는 전적으로 반대할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결국, 슈티르너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라’라고 요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은 유일자인 나를 낮추고 추상적인 것들을 나보다 높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나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자기결정과 자기의지의 결여로 자유, 자기해방, 자기 전권위임이라는 나다움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든다.

 

  1. 위계질서에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슈티르너는 위계질서와 관련하여 어린이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삶에 필요한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저 정신들에 대해 무관심(gleichgültig)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약하기 때문에, 정신들의 권력에 굴복”한다(79). 우리는 이 글에서 위계질서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 무관심이다. 슈티르너는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로 위계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의 공격에 무관심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신들을 쇠약하게 만들지 않게 하도록 만들어서, 그 일을 무관심(Apathie)하게 성취하였다. 호라티우스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nil-admirari)는 유명한 말을 하고, 마찬가지로 그것에 의하여 다른 것들에 대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한다.(101)

 

닐 아드미라리(nil-admirari)는 호라티우스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며 <서간집>에 남긴 말이다. 무관심(Apathie:어원은 그리스어 páthos이다)은 모든 정념(情念)에서 해방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스토아 학파는 정념에 방해받지 않는 태연자약한 심경, 격정 등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였다. 슈티르너는 스토아 철학을 소환시킨다. 마치 데리다가 도래할 유령으로 맑스를 소환하듯이 말이다.

 

누구나 대상들(Objekten)과 어떤 관계를 맺는데,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그 대상들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 –성경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sich gar nichts aus ihr macht) 사람에게 성경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액막이로 사용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다만 가치를 가지고, 어떤 마법 수단(Zaubermittels)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 같은 사람은 성경으로 놀이를 하고, 그에게 성경은 단지 어떤 장난감 등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376)

 

아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대상들에 대한 태도에서 무관심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경으로 놀이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성경은 마법 수단도 아니고, 성경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대해 슈티르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대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sich gar nichts aus ihr macht) 사람”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니체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정신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에 이르는 과정으로 비유된다. 낙타의 정신은 기존의 자명성에 복종하고 외경하는 정신의 상태이므로 부정할 힘의 부재이고,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자명성을 부정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을 획득한 상태이며, 어린아이의 정신은 창조력을 갖춘 정신, 곧 새로운 자명성을 창출할 가능성의 획득을 의미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어린아이같은 사람이다. 곧 이 어떠한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는 우리가 보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곧 나다움을 추구하며 살기위해서는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삶의 태도를 전환시키고,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아야 하며, 위계질서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것에 대한 헛됨을 부여하여 신성한 것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고 자기의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자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1)

슈티르너의 말대로 ‘아이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에게 신성한 대상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이 같은 사람이여!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오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왔다.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 노랫말이 떠오른다.

 

“어느 것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Nothing really matters to me)

 

다시 슈티르너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All things are nothing to me.’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

모든 자유는 근본적으로-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모든 자유는 근본적으로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자기해방과 해방(Emanzipation)을 구별하라

 

우리는 앞서 슈티르너가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변주하여 “네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는 주장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내세우는 ‘유일자’, 곧 ‘나다움’의 철학을 의미하고 다시 ‘자유’의 문제와 연결되면서 자유가 ‘자기해방’임을 드러낸다. 못다 들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자유는 근본적으로-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다.(184) 이 말은 우선, “내가 나다움(Eigenheit)을 나에게 마련해 주는 만큼 내가 그만큼만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184) 좀 더 ‘자기해방’에 대해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슈티르너가 자기해방을 해방(Emanzipation)과 구별하는 지점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해방과 구별되는 것은 해방, 자유롭게 방면함(Freisprechung), 자유롭게 놓아줌(Freilassung)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구별 속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놓아줌’을 갈망하고 외친다.”고 비판한다.(184) 이렇듯 그에게 자기해방과는 다른 의미인 해방은 ‘자유롭게 방면함’, ‘자유롭게 놓아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성년임을 선고하다’(für »mündig erklären)는 것을 ‘해방하다’(emanzipieren)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185) 그런데 동사 ‘에만치파레’(emancipare)는 라틴어에서 우선 타동사로 사용되었고, 또한 체들러가 번역하듯이 ‘팔다’(verkaufen), ‘양도하다’(veräußern)의 뜻이었는데, 특히 경작지를 팔거나 양도하는 것을 일컬었다. 이 동사와 명사형이 서유럽 민족 언어로, 14세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17세기에는 영국 그리고 그 후 독일로 유입된 이후에 재귀적인 사용이 대두됐는데, 이는 성년이 됨/성숙하게 됨(Mündigwerdung)이 지니는 관습적인 의미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이전의 법률 용어에서 배제되었던 자기 전권위임(Selbster-mächtigung)을 지시하게 되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해방 9, 22쪽.) 우리는 아래의 글을 읽고 난 후에 슈티르너가 ‘자기해방’을 ‘자기 전권위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아래의 글을 음미해 보자.

 

자유롭게 놓아준 사람(Freigegebene)은 바로 어떤 해방된 자, 어떤 (노예에서 해방된: 옮긴이) 자유인(libertinus), 사슬의 조각을 질질 끌고 다니는 어떤 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der Esel in der Löwenhaut)처럼 자유의 겉모습 속에 있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185)

 

  1. 자기해방은 자기 전권위임’(Selbster-mächtigung)이다.

 

이제 슈티르너에게 자유롭게 놓아준 사람은 해방된 자이고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듯 자유롭게 놓아준 사람은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처럼 약자의 허세, 꾸민 기세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해방보다는 자기해방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만약 내가 힘이 있는(mächtig) 존재일 뿐이라면, 나는 이미 자연히 무엇을 할 권력을 주는(ermächtigt) 존재이고 결코 다른 전권위임(Ermächtigung) 혹은 자격 부여도 필요치 않다.”(230)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ermächtigen’< (무엇의[무엇을 할]) 권력[자격·전권]을 주다>라는 단어를 소유와 연결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소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나의 안에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네! 나는 어떤 소유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는가? 내가 나에게 –무엇을 할 권력을 주는(ermächtige) 모든 것에 있다. 내가 나에 소유를 취함으로써, 혹은 나에게 소유자의 힘(Macht)을 주고, 전권(Vollmacht)을 주며, 전권위임(Ermächtigung)을 줌으로써 나는 소유의-권리를 나에게 준다.(284)

이렇게 보면, 그에게 자기해방이라는 것은 ‘자기 전권위임’(Selbster-mächtigung: 물론 슈티르너가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진 않는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자기해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 이유는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지(befreite) 않기 때문”이다.(94) 그리고 표상의 신성함에 대한 존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현대적인 시대는 단지 실존하는 객체, 현실적인 권력자(Gewalthaber) 등등을 표상된 것(vorgestellte)으로 변화시켰는데(verwandelte), 다시 말해 그 이전에 관념(Begriffe) 속에서 오래된 존경을 상실하지 않았을 뿐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존경이 강하게 증가했다.(94)

 

그는 표상을 도덕성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Sitte)과의 결별을 선언하지만, ‘도덕성’(Sittlichkeit)이라는 표상(Vorstellung)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96) 예를 들어 ‘가족’이 어떤 신성한(heilig) 관념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신성한 관념을 결코 모욕해서는(beleidigen) 안 된다는 것이다.(95) 나아가 “이러한 가족은 어떤 생각, 관념으로 내면화되고 지각할 수 없게 된 가족은 이제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바로 그 신성한 것의 전제정치(Despotie)은 열 배나 더 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의 전제정치는 내 양심 안에서 떠들기 때문이다.”(96)

 

 

  1. 신성한 관념이라는 전제정치를 깨부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Nichts)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정치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유일자의 존재론인 ‘창조적 무’이다. “가령 표상된 가족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Nichts)으로 될 때, 이러한 폭정은 부서진다.(96) 이러한 폭정을 부수는 것이 다름 아닌 유일자의 나다움을 찾는 것이고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며 자기해방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자유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가 말하는 ‘자아’가 다음과 같음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공허함(Leerheit)의 의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das Nichts)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das schöpferiche Nichts), 곧 아무것도 아님에서 나 자신은 창조자로써 모든 것을 창조한다.(5)

 

‘Nichts’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non ens)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무(Nichts)의 지위는 슈티르너 철학의 존재론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매순간마다 자신을 그때그때 최초로 정립하거나 창조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167) 이는 활동적인 자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자아의 활동성은 유적 본질의 부정으로 나아가고 창조적 무를 긍정하게 만드는 계기(monent)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은 부정의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창조적인 자아로 회귀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고, 오히려 끊임없는 부정의 활동으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Göttliche’, 곧 신적(神的)인 것이라는 말,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크고도 성스러워 함부로 했다가는 큰일이 나는 어떤 대상을 수식할 때 쓰는 말이다.(빌헬름 바이셰델, 안인희 옮김,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 2012, 30쪽.) 이것에 대해 슈티르너는 비판을 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일자, 나다움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그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모든 거룩한 것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그에게 권리, 국가, 사회, 인간, 인간적인 것, 하물며 가족, 이념, 소명 등을 거룩하게 하는 모든 것은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룩한 것에 대한 비판이고 거룩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이다.

이러한 거룩한 것, 신성한 것은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일반적인 것’(allgemeine) 또한 비판의 대상이고 무관심의 대상이다. 일반적이란 말은 하나의 집합에 속하는 모든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특수, 단일과 대조적인 말이다. 일반적(general)은 유, 기원을 뜻하는 ge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유적존재를 비판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일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것에 무관심하며, 오로지 다음과 같은 점을 고수한다.

 

  1. 염려하라, “나에게 있어서 나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에게 있어서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Mir geht nichts über Mich!)(5)

 

위 구절과 유사한 말이 그의 저작에서 몇 번 더 언급된다. 그는 출판물을 예로 들어 소유 문제와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출판물은 나에게 있어서 이미 나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는(Mir nichts mehr über Mich geht) 순간부터 나의 소유이다.”(316) 이와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인류, 이념: 옮긴이)은 나에게 있어서 내 위에 있는 것이다.”(es geht Mir über Mich.”(341) “내 아래에 있는 모든 참들은 내게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 위에 있는 어떤 참, 곧 내가 나를 참에 맞추었어야만 하는 참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에게 어떤 참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이상인 것은 아무것도 없기(über Mich geht nichts) 때문이다! 나의 본질(Wesen)조차, 내 위에(über Mich)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질조차 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정확히 말해서 이 ‘양동이에 있는 물방울’, 이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 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399)

그런데 “참, 인류 등등과 같은, 모든 더 높은 본질은 우리보다 상위에(über) 있는 어떤 본질(Wesen)이다.”(40)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일자가 염려해야 할 것은 나의 자아, 유일성, 나다움이다. “너의 고유한 자아(Dein eigentliches Ich)를 위해 염려하는(sorgest) 것이 필요하다.”(31) 염려한다(sorgen), 염려(Sorge) 단어는 슈티르너가 자주 쓰는 단어인데, 특히 유일자를 개념화 하는 중요한 단어라고 본다. 유일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염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나다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것에 대한 탈신성화의 선포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자기해방, 곧 자유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자를 주장했던 슈티르너가 죽은 뒤 한참 뒤에 하이데거는 ‘염려’를 자신의 존재론적 명칭으로 사용한다.

심려(Sorge, 염려, 마음씀)는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의 존재를 특히 심려(Sorge)라고 이름 짓는다. 이는 순전히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심려는 그야말로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특징짓는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그렇다면 ‘창조적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존재론에서 유일자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고유한 자아’이다. 결국 슈티르너의 존재론은 고유한 자아, 나다움, 자기해방, 나아가 자기 전권위임을 염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미 확인했듯이 이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이다.(39) 다음호의 글의 주제가 정해졌다. 자신을 염려하지 않는 자는 자기폐지이다. 그의 책에서 끝으로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나의 힘(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Nichts)에서 다시 태어난다. 신이든, 인간이든지 간에 나보다 더 위에 있는 모든 더 높은 존재(Wesen)는 나의 유일성(Einzigkeit)에 대한 느낌을 약화시키고 내가 나의 유일성을 의식할 때(der Sonne dieses Bewusstseins)에만 빛이 바랜다. 만약 내가 나 자신 위에 나의 관심사인 유일자를 세운다면, 그때에 나의 관심사는 무상함(Vergänglichen) 위에, 곧 자기 자신을 소비하는, 그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창조자 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다.

나는 나의 관심사를 무(Nichts) 위에 세웠다.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고정관념은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유령이다.

 

우리는 앞서 신성모독자가 수행하는 신성모독(Entheiligung)과 과소평가(Herabsetzung)는 탈마법화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나아가 신성한 것에 대한 탈마법화는 지금까지의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새로운 역사의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나의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이 글에서는 고정관념에 대한 슈티르너의 이야기를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Mensch, es spukt in Deinem Kopfe). 자네는 미쳤네!(Du hast einen Sparren zu viel) 너는 위대한 존재물(Dinge)을 상상한다. 그리고 너는 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들의 모든 세계, 네가 어떤 것에 천직인 정신의 왕국, 너에게 손짓하는 이상(Ideal)을 마음에 그린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종의 고정관념(fixe Idee)을 가지고 있다네!(46)

 

그가 ‘고정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을 복종시켰던 하나의 관념(Idee)이다.”이고 “어떠한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Tugend)이다.”(46) 나아가 “어떤 생각을 불어넣었던(sich in den Kopf gesetzt) 것”을 고정 관념(fixe Idee)이라고 부르고 있다.(80)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그들의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출몰한다(spukt). 가장 괴롭히는 유령(Spuk)은 인간(der Mensch)이다.”(80) ‘그 인간’이라는 ‘유령’은 고정관념이고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다. 그리고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령을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Begriffe)은 도처에서 결정해야만 하고, 삶을 규정하고, 지배한다.”(104) “언어 혹은 ‘말’은 우리를 가장 과격하게 전제적으로 다스린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에 반대하여 고정 관념이라는 어떤 완전한 군대를 세우기 때문이다.”(389) 또한 “고정 관념은 ‘근본명제, 원리, 입장’ 등과 같은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낯선(fremd) 입장이 바로 정신, 이념, 생각, 개념, 본질 등의 세계이다.”(67)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개념규정(Begriffssatzungen)에 따라 살아가도록 강제되었다.”(105)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개념규정을 비판하면서, 개념이 ‘유일자’, ‘에고이스트’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소유가 약화되는 곳에서, 그것이 중지하는 곳에서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이 시작되고 어떤 목적은 고정관념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66]바로 어떤 목적이 우리가 소유자(Eigentümer)로서 뜻대로 행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Eigentum)를 중지하는 그 곳에서 시작한다. 그 경우에 어떤 목적은 하나의 고정된 목적이거나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된다.

 

슈티르너가 고정관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 대부분 신문들의 모든 바보 같은 쓸데없는 말은 도덕, 적법성, 기독교 정신 등등의 고정관념으로부터 고통 받는(leiden) 바보들의 끊임없는 수다가 아닌가?”(47) 슈티르너는 분명히 이러한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끼치는 억압성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앞서 슈티르너가 탈신성화를 통해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현대의 영혼 상태로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방식이다. 곧 우리가 고통받게 만들고(Leiden-machen), 고통스럽게 놓아두고(Leiden-lassen),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고(Sich-leiden-machen), 스스로 고통받게 놓아두는(Sich-leiden-lassen)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해결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Seelenstnde Psychoanalyse) 슈티르너에게 ‘고정관념’은 고통의 원인이다. “어떤 참된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를 찾으려고 애쓰고 찬양한다.”(397)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지배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정관념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우리가 스스로 고통받게 만든 것이고, 이 고정관념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게 놓아두는 것이며,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하늘을 자신들에게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천국의 입장을 확고하게 그리고 영원히 받아들이기 위하여, 인류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칠 줄 모르게 필사적으로 싸웠다.”(67)

 

 

  1. 고정관념에 대해 의심하라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한 고통으로부터 저항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태도는 의심하는 것이다. 곧 고정관념이라는 신성한 것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가 유일자의 태도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유일자고 선언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을 자신보다 더 높은 본질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아님’이라고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문마다 정치기사로 가득한 것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언젠가 비판의 날카로운 칼을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놓으려 하지 않고, 노복(奴僕)은 노복 근성(Untertanentum)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자유주의자는 ‘인류’ 등등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미친 사람의 그릇된 생각처럼 확고한 그들의 생각들은 단단한 토대에 서 있다, 그리고 저 생각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신성한 것을 공격한다! 그렇다, ‘고정관념’, 그것은 참으로 신성한 것이니까!(47)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의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곧 도시(polis)를 자연적 사실로 보고 도시 안에서의 삶을 정치적 동물로 파악하면서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슈티르너는 기존의 공동체의 삶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에고이스트의 연합’을 구성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연합은 교류, 상호성(Gegenseitigkeit)이고 자유의 확대이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존의 ‘생각들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의심하면서 살고 있는가? 과연 이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너무나 뻔한 질문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의심하며 살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슈티르너는 고정관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여 그 신성함에 대해 모독을 하길 원했고,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했기에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편협 고루한 종교적 견해를 종교적 입장의 또 다른 측면, 곧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한다(eintauschen). 예를 들어 우리는 더 이상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은 거룩한(göttlich)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거룩한 것이다”라는 술어의 자리에 동일한 의미인 “신성한 것이다”(heilig)라는 말을 대신한다면, 상황은 모든 낡은 것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것에 따라서 사랑은 인간에게 선한 것, 선한 것의 거룩함(Göttlichkeit), 인간에게 명예를 만드는 것, 인간의 참된 인간다움(이것은 “그를 비로소 인간(Menschen)으로 만들고”, 비로소 그의 밖에 어떤 인간을 만든다.)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선한 것은 더 정확하게 다음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비인간적 인간(Unmenschliche)은 애정이 없는 에고이스트이다.”(51)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신은 사랑이다”에서 “사랑은 거룩한(göttlich) 것이다”로, 그리고 다시 “사랑은 신성한(heilig)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이다”로 교환된다. 이렇게 되면 슈티르너가 보편적 추상성을 나타내는 ‘인간’과 구분하여 개별성을 강조하고자 사용하는 ‘자아’, ‘유일자’, ‘에고이스트’는 비인간적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맑스와 아도르노에게서도 교환Tausch, 교환가치Tauschwert는 자본주의 사회나 상품의 비밀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열쇠이다. 이것에 반대 측에는 사용가치, ‘즉자적인 사물이 갖는 질’(質), ‘불가공약적인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32쪽) 이런 맥락에서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한 것은 ‘인간다움’이다. 모든 개별자는 ‘인간’ 혹은 ‘인간다움’으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다움 그 반대 측에 있는 사용가치는 ‘나다움’, ‘비인간적 인간’, ‘에고이스트’로 볼 수 있다. 나다움의 주장은 모든 나다움이 ‘인간다움’이라는 교환가치로 교환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과 교환되는 모든 ‘유일자들’의 비교될 수 없는 질적인 측면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다움’이 ‘인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가? 슈티르너는 ‘나다움’이 ‘인간다움’의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인간다움’이 ‘나다움’을 가능하게 하는가? 헤겔은 후자를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은 좋은 국가의 시민이 되는 데서 비로소 자기의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법철학, 153절 보)

또한 위 글에서 논의되는 ‘인간다움’은 계몽과 연관하여 살펴볼 단어이다. 왜냐하면 계몽은 인간다움과 이성성의 원리들을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순수하고 고상하고 인륜적이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가들의 진보 이데올로기에 있어 계몽은 잠재적으로 역사적인 범주, 기획과 목표 개념으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계몽』, 31-32쪽 참조). 계몽이 인간다움을 지향하고 있다면, 슈티르너는 인간다움을 지양하여 나다움(Eigenheit)을 지향하고 있다.

 

 

  1.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라

 

고정관념은 신성한 것이고 이것을 의심하는 것이 나다움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성한 정신은 절대적 관념으로 변신하고 다시 절대적 관념은 인류애, 이성적인 것, 시민의 덕 등등으로 변신한다.

 

가지각색의 변신들(Wandlungen) 가운데 신성한 정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대적 관념’(absolute Idee)이 되었다. ‘절대적 관념’은 다시 다양한 굴절을 통해 서로 나누어져(auseinander) 인류애, 이성적인 것, 시민의 덕(Bürgertugend) 등등의 다른 종류의 관념을 만든다.(104)

 

슈티르너는 절대적 관념이 변신한 것들 가운데 ‘덕’(Tugend)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다움, 여성다움을 자신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다움’으로 인하여 고통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많은 고정관념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아니라 ‘나다움’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남자다움(Männlichkeit) 혹은 여자다움(Weiblichkeit)과 같은 어떤 나의 특성((Eigenschaft) 고유성(Eigentum))일 뿐이다. 고대인은 사람들이 완전한 의미에서 남자(Mann)라는 그 점에서 이상(das Ideal)을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남자의 덕(Tugend)은 남성적인 힘(virtus)과 훌륭함(arete), 다시 말해 남성다움(Männlichkeit)이다.…여자는 ‘진정한 여성다움’(echten Weiblichkeit)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99)

독일어 Tugend는 virtus(남성적인 힘), vir(인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사물의 고유한 힘을 의미한다. 그런데 “ 인간(Der Mensch)은 단지 어떤 이상이고, 유는 오로지 어떤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Ein Mensch)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Menschen)이란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200) 슈티르너에게 ‘이상’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존재의 의미이다. 그런데 “종교는 어떤 이상(Ideal)의 고정(Fixierung), 어떤 절대적인 것의 확정으로 존재한다. 완전성은 ‘최고의 선’이고, 선의 끝(finis bonorum)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이상은 완전한 인간, 참된 인간, 자유로운 인간 등등이다.”(269) 우리는 이미 고정관념이 “어떠한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46)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 곧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기(verschmähen) 위해” 노력했던 ‘니농’(Ninon)에 대해 언급한다. 먼저 ‘욕하다’, ‘비방하다’(schmähen)와 연관된 단어는 조롱(spott), 무례함, 자만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두 탈신성화를 위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잠시 니농 드 랑클로(1616∼1705)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여성인데, 직업은 ‘코르티잔(Courtesan, 고급 창부)’으로 알려져 있다. 15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하급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고급 창부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현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이태리어, 스페인어, 수학과 철학 등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유머와 센스를 겸비한데다 우아한 외모도 갖췄다고 한다. 루이14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조언을 들었고, 볼테르도 그의 살롱에 출입하는 단골 문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프랑스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불공평함을 극복하기 위해 남성 우월주의가 만든 모범적 삶과 탕녀의 고정관념을 바꿨다. 슈티르너도 이러한 그의 모습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며,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여성으로서는 유례없는 지적 자유를 누렸다.” 니농 드 랑클로는 “군대를 지휘하는 것보다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사랑은 굶주림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화불량으로 죽는 경우는 많다.”(코르티잔, 매혹의 여인들, 수잔 그리핀 지음, 노혜숙 번역/해냄출판사)

 

 

  1. 비아(Nicht-Ich)라는 실체에 비굴하게 굴지 말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의심하라, 그래서 나다움의 가치를 끌어올려라

 

“비아(Nicht-Ich)라는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엄청난 가격을 지니고 있는 한, 나의(Meiner)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비아는 나에 의해 소비하고 흡수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거칠고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체를 완전히 먹어 없애지 않으므로, 기생생물이 신체에서 바로 그 신체의 체액으로부터 양분을 배양하듯이,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것(Unbeweglichen)에, 다시 말해 이러한 실체(Substanz) 주변에서 대단히 부지런히 비굴하게 굴뿐이다.”(72)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비아는 신과 같이 파괴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아는 국가, 사회로 볼 수 있다. 슈티르너는 또한 사회를 실체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실체(Substanz)를 다치지 않게 해야만 하고 신성하게 유지해야만 한다.”(343) 실체에 대한 잠시 살펴보자. 최초의 존재자를 ‘자기 원인’, 곧 신(theos)이라고 보고,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이므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체(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 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데카르트, Principia Phil, 1, 57)이라는 의미에서 ‘실체’(substantia)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ens perfectissium),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재) 존재자’(ens realissimun)라고 불리 운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실체의 개념을 ‘자족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실체라는 것은 마치 기생생물이 바로 그 신체의 체액으로부터 양분을 배양하듯이, 사람들이 그러한 실체에 대해 비굴하게 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비아’는 소비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비아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체로 보이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다. 신성한 것은 신성한 것이라고 ‘선포’되어야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Wesentliches) 혹은 ‘실체적인 것’(Substantielles)은 아무것도 변화(Veränderung)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72) 독일어 Wesen은 ‘본질’을 뜻하는 라틴어 essentia가 어원이다. 이 말은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ousia의 번역어인 라틴어 esse에서 유래한 것이다. 철학에서는 1)부수적인 성질의 반대말로 어떤 존재의 항구적인 본성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실체’와 가깝다. 나의 것이 비아의 것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국가가 자아(das Ich)로 존재하는 한, 개별적인 자아는 일종의 가난한 악마, 어떤 비-자아(Nicht-Ich)로 남아야만”(280) 한다.

그는 욕망(Begierden)이 ‘고정되어(fix)’서는 안 된다.(67)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나의 소유 스스로가 고착되어 하나의 ‘고정된 이념’ 혹은 하나의 ‘병적 욕망’(Sucht)이 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을”(157) 삼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고정관념은 병적 욕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폐욕망(Geldgier)으로부터 화폐욕망의 노예만을 자유롭게 한다.”(374)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해 ‘노예화된 본성의 한탄(Jammer)을 경청’하라고 한다.(68) 화폐욕망은 맑스가 자본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맑스는 이러한 화폐의 욕망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독단론자과 비판가를 구분하는데, “비판가는 항상 사상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그는 원리적인 생각을 사유과정(Denkprozess)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생각을 고정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단론자와는 차이가 있다.”(162)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유일자는 비판가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의심하는 자이다. 나아가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311)은 유일자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곧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elung) 등도 유일자의 덕목임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래서 그는 “나의 가치, 곧 나다움이라는 가치를”(279) 끌어 올려라! 그런데 “내가 나다움(Eigenheit)을 나에게 마련해 주는 만큼 내가 그만큼만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다.”(184)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자기 해방’(Selbstbefreiung)이기 때문이다.

자기해방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탈신성화, 탈마법화를 통해 희생과 체념을 역사를 넘어서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우리가 앞의 글에서 논의한 것을 잠시 정리해 보자.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것인데, 고취된 교육은 ‘신성한 것’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은 ‘소유자’의 교육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가 비판하는 교육은 전자의 것이다. 도덕적 영향력의 출발점은 우리의 “굴복(Demütigung)”이고, “용기(Mut)의 꺾어버림과 굽힘은 겸손(Demut)”이므로, 이를테면 “어떤 더 높은 것굴종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기 비하”이다.(88쪽; 여기서 슈티르너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유희를 엿볼 수 있다.) 더 높은 것은 신성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낯선 힘”에 대한경외심 때문이다.(77) 경외심은 결국 자기비하이므로 나다움이 아니다. 그래서 유일자의 철학은 낯선 힘을 지양하고 나다움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의 철학은 그야말로 신성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 (Nichts)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철학은 “ ‘에고이스트가 신성한 것을 ‘덧없음’,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77) 자기결정에 의한 ‘나다움’”(172)이다.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이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나다움을 선어하는 자는 신성모독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성모독자가 수행하는 신성모독과 과소평가는 탈마법화라는 점이다. 나아가 탈마법화는 지금까지의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역사의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출발점은 저항이다.

 

1. 나다움을 선언하는 자는 신성모독자이다.

 

유일자의 철학이 나다움을 선언하는 것이고 나다움은 신성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는 것이기에 그런 사람은 ‘신성모독자’(Gotteslästerer)(216)이다. 이를테면 “거룩한 권리에 대한 신성모독(Blasphemie)”을 하는 사람이다.(308) 일반적으로 신성모독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은 슈티르너가 유일자의 태도를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 Blasphemie단어는 이 책에서 한 번 사용하지만 신성한 것을 파괴하는 태도이다. 이 단어 Blasphemie와 유사한 말은 신성 모독, 신을 모독함(Entweihung –en)인데 이 단어의 사용은 103, 186, 222, 311에서 나온다. 또한 같은 의미인 Entheiligung; entheiligen란 단어는 103-4, 166, 202, 244, 311-2, 343쪽에 언급하는데, 신성 모독은 신성한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가장 과격한 것이며, 슈티르너가 거룩한 정신을 비판하기 위하여 정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하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이성에 대한 반이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이라는 점과 같은 방식이다. 나를 지배하는 정신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자기 정신의 사용을 통한 비판이다.

 

“내가 정신을 유령(Spuk)으로 과소평가하였고 내(Mich) 위에 정신의 지배권을 어떤 망념(Sparren)으로 과소평가 할 때, 그 경우에 정신은 신성을 모독하는(entheiligt) 것으로, 신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자연을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정신을 사용한다.”(104)

 

또한 신성모독(Gottes)lästerung과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산주의, 그리고 에고이즘을 모독하는(lästernd) 인본주의는 여전히 사랑을 기대한다.” [347]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본주의나 공산주의는 에고이즘을 모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자의 철학은 거꾸로 신성 모독(Lästerung)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신들린 상태이므로 ‘나쁜 마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기독교도에게 가장 나쁘게 보이는 (종교, 도덕상의; 옮긴이) 죄를 범한다. 곧 신성한 마음에 거슬린(wider) 죄와 신성 모독(Lästerung)을 저지른다.”(202)

 

2. 신성모독(Entheiligung)은 탈마법화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나 자신의 밖에서 거짓말 하는 운명을 주어야만 한다고 항상 가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국 나에게, 나-인간(Ich – Mensch)이기 때문에 내가 인간적인 것을 요구해야만 하도록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다. 피히테의 자아(Ich/ego)조차 나 밖에 있는 그와 같은 본질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자아만이 권리를 갖는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아니라, ‘그 자아’(das Ich)이다.(406)

 

슈티르너는 ‘인간’이라는 것이 “나 밖에 있는” 본질인 피히테의 자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서 마법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법의 영역에서 성경은 마법 수단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성경을 액막이로 사용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다만 가치를 가지고, 어떤 마법 수단(Zaubermittels)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376) 나아가 그는 마법의 영역을 ‘실존과 소명’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면서 마법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한다.

 

만약 실존과 소명(Existenz und Beruf) 사이에, 다시 말해 존재하는 나와 존재해야만 하는 나 사이에 긴장이 중지되었다면, 기독교 정신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는 끊어졌을 텐데.(410)

 

위 글은 접속법 2식 과거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저 문장의 의미는 실존과 소명 사이에 긴장이 중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실존은 ‘존재하는 나’이고 소명은 ‘존재해야만 하는 나’이다. 따라서 소명은 본질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까 슈티르너는 실존과 본질의 긴장이 끊어져야만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소명(Beruf)이라는 단어는 계속하여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소명은 일종의 본질이며 본질은 ‘개념적 질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개념도 나를 표현하지 않는다.”(412) 유일자라는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이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411) 소명(Beruf)이란 말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세속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생활의 세속적인 일들을 포괄적인 종교적 영향권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재성, 「막스 베버의 경제윤리 연구」, 서울대 대학원, 1983, p.36) 슈티르너는 막스 베버 이전에 자신의 시대를 마법화된 시대로 진단하고 있다. 여전히 종교적인 측면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하여 유령을 푸닥거리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의 계몽 비판은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의 신화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이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하면서 계몽의 변증법, 곧 이성이 진보이면서 야만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제시하였듯이, 이미 그 이전에 슈티르너는 근대를 비판하면서 여전히 이성이 환상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로지 영혼, 감정, 믿음의 환상(Phantasie)이 종교적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연적 오성(Verstand)”, 인간의 이성(Vernunft) 또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은 이성조차 환상(Phantasie)과 같은 그러한 공상가(Phantastin)로 존재할 수 있다는 권리를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의미하는가.(52)

 

슈티르너는 물론 ‘탈마법화’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지향, 곧 소명에서 유일자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탈마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탈마법화는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 곧 ‘신성모독’이다. 막스 베버는 “세계의 탈마법화”(Entzauberung der Welt)를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과의 대면적 관계 설정의 완결이 탈주술화, 탈마법화이다. 그는 가톨릭에서 사제는 변체(變體) 기적을 수행하고 천국의 열쇠를 장악하였던 주술사 또는 마술사였기 때문에 세계의 탈마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96, p.91)

또한 “선량한 사람들은, 법이 민중(Volk)의 감정 속에서 공정하고 정당한 것만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중은 아마도 신성모독자(Gotteslästerer)에 대립될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신성모독에 적대적일 것이다.”(217) 이 단어의 사용은 188, 202, 267, 347쪽에 나온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모독하다’(entweihen)라는 단어는 103, 186, 222, 311쪽에서 언급하며 ‘욕보이다’(schänden)라는 단어는 186, 244, 336쪽에서 언급한다. 또한 욕하다, 비방하다(schmähen)와 연관된 단어는 217, 308, 311, 328, 329에 나오며, 특히 217쪽에 나오는 조롱(spott; 64, 217, 267,311), 무례함, 자만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데, 모두 신성모독을 위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슈티르너에게 웃음거리나 조롱은 신성모독(Entheiligung)으로 이해된다. ‘덕’이라는 신성한 것에 대한 그의 경멸을 들어보자.

 

오 라이스(Lais)여, 오 니농(Ninon)이여, 너희는 이처럼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기(verschmähen)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덕을 닦으면서 늙어간 천 명의 처녀들에 반해서 한 사람의 자유로운 그리세트(Grisette)여!(67)

 

“에고이스트는 무리한 요구와 현재의 개념에 반대함으로써, 그는 가장 과격한 것-신성모독(Entheiligung)을 무자비하게 실행한다. 그에게 아무것도 신성한 것이 아니니까!”(202) 이 말은 견유주의(犬儒主義), 곧 시니시즘(cynicism, Zynismus)을 떠오르게 한다. ‘개와 관련되는’을 뜻하는 kunikos는 넒은 의미에서 어떤 가치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이다. 퀴니코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의 의미-엘렌코스(elenchos)라는 대화법을 통해 당혹스러운 상태, 곧 아포리아(aporia)에 봉착하여 자신의 특정한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를 웃음거리나 조롱으로 바꾸었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의 철인(412-323 BC) 디오게네스(Diogenes), 그의 실생활 표어는 아스케시스(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는 것), 아나이데이아(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아우타르케이아(스스로 만족하는 것)이고 옷 한 벌, 한 개의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통 속에 살았다. 알렉산드로 대왕이 그를 찾아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서라.”고 말했다. 이 말을 슈티르너는 국가에 대해 에고이스트가 하는 말 “나로부터 햇빛을 가리지 마라”(Geh’ Mir aus der Sonne)로 표현하면서 한 번 인용한다(257).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가 보여주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곧 신성한 것을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77) 유일자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그가 무자비한 신성모독, 아무것도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선언, 신성한 것을 욕보이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왜 그토록 신성한 것, 본질, 소명을 경멸하고, 평가절하 하는 것인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3. 탈마법화는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삶의 사명(Lebensberuf), 어떤 삶의 과제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삶을 통해 어떤 것을 현실화시켜야만하고 해내야만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떤 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은 오로지 수단과 도구이인데, 그 어떤 것은 우리의 삶보다 더 가치가 있고, 그 어떤 것에 사람들은 삶을 빚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희생(lebendiges 희생Opfer)을 요구하는 어떤 신을 가지고 있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스러운 행위만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자체는 줄지 않고 남아있고, 정의의 범죄자는 금방 희생에 빠지며, 우리는 “인간의 본질”, “인류의 이념”, ‘인간성’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 ‘가난한 죄인’을 희생으로 학살하고 그 밖에 아직도 우상 혹은 신과 같은 것을 말한다.(361)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삶의 사명은 본질로 이해 할 수 있고, 삶의 사명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있는 희생’을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곧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중들과 개인들(Individuen)을 인류에 헌신 속에서 고생하도록 한다(sich abquälen).(4)

 

우리는 여기서 “(몹시) 괴롭히다, 고통을[고뇌를] 주다;가책받게[번민케] 하다(quälen)라는 단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단어와 관련된 단어들은 이 곳 말고도 42, 191, 238, 266(새로운 헌법으로 시대에 적합한 개선으로 고생하고), 269(새로운 이상은 새로운 고통을 주고), 324, 325(인류에는 인간의 고역이며), 344, 363, 389쪽에 나온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소명, 본질, 인간, 인류 유령들을 신성모독(Entheiligung, 103,104)이고 과소평가(Herabsetzung,166, 202, 244, 312, 312)하는 것이다. 또한 아픔, 고통(Qual)과 관련하여(43, 92, 164, 238, 324, 397) 논의하면서, 그가 도달한 것은 환영이라는 것, 더 높은 것, 유령이라는 것 때문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걸쳐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der 물질»materiell Gesinnte)은 이상적인 환상(Schemen), 자신의 덧없음(Eitelkeit)에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고, “정신적인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물질적 향유, 풍족한 생활(Wohlleben)에 모든 것을 희생한다.(64)

 

이렇듯, 슈티르너는 자아의 생성사를 희생(Opfer)으로 보고 있는데, 이 희생을 극복하는 것을 에고이스트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저작 전체는 희생의 극복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사람들은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의 희생자와 만나지 않고, 어디를 바라볼 수 있었는가?”(66) 그는 비전인적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도대체 누가 “희생하는”(aufopfernd) 것인가? 물론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이다. 만약 연인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과 결핍을 견디고 부모를 떠난다면, 그는 희생하지 않는 것이냐? 혹은 모든 욕망들, 소원들 그리고 고유한 열정의 만족들을 바치는 야심이 있는 사람(Ehrgeizige)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혹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인색한 사람(Geizige)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혹은 쾌락을 좇는 사람(Vergnügungssüchtige) 등등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열정을 위해 나머지 것들을 희생하는 사람의 어떤 열정은 그들을 지배한다.(81)

 

이는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시민적 개인의 원형(Urbild)”(DA,63)으로 다루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통하여 사이렌의 소리를 들이며 죽지 않기 위해 자연적 욕구와 본능을 억압하는 희생(Opfer)과 체념(Entsagung)의 자아 형성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그러한 자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다른 한편 슈티르너는 “그런 까닭에 기독교적인 생각을 품은 자들은 억압된 노동자들의 경건성, 그들의 인내와 체념 등등만을 배려할 뿐이다. 억압받는 계급은 그들이 기독교도인 한에 있어서만, 모든 비참함을 참아낼 수 있었다.”(132)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는가? 희생은 많은 곳에서 논하고 있다(82, 83, 85, 104, 109, 135, 165, 196, 198, 211, 238, 243-4, 246-7, 277, 285, 324, 328, 338, 341, 344, 346, 351, 409). 슈티르너는 38쪽에서 민족을 “애국심이 있는 헌신(patriotische Aufopferung)”으로 파악한다. 198쪽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슈티르너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고 있다.

 

새로운 역사는 희생(Aufopferungen)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나의 역사이다. (Der) 인간은 보편(Allgemeine)으로 간주하는 것이다.(197-8)

 

이것은 아도르노가 오디세우스를 개인의 탄생으로 보면서 역사를 자기부정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과 상응하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새로운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이해하고, 이것을 향유의 역사로 보고 있다. 향유의 역사는 자기부정을 넘어서고, 희생을 극복한 에고이스트, 유일자로 자신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슈티르너가 미래를 향유의 역사로 추구하는 반면에, 아도르노도 미래의 역사를 화해(Versöhnung)로 본다.

또한 슈티르너는 체념(Entsagung)을 희생과 함께 논의한다(67, 73, 153, 353). 67쪽에서는 바로 이 “체념의 관례는 너의 갈망의 격정을 냉각시킨다.”고 비판한다. 73쪽에서는 “천상(Himmel)은 체념의 종점이다.”이라고 비판하고 153쪽에서는 “모든 “우월함”을 포기하라고 하는 가장 엄격한 체념론”을 비판하면서 유일자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용으로 자기 향유로 향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신성화(Heiligung) 혹은 정화의 특성(Zug)이 낡은 세계(목욕 재계(齋戒) 등)를 통해 진행되듯이, 그렇게 기독교적 세계를 통해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의 특성이 진행된다.(408)

 

‘체내화’(Verleiblichung)라는 말을 한번 사용하지만, 이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정신분석에서 주체가 대상을 공상적으로 내부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 체내화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기향유를 향하고 있으므로 자기향유는 “자아의 자기실현(Selbstverwertung des Ichs)의 모든 총괄 개념(Inbegriff)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또한 국가에 거스르는 그의 자의식(Selbstgefühls/self-consciousness)의 자아의 자기실현이라는 모든 총괄 개념이 중요하다.”(303)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자기실현”이라는 말을 좀 더 풀어보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 자기(능력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영문에서는 “the ego’s self-realization of value from himself”이라고 번역하였다. 물론 Selbstverwertung 단어가 2번만 사용되었지만,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 자기향유로 나아가는 유일자의 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아의 자기실현의 총괄개념을 살펴 보자. 그는 우리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단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허락한 것만큼만 행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verwerten) 안 되고, 나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결코 나의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249) “내가 만들어 내는 것, 곧 밀, 아마포 혹은 철과 석탄 등등은 내가 이 땅에서 힘들여 찾아낸 것인데, 그것은 내가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려고 하는 나의 노동이다.”(282) 그러나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자신의 가치를 찾는 길이다. 그렇다, 자신의 가치회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향성을 주장한다. “그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verwertet) 않고, 오히려 국가가 그를 가치 있게 만든다.”(281) 또한 “집단 빈곤은 나의 무가치성이고,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는 현상이다.”(282) 그러므로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슈티르너는 소크라테스를 존중하면서 비판하는데,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제시한다.

 

우리들의 소유를 포기하라! 그렇지 않다. 우리들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우리 시대의 문 위에 저 균형 잡힌 시간이 서 있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Verwerte Dich)!(353)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무지의 자각도 중요하다. 다른 측면에서도 자신을 바라보자!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유일자의 철학이 제시하는 전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은 저항하는 일이다.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겪는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유의 차원에서 ‘코기도’(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반항은 원초적 자명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명함은 개인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끌어낸다.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책세상, 46쪽)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Eigenheit)의 철학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Eigenheit)의 철학이다.

박종성

 

 

  1. 우리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다.

 

우리는 앞선 글에서 신성한 것(Heiligen)이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초-자아(das Über-Ich)이라는 것에 도달하였다. 이 글에서는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것과 고취된 교육은 ‘신성한 것’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은 ‘소유자’의 교육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나다움의 철학은 신성한 것에 대한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슈티르너는 헤겔뿐만 아니라 바로 그 당시의 ‘좌파인’, 계몽적 비판가인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와 논쟁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인물, 곧 ‘소유자’의 미래상을 발전시킨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겔은 어린이의 조기에 시작하는 마음의 교양(Bildung)을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요구한다.

 

“교육(Erziehung)의 주안점은 극기, 훈련에 두어져야 하거니와 극기란 자식의 어리광(Eigenwillen)을 억누르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의 가장 고유한 주관성으로서의 이성(Vernünftige)이 어린이에게 싹트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Sittlichkeit)란 것이 감각적으로 어린이에게 심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G.W.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 174, 175, Zusätze (Hervorhebung B.A.L.) >

 

잠시 ‘Eigenwillen’ 단어를 살펴보자. 헤겔과 달리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미 첫 번째 <e시대와 철학>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Eigenwille’을 ‘멋대로 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eigen’(자신의, 자기의)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선호하고 이런 단어들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자기 의지(Eigenwille), 나다움(Eigenheit)”(186쪽)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는 ‘자기의지’(Eigenwille)를 ‘자유재량’(Willkür)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141) 그래서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는 확실히 자유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self-denial])이다.”(172)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겔에 있어서 ‘이성적인’ 인간의 생산은 ‘윤리적 인간’의 생산이고, 헤겔 이후 ‘자유인’이라는 계몽주의자에 있어서는 소위 유적본질(Gattungswesens)의 생산이다.<Der “Eigner” bei Max Stirner, Bernd A. Laska: “Katechon” und “Anarch”. Carl Schmitts und Ernst Jüngers Reaktionen auf Max Stirner. Nürnberg: LSR-Verlag 1997 Stirner-Studien Nr. 3.> 유일자로서의 슈티르너는 모든 측면에서 노력했던 그런 식의 ‘교육’을 근본적인 악으로 인식한다. 더욱이 그런 가장 우스꽝스러운 산물들은 그에게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초기의 저작에서 “자유로운 인간, 주권을 가진 인물”(freie Personen, souveräne Charaktere)을 주장하는데<Max Stirner: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1842). In: PKR, S.,77>, 이후의 저작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더 이상 ‘자유로운’, ‘주권을 가진’, ‘참된’ 등등의 인간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학술적인 경계 설정의 토대에서 ‘소유자’를 말한다. 그는 계몽주의자에 반대하여 “우리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332쪽)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덕적 영향력”은 “영혼의 구제”(Seelenheil)이다.(77) 나아가 “성직자 냄새가 나는 마음의 효력은 특히 사람들이 빈번히 ‘도덕적 영향력’이라고 부르고 듣는 것에 해당한다.”(88) 좀 더 그의 말을 음미해 보자.

 

도덕적 영향력은 굴복(Demütigung)이 시작되는 곳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도덕적 영향력은 바로 이러한 굴욕 그 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용기(Mut)의 꺾어버림과 굽힘은 겸손(Demut)에 이른다. 만약 가까이에 있는 암석이 폭발할 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도망가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면, 나는 이러한 요구(Zumutung)로 어떤 도덕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네가 식탁에 내놓아진 것을 먹지 않는다면, 너는 배고플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떤 도덕적 영향력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에게, 너는 기도하고, 어른을 존중하고, 십자가를 존경하며, 참 등등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일부를 이루고 인간의 사명이다 혹은 심지어 이것은 신의 의지이라고 말한다면, 도덕적 영향력은 완성된다. 그 때에 인간은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며, 순종하게 되어야만 하며, 규칙(Regel)과 법으로 세워진 어떤 낯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더 높은 것굴종해야(sich erniedrigen)만 한다. 곧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이다. “제 몸을 낮추는 사람은 찬양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어떤 경우든, 아이들은 제때에 깊은 신앙심, 신에 귀의함(Gottseligkeit), 존경할 만함으로 독려되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좋은 교육은 어떤 사람에게 “선한 근본 명제”를 가르쳤고 명심시켰으며 억지로 머릿속에 넣어주었고, 억지로 주입시키고 설교하게 되었다.

 

이렇듯 도덕적 영향력은 굴복(Demütigung)이고 겸손(Demut)이며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낯선 것에 자기 의지를 포기하여 더 높은 것굴종해야(sich erniedrigen)만 하는 것인데, 이는 의지의 포기이고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이다. 위에서 사용된 ‘규칙’의 어원은 ‘규칙’ 또는 ‘길이를 재는 자’를 뜻하는 라틴어 regula이다. 특정한 상황 또는 영역에서 따라야 할 방침, 해야 할 행동을 가리키거나 규정하는 공식을 의미한다. 슈티르너는 291쪽에서 규칙, 지배, 법칙을 같은 부류로 본다. 인간, 자유 등등도 이러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 그것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규칙을 지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의지를 포기하고 자기비하를 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자기비하를 하는가? 우리는 왜 자기비하를 하는가? 고취된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들린 상태가 돼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슈티르너의 말을 들어 보자.

 

 

  1. 고취된 교육-‘신성한 것과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소유자의 것

 

다시 교육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슈티르너는 우리의 교육을 ‘우리에게 감정들을 불어넣는 것’(einzugeben)과 ‘우리의 산출로 내맡기는 것’을 구분한다. 다시 말해 “감정을 나에게 불어넣은(eingeben)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인가”고 구분하면서 “후자가 자신의 것, 자기중심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은 나에게 감정으로서 각인하지 않고,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으며, 그리고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감정들을 불어넣는 것’ 다시 말해 “고취되었던 것들을 뽐내고, 나는 그것들을 마치 유산의 배당분(Erbteil)처럼 내 속에 품고, 그것들을 경작하여(kultiviere) 그것들에 의해 신들린 상태(besessen)가 된다.”(70)

 

이를테면 고취되었던 것들을 경작하여 그것들에 의해 신들린 상태가 된다는 슈티르너의 생각에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 녹아있다. 문화(kulur)라는 말은 ‘경작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lere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루소가 <에밀>에서 “인간은 경작을 통해 식물을 기르고 교육을 통해 인간을 기른다”고 말했다. 이렇듯 경작과 교육은 kulur의 두 의미이다. 그러나 루소는 문명의 진화 과정을 발전으로 보지 않는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생각을 이어 받아 원시 문화가 서구 문화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문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와 공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슈티르너의 문화, 혹은 교육에 대한 관점에서 후퇴한 교육은 고취된 교육이다. 그러니까 감정을 나에게 고취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 이러한 교육은 자신의 것이고, 이때 나는 ‘소유자’인 것이다. 나는 어떤 교육 속에 있는가?

 

또한 ‘신성한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자 모습의 이해를 위한 열쇄이다. “당신이 어떤 존경 혹은 경외(Ehrfurcht)를 품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Heiligen)이라는 이름을 얻는다.”(78) 따라서 신성한 것은 아이에게 최초에 낯선, 투사된, 내면화된, 규범적 구조로 나타난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이전의 글에서 설명하였다. 곧 신성한 것은 모든 교육의 본질적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다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감정을 나에게 불어넣은(eingeben)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인가?” 우리는 한때,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다. 아직도 첫 구절은 기억을 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우리가 때어난 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렇다! ‘사명’이다. 슈티르너 말을 다시 옮기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때어난 “그 때에 인간은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며, 순종하게 되어야만 하며, 규칙(Regel)과 법으로 세워진 어떤 낯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지금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사명은 무엇일까? 나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인간의 ‘사명’말이다!

 

 

  1. 나다움의 철학이여! 신성한 것의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자. 왜 신성한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물과 같이, 작은 어린이에게는 아무것도 신성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이란 표상(Vorstellung)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좋고 나쁜, 정당하고 부당한” 등등과 같은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zu Verstand)까지 이미 도달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의 반성 혹은 현명(Verständigkeit)에서만-종교의 고유한 입장에서-자연스러운 두려움(Furcht)의 자리에 “신성한 두려움”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다시 말해 생각에 의해서 비로소 내보였던) 경외심(Ehrfurcht)이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간주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그 낯선 힘(Macht eines Fremden)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하게 인정하는데, [78]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게 자리를 내주어, 항복하고, 자신을 속박하도록 한다(헌신, 겸손(Demut), 굴종, 공순 등등)는 것이다.(77-78)

 

슈티르너는 이 “모든 환영의 무리가 유령으로 돌아다닌다.”(spukt)고 말하고 있다.(78) 그렇다면 이러한 신성한 것, 유령이자 ‘정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틀림없이 사람들은 ‘도덕’(Sittlichkeit)이란 말을 자발성(Selbsttätigkeit), 자기결정(Selbstbestimmung)과 동의어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76) 그는 ‘이성적 자기결정’,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이 단어는 때로 부정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정신의 ‘자율성’(Autonomie)(233)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자율성은 한 번만 쓰고 있기 때문에 그와 유사하게 사용하는 ‘자기결정’이라는 말을 살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자기발전이라든가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몸에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116)고 한다. “질투가 심한 시민적(bürgerlich) 자유주의가 감시하는 ‘개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하여 행위가 완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을 결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만 개인들(Personen)의 독립(Unabhängigkeit)을 의미”(117)하고, 다시 말해서 “자기 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강조는 옮긴이],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것, 모든 가치의 인정에 따른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나다움(Eigenheit)”(172)을 요구한다고 한다. 결국 자율성은 자기결정에 의한 행위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이며, 그것이 바로 ‘나다움’이다. 곧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이다. 나의 삶을 다른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삶은 유일하다는 것을 자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신성한 것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어떤 존재물(Ding)도 스스로 신성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에 의해, 나의 선언, 나의 판단, 나의 무릎 굽히기에 의해,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양심에 의해 신성한 것이다.”(77) 결국의 나의-양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다시금 ‘나’이다. 곧 “무제약적인 자아”(unumschränktes Ich)로서의 ‘에고이스트(Egoist)가 신성한 것을 ‘덧없음’(Nichtigkeit),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77) 그의 저작 첫 문장과 똑같은 마지막 문장을 보자.

 

“나는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님(Nichts) 위에 놓았다.”(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

 

달리 말하면 모든 일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님(Nichts)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non ens)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무(Nichts)의 지위는 슈티르너 철학의 존재론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창조적 무”를 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적 본질의 부정은 창조적 무를 긍정하게 만드는 계기(monent)라고 볼 수 있다. 5쪽에서 잘 드러나듯이 “창조적 무”라는 개념은 부정의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창조적인 자아로 회귀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고 부정의 활동으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다. 창조적 무로서의 유일자는 현실 극복을 위한 부정의 부정이라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언어에서 sein이 ‘항구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다. 그리고 있음이 필연적이다’라는 것을 신념하며 있지 않음(Nichts-Sein)은 인식할 수도 없고 밝혀 보여줄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자아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있음으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Nichts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번역하였다. 무엇이라고 규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가 유일자이다. 이렇듯 유일자의 철학은 ‘아무것도 아님’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님’이기 때문에 자유가 성립할 수 있다.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유다! 우리는 자유이다. 그렇기 위해서 세계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나다움’의 철학이여! 신성한 것의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