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자유로운 글쓰기와 사상의 교류를 위해 회원들 각자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기부하면서 자신들이 꾸려나가는 블로그형 글쓰기 코너 입니다. 후원도 하시면서 글까지 써주기로 하신 회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4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장 역사적인 그리고 지성적인 맥락

 

맥스 펜스키(Max Pensky)

하버마스의 역사적이고도 지적인 영향들

Max Pensky, 사진출처: https://www.binghamton.edu/philosophy/people/faculty-pensky.html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철학자의 작업에 대한 위의 수정된 관점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반세기를 거쳐 온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위에서 내가 논한 두 번째 유형, 즉 현실 참여적 범형의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맥락 초월적 진리 혹은 주장과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그러한 주장과 규범들이 제공되고 수용되는 사회적 세계의 맥락 내재성 간의 변증법적 관계는 사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버마스가 의식적으로 모으고 개조했던 수많은 다양한 지적 영향과 원천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가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그는 현대에 요구되는 철학함의 적절한 역할과 범위는 철학자가 속한 시대, 지적 분야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포괄적인(overarching) 전망-누군가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전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몇몇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하버마스가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다양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는 점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 점은 그가 저술한 철학적 저작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저작에서 활용하는 자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어떤이들은 그가 동원하는 자료들과 영향력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자가 속한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철학자의 중심적 업무-철학적 활동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로 삼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적 의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광범위한 작용력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전기는 독일이 0년(“Stunde null”)에 머무르던 시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1945년 종전 후 독일 문화와 사회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폐허의 상태에 있게 된 때였다. 하버마스는 1929년 국가 사회주의의 “일상”이 뿌리내린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입회를 당하여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몇 달 간 잠시 방공포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던 16살 때 하버마스는 홀로코스트의 본성과 규모 그리고 그가 따르던 나치 지도 체제의 도덕적 타락을 폭로한 뉘른베르크 재판 라디오 방송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1929년이라는 출생년도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전후 독일 문화와 정치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세대의 구성원이 되게끔 하였다. 한 편으로, 하버마스와 동세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기억을 갖거나 국가 사회주의 체제가 초래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만큼의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독일 사회의 끔찍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붕괴에 대한, 총력전이라는 최후 단계에 참여했던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산산조각 난 사회를 재건하는 거대 과업을 직접 보았던 노골적이고도 개인적인 경험들을 겪을 만큼의 충분한 나이는 먹고 있었다.

이 세대에게 독일의 정치적 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미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독일은 파시즘의 폐허에서 벗어나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민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돌무더기 속에서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독일 문화의 핵심 요소들 -정치적이고도 도덕적인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 무엇보다도 칸트와 괴테, 쉴러와 바흐와 같은 계몽의 전통 –을 골라 내 새로운 사회 질서의 기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사회 재건과 재발명이라는 거대 과업을 스스로의 도전적 과제로 자기 의식적으로 인식했던 세대는 현대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은 철학적 활동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으며, 자기네 철학 전통을 집단 정체성과 자기 이해의 주요 원천으로 받아들이던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들이 자기네 철학 유산의 집단적 재정향을 사회적 재탄생의 과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0년대 초 마르틴 하이데거에 깊은 감화를 받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던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의 고유한 유산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그려보는 세대적 과업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신에 그가 당시에 대해 매섭게 기록했듯이 전후 독일 학계의 뿌리 깊은 보수주의는 머리를 모래에 처박은 채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문화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 문화는 독일이 자행했던 직전의 과거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기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침묵시키려 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와 제휴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하버마스를 가르쳤던 몇몇 교수들을 비롯해 저명한 교수들은 과거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폭로하지도 않았다.

독일적 재난에 응하면서 철학은 변화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전후 독일의 현실에서 철학은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그리고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고려대상에서 간단히 제외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실망과 좌절을 느낀 이는 하버마스가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철학은 칸트와 헤겔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 철학의 전통은 보수학계만으로 이루어진 협량한 전통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내적 비판을 가하는 전통도 포함한다. 게다가 계몽의 유산은 철학적 통찰과 내가 앞에서 논했던 진보적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 사이의 변증법 속에 핵심을 두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물음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1996: 11~22)라는 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공적 논증, 탐구 그리고 관용 개념-칸트 철학은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인지 능력이라고 보았다-이 사회 일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하버마스 및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철학적 동료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18세기의 지적 정치적 계몽의 전통이 유례없는 손상을 당한 사회의 요구에 어떻게 적절히 봉사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세속주의, 합리성, 관용, 대의적 공화정, 보편적이고도 평등한 도덕 및 법적 권리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포용력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헌신하던 계몽주의가 어떻게 당대의 요구와 공명하면서 재전유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무척 복잡하기는 하지만 다음의 세 가지 연관된 주장들로 알맞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가치를 만회하고 전후 세계에 적합하게 촉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기존 철학이 담당하던 역할, 즉 선험적이고도 토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특화되어 학문적 받침돌의 역할을 하던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그만두고, 좀 더 겸손하게, 그렇지만 좀 더 사회적으로 중대한, 세속적이고 “탈형이상학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의 가치와 도전들에 특히 잘 들어맞는 역할을 담당하라고 주문한다. 둘째,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철학, 무엇보다도 독일 대학에서 발전해 왔던 편협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멀리하던 새로운 인접 학문들과 생산적이고도 호혜적인 대화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이미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를 위한 주요 후보를 지목하고 있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적 사회학을 구성하고 있는 분야들이 그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것을 “재구성적” 과학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재구성적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추정될만한 주장을 담지한 인간 상호작용의 측면들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셋째, 하버마스는 전후 독일(혹은 더 적절하기로는 유럽) 철학이 이와 병존하던 철학 전통들, 특히 철학과 민주주의 간의 생산적 관계를 가장 기본적 문제로 취급했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의 영향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유럽 철학이 너무도 철저히 다루어 고갈시켜 버린 이론적 모델들-즉 철학적 분석의 “기본 단위”로서의 고독하고도 자율적인 자아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자기자신 및 외적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식 철학적 모델-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안과 문제들을 보게 되었다.

이후부터 나는 우선 하버마스가 새롭고 겸손하며 상호작용적인 철학 모델에 어떻게 천착했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철학과 재구성적인 비판 사회 과학들 간의 열린 대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에 대해 좀 더 길게 논하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초기 하버마스가 전후 프랑크푸르트 비판 이론 학파의 그 대표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및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협력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주체 철학과 의식 철학 모두와 확실히 절연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버마스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개했던 언어적 능력 및 의사소통 합리성에 관한 이론적 작업으로 선회할 것이다.

 

3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주제의 개관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상에서 서술한 관심사와 강조점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의 이론 작업에서의 체계성과 일관성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떤 주제들은 하버마스의 저작을 통해 울려 퍼지게 되었고 연이어 이 책을 통해서도 되풀이해 이야기되고 있다. 그가 공들여 발전시킨 많은 주제들은 결국 첫 번째 주요 저작인 『공영역의 구조변동』에 이미 담겨있던 것이다. 이 주제들 중 으뜸가는 것은 공영역이라는 관심사다. 이 주제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자기 사상의 주요 특징인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강조하도록 몰고 갔다.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자인 것은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규범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근거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준수하는 규범은 규범적 구속력을 지닌다. 하지만 [규범적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규범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에 관한] 그러한 논의가 발생할 수 있는 건강한 공영역은 다른 사회 구조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이미 제시된 것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인간적 행위의 본성은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며, 그러한 행위를 만들어 내어 참여하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들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버마스의 사상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이지만 이후의 저작에 대한 비평에서 자주 간과되거나 망각되는 사항이다. 구조변동이라는 개념은 『의사소통행위론』에서 다루는 근대성 및 합리화에 대한 하버마스적 이해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구화-하버마스는 이것을 근대화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에 대한 그의 최근 저작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하버마스의 중심 주제는 칸트적 프래그머티즘이다. 그의 기획은 칸트, 다윈 그리고 마르크스의 화해로 묘사될 수 있다(TJ: 9를 참고할 것). 그의 담론 윤리학, 범세계주의 그리고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은 몹시 분명하게도 철저히 칸트적이다. 그는 진리나 도덕성에 관한 상대주의적 입장에 굴복하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에도 무릎 꿇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규범적 기획(enterprise)이다. 결국 비판이론의 이상은 시대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이 눈에 잡히도록 진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근대성에 관한 규범적 자기 이해의 탈근대적 ‘극복’”(PNC: 130)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강한”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자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진리와 정당화』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 명확히 설명하고 있듯이 “부드러운” 혹은 “약한” 자연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무릇 보편주의적이고 규범적인 이성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맥락초월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주장들을 내세워야 하며, 그러한 주장들이 합의를 지향하는 가운데 [보편규범적] 이성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같은 이유로 그의 칸트주의는 고전 프래그머티즘에 영향을 받으면서 “탈초월화(detranscendentalized)”되었다. 예를 들어 조화로운 세계에 관한 칸트의 “범세계주의적 이상”은 객관 세계에 관한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실천이성의 자명한 전제로서의 “자유의 이념”은 책임 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합리성이라는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관념의 역량”으로서의 이성은 언어적으로 구체화되고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담론적 이성으로 대체되었다(TJ: 87).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퍼스를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리의 관습(practices)이 진화하며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진화의 역사-생물학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진화 모두의 의미에서의-를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버마스의 원숙한 개념 틀의 토대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모여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대부분의 글들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그 이후의 저작을 다루고 있다. 1장에서 맥스 펜스키(Max Pensky)는 하버마스의 저작을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연관된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하버마스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지적 생애를 제공하고 있다. 2장~5장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면서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기본 개념들에 관한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2장에서 멜리사 예이츠(Melissa Yates)는 하버마스의 형이상학 비판과 사회과학에 대한 평가를 설명하면서 하버마스의 “부드러운” 자연주의와 약한 혹은 “유사” 초월주의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과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용어에 내포된 것에 관한 방법론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가 해명한 것처럼, 형식 화용론은 탈초월화 된 이성 개념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나는 3장에서 이에 관해 다룬다. 3장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자들의 상호행위 과정 속에서 가능해야만 하는 필요조건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버마스의 표식인 의사소통 행위 개념은 상호 이해 지향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의 언어적으로 매개된 상호행위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 타당성 및 상호주체성이라는 개념들은 그것의 설명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하버마스는 서로 다른 이들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발언들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말할 때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제기한 주장들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근거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합리성은 이렇게 언어적 의사소통 속에서 구체화 된다. 3장에서는 또한 하버마스의 사유가 “대륙의” 해석학적 언어철학과 영미권에서 이론화된 “분석적” 언어철학의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의사소통행위와 전략적 행위 간의 구분은 3장에서 소개되고 있으며, 4장에서 다시 조 히스(Joe Heath)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다. 물론 의사소통행위는 행위 조정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생활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략적 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체계적 구조들에 의해서도 조직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측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을 끌어와 베버와 뒤르켐의 고전적 사회이론들을 알맞게 수정한다. 히스는 하버마스적 기능주의에 존재하는 장점과 한계에 대해 개략적으로 다루면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을 설명한다. 기능주의적 사회이론들에 대한 반대 견해는 이 이론들이 행위자 및 개인적 자율성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너른 지지를 받고 있다. 하버마스적 2단계 사회 모델의 목표 중 하나는 사실 기능적으로 조직된 사회 구조들이라는 배경에 맞서 어떻게 하면 자율적 행위자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엘 앤더슨(Joel Anderson)은 5장에서 자율성, 정체성 그리고 자아에 관한 상호주관적 개념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책임능력을 지닌 행위자와 진정성을 지닌 자아정체성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적, 개인적 자율성 역시 구분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주체들인 우리는 사회문화적, 역사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자율성은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라면서 만들어지고 성숙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성숙한 주체들은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것인데, 그러한 주체가 되는 것은 담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3장에서는 의사소통행위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해 매우 기본적인 개관을 제공한다. 다양한 담론 유형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 조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다음 장에서는 하버마스의 도덕담론, 민주주의 담론, 법담론에 대해 다룬다. 이 세 가지 담론들은 “[논의되고 있는 규범에 의해] 영향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들의 참여자로서 동의할 수 있을 규범만이 타당한 규범”이라고 명문화 된 “담론 원칙”(BFN: 107; 이 책의 6장 p. 120를 볼 것)을 적용한 것이거나,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용”(BFN: 103)한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하버마스는 초월적 진리나 도덕성과 같은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옳거나(right) 정치적으로 온당하거나(correct) 법적으로 정당한(legitimate) 것은 담론적으로, 말하자면 합리적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윌리엄 레그(William Rehg)는 6장에서 하버마스의 도덕이론인 “담론 윤리학”에 대해 설명한다. 하버마스는 도덕적 주장들은 보편적이면서 상호주관적인 타당성을 담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도덕적 정당화를 수행하는 칸트적 절차주의 모델을 옹호한다. 규범이나 도덕적 규칙은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규범들의 타당성에 관한 담론 [과정]은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관계와 가치들을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고려함으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레그는 도덕성과 인륜성이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인륜성을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개념과 관계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실 우리는 좋은 삶과 행복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이 보장되기를 기대하고 [이러한 관점들 간의] 합당한 불일치를 관용한다. 또한 동시에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는 보편적 합의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7장에서는 케빈 올슨(Kevin Olson)이 동일한 절차주의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론의 개요를 설명한다. 보편화 원칙에 의해 규제되는 도덕성과 달리, 정치는 정당한 입법 원칙을 세우는 데에 봉사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규제된다(혹은 규제되어야 한다). 도덕담론은 규범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모든 인격들(persons)의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정치담론은 법의 정당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시민들이 “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공동체에 관해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원칙은 “[정치적] 자기 결정의 실천에 연관된 수행적 의미”(BFN: 110)를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다. 올슨은 모든 시민들의 동등한 정치적 참여를 보장해주는 권리들[혹은 법]의 체계를 통해 어떻게 합리적이고도 정치적인 의지 형성이 제도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장에 소개되었던 정치적 자율성 개념과 평등, 호혜성 그리고 포용의 이상이 어떻게 권리로 제도화되는지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도출되며, 결국 그것은 공적 담론을 통해 발생한다. 그리하여 올슨은 공영역에 관한 논의로 자기가 맡은 장을 마무리 짓는다.

의사소통행위의 주체들은 도덕담론에서의 [도덕적] 인격들이나 정치담론에서의 시민들이 하는 상호작용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있는 주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정당한 민주적 절차들의 제도화를 요구한다면 정치담론은 법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법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8장에서 크리스 저언(Chris Zurn)은 사회학, 철학 그리고 법적 판결에 연관된 관점들을 가지고 조직된 하버마스의 법 담론이론을 제시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을 체계와 생활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전송 벨트(transmission belt)”로 생각한다. 이 전송 벨트는 (유대, 화폐, 권력[의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사소통적 형식과 기능적 형식을 연결한다. 법은 잠재적 해방 메커니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규범들과 사회적 가치들(societal values)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은 전문화된 경제용어와 행정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 실증주의와 자연법 이론 간의 구분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법과 도덕이 독립적인 동시에 모두 동등하게 근원적인(equiprimordial) 담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판결[문제에 대한 하버마스의] 담론 이론은 법 적용 논리에 관해서 그리고 판사들과 법학자들이 법적 공영역에서 특정 판결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법 자체에 적용되는 법의 정당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세 글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이 당대의 사회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개입하던 하버마스의 활동 속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다른 저자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설명하고 있다. 키스 해이섬(Keith Haysome)은 9장에서 공영역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버마스의 시민사회 개념,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분석 그리고 196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던 사회운동에 대한 하버마스의 논법을 고찰하면서 그가 사회적 병리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리는지에 대한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해이섬은 하버마스가 그의 후기 저작에서 공영역과 시민사회 [개념]을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생각하던 부르주아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자발적 풀뿌리 시민조직의 형식 속에서 “재발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키어런 크로닌(Ciaran Cronin)은 10장에서 “후기국민국가적” 정치 질서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관한 하버마스의 고도로 복잡한 모델을 제시하면서 해이섬이 빠트린 부분을 여러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옹호하는 범세계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경제적 지구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라크전을 뒤이은 미국 주도의 군사개입 뿐만 아니라 발칸 전쟁에 관해 그가 수행했던 성찰의 결과물이다. 11장에서 에두아르도 멘디타(Eduardo Mendieta)는 하버마스의 최근 관심사, 즉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해이섬이 사회운동 [개념]을 활용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게, 멘디타는 하버마스적 사회 진화 개념을 고찰하면서 세속화 [개념]를 다루고 있다. 그는 하버마스가 근대화란 오랜 세월에 걸친 합리화의 형식이라고 했던 자신의 테제를 재고하면서 세속화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멘디타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하버마스의 사유를 추적한다. 하버마스는 종교가 초기에는 합리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다가 사회질서의 한 원천(이 기능은 이후 근대에서 법이 담당하게 된다)으로 기능하고, 이제는 철학이 대체할 수 없는 담론과 사회적 실천의 독립적 영역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결국 행위 동기 및 가치의 한 원천으로서 함께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럴 경우 철학이 사실 의존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마지막 단계에서 종교는 다시 매개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무리 장은 하버마스의 저작이 통합적 본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한 그의 저술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차기 거작을 기대하게 되는 일종의 가늠자가 되며 그것은 여심의 여지없이 영향력 있는 묵직한 저작이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2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2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1971~1982)

『인식과 관심』 이후 하버마스는 체계이론(루만), 발달 심리학(피아제, 콜버그), 사회 이론(베버, 뒤르켐, 파슨스, 미드 등)을 끌어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1971[1973]), 프린스턴대학에서 행한 가우스 강의록(『사회적 상호작용의 화용론에 대하여』라는 책에 수록(1984[2001]), 『의사소통과 사회진화』(1976[1979])에 실린 글들이 이 시기에 속한 결과물이다. 가우스 강의록은 하버마스 사상에 있어서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나타내는 저작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구상에 있어 적절한 개념틀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강의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이 “언어적 전회”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인간 행위와 상호이해가 언어적 구조에 의해 충실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이론의 토대를 다시 만들고자 했던 이러한 예비적 시도는 1976년에 발표된 중추적 논문인 「보편화용론이란 무엇인가?」(CES: 1~94; OPC: 21~103)라는 결실을 거두게 한다. 이 글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 이론의 토대를 다졌다.

이 시기에 가장 드높은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하버마스는 이 두 권짜리 책의 목적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이성이 인지도구적으로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이다. 나는 이 합리성 개념이 회의적 고찰을 너끈히 견딜 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둘째, 생활세계와 체계의 패러다임을 결합하는 2단계 사회 개념이다. 두 패러다임은 단순히 수사적 방식으로 결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병리 유형들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병리의 유형들을 의사소통적 구조를 갖는 삶의 영역들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자립화된 행위체계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가정 아래 설명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근대의 역설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삶의 연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 1』 20쪽)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도입된 이론적 모델의 핵심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대한 고찰] 그리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의 이항대립이 자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를 사회적 학습(societal learning)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학습은 사회 체계 안에 침전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 체계는 점점 복잡하게 분화되는 가운데 고유한 자체 논리를 획득하면서 개인이나 사회적 행위 집단의 통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화와 개인화 과정은 생활세계-훗설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을 하버마스는 형식화용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에서 이루어진다.

 

  1. 탈형이상학적 사유: 합리성, 도덕성 그리고 민주주의(1982~2000)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출판 이후, 하버마스는 합리성 및 근대성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그것의 개념적 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인다. 그는 탈근대주의, 회의주의, 역사화된 상대주의(historicizing relativism) 그리고 교조적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진리와 정당화(1999 [2003])』에서 그는 진리에 대한 기존 설명을 고치면서 “약한 자연주의”[적 입장](이후 내용을 참고할 것)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는 모든 종류의 인간 행위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윤리학과 사회 정치 철학으로 전환하면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를 이용해 담론윤리학적 형식의 도덕이론, 토의민주주의론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이론을 전개한다. 이 세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 그는 각 영역들의 담론 및 합리성 형식들과 연관된 규범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역들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갖춘 주체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구조들의 종류에 대한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저작은 『도덕의식과 의사소통행위(1983 [1990])』,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1987])』, 『탈형이상학적 사유(1988 [1992])』, 『담론윤리의 해명(1991 [1993]), 『이질성의 포용(1996 [1998]) 그리고 정치이론 및 법이론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1992 [1996])』이다.

 

  1. 후기세속주의적(postsecular) 사유와 후기국민국가적(postnational) 사유(2001~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버마스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철학적 인간학으로 다소 회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특히 담론 윤리학에 대한 토론은 동기화의 문제를 자주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합리적으로 행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하버마스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칸트적 인식 및 행위 주체관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의 저작에서 그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로 인한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줬다. 이러한 전개는 2001년 독일서적상협회평화상의 수락 연설인 “신앙과 지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1 [2003b])』에 수록된 <인류의 윤리적 자기이해에 관한 논쟁>이라는 긴 논문과 더불어 선보여졌다. 여기서 그는 인간복제와 착상 전에 이루어지는 유전자 검사에 반대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도덕성은 그러한 인격 속에 구현된 것이라는 어떤 윤리적 자기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버마스는 피험자의 동의 없이 생물학적인 조작이 이루어지면 그러한 일은 우리가-동시에 이 피험자가- 자율적 행위자라는 생각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행위자로 살아온 우리의 경험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개략적으로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생명윤리학적 논쟁에 이바지하면서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와 그가 “후기세속주의적”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지칭한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 썼다. 여기서 그는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계몽된 자기이해와 주요 세계종교에 대한 신학적 자기이해-이것은 과거에서 생성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서 작금의 현대에 튀어나온 것이다- 사이의 기이한 변증법”(하버마스 2010: 영문 번역본 16페이지. 번역은 수정)으로 묘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하버마스는 도덕성, 민주주의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 이론적 절차주의뿐만 아니라 탈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전념해 왔는데 이런 그의 입장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2005 [2008]』라는 책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에 대한 후기세속주의적 자기 이해로 여겼던 것과 정확히 수렴한다.

후기세속주의적 사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시도하고 종교 문제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담론 윤리학에 내재하고 있었던 쟁점들(위에서 언급했던 동기화의 문제 같은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 정치 상황에 대한 고찰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해 여타 유럽 지역에서는 늘어나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문제들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 팽창한 유럽연합은 조화로운 유럽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구적 타원에서 보면, 종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9. 11 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분명한 요인이었다. 1999년 코소보 사태에 대해 하버마스는 나토의 군사 개입과 폭격을 지지한 반면에, 2003년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이는 정당한 근거를 필요로 하였고 하버마스로 하여금 국제법과 그것의 규범적 강제력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지지 및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사회 민주주의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구적 정치 질서 안에서의 범세계적(cosmopolitan) 민주주의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최근 저작들에서 분명히 철학적 인간학으로 회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규범적 비판이론을 좀 더 명확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4-1.[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이상하(한철연 회원)

 부끄럽게도, 벤야민과 덴마를 읽으며 폐허와 낙원, 행복과 도피에 대해 과거에서 오는 희망을 노래하는 글을 쓰는 와중에도 현실의 나는 또다시 삶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한때는 나의 내면 밑바닥을 박박 긁어모아 살짝 드러낸 자작시로, 한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가 손으로 닿는 것을 좋아해주고 나의 못난 마음을 치유해주는 카페의 고양이 언니에게로. 그리고 난 그 사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바다를 두 번 아니지 서해 을왕리까지 조용히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순례와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어린시절 마을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겨나서 여름 방학내내 매일 죽는 것만을 생각하다가 자기 치유를 위해 떠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를 그려냈듯이. 그리고 동해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일출을 보면서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나를 다독이고 수정하고 써보기로 했다… 반복과 폐허와 낙원에 대해서.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

 

 

 태양의 일출은 분명 50억 년째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는 자연 현상이지만, 인간의 삐딱해지기 쉽고 비틀어지기 쉬운 이 시각과 관점은 이 반복되는 일출 속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매번 포착할 수 있는 무언가, 상수가 아닌 변수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쉽지는 않다. 촬영 버튼 한 번만 누르면 같은 대상을 0.01초마다 반복해서 찍어도 매번 아주 조금씩 다른 사진이 나오는 이 현대기술의 총집체 스마트폰 카메라라고 해도, 결국 그 진정한 차이를 가져오는 프레임을 결정하는 것은 떨리는 사람의 손이다. 그래서 벤야민도 사진의 작은 역사 같은 에세이에서 이 새로운 사진 기술에 대한 작지 않은 희망감을 내비쳤으리라.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2

 

 

 이제 본론인 덴마의 지로와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 여기 하나의 밑바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사람이 산다. 마치 태양이 뜨고 지듯이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feat.세익스피어)의 일상이 반복되지만, 아무도 안전한 오늘이라던가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을 결코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제8우주 행성 모압의 한 슬럼가. 여기에 사람이 있다. 여기에도 사회가, 공동체가 있다. 이 밑바닥 슬럼가 여기에도 사람’들’이 산다. 고대 시절부터 존재 자체로 경멸받기도 하고 공포 또는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한, 벤야민의 사상을 이어받은 또 한명의 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호모 사케르Homo sacer, 저주받고 신성한 뒤틀린 모순된 존재들이 사는 빈민가. 오늘 누군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의식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사회에서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존재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덴마 웹툰 전체의 주인공 덴마는 오늘도 실버퀵의 택배를 신속 안전 배송하기 위해 치안이 불안하다고 여겨지는 행성 모압의 슬럼가로 꼬마의 몸으로 홀로 들어서다가 자기도 슬럼가 출신이라며 이상한 편견 가지지 말라고 하다가 택배를 강탈당한다. 그리고 이 밑바닥 슬럼가 안에서도 최악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 한 사람. 덴마의 제8우주 세계관에서 물리적 오류로 인해 공간 도약과 사물의 기억 읽기라는 희귀한 초능력을 가진 퀑. 그러나 그저 마약 중독자 약쟁이로 하루하루 연명할 뿐인, 쓰레기 퀑 지로가 슬럼가의 가장 밑바닥에서 마약을 빨면서 숨쉬고 있다. 이 지로에 대해서 수많은 관점의 카메라를 현미경처럼 들이댈 수 있겠지만, 일단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Epoke 판단중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저 이성의 판단이나 선입견이 아닌, 지로의 삶을 찬찬히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지로는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는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탐나는 초능력을 두 개나 가진 퀑이지만, 하루라도 마약을 하지 않으면 삶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기에 그저 그 능력은 도둑질에 이용될 뿐이다. 이전 식스틴 에피소드에서 나온 지로와 같은 신체 공간도약 능력을 가졌지만 그 권투 챔피언이자 경호대 대장으로 살고 있는 막스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삶.  그리고 이렇게 도둑질로 기껏 생긴 돈으로는 마약에 전재산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마저도 약물 중독에 빠뜨린, 가족에게마저도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 지로는 이 세상에 어떠한 특별한 희망도 기대도 욕망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만 살아갈 뿐이다. 오늘 하루 어떻게 약을 빨고서 그냥 누워있을까 하는 욕망만이. 

 

 물론 이것은 단순히 지로같은 마약쟁이에게만 해당되는 욕망일리는 없지 않던가? 20세기말 IMF위기 이후 모두 부자되세요를 외치던 이 한국 사회에서, 다들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없이 수익을 받는 건물주가 되기를 대놓고 욕망하는 21세기 현대 한국인들은, 사실상 장래희망이 이렇게 아무 노력도 노동도 없이 그저 편하게 쾌락만을 탐닉하는 마약쟁이를 자신도 잘 모르는, 숨겨진 욕망을 건물주라는 합법화되고 사회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은 한때 로또의 꿈이었다가, 주식대박의 꿈이었다가, 비트코인의 꿈이었다가 조물주 아래 건물주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될 뿐,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동없는 이윤을 원한다는 본질은 수백년쨰 어쩌면 수천년째 동일하지 않은가.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7&weekday=tue

 

 지로의 이런 쓰레기같은 행태를 보고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멸의 눈빛과 언행을 마다않을 것이고, 어떤 이는 섬뜩해하며 그저 멀리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타인의 불행을 감상하리라. 물론 이것 외에도 이런 마약에 찌든 인간을 동정하거나 그저 웃음거리로 삼고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저정도 쓰레기같은 삶은 아니지 하며 나의 심리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이 중 어떤 방식이든, 그 누구도 지로처럼 이렇게 자신이 그저 약물중독된 폐인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로도 힘든 슬럼가 생활에서 그저 당장의 위안, 지금의 쾌락을 쫓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약쟁이가 되었을 뿐. 물론 오해하실 필요는 없다. 이는 결코 타인에게 온갖 민폐를 끼치는 약쟁이 지로의 삶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지로 또한 이 슬럼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라는 관점을 슬쩍 드러내고 싶었을 뿐이니. 이에 대해선 이 나이트 에피소드 연재글의 마지막에서 좀 더 다루게 될 것이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9&weekday=tue

 

 

 지로의 이러한 불행과 가족들과의 갈등을 독일 부르주아 집안의 소년이던 벤야민의 유년시절과 겹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 에세이집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선물사러 나간 크리스마스 날 구걸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거리의 빈민층 아이들을 보며 느낀 거리감과는 좀 다르게, 우리는 그저 이 시대에 지로의 사례같은 타인의 불행을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은근슬쩍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불행 포르노 또는 고통 포르노를 만끽중인 것은 아닐까. 지금 시대에 이런 행태가 가장 적나라한 곳은 유튜브와 인터넷 개인방송들이리라. 가짜사X이 같은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이X 대위에 환호하고 찬양하지만 사실은… 다들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한때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것처럼 사실 못난 공혁X, 4번 훈련생, 자기만 아는 자기 고통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벤야민이라면, 그 진흙탕같은 지옥의 시공간 속에서도 메시아적 중지의 시간을, 구원의 계기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가고싶고 닮고싶은 방향도 그러하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53&weekday=tue

 

 

 범행을 저지르려다가도 약기운이 떨어지면 오로지 마약을 하기 위해 남의 신발도 핥고 불구덩이 속에 자신의 맨살도 집어넣는 쓰레기 약쟁이 지로. 더이상 돈없이 오면 거래를 끊겠다고, 약을 주지 않겠다고 마약 거래상이 엄포를 놓자 지로는 급기야 몽둥이를 들고 막무가내로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마약을 손에 넣는다. 누구 맘대로 약을 끊냐고, 너희는 끊어도 나는 절대 못 끊는다고.

 이를 보면서 양영순의 수많은 충성독자인 덴경대들이 댓글에서 지각연재가 일상인 양영순을 향한 자신의 애증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다른 웹툰들은 다 11시에 칼같이 올라오는데도 그저 덴마가 자신에게 재미있다는 이유로 몇시에 올라오든 심지어 다음 날에 올라와도 그저 오매불망 기다리고 욕하면서도 반드시 양영순을 찾아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덴마의 팬아트를 만들고 연재 등록을 알려주는 덴경대 어플을 만들어낸 이 덴경대 독자들. 그렇기에 이 연재글의 초반에 말했듯이 완결없는 완결에 대한 그들의 배신감은 더욱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각이 일상인 현실과 마약이라는 비정상이 정상처럼 굴러가는 가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이 비현실적인 일상을 중지시키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우리는 외부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그런 초월적 힘이 잠재되어 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은… 후에 지로가 만나는 인생의 은인 중 하나인 퀑 딜러 주완의 말처럼 자신의 밑바닥에 정말 진심으로 물어봐야만 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정말 진심으로,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합니까?

 

계속…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65&weekday=tue

노동력(Arbeitskraft)과 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Arbeitskraft)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박종성(한철연 회원)

 

화폐에 대한 갈망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양심의 독촉, 모든 명예심, 모든 관대와 모든 동정(Mitleid)1을 부인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64)

 

맑스는 1844년부터 국민경제학을 공부했는데,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1857-1858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에서 자본가가 지불해서 얻은 상품은 노동자의 능력(Vermögen)이며, 일종의 잠재성 내지 재능이라고 했다.2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자본의 착취의 비밀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증식의 비밀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 (1869)에 이르러서야 노동능력(Arbeitsvermögen) 대신 노동력(Arbeitskraft)이란 말을 사용한다. 능력(vermögen)과 힘(kraft)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mögen은 잠재성을 가진 힘이고 kraft는 잠재성이 없고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되는 일정한 양의 힘이다. 니체는 kraft(force)와 구분해서 애용한 힘(Macht)도 mögen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나 라틴어 포텐차(potentia)와 통한다.3

그렇다면 맑스가 가혹하게 비판했던 슈티르너는 이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러나 내 능력(Vermögen)은 단순히 내 노동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내 노동능력(Arbeitsvermögen)으로 애써 조달하는 얼마 안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304]

 

그러나 나는 노동하는 것을 “당신의 능력(Vermögen)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05]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먼저 능력이 노동능력보다 더 다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능력 중에 일부가 노동능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는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화폐가치’를 인간의 ‘능력’(Vermöge)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화폐가치는 노동능력의 가치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능력과 구분하여 “노동력”이란 용어를 사용한다.(293) 그런데 그는 노동력의 사용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노동력을 능력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력의 사용만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그에게 ‘능력’이란 무엇인가?

 

“네가 할 수 있는(vermagst)것이 너의 능력이다!”(294),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는(vermag) 것, 그것이 내 능력이다.”(294)

“우리는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물건들을 사용한다.”(377)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능력은 네가 할 수 있고 소유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능성과 현실성(Möglichkeit[Possibility] und Wirklichkeit[reality])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369)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능성=현실성=능력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어야만 그것이 능력이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고전적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데, 한편으로 현실다운 것은 물질에 대립되는 형상을 뜻하며(모양을 갖춘 대리석), 다른 한편 가능태나 잠재태에 대립되는 활동성 자체를 뜻한다(말할 수 있음과 실제 말하고 있음). 이와 달리 가능성과 현실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슈티르너에게 가능성, 예를 들어 말할 수 있음이 곧 실제 말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와 통한다고 했는데, 슈티르너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이 소유할 ‘지배’(Herrschaft)를 ‘뒤나미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151)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dynamis는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면,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슈티르너가 지배와 뒤나미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지배, 곧 현실태는 잠재태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의 능력 개념은 단순한 잠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결과를 생산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슈티르너는 힘(Macht)과 능력(Vermögen)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노동력과 구분한다.

 

[350]당신은 연합(Verein)으로 너의 모든 힘(Macht), 너의 능력(Vermögen)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에서 당신은 당신의 노동력(Arbeitskraft)을 사용한다.

 

정리하면 슈티르너에게 능력은 가능성=현실성=힘=뒤나미스이다. 그리고 연합 속에서는 힘, 능력이 발휘되지만 사회에서 사용되는 것은 노동력이다. 그는 사회보다는 연합체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노동력의 사용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능력, 그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드는 잠재적 힘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연합이 에고이스트의 삶이다. 맑스도 노동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곧 온갖 사물(정신적인 것을 포함해서)을 생산하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다.4 그렇다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노동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용성을 인정받은 인간의 행위능력, 다시 말해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은 “인간의 전반적 노동능력의 희생을 대가로 일면화 된 전문성”5이 된다. 다면적인 잠재능력 중 특정 재능만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달인의 경지’는 다면적인 잠재능력이 아니다. 슈티르너가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한 것도 이러한 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전면적인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연합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인간이,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자, 에고이스트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노동의 현실은 어떠한가? “거의, 아니면 전혀 자신의(eigene)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Arbeit des Kapitals)과 공순한(untertänig) 노동자의 노동”[125]일 뿐이다. 결국 자본을 위한 노동이지 나를 위한 노동이 아니다. 또한 자본을 위한 노동자의 태도 또한 공순(恭順)한 것인데, 이는 노동자라는 주체를 공손하고 온순한 노동자로 형성하고자 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 가치설에 따르면 노동력은 노동자의 소유이다. 그러나 소유는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 즉 자본가6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gebildet)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Bildung)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여기서도 인간의 다면적 잠재능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금 현실에서의 노동을 살펴보자.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만 노동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그를 이용한다(착취한다exploitiert).”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노동력을 소유한 사람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노동력의 사용권, 이용권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의 것이 된다. 바로 자본가의 노동력의 사용, 이용은 착취이다. 맑스의 언어로 말하면, 잉여가치는 착취와 같은 말이다. 잉여가치의 비밀은 노동력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복시키고자 슈티르너는 노동자의 엄청난 힘을 믿고 있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파업이다.

 

노동자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그들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떤 것도 그들에 저항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아마 동맹 파업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이고,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향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곳곳에서 발발하는 노동자 소요(Arbeiterunruhen)의 의미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127)

 

에고이즘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Geizige)”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7 이 구절은 탐욕(Geiz)이라는 점에서 맑스가 자본가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슈티르너가 보이기에 여러 가지 욕망 중에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8, 곧 “화폐에 대한 갈망(Gelddurst)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9 이는 자신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자율주의인데, 이는 탐욕이 주체가 되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폐욕망’(Geldgier)은 ‘병적욕망’이고 ‘자기극복’10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앞서 슈티르너가 화폐에 대해 갈망하는 사람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예로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언급하였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물론 탐욕스러운 사람의 행위는 명확히 자기 이해관계, 자기중심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에고이즘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사람의 행위는 슈티르너가 거부하는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와 행동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bornierter Egoismus)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에고이즘과 구분하여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신들린 상태”(Besessenheit)이다.11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하나의 목적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고, 이 하나의 목적은 우리를 고취시키고, 열광시키며, 공상에 빠지게 하므로 그것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에고이즘은 ‘나’다움이고 자율성이며 자기지배로 볼 수 있다. 자신을 희생하는 에고이즘, 곧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다움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지배는 외적이고 내적인 영역이다.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는 스스로가 타자에 종속되는 것에서 벗어나길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욕구나 목적에 복종시키는 것을 피하길 원한다. ‘관념’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들어보자. 어떤 관념이 “내 마음 속에서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고(sich etwas in Mir festsetzt) 그것이 용해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나는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 예컨대 어떤 신들린 사람이 될 것이다.”12 마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신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사람은 “자신을 선이라는 관념의 도구(Werkzeuge der Idee)”로 만든다.13

이러한 관념에 대한 비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에고이스트가 더 이상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생각의 실현을 위한 도구”14로, “관념의 어떤 도구”15로 만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관념과 이념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가 실행하는 힘은 “세계의 무리한 요구와 무법행위”를 능가하는 것이고16, “내 본성을 능가하는 ”을 실행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에고이스트는 “내 욕구의 노예”17로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이 나다움을 위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자본가는 가치증식의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화폐에 대한 갈망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이며 신들린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당신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1. 경건함을 뜻하는 라틴어 pietas가 어원인데, 타인의 불행한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공감, 전통적으로 철학은 동정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으나, 루소에게 동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문명화된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원초적 본성이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은 이기주의와 이해관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대의 가능성을 확립한다, 지배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것도 동정이다. 이후 쇼펜하우어가 중요하게 다룬 주제이다.

  2. 칼 맑스 지음, 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그린비, 2007, 266쪽.

  3.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6쪽.

  4.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7쪽.

  5.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Ⅰ-1」, 길, 2008, 483쪽.

  6. 자본가에 대한 느슨한 정의인데, 맑스의 개념과 비교 가능하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다.”(167f., 강조는 M. H.) 하인리히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Eigentümer)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어야만verfügen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7.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금욕(Entsagung)의 복음(Evangelium)을 성실하게 준수한다…. 그러므로 근면(Arbeitsamkeit)과 절약(Sparsamkeit) 그리고 탐욕(Geiz)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정치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147)

  8. 같은 책, 81.

  9. 같은 책, 64.

  10. 같은 책, 379.

  11.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82.

  12. 같은 책, 157.

  13. 같은 책, 362.

  14. 같은 책, 385.

  15. 같은 책, 411.

  16. 같은 책, 373.

  17. 같은 책, 374.

1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1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 글은 Barbara Fultner eds., Jürgen Habermas: Key Concepts, NY: Routledge, 2014라는 책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영미권의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하버마스의 이론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는 훌륭한 개론서다. 하버마스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서툰 번역으로나마 틈나는 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인용된 하버마스 저작의 축약어는 아래와 같다. 꺾쇠 안에 표기된 년도는 영문판 출간 년도다.

 

BFN Between Facts and Norms (1992 [1998])

BNR Between Naturalism and Religion (2005 [2008])

CES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 (1976 [1979])

DW The Divided West (2004 [2007])

IO The Inclusion of the Other (1996 [1998])

JA Justification and Appilication [1993]

LC Legitimation Crisis (1973 [1975])

KHI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68 [1971])

MCCA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1983 [1990])

OPC On the Pragmatics of Communication [1998]

PDM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1985 [1990])

PMT Postmetaphysical Thinking (1988 [1992])

PNC The Postnational Constellation (1998 [2001])

STP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1962 [1989])

TCA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1981 [1984/1987])

TRS Toward a Rational Society [1970]

TJ Truth and Justification(1999 [2003])


 

들어가며

바바라 풀트너(Barbara Fultner)

 

Barbara Fultner, 출처: https://denison.edu/people/barbara-fultner

 

의심할 여지없이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전 세계 사회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설립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후계자이자, 비판이론이라고 하면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머마스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탁월한 공적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여러 주요 신문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과 공개 대화를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자크 데리다에서 미셸 푸코, 리처드 로티 그리고 베네딕트 14세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까지 다양하다. 하버마스는 심오한 체계적 사상가이며 완벽한 통합이론가다. 그의 이론적 개념들은 영미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마르크스의 이론, 유럽대륙철학을 끌어와 합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저작을 읽는 일은 여간한 도전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192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하버마스는 이 도시의 상공부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후 그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 나치의 잔혹행위와 기만행위에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하버마스는 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나치 체제와 공모하거나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했던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그중에서도 마르틴 하이데거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1950년대 반핵 운동과 1960년대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세대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대변하던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한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4년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자로서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 연구소의 철학 및 사회학 교수로 지명되었다. 1971년에서 1982년까지는 슈타른베르크에 자리한 과학기술세계에서의 삶의 조건에 관한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그는 1994년 은퇴하여 저술에 몰두하면서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의 노스웨스턴 대학, 뉴욕의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과 스토니브룩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초청 강좌를 맡았다.

이 책의 글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광범한 지적 성과에 대한 개념 지도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난 40 여 년 간 그는 각 연구 영역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수많은 획기적인 저작들을 내놓았다. 이 책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설정해 주곤 했다. 그의 영향은 비판이론과 사회정치철학에서 가장 뚜렷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기고문들이 보여주듯이, 언어학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으로서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윤리학, 인식론, 심리 철학, 언어철학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아마도 하버마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남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사회, 근대화 및 합리성에 관한 포괄적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이어지던 연구 작업, 즉 도덕이론, 정치 이론 그리고 법 이론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론 진화의 발자취

이 책은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버마스의 지적 발전을 역사적 관점에서 추적하고 있기도 하다. 하버마스의 저작들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체계성 및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장과 관심사들은 이론의 내적 논리에 따라 진화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다른 이론가들의 비판에 답하고 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기도 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대화적 사상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저작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1 대부분의 경우 시기 구분은 기본 관점의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하버마스에서 이 네 시기는 기본 관점에서의 변화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초점이나 강조하는 바가 달라짐을 나타낸다. 하버마스 사유의 흐름이 이런 시기 구분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네 시기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라 하겠다.

 

  1. 철학적 인간학: 의식철학과 실증주의 비판(1954~1970)

첫 번째 시기는 박사논문에서 『인식과 비판』까지다. 이 시기의 저작에는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1989])』, 『이론과 실천(1963[1973])』, 『사회과학의 논리(1967[1988])』,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소묘(1971[1983])』가 있다. 이 시기 동안 하버마스는 독일 관념론(칸트, 피히테, 헤겔)과 후설 현상학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해석학과 사적 유물론을 연구하였던 하버마스는 사회진화와 인류 역사를 강조하는 사회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식철학을 거부하게 되었다. 18세기 커피 하우스 문화에 대해 세세히 분석하고 있는 『공영역의 구조변동』은 비판이론과 문학 연구에 있어서 표준이 된 책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영역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며, 당시에 생겨난 특정한 경제적 변화(자본주의, 세계 무역 등)와 긴밀히 묶여 있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공영역의 구조가 역사적 조건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책은 공영역이라는 개념을 하버마스의 일생에 걸친 관심사로 만듦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연구를 미리 예시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문화 상업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후에 등장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를 미리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1980년대에 천착하게 될 주체성의 사회적 해명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이미 이때부터 관심의 싹이 트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하버마스는 실증주의 과학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켰다. 그는 과학에 내재하고 있는 잘못된 객관성 개념을 거부하였다. 과학이 몰역사성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문화가 우리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점은 의식철학도 공유하고 있다. [하버마스에게] 인간은 사회문화적 과정에 의해 매개되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며,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상태에서 진화의 결과물로서의 지식을 얻게 되는 주체다. 이런 인간이 구체적 현실에서 멀어져 버린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와 객관적이고도 편향적이지 않은 과학자로 대체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하버마스적 주체의 인지 능력은 따라서 변치 않는 본성으로서 미리 새겨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학습되어 [본성적 능력으로 보이게끔]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습득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는 기획은 평생의 동료이자 친구인 칼-오토 아펠에 의해 인식인간학 (Erkenntnisanthropologie)혹은 인간학적 인식론(anthropological epistemology)으로 일컬어졌다.

『인식과 관심』 역시 앞으로 등장할 이론의 토대를 놓은 저작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인간의 관심을 인간의 인식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로 여기면서 세 가지 근본적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들을 식별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적, 실천적, 해방적 관심이다. “기술적 통제를 지향하고, 처신(conduct of life)에 있어서의 상호 이해를 지향하며, 외관상 ‘자연적’ 속박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됨을 지향하는 것”(KHI: 311)은, 정확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등장한 세 가지 구분들, 즉 이론적, 실천적, 미적 담론과 이에 각각 상응하는 세 가지 타당성 요구, 즉 진리성요구, 규범적 정당성 요구, 진실성 요구의 전조가 되었다. 『인식과 관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언어를 “그것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314)으로 도입함으로써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토대가 될 언어적 전회의 도화선을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관심』은 방법론적 쟁점을 제기하였다. 즉 그것은 하버마스에게 경험적 근거와 근대성에 대한 규범 비판적 분석을 통합한 사회이론을 형성하려는 목적에 적합한 이론적 틀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1. 이 시기 구분은 Eduardo Mendieta가 제안한 것을 채택한 것이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3-2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3-2

 

이상하(한철연 회원)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이전의 글을 이어가보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뻔한 말은 이제 현대인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데카르트 이래 도구적 합리성, 흔히 말하는 투입-산출이라는 효율성이 인생의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잣대가 된 근대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한국인들은 다들 어떻게든 자신의 기대를 낮추려, 아 어차피 망할거야 안될놈은 안돼 등등의 말로 자기 인생에 실망하고 손해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생계와 관련되지 않은 스포츠 같은 취미분야에서는 설레발이 아닌 역레발, 즉 자신의 진심과는 반대쪽으로 설레발을 치거나 자기 팀 망하라고 부두술을 거는 행위가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중요한 경기 이전에 유행으로, 하나의 문화적 밈으로 퍼지기도 한다. 축구계의 황제인 브라질의 레전드 펠레가 경기 예언만 하면 반대로 실현된다는 펠레의 저주 속설이 퍼지니까, 브라질 국민들은 월드컵 시즌에 제발 펠레가 조용히 입을 다물어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웹툰같은 대중문화 서브컬쳐의 세계에서도 대부분 캐릭터들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렇지만 도저히 기대를 낮출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으로 온갖 설레발을 다 쳐보고 싶은 포기할 수 없는 소원도 사람마다 분명히 존재한다. 취준생에겐 번듯한 정규직이, 입시생에겐 명문대 합격이 그러하듯, 웹툰 덴마 야엘로드편의 주인공 야엘에겐 최하층 계급 피코인 자신이 이 불평등한 계급 사회를 바꾼다는 소원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힘든 현실의 억압과 차별에 지쳐서 이전 글에 나왔듯이 10대에 벌써 삶 자체를 놓아버리기 직전에 놓인 야엘. 허나 초능력으로 미래를 보고 예언한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자신이 바로 미래에는 영웅의 전당에 올라가 위대한 로드 야엘로 불리게 된다는 예언을 듣게 된다면… 이 소원에 대한 기대는 밑도 끝도 없이 커질 수밖에. 외계인이 나타나서 1년뒤 로또 번호를 알려준다면 그 누구든 어떻게든 1년을 버틸수 있게 되듯이. 2년 뒤면 누구나 전역을 하니까 불공정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군인도 사회로 돌아갈 기대를 품으며 오늘의 모욕을 참아내듯이. 그리고 과거의 역사속에서 맑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현재의 억압과 고통을 영광된 미래에 보상받으리라 기대했듯이, 마치 기독교의 종말론 서사처럼.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1&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하지만 이 모든 미래에 대한 희망찬 예언이, 예정된 자신의 미래가 사실 거짓이었다면?데바림이 미래를 보고 예언할 수 있다는 초능력 자체는 진실이지만 그들이 항상 진실만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실이라면? 보통 이러면 대부분의 인간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단순히 지금의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을 포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지금까지의 삶과는 아에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우리 역사 속 한국의 경우에도 사회주의의 미래에 약속된 승리를 확신하며 투쟁했던 80년대 운동권들이 소련이 무너지는 역사 앞에서 적지 않은 좌파들이 극우파로 전향하지 않았던가. 대중적으로 유명한 김문수나 박형준은 그중 대표적인 인물 한 두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야엘은?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2&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허나 야엘은 예언된 미래가 거짓이었다는 것에 무너지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예언한 미래가 설사 거짓이라 해도, 그 비전 덕분에 야엘은 차별받고 억압받는 힘든 하루하루가 행복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기 때문이다. 공포 마케팅에 전염되어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혐오하거나 멸시하는 길이 아니라, 그 사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싸우며 그 고통 속에서 현세의 행복을 찾는, 묵묵히 하루하루 땅을 파내는 참으로 종교적인 선지자의 길을 야엘은 택했고 행했다. 벤야민도 바로 이런 삶에 대해서, 맑스가 자본론 책에서 말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더지’라는 혁명가의 모델에 대해 말한 바 있고 중요한 이미지로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선 차후 또 천천히 상세하게 이야기해볼까 한다.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2&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허리를 다쳐서 다리를 못 움직이면 양팔로라도 기어가는 구도자의 길. 어차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역설적으로 위안이 되고, 자신에겐 포기할 것이 없으니 더더욱 앞으로 미래로 갈 수밖에 없는 야엘. 이 모든 이야기는 행성 전체에 생방송으로 전달되었고, 피코 계급 전체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야엘 몰래 생방송을 중계했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로 야엘은 정말로 피코만이 아닌 행성 주민 전체에 큰 울림과 성찰을 주는데 성공했다. 벤야민이면 이런 장면을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기존의 반복되는 과거를 중단시키고 미래의 시간으로 도약하는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흔히 혁명을 전진하는 힘의 대오, 1987년 장준환 감독의 영화처럼 시위나 집회같은 이미지로 많이들 표상하지만, 앞으로만 전진하는 기관차가 혁명인 것이 아니라, 송강호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다소 노골적으로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와 전체주의라는 현재 폭주하는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지금시간이 바로 이 시대의 혁명이 아닐까.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3&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정신을 잃었다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난 사이에 행성 주민들의 꿈과 희망이자 엄청난 스타가 되어버린 야엘. 자신이 했던 말들이 생중계되는 것을 몰랐던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주어진 현재의 고통들을 버텨냈을 뿐이고,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스스로 가능한 최선의 행복을 추구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허나 바로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미래를 여는 희미하고 작은 메시아로 통하는 희망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피코 야엘에겐 자신의 길을 먼저 걸었던 역사의 선배 또한 존재했다. 벤야민이라면 이 선배를 바로 앙겔루스 노부스, 역사의 폐허 속에서 끝없이 진보의 폭풍이 불어오는데도 과거의 잔해를 주워담으려는 새로운 천사의 이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3&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이 야엘에게 의외의 응원권이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속에서 최하층 계급인 수드라보다 낮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있듯이, 사실은 피코 야엘에게 엄격히 대하던 국회 의장이 바로 피코보다도 키가 작고 낮은 계급 출신이라는 반전이 나온다. 물론 국회의사당이 무너져서 의장이 다리를 다치자 기계몸이 나온 시점에서 이를 벌써 눈치챈 날카로운 독자도 있었을테지만, 나로선 이 복선과 반전에 실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 야엘로드 편부터 사람들이 양영순의 스토리텔링에 깊이 공감하고 훗날 덴경대라 불리게 되는 적극적인 지지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야엘의 흔해빠진 영웅적 신화 스토리가 아니라, 이런 세세한 디테일이 양영순의 덴마가 마무리를 망친 괴작이 아닌 다시 또 봐야 하고 한국 웹툰의 역사의 기억안에 남겨둘 만한 근거로 충분치 않은가 나는 감히 생각한다.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3&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하지만 이 야엘로드의 결말 이후의 50년 뒤를 살짝 보여주는 에필로그에서, 나는 두 가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50년 뒤의 대화들은 분명 키가 작든 크든 계급이 낮든 높든 평등이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피코출신 작은 키의 야엘은 왜 굳이 키를 크게 그렸을까? 50년이나 걸려서 국회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저 야엘조차도 결국 국회의장이 기계몸을 타고 키를 키웠듯이 상층 출신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사인 것일까? 정치인이 누구나 국회에서 정장을 입어야 하듯이? 그 유시민조차도 국회 입성한 날에 처음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동료 의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다음날부터 말끔한 정장을 입었듯이 이 또한 양영순의  씁쓸한 현실 풍자인 걸까?

 

 

 

그리고 과연 야엘이 던진 질문인 행복이란 무엇일까? 야엘은 행복이란 마치 자명한 개념인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과연 행복이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말이던가??…  이에 대해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만드라고라 편에서 나름의 대답을 내놓은 듯하다. 하지만 나름 엘리트인 국회의원 보좌관 야엘이나 만드라고라 마스터인 나오미 수녀처럼 전문가적 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정말 밑바닥 인생도 그러한 어떠한 반전의 계기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제 다음 에피소드인 나이트의 슬럼가 쓰레기 퀑 지로를 보며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야엘처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꾸는, 벤야민이 말하는 혁명적인 지금시간을 과거로부터 불러올 수 있을 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

 

 

계속…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이상하(한철연 회원)

 

 지난 글에서 다룬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독교의 해방서사스러운 스토리텔링의 전형이었습니다.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을 거듭한 주인공이 도피와 고난과 시련끝에 현재를 극복하고 삶의 행복과 영광을 얻는 이야기였죠. 그렇다면 오늘 다루는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주인공 야엘은 어떨까요. 이전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사회나 국가와는 별개로 그저 자기 삶의 의미란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수녀 한 명이었습니다. 반면에 행성 네게브의 최하층 천민 피코로 자라난 야엘은 어린 초등학생 시절에 남들보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기에 밥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고 이에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부당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무척이나 사적이면서도 너무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자라온, 헤겔의 말을 빌려보면 한 세계사적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으로 야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조금 서글픈 진실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진부하고 뻔하고 슬픈 말이지만, 억압과 차별이 없는 시대는 인류의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마다 날 때부터 능력과 신분과 계급이 다른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초에 가문에 유전자에 타고난 게 사람마다 다른 법인데 대우를 다르게 받는 게 뭐가 문제고 대체 뭐가 차별이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스스로가 행하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와 집단을 만들고, 심지어 제도권 내에 극우 정당을 만들고 떵떵거리며 차별을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정치를 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이 국가,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라고. 괜히 선동과 말장난으로 세상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좀 받아들이라고.

 

 허나 이런 불행한 역사의 진실에 대응하는 힘도 역사상 존재해왔죠. 과연 너희들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건 언제 어디에 존재하냐고, 만약 있더라도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의 눈으로 그걸 어떻게 알고 느낄 것이냐고. 시대가 변해도 살아남는 진정한 문학과 예술은 항상 그러한 현실에 맞서서 상상력의 힘으로 날아오르며 니체의 말처럼 현실이라는 대지의 중력에 맞서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영순의 웹툰 덴마-야엘로드 편도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흔한 전형의 스토리텔링은 아니고 약간 비틀린.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29&weekday=tue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테러로 국회가 무너진 상황에서, 택배를 전하러 온 주인공 덴마와 함께 야엘은 목숨을 건 탈출 중에 자신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합니다. 작중에서 행성 네게브의 가장 가난하고 몸도 작은 최하층 계급 피코로 태어난 주인공 야엘은 다리도 짧아서 느리기에 어릴 때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중의 기본인 밥 문제부터 선착순이라는 능력주의의 가면을 쓴 차별을 겪습니다. 심지어 이를 도와주고 해결해줘야 마땅한 보육시설의 선생도 넌 최하층 계급이니까 불평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며 누가 봐도 부당하게 야엘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면 당연히 사람으로써 어이가 없고 화가 나지만, 야엘은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식사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자신을 더 짜내고 더 힘내서 뛰어봅니다. 이는 이전 나오미수녀의 기독교적 믿음과 비슷하면서도, 마치 볼테르 이후 헤겔 맑스를 비롯한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들이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렇기에 우리가 더 열 배 천 배 힘내야 한다는, 그러면 역사의 법칙은 미래엔 반드시 우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선형적 진보사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에 대해선 우리가 계속 덴마와 함께 읽어온 한상원을 말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맑스는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자였다. 그리고 맑스 자신과 그의 사상 역시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맑스의 역사철학적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지적 풍토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갔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맑스의 계몽주의, 독일 고전철학 상이의 연관성 속에는 19세기까지 서구의 모든 역사적 사유를 사실상 지배해 왔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기독교 종말론적 역사관의 흔적들이 공명하고 있다. 물구나무 선 사변적 세계를 뒤집어 인간의 두 발이 땅을 향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철저한 유물론자 맑스의 역사적 사유에 기독교 종말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맑스 자신이 언급한 적이 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 언급은 맑스뿐 아니라 볼테르 이후 역사의 진보와 이성의 최종적 승리를 주장했던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01-102쪽 인용.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당한 현재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행성 네게브의 계급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더 힘내서 분투하려는 야엘은 마치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에 대한 억압을 잘 이겨내며 씩씩하고 당찬 야엘조차도 버티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day=tue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억압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도 있고 괜찮지만 나의 거울이나 다름없는 내 친구나 가족에 대한 욕은 나에 대한 모욕보다 더 참기가 어렵지요. 심지어 연주자라는 꿈에 대한 좌절에 겹쳐,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친구에 대한 이중적 차별을 그냥 듣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친구의 쇼크사를 모욕했기에 자신이 정신놓고 떄린 인간이 재단 이사장 아들인지 아닌지는 적어도 야엘에겐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도 아닌데 타인의 고통에 관심가지는 사람들을 관심종자니 정치병이니 심지어 위선자니 몰아세우고 적극적으로 조롱하지만, 어쩌면 야엘의 경우처럼 우리는 타자의 고통과 부당함에 민감할때만 진정으로 차별적 구조를 깨뜨리는, 현재의 반복을 중단시키는 강력한 저항과 혁명의 원동력이 생겨나는 걸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차별에는 적당히 참고 넘어가던 야엘이 자신이 잠시나마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듯이,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 어쩌면 벤야민이라면 이런 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불러와서 그 힘으로 지옥같은 현재의 동일한 반복을 깨뜨리는 ‘지금시간’ 이에 대해선 천천히 더 깊숙히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을 동원한 저항의 순간은 당연히 기존 체제의 강력한 억압에 부딪칩니다. 체포되어 소년원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는 중 참고 참다가 참다못한 야엘이 죽은 소녀와 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결심하려 하는 차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미래를 본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남겨준 과거 예언의 기록을 꺼내보게 됩니다.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day=tue

 너무나 많은 정서들을 함축하는 피코 야엘의 저 웃음과 울음.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건축물을 패러디한 행성 네게브 영웅의 전당. 만화 나루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 적이 있죠. 당연히 원 모티브는 미국의 러쉬모어 산에 있는 4인의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과거의 역사에 이 위대한 전당에는 피코가 아닌 상류 계급 출신만이 조각되었지만, 데바림 선생님은 이 전당의 가장 높은 곳에 바로 최하층 계급 피코인 야엘이 올라갈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자살 직전까지 갔던 야엘은 이 예언을 통해 더더욱 놀라운, 혼신에 헌신의 노력을 다하게 되어 국회 보좌관까지 올라갑니다. 마치 한국에서 가난한 비수도권의 흙수저 출신이 사법고시를 통과한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거기서도 상위 계급 출신들의 온갖 차별과 억압을 받지만, 예언을 통해 미래에 대해 확신이 생긴 야엘에겐 이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야엘이라는 개인의 갈등과 투쟁이 행성 전체를 의외의 결과로 이끌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계사적 개인에 대해선 또 한상원과 헤겔을 참조해보며 숙고해볼만 만합니다.

 

 헤겔에게서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는 자유를 향해 진보한다. 역사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희생, 고통은 이러한 자유를 시련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 세계사의 전체 과정은 이 충동을 의식적으로 도달하도록 하려는 노동이다. 이를 위해 역사에는 갈등과 적대가 불가피하다. 세계사는 대립이 표출되는 전장과도 같다.

 

 적대와 갈등, 폭력이 자유를 향한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다시금 역사 속에 존재하는 섭리의 신비를 보여준다. 헤겔은 세계사를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세계사적 개인에 관해 언급한다. 세계사적 개인 혹은 영웅의 창조적 행위는 새로운 사태와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를 추동한다. 그런데 이때 영웅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정신 자신의 본질에 의해 작동하는 현실이다. 세계사적 개인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충동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추동하는 개인적은 특수한 욕망과 열정, 의지를 통해 세계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성은 교활한 책략을 통해, 행위하는 개인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나간다. 이성이 지닌 간지는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섭리의 구체적 형태다.

 

“열정의 특수 이익은 보편자의 실행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특수한 것, 한정된 것, 그리고 그 부정으로부터 보편자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투쟁하며 그중 한쪽이 몰락하는 것은 특수한 것이다. 보편적 이념은 대립과 투쟁 속으로, 위험 속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공격과 손실로부터 물러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이를 이성의 간지라 부를 수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14-115쪽 인용.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1&weekday=tue

정해진 미래가 있으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어떠한 어려움도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야엘은 이런 말을 하는 것에서는 단순히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준의 신앙이 느껴집니다. 그 누가 현재의 나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든 나는 반드시 내 구원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서사. 이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전형적인 기독교적인 구원의 서사이자 계몽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야엘로드는 분명히 계급 갈등과 경제적 차별이라는 흔한 진보주의 또는 유물론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적인 지점과 결합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바로 이렇게 이질적인, 섞이기 어려워 보이는 유물론과 신학을 결합시켜서 나치가 득세한 2차대전중의 독일인으로서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철학을 펼쳐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신학적인 자세로 과연 괜찮은 걸까요? 혹시 작중의 야엘처럼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면 기존의 신학은 오히려 없으니만 못한 거짓된, 허무한 낙관주의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이 또한 헤겔이 말한대로 적대와 투쟁을 통한 이성의 간지일까요?

계속…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1&weekday=tue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자우림 샤이닝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

자우림 샤이닝

 

이상하(한철연 회원)

 

5.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자우림의 노래 샤이닝 중에서.

 

출처 여행중에 직접 찍은 제주도 협재 해변의 사진

 

 

 이번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나오미수녀와 벤야민에 대해 쓰면서 난 자우림의 명곡 샤이닝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도망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이 지루한 반복되는 일상과 예기치 못한 고난과 고통이 산재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허나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선 도무지 이 반복되는 지겨운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니체도 지긋지긋하다고 강조한 중력의 정령을.

 그래서 현대인들의 유토피아는 항상 외국, 여행 속에만 존재한다. 이 유토피아, 낙원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망이 여행에는 잠재되어 있다. 타인이 자기를 알아볼 일이 없는,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의 자기를 알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었고, 나치의 유럽을 피해서 미국으로 가려던 벤야민도, 수녀원을 떠나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었던 덴마의 나오미 수녀에게도 분명히 그런 욕망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수녀는 이렇게 주문했다. 어디로든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그렇지만 그 여기서 먼 공간 조차도 돈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안에서만 정해진다. 분명 그러한 속세의 논리가 싫어서 봉사하는 삶을 위해 수녀원으로 들어갔을 나오미 수녀지만, 토지 소유권 문제로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길 나와서도 이 돈의 한계에 갖히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나 푸코 같은 사람이 말했다는 ‘자본주의의, 세계의 외부란 없다’라는 끔찍한 말이 떠오른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사실은 벗어날 이 내부의 ‘바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건 아닐까.

 게다가 이 에벤에셀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나오미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남은 짐 또는 재산인 가방을 타지에 도착하자마자 부랑자에게 도둑질당한다. 그리하여 돈이 없기에 식사를 하고서 식당주인의 허락을 받아 설거지 노동으로 보상하려는데 그마저도 기차역에서부터 온갖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스트레스를 준다… 시선이란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헤겔 시절부터 말해온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관심 타인의 시선을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인정욕망이 있지만, 그 때문에 또한 인정투쟁에 시달리게 되고 고통을 받고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 그런 시선이 없는 타지로의 여행을 이상화하지만, 나오미 수녀는 분명 멀리 타지로 왔음에도 오히려 수녀원보다 더욱 타인의 시선에 시달린다. 그리고 왠 낯선 남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는데…

 이는 놀랍게도 에벤에셀 도시의 시장이 직접 나오미 수녀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노인이 절반 이상인 실버타운 에벤에셀의 시장은 당연히 건강에 큰 관심이 있었고, 나오미 수녀가 그동안 만들어온 약효가 있는 만드라고라에 나오미 수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에 시장을 비롯해서 모든 시민이 나오미 수녀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나오미가 계속 이 도시에 살며 만드라고라를 만들기를 원한다고 전해준다. 조용히 살던 수녀원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야반도주한 나오미 수녀의 입장에서 정말 만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진작 그 끝도 없는 보상없는 노동이 반복되는 수녀원에서 도망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더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20세기 세계대전중 나치의 독일에 살던 유대인 벤야민도 이런 희망을 기대하며 모스크바로 떠나고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크리스마스날 상가를 헤매고 파리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던 벤야민처럼, 듬직한 경호원이 항상 대동해주고 그보다도 더 듬직한 시장의 신용카드를 받고서 에벤에셀의 거리를 산책하는 나오미수녀.그녀는 돈이 필요없는 수녀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겨우 며칠만에 잊어버릴 만큼 이 풍족한 소비생활에 익숙해진다. 이는 참으로 무섭고도 매혹적인 돈의 마력이자 자본주의의 매력이 아닐까.

 돈이 없을땐 누구나 돈과 자본주의에 악담과 저주를 퍼붓지만 돈이 많을땐 이 자본주의만큼 나에게 쉽게 만족과 행복을 제공해 주는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신이라던가 sibal 비용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가며 나의 행복을 위해 소비를 저지른다.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을 때 자본주의와 관련해 그런 일화가 있었다. 아일랜드였나 어떤 유럽의 소국에선 전통 음악 등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해서 전혀 미국의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티비가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엠티비같은 방송이 시작되자 겨우 몇년만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할리우드와 미국 팝송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이 나오미 수녀도 그와 비슷한 씁쓸하고도 달콤한 자본의 매혹과 참맛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자본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벤야민도 아마 그러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겨우 며칠만에 완벽하게 바뀌는 사람은 없고 나오미 수녀님도 그러하다. 5일전에 수도원을 철거하겠다는 용역 깡패의 말을 나오미수녀는 기억해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자신을 찾아온 택배원 덴마를 따라 다시 수도원으로 가게 된다. 허나 그곳에서 이전에 자신이 구하고 간호했던 거지들이 수도원 철거를 막는 광경을 보고… 나오미는 이전에 수녀원장님이 자신에게 남긴 말을 떠올린다…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4&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양손에 시장의 카드로 사거나 선물받은 물건을 잔뜩 쥐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 부랑자의 무리를 만난 나오미 수녀.

벤야민은 이 나오미 수녀처럼 도시의 빈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부모손을 잡고 상점가를 가다가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만났었고… 파리같은 대도시의 거대한 아케이드를 산책하다가 화려한 상품들에 대비되는 실업자 거지 매춘업자 노숙자 심지어 온몸을 광고판으로 채운 샌드위치맨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 가진 것 없는 약한 자들 사이를 산책하면서 벤야민은 희망을 수집하고 새로운 서사를 구성해낸다. 어쩌면 나오미 수녀도 벤야민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본다면, 사회에서 아무 몫도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몫을 찾아주기… ?

 

 

6.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더 늦게 전에

어서 도망치렴.

안밖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오미수녀에게 원장수녀님은 병환으로 아픈 와중에도 이런 말을 남겨주었다. 이제 왜 그녀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다시금 알아볼, 벤야민 식으로 말한다면 과거를 회억, 회상하고 기억해볼 시간이다.

수녀원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나오미 수녀.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의외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이 원했던 곳이, 자기가 즐거운 곳이 아니었으니까. 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오미는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부일 때나 병자를 간호하는 간호사일 때나 신의 종으로 하루종일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수녀일 때가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즐거웠다는 것을, 그 장소를 떠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다뤘던 철학자 하이데거도 딱 이런 상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무언가가 부재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깨닫는다고. 물론 꼭 철학자의 이런 언어가 아니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으로도 왜 나오미 수녀가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수녀원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저렇게 양손에 잔뜩 쥔 무거운 상품들을 내려놓고 예수나 부처를 떠올리게 할만한 미소를 짓게 되는지 알게 되는 이유로 충분하리라.

출처-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5&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이제 수녀원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후배를 만나고 원장수녀님이 말한 말씀을 계속 전해준다. 어서 도망치라고. 자신은 이미 잘 다녀왔다고. 심지어 이 후배의 이름은 마리아, 덴마의 세계에 기독교는 없고 그와 닮은 종교들만 있지만 예수를 낳았다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자의적 해석이지만, 나오미라는 이름 자체도

나오(더라도) 바깥으로

미(me)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라고 양영순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물론 마리아는 서양에 한국의 영희만큼이나 흔해빠진 이름이고 이 모든 게 나의 시쳇말로 뇌피셜 무리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런 게 바로 그저 재밌었다고 한번 휙 보고 넘길 수도 있는 만화 한 편에 대해서, 산책하고 수집하는 리뷰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길은 아닐까. 벤야민이 모스크바 일기를 재구성했듯이.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나오미를 그렇게까지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이란 결국 뭐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생명이리라. 생명이라는 건 천주님이 이 우주 곳곳에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한 가장 즐거운 에너지 흐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마치 스피노자가 기쁨의 정서에 대해 말한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흔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함께 서양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철학을 개시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이나 명예욕같은 구체적인 인간의 정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다룬 섬세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벤야민도 이런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을 분명히 읽었고 영향받은 기록들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 그래서 벤야민은 20세기 나치의 파시즘이 휘몰아치는 유럽의 거리에서 빈민과 창부와 산책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과 정서에 대해 살펴보고 수집하며 자신의 역사철학을 다듬어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도 바로 그런 수집가이자 산책가로서 벤야민의 문장과 마음을 훔치고 흉내내고 싶어서 이 연재글을 시작한게 아닐까.

이제 나오미수녀는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다. 떠나보고 나서야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공간, 즐거운 삶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도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다가, 자신의 연인인 아샤를 보기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가 돌아오고 모스크바의 일기를 남긴 것도 바로 이런 나오미의 마음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이런 정서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면 나름 감동적이고 훈훈한 흔한 결말이리라. 하지만 나는 또 마음 한켠에서 삐딱한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고 입을 삐쭉 내민다.사실 나오미 수녀도 이전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능력있으면서도 운까지 좋은 일부 사례에 불과한건 아니냐고. 만드라고라 마스터로 이미 하나의 엘리트 전문가였고, 여행객이 타지에서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면 보통 패닉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인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도시의 시장이 그녀를 구해주러 오는건 지나치게 그녀에게 편리하고 양 작가의 작위적인 전개가 아니냐고. 좀 더 무리수를 던져본다면 어쩌면 베를린의 부잣집 엘리트로 자라난 벤야민이 잠시 모스크바로 외도를 떠난 것도 단지 그런 ‘일탈이자 행운으로 가득찬 여행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또한 이 에피소드의 스토리 전체가 그 각자 다양하고 수많은 일상의 고통과 고난을 자칫 개인적으로 버티고 즐기면 된다고 정당화하는건 아니냐고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을 법하다. 천년도 더 전에 로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시절부터 기독교의 이런 서사는 매우 고전적인 레파토리 아니었는가.

 현재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미래에 더 큰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서사. 이는 자칫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저 구원은 미래에, 심지어 죽음 뒤에만 존재하니 현실에서 무슨 고통을 받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종말론, 메시아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 21세기에 오히려 종교는 더더욱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중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모두 살고 있다…

 

 

7.

 개신교니 신천지니 하는 특정 종교나 특정 교파의 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다들 영원한 경제성장을 비롯한 유사 종교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편에 이어 이번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또한 고통받으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기독교스러운 서사는 여전히 우리 세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이런 만드라고라 마스터이자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나 벤야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감각해야 할까. 이에 대해 나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서론을 끝내는 이 말로서 내 표현을 대신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달고서… 비판, 비평이란 당연히 그러해야 하니까. 다음 글에선 이런 기독교와 수도원의 구원서사가 아닌, 맑스의 투쟁과 해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필자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역사철학을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서구 역사철학 역시 이러한 관심, 즉 고통과 불의를 신의 관점 속에서 설명하려는 이유에서 ‘역사의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맑스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옹호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된 맑스의 이중성 역시 논증할 것이며, 아울러 벤야민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메시아에 대한 관점을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역사적 유물론을 일관된 방식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역사철학으로 재설정하기 위한 방향 전환으로 해석해볼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으로 과거를 망각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결국 역사철학의 세속화에 관한 이 책의 논의는 미래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당화하고 망각하려는 시도들과 정반대로, 망각에 저항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하려는 모든 형태의 ‘몫 없는 자들’의 서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철학에 대한 시론임과 동시에 정치철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이 실은 모든 역사철학에 공통된 것이며,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39-40p)

계속…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사랑했다는 괴로움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 려나

바람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 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2020.04.05.

 

이상하(한철연 회원)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궁핍에서 태어난 산물로
고찰할 줄 아는 자만이,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중에서 발췌)

 

 

1.

지난 시간에 두 폐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반대로 이 폐허 속에서 점화된 불꽃, 낙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낙원,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은 어느 시대에나 형태는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또는 소비 자본주의 시대, 나를 가져봐! 나를 즐겨봐! 그러면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거야! 라고 외치는 광고가 세상 천지에 깔려있고 돈만 된다면 자진해서 사람 피부에도 광고판을 새겨놓는 21세기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철학자가 자주 농담처럼 말하듯 이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란 결국 모두에게 ‘즐겨라’ 라는 지상명령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체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재벌 이재용이든 서울역 노숙자든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즐기거나 가질 수는 없다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으로 종종 화폐,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분명 없지는 않았고 사실 지금도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 절이나 수도원같은 종교인들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리라. 또한 혁명과 해방을 외치며 영주에게 저항하며 도망친 농노들이 만들어낸 중세 코뮨 도시나,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평의회라든지 로버트 오언의 공동농장같은 유토피아적 사회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실험들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아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고기먹고 술 먹고서 단체 도박을 하다가 검거된 땡중이나 헌금 경쟁을 장사하듯 부추기는 부패한 대형 교회의 폐허를 떠올리게 하는 뉴스를 떠올리며 종교인들의 유토피아라는 말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공동체를 쉽게 다 타락했다고, 거기엔 아무런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현대의 수도원 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화폐, 돈 자체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약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는 신부님과 수녀님 종교인들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런 종교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종로의 조계사처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전 간부나 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으려는 노동조합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려 찾는 신성하고 현실 권력에 불가침적인 해방의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의 공간을 찾으려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던 벤야민과, 한명의 전문가로서 뛰어난 약효를 입증한 만드라고라 마스터인데도 수도원을 향했다가 도피하고 방황하던 청춘, 웹툰 덴마의 나오미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둘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는 도피와 삶의 행복의 사유-이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볼 수 있으리라.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p 중에서 인용.

 

 

2.

나와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른다. 수도원 같은 폐쇄된 작은 공동체가 이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 오래고, 막스 베버같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가 진행된 근대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무슨 큰 상관이 있느냐고. 철학적 사상적으로 봐도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 살고 있고 19세기의 마지막에 니체가 선언했듯이 신은 죽었다고 봐야 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시대에 종교가 무슨 큰 현실적인 영향력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기존 종교의 유일신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인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졌을까. 그렇다면 수도원같은 오래된 신의 성전에 대해 다루기 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신흥 유사종교, 영원한 경제성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지난 글에서 말한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 첫날의 두 폐허를 목격한지도 벌써 세달 째, 이제 내가 사는 서울 홍대동의 날씨는 분명 겨울이 지나갔고 정말이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가정통신문처럼 진부한 말이지만 개나리와 벚꽃이 슬슬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허나 이런 계절의 순환과는 달리 매서운 코로나 사태는 종식은 커녕 글로벌하게 점점 장기화될 조짐이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실시되고 선진국들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거의 다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금이 이렇게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결국 주가는 다 회복하고 경제는 다시 성장하리라는, 끝없는 성장신화라는 유사종교를. 도대체 이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상원의 저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참고해서, 천년도 더 전에 기독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13-426)에서 이런 끝없는 성장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찾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한때 로마 제국은 지금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뿌리였고 거대한 영광 그 자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많은 고난 끝에 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았고 이천년뒤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심지어 세계의 달력과 시계는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로 시간을 세고 있으며 21세기 근대화된 국가 중에 사실상 예외는 없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이 로마의 국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이교도이자 야만족으로 불렀던 서고트족의 군사적 침입과 패배로 로마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구원에도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철학의 창시자 또는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 그리스 철학의 원형적 시간관-즉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벗어난다.

그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은 무한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설정한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엔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선형적)시간관을 전개한다. 이 최후의 종말, 심판 또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 현실의 어떤 고통도 사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의 영광과 구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비극을 견뎌낼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허나 이는 어쩌면 언젠가 경제가, 내 주식은 언젠가는 오를 거고 내 살림살이가 좋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는 21세기 우리네 대다수의 삶과 구조적으로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

 

 

3.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내 세대가 직접 겪어본 것만 하더라도 97년의 IMF구제금융 사태, 2008년의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공황, 그리고 2020년의 코로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까지. 영원한 경제성장이란 없으며 10년 정도 주기로 세계적인 불황,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것을 과연 누가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경제성장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자신의 옷을 바꿔 입을 뿐 끝없이 현재 세계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주가 폭락 사태를 대다수 개인들, 이른바 개미들이 스스로 국난을 극복하자며 동학 농민 운동을 패러디하여 ‘동학 개미 운동’을 펼치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연극을 펼치는 중이다. 지금의 천도교인 동학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바로잡자며 백년 전에 펼친 그 운동을 이제 주식시장에서 다시 반복해보자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불황이 있음에도 여전히 경제성장이라는 불멸의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보며 겨우 재작년에 겪은 전국민의 휩쓸린 비트코인 폭등과 폭락 대란이 떠오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이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명언을 다시금 되새겨볼 즈음이 아닐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그리고 이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근거없는 사이비 종교스러운 언어처럼 지난 10년 사이 가장 그 의미 내지 뉘앙스가 변해버린 말로는 뭐가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에서는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 교과서에서 ‘청춘 예찬’이라는 글의 주요 주제를 파악하는, 아니 외우는 병든 실험용 쥐 같았던 수험생들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대 소비자학 교수 김난도가 백만권 넘게 판매한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읽고서 한번 더 힘을 내봤지만, 당연히 그 책을 읽는 95퍼센트 이상은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김난도 그의 행적과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 실망한 수많은 리얼 청춘들의 반항 내지 저항은,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로 종결된 듯하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나오미수녀의 고난과 도피는 그야말로 이런 우리 세대의 청춘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스케치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또한 그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말한 벤야민의 사유-이미지의 실제적 사례를 수집하고 산책하고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칸트의 명언을 패러디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감히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감히 재구성해보라, 너 자신만의 감각을 표현할 용기를 가져라!

 

1927년 1월 30일. 모스크바 일기.

여기 베를린에 와서 비로소 분명해진 모스크바에 대한 몇가지를 더 적는다. (1월 29일부터의 일기는 2월 5일 베를린에서 쓰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베를린은 하나의 죽은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은 황량할 정도로 개별화되어 있고 한 명 한 명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 떨어진 채 큰 거리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다. 동물원 역에서 그루네발트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나야 했던 거리들은 마치 닦고 문질러 씻은 듯 지나치게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도시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들의 정신적 사태를 반영한다. 이 도시에서 얻게되는 새로운 시각은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 체류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비록 러시아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의식하면서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것이 분별력 있는 유럽인이 러시아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 체류는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 방문자들에게 정밀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요구된다. 평균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적인 사람,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체제에 덜 적합한 사람일수록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손쉽게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상황에 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유럽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다가서는 추상적 사유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될 것이다. … 모스크바는 다른 대도시에서 저항하기 힘든 멜랑콜리를 퍼뜨리곤 하는 교회 종소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이것 또한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되고 그리워지는 것 중 하나다. (257-258)​

 

 

4.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 이 연재글에서 모든 캡쳐의 저작권은 네이버웹툰에 있습니다.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이제 웹툰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를 따라가보자. 덴마의 주 무대인 드넓은 제8우주의 행성 중 하나인 위노바, 한 작은 수도원의 막내로 보이는 나오미 수녀는 그야말로 군대의 이등병처럼 중노동에 하루종일 시달리는 아픈 청춘이다. 혼자서 수십명의 환자 간병에 청소에 빨래에 음식까지… 하루에 하나만 해도 사실 충분히 피로에 지칠 수십명분의 가사 노동인데 이 많은 노동을 나오미 수녀는 모두 떠맡고 있고, 심지어 이 와중에 같이 일하는 수녀들 사이에서도 나오미 수녀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이전에 나오미 수녀의 건의대로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사회의 낮은 존재, 약자인 동네의 노숙자, 걸인들을 수도원에서 보살피게 되자, 기존 동네 신자들의 수도원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주 액션 활극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극, 블랙코미디인 덴마에서 이런 수도원이 나오는 걸까. 이 가난한 수녀들의 수도원에 대해서 우리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에서 한상원의 언급을 한번 살펴보고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기독교 전통은 이렇듯 공통의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물질적 재화의 공동 분배 역시 공동선의 원리로서 강조해왔다.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기독교 신자 공동체에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85p)

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러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회 전체를 지적,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질적으로도 지배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필두로 하여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과 직면한다. … (86p)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바티칸이 상실해버린 사도 바울의 공동선 이념을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그 시작점은 성직자들이 청렴한 삶을 살고, 수도원 내에서 자율적, 자족적인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따. 수도원 운동의 교회 개혁 중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교회의 재산 소유와 상속(당시 성직자들 중에는 교회법을 어기고 자녀를 낳은 사람들이 많았다)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어디까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하는 신학적 논의가 펼쳐지면서 이러한 논쟁은 다소 정치적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87p)

현실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덴마의 우주에서는 태모신교라는 종교가 굉장히 큰 세력을 쥐고서 실버퀵이라는 자체 회사를 통해 우주의 물류를 장악하고 있다. 물류, 유통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마존이 지금 미국인들의 삶을 장악하고 쿠팡이 당일배송으로 한국인의 편리함을 장악하고 있듯이 경제의 대단히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태모신교에 비교해 마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에 나오는 고엘 종교회와 나오미수녀의 선행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렇게 헌신하면서 당연히 기존 지역사회의 헌금이나 십일조도 줄었으리라. 게다가 수도원 토지의 소송에서도 져버려서 신의 성전을 용역 깡패가 노골적으로 폭력을 쓰며 쳐들어오고 협박을 일삼는다. 이렇게 나오미 수녀는 안밖으로 압박을 받으며 삶에 지쳐가는 중에, 병환으로 누워 있는 원장 수녀님에게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한다… 깡패가 얼릉 이 수도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며 그녀의 몸에 붙여놓은 빨간색 재산 철거통지서를 만지면서.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재산권의 정당한 법적 행사라는 신성한 권리를 내세워서 종교라는 이전의 신성을 폭력으로 짓밟고, 심지어 생일날 수녀를 때리고 철거집행 통지서를 수녀의 몸에 붙이는 이 장면은 정말이지 인상적인 양영순의 연출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유일신의 논리였지만, 지금 21세기엔 누가보아도 기독교보다 자본주의가 더 전세계적으로 우세한 유일한 신성의 논리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적인 시선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정신적인 종교와 물질적인 자본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알레고리, 우화야말로 마치 수천년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신 포도의 이솝 우화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말해줄 테니까. 여튼 나오미 수녀는 더이상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도피를 결심한다. 딱히 목적지도 없이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는 마음으로 떠난 나오미수녀. 허나 떠난 곳에서도 부랑자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등 수난은 계속된다. 허나 수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유대인 말살정책을 펼치던 나치를 피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나치가 득세하는 지금의 유럽을 피하기 위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벤야민도 마치 이런 심경은 아니었을까.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에벤에셀에 대한 자칫 놓치기 쉬운 복선을 한 독자의 매우 친절한 베스트댓글이 탁 하고 잡아준다. 나오미 수녀가 정처없이 떠나서 도착한 지역 에벤에셀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베댓처럼 나오미 수녀의 선행, 만드라고라 마스터로서 살아오고 베풀어온 그녀의 업이 이 먼 도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나오미수녀는 그저 별 목적없이 그저 지금 여기, 고통스런 현재의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수녀를 인도한 것이고, 덕분에 나오미는 그동안 고생한 것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칼뱅의 예정설처럼, 나오미의 이 돌발행동마저도 신의 입장에선 다 예견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전에 나오미 수녀가 키워냈던 위노바 행성의 특산물인 건강식품 만드라고라. 이 식물은 가장 많은 애정을 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 형상대로 꽃이 피는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건 위에 나온대로 수도원에서 그 중노동을 나오미수녀가 감당하기 이전엔 농부로서 애정을 가지고 만드라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단순히 나오미수녀가 일반인 이상의, 앞선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처럼 엄청난 고통과 억압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초인에 가까운 존재인 걸까?? 아니면 야엘같은 초인이 아니라도, 벤야민의 표현을 살짝 빌려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메시아가 열어놓은 희미한 작은 문’ 은 존재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