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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 첫 번째 글

시작하며

박영미(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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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우리철학’을 웹진에 연재하고 책으로 출판한 후 뒤를 이어 한국근현대철학을 계속 소개하고자 했던 분과의 계획은 얼마간 연재되다 중단되었다. 오랜 공백에 뭐라도 해보자며 호기롭게 웹진에 글을 쓰겠다고 나섰지만, 곧바로 후회로 바뀌었다. 그렇게 미적거리는 사이에 분과에서는 새로운 책을 기획했고 동시에 글을 시작할 수 있는 힘도 얻게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 중국근현대철학, 한국근현대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마지못해 일본근현대철학도 기웃거렸다. 이들을 함께 잘 정리해 구성할 정도의 연구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많은 물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을 거칠더라도 글로 쓰기로 했다. 제목을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로 정한 것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묻고 어떤 틀에도 얽매임 없이 그 물음의 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결과가 항상 뒤따라올 것 같지는 않다. 묻기만 하고 답이 없는 무책임한 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이러한 ‘좌충우돌’도 이해해주시기를 미리 부탁드린다.

 

2

서양의 근대는 분명하게 사유되는데 우리의 근대는 모호하다는 한 사회학자의 고백은 우리 근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변한다.

“사회과학을 하는 필자에게 서양의 근대는 언제나 뚜렷했고 분명했다. 가령 독일의 노동 계급이 태어났던 1850년대 독일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당시 시민의 삶은 여러 역사 연구를 통해 상상할 수 있다. 미국 역시 토크빌의 여행기나 그 밖의 역사 기록 덕분에 19세기 전반 미국의 사회 상황을 머릿속에서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다. …… 그런데 한국은 근대의 기원과 진화 궤적이 모호하다. 여러 학문 분과에서 한국의 근대를 찾아 힘든 지적 모험을 감행해 왔지만 총체적 모습은 아직 흐릿하다. 어떻게 시작됐는지, 근대의 발전 궤적은 왜 집단적 기획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천지 사방으로 흩어졌는지, 제국주의적 통치는 어떻게 그것을 왜곡했는지를 두고 아직 논쟁이 분분하다.”1

서양의 근대는 물론이고 중국의 근대, 일본의 근대라고 하면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들이 비교적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에 대해서는 ‘뚜렷하지 않다’고 토로하거나, 우리의 근대를 찾는 것은 ‘힘든 지적 모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 이유가 우리 근대사 자체의 복잡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양 중국 일본과 달리 유독 우리의 근대만 복잡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근대의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 그 연관과 평가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근대를 잘 정리하고 해석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방치했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한국근현대사상 및 철학 연구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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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우리 근대 읽기가 어려운 것은 근대를 마주하면 다음의 질문들이 뒤엉켜지기 때문이다. 우리 근대에 서양의 근대에서와 같은 주체가 존재했을까? 근대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근대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지 않을까? 이는 주로 동학을 연구하며 부딪치는 질문이다. 식민의 경험과 친일(매국)에 대한 분노는 식민통치 이전으로까지 소급되어 일본과의 영향 결탁된 모든 것들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주로 개화파를 연구하며 부딪치는 문제이다. 시대의 변화를 강하게 거부했던 집단은 왜 여전히 근대사의 전면에 자리하고 있을까? 이는 위정척사파에 대한 서술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근대로 자신 있게 내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정리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뜻 나서지 못하거나 나섰더라도 좌절하게 되고 결국 외면하게도 된다. 나의 우리 근대 읽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과도하게 소급해서 평가하지 않고, 시대를 역행했던 집단은 그에 맞는 역사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우리의 근대는 애써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히 읽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우리 근현대의 공간1 : 근현대사 기념관

서울 강북구에 있는 근현대사 기념관은 작은 규모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집약해서 전시하고 있다. 4.19 민주묘지에서 가깝고, 주변에 독립운동가의 묘역들이 있다.

 

 


  1. 송호근, 『시민의 탄생』, 민음사, 2013.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서평자: 최종덕(독립학자; http://philonatu.com)

 

이정은 씀,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

 

남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인정욕구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실존적 현실이다. 실존적 현실이란 생물학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이 서로 얽혀져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접촉되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다. 그런 스펙트럼을 나는 ‘스피노자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거듭 말해서 스피노자 스펙트럼의 대표적인 것이 인정욕구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정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엄연한 사회적 현실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필연이다. 사회적 현실이라는 이유는 단박에 이해되어지는데 반해, 존재론적 필연이라는 이유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개념부터 어렵다. 그런데 인정욕구의 존재론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준 책을 찾았다. 그 책은 이정은의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허망함과 유한함에 부딪히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무한성과 불멸성을 가져보려는 욕구가 생겨났으며, 이런 욕구는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욕구와 달리 정신적이고 의식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의식적 욕구를 스스로 자각 하는 원시인류에서 도덕이 생겨났나는 칸트의 이야기, 욕구 충족에 관련된 좋고 나쁨이 극단적으로 되어 선과 악의 구분으로 되었다는 니체의 이야기를 거쳐서, 저자 이정은은 헤겔의 자기의식과 자유 개념으로부터 인정욕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이 책의 의식적 욕구에 대한 자각 편) 인정투쟁의 도덕철학을 다룬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남성 중심 혹은 양성 중심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부정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차이의 정치를 제시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재분배 정치에서 인정의 정치로의 확장을 강조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인정투쟁을 다문화주의와 연결시킨 찰스 테일러( Charles Margrave Taylor, 1931~), 차이의 정치를 넘어서 포괄의 정치를 확립한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모두 자신의 철학적 배경을 헤겔에 두고 있다. 헤겔 철학의 계승인지 아니면 부정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인정투쟁 논의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의 저자가 인정욕구의 철학을 말하기 위하여 헤겔 철학의 배경을 다루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인정투쟁에 이르는 헤겔의 논의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은 그런 헤겔철학의 철학적 문맥을 우리들 일상의 문맥으로 바꾸어 서술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정은은 인정욕구와 같은 의식적 욕구를 채우려면 자연 욕구에서 벗어나 자아를 반성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헤겔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반성을 위해 욕구 대상을 객체화시켜야 하며, 내가 객체화된 대상을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헤겔은 “노동”을 통하여 이런 자각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을 통해서 대상을 단순 소비재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창조성을 얻을 수 있다. 대상을 창조하는 나의 창조행위는 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과 같은데, 헤겔은 이를 자기의식의 자각 과정이라고 했다. 자기의식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유로워진다. 나의 자기의식과 자유는 남들의 자기의식과 자유에 연결되어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성된 나의 자기의식이 바로 반성력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대상을 통해 반성하는 나의 주체적 활동이다. 이런 반성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자기인정의 정립이다. 자기인정은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즉 인정욕구의 원천이라는 논리구조를 저자는 잘 풀어서 우리 독자들에게 설명해 준다.

헤겔 『법철학』에서 인정욕구를 사적인 욕구에서 공적인 욕구로 전환할 것을 헤겔은 요청했다. 사적 욕구는 나를 중심에 둔 이기적 욕구이다. 사적 욕구는 개인적이고 특수하기 때문에 남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헤겔은 특수한 개별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를 『법철학』에서 ‘시민사회’로 규정했다. 시민사회는 공동체 실현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취약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민사회는 개인 권리를 실현하려는 근대사회의 특징인데, 저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출처: 위키피디아

시민사회의 경제적 욕구는 욕구대상물을 생산하게 되고 이를 위해 단순 노동행위를 가했다. 이런 노동행위는 경제활동의 주축으로 되었지만, 생산품이 많아질수록 욕구 또한 무한대로 커지므로 결국은 채워질 수 없는 욕구만 낳게 된다. 이를 “욕구의 여변 지대”라고 표현했다. 욕구의 여변 지대, 즉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나와 너는 서로 의존하게 된다. 너와 나 사이의 생산 의존관계는 인정욕구의 의존관계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나는 남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의 철학적 토대를 저자는 쉽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우리는 서로 인정하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서로 인정받으려고 해서 더 괴로워한다. 나만의 욕구를 채우려 하니 힘들고 남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더 힘들어진다는 삶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소화해내는 논의구조가 이 책의 탁월한 특징이다.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라!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면 그런 괴로움이 없어질 것이라’는 덕담이 회자하지만, 그런 추상적 덕담은 나도 할 수 있다. 욕구는 나의 자연적 본래에서 온 것이라 말로만 좋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욕구가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큰 문제다. 인정욕구의 실존적 현실과 개체적 특수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욕구와 욕망에 마주한 나의 갈등을 보편적으로 정립하는 구조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어서,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헤겔의 표현대로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정립’이라는 것인데, 보편성의 정립은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전체의 문화 도덕의 발전을 유도한다고 말한다. 거꾸로 공동체에서 도덕의 고양은 결국 개인의 인간성 실현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헤겔의 변증법 과정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보편성 정립을 통한 인간성 실현은 국가 공동체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인정의 지향점」 편)

문제는 인정욕구가 상호보편성에서 탈선하여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적 욕구실현으로 왜곡된다는 점이다. “왜곡된 인정모델”은 강요된 보편화의 병리현상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사례로 들은 노사관계에서 보듯 노동자의 욕구는 배제되면서 기업주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위장되는 많은 경우들이 드러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계층이 없어졌지만 인정투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 사이의 계층화가 고착되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계층 고착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 대안으로 저자는 자기의식과 자유라는 헤겔의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인정의 지향점」 편)

헤겔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인격을 지닌 존재이다. 인정투쟁은 그런 자유를 실현하려는 활동이다. 헤겔은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의 고유 개념을 그의 『정신현상학』(1807)에서 전개했다. 여기서 인격적 존재의 의미는 자신의 내적 목적을 지니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그 목적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할 때 ‘자기의식적 존재’로서 자아도 실현된다. 인정욕구는 ‘자유’와 ‘자기의식’의 두 가지 절대원리에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자유에 대한 자각과 자기의식에 대한 자각은 같은 지평에 있는데, 그런 원리를 정립하려는 이성적 존재가 인간이다.(「인정을 위한 싸움」 편)

동물원 침팬지를 대상으로 보여준 인정욕구 실험은 유명하다. 격리되었지만 서로를 볼 수 있는 두 마리의 침팬지가 있다. 먼저 한 쪽 1번 침팬지에게 오이를 주면 잘 받아먹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쪽 2번 침팬지에게만 파인애플을 주면, 이를 본 1번 침팬지는 화를 내면서 원래 잘 먹고 있던 자신의 오이를 내팽개쳐 버린다. 2번 침팬지와의 차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만의 자기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반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정투쟁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인정욕구 투쟁은 자기의식을 동반하여, 나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투쟁한다. 인정을 받더라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인정을 받는다면 여전히 공허감에 빠진다는 뜻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처럼 주인은 노예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식을 자각하지 못하게 억압과 공포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억압 상황에 순응되어진 노예는 외부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끊고 ‘자기의 내면’으로 빠질 수 있다. 노예와 같은 자기 내면화는 헤겔이 반성적으로 관찰한 금욕주의(stozismus)의 한 모습이다. 이런 금욕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 가지 태도라고 헤겔은 보았다. 자기 내면화는 사유와 관념 속에서 자유를 누리려는 관념론적 태도인 셈이다. 헤겔은 이를 “현실과 대상의식을 포기한” 자기의식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헤겔이 말하는 금욕주의는 저급한 자기의식 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저자 이정은은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읽기 좋게 전개하여 잠재적인 오해를 말끔히 풀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만이 아니라 주인도 마찬가지로 순응의 틀에 빠지고 마는 노예-주인-변증법적 관계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노예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노예의 노동으로 얻은 부를 착취하면서 주인은 노동하지 않고도 물질을 향유하고 자연적 욕구에 빠진다. 결국 주인 역시 자유와 자기의식을 잃는다. 헤겔이 말한 사례에서 보듯 공포정치가 확산될 경우 주인은 물질적 향유에 빠지지 않더라도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빠지고 금욕주의를 택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무관심과 부정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자기의식의 저급한 단계’라고 헤겔은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자칫 ‘금욕주의’, ‘저급한 단계의 자기의식’, ‘시민사회’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즉 이런 개념들의 원래 의도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 관념적이고 개체적인 것, 고립적이고 정적인 것을 반성하면서 관계적이고 동력학적인 변증구조를 회복하자는 데 있음을 저자 이정은은 잘 해명해주고 있다.(「인정투쟁」 편)

앞서 서술했듯이 강요된 자기내면화에 빠진 노예나 향유와 저급한 금욕주의에 빠진 주인이나 다 같이 인정욕구의 상호관계에 놓일 수 있다. 주인이 향유에 빠질 때 노예는 자기의식과 자유와 무한성을 자각하면서 미약해진 주인과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정투쟁의 시작이다. 그 결과 주인은 노예로 되고 노예는 주인으로 바뀔 수 있다. 주인이 된 노예는 주인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인정투쟁의 끝은 주인-노예 관계의 역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인정에 있다. 이러한 상호인정의 변증법이 인정욕구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상호인정이 실현되려면 다음 조건이 요청된다. 사회관습이나 민족정신 등의 공통의 삶의 지평에서 형성되는 이성적이고 체계적이며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자유와 자기의식의) 질서가 인륜성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인정 욕구의 양상」 편)

현실적으로 볼 때 인정욕구가 모두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욕구를 고통의 산실이라고 체념하기보다는 그런 고통을 해소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매우 소중하다. 그런 장치로서 첫째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는 성실한 분석이 있어야 하며, 둘째 왜곡되어가는 인정욕구의 삶의 구조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용기 안에는 타인이 원하는 인정욕구를 수용하는 태도, 타자 속에서 나를 직관하는 내 안의 타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포함된다. 현대인의 과제는 어떻게 나의 삶을 타자로부터 폐쇄시키지 않고 타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느냐에 있다고 저자 이정은은 말한다.

법철학에서 헤겔의 논의는 매우 어렵고 복잡하기로 유명한데, 저자 이정은은 이런 헤겔의 이론구조를 인정욕구라는 관점에서 매우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해준다. 헤겔 법철학의 서술특징은 연구대상(내용)과 연구방법론(형식)이 서로 겹쳐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헤겔은 변증법 구조를 서술하면서 그 서술의 방법 자체가 변증법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헤겔 서지학의 특징 때문에 헤겔의 작품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성실한(ehrich) 의식과 현실화된 정신(Geist) 사이의 관계, 공허한 사태와 사태 자체(Sache selbst) 사이의 관계, 금욕주의와 현실포괄 사이의 관계, 시민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관계, 특수와 보편의 관계, 우월욕구와 대등욕구의 관계 등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갈등과 정립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 Bewusstsein)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이 전개되는 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그나마 겨우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그런 구조를 설명하는 설명 틀의 형식도 변증법적이라서 헤겔의 글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변증법적 내용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다룬 헤겔 인정욕구의 중층 구조를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단한 글쓰기 능력이다. 인정욕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많은 사람들에게 욕구의 문법을 좀 더 수월하게 읽어보도록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를 강추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세 번째 흐름: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

 

<프레이저> 구소련의 몰락과 좌파 사상의 동반 몰락의 틈을 파헤치고 다양한 인정투쟁이 나타나는 시대를 포스트사회주의의 조건이라고 낸시 프레이저는 파악한다. 프레이저는 재분배 중심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정(recognition)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재분배와 같은 경제적 투쟁 대신에 정체성의 문화적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조하는 것이 프레이저 정치철학의 내용이다.(229~230쪽) 프레이저가 구분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첫째 잘못된 분배로 인한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둘째 지배적 타자 문화에 종속되거나 경멸 혹은 무시(불인정) 당하는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이다.(231쪽) 여기서 프레이저는 경제적 부정의가 해결되면 문화적 부정의도 따라서 해결된다는 롤즈의 환원주의 방식을 비판한다. 물론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가 서로 모순되어 변증법적 관계라는 안티-테제론도 반대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필자 이현재는 강조한다.

여성은 경제적 부정의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문화적 부정의의 피해자인데, 프레이저는 이런 여성의 모습을 이가적 집단(bivalent collectivities)이라고 표현했다. 경제적 부정의의 내용인 재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폐기해야 하고 문화적 부정의의 내용인 불인정의 사회를 없애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강조해야 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두 가지 양면 가치를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딜레마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4쪽) 프레이저는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이가적 태도에 대하여 긍정 해소책과 변혁적 개선책을 구분한다. 그리고 재분배 변혁을 위한 사회주의와 인정 변혁을 위한 해체주의의 결합이 서로의 상충이나 딜레마 없이 부정의를 해소하는 개선책이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5쪽)

정치적 대표자로서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여성은 삼가적(trivalent, 三價的)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237쪽) 주디스 버틀러나 아이리스 영은 재분배와 인정의 구분이 이분법적 사고의 창조물이라고 비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 논쟁은 우리 한국사회의 젠더 운동과 방향을 제공할 것이라고 필자 이현재는 말한다.

 

<누스바움> 정치철학자 누스바움은 “철학자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의 통합성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덕적 삶의 기초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여성운동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도록 해준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249~250쪽) 분석적이고 범주화된 누스바움의 기초적 질문은 1997년 『성과 사회정의』, 2007년 『성과 윤리학』, 『여성과 인간개발: 역량개발법』 등에서 구체적인 페미니즘이론과 정치철학으로 발전했다. 누스바움의 ‘대상화’ 개념은 페미니즘 핵심개념으로 여성을(사람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상화의 일곱 가지 성질을 표현하면, (1)사람을 도구로 삼거나 (2)남의 자율성을 부정하거나 (3)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무력화시키거나, (4)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거나 (5)다른 사람 아무나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거나 (6)타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거나 (7)타인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레이 랭턴Rae Langton은 여기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고 한다. 사람을 (8)몸으로 나아가 (9)외모로만 환원하여 판단하거나 (10)남을 아무 말 못하게 침묵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이다.(251쪽)

삶, 육체적 건강, 육체적 통합성, 감성, 상상과 사고, 감정, 실천이성, 친밀성, 놀이, 환경 등에 관한 제어능력이 사람답게 사는 기초 역량이라고 한다. 이러한 핵심역량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특히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데 힘들어진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누스바움의 역량 개발은 국제기구나 미국 정치계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60쪽)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이런 역량들이 제한되어져 왔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역량의 최소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필자 유민석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그런 역량의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261쪽)

<아이리스 매리언 영> 잘 알려진 대로 정치철학자 롤스에서 정의는 공정성이다. 자유권 보장과 분배의 공정성이라는 두 원칙에 입각한 존 롤즈의 분배 정의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 정치철학의 시발이다. 롤스의 분배정의는 개인주의, 이성 중심, 남성 중심, 원자적 개인 중심이지만, 영은 한 개인에게 책임을 몰아가지 않으며,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구조에 상관적이어서 동적이고 과정적이라고 본다. 개인마다의 차이, 집단마다의 차이를 조명하는 차이의 관점에서 정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정의론 기초이다.(266쪽) 차이를 무시한 동질화는 억압을 더 가중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래서 영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등권의 실현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적 공중을 지향하는 “차이의 정치”를 요청한다.(280쪽)

정치에서나 일상에서나 권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영은 받아들이면서, 그런 권력 망 속에서 분배논리로 파악되기 어려운 부정의가 산발되고 있음을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지적했다.(270쪽)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의를 도덕심에만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은 정의를 도덕에서 분리하여 정치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를 역설한다. 영이 비유한 “새장의 비유”는 독자에게 앞의 권력구조를 단박에 이해시켜 준다. 억압을 새장에 비유한 마를린 프라이(Marilyn Frye, 1983)를 영이 인용한 것이다. 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각각의 철사 하나하나는 새를 밖으로 날지 못하게 하는 잠금과 갇힘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철사가 서로 얽혀 연결되어 새장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되었을 때 새는 밖으로 날지 못하도록 막히게 되어 갇히게 된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는 바로 이런 새장의 구조와 같다는 비유이다.

공중, 공공성, 공적인 것이란 통일성이 아니라 복수성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영의 정치철학은 바로 그런 복수성 때문에 진보정치권에서조차 연대를 파괴하는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를 낳게 될 것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거꾸로 차이의 정치가 민주적 소통의 자원(resources)을 제공한다고 항변했다.(282쪽) 획일화된 정체성의 정치는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주변화 시키며 구성원 모두의 동일한 이해관계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질 것을 은연중에 압박하기 때문에, 결국 파벌과 갈등, 배제의 모순을 낳는다고 한다.

영은 심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포괄(inclusion)인데, 포괄이란 토론과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거나 소수인 구성원조차도 실질적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은 주변화 된 이들을 소통의 과정으로 끌어오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286쪽) 포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학과 더불어 영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민주적 공공성을 실현하면서 구조적 부정의에 저항하고 차이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영의 차이의 정치학의 구현이라고 필자 김은주는 강조한다.(290쪽)

 

<버틀러> 섹스도 젠더와 같이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표현은 버틀러 『젠더 트러블』의 주요 메시지이다. 젠더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주체로서 행위자를 가정할 필요 없다고 한다. 주체는 권력이 생산하는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몸이 물질이지만 몸이 담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혐오발언』(1997)에서는 우리 몸이 권력에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개인은 권력에 복종함으로써만 주체로 된다고 한다.(294쪽) 여기서 우리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지고 만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넘지 못할 규범을 만들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버틀러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젠더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기를 수술하여 성을 수정하는 것, 즉 정체성의 재배치가 몸에 가해진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라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페미니스트조차도 변화된 각기의 남녀 성적 정체성에 고정되는 것을 버틀러는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의 여성 주체성 강조는 정체성 확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버틀러는 보기 때문이다. 기존 이성애적 질서를 부정하듯이 일체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버틀러는 같이 부정한다.

주체 부정의 노선으로 버틀러는 헤겔에서 벗어나는 기획에 집중했다. 최근 버틀러의 관심은 삶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헤겔에서 이성은 분열되었던 의식이 다시 통일되어가는 운동이다. 의식은 타자가 보는 나에서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동일성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헤겔의 동일성으로 표현된 ‘나’ 대신에 변화하고 타인과 다른 나의 차이를 본다. 헤겔처럼 분열된 의식의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타인마다 나를 보는 관점과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타자의 철학이 출발된다고 필자 조주영은 평가한다. 나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며, 변화에 있는 동적인 나를 정적인 무차별로 다루는 정체성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이 버틀러 정치철학의 핵심이라고 한다.(309쪽)

 

네 번째 흐름: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

 

<하버마스> 하버마스 공영역 개념은 사적 개인들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담론행위로서 그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영역은 중세의 ‘과시적 공영역’과 질적으로 다르다. 근대 공영역은 공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적 인간들이 모여 생활 속의 공동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던 공간이다. 예를 들어 시장가격, 문학작품, 과학적 발견, 정치적 사건 등을 신문이나 잡지 등의 새로운 형태의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한다.(325쪽)

근대성의 주축이 되어온 이성 개념은 해체주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론이 의사소통 합리성 이론이다.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보는 아도르노의 자기파괴적 합리성 이론을 비판하고, 지배권력으로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의사소통 패러다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을 구제한다. 의사소통행위 안에 들어있는 일상생활의 상호관계적 실천행위가 이성이 지닌 도구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제안했다. 일상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사이의 지배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성 또한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327-8쪽) 이는 하버마스 의사소통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필자 한길석은 일상 언어행위의 구체적인 대화사례를 들어 그 어려운 의사소통이론을 선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책에 나온 예를 보자. 말하고 듣는 일상언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1)객관적 진리성(대화 내용이 객관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 (2)주관적 충실성(대화내용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만의 콘텍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문제) (3)사회적 타당성(대화내용이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 안에서 사회적으로 불편부당한 점은 없는가의 문제)의 여과장치를 돌리고 있다.(329~330쪽)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징적 가치와 규범으로 내면화된 생활세계(lebenswelt)와 체계, 즉 화폐(경제체계)와 권력(행정체계)의 조정매체인 체계(System)라는 두 차원을 통해 전개된다. 체계가 생활세계와 분화되고 자립화하면서,(331쪽)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의 역할은 축소되고 체계의 목적합리성이 확장된다. 이렇게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위험스런 현상을 하버마스는 경고한다. 체계의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환경, 반핵운동 등 시민사회의 생활세계가 이끄는 신사회운동을 확대하여 의사소통의 실천을 강화하여, 끝내 시민 차원의 생활세계의 힘이 입법과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정치철학의 전략이다.(332쪽)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의 방향은 인간적 삶의 해방, 혹은 해방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 해방적 삶을 찾기 위하여 계몽적 이성과 의사소통의 이성을 구분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으로 이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한다. 소통을 통해서, 쉽지 않더라도 사회의 합리적 통합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필자 한길석의 설명이다.

 

<찰스 테일러> 테일러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도덕철학의 지평을 정치에 확장시켰다.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가능한 자유를 최고의 인류성으로 보는 헤겔 『법철학』의 전체주의 사상을 테일러는 공동체 가치를 결속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공동체 가치에서 자유의식은 중요하다.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는 다름을 테일러는 강조한다. 서구 근대화의 기저는 자유주의 가치의 확산이라고 본다. 여기서 테일러는 헤겔과 다르게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를 구분한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근대 세속화가 형성된다. 이런 과정을 테일러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라고 부른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연관되어 있는데, 근대 이전 주술의 기능은 공동체 개인에 신념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해온 것으로 테일러는 분석한다. 즉 근대화의 탈주술화는 도덕적 지평의 상실 과정을 대신한다고 설명한다.(347쪽)

도덕적 지평이 상실되어가는 근대의 세속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테일러는 “보다 높은 시간” 개념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다 높은 시간”은 도덕적 지평을 상실하기 이전의 시간이며 영원성의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시간이며, 사물의 질서가 세워진 시간이다.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으로 상실된 도덕을 되찾는 일이 테일러가 말하는 『불안한 현대사회』로부터의 극복이며, 그의 정치철학의 과제이다.(348쪽) 불안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외양은 민주주의이지만 실제로는 ‘현대판 독재’, 이 세 가지라고 쓰고 있다. 이런 불안은 결국 자유주의가 마치 자유의식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유의식을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필자 유현상은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식이란 ‘자기결정의 자유’인데, 자기결정의 자유는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해주는 “인정의 정치”로부터 나온다고 필자 유현상은 설명해주고 있다.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이란 개인의 평등한 인격적 처우만이 아니라 문화공동체에 대한 인정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북미원주민에 대한 인정은 원주민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 문화, 즉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358쪽) 한국사회에서 테일러의 자기결정의 자유가 정치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동체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일반시민들의 사회적 연대가 필요다고 필자 유현상은 강조한다.(361쪽)

 

<아감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Homo Sacer)란 “죽여도 되지만 희생양으로는 삼을 수 없는 생명”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 탄생과 더불어 생긴 호모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자(법)가 가진 생사여탈권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었다면 근대 권력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필자 이순웅은 이런 권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호의 비극을 예로 들었는데, 세월호 승객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게 내버려 둔 비극이라고 한다. 세월호 승객들, 장기간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내 이웃으로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필자 이순웅은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통해 설명한다.(371~372쪽)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는 사회계약론자가 말하는 주권(sovereignty)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통치(government)를 통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고 한다. 주권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바뀌었다는 푸코의 인식을 아감벤도 같이한다. 생명권력의 행사라는 점에서 근대적 주권권력은 그 형성과정에서부터 폭력적이다. 아감벤에서 통치성은 폭력성이다. 폭력성은 비오스(bios)를 무시하고 물질적 신체 조에(zoe)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정치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폭력성은 근대국가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강조점이다. 오늘의 정치는 조에와 비오스 자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라고 한다. 근대 민주주의조차도 벌거벗은 생명을 통제하고 보살펴주고 관리하는 효율적 정치형태를 찾는 데에 머물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비관적인 아감벤 정치철학을 해명한다.(378~379쪽)

출생과 동시에 조에 생명이 국가의 관리체제 안에 흡수된다. 이주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 혹은 미혼모의 자식, 외국난민의 자식 등 이런 체제에서조차 배제되는 조에 생명의 벌거벗은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말한다. 문제는 눈에 띄는 호모사케르 이상으로 눈에 띄지 않는 호모사케르가 더 많이 편재한다는 점이다. 조에에서 비오스의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렌트의 해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비오스를 되찾는 아감벤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필자 이순웅이 더 보태주면 좋을 듯하다.

 

<지젝> 지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이데거의 주체 해체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해체주의 존재론은 기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그 이면에 세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용인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해체론 기반의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철학을 반대한다. 라캉철학의 거울을 통해서 헤겔의 전체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무정부주의 자치주의나 협동조합주의를 비판하고 레닌의 혁명정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지젝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402~403쪽)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지젝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모시켰다. 즉 급진민주주의에서 혁명적 전위주의로, 계몽적인 라캉에서 낭만적이고 총체적인 정치혁명의 전위주의자로의 변모이다. 그 이유는 지젝이 본 진보진영의 자기한계에 있었다.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즉 그들의 규칙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본다. 기존 프레임 안에 갇힌 진보진영의 투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단지 비판적 문화연구에 그치는 자기한계에 빠져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이 보기에 포스트모던 정치는 고전 맑스주의의 제스처를 반복하거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배우의 연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필자 김성우는 표현한다.(405쪽) 예를 들어 진보진영의 포스트모던 정치이론의 전략은 문화적인 인정투쟁이나 무지개(사회주의,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연합정치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탈정치화 된 경제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화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젝의 혁명정치학이다.(407쪽)

 

이렇게 모두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흐름을 한국의 신진철학자 16명이 한 주제씩 잡아 서술한 책이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이 책이다. 현대정치철학의 흐름을 넷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정치철학 지성계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서 서평자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관련 전공자 16인이 모여서 쓴 글이라서 통일된 문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필자마다의 글쓰기 성향이 각자 드러나면서도 일반 독자를 배려한 원고 작업이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서문에서 이 책은 대중적 입문서라고 밝혔는데, 하나 두 개 꼭지는 마치 논문을 읽는 것 같아 비전공자가 독서하기에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여기 서술된 16명의 정치철학자의 사상이 철학사 맥락에서 얽혀 있으며, 20세기 현대사 맥락에서도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더 큰 소득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현대정치철학자 모두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사회적 현실의식과 철학적 문제의식을 다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가 살아왔던 지난 100년을 투영한 그들의 정치철학적 대안과 주장들 모두가 마치 3.1운동 이후 한국의 100년 정치사를 반영하고 해석하는 듯해서 전율을 느꼈다. 여기 전개된 정치철학의 흐름이 남의 이야기 아니라 바로 오늘의 한국인이 겪고 있고 풀어가야 할 큰 과제라는 뜻이다. 일반 독자 분들이나 철학 전공자라도 전체 흐름을 엮어보는 분들,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정신사에 관심을 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끝>


(1)부 글 보러가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철학은 비판과 반성을 겪어가는 삶이다. 정치는 그런 삶의 조건이면서 삶의 현장이다. 철학은 정치에 제약을 받지만 정치를 반성하고 느리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 나로부터 멀어진 정치를 나에게 되찾아오고, 나와 우리 사이의 조작된 경계를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의 지도가 정치철학이다. 그런 정치철학의 지도가 탄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쓴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전체주의와 독재 문제를 다룬 영역’과 ‘해체주의와 구조주의 프랑스 정치철학의 영역’, ‘차이의 정치 혹은 페미니즘 정치철학의 영역’,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의 세속화와 혁명정치를 다룬 영역’의 4가지 정치철학 영역을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논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정치철학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내부의 독재를 다룬 영역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②해체와 구조의 주제를 다룬 영역에서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③기존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차이의 정치를 다룬 영역에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마지막으로 ④근대성을 해부하여 민주주의의 속살을 벗겨내는 영역으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까지, 이렇게 모두 정치철학의 16가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담론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매체학, 미학과 문학 및 예술분야를 포함한 한국 지식사회 전체에서 격렬히 논쟁되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16명의 국내 번역서가 무려 300종이 넘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논의가 한국 지성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평자도 현대 정치철학의 담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너무 전문적이고 방대해서 그동안 전체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2019년에 출간된 책,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을 읽으면서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현대 정치철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6명 정치철학자들의 논점을 이 책의 순서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했다.

첫 번째 흐름 :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

 

<칼 슈미트>첫 번째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1부의 시작은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나치를 정당화했던 칼 슈미트(1888~1985)의 정치철학이다. 슈미트 이론 안에는 민주주의의 붕괴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꾸로 말해서 슈미트의 위험한 정치철학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약점과 함정을 피하고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분석에 의미를 두었다고 필자 남기호는 말한다.

칼 슈미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쉽게 말해서 말 많고 겁 많은 의회제도 대신에 일인 통치자 중심으로 강력하게 국가를 끌고 가는 총통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데 있다. 한국 정치에서는 이미 박정희 미신 덕에 익숙해진 내용인데, 이 글을 읽으니 왜 전체주의가 되살아나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군주제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는 민족, 인민 등 이종적 대중들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각축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회의 당파성으로 인해 협동적인 정치화합은 불가능하다고 슈미트는 단언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로 동일시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를 이합집산의 자유주의 소산물로 보는 것이 슈미트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합집산의 의회주의 대신에 사회의 자기 조직화로서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슈미트가 설계하던 잠재적 전체주의 국가 모습이다.(27~28쪽) 나아가 민주주의에서 선거에 패배한 쪽은 배제되는데, 불평등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의 실제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슈미트는 말한다. 이제 이러한 자유주의 이합집산을 막는 유일한 길이 파시즘이며 파시즘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칼 슈미트의 궤변이 시작된다. 20세기형 전체국가를 꿈꾸던 슈미트는 나치를 정당화하고 환호와 갈채를 독재자를 찬양한다. 슈미트의 오도된 민주정치 의식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전체주의 괴물을 경계하고 붕괴시켜야 한다고 필자 남기호는 강하게 말한다.

<벤야민> 문화학자이면서 정치철학자인 벤야민(1892~1940)은 그의 유명한 저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세계변혁의 도구로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매체와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혜안은 철학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40쪽) 소비에트 스탈린과 독일 파시즘의 결탁으로 위기에 맞은 벤야민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장르에 급진적 해방의 밑그림을 입혔다. 벤야민의 박사학위 주제였던 낭만주의 예술과 그 비평은 시와 사유의 결합이며 시인과 철학자의 결합이었다. 시가 미의 이념을 구현한 것이라면 철학은 구현된 미의 이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술이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52쪽)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연극은 관객이 배우 안으로 빠져들지만, 영화는 상대적으로 배우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남으로써 관객이 비평할 수 있는 태도가 넓어졌다. 영화의 영상은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의 언어라는 벤야민의 어구는 아주 유명하다.(55쪽)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파시즘은 예술적인 자기만족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을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경고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나치 권력의 홍보용이었다는 점을 필자 박지용은 지적하고 있다.(57쪽)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보편사 이념에 기초한 진보 개념을 비판하고 혁명적 실천의 동력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서평자가 알기에 벤야민은 기독교적 구원론이 국가권력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신학 이론을 부정했는데,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진보 개념은 역사적인 연속성의 노정에서 스스로 벗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당시 사민주의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면서도 소비에트 유물론을 거부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지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렇듯이, “벤야민의 기여는 지금까지 좌절된 혁명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 있다”고 필자 박지용은 강조한다.(64쪽) 당대 아도르노와 브레히트 그리고 아렌트와 벤야민은 나치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브레히트는 결국 당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에 눌려 동독에 정착했고, 벤야민은 미국행 직전에 이주가 좌절되어 약물 자살로 삶을 마쳤다. 죽음 직전의 원고에서 그가 한 말이다. “역사 유물론은 언제든지 승리한다.”

<아도르노>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미학 그리고 음악에까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아도르노(1903~1969)는 히틀러 정권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1953년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교수로 귀환했다. 미국 시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미국 거주 시기에 받은 음악에 대한 문화적 충격과 미국 실증주의의 양면성들, 그리고 미국 시기 이전 루카치와 벤야민 등과 교류한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활동은 68혁명의 이론적 배경에 영향을 끼쳤다.(68~69쪽) 20세기 두 차례의 전쟁, 파시즘의 등장, 폭력적 독재 만연 등의 이유를 “계몽의 자기파괴” 혹은 “신화로 퇴보하는 계몽”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의 요체이다.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신화이지만 그 계몽 자체가 신화로 빠지는 역설, 변증법적 역설을 다룬다. 계몽이 추구하는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수단으로 되는 역설을 말한다. 계몽은 주체를 필요로 하는데 그 주체가 소멸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보여준 야만성이란 합리적 주체라고 하는 계몽의 주체가 오히려 신화의 주인공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해명한다.(68~71쪽)

전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시스템이다. 동일성을 지키는 주체는 편집증 환자가 된다는데, 즉 자신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광기와 공포를 표출한다는 것을 필자 한상원은 편집증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다.(79쪽) 독재 권력의 전체주의로 인해 주체가 퇴보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고가치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은 동일하고 규격화된 삶의 형식으로 빠지게 된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했다.(80쪽) ‘가상에 빠진 자유’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했다. 당과 계급이라는 교조화된 맑스주의 대신에 개인의 고유한 사람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적 해방이 아도르노가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를 한상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해제 시킨 자리에는 곧바로 순응하는 군중이 출현하며, 이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으로 이어졌다.”(83쪽)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듯하다.

<아렌트> 1941년 미국으로 옮긴 후, 1959년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된 아렌트(1906~1975)는 저서 『인간의 조건』(1959)에서 인간 활동의 세 가지 기반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라고 했다. 여기서 노동은 생물학적 충족을 위한 생산이며, 작업은 세속화된 물질세계를 만들면서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행위는 말을 통해서 정치적 관계를 풀어가려는 공공적 교환이다. 노동과 작업의 생산 관계가 행위의 정치 행위를 지배하는 틀에서 탈출하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표현했다. 정치 행위가 배제되고 소통을 위한 아고라의 공적 영역이 무시되는 욕망 지배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복층의 소통문화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아렌트의 “차이의 정치”이다.(101쪽) 차이의 정치를 보장하는 정치적 삶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비오스(bios)의 삶이다. 비오스와 대비된 조에의 삶이란 획일적이고 단수적이며 개체화된 삶이며, 기계적이고 운명의 굴레에 빠져 정치적인 삶의 황폐화에 이르는 길이다. 아렌트가 추구하는 차이의 정치는 비오스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102쪽)

과거 독재정치나 전제정치는 아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합의가 파괴되고 그들만의 정당성을 합의 없이 축조하면서 그들 스스로 적법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정치를 아렌트는 “총체적 테러”라고 표현했다.(105쪽) 개인이 느끼지 못하고 저항할 수 없지만, 개인의 다양성이 말살된 상태이며, 이런 전체주의는 나치 이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106) 총체적 테러를 극복하고 무작위적인 균등과 다른 진짜 평등성의 권리를 찾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며, 차이의 정치는 정치적 삶과 저마다의 인권을 연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이다.(109쪽) 정치와 인권이 연결되어야만 구성원 사이의 다양성이 보장된 공동체에서 나의 인권이 성취될 수 있다. 필자 조배준에 의하면 개인의 권리를 빼앗기고 소통이 차단되어 사회적 합의가 강압적인 그런 정치 권력은 정치 행위의 종말이며 정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평등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 가능함을 아렌트는 강조한다. 평등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평등은 정치 활동을 통해 정의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평등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의 균등성은 전체주의에 예속화된 삶의 결과일 수 있다.(110쪽) 2010년 이후 극심해진 양극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 만연된 혐오 문화 등의 사회적 병리는 제도권 정치 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아렌트의 공동체 평등주의, 총체적 테러에 대한 붕괴와 방어의 노력,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합의 공간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그런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푸는 열쇠일 것이라고 필자 조배준은 말한다.(113쪽)

 

두 번째 흐름: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

 

<알튀세르> 알튀세르(1918~1990)의 두 작품, 『맑스를 위하여』(1965)와 『자본을 읽자』(1965)는 최고의 맑스 해석서이면서 동시에 맑스를 철저히 해부하여 혁신시킨 정치철학의 깃발이다. 알튀세르를 맑스주의자이면서 맑스주의 비판자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가 지닌 경제결정론과 역사목적론을 알튀세르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이미 역사적인 형식들, 즉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적 필연성 말고 그 어떤 것도 아닌 형식들 속에 삽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138쪽)

알튀세르는 군대, 경찰이나 법원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가 아닌 또 다른 억압으로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를 묘사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종교, 교육, 정치, 노동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도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위한 투쟁은 완성될 수 없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연이은 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52쪽) 여기서 ‘투쟁이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은 투쟁의 강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투쟁의 목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목적론과 결정론을 거부하나 여전히 최종심급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결정적인 기본 토대를 지향하는 알튀세르의 반(反)목적론 맑스주의를 표현하는 듯하다. 필자 최원은 최종심급의 끝에 미래만이 남는다고 표현했다.(154쪽)

<푸코> 푸코(1926~1984)의 권력 개념은 푸코 정치철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이다. 권력은 타자를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종시키는 힘이다. 권력은 인격적이거나 거시적이거나 억압력으로 설명되지만은 않는다. 권력은 모세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망을 이루며 우리 주변의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이를 보여주는 푸코의 지도가 ‘계보학’이다. 푸코가 나누고자 했던 지식은 광기, 병원, 감옥, 성이었으며, 그런 개념 위에서 그의 정치철학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필자 박민미는 푸코 철학 사유의 뼈대를 아주 쉽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고고학과 계보학이 푸코의 핵심어이며, 사상의 핵심어는 권력/지식, 미시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이다. 최근 주목받는 그의 핵심어는 통치성이다.”(162쪽) 주체의 형성사를 발굴하고 문제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역사적 재구성”이라고 했다. 역사적 재구성은 개인이 삶의 주체로 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고고학, 권력에 종속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계보학, 도덕 주체로 되어가는 개인을 다루는 윤리학이다.(162쪽)

세상의 사물과 관계를 경계 지우는 경계선이 권력인데, 사회가 그어놓은 금기의 경계선에 도전하는 것이 푸코 정치철학의 기초이다. 푸코는 스스로 지식의 권력부터 거부한다. 지식은 권력을 떠날 수 없으며,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 지식은 권력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특정 권력이 아니라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관계 전체를 말한다. 권력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집단을 권력 안에 머물도록 강제화하는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가진다. 권력은 대상화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효과이다. 이를 권력효과라고 한다. 한편 권력은 저항을 산출한다. 이 점에서 권력과 저항은 역설적인 상호관계론으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효과의 위험성을 투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한다.(164쪽) 권력망을 투시하고 자신의 삶을 부단히 창안하는 자유를 동력으로 삼아 사회가 보이지 않게 쳐놓은 금기의 선을 ‘감히 넘어서 보라’(173쪽)는 필자 박민미의 말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들뢰즈> 들뢰즈(1925~1995)의 철학에서 좌파는 소수자이다. 백인, 기독교인, 남성은 다수이며 인간을 정의하는 표준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표준에 들지 못하는 주변인의 소외가 늘어난다. 들뢰즈는 표준을 거부하고 소수자에게서 새로운 생성의 힘을 발견한다. 표준에 속하는 집단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표준성에 안착하여 변화에 대한 의지나 욕구가 사라진다. 반면 소수자는 생성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발휘한다. 들뢰즈는 유명한 카프카의 사례를 든다. 땅속줄기(뿌리)는 리좀이며, 자신은 땅속에 있지만 다른 것에 연결되어 그 다른 것을 활용하여 에너지와 힘을 생산하고 제공한다. 다양체로 번역되는 리좀은 더 위를 향해 생성의 지도를 그린다.(180쪽)

개인의 주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세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체된 실체가 아니다.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뢰즈는 주름에 비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가 서로 주름을 안으로 접으면서 내부성을 만들면서 ‘되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주체화다. 이차원의 평평한 밀가루 반죽을 접으면 그때 비로소 안으로 접힌 면을 우리는 내부라고 부르고, 밖으로 젖혀진 면을 외부 표면이라고 부를 뿐이지, 원래는 다 같은 평평한 하나의 동일면이었다. 내부는 안으로 접혀 들어온 외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름이 안으로 접힌 밖인 것처럼 말이다. 밖을 경험하면서 밖의 경험들이 안으로 차곡차곡 혹은 어지럽게 접혀 여전히 밖의 표면이지만 마치 안처럼 내부화된 것이 바로 인간의 주체화라고 들뢰즈는 설명한다.(182쪽) 주체는 동일성에 의해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철학을 넘어서 있는 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내재화된 주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주체의 동일성에서 탈출하는 길은 같지 않다고 한다.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서 주체 안에 차이가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는 다른 것과 비교해서 만든 차이가 아니라 주름의 뒤집힌 껍질이며, 밖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의 주체이다. 변화의 주체란 주체가 변한다는 뜻이기보다는 변화 자체를 품고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기존 관념으로 본 주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차이가 행위의 조건이며 내적인 힘으로 형성되는 사건의 도래라고 필자 김범수는 설명한다.(188~190쪽)

차이의 내재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들뢰즈의 욕망이론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혹은 내 국가에 결핍된 무엇을 채우려는 목적의지와 다르다. 목적 없이 욕망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욕망인데, 들뢰즈는 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개인에 얽매이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며 생산적이라고 필자 김범수는 말한다. 이렇게 욕망은 내재 된 차이의 변화하는 힘과 소수자만이 누리는 생성의 힘을 결합한다. 표준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효과에서 탈출하기 위해 욕망을 동일성의 주체로부터 걷어내도록 하는 일이 들뢰즈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랑시에르> 경직화된 이데올로기로 변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인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의미를 이미 상실했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평등의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치안’으로 전락한 현 제도의 정치체계, 즉 “감각적인 것을 분할 하는 체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정치 개념과 치안 개념을 구분하면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전개된다.(198~199쪽)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제안한 ‘감각적인 것의 부활’ 개념을 미학에 적용하여 미학의 정치성을 부각했다. 이 시기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했다. 계몽과 지도의 노력 없이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고 필자 조은평은 랑시에르의 철학적 방법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206쪽) 이 점에서 랑시에르와 양명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개인의 성향과 소질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지 결코 지적 능력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207쪽) 그러나 세상은 무지한 자와 유식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자기 무시의 늪”은 지식인에게도 두 가지 경고를 던진다. 그 하나는 지식인끼리 서로 지식의 우위를 따지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인이라는 자기 오만에 빠져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는 경우이다.(208쪽) 랑시에르의 표현대로 “무지한 스승”에서 탈출하여 계몽과 지도 대신에 무지한 삶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해방의 의미이며,(208쪽) 이런 해방의 평등정치가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기초라고 필자 조은평은 설명한다.(201쪽)

정치공동체란 각 계급이 기여한 합리적 몫에 따라 권력을 분배하도록 합의하는 공동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정치공동체에는 불화가 없을 듯 보이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몫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자신의 몫을 찾지 못하는 불평등이 생긴다. 여기서 계급투쟁이 생기고 공동체 질서도 깨진다. 권력자는 이런 사람들을 공동체를 방해하는 자들로 여긴다. 여기서 유한계급층은 그런 방해자를 제어하는 치안(police)의 정치만을 필요로 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했다. 랑시에르는 이런 불평등을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제”라고 표현했다.(215쪽) 평등을 되찾는 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217쪽)


(2부)에서 이어집니다~

6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6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

『인식과 관심』은 근대적 지식 형식의 기초를 인식하고자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시도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하버마스가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제시했던 사회적 지식에 관한 역사 맥락적 분석에서 완전히 벗어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전념하고자 했던 기획으로 이동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저작이었다. 새로운 기획은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인데, 그것은 분화된 인간 지식과 행위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는 “미시논리적” 수준과 사회적 근대성을 발생시킨 “거시논리적” 수준 모두를 포괄한다. 근대성은 이러한 토대를 구현하는 실천들이 새로운 제도들과 다양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이룩된다.

비판사회이론의 명확한 개념화라는 작업에 있어서 『인식과 관심』의 인간학적 지향을 승인하는 것은 적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학, 특히 언어행위이론의 한 분야인 화용론이라는 인접 분과학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합리성 이론의 원천을 [언어행위라는]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일련의 보편적 능력들 속에서 발견하기 위한 시도였다. 언어를 의미 목록으로 여기기보다는 상호주체적 체계이자 조정 행위로 간주하던 하버마스는 어떻게 언어가 실제로 행위 조정에 활용되는지 탐구하였다. 즉 화자와 청자들이 서로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이룩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핵심적 능력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것이다 (CES를 볼 것).

이런 발상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현대 언어학과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이었다. 하버마스는 모든 자연 언어들의 저변에는 보편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언어행위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화용론적으로 불가피한 기술과 능력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없이는 행위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라는 화자와 “너”라는 청자의 위치를 자유롭게 번갈아 가며 변환시킴으로써 인칭대명사의 체계 내에서 부여되는 위치를 확정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능력은 올바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발언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데에 필요하며, 상호주관적인 언어 행위의 대칭적이면서 호혜적인 요구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특히 참이라고 주장되거나 정당화된 발언들의 실천적이면서 사회적인 차원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이래 지속되어왔던 철학과 재구성적 과학들 사이의 밀접한 협업 관계를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 (1981 [1984/1987])』에서 마침내 완성된 형태로 주장할 수 있었다. “자리 지키는 자이자 해석자로서의 철학”이라는 논문은 이러한 입장을 요약적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저작에서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들을 분석하면서 사회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 이론은 성인 화자와 청자들이 집단적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자기 및 상대방에게 부여해야만 하는 언어 능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을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학문 분야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는 언어학과 행위 및 논의 이론, 발달심리학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이론들과 이에 연관된 인지적이고도 도덕적인 학습 과정에 대한 이론적 연구방법들, (인간의 의사소통을 자연 언어에 숙달되는 것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행위로 분석하는) 언어행위이론 그리고 경험적 근거를 지닌 자연적 논의 이론들까지 섭렵하였다.

『의사소통행위이론』 역시 여러 사회학 분야들의 역사, 구조 그리고 목표에 대한 심오하고도 일관된 문제로 구성되어있다. 거기에는 막스 베버의 합리성으로서의 근대화 이론,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에밀 뒤르켐의 세속화 및 집단 의식 변형이론 그리고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해독이 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놀랍게도 다양한 지식들을 묶어내게 되면 그 이론은 중심점이나 안내자 없는 상태로 머무르게 되어 이론 기획 전체가 전복될 위험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서의 철학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이러한 접근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심오한 철학적 시도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은 근대적 주체와 사회적 삶에 대한 근대적 형식들의 바로 그 구조 안에 존재하는 합리적 행위의 잠재력을 찾아내고, 식별하고, 정교화하려는 목적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언어 능력에 관해 보편 화용론이 작업하던 세부 사항을 통하거나, 해석 사회학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방법론적 논쟁을 통하는 등의 모든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으로써 이런 [근대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에 대한 주요 위협들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위협들에 대응할 수있는 방법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버마스의 지적 영향

 

하버마스가 철학과 사회 영역에 끼친 가장 의미있고도 지속적인 영향은 물론 추산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략적으로는 소개할 수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철학 및 정치이론을 다룬 저작들은 2차대전 이후 반세기와 21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서양철학의 변형의 와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 영향은 다음과 같은 세 측면으로 부각된다.

 

학제적 협력

첫째, 위에서 논의했듯이, 하버마스는 철학에 융합적 학제적 백과사전적으로 광범위하게 접근하면서 철학적 활동의 기존 모델(때때로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되었는데)에 사려깊은 대안을 제시하였다. 철학 활동의 기존 모델은 고독하고도 자아 성찰적인 철학자가 내적 의식의 심연에서 심오한 진리를 불러내는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이와같은 철학적 활동 방식은 2차대전 이후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하버마스의 철학 저작은 방법론적 고립이라는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등지고 있다. 이제 철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성과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가 오가는 대화의 한 당사자로서 참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철학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전문적 기술 용어로 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견을 공적 토론에 적합하도록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제공하는 통역사로서의 책임이거나 필요하다면 그런 공적 토론의 장에서 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맡는 일에 그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은 대중적이다. 아마도 [하버마스의] 이런 철학적 모델은 장구한 세월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역사학이나 제도의 기나긴 역사를 다루는 사회학과 다르다. 이 철학 모델은 자연에 대한 그리고 학문적 혹은 과학적 탐구의 한계에 대한 고도의 자기 성찰성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끈덕지게 다룬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해 독점적으로 접근하게끔 하는 원칙과 방법을 모두 단념했다. 진리에 대한 독점적 태도는 여타 관련 학문에서도 결핍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의 본질과 목적을 축소시키는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철학에게 과학의 시대에서도 적합성을 유지하도록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이성의 복권

둘째,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성의 복권으로 대표된다. [앞서 보았듯이] 하버마스는 “자리하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제까지 철학은 여타 학문들이 [자기 영역에서 발견한 사실을]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학문들이 다양한 인간 문화의 영역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최종적 판단을 내려주는 역할을 맡아왔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그러한 허세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이 “합리성의 수호자”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포기하여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체와 이른바 이성적 중핵의 불확정성에 대한 영미 분석적 인식론, 언어철학, 논리학 및 유럽 대륙의 ‘포스트모던’ 이론들의 궤적과는 다르게,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인간이 시도해왔던 모험의 중심에는 이성이 있어야 한다는 고대 철학의 주장을 유보 없이 받아들인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방어하려던 이성이라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역량이자 재능이다. 우리는 이성이 인간사를 의식적으로 규제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강제적 규범이나 주장들의 원천으로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또한 이성은 토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즉 인간 이성 및 보편적 주장의 원천으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자연적 혹은 사회적 진화의 우연한 과정 속에서 얻은 자연적 결과물로 여겨질 수 없다. 이성이 사회적 개인적 규범들의 정당화 요구에 관한 인식가능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저 성공 전략이나 타산에나 관련된 합리적 계산 능력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궁극적으로 이성은 규범적인 것이다.

이성의 복권과 관련된 이 두 번째 주장은 [철학은 자리하는 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는] 첫 번째 주장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주장은 철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내 인접 학문과 협력적 상호작용에 나서는 탈신화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적 철학의 기획에서 발견되는 독특성은 이 둘[이성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이성이 인간적 사유와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입장] 간의 조화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기존 특성과 자율성에서 연유하는 역할과 방법을 가치 절하할 것을 요구하는 [겸손한] 입장은 이성의 중심적 위치를 복권하려는 입장과 조화될 수 있다. 만일 하버마스의 작업이 ‘주체 철학’ 및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에서라면 말이다. ‘주체 철학’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이성을 자율적 주체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입장을 거부하고, 이성이란 단지 상호주관적 상호작용과정에서 도출되는 특성일 뿐이라는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철학적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본래적 토론장은 자기 성찰적 정신이 수행하는 내적 삶이라고 여겼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있어서 상호작용은 사회 속에서 주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언어를 매개로 한 것인데, 이런 상호작용은 주체들의 [내적] 자기 관계 과정 속에서 도출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에 따라서 패턴화한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상호작용, 즉 상호인격적 의사소통을 하면서 근거들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끌어진다는 것을 요점으로 삼는다. 이런 류의 협동적 의사소통이 성공하려면 관련 담론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합의를 지향해야만 한다. 만일 담론 참여자들이 합당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이 담론 절차에 관련된 모든 참여자들은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평등, 호혜성, 솔직함 혹은 비기만성 그리고 공정성의 규칙을 채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는 정당화가 가능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조건들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의 그리고 법적 공정성과 같은 ‘실생활에서 유통되는(downstream)’ 규범적 주장들을 위한 토대로 기능한다.

하버마스의 저 유명한 ‘담론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규범은 때로는 올바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는 행위 계획인데, 이 규범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된 조건들에 의해 조성된 담론 절차 속에서 합의해 낼 수 있을 때에만 정당화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론원칙은 합당성(reasonableness)이 정당성(rightness)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담론원칙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직관을 철학적 용어로 정련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고 기꺼이 하기도 하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어떤 행위 요구지만 잘 실행되지는 않는 요구이기도 하다. 즉 굳이 전문적 자질이 없어도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올바른 사회에서라면 그들의 정치 체계 내에 될 수 있는 한 정말로 많이 제도화하도록 권고하는 그런 요구인 것이다. 지배는 결국에 가서는 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을 좌절시킨다. 그것이 사람들이 서로 강요하는 바 없이 협력 행위를 하도록 하는 기본적 자유를 부정하는 정치 체제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든,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자원들을 말라붙게 하여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훨씬 음흉한 형태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거대한 연구주제는 이성과 민주주의의 내적 연관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계몽 기획에 이바지하려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는 그저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를 지닌 수많은 그럴싸한 경쟁적 정치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우연에 의해 잠깐 ‘현재 선호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대안들과 비교해 볼 때 합당한 것이라 할 만 하다. 하버마스는 민주적 삶의 합당성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헌신하였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그는 이러한 입장을 모든 적대자들에 맞서 방어해왔다. 이 적대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은 아마도 ‘포스트 모던’ 이론가들로서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들이 이성을 통해 민주적 삶을 강건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방어하리라는 약조를 포기해 버렸다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PDM).

이성을 이렇게 의사소통적이면서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으로 회복시키는 입장은 기존 철학이 지니고 있었던 야망을 위해 입증의 토대를 세우는 것을 열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오늘날의 철학과 사유에 영향을 끼친 하버마스의 핵심 요소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상호주관적 이성의 본성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 시대에서는 지지하기 어려운 전체론(holism)을 재생하려는 실질적이고 배타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교활한 노력과, 합리성 담론을 전적으로 단념하는 풍조(이러한 풍조는 현대적 삶의 형식으로서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를 정당화하는 손쉬운 냉소주의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항해해 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탈형이상학적 사유

이것[탈형이상학적 사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 영향에 있어서 세 번째 및 마지막 측면으로 소개될만한 것이다. 수십년 간 하버마스는 자기의 철학적 기획을 ‘탈형이상학적(PMT)’이라고 일관되게 규정해왔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하버마스의 모든 사유에 있어서 중심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결여되어 있다. 이 용어는 특별한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저술하는 방법을 위한 넓은 차원의 정신 혹은 전제(postulate)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우선 칸트적 주장을 수반한다. 즉 영혼불멸,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존재, 도덕적 의지의 자유의 사실 등의 철학적 형이상학의 전통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며 그러한 문제들은 인간의 끊임없는 관심사임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탐구는 우리 인간이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이 무엇인지 인식하고자 하는 관심은 결국에는 인간의 인식 가능성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특정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는 탈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하버마스의 관점은 변화한 근대세계 안에서의 변화한 철학적 역할과 관련된다. 롤스의 ‘비이상주의적 non-ideal’ 정치이론 작업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게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의 현실이 복잡성, 다원주의 그리고 다양성을 향해 극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게끔 전개되고 있다고 논평한다. 이러한 전개양상은 철학이 정당하게 해명하고자 할 수 있는 문제 설정에 있어서 강력한 제한을 두게끔 한다. 롤스가 근대 민주사회에서는 전체론적 가치 합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가치다원주의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듯이, 하버마스 역시 근대성에 대한 ‘탈중심화된’ 자기 이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근대사회는 삶과 가치와 좋음의 이상과 연관된 기본적 지향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다원주의의 조건과 좋은 삶에 대한 관념에 대한 갈등 아래서, 근대적 생활형식의 합리성은 오직 갈등을 규제하고 사회적 연대를 산출해내는 합당한 절차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합당한 절차들은 민주적 자기지배의 실천과 근대 민주 시민들이 지닌 관용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의사소통 합리성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근대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근대사회적 실존의 합리성을 인식하고 다듬으며, 혹시 가능하다면, 증진시키기는 일을 다시 맡아 보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식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를 획득하려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이 임무는 비록 기존의 것에 비해 훨씬 보잘 것 없지만 여전히 중대한 임무다.

 

공적 지식인이자 조언자

하버마스가 2차대전 이후 끼친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논의는 철학 이외의 다른 두 영역에 대한 언급 없이는 끝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하버마스는 철학자로서 이론화했던 ‘정치적 공영역’에 공적 지식인으로 관여하면서 괄목할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독일이나 세계 독자들을 대상으로 국제적 사안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열렸던 회담이나 토론에 하버마스가 참가하지 않은 적은 거의 드물었다.

하버마스가 참여했던 논쟁이 몇 개나 되고 어느 범위까지였는지 세세히 밝히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몇몇 부분을 부각시켜보기만 해도 그 영향력은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1950년대 하버마스는 새로운 독일연방공화국이 민주적 지배의 요구를 그저 관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해 갖춰야할 정치문화의 이행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 목소리를 냈다. 교육과정 개혁 문제부터 서독의 국제 협약, 모든 국내 정치적 사안, 전후 배상 및 기념 사업에 관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하버마스는 일관되게 열린 사회를 요구해 왔다. 냉전이 종식될 때 하버마스는 독일 통일이 자기 반성적인 토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소리 높였고, 통일 이후로는 유럽 연합 내 독일의 역할과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과 확장의 중요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논평자로 활약해왔다(DW). 근래에 하버마스는 유전자 기술의 도덕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논쟁과 서유럽의 ‘세속적’ 사회 내 공적 삶에 있어서 종교 및 종교적 가치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여러 개입 과정을 통틀어 보자면, 하버마스의 작업은 공적 철학자이자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통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탈형이상학적인 민주적 세계에서는 좋은 근거들만이 유일하게 궁극적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지난 반세기 동안 하버마스는 활동적 철학자로 활약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분포된 후배 학자들의 지적 성장을 촉진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의 이전 제자들은 독일에서는 악셀 호네트, 하우케 브룬트호르스트, 라이너 포르스트, 그리고 미국에서는 토마스 매카시, 세일러 벤하비브, 낸시 프레이저와 같은 이들인데, 사실 이들이 비판이론 ‘3세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만한 것이다.

 

5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5회

한길석(한철연 회원)

 

철학 및 철학의 역할에 대한 재개념화

1980년대 초 “자리하고 있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하버마스는 철학이, 특히 칸트와 헤겔에서 정점을 이룬 독일 철학 전통에서 너무나 익숙한 학구적 철학의 역할, 즉 자연 과학이 알 수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적법하게 결정하고 보다 넓은 문화적 학습의 지붕 아래서 어떻게 학문적 지식들이 적법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판정하는 재판관의 권위를 휘두르는 스타일은 더 이상 그럴싸한 것으로 주장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MCCA: 1~21).

하버마스는 근대라는 조건에서는 철학은 좀 더 겸손해져야 하지만 여전히 중대한 포부, 즉 재구성적 사회과학을 위해 “자리를 메워 주는” 포부를 지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철학이 강한 보편주의적 주장을 지닌 인간 행위에 관한 경험적 이론들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공개적 장소를 열어 유지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구 계몽주의의 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오늘날의 현안에 있어 겸손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실현 가능한 판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 능력에 관한 이론 같은 것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성의 주권적 힘을 칸트와 헤겔이 그러하듯 권위적으로 간단히 억측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성에 대한 강한 경험적 근거들을 이미 제공하고 있는 인간의 기본적 능력들, 즉 우리가 자신과 타인들을 책임 능력이 있는 주체들로 간주할 경우 다른 대안적 능력들에는 결핍되어 있는 기본적 능력들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들의 주요 후보자들은 분명히 언어와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와 의사소통을 탐구하는 재구성적 과학들이 자기 이론에 함축된 보편주의적 주장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고 널리 전파할 수 있도록 철학이 보조하고 도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도우미로서의 역할을 충족하고자 하는 철학은 여타 학문들에게 허가장을 발부하고, 이론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합리성에 대한 고유한 주장을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제기하는 법(결국 그것이 [경험적 자기 학문 영역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게 하는] 보편적 역량들인 것이므로)을 학습시키는 자기 이해자로서의 역할을 그만둬야만 할 것이다.

 

비판이론의 유산과 변형

이와 같은 입장은 하버마스로 하여금 철학의 자기이해에 대해 두 번째로 수정하게끔 하였다. 즉 철학은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문화적 이해 전체와 적절한 관계를 맺도록 방법을 일러주는 주권자적 판관으로서 자임할 것이 아니라, 재구성적 과학들의 전문화되고 기술적인 언어를 시민들이 매일 수행하는 생활 세계의 “통상적” 담론으로 번역하여 그런 지식들로부터 얻은 통찰을 시민들이 의사소통하게 하는 번역자로서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이 과학적 진보에 함의된 규범적이고도 정치적인 함축을 발견하는 것은 민주적 공영역에서 논쟁을 벌임으로써 가능하다.

“자리 지키는 자 및 해석자로서의 철학”의 논의에서 함축된 바는 철학이 간직해야 할 분과 학문적 핵심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등의 병존 분야들과 지속적 대화의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의 목표는 사회이론과의 지속적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일찍이 1950년대부터 하버마스의 고유한 지적 궤적을 안내하고 있는 입장이다.1

유연하고 세심하며 자기 제한적인 철학에 관한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하버마스에게서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철학 학위를 받은 후 수년간 언론인 생활을 하던 청년 하버마스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에서 둥지를 튼(비록 편안한 둥지는 아니었지만)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저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사회이론은 하버마스의 사회적 의식이 명확하면서 학제적 특성을 지닌 철학이라는 입장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세워진 사회조사 연구소는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법학자, 정신의학 및 문학도들이 현대적 사회 병리 현상의 구저와 원천을 넓은 범위에서 연구하기 위해 협력 작업을 했던 곳이었다. 1930년대에 이 연구소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감독 아래 불의, 지배 그리고 억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경험적 사회 연구와 철학적 분석을 통합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연구소가 마르크스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구성원 중 공공연한 마르크스주의자는 극소수였다. 호르크하이머는 자유민주주의를 전체주의로 눈에 띄지 않게 이행시킴으로써 자본주의사회를 생존하게 하는 환상과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비판이론을 발전시킬 것을 서약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통합시키는 추진력을 보여주면서,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허버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프리드리히 폴락과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원들은 사회 병리 현상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논평하기 위한 독창적인 방법을 만들어냈다. 즉, 한 편으로는 조작되고 억압된 시민 대중이 자기들의 독립성과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지배에 굴종하도록 만드는 신경증, 정서 및 인지 장애를 개별 주체의 차원에서 연구하면서, 다른 한 편 국가 주도적 시장과 대중의 충성을 강력하게 혼합하여 일당 지배 아래에 둠으로써 약화되던 입헌 민주주의에 대해 제도적 수준에서 연구하였다. 그들은 독일과 미합중국에 존재하는 “권위주의적 인격”을 분석하고 논평하였다. 이것은 반유대주의의 정치적 세력화를 가능하게 한 심리적이면서 사회적인 조건들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이자, 표면상으로 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에 헌신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이 모두를 부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공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은 계몽주의적 근대성 속에 내재된 규범적 원천에 경보를 발령하는 일이 거듭되면서 점차 계몽주의적 근대성 기획 전체를 회의하게 되었다. 연구소 구성원들은 1930년대에 이미, 그리고 나치즘의 성공과 세계대전이 코앞에 닥친 게 명확해지던 이후부터 특히 점점 더 암울한 전망의 글을 쓰게 되었다. 전쟁기 저술된 고전적 연구서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유럽 계몽주의 전통을 인간 이성의 보편적 형식을 바탕으로 한 정의와 평등의 정치적 요구에 대한 원천으로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다. 대신에 그들은 근대 역사의 시작 이래로, 아니 사실상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성”은 “신화”와 상호 얽힌 상태에서 전개되어왔다고 논평하였다. 자연[혹은 본성]의 힘에 복종하던 주체성을 해방시키도록 독촉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합리성을 계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성은 자연 지배를 통해 인간에게서 자연을 분리시킨 자연에 저항하는 힘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적 환경 및 인간이 지닌 자연적 충동, 욕구 그리고 갈망으로서의 “내적 본성”으로서의 자연을 길들이고 통제하도록 하던 경향성이 점점 더 가혹하고 교묘한 지배 및 통제의 형태로 갱신을 거듭했다는 것이다(Horkheimer & Adorno 2002).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연구소를 재건하던 1950년대에 이 연구소의 작업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연구소와 그 구성원들은 사회적 지배의 사회심리학적 차원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계속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불안정한 정치문화 속에서 진보적 역할을 지속하고 있기는 했지만, 철학에 있어서 그들은 종래에 지녔던 급진 정치적 포부를 포기하였다. 철학은 예전의 보수적인 기능, 즉 진리와 미의 전통적 가치들에 해를 끼치는 근대적 사회 현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수호하는 역할로 회귀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 이후에 있어서는 호르크하이머 자신, 나아가 아도르노조차도 그러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2세대”로 표상되곤 한다. 사회조사연구소의 주요 구성원들의 작업들이 하버마스의 철학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2년 간 아도르노의 조수로서 일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비판이론이 그에게 의심할 수 없는 중요한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 이론의 영향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비판이론이 하버마스의 독창적 이론의 성숙에 있어서 긍정적 영향 못지않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사상이 하버마스에게 이바지한 바는 미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54년 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주제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 쉘링의 역사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연구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을 마치기도 전에 하버마스는 독일철학이 (나치) 시대에 대한 철저한 진단은 고사하고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자 독일철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급진 철학의 전통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그의 대학 시절에는 전수받지 못했던 전통이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구자들과 당대인들의 핵심 저작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는 물론이고 죄르지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발터 벤야민 그리고 프랑스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장-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저작들이었다.

1956년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해 아도르노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교수자격논문”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교수자격논문은 독일에서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이후에 저술해야 하는 단행본 분량의 논문을 일컫는다. 프랑크푸르트에 머물 무렵, 하버마스와 막스 호르크하이머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호르크하이머는 사실 하버마스를 연구소에서 일하도록 초청한 아도르노의 처분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아도르노에게 쓴 편지에서 젊은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너무 급진적이어서 연구소의 구성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의 지도교수가 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은 2년 동안 충돌하였고, 결국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마르쿠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볼프강 아벤트로트의 지도 아래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하였다. 아벤트로트는 1950년대 중반 서독의 보수적이자 반공주의 분위기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교수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극소수 학자 중 하나였다.

그의 개인적 어려움과는 별개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하버마스의 학문적 관계 역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계몽의 변증법』이 출판되고 나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결국 철학과 경험적 사회학이 상호 보강 및 이의를 제기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회비판이론의 원래 기획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철학 분야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두 사람은 1968년 독일 대학과 도시들을 휩쓸었던 급진적 학생 운동의 목표와 전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2 하버마스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인간 합리성의 해방적 차원을 거부하는 지구적 흐름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그의 입장은 지성 및 정치적 계몽에 대한 칸트주의에서 발견되는 규범적 요구에 핵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의 회의적 저술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지적 상속자이자 계속적인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하버마스가 아벤트로트의 지도 아래 생산해 낸 테제는 비판이론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으며 표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 [1989]) 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테제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하버마스를 서독에서 가장 유망한 철학자이자 지식인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 책은 그 논지나 방법에 있어서 이성, 자유 그리고 위엄 사이의 내적 연관에 대한 계몽주의의 핵심적 주장—비록 이러한 주장 속에 내재한 철학적 과시물들은 옹호될 수 없는 것이지만—을 보존할 수 있는 사회이론 및 정치 이론을 생산하고자 한 하버마스의 포부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하버마스는 살롱, 커피하우스, 클럽, 신문과 같은 18세기 유럽에서 정치적 토론을 벌이던 비공식적 장소의 전개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는 제도화된 정치 체계 바깥에 있던 그러한 비공식적 회합장소들에서 시민들이 생활 속 쟁점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쟁점들에 대해 토론하여 정치적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민주적 접근 경로를 통해 정치적 여론을 정치 체계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이런 정치적 여론의 “풀뿌리”적 원천들은 하버마스가 나중에 의사소통 합리성의 핵심 요소로서 분석한 공개적 담론이라는 절차적 원칙들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다. 공영역에 참여한 화자와 청자들은 담론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했으며, 담론 참여자들의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그런 담론 과정을 통해 이룩한] 식견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합의에 이르고자 했다. 그들은 공정한 이해 지향적 관행을 그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보다도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성과 민주주의의 강력한 개념적 상호독립성을 드러내었다는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합리적이고도 민주적으로 담론을 운영하였다. 절차적으로 온당하게 정치적 공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정한 기술, 식견 그리고 행동을 요구하였다. 민주적 참여는 근거들을 주고받는 담론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거친 합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유럽의 정치적 공영역은 하버마스의 이후 저작이 역사적이기보다는 이론적으로 탐구했던 현상들이었다. 정치적 공영역은 공유된 참여 경험과 태도들이 존재하던 일상적 생활세계와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근대 통치 제도 사이를 비집고 열려진 근대적 참여정치의 공간이다. 이 좁고도 깨지기 쉬운 공간은 시민으로서의 주체들이 이해관계의 공유라는 문제에 대해 논하는 비공식적 담론들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합리적 행위 능력을 단련하는 경연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제목이 함축하듯이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초기 민주적 의사소통의 규범적 토대를 분석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공영역의 쇠퇴에 대해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공영역은 19세기와 20세기 무렵 복잡한 관료행정과 고도로 조직된 국가 기구들이 흥기함에 따라 위태롭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국가 권력과 거대 시장 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적 복잡성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정 매체”가 되었고, 그것들은 발전된 국민국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조정 문제들에 대해 점차 세련되고 효율적인 대응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국가 관료행정과 시장 경제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즉 국가와 시장 사이의 협소한 공적 공간을 폐쇄하게 만들어 능동적 시민들을 관료행정의 수동적 고객이나 시장경제의 고객으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다.3

하버마스의 초기 저작은 전쟁 기간 동안 저술되었던 비판 이론 “1세대”의 저작들에 퍼져있던 사회 병리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근대 민주 사회의 위기 경향과 구조적 결함이 합리성 자체에 내재한다는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효율적 관료 행정 권력을 실현한 계산적 통제의 합리성 유형과 동등한 시민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던 의사소통적 조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던 근거를 주고받는 능력의 합리성 유형이 확연히 다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의 사명이란 이러한 합리성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민주적 생활 형식의 원천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하버마스로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제공한 근대성 진단과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위에서 논했던 철학과 재구성적, 경험적 사회과학의 협업을 위해 설정한 방향이었다.

이후 이어진 수십 년간의 저술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과 여타 재구성적 과학들로 선회하였다. 이는 근대 사회의 병리현상들과 합리성을 탐구하고 합리성의 갱신을 위해 그것에 내재한 잠재성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위한 주된 도구였다. 1960년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술인 『인식과 관심』(1968 [1974])에서 하버마스는 철학적 인간학, 역사기록학(historiography) 그리고 심지어 정신분석이론을 포괄하는 수많은 기타 재구성적 과학들로 선회하였다. 이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실현 조건으로 작동하는 “인간학적으로 깊게 자리한” 관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또한 그러한 관심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타당성 조건에 기초하여 인식될 수 있고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관심들은 인류의 자연사적 역사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인류에 구현된 다양한 제도들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인식 구성적 관심들은, 화용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인간 인식 활동에 연관된 초월적 토대였다.

하버마스는 그러한 관심들이 세 가지로 식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외적 자연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기술적 관심, 상호주관적 이해에 내재한 실천적 관심, 다양한 지배, 강제 및 통제 형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해방적 관심이 그것이다. 기술적 관심은 과학과 기술공학이 복합되면서 그것의 자체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전문지식, 진리, 성공, 진보로 간주되던 것을 통해 근대에서 꽃피웠다. 실용적 관심은 19세기 정신과학 혹은 인문학으로 통합되었던 일련의 해석학적 분과학문들을 발생시켰다. 이런 학문들은 역사기록학, 문예비평, 문화 연구 같은 것으로서, 연구 대상을 제어하거나 예견할 수 없고 연구 참여자들 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해방적 관심을 설정한 것은 하버마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공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세 번째 관심, 즉 개방적으로 규범적이며 정치적인 관심을 인식한다는 임무는 기술적인 만큼이나 야심만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도 하버마스가 한 작업은 불필요한 지배 유형을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한 지배 유형을 폭로하고 극복하려는 임무에 헌신하면서 여타 지식들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영감을 받은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이 분명한 문제점—(잠재적으로 한 없이 계속되는) 심리치료의 성과가 어떻게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가와 분석 대상자 간의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가 어떻게 해방의 범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볼 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1. 하버마스의 탈초월화된(detranscendentalized) 이성과 탈형이상학적(postmetaphysical) 사유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에 대해서는 이 책의 2장을 보라.

  2. 당시 하버마스가 학생 운동에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7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3. 이후 하버마스는 이러한 현상들을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용어로 이론화하였다. 이 책의 4장을 보라.

4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4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장 역사적인 그리고 지성적인 맥락

 

맥스 펜스키(Max Pensky)

하버마스의 역사적이고도 지적인 영향들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철학자의 작업에 대한 위의 수정된 관점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반세기를 거쳐 온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위에서 내가 논한 두 번째 유형, 즉 현실 참여적 범형의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맥락 초월적 진리 혹은 주장과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그러한 주장과 규범들이 제공되고 수용되는 사회적 세계의 맥락 내재성 간의 변증법적 관계는 사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버마스가 의식적으로 모으고 개조했던 수많은 다양한 지적 영향과 원천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가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그는 현대에 요구되는 철학함의 적절한 역할과 범위는 철학자가 속한 시대, 지적 분야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포괄적인(overarching) 전망-누군가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전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몇몇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하버마스가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다양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는 점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 점은 그가 저술한 철학적 저작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저작에서 활용하는 자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어떤이들은 그가 동원하는 자료들과 영향력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자가 속한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철학자의 중심적 업무-철학적 활동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로 삼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적 의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광범위한 작용력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전기는 독일이 0년(“Stunde null”)에 머무르던 시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1945년 종전 후 독일 문화와 사회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폐허의 상태에 있게 된 때였다. 하버마스는 1929년 국가 사회주의의 “일상”이 뿌리내린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입회를 당하여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몇 달 간 잠시 방공포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던 16살 때 하버마스는 홀로코스트의 본성과 규모 그리고 그가 따르던 나치 지도 체제의 도덕적 타락을 폭로한 뉘른베르크 재판 라디오 방송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1929년이라는 출생년도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전후 독일 문화와 정치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세대의 구성원이 되게끔 하였다. 한 편으로, 하버마스와 동세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기억을 갖거나 국가 사회주의 체제가 초래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만큼의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독일 사회의 끔찍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붕괴에 대한, 총력전이라는 최후 단계에 참여했던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산산조각 난 사회를 재건하는 거대 과업을 직접 보았던 노골적이고도 개인적인 경험들을 겪을 만큼의 충분한 나이는 먹고 있었다.

이 세대에게 독일의 정치적 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미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독일은 파시즘의 폐허에서 벗어나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민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돌무더기 속에서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독일 문화의 핵심 요소들 -정치적이고도 도덕적인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 무엇보다도 칸트와 괴테, 쉴러와 바흐와 같은 계몽의 전통 –을 골라 내 새로운 사회 질서의 기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사회 재건과 재발명이라는 거대 과업을 스스로의 도전적 과제로 자기 의식적으로 인식했던 세대는 현대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은 철학적 활동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으며, 자기네 철학 전통을 집단 정체성과 자기 이해의 주요 원천으로 받아들이던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들이 자기네 철학 유산의 집단적 재정향을 사회적 재탄생의 과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0년대 초 마르틴 하이데거에 깊은 감화를 받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던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의 고유한 유산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그려보는 세대적 과업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신에 그가 당시에 대해 매섭게 기록했듯이 전후 독일 학계의 뿌리 깊은 보수주의는 머리를 모래에 처박은 채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문화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 문화는 독일이 자행했던 직전의 과거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기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침묵시키려 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와 제휴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하버마스를 가르쳤던 몇몇 교수들을 비롯해 저명한 교수들은 과거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폭로하지도 않았다.

독일적 재난에 응하면서 철학은 변화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전후 독일의 현실에서 철학은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그리고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고려대상에서 간단히 제외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실망과 좌절을 느낀 이는 하버마스가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철학은 칸트와 헤겔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 철학의 전통은 보수학계만으로 이루어진 협량한 전통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내적 비판을 가하는 전통도 포함한다. 게다가 계몽의 유산은 철학적 통찰과 내가 앞에서 논했던 진보적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 사이의 변증법 속에 핵심을 두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물음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1996: 11~22)라는 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공적 논증, 탐구 그리고 관용 개념-칸트 철학은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인지 능력이라고 보았다-이 사회 일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하버마스 및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철학적 동료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18세기의 지적 정치적 계몽의 전통이 유례없는 손상을 당한 사회의 요구에 어떻게 적절히 봉사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세속주의, 합리성, 관용, 대의적 공화정, 보편적이고도 평등한 도덕 및 법적 권리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포용력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헌신하던 계몽주의가 어떻게 당대의 요구와 공명하면서 재전유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무척 복잡하기는 하지만 다음의 세 가지 연관된 주장들로 알맞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가치를 만회하고 전후 세계에 적합하게 촉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기존 철학이 담당하던 역할, 즉 선험적이고도 토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특화되어 학문적 받침돌의 역할을 하던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그만두고, 좀 더 겸손하게, 그렇지만 좀 더 사회적으로 중대한, 세속적이고 “탈형이상학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의 가치와 도전들에 특히 잘 들어맞는 역할을 담당하라고 주문한다. 둘째,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철학, 무엇보다도 독일 대학에서 발전해 왔던 편협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멀리하던 새로운 인접 학문들과 생산적이고도 호혜적인 대화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이미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를 위한 주요 후보를 지목하고 있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적 사회학을 구성하고 있는 분야들이 그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것을 “재구성적” 과학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재구성적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추정될만한 주장을 담지한 인간 상호작용의 측면들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셋째, 하버마스는 전후 독일(혹은 더 적절하기로는 유럽) 철학이 이와 병존하던 철학 전통들, 특히 철학과 민주주의 간의 생산적 관계를 가장 기본적 문제로 취급했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의 영향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유럽 철학이 너무도 철저히 다루어 고갈시켜 버린 이론적 모델들-즉 철학적 분석의 “기본 단위”로서의 고독하고도 자율적인 자아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자기자신 및 외적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식 철학적 모델-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안과 문제들을 보게 되었다.

이후부터 나는 우선 하버마스가 새롭고 겸손하며 상호작용적인 철학 모델에 어떻게 천착했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철학과 재구성적인 비판 사회 과학들 간의 열린 대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에 대해 좀 더 길게 논하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초기 하버마스가 전후 프랑크푸르트 비판 이론 학파의 그 대표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및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협력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주체 철학과 의식 철학 모두와 확실히 절연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버마스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개했던 언어적 능력 및 의사소통 합리성에 관한 이론적 작업으로 선회할 것이다.

 

3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주제의 개관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상에서 서술한 관심사와 강조점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의 이론 작업에서의 체계성과 일관성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떤 주제들은 하버마스의 저작을 통해 울려 퍼지게 되었고 연이어 이 책을 통해서도 되풀이해 이야기되고 있다. 그가 공들여 발전시킨 많은 주제들은 결국 첫 번째 주요 저작인 『공영역의 구조변동』에 이미 담겨있던 것이다. 이 주제들 중 으뜸가는 것은 공영역이라는 관심사다. 이 주제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자기 사상의 주요 특징인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강조하도록 몰고 갔다.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자인 것은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규범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근거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준수하는 규범은 규범적 구속력을 지닌다. 하지만 [규범적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규범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에 관한] 그러한 논의가 발생할 수 있는 건강한 공영역은 다른 사회 구조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이미 제시된 것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인간적 행위의 본성은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며, 그러한 행위를 만들어 내어 참여하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들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버마스의 사상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이지만 이후의 저작에 대한 비평에서 자주 간과되거나 망각되는 사항이다. 구조변동이라는 개념은 『의사소통행위론』에서 다루는 근대성 및 합리화에 대한 하버마스적 이해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구화-하버마스는 이것을 근대화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에 대한 그의 최근 저작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하버마스의 중심 주제는 칸트적 프래그머티즘이다. 그의 기획은 칸트, 다윈 그리고 마르크스의 화해로 묘사될 수 있다(TJ: 9를 참고할 것). 그의 담론 윤리학, 범세계주의 그리고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은 몹시 분명하게도 철저히 칸트적이다. 그는 진리나 도덕성에 관한 상대주의적 입장에 굴복하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에도 무릎 꿇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규범적 기획(enterprise)이다. 결국 비판이론의 이상은 시대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이 눈에 잡히도록 진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근대성에 관한 규범적 자기 이해의 탈근대적 ‘극복’”(PNC: 130)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강한”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자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진리와 정당화』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 명확히 설명하고 있듯이 “부드러운” 혹은 “약한” 자연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무릇 보편주의적이고 규범적인 이성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맥락초월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주장들을 내세워야 하며, 그러한 주장들이 합의를 지향하는 가운데 [보편규범적] 이성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같은 이유로 그의 칸트주의는 고전 프래그머티즘에 영향을 받으면서 “탈초월화(detranscendentalized)”되었다. 예를 들어 조화로운 세계에 관한 칸트의 “범세계주의적 이상”은 객관 세계에 관한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실천이성의 자명한 전제로서의 “자유의 이념”은 책임 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합리성이라는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관념의 역량”으로서의 이성은 언어적으로 구체화되고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담론적 이성으로 대체되었다(TJ: 87).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퍼스를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리의 관습(practices)이 진화하며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진화의 역사-생물학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진화 모두의 의미에서의-를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버마스의 원숙한 개념 틀의 토대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모여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대부분의 글들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그 이후의 저작을 다루고 있다. 1장에서 맥스 펜스키(Max Pensky)는 하버마스의 저작을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연관된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하버마스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지적 생애를 제공하고 있다. 2장~5장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면서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기본 개념들에 관한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2장에서 멜리사 예이츠(Melissa Yates)는 하버마스의 형이상학 비판과 사회과학에 대한 평가를 설명하면서 하버마스의 “부드러운” 자연주의와 약한 혹은 “유사” 초월주의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과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용어에 내포된 것에 관한 방법론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가 해명한 것처럼, 형식 화용론은 탈초월화 된 이성 개념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나는 3장에서 이에 관해 다룬다. 3장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자들의 상호행위 과정 속에서 가능해야만 하는 필요조건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버마스의 표식인 의사소통 행위 개념은 상호 이해 지향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의 언어적으로 매개된 상호행위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 타당성 및 상호주체성이라는 개념들은 그것의 설명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하버마스는 서로 다른 이들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발언들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말할 때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제기한 주장들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근거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합리성은 이렇게 언어적 의사소통 속에서 구체화 된다. 3장에서는 또한 하버마스의 사유가 “대륙의” 해석학적 언어철학과 영미권에서 이론화된 “분석적” 언어철학의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의사소통행위와 전략적 행위 간의 구분은 3장에서 소개되고 있으며, 4장에서 다시 조 히스(Joe Heath)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다. 물론 의사소통행위는 행위 조정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생활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략적 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체계적 구조들에 의해서도 조직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측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을 끌어와 베버와 뒤르켐의 고전적 사회이론들을 알맞게 수정한다. 히스는 하버마스적 기능주의에 존재하는 장점과 한계에 대해 개략적으로 다루면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을 설명한다. 기능주의적 사회이론들에 대한 반대 견해는 이 이론들이 행위자 및 개인적 자율성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너른 지지를 받고 있다. 하버마스적 2단계 사회 모델의 목표 중 하나는 사실 기능적으로 조직된 사회 구조들이라는 배경에 맞서 어떻게 하면 자율적 행위자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엘 앤더슨(Joel Anderson)은 5장에서 자율성, 정체성 그리고 자아에 관한 상호주관적 개념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책임능력을 지닌 행위자와 진정성을 지닌 자아정체성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적, 개인적 자율성 역시 구분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주체들인 우리는 사회문화적, 역사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자율성은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라면서 만들어지고 성숙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성숙한 주체들은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것인데, 그러한 주체가 되는 것은 담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3장에서는 의사소통행위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해 매우 기본적인 개관을 제공한다. 다양한 담론 유형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 조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다음 장에서는 하버마스의 도덕담론, 민주주의 담론, 법담론에 대해 다룬다. 이 세 가지 담론들은 “[논의되고 있는 규범에 의해] 영향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들의 참여자로서 동의할 수 있을 규범만이 타당한 규범”이라고 명문화 된 “담론 원칙”(BFN: 107; 이 책의 6장 p. 120를 볼 것)을 적용한 것이거나,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용”(BFN: 103)한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하버마스는 초월적 진리나 도덕성과 같은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옳거나(right) 정치적으로 온당하거나(correct) 법적으로 정당한(legitimate) 것은 담론적으로, 말하자면 합리적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윌리엄 레그(William Rehg)는 6장에서 하버마스의 도덕이론인 “담론 윤리학”에 대해 설명한다. 하버마스는 도덕적 주장들은 보편적이면서 상호주관적인 타당성을 담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도덕적 정당화를 수행하는 칸트적 절차주의 모델을 옹호한다. 규범이나 도덕적 규칙은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규범들의 타당성에 관한 담론 [과정]은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관계와 가치들을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고려함으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레그는 도덕성과 인륜성이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인륜성을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개념과 관계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실 우리는 좋은 삶과 행복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이 보장되기를 기대하고 [이러한 관점들 간의] 합당한 불일치를 관용한다. 또한 동시에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는 보편적 합의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7장에서는 케빈 올슨(Kevin Olson)이 동일한 절차주의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론의 개요를 설명한다. 보편화 원칙에 의해 규제되는 도덕성과 달리, 정치는 정당한 입법 원칙을 세우는 데에 봉사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규제된다(혹은 규제되어야 한다). 도덕담론은 규범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모든 인격들(persons)의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정치담론은 법의 정당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시민들이 “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공동체에 관해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원칙은 “[정치적] 자기 결정의 실천에 연관된 수행적 의미”(BFN: 110)를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다. 올슨은 모든 시민들의 동등한 정치적 참여를 보장해주는 권리들[혹은 법]의 체계를 통해 어떻게 합리적이고도 정치적인 의지 형성이 제도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장에 소개되었던 정치적 자율성 개념과 평등, 호혜성 그리고 포용의 이상이 어떻게 권리로 제도화되는지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도출되며, 결국 그것은 공적 담론을 통해 발생한다. 그리하여 올슨은 공영역에 관한 논의로 자기가 맡은 장을 마무리 짓는다.

의사소통행위의 주체들은 도덕담론에서의 [도덕적] 인격들이나 정치담론에서의 시민들이 하는 상호작용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있는 주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정당한 민주적 절차들의 제도화를 요구한다면 정치담론은 법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법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8장에서 크리스 저언(Chris Zurn)은 사회학, 철학 그리고 법적 판결에 연관된 관점들을 가지고 조직된 하버마스의 법 담론이론을 제시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을 체계와 생활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전송 벨트(transmission belt)”로 생각한다. 이 전송 벨트는 (유대, 화폐, 권력[의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사소통적 형식과 기능적 형식을 연결한다. 법은 잠재적 해방 메커니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규범들과 사회적 가치들(societal values)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은 전문화된 경제용어와 행정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 실증주의와 자연법 이론 간의 구분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법과 도덕이 독립적인 동시에 모두 동등하게 근원적인(equiprimordial) 담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판결[문제에 대한 하버마스의] 담론 이론은 법 적용 논리에 관해서 그리고 판사들과 법학자들이 법적 공영역에서 특정 판결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법 자체에 적용되는 법의 정당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세 글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이 당대의 사회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개입하던 하버마스의 활동 속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다른 저자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설명하고 있다. 키스 해이섬(Keith Haysome)은 9장에서 공영역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버마스의 시민사회 개념,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분석 그리고 196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던 사회운동에 대한 하버마스의 논법을 고찰하면서 그가 사회적 병리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리는지에 대한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해이섬은 하버마스가 그의 후기 저작에서 공영역과 시민사회 [개념]을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생각하던 부르주아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자발적 풀뿌리 시민조직의 형식 속에서 “재발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키어런 크로닌(Ciaran Cronin)은 10장에서 “후기국민국가적” 정치 질서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관한 하버마스의 고도로 복잡한 모델을 제시하면서 해이섬이 빠트린 부분을 여러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옹호하는 범세계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경제적 지구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라크전을 뒤이은 미국 주도의 군사개입 뿐만 아니라 발칸 전쟁에 관해 그가 수행했던 성찰의 결과물이다. 11장에서 에두아르도 멘디타(Eduardo Mendieta)는 하버마스의 최근 관심사, 즉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해이섬이 사회운동 [개념]을 활용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게, 멘디타는 하버마스적 사회 진화 개념을 고찰하면서 세속화 [개념]를 다루고 있다. 그는 하버마스가 근대화란 오랜 세월에 걸친 합리화의 형식이라고 했던 자신의 테제를 재고하면서 세속화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멘디타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하버마스의 사유를 추적한다. 하버마스는 종교가 초기에는 합리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다가 사회질서의 한 원천(이 기능은 이후 근대에서 법이 담당하게 된다)으로 기능하고, 이제는 철학이 대체할 수 없는 담론과 사회적 실천의 독립적 영역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결국 행위 동기 및 가치의 한 원천으로서 함께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럴 경우 철학이 사실 의존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마지막 단계에서 종교는 다시 매개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무리 장은 하버마스의 저작이 통합적 본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한 그의 저술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차기 거작을 기대하게 되는 일종의 가늠자가 되며 그것은 여심의 여지없이 영향력 있는 묵직한 저작이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2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2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1971~1982)

『인식과 관심』 이후 하버마스는 체계이론(루만), 발달 심리학(피아제, 콜버그), 사회 이론(베버, 뒤르켐, 파슨스, 미드 등)을 끌어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1971[1973]), 프린스턴대학에서 행한 가우스 강의록(『사회적 상호작용의 화용론에 대하여』라는 책에 수록(1984[2001]), 『의사소통과 사회진화』(1976[1979])에 실린 글들이 이 시기에 속한 결과물이다. 가우스 강의록은 하버마스 사상에 있어서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나타내는 저작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구상에 있어 적절한 개념틀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강의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이 “언어적 전회”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인간 행위와 상호이해가 언어적 구조에 의해 충실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이론의 토대를 다시 만들고자 했던 이러한 예비적 시도는 1976년에 발표된 중추적 논문인 「보편화용론이란 무엇인가?」(CES: 1~94; OPC: 21~103)라는 결실을 거두게 한다. 이 글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 이론의 토대를 다졌다.

이 시기에 가장 드높은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하버마스는 이 두 권짜리 책의 목적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이성이 인지도구적으로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이다. 나는 이 합리성 개념이 회의적 고찰을 너끈히 견딜 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둘째, 생활세계와 체계의 패러다임을 결합하는 2단계 사회 개념이다. 두 패러다임은 단순히 수사적 방식으로 결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병리 유형들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병리의 유형들을 의사소통적 구조를 갖는 삶의 영역들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자립화된 행위체계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가정 아래 설명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근대의 역설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삶의 연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 1』 20쪽)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도입된 이론적 모델의 핵심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대한 고찰] 그리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의 이항대립이 자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를 사회적 학습(societal learning)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학습은 사회 체계 안에 침전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 체계는 점점 복잡하게 분화되는 가운데 고유한 자체 논리를 획득하면서 개인이나 사회적 행위 집단의 통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화와 개인화 과정은 생활세계-훗설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을 하버마스는 형식화용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에서 이루어진다.

 

  1. 탈형이상학적 사유: 합리성, 도덕성 그리고 민주주의(1982~2000)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출판 이후, 하버마스는 합리성 및 근대성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그것의 개념적 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인다. 그는 탈근대주의, 회의주의, 역사화된 상대주의(historicizing relativism) 그리고 교조적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진리와 정당화(1999 [2003])』에서 그는 진리에 대한 기존 설명을 고치면서 “약한 자연주의”[적 입장](이후 내용을 참고할 것)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는 모든 종류의 인간 행위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윤리학과 사회 정치 철학으로 전환하면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를 이용해 담론윤리학적 형식의 도덕이론, 토의민주주의론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이론을 전개한다. 이 세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 그는 각 영역들의 담론 및 합리성 형식들과 연관된 규범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역들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갖춘 주체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구조들의 종류에 대한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저작은 『도덕의식과 의사소통행위(1983 [1990])』,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1987])』, 『탈형이상학적 사유(1988 [1992])』, 『담론윤리의 해명(1991 [1993]), 『이질성의 포용(1996 [1998]) 그리고 정치이론 및 법이론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1992 [1996])』이다.

 

  1. 후기세속주의적(postsecular) 사유와 후기국민국가적(postnational) 사유(2001~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버마스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철학적 인간학으로 다소 회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특히 담론 윤리학에 대한 토론은 동기화의 문제를 자주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합리적으로 행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하버마스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칸트적 인식 및 행위 주체관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의 저작에서 그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로 인한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줬다. 이러한 전개는 2001년 독일서적상협회평화상의 수락 연설인 “신앙과 지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1 [2003b])』에 수록된 <인류의 윤리적 자기이해에 관한 논쟁>이라는 긴 논문과 더불어 선보여졌다. 여기서 그는 인간복제와 착상 전에 이루어지는 유전자 검사에 반대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도덕성은 그러한 인격 속에 구현된 것이라는 어떤 윤리적 자기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버마스는 피험자의 동의 없이 생물학적인 조작이 이루어지면 그러한 일은 우리가-동시에 이 피험자가- 자율적 행위자라는 생각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행위자로 살아온 우리의 경험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개략적으로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생명윤리학적 논쟁에 이바지하면서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와 그가 “후기세속주의적”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지칭한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 썼다. 여기서 그는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계몽된 자기이해와 주요 세계종교에 대한 신학적 자기이해-이것은 과거에서 생성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서 작금의 현대에 튀어나온 것이다- 사이의 기이한 변증법”(하버마스 2010: 영문 번역본 16페이지. 번역은 수정)으로 묘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하버마스는 도덕성, 민주주의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 이론적 절차주의뿐만 아니라 탈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전념해 왔는데 이런 그의 입장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2005 [2008]』라는 책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에 대한 후기세속주의적 자기 이해로 여겼던 것과 정확히 수렴한다.

후기세속주의적 사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시도하고 종교 문제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담론 윤리학에 내재하고 있었던 쟁점들(위에서 언급했던 동기화의 문제 같은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 정치 상황에 대한 고찰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해 여타 유럽 지역에서는 늘어나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문제들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 팽창한 유럽연합은 조화로운 유럽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구적 타원에서 보면, 종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9. 11 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분명한 요인이었다. 1999년 코소보 사태에 대해 하버마스는 나토의 군사 개입과 폭격을 지지한 반면에, 2003년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이는 정당한 근거를 필요로 하였고 하버마스로 하여금 국제법과 그것의 규범적 강제력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지지 및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사회 민주주의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구적 정치 질서 안에서의 범세계적(cosmopolitan) 민주주의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최근 저작들에서 분명히 철학적 인간학으로 회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규범적 비판이론을 좀 더 명확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4-1.[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이상하(한철연 회원)

 부끄럽게도, 벤야민과 덴마를 읽으며 폐허와 낙원, 행복과 도피에 대해 과거에서 오는 희망을 노래하는 글을 쓰는 와중에도 현실의 나는 또다시 삶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한때는 나의 내면 밑바닥을 박박 긁어모아 살짝 드러낸 자작시로, 한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가 손으로 닿는 것을 좋아해주고 나의 못난 마음을 치유해주는 카페의 고양이 언니에게로. 그리고 난 그 사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바다를 두 번 아니지 서해 을왕리까지 조용히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순례와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어린시절 마을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겨나서 여름 방학내내 매일 죽는 것만을 생각하다가 자기 치유를 위해 떠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를 그려냈듯이. 그리고 동해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일출을 보면서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나를 다독이고 수정하고 써보기로 했다… 반복과 폐허와 낙원에 대해서.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

 

 

 태양의 일출은 분명 50억 년째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는 자연 현상이지만, 인간의 삐딱해지기 쉽고 비틀어지기 쉬운 이 시각과 관점은 이 반복되는 일출 속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매번 포착할 수 있는 무언가, 상수가 아닌 변수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쉽지는 않다. 촬영 버튼 한 번만 누르면 같은 대상을 0.01초마다 반복해서 찍어도 매번 아주 조금씩 다른 사진이 나오는 이 현대기술의 총집체 스마트폰 카메라라고 해도, 결국 그 진정한 차이를 가져오는 프레임을 결정하는 것은 떨리는 사람의 손이다. 그래서 벤야민도 사진의 작은 역사 같은 에세이에서 이 새로운 사진 기술에 대한 작지 않은 희망감을 내비쳤으리라.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2

 

 

 이제 본론인 덴마의 지로와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 여기 하나의 밑바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사람이 산다. 마치 태양이 뜨고 지듯이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feat.세익스피어)의 일상이 반복되지만, 아무도 안전한 오늘이라던가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을 결코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제8우주 행성 모압의 한 슬럼가. 여기에 사람이 있다. 여기에도 사회가, 공동체가 있다. 이 밑바닥 슬럼가 여기에도 사람’들’이 산다. 고대 시절부터 존재 자체로 경멸받기도 하고 공포 또는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한, 벤야민의 사상을 이어받은 또 한명의 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호모 사케르Homo sacer, 저주받고 신성한 뒤틀린 모순된 존재들이 사는 빈민가. 오늘 누군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의식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사회에서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존재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덴마 웹툰 전체의 주인공 덴마는 오늘도 실버퀵의 택배를 신속 안전 배송하기 위해 치안이 불안하다고 여겨지는 행성 모압의 슬럼가로 꼬마의 몸으로 홀로 들어서다가 자기도 슬럼가 출신이라며 이상한 편견 가지지 말라고 하다가 택배를 강탈당한다. 그리고 이 밑바닥 슬럼가 안에서도 최악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 한 사람. 덴마의 제8우주 세계관에서 물리적 오류로 인해 공간 도약과 사물의 기억 읽기라는 희귀한 초능력을 가진 퀑. 그러나 그저 마약 중독자 약쟁이로 하루하루 연명할 뿐인, 쓰레기 퀑 지로가 슬럼가의 가장 밑바닥에서 마약을 빨면서 숨쉬고 있다. 이 지로에 대해서 수많은 관점의 카메라를 현미경처럼 들이댈 수 있겠지만, 일단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Epoke 판단중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저 이성의 판단이나 선입견이 아닌, 지로의 삶을 찬찬히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지로는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는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탐나는 초능력을 두 개나 가진 퀑이지만, 하루라도 마약을 하지 않으면 삶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기에 그저 그 능력은 도둑질에 이용될 뿐이다. 이전 식스틴 에피소드에서 나온 지로와 같은 신체 공간도약 능력을 가졌지만 그 권투 챔피언이자 경호대 대장으로 살고 있는 막스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삶.  그리고 이렇게 도둑질로 기껏 생긴 돈으로는 마약에 전재산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마저도 약물 중독에 빠뜨린, 가족에게마저도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 지로는 이 세상에 어떠한 특별한 희망도 기대도 욕망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만 살아갈 뿐이다. 오늘 하루 어떻게 약을 빨고서 그냥 누워있을까 하는 욕망만이. 

 

 물론 이것은 단순히 지로같은 마약쟁이에게만 해당되는 욕망일리는 없지 않던가? 20세기말 IMF위기 이후 모두 부자되세요를 외치던 이 한국 사회에서, 다들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없이 수익을 받는 건물주가 되기를 대놓고 욕망하는 21세기 현대 한국인들은, 사실상 장래희망이 이렇게 아무 노력도 노동도 없이 그저 편하게 쾌락만을 탐닉하는 마약쟁이를 자신도 잘 모르는, 숨겨진 욕망을 건물주라는 합법화되고 사회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은 한때 로또의 꿈이었다가, 주식대박의 꿈이었다가, 비트코인의 꿈이었다가 조물주 아래 건물주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될 뿐,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동없는 이윤을 원한다는 본질은 수백년쨰 어쩌면 수천년째 동일하지 않은가.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7&weekday=tue

 

 지로의 이런 쓰레기같은 행태를 보고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멸의 눈빛과 언행을 마다않을 것이고, 어떤 이는 섬뜩해하며 그저 멀리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타인의 불행을 감상하리라. 물론 이것 외에도 이런 마약에 찌든 인간을 동정하거나 그저 웃음거리로 삼고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저정도 쓰레기같은 삶은 아니지 하며 나의 심리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이 중 어떤 방식이든, 그 누구도 지로처럼 이렇게 자신이 그저 약물중독된 폐인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로도 힘든 슬럼가 생활에서 그저 당장의 위안, 지금의 쾌락을 쫓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약쟁이가 되었을 뿐. 물론 오해하실 필요는 없다. 이는 결코 타인에게 온갖 민폐를 끼치는 약쟁이 지로의 삶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지로 또한 이 슬럼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라는 관점을 슬쩍 드러내고 싶었을 뿐이니. 이에 대해선 이 나이트 에피소드 연재글의 마지막에서 좀 더 다루게 될 것이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9&weekday=tue

 

 

 지로의 이러한 불행과 가족들과의 갈등을 독일 부르주아 집안의 소년이던 벤야민의 유년시절과 겹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 에세이집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선물사러 나간 크리스마스 날 구걸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거리의 빈민층 아이들을 보며 느낀 거리감과는 좀 다르게, 우리는 그저 이 시대에 지로의 사례같은 타인의 불행을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은근슬쩍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불행 포르노 또는 고통 포르노를 만끽중인 것은 아닐까. 지금 시대에 이런 행태가 가장 적나라한 곳은 유튜브와 인터넷 개인방송들이리라. 가짜사X이 같은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이X 대위에 환호하고 찬양하지만 사실은… 다들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한때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것처럼 사실 못난 공혁X, 4번 훈련생, 자기만 아는 자기 고통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벤야민이라면, 그 진흙탕같은 지옥의 시공간 속에서도 메시아적 중지의 시간을, 구원의 계기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가고싶고 닮고싶은 방향도 그러하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53&weekday=tue

 

 

 범행을 저지르려다가도 약기운이 떨어지면 오로지 마약을 하기 위해 남의 신발도 핥고 불구덩이 속에 자신의 맨살도 집어넣는 쓰레기 약쟁이 지로. 더이상 돈없이 오면 거래를 끊겠다고, 약을 주지 않겠다고 마약 거래상이 엄포를 놓자 지로는 급기야 몽둥이를 들고 막무가내로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마약을 손에 넣는다. 누구 맘대로 약을 끊냐고, 너희는 끊어도 나는 절대 못 끊는다고.

 이를 보면서 양영순의 수많은 충성독자인 덴경대들이 댓글에서 지각연재가 일상인 양영순을 향한 자신의 애증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다른 웹툰들은 다 11시에 칼같이 올라오는데도 그저 덴마가 자신에게 재미있다는 이유로 몇시에 올라오든 심지어 다음 날에 올라와도 그저 오매불망 기다리고 욕하면서도 반드시 양영순을 찾아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덴마의 팬아트를 만들고 연재 등록을 알려주는 덴경대 어플을 만들어낸 이 덴경대 독자들. 그렇기에 이 연재글의 초반에 말했듯이 완결없는 완결에 대한 그들의 배신감은 더욱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각이 일상인 현실과 마약이라는 비정상이 정상처럼 굴러가는 가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이 비현실적인 일상을 중지시키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우리는 외부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그런 초월적 힘이 잠재되어 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은… 후에 지로가 만나는 인생의 은인 중 하나인 퀑 딜러 주완의 말처럼 자신의 밑바닥에 정말 진심으로 물어봐야만 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정말 진심으로,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합니까?

 

계속…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65&weekday=t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