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㉟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80d]

*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다. 신은 나쁜 일의 원인일 수 없으며 오직 좋은 것들의 원인이다”라는 사실을 시인들이 시가를 지음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첫 번째 규범이자 법률로서 제시한 후, 두 번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1) 신이 마법사γόης여서 마음먹은 대로 그때그때 다른 형태ἰδέα로 나타날 수 있는φαντάζεσθαι 존재인지 아니면 2) 우리 눈을 속여서 자기에 대해 그런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존재인지 또 아니면 신은 단순하며ἁπλόος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는 일ἐκβαίνειν이 무엇보다도 적은 존재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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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첫 번째 규범에 이어 두 번째 규범이 논의된다. 논의는 여기서부터 제2권 끝(383c)까지 위의 1)(380d-381e)과 2)(381e-382e)의 순서로 다루어진 후 마무리 부분(382e-383c)에서 둘째 규범이 정리된 상태로 제시된다.

 

[380d-381b]

* 1)(380d-381e)은 ‘신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갖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담고 있다. 논변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ὑπ᾽ ἄλλου μεθίστασθαι(380d-381b)와 자신에 의한 변화ὑφ᾽ ἑαυτοῦ μεθίστασθαι(381b-381e)로 구분해서 진행된다.

* 우선 ‘신은 외부에 의해 변화를 겪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논변을 제시한다.

1) 본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ἐκβαίνειν은 자신 혹은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이다.(380d)

2) 그런데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것τὰ ἄριστα ἔχοντα은 다른 것에 의해 변화ἀλλοιοῦν 또는 운동κινεῖν을 가장 덜 겪는다. 가장 건강한ὑγιέστατον 몸이 음식이나 힘든 일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가장 강한ἰσχυρότατον 식물들이 태양열이나 바람 등에 영향을 가장 덜 받는 이치와 같다.(380e)

3) 혼도 가장 용감하고ἀνδρειοτάτην 가장 분별 있는φρονιμωτάτην 경우, 외부에 의한 영향이나 변화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적다. 집과 옷, 가구 등 잘 만들어진 것들과 좋은 상태에 있는 것들도 시간이나 다른 영향들로 인한 변화ἀλλοιοῦν를 가장 적게 받는다.(381a)

4) 이처럼 자연적으로건 또는 기술에 의해서건ἢ φύσει ἢ τέχνῃ 또는 이 두 가지에 의해서건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τὸ καλῶς ἔχον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μεταβολή를 가장 적게 받는다.(381b)

5) 그런데 신과 신에 속하는 것들τὰ τοῦ θεοῦ은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ἄριστα 존재이다.(381b)

6) 그러므로 신은 다른 것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μορφή를 취할 가능성이 가장 적다.(38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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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관련한 두 번째 규범을 구성하는 첫째 원리는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변화를 외적 요인에 따른 변화와 내적인 요인에 따른 변화로 구분하고, 그 어느 경우이든 왜 신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지를 밝힌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변화를 의미하는 말로 μεθίστασθαι, ἀλλοιοῦν, μεταβολή 등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의 의미상 차이는 별로 없다. 다만 그러한 말 가운데에 ‘운동’의 의미를 갖는κινεῖν(kinein)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어서(380e)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이 불변자인 동시에 부동자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도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표현이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듯이 그리스어 κινεῖν(kinein)은 ‘운동’의 의미와 함께 ‘변화’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실 신은 말도 하고 행동도 하므로(383a) 애당초 부동자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 불변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신이 가지고 있는 형태ἰδέα, μορφή와 언행의 일관성은 물론 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의 내적 속성의 불변을 뜻한다. 특히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형태와 언행의 일관성은 온갖 모습으로 변덕을 일삼는 전통 신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과 부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상태가 외적인 영향을 가장 덜 받는다는 말은, 신이 그 상태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신적 상태의 훌륭함과 더불어 능력의 탁월성도 함께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의 영향으로 훌륭한 상태가 변화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갖는 나약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건강한 몸과 강한 식물이 그러하듯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영향 하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내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신적 불변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신이야말로 장자 나라를 통치할 수호자들이 닮아야할 대상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새로운 신관이 정의로운 나라에서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수호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 시기질투하며 갈라져 싸우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함이 없이 늘 하나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위협하는 어떠한 외부의 영향들로부터도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강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소크라테스는 신이 갖는 가장 훌륭한 상태가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몸과 식물 그리고 혼 등 자연적 산물만이 아니라 집과 옷, 가구 등 인공적 산물까지도 함께 끌어들여 ‘자연적으로건 기술에 의해서건’ἢ φύσει ἢ τέχνῃ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를 가장 적게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이 자연적 본성의 훌륭함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능력 또한 탁월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말 자체가 ‘장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를 우주를 선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내는 신으로 내세워 장인적 기술에 있어 지고지상의 본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데미우르고스의 신적 우주 제작 기술의 원리를 나라의 통치자들이 정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본받아야 할 통치 기술의 근본 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신은 통치자들이 닮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381b-381e]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의한 변화ὑφ᾽ ἑαυτοῦ μεθίστασθαι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은 논변을 제시한다.

1) 그렇다면 신은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바꾸는가? 바뀐다면 그 변화는 더 낫고βέλτιόν 아름다운κάλλιον 쪽인가 자기보다 더 못하고χεῖρον 추한αἴσχιον 쪽인가?(381b)

2) 신은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있어κάλλους ἢ ἀρετῆς 분명히 부족함이 없다οὐ ἐνδεᾶ.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나쁜χεῖρον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다.(381c)

3) 신이건 사람이건 자발적으로ἑκών 자신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381c)

4) 그러므로 신이 자신을 바꾸려ἀλλοιοῦν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ἀδύνατον 일이다.(381c)

5) 신들은 각자ἕκαστος 가능한 한 최대한 아름답고 좋은κάλλιστος καὶ ἄριστος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단순하게ἁπλῶς 자신의 모습μορφῇ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381c)

*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ἅπασα ἀνάγκη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말하는 내용, 즉 신들이 온갖 모습을 하고 다닌다거나 신이 변장을 한다ἀλλοιόω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거짓말이며(381d) 그에 따라 시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것을 들은 어머니들이 어떤 신들은 별의별 이방인ξένος의 모습을 하고 밤중에 돌아다닌다는 식으로 나쁘게 말해 어린아이들을 겁에 질리게δειλοτέρους 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38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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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 변화할 수 없다’는 앞서의 논변에 이어 ‘신은 결코 자신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없다’는 위와 같은 논변에는 시종일관 신이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있어κάλλους ἢ ἀρετῆς 그 어떤 결여나 부족함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단순하고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근본 전제가 깔려 있다. 자기 변화를 낳는 유일한 동기는 결핍인데 신에게 그러한 결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앞서 살핀 신의 기술적 탁월성ἀρετῆ뿐만이 아니라 신적인 자기 충족성 내지 자기 완전성이 포함되어 있다. 논의를 마무리하며 신을 표현하는 말 즉 ‘늘 단순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μένει ἀεὶ ἁπλῶς ἐν τῇ αὑτοῦ μορφῇ는 말에서 ‘단순하다’ἁπλόος(haploos)라는 그리스말에는 simple의 의미만이 아니라 타자와 단절된 ‘절대’absolute의 의미는 물론 ‘타자와 어떤 섞임도 없음’not compound, ‘단일함’single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μένει ἀεὶ ἐν τῇ αὑτοῦ μορφῇ는 말은 신적 불변성과 자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처음부터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이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체적인 존재이다. 신을 표현하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신관이 유일신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인데 충만함이 여럿 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충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분명 여기서 신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위에서 인용한 마무리 부분의 문장 또한 ‘신들 각자’로 시작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일단 플라톤의 신관이 유일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러 완전한 것들로서 신들 각각의 완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우리는 그 해답의 일단을 앞에서 살핀 신적 능력이 갖는 기술적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의 가장 훌륭한 상태, 결함이 없는 상태 그리고 그것을 보전하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그것에 대한 능가pleoneksia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어떠한 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엄밀한 의미의 기술자는 어떠한 실수도 저지르지 않으며 게다가 그 기술은 오로지 대상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선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기술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능에 있어 완전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한 기술들이 여럿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들의 영역에서도 신들은 각기 고유한 역할들이 있고 그 고유한 역할에 있어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며 나아가 그 뛰어난 상태를 늘 하나같이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제각기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신 즉 완전하고 결함이 없으면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신 역시 반드시 하나일 이유는 없다 할 것이다.

3) 그런데 그 신들 각자가 완전하면서도 그 자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들이 자체성 내지 자기동일성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곳의 신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의 신들은 모습을 갖고 있고 말과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이데아와 단순 비교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이 신화 상의 실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주에서 자체적 존재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뛰어난 존재인 신들을 최소한 그 자체성과 자기동일성의 측면에서 이데아에 견주어 생각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플라톤의 신학과 철학의 내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본paradeigma을 보고 우주를 가장 선하게 만든 데미우르고스를 최상의 신으로 그리고 있음은 물론 그가 직접 만든 항성들 즉 영원한 자기 운동자들 역시 모두 신들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플라톤 연구가들은 그 데미우르고스를 그와 같은 우주의 영원한 자기 운동성과 자체성의 근원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선성과 존재성에 기초하여 그를 혹은 그가 바라본 본을 <국가>에서 언급되는 ‘선의 이데아’와 직접 연관 지어 고찰하기도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곳에서의 신들이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신들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를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통치자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원상으로 유추하는 것 역시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라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381e-382e]

* 위와 같이 1) ‘신은 온갖 모습으로 변화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된 후 2) 신들은 스스로 바뀌지 않는μὴ μεταβάλλειν 존재이지만 우리에게 자신들이 별의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게끔 우리를 기만하고 홀리는지ἐξαπατῶντες καὶ γοητεύοντες 즉 ’신은 거짓말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381e)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말로나 행동으로λόγῳ ἢ ἔργῳ 우리한테 환영φάντασμα을 내세워 속이는지ψεύδεσθαι를 묻고 그가 그에 대해 모르겠다고 답을 하자 만일에 ‘진짜 거짓’τό ὡς ἀληθῶς ψεῦδος이란 말이 허용된다면 그 진짜 거짓은 모든 신과 사람이 미워한다고 말하고 그 말의 의미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그 누구도 자신의 가장 주된 부분에 있어서τῷ κυριωτάτῳ 가장 주된 문제들과 관련해서περὶ τὰ κυριώτατα 자발적으로ἑκὼν 속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거짓을 지니고 있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고 말한다.(382a)

* 그래도 아데이만토스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아래와 같이 풀어서 설명한다. 즉 사람들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과 관련해서 혼에서 속는 것ψεύδεσθαί을, 그리고 그렇게 ‘거짓에 빠져 무지한 것’ἐψεῦσθαι καὶ ἀμαθῆ εἶναι을, 그래서 혼에 거짓을 들여와 갖게 된 것을 누구라도 꺼릴 것이고πάντες ἥκιστα ἂν δέξαιντο 그런 경우의ἐν τῷ τοιούτῳ 거짓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다.(382a)

* 그런 연후 앞에서 말한 진짜 거짓을 ‘거짓에 빠진 자의 혼 안에 있는 무지’ἡ ἐν τῇ ψυχῇ ἄγνοια ἡ τοῦ ἐψευσμένου로 칭하고καλοῖτο, 말에서의 거짓τό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ψεῦδος, 즉 거짓말과 대비시킨다. 거짓말은 혼이 처한 그런 상태παθήματος의 일종의 모방물μίμημά이자 나중에 생긴 영상εἴδωλον이어서 완전히 순수한 거짓이 못 된다οὐ πάνυ ἄκρατον ψεῦδος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진짜 거짓’은 신들과 인간들 모두의 미움을 산다’고 앞서의 주장을 재차 확인한다.(382b)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진짜 거짓과 거짓말을 위와 같이 대비시킨 후, 화제를 바꾸어 ‘말에서의 거짓’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ψεῦδος 즉 거짓말이 미움을 사지 않을 정도로 유용할χρήσιμον 때는 언제이며 누구에게 유용한지를 묻는다. 이를테면 적πολέμιος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μανία나 어떤 어리석음ἄνοια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φίλος들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옛날παλαιός 일들을 몰라 허구τὸ ψεῦδος를 최대한 진실ἀληθής 같도록 만드는 설화 이야기μυθολογία 속 거짓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382c)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거짓말이 가져다주는 유익한 경우들을 언급한 후, 도대체 그 중 어느 점에서 거짓이 신에게 유용한지 즉 거짓말을 해서 신에게 유용한 경우가 있는지를 묻는다.(382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신은 옛날에 관해 몰라 시인처럼 허구를 지을 일도, 적을 두려워할 일도, 친근한 이들의 어리석음과 광기에 빠질 일도 없으므로 ‘신이 누구를 위해 거짓을 말할 일은 전혀 없다’οὐκ ἔστιν οὗ ἕνεκα ἂν θεὸς ψεύδοιτο고 말을 한다. 요컨대 영전인δαιμόνιόν 존재와 신성한θεῖον 존재는 어느 모로 거짓됨이 없다는 것이다.(38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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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가장 주된 부분에 있어서 가장 주된 문제들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에서 ‘가장 주된’의 원어는 ‘힘을 가진, 권위 있는’(having power or authority over)의 뜻을 가진 kyrios의 최상급형인 kyriōtatos를 번역한 말이다. 즉 이 말은 ‘가장 힘이 있고 가장 권위 있는 것 최고의 관심사와 관련해서’의 뜻이다. 다시 말해 이 문맥은 ‘누구든 자신이 가장 신경을 쓰는 최고 관심사와 관련해서 속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싫고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런 일에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는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나중에(505d-e) 누구든 ‘좋은 것들’ἀγαθὰ 과 관련해서는 사실 그대로 정말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그와 관련한 억견δόξα은 경멸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에 기초해서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주된 것을 구체적으로 ‘좋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382a에서 말하는 ‘있는 것들’τὰ ὄντα(ta onta)은 역본에 따라 ‘사실들’, ‘사실로 그런 것들’(505d)로 옮겨지기도 한다. 사실 원어 ta onta는 우리가 보통 존재 또는 실재로 옮기는 ’to on’의 복수형이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그냥 ‘주어진 현실 내지 현존하는 것들’ 정도를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 실재는 차치하고 일상의 현실사와 관련해서 쉽게 거짓에 빠지거나 속임수를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참주 같은 자들의 경우,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일상의 현실사들 역시 영악하게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그러한 현실 정보들을 이용하여 남들을 나쁜 목적으로 속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참주 또한 모종의 지식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참주가 알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일상사와 관련한 현실 정보들일 뿐 결코 실재와 관련한 참된 앎일 수는 없다. 플라톤에게 앎은 도덕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참주를 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 가운데 가장 무지한 자로 부른다. 플라톤에게 ‘무지’amathia, anoia는 일상사 내지 주어진 현실사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능력으로서 혼이 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무지는 혼이 내적으로 불균형 상태ametria에 빠져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228c-d)에서 무지란 혼의 불균형 상태로서 혼의 질병이자 악덕, ‘분별로부터 비켜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국가> 제6권(480d)에서도 사고dianoia는 혼이 균형상태emmetria에 있을 때 각각의 실재의 이데아로 쉽게 인도된다고 말을 한다. 즉 철학자는 현존하는 사실들과 문제 상황들을 균형 잡힌 혼의 총체적인 안목을 통해 그 진실을 포착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참주는 혼이 불균형 상태에 있으므로 그러한 일상의 사실들과 상황들을 순전히 이기적 관점에서 왜곡하고 그 분별에서 벗어나 있어서 결국 부정의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진짜 거짓’to hόs alethōs pseudos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이 허용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그것은 원어에서 참을 나타내는 alethēs란 말과 거짓을 나타내는 pseudos란 말이 형용모순처럼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속는 것’psedesthai(현재 부정사)은 ‘거짓pseudos에 빠지는 것’으로 옮길 수 있고 ’거짓에 빠져‘epseudesthai(완료 부정사)는 ‘속아 넘어가’로 옮길 수도 있다. ‘들여와 갖게 된 것’ἐνταῦθα ἔχειν τε καὶ κεκτῆσθαι을 직역하면 ‘안에 가져서 획득한 것’ 즉 속은 다음 그 속은 상태를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적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나 어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들에 대한 거짓말‘은 제1권(331e-332b) 폴레마르코스와 나눈 대화를 환기시키는 말이고 ’옛날 일들을 몰라 허구를 최대한 진실 같도록 만드는 설화 이야기‘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롯한 이후 설화 작가 내지 시인들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광기μανία는 극단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무지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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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에 관한 둘째 규범으로서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 ‘신은 부족함이 없다’, ‘신은 언제나 단순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등에 관한 내용들이 논의된 후 이제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앞에서 ‘신이 변화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것을 내세워 ‘신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똑같은 방식 즉 ‘신은 인간들처럼 거짓말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세워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2)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위해 흥미롭게도 ‘진짜 거짓’과 그것의 모방물로서 ‘말에서의 거짓(거짓말)’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런 연후, 신은 진짜 거짓은 물론이려니와 말에서의 거짓도 결코 행하지 않을뿐더러, 흔히들 인간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조차 전혀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방식으로 ‘신은 일체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짜 거짓과 말에서의 거짓, 그리고 유익한 거짓말의 의미가 각각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3) 우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짜 거짓’은 ‘혼 안에 있는 무지’, ‘혼의 무지 상태’이다. 혼의 무지 상태는 이미 혼에 거짓이 들어와 거짓에 빠져 있는 자의 상태이다. 그리고 말에서의 거짓 즉 거짓말은 이 혼 안에 있는 무지로서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자 나중에 생긴 영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이 나온 것이라고 얘기하듯이, 거짓말은 혼에서의 무지가 선행 원인이 되어 그것이 말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진짜 거짓이라는 원상의 그림자이자 모방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상인 진짜 거짓의 모방물인 한에서 완전히 순전한 거짓이 못 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완전히 순전한 거짓의 모방물인 한, 모방의 정도에 따라 진짜 거짓에 아주 가까운 거짓말에서부터 비교적 그것보다는 좀 떨어진 그것과 덜 비슷한 거짓말 등 여러 종류의 거짓말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앞에서도 나왔듯이 자신이 속아서 혼의 무지 상태에 있음에도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마치 진실인 양 떠들어 대는 경우의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듯이 이른바 가짜 뉴스를 진실로 알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이와 순전함의 정도가 다른 거짓말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은 사실들을 알고 있으면서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도 거짓말을 행하는 자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이미 그의 혼 안에 거짓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역시 혼의 무지 상태에서 거짓말을 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들 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실재에 관한 앎이 아니라 일상사 내지 현실 정보들로서 장차 혼의 무지에 의해 왜곡되어 나쁜 목적에 쓰일 재료이자 도구들일 뿐이다. 특히 참주들은 그러한 거짓말을 하는 자들 가운데 정보량에 있어서나 그것을 나쁘게 활용함에 있어서나 가장 월등한 자들이고 그만큼 가장 나쁜 자들이다. 그러나 참주는 여전히 그 누구보다도 무지한 자일뿐이다. 왜냐하면 참주는 불균형한 혼을 가져 분별에서 벗어나 있어 그러한 현실 정보들의 내적 관계와 본질들 즉 그것들이 삶과 현실에서 어떻게 총체적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는가에 대한 진실에 무지할뿐더러, 그 진실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하고 선한 삶을 이루어낼 낼 것인가에 대한 앎 또한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보다 참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진짜 거짓’에 가까운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일부 특수 사안에 속아서 나온 거짓말이지만 참주의 경우는 현실의 모든 사안들과 연관된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이고도 원리적인 앎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짜 거짓인 혼의 무지에서 나온 모방물로서 거짓말들은 인간들 각자의 가장 주된 부분, 주된 문제 영역에서 결코 유익함을 가져다주지 못함은 물론 참주의 경우가 보여주듯 유익은커녕 인간 삶의 전체 국면에서 전적인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4)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마친 후 거짓말이 때로는 유익한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앞에서 우리가 살핀 내용들과 상충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혹자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완전히 순전한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에 근거하여 어차피 순전하지 않으므로 때로는 유익함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유익한 거짓말은 자기의 이익이 아닌 친구나 대상의 이익을 위한 선한 행위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다가 나중에 철학 통치자들도 행하는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진짜 거짓의 모방물로서 거짓말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거짓말이다. 만약 유익한 거짓말을 그러한 거짓말의 하나로 포함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 특히 철학 통치자가 진짜 거짓 즉 혼에서의 무지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혼에서의 무지 상태 즉 진짜 거짓의 모방물로서 거짓말 속에는 가장 유익하지 않은 상태에서부터 덜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정도 차이만을 갖는 나쁨이 있을 뿐 어떠한 유익함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적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나 어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들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옛날 일들을 몰라 허구를 최대한 진실처럼 만드는 설화 이야기 속 거짓말들은 나쁨이 아닌 좋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유익한 거짓말은 혼의 무지 상태로서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국 거짓말은 크게 나누어 혼의 무지상태에서 나온 거짓말과 혼이 속지 않는 상태 즉 앎의 상태에서 나온 거짓말로 나누어지고 앞서 살폈듯이 전자에는 속은 줄도 모르고 진실인 양 떠드는 거짓말과 사실을 알면서 나쁜 목적을 위해 남을 속이는 거짓말 등이 속해 있을 것이고 후자에는 이른바 유익한 거짓말들이 속해 있다 할 것이다.

5) 그런데 우리가 유념할 점은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 내용의 초점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거짓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짜 거짓에서 나온 거짓말이든 유익한 거짓말이든 그 어떤 경우든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유익한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앞에서의 거짓말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 그 의미의 일관성과 관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혹스러움을 안겨주지만, 전후 문맥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인간과 달리 신들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유익한 거짓말을 할 이유조차 존재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들이 거짓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무결한 선성을 가진 존재임을 더욱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별도의 화제로 삽입된 것이다.

6) 한편 위와 같은 해석과 달리 위의 부분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1) 신이든 사람이든 가장 주된 것 즉 ‘좋은 것’에 관해서는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지 않는다. 2) 좋은 것과 관련한 거짓을 갖고서(속고서) 속은 줄도 모르는 상태가 혼의 무지로서 진짜 거짓이다. 3) 말을 통한 거짓 즉 거짓말은 자신은 속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속이는 것이므로 진짜 거짓에 비해 아주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4) 그러므로 거짓말에는 적에 대해 하는 거짓말, 정상이 아닌 친구에게 하는 거짓말 등의 경우처럼 유익한 거짓말도 있다.

7)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말을 통한 거짓이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거짓말에 존재하는 속성 ‘자신은 속지 않은 상태’는 그것이 모방하고 있는 진짜 거짓에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해석은 나중 철학 통치자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익한 거짓말이 진짜 거짓인 혼의 무지의 모방물이라면 철학 통치자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의 경우까지 혼의 무지 상태에서 나온 것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시민을 속이는 참주와 그것에 속은 줄도 모르는 대중을 비교할 때 시민이 혼의 무지의 원상이 되고 참주가 그 모방물이자 영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참주는 자기는 속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을 속이는 자 즉 진짜 거짓에 빠진 자가 아닌 반면에 오히려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는 시민이 진짜 거짓에 빠진 자가 되기 때문이다. 즉 진짜 거짓은 시민의 상태가 되고 참주는 그 시민을 모방한 자로서 혼에 있어 시민 보다 덜 무지 상태에 빠진 자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은 것과 관련해 가장 무지한 한 자 즉 혼의 무지가 누구보다도 극상의 상태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참주이다. 요컨대 이러한 해석은 참주의 거짓말이 최악의 진짜 거짓말이라는 것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382e-383c]

* 위와 같은 논의가 이루어진 후 소크라테스는 그 논변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둘째 규범δεύτερον τύπον을 제시한다. 즉 ‘신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ἔν τε ἔργῳ καὶ λόγῳ 전적으로 단순하고ἁπλόος 진실ἀληθὲς 하거니와, 스스로 바뀌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도 아니한다’ 신은 인간에게 환영φαντασία이나 말로도 꿈속에서건 생시건 자신을 바꾸거나 남을 속이는 어떤 징조σημεῖον도 보내지 않으며(382e) 말에서든 행동에서든 결코 우리를 오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383a)

* 그러므로 신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시를 지을 때 반드시 이 규범을 지켜야 하며, 비록 우리가 호메로스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은 칭송하지만, 만일 이 규범에 어긋난 말을 할 경우에는 칭송하지 않을 것이며οὐκ ἐπαινεσόμεθα(383b) 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해 화를 낼 것이고χαλεπανοῦμεν 그에게 합창 가무단χορός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수호자들οἱ φύλακες을 최대한 신들을 경외하는θεοσεβής 인간이자 거룩한 이들θεῖοι로 키우려면 교사διδάσκαλος들로 하여금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ἐπὶ παιδείᾳ τῶν νέων 이 규범에 어긋난 이야기를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οὐδὲ ἐάσομεν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규범에 전적으로παντάπασιν 찬동하며συγχωρειν 그것 또한 법률νόμος로 삼았으면 한다고 대답한다.(38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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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전통 신화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정기적으로 연극의 형태로 공연되면서 아테네인들의 삶에 대한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연극은 일종의 시민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나랏돈은 물론 부유층들의 기부금을 받아 그러한 공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합창가무단도 그러한 지원의 일환으로 공연이 이루어질 때마다 제공되고 있었다.

*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에서 채택될 규범에는 전통적인 신화와 상충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담겨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신과 관련한 규범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호메로스의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여전히 찬송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는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시가 교육론 내지 종교론은 기본적으로 기존 체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비판적인 분별의 방식으로, 일부는 계승하고 일부는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 이로써 ‘신은 선하며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변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규범은 시가 교육과 시가 창작을 함에 있어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자 법률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러한 규범들은 앞서 살폈듯이 단순히 시가 교육상의 규범을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세계관 내지 가치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규범들이 담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전통적인 신들과는 차별되는 플라톤 고유의 신관 내지 종교관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앞에서도 살폈듯이 이곳에서 언급된 신에 대한 새로운 관념들과 장차 본격적으로 언급될 이데아에 대한 관념이 자기 완전성과 자체성의 측면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역시 플라톤의 신학과 철학의 내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플라톤의 신관 내지 종교관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크게 요약하자면 그것 역시 플라톤 철학의 연장선 위에서 i) 기원전 7-8세기 형성되고 전승된 신화적 세계관과 ii)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로부터 과학적 사유가 유입된 이래 당대 아테네 사상계에서 형성된 철학적 세계관 즉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 그리고 iii) 피타고라스 이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자리 잡은 영혼불멸 사상 등을 그야말로 총체적인 관점에서 종합하고 통일한 것이다. 이른바 개인의 혼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 했던 플라톤 평생의 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이제 제2권은 마무리되고 이어서 시가 교육에 있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들이 다루어지고 그것을 본받아 인간들이 지녀야 할 덕목들이 함께 제시된다.

<국가> 제2권 -끝-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10월 마당(5회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기에 다들 평안하신지요.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10월 마당(5회차)를 안내합니다.

지난 8월에 이어 철학 마당 5회를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원효, 화담과 경허 등 한국철학사에서 불교와 기철학의 인물들을 다룹니다.

관심 있는 회원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등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 공동좌담자(가나다순) :

①구태환(상지대학교 초빙교수)

②김제란(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③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④이병창(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⑤최유진(경남대학교 교수,불교철학)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 이후 일정 ***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도시와 제국의 싸움 [나인당케의 단상들]

 

 

도시와 제국의 싸움

한상원(한철연 회원)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도시와 국가가 같은 개념이었다. 그리스어로는 polis, 라틴어로는 civitas는 모두 도시와 국가를 뜻했다. 이는 ‘도시국가’별로 정치단위를 가졌던 고대적 언어관습이다(아마 이와는 상관 없겠지만, 독일어에서도 도시Stadt와 국가Staat는 모음 길이만 다른 거의 유사한 발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란 자율성을 가진 정치적 자치공동체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을의 확장인) 도시가 이루는 자율적, 독립적 공동체로서 폴리스를 예찬한다. 그러나 고대의 도시국가 체제는 마케도니아와 로마라는 대제국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 도시는 제국으로 흡수된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중세의 한복판에 재등장한다.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 시민들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사고 공동방위를 통해 자치도시(코뮌) 공화국을 수립한다. 마키아벨리가 활동한 피렌체는 대표적인 자치도시 공화국이었다. 맑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당시의 도시공화국(생캉탱)의 자유에 얼마나 분개했는지, 그에 맞서 코뮌의 시민들이 어떻게 상호방위를 실행했는지 엥겔스에게 쓰고 있다. 훗날 벤야민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이렇게 적는다. “최초의 코뮌: 도시.”

최근 중국 대륙에 대항하는 홍콩 시민의 저항을 보면, 마케도니아와 로마와 같은 대제국에 흡수되는 것에 저항하는 도시국가(폴리스), 또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중세 자치도시(코뮌)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나 홍콩인들이 최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도시의 자치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앙집권적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이 21세기 도시공동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도시는 제국으로부터 살아남아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까. 오늘날 홍콩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시대와 철학]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이영훈(한철연 회원)

 

얼마 전, 국내 제1야당 소속의 민모 국회의원이 개인 SNS에 올린 글이 뉴스가 된 적이 있다. 기자의 사견 등을 제외하고 사실만 나열하면 뉴스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모 의원이 북한 열병식 사진, 교황 방한 사진, 나치당 뉘른베르크 당 대회 사진과 더불어, 이번 검찰개혁 시위 사진들을 함께 올리고 “좌좀들 150만 명”이라 지칭했다.’

이전에도 국회의원들의 과한 언사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야 이 친구야, 쟤들은 원래 그렇잖아, 대한민국 국민답게 행동하라고’라는 식으로 넘어갈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민 의원의 이 발언에서 그저 쉽게 넘기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국회의원은, 시험 봐서 입성하는 입법부나 사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권한 행사를 대행하라고 국민이 뽑은 ‘선출직’이다. ‘국민을 대행’하는 ‘선출직’이라는 점은 국회의원이 관료조직과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 부분이 왜 포인트인지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 의원의 득표율을 보자. 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확인해보니 민 의원은 해당 지역구 투표인 119,224명 중 32,963명이 투표하여 당선됐다. 참고로 2등은 여당 소속이며 27,540표로 낙선했다. 바꿔 말하면, 참여하지 않은 인원을 차치하고서라도, 민 의원 지역구 주민 중 2등을 뽑은 약 27,540명 중의 적어도 일부는 민 의원과 반대되는 정치적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들 중 또 몇몇은 이번 검찰개혁 시위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시위는 안 나갔어도 이 시위를 지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구민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전 국민의 뜻을 대행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민 의원 지역구의 예에서 보았듯이 상식적으로 그와 생각이 다를 가능성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민 의원은 이번 시위에 나선 국민을 “좌좀들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뭐 국회의원이니까, 이 정도 언사는 넘어가도 된다고 보는지? 혹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상적인 것이니까, 그도 사람이니까 내지는 정치인이니까… 이런 발언도 내뱉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발언에 대해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국민이 뽑았고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국민을 ‘사고능력은 전혀 없는 채 식욕에 따라 인육을 탐해 움직이는 죽어 썩어버린 상상의 시체 덩어리’인 좀비에 빗대어 “좌익 좀비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이 국회의원은 많은 국민들이 그 발언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더럽다, 더러워’라며 혐오의 발언을 또 다시 내뱉었다. 이 국회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들의 동조 혹은 묵인 덕분에 민 의원과 그의 소속 당은 물론 당신들과 정치사상이 다른 국회의원까지 똑같이 국민을 무시할 수 있는 실질적 근거를 하나 더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 봤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는 민 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과 그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가 달라졌을 때도 저들이 과연 당신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일 것 같은가? 아니면 그저 자신들을 대표하는 자들일 것 같은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과 그 정당이 영원히 뜻을 같이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그런 정치인에 대한 순진하기까지 한 ‘믿음’이 깨지는 실례는 특정 당적과 상관없이 지난 우리 현대사에서 수도 없이 봐 왔다.

 

자신과 같은 국민인 검찰청 앞의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죽은 고깃덩어리 살육귀로 규정하는 자와 그런 인물이 소속된 정당이 과연 민의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누가 저들에게 묵인과 동의로서 자신만을 대변할 면허를 주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청와대 대변인이었고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인 민 의원이 단지 세속적이고 친숙한 언사를 구사해보고자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의 언어를 뜻도 잘 모른 채 사용하는 ‘실책’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도 사람인지라 잠시 과한 언사를 했다고 얼른 태세를 바꾸어 사과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결과는 모두가 감당할 뿐이지만 국민의 입장, 또 시민의 입장에서는 ‘국민을 대행하는 자’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떻게 발언해야하는지 깨닫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시대와 철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정동훈(2018-시민대학 수강)

 

조인성 주연의 ‘더 킹’은 검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태수는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건달의 아들이며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이다. 어느 날 태수는 한 주먹도 아까워 보이는 검사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공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검사의 꿈을 품는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 태수는 결의를 다지며 정의로운 검사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막막한 현실의 벽에 굴복한 태수는 결국 정치검찰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주인공 태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현대사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탄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검찰의 모습이 마치 영화 ‘더 킹’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를 요약하면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를 받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근대적인 검·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경찰인력을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대거 활용했다. 친일파가 가득한 경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당시 한국의 제도를 만들던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원이 적은 검찰에게 강력한 권력을 주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검찰을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검찰은 총 2천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11만 명이 넘는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 영장, 기소, 공판 등등 사실상 법조의 전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검찰은 견제 받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의회가 정부를 정부가 의회를 견제한다. 또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출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가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은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민주사회의 가장 큰 시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형식상 법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지만 형식일 뿐이다. 검찰을 통제할 정치권력은 언제든 수사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건드리기 어렵고 시민에게 검찰은 개인에게는 감히 저항조차 두려운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찰이 검이라면 검을 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협력 혹은 개혁이다. 전자는 보수정부의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전 독재정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보수정부만 생각해도 검찰이 얼마나 권력과 유착하여 공생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자는 노무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게 개혁은 개혁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말로 들릴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힘을 없애겠다는 말이니까. 노무현의 검찰개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금 유착한 권력과 검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시 검찰개혁을 선언한 정부가 집권했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리고 검찰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선 사적제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적제제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게 뻔하다. 대신 국가는 ‘국가형벌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직접 나서서 범죄를 ‘처벌’한다. 검찰은 이러한 국가형벌권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기관이다. 검찰은 선량한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며 악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검찰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그동안 검찰은 자신의 권한을 사유화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결과적으로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전직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담고 있다면 스폰서검사, 떡값검사 등의 부패검사들 그리고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들의 모습은 검찰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수사 과정부터 재판까지 하나의 사건에 있어서 검찰의 권한은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강력하기에 그 자체가 비리와 유착을 부르는 원인이다. 또한 견제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비리가 고발된다 한들 언제든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한다. 설사 비리로 인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해도 그 자체가 전관 출신 변호사가 되어 활개치고 다닐게 뻔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고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없이 국민의 것이다. 국가기관은 국민을 향해야한다.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검찰의 주인은 국민이고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작용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민주국가의 헌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권력분립이다. 국가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그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기본원리이다. 권력분립의 입각해서 볼 때 검찰은 어떠한가? 너무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검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권한의 행사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검찰개혁엔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검찰 스스로가 개선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검찰 권력의 문제가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 장치의 부재로 요약된다면 제도 개선의 쟁점도 ‘권한을 나누고’ ‘견제 장치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대안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이것은 2018년 행안부와 법무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률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이른바 ‘공수처’의 설치이다. 이것도 어려운 산이다. 제 1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지만 둘 다 얻기 어려운 아주 힘든 상황이다.

 

아직 검찰은 무서울 것이 없다. 검찰개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힘이 점점 빠져가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제 1야당이 아직 버티고 있으며 혹여나 그들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칼은 칼이다. 내가 휘두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도륙할 능력이 있어도 휘두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다. 검찰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차가운 감옥으로 아니 죽음으로도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도 재벌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라면 그들만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나약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을지. 검찰개혁의 명분과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기관 앞에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질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㉞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78b-e]

* 소크라테스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저지른 일이 설사 진실일지라도 이 나라에서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아데이만토스도 그런 이야기는 적합하지 않은οὐδὲ ἐπιτήδεια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신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고πολεμοῦσί 서로 음모를 꾸미며 싸움질을 하는ἐπιβουλεύουσι καὶ μάχονται 것으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οὐδὲ γὰρ ἀληθῆ.(378b) 게다가 수호자들이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αἴσχιστον 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신들과 영웅ἥρως들이 자기들의 동족과 친근한 이들에게 취한다는 적대행위ἔχθρας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어떤 시민πολίτης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ἀπάχθομαι 일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런 짓은 경건한ὅσιον 짓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πείθειν 하려고 한다면 노인γέρων들과 노파γραῦς들이 아이들τὰ παιδία을 상대로 곧바로εὐθὺς 들려주어야 하고(378c) 이들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들을 위해 시인들로 하여금 그와 비슷한 이야기 즉 어떤 시민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짓도록 강제해야 한다ἀναγκασ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지은 온갖 신들의 싸움 이야기들은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게 지어졌건 아니건 간에 이 나라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사람ὁ νέος은 뭐가 숨은 뜻인지 아닌지 판별κρίνειν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δόξα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기δυσέκνιπτάτε καὶ ἀμετάστατα때문이라는 것이다.(378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해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37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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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금지하는 것은 있는 사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 내지 폐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들을 감독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말인데다가 신의 선성이라는 이 나라 최고의 규범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최고의 규범적 가치로 확립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플라톤은 신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물론 일찍이 시민이 같은 시민들을 미워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조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역사만 보더라도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말은 신의 자손으로서 신들을 닮은 선조들이 본래부터 서로 싸우지 않고 동족으로서 친근하게 지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기존 신화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들 모두가 신들끼리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분열하는 모습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플라톤은 그 자신 평생 동안 몸소 내전을 겪으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특히 기원전 5세기 이래 그리스 사회 전체가 평화의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동족상잔과 내전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있어 플라톤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수호자들과 시민들 모두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단합하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어려서 부터 한 나라의 시민이자 동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겨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것이 갖는 중대성의 크기만큼 어린이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시가교육과정에서부터 엄격한 규범을 세워 위와 같은 신들과 영웅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원천적으로 배격하고 오직 신과 관련한 훌륭한 내용들만 듣도록 설계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비판적 사고 내지 그것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화신이라고 부를만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자기가 틀렸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교육 대상에게 알려주길 거부하거나 하물며 은폐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사실 제대로 된 비판 교육이라면 설사 잘못된 생각일지라도 그것을 감추기 보다는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해야 진정으로 그 뭔가를 온전하게 알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비판적 안목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종종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쁜 일을 당하기 쉬우므로, 그런 나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치 몸에서 면역력을 기르듯이 어떤 것이 나쁜 것들인지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감수성이 강한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는 플라톤의 생각대로 나쁜 것들이 무엇인지 굳이 미리 배우게 하거나 알려 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접하는 시가 작품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시인들을 강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착종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 이것을 위해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의 원인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미리 끌어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혼의 인식 능력에 기초하므로 제대로 된 앎을 얻기 위해서는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함께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그 신체의 물질성에 의해 원천적으로 혼의 순수성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해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경우 혼의 인식능력이 크게 떨어져 제대로 된 앎을 가질 수 없고 그로 인한 무지가 그에게 나쁜 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지성의 훈련 즉 배움을 통해 이 신체가 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나쁜 것의 원인은 무지이고 그 무지의 이면에는 물질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의 신체가 나쁜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신체가 갖는 물질성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과도 무관하게 막무가내 자기 식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물리적 필연이라는 힘을 갖고 있어 인식 능력으로서 혼의 지향성을 흐트러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사태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여 그에게 나쁜 일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쁜 일에 대한 근본책임은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지적 훈련에 게을리 하여 신체의 힘을 통제해 내지 못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 즉 혼의 인식 대상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에 따라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간파하여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적 안목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으로 그 잘못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했던 생각을 자신도 미리 다 경험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 사태의 진실을 인지하고 분별해낼 수 있는 힘으로서 혼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별의 기준으로서 진실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상은 물론 그것을 인지하는 순수한 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앎이란 순전히 백지와도 같은 마음 상태에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 주어지는 감각자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참과 거짓은 이른바 혼에 의해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들어온 감각내용을 토대로 분별되는 것이고 그 분별의 기준 또한 그 후천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험론적 사고는 오늘날 인식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험론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관점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지식을 사태와 사물의 진실인 양 강제하는 일종의 나쁜 주입식 교육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태에 대한 진실은 시행착오 내지 실험이라는 경험의 과정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에게도 경험은 앎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혼은 그 자신과 닮은 것에 더 잘 반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들 가운데 혼의 순수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경험들은 교육의 한 수단으로 적극 권장된다. 그렇지만 이른바 나쁜 경험들은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미리 배워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의 순수성을 오염시켜 무지를 초래하고 그로부터 나쁜 일들이 야기된다. 이러한 한, 분별없이 시행착오를 감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삶의 현실에는 누구라도 혼의 순수성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일들에 직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그 나쁜 일에 용이하게 대처하거나 이겨내는 능력을 훨씬 더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앎이기는 하지만, 비록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적을지라도 배움과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닦아 삶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 누구보다도 넓고 그에 기초하여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분별하고 대처하는 지혜 또한 더욱 깊어진다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과학 영역에서건 도덕 영역에서건, 단순한 습득을 위한 교육에서건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에서건, 기본적으로 학습은 혼의 순수성을 통해 함양되고 증진되는 것이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숨은 뜻’과 관련한 언급은 자칫 신들의 모든 행적을 모두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노정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설사 신들의 행위 가운데에는 겉으로는 나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 즉 숨은 뜻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 교육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어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가 어린이 교육과정에서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2-1-1-1 신은 선하다.(378e-380c)

 

[378e-379c]

* 소크라테스가 어린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하여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 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아데이만토스는 그게 어떤 것들이며 어떤 설화들μῦθοι인지를 누가 묻는다면 뭐라 답할 것인지를 묻는다.(378e)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시인들ποιηταὶ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οἰκισταὶ πόλεως임을 환기시킨 후 나라의 수립자들은 시인들이 설화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할 규범τύπος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스스로 설화를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οὐ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면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θεολογία에 대한 규범들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서사시ἐπη, 서정시μέλη, 비극시τραγῳδία 어떤 시를 짓건 언제나 신을 신인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ἀποδοτέος(379a)즉 “신은 참으로 선하므로”ἀγαθὸς ὅ θεὸς τῷ ὄντι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들은 해롭지 않다. b) 해롭지 않은 것ὃ μὴ βλαβερὸν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c) 나쁜 짓κακὸ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것의 원인κακοῦ αἴτιον일 수 없다.>라는 확답을 얻어내고, 이어서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은 유익하다.ὠφέλιμον b) 그러면 선한 것은 잘함의 원인αἴτιονα εὐπραγίας이다.>라는 확답 또한 얻어 낸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τῶν μὲν εὖ ἐχόντων αἴτιον이고 나쁜 것의 원인은 아니다”(379b)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기에 ὁ θεός, ἐπειδὴ ἀγαθός 소수의 것들에 대해서ὀλίγων 원인일 뿐 많은 것에 대해서는 원인이 아니며(인간들에게 있어 좋은 것들τἀγαθὰ이 나쁜 것들 보다 훨씬 더 적기ἐλάττω 때문에) 이에 따라 ‘좋은 것의 원인은 신’으로,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 아닌 다른 것’으로 말해야 한다고 단언한다.(37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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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훌륭한 설화가 뭔지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은 시인들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로서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설화를 스스로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을 한다.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테이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설화를 짓는 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호메로스 등 큰 규모의 설화를 대신할 만한 설화를 새로 짓는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플라톤의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수호자 교육에서 당대 아테네 시가 교육 제도를 전면 부인하기보다는 그 기본틀은 유지하되 그것이 갖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시가 교육이 미치는 영향력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이상국가가 백지 상태에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염증상태에 있는 현실의 조건들 위에서 그것을 정화하고 개혁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수립자 즉 철학자란 설화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규범을 세우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논의의 국면 또한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음에도 다른 한편 동시에 철학자가 ‘스스로 설화를 꼭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οὐ μὴν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곳의 논의 국면과 어울리지 않게 철학자도 시인들처럼 스스로 설화를 지을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깊이 함축적으로 전하기 위해 대화편들 곳곳에서 기존 신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화적 표현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신화를 짓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말년의 사상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편은 가히 이곳에서 가장 훌륭하게 지은 설화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의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훌륭함과 관련하여 신들이 행한 최선의 행적들 즉 어떻게 신들이 선한 우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그 자신의 설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나라의 수립자들이라는 표현은 이곳의 논의가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가 힘을 합쳐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플라톤의 말년의 대화편 <법률>은 그러한 과정을 한층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법률>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다는 전체 구도 하에서 이곳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원칙적인 규범들뿐만 아니라 그 규범들에 걸 맞는 세부적인 법률들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나라의 수립자들이 신과 관련한 이야기로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있는 규범 즉 수호자들이 간직해야할 첫째가는 종교적 믿음은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과 관련한 이야기’의 원어가 오늘날 ‘신학’의 의미로 쓰이는 θεολογία(theologia)라는 것을 고려하면 위의 규범은 이른바 플라톤 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여기서 이 규범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a)-b)-c)에 이어서 d)-e)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식화한 삼단논법syllogism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위의 추론 과정은 아래와 같이, ‘신은 선하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삼단논법들의 단계를 거쳐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결론을 추론해내고 있다.

우선 a)-b)-c)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1> 신은 선하다(대전제)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해롭지 않다(결론). <삼단논법 2>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대전제) 해롭지 않은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소전제) 그러므로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3>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신은 선한 것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4>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그리고 d)-e)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4> 신은 선한 것이다(대전제) 선한 것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5>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대전제)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6>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대전제)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 위 추론들의 결론 즉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결론에서 전자 즉 ‘신은 선하다’ἀγαθὸς ὅ θεὸς라는 말은 그 말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특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ἀγαθὸς(agathos)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도덕적 선morally good의 의미와 함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좋다good’, ‘유익하다’benefit, ‘능력 있다’capable, ‘훌륭하다’admirable 등의 의미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 선하다’라는 말은 결코 낯선 표현도 틀린 표현도 아니다. 설사 신이 나쁜 일들을 했다하더라도 신은 그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처음 ‘신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 아데이만토스가 ‘물론이죠!τί μήν;’라고 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 즉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힘든 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앞에서도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듯이, 기존의 신화에 나타난 신들은 나쁜 일들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 플라톤이 규범으로 내세우고 있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당대의 신관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이 말에는 새로 세워지는 정의로운 나라에서 수호자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조, 다시 말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할 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존 신관의 근간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새로운 신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신화 관련 규범으로서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명제들을 플라톤 형이상학의 전모를 가장 깊이 있게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그의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내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명제들이 갖는 의미는 가히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플라톤 세계관의 핵심과 바로 직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길게 논의하기는 우리 강해의 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이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점만을 음미해보더라도 그 중대성은 지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기본적으로 신들과 관련한 이야기이되 그 내용들 모두 신화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화를 통해 플라톤이 드러내고 있는 핵심 요체가 다름 아닌 이곳에서 그가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신의 선성”과 그 신을 닮은 “우주의 선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우주론적 설화가 그 자신 평생을 통해 구축하고자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요체를 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신화가 다름 아니라 <국가>에서 다룬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이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플라톤 철학 연구가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와 그가 자신을 닮은 선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바라본 본paradeigm을 <국가> 제6,7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좋음)의 이데아’와 연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플라톤 철학에서 그것이 갖는 중대성만큼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작품 안내 참고)

* 플라톤이 기존의 전통적 신화들은 물론 기원전 5세기 수많은 시인들이 지은 이야기들을 왜 그토록 비판하고 새로운 신관까지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해온 신화적 세계관 즉 그리스 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곳 강해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크고 방대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이곳 논의와 관련하여 그리스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신화를 그저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하여 그리스 종교에서 가히 경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신화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신화의 내용들이 인간사와 관련된 시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리스 종교 역시 체계나 강령은 물론 성직자 같은 사람들도 따로 없었고 굳이 있었다면 다만 신전과 공물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과연 종교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화에 나타난 신들을 그들이 과연 믿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만을 고려하더라도 아테네인들에게 종교는 비록 오늘날의 기성 종교들이 갖는 양태와 거리가 있어 보여도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해 오면서 그들의 삶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종교로서 특성을 갖추었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신화의 내용들은 그들의 역사이자 태초 이래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해 온 자명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래왔듯 모두 거리에서건 집에서건 신들의 탁월성과 불멸성을 칭송하며 신들에게 안녕과 행복을 빌었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신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구했고 나라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신들을 끌어들였으며 재판관들 또한 죄를 판정하는 근거로 신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시인들은 인생사의 제반 일들을 신화를 끌어들이거나 변용해가면서 시로 노래하였고 예술가들 또한 신들을 모형으로 삼아 그들로부터 아름다움의 근거를 찾아냈다.

* 그렇다면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은 언제부터 생겨나고 확립된 것일까. 그리스신들 역시 대체로 기원전 3000년 원시시대 이래 그들이 맞이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자연신들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것들은 인간들의 소망과 기원에 반응하는 신인동형설적인 존재로 점차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것들에 이름이 붙여지고 내력과 성격이 구체화 되면서 불멸성과 탁월성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가이아와 하데스 등 제우스 이전 신들이 보여주는 다툼과 혼란상은 원시 그리스인들의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혼돈의 시대를 투영한 것이고, 제우스의 등장 이후 태양신 제우스를 정점으로 나름의 고유한 역할을 갖고 위계를 형성하고 있는 12신들은 자연들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시대 이후에 생겨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안정감이 투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이런 경험들이 오랜 기간 반복되고 동시에 집단의 단위가 점차 커지고 사회화되면서 위와 같은 자연신들 이외에 네메시스, 모이라 등 인간의 사회적 삶과 의식을 반영하는 추상적 신들도 생겨나서 도덕과 규범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남하와 정착 과정에서 척박한 환경과 오랜 기간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부족의 정치적 결속과 단합을 담보하는 이른바 정신적 토대이자 믿음으로서 그리스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종교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신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남하 과정에서는 물론 그 과정에서 유입된 이집트 종교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내면적 구원 의식과 같은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종교는 근본적으로 씨족이나 부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 또는 자연적 재앙이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고통으로부터 집단의 공적 제의를 통해 평화와 승리, 안녕과 번영을 비는 것이 기본틀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인들과 개별 가문들의 평화와 안정 역시 그러한 공동체의 평안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태초 이래 신들과 관련한 제의 내지 의식의 형태로 발달해왔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가 기본적으로 점술과 예언, 신탁이 중심을 이루고 탄원과 기원에서조차 제의와 제물 봉공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원적 배경 하에서 기원전 11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된 아테네인들 역시 매일 신들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나라는 물론 그들 자신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일로 받아들였고 정기적으로 큰 규모의 제의와 함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 같은 내력이 수많은 설화로 구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8세기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시가의 형식으로 기록되면서 차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는 물론 시인들의 선조 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와 핀다로스의 작품까지 그들의 삶과 의식을 지도하고 이끄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져 아테네에서는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암송하며 학습하는 것이 교육과 관련한 중요한 제도이자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신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의식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삶과 관습 및 행위들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면서 사회생활 전반은 물론 개인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테네의 경우,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끊임없이 전란에 휩싸이고 게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아테네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시민으로서의 결속도 서서히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크게 퍼져나가면서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관습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 외국과의 잦은 왕래가 이루어지고 거류외인은 물론 외래 사상도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생활종교로서 자리잡아온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종교 이외에, 내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들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이른바 디오뉘소스 비의(秘儀) 종교는 그나마 전통적인 종교에서 변용된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종교이지만, 디오뉘소스 신화의 변용으로서 자그레우스 신화에 뿌리를 둔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 종교 등은 비록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원죄에 대한 관념은 물론 대립되는 두 본체 사이의 투쟁으로서 삶의 개념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등 그동안 전통적 아테네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 이른바 그들의 종교적 신조로 내세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는 이오니아에서 발원한 과학과 철학의 흐름이 아테네에 유입된 이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신화에 대한 회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크세노파네스Xenophanēs(기원전 570-480)가 일찍이 기존의 신들을 냉소한 것은 그러한 변화를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전통적인 신화에 대한 창조적 변용을 통해 신들을 찬미하던 시인들마저 아테네의 번영과 그 과정에서 급속히 유입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경향을 등에 업고,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찬미보다는 인간사의 고민과 갈등 들을 작품의 주제로 내세우기 시작하였고, 하물며 신과 영웅들에 대한 냉소와 회의의 눈길도 과감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작품 속에는 전통 신화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으로 신들과 영웅들 간의 싸움이 그려져 있음은 물론 인간사와 관련한 그들 사이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도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아테네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는 더욱 크게 고취되었다. 당대 아테네에서는 종교적 제의를 거부하거나 임의로 그 형식을 바꾸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기원전 5세기 말 시인들의 신들에 대한 변용이 가히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변질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통제는 기이할 정도로 방임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제력이 쇠락해졌기도 하였지만 아테네 지성을 대표하는 막강한 기득권자로서 오랜 기간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시인들의 지위는 가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권은 소피스트들의 입장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발달되면서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멸망을 앞당기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역사를 통해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저자들이자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와 창조적 기풍을 세운 선구자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 플라톤은 이러한 아테네의 종교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오랜 역사 동안 아테네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쳐온 신들에 대한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플라톤은 그 재편을 위해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당대의 종교적 정황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전통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아테네에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종교들이 유입되어 있었고 당대의 정황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의 그림자가 아테네에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히 아테네는 이른바 곪을 대로 곪은 염증상태의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이제 플라톤은 그리스의 기존 종교를 한편으로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 과정 모두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논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것이지만 그 과정을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컨대 플라톤은 <법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제의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다신론적 전통종교를 계승하면서도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국가>가 암시하고 있듯이 철학사적 전통에서 확립된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과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신비종교를 통해 유입된 영혼불멸에 대한 의식을 토대로 인간의 안녕과 행복 국가 사회의 정의와 번영에 대한 기본 관념을 혁신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던 것이다.

 

 

[379d-380c]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거에 의거하여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들이 생각 없ἀνοήτως이 신을 나쁜 것들의 원인들로 언급한 것들이 잘못임ἁμαρτάνοντος을 분명히 한 후, 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해가며 하나하나 비판한다.(379d-380a)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린 사람νέος들이 듣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이 이것들을 신이 한 일로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고 설령 그게 신이 한 일ἔργα일지라도 그것을 위한 서술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 σχεδὸν ὃν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380a) 즉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δίκαιά τε καὶ ἀγαθὰ을 했으며 그들은 응징을 당함으로써 이롭게 된 것οἱ ὠνίναντο κολαζόμενοι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어떤 시인이 벌δίκη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며ἄθλιοι 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도록 허용해서는 아니 되고 그와 달리 만일 어떤 시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비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처벌을 받음으로써 신한테서 은혜를 입은 것’διδόντες δίκην ὠφελοῦντο ὑπὸ τοῦ θεοῦ이라고 말 할 경우에는 허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쁜 일들의 원인으로 된다는 주장은 모든 방법으로 맞서 분전해야 하며διαμαχετέον 나라가 훌륭하게 다스려지려면 제 나라에서는 ἐν τῇ αὑτοῦ πόλει 나이에 상관없이 운문, 산문 여부에 상관없이 아무도 그런 것을 말하거나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380b) 그런 이야기는 경건하지도ὅσιος 유익하지도σύμφορος 않으며 그 자체로도 모순된οὔτε σύμφωνα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 법νόμος에 대해 찬성한다σύμψηφος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이제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선한 것들의 원인임μὴ πάντων αἴτιον τὸν θεὸν ἀλλὰ τῶν ἀγαθῶν을 시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신들과 관련한 법률νόμος과 규범τύπος들 중의 하나로 분명하게 제시한다.(3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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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뿐만이 아니라 <국가>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신화들을 수시로 인용하고 있다.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그러한 인용이 논의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국가>의 논의가 우선 당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고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시가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플라톤이 그토록 때마다 신화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 강해에서는 앞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는 물론 앞으로도 신화들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화와 <국가> 논의의 내용적 연관성은 우리말 역본에 실린 주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앞에서도 신화가 포함하고 있는 ‘숨은 뜻’에 관해 설명한 바가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행한 나쁜 짓들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해도 일단 어린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숨겨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의 나쁜 행위를 숨기는 것은 사실의 은폐 차원이 아니라 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 폐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행위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한 뜻을 숨기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숨기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 숨은 뜻을 찾아내서 그 선함을 밝혀야 한다. 그냥 밝히지도 않고 숨은 뜻이 있다고만 말하면 자칫 신들의 나쁜 행위를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논의는 비록 숨은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숨은 뜻과 관련한 논의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시인들이 신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즉 ‘신들이 선하다는 것’을 찾아내어 실제로는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며, 시인들의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함께 밝히고 있는 이야기들만 허용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누군가를 응징했을 경우 그 벌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한 것이 신들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들은 나쁜 일들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경우 경건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들이 주는 벌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마땅히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것이되 그렇게 처벌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것이다.

* 사람에 대한 신들의 응징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어떤 경우에서든 신들은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법률 차원에서건 종교 차원에서건 형벌 내지 징벌과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플라톤에게 벌이란 응징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교정(矯正)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벌을 처단과 응징의 성격이 아니라 교정을 위한 가르침의 일환으로 보는 플라톤의 생각에는 사람들의 내적 변화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 믿음이 깔려 있다. 벌을 받는 사람에게 벌은 고통스럽고 일단 강제의 형식을 갖고 부여되지만 교육을 통해 그 사람 스스로 벌의 이유가 교정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스스로 잘못을 교정할 수 있으므로 나라의 지도자나 철학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구성원들이나 상대에게 늘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데이만토스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규범을 법nomo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자기도 그에 찬성투표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단순히 당위적 규범이 아니라 말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가 제도적 관습으로 채택해야할 최고의 입법 원리 즉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헌법적 규정 내지 헌법 정신임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그것을 법률과 규범으로 다시 표현하면서 첫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수호자들이 종교적 신조 차원에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둘째 규범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㉝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376c-d]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성향φύσις을 논한 후 이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양육τρέφειν되고 교육παιδεύειν받도록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가 장차 전개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나라에 있어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τίνα τρόπον ἐν πόλει γίγνεται;를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령 다소 길어질μακροτέρα 지라도 이에 대한 고찰σκέψις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후 이 사람들을 논의를 통해 교육시켜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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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수호자의 성향이 거론된 후 이제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의 시작을 장식하는 것은 수호자에 대한 교육론이다. 앞으로 수행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본격적인 국가론을 시작하면서 수호자 교육론이 일차적인 과제로 내세워지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어색하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국가론을 다룰 때 우선 논의되는 것은 주로 정부와 권력 구조, 법률과 제도 등 국가 시스템에 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틀에 박힌 물음이지만 아주 오래된 물음 즉 인치(人治)가 먼저인가 법치(法治)가 먼저인가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론의 시작을 수호자 교육론으로 장식하고 있는 플라톤의 입장은 분명 인치가 먼저라는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치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정치의 핵심에는 법률과 제도 이전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므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률과 제도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거나 그러한 믿을만한 사람의 주도 하에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독재정치의 폐해를 혹독하게 경험한 이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법치 즉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제정된 법률과 제도를 통한 지배만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통치 방식이며 모든 정치 행위 또한 그 법률적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져한다는 생각이 정치적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수호자 교육론은 현대인들에게 시작부터 그 의미가 격하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살아간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생각을 단순히 폄하만 할 일도 아니다. 플라톤은 법률과 제도에 따른 지배가 보편화된 오늘날과 달리 사람에 의한 통치가 당연시되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중대하고도 거의 유일한 정치철학적 관심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플라톤 당대에도 법률과 제도가 존재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헌법적 수준의 법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법률 또한 확고한 구속력을 갖는 오늘날의 실정법과 다른 다소 느슨한 관습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치냐 법치냐를 이분법적으로 극단화해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인치의 시대를 살던 플라톤은 물론이고 법치가 기반을 잡은 오늘날에서조차 모두가 동의하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과 제도를 갖춘 나라라고 할지라도 누가 정치권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치 현실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치와 법치는 상호 배척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라는 데에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피게 될 플라톤조차 크게 이의를 달지 않는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곳에서는 비록 인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당대의 관습법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법률체계를 토대로 법률의 지배 또한 함께 강조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이곳 <국가>의 논의에서는 인치를 강조하는 관점에서 수호자라는 통치 권력자를 핵심으로 이상 국가론을 펼치고 있지만, <국가> 못지않은 만년의 대작 <법률>을 통해 그는 헌법적 개념을 포함하여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인 입법 과정과 내용을 토대로 인치가 갖는 현실적 한계를 보완함은 물론 법치가 갖는 고유한 중대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전모를 이해하려면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 아니라 <법률>의 논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2) 그러나 일단 이곳 <국가>에서의 논의에서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무엇보다도 나라를 다스리는 수호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수호자의 성향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을 장차 제대로 된 자질과 능력을 갖춘 훌륭한 수호자로 길러내는 일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론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은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를 밝혀 정의가 왜 부정의보다 나은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찰의 목적에 대한 표현이 조금씩 달라져 오긴 했지만 수호자가 어떻게 길러지고 자라나는가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가가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가가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다.

3)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논의가 다소 길어질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가>에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차지하는 분량을 보면 다소 길다는 표현에서 우리가 느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우선 바로 이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 부분만 보아도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모두를 합해 이곳 376e부터 제3권 412b까지 이어진다. 이 분량은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35쪽에 가까운 것인데 이 분량은 우리가 제1권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핀 분량(스테파누스 쪽수로 48쪽)의 3분의 2에 가까운 분량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은 수호자를 선발한 후 본격적으로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기 이전 단계 즉 18세 이전의 아테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일종의 예비 수호자 교육만을 다루고 있다. 이후 제6권과 제7권에 가면 수호자와 통치자를 단계별로 선발한 후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교육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곳의 분량까지 포함하면(502c~541b) 수호자의 교육을 직접적인 주제로 내세워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만 해도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85쪽에 이른다. 이 분량은 <국가> 전체(327a-621d.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294쪽) 분량의 거의 30%를 차지한다. 나머지 내용도 거의 다 이러한 수호자 교육이 결과하는 내용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자체가 기본적으로 수호자의 교육과 관련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4) 여기서 양육τρέφειν이란 건강한 신체를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고 교육παιδεύειν은 건강한 혼을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기본적으로 교육은 각자의 혼 안에 있는 힘을, 마치 눈을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이, 실재와 좋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즉 혼의 전환περιαγωγῆ을 위한 방책τέχνη이다.(518c)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교육의 목적은 영혼 속에 잠재된 최상의 것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짐과 습관을 통해 혼 안에 덕을 구현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혼이 근본적으로 자신과 친숙한 것을 닮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한, 땅에 심은 식물이 토양과 대기에 의존하여 잘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 또한 어떤 것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함께 하느냐에 따라 좋음과 아름다움에 더욱 다가가고 그에 동화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425c, 492a)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376e]

*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교육παιδεία은 어떤 것일까, 오랜 세월에 걸쳐 고안된 교육방식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일까’를 물은 후, 현존하는 아테네의 전통적 교육 방식에 준해 몸을 위한 교육으로 체육ἡ ἐπὶ σώμασι γυμναστική을, 혼을 위한 교육ἡ ἐπὶ ψυχῇ μουσική으로 시가μουσική 교육을 제시한 후 이 가운데 시가 교육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시가에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이야기에 사실적인 것τὸ ἀληθές(alēthes)과 허구적인 것ψεῦδος(pseudos)이 있고 어린이παίδιον들 교육은 그 가운데 허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의아함을 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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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들 즉 시가 교육의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앞에서 언급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수호자 교육을 아테네의 전통적인 방식에 준해 수행할 것을 표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교육의 대상은 천성과 상관없이 아테네 시민 계급 젊은이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 아테네에서는 귀족 여부에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모두 어려서부터 18세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언급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마친 후 수호자를 선발할 때에도 천성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오직 교육의 결과에 따른 능력만을 기준으로 선발하고 있다. 현대 비평가들은 종종 플라톤이 태생에 따른 천성의 차이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주의자로 그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공고한 신분사회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가문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오직 능력에만 기초하여 교육의 기회는 물론 통치자의 자격까지 부여한 그의 구상이야말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할 그의 진면목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천성적 성향을 더욱 살려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천성적 성향이 다소 모자라도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천성적 성향을 가지고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 못지않은 수준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훌륭한 양육과 교육이 수반되지 않으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 참고로 이곳 제2권과 3권에서는 수호자를 기르기 위한 초기 교육의 일환으로 시가 교육과 체육 그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과학 교육이 이루어지고(18세까지) 18세부터 2,3년 동안은 수호자로서 군사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강화된 체육교육이 이루어진다. 이후 20세가 된 수호자들 가운데 통치자가 될 사람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30세까지 어린 시절 받았던 기초 수준의 과학 교육에 이어 체계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을 받으며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35세까지 최고 수준의 철학 교육 즉 변증술 교육을 받는다.(537a-d) 물론 이때에도 시가교육은 지속적으로 부과된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명실공한 통치자들로서 15년 동안 도시의 관리와 행정, 군사 관련한 고위 직책을 맡아 나랏일에 봉사하고 50세에 이르면 그러한 모든 일에서 벗어나 철학적 관조에 시간을 보내면서 순번에 따라 철학자왕의 역할을 수행한다.(540a-b) 이때 철학자왕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만 왕으로 봉사한다. 철학자들이 순번대로 왕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넓게 봐서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하겠다. 이것은 <법률>에 가서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라는 집단지도체제로 구체화된다.(<법률> 908a-908a, 672d)

3) 수호자의 교육과 선발에서는 물론 앞으로 펼쳐질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보여주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호자의 교육 방식 좀 더 정확하게는 장차 수호자 선발을 위한 청소년기의 예비 교육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채택하고 있는 교육방식은 일단 현존하는 전통적인 아테네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이상국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수호자 교육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그가 변혁하려는 아테네의 기존의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고 있는 기본 문제의식은 물론 그 구현 방법론에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백지상태에서 그가 꿈꾸는 대로 설계하고 건설되는 이상국가가 아니다. 앞서 나라의 기원과 발달에서도 살폈듯이 그의 이상 국가로서 정의로운 국가는 염증 상태에 빠진 나라를 정화하여 세워지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와 같은 염증 상태의 나라가 쉽게 정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당대 아테네는 물론 몇 차례의 쉬라쿠사이에서의 정치실험을 통해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평생을 통해 목도한 아테네 현실은 정화의 구상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견고하고 그 역사적 뿌리 또한 너무 깊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정의로운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피폐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인 동시에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그가 찾아낸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정의로운 수호자를 길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 현실에서 어린이는 물론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쳐왔던 교육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일 유연한 어린 시절부터 18세까지 이루어지는 시가 교육이었다. 특히나 시가 교육은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단순한 예술 교육을 뛰어 넘어 평생을 통해 아테네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아테네 현실 또한 오랜 시간 그와 같은 시가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다. 그런 만큼 플라톤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시가 교육의 개혁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가 내용의 토대를 이루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그 자체의 역사적 권위뿐만이 아니라 이후 여러 시인들에 의해 수많은 작품으로 각색되고 변용되어온 만큼 그것을 모두 폐기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그 방대한 분량을 대체할 새로운 시가를 창작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론에서 채택한 방법은 기존의 시가 교육 방식에 따르되 신화의 근본 축을 이루어야 할 규범들을 새로 마련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시가 내용에서 잘못된 내용을 철저히 바로 잡아 장차 수호자가 될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기존 설화들을 비판하자 그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이냐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들은 나라의 수립자로서 신화를 지어내는 시인들이 아니라 그 시인들에게 규범τύπος을 제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도(378e-379a) 그러한 앞뒤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4) 여기서 우리는 이제 시가와 시가 교육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아테네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지배할 정도로 심대한 것인지를 살펴야할 할 때가 되었다. 사실 <국가>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시가 교육을 어린 시절 어린이의 감수성에 맞추어 부여되는 예술 교육 정도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에서 시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이나 시문학 정도의 성격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가μουσική(mousikē)는 뜻만으로는 무사(Mousa) 여신 즉 뮤즈 여신들이 관장하는 모든 기예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는 직접적으로 그리스의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신화는 아테네의 조상들의 믿음과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전승되고 오랜 동안 그들의 의식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 기원전 5세기 시절에 이르러서는 아테네인들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는 거의 종교적 경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신화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중요성에 따라 여러 시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각색되어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창작되었고 그 작품들 가운데 우수한 작품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혹은 축제 때마다 연주와 합창, 춤을 동반한 연극의 형식으로 상연되기도 하였다. 즉 아테네에서 연극은 단순히 오락을 위한 연극 수준을 넘어서서 일종의 시민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가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믿음을 담은 시문학적 담론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은 노래와 춤 모두를 포함한 일종의 종합적인 종교 예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은 단순히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젊은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음악이나 예술 교육만이 아니라 아테네인으로서 일반교양은 물론 표준적인 가치관,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 굳이 오늘날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플라톤은 기존 시가 교육이 갖는 토대 위에서 그 장점들을 수용하고 존중하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규범들 특히 신의 선성과 관련한 혁명적인 관념을 내세워 기존 시가의 잘못된 부분을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은 물론 아테네 사람들 모두에 대한 의식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데 이러한 시가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담고 있는 담론의 내용 즉 이야기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있어 이야기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사실과 허구로 구분한 후 어린이들의 시가 교육은 허구적인 것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구’라고 번역한 말의 그리스 원어는 ψεῦδος(pseudos)이다. 그런데 pseudos의 원래 의미는 거짓말,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학적 허구도 사실이 아닌 것을 지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우리말 역어로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말은 매우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갖는다. 문학적 허구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거짓말은 모두에게 일단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소크라테스가 시가 교육에서 pseudos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의아해한 것도 아마 pseudos가 갖는 거짓말의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육 특히 어린이 교육에서 거짓말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잘못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pseudos의 원래 뜻인 거짓을 살려 모두 거짓말로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가 최소한 신들과 관련해선 상당 부분 거짓말임을 밝히려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려나 우리는 역본들에서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역어를 함께 접하게 되겠지만 그 두 역어의 그리스어 원어는 모두 pseudos임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읽어야 한다.

6)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으로, 시가는 혼을 위한 교육으로 구분하지만 나중 체육을 따로 논하면서 체육도 궁극적으로 혼을 위한 교육임을 밝힌다.(410c)

 

[377a-378a]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처음엔 어린이들에게 설화μῦθος를 이야기해준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설화는 대체로 허구이지만 사실적인 것ἀληθῆ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 후 어린이들에게 신체 교육 보다 설화 교육을 먼저 이용하는 이유를 시가 교육을 체육 보다 먼저 착수하는 이유와 등치시킨다. 설화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어리고 연약한νέῳ καὶ ἁπαλῷ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모든 일의 시작ἀρχὴ παντὸς ἔργο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377a) 그것은 어렸을 때가 가장 유연성이 있고μάλιστα πλάττεται 누군가가 각자에게 새기어 주고 싶은 인상이 제일 잘 받아들여지기ἐνδύεται τύπος ὃν ἄν τις βούληται ἐνσημήνασθαι ἑκάστῳ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지어낸 이야기로μύθους πλασθέντας 닥치는 대로 듣게끔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이 커서 반대되는 생각들을 마음속에 지니게 해서는 안 되며(377b) 그에 따라 설화 작가μυθοποιός들을 감독하여ἐπιστατητέον 그들이 짓는 것이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377c)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모들과 어머니들에게 훌륭한καλὸν 이야기로 아이παῖς들의 혼을 형성해주도록πλάττειν τὰς ψυχὰς 설득하고πείσομεν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많은 것은 버려야만 한다ἐκβλητέον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버려야하는 설화에는 큰 규모와 작은 규모τούς τε μείζους καὶ τοὺς ἐλάττους가 있지만 그 모두 틀τύπος은 같고 같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377d) 그 큰 규모의 설화가 다름 아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및 다른 시인ποιητής들이 구성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허구적인ψεῦδος 설화임을 밝힌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허구적인 설화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탓하는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 무엇보다도 제일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서 ‘좋지 못한μὴ καλῶς 거짓말’(377e) 즉 마치 화가γραφεύς가 전혀 닮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과 같은, 신과 영웅들에 관해 나쁘게κακῶς 묘사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지 못한 거짓말로서 가장 큰 거짓말, 가장 중대한 것들에 대한 거짓말τὸ μέγιστον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γίστων ψεῦδος로서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한 우라노스Οὐρανός가 저지른 짓과 크로노스Κρόνος의 행적을 적시한다. (3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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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이에게 설화를 이야기할 때 허구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설화에는 사실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이른바 옛날이야기나 동화들은 기본적으로 허구pseudos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구pseudos에는 훌륭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리고 연약한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설화 작가들을 감독해야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큰 규모의 설화 가운데에는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좋지 못한 거짓말pseudos 즉 나쁘게kakōs 묘사한 것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언급들을 토대로 pseudos를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다시 분류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 a) 사실과 다른 사실 왜곡으로서 pseudos.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말 뜻 그대로 거짓말. b) 지어낸 것으로서 훌륭한 것 즉 훌륭한 허구로서 pseudos. c) 지어낸 것으로서 나쁜 것 즉 나쁜 허구로서 pseudos.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할 근본 전제가 있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훌륭하고 선한ἀγαθὸς 존재이다.(379b) 그러므로 어떤 설화이든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로 잘못 묘사한 거짓말 즉 위의 구분 상 a)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에서도 신들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리고 신들을 좋게 묘사한 것은 위의 기준으로 b)에 해당하는 신에 대한 진실로서 훌륭한 허구 아니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 시인들이 지어낸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1)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는 a)와 c)의 구분이 따로 없다. 이와 달리 좋게 지어낸 것은 훌륭한 허구 즉 b)에 해당하는 pseudos이다. 요컨대 위의 분류에서 소크라테스의 어법에 따르면 최소한 신과 영웅과 관련해서는 a)의 pseudos와 c)의 pseudos는 모두 우리말 거짓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b)에서처럼 좋게 묘사하면 앞서도 말했듯 훌륭한 것 즉 좋은 pseudos 아니면 사실로 인정된다. pseudos가 어쨌거나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한, 소크라테스에게는 비록 이곳에서는 신과 관련한 이야기에 국한 되어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설화작가건 시인들이건 정치가이건 간에 좋은 허위, 좋은 거짓말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는 셈이다. 거짓말의 문제는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하여 나중에 다시 또 다루어질 것이다.

2)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어린이에게 들려 줄 설화 가운데 많은 것을 버려야 하고 또 그러한 것을 지어내는 설화 작가를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감독의 대상이 어린이를 위한 설화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경우 오늘날에도 감독의 필요성이 요구되듯이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면 기존의 신화나 설화는 물론 새롭게 창작되는 시인들의 작품 모두에 검열의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검열하는 다시 말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으로 그 해당 부분에 가서도 각각 살피게 되겠지만 우선 이러한 비판은 앞에서 우리가 살폈듯이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성격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규범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선한 신의 관념 등을 고려하면 그렇게 적확하고 합당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앞서 살핀 대로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문학 내지 예술 작품의 창작이나 일반적인 예능 교육 차원을 넘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국가 종교 내지 세계관 교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시가 교육은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아테네 시민으로서 함께 공유해야할 진실이자 함께 지켜나가고 유지해야할 일종의 이념이자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설계하는 이상 국가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부분보다도 엄중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 영역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플라톤이 시가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으려는 새로운 신관은 이상 국가의 이념에 준하는 매우 중차대한 교육 목표의 하나임을 고려하면 수호자에 대한 시가 교육에서 신들과 관련하여 거짓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게 용인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오늘날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양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국교 교육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오늘날 다종교 국가에서 조차 개신교 교리 교육과정에서 코란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혹은 이슬람 교리 교육과정에서 불교 경전을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그것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가르치는 경우 아무런 감독 없이 자유로운 학술활동으로 방임하기란 상상조차 힘들다.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갖고 있는 이러한 특수한 성격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신들과 관련한 거짓말을 감독하는 것과 마치 오늘날 일반 시민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것을 등치해서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플라톤은 수호자 교육에 있어 아테네의 시가 교육 방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만은 아테네 사회에서 경전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의 핵심 내용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의 이상국가론이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기 위한 이론임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배척하고 진정한 신관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그 자신의 철학적 실천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이 문맥이 담고 있는 합당한 의미라 할 것이다.

3) 박종현 역본에서 ‘허구적인 설화를 구성해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냥 ‘거짓말로 설화를 구성하여’로 변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그래야 그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뭔가 탓을 하려는 것으로 여기는 아데이만토스의 태도가 이해된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여기서(377a) ‘좋지 못한 거짓말’은 신화 내용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 그냥 ‘사실과 다른 거짓말’을 의미하고 ‘나쁘게 묘사할 경우’ 또한 ‘사실과 다르게 잘못 묘사할 경우’를 의미한다.

 

[378a-b]

* 소크라테스는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설령 그것이 진실ἀληθῆ이라 할지라도 어린 사람νέος에게 그것을 경솔하게 들려줄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σιγᾶσθαι이 상책이며 불가피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비밀리에 최소한의 소수ἐλάχιστος만이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이 나라에서ἐν τῇ ἡμετέρᾳ πόλει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가 듣고 있는데 누가 그런 극단적인 부정의ἀδικῶν τὰ ἔσχατα를 저지르는데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해서도 아니 되고 정의롭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온갖 방법으로 응징하는데도κολάζων 위대한 신들도 그런 짓을 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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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주장 또한 전체주의 내지 독재시대에 횡행했던 금서 정책 또는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 금지 내지 정보의 독점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물론 극히 소수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그러한 방침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당연히 오늘날 확립된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지식과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이 역시 정의로운 국가를 설계하면서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과정에서 나라의 중추적 이념이자 가치관의 기초가 되는 신들에 관한 관념을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임을 고려하면, 기존의 잘못된 신화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신은 선한 존재임에도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주 중차대한 거짓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그것은 신들과 관련한 특정 사실의 은폐가 아니라 신들에 대한 거짓 정보의 폐기 내지 부정이었던 것이다.

* 그럼에도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침묵이 상책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신과 관련하여 여전히 뭔가 진실을 숨기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말이기 보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어린이 교육의 필요상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달리, 이후 신들의 나쁜 이야기에는 뭔가 다른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을 수 있다는 시사를 내비치고 있음(378d)에 기초하여 이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행실은 겉으로 나쁘게 보이지만 뭔가 숨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행적은 순진한 어린이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한지라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중에(380a) 소크라테스가 그와 같은 숨은 뜻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신들의 나쁜 행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기존 신화에 실린 신들의 나쁜 행적 모두가 합리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것은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그 자체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떨어진다. 플라톤이 최대한 기존 신화에서 신들의 선성을 살려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여 정의로운 국가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종교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나중 살피게 되겠지만 그가 내세우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플라톤의 이러한 종교 개혁이 가히 혁명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독일 이데올로기』 1, 2 출간 안내(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이병창 옮김, 먼빛으로, 2019년 7월 5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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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 1, 2 출간 안내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이병창 옮김, 먼빛으로, 2019년 7월 5일 발간)

 

맑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가 완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병창 선생님이 10년에 걸쳐 흘린 땀과 노력이 두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도 완역이 드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완역되었습니다. 매우 의미있는 성과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아직 완독한 분들이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아래 출판사의 책 소개와 서평으로 알림을 대신합니다. 앞으로 [철학자의 서재]에서 서평으로 다시 만나보기를 고대합니다.

 

  • 출판사 책 소개와 서평

 

『독일 이데올로기』는 『자본론』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저서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6에서 1847년까지 공동으로 작성한 이 저서를 통해 사상의 역사에서 역사적 유물론이 탄생했다.

 

이 저서는 그동안 1권 1장에 해당하는 포이어바흐 장만 번역됐다. 이제 처음으로 전체 저서 1권, 2권이 완역됐다. 이 저서의 완역은 전 세계에서도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이다. 1918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세워진 한인사회당이 우리나라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기점이라면 근 100년 만에 완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이후 전 세계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가 퇴조하면서 다시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곳곳에서 모색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마르크스 엥겔스가 지은 『독일 이데올로기』가 처음으로 완역된 것은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치열한 논쟁 시대의 산물이다. 1840년대 독일은 철학의 시대이다. 이 시대 철학을 대표하는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 모제스 헤스 그리고 마르크스, 엥겔스는 서로 치고받았다. 이 저서에서도 문체나 내용을 통해 그런 논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저서에서 타자의 말로 타자를 비판하는 아이러니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빌린 풍자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두 권으로 기획했다. 그 가운데 『독일 이데올로기』 1권은 바우어와 슈티르너의 관념론적 역사 철학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이런 비판 과정에서 그들이 옹호했던 포이어바흐 유물론의 한계를 깨닫고 추상적 유물론에서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가게 됐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보듯이 인간 역사를 “감각적인 인간 활동,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역사관이다.

 

이어 『독일 이데올로기』 2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의 진정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모제스 헤스 등은 생 시몽 등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을 독일화하여 이를 진정 사회주의로 불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2권에서 공상의 산물인 진정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실제 역사를 반영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이행할 필연성을 제시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마르크스의 역사, 혁명 이론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작업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런 치열한 논쟁 덕분에 출현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비극적 운명을 걸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당시 독일의 문화 권력자들을 비판하면서 이 저서의 수고를 완성한 다음에도 좀처럼 출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수고는 창고에 처박혀 쥐들의 비판에 맡겨졌다.

 

이 저서의 운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완성 수고로 남은 이 저서는 여러 차례 편집됐다. 대표적인 편집본인 MEW판, MECW판, MEGA2판을 제외하고도 수없는 편집본이 난립했다. 이런 편집본 역시 그 시대 정치 사회적 대결을 반영했다.

 

이 번역본의 후기에 이 책의 간난한 운명, 그 탄생의 비화와 편집의 논쟁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위의 세 가지 판본이 특히 차이가 나는 지점은 1권 1장 포이어바흐 장이다. 이 책은 포이어바흐 장을 세 가지 판본이 각기 어떻게 편집하였는가를 비교 분석하여 놓았다. 이런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동안 잘못된 맥락에 놓여 있었던 포이어바흐 장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역자의 10년간에 걸친 부단한 노고를 통해 마침내 『독일 이데올로기』의 완역이 세상에 탄생의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저서의 완역을 통해 그 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부분이 알려지면 마르크스 엥겔스에게서 여러 가지 새로운 이론, 사상,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라면 마르크스 엥겔스가 슈티르너를 비판하면서 제시한 유용성 이론이다. 이 완역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출현할 것으로 기대한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8월 마당(4회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무더운 날씨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에 다들 건강하신지요?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8월 마당(4회차)를 안내합니다.

지난 6월에 이어 철학 마당 4회를 맞았습니다.

이번 회에는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이 좀 더 드러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회원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8월 마당> 사회 :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주제 : 중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유가철학, 도가철학, 선불교철학 등
* 일시 : 2019년 08월 17일(토요일) 오후 2시
* 공동좌담자(가나다순) :

①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②김선희(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

③이병창(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④이 지(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⑤이현구(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초빙교수)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 이후 일정 ***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㉜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서론 강해에서 <국가>의 목차를 언급하며 살폈듯이 우리는 권수를 기준으로 제1권을 <국가>의 서론, 그 이후 제2권부터 9권까지를 본론, 제10권을 에필로그로 나누고, 본론의 첫째 부분을 제2권에서 제4권까지, 둘째 부분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셋째 부분을 제8권에서 제9권까지로 구분하여 <국가>를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권수를 고려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제1권부터 호사스런 나라에서 수호자가 등장하는 바로 앞 374e까지를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앞서 진행된 서론적 논의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다만 소소하게는 위의 견해와 같되 수호자의 성향까지를 서론적 논의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강해는 <국가>의 서론적 논의(제1권부터 제2권 357a-374e까지)를 모두 마무리한 셈이다.

* 이에 따라 이제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비유를 내세워 논의를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하고 나라의 발전에 따른 계층들의 발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과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정의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그것들의 유기적 연관성을 토대로 전개될 것임을 일러 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필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의 첫 부분 또한 그러한 구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나라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나라의 구성 요소로 생산자 계층, 수호자 계층(통치자 계층 포함)을 등장시킨 후 → 수호자의 교육 이념을 통해 그 세 계층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고 → 그 다음 단계로 개인의 영혼 또한 나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이성, 기개, 욕구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힌 후 → 그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도 나라의 정의와 동일하게 영혼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게 될 위와 같은 논의 내용들을 강해 서론에서 제시한 목차를 기준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제2권 375a-제4권 끝)

 

  1. 본론 1,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나라의 기원(357a-374e)
  2.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3.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

{376e-383c(제2권 끝), 제3권 386a -392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3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권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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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 <국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강해를 이어가자.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2.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374e]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τὸ τῶνφυλάκων ἔργον이 가장 중요하고μέγιστον 그만큼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σχολῆ를 요구하는 한편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τέχνη과 관심ἐπιμελεία을 요하는 것임을 밝힌 후 곧바로 수호자들에 적합한 성향φύσις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일에 착수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상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며 주춤 거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375a-b]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가문 좋은 젊은이의 성향과 지키는 일의 관점에서φυλακὴν 혈통 좋은 강아지σκύλαξ의 성향은 서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φύλαξ나 강아지 모두 감각αἴσθησις에 있어서는 예민해야ὀξύν 하고 감지된 것을 추적하는데 날렵해야ἐλαφρός 하며 붙잡고 싸워야 할 때는 힘이 세야만ἰσχυρὸν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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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kyōn라고 해도 상관없음에도 젊은이에 맞추어 새끼 강아지로 표현한 것은 강아지의 원어 skylaks와 수호자의 원어 pylaks의 말미가 같다는 것을 고려한 말놀이일 수도 있다. 개kyōn는 개를 나타내는 명칭 그대로 아테네에서 이른바 퀴니코스kynikos 학파(the cynics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내리고 있는 개의 함축과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개의 함축이 거의 상반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흥미를 끈다. 플라톤의 개는 나라를 책임지는 수호자에 비유되고 있지만 견유학파의 개는 오히려 나랏일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375b]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개이든 그 밖의 어떤 동물이든 맹렬하지θυμοειδὴς 못한 것이 어찌 용맹한가ἀνδρεῖος를 반문하고 격정θυμός이야말로 그것이 일게 되었을 때 마음ψυχὴ 이 모든 것에 대해 겁이 없고ἄφοβός 꺾이지 않는다ἀήττητος고 말한다.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성향은 신체적으로는τοῦ σώματος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하는데 날렵하고 힘세어야 하고 심적으로는τῆς ψυχῆς, 격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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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는 동물에 대해 쓰일 때는 맹렬함의 의미를 갖지만 사람에게 쓰일 때는 기본적으로 격정, 분노의 의미를 갖되 생각이 깃든 분노 즉 의분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감정적 격분과는 달리 이지적 측면 즉 자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개의 성격을 갖는다. to thymoeidēs는 이후 플라톤에 의해 개인의 영혼에서 ‘기개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된다.

 

[375c-e]

* 그런데 이러한 성향들은 수호자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거칠어ἄγριος 서로와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διολέσαι 있으므로 친근한 사람에게는 온순해야하고 적들에 대해서만 거칠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호자는 온순하면서도 대담한 성품 ἅμα πρᾷον καὶ μεγαλόθυμον ἦθος 즉 서로 대립적인ἐναντίος 온유한πρᾶος 성향과 격정적인θυμοειδής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대립적인 성향을 함께 갖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수호자에 비유한 혈통 좋은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두개의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고 있는 수호자를 찾는 일은 ‘자연에 어긋나는 게 아니’οὐ παρὰ φύσιν라고 말한다.

 

[ 376a-c]

* 그런데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되 친한 사람의 모습과 적의 모습을 식별καταμαθεῖν하여 그 앎과 모름에 의해 친근한 것과 낮선 것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개의 천성의 상태는 영리하고κομψός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배움을 좋아한다φιλομαθὲς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나라의 훌륭하디 훌륭한καλὸς κἀγαθὸς 수호자가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정적이며θυμοειδὴς 날래며 굳세야ταχὺς καὶ ἰσχυρὸς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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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음미할 것이 있다.

 

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필요한 계층들이 생겨나고 마침내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대문자에 해당하는 정의로운 나라를 살필 준비가 갖추어진다. 장차 드러나겠지만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들은 소문자에 해당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의 세 부분들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기본적으로 수호자 계층에만 집중되어 있다.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에 수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기층 생산 계층이 지성의 지배로 표징되는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 자리를 차지하기란 처음부터 난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논의를 시작하면서 수호자의 성향부터 꺼내든 것 역시 수호자 계층 또한 분업과 전문화 원칙에 따라 무엇보다도 타고난 적성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자의 성향을 다루는 이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들의 부분이 어떤 것들인지가 거의 명시적이다시피 드러나 있다. 수호자의 성향 자체가 수호자의 내적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수호자의 성향에 관한 서두 부분은 나중에 펼쳐질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 대한 예비적 암시이자 나라의 계층들과 개인의 내적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아예 미리부터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실제로 수호자의 성향을 강아지에 빗대어 신체적으로는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에 날렵하고 싸울 때 힘이 세야 하고, 심적으로는 맹렬해야(격정적이어야)하며 동시에 아는 사람과 낯선 사람을 식별함에 있어서는 지혜롭고 영리해야 한다는 언급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장차 개인의 내적 영혼들을 나타내는 말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격정적’이라는 말 thymoeidēs는 나중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와 표현부터 그대로 일치하고, 식별하고 헤아리는 능력 역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logistikon(명사형 logos)와 내용적으로 일치하며, 감각을 뜻하는 aisthēsis나 신체적 능력을 나타내는 ischus라는 말 역시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epithymētikon(명사형 epithymia)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이다.(440e 참고) 특히나 개의 능력과 관련하여 친한 사람과 적을 구별하는 능력과 연관해 사용하는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os’라는 말과 ‘배움을 좋아하는’philomathes라는 말은 수호자의 성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향을 나타냄과 동시에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성적인 부분이 갖는 성격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듯 이곳에서의 수호자의 성향은 장차 언급될 영혼 3분설에서 언급되는 영혼의 내적 부분들과 그대로 일치한다. 물론 영혼 3분설이 사람 일반에 적용되는 한, 수호자뿐만 아니라 생산자 또한 이성적 부분, 격정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영혼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차츰 밝혀지겠지만 그것들 세 부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그들 각각의 전체적인 성향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갖게 된다. 마치 장기판의 장기 알들은 모두 똑같지만 장기판의 형세는 두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3) 소크라테스는 온순함과 대담함, 온유와 격정이라는 대립적 성향을 함께 갖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훌륭한 수호자란 불가능하다고 운을 뗀 후, 곧바로 개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또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간단히 판정해낸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자문자답을 곱씹어보면 이 부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읽고 넘어갈 곳이 아님을 이내 직감하게 된다. 물론 상식적 수준에서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 즉 전사가 하는 일이 아군과 적을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정반대의 태도로 임하는 것이 당연한 한, 그 말에 달리 주목할 만한 의미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호자 가운데 통치자가 선발되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정치 행위임을 고려하면 이 문맥은 한층 중요한 의미로 다가 올 수 있다. 즉 그 말은, 나라에 늘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 모두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인 한, 수호자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즉 통치의 핵심은 그러한 대립적인 것들 중 하나를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하나의 옷감으로 만들어 내는 직조술을 정치가의 기술로 언급하고 있는 <정치가>의 내용(281a-283b)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4) 그러나 이 문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가 그 동안 씨름해왔던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의미와 논쟁거리를 안겨준다. 우선 플라톤 이전 시기까지 그리스 지성계를 지배해왔던 엘레아주의적 사고에서 보면 대립자들이 함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하다. 엘레아주의자 말대로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는 한, 오로지 부동의 일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런 식의 접근은 현실을 공간적 사고에만 가두어 두는 것으로서 시공간 속에서 만상이 엉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엄연한 실재로 우리 앞에 현존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자론자들처럼 운동하는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허공kenos이라는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운동을 그저 원자atom들의 물리적 충돌로만 설명하려는 것 또한 혼돈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제하는 방안이 될 수 없다. 이에 플라톤은 대립적인 것들이 함께 엉켜 변화무쌍하게 운동을 거듭하는 것이 현실의 진상(眞相)인 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존재론을 제시하고 그 현실의 변화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내야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으로 현실을 해명하는 참된 길이며 동시에 모멸의 현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요컨대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존재to on와 생성to aei gignomenon이 있다하더라도 현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로 환원될 수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해체되지도 않는 제3의 것이다. 현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 속에는 이른바 존재적 성격과 생성적 성격이 무한히 관계 맺으며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 현실의 단적인 국면이 드러나는 곳이 곧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어떠한 능동자poioun의 개입이 없는 한 현실은 무규정적apeiron 욕망이 지배하면서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고 개인은 불행의식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 무규정적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불행한 현실은 어떻게든 다양한 욕망이 함께 공존하는 방향, 즉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운동하되 지향과 목적telos을 가져야 한다.

5) 그러나 운동은 해체를 의미할 뿐이라는 종래의 사고로는 그러한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운동하되 그 지향의 끝 즉 자기동일성을 동시에 담보해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부동의 형상을 넘어 그 힘을 생명체의 자기 운동에서 발견한다. 생명체야말로 운동을 통해 오히려 자기 동일성을 보전하고 그 스스로의 합목적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운동의 정지는 자기동일성의 상실이며 해체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형상의 초월성을 인정하되 자기 운동을 통해 오히려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보전하고 다(多polla)의 영원한 조화와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agahthon)의 실재 또한 진실로 통찰한 연후, 완벽한 생명체로서 그 우주의 내적 생명력으로서 ‘우주 영혼’을, 현상세계와 인간의 욕망을 우주적 질서로 견인하는 지고의 근거이자 힘으로 천착해낸다. 그리고 플라톤은 다행스럽게도 신들이 현실의 생명체를 만들면서 인간을 가장 자신의 영혼과 닮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우주 영혼을 본 그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혼돈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우주 영혼을 본으로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철학자의 현실 개입이야말로 현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지적 실천이자 최선의 정치이다.

6) 이처럼 플라톤은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생성을 넘어 현실을 구제하기를 열망했고 그에 따라 자기동일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존재론을 마침내 우주에 대한 성찰로부터 천착해냈다. 우주는 끝없이 자기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해체되지 않으며 수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질서 속에서 완벽하게 조화시키고 있는 유일한 실재이자 가장 선하고 완벽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주 영혼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하고 그 영혼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현한 철학자를 통해서 혼돈의 현실이 변혁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그야말로 전래의 엘레아적 일자에 버금가는 존재론적 지위를 우주적 생명력의 기초로서 우주 영혼에 부여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자의 영혼은 우주 영혼을 본으로 삼아 물질의 필연성에 끝없이 반역하고 거스르는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가장 능동적으로 가장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모든 부분들과 모든 차이들과 모든 대립자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질서로 용융해내는 지고의 영혼, 즉 우주 영혼의 최상의 모상이었던 것이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 수호자의 성향에 대한 논의에 이어 수호자의 교육론이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35쪽에 이를 정도로(376c-412b) 상당히 길게 펼쳐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의로운 국가를 구축하려는 그의 언급의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수호자 교육론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며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수호자 교육론의 대부분이 시가교육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 시가 교육에 관한 내용은 매우 중대하고 독립적인 주제를 이루므로 다음 시간에 다루기로 한다.

 

<공지> 정암학당 강해가 여름 방학을 맞아 일시 휴강함에 따라 본 웹진 강해는 잠시 쉬었다가 8월 15일 경에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