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 2020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철연 2020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링크https://youtu.be/iPgwkp4YGcQ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지금, 우리’의 전통철학 – 유학의 현대적 연구”라는 주제로 동양철학 특집으로 2020년 하반기 월례발표회를 총 4회 진행합니다.

그 처음은 김정철 선생님의 지난 8월 발표로 시작합니다.

– 주 제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
– 발표자 :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 토론자 : 조현웅(한국학중앙연구원)
– 사회자 : 박민철(한철연 학술1부장, 건국대)
– 일 시 : 2020년 8월 1일 오후 3시
– 장 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방 식 : 비공개 방식(오프라인 촬영 및 영상 업로드)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내가 읽는 『자본론』]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지난 8~9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등의 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의사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한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내가 속한 세대와 나 자신에 대한 성찰도 많이 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를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그 세상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언론에서 의사파업과 자주 같이 묶이는 것이 ‘인국공 사태’이다. 내가 접한 수많은 칼럼과 기사들에서는 이 두 사건이 같이 언급되며 청년세대의 이기심과 잘못된 공정관념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나는 역시 그 비판에 동의했다. 우리 세대가 공정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세대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청년세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나는 조금씩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비난들이 다소 ‘불공정’하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청년 개개인들의 이기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 ‘이 시국에 어떻게 파업을 할 수 있냐’며, 인국공 사태에 관해서는 ‘같이 살 방법을 모색해야지, 시험으로 얻은 권위만을 진정한 공정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 얕은 사고’라며.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며 수없이 한숨을 쉬었지만,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경쟁의 틀 안에서 자라야 했던 우리는 가족 안에서,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을까요?

세대들은 서로로부터 독립된 게 아니라서, 다음 세대는 반드시 이전 세대의 거울일 수밖에 없다. 이전 세대가 어떤 가치를 추구했고, 어떤 싸움을 벌여왔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모습이 달라진다. 모든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번 의사파업은 코로나19 이전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이 생명을 얼마나 함부로 다뤄왔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창궐 이후로 우리 모두가 생명과 연대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되었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어땠나? 나는 세월호 사건을 기억한다. 아직도 기업이 안겨준 수십억 빚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삼성 백혈병 사태를,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구의역 김 군의 죽음에서 멈추지 않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산재, 노동자들의 죽음을, 그 뒤에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무능한 국가를 생각한다. 마땅히 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회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해 다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수많은 약자를 떠올린다. 기성세대에 감히 송구한 발언을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어떤 윤리와 미덕도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세대가 유일하게 약속받은 것은 1등이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보장이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1등이 되어야 해고될 걱정 없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언젠간 내 집을 갖고, 내 집만이 아닌 내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여러 다른 집도 가질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내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1등이 되려고 했다.

그러니 청년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정의 개념은 당연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더 빨리, 더 멀리 뛰어야 하는 경주에서는 당연히 그 누구도 옆 사람과 함께 뛰려고 하지 않는다. 청년세대가 잘못된 공정을 쫓고 있다면, 그 공정의 틀을 제공한 기성세대도 함께 반성해야 한다. 공생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공생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모든 이의 노동이 존중받고, 모든 이의 생명이 존엄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이토록 이기적일 필요가 있었을까.

자본론 제8장과 제9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과정 중에 가치가 변하지 않는 ‘불변자본’과 가치가 변하는 ‘가변자본’을 구분하여 착취가 어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 결론은 가변자본 중 노동자의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의 몸이 움직이는 동안 노동자는 자신이 버는 임금 이외의 가치들도 창출하는데, 그 가치는 자본가가 다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이 자본론의 해설은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거의 마흔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잉여가치 발생 및 착취의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다. 직접 읽어보길 권장하지도 않는다. 같은 부분을 7시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다 가져가더라도, 노동자가 충분히 먹고살고, 또 건강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그 누구도 불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의 발생을 문제 삼았던 이유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 착취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 비추어 보자면, 과로에 시달리는 택배 노동자들(나는 최근에 택배 노동자들이 택배 분류작업을 직접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의 빌어먹을 ‘빠름’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값싼 배달료가 목숨 값이 되어버린 배달 플랫폼 라이더들, 방학에도 수업 준비를 하고 연구를 해야 함에도 학기 중에만 월급을 받는 시간강사들 등의 착취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윤 앞에 이들 자신의 안전과 건강은 늘 뒷전이다.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지만, 어쩐지 살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고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긴 후에 쭉 지켜본 한국 사회는 격변의 사회였다. 하지만 어쩐지 수많은 ‘격변’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담론은 개인의 윤리와 잘못에 대한 논의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이번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난데없이 재활용 분리수거라니.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으나, 최근에 어떤 기사를 통해 접한 플라스틱 재활용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되는 플라스틱 중 아주 낮은 비율만 재활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에는 재활용 비용이 너무 비싸다거나, 기업이 플라스틱과 다른 소재를 섞어 재활용이 불가능해진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플라스틱이 재활용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왔다. 나라에서는 분리수거를 적극 격려하고, 기업에서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이라고 선전을 하니 비닐도, 페트병도 열심히 분류하고 음식물이 묻은 플라스틱은 깨끗이 씻어서 배출했다. 플라스틱만이 아니라 종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떼어도 잘 떼어지지 않는 택배 운송장의 마지막 코너까지 긁어내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난감하게 비닐과 종이가 섞인 포장을 둘로 열심히 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로벌화 된 기후변화 이슈에 대응하는 것은 윤리적 개인이었고, 개인일 뿐이었다. 국가나 기업은 마치 치어리더처럼 재활용을 격려만 하는 동안 개개인은 환경에 대한 죄의식과 일종의 의무감으로 모든 짐을 짊어졌다.

기후변화 얘기에 아직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의사파업으로 돌아가 보겠다. 최근 의대생들이 거부했던 의사 국시를 다시 보게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정부는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고, 사람들은 고소해했다. ‘그거 봐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설치랬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나도 이제 와서 이미 지나간 의사국시를 허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윤리적으로 잘못한 죄인’들에 대해 처벌을 내린다는 심정으로 고소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씁쓸해해야 한다.

청년들의 주식투자 열풍에 한탄하는 글들도 요즘 많이 접하게 된다. 집이 없는 청년들은 주식투자를 한다. 누군가가 이미 너무 많은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청년들 사이에서 또 한창 인기 있는 것은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부류의 에세이, 자기개발서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고,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고, 죽고 싶어도 괜찮고, 우울해도 괜찮고, 가진 게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물론 정말 다 괜찮다. 자신의 감정과 처지를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인지하고, 또 그것에 대해 위로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치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치유는 없고, 위로만 난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 이 시국에서도 정부나 정치인들이나 기업들이 하는 말은 다 위로의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진짜 공정이라느니, 공생이라느니, 경제성장의 회복이라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개천절, 국무총리는 경축사를 하며 이런 말들을 했다:

 

“정부는 올해 9월 우리의 국가목표로 ‘포용국가’를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설명하신 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단 한 명의 국민도 차별받지 않고 더불어 사는 나라가 포용국가입니다. 포용국가로 가려면 정부와 정치가 제도를 만들며 이끌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일상에서 하실 일도 많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약자를 돕는 일이 그것입니다. 포용국가의 길을 정부는 착실히 가겠습니다. 정치와 국민 여러분께서도 동행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이것 또한 단군 할아버지께서 꿈꾸신 홍익인간의 길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더 씁쓸해지지 않으려 채널을 돌렸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치(治)’를 우리는 ‘다스릴 치’로 많이들 생각해왔지만, 「맹자, 마음의 정치학」의 저자이자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인 배병삼 선생님은, 그 ‘치’에는 다스린다는 의미보다 치유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즉,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위로만 준다면 그것은 그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 최대한 많은 표를 받아 최대한 많은 국민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는 특정 가치와 방향성을 가지기보다 그때그때 더 커지는 목소리들에 휩쓸리기 쉽다. 하지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정치는 다르다. 그런 정치는 병든 부분이 어디인지 명확히 짚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설정한다.

87년생의 초선의원인 정의당 장혜연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국공 문제를 공정 이슈로 보는 것은 담론 바꿔치기에 가깝다. 진짜 근원적 해답은 좋은 일자리가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애당초 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비정규직으로 쓰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기성세대가 된 86세대에 대해서는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민주화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를 청산하고 우리가 맞은 과제들에 용감히 부딪혀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돼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라고 말했다.1

나는 이 글로써 의사파업의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당신들 잘못이라고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다. 세대 간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기만 하면 또 다른 단절과 또 다른 갈등이 생길 뿐이다. 나는 다만, 이번 사태의 본질이 엘리트주의에 빠진 기득권 청년들과 이들이 속한 집단의 이기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시스템이 문제라고. 우리는 코로나19 속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1등들이 생명과 연대가 아닌 자신들의 기득권만 주장했을 때 우리는 온 국민이 위기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경쟁교육, 그리고 성장 중심주의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실질적으로 공정하고, 실질적으로 평등한 정책들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를 확고히 선언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선언을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성세대와 정치권의 결단력 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동안 기고만장했던 기업의 책임을 따진다.

마음이 조급하다. 청년이 기성세대가 된 세상은 지금 같지 않아야 한다. 아마 백신이 나오고 인류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린 다시 예전 그 방식대로 살아나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19 이전의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감히 솔직해지자면, 기존의 사고방식을 우리 사회가 스스로 버리는데 필요한 시간만큼 코로나가 우리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한다. 1등이 아니어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노동이, 1등이 아니어도 존엄하다고 가르쳐주는 교육이, 자연을 돌보지 않고는 풍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현실이 될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의 그 날이 너무 멀리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1. 2020-10-09, 이정민, 「[이정민의 직격인터뷰] “잘못 인정하는 게 리더,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 회복해야: 87년생 초선의원이 86세대에 던지는 고언”」, 『중앙일보』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내가 읽는 『자본론』]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1.  어느 여름 날

 

2020년 어느 여름 날, 늦은 아침 집 앞 도로를 달리는 마을버스의 엔진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의자에 걸려 있는 옷을 주워 몸에 걸친다. 코로나19가 무서운 나는 가방과 함께 마스크를 챙긴 다음 집 밖으로 나선다. 학교로 향하는 길,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텀블러에 받아간다. 정문 옆 대학병원 입구로 의료용품을 실은 수레가 향한다. 그 뒤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학교에 들어서니 길목 곳곳을 서걱서걱 쓰는 빗자루 소리가 들린다. 교통정리를 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뒤로 하고 학교 건물로 들어간다. 어차피 수업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 하지만 행정실에 들러야 해서 학교에 왔다. 행정실 방문 전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켠다. 수업을 들었는지 잠을 잤는지 잘 모르겠다만 수업은 끝이 나고, 행정실로 가서 내가 다음 학기 졸업이 가능한지 마음 졸이며 확인을 받는다. 다행스럽게도 졸업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 바친 돈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에 가기는 좀 그렇다. 배달음식어플을 켜고 무슨 음식을 주문할지 고민해본다. 고민은 복잡했지만 답은 언제나 그렇듯 자장면이다. 요청사항에 ‘양파 많이 주세요’라고 적은 뒤 배달이 오기 전 한 숨 자기로 한다. 아차, 배달주소를 잘못 입력했다. 재빨리 음식점에 전화를 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으로 배달 주소 변경할게요. ㅎㅎ’ 조금만 늦었으면 점심 먹으러 다시 집에 갈 뻔 했다. 배달이 왔다. 후루룩 자장면을 먹는다. 다 먹고 그릇을 내놓으려 보니 요즘은 중국음식점도 일회용 그릇을 쓰나 보다. 지구 생태와 환경에 죄를 지었다는 아픔에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에 일회용 그릇을 버린다. 달력을 보니 <e 시대와 철학> 원고 마감일이 코앞이다. 밀린 자본론 에세이 연재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쓰레기통 비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아침 해가 뜨고 있다. 아까 학생회실 소파에서 10분만 잔다는 게 열 시간이 되었나보다. 내 인생 이래도 괜찮을까?

 

위의 글은 2020년 여름 어느 날을 살아가는 가상의 인물이 쓴 하루 일기이다. (절대 필자 본인 인생을 묘사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일기 내용을 보면 참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여러 노동자들이 엿보인다.

한 번 간단하게 나열해보자. “버스기사, 바리스타, 택배기사, 의사, 간호사, 미화원, 수위, 강사, 행정교직원, 배달원, 콜센터 직원 등…….”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들만 해도 이정도이다. 이들이 하는 일들은 그 형태도 방법도 결과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이름 아래 묶인다. “노동자”

 

2. 노동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 생산을 위해 쓰이는 노동을 단순화하여 분석한다. 실상 『자본론』 1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탐구하는 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치의 원천을 ‘노동력’이라 규명하였다. 그 노동력을 투입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노동’이다.

노동은 노동을 행하는 사람과 노동환경의 구성, 노동과정의 끝에 나올 완성품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가진다.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버스기사와 망가진 에어컨을 수리하기 위해 가정집 출장을 다니는 에어컨 정비공, 이 둘의 노동형태가 다름은 자명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서로 다른 이들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상호 비교·분석된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기능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함으로써, 가치[대상화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자기를 증식하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1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노동의 형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노동이 가치를 증식시켜 자본을 불려준다면 자본가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만큼 재생산될 수 있게 하면 된다.

다시 다른 입장에서,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입장으로 가보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형태의 노동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본가들에게 인간 철수, 영희, 바둑이는 없다. 그들은 이 세 명의 인간을 노동자 1, 노동자 2, 노동자 3으로 본다.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이 열악한 이유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를 자본가와 나눠가져야 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해고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본가에게 종속된 ‘노동자’이기 때문이지 ‘방직’노동자라서, ‘청소’노동자라서, ‘IT’노동자라서, ‘사무’노동자라서가 아니다.

 

3.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서 ‘전노협’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건설운동의 영향을 받아 1990년 결성된 단체로, 이름 그대로 전국 노동조합들의 협의회, 상위단체였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전노협 진군가’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가사 중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2이라는 대목을 인용하고자 전노협을 언급했다. 필자의 부족한 깜냥으로 생각하기에,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를 이 구절이 잘 나타낸다고 봐서이다.

작업장이 어디에 있든, 그 작업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들은 전노협 아래에 뭉치고자 하였다. 이는 활동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 모든 활동들이 노동이고, 그 노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포항 제철소에서 쇳물 사이를 누비는 노동자와 광주 자동차공장에서 볼트를 조이는 노동자, 새벽같이 서울 빌딩숲을 오가며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노동자와 대전 국가연구단지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 모두가 같은 노동조합 상급단체 아래에서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앞 2.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인 이유는 그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어떤’ 노동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특정한 노동에 종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을 한다.

 

사진출처 http://demos-archives.or.kr/content/306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4. 노동운동을 한다!

 

필자 주변에는 노동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필자 역시 노동 현장 혹은 노동운동 현장을 몇 번 직접 경험했었다. 사람들은 노동현장에서 여러 부류로 나뉜다. 우선 노동현장의 사람들은 크게 노동자와 사용자로 나뉜다. 여기서 사용자는 논외로 치고, 같은 노동자라도 법적으로 어떤 고용형태를 가지냐에 따라 정규직 노동자가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또 노동자들은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도입부의 일기에 나온 것처럼 각자 다른 이름을 가진다. 버스를 운전하는 운수노동자는 버스기사, 학교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노동자는 청소부, 이렇게. 혹은 노동숙련도에 따라 숙련노동자, 미숙련노동자라는 이름표를 다는 경우도 있다.

노동운동의 큰 목표 중 하나는 이렇게 이질적인 겉모습들을 가진 수많은 노동자들을 하나의 대오로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들리는 구호 중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3이라는 구호가 있다. 이 구호는 노동자이지만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곳곳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구호이자, 사회 주류가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범주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이라는 외연 아래에 한데 묶는 구호이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대오로 뭉칠 때 그들은 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조직된 모든 노동자 수의 합 그 이상의 시너지로 나타난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의 범위를 넓히고, 노동자 조직이 포괄하는 노동자의 수와 범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감히 필자가 노동운동이 그렇게 전개된 이유를 짐작하자면, 쪽수가 곧 힘이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수록 그 조직이 단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이 유효했고 유효한 이유는 각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형태가 모두 다를지라도 그들이 모두 ‘노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오늘 뒤풀이 비용은 조합비로 결제하겠습니다.”

 

필자도 나름 조직된 노동자의 힘을 직접 느껴 본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보일 수도 있겠는데, 필자는 회식자리에서 그 힘을 느꼈다. 노동운동 현장을 따라다니다 보면 필자도 투쟁 마무리 회식에 스리슬쩍 합류할 때가 있다. 참 감사하게도 필자는 아직 얻어먹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다. 돈을 안 버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아마 그 현장에 함께했던 노동자 개개인들과 필자가 일대일로 만난다면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밥을 사줄 수 있을까? 그분들이 일해서 돈을 번다고 살림이 풍족할 리가 없다. 빠듯한 가계부이지만 그분들이 나 같은 ‘룸펜’에게 밥을 사주실 수 있는 이유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회식들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임금에서 각출한 조합비로 처리되기 마련이다. 아마 그 조합비가 없었다면 나는 밥을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연재 글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현대 한국의 대학생이 쓰는 글’이라는 연재의 주제와 조금은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연재분의 핵심 글 꼭지였던 『자본론』 제1권 제3편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읽으며 노동의 껍데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끊임없이 생각났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를 장악한 뒤 노동과정에서도, 가치증식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을 담지하고 있는 하나의 살덩어리로만 여겨져 왔다. 그들이 하나의 전인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노동력의 담지자로 취급당해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뭉쳐야만 했다. 노동해방의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상을 상상해본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 ‘노동계급’이라는 단어를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해방 그 이후에야 사람들은 노동력의 담지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노동자로서 생활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소 주변에 노동자 가족, 이웃, 친구를 두고 있는 사람, (99% 확률로) 노동자가 될 사람으로서 느끼는 점들이 많았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나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며 두서없이 그 느낌들을 적어봤다. 그럼에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떤 ‘노동자’가 아니라 ‘어떤’ 노동자라는 관점의 시각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았을 때 느낀 그 절망과 공포에 맞서 싸우는 ‘조직된 노동자’들을 존경한다. 그들 중 몇몇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노동한다. 자신의 일만 하면 참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탄가루 날리는 발전소에서, 쇳물 흐르는 용광로에서,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바이러스 감염자들 앞에서 자신을 갈아 넣는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는다.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스물세 번째 시간, ‘포기’란 없다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세 번째 시간, ‘포기’란 없다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어요. 처음 알게 된 때부터로 계산하면 13년, 마지막으로 만난 때부터로 계산하면 약 9년 만에 연락이 되어 만나는 셈이었는데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렴풋이 상상을 해보기도 했죠. 하지만 친구는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공을 다시 공부했고,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전문인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렇게 되기까지의 친구의 방황과 고민의 시간, 쉽지 않았을 선택의 과정 등을 들으며 한편으로 너무나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 단계에 오기까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그 많은 어려움을 견뎌낸 친구가 참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생각난 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그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송경동 시인의 시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입니다.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이 시의 화자는 아마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를 읽으면 이 화자는 살면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잖이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보여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죠.

우리도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나요?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그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 될 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 때가 가장 여린 초록, 그 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소나무를 한 그루 생각해볼까요? 모든 나무들 중에 특히 소나무는 무수한 세월을 살아가죠. 어느 날, 소나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몇 백 년을 살고 있으니, 이제 왠지 이파리도 좀 시든 것 같고, 볼 품 없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때가 그 나무에게는 가장 여린 초록의 시간이겠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비하면 말이죠.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오년 후, 십년 후의 너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이 “가장 여린 초록빛”이라고 말입니다.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이 시인의 시처럼, 앞이 꽉 막힌 상황에서 나에게는 도대체 출구가 없다고 불평할 때, 사실은 등 뒤에 그저 작은 ‘출입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길이 열려 있는데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쉽고 편하고 안전한 길을 ‘출구’라고 정의해 놓고, 진정한 출구인 ‘광야의 세계’를 너무 쉽게 놓쳐버렸던 것은 아닐까요?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에 버스에서 들었던 한 라디오 사연이 기억났습니다. 어느 95세 할머니의 사연이었는데, 듣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95세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 목표로 지금 제2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연이었거든요. ‘아니 그 늦은 나이에 무슨 외국어를 공부하시려고 하지?’ 싶었는데, 이 분의 사연을 끝까지 듣고는 더 놀랐습니다. 30년 전, 당신이 65세 생일을 맞이했을 때, 그 때는 자신이 이렇게 30년이나 더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고, 이젠 늙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겁니다. 그 때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지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95세 생일을 맞이했을 거라고.. 그러면서, 이제 10년 후, 자신의 105세 생일이 왔을 때 또 지금처럼 10년 전을 아쉬워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하련다는 내용의 사연이었습니다. 대단하죠?

이 시의 표현처럼, 세상은 우리를 자주 속이려고 합니다. “넌 안 돼,” “이젠 너무 늦었어,” “네 나이를 생각해라,” “네 나이또래 친구들은 벌써…,” “이제 와서 무슨!” “네가 그럴 능력이 되니” 등등 힘 빠지게 만드는 직접적인 말, 암묵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어깨가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는 이 시인의 다짐처럼,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 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기회의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진짜 내가 가야할 ‘출구’가 있다는 것.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소개해 드릴게요.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성악가, 뮤지컬 배우, 일반인들이 모여 노래경연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곡 중에 한 곡 가져 왔습니다. 이탈리아의 국민가수라고 불리는 Renato Zero 원곡의 “L’impossibile Vivere” 라는 제목의 곡인데요, 번역하면 ‘불가능한 삶’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노래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살아내야지”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힘 있는 가사가 가슴을 울리는 곡입니다. 어제 만났던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네요.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을 살자. 너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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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possibile Vivere – https://youtu.be/HOhsVSmqKu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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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4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4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장 역사적인 그리고 지성적인 맥락

 

맥스 펜스키(Max Pensky)

하버마스의 역사적이고도 지적인 영향들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철학자의 작업에 대한 위의 수정된 관점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반세기를 거쳐 온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위에서 내가 논한 두 번째 유형, 즉 현실 참여적 범형의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맥락 초월적 진리 혹은 주장과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그러한 주장과 규범들이 제공되고 수용되는 사회적 세계의 맥락 내재성 간의 변증법적 관계는 사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버마스가 의식적으로 모으고 개조했던 수많은 다양한 지적 영향과 원천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가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그는 현대에 요구되는 철학함의 적절한 역할과 범위는 철학자가 속한 시대, 지적 분야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포괄적인(overarching) 전망-누군가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전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몇몇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하버마스가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다양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는 점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 점은 그가 저술한 철학적 저작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저작에서 활용하는 자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어떤이들은 그가 동원하는 자료들과 영향력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자가 속한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철학자의 중심적 업무-철학적 활동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로 삼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적 의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광범위한 작용력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전기는 독일이 0년(“Stunde null”)에 머무르던 시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1945년 종전 후 독일 문화와 사회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폐허의 상태에 있게 된 때였다. 하버마스는 1929년 국가 사회주의의 “일상”이 뿌리내린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입회를 당하여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몇 달 간 잠시 방공포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던 16살 때 하버마스는 홀로코스트의 본성과 규모 그리고 그가 따르던 나치 지도 체제의 도덕적 타락을 폭로한 뉘른베르크 재판 라디오 방송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1929년이라는 출생년도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전후 독일 문화와 정치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세대의 구성원이 되게끔 하였다. 한 편으로, 하버마스와 동세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기억을 갖거나 국가 사회주의 체제가 초래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만큼의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독일 사회의 끔찍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붕괴에 대한, 총력전이라는 최후 단계에 참여했던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산산조각 난 사회를 재건하는 거대 과업을 직접 보았던 노골적이고도 개인적인 경험들을 겪을 만큼의 충분한 나이는 먹고 있었다.

이 세대에게 독일의 정치적 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미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독일은 파시즘의 폐허에서 벗어나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민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돌무더기 속에서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독일 문화의 핵심 요소들 -정치적이고도 도덕적인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 무엇보다도 칸트와 괴테, 쉴러와 바흐와 같은 계몽의 전통 –을 골라 내 새로운 사회 질서의 기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사회 재건과 재발명이라는 거대 과업을 스스로의 도전적 과제로 자기 의식적으로 인식했던 세대는 현대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은 철학적 활동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으며, 자기네 철학 전통을 집단 정체성과 자기 이해의 주요 원천으로 받아들이던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들이 자기네 철학 유산의 집단적 재정향을 사회적 재탄생의 과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0년대 초 마르틴 하이데거에 깊은 감화를 받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던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의 고유한 유산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그려보는 세대적 과업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신에 그가 당시에 대해 매섭게 기록했듯이 전후 독일 학계의 뿌리 깊은 보수주의는 머리를 모래에 처박은 채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문화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 문화는 독일이 자행했던 직전의 과거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기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침묵시키려 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와 제휴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하버마스를 가르쳤던 몇몇 교수들을 비롯해 저명한 교수들은 과거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폭로하지도 않았다.

독일적 재난에 응하면서 철학은 변화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전후 독일의 현실에서 철학은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그리고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고려대상에서 간단히 제외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실망과 좌절을 느낀 이는 하버마스가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철학은 칸트와 헤겔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 철학의 전통은 보수학계만으로 이루어진 협량한 전통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내적 비판을 가하는 전통도 포함한다. 게다가 계몽의 유산은 철학적 통찰과 내가 앞에서 논했던 진보적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 사이의 변증법 속에 핵심을 두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물음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1996: 11~22)라는 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공적 논증, 탐구 그리고 관용 개념-칸트 철학은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인지 능력이라고 보았다-이 사회 일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하버마스 및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철학적 동료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18세기의 지적 정치적 계몽의 전통이 유례없는 손상을 당한 사회의 요구에 어떻게 적절히 봉사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세속주의, 합리성, 관용, 대의적 공화정, 보편적이고도 평등한 도덕 및 법적 권리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포용력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헌신하던 계몽주의가 어떻게 당대의 요구와 공명하면서 재전유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무척 복잡하기는 하지만 다음의 세 가지 연관된 주장들로 알맞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가치를 만회하고 전후 세계에 적합하게 촉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기존 철학이 담당하던 역할, 즉 선험적이고도 토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특화되어 학문적 받침돌의 역할을 하던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그만두고, 좀 더 겸손하게, 그렇지만 좀 더 사회적으로 중대한, 세속적이고 “탈형이상학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의 가치와 도전들에 특히 잘 들어맞는 역할을 담당하라고 주문한다. 둘째,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철학, 무엇보다도 독일 대학에서 발전해 왔던 편협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멀리하던 새로운 인접 학문들과 생산적이고도 호혜적인 대화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이미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를 위한 주요 후보를 지목하고 있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적 사회학을 구성하고 있는 분야들이 그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것을 “재구성적” 과학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재구성적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추정될만한 주장을 담지한 인간 상호작용의 측면들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셋째, 하버마스는 전후 독일(혹은 더 적절하기로는 유럽) 철학이 이와 병존하던 철학 전통들, 특히 철학과 민주주의 간의 생산적 관계를 가장 기본적 문제로 취급했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의 영향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유럽 철학이 너무도 철저히 다루어 고갈시켜 버린 이론적 모델들-즉 철학적 분석의 “기본 단위”로서의 고독하고도 자율적인 자아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자기자신 및 외적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식 철학적 모델-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안과 문제들을 보게 되었다.

이후부터 나는 우선 하버마스가 새롭고 겸손하며 상호작용적인 철학 모델에 어떻게 천착했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철학과 재구성적인 비판 사회 과학들 간의 열린 대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에 대해 좀 더 길게 논하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초기 하버마스가 전후 프랑크푸르트 비판 이론 학파의 그 대표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및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협력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주체 철학과 의식 철학 모두와 확실히 절연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버마스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개했던 언어적 능력 및 의사소통 합리성에 관한 이론적 작업으로 선회할 것이다.

 

사장님 나빠요 [내가 읽는 『자본론』]

사장님 나빠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은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형성된다. ‘노동가치설’이란 경제적 가치 창조의 근원이 ‘인간노동’임을 전제하는 경제학적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에 앞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유를 학술적으로 체계화해왔으며, ‘노동가치설’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등장으로 그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상에 내놓은 경제학 고전서 「자본」은 자본주의 구조를 지탱하는 경제학적 메커니즘과 현상적 모습 이면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속 (가치)착취의 원리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 속 노동가치설을 통해 (경제학적 이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사유 전반을 담아냈다. 마르크스 철학의 근간이 되는 인간애의 사유를 비롯해, 사회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그 필연성 역시 그의 저술 「자본」 속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경제학 비판 서적’ 「자본」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적 대립 양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내의 계급적 모순의 필연적 양태는 익히 아는 것처럼 자본가 계급(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이때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에서 악역을 도맡는) 부르주아지들이 바로 착취를 자행하는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 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피착취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굉장히 거칠게 풀어내 요약한 이 같은 서술을 처음 접한 이들이라면 이처럼 파격적이고 대립적, 갈등적 분석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다. 먼저, 본인의 경우엔 자본가 계급이 과연 절대적 악역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 경제적 가치가 오로지 노동자의 손에서만 탄생하는지 되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도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자본가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에 의문을 품을 수 있으며, 자본가 역시도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오늘 이러한 의구심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볼 작정이다.

필자의 절친한 친구 김 모 군은 현재 술집에서 야간 알바를 하고 있다. 김군은 종종 본인에게 자신이 알바를 하는 도중에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한다. 그 여러 에피소드에 압도적인 출연 비율을 보이는 이가 있고, 그는 바로 김 군의 고용주인 술집 사장님이다. 친구 김 군은 사장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전하곤 하는데, 보통은 그 맥락이 “사장님 나빠요”하는 식의 뉘앙스인 경향이 많다. 사장님은 은퇴 후 현재의 매장을 오픈하셨으며, 편의점 점장도 맡으시는 등 다방면의 사업에 뛰어든 중년의 남성으로 보인다.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분이라는 친구의 담담한 말투 뒤에는 종종 푸념이 따라오곤 한다. 사장님이 너무나도 예민하고 엄격하셔서 잔소리와 업무 간섭이 심하시다는 것이다. 친구는 일하는 건 알바생인데 사장님은 일도 안하면서 너무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사실 가게 자체가 사장님의 소유에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며, 사장님이 입버릇처럼 하신다는 말씀을 내게 들려준다. “너네 테이블 닦는 것보다, 관리하고 총괄 감독하는 책임자의 업무가 훨씬 힘든 거야, 알어? 건너편 고기집 사장도 주말 지나면 몸져눕고, 회사들도 사장이 애 안 쓰면 안 굴러가. 이재용이 봐 얼마나 고생하는데” 필자는 이 말을 듣자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사장님의 말대로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세계의 사장님들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상황인 것인지, 또 이를 정말로 행하고 계시는지 실로 궁금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가정을 두었을 때, 사장님들의 관리 감독의 업무 또한 가치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 지출의 형태는 다소 독특하지만, 어찌되었든 사회적 유용노동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관리와 감독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서적 노동이 단순 육체노동보다 버거운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기타의 노동가치설에서도 복잡한 정신적 노동으로 창조된 가치에 [질적으로 상이한 여타 노동들과의 (노동)강도 비교를 통한] 양적 가감을 부여하는 등 정신적 노동 강도에 대한 고려 역시 빼놓지 않는다. 더욱이 대규모 자본을 굴리시는 사장님들이 아닌 이상 (소규모 자영업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실제로 노동 현장에 참여하는 정도가 더욱 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군의 고용주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허나, 필자가 궁금해 하는 문제는, 해당 발언의 절대적 옳고 그름이나 적절성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논의에서 좀 더 명확히 밝히고픈 부분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자본가로 칭해지는 이들이 관리, 감독 등의 업무를 통해 노동자들의 노동에 버금가는 근로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과 맞닿아있다. 김 군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모든 고용주들이 그토록 고된 관리, 감독의 노동을 도맡고 있음을 일반화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 역시도 우리 사회내의 경제적-가치를 직접 창조해내고 있는지 거시적 경제학 담론의 차원에서 함께 면밀히 관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관리, 감독 등의 정서적 노동이 육체적 노동의 강도보다 더욱 고된 것인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현실 속,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의 노동들 사이의 강도 비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서적 차원의 관리, 감독의 노동이 여타의 육체적 노동들 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세계 곳곳의 사장님과 회장님들께서 그러한 노동들을 실제로 수행하고 계시는지에 관한 문제다.

매우 중요한 두 번째 유의점은, 우리의 논의가 미시적 사례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례에서 특정한 자본가는 그 어떤 노동자보다 많은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고찰에선 그것이 사회의 평균적 수준으로 일반화 될 수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자본가도 고된 노동을 수행하는가” 하는 식의 의문은 파편적인 낱개 사례들의 종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가 품은 의문은 “우리 사회 내에서 자본가 계급 또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며, 그 의문의 차원은 거시적 영역으로 넓혀져야 한다.

필자가 진지하게 탐구하고자하는 모든 의문은, 자본가, 즉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배제하고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자본가로 규정하는 이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규정되는 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한다. 그저 돈이 많다고 자본가인가? 개인 사업장을 차리면 모두 자본가인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장님은 모두 부르주아지인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할 것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생산수단! 다름 아닌 ‘생산수단’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의문들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생산수단’이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하여 통칭하는 개념이다. 노동자의 노동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요구되는데, 첫 번째가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 활동이요,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각각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다. 인간노동은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합목적적 활동(노동)을 실현해내게 되는데, 이때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천연적 존재들이 노동대상이다. 또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 중 이미 인간노동이 투여되어있는 존재들은 원료로 칭해지는데, 이들 또한 노동대상이 된다.

한편 노동수단은 노동자가 자신의 활동(노동)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매개체로 사용하는 도구적 존재를 의미한다. 예컨대, 김 모군 이 술집 테이블을 닦기 위해 사용한 행주부터 시작하여, 바구니, 항아리, 통, 각종 기계, 관, 돌도끼, 칼, 망치, 혹은 토지 그 자체 등 인간노동의 실현 과정에서 도구로 작용하는 (상이한 발전 정도의) 모든 존재들은 노동수단이 된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자본」 Ⅰ 상 제3편 제7장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나타남을 밝혔다. 즉,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되는 셈이다.

‘생산수단’ 개념은 어떻게 자본가 계급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우선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 ‘생산수단’ 개념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게 됨을 주장했는데, 이때 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적 기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그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이며,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으로 초상위계층에 속한) 극소수의 부르주아지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물질적 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을 규정하는 핵심적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많은 돈(자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이 많다고해서 전부 다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이 직접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에 착수하지 않으며,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과 자신이 구매한 (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결합을 도모한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만남을 통한 물질대사의 작용 결과로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잉여가치들의 축적을 통해 자본가들은 가만히 앉은 채로 자신의 자본을 눈덩이처럼 불린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무산계급으로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 (피억압) 계급이자, 대다수의 대중들로 이뤄진 민중의 계급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노동 계급의 인민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 역시, 본디 로마제국 시대에 군에 입대시킬 자신들의 아들(proles – 라틴어) 외엔 어떠한 부도 갖지 못한 무산계급을 조롱하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 사업장을 차리고 독자적 사업을 운영하는 모든 사장님들은 전부 다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가? 자신의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진) 사장님들 중에는 재벌가 대기업 회장님들도 있지만, 동네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직접 운영하는 자영업자분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생산수단을 토대로 자신의 자본을 축적 내지는 확장시켜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소규모 자본(소규모의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작은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대기업 회장님들과 유사한 형태의 방법으로 부를 쌓고는 있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직접 가치 창조의 현장에 뛰어든다.

자영업자들이 직접 노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해당 작업장의 피고용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고용주(자본가)가 노동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피고용 노동자들과 함께) 인간노동을 투여함으로써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존에 상정한 자본가 계급의 근본적 특질과는 동떨어져있는 현실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주인인 고용주가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직접 투여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인격적 전형인 대기업 회장님들과의 괴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노동력을 구매하고 이를 자신의 생산수단과 결합시킴으로써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자본가들과 유사하지만, 자신들도 그 노동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 운영하는 자본의 규모가 비교적 작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적 자본가들과는 구별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분석과 이론을 사상적으로 구체화해나가던 시기 전후에도 이러한 소(小)부르주아지들은 존재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러한 독특한 계급적 집단을 ‘쁘띠 부르주아’로 칭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과는 분명하게 배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대자본가들을 비롯한 [자본가 일반]과도 계급적 이해의 불일치를 보이게 된다. 생산구조의 기본적 구성 원리상 쁘띠 부르주아 역시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대자본가들에 의한 억압에 놓인다. 예컨대,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독점적 대자본(대기업)에 의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흡수되며, 소규모의 중소자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남는 경우에도 하청제도나 대기업의 원료 독점, 불합리한 세금/금리 부담 등을 말미암아 이윤의 일정부분을 대기업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선 노동자 계급이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해야함을 주장하는 견해가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하고 시장이 침체된 요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피해 역시 대부분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짊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영업자들이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찾자면, 우선 MP3 플레이어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세계최초의 MP3 MPman ‘F10’ 사진출처: https://it.donga.com/3476/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디지털 캐스트’는 1996년 MP3를 처음 개발해낸 심영철씨와 황정하 사장을 필두로 MP3플레이어의 세계 최초 발명과 특허 등록까지 완료했었다. 이때 삼성 계열사인 새한미디어에서 생산과 마케팅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해 특허권의 공동 소유를 요구했고, 국제적 마케팅과 대량 생산을 위해 디지털 캐스트측은 이를 수용했었다. 하지만 새한미디어는 특허권이 공동 소유가 되자마자 디지털캐스트를 배신하고 MP3 플레이어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캐스트는 직원들의 급여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무너졌고, 결국 황정하 사장은 특허권을 미국 회사인 다이아몬드사에 매각하여, 미국인들이 세계 최초라고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 사의 MP3플레이어가 탄생하게 된다. 새한미디어 역시 특허무효소송을 걸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남은 특허권 지분까지도 미국의 아이리버사로 매각된다. 결국 MP3플레이어의 특허권은 전부 미국의 대기업으로 흡수된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납품가 후려치기, 계약금 미지급, 결제 미루기 등으로 유망 중소기업이었던 정산산업을 부도로 이끈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의 사례나, 28년간 성실히 냉장고 부품을 생산해 납품한 하청업체의 중국 투자를 강요하였다 발주물량을 줄여 해당 업체를 위기로 내몰고 이후 헐값에 인수를 시도한 삼성전자의 사례 또한 별반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횡포의 유형은 다르지만, LG생명과학은 중소기업 비타민하우스의 유망한 인재들을 단기간에 대거 빼오는 식으로, 현대중공업은 중소기업 테크마레에서 개발해 특허 낸 선박 구성품을 무단으로 복제해 사용하는 식으로 중소기업을 짓밟았으며,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대기업과 대자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위 갑질을 일삼고 있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대자본들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이 일차적으로 타격을 흡수함에 따라 위기에도 덜 흔들리게 되고, 기반이 불안정한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사업 전반에 걸쳐 고스란히 그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쁘띠 부르주아들은 그 스스로 부르주아지적 사고와 자본가적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다. 쁘띠 부르주아지들 또한 생산의 기본적 메커니즘 상 노동자 계급과 근본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들은 대기업과 대자본으로 대표되는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이해관계와도 일정부분 대립함으로써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특수한 중간 계급으로 취급된다. 초기의 의문처럼 우리 주위의 사장님들 역시 가치를 창조하는지, 또 현대 사회에서 자본가의 감독 역할과 관리 업무를 노동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기존 관념 속 부르주아 계급(대기업을 바탕으로 한 자본가 계급 일반)과 현대 사회에서 그 출현이 더욱 두드러진 쁘띠 부르주아 계급을 분리해서 사유할 수 있어야만 2020년 현재의 자본가 계급의 역할을 ‘노동’ 혹은 ‘가치 창조’의 관점에서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격상되자 당분간은 가게 형편이 어려우니 알바 출근하지 말라는 고기집 사장님과 스마트폰 및 가전제품을 생산해내는 모 회사 회장님의 이해관계는 분명히 다를 테니 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과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했으니, 이제 이 구분을 우리의 의문에도 적용해보자. 이전에는 대충 얼버무려 점철되어있던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사이의 간극을 비로소 파악해낸 지금, 다시 “자본가 계급도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하는가”하는 질문을 마주해보겠다. 이제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부르주아지의 경우와 쁘띠-부르주아지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먼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경우엔 쁘띠 부르주아지가 직접 노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특수한 사업장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고용주 쁘띠 부르주아지는 저마다 다른 강도로 노동과정에 직접 개입한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자영업자들 혹은 중소자본가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경우에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펼쳐지는 가치 창조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가치를 일정 부분 직접 창조해낸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했으며 이를 활용하여 잉여가치의 창출을 도모하기에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직접 노동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본가 계급 일반]과는 차별성을 띤다. 한마디로 현대의 일반적인 쁘띠 부르주아는 ‘인간노동일반’의 지출을 통해 직접 가치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경우에 따라 중소기업의 사장님, 식당 주인, 식료품 도매업체 대표 혹은 (김 모 군의 사장님처럼) 술집 주인 등을 맡고 있으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상이한 강도와 다양한 질적 형태로 구성된 각자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본가 계급 일반의 전형인 대자본가들, 대기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한 사장님과 회장님들을 어떠실까. 이들은 기존의 일반적 관념 속 자본가 계급의 보편적 상 그 자체이자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자본가들과 대기업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직접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매우 자명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삼X전자의 이모 회장님께서 전자 제품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지시, 지휘의 업무, 감독의 업무, 관리의 업무 등 그 어떤 형태의 노동도 대자본가들의 몫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자본으로 지시, 지휘, 감독, 관리 따위의 업무를 대신 도맡을 노동력을 구매한다. 단순 노동자들을 고용함과 동시에 관리나 감시의 역할을 수행할 노동자들을 별도로 고용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자본가들과 같은 편으로 보이는 감시, 감독의 노동자들, 이를테면 대기업 임원진 및 전문 경영인 등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을 수행할 뿐 똑같은 노동자다. 물론 이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분명히 단순 노동자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의 강도나 임금의 수준, 착취의 정도 등 여러 부분에서 단순한 형태의 노동자들보다는 양질의 대우를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이들 역시도 대자본가 회장님들의 감시, 감독을 대신 행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쁘띠 부르주아로 분류되는 소자본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가치를 만들기도 한다. 김 군의 사장님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을 이루는 대자본가들과 대기업 회장님들은 자신의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의 물질대사를 멀리서 지켜볼 뿐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결론을 맺기 전에, 처음으로 돌아가 김 군의 일터에 계시는 사장님의 말씀을 다시 곱씹어보겠다. 사장님들이 행하는 노동의 버거움을 시사했던 김 군의 고용주, 사장님의 말씀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일단 (힘듦의 정도는 객관화가 어렵지만) 사장님들이 실제로 노동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김 군의 고용주와 유사한 형태의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및 소자본가(쁘띠 부르주아)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처럼 사장이 애를 쓰지 않고는 그 어느 사업장의 (가치)생산과정도 원활히 굴러갈 수 없다는 말씀은 현대 사회의 모든 사장님들께 일반화시키기에 부적절했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가 고찰했듯, 부르주아 계급은 일반적 양태와 (소자본가들로 구성된) 쁘띠 부르주아로 나뉘었다. 김 군의 사장님과 이해관계가 유사한 쁘띠 부르주아지 집단 내에서는 김 군의 사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분 또한 자신의 경험적 한계에 근거해 이러한 발언을 하셨으리라. 하지만 이모 회장과 같은 대기업의 대자본가들에게는 이 같은 주장이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은 노동 일선에 결코 참여하지 않으며, 나아가 자본가 계급 일반이 노동 과정에 참여한다는 발상은 실제적 양상과는 괴리가 컸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부르주아지들은 절대로 직접 노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관리, 감독이 없어도 분명히 누군가(노동자) 이를 대신함으로써 생산과정을 원활히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자본가의 노동으로 사업장이 돌아감을 시사했던 김 군 고용주의 발언이 (쁘띠 부르주아의 경우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 군의 사장님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 계급 일반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셨고, 이 때문에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게 아닐까 싶다. 쁘띠 부르주아는 분명히 직접 가치를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의 자본가들 모두가 가치 창조 과정(=노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운영구조를 대중이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가 알지 못하는 과정에 대기업 대자본가들의 노동이 투여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은폐된 과정이 존재한다한들, 대자본가들의 노동은 쁘띠 부르주아지들의 직접적 노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일 것이다. 더욱이 강도의 측면에서도 결코 비교할만한 수준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결론을 짓자면, 우리 사회 내 많은 사장님들이 직접 노동을 하고 계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 모든 자본가(혹은 고용주, 혹은 사장님)들의 표준적인 계급적 표본이 아니었으며, 그저 쁘띠 부르주아였을 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경우엔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질적 노동과정에 대기업 사장님들이 개입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한 사유의 과정 속에 우린 부르주아 계급 형성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산수단’의 개념을 포착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쁘띠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일반을 분리해냈다.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향성 속에 우리는 오늘의 논의를 통해 좀 더 세밀한 관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더불어 노동과정 전반을 자본가의 관점에서 사유해봄으로써, 우리의 근로 과정에 사장님들이 어떻게 개입하고 계셨는지 심도 있게 분석해볼 수도 있었다.

일상적 사례를 통한 자본주의적 구조&생산관계의 명료화 과정을 가능케 해주었던 김 군을 떠올려본다. 글을 마무리하는 대로 김 군에게 연락을 취해 필자에게 들려준 에피소드를 글에 담았음을 밝히고 이를 게재해도 좋을지 물어볼 참이다. 소재를 제공해주었음에 감사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우스운 질문도 하나 덧붙여야겠다. “ 너네 사장님보다 더 나쁜 사장님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을래?”

스물두 번째 시간, 충고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두 번째 시간, 충고

 

마리횬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어느덧 9월 중순이 되었고, 하늘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죠. 가을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시를 통해 듣는 충고의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는데요, 오늘은 길가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들고 있는 박노해 시인을 만나봅니다.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박노해 시인의 시 <도토리 두 알> 들어보았습니다. 뭔가 뒤에 더 할 말이 있는데 여운을 남기며 시가 끝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처럼 내가 겪었던 작은 사건을 가지고 그 사건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들이 참 좋습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고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부럽죠. 오늘 주제를 ‘충고’라 하고 이 시를 들려 드렸는데, 여러분은 이 시에서 어떤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시 텍스트를 보면, 시의 시행들이 이어지다가 중간에 한 줄이 툭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라는 시행이 툭 놓이죠. 그러면 그 순간, 시를 읽는 템포가 살짝 늦춰집니다. 그리고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라는 시행 후에 또 다시 시행이 구분되면서, 다시 한 번 약간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그 틈에 독자로 하여금 도토리의 모양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혹은 도토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약간 벌어주는 효과가 있죠.

요즘 공원이나 산길을 (마스크를 쓰고) 산책하면서 보니, 도토리가 적지 않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라구요. 그 모양을 보면 각기 다양합니다. 시인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는 도토리 두 알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 그리고 크고 윤나는 도토리 한 알을 주워 들면서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크고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

 

‘도토리 키 재기’ 라는 속담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누가 더 크고 더 빛이 나는지를 아무리 따지고 아무리 경쟁을 해도 사실 모두 작은 도토리일 뿐이죠. 누가 더 잘났는지 경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인이 던지는 질문이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라는 물음에는 우리도 그러한 존재라는 것, 우리 인간이야말로 사실은 필사적으로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느냐”라고 물어보면서,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도토리는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먹는 맛있는 도토리묵의 재료로도 사용되지만, 그런 것들은 동물이나 인간에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정작 도토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라나서 거대한 도토리나무가 되는 것,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참나무’가 되는 걸 겁니다. 그것이 도토리의 사명이겠죠. (‘사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요?)

참나무가 되려면 도토리는 땅에 묻혀서 썩어져야 합니다. 썩어야 뿌리가 나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야 떡잎을 낼 수 있어요. 그런데 땅에 묻혀서 썩어질 도토리에게 ‘크기’가 중요할까요? 땅에 묻혀서 썩어져서 뿌리를 내리는데 도토리의 ‘윤기’가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참나무가 되는 과정에서 크기나 윤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보기에 크기가 작고 윤기가 없더라도, 결국은 도토리보다 몇 백 배는 더 큰 나무가 될 테니, 지금 당장의 도토리의 크기나 윤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죠. 시인은 도토리에게 던진 물음을 우리에게도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

 

이 물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다면, ‘너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물음에 답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지금 당장의 겉모습이나 내가 가진 조건을 내세우기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내 삶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사명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것에 합당한 ‘훨씬 더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도토리의 심정을 표현하면서 ‘울지 마라’라고 하죠. 어쩌면 ‘먼 곳으로’ ‘빈숲으로’ ‘홀로’ 던져지는 도토리의 심정은 참담하고 속상하고 슬플지도 모릅니다.

비옥한 땅에서 참나무가 되라고 멀리 던져준 것인데, 지금 당장은 홀로 빈숲에 떨어진 상황이니, 게다가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정말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토리는 멀리 빈숲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다니는 청설모나 다른 짐승들에게 먹히지 않고 결국 참나무로 자라게 될 겁니다.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외로움과 힘듦의 시기를 견디면 뿌리가 내려오고 싹이 나고, 점점 나무로 자라게 될 겁니다. 시인은 그걸 보고 있죠.

혹시 여러분 중에, ‘아… 나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것 아닐까..’ 라고 스스로를 작게 여기면서 참나무가 될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기준과 다수가 말하는 가치관에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가 주는 충고를 마음에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정 무엇이 중요한가… 도토리에게 중요한 것이 결국 ‘얼마나 큰가’ 하는 ‘크기’나 ‘얼마나 반짝이느냐’ 하는 ‘윤기’가 아니라, 결국 ‘참나무가 되는 것’이라면, 지금 나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그 중요한 것을 따라 살고 있는가 한 번 짚어 보고 돌이켜 봐야 하겠죠.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샘 옥(Sam Ock)의 <Meet me>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나는 한 명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 몇 백만 명의 어린 아이 중 그저 한 명일 뿐. 내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무리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노래가 높은 곳의 당신에게 들릴 수나 있을까?”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멀리 던져진 작은 도토리와 같은 마음의 가사이죠. 하지만 이 노래는 ‘네가 굳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괜찮아. 비록 여전히 어둡고 낮은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너의 노래를 듣는 이가 있어. 그리고 너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할거야’라고 이어집니다. 숲 속에 던져진 작은 도토리 같은 시기를 겪고 계신 분들, 참나무가 될 인내의 시기를 겪고 계신 분들께 이 노래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마음껏 즐기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시가 필요한 시간 이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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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옥(Sam Ock) – meet me 주소 – https://youtu.be/Rii2mrgIn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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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3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주제의 개관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상에서 서술한 관심사와 강조점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의 이론 작업에서의 체계성과 일관성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떤 주제들은 하버마스의 저작을 통해 울려 퍼지게 되었고 연이어 이 책을 통해서도 되풀이해 이야기되고 있다. 그가 공들여 발전시킨 많은 주제들은 결국 첫 번째 주요 저작인 『공영역의 구조변동』에 이미 담겨있던 것이다. 이 주제들 중 으뜸가는 것은 공영역이라는 관심사다. 이 주제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자기 사상의 주요 특징인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강조하도록 몰고 갔다.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자인 것은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규범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근거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준수하는 규범은 규범적 구속력을 지닌다. 하지만 [규범적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규범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에 관한] 그러한 논의가 발생할 수 있는 건강한 공영역은 다른 사회 구조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이미 제시된 것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인간적 행위의 본성은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며, 그러한 행위를 만들어 내어 참여하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들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버마스의 사상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이지만 이후의 저작에 대한 비평에서 자주 간과되거나 망각되는 사항이다. 구조변동이라는 개념은 『의사소통행위론』에서 다루는 근대성 및 합리화에 대한 하버마스적 이해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구화-하버마스는 이것을 근대화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에 대한 그의 최근 저작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하버마스의 중심 주제는 칸트적 프래그머티즘이다. 그의 기획은 칸트, 다윈 그리고 마르크스의 화해로 묘사될 수 있다(TJ: 9를 참고할 것). 그의 담론 윤리학, 범세계주의 그리고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은 몹시 분명하게도 철저히 칸트적이다. 그는 진리나 도덕성에 관한 상대주의적 입장에 굴복하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에도 무릎 꿇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규범적 기획(enterprise)이다. 결국 비판이론의 이상은 시대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이 눈에 잡히도록 진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근대성에 관한 규범적 자기 이해의 탈근대적 ‘극복’”(PNC: 130)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강한”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자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진리와 정당화』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 명확히 설명하고 있듯이 “부드러운” 혹은 “약한” 자연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무릇 보편주의적이고 규범적인 이성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맥락초월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주장들을 내세워야 하며, 그러한 주장들이 합의를 지향하는 가운데 [보편규범적] 이성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같은 이유로 그의 칸트주의는 고전 프래그머티즘에 영향을 받으면서 “탈초월화(detranscendentalized)”되었다. 예를 들어 조화로운 세계에 관한 칸트의 “범세계주의적 이상”은 객관 세계에 관한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실천이성의 자명한 전제로서의 “자유의 이념”은 책임 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합리성이라는 프래그머티즘적 가정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관념의 역량”으로서의 이성은 언어적으로 구체화되고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담론적 이성으로 대체되었다(TJ: 87). 다윈, 마르크스 그리고 퍼스를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리의 관습(practices)이 진화하며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진화의 역사-생물학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진화 모두의 의미에서의-를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버마스의 원숙한 개념 틀의 토대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모여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대부분의 글들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그 이후의 저작을 다루고 있다. 1장에서 맥스 펜스키(Max Pensky)는 하버마스의 저작을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연관된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하버마스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지적 생애를 제공하고 있다. 2장~5장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면서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기본 개념들에 관한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2장에서 멜리사 예이츠(Melissa Yates)는 하버마스의 형이상학 비판과 사회과학에 대한 평가를 설명하면서 하버마스의 “부드러운” 자연주의와 약한 혹은 “유사” 초월주의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과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용어에 내포된 것에 관한 방법론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가 해명한 것처럼, 형식 화용론은 탈초월화 된 이성 개념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나는 3장에서 이에 관해 다룬다. 3장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자들의 상호행위 과정 속에서 가능해야만 하는 필요조건에 대해 뚜렷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버마스의 표식인 의사소통 행위 개념은 상호 이해 지향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의 언어적으로 매개된 상호행위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 타당성 및 상호주체성이라는 개념들은 그것의 설명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하버마스는 서로 다른 이들의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발언들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말할 때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제기한 주장들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근거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합리성은 이렇게 언어적 의사소통 속에서 구체화 된다. 3장에서는 또한 하버마스의 사유가 “대륙의” 해석학적 언어철학과 영미권에서 이론화된 “분석적” 언어철학의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의사소통행위와 전략적 행위 간의 구분은 3장에서 소개되고 있으며, 4장에서 다시 조 히스(Joe Heath)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다. 물론 의사소통행위는 행위 조정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생활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략적 행위에 의해 행위가 조정되는] 체계적 구조들에 의해서도 조직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측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을 끌어와 베버와 뒤르켐의 고전적 사회이론들을 알맞게 수정한다. 히스는 하버마스적 기능주의에 존재하는 장점과 한계에 대해 개략적으로 다루면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을 설명한다. 기능주의적 사회이론들에 대한 반대 견해는 이 이론들이 행위자 및 개인적 자율성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너른 지지를 받고 있다. 하버마스적 2단계 사회 모델의 목표 중 하나는 사실 기능적으로 조직된 사회 구조들이라는 배경에 맞서 어떻게 하면 자율적 행위자의 개념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엘 앤더슨(Joel Anderson)은 5장에서 자율성, 정체성 그리고 자아에 관한 상호주관적 개념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책임능력을 지닌 행위자와 진정성을 지닌 자아정체성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적, 개인적 자율성 역시 구분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주체들인 우리는 사회문화적, 역사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자율성은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라면서 만들어지고 성숙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성숙한 주체들은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것인데, 그러한 주체가 되는 것은 담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3장에서는 의사소통행위의 가능성 조건들에 대해 매우 기본적인 개관을 제공한다. 다양한 담론 유형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능성 조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다음 장에서는 하버마스의 도덕담론, 민주주의 담론, 법담론에 대해 다룬다. 이 세 가지 담론들은 “[논의되고 있는 규범에 의해] 영향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들의 참여자로서 동의할 수 있을 규범만이 타당한 규범”이라고 명문화 된 “담론 원칙”(BFN: 107; 이 책의 6장 p. 120를 볼 것)을 적용한 것이거나,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용”(BFN: 103)한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하버마스는 초월적 진리나 도덕성과 같은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옳거나(right) 정치적으로 온당하거나(correct) 법적으로 정당한(legitimate) 것은 담론적으로, 말하자면 합리적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윌리엄 레그(William Rehg)는 6장에서 하버마스의 도덕이론인 “담론 윤리학”에 대해 설명한다. 하버마스는 도덕적 주장들은 보편적이면서 상호주관적인 타당성을 담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도덕적 정당화를 수행하는 칸트적 절차주의 모델을 옹호한다. 규범이나 도덕적 규칙은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규범들의 타당성에 관한 담론 [과정]은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관계와 가치들을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고려함으로써 수행되는 것이다. 레그는 도덕성과 인륜성이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인륜성을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개념과 관계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실 우리는 좋은 삶과 행복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이 보장되기를 기대하고 [이러한 관점들 간의] 합당한 불일치를 관용한다. 또한 동시에 도덕적 영역에 있어서는 보편적 합의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7장에서는 케빈 올슨(Kevin Olson)이 동일한 절차주의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론의 개요를 설명한다. 보편화 원칙에 의해 규제되는 도덕성과 달리, 정치는 정당한 입법 원칙을 세우는 데에 봉사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규제된다(혹은 규제되어야 한다). 도덕담론은 규범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모든 인격들(persons)의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정치담론은 법의 정당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시민들이 “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공동체에 관해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원칙은 “[정치적] 자기 결정의 실천에 연관된 수행적 의미”(BFN: 110)를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다. 올슨은 모든 시민들의 동등한 정치적 참여를 보장해주는 권리들[혹은 법]의 체계를 통해 어떻게 합리적이고도 정치적인 의지 형성이 제도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장에 소개되었던 정치적 자율성 개념과 평등, 호혜성 그리고 포용의 이상이 어떻게 권리로 제도화되는지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의사소통적 권력으로부터 도출되며, 결국 그것은 공적 담론을 통해 발생한다. 그리하여 올슨은 공영역에 관한 논의로 자기가 맡은 장을 마무리 짓는다.

의사소통행위의 주체들은 도덕담론에서의 [도덕적] 인격들이나 정치담론에서의 시민들이 하는 상호작용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책임질 능력이 있는 주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정당한 민주적 절차들의 제도화를 요구한다면 정치담론은 법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는 법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8장에서 크리스 저언(Chris Zurn)은 사회학, 철학 그리고 법적 판결에 연관된 관점들을 가지고 조직된 하버마스의 법 담론이론을 제시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을 체계와 생활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전송 벨트(transmission belt)”로 생각한다. 이 전송 벨트는 (유대, 화폐, 권력[의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사소통적 형식과 기능적 형식을 연결한다. 법은 잠재적 해방 메커니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규범들과 사회적 가치들(societal values)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은 전문화된 경제용어와 행정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버마스는 법 실증주의와 자연법 이론 간의 구분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법과 도덕이 독립적인 동시에 모두 동등하게 근원적인(equiprimordial) 담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판결[문제에 대한 하버마스의] 담론 이론은 법 적용 논리에 관해서 그리고 판사들과 법학자들이 법적 공영역에서 특정 판결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법 자체에 적용되는 법의 정당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세 글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이 당대의 사회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개입하던 하버마스의 활동 속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다른 저자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설명하고 있다. 키스 해이섬(Keith Haysome)은 9장에서 공영역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버마스의 시민사회 개념,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분석 그리고 196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던 사회운동에 대한 하버마스의 논법을 고찰하면서 그가 사회적 병리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리는지에 대한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해이섬은 하버마스가 그의 후기 저작에서 공영역과 시민사회 [개념]을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생각하던 부르주아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자발적 풀뿌리 시민조직의 형식 속에서 “재발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키어런 크로닌(Ciaran Cronin)은 10장에서 “후기국민국가적” 정치 질서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관한 하버마스의 고도로 복잡한 모델을 제시하면서 해이섬이 빠트린 부분을 여러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옹호하는 범세계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경제적 지구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라크전을 뒤이은 미국 주도의 군사개입 뿐만 아니라 발칸 전쟁에 관해 그가 수행했던 성찰의 결과물이다. 11장에서 에두아르도 멘디타(Eduardo Mendieta)는 하버마스의 최근 관심사, 즉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해이섬이 사회운동 [개념]을 활용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게, 멘디타는 하버마스적 사회 진화 개념을 고찰하면서 세속화 [개념]를 다루고 있다. 그는 하버마스가 근대화란 오랜 세월에 걸친 합리화의 형식이라고 했던 자신의 테제를 재고하면서 세속화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멘디타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하버마스의 사유를 추적한다. 하버마스는 종교가 초기에는 합리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다가 사회질서의 한 원천(이 기능은 이후 근대에서 법이 담당하게 된다)으로 기능하고, 이제는 철학이 대체할 수 없는 담론과 사회적 실천의 독립적 영역으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결국 행위 동기 및 가치의 한 원천으로서 함께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럴 경우 철학이 사실 의존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마지막 단계에서 종교는 다시 매개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무리 장은 하버마스의 저작이 통합적 본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한 그의 저술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차기 거작을 기대하게 되는 일종의 가늠자가 되며 그것은 여심의 여지없이 영향력 있는 묵직한 저작이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자본론 에세이-4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작년 여름에 한 선배랑 대화를 나누던 중, 선배가 난데없이 뱃사람과 듀공의 이야기를 해줬다. 항해를 떠나 오랫동안 여자에 굶주린 뱃사람들은 듀공을 잡아다 강간하고 나서 그 고기를 먹고, 남은 잔해는 도로 바다로 던지곤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듀공이 느꼈을 감정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뱃사람들을 비난했고 선배는 “성욕은 있고, 여자는 없는데 그럼 어떡해. 나는 뱃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데?”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선배가 나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듀공을 좀 닮은 것 같네?” 이 일로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동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불쾌하기보다는 실감이 안 났다. 자기가 내뱉은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픈 말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말들을 하다니. 그때 처음 깨달았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은 절대 듀공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구나. 평생 고기를 잡아다 팔고, 먹곤 했던 뱃사람에게는 듀공 역시 그냥 자신이 낚은 수천 마리의 고기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넣은 이유는 ‘대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자본론 제7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대상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가치가 증식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다. 나는 이중 가장 핵심은 ‘노동의 대상화’라고 판단하였다. 노동이 대상화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노동만이 아닌 자연과 여성의 대상화를 함께 다루고, 그런 대상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본론 7장을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먼저 대상화되기 이전의 노동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자기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이 구간을 그냥 읽으면, 마치 노동 그 자체가 자연을 착취하는 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동물들을 떠올렸을 때 위와 같은 노동에 대한 설명은 생태계의 모든 생물에게 해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스스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꽃가루를 채취하는 꿀벌이나, 지렁이를 파먹고 나뭇가지로 둥지를 트는 새도 마찬가지다. 이때 이루어지는 노동에서 자연과 인간의 생존은 직결된다. 인간은 자연의 것을 가져가되 결코 파괴할 수는 없다. 자연이 파괴되면 생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임금노동 이전의 노동이란 자기의 몸과 자연을 대등하게 보살피는 것이었다. 다만,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노동 간의 차이점은 동물은 노동을 본능적으로 하지만, 인간은 노동 행위 이전에 일종의 구상을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 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위의 말을 정리하면, 노동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노동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또 그 목적에 맞게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또 노동자는 목적에 맞게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목적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탁월한 성질이지만, 그 성질 때문에 대상화가 발생하기 쉽다. 노동의 목적이 ‘자연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난 것’을 가공하여 받는 임금이 목적이 될 때, 자연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연의 안위는 더 이상 나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을 최대한 착취해서 임금을 많이 받는 것만이 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대상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 대상화를 영어로 한 ‘objectification’의 한국어 뜻풀이는 ‘(사람에 대한) 객관화[대상화], (사람을) 물건 취급함’으로 나와 있다. 대상화는 ‘타자화’, ‘사물화’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상화를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어떤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이 특정 사물의 가치로 등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상화가 다른 존재에 나의 주관을 객관화하여 씌우는 것을 의미할 때, 대상화된 존재는 본연으로서의 의미와 맥락이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주관을 객관화한 실체로만 유의미하다. 노동의 대상화는 그래서 사실상 살아있는 노동을 죽여서 사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화폐가 등장하고,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오직 임금노동만이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됨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연도 대상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이 담당했던 가사노동의 경우는 타인에게 판매될 수 있는 노동이 아니었다. 가사노동은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남성의 노동에 자연스럽게 우위가 발생했고, 가사노동은 폄하의 대상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여성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유일하게 여성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여성의 성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적 특성에 따라, 여성의 신체 역시 대상화되었다.

이렇게 노동, 자연, 그리고 여성. 이 세 영역의 대상화는 노동자는 기계라는, 자연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는, 여성은 인격체 없는 남성의 자위기구라는 환상을 우리 사회에 심어놨고, 그 결과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주검과 코로나19, 최근에 겪은 이례적인 장마와 전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 그리고 ‘곤란한’ 페미니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터지고 사람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우리 사회가 드디어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본질적인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이번에 내놓은 뉴딜 정책의 경우, 여전히 성장주의가 그 핵심에 있고, 디지털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디지털화를 통해 대면 상호작용과 이동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친환경적인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태에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다른 에너지를 줄이고 전기사용을 확대하거나 친환경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환경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상 전기자동차의 보급화는 환경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만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 오히려 주행거리와 운행 빈도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또 우리는 자동차만 친환경으로 바꾸면 되는 줄 아는데,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가 차지하는 도시 인프라 자체에서 발생하는 탄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친환경 연료는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친환경 에너지 자체도 고민해볼 지점이 많다. 우리나라 태양열 에너지의 경우, 땅이 좁아서 산을 깎아내는 식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는데, 에너지 확보를 위해 산을 깎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 않는가.

디지털화가 대안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대면의 비대면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인간상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면하여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납작한 청각과 시각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개입을 하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상대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특정 순간에 흘렀던 음악을 머릿속에 평생 저장해두어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상대가 다리를 떠는지, 팔짱을 끼는지를 봄으로써 불편함을 포착하기도 하고, 눈과 입의 미세한 떨림, 움직임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공감능력을 형성하고, 타인과 유대를 맺어왔다. 하지만 모든 상호작용이 비대면화 되면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에 화면이라는 벽을 놓게 되는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TV 속 광고와 인스타그램에 속아왔듯이, 우리는 화면으로 보이는 것에 우리의 상상만 덧입히게 되지, 실제로 상대를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N번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해자들은 화면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화면이라는 평평한 창을 통해 접해왔던 수많은 과장되고 허구적인 상(像)들 때문일 것이다. 화면 앞에서 질주하는 그들의 욕망을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든 화면은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평평한 것이기에.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대체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교육 역시 입시경쟁에 의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일. 더불어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은 예컨대 소규모 학급을 운영하고, 더 넓은 교실과 더 많은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효율 논리에 따르면 이런 방안들이 논의될 리 없다. 디지털화, 비대면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곳곳에서 이토록 빠르게 적용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값싸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지, 옳고 이성적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진정한 최선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풍요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성장 중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벗어 던져야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성장 자체에 착취가 내포되어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땅이든, 자본은 무언가를 갉아 먹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재선으로 당선된 프랑스 파리시의 시장(市長)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장 ‘안 이달고’는 ‘파리를 위한 선언’으로 도시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파리를 위한 선언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핵심적인 것들만 나열해 보겠다.

 

⓵ 파리 전역 운행속도 30km/h 제한

②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③ 디지털 광고판 퇴출

④ 에어비앤비 주택 사들여 저렴한 공공임대

⑤ 파리시민의 식량주권 확보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 대안적 가축 사육 지원 정책 마련)

 

이달고 시장의 철학은 도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그리고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달고 시장은 파리를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도시로 만들어 자연과 사람이 숨 쉬는 도시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달고 시장의 이러한 정책 취지에 파리 시민이 공감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시장 Anne Hidalg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ne_Hidalgo_(3).JPG © Remi Jouan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반(反)성장의 삶은 개개인이 혼자서는 달성하기 힘들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개개인은 시스템의 이탈자가 되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달고 시장이 했듯이 시스템과 제도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어 국가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변화가 있어야만 다른 삶이 가능하다.

 

결론이다. 앞서 살펴봤듯, 임금노동에서 시작해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경제적 파편들로 잘게 잘게 쪼개졌다. 그리하여 노동과 여성과 자연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해왔다. 사회는 노동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착취자인 뱃사람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와 각종 자연재해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피해자들의 눈을 응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당장의 방역과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눈은, 앞으로 우리가 듀공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멀리,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야 한다. 죽은 듯 보였던 것들은 사실 전부 살아있기에. 내려오자. 대상화의 단상에서 생(生)이 있는 대지로.

2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2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1971~1982)

『인식과 관심』 이후 하버마스는 체계이론(루만), 발달 심리학(피아제, 콜버그), 사회 이론(베버, 뒤르켐, 파슨스, 미드 등)을 끌어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1971[1973]), 프린스턴대학에서 행한 가우스 강의록(『사회적 상호작용의 화용론에 대하여』라는 책에 수록(1984[2001]), 『의사소통과 사회진화』(1976[1979])에 실린 글들이 이 시기에 속한 결과물이다. 가우스 강의록은 하버마스 사상에 있어서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나타내는 저작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구상에 있어 적절한 개념틀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강의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이 “언어적 전회”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인간 행위와 상호이해가 언어적 구조에 의해 충실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이론의 토대를 다시 만들고자 했던 이러한 예비적 시도는 1976년에 발표된 중추적 논문인 「보편화용론이란 무엇인가?」(CES: 1~94; OPC: 21~103)라는 결실을 거두게 한다. 이 글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 이론의 토대를 다졌다.

이 시기에 가장 드높은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하버마스는 이 두 권짜리 책의 목적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이성이 인지도구적으로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이다. 나는 이 합리성 개념이 회의적 고찰을 너끈히 견딜 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둘째, 생활세계와 체계의 패러다임을 결합하는 2단계 사회 개념이다. 두 패러다임은 단순히 수사적 방식으로 결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병리 유형들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병리의 유형들을 의사소통적 구조를 갖는 삶의 영역들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자립화된 행위체계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가정 아래 설명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근대의 역설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삶의 연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 1』 20쪽)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도입된 이론적 모델의 핵심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대한 고찰] 그리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의 이항대립이 자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를 사회적 학습(societal learning)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학습은 사회 체계 안에 침전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 체계는 점점 복잡하게 분화되는 가운데 고유한 자체 논리를 획득하면서 개인이나 사회적 행위 집단의 통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화와 개인화 과정은 생활세계-훗설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을 하버마스는 형식화용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에서 이루어진다.

 

  1. 탈형이상학적 사유: 합리성, 도덕성 그리고 민주주의(1982~2000)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출판 이후, 하버마스는 합리성 및 근대성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그것의 개념적 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인다. 그는 탈근대주의, 회의주의, 역사화된 상대주의(historicizing relativism) 그리고 교조적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진리와 정당화(1999 [2003])』에서 그는 진리에 대한 기존 설명을 고치면서 “약한 자연주의”[적 입장](이후 내용을 참고할 것)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는 모든 종류의 인간 행위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윤리학과 사회 정치 철학으로 전환하면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를 이용해 담론윤리학적 형식의 도덕이론, 토의민주주의론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이론을 전개한다. 이 세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 그는 각 영역들의 담론 및 합리성 형식들과 연관된 규범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역들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갖춘 주체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구조들의 종류에 대한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저작은 『도덕의식과 의사소통행위(1983 [1990])』,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1987])』, 『탈형이상학적 사유(1988 [1992])』, 『담론윤리의 해명(1991 [1993]), 『이질성의 포용(1996 [1998]) 그리고 정치이론 및 법이론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1992 [1996])』이다.

 

  1. 후기세속주의적(postsecular) 사유와 후기국민국가적(postnational) 사유(2001~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버마스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철학적 인간학으로 다소 회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특히 담론 윤리학에 대한 토론은 동기화의 문제를 자주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합리적으로 행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하버마스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칸트적 인식 및 행위 주체관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의 저작에서 그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로 인한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줬다. 이러한 전개는 2001년 독일서적상협회평화상의 수락 연설인 “신앙과 지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1 [2003b])』에 수록된 <인류의 윤리적 자기이해에 관한 논쟁>이라는 긴 논문과 더불어 선보여졌다. 여기서 그는 인간복제와 착상 전에 이루어지는 유전자 검사에 반대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도덕성은 그러한 인격 속에 구현된 것이라는 어떤 윤리적 자기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버마스는 피험자의 동의 없이 생물학적인 조작이 이루어지면 그러한 일은 우리가-동시에 이 피험자가- 자율적 행위자라는 생각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행위자로 살아온 우리의 경험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개략적으로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생명윤리학적 논쟁에 이바지하면서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와 그가 “후기세속주의적”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지칭한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 썼다. 여기서 그는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계몽된 자기이해와 주요 세계종교에 대한 신학적 자기이해-이것은 과거에서 생성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서 작금의 현대에 튀어나온 것이다- 사이의 기이한 변증법”(하버마스 2010: 영문 번역본 16페이지. 번역은 수정)으로 묘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하버마스는 도덕성, 민주주의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 이론적 절차주의뿐만 아니라 탈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전념해 왔는데 이런 그의 입장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2005 [2008]』라는 책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에 대한 후기세속주의적 자기 이해로 여겼던 것과 정확히 수렴한다.

후기세속주의적 사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시도하고 종교 문제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담론 윤리학에 내재하고 있었던 쟁점들(위에서 언급했던 동기화의 문제 같은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 정치 상황에 대한 고찰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해 여타 유럽 지역에서는 늘어나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문제들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 팽창한 유럽연합은 조화로운 유럽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구적 타원에서 보면, 종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9. 11 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분명한 요인이었다. 1999년 코소보 사태에 대해 하버마스는 나토의 군사 개입과 폭격을 지지한 반면에, 2003년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이는 정당한 근거를 필요로 하였고 하버마스로 하여금 국제법과 그것의 규범적 강제력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지지 및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사회 민주주의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구적 정치 질서 안에서의 범세계적(cosmopolitan) 민주주의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최근 저작들에서 분명히 철학적 인간학으로 회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규범적 비판이론을 좀 더 명확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