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 /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유운의 전개도 접기]

예스터데이 /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이유운

 

예스터데이

 

전화가 오랫동안 울리지 않으면

차라리 전보를 치던 때가 사랑하기 편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스터데이에 갔다

아득한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러

 

내가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이 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자신의 바지 밑단이 말린 모양 때문에 고장나기를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

 

그는 머리를 풀고 셔츠를 벗으면서

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내 이름도 모르고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앉기 전에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해야겠다고 말한다

휴대폰 따위는 만지지 않아야 사랑하는 사이니까

 

반들거리는 창가에서

금방 튀긴 팝콘을 먹고 맥주를 따고 오프너를 만지면서

생각

했다

 

일기장을 너무 함부로 펼쳐놨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던 뒷목의 문신도 너무 헐렁한 옷을 입고 있다

 

이런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알콜중독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상담을 위해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실 수 있기 위해 구걸을 하기 위해

철 지난 스키복을 덮고 길거리에 누워야 하는 결말이 정해져 있을지도

 

그래도 위인들의 일기장은 언제나 출간되니까

 

위인이 되려면 뭐든 해야 하잖아

레몬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거나

동시에 스물여덟 명과 연애를 하거나

혀로 체리꼭지를 묶거나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온다

 

그는 휴대폰을 충전하는 나의 등 뒤에 있고

나는 발뒤꿈치로 그의 앞까지 걸어가고

불 좀 빌립시다 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은 사랑 좀 빌립시다, 목숨 좀 빌립시다 구걸하고 싶었지만

 

녹내장에 걸린 늙은 고양이와

슬개골이 다친 강아지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이었으므로

한 번도 나를 가여워해보지도 못했고

나를 가여워해달라고 구걸해보지도 못했다

 

뒤에서 그가 부른다 아직 멀었어요?

 

아직 멀었어요 내겐 사랑도 구걸 같아요

어떻게 걸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자기소개를 할 때는 여전히 지옥 같아요

그러니까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먼 사람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에

등을 돌리면서 고고하게 웃는다

기다렸어요? 하고서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오래된 공간을 좋아한다. 그 공간에 얽힌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래된 엽서처럼 나에게 오래 있다. 오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서대문구에서 내게 가장 친숙하고 오래된 장소는 ‘예스터데이’다. 카카오맵에 따르면‘예스터데이’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531, 2층에 위치한 호프, 요리주점이다. 원래는 경양식집이었고, 카페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그 곳에 갔을 땐, 지금처럼 호가든 여섯 병과 나초를 한 세트로 엮어 파는 곳이었다. 깊이 안 쪽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야 하는 커다란 소파 같은 의자, 언제 와도 비슷한 플레이리스트, 베티가 찍혀 있는 냅킨들. 나에게 가장 오래된 예스터데이의 장면들이다.

나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나의 언니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축하할 일이나 함께 만날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 만났다. 나는 이 곳에서 환풍구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며 많은 것들을 싫어하는 법을 배웠다. 병을 빙글빙글 흔들어 적당하게 호가든을 따르는 법을 배웠다. 어떤 혁명은 누군가를 지독하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이렇게나 슬프고 험난한 세상에서도 명랑하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웠다. 그것은 언니들과 선생님이 나 대신 슬픔을 먼저 맞아주기 때문에 그랬다.

대학원에 와서 가장 신기한 것은 ‘세미나’였다. 세미나에서 더듬더듬 낯선 말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는 법을 배우는 것도 신기했지만 제일 신기한 것은 다들 나를 먹인다는 것이었다. 커피를 사주고,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고, 책을 사주고, 연필을 깎아줬다. 보답은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물론 나는 가끔 세미나에서 도망을 쳤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 어딘가에 뻑적지근하게 걸려서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튼 나는 성실한 학생은 절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언니들이 나보다 엄청나게 넉넉했을 리도 없는데, 그들은 나를 먹이는 데에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다. 밝고 너른 눈으로 나를 봐주는 언니들의 둥근 눈동자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내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태도를 만들어준, 성실하고 그래서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는 언니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낸다. 그들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예스터데이에서 마감 시간에 나오는 ‘예스터데이’ 노래 외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엽서처럼 오래 된 사람들을 떠올릴 때 그들과 자주 있었던 장소는 아주 중요하다. 눈치 챘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일부러 ‘공간’과 ‘장소’라는 말을 번갈아 혼용해서 썼다. 적확하게 단어를 골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철학 연구자가 최대한 빨리 타파해야 할 아주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나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을 여러 개 늘어놓은 다음 그 단어를 상상하기 좋은 다른 나라의 언어나 옛날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고약한 취미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공간’이라는 단어의 한자 표기를 좋아한다. 空間. 빈 것 사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람 소리가 사실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나무 사이의 빈 공간이 흔들리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무서울 정도로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가득한 숲을 상상한다. ‘장소’ 라는 단어에는 유난히 일본어가 어울린다. 장소(場所). ばしょ. 조금 웃긴 말이지만 그 발음을 할 때마다 모아지는 입술의 모양이 귀여워서 그렇다.

 

장소란 말은 슬프다. 가변적이니까.

버스를 타고 서대문구를 지날 때마다 꼭 예스터데이의 간판을 확인한다. 야자수가 반짝거리는 촌스러운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예스터데이가 몇 번 변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약간의 불안을 야기한다. 저 곳에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너는 말이다, 좀 우울하지 않느냐. 희망을 가진 존재는 명랑해야 한다. 명랑함에서 희망이 나온다! 혁명이라는 것도, 영원이라는 것도. 생의영원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어디서 온 것 같으냐. 명랑한 눈! 명랑한 태도에서 온 것이다.” 라고 말했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 자꾸 땅콩이며 안주를 쥐어주고 “네가 벌써 스물아홉이야? 나는 아직두 네가 스물다섯 같애.”하고 웃는 언니의 얼굴.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던 연인의 얼굴. 내 사랑의 형태들을 모두 이해했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예스터데이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장소란 말은 즐겁다. 가변적이니까.

「예스터데이」는 정말로 예스터데이에서 썼다. 사랑의 앞에 있을 때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을 담아 썼다. 술을 마시면 솔직해진다고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거짓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사랑이 별 것 아닌 척, 그에게 내가 목매지 않은 척. 다 거짓말이다. 사랑이 별 것 아닐 리가 없다. 나는 그런 것들도 누가 가르쳐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이런 것은 내가 스스로 나아가 먼저 맞아야 할 슬픔이나 두려움이었다.

나는 사랑을 시작할 때 못된 버릇이 있다. 자꾸 그와 함께 할 영원을 상상한다. 오래 참는 사랑이 온유할 거라는 오랜 가르침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을 생각하다 보면 순간을 놓친다. 소홀해진 순간들이 결국 깨지는 것은 나 때문인데 나는 그것을 견디질 못한다. 사랑이 나에게 이와 같은 무서운 얼굴로 다가올 때 이 시를 썼다. 내게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에서 이토록 나에게 무서운 시를 썼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하지만 예스터데이는 내게 언제나 무언갈 배울 수 있는 공간이므로 나는 이 무서운 시에 기꺼이 예스터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금의 나는 연인에게서 성실하게 순간을 잡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배움의 과정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한 학생이 되기를 원한다.

「예스터데이」가 너무 슬픈 시라는 벗의 말에 나는 정성껏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 구절을, 베티가 인쇄된 예스터데이의 냅킨 뒤에 써서 주었다.

 

“너는 슬픈 시를 쓰는구나.

슬픔이 시가 되었으니 안 슬퍼야 할 텐데.

시가 된 슬픔은 어느 다른 나라로

잠시 여행을 간 거야.

어느 날 건강히 다시 돌아올 거란다.”

 

                                                                                  ― 박시하, 「일요일」

 

 

너무 슬픈 시라는 것은 없다. 영원한 슬픔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믿는다. 어떤 것들은 영원할 거라고 쉽게 믿었다. 믿는다는 건 어떤 태도니까. 그런 태도를 오래 취하고 있으면 그런 행동을 하게 되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신실하게 무언가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믿음이 깨진다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믿음은 잠깐 멈출 수 있다. 같은 자세도 오래 취하면 온 몸이 저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고 하면, 그건 너무 쉽고 게으른 설명이다. 조금씩 자세와 태도를 바꾸어 가면서 믿음을 지속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태도와 퍽 달라져 있지만 그것도 믿음이다. 오디세우스의 배 모순 논리 같지만 사실이다. 믿음은 사실이니까.

 

명랑한 태도.

어떤 것들은 영원할 거라고 믿는 태도로.

어떤 것들은 영원하고

영원하다고 믿는 태도는 신실하다.

나는 너무 염려하지 않는 삶을 믿는다.

 

 

작가의 말

twt @writecloudpen

6월 13일을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