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의 이원론 대 민중의 다중화 [천 하룻밤 이야기]
좌우의 이원론 대 민중의 다중화
2025 10 23 상강(霜降), 이틀간 서리 내릴 듯 찬바람이 불더니 어제부터 다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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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이든 몸으로 히말라야 산맥에서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를 수 없겠지만, 개마고원을 거쳐서 백두산(2,155m)을 걸어서 오를 수는 있을까? 어느 산이든 산을 오르는 길은 매우 많다. 가까이에 북한산이 있고, 그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서쪽에서는 은평구에서, 동쪽에서는 도봉구에서, 북쪽에서는 송추로부터, 남쪽에서는 정릉에서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네 방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들 사이사이에 오를 수 있는 길들도 여럿 있다. 그럼에도 북한산 꼭대기(836미터)는 하나이다. 왼편에서 오른 이는 오른편에서 오른 이와 같은 다른 길에서 보아온 것들을 이야기를 한다. 삶도 그럴지 모른다.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길은 무수히 많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온 터전을 어느 날 떠난다는 것은 숙명이며, 사람이란 ‘세상을 떠난다’ 것은 하나의 이법으로 통한다. 산꼭대기에 올랐다가 산을 내려오고 다시 오를 기회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떠남은 필연이며 숙명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잡다한 이야기들은 산을 오르는 길들이 달라서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것과 닮았지만, 한번 세상을 떠나면 되돌아 올 수 없고, 각각이 살았던 이야기는 새로운 반복처럼 다르다. 오르고 내림의 반복과 살아가는 반복은 전혀 다른 반복일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반복이 남긴 것은 역사이며, 되돌아 비춰보는 통감(通鑑, speculation)이 있고, 평결론자들(les sententiaires)은 삶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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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 사람, 살림, 삶, 살(육肉)을 이야기 하면서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터전에서 반복하는 방식들이 다르다. 그럼에도 자연의 이법에 따라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는 반복은 같은 반복으로 받아들여진다. 아침에 나서서 일터에 가서 일하는 노력들이 다르지만 매일 노력을 더하여 자기 일의 집중과 강도를 높이며 살아가는 반복은 하루의 순환, 한해의 순환과 다르게 느껴진다. 동일하게 느끼는 해와 달의 순환과 달리,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방식에서 반복의 차이는 개인의 삶의 선호와 열정에 따라 다르다. 사람들은 자연과 터전에서 공통점을 공유하기도 하고, 각각의 역량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을 지라도 동일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다양한 방식이 공통용어로 잘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동일반복으로 일반화의 방식에서 하루, 한달, 한해에 맞는 용어들을 만든다. 그럼에도 용기 있는 인간과 정의로운 인간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각각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다고 하지만 큰 틀에서는 같아 보인다고 할 때, 삶에서 일반적인 기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위치가 다르듯이 개별적 특성에 의해 각자는 남들과 다른 지위와 위상을 갖는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연을 다루는 방식에서 공통성을 유지하면서 질서 속에서 살아가지만, 각자의 위치의 차이가 있고 게다가 삶에서 공동체라는 제도 안에서 역할에 따라, 다른 배치와 지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고대 그리스철학 이래로 다른 방식들을 보았을 것 같다. 한편으로 자연을 도구로서 잘 이용하려고 과학으로써 지식을 만들려고 했고, 다른 한편 자연 속에서 또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양식으로써 지혜를 찾고자 했을 것이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이미 인간이 사물 또는 물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런 차이를 알게 되면서, 외부의 자연에 대한 이중적 관심도 있었고,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양식에도 이중적 또는 다양한 양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관심 또는 지식을 만들려는 노력에서 이중화 또는 다양화는, 자연의 순환성과 인생의 일회성의 차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회성으로는 순환성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회성이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새로운 탄생의 일회성과 더불어 순환성을 이어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순환성이 지속인지 단절의 도약인지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었을 것이다. 이즈음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연의 순환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일회성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 같다.
자연의 순환성을 하루, 한달, 한해라는 구별을 한꺼번에 생각 속에 담을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 했다면, 순환의 운동을 수(數) 또는 길이로서 표시하는 방법이, 또는 상징으로서 공통 문자화 또는 기호화가 당연히 요구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를 언어로서 표현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인류가 신석기에 들어서서 생산물을 축적하고 교환하는 과정에서 각 부족들이 나름의 표시들을 가졌을 것이라 한다. 이러한 표기방식에서 기호화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일반화의 규칙들을 생각해내었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 일반화에서 사물에 대한 것과 삶의 양식에 대한 것 사이에 차이로서 양면성이 있었을 것이다.
소통과 교환이, 이런 양면적 역할에서, 보다 넓은 공동체 안에서 일반화의 방식을 창안해 나갔을 것이다. 제도도 일반화의 토대 위에 성립할 것이다. 이런 일반화들이 인간의 상상작용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후대까지 공유할 수 있는 기호화의 체계를 만들고, 다음 세대들에게도 또는 다른 터전에서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사유세계라고들 한다.
물론 문명의 시작으로 아나톨리아지방의 신석기 문명에서 포획의 방식이 생겼다고 하고, 농경문화에서는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 기본이라고 한다. 그래도 바빌론 문명과 이집트 문명들에서도, 동양에서도 황허문명과 요하문명에서도 전승이 있었다고는 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의 실재 활동과정에서 세는 것과 재는 것이 있어왔고, 또는 독해가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주문과 같은 암송의 언어들은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인간이 두뇌의 용량의 확대와 구강의 발달이, 흔적을 남기지 못했던 구술언어의 단계를 거쳐서 문자화할 수 있는 언어로 역사 속에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현대인들이 독해 가능한 범위 안에서 문자기록의 전승에서 보아, 그리스 철학사가 흥미 있는 사유의 전개 과정으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고들 한다. 그리스 사유에 양면성이 있다고 한다. 공간과 시간, 정지와 운동, 페라스와 아페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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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좌파와 우파의 대결처럼 이항 대립으로 보는 관점을 고착시켰다고 여긴다. 21세기에도 이런 사고의 이분법적 방식이 당연하고 또한 편리한 것으로 여긴다. 하물며 이들은 이분법을 인정하면서 조화 또는 중용의 방식을 소중히 여겨, ‘하늘을 나는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고들 한다. 사람은 두 다리로 걸으면서 오른발과 왼팔이 왼발과 오른팔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한 몸 속에서도 운동 방향을 달리하는 방식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분법 또는 이원론에 익숙한가. 수에서 10진법과 60진법이 있음에도, 이분법의 방식은 두 팔과 두 다리의 걷기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나중에 사회라는 제도와 종교라는 교리가 지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이런 이분법적 추리가 논리적 사유의 배중율에서 왔다고도 한다. 배제, 배척, 부정, 적대.
생각의 폭을 넓혀진 시대 이전에, 동양의 천지인에서도 인간이 소중하다고 한다. 어릴 때 들었던 하도와 낙서로부터 주역을 이해해야 군자로서 세상사에 나설 수 있다고 했다. 현 시절에서는 초등학교 시절에서부터 산수의 계산법을 배우고 또한 도형의 기하학을 배운다. 그리고 물체들을 더 정확하게 다루기 위해 좌표기하학과 미적분을 거쳐서 허수의 등장까지 배운다. 그럼에도 또한 공동체의 삶에서 전례의 방식에 따라 규칙과 규율을 익히고, 사물을 다루는 법칙과 원리를 깨달아가면서, 세상에 나서서 장하고 훌륭한 인간이 되는 도덕을 닦고 인성을 함양한다. 이런 방식들은 현실사회에서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들이리라. 그 방편들을 학문이라는 체계에 맞추어 생각하는 추리와 추론이 점점 복잡해진다는 것도 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인 수와 도형을 익히고, 더불어 노래와 운동을 통해 건강과 신체를 안존하는 방식을 배우고, 나아가 사회생활의 필수로서 제도와 체제의 규율들을 익힌다. 이런 과정에 대해 학문은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삶의 보존에서 편리하고 유용한 방식들을 공유하게 한다. 그 공유하는 지식을 다음 세대에도 체계적으로 전수하여 공동체와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하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현대 산업혁명까지 지식의 전승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라고 착각하게 하였던 것 같다.
공동체의 체제와 사유하는 체계를 둘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은 편리하다. 그런데 이런 편리한 방식이 질서와 안녕을 가져다 준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듯이 인간에게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쩌면 불협화음처럼 계속되었다. 정합성이 모자라더라도 체계 안에서는 지식인들뿐만이 아니라 민중도 터전을 유지하며 살만하다고 여겼다. 즉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이용 방식을 공유하고, 나아가 제도를 만들어 인간들 사이의 공통성과 개별성을 더 잘 보증해 주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제도와 체제가 이원론으로 구성된 또는 구축된 세상이 타당한가라는 물음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죽 있어왔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를 이항대립 구도로 여기고, 또한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에서는 거의 극단적인 대립구도를 드러냈다. 대립의 극단에서 자기편이 아닌 자들을 반국가세력이라고 하고 제거해도 된다는 착란에 빠지기도 한다.
우선 팔과 다리의 운동을 상기해 보면서 어떤 힘들의 운동에서, 양편이 조화와 중용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의 발달과 역사의 과정으로 보아도, 건전한 사유에서는 좌편이 51% 우편이 49%로 이루질 경우에 조화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다수인 대중이 소수자처럼 살고, 소수이면서도 권력이든 재산이든 많이 소유하는 자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의 발전이래로 이런 지배층이 대중을 강압하는 점에서 전도된 사회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전도된 사회에 혁명을 설파하는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이 있다. 사유 활동의 진솔한 전개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혁명이후로 자연 안에서부터 사회로 그리고 세계 공동체로 나가는 전복적 사유의 시대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들을 위마니스트가 아니라 위마니떼르, 리베랄리스트가 아니라 리베르떼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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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편과 우편의 이분법적 사유는 사회적 삶의 편리함 때문에, 앵글로색슨계에서는 유용성과 실용성이라 하면서,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사유의 깊이 또는 심층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즉 자연 속에서 삶의 숙명성을 다시 깨우치기 이전에, 사람들은 편리와 이익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동양에서도 천지인에서부터든 하도낙서로부터이든, 음양, 남녀, 천원지방 등의 이분법의 바탕 또는 기원으로 하나인 태극을 두기도 한다. 하나로부터 이원성과 4상, 8괘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화에서도 조화와 중용을 통해 세상이 평천하를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동양 사회는 이원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입말과 문자에서는 백성이 하늘이라 한다. 그 바탕이 태극이라는 것이 사변적이라면, 백성은 실재성일 것이다.
이와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영향을 입은 두 갈래의 사상이 아테네에 들어왔다고 한다. 자연의 탐구로서 이오니아학파의 사상과 수학(산술학)에 근거를 우주의 원리로 삼은 엘레아의 사상이 들어왔다. 여기 외적 자연과 사유 사이의 이중성에서, 다시 이것들 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제기되었다. 이 탐구가 인간 또는 사유하는 권능으로서 영혼(프쉬케)이 의식 속에서인지, 의식의 대상인지에 대한 문제는 남아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이 철학이라고 하지만, 그 문제는 변형되어 중세의 신학에 이르렀다. 신학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은 신앙 속에서 진실한 활동을 한다고 믿었다.
신의 완전성과 세계의 원리 등을 추리에 앞서 보편성으로 인정한다고 했더라도, 사물들에서 또한 세상사에서 부딪히는 사실들과 환경들은 완전하지도 않았고, 원리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신과 천국, 천사와 계시라는 부분들을 젖혀두고 라서도 현실에서 경험적 사실들은 다른 영역임이 드러났다. 계시와 언어의 전달은 별개이라, 인간이 만든 기호들과 개념들의 잡다함에 통일성과 법칙성을 규정하는데 목적성이 먼저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판단들에서 명제들의 용어들에 대한 기호표기와 사물의 조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알았듯이, 삶의 표현들에서 종교적 환희나 공동체의 즐거움과 개인의 훌륭함 등이 다른 영역임을 알았다.
많은 논제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에 의견들을 모으는 평결문들은 선전제에 의한 추리들이 아니었다. 13세기에 프란체스코파 학자든 도미니크파 학자들은 평결문들에서 구체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황청 교리성은 신과 신국 등 근원적 항목들을 대해 문제 삼지 않는 한에서, 파리와 옥스퍼드 등의 대학들에서 현실적 논의에서 이중성의 대립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한편을 들고 다른 편을 말살하는 방식은 종교재판과 마남사냥에서 여전히 남아있었다. 르네상스시기까지 종교재판으로 브루노를 산채로 화형 시켰고, 갈릴레이에게도 지동설을 외부로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물질세계가 어쩌면 신의 창조와도, 그리고 인간의 추상적 추론의 담론과도 다른 탐구 방법의 필요를 알게 되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는 시기에, 데카르트는 발표를 하지 않았지만, 세계에 대한 자치적 특성을 발표하려고 했다. 그런 데카르트가 두 개의 실체를 내세우면서, 자연 또는 물질의 탐구 방법이 따로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근대철학의 여명이라 불리는 방법론은 두 가지 다른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럼에도 사유와 연대하는 자연의 작용방식을 인식의 한 방향(양식)으로 여기고, 자연과 물질의 운동 현상도 사유와 상응하여 설명하려하였다. 그러나 두 사유 속성을 다루면서, 소박한 유물론자들이 다루는 물질과 관념론자들이 사유 대상의 일부로서 삼는 물체 사이에 간격이 점점 확인되어 갔다. 이로서 생명 있는 존재는 자연 속에서 산다는 인식이 “빛들 세기”에 도래할 것이고, 19세기에는 생기론과 프퓌케에 대한 학문이 전개될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자연 밖에서도 또는 자연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인식의 추론체계와는 다른 생성의 양식이 있음을 알아챘다. 안과 밖이 없는 심층 세계가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리라. 다시 기원에 대한 성찰에 힘입어서, 자연을 탐구하는 기본적 요소 또는 기본 단위로서 수, 점, 원자, 이외에 스토아학자들이 말했던 정령들(프쉬케)도 한 몫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계몽기라고 하는 18세기 “빛들 세기”에서는 빛이 기본요소로서 떠올랐다. 빛의 무한 진행?에서 무한대라는 생각은 이미 브루노가 하늘의 뚜껑을 열어서 무한대를 펼쳐놓았었다. 그 빛을 통해 사물과 물체를 구별하고 있었듯이, 빛의 직진과 무한 확장과 같은 수학적 추론과 원리들을 생각하였다.
자연에서 좌표 설정과는 다른 양태인 자연의 자치성에서, 생명체가 물체처럼 자동인형 같은 것이 아니라, 생명있는 물체의 자치성과 자율성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데카르트 좌파라고 불릴 유물론자들은 그 자율성 속에, 물리학자들이 물체의 충력을 보듯이, 생명체의 조직화에 생기 또는 에너지를 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도 겉으로 보기에 이원성을 기준으로 하는 두 갈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자연의 물질과 물체들의 성질들을 위계적으로 무기물, 식물, 동물, 인간 (천사, 신) 등으로 보는 이해하는 방식을 떠나서, 각각의 물체들(이미지들, 형상들)이 발생적으로 다른 과정에서 생성의 길을 걷는다는 것 알게 되었다. 자연학자인 뷔퐁이 생성의 과정에서 논리학의 항목들과는 다른 항목(용어, 명사)들을 설정할 것이다. 게다가 생명체의 조직화를 다루게 되면서 생리학도 성립한다. 인간의 감각과 감정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생명체 안에서 영혼(아니마든 프쉬케든)의 위치를 다루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세계의 체계와 제도의 체제를 세운 정신의 성찰과는 다른 길을 열게 될 것이고, 생물학과 진화의 사유를 열기에 이를 것이다. 이원성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지식체계의 관점이었으며, 과거의 잠재적 이원성은 이를 상징으로 교회제도와 사회제도에 투사했던 것으로 여겼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물질의 내부의 탐구로 이어지면서, 인식의 역량이 지적 체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방식에서도 내재적 발생의 연관을 고려하게 된다. 지식의 발달과 도구의 발달은, 빛들 세기에 “백과전서”에서 밝히듯이 오랜 과정에 점진적 발전을 거쳐서 민중이 공유하는 기술발달의 확장으로 생산력이 높아지고, 시민의 정치의식도 활발해졌다. 심층으로부터 나온 자연의 자치성 이상으로 인간의 자율성은, 교권과 왕권에 대항하는 제3신분이라는 인민을 등장시켰다. 물질성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상위의 두 권력을 무너뜨리고, 인민의 자치와 인민의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우주와 자연에서 의식의 이원성이, 제도와 체제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분법적 사고로 전환되는 듯이 보였으나, 전승의 선전제와 체계는 공고하였고, 혁명과 반동 사이에서 국가 권력이 교권과 왕권을 대신하면서, 정치적으로 좌우를 구별하여 좌편에는 인민을 대변하는 세력이, 우편에는 기존 권력을 유지하려는 왕당파들이 있었다. 1830년 이후로 산업화의 과정에서 왕당파를 대리하는 자본가들이 우파가 되고, 자본에 예속되는 노동자가 좌파가 되었다. 맑스는 대혁명에서 인민의 성장이, 정치경제학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이루질 것이라고 역사의 발전을 설명했다. 인간의 사유 방식에서 심층과 상층의 이원적 대립, 다음으로 의식 활동에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 또는 영혼과 신체의 대립, 빛을 통하여 자연의 체계와 자연의 발생의 대립을 잠시 거쳐서, 삶의 터전에서 좌와 우의 대립은 사회정치적 활동에서 대립의 양상으로 이어졌다.
천오백년의 종교이든, 이백년의 형이상학이든 자연의 대하는 태도에서 대립에서는 인간이 막연하게 우월하다는 심정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지식의 확장을 통해 자연의 주인으로써 지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나, 칸트는 그런 지식이 없음을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이라고 밝혔고, 사회에서는 지식보다 도덕과 공감이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산업화의 발전에서 지식을 도구로 삼는 체제는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고, 사회의 갈등과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칸트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국가 제도와 체제에서 소수의 상층과 다수의 심층 사이의 대결은 심화되었다. 다수의 좌파와 소수의 우파의 구별은 뚜렷해졌고, 부의 사적 축적자들에 의한 산업화과정은 불평등의 해소하지 못하고, 다수의 인민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치경제적 좌우의 대결은 19세기 이래로 산업화 과정에서 점점 굳어져갔다. 상품자유주의 세계에서는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이에 대립하는 인성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인도주의를 내세운다. 우리 남녘에서는 개인의 사적 이기심이 사회의 공공성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하는 체제를 굳혀갔다. 21세기 임에도 급기야, 야만적 상품자유주의자들이 인도주의자이며 인성자유주의자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처형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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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방식이든, 사유 양태이든, 사회 제도이든 좌우의 구별은 사실상 불편한 것이다. 철학은 이런 이분법적 추리의 사유(로고스)를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서양 철학사에서 의식의 측면에서 2500년 과정을 상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표면에서 심층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유의 측면에서 상층의 소수의 자유에서 표면의 부르주아의 자유로, 그리고 심층의 인민의 자유로 확장되어 간다고 한다. 인민의 자유, 안양정토세상, 평천하.
고대의 사유에서는 상층의 정지가 먼저였고, 르네상스 이래로는 표면의 이분법과 이중화 현상이 있었고, 근대에 와서는 심층의 발현과 발생의 사유로 인민의 성장이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20세기 중반에 새로운 변화로서 유전자(DNA) 구조의 발견과 디지털의 발명으로 새로운 사유가 전개되고 있다. 이런 사유에는 상하와 좌우라는 사방으로 방향설정을 생각할 수 있고, 이를 세분화하여 팔방도 생각할 수 있고 확장으로 36방과 삼십육계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양방이든 36방이든, 방향의 중심을 공의 중점 또는 초점처럼 생각하면, 진자운동처럼 수많은 움직임이 마치 주변에서 중심으로 그리고 중심으로 주변들로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갈릴레이는, 사람들이 추의 진자의 운동에서 중간점이 겉보기에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라도, 그 중간점이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힘(충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충력이 물체 속에 있다. 이런 움직임이 지구의 자전과 관계있다고 증명한 것은 1851년의 푸꼬(Léon Foucault, 1819-1868)의 추(le pendule)이다. 운동하는 중간 또는 중심이 하나이라고 기호화할 수도 있지만, 이 하나가 수도, 점도, 원자도 아니다. 움직이는 힘 또는 에너지, 나아가 퀴니코스-스토아학파가 이야기한 소마-프쉬케(물질영혼)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인간에 내재하는 영혼의 작동에게도 상사성이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편리와 안락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근대성일 것이다. 그런데 편리와 안정의 생산력은 산업사회의 한계에 이른 것 같은데, 사적이익 추구자(트럼프포함)들은 그 기술과 도구를 여전히 전쟁과 공포를 조장하려는데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의 발달이 소통의 방식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철기시대 이래로 문자화가 우선하며, 간접화법을 통한 지배방식은 여전했다. 디지털의 발전은 직접화법과 이미지전달(상상작용)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의 한계에 이르러서 문화의 다양화가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다양성의 발현이 우선은 사유에서보다 문화 예술에서 전개되고 있다. 문학, 영화, 스포츠, 음악, 회화, 공예, 건축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기술의 발전에서 생산력의 변화에 인공지능(AI)이 첨가 되면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만큼이나 전쟁 도구로 전환도 속도를 내고 있는 것 같다. 터전 또는 개인도 다양화되고 있어서 다양체의 사회가 이루지고 있고, 전지구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그럼에도 이항 대립이 낳은 불평등과 억압은 여전히 너울을 드리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 탐만치, 즉 탐욕자와 사적 이익추종자들과 치졸한 파라노이아 환자(종교병환자)들이 문제다. – AI가 입말과 문자화를 일방통행을 넘어서 이미지들을 상호소통 시키면서, 다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소통하는 누리소통 시대에서, 제국의 지배방식과는 다른 공감과 공명이 이루어질 탈영토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 들뢰즈가 순수했다고 해야 하나.
열 달이 지나도록, 계엄과 내란 획책의 집단적 사고는 여전히 우리의 상층에서 그리고 주변을 맴돌고 있다. 빠르게 널리 이미지의 전송과 소통에서도 고착된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누리소통도 이항대립처럼 편가르기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게다가 이 문자화에서 용어들이 상층 편향되어 있고, 편집증의 세뇌가 깊이 작용을 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라고 말하지만 구체제와 구시대의 관습과 습관이 사유방향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재성이 내재성으로부터 발현이라고 하지만, 그 발현이 현실성의 형해화 된 이미지와 관계 속에서 고착화되는 것을 우선은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 것이 현실의 관계에서 숫적으로 다수 임에도 지배방식에서 소수자일 때, 삶의 터전의 변화와 혁명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분법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개인이 실천하는 방식으로 우공이산이라고 하기 에는 다양체의 덩어리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을 직감한다. 시대는 입말의 소통과 더불어 이미지의 소통으로 다양체의 덩어리가 회오리처럼 커져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 덩어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고 나가는 모습을 그 파도 속에 있는 물방울로서는 느끼지 못하는 한계 때문일까?
프로이트 위상적 사고에 따른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서, 상징계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를 생각하는 이들은 교회권력, 국가권력, 학문권력에 복속되어 자들이라고 하지만, 그 상징계를 거의 실재성으로 여기는 신앙인들, 부역자들, 이원법의 인식 추종자들이 여론과 문자화를 통해 체제를 견고히 하려 한다. 이런 고착성에 대해 중심의 운동성과 다양성이 체제 안에서 작동하여 변화를 실행하려고 하는 노력에는 강도가 축적되어가고 있다. 누리소통을 통한 공감과 공명이, 삶의 터전에서 먹고 자는 문제에 대한 해결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소통은 상상계의 그림(이미지)과 같은 잠재성으로 그칠 것이다. 이 상상작용으로서 실재성이 현실로서 누리 소통 속에서 잠재성에서 표출되고 생성되는 것에서 의미를 새롭게 할 것이다.
벩송이 정태적 종교를 이야기하면서 폴리네시아인들이 자연에 정령의 힘과 같은 ‘마나’가 있다고 믿었다고 하는데, 이는 인류에게 공통하는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토착민들의 종교성은 이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에도 있다는 것이다. 벩송이 인용한 예에서, 어느 부인이 승강기를 타려고 했을 때, 승강기문이 열렸으나 발판이 없었는데, 마담이 한 발을 내디디려고 하는 순간에, 안에서 갑자기 앞에 검은 물체(사람)가 뛰쳐나와서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에서 상상작용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론인 이영희 선생은 어느 글에서 함경도 지방에 ‘어덕서니’라는 귀신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려움이 닥칠 때 갑자기 앞에 나타나는 검은 기둥귀신과 같은 것인데, 위로 올려다 보면 점점 커져서 무섭고 아래로 내려다보면 점점 작아져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줄어드는 것을 설명하며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에게 귀신처럼 등장하는 검은 물체 또는 저승사자에게는 발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다보면 상상계가 줄어들어 사라지고 실재를 직시하게 된다고 한다. 이데올로기로서 상층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에서도 종교에서도 가상성은 여럿으로 그리고 과정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은 마치 포퓰리즘의 대중의 확대처럼 커져 간다. 그런데 그 밑을 또는 심층의 실재성을 들여다보면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심층의 발현으로써 어느 부인의 일화는 효과가 있다.
AI를 통한 누리소통을 통한 실재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어덕서니의 아래를 보듯이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벩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상상계의 이미지를 기억의 재인식의 방식으로 다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작동은 실재성과 현실성의 연결에 의한 조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벩송에 이어서 들뢰즈는 상상작용(imagination)에서 형태로서 등장하려는 이미지(image)의 어렴풋한 형상화(마나, 검은 물체, 어덕서니, 저승사자)의 효과에 머물지 말고, 내재성의 실재 생성과 발현을 심층에서부터 깊이 재인식할 것을 권한다. 그 실재성의 발현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어덕서니건 그 발현은 삶의 표출로서 탈주선임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런 재인식에서 또는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인민의 권능과 그 강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것이다.
(8:13, 58UMDD)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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