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앞의 글(서평, 1부)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조던이 과학자로서 불굴을 의지를 갖추고 자연 속에 질서를 세워 나갔던 힘의 원천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여기서 저자의 서술은 비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가에 가깝다.

이 책에서 조던에 대한 애가는 갑작스럽게 분노로 전환한다. 이것은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첫 번째 의심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해 1905년 스탠포드 학장으로 근무할 당시이다. 스탠포드 대학 이사장인 제인 스탠포드가 사망했는데 여러 증거로 볼 때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조던은 학장으로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제인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만다.

최근 이 사건은 다시 조사되었는데 저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조던이 제인을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의심보다 더 결정적으로 저자의 평가를 전환한 것은 조던이 1920년대 전개했던 우생학 운동이었다.

우생학은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제시했다. 조던은 이런 우생학을 미국으로 전파했으며 1920년대에는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우생학의 온상이 되었다. 조던의 영향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924년 버지니아 수용소나 1928 인종 개선 재단은 모두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생학의 결과는 사회 부적응자를 강제로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후일 독일에서는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강제 불임 시술을 통해 유전적 영향을 제거하려 했다.

2)

여기서 강제 불임의 대상이 된 것은 단순히 간질환자나 정신지체인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도덕적 타락으로 지목된 창녀, 동성애자 등도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근거가 된 이론이 도덕적 타락이 유전된다는 주장이다.

버지니아 수용소장이었던 프리디 박사는 캐리 벅이란 여성을 조사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났으나, 강간당해서 양부모가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는 애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프리디 박사는 애마가 캐리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애마 역시 창녀로 이 수용소에 끌려왔다. 프리디 박사는 캐리가 수용소에서 출산한 아이 비비엔에게서도 정신적 퇴화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캐리 벅의 예를 도덕적 타락이 3대에 걸쳐 유전한 예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버지니아 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던 두 여인 애나와 메리를 만난다. 저자는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이 처리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를 되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우생학이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마침내 이 책의 근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엄격한 절차를 따르는 탁월한 과학자 조던이 이런 우생학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니다. 나치즘 역시 우생학에 기초하여 인종 청소를 하였으니, 이런 물음은 곧 나치즘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다.

3)

저자는 조던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그 단서를 찾으려 한다. 저자는 마침내 조던을 과학자로 이끌었던 그의 스승 루이 아가시의 사상에 부딪힌다. 루이 아가시는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표본실 건물 앞에 동상으로 세워놓은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이 나중에 다윈의 영향을 받아 탁월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아가시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지배되었다고 본다.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밑바닥에 있는 개념은 자연 속의 신의 계획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거슬러 올라가서, 조던이 아가시를 자연관찰 캠프에서 처음 만난 날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때 저자는 아가시의 말을 같은 캠프에 참가했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시 속에서 발견한다.

스승이 젊은이들에게 말했지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우리는 그분의 법칙에 따라

원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다네

그 무한한 존재, 시작된 적이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그분,

이름 붙일 수 없는 유일자,

우리의 모든 빛의 빛, 그 빛의 근원,

생명의 근원, 그리고 힘의 힘을

맹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듯,

우리는 이곳에서 더듬으며 찾고 있다네.

그 상형문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이는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자연 속에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아가시의 사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진화론의 태두라고 할 라마르크의 학설과 닮았다. 이 학설은 다윈의 맹목적 진화론과 구별되며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서 이제 진화의 단계는 동시에 탁월함의 단계이며 도덕적 완성의 단계가 된다. 그 단계의 최종 끝에는 인간이 있으며 이 인간의 끝에는 다시 이성적이며 기독교도인 백인종이 있다.

과학이 자연의 종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의 종 속에 신이 숨겨놓은 이런 탁월성의 단계,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가시는 이렇게 말한다.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4)

저자에 의하면 조던 역시 끝내 아가시의 목적론적 진화론, 즉 자연의 층계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자연의 층계라는 개념은 우생학의 원천이 된다. 그 대문에 조던 역시 우생학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퇴화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른 생물은 퇴화하여 자신이 진화의 단계에서 발전시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생학은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해서는 퇴화가 일어난 종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인종 청소나 강제 불임 시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조던이 스위스의 아오스타라는 공간을 방문한 기록을 발견한다. 아오스타는 가톨릭교회가 장애인을 돌보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장애인이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어느덧 커다란 도시가 되었다. 조던은 이 아오스타를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 대립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높이 평가한다. 다윈에서 모든 생물은 각자 적응하고 있는 존재니, 여기서는 어떤 층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생물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다윈으로서는 퇴화라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새로운 적응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물의 다양한 변종이 생물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제이니, 이런 변종이 생명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5)

초기에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한 조던이 끝내 다시 아기시의 목적 진화론에 빠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관해 저자는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이 책의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조던이 은 우생학에 빠져든 것은 자연의 무질서 앞에 조던이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자연이 혼돈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과학이 아무리 이 자연 속에 질서를 세우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대지진 앞에서 무너진 조던의 표본실과 마찬가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혼돈의 세계 속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버지니아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한 채 살아남은 애나와 메리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그리고 자연에 어떤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곧 민들레 법칙이라 한다. 그것이 다윈이 독자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라고 한다.

조던의 삶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이런 법칙은 작가 자신의 삶도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이제 자신을 떠난 남편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제 직시하며 새로 만난 여성과 삶을 꾸리게 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제 약간 감상적으로 되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포한다.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을 해방시키는 것”

6)

마침내 저자는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어류의 세계에서 세웠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저자는 자기의 일이 조던이 애나와 메리에게 가했던 잔인한 불임시술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의 결단 속에는 어떤 미묘한 즐거움이 흐른다.

저자는 분지학을 연구하는 캐럴 계숙 윤의 도움으로 물고기라는 존재 즉 어류라는 분류 항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산에 사는 생물을 모두 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또는 공중에 나는 생물을 모두 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물에 산다고 해서 모두 어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어류라고 말해지는 폐어, 송어, 멍게, 가자미 등은 동일한 과에 속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한다는 생각은 관념론 철학의 근본 주장이다. 물고기라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은 물고기가 마치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물고기라는 분류명을 제거해 버린다. 이로써 조던이 목숨을 걸고 확립하려면 물고기의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7)

글을 다 읽고 나서, 독자로서 나는 다시 회의에 빠진다. 우선 우생학에 대한 문제이다.

민들레 법칙, 아름다운 말이지만 저자가 기대한 만큼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가 그려 놓은 것처럼 자연의 혼돈 앞에 그런 그물망이 얼마나 버틸 것인가? 아마 그것은 대지진으로 파멸된 조던의 실험실 유리병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자가 가정했듯이 우생학이 목적론적 진화론의 결과인가? 다윈의 저서 속에 인간이 가축을 개량한 것 역시 진화의 한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자체 내에 이미 그런 우생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이런 생물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 속에 끌어들인 것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생물과 동일하다면, 우생학은 불가피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생물과 운동 법칙이 다르다는 전제 아래서만 우생학을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존재의 탁월성이나 도덕적 완성의 단계로 보는 것은 인간적 관점을 자연 속에 집어넣는 것이니 비판 받는다. 하지만 자연의 사다리를 자연 자체의 운동 법칙의 차이로 본다면, 이는 자연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연은 정말 혼돈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질서는 인위적인 것인가?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결국 니체의 철학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존 의지는 영웅의 것이고 대부분 사람은 자연의 혼돈 앞에서 오히려 니체가 경멸하는 과학적 삶, 무리 지은 삶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저자가 반대하는 삶이 결론으로 도출되지 않을까? 역시 인간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기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1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어느 물리학 교사의 말이다. 급하게 책을 구해 읽어 보니, 교사의 말이 틀림없다.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철학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번역서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LuLu Miller 저, 정지은 역, 곰 출판, .2021.12)이다. 원본이 2020년 나왔으니, 얼마 전이다. 저서의 원래 이름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논픽션이다. 구체적으로는 20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다룬다. 단순한 자서전과는 달리 저자가 과학자인 그의 삶에 물음을 던지며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을 읽기 전에 조던을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미국인인 그는 1851년 태어나 1931년 사망했다. 그는 어류를 연구했으며, 그가 발견해 명명한 물고기는 200여 종이 넘는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 거대한 어류 표본을 보관하는 건물을 지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나면서 이 건물에 이름표를 달아 놓은 유리병에 보관된 표본이 모조리 파괴된다. 물고기와 그 이름표는 서로 흩어져 일대 혼란이 벌어졌을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물고기의 이름표를 물고기의 몸에 바늘로 꿰매 놓는다. 그 후 그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과거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표본실이 건설되었다.

그는 인디아나 대학 학장(1885년)을 거쳐 스탠포드 대학 학장(1891년)을 역임했으며,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화주의자로서 미국의 전쟁 참여를 반대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인의 반열에 들어 심지어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호수와 산도 있다.

그런데 그의 삶에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그는 1906년 스탠포드 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제인 스탠포드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우생학을 미국에 도입하여 그 영향으로 1924년 버지니아 간질환자 정신박약자 수용소가 건설되어 강제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1928년 죽기 직전 그는 미국의 인종 개선 재단의 위원이 되었다. 그의 행동은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려 했던 나치의 행동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그를 새롭게 평가하는 노력이 등장하여 미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다. 저자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철학적 전기라고 하겠다.

2)

그의 생애를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 그의 삶의 문제가 금방 드러난다.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다. 그가 어떻게 부적응자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강제 불임 시술을 합법화하는 잔인한 행동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저자는 나중에 가서는 이런 문제를 깨닫게 되지만 처음에 저자가 그의 삶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오히려 다른 문제였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조던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과학자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조던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날 저자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어보았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결국, 이 자연 세계 속에 남는 것은 혼돈뿐이다. 이런 혼돈 속에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보다 더 탁월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저자의 아버지에 의하면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우리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이런 생각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형이상학자에 대항하면서 니체가 내뱉은 말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혼돈이 지배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니체가 세계의 혼돈 속에서 삶의 허무를 말했듯이 저자의 아버지 역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저자가 어릴 때 부딪혔던 것은 바로 혼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비극적인 자기파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냉혹한 세상에서 잠시 ‘웃음의 잔물결’을 던져주는 희극배우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저자가 소녀를 유혹했다고 고소되면서, 남편도 떠나고 저자의 삶은 파괴되고 만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과학자 조던의 삶을 연구하게 된다. “아무런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을 그에게서 찾고 싶었다.

3)

저자는 조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소개한다. 조던은 어릴 때 들꽃을 좋아한다. 그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는” 아름다운 아이였다.

노예 폐지론자인 그의 형이 북부 연방군에 참가했다가 발진티푸스로 죽자 그는 내적으로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그는 들꽃을 채집하여 표본을 만들거나 들꽃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보존하는데 흥미를 느낀다.

그는 1873년 루이 아가시가 페니키스 섬에서 개설한 자연관찰 캠프에 참가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한다. 그는 아가시의 도움을 어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캠프에서 그는 수잔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다윈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앞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그는 탁월한 학자가 되었다. 그의 생애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 따르던 형을 읽었고, 아내 수전도 병으로 일찍 죽었다. 나중에 다시 재혼했지만 아이 바버라도 잃었다. 그런 재앙에도 그는 굽히지 않는다.

저자는 조던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에 파괴된 물고기 표본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이런 서술을 통해 과학자로서 조던이 무질서한 자연에 대항하여 질서를 세우기 위해 벌였던 영웅적 노력의 원천을 발견하고자 했다. 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4)

저자가 일단 먼저 가정한 것은 카프카가 말한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란 곧 니체가 말한 생존의 의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는 어쩌면 인간을 계속 나가게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인 조던에서는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발견한 것, 즉 그것을 통해 조던이 자연에 질서를 세우도록 만든 힘은 오히려 두려움이라고 본다.

이 두려움을 저자는 조던이 형의 죽음에서 처음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형을 좋아했다. 그의 형은 노예 해방론자이며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가담했다. 불행하게도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어릴 때 그는 형의 죽음에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혼돈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런 두려움이 질서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이런 두려움이 자연의 파괴적 힘이 분출된 1906년 대지진 앞에서 그가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도록 만든 원천이라는 것이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만이 이 투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투쟁할 수 있게 했던 것은 또 하나의 힘은 어떤 기만이었다. 저자는 이 기만을 조던이 남긴 일기 속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은 기만이라 본다. 이는 근거 없는 어떤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근거 없는 기만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면서 삶의 투쟁을 계속하게 만드니, 이것은 자기기만이 가진 긍정적 효과라고 한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 자기기만이 과학자의 삶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니체가 말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본다면 자연 과학자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의 삶이 여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2부에서 계속)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2월 월례 발표회 영상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2월 월례 발표회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 4차례의 월례발표회는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될 예정입니다. 동학과 대종교 등의 종교사상, 한국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한국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자기화 과정 등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주 제 :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토론자 : 송인재(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일 시 : 2022년 2월 24일(목) 오후 4~6시

장 소 : 온라인 줌 회의실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1QCwlGMdknI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 학술대회 알림

회원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곧 거행될 한철연 2022년 봄 제62회 정기 정기 학술대회에 대해 알립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에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라는 주제와 더불어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를 같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온라인(Zoom)으로도 동시진행할 예정하오니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 학술대회

주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장소: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 (온라인 동시진행)

시간: 2022년 6월 11일 (토) 오후 1시

Zoom  ID: 812 1485 2828 / 암호: 1234

 


 

[회원동정] 제30회 열암철학상에 (고)이규성 선생님의 저서 선정, 수상(2022년 3월 26일)

조금 늦게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2022년 3월 26일(토) 18시에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22 한국철학회 정기학술대회(온오프라인 병행) 자리에서 한철연 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셨던 (고)이규성 선생님(이화여대 철학과)의 저서 두 권이 제30회 열암철학상에 선정되어 수상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수상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ㅇ 제30회 열암철학상 수상작

  • 『중국현대철학사론: 획득과 상실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6.30.)
  •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11.5.)
  • 저자: 이규성(전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작고하신지 1주기가 되어가는 시기에 열암학술상 수상이 한 시대를 관통한 동양철학자로서 고인의 학술을 평가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한철연 회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와 평가가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한국철학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http://hanchul.org/34/11013507

 

보보스(보헤미안 부르주아) 문화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보보족[BoBos]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헤미안 부르주아를 줄여 복수 어미를 붙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작가 대비드 브룩스[D. Brooks]의 저서 ‘보보스[Bobos in pradise]’라는 책 때문에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실상 유럽에서 일찍부터 널리 쓰인 말이라 한다.

브룩스의 저서는 2000년에 발표된 것이다. 이 시기는 1980년대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성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전성기는 곧 몰락을 예고한다. 결국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는 몰락의 조짐을 드러냈다.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를 흔히 포스트모던 문화라 한다. 브룩스가 보보스라고 일컬은 문화적 현상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다룬 것과 동일한 현상을 다룬다고 보겠다.

90년대 말부터인가 우리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어 필자도 이 문화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스트모더니즘론이 이 시대 문화의 일반적 특징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혼종[混種] 현상 또는 혼성 모방 현상이다. 여러 가지 문화적 현상 가운데 일부를 빌어와 뒤섞은 문화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라 한다면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추상적인 모더니즘적인 구조에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구상적 형태를 덧붙인 건축을 들 수 있다.

저자 브룩스는 이런 다양한 혼종 문화 가운데 특히 부르주아적이면서 동시에 보헤미안적인 혼종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적 현상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 혼종 문화 현상에 보보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2)

부르주아 문화의 특징이란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것을 기본으로 한다. 초기 부르주아는 개신교적 억압 아래 욕망을 통제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이후 부르주아 전성기에 이르면 점차 부르주아의 욕망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치와 방탕이 확산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문화는 이성적 합리성 자체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1950년대 전후 복지국가 시절 전문기술 노동자층이 등장하면서 부르주아 문화는 마침내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부르주아 문화에 대립하는 보헤미안 문화란 거슬러 올라가면 1830년대 등장한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낭만주의 문화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화로 그리고 1960년대 들어와서 아방가르드 문화로 발전하면서 보헤미안적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이라면 현실 초월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은 낭만주의나 모더니즘에서는 소수의 지적이거나 예술적인 엘리트의 문화로 남았으나, 60년대 히피 세대에서는 대중적으로 확산했다. 이 시기 만연한 섹스, 대마초, 명상, 록 음악 등은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 욕망을 초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모습은 무정부적이고 자기 파괴적이었다.

이런 두 가지 문화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까지 서로 대립적이었다. 보헤미안적인 지식인, 예술가는 부르주아 삶을 경멸했으며 부르주아는 이런 보헤미안을 자기들의 안정된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질병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브룩스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 문화가 마침내 융합하면서 보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브룩스는 두 문화가 융합된 모습을 지식인과 부르주아 양편에서 추적한다. 한편에서 부르주아는 이제 보헤미안적 문화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기업가는 청바지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하며, 휴일이면 할리 오토바이를 몰고 질주한다. 이런 기업가는 몇 주간 오지나 농촌을 찾아 고통을 감내하며, 아무도 오지 않을 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원시적 삶을 체험한다.

기업은 이제 단순히 유용한 상품,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지 않는다. 기업은 자신이 인류의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다. 기업은 온난화 등 환경 위기를 극복하며 세계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며, 자신의 상품은 이제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며 심지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실된 자연과 사랑, 그리고 영혼까지 찾아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들 보헤미안적 사업가는 기업의 경직된 조직 체계를 허물며, 조직 인간 대신에 자유로운 개인, 상호 소통하는 열린 공간을 기업 내 창출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문명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보면서 이 시대가 새로운 문명의 시대임을 예를 들어 4차 기술 혁명의 시대라든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시대임을 선지자적으로 고지한다.

브룩스는 이런 보헤미안적 사업가의 특징을 실천적 지혜, 육감적 능력을 의미하는 ‘메티스’라든가, 자기의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과 사명을 강조하는 ‘고상한 자기 중심주의’라는 말을 통해 규정한다.

4)

거꾸로 지식인(동시에 예술가)은 이제 사회를 초월해 시대의 양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분노의 심판을 내리던 선지자적 자세를 버린다. 과거 지식인은 자신의 언어나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사회적 혁명을 만들 거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지식인은 자신을 세속적 성직자로 간주했으며, 동시에 그는 사회로부터 추방되거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확신했다.

브룩스는 이제 그런 지식인 즉 인텔리겐차는 사라졌다고 본다. 터무니없이 암울한 예감에 사로잡혔던 지식인들은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공룡처럼 소멸했다.

지식인은 이제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부딪힌 문제를 풀어가는 지적인 기술자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하나의 유용한 상품이며, 대중의 갈채가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간주한다. 지식인의 가치는 이런 사회적 교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제 성공한 지식인이 지식인 스타가 등장했다. 대중적으로 판매되는 그의 상품을 바탕으로 그는 언론과 방송으로 진출하며, 심지어는 TV 연예 코너에 등장하기도 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전략 전술적으로 판단하며, 학계와 학술회의, 인적 맥락을 조직한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의 상업적 가치를 증대하기 위해 상업적 대중문화 속에 뛰어들어 그것으로 자신의 상품을 포장하며 아예 이런 상업적 대중문화를 자신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5)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의 혼종 현상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과거 보헤미안은 욕망을 극단화했다. 그들은 욕망을 억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의 만족, 쾌락을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억압의 파괴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의 억압이 부르주아적 질서 자체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욕망의 해방 가운데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보헤미안의 욕망은 곧 죽음에의 충동이었다.

부르주아에게서도 1870년대 이후 사지와 방탕이 확산했기에 마치 보헤미안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보헤미안이 죽음의 충동이었다면 부르주아는 만족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부르주아는 일시적으로 방탕에 빠졌으며 결국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배운다.

보보족의 경우는 마치 보헤미안처럼 욕망을 극단화한다. 그는 과거 부르주아가 꿈꾸지 못한 다양한 욕망에 탐닉한다. 그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욕망의 전문가이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는 전문가 수준에 걸맞은 값비싼 오디오가 있으며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자신을 커피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욕망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는 그의 건강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지만, 그의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은 과감하게 단절한다. 그는 보헤미안처럼 록 음악과 명상을 즐기지만, 보헤미안과 달리 술과 대마초에 빠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문화화하듯이 그는 자신의 욕망을 문화화한다. 그는 여느 사도 마조히스트처럼 자신의 욕망을 규칙화하며, 자신의 욕망에 진보적 이상의 색깔을 입힌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자연과 공동체, 생태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섹스는 영혼에 도달하는 수단이라 확신한다.

6)

브룩스는 서술에서는 풍자적 요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보보스 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는 이런 보보스 문화가 정보화 시대의 산물로 본다. 이 시대 지식이 대중화하면서 또한 지식이 자본화하면서 지식인 전통과 부르주아 전통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두 문화가 함께 융합하면서 보보스 문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새로운 보보스 문화는 부르주아의 야만도 보헤미안의 고고함도 버리고 지식인은 상업화하며 반면 부르주아는 욕망에 탐닉한다.

그러나 브룩스는 보보스 문화를 너무 과도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던 문화의 혼종적 특징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부르주아의 보헤미안적 문화는 일종의 기호,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그런 기호나 상징에 진지하지 않기에 그런 기호는 부르주아의 물질적 문화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지젝 역시 비판적으로 본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문화는 한편으로는 쾌락 지향적 경향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자기 통제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자기 통제적 경향을 일종의 편집증으로 해석했다. 즉 쾌락지향적 성격이 상징적 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면, 자기 통제적 측면은 아버지의 이름이 환상 속에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부르주아의 보헤미아니즘이 허위라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지젝은 보헤미아니즘이 도달하는 자기모순을 지적한 것이 할 수 있겠다. 이런 비판적 분석과 대조해 보면, 브룩스의 해석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혼종적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도 기울어져 간다. 트럼프와 같은 구시대 야만적 자본가 유형의 인물이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보보스 문화도 퇴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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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멜랑콜리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영화 멜랑콜리아

 

1)

영화 멜랑콜리아는 감독 라스 폰 트리어의 영화이다. 60년대 프랑스에서 누벨 바그가 등장했을 때, 독일에서는 노이에 키노 바람이 불었다. 이들의 주축은 파스빈더, 헤어쪼그, 벤더스 등이다. 네델란드 출신 라스 폰 트리어도 한세대 후이지만 이들을 계승하는 작가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가 68세대와 공통의 정신적 지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아주 독특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서구 문명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그를 알리는 데 공헌한 영화인 ‘백치’는 백치를 내세워 정상인의 세계를 조롱하며, 영화 ‘도그빌’은 마피아의 보스가 자기 딸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강간당하자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징벌하는 법과 불법이 전도된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혜성(그 이름이 ‘멜랑콜리아’다)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종말에 이른다는 종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전개된다. 지구 종말은 다른 한편, 지구 문명에 대한 분노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정된 지구 종말은 실제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지구 종말적 상황은 감독이 서구 문명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심판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장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극 중 두 주인공 쥐스틴과 클레어의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쥐스틴은 지구 종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 할 필요 없어.”

2)

영화는 도입부에 이어서 주인공 자매의 이름을 따서 1부 쥐스틴(동생) 2부 클레어(언니)로 이루어진다. 구성상 두 주인공이 각기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주인공은 항상 함께하며, 오히려 1부와 2부의 구분은 다루어지는 이야기 주제에 따른다고 하겠다.

1부에서 시종일관 쥐스틴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진다. 1부를 시작하면서 거대한 리무진이 시골의 굴곡진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모습을 감독은 상당히 길에 보여주는데, 이는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서구 문명의 한계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쥐스틴은 카피라이터로서 성공적인 경력 여성이다. 이제 막 마이클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행복할 만하다. 하지만 이 결혼식을 계기로 쥐스틴은 정식적 파국에 직면한다. 감독은 쥐스틴을 둘러싼 남자들, 회사 사장,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인 마이클을 스케치하면서 쥐스틴을 파국에 빠뜨린 원인이 무엇인지를 그려낸다.

쥐스틴을 고용한 사장은 쥐스틴이 쏘아붙인 대로 “권력에 눈이 먼 옹졸한 인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혼하고서 새로 사귄 애인인 두 명의 베티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온다.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이제는 세상에 지친 여인이다. 그녀가 막 결혼하려는 마이클은 소시민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는 늙어서 함께 살 과수원 사진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쥐스틴의 갈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서구 문명의 대표적 두 축인 사회와 가족의 표면적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 뒤에는 이처럼 끔찍한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감독의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쥐스틴이 정신적 파국에 처한 것은 이런 사회적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감독은 1부에서 쥐스틴이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아버지를 붙드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은 그녀가 아버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갈망은 2부에서 행성이 지구에 다가오면서 쥐스틴이 밤에 나체로 행성과 교감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문에 행성이 다가오자 쥐스틴은 오히려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3)

2부에서는 행성이 다가와 지구와 충돌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쥐스틴보다는 오히려 클레어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녀의 남편 존은 18홀 골프코스를 지닌 대저택에 살면서 천체 관측을 즐기는 자기 과시적 또는 가부장적 인물이다. 클레어는 그런 남편 아래 살면서 결혼식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서 그려졌듯이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의무에 철저한 주부이다.

표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쥐스틴과 달리 클레어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우리는 클레어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 아래 주부로서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적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그녀의 삶 어딘가 균열, 틈이 생겼으며 그녀는 이를 철저히 막으면서 살아왔다. 조금도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꼿꼿한 태도가 거꾸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균열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행성이 지구와 다가와 충돌한다는 종말적 상황이 펼쳐지자, 클레어는 더는 자신의 내적인 균열을 틀어막을 힘을 상실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 급기야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그녀 역시 강박증에 사로잡히며 정신적 파국에 이른다. 그녀는 자살에 필요한 약을 사 놓는다.

4)

정작 최종 충돌 즉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졌을 때, 클레어나 쥐스틴보다 존이 먼저 무너진다. 존은 클레어가 사 놓은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존의 죽음은 서구 문명이 내적으로 얼마나 허약한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반면 클레어나 쥐스틴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가능성은 클레어의 아들 레오와 쥐스틴의 대화를 통해 미리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바로 마법의 동굴을 짓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인디언의 텐트 같기도 하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법의 동굴에서 레오와 쥐스틴, 클레어는 손을 서로 잡고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행성 충돌과 대폭발이지만 그 환한 빛은 어쩌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마법의 동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서구 문명에 대한 감독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마법의 동굴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비합리적이지만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⑤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행길이(한철연 회원)

 

우정, 최고의 기쁨

 

“전 생애에 걸친 축복을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을 갖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혹은 공적 삶을 살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폴리스적 삶의 양식이 무너진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중시킨다. 정치 영역은 이미 권력을 독점한 군주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군주는 권력을 분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군주의 지배권을 분할받으려는 시도로 인지되어 파멸의 고통을 면치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군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줄타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에피쿠로스는 공적 행위인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쾌락의 지속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되니 적이 생기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가 사회생활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활동 이외의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우정이 주는 쾌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키케로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고, 우정이 없이는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 없이 살지도 못하며 심지어 유쾌하게 살 수도 없기에 우정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 철학의 기본 입장에서 벗어나는 말을 할 정도로-“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의 커다란 원천이었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가 근근이 마련한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볼 수 없었던 풍경이 그의 정원에서는 자연스럽게 벌어지기도 했다. 즉 고대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인 헤타이라들이 드나들며 남성 구성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담론을 나누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은 에피쿠로스를 창녀와 수작이나 부리는 자로 비방하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노예와 어린이들(학단 구성원들의 자녀들)도 친구로 대우하면서 상냥한 편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정은 홀로 맞는 죽음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원천이다. 죽음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고적함의 고통은 누구에게든 보편적이다. 홀로 죽음의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각성은 모든 인간을 외로운 존재로 남겨두지 않고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된다.

자유시민들의 우정 어린 공동체라 할 수 있는 폴리스가 소멸한 이후에 우정의 기쁨을 전파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사적으로 선사하였다.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실제로 도와주기 때문에 우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정이 지속되는 이유는 실제의 도움보다는 “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에 있다. 이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분열과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며 늘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불안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우정의 삶은 이러한 고립의 환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폴리스의 연대적 삶이 소멸된 불안한 상황에서 안전과 평화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공간은 에피쿠로스가 제안한 우정의 정원이었다. 비록 이 공간은 사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비정함이 초래하는 삶의 고통에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정원 속에 모인 이들은 우정의 기쁨을 아래와 같이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 그리고 소리친다. 모두 일어나라! 그리고 노래하자!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 시대와 에피쿠로스

 

러셀에 의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험 가득한 행복을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병약자의 철학이었다. 소화불량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적게 먹어라. 다음 날 아침이 걱정된다면 과음하지 말라, 정치와 사랑과 격렬한 열정을 동반하는 모든 활동을 삼가라.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운명의 인질이 되지 말라.” 고통에 침잠하지 말고 그 속에 잠재된 쾌락을 능동적으로 관조하는 법을 배우라. “육체의 고통은 분명히 커다란 악이지만, 격심한 고통이라는 것은 짧은 법이고, 길고 긴 고통이라는 것은 정신훈련을 하거나 고통 속에서도 행복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참아낼 수 있다.”

어찌보면 소심하기 그지없는 철학이다. 그런 까닭에 얄팍한 위로와 단발적 힐링에 열광하는 부박한 시대에 에피쿠로스는 자칫 힐링의 멘토로 부각될 수 있다. 더구나 시민적 연대의 전통과 사회적 보호의 수단이 점차 훼손되고 있는 와중에 현대인의 고통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대도 극심한 고통으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고난의 시대였다. 지금과 유사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의 미망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는 없었다. 사회적 고통을 해결해줄 구조적 대응은 요원한 형국이다. ‘위로의 구루’가 재림하여 힐링의 향유를 피워대면 사람들은 언제든 ‘좋아요’를 누르며 힐링을 소비할 태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제안하는 위로의 즐거움은 ‘좋아요’와 같은 손쉬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은 정신의 자기성숙을 통한 고통의 극복이다. 정신훈련을 통해 굳건한 정신을 가진 주체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고통도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시대적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은 오늘날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향은 다르다. 더구나 사람들은 욕망의 무제한적 표출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체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로부터 초연해지는 평정한 영혼의 상태(ataraxia)를 권고하는 에피쿠로스가 과연 현대인의 삶을 인도하여 즐거움의 항구에 안착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에세이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철학을 하는 데 있어 굳이 다른 사상가의 철학을 빌려올 필요가 없다. 내가 네이버 <지식 저술가> 프로젝트에 제출한 ‘에세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한다면 ‘에세이 철학’은 불교의 선(禪)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선불교는 잘 알다시피 스님들이 염불하는 법당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에서 불법을 찾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정신이다. 일자무식인 6조 혜능은 홍인 선사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낸다)’란 금강경 강론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번거로운 절차도 없고, 온갖 언어 수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행주좌와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홀연히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만이 중요하다. 임제 선사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의 정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칼을 든 사무라이와 그 정신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때 그 어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들, 동과 서, 옛날과 지금의 수많은 철학자에 올라타거나 그들의 사상을 빌려오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지금 이 순간'(hic et nunc)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모든 대상과 경험들을 철학적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철학적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어 준다. 그러므로 ‘에세이 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선의 정신처럼 모든 권위와 우상의 파괴를 시도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언어의 우상’ 외에도 ‘권력과 국가의 우상’ 등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니체의 ‘망치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할 뿐 실체화되고 화석화된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추상개념들의 몰 주체성도 비판한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과 ‘선불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은 언어의 끝, 문자의 종언을 주장하는 데 반해, ‘에세이 철학’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을 굳이 선으로 표현한다면 ‘문자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21세기에 부활한 선불교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자는 어떤 경우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자를 버린다면 문자가 부재하는 그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이 소수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의 궁극 목적[상구보리(上求菩提)]은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함이고[하화중생(下化衆生)],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깨달은 이, 모든 인텔리겐차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본 계몽된 인텔리겐차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동굴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선의 문자화, 선의 일상화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은 그동안 이 땅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추구해 마지아니했으나 누구도 시도치 못한 ‘우리 철학’의 방법론이자 그 철학 자체이다. 지금까지 ‘우리 철학’을 모색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내 걸었으나 문전에서 머뭇거렸을 뿐 누구도 그것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칸트식의 물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내가 수영을 할 수 있는가나 내가 말을 탈 수 있는가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백날 던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면서 배우는 것이고, 말 등에 올라탔을 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다 보니 그간 ‘우리 철학’을 그렇게 탐구했으면서도 누구도 그런 작업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사유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한 우리의 철학이다. 더 이상 그것 바깥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사유하고 통찰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타자의 철학’이 아니라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