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필요한 스물다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1) – ‘채움’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다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1) – ‘채움’

 

마리횬

 

무언가를 비워내는 행위와 채우는 행위는 정 반대의 것처럼 보입니다. 보통 무언가가 비어 있다는 것은 채워진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고, 반대로 뭔가를 채우려면 그 채울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가득 차 있는 것을 비워 내야만 하니 의미적으로만 보면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소개해드릴 두 편의 시를 읽어 보면서 전혀 달라 보였던 두 가지 행위가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채움’에 대한 시를 읽어보겠는데요, 도종환 시인의 <깊은 물>입니다.

 

 

  깊은 물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우리 가슴 속에는 저마다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요, 도종환 시인은 이 시에서 우리 모두에게 마음 속 강물에 물을 깊이 채우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큰 배가 뜨려면 바다나 강물이 충분히 깊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인데, 시인은 그 사실에 덧붙여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엔, 그대의 가슴에는 큰 배커녕 종이배 하나라도 뜰 만큼의 깊은 물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시간의 물살의 쫓기는 그대’라는 대목은 바쁘게 살아가는 분주한 우리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죠. 이 시가 발표된 1994년에도 사람들은 바쁘게 살았겠지만, 그때보다 과학이 더 발전하고 편리한 기술들이 개발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아요. 마음의 강물이 잔잔할 틈이 없죠.

특별히 시인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에는 모두가 바쁠 수밖에 없어요. 출근을 하고 학교 수업을 준비해야 하죠. 모두가 시간의 물결에 쫓기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는 저녁에는 어떤 가요? 잔잔하게 머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 자신을 비춰보고 되돌아 볼 시간조차 없이 여전히 분주하고 시간의 물살에 쫓기고 있지는 않은 가요? 시인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 강물은 충분히 깊은지, 그 물살은 잔잔한지 말입니다.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잔돌’들이 참 많습니다. 작아서 위험하지는 않지만 유독 거슬리고 나를 건드리는 사소한 문제들이 있죠. 잔소리 많은 직장 상사, 항상 말에 뼈를 넣어서 말하는 후배, 하기 싫은 잡다한 업무,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 등.. 인생에서 정말 자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잔돌’과 같은 문제와 상황을 만났을 때 내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본다면, 내 마음 속의 강물이 얕은 물인지 깊은 물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하나 다 스치고 건드리며 소란스럽게 지나가는 얕은 물인지, 아니면 묵직하게 그 돌들을 품어 내며 묵묵히 소리 없이 지나가는 깊은 물인지 말입니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굽이 많은 시냇가 여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죠? 내가 있고 싶은 곳에만 있을 수 없고, 늘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과 생활할 수도 없고, 언제나 나에게 편안한 상황들만 생기지는 않아요. 굽이굽이 굴곡이 있고 잔돌들이 놓여 있죠. 그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며 사사건건 내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소리치며 흐르는’ 모습이 나에게도 있지는 않은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하게 됩니다.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 하는 가벼운 삶이 아니라, 때로는 깊이 품어낼 줄도 아는 무게감을 가지기를, ‘채움’으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기를 충고하는 시인의 메시지를 <깊은 물>에서 읽어냅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짧은 가곡을 한 곡 준비했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나라 가곡에 대한 강연을 보게 되었는데요, 여러 곡들이 소개되는 가운데 2014년 화천비목콩쿨에서 창작가곡 부문 1위를 한 <마중>이라는 곡이 너무 아름답더라구요.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가져왔습니다.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 속에 깊은 물이 채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감동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시간에 ‘비움’에 관한 시 들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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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훈 – 마중 주소: https://youtu.be/yI3G7u7-6S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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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1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철학은 비판과 반성을 겪어가는 삶이다. 정치는 그런 삶의 조건이면서 삶의 현장이다. 철학은 정치에 제약을 받지만 정치를 반성하고 느리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 나로부터 멀어진 정치를 나에게 되찾아오고, 나와 우리 사이의 조작된 경계를 알려주는 철학적 사유의 지도가 정치철학이다. 그런 정치철학의 지도가 탄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쓴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전체주의와 독재 문제를 다룬 영역’과 ‘해체주의와 구조주의 프랑스 정치철학의 영역’, ‘차이의 정치 혹은 페미니즘 정치철학의 영역’,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의 세속화와 혁명정치를 다룬 영역’의 4가지 정치철학 영역을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논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정치철학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내부의 독재를 다룬 영역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②해체와 구조의 주제를 다룬 영역에서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③기존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차이의 정치를 다룬 영역에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마지막으로 ④근대성을 해부하여 민주주의의 속살을 벗겨내는 영역으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까지, 이렇게 모두 정치철학의 16가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담론은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매체학, 미학과 문학 및 예술분야를 포함한 한국 지식사회 전체에서 격렬히 논쟁되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16명의 국내 번역서가 무려 300종이 넘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논의가 한국 지성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평자도 현대 정치철학의 담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너무 전문적이고 방대해서 그동안 전체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2019년에 출간된 책,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을 읽으면서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현대 정치철학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6명 정치철학자들의 논점을 이 책의 순서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리뷰를 시도했다.

첫 번째 흐름 :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반성

 

<칼 슈미트>첫 번째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1부의 시작은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나치를 정당화했던 칼 슈미트(1888~1985)의 정치철학이다. 슈미트 이론 안에는 민주주의의 붕괴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거꾸로 말해서 슈미트의 위험한 정치철학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약점과 함정을 피하고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분석에 의미를 두었다고 필자 남기호는 말한다.

칼 슈미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쉽게 말해서 말 많고 겁 많은 의회제도 대신에 일인 통치자 중심으로 강력하게 국가를 끌고 가는 총통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데 있다. 한국 정치에서는 이미 박정희 미신 덕에 익숙해진 내용인데, 이 글을 읽으니 왜 전체주의가 되살아나는지 명쾌하게 이해되었다. 군주제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는 민족, 인민 등 이종적 대중들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각축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회의 당파성으로 인해 협동적인 정치화합은 불가능하다고 슈미트는 단언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로 동일시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를 이합집산의 자유주의 소산물로 보는 것이 슈미트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합집산의 의회주의 대신에 사회의 자기 조직화로서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슈미트가 설계하던 잠재적 전체주의 국가 모습이다.(27~28쪽) 나아가 민주주의에서 선거에 패배한 쪽은 배제되는데, 불평등으로 보이는 이런 현상의 실제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슈미트는 말한다. 이제 이러한 자유주의 이합집산을 막는 유일한 길이 파시즘이며 파시즘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칼 슈미트의 궤변이 시작된다. 20세기형 전체국가를 꿈꾸던 슈미트는 나치를 정당화하고 환호와 갈채를 독재자를 찬양한다. 슈미트의 오도된 민주정치 의식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전체주의 괴물을 경계하고 붕괴시켜야 한다고 필자 남기호는 강하게 말한다.

<벤야민> 문화학자이면서 정치철학자인 벤야민(1892~1940)은 그의 유명한 저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세계변혁의 도구로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매체와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혜안은 철학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예술 부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40쪽) 소비에트 스탈린과 독일 파시즘의 결탁으로 위기에 맞은 벤야민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장르에 급진적 해방의 밑그림을 입혔다. 벤야민의 박사학위 주제였던 낭만주의 예술과 그 비평은 시와 사유의 결합이며 시인과 철학자의 결합이었다. 시가 미의 이념을 구현한 것이라면 철학은 구현된 미의 이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술이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52쪽)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연극은 관객이 배우 안으로 빠져들지만, 영화는 상대적으로 배우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남으로써 관객이 비평할 수 있는 태도가 넓어졌다. 영화의 영상은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의 언어라는 벤야민의 어구는 아주 유명하다.(55쪽)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파시즘은 예술적인 자기만족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을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경고했다. 예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나치 권력의 홍보용이었다는 점을 필자 박지용은 지적하고 있다.(57쪽)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보편사 이념에 기초한 진보 개념을 비판하고 혁명적 실천의 동력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서평자가 알기에 벤야민은 기독교적 구원론이 국가권력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신학 이론을 부정했는데,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진보 개념은 역사적인 연속성의 노정에서 스스로 벗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당시 사민주의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면서도 소비에트 유물론을 거부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지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렇듯이, “벤야민의 기여는 지금까지 좌절된 혁명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데 있다”고 필자 박지용은 강조한다.(64쪽) 당대 아도르노와 브레히트 그리고 아렌트와 벤야민은 나치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브레히트는 결국 당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에 눌려 동독에 정착했고, 벤야민은 미국행 직전에 이주가 좌절되어 약물 자살로 삶을 마쳤다. 죽음 직전의 원고에서 그가 한 말이다. “역사 유물론은 언제든지 승리한다.”

<아도르노> 철학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미학 그리고 음악에까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아도르노(1903~1969)는 히틀러 정권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1953년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교수로 귀환했다. 미국 시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은 미국 거주 시기에 받은 음악에 대한 문화적 충격과 미국 실증주의의 양면성들, 그리고 미국 시기 이전 루카치와 벤야민 등과 교류한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활동은 68혁명의 이론적 배경에 영향을 끼쳤다.(68~69쪽) 20세기 두 차례의 전쟁, 파시즘의 등장, 폭력적 독재 만연 등의 이유를 “계몽의 자기파괴” 혹은 “신화로 퇴보하는 계몽”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의 요체이다.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신화이지만 그 계몽 자체가 신화로 빠지는 역설, 변증법적 역설을 다룬다. 계몽이 추구하는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수단으로 되는 역설을 말한다. 계몽은 주체를 필요로 하는데 그 주체가 소멸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보여준 야만성이란 합리적 주체라고 하는 계몽의 주체가 오히려 신화의 주인공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해명한다.(68~71쪽)

전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시스템이다. 동일성을 지키는 주체는 편집증 환자가 된다는데, 즉 자신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광기와 공포를 표출한다는 것을 필자 한상원은 편집증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다.(79쪽) 독재 권력의 전체주의로 인해 주체가 퇴보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고가치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은 동일하고 규격화된 삶의 형식으로 빠지게 된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했다.(80쪽) ‘가상에 빠진 자유’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했다. 당과 계급이라는 교조화된 맑스주의 대신에 개인의 고유한 사람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적 해방이 아도르노가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를 한상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해제 시킨 자리에는 곧바로 순응하는 군중이 출현하며, 이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으로 이어졌다.”(83쪽)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듯하다.

<아렌트> 1941년 미국으로 옮긴 후, 1959년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된 아렌트(1906~1975)는 저서 『인간의 조건』(1959)에서 인간 활동의 세 가지 기반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라고 했다. 여기서 노동은 생물학적 충족을 위한 생산이며, 작업은 세속화된 물질세계를 만들면서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행위는 말을 통해서 정치적 관계를 풀어가려는 공공적 교환이다. 노동과 작업의 생산 관계가 행위의 정치 행위를 지배하는 틀에서 탈출하는 일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표현했다. 정치 행위가 배제되고 소통을 위한 아고라의 공적 영역이 무시되는 욕망 지배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복층의 소통문화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아렌트의 “차이의 정치”이다.(101쪽) 차이의 정치를 보장하는 정치적 삶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비오스(bios)의 삶이다. 비오스와 대비된 조에의 삶이란 획일적이고 단수적이며 개체화된 삶이며, 기계적이고 운명의 굴레에 빠져 정치적인 삶의 황폐화에 이르는 길이다. 아렌트가 추구하는 차이의 정치는 비오스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102쪽)

과거 독재정치나 전제정치는 아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합의가 파괴되고 그들만의 정당성을 합의 없이 축조하면서 그들 스스로 적법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정치를 아렌트는 “총체적 테러”라고 표현했다.(105쪽) 개인이 느끼지 못하고 저항할 수 없지만, 개인의 다양성이 말살된 상태이며, 이런 전체주의는 나치 이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106) 총체적 테러를 극복하고 무작위적인 균등과 다른 진짜 평등성의 권리를 찾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며, 차이의 정치는 정치적 삶과 저마다의 인권을 연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이다.(109쪽) 정치와 인권이 연결되어야만 구성원 사이의 다양성이 보장된 공동체에서 나의 인권이 성취될 수 있다. 필자 조배준에 의하면 개인의 권리를 빼앗기고 소통이 차단되어 사회적 합의가 강압적인 그런 정치 권력은 정치 행위의 종말이며 정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평등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 가능함을 아렌트는 강조한다. 평등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평등은 정치 활동을 통해 정의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평등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의 균등성은 전체주의에 예속화된 삶의 결과일 수 있다.(110쪽) 2010년 이후 극심해진 양극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 만연된 혐오 문화 등의 사회적 병리는 제도권 정치 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아렌트의 공동체 평등주의, 총체적 테러에 대한 붕괴와 방어의 노력,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합의 공간을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그런 한국의 사회적 문제를 푸는 열쇠일 것이라고 필자 조배준은 말한다.(113쪽)

 

두 번째 흐름: 1968 전후의 프랑스 정치철학

 

<알튀세르> 알튀세르(1918~1990)의 두 작품, 『맑스를 위하여』(1965)와 『자본을 읽자』(1965)는 최고의 맑스 해석서이면서 동시에 맑스를 철저히 해부하여 혁신시킨 정치철학의 깃발이다. 알튀세르를 맑스주의자이면서 맑스주의 비판자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가 지닌 경제결정론과 역사목적론을 알튀세르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이미 역사적인 형식들, 즉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적 필연성 말고 그 어떤 것도 아닌 형식들 속에 삽입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138쪽)

알튀세르는 군대, 경찰이나 법원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가 아닌 또 다른 억압으로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를 묘사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종교, 교육, 정치, 노동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도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위한 투쟁은 완성될 수 없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연이은 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52쪽) 여기서 ‘투쟁이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은 투쟁의 강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투쟁의 목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목적론과 결정론을 거부하나 여전히 최종심급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결정적인 기본 토대를 지향하는 알튀세르의 반(反)목적론 맑스주의를 표현하는 듯하다. 필자 최원은 최종심급의 끝에 미래만이 남는다고 표현했다.(154쪽)

<푸코> 푸코(1926~1984)의 권력 개념은 푸코 정치철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이다. 권력은 타자를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종시키는 힘이다. 권력은 인격적이거나 거시적이거나 억압력으로 설명되지만은 않는다. 권력은 모세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망을 이루며 우리 주변의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이를 보여주는 푸코의 지도가 ‘계보학’이다. 푸코가 나누고자 했던 지식은 광기, 병원, 감옥, 성이었으며, 그런 개념 위에서 그의 정치철학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필자 박민미는 푸코 철학 사유의 뼈대를 아주 쉽고 눈에 확 들어오도록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고고학과 계보학이 푸코의 핵심어이며, 사상의 핵심어는 권력/지식, 미시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이다. 최근 주목받는 그의 핵심어는 통치성이다.”(162쪽) 주체의 형성사를 발굴하고 문제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역사적 재구성”이라고 했다. 역사적 재구성은 개인이 삶의 주체로 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고고학, 권력에 종속되어가는 흐름을 다루는 계보학, 도덕 주체로 되어가는 개인을 다루는 윤리학이다.(162쪽)

세상의 사물과 관계를 경계 지우는 경계선이 권력인데, 사회가 그어놓은 금기의 경계선에 도전하는 것이 푸코 정치철학의 기초이다. 푸코는 스스로 지식의 권력부터 거부한다. 지식은 권력을 떠날 수 없으며,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 지식은 권력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특정 권력이 아니라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관계 전체를 말한다. 권력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집단을 권력 안에 머물도록 강제화하는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가진다. 권력은 대상화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효과이다. 이를 권력효과라고 한다. 한편 권력은 저항을 산출한다. 이 점에서 권력과 저항은 역설적인 상호관계론으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효과의 위험성을 투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한다.(164쪽) 권력망을 투시하고 자신의 삶을 부단히 창안하는 자유를 동력으로 삼아 사회가 보이지 않게 쳐놓은 금기의 선을 ‘감히 넘어서 보라’(173쪽)는 필자 박민미의 말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들뢰즈> 들뢰즈(1925~1995)의 철학에서 좌파는 소수자이다. 백인, 기독교인, 남성은 다수이며 인간을 정의하는 표준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표준에 들지 못하는 주변인의 소외가 늘어난다. 들뢰즈는 표준을 거부하고 소수자에게서 새로운 생성의 힘을 발견한다. 표준에 속하는 집단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표준성에 안착하여 변화에 대한 의지나 욕구가 사라진다. 반면 소수자는 생성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발휘한다. 들뢰즈는 유명한 카프카의 사례를 든다. 땅속줄기(뿌리)는 리좀이며, 자신은 땅속에 있지만 다른 것에 연결되어 그 다른 것을 활용하여 에너지와 힘을 생산하고 제공한다. 다양체로 번역되는 리좀은 더 위를 향해 생성의 지도를 그린다.(180쪽)

개인의 주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세상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정체된 실체가 아니다.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뢰즈는 주름에 비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가 서로 주름을 안으로 접으면서 내부성을 만들면서 ‘되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주체화다. 이차원의 평평한 밀가루 반죽을 접으면 그때 비로소 안으로 접힌 면을 우리는 내부라고 부르고, 밖으로 젖혀진 면을 외부 표면이라고 부를 뿐이지, 원래는 다 같은 평평한 하나의 동일면이었다. 내부는 안으로 접혀 들어온 외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름이 안으로 접힌 밖인 것처럼 말이다. 밖을 경험하면서 밖의 경험들이 안으로 차곡차곡 혹은 어지럽게 접혀 여전히 밖의 표면이지만 마치 안처럼 내부화된 것이 바로 인간의 주체화라고 들뢰즈는 설명한다.(182쪽) 주체는 동일성에 의해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철학을 넘어서 있는 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내재화된 주체에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주체의 동일성에서 탈출하는 길은 같지 않다고 한다.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서 주체 안에 차이가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는 다른 것과 비교해서 만든 차이가 아니라 주름의 뒤집힌 껍질이며, 밖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의 주체이다. 변화의 주체란 주체가 변한다는 뜻이기보다는 변화 자체를 품고 있는 주체이다. 그래서 기존 관념으로 본 주체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차이가 행위의 조건이며 내적인 힘으로 형성되는 사건의 도래라고 필자 김범수는 설명한다.(188~190쪽)

차이의 내재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들뢰즈의 욕망이론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혹은 내 국가에 결핍된 무엇을 채우려는 목적의지와 다르다. 목적 없이 욕망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욕망인데, 들뢰즈는 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개인에 얽매이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며 생산적이라고 필자 김범수는 말한다. 이렇게 욕망은 내재 된 차이의 변화하는 힘과 소수자만이 누리는 생성의 힘을 결합한다. 표준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효과에서 탈출하기 위해 욕망을 동일성의 주체로부터 걷어내도록 하는 일이 들뢰즈 정치철학의 과제이다.

<랑시에르> 경직화된 이데올로기로 변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인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의미를 이미 상실했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평등의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치안’으로 전락한 현 제도의 정치체계, 즉 “감각적인 것을 분할 하는 체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정치 개념과 치안 개념을 구분하면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전개된다.(198~199쪽)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제안한 ‘감각적인 것의 부활’ 개념을 미학에 적용하여 미학의 정치성을 부각했다. 이 시기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와 결별했다. 계몽과 지도의 노력 없이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고 필자 조은평은 랑시에르의 철학적 방법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206쪽) 이 점에서 랑시에르와 양명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개인의 성향과 소질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지 결코 지적 능력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207쪽) 그러나 세상은 무지한 자와 유식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자기 무시의 늪”은 지식인에게도 두 가지 경고를 던진다. 그 하나는 지식인끼리 서로 지식의 우위를 따지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인이라는 자기 오만에 빠져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는 경우이다.(208쪽) 랑시에르의 표현대로 “무지한 스승”에서 탈출하여 계몽과 지도 대신에 무지한 삶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해방의 의미이며,(208쪽) 이런 해방의 평등정치가 랑시에르 정치철학의 기초라고 필자 조은평은 설명한다.(201쪽)

정치공동체란 각 계급이 기여한 합리적 몫에 따라 권력을 분배하도록 합의하는 공동체라고 알고 있다. 이런 정치공동체에는 불화가 없을 듯 보이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몫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자신의 몫을 찾지 못하는 불평등이 생긴다. 여기서 계급투쟁이 생기고 공동체 질서도 깨진다. 권력자는 이런 사람들을 공동체를 방해하는 자들로 여긴다. 여기서 유한계급층은 그런 방해자를 제어하는 치안(police)의 정치만을 필요로 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했다. 랑시에르는 이런 불평등을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체제”라고 표현했다.(215쪽) 평등을 되찾는 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217쪽)


(2부)에서 이어집니다~

어른들은 몰라요~ [내가 읽는 『자본론』]

2021년 ‘내가 읽는 『자본론』’ 스무 번째 글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어른들은 몰라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지난 2019년, 대한민국의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이 만19세에서 만18세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것은 광복 이후 세 번째 선거권 제한 연령 조정이자, 청소년의 참정권 쟁취를 위한 무수한 투쟁들이 단면적으로 가시화된 일이었다. 필자는 2019년 3월을 지나며 만19세가 되었기에 실제적 변화를 체감할 순 없었지만, 이 연령 기준 조정을 두고 여러 현장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던 나의 스물 살 시기는 아직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내 주위에서도 연령 조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미성숙한 청소년이 벌써 정치에 참여해서 좋을 것이 없다.”라고 얘기하거나 또 다른 이들은 “참정권은 국민의 기본적, 보편적 권리이므로 청소년을 이 기본적 권리에서 배제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령 하향 조정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는 전자의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만한 지점을 시사한다.

우선 전자의 주장은 ‘장유유서’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동북아 문화권 특유의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 나이주의) 문화와 맞닿은 견해라 판단된다. 연령에 따라 정해지는 위계질서와 그 규범에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복종해왔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을 불완전한, 혹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또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종종 발견한다. 에이지즘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연령-차별적 문화 속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은 자연히 여러 억압에 놓이게 된다. 이 같은 억압의 양태는 개별적 개체로서의 아동과 청소년, 또 우리 사회 분업 체계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도맡는 구성원으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을 동시에 옥죄고 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피억압과 더불어 ‘노동자’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은 성인 노동자의 그것보다 더욱 무겁고 커다란 억압의 사슬을 발목에 차게 되었다.

추상화 된 사변적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을 떠올려보자. 당장 우리가 여러 가지 종류의 판·구매와 소비, 거래, 교환 등을 실현하는 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사회적 분업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청소년과 아동들은 어떠한 상태에서 근로하게 될까? 우선, 대부분의 대한민국적인 문화가 그러하듯, 에이지즘 문화가 그 관념적(관습적) 기반을 이룬 사업장에서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차별과 부당대우에 놓여있다. 이들의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유로 이들을 향한 공격적 발언과 차별적 행위가 큰 거리낌 없이 (연장자들에 의해) 자행될 것임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추론 가능한 종류의 현상이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상품 노동력에 관한 부분에서 포착된다. 에이지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아동·청소년-노동자는 충분히 숙련되지 못한 노동력의 판매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종류의 편견을 지닌 고용주들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성인 노동자가 같은 시간 동안 수행하는 노동보다 질이 낮은 노동만을 수행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이는 사실이다. 특정한 노동의 행위 경험과 이에 대한 능숙도가 비례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의 특수한 형태와 개별적 상황에 따라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성인 노동자들에 비해 더욱 우수한 역량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편견이다. 고용주들은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업무적 미성숙을 빌미로 시간적 크기가 성인 노동자의 그것보다 훨씬 큰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노동력을 성인 노동자의 노동력 가격과 비슷한 가격에 구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같은 값에 아동·청소년 노동자를 성인 노동자보다 오래 고용하고자 하는 셈이다. 언뜻 보면 이는 등가거래로 보일 수도 있다. 아동이나 청소년이 판매하는,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품질의 상품임에 동의하는 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질이 떨어진다는 식의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이유로 어린 ‘노동력’의 가치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고용주들의 음흉한 속셈은 커다란 오류를 낳는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에 적용되는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 상품에 투여(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의 총합으로 책정된다. 즉, (아동·청소년의 노동력의 가치량은 상품 노동력 생산에 투여된 모든 가치량의 합임에도 불구하고) 아동·청소년들이 판매한 노동력이 그 구체적 행위(노동) 과정(구매자/고용자의 상품 사용 과정) 끝에 이끌어내는 물적(양적) 생산성이 (성인노동자의 그것에 비해) 낮다는 이유로, 본래 가치의 양보다 적은 가치를 아동·청소년의 노동력 가격표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력의 질적 문제를 빌미로 자행 되는 (시간적 양이) 과도한 노동이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지속적으로 강제 될 경우, 이는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일상의 재생산’을 방해하며, 나아가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생명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더불어 어린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노동량을 부여하는 것은 고용주가 노동자의 (손에서 창조된) 가치를 앗아가는 착취의 정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력을 판매한 노동자의 삶이 재생산 될 수 있게 하는 생활수단의 양적 크기와 같다. 따라서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지속적으로 과다 노동을 강제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증가하며 이는 이들이 판매하는 상품 노동력의 가치 증대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테면 과도한 노동으로 야기된 질병이나 성장저하와 같은 건강상 문제들이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일상과 그 재생산을 방해하게 될 경우, 고용주가 이들에게 지급해야할 이들 노동력의 값어치는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다음날 출근을 위한 기본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상품으로서 기능 할 수 있는 정상적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양 역시 (건강 문제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어린 노동자들의 개인적 사정 따위엔 관심이 없다. 노동력의 가격표는 그대로일 것이고, 이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치착취의 정도가 더욱 증대됨을 의미한다.

『자본』Ⅰ-상 제3편 제10장의 노동일 부분을 통해 우리는 수백 년 전 지구반대편 영국에서도 나이와 권위를 빌미로 한 아동·노동자에 대한 억압이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1 저자 마르크스는 1860년대 영국의 <아동노동 조사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를 인용하여 당시 영국에서 자행 되고 있었던 아동-노동자에의 착취와 억압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노동량을 9~12세의 소년들이 수행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나 고용주의 이와 같은 권력 남용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

소년들을 주야 교대로 일시키는 방법은 ……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이 노동시간은 많은 경우 소년들에게 잔혹할 뿐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시간이다.

……

정상적 노동일이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 반까지 계속되는 어느 압연공장에서 일하는 한 소년은 일주일에 나흘 밤은 적어도 8시 반까지 일했다… 그리고 이것이 6개월간 계속되었다. 다른 한 소년은 9세 때는 가끔 1교대 12시간 노동을 3회 연속했고, 10세 때는 이틀 낮, 이틀 밤을 계속 일했다.

……

12세의 또 한 소년은 스테이블리에 있는 어느 주물공장에서 2주일 동안 계속 아침 6시부터 밤 12까지 일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2

 

위 내용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당시 영국의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은 너무도 가혹하고 처참했다. 자본과 그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고용주 자본가는 불변자본3 및 생산수단이 빈둥거리며 그 쓸모를 잃게 될까 극도로 염려한다. 자본가가 구매한 생산수단 속의 가치는 생산수단이 사용되지 않는 한 쓸모없이 낭비되며, 이는 자본가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이 때문에 자본은 본능적으로 기계를 비롯한 자신의 여러 생산수단들을 잠시도 가만히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본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근본 속성은, 노동자를 24시간 제한 없이 착취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동일한 노동자의 노동력을 하루 종일 밤낮없이 착취하는 것은 생물의 육체적 차원에서 불가능하다. 여러 노동자들의 고용주인 자본가들은 고민 끝에, 노동자들을 밤과 낮으로 나누어 교대로 착취하고자 했다. 이 발상에서 비롯한 야간 노동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극도의 비인격적 노동 환경으로 내몰았다. 물론 야간노동에 내몰렸던 노동자들이 모두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인에 비해 주체적 결정권이 부족한 아동과 청소년들은, 고용주 혹은 부모나 기타 어른들의 나이에 근거한 차별과 그 강압으로 말미암아 반강제적으로 위와 같은 고용 형태와 노동 환경에 순응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거의 모든 아동과 청소년들은 야간 노동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 의지로 이 같은 작업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위와 같은 비인간적 형태의 참혹한 착취가 성인에 비해 아동에게 더욱 심각한 건강과 병태 생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은 더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 이와 같은 교대제 또는 윤번제는 영국 면공업의 왕성한 성장기에 성행했으며, 현재에도 특히 모스크바의 면방적 공장에서 성행하고 있다. …… 이런 곳에서 노동과정은 6일간의 노동일 동안에는 매일 24시간 계속될 뿐 아니라, 일요일에도 거의 24시간으로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는 남녀의 성인과 아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동과 소년들의 나이는 ‘8세’부터(일부의 경우에는 ‘6세’부터) 18세까지의 모든 나이층에 걸쳐 있다. …… 약간의 부문들에서는 소녀와 부인도 남자 종업원과 함께 야간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

야간노동의 일반적인 나쁜 영향들을 당분간 무시하면, 24시간 중단 없이 계속되는 생산과정은, 예컨대 앞에서 말한 매우 긴장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부문들[각 노동자의 공인된 노동일은 대체로 주야를 불문하고 12시간으로 되어있다]에서는 표준노동일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 그러나 이 한계를 넘는 과도노동은 다수의 경우 영국 공식보고서의 말을 빌린다면, ‘참으로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

[제강공장인 네일러 앤드 빅커즈사의 공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 미만 소년들의 야간노동 없이는 우리 일은 잘 될 수가 없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생산비의 증가다. …… 숙련공과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소년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 미만 소년들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면 막대한 곤란이 생길 것이다. 최대의 곤란은 ……비용 증가다. …… 손실은 공장주의 부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노동자]들은 당연히 그 손실을 부담하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4

 

실상 자본가는 자신의 손실을 극도로 꺼려하여 손실 문제의 책임 소재를 노동자에게 전가 하려고 하는데, 보통의 노동자 역시 손실을 부담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기에, 결국 이를 감당하여 손실을 메꾸는 몫은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실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근본적 계급 관계 때문에 자본에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으로 연령이 낮은 아동·청소년이라는 점 때문에 복합적인 착취의 위험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에이지즘의 문화 구조, 그리고 이념적 권력 관계의 작용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에게 두 가지 교차적 차원에서의 불이익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이지즘을 자본주의적 착취와 버금가는 불의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보다 정합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나이주의 문화와 자본주의 속 에이지즘의 양태에 대해 분석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 오늘 내가 쓰고 있는 글의 목적은 에이지즘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나이에 따른 위계(권력) 형성이 바람직한지 논함에 있지 아니하다. 이를 위해선 너무나도 엄밀하고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증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내 논의의 범위는 실제적 현상에 드러난 에이지즘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영향들을 고민해보는 수준에 국한하기로 했다. 에이지즘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명료화 할 수 없다고 해서 이 글이 무의미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과거(1800년대)의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탐구해온 자본주의적 착취와 에이지즘적 불평등의 결합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1년 지금 세상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대한민국을 휘감았던 ‘열정페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열정페이’란 젊은 구직자들이나 청년들에게 극단적 저임금 혹은 무임금으로 노동을 시키며, 기술력의 교육이나 열정 창출 등을 지급했음을 주장하는 기성세대 고용주들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인터넷 지식백과에선 ‘열정페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무급 또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주 적은 월급을 주면서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태를 비꼬는 신조어다. 즉, 취업을 희망하는 취업준비생을 무급 혹은 저임금 인턴으로 고용하는 관행으로 2014년 유명 의류 업체와 소셜커머스 업체 등 몇몇 기업의 부당한 청년 고용 실태가 보도되면서 이 용어가 부각됐다.”5

“열정페이(熱情Pay)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줬다는 구실로 청년 구직자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적게 줘도 된다는 관념으로 기업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경험이 되니 적은 월급(혹은 무급)을 받아도 불만 가지지 마라,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라는 태도를 보일 때 이를 비꼬는 말이다. 이 말에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로 치달은 사회 분위기에 대한 냉소가 담겼다.”6

 

‘열정페이’란 현대의 청년-노동착취를 우습고 엉성하며 얼토당토아니한 포장지로 포장하는 셈이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용주가 ‘열정페이’를 지급하고자 억지를 부리는 대부분의 경우는 청소년 및 청년층이 노동력 판매하는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 1800년대 영국 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아동들보다는 조금 더 넓은 스펙트럼의 연령대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면서도 이를 통해 깨닫는 중요한 점은 나이주의 문화에 근거한 권력 구조를 토대로 발생하는 심화된 형태의 노동 착취가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 계속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현대엔 사회가 더욱 첨단화 되어감에 따라 착취를 고도화 하는 에이지즘적 억압이 더욱 교묘하고 세밀한 양상으로 첨예화 된 것으로 보인다. 저출산과 수명의 연장으로 사회 지배층-피지배층 간의 연령적 단절은 더욱 뚜렷해졌고, 이는 나이주의 위계 질서와 권력 구조를 공고화 했다. 또 이 때문에 위와 같은 복합적이고 결합적인 피착취 대상의 연령적 범위는 더욱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용주 계급과 기득권층을 구성하고 있는 연장자들은 사회적 권력과 기득권적 지위를 보다 더 공고히 했으며, 이는 더 많은 아동/청소년/청년을 억압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생애 주기’의 기준으로 과거엔 ‘한창 일할 시기’에 막 진입하곤 했던 젊은이들은 이제 일자리를 쉬이 구하지 못하게 되었고, 사회적 권력에서 더욱 더 소외됨으로써 절박하고 간절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일전엔 정상적 성인 노동자로 취급 받던 젊은 20대 노동자들이 이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이주의적 경향에 의해) 보다 심화된 노동 착취적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열정페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신조어의 등장은 단지 추상적·사변적 유행어나 가벼운 말장난의 등장 정도로 판단할 수 없다. 실제로 내 주위에도 이 같은 ‘열정페이’의 사례들이 너무나 빈번하고 흔하게 존재하고 있다. 먼저, 아동 청소년이나 젊은 청년 계층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하고자 하는 사업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제도로 ‘수습’, ‘실습’, ‘교육’ 등의 방법들이 사용되는데, 이는 ‘열정페이’가 의미하는 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습생’, ‘실습생’, ‘교육생’ 따위의 이름표를 달게 된 어린 노동자는 보통 수습이나 교육, 실습 기간 동안 합의된 급여보다 적은 급여(심각한 경우엔 무급여)에 일하게 된다. 연장자인 고용주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 노동자들에게 기술력 이전 및 각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제시하며 이 노동착취의 관례를 적극 옹호한다. 더불어 고용주들은 ‘실습 제도’에 노동자가 쓸 만한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는 것인지 시험해보는 의의도 있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해당 노동력이 성에 차지 않으면 수습(실습)기간 전후에 고용주 마음대로 얼마든 (일방적으로) 해고해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중고교시절, 청소년의 입장에서 수습기간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했던 아르바이트-계약들을 숱하게 경험 했다. 그때는 생각의 한계로 지금 같은 문제의식은 없었지만, ‘대체 교육과 급여의 지급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의아함은 분명 들었다. 즉 고용주가 미래에 그럴듯한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구입하고 싶어 어린 노동자에게 교육 또는 실습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는 어디 까지나 고용주 자신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당연히 계약된(합의된) 동일한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 맞지 않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좀 더 면밀히 현실을 들여다보면, 알바생 실습, 교육 제도 정도는 양반이다. 그래도 이 경우엔 수습기간이 끝나면 이러한 노동 착취를 어느 정도는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재학 중인 대학 내외에 존재하는 특정 매장(사업장)에서 훨씬 더 충격적인 노동 현장들을 목격해왔다. ‘크루’, ‘지기’ 등의 그럴듯한 이름을 부여 받은 ‘무급’ 대학생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매장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로 내 주위에 즐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알아보니 이들은 수익금을 기부하거나 자신들의 학부를 위해 쓰거나 하는 비영리적 성격임을 밝히고 있었고, 특정한 한 명의 고용주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를 어디론가 통째로 흩날려버리고 있었고, 이는 노동의 의미와 그 중대한 가치에 대한 심각한 훼손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학 시절 해맑게 웃으며 자발적으로 ‘열정페이’를 실현해낸 젊은 구직자들이 머리가 희끗한 대고용주들 눈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겠는가. 이 어린 노동자들의 무급 노동을 일종의 협동 조합식 기업 운영으로 포장하려해도, (노동-생산과정의 통제력은 자신들이 지닐지 몰라도) 결국 노동의 생산물 혹은 노동력이 창조해낸 가치를 이들이 소유하지 못하므로 합리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더불어 노동자의 유(類)적 본질 그 자체도 소외되고 훼손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이 행위자의 의식적, 창의적, 자발적, 인간적 행위일 때에는 그 자체만으로 노동 행위자를 만족시키고, 인간의 능동적 행위임에 해당 노동에 인간의 유(類)적 본질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노동의 대가로서의 가치가 필요 없게 된다. 노동 자체가 이미 인간적 목적이며 대가를 필요로 하는 수단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노동은 생계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그 본질적 의미는 이미 퇴색되었고, 그 과정의 결정권과 통제력마저 이미 노동자의 손을 떠났으며, 노동자로 하여금 그저 대가로서의 가치만을 바라게 한다. 내가 언급한 대학생 무임금 노동의 경우엔, 노동의 과정 자체는 노동자들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는 의식적 창의적 행위로 구성되지만, 노동의 목적 자체가 노동자 스스로의 욕구 충족이나 만족을 위함이 아니고, 노동의 생산물을 노동자가 소유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당 노동이 수단으로 기능하여 노동자가 어떠한 가치를 (노동의) 대가로 지급 받게끔 하는 것(임금 노동) 또한 아니다.]

 

요컨대 2021년 현재에도 어린 노동자들은 노동자-일반이 당하는 착취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부당하게 착취당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착취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가 나열한 모든 종류의 실제 노동착취 현장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아동/청소년/청년 노동자들이 경험하게 될 냉혹한 현실이라 단언하겠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이가 제법 차 고용주가 나이주의 권력을 이용하기 부적합한 노동자들은 이전의 노동 경험을 근거로 실습(교육) 등의 착취적 경험에서 면제되며, ‘젊은 시절의 경험’ 등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될 무임금 노동의 새 희생양 후보에서도 제외된다. 이쯤 되면 이미 내가 굳이 『자본』 속 옛 사례들까지 꺼내어 문제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이 모든 실례들이 『자본』 속 사례들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영국 및 유럽 각지에서 자행 되었던 아동·청소년 노동 착취가 껍데기만 바꾼 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당연히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린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히) 급여 대신 지급 받아야 할 대가로서의 가치로 보기 어렵다. 이들에게 필요한건 사라진 임금의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기술력의 교육이 아니라, 인간적 노동 환경 보장과 노동 가치의 온전한 반환으로서 누릴 수 있게 되는 인간적 ‘성장’과 학술적 ‘교육’의 기회다. ‘교육’은 고용주의 핑계 거리가 아니라 어린 노동자들의 권리로 기능해야 한다.

『자본』 속 서술들 역시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본문에서 제시하는 19세기 영국의 사례들은 2021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봐도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현대의 알바생 실습 제도와 유사한 사례들이 제시되어있음에 매우 놀랐다. 이를 조금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인노동자들이 소년들에게 베푸는 지도는 소년들의 임금의 일부로 계산되며 …… 성인 노동자들은 소년들의 노동을 비교적 싸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소년들의 야간 노동이 금지된다면) 각 성인노동자는 자기 이득의 절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

바꾸어 말해 샌더슨사는 성인노동자들의 임금 일부를 소년들의 야간 노동에 의해 지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급해야할 것이다. …… 이리하여 샌더슨사의 이윤은 약간 감소할 것인데, …… 이 사실이 샌더슨사로 보아서는 소년들이 자기 일을 낮에는 배울 수 없다는 훌륭한 이유인 것이다.

……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계설비가 놀고 있는 탓으로 생기는 손실은 주간작업만 하는 공장이라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 만약 용광로의 불을 끄지 않으면 연료가 낭비될 것이고, …… 그리고 용광로 그 자체도 온도 변화로 말미암아 망가지게 될 것이다.‘(※이에 대한 저자 마르크스의 반응※ 그런데 동일한 용광로인 노동자들은 주간노동과 야간노동의 교대에 의해 조금도 망가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1865, 제85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조사위원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규칙적인 식사시간이 보장되는 결과 약간의 열량이 현재보다 더 낭비될 수는 있다. …… 그러나 유리공장에서 일하는 성장기에 있는 아동들이 마음 놓고 식사하며 먹은 것을 소화하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결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나라의 유리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력의 낭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 그처럼 더운 공기 속에서 그처럼 힘든 일을 하는 아동들에게 수면은 절대로 필요한 것인데, 아동들은 이 수면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뛰어놀거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시간을 조금도 얻지 못한다. …… 이 짧은 수면까지도 밤에는 아이들 자신이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중단되며, 낮에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잠이 깨기 때문에 중단된다.

……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 초안 작성자인 트리멘히어와 터프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년‧소녀‧부녀자들이 주간 또는 야간의 근무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량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7

 

인용문의 사례는 기술력 교육이 필요한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며, 성인 노동자들은 해당사항이 없다. 이를 통해 고용주는 임금의 지출을 줄일 수 있고, (어린 노동자들 덕분에 이익을 얻는) 성인 노동자들은 어린 노동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는 명목 아래 보조적 노동력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어린 노동자들의 생명력은 소실되고 궁극적으로 노동-가치 착취를 극대화한다. 이런 상황이 1865년 영국과 2021년 대한민국에 모두 존재한다.

1800년대 영국의 공장에서는 위와 같은 착취적 노동 제도들을 바탕으로 온갖 핑계를 만들며 아동·청소년 및 부녀자들을 24시간 주야 교대 근무제로 내몰고 있었다. 공장주들은 (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24시간 공장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실습 제도를 내세워 아동과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성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형태의 노동 제도의 치명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오히려 이를 통해 약간의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모든 부분에서 1800년대의 영국의 공장 노동 실태와 현재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청년 노동 현장은 공통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200여 년 전의 영국 아이들과 현재 대한민국 아동·청소년 모두 공통적으로 나이주의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의 피해자들인 셈이다.

나는 『자본』에 보이는 과서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의 실태가 지금 아동과 청소년들이 겪는 노동 현실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로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 열거한 문제들을 에이지즘의 담론과 직결 시킬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에이지즘이 아동 및 청소년 노동착취의 과정에서 직접적 역할을 하며 뚜렷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의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노동 현장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또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추가적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이는 이들의 노동력 가치를 앗아가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이 에이지즘에 기반을 해 있던 그렇지 아니하던, 어린 노동자들의 근로를 더욱 버겁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만만하게 여겨지는 낮은 연령의 피착취 계급으로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실제적 노동 상황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며, 그 불평등한 현실을 분석적으로 밝혀내고 이에 맞서 싸워낼 당위를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선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투쟁이 특정 정체성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과거의 어느 때에 아동이었고 청소년이었다. 아동·청소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 결코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서 계급성을 저해할만한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할 계급투쟁의 가열한 함성 속에, 이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위한 뜨거움을 조금 더 도드라지게 섞어내도 되지 않을까. 청소년과 아동의 인권을 위한 용기 있는 투쟁들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되찾아오고 있듯이, 아동과 청소년들의 노동권 또한 다시 되찾아올 수 있게끔, 시대적 소명을 깨우친 모두가 들끓는 목소리를 모아야만 할 것이다.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구시대의 옛 어휘로 남기를 소망하며,

“이젠 어른들도 알아야만 한다.”


  1. 물론 이런 억압은 당연히 ‘자본의 노동자 억압’ 일반을 그 바탕으로 두고 있으며, 이에 부차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2.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Ⅰ 상, 비봉출판사, 2015, 345~349쪽.

  3. 생산수단을 구입하는 데에 사용된 자본의 부분을 일컫는 말로, 생산과정에서 추가로 창조 되는 잉여의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 자본의 부분을 의미한다. 불변자본은 생산수단의 구입으로 자본에서 구체적 생산수단의 형태로 그 양태를 탈바꿈하며, 이 생산수단에 체현 되어있는 가치를 그대로 생산물에 이전할 뿐 추가적 가치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4.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Ⅰ 상, 비봉출판사, 2015, 345~354쪽.

  5. 「열정페이」, 시사상식사전 –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각, 2015.03.0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569963&cid=43667&categoryId=43667〉.

  6. 「열정페이」, 위키백과, 2020. 5. 30.,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C%A0%95%ED%8E%98%EC%9D%B4〉.

  7.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Ⅰ 상, 비봉출판사, 2015, 354~356쪽.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 12월 공개세미나 「니체와 20세기 초 한국 정신사-‘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 논쟁을 중심으로」(발표자: 김정현) [월례발표회•세미나]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 12월 공개세미나

「니체와 20세기 초 한국 정신사-‘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 논쟁을 중심으로」 (발표자: 김정현)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한철연)

 

2020년 12월 28일 20시, 한철연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는 원광대 철학과의 김정현 선생님을 초빙하여 특별 세미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발표 논문은 독일의 니체연구지

Nietzscheforschung』, Bd.23(2016)에 게재된 글로 한국에서 첫 니체 수용의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적인 것’, ‘근대적 개인주의’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저희 분과에서는 김정현 선생님의 연구가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논의된 내용들을 간략히 소개하며 뜻깊었던 자리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선 논문에서 김정현 선생님은 왜 니체가 동아시아에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물으며 니체 연구의 수용사가 20세기 한국의 시대적 문제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주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어 본문을 통해 저자는 크게 두 개의 주제와 연관하여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 정신사에 자리 잡고 있는 니체의 위치를 점검하고 후반부에서는 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니체 수용사의 구도를 고찰합니다.

일본지성계와 중국지성계의 상황을 비교하는 전자의 논의에서 흥미롭게 지적된 점은 일본에서의 니체 논의는 국가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와 연결되었던 반면 중국에서의 니체 논의는 구습의 폐지, 신문화 창조, 민족주의의 담론으로 이어졌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후자에서 다룬 서북학회의 니체 수용사는 이 시기의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을 위시한 서구 인권사상, 민중 계몽의 사상 등을 확산시키면서 니체와 톨스토이의 사상을 대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었는데, 두 사상가들이 다룬 개념들을 20세기 동아시아라고 하는 특수한 지형 속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논의였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언급된 ‘윤리 및 개인과 사회의 관계’ 부분은 1909년 <서북학회월보>를 통해 소개된 ‘애기(愛己)’와 ‘애타(愛他)’에 관한 필자불명의 두 편의 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었는데, 김정현 선생님은 이 시기의 니체 연구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있었던 시대정신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윤리적이고도 사회적인 개인의 발견과 근대성의 이해 문제가 대한제국의 자기인식이라는 숙제와 연관되어야 함을 지적했습니다.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 초반까지 진척되었던 한반도 사상계 속 개인과 사회, 국가에 대한 새로운 물음들은 톨스토이와 니체를 중심으로 한 대결적 구도 속에서 근대 인식의 지도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언급된 특징들이 일본이나 중국과도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날 분과원들을 비롯하여 동·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30여 명 정도의 인원이 참석하였습니다. 모두 김정현 선생님과 열띤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고 수많은 흥미로운 발언들 속에서 저마다의 숙제를 담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의미 있는 마무리가 된 것은 김재현 선생님이 동과서 출판사에서 근현대 한국 총서 시리즈로 출간된 양일모 선생님(팀)의 최근 연구서(들)을 소개하면서 발표자인 김정현 선생님이 앞서 언급한 필자불명의 글이 일본학자의 것임을 부연해주었다는 점입니다. 이날의 세미나는 참으로 21세기의 한국철학을 만들고 있는 ‘젊은’ 한국 철학자들의 만남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동서양 연구의 만남에 대해 가치 운운하던데, 바로 오늘 같은 만남(20세기와 21세기를 횡단하고 동양과 서양의 연구가 교접하는 ‘across the sophia-phile’) 이상의 또 뭣이 중할 수 있겠습니까?


*flex: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분과 모임인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 세미나>는 2019년 5월 28일 첫 모임을 시작으로 매달 마지막 주 저녁 8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오후 4시경쯤 서교동에 있는 한철연 세미나실에서 모였으나, 팬데믹 이후 Zoom을 통해 저녁에 회합하고 있습니다. 요일은 그때그때 다르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미리 연락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현재 멤버는 김교빈(분과장), 김문용, 김재현, 김제란, 김홍경, 연효숙, 이종란, 이찬희, 이현구, 인현정, 황희경입니다. 참고로 저희 스터디의 aka가 ‘복덕방 스터디’로 알려졌는데 왜 이런 경이로운 소문이 퍼졌는지, 올해로 평균 연령 21세가 되는 멤버 모두가 갸우뚱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인보, 이기, 최남선, 신채호 등의 글들을 살펴왔고, 앞으로도 근현대 인물들의 삶과 철학을 폭넓은 관점과 주제로 공부할 예정입니다.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시대와 철학]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김성우(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세계화의 파산과 극우 포퓰리즘의 재등장

 

7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박근혜 정부 집권 1년 차인 2013년 말은 민주 시민에게는 절망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유럽의 변방인 구동구권 출신으로 당대의 떠오르는 스타 철학자였다. 지젝의 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이 논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이란 보수 쪽에서의 신자유주의적인 협박이 있다. 보수가 훨씬 능동적이고 풀뿌리적인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한다.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자유주의적인 현 상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더 나아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퇴색하고,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자본과 시장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스템으로 전락한 채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체제가 공고해지고 있다.”

극우적 포퓰리즘이 득세할 것을 염려한 상황 인식은 불행하게도 2012년 우리나라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실현되었다. 또한 절차 민주주의의 허점을 악용할 것을 걱정한 불길한 예측은 브라질의 연성 쿠데타로 이뤄지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개혁과 혁명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이때 취약한 계층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체제 전복을 막는 운동 세력을 조직화하려는 전형적인 극우적 해법이 있다. 나치즘과 같은 포퓰리즘이 그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극성을 부리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적 저항에 맞서기 위해 기득권 카르텔이 내세운 카드이다. 새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여도 대단히 낡은 카드이다.

대망의 새로운 밀레니엄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민당과 같은 진보 정권들도 신자유주의적 언어로 자신의 정책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참여 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2008년 월가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위력이 마법같이 사라졌다. 세계화의 불평등과 이를 공고히 하려는 반민주적 기득권 카르텔에 저항하는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 2010년부터 중동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을 상징하는 재스민 운동과 2011년에는 미국에서 봉기한 ‘월 가를 점거하라!’라는 오큐파이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세계사적인 시대적 흐름 안에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 실패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반민주적 정책에 국민들이 염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 캠프는 박정희 전 대통령 향수를 자극하는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경제 민주화를 포장지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선 캠프는 민주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도 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극우 포퓰리즘 등장의 세계적 신호탄이었다.

2013년 여름, ‘아랍의 봄’에서 탄생한 이집트 최초의 민주 정부가 법원과 검찰의 포위 아래 다시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프랑스와 노르웨이 같은 진보 정당이 오래 집권했던 나라까지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지지세를 넓혀 가고 있었다.

2016년 여름, 영국에서는 보수당의 일부 극우 정치인들의 아젠다인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영국에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2019년 말 열린 총선에서 영국판 트럼프라고 불리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승리로 귀결된다.

같은 해 여름, 브라질에서는 보수 야권 세력이 연방 검찰과 재벌 언론의 유착을 바탕으로 포퓰리즘 방식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마침내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은 검찰과 사법부를 이용한 연성(soft) 쿠데타로 규정된다. 이 쿠데타가 연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군부의 총칼이 아닌 법적 절차를 악용한 합법을 가장한 정권 탈취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 언론이 가세한 극우 포퓰리즘이 견고하게 작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수사 절차와 사법 절차를 남용한 쿠데타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달아 같은 해의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극우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세계화의 피해자인 백인 남성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모든 주류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다. 이는 가짜뉴스와 결합한 극우 포퓰리즘이 세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극우 포퓰리즘 정치 세력은 특히 기독교 파시즘 세력과의 결합으로 운동의 기본 동력을 마련하고, 가짜뉴스로 여론을 조작한다. 이런 식으로 진보 정권에서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보수 정권에서는 친정부 시위를 이끈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민주진보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난민 혐오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반난민 정서를 부추기고 반중국 정책으로 자기 지지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유사하게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종북’이 민주진보 세력을 매도하는 대표적인 언어였다. 현재의 극우 야권 인사들은 문재인 정부를 친북이나 친 중국적인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다. 자신들이 독재의 후예이면서도 시장의 권력을 약화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개혁 정책이나 법안을 입법화하면 (재벌과 부유층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재라고 맹비난을 가한다.

세계 전역에서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과 재벌이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은 언론의 여론 조작과 검찰의 선별적 수사와 사법부의 자의적 판결에 의해 포퓰리즘적인 동원력을 갖추고 민주진보 정부와 운동을 짓밟는 힘을 과시한다.

브라질에서 연성 쿠데타가 성공한 원인은 식민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구축된 5개의 연합으로 이뤄진 기득권 카르텔이 굳건한 데 있다. 반면에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차 남용 쿠데타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 전 브라질 대통령.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ilma_Rousseff_-_foto_oficial_2011-01-09.jpg

 

쌩큐, 박근혜! 쌩큐, 트럼프!

 

트럼프보다 4년 먼저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2월에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되고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당한다. 트럼프는 4년 뒤인 2020년 말 대선에서 패배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탄핵을 방해하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막무가내식 시도에 촛불 시민들이 얼마나 혀를 내두르고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엽기적인 내막이 알려지자 우리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운 박정희 신화의 철갑이 벗겨졌다. 이로 인해 여론과 민심의 지형이 바뀌고 말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민주진보진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역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촛불 시민들이 각성하자 운동장의 기울기가 역전되었다.

여기에는 기득권 카르텔의 내분도 한몫했다. 권력의 애완견 역할을 자처하던 보수 언론도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공격적으로 보도하고, 보수 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검찰도 과감하게 국정농단 수사를 했다. 그 당시 심지어 친박에 속하는 여권 의원들도 탄핵 의결에 동참하고, 친보수적인 판결을 일삼던 헌법재판소마저 탄핵소추안을 인용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박정희 신화가 사라져버려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현 보수 야권은 4차례의 선거에서 전패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도는 철옹성처럼 보였다. 올해 총선에서는 180석의 거대 여당이 탄생하고 문재인 정부는 성공적인 방역으로 경제에서도 선방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게다가 영화와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한류는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래된 식민지 의식의 잔재인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진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작년 여름부터 브라질식의 연성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아직 진행 중이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로 검란이 일어났다. 검란에 기초하여 보수 언론과 보수 야당은 가짜뉴스에 가까운 여론 공세로 극우적 포퓰리즘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 사법부는 이미 사법농단으로 독립성이 흔들리며 국민적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법 논리를 악용한 판결로 검란에 동참하고 말았다.

검찰에 유착된 보수 언론의 가짜뉴스에 가까운 편파적 보도와 보수 야당의 극우화에 기인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검찰과 사법부의 쿠데타 시도는 현 정부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기득권 카르텔의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구축된 기득권 카르텔이 박근혜 탄핵 이후 발생한 균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록 대선에서 졌지만, 포퓰리즘적인 선동에 능한 까닭에 열성적인 지지자를 대규모로 모아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하였다. 그 지지세에 놀란 공화당마저 자기편에 서게 하여 정치적 외톨이에서 당을 장악한 정치인이 되었다. 게다가 고위 관료와 연방대법관마저 자기 사람으로 심어 미국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민주적 절차와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뉴미디어와 대규모 열성 지지자를 동원해 선거 조작을 외치며 엄청난 물량의 소송전을 펼쳤지만, 각종 법원에서 연달아 거의 모든 소송이 기각되었다. 고위 관료와 다수의 공화당 인사들로 주의회나 주정부를 흔들어 대선 선거인단 투표를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나름대로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법적 투쟁을 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쿠데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합리적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의 공화당은 식민지 해방 이후 생겨난 신생국들의 보수 정당처럼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력이 당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나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한 공화당 인사들이 대선 결과에 승복하고 있다.

더군다나 <뉴욕타임스>와 <CNN> 등과 같은 주류 언론은 언제나 날을 세워 트럼프와 대립하였고, 심지어 친트럼프 언론의 대명사인 <폭스뉴스>마저 선제적으로 트럼프에게 불리한 예측을 했다. 심지어 트럼프가 임명한 국방부 장관이나 법무부 장관, 심지어 법관들마저 공개적으로 트럼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리한 발언을 하거나 판결을 내렸다. 이는 다섯 영역의 기득권 카르텔이 균열되어 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할 절차적 민주주의를 허무는 쿠데타에 찬성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트럼프식의 연성 쿠데타 시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기득권 카르텔의 연성 쿠데타 시도도 실패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선 보수 언론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들의 뉴미디어 언론이 있다.

보수 언론이 아무리 정부와 여권에 대해 맹공을 가해도 다소 출렁거림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선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보수 언론이 조국 가족에 대해 80만 건 이상의 친검(檢) 보도를 했지만, ‘검찰 개혁과 조국 수호’를 외치며 서초동에 모인 백만 이상의 촛불 시민의 집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극우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민주 시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견인하여 공수처를 설치하고 다양한 개혁 정책들과 법안들을 입법화하고 있다.

거기에다 군부 독재 세력의 후신인 현 보수 야권이 많이 약화되고 분열되어 있다. 물론 검언(檢言) 카르텔이 대단히 견고하고 상당히 많은 보수적 판사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이 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연성 쿠데타 시도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검언 카르텔이 일으킨 쿠데타에 법조 카르텔이 참여하면서 민주 시민들의 촛불에 다시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이 쿠데타에 무사안일하게 대처하던 민주당이 민주 시민들의 성난 목소리에 떠밀려 2차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 및 윤석열과 사법 농단 판사 탄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여권은 180석을 바탕으로 국정원과 경찰 및 검찰이라는 3대 권력 기관의 1차 개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검언과 사법 쿠데타 시도로 말미암아 문재인 정부는 그 임기 내에 민생 개혁,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사법 개혁을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4대 개혁 과제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재보궐 선거와 대선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새해에는 민주 시민들의 분노가 지닌 엄청난 압력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상당히 이뤄낼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현 정부의 대명사인 선제적인 검사 외에 국내 치료제 개발과 해외에서 개발 중인 백신 계약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에 검사, 치료, 예방이라는 3대 조치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도 기대한다.

트럼프의 쿠데타 시도가 이미 실패로 판정이 나고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쿠데타 시도도 민주 시민과 거대 여권의 연대에 의해 제압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니 촛불 시민들이여, 분노하라! 그 분노의 목소리를 크게 외치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향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도록!

 

시가 필요한 스물네 번째 시간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네 번째 시간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 뵙네요.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해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겪어내고 있는데요,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은 어떤 기억들을 간직하셨는지, 또 2021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연말과 신년은 여러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보내기 마련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서로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거리두기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고독해지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2021년도 어김없이 코로나와 함께 살게 될 텐데요, 한 번 살아봤으니 2년차에는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요?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는 용혜원 시인의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용혜원 시인은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2년에 계간지 <문학과 의식>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시인입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는 순수하고 어렵지 않아서, 누가 읽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오늘 제가 가져온 <나를 불러주는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시로, 요즘 같은 때에 읽으면 더 큰 감동이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리횬의 목소리로 듣고 오시죠.

 

 

나를 불러주는 사람

                                  용혜원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하던 생각지 않은 날에

곱게 피어나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행운이라도 잡은 듯 기쁠 것이다

 

목마른 그리움 탓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 순간 가까워질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아도 좋다

 

내 눈동자에 내 마음에

사랑을 꽃피워 줄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아무도 몰래 내 마음 꺼내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서로 토닥이고 다독여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억을 한 아름 만들 수 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네, 용혜원 시인의 시 <나를 불러주는 사람> 듣고 왔습니다. 이 시의 첫 줄처럼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이런 날이 한 번씩 찾아옵니다. 특별한 일도 없고 누가 스트레스 주는 상황이 아님에도 갑자기 훅 우울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죠. 요즘처럼 거리두기가 계속되어 주변 사람들과 만날 수 없는 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하던 생각지 않은 날에

곱게 피어나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행운이라도 잡은 듯 기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 마침 보고 싶은 누군가가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어떨까요?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생각지 못한 날에 보고 싶었던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거나 짧은 메시지 한 통 받는다면 어떨까요? 반가움에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지면서, 한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목마른 그리움 탓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 순간 가까워 질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아도 좋다

 

[…]

 

서로 토닥이고 다독여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억을 한 아름 만들 수 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며칠 전에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보이스톡을 받았어요. 신년을 앞두고 문득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전해주었는데요, 예전에 함께 학교 다니던 생각이 나면서 너무 반갑고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이에서 아무 특별한 일없이 먼저 연락을 취하기란 사실 쉽지 않아요. 보통은 무언가 용건이 있어야만 연락을 하게 되죠.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상대방이 놀라면 어쩌지?’ ‘내 연락을 불편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머뭇거리기 일쑤이고, 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 선뜻 연락하지 못했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알기에, 먼저 연락을 준 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저도 메시지 창을 열어 그간 연락하지 못했던 다른 지인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내 친구가 그러했듯 나도 먼저 용기를 내자! 이 따뜻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게 해 주자! 하고 말이죠.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환경에 있더라도, 문득 생각이 나는 날에 잠시나마 안부를 전할 수 있다면, 멀게만 보였던 서로의 간격은 한 순간에 허물어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는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죠. 오랜 기간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로 내 마음을 살포시 담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1월 1일을 놓치셨다구요?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또 한번의 새해인 ‘설날’이 곧 찾아오니까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 친구들에게 “잘 지내?” “내가 좋은 시 한 편을 읽었는데 네 생각이 났어”라며 먼저 연락해보세요. 그 사람 역시 여러분의 연락을 받고 ‘아 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위로와 격려를 한아름 누리게 될 겁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이적의 <당연한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이 노래는 가수 이적씨가 SNS에 개인적으로 만들어 올렸던 곡이었는데요, 2020년 제56회 백상예술대상 특별공연에서 아역배우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곡입니다. 코로나 여파가 계속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만 여겼던 모든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우울함 속에서도 밝은 미소를 지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노랫말이 용혜원 시인의 시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따뜻하게 보내시구요,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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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 당연한 것들 / 주소: https://youtu.be/LYSR0iAF8i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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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영상 –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 – 윤태양 회원 발표

 

링크: https://youtu.be/eS6II1sNO1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2020년 11월 26일에 줌(ZOOM)으로 진행한 월례발표회 영상입니다.

 

-일    시: 2020년 11월 26일 (목) 오후 4~6시

-주    제: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

-발표자: 윤태양(건국대 모빌리티인문학연구원)

-토론자: 배기호(충북대 철학과)

 

“이 발표문은 윤리적 행위를 해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한 가능성으로 정동적 변화를 지목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동성과 다양성이 만연해진 현대사회에 효과적인 제안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한다. 한국 학계에 있었던 ‘정동(情動, affect)’ 개념을 둘러싼 토론을 정리하고, 순자 성악설의 논리구조와 ‘정안례(情安禮)’를 중심으로 모빌리티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의 길을 모색한다.”

“누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가? ‘포퓰리즘’이 게으른 분석과 냉전식 선동 논리로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를 시작하며,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병 위기는 자연재해 말고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더 드러내 보였습니다. 어려움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닙니다. 집권당은 거대의석에 걸맞은 개혁을 보여주기는커녕 실망스러운 모습만 안겨주고 있습니다. 촛불 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커져만 가는 불평등과 자영업 붕괴,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서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어느 재벌 회장의 죽음은 추도하면서, 택배기사들을 비롯해 산업 현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습니다. 교육 현장은 비대면 수업의 전면화 이후 이른바 ‘언택트’ 방식으로의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어느 누구도 수업의 질과 강사들의 생존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미투 운동의 확산 이후에도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는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 코로나 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는 것은 여성이고, 성소수자들은 이태원발 집단감염 당시 강제 커밍아웃에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철학을 업으로 삼고, 철학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러한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두고 철학적으로 개입하여 시대진단과 비판적 시각을 담은 글을 써보려 합니다. 들어가는 큰 주제는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코로나 이후의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현재와 미래’, ‘강사법과 대학 사회’ 등으로 잡아봤습니다.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라는 기조를 공유한 몇 사람들이 먼저 집필을 시작합니다. 참여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아래 글은 2019년 11월 5일자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정치면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게재를 허락한 저작권자 김성우 회원에게 감사드립니다. 기사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84264&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누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가? ‘포퓰리즘’이 게으른 분석과 냉전식 선동 논리로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김성우(한철연 회원, 상지대)

 

<포퓰리즘으로 망한 아르헨티나… 한국이 따라 가선 안 돼>(한국경제)
<‘조국 사태’와 포퓰리즘의 상관관계>(동아일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기업성장 저해>(중앙일보)
<디지털,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기로에 서다>(한겨례)
<포퓰리즘과 혼돈의 한국 정치>(프레시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최근 언론에 실린 기사 제목에는 어김없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적이자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 왜 포퓰리즘이 이런 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포퓰리즘은 냉전 시대의 전체주의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가 동구권의 자유화 이후 소련 스파이 대신에 새로운 악역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의 냉전 시대에는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상대방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악용되거나 남용되었다. 우파의 파시즘도 전체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좌파의 스탈린주의도 전체주의라고 비난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이와 유사하게 유럽과 미국에서 트럼프로 상징되는 극우의 부활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있다.

이는 포퓰리즘을 대중선동주의나 대중영합주의로 사용한 예이다. 이렇게 되면 광화문 기독교 극우 집회도 포퓰리즘이 되고, 서초동이나 여의도 촛불문화제 집회도 포퓰리즘이 되어 의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 세력으로 똑같이 취급을 받게 된다. 위에 열거한 기사 제목처럼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보수지와 진보지를 막론하고 소위 정치 전문가들에 의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상대 진영을 비판하는 냉전적 언어이듯이 포퓰리즘도 극도의 흑백논리적인 언어이다. 다시 말해 포퓰리스트를 데마고그(대중선동가)로 착각해서 부르는 것이다. 민중의 편에 서는 민중주의자와 엘리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대중선동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원래 포퓰리스트는 기득권층인 엘리트에 대비해서 민중, 평민, 서민 등을 옹호하는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대의 민주주의가 엘리트만의 게임으로 변질될 때 포퓰리즘은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로서 다시 대의 민주주의가 민중이나 서민을 대표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정치운동이다.

마치 전체주의가 그 이름과 정반대로 일인 독재나 일당 독재로 지칭되어 상대 체제를 서로 낙인찍는 애매모호한 명칭이 되었듯이 포퓰리즘도 그 원래 의미를 잃고 상대 진영을 비난하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언론과 방송에서 광화문 극우 집회도 포퓰리즘이고 여의도 촛불문화제 집회도 포퓰리즘으로 부르며 양비론을 구사한다. 엘리트의 입장을 양비론의 우산을 펼치며 보호하고 엘리트 중심의 의회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식이 이른바 의식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분석가나 기자들의 행태이다.

어떤 낱말이 모든 것을 지칭하거나 애매모호하게 사용된다면 이미 그 단어는 생명력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전체주의’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폐기하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날카로운 주장이 이를 입증한다. 인종 차별과 전쟁광의 논리인 극우 파시즘과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극좌 무장투쟁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짜 뉴스로 대중 선동을 일삼는 대중선동 집회와 스스로 팩트 체크를 하며 기성 언론을 비판하는, 깨인 시민들의 자발적 집회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 유형의 정치운동을 무분별하게 동일한 언어로 동급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족보 있는 단어를 난데없이 족보를 무시한 채 임의적으로 남용하는 일은 이른바 전문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유행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더 이상 남발해서 애매한 양비론의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고 엘리트 권력을 은폐하는 우산으로 사용하지 말기를. 냉전식 선동 방식으로 현재 일고 있는 사건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면밀한 분석 대신하지 않기를. 포퓰리즘에 그 원래의 의미를 돌려주고, 촛불문화제를 통해 우리 시대의 진리(검찰개혁과 언론개혁, 불공정한 제도 개혁 등 엘리트 파워 폐지)가 현현하고 촛불시민이 새로운 정치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적 의의를 무시하지 말자.

의철학의 지도 그리기 – 최종덕의 『의학의 철학』 서평 [철학자의 서재]

의철학의 지도 그리기

최종덕의 『의학의 철학』 서평

 

김범수(한철연 회원, 상지대)

 

평생에 걸쳐서 하나의 이론적 지형을 그려낸 저작이 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분야라서 그 노고만큼의 화제나 명성을 얻기도 힘들다. 이 소모적인 일을 저작에 대해서 짧게 말하려고 한다. 이 책은 최종덕 교수가 쓴 『의학의 철학』이다. 이 저작은 아마도 교과서와도 같이 필요하면 소환되어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20년이 지난 뒤에도 독자들에게 소환되어 저작에 그려진 ‘의철학’이라는 낯선 지형을 탐색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깊이의 책을 독해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의학의 철학』은 최종덕 교수가 학자로서의 평생 업적을 집약해 놓은 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센대학에서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물리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관심은 물리학, 수학에서 진화론과 생물학으로 넓혀갔다. 물리 대상에서 생명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몸으로 관심분야가 확대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저작의 주제는 다수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의학 철학이다. 이 과정을 살펴본다면 저자의 이력은 과학 철학이라는 큰 울타리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분기해서 생물학이며 의철학으로 꽃을 피운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작은 이미 앞선 『생물철학』, 세종도서상을 받은 『비판적 생명철학』의 연장선이자 발전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판적 생명철학』에서는 단순히 생명을 규정하기 위한 마이어와 같은 학자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론적 사고와 생기론적 사고를 비교하면서 생명의 특성 안에 상호작용, 혹은 공생의 의미를 살피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따뜻한 인문학 안에 과학적 사고의 요청과 필요성을 소환하려는 저자의 이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유는 자연스럽게 진화론과 연결되면서 『생물철학』에서 『의학의 철학』을 집필하게 될 전조가 감지된다.

최종덕 교수가 쓴 『의학의 철학』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제법 두껍기도 하거니와 생소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주제가 배치되어 단번에 읽어 보겠다는 야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버거울 수 있다. 이에 많은 분량을 간단하게 분류하여 그 흐름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구성을 임의로 재배치하면 크게 세 주제 혹은 네 묶음으로 재분류할 수 있다. 1장과 2장, 그리고 11장은 의학철학의 존재론적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존재론적 문제에서 인식적 차원의 논의로 이해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3장, 4장, 5장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인식적 문제의 주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독자적인 부분으로 이해할 법한 9장과 10장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면역학과 노화방지학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6장, 7장, 8장의 진화(의학)론이다. 이렇게 보면 대략 세 주제 혹은 네 묶음으로 재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의철학의 존재론적 물음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11장에서도 이러한 구성에서 철학자의 분투가 그려진다. 왜 그런지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 존재론적 물음은 흔히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찾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에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계속 묻는다. 가령 용기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 이 간단한 질문은 대화 상대를 늘 곤경에 빠뜨린다. 심지어는 이 물음을 던질 소크라테스마저도 ‘나도 잘 몰라’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물음이 존재론적 물음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마저 무지를 고백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물음은 거인족(티탄족)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언뜻 인식론적 차원에서 논의가 접근되는 것 같지만, 어김없이 “~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한다. 이 물음을 그대로 ‘의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구체적으로 제기해 보자.

저자는 의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회적인 답을 내린다. 그 답의 키워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고, 다른 하나는 플랫폼이다. 저자가 말하는 의철학은 다음과 같은 우회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철학은 추상적인 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현실 문제도 깊이 다룬다. … 철학은 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에 대해 미학적 해석을 시도하며, 로봇윤리와 같이 인공지능의 가치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의학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의료윤리와 같은 가치론을 다룰 수 있는데, 이런 분야를 ‘의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 엄밀하게 이런 정의는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하지만 의철학의 위상을 매우 솔직하고 정확하게 지도 그리기를 한 것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를 상상해보자.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한다. 그 지도는 여행 전체 일정을 바꿀 수도 있다. 지도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낯선 곳이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라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게 된다. 이로부터 여행은 더 안락하고 즐거워진다. 이 책에서는 의철학을 설명하면서 그 인식론과 존재론, 가치론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불친절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향으로 책이 정리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의철학이 다루는 존재론의 문제, 인식적 문제, 가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하나의 의철학 지도로 톺아보면,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이나 깡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 새롭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구체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학의 철학』에서는 그려진 지도가 매우 자세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영토를 표시하는 지도가 아니라 풍경이 그려진 지도의 형식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지도 그리기로 설명한 존재론적 문제에서 인식적 차원의 논의로 좀 더 세분하여 나아가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3장, 4장, 5장, 그리고 9장과 10장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야하는 부분이 바로 질병에 대한 ‘인식’이다. 질병이 무엇이고, 왜 생기는지를 알 수 있다면 건강과 장수의 희망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 분류 의학의 존재론적 기초를 다루면서 질병마다 고유한 본질을 따로 갖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로부터 근대 의학이 탄생할 수 있는 병리학의 위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분류 의학의 존재론적 의미가 질병관의 역사적 모델과 함께 상세하게 4장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의료인류학의 인식적 기초를 5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의료인류학은 인간의 건강이 사회적 요소에 의해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연구 분야이다. 의료인류학은 문화적, 역사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 질병의 경험을 기술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질병이 단순히 실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류학적으로 문화 횡단적이고, 역사적이며, 진화론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6장부터 8장까지 최종덕 교수는 진화론과 의학의 관계를 조명한다. 진화에 관한 논의는 물론 라마르크나 다윈과 같은 학자들의 논의에서 출발하지만, 이내 진화 의학으로 발전적인 지도를 그려간다. 진화의학은 우리 신체가 적응진화의 소산물이라는 진화론적 인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질병과 병리적 징후군의 기원과 원인을 이해하여 더 나은 치료와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임상과 이론의 의학 체계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진화의학은 의학계에서 외면 받아왔다. 최종덕 교수는 그 이유를 진화 의학의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면서 임상의학에서 이용될 수 있는 접점을 그려보고 있다.

한편 5장에서 다루어진 의료인류학은 삶의 문화적 실존과 더불어 삶의 실존을 억압하는 현실의 사회-역사적 조건을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여러 감염병의 파장으로 지역적 의료환경과 보건 정책 등을 따져보게 된다. 이로부터 건강 모델이나 공중보건 모델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9장에서 면역의학으로 연결될 수 있다. 면역의학은 면역학적 사유체계를 통해서 질병을 해석하고 생리의 역동구조를 이해하려는 인식론적 태도를 말한다. 이 인식적 태도에서 공진화와 공생과 같은 개념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이로부터 공존의 존재론, 즉 숙주의 면역작용과 기생체의 공격작용이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 변화를 겪는 공존의 존재론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책 전체를 보면 의철학을 구성시킬 수 있는 인식론적, 가치론적 태도가 다시 존재론적 위치에서 다시 탐문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처음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의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니 이 질문은 실용적으로 다음 질문으로 대체해 보자. 의철학은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의학의 철학』에서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캐플란은 1992년 “의철학이 존재하는가?”라는 논문에서 고유한 영역이 가능하려면 그 영역만의 핵심 교과서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의철학은 그 당시까지 고유 영역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고립된 지식의 섬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서 그는 의철학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비관적인 주장을 담았다. 하지만 의철학은 고유한 영역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마컴은 의철학의 고립성을 부정한다. 의철학 교과서가 미비하고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고,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마컴(Marcum)은 의철학의 고유성을 제기한다. 바로 이런 설명이 앞으로의 의철학 발전을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 11장은 본질적이라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 등 여러 조건에서 의철학의 규정이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플랫폼’이라는 형식을 제안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은 세상을 보는 비판적 시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적 시선을 잃지 않는 관점이며 문제와 문제 아닌 것을 구분하여 진짜 문제를 질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의철학이란 그런 질문을 의학에 던지는 사유행위이다. 의철학은 철학사에 갇혀 있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인문의학과 의료인문학의 방향과 지향을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플랫폼은 빈 그릇이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는 매우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다. 애초에 『의학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두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지도 그리기’와 ‘플랫폼’이 그것이다. 이제 이 책 『의학의 철학』으로부터 지도와 플랫폼을 하나의 격자로 만들어서 각자가 그려갈 의철학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제59회 정기 학술대회 안내(zoom-온라인)

[학사상구회] 2020년 가을, 제59회 정기 학술대회 안내 –

한철연 정기 학술대회를 알립니다.

 

일시: 2020년 12월 12일 토요일 오후 1시 50분

온라인(Zoom) 방식으로 진행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격상됨에 따라, 이번 학술대회는 온라인(Zoom)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Zoom 회의 ID: 816 5313 0565 / 암호: 12345]

《한국 근현대 철학과 ‘운명’》이라는 주제로 2인의 발표와 2인의 토론·논평이 준비돼 있습니다.

그리고 각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청중 질의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종합 토론 시간이 이어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해 드린 포스터를 참고해 주십시오.)

비록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이번 학술대회 역시 열정적이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개최될 것을 기대합니다. 회원 및 관심있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