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시대와 철학]

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 중 한철연 회원인 한상원 선생님이 강의한 2강의 주요 내용을 강연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강의: 한상원(충북대), 정리: 편집주간

 

2023년을 지내는 지금, 이 시대는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공정, 반지성주의, 법치 개념은 전도되고 왜곡되어 쓰인다.

지금 우리 시대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에 국한되지 않을까. 보수 정치권에서 100시간 일할 자유를 운운한 것은 시민의 자유와 부합되지 않는다. 개체로 분절되고 원자화된 자유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약화한다. 자주 회자되는 ‘공정’은 어떤가. 공정 이전에 평등은 2023년에는 사라진 개념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공정이 채웠다. 지금 말하는 공정은 게임의 법칙으로서 공정이다. 공정한 경쟁이 유일한 정의관이 되어 강자는 약자를 위한 정책에 반발하고 역차별을 주장한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반지성주의’는 정치적 대립 상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의 구호로 바뀌었다. ‘법치’는 이미 선택적 법치주의가 되었다. 강자의 부정의는 사면으로 보호받고 노동자의 투쟁에는 법과 질서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댄다. 약자의 저항은 법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아는 법치는 탈취되었다.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그간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여러 일이 일어났다. 2023년 1월 18일 사상 최초로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압수수색했고, 2022년 11월 29일에는 화물연대의 파업에 정부는 국가가 국민(노동자)을 강압하는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여 전체주의적 발상을 정당화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에 경찰은 질서 유지가 아닌 마약 단속을 주업무로 삼아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사고 예방이 아닌, 범법자 검거를 경찰 활동의 우선순위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태들이 오늘날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된 법치의 모습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도대체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법치주의의 기원

영어권 국가들에서 법치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13세기 영국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서 비롯되었다. 대헌장은 영국의 국왕 존(John, 1199~1216)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요구로 제정되었는데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고’(39항),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정당한 정의와 권리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늦출 수 없다’(40항)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자유)를 보장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다. 물론 농노민이 아닌 자유민을 대상으로 삼기에 귀족 운동의 한계는 존재한다. 또 서구에서는 미국혁명을 통해 법을 성문화하여 인격체가 아닌 법에 기반한 통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프랑스혁명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권선언이 이루어졌다.

∎법치주의의 자기모순

절대군주제를 비판하고 시민정부론을 주장한 존 로크, 법치국가에서 자유를 중시한 몽테스키외, 자신과 타인의 자유가 공존하게 만드는 질서가 법이라 명시한 칸트 등 근대 법치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근대 법치는 자유주의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과연 확대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근대 법치는 국왕의 전제주의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높였다. 그러나 현대는 개인의 소극적이고 원자화된 자유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대 법치주의의 현실은 통치권을 장악한 정권이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며 개인의 권리는 축소한다. 법 전통을 위배하는 현상이다. 이를 위해 통치 권력을 잡은 정권은 특정 적(敵)을 설정한다.

모든 통치 권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적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까운 한국의 경우 정권에 따라 일본이나 북한, 또는 엄한 이란이 적이 되기도 한다. 내부적으로는 토착왜구나 종북세력으로 불리는 적들이 등장한다. 법치주의는 자유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전제주의를 몰아내고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이념인데, 실상 법치주의라는 이름은 적에 대항하는 국가의 투쟁이라는 반자유주의적 논리에 활용된다.

∎이상한 현실

또 이상한 것은 법을 가장 잘 아는 검찰 출신들이 통치 권력을 잡은 지금 한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부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를 실행하지 않고 마키아벨리와 홉스, 슈미트의 얼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법은 그 자체로 동시에 권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법의 존재 목적이지만, 법의 이름으로 특수 집단의 권리가 제한되고 억압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현대 여러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에 법은 개인들을 시민이라는 법 권리를 가진 자로 호명하나 실상 많은 사람을 법의 권리적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법적 주체

우리는 법적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법학자 한스 켈젠은 법적 주체 개념을 비판하면서 법적 주체는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주관적 법 이해에 불과하다는 일리 있는 주장을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경제적 권리라는 소극적 자유라는 의미보다는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는 보다 적극적인 권리의 차원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4조에는 “불합리한 압수와 수색에 대하여 신체, 주거, 서류, 물건의 안전을 확보할 국민의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 현실에서는 흑인(소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존엄은 박탈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적 주체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 없이는 법은 권리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봉기와 헌정(구성)의 변증법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평등자유 명제

발리바르는 봉기와 헌정[constitution, 헌법, 구성]의 변증법을 얘기한다. 구성은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적 행위를 수반한다. 구성 단계는 혁명적 모험주의가 아니라 봉기를 통한 제도화로 나아가는 지점이다. 프랑스 이주노동자들의 폭동에 대해 발리바르가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을 보면 발리바르가 얘기한 봉기의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이미 제도화된 헌정도 다른 형태로 변동 과정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혁명이 제출한 프랑스 제1공화국 헌법의 전문(前文, 공포문)에서 자연권 사상가들이 내세운 인간이라는 말과 자연권 비판의 영역에서 특정한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이라는 말이 동의어라 본다. 여기에서 ‘평등자유[Egaliberté, equaliberty(equality+liberty)]’라는 명제를 도출하고 이것이 프랑스 인권선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권 이념의 기원을 이루는 ‘평등자유’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요구하는 과정에서, 해방을 향한 투쟁 과정에서 언제나 반복적으로 출현하게 된다는 것. 이로써 갈등을 통한 새로운 제도화로 귀결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항상 발현되지 못하므로 기존의 지배 질서에 대항하게 된다. 한국에서 노동자, 또는 장애인의 투쟁은 ‘인간이되, 왜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해방적 운동이 봉기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민권의 내용은 갈등적 관계라는 토대 위에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파업, 시위 등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봉기적 계기를 억압하는 법치주의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혹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보면 시민권은 내부적 갈등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인 흑인 유색인종의 구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구분되지 않고 시민권 안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랑시에르는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지를 묻는다. 한나 아렌트는 추상적인 인권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장될 수도 없다고 했다. 현대에 미국은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용인하기도 하지 않는가. 과거 프랑스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인권은 천명되었지만, 주체들이 그 내용의 이행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고, 스스로 ‘인권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인권은 주체화와 정치화의 과정을 촉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정치적 술어를 증명하려는 주체들이 등장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규명하려는 시도 위에서 과연 자유와 평등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편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사용된 인간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homme’가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 권리선언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종의 패러디로 ‘인간(남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대항하는 ‘여성(femme)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작성한다. ‘단두대 처형은 남녀 모두 똑같이 적용하나 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연단에서 연설을 못하는가’라는 올랭프 드 구즈의 항변은 이미 존재하고 합의되어 성문화된 내용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들의 활동이다. 이러한 불화는 조화가 아닌 갈등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의 내용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범주에 생물학적으로는 포함되나 정치적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그리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여성의 지위에 관한 전복적 질문으로 ‘재맥락화’된다. 즉 정치적 주체는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이고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증명하는 주체이며 배제를 넘어서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주체이다.

인권의 주체란 자신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한 주체이자 자신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가진 주체이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현실에서 갖지 못한 주체(예컨대 미국 내 흑인들 )와 실정법상 권리를 갖지 못했으나 인권의 이념에 의해 권리를 가져야 마땅한 주체(예컨대 이란 내 여성들, 유럽의 난민들)들도 인권의 주체이다.

∎권리는 자신의 주체를 요청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제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하여 ‘노동3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로서 화물노동자들은 업무개시명령에 적용되지 않으며 헌법을 벗어난 명령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현행법에서 ‘나’를 배제하는 지점을 발견하여 그 권리를 주장할 때 그들은 곧 권리의 주체로 발생하는 것이다. 2022년 9월 중순 이후 이란 여성들이 ‘여성, 삶, 자유(Women, Life, Freedom)’를 외치며 반히잡 시위에 나서고 이로써 촉발된 반정부 시위의 주체들은 ‘인권의 주체’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법과 권리 사이 간극의 모순 문제를 통찰한 인권 주체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가진 권리를 증명할 주체를 소멸시키는 법치주의는 법이 실현해야 할 권리를 억압하는 ‘치안의 논리’이다. 지금 2023년 한국에서 우리가 마주한 법치주의는 권리와 인권의 주체를 억압하는 ‘치안’일 뿐이다.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철학자의 서재]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오상현(한철연 회원)

 

박은미 선생님의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 벗어나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자의 시선에서 고르고 담았다. 화가 많은 나로서는 일종의 처방전이었다고 해야겠다.

“논리적 결론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때 인간은 그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어갑니다. 즉 논리적 결론이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논리적 결론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러니 논리적 결론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그 결론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원활하게 만드는 결론, 즉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결론을 참이라고 믿습니다.”(38쪽)

철학을 전공하면서 ‘논리’를 무기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에 열을 올리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일상에서 논리적이지 못하다. 행동경제학이 전통경제학보다 재미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다만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면 다행이겠지.

“반성 능력이 좋은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입힐 가능성을 생각하고, 반성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즉 후자는 자신의 잘못을 못 보기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거죠.”(214쪽)

‘정신승리’가 자기 보존에 유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요즘 유독 ‘책임’을 지겠다는 권력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답답하고 아쉬웠는데, 반성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태풍도 폭염도 곧 지나간다 하였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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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4회 정기 학술대회(8월 19일) 알림 [한철연소식]

2023년 8월 19일 열리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4회 정기 학술대회를 안내합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사회와철학연구회’와 공동으로 개최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내용을 확인해 주십시오.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 일시: 2023년 8월 19일(토) 오후 1~6시
● 장소: 서울대학교 83동(인문사회계열멀티미디어 강의동) 305호

● 대중교통
– 추천 경로: 2호선 서울대입구역 하차 -> 지선 5511 승차 -> 경영대 행정대학원 정류장 하차 -> 도보 약 10분 (아래 지도 참조)
● 주차
– 위치: 정문 인근 주차장 혹은 관악사삼거리 주차타워(아래 지도 참조)
– 안내사항: 서울대 주관/주최 행사가 아닌 관계로, 서울대 측에서 주차권 제공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개인 차량으로 오시는 선생님들께서는 사비로 주차비를 납부하셔야 하는 점 양해 부탁드리며, 주차공간이 협소하니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드립니다.

● 프로그램

학술대회장 위치

 

 

 

 

 

 

 

 

 

 

 

 

 

 

 

 

 

 

 

 

주차타워 위치

 

어떤 두려움 –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에 – [내게는 이름이 없다]

어떤 두려움 –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에 –

 

행길이(한철연 회원)

 

‘어떤 두려움’

 

올해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이다. 비판이론 1세대의 아도르노, 2세대의 하버마스, 3세대의 호네트 등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학파의 전통은 계승보다는 비판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선배의 이론을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이론적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간에 대립과 단절의 계기를 지닌 채 비판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이 학파의 정체성이자 전통인 것이다. 하버마스의 입장이 아도르노와 다르듯이 호네트도 하버마스와 같지 않다.

철학자마다 입장이 다른 까닭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이 상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배 세대들이 망명 유대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은 하버마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시기 하버마스는 철없는 소년이었고, 게르만 민족의 범죄적 역사를 의식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도 되지 못했다. 그는 의사를 꿈꾸던 착실한 소년에 불과했다.

소년기의 무구함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뉘른베르크 재판이었다. 소년은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가 인류 최악의 범죄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였다. 하버마스는 의사의 길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신체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정신의 질병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대학에 입학한 하버마스는 선배 아펠의 도움으로 비판적 문제의식을 넓혔고, 졸업 무렵에는 비판적 저널리스트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하이데거 철학의 근저에 흐르고 있던 전체주의적 정신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게재하여 호응을 얻던 차였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학문적 재능을 알아본 아도르노가 조교직을 제안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로 이끌자 그는 비판적 저널리스트의 꿈을 접고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하버마스는 독일 국민들을 권위주의적 전체주의 체제의 하수인으로 만든 모든 정신적인 것들을 일소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구제하는 철학적 투쟁에 평생 헌신한다.

전후 서독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과거의 야만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체제의 지적 선봉대들과 그 후예들이 반공주의적 자유주의를 구실로 권위주의적 정신을 퍼뜨리고자 하는 데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서독 지식 사회가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며 전체주의의 부활을 시도하자, 하버마스는 ‘역사가 논쟁’에 뛰어들어 이들의 반민주주의적 의도를 낱낱이 폭로하는 비판 활동에 힘썼다. 독일 시민들은 하버마스의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과거의 망령에게 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독일의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현 정부는 ‘민주주의를 제거한 자유’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적잖은 사람들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대항하는 비판적 담론이 활기차게 제기되지도 못하는 데다가 시민들 사이에 확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건 한숨과 조롱 그리고 역정뿐이다. 과거의 망령들이 하나둘 무덤에서 나와 활개를 치고, 권위주의 체제가 부활에 성공하는 것 같아 참으로 두렵다. 과한 두려움일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주일 지음,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 –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이게 나라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그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 말이다. 지금은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상반된 의도를 담은 정치 공세의 구호로 쓰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라(폴리스)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바탕이며 그 목적이기도 하다. “시민의 삶을 살거나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살며, 공적인 삶과 관련해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동물”(18쪽)이 인간답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칭하는 ‘나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의로운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일의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 국가와 시민의 관계, 사회와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서두에도 자세히 밝히고 있듯이 플라톤 『국가』의 원제는 ‘Politeia’로 ‘폴리스의 정치체제’라는 뜻이 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윤리관이 담긴 『국가』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인 ‘정의가 살아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을 제시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또 어떻게 타락해 변해갈 수 있는지를 다중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불의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여러 사람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주제로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에서는 총 10권 분량의 『국가』 서설에 해당하는 1권의 대화 내용을 주로 다룬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하며 정의의 실체를 논하는 내용을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자의 세계관을 들고 논의에 난입”한 트라쉬마코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시종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를 묻”고 논박한다.

“자신의 이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부정의(不正義)를 통치자의 기술로 둔갑시킨”(100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지금 부정의한 통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지금 우리의 통치자들은 어떤가?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 위장해 피통치자들을 속이고, 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게 하고 위법한 자는 부정의한 자라고 하여 처벌한다.”(100~101쪽) 이런 모습이 통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피치자는 위정자의 모순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감히 부정의를 저지르지 못하고 비난하며, 정의를 지키는 시늉을 한다. 치자와 피치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가 이 모순을 견디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101~102쪽) “우리 사회가 겪었던 최악의 통치 권력 중 하나였던 제5공화국이 내세웠던 국정지표가 ‘정의사회구현’이었던 것을 보면”(102쪽), 정의라는 이름 아래 모순의 사회가 유지된 역사는 가까운 과거사에서도 목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로운 자의 타율적 결핍은 심해지는 데 반해 부정의한 자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두고 부정의한 자의 ‘능력’이란 말로 칭송될 때 2,500년 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비극적으로 현실화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후반부에는 플라톤이 주장한 정의로운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 철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종합적 견해를 다룬다. 사회 구성원 중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수호자 계층을 지목하여 그들이 함양할 덕목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 제도권 안에서 공적인 삶의 태도 등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자들이 통치하는 철인정치의 가능성을 다채롭게 짚으며 정치체제뿐 아니라 이에 관계하는 인간의 영혼 및 이데아 개념, 문학 등도 거론하는 대목은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 읽어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 『국가』를 읽는 것은 ‘정의에 이르는 길’을 찾는 지적 여정의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이르는 길, 즉 정의로운 나라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연장으로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연재하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의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의 한 대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러운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1


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신간안내]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 지음|EBS BOOKS|2023년 6월 30일) [한철연 소식]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 지음)

 

박은미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2013년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에서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을 제시하며 대중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철학의 지평을 펼쳤던 박은미 회원이 “마음을 괴롭게 하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EBS BOOKS)을 펴냈습니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철학의 일상화 일상의 철학화’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의 단초가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삶과 맞닿은 철학을 추구해온 저자의 글을 통해 마음과 생각의 관계, 철학적 사고의 형성에 대해 좀 더 넓고 깊게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 전공자들도 꼭 한번 읽어볼 책입니다.

아래 책소개와 관련 기사를 안내합니다(링크 참조).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데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좋은 생각’이 필요하다!

  철학과 심리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마음·생각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생각을 검토하여 신뢰해도 좋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학문이고, 심리학은 행동 밑바탕의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우리를 마음의 주인이 되게 하는 데에는 철학과 심리학이 모두 필요하다. 생각은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마음은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바로 철학의 일이다.
  삶의 비바람 속에서 나를 지키고 또 발전시키려면 생각을 검토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따져서 살피지 않고 간단하고 편리한 생각에 안주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궁극적으로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에 닿게 해주는 것, 내 마음의 평안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간편한 생각을 거스르는 힘이다. 이 힘을 길러줄 수 있는 것은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이 머리 아픈 학문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철학은 우리 삶에 필요하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책이다. “좋은 생각을 하라”는 말은 많이 들리고 또 모두가 그 말에 공감하는 바지만 어떻게 하면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없다는 아쉬움으로 박은미는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생각의 습관을 파악하고, 새롭게 철학적 사고 능력을 훈련하며, 일상에 철학을 적용하는 3단계로 생각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준다.
  “마음이란 다름 아닌 마음을 통해 장악되었을 때에만 자유롭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 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금 생각을 잘하고 싶다면,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극복하고 내 마음을 정말 내 마음으로 하고 싶다면 이 책이 필요한 것이다.

목차

1부 개념편: 일상을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들

01 왜 피해자인 나를 탓하지? │ 방어적 귀인
02 내가 이런 건 다 부모 탓이라는 생각 │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분
03 타인을 선의로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 │ 휴리스틱
04 오해와 편견을 부르는 뇌의 에너지 절약 방침 │ 인지 구두쇠
05 길을 막고 물어봐! 누가 그렇게 말하나 │ 제3자 퇴행 논변
06 내 눈에만 안 보이는 내 잘못 │ 인식의 사각지대
07 나조차 속아 넘어가는 나의 거짓말 │ 가짜 일관성
08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해답이 보인다 │ 프레임 바꾸기
부록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 진단 및 처방

2부 심화편: 삶을 변화시키는 생각 훈련

09 인식의 사각지대 줄이기 │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을 점검하자
10 현명한 생각의 출발점 │ 근거에 입각해 생각하자
11 경험의 효과를 두 배로 만드는 생각의 힘 │ 분석적으로 생각하자
12 확증편향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자
13 소망적 사고 극복하기 │ 내 생각을 움직이는 요인을 알아내자
14 후회와 불행을 줄이는 생각법 │ 교정적 인식을 하자
15 논리와 심리의 사이에서 마음의 가닥 잡기 │ 비합리에 딸려 가지 말고 균형을 잡자
16 무의식 바라보기 │ 나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자
17 다름을 견디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을 가능성을 생각하자
18 심리학 책을 읽고 감동해도 그대로 실행하기 어려운 이유 │ 삶의 근본적인 태도를 점검하라
19 내 마음을 정말 내 마음으로 하고 싶다면 │ 관찰적 자아를 활성화하자
부록 나 자신을 알기 위한 질문법

3부 실전편: 일상에 철학 적용하기

Q 1 팀장인 제 말을 꼬아서 듣는 팀원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편안한 소통이 될까요?
Q 2 저도 꼰대가 될 수밖에 없을까요?
Q 3 제 직장 동료가 제가 불편하다는데,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Q 4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때문에 힘이 듭니다
Q 5 직장의 대표가 사소한 것까지 간섭하면서 “이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냐?”라고 해요
Q 6 직장 동료가 사람들을 너무 무시해서 괴로워요
Q 7 회사에서 일일이 칭찬받고 싶어 하는 저, 프로가 아닌 걸까요?
Q 8 번아웃이 온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Q 9 어떤 생각에 빠지면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Q 10 회피하는 성향이 있어서 평소에 대화가 어렵고 불필요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Q 11 감정일기를 쓰는 것이 생각을 잘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Q 12 아버지가 지나친 능력주의자입니다
부록 삶을 위한 철학적 조언

출처: yes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19810971

 

♦ 책 관련 기사 바로가기 모음 ♦

마음을 아프게 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기(채널예스 기사) 『아주 일상적인 철학』 박은미 저자 인터뷰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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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은미는? 철학박사·철학커뮤니케이터.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의 문턱을 낮추는 일을 통해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겠다는 포부로 철학커뮤니케이터를 자처하고 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일상을 위한 철학’ 채널의 콘텐츠 크리에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 삶과 닿아 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저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를 출간한 이후 ‘인간관계에 대해 철학하기’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삶을 견디고 있는 당신을 위한 철학’ 등의 강의로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다.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EBS Books),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소울메이트)를 단독으로 썼고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 상담인가』 등을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썼으며 『철학Ⅱ: 실존 조명』(공역),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50인의 철학자』 등을 번역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441c-444a]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정의를 마무리하면서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τὰ αὐτὰ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ἴσα τὸν ἀριθμόν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그가 말하는 개인의 정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가 지혜로웠던 방식으로 나라를 지혜롭게 했던 것에 의해서, 개인ἰδιώτης 역시 지혜롭다σοφός.(441c) 그리고 개개인을 용기 있게 하는 그것에 의해서, 그리고 개개인이 용기 있는 방식으로, 나라 역시 용기 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개인 또한 나라가 정의로웠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롭다.(441d)

2) 나라의 세 부류들 각 부류가 자기 것을 함으로써 나라가 정의롭듯이 개인도 ‘자기 안에 있는 것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되면’ἕκαστον τῶν ἐν αὐτῷ πράττῃ, 그런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자 자신의 것을 하는 사람이다.(441d) 그러므로 이성 부분λογιστικόν이 다스리고 기개 부분θυμοειδής은 그 부분에 순종하고 그것의 동맹군σύμμαχος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ἐπιθυμητικόν.(441e)

3)우리가 말했던 대로(411e-412a)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ῆ의 혼합κρᾶσις이 그것들을 조화롭게σύμφωνος 만든다. 그 한 부분은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배움으로 고조시키며ἐπιτείνουσα 키우고, 다른 하나는 화음ἁρμονίᾳ과 장단ῥυθμός으로 풀어주고ἀνιεῖσα 달래서παραμυθουμένη 길들인다ἡμεροῦσα.(441e-442a)

4) 이성적 부분은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 부분ἐπιθυμητικόν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자신의 것을 하지 않고 부적절하게도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다스리고καταδουλώσα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는 일ἀνάτρεψις이 없도록 감시한다τηρήσετον.(442a)

5) 이성 부분은 숙고를 하고 기개 부분은 다스리는 부분을 따르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부분μέρος 때문이다(442b).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한다.(442c)

6)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ὅλῳ τῷ κοινῷ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7)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φιλίᾳ와 화합 συμφωνίᾳ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두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것을 거슬러 내분στάσις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8) 개인이 정의로운 것도 나라가 정의로운 것과 같은 방식이다.(442d) 아래와 같은 일상의 사례들을 적용해보더라도 그렇다. 나라와 본성이 유사하게 태어나고 유사하도록 양육된 사람은 재화를 떼어먹거나 신전 약탈ἱεροσυλία이나 도둑질κλοπή, 또는 사적으로는ἰδίᾳ 동료들을 공적으로는δημοσίᾳ 나라를 배신하는 것 같은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442e-a) 게다가 그것은 간통μοιχεία이나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442a)

9)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의 안에 있는 부분들 각각이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음과 관련하여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이와 같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만들어내는 힘δύναμις이다. (443b) 이로써 정의의 어떤 단초ἀρχή와 원형τύπος에 발을 들여 놓은 것ἐμβεβηκέναι 같다는 꿈(433a)이 완전히 이루어졌다κινδυνεύομεν.

10) 그런데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εἴδωλόν이었다. 본성상 신발 만드는 것이 적성인 사람은 신발 만드는 일σκυτοτομική을 목수인 자는 목수 일τεκτονικἡ을 하는 것 그런 어떤 것이 정의이기는 하지만, 사실 정의는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된 것πρᾶξις τῶν αὑτοῦ περὶ τὴν ἐντός이다.(443c-d)

11) 이처럼 개인의 정의는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θέμενον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ἄρξαντα 조율하여συναρμόσαντα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νεάτη, 상현음ὑπάτη, 중현음μέση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ἁρμονία를 이루는 것이다.(443c)

12) 그리고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ἄλλα ἄττα μεταξὺ이 있더라도, 정의로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한 데 묶고 여럿으로부터 전적으로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443e)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어떤 행동을 할 때이든 이 모든 경우에 이 상태를 보존하고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다.(443e) 이 행위를 관장하는ἐπιστατοῦσαν 앎ἐπιστήμη이 지혜σοφία인 반면, 이 상태를 그때그때 와해λύη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δόξα은 무지ἀμαθία이다.(443e-444a) 이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나라,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ηὑρηκέναι.(44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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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1)과 2)(441c-442a)와 앞서의 논의(434c-441c)에 한정해서 나라의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에 상응하는 개인 영혼의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성격을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이성적 부분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한다.(439c-d)

영혼을 다스린다.(441e) 숙고를 한다.(442b) 욕구 부분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지 못하도록 감시한다.(442a)

2) 기개적 부분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낸다.(440b)

이성 부분에 순종하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442b)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에 대한 이성의 지시를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전한다.(442c)

3) 욕구적 부분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하는 것, 일종의 만족과 쾌락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다.(439c-d)

욕구들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 즉 마실 것에 대한 욕구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이다.(437d-e)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른다.(442a)

* 나라에 있는 덕들과 동일한 덕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언급(441c)과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덕을 갖고 있다는 이곳 1)과 2)의 언급만(441c-442a)을 토대로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적 관계를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a) 나라의 덕목과 상응하는 개인의 덕목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가 되면 그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영혼을 다스리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441d)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가 되면 그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이 이성적 부분을 보조하고 순종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절제로써 믿음을 같이 하면 절제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절제로써 이성 부분을 믿고 따르면 그 사람들은 다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통치자의 지배에 따라 각자 자신의 것, 자신에 속한 것을 할 때 정의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각 자신의 것을 할 때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441e)

  1. b) 지혜로운 개인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c). 용기 있는 개인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기 때문이다.(442c-d)

  1. d) 절제 있는 절제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와 화합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 믿음을 거슬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1. e) 정의로운 개인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이다. 정의는 그렇게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443c-d)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조율하여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443d)

  1. f) 정의로운 행위

정의로운 행위들의 원인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나라의 계층 내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만드는 힘dynamis이다.(443b)

어떤 행동을 할 때 영혼의 절제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며 그 행위를 관장하는 앎이 지혜인 반면 이 상태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은 무지이다.(444a)

* 위의 글 3)(441e-442a)에서 ‘그 한 부분’과 ‘다른 하나’는 각기 시가와 신체단련을 가리키는데 실제 이어지는 그 역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시가의 역할이라는 지적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신체 단련도 결국 ‘영혼을 위해 있는 것’(410c)이고 ‘시가와 신체 단련의 혼합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된 상태’가 ‘가장 시가에 능한’ 상태(412a)임을 고려하면 신체 단련도 마치 율동처럼 화음과 장단이라는 시가적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4)는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질 경우 나머지 부분들을 노예로 삼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욕구 부분은 능동적으로 지배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성 부분이 병이 들었어도 욕구 부분은 이성 부분에 따른다. 다만 그때 이성 부분은 병이 든 상태이므로 욕구 부분을 제어하는 쪽이 아니라 반대로 그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상태는 곧 이어서(444b) 언급되듯이 부정의한 영혼의 상태이다.

* 위의 글 8)은 당대 아테네에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의 대표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부모 봉양 등 동양의 전통 윤리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 위의 글 9) : 플라톤에서 정의를 비롯한 지혜, 용기, 절제 등 제반 덕들은 앎인 동시에 실천을 담보하는 힘 즉 실행 능력이다.

* 위의 글 10)에서 플라톤은 외적인 정의로운 행위들을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으로 언급한다. 이 영상이 의미하는 것은 통상 플라톤의 보편적인 정의(定義)가 통상 구체적 사례들이 아니라 본질 차원에서 규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상과 그림자라는 관계에서 그림자 내지 구체적 사례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언급의 초점은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라기보다는 개인의 정의를 외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규정하지 않고 영혼의 내적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로 보자면 전자 즉 외적 행위는 정의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후자 즉 영혼의 내적 상태가 정의의 실상이라 하겠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 윤리학의 고유성이 드러난다. 개인에게 있어 정의와 선은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면의 영혼 상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플라톤의 입장은 도덕 심리학의 혁명적 선구이자 오늘날 덕의 윤리학의 뿌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11)에서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 : 그리스 음악의 화음체계에서 음계의 구성은 4개음으로 이루어져 완전4도가 되는 테트라코드(tetrqachord) 2개가 이어져 만들어진다. 이중 가운데 위치한 음을 중현음(mesē), 가장 낮은 음을 하현음(hypatē), 가장 높은 음을 상현음(neatē 또는 nētē)이라고 불렀다.

* 위의 글 12)에서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이 있더라도’ : 세 가지 기본음을 나라와 영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경우, 이 표현은 나라와 개인 영혼의 세 계층들 사이에도 어떤 다른 계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기본음은 화음의 기본음이고 하나의 음악에 그 밖의 음들도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정의는 어떠한 다양성의 경우라도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 위의 글 12)에서 앎epistēmē과 믿음doxa, 지혜sophia와 무지amathia가 대비되고 있는데 특히 <국가>에서 앎과 믿음이 동시에 대비되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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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플라톤은 덕들과 관련하여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숫자로 유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언급은 앞서 언급한 내용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명 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우선 앞서 나라의 덕을 논하던 부분에서는(427d-445c) 분명 지혜의 덕은 통치자의 고유한 덕으로, 용기의 덕은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 절제의 덕은 모든 계층 공통의 덕으로 그리고 그러한 덕들을 서로 조화롭게 만드는 덕은 정의로 각기 언급되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통치자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 모두를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의 덕을,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갖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곳 개인의 덕을 논하는 부분에 와서는 나라가 갖고 있는 덕들과 동일한 것이 같은 수로 개인에게도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개인 역시 나라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4개 덕을 갖고 있듯이 개인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4개 덕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그것은 앞서 통치자의 덕들에 대한 논의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발생적인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즉, 플라톤은 통치자의 출현에 맞추어 통치자의 덕을 언급하면서 논의 순서에서 통치자가 아직 철학자라는 점이 살펴지기 이전임을 고려하여 일단 그렇게 한정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라의 부분들과 개인 영혼의 부분들이 어떻게 유비적으로 상응하는지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일단 나라의 세 계층과 영혼의 세 부분이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 부분, 수호자 계층은 기개 부분, 생산자 계층은 욕구 부분에 서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상응한다고 해서 통치자 계층의 영혼은 이성 부분만 있고, 수호자 계층의 영혼은 기개 부분만 있으며, 생산자 계층의 영혼은 욕구 부분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 자신 모든 사람의 영혼은 누구나 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영혼 3분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그 누구든 그들의 영혼은 모두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똑같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는 실제로 어떤 관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일까?

* 설명을 위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플라톤에 따르면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을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 내부의 영혼들이 그들 고유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도록 최상의 조건으로 조직화되었다는 것 즉 서로 최상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통치자의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이성 부분의 주도하에 통치에 관한 지혜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고, 수호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수호에 관한 용기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며, 생산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자 욕구와 소질에 맞는 생산 기술 능력이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는 각각 가장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이루되 통치자는 이성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수호자는 기개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생산자는 생산력으로서 욕구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나머지 부분들과 조화를 구현하면서 각기 정의로운 개인이 되고 그러한 개인들이 정의로운 나라의 정의로운 시민이 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의 상태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내적 능력 즉 덕을 최대한 발휘하여 구현한 상태라면 그들 계층 각각은 그리고 그들의 내적 영혼의 부분들 각각은 공히 지혜와 용기와 절제 그리고 정의의 덕을 구유한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영혼을 간직한 개인 역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라는 4개 덕을 갖춘 개인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서로 간에 차이가 있다면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다스리는 지혜의 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고, 수호자는 통치자를 도와 나라를 수호하는 용기의 덕이 통치자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사람이며, 생산자는 통치자와 수호자와 더불어 공히 뛰어난 절제의 덕을 바탕으로 최소한 각자의 기술 영역에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모두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을 갖추고 있고 또 모두가 정의의 덕을 통해 각자의 일을 최선으로 수행하면서 계층 간 영혼의 부분들 간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과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최고의 클래식 성악가와 트로트 가수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영역에서 최상의 조화로운 음악을 구현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음과 소리의 성격 내지 그것들의 조화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 이렇듯 정의로운 나라의 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역할 수행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두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아가 각자 나름대로 최상의 영혼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행복하며 그 행복감의 크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현된 최상의 조화인 한, 서로의 역할에 대한 질투나 선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랏일을 기준해서 보면 그들의 역할이 갖는 중요도의 차이만큼 그들의 조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 질 수 있다. 이를테면 통치자이자 철학자의 경우 오랜 동안의 철학 교육을 이수해온 데다가 나랏일에서 가장 중차대하다고 여겨지는 통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영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동반한 가장 고매하고 품격 있는 수준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의 앎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정의로운 나라는 분업에 기초한 협동적 공동체로서, 통치자의 앎뿐만이 아니라 수호자, 생산자 모두의 앎이 최소한 각기 자기 기술 영역에서 만큼은 최고의 앎의 상태로 조화롭게 결합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인간 본성의 다양성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른 적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인간 본성론과 관련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랏일과 관련한 역할을 기준으로 크게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구분한 것도 그러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이 그러하다 해도 생산자 계층을 제외한 통치자, 수호자 계층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을 고려하면, 본성을 세 그룹 정도로 구분하는 것만으로 과연 자신이 내세우는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까 의심이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세 그룹 중 생산자 계층이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이 정작 인간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적성과 소질들을 거론할 때 인용하는 사례들을 보면 통치 기술과 전투 기술뿐만이 아니라 농사기술, 제화술, 의술, 조타술, 목공술 등 생산자들이 갖는 다종다양한 기술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각기 다른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사회 계층을 크게 세 계층으로 구분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세부적으로는 이상 국가 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들 또한 내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플라톤은 생산자들 각자의 실질적인 욕망 또한 비록 그들 욕망이 대부분 돈으로 충족된다.(442a)는 점에서 돈을 좋아 하는 부류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적 욕구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종다양한 적성들과 소질들 즉 각기 다른 다양한 욕망들을 갖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 어린 시절 우리들 모두 장래 희망하는 직업이 다종다양하게 서로 달랐다가 성장하면서 당대의 외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거의가 비슷한 직군들을 선망하게 됨을 되돌아보면 플라톤의 견해가 오히려 자연적 본성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들의 이와 같은 다양하고 고유한 욕망에 기초하여 분업적 사회 공동체에서 각자 그에 걸맞는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 각자의 적성과 소질에 합당한 양육과 교육을 설계하고 그것의 이행을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는 말 그대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이상적인 나라인 것이다.

 

[444a-445d]

* 소크라테스는 이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에 대한 논의의 대장정을 모두 마무리 한다. 그러나 애초 논의 목적으로 상정된 부정의한 나라 및 개인들과 비교해보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부정의ἀδικία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살펴보려 한다.(444a) 이에 관해 이곳에서 그가 펼친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부정의란 이 세 부분들의 내분στασις이며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이고, 남의 일에 대한 간섭ἀλλοτριοπραγμοσύνη이며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ἐπανάστασις이다.(444b)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δουλεύειν이 적합한 그런 성향φύσις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이다. 부정의는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ταραχή과 방황πλάνη이며 방종ἀκολασία이고 비겁δειλ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 즉 일체의 악덕κακία이다.(444b)

2) 그렇다면 부정의한 행위와 정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도 명확하다. 이것들이 영혼 안에서 하는 작용은 건강한 것들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이 몸 안에서 하는 작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건강한 것들은 건강ὑγίεια을 생기게 하고,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 역시 정의를 생기게 하고, 부정의한 일은 하는 것은 부정의를 생기게 한다.(444c)

3) 건강을 생기게 함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도록 확립하는 것인 반면, 병을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확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의를 생기게 함은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을 본성에 맞게κατὰ φύσιν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게 확립하는 것인 반면, 부정의를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παρὰ φύσιν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445d)

4) 덕ἀρετὴ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아름다움이며 좋은 상태’ἀρετὴ ὑγίειά τέ τις ἂν εἴη καὶκάλλος καὶ εὐεξία ψυχῆς인 반면, ‘악덕은 질병이며 추함이고 허약함’κακία νόσος τε καὶ αἶσχος καὶ ἀσθένεια이다. 아름다운 활동τὰ καλ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은 또한 덕ἀρετῆ의 획득κτῆσις으로 이끌고 추한 활동τὰ αἰσχρὰ은 악덕 κακία의 획득으로 이끈다.(444e)

5)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의롭게 행하는 것, 아름다운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λυσιτελεῖ 아니면 부정의한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445a)

6) 글라우콘은 그 두 가지 각각이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그런 것들임이 드러난 마당에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더라도 우리가 여기까지 왔으니 기운을 잃지 말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445b)

7) 덕은 한 가지ἓν 유형이지만 악덕은 무한하며 ἄπειρα 그중 기억해 둘 만한 것들(악덕)은 네 유형이다.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몇 종류τρόπος이든 영혼의 종류도 그만큼이 있다.(445c) 이에 따라 정치체제가 다섯πέντε 종류이듯, 영혼도 다섯 종류이다.(445d)”

8)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정치체제는 한 종류이지만 이름은 둘이 붙을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들 사이에 특출한 사람이 한 사람이면 왕정βασιλεία이라 부르고 여러 사람인 경우에는 최선자(最善者)정체ἀριστοκρατία라 부른다. 이것은 모두 한 유형ἓν εἶδος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온 양육τροφῇ과 교육τροφῇ을 실행하는 경우에는 나라의 중요한 법을 흔드는 일은 없다.(44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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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의 글 1)에서 ‘부정의란 ..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 : 부정의에 대한 이곳에서의 언급은 앞서 (442a) ‘욕구 부분이 다른 부분들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과 하나로 연관된다. 이곳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상태를 ‘종노릇하기에 적합한 그런 성향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내용상 이성이 욕구의 도구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행위와 동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쨌거나 이성이다. 인간 행위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욕구의 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병이 들어 본래 모습을 상실하고 스스로 잘못된 방향인지도 모른 채 아니 그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 양 착각하고 능동적으로 욕구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한 것이다. 욕구의 측면에서 보면 욕구에 이성이 지배된 것으로 보이지만 애당초 욕구는 지배라는 의도적 목적을 가질 수 없는 그 자체로 맹목적인 힘이다. 플라톤에게서 구조상 영혼과 동일한 나라의 경우에도 반란은 생산자 계층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 계층을 이용한 선동적 정치가들 내지 타락한 통치계층에 의해 저질러진다. 요컨대 부정의는 이렇게 이성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든 이성이 능동적으로 초래하는 결과들 즉,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과 방황이며 방종이고 비겁이며 무지, 즉 일체의 악덕이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재현되고 있다. 이성이 폭압적 권력을 비판하기는커녕 반대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능동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이다. 일례로 나치 권력에 빌붙어 플라톤의 이름으로 나치즘을 극력 정당화한 프리데만(H. Friedemann)과 싱게르(K, Singer)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게오르그(S. Georg) 학파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플라톤을 폭압적 전체주의의 이론적 배후로 낙인찍히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이정호, ‘플라톤의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참고)

* 위의 글 3), 4)에서 플라톤은 덕으로서 정의를 자연적 본성에 따른 영혼의 건강이자 좋은 상태로, 악덕으로서 부정의는 자연적 본성에 거스르는 질병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은 제2권 서두에서(357b-c) ‘좋은 것’을 아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i) 그 자체로 좋은 것 ii) 그 자체로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에서도 좋은 것 iii)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번째 것의 대표적인 경우로 건강을 들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를 ‘건강’과 ‘아름다움’ 이자 ‘좋은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정의를 그 자체 때문에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즉 완전하고 영원한 조화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에 뿌리를 둔 객관적 원리이자 본성적 선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몸이 건강하면 편하고 몸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 직각적으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것을 안다. 플라톤이 보기에 부정의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질병에 걸리거나 몸이 다쳤음에도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 자체로 터무니도 없고 가당치도 않은 것, 즉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한, 어떤 경우에서든 영혼의 조화 즉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건강이 그러하듯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견해에 의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규정될 수 있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니다. 제2권 서두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논의 단계를 상정하였다. 우선 그것을 보다 잘 살핀다는 명분으로 대문자 비유를 통해 사람을 나라로 확대시켰고 그런 연후 정의로운 나라를 세워 그 나라가 어떤 덕들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논의 목적대로 나라에 대한 논의에서 개인 영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개인에서도 나라와 같이 정의가 성립하고 나라의 덕과 동일한 덕이 개인의 영혼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논증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과 비교하여 그 중 어떤 나라와 개인이 그 자체로 좋고 결과에서도 이득이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기본적인 결론을 내놓은 상태일지라도 글라우콘에게 그 둘을 비교하는 논의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이미 지금까지의 논의만 보더라도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다 드러난 마당에 그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그러한 논의를 이어가려한다. 그리고 그 첫 단계로 정의로운 사람을 살필 때 사람을 나라로 확대해서 고찰했듯이 이곳에서도 부정의한 사람을 살핌에 앞서 우선 부정의한 나라 즉 부정의한 정치체제들부터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와 상반된 네 가지 유형의 부정의한 정치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착수하게 된다.

* 위의 글 8), 9)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의 종류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로서 왕정 내지 최선자 정체를 포함하여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다섯 가지 정치체제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여기서 이른바 왕정과 최선자 정체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강해(44)에서 플라톤의 철인왕정이 1인왕의 지배체제인가 다수 왕들에 대한 지배체제인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철인왕의 숫자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핵심은 그 왕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몇 사람이건 어떤 양육과 교육을 받았는가 즉 그들이 과연 진정한 철학자인가 아닌 가에 있다. 다만 지난 번 강해에서 플라톤의 철인왕 정치체제를 일인 왕정이 아니라 실제로는 다수 철인왕의 정치체제 즉 최선자 정체라고 집중해서 강조한 것은 오늘날 플라톤의 철인왕정에 대한 인식이 이른바 일인 독재체제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설사 통치자의 수를 문제 삼는다고 해도 <국가>나 <법률> 모두 통치 행위 주체를 표현할 경우 하나같이 복수의 통치자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은 통치자의 수가 아니라 그가 철학자인가 아닌가 이다. <정치가>에서 한 사람의 철인왕정을 최상의 정치체제로 설정한 것 역시 정치가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통치자의 숫자를 정치체제 분류의 한 기준으로 삼은데 따라 제시된 것일 뿐 그곳에서도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올바른 정치가 즉 왕은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 최선자 정체의 그리스 원어 ‘aristokratia’는 보통 ‘귀족정’을 나타낸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철인왕정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정치체제를 내세우면서도 기존의 정치체제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자신의 정치체제가 일종의 ‘복수의 뛰어난 귀족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체제’에 가깝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aristokratia’는 플라톤도 알고 있었을 통상의 귀족정과는 전혀 다른 그가 고유하게 제창한 정체제제 즉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치체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통상의 귀족정과 구분하고 플라톤의 취지도 살려 그것을 원어의 말뜻 그대로 ‘최선자 정체’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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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국가> 제4권의 논의가 끝을 맺는다. 이른바 이상 국가의 기본적인 얼개가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분량 면에서도 <국가>가 크게 다섯 부분 즉 제1권, 제2권에서 제4권, 제5권에서 제7권, 제8권에서 9권, 제10권으로 구분된다면 전체 내용 중 5분의 2를 살핀 셈이다. 그런데 제4권의 끝부분이 보여주듯이 우리 모두 제5권에서는 당연히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질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5,6,7권에서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형식만 일탈일 뿐 실제로는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문학적 플롯에 따라 이상국가론을 철학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뒷받침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통상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난해한 철학적 주제로 평가되는 좋음의 이데아나 변증술의 문제를 비롯해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의 철학적 기초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곳이다. 더욱 힘을 내서 새로운 기운으로 제5권의 논의를 이어가기로 하자. – 제4권 끝-

* 다음 주제 :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실현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후 강해는 대략 한 달 간격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1. 슈티르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맑스를 경유하여 알려진 철학자다. 바쿠닌, 바우어, 푸르동이 그러했듯이 슈티르너란 철학자는 맑스의 조롱과 비판 ‘덕분’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슈티르너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확인하기에 앞서, 혹은 그럴 필요도 없이 그의 이름은 확고한 ‘악명’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악명은 구체적으로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다.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신랄한 비판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맑스의 주저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한 이론, 사상, 실천적 노선 또는 그 주창자를 향한 ‘비판서’들이다.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헤겔법철학비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자본』도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부제를 달고 있을 뿐 아니라, 속류경제학 및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전투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비판은 『독일이데올로기』(이병창 번역)의 슈티르너 비판이다. 단순히 비판을 위해 한 사람에게 할애한 원고량도 놀랍지만, 글쓰기의 스타일도 전무후무하다. 우선, 늘 그렇듯 날카로운 비판이 전개되긴 하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문장 및 구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나아가, 저술 전체가 마치 ‘악플’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르너를 조롱하며 심지어 그의 연인까지 들먹일 정도다. 어쨌든, 국역본 기준으로 700여쪽에 달하는 이 장대한 비아냥거림 덕분에 슈티르너는 악명이나마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맑스의 공이 크다고 해야 할까. 궁금한 것은 이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이 왜 하필 슈티르너를 향했는가 하는 점이다. 맑스의 인성부터 『독일이데올로기』 저술시점이 지닌 역사적·개인사적 긴박함까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맑스의 비판, 그리고 그 강도는 논적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과도한 비판은 어쩌면 슈티르너의 사유가 지닌 영향력 또는 잠재력을 맑스가 간파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2.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 첫머리부터 이미 가장 적극적인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저 위대한 자기중심적 사람을 섬기지 말고,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 자체가 되라고 제안한다.” 신과 신성, 위대한 인류애, 왕 또는 국가가 끊임 없이 설득해 온 자기 희생, 그리고 이 희생의 열매인 다른 이들의 안녕 및 행복이란 그가 보기에 명백한 기만이다. 진정 신과 인류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드러내는 타협 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신은 오로지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인 나”만을 자기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 세속의 ‘선량한 도리’란 신에 근거하든 인류에 근거하든 ‘나’에겐 부질없으니, 진리와 선, 정의와 자유 따위는 신이나 인류의 관심사일 따름이다. 나는 ‘나의 것’, 나만의 것, 따라서 ‘유일한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에게, 나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맑스가 말한 해방이 ‘현실’적인 것인 한, ‘이념’, ‘가치’, 이를 체화한 제도 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통한 ‘통제’ 역시 불가피하다. 슈티르너는 신, 철학, 과학, 혁명 그 어떤 미명을 내걸든 ‘나’를 강박하는 외부를 완전히 거부하며, ‘나’의 유일무이함, ‘나’의 근원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순전히 ‘나’의 권역에 속하는 문제다. 해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또 혁명이 모든 억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실, 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의 현재, 현대인의 삶 등을 되돌아 보면 슈티르너의 이같은 목소리는 지금도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나아가 슈티르너의 사유는 헤겔이나 낭만주의의 기풍이 역력하긴 하지만, 영향력 있는 여러 현대 사상가들과 유사한 궤적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외적 강제와 그로 인한 ‘나’의 침몰을 치열하게 사유했기에 어떤 점에선 푸코의 권력 이론에 맞닿고, 소크라테스 이후 인류가 고대의 생기를 상실한 채 ‘정신’과 ‘진리’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대한 니체의 사유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맑스는 아마도 슈티르너의 이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기에, 그리고 그의 사유가 혁명의 길을 흐트릴 정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구석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의 목소리는 엇나가는 이들에 대한 규제를 함축하지만, 길끝의 영광을 선취하는 이는 도정의 고난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훨씬 달콤하다. 아마도 슈티르너는 후자였고, 맑스는 압도적으로 매혹적인 후자의 힘을 간파했던 전자였을 듯하다. 맑스의 일갈에 묻힌 철학자를 우리말로 꺼내 21세기 한국의 철학도들에게 소개한 박종성의 노고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동아대 명예교수)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연인 가네코후미코가 감옥(법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가네코후미코가 들고 있는 책이 있다. 아마 슈트리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아닐까 한다. 1844년 작성된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국내에 무려 180년 만에 박종성 교수에 의해 번역(2023)되었다. 원문 자체에 풍자가 섞여 있어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박 교수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극정성으로 마침내 번역되었느니, 감개가 무량하다.

법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자)

필자는 이 책과 악연이 있다. 이 책이 발간되자, 1846-47년에 걸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글을 풍자하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작성했다. 이 책은 아마도 슈티르너의 원본보다 부피가 더 큰 약 500페이지에 걸친 비판서인데, 필자는 2019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르크스 엥겔스가 토막토막 동시에 풍자를 섞어서 인용한 슈티르너의 글을 읽었는데, 필자는 풍자한 슈티르너의 원본을 알 수 없어서 마르크스 엥겔스의 글 가운데 어느 만큼이 풍자이고 어느 만큼이 본래 슈티르너의 글인지 알 수 없어, 번역이 말 그대로 고통스러웠다. 필자는 속으로 정말 많이 욕을 했다. 이 욕은 원문을 쓴 슈티르너와 그를 풍자한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필자의 무능력에 대한 동시적인 욕이었다.

슈티르너의 원본이 먼저 번역되었더라면 필자도 고통어린 수고를 덜었을 것이고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뒤늦게야 번역한 박종성 교수에게 약간 원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독자는 원본과 비교하여 마르크스 엥겔스가 비판한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니, 번역자 박종성 교수에게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슈티르너의 책이 번역된 마당에 슈티르너가 마르크스 엥겔스에 미친 영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마르크스 엥겔스를 이해하는 데서는 물론하고, 슈티르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간단하게 이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 그대로 공역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작성하면 함께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교정하면서 전개되었다. 슈티르너 부분은 먼저 마르크스가 작성하고 엥겔스가 교정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실 슈티르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편차가 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슈티르너와 엥겔스는 베를린 히펠 바(맥주집인지 와인바인지 모호)에서 열리는 자유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으나 마르크스는 이 모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이런 거부감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슈티르너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평지를 보면, 슈티르너의 책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엥겔스는 처음 슈티르너의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긍정적인 점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마르크스에게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마르크스는 아마도(?)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이 브뤼셀의 아지트에서 함께 히히덕거리며(마르크스 부인 예니의 표현을 따르면) 토론한 결과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듯이 철저한 풍자인데, 마르크스 엥겔스는 슈티르너를 성 막스라고 하거나 돈키호테의 시종인 산초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뜻에 굴복한 것인지, 엥겔스 역시 처음부터 그런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기 힘들다.

아무튼 슈티르너의 책은 이렇게 풍자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엥겔스가 말년에 언급한 글에서 드러난다. 알다시피, 독일 이데올로기는 모제스 헤스가 출판을 위한 협조를 거부한 결과 출판되지 않았다. 나중에 엥겔스의 말(『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서문에서)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를 쥐들의 비판에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엥겔스는 이 수고를 작성하는 가운데 그들은 진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그 진짜 목적은 곧 그들의 사상인 역사적 유물론의 탄생이었다.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슈티르너의 대담하고도 확고한 비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포이에르바흐식의 유적 본질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슈티르너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빛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이 지닌 혁명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의 아포리아로 알려진 두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홉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즉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절대왕권을 정당화한다는 문제다. 또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교환 관계를 통해서 여전히 불평등이 불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르크스는 개인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했는데, 유일자의 절대적 자유와 그의 힘에 의한 소유를 타당으로 하는 슈티르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만일 슈티르너식의 해결책이 있다면 굳이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사에서 슈티르너의 영향은 광범위하며, 20세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상에 끼친 공적은 말할 것도 없이 잘 알려져 왔다. 특히 20세기 말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데리다나 들뢰즈의 평가도 흥미롭지만, 평자로서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니체에 대한 슈티르너의 영향이라는 문제이다. 19세기 말에는 슈티르너의 영향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오히려 그 영향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문제는 사실 니체의 사상적 발전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니체 연구자의 관심에 속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슈티르너의 유일자나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유일자의 자유, 힘이라는 개념을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개념과 비교되는데, 양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니체의 경우 권력의지는 자기를 초월하는 힘, 즉 위버멘쉬의 힘이다. 그러나 유일자의 힘이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힘이니,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닐까?

문제야 어떻든 간에 사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슈티르너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이 일종의 풍자인지 아니면 솔직한 자기주장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풍자로 말한 것을 그의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독이 될 텐데, 마침 박종성 교수가 이 책을 번역했으니, 슈티르너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한번 박종성 교수의 노고를 치하한다. 벤야민은 책은 자신의 삶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번역된 책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박은미 지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유현상(한철연 회원)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를 읽고

 

철학자들의 언어는 어렵다.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누구나 아는 말로 표현해도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선택하는 과정은 철학자들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유를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고 인정받았던 하이데거조차도 자신의 사유를 표현할 언어의 한계를 느껴 한동안 집필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곤혹감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 철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읽는 것만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마음이 가지 않는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 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쇼펜하우어와 그의 대표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서 소개하기가 쉽지 않은 텍스트 임에도 핵심적인 이해를돕기에는 적절한 설명을 담고 있다. 핵심어인 ‘표상’ 개념에 대해서는 언어 분석적 접근을 통해,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는 칸트의 ‘물자체’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쇼펜하우어의 세계 인식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의 세계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덧붙여서 ‘의지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세계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의지가 객관세계의 존재근거라면 표상은 인식 주관의 인식 내용의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는 세계 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단지 세계 인식에 관한 문제의식만을 담고 있지 않음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나의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인식의 중요성, 즉 의지에 근거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대상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통스러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세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적 관점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역동적 세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논리는 어쩌면 일종의 ‘죽어 있는 사고의 형식’일 수 있다. 헤겔은 이런 난점을 극복하고자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변증법적 논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 역시 법칙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심리학은 세계 못지않은 역동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지적 도전이다. 그 도전이 인간의 구체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진전을 이루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 역시 규칙성과 논리로 인간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생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구명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타난 반합리주의 철학이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철학의 주류적 흐름에 생(生)을 역동적인 모습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 지평을 연 철학임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서평자 유현상: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