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예술의 화해(1)-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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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화해(1)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1)

삶과 예술은 여러 면에서 대립한다. 삶은 현실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은 현실 너머에 있는 영원을 향한다. 삶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면 충족될 수 없지만 예술은 가상적인 수단을 통해 목적에 이른다. 삶은 지루한 일상을 통해 강건함을 유지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 속에 생명을 갉아 먹는다.

 

삶과 예술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지금껏 많은 철학적 사유가 등장했으며 예술가는 이 문제를 자신의 방법으로 풀어나가려 했다. 치열하게 이 문제와 맞싸웠던 예술가 중 대표자는 토마스 만일 것이다. 그의 청년기, 노벨상 수상 작품인 붓덴부르크 일가는 상인으로부터 시작한 독일 자본가의 4대에 걸친 성공과 몰락을 그리고 있다.

 

4대의 흥망에서 결정적 전환점은 붓덴부르크 가문의 3대 수장 토마스이다. 왕성한 자본가이었고 마침내 정치적 권력도 획득한 아버지와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 그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예술에 심취했으나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가 남긴 기업을 이어받는다. 그는 투철한 책임감으로 기업을 발전시키지만, 그의 내면에는 예술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그는 병약한 예술가의 모습을 가진 여성 게르다와 결혼한다. 이미 토마스 시대 말기에 그의 기업은 몰락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4대 하노는 마침내 음악에 대한 동경에 빠져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기업이 몰락하는 것을 방관하고 만다.

 

2)

천명관의 소설 고래도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로 삶과 예술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는 토마스 만과는 삶과 예술의 대립보다는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그려낸다. 이 소설 역시 3대에 걸쳐 전개되는데, 주요 무대는 평대라는 산골이다. 이곳은 기차가 지나가는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으나, 주인공 금복이 세운 벽돌공장 때문에 개발 붐이 일어났던 곳이다.

 

작가는 3대에 걸친 인간의 운명을 그려내기 위해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화자가 되어, 마치 초기 영화의 변사처럼 주인공의 운명을 슬퍼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해설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작가는 서사시적 특징을 지닌 소설 속에 다양한 장르로부터 빌어온 장치를 끌어넣는다. 그는 환상과 캐리커처, 풍자를 비벼 주인공의 운명을 조탁해 낸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어쩌면 모두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그들은 각기 내면 속에 자기와 대립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몰락하고 말며, 전체적으로 모든 인물은 자가당착적이다.

 

주인공 1대가 노파라면 2대는 금복이다. 마지막 3대가 춘희이다. 이들 사이에는 엄격하게 핏줄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금복은 노파가 운영했던 국밥 집을 이어받았는데 폭풍우가 몰아 지던 날 노파가 감추어 놓고 죽은 돈을 발견하고 이 돈을 바탕으로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벽돌공장을 비롯해 운수업체 그리고 마침내 고래극장이라는 거대한 건물은 그녀가 집념으로 이룬 산물이다. 춘희는 금복의 딸이지만, 금복이 거지가 되어 전국을 유랑할 때 우연히 낳은 딸일 뿐이다. 그런데 금복은 춘희가 4년 전에 죽은 자신의 연인 걱정을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춘희를 걱정의 딸로 간주한다.

 

이들 3대는 어떻게 보면 한국자본주의 발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시대 배경을 알아볼 수 없도록 제거해 버리는데,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한국 자본주의의 서사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3)

1대 노파는 박색이며 가난한 천민이다. 그러나 그녀는 왕성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반 가 막내 아들인 반편이와 관계하다가 두들겨 맞고 쫓겨난다. 그녀는 반편이를 꾀어내어 물에 빠트려 죽이고 도망해, 철도 건설 공사가 한창 이던 시기 평대에 국밥 집을 차려 돈을 모은다. 그녀는 기어 다니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붕 밑에 감추어 둔다. 노파의 이런 모습은 마치 민중에서 나온 초기 자본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노파는 삶의 원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삶의 원리를 대변하는 노파의 몸 속에 이미 이에 대립하는 예술의 원리가 싹트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애꾸이다. 노파가 반편이와 관계하여 낳은 딸이 애꾸인데, 노파는 딸의 눈이 자신이 죽인 반편이의 무심한 눈을 닮을 것을 보고 죄의식 때문에 부지깽이로 딸의 논을 찔러 애꾸로 만들고 딸을 산 속에 사는 벌치기에게 꿀벌 2통에 팔아버린다. 애꾸는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노파의 돈을 훔치려다 결국 노파를 죽이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벌치기로부터 벌과 교감하는 법을 배운다. 무심한 눈, 자연과의 교감은 후일 예술가가 되는 춘희를 연상시킨다.

 

3)

소설의 중심은 금복이다. 작가는 금복의 삶을 전반부(1부의 이야기)와 후반부(2부의 이야기)로 구분한다. 전반부에서 금복은 세상의 물정을 파악하는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불타는 내적 욕망(작품 속에는 ‘바람’으로 상징된다)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자신을 향하는 아버지의 욕정을 피해, 생선장수와 도망쳐 항구에 이른다. 거기서 그녀는 천부의 총명함으로 생선장수를 도와 덕장을 운영하다가, 걱정을 만난다. 걱정은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단순하여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남자이다. 금복은 걱정을 사랑하여 생선장수를 버리고 걱정과 살림을 차리지만, 금복 자신이 예감한 대로 걱정은 단순성에서 나오는 만용으로 폭풍우 속에 굴러 떨어지는 통나무를 막다가 다친다.

 

춘희는 걱정을 보살피는 가운데, 칼잡이를 만난다. 칼잡이는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깡패 두목이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자 기생인 나오꼬를 위한 것이다. 칼잡이는 자신의 손가락 6개를 바치고 나오꼬를 품에 안지만, 아침에 그가 발견한 것은 그를 기다리다 이미 나이 들어 노파가 된 여자였다. 칼잡이는 자신의 욕망이 허망했다는 것을 깨닫고 평생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으나 나오꼬를 닮은 금복을 보자, 사랑에 빠진다.

 

결국 걱정을 사랑하는 금복은 그녀를 사랑하는 칼잡이와 함께 살기로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걱정은 금복이 칼잡이와 관계하는 것을 보고, 집을 떠나 바다에 빠져 죽는다. 칼잡이는 걱정을 붙잡으러 따라 나섰으나 금복은 칼잡이가 걱정을 살해해 바다에 던진 것으로 생각하고 칼잡이를 등 뒤에서 작살로 찔러 죽인다.

 

이렇게 해서 전반부는 끝난다. 금복은 걱정을 상실한 절망과 칼잡이를 죽인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지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다가 어느 마구간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아이를 낳는 중에 쌍둥이 자매에 의해 구원받으면서 전반부가 끝난다.

 

전반부에서 나타난 금복의 모습 속에는 아직 후일 대기업을 일으키는 자본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금복의 모습은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인데, 그녀가 감추고 있는 거대한 욕망의 모습은 걱정을 사랑하는 모습에서나 칼잡이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습에서 보듯이 남성적 욕망과 대립하는 여성적 욕망의 형태이다. 작가는 그 때문에 금복에게 남자를 홀리는 냄새가 들어있다고 서술한다. 여성적 욕망의 형태는 자주 예술적 기질의 원천으로 설명되는데 이런 점에서 금복의 전반부에서 모습은 예술가적 기질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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