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그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장윤경(애견 훈련사)

 

나는 올해 32살의 여성 애견훈련사이다. 개와 고양이, 새나 병아리 심지어는 길에서 주운 쥐를 키우겠다며 집에 들고 와 어머니를 기겁시킨 일도 있었던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나는 동물을 참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많은 동물을 키웠다. 그들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에 웃고 우는 유년기를 보냈으나 중학교 이후 내게 주어진 삶은 동물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 훈련소에서중학교 진학과 함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따라간 화실의 그림공부는 내 생활의 일부분으로 시작해 점점 내 생활의 전부가 되어갔다. 활동적이지 않은 성격 탓이었겠지만, 그림을 그리느라 대여섯 시간을 줄곧 앉아 있어도 좀이 쑤시지 않았고,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운 좋게도 세차고 드센 비바람 한 번 만나지 않고 고무 튜브에 몸을 맡긴 채 잔잔한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 흘러가 도착한 곳은 예술 고등학교였다. 딱히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보니 적성에 맞았다. 어쩐 일인지 별 노력 없이도 그림을 잘 그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생각 한 번 없이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돌이켜 보면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고 기대도 받으며 살아가는 일이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아니 분명 꽤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서 전문 화가가 되어야 하겠다든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어떤 미래를 가지게 될지 같은 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내 어머니, 당신이 꿈꾸고 계획해 놓은 내 미래의 청사진을 듣는 순간, 웬일인지 그 길이 내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입에서 ‘교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런 것은 결단코 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나를 덮쳐왔던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꿈이었지, 나의 꿈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그 길을 벗어났고, 길을 잃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엇이 될지, 무엇을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혼란과 방황의 대학 시절을 보내다 힘든 시기에 힘이 되어준 지금의 남편과 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첫 번째 반려동물인 개 캐니를 집으로 데려왔다. 라브라도 종인 캐니는 아주 영리한 개였고,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캐니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예뻤던 나는 둘째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마침 캐니가 다니던 훈련소에서 태어난 쵸콜렛색 라브라도가 디키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캐니의 동생이 되었다. 아파트에서 대형견 두 마리를 키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목줄을 매고 나선 산책길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면 혹여 작은 피해라고 줄까 염려해 목줄을 꼭 부여잡았지만 큰 개를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얻어먹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특히 뉴스에 개에게 물려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의 사건이 보도되기라도 한 다음 날이면 소중한 맹인 안내견으로 쓰여도 충분할 정도로 순한 개들이었건만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면전에서 대놓고 참기 힘든 말을 듣기도 했고 그로 인해 행인과 언성을 높이는 일도 일어났다. 몇 년간 지속된 그런 일에 서서히 지쳐갔고, 결국 우리는 두 마리의 우리 가족을 위해 이사를 결심했다.

도시 외곽의 넓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우리 부부는 보다 많은 반려견들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예닐곱 마리의 대형견을 능숙하게 통제하며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고, 예상치 않은 반려견 훈련부탁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부탁을 접하면서 스스로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훈련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흐르는 강물에 다시금 뛰어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른 그 누구의 결정이 아닌 바로 나의 뜻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번 여행에는 믿음직한 남편 또한 함께였다. 사랑스러운 반려견들을 키우면서 손에 잡기 시작했던 애견 훈련에 대한 공부는 이때부터 전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외국 서적을 주문해 사전을 뒤적이고 밑줄을 치고, 노트를 해나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세계적인 훈련사들의 동영상을 찾아보고 그들의 노하우를 배워 나갔다. 그때까지의 실제 대형 반려견들과의 생활 또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우리 부부는 세계 애견 연맹인 FCI가 공인한 한국애견연맹이 주관하는 훈련사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프로 훈련사가 된 것이다.
▲ 훈련소의 개들그러나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한 나의 일, 애견훈련사가 되는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고 그 어려움은 지금도 이어지는 듯하다. 다른 이에게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뛰어든 이 강 위에서 세찬 비바람도 만나고 드센 여울목도 만나는 중이다. 프로 훈련사로서의 초년병 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보다도 애견훈련이 천한 직업이라고 여기는 듯 함부로 말하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부모님과 친지들조차 나의 직업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말과 태도를 취하곤 했었고 사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건 큰 상처였다. 거기다 애견 조련은 나의 첫 직업이었고, 조련사로서의 생활은 학교 졸업 후 난생처음 하는 사회생활이기도 했다. 나는 사람, 특히나 내게 자신들의 개를 맡기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견주들을 대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견주들을 대하는 일이 어색했고 나는 말재주가 전혀 없었다. 개들을 돌보는 일, 견종에 따라 달라지는 훈련 방식과 그 과정, 그러한 훈련 과정을 통해 달라지는 개들의 상태를 멋지게 설명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후 견주들에게 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물어보는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들이 프로로서의 나의 능력을 알아주고, 또 평가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개들을 받고, 돌보고 훈련시키고, 돌려보냈다. 초년병 시절 나는 내가 과연 전문 훈련사로서 유능한지 무능한지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함께 했지만, 나는 한 사람의 독립적 전문 훈련사이기도 했으므로, 내 능력에 대한 초조함에 휩싸여 몇 번이나 이 길을 들어선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그 심적 부담에서 벗어날 방법은 예전에 튜브를 뒤집고 강에서 나와 멀리 도망간 것처럼 도망치는 방법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이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 삶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두었을 때에는 잘되면 내가 잘나서요, 못되면 네가 못나서라고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정한 일에서 내가 도망치면 나는 다시는 한 사람의 주체적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재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일에서 다시 실패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며 나의 역량부족인 까닭이라는 사실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나는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 잡았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 채우고 다시 도전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적어도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 능숙한 애견훈련사가 되었고 우리 부부의 훈련소의 규모도 많이 커졌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견주 중에는 애견훈련소에만 보내면 자신의 개가 가진 모든 문제가 사라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개가 사람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들은 리모컨 달린 인형이 아니다. 애견 훈련은 반려견을 기계로 키우는 훈련이 아니다. 애견 훈련사로서의 내 철학은, 내가 맡은 개들이 훈련을 통해 반려견으로서 주인과 어우러져 실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한 가정의 가족으로서 생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견훈련이 기계처럼 딱딱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명령어에 무조건 복종하게 하는 훈련보다는 마치 자신의 주인이 사랑하는 개에게 말하고 개가 그 말을 따르는 것처럼 편안한 훈련을 한다. 그것을 추구하기에 새로운 개가 오면 원래 처음부터 우리집 가족이었던 냥 집에서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적응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내 옷은 심지어 외출용 옷에도 개털이 묻어 있기 일쑤고, 모임을 가지기 전 날 미리 세탁해서 말려둔 옷을 입고 나가도 개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특히 검은색 옷은 금기 의상이다. 양말이며 옷, 이불 등등에 이르기까지 검은색만큼 개의 털을 돋보이게 해주는 색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의를 표하러 갈 때가 참 곤란하다. 신기하게도 밖에서 검은 옷을 바로 사 입고 가도 어느 사이 옷 여기저기에 털들이 붙어있다. 그러한 사실이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들보다 가볍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나란 사람이 제정신이 박히지 않았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내 앞에서 뒤에서 소곤대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참 속상하다. 속상한 마음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탓을 개에게 돌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울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 때 녀석들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나도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우울한 날이면 그런 녀석들을 다 물리치고 혼자 우울하게 방문을 닫곤 하지만, 그럼 뭐하나. 그토록 냉정히 저희를 뿌리친 내가 방문만 열고 나와도 또다시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사랑을 표현해대는 것을. 난 늘 생각해왔다. 반려동물들은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다고. 그것이 반려동물을 집으로 데려온 이상 그 생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라고. 나의 매정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나를 사랑해주는 그들을 보면 나 역시도 그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이 반려 동물과 인간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이유인 것이며, 우리는 준 사랑과 받은 사랑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인 것이다. 견주들이 길에다만 개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훈련소에 개를 버리기도 한다. 연락이 끊어지거나, 때로는 개를 적당한 곳에 버려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필요할 때만 반려 동물을 취하고 귀찮아지면 매정하게 버리는 사람들은 내게 사랑의 의미와 그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개들과의 생활은 나를 보다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삶의 스승 아닐까. 나는 내가 개들로 인해 행복하고 나로 인해 개들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개도 그러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희망한다.

 

 

아버지의 눈빛으로 아들의 사랑으로, 영화 ‘맨인블랙3’ /강지은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아버지의 눈빛으로 아들의 사랑으로

영화 ‘맨인블랙3’

?글: 강지은(편집주간)

 

그들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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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인블랙MIB, 그들이 돌아왔다. 검은 수트에 검은 선글라스. 자체 발광하는 A급 배우 윌스미스와 토미리 존스.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를 고르는 나의 눈을 끌기에 충분하다.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블록버스터이지만 1편부터 맨인블랙은 신선함을 주는 코미디 블록버스터였다.

대부분 영화에서 외계인은 소탕해야 마땅한 존재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외계인은 일종의 제국으로서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인블랙의 외계인은 지구가 좋아 또는 자신이 살고 있는 행성의 불화를 피해 이민 온 이방인들이다. 게중에는 불법 이민 온 외계인들도 더러 있다. 지구는 외계인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 외계인들을 감시하고 단속하는데 그걸 담당한 형사들이 검은 수트의 맨인블랙이다. 지구의 문명은 이 외계인들이 가지고 온 뛰어난 문명 덕택에 진화를 이루었다. 영화의 작동방식은 낯선 이방인을 필요에 의해 받아들이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핵심 영역에서 배제하는 인간사회와 꼭 닮았다. 그러나 외계인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살아간다해도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나기 마련인데 영화에서는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바로 외계인들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왠지 나도 설득당하는 기분이었다. 맞다. 그들이 외계인이 아니었던들 그리 뛰어난 재주를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1편은 어떤 영화든 그렇지만 시리즈의 기본 설정을 모두 보여주는 베이스이다. 맨인블랙도 헐리우드의 영웅을 그리는 영화이니 당연히 악당이 등장한다. 1편의 악당은 바퀴벌레 외계인. 은하계를 손에 넣기 위해 우주에서 납작한 비행접시를 타고 날아왔다. 바퀴벌레가 달큰한 음식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이 바퀴벌레 외계인도 설탕물을 좋아한다. 또 동족이 발에 밟혀 내장이 터지는 것을 제 몸 아파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는 감성도 지녔다. 은하계를 찾으러 온 또 다른 우주인들이 지구 밖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폭파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급박한 상황. 맨인블랙 콤비는 외계인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않고(사실 어떤 유기체의 뱃속에 유기체가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활약을 펼쳐 바퀴벌레 외계인이 탈취한 은하계를 구해낸다. 그런데 은하계는 지구를 포함해 수십억 개가 넘는 거대한 별의 집단인데 그게 어떻게 뺏고 뺏기는 물건처럼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맨인블랙의 상식을 뒤집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우주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크기라는 선입견에 얽매여 있으면 결코 자신이 처한 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 또한 자신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불교에서 속계의 모든 인연을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길은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난 무아지경이다.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 상태. 결국 대상이 내가 되는 역전이 벌어지면서 나와 타인의 구분이 없어지는 대자대비의 부처가 되는 길을 불교는 이야기한다. 맨인블랙에서 은하계는 고양이의 목에 매달린 방울 속에 있다. 방울 속에 우주가 있으니 우주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내 마음을 내가 어찌 못하는 현대인에게 ‘마음먹기에 달렸어’라고 속삭인다. 영화의 엔딩은 어쩌면 신일지도 모르는(부처님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손이 우주의 구슬을 가지고 놀다 주머니에 넣는데 그 속에도 구슬 우주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광대한 우주라는 것도 신들의 눈으로 보면 작고 앙증맞은 유리구슬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인간의 유대 vs. 가족?

맨인블랙 1편의 주인공 파트너 요원 K(토미리 존스)와 요원 J(윌 스미스)는 능력에 맞추어 이루어진 단짝이다. 맨손으로 외계인을 잡은 뉴욕 경찰 제임스(윌 스미스)를 MIB 요원으로 캐스팅한 자가 K이다. 둘은 좌충우돌 부딪힐 때도 많지만 결정적인 순간 나쁜 외계인을 물리치는 데에 기가 막히게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요원 K는 비록 무뚝뚝하지만 똑 부러지는 원칙과 행동 속에 믿음과 신뢰가 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요원 J는 원칙대신 동정과 사랑으로, 기준 대신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판단한다. 궁합이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K와 J는 불일치 속에서 일치점을 찾아나가고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알고 이해해주는 인간적 유대를 1편과 2편에서 지속한다.

1편에서는 요원 K가 주축을 이루는 이야기의 중심라인이었다면(1997년) 2편(2002년)에서는 둘 이 대등한 중심점을 갖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3편에서는 요원 J의 과거사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1편에서 요원 J는 맨인블랙 요원 신참으로서 요원 K의 목숨을 사리지 않는 투혼에 감동받는다. 2편에서는 맨인블랙을 떠났던 요원 K를 요원 J가 다시 데리고 옴으로써 둘의 관계가 이전의 관계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2편에서는 샤크라의 빛을 손에 넣어 우주를 정복하려는 나쁜 촉수 외계인에 맞서 그 빛을 과거에 수호하려했던 요원 K가 요원 J를 돕는다. 맨인블랙의 실세가 된 J는 거북하게 원칙을 들이대는 K가 없으니 날개를 단 셈이지만 도무지 손발이 맞는 파트너를 찾을 수가 없어 난감하다. 카오스에도 인간이 알 수 없는 질서가 있기 때문에 카오스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성격이 좋은 파트너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예쁜 파트너라고 하더라도 손발이 맞아야 일을 할 수 있다. K와 J는 다시 합심하여 지구를 구한다. 인간적인 유대는 그렇게 생겨나고 유지된다. 출신 성분이나 인종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3편의 맨인블랙은 이러한 인간적 유대를 스스로 버렸다. 전편들에 비해 볼거리가 적은 것도 아니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이 대목에서 힘이 빠질까. 그렇다고 막장 SF처럼 “내가 네 애비다”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K와 J는 처음부터 인종이 달랐으니 부자지간의 연을 맺기는 어려운 관계다. 하지만 이번 3편에서 K는 양아버지의 존재로 그려지며 J의 성장과정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J는 어릴 적 지구의 위기를 구하는데 일조를 한 아버지의 죽음에 자책감을 느낀 K를 보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K를 향한 연민의 감정을 드러낸다. K는 J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며 그의 아들 J의 곁에 선다. 이제 맨인블랙은 아버지와 아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읽혀진다. 아버지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엄한 법을 들이대고 아들은 반항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길을 따라간다. 숨겨왔던 부자지간의 인연을 말하려고 수화기를 든 K의 얼굴엔 한없는 아버지의 자애로움과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비장미가 드러난다. K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아니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결심한다. 자신이 달 감옥에 가둔 나쁜 외계인이 탈출해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는 지금 이 순간, K는 아예 그를 없애버리려 과거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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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미국, 미국인

?SF의 볼거리 생각거리를 총동원한 맨인블랙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미국과 미국인의 우월함을 한껏 과시한다. 맨인블랙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우주인을 쏘아올리던 1969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영화에는 텔레비전으로 우주선 발사 장면을 보는 미국인,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놀이공원이 등장한다. 영화는 텔레비전을 집에 소유한 단란한 핵가족의 풍요로움을 여러 차례 화면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전편들에서 뛰어난 지구인들은 거의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미국인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스토리 라인에 현대 미술의 거장 앤디 워홀을 등장시켜 그를 MIB 요원으로 설정한다. 이제 지구를 지키는 훌륭한 지구인은 MIB 출신이다. 게다가 영화의 흥미진진함을 반감시키는 또 다른 요인은 예지력을 가진 외계인이 조력자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블록버스터의 정석은 영웅이 악당을 물리쳐 승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과정에서만큼은 영웅도 좀 얻어맞고 관객은 그런 장면을 보며 “그가 죽을지도 몰라, 어쩌지”하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지력을 가진 털모자의 외계인은 슬쩍슬쩍 정답을 흘리고 다니며 영화보는 맛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MIB

?그래도 맨인블랙은 재미있다. 영화가 보는 이들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거나 인생을 되돌이켜 보게 해주어야만 명작은 아니다. 순간순간 빵 터지는 재미도 필요하고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도 있어야 하고 멋진 배우도 있어야 한다. 너무 무리한 주문인가? 맨인블랙은 이들을 고루 갖춘 블록버스터이다. 외계인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코믹적인 감각도 전편을 걸쳐 유지하고 있다. 우주가 어떤 거대한 존재의 구슬에 지나지 않는다는 1편의 엔딩과 지구는 무수히 많은 우주의 외계생명체에겐 물건을 담아두는 수많은 사물함 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2편의 엔딩은 내가 최고라는 지구인들의 오만함에 썩은 미소를 날린다. 또 한 가지, 영화 《아이 로봇》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그 자체 초콜릿 복근과 팔뚝 근육을 자랑하는 윌 스미스도 감탄을 자아낸다. 윌 스미스는 집에서 비디오게임을 하는데 왜 꼭 런닝 속옷만 입을까. 팬들에 대한 보답 말고는 답이 없다. 어찌 되었든 오늘도 외계인의 공격으로부터 안심하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게 해준 《맨인블랙3》는 재미있다.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임종국 평전』/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정운현이 쓴 『임종국 평전』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특유의 씨익 웃음’(240, 241쪽)

책 얼굴에서 임종국 선생이 웃으신다. 웃으신다. 해맑게 웃으신다. 장마비 내린 뒤 방긋웃는 햇님처럼 밝게 웃으신다. 달님이 시기할 정도로 밝게 웃으신다. 나도 덩달아 웃는다. 『임종국 평전』 책 얼굴 디자인 한 사람 참말로 멋지다. 은은한 바탕색에 개구쟁이같이 웃는 임종국선생 사진을 책 얼굴에 멋지게 올렸으니 말이다. 당신이 해맑게 웃을 수 있었기에 친일문학론을 쓸 수 있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친일문학론』을 쓸 수 있었다. 벼락이 떨어져도 임종국 선생은 당신 서재를 뜨지 않으셨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서 너 다시 태어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면, 연자맷돌에 온 몸이 갈리더라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456쪽)고 말했을 정도로 선생 삶은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당신 서재를 뜨지 않으셨다. 벼락이 선생을 무서워했다.

 

임종국 선생은 왜 『친일문학론』을 썼는가?

‘한 일본군 병사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순간 그 일본군 병사는 마치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

▲ 임종국 평전, 정운현 지음, 시대의 창 펴냄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꼭 20년 후에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

회담이 타결되기도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 제2의 송병준이, 제2의 박춘금이가 얼마든지 또 생겨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237, 238쪽)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318년 후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했다. 2012년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이다. 대통령 이명박은 2008년 7월 15일 일본 후쿠다 총리와 정상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서 일본 총리가 “다케시마의 내용을 일본 교과서에 싣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 이명박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임종국 선생이 『친일문학론』을 쓴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대통령이 지닌 역사의식이 참으로 낮다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 이런 대통령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된다. 그리 되려면 『친일문학론』, 『친일파는 살아있다』, 『임종국 평전』 이 세 책이 이 나라에서 많이 읽혀야 한다. 학교 선생님과 이 나라에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열심히 해 주길 기대해 본다.

선생은 『친일문학론』을 내면 책이 많이 팔릴 것이라고 확신 했다. 뭔가 지식인 사회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우선 출판사들이 책 출판을 꺼렸다. 용케도 나서는 출판사가 있어서 어렵사리 책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반응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친일문학론』에서 이야기 대상이 된 당사자들과 그들과 관련된 인간들이 서로 이 책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선숙의 증언에 따르면, 평화출판사 이전에 몇몇 출판사에 출판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고대 동문인 신일철, 민영빈 등은 “나중에 안 좋다”며 책 출간을 말리기도 했다고’

‘허 사장은 초판 1000부를 찍으려다 500부를 더 얹어 1500부를 찍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 허사장의 예측이 맞았다. 초판 1500부를 소화하는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1979년 10?26이 난 뒤에 가서야 겨우 재판을 찍었다. 하나 놀라운 사실은 초판 1500부 가운데 500부는 국내에서 소화되고 나머지 1000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허 사장은 전했다.’(253, 254쪽)

‘문단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을 실명으로 비판하고 나섰으니 상식적으로 본다면 언론도 대서특필하고 또 당사자들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명예훼손이니 어쩌니 난리법석을 피웠을 만도 하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모두 빗나갔다. 마치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언론도, 문단도 모두 의외로 조용했다.(물론 전연 보도가 안 된 건 아니다. 다만 비중이나 관심도가 낮았다는 애기다).’(255, 256쪽)

『친일문학론』이 많이 팔리지 않게 되어 임종국 선생은 크게 실망한다. 지식인 사회의 무반응이 그를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혼, 힘겨운 밥벌이 등이 그를 힘들게 했다. 임종국 삶을 알게 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사진은 많은 것을 말한다. 글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임종국 평전』 452쪽 사진은 선생의 삶이 힘들었음을 잘 말해 준다. 이 책을 쓴 정운현은 그 사진 밑에 이렇게 썼다. ‘죽어서는 ‘바람’이 되고자 했던 종국, 요산재 옆 눈밭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한없이 쓸쓸해 보인다.’

 

임종국을 만든 사람들?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조선 최고의 해전 전문가, 정걸 장군, 물길 연구에 삶을 바친 어영담 등이 그들이다. 임종국을 만든 사람들은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보다 더 많다. 임종국 할머니, 할아버지, 임종국 엄마, 아버지, 김대기, 임경화 등이 그들이다. 임종국 아버지 임문호는 호연지기의 대명사이시다.

‘끝으로 종국이 부친 임문호의 친일 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싣게 된 경위를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는 경화의 증언이 있다(순화도 같은 증언을 했다).

“1966년 1월쯤이라고 생각됩니다. … ‘아버지! 친일 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고 하셨습니다.”(366쪽)

평화출판사 허창선 사장은 『친일문학론』을 이 세상에 낸 사람이다. 재혼한 아내 이연순과 김대기, 임경화는 임종국선생 말년 5년을 함께한 사람들이다. 백기완 선생은 감옥에서 『친일문학론』을 퍼뜨린 사람이다. 이근성, 서화숙, 나문순은 기자로서 임종국 선생을 언론 매체에 알린 사람들이다. 백기완 선생은 “한국의 진보는 임종국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임종국 선생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임종국 선생을 크게 칭찬한 사람이다.

‘당대의 지성’ 리영희(1929년생, 77세, 전 한양대 교수)는 지난 1984년 한길사에서 펴낸 『분단을 넘어서』에서 “임종국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는 일면식고 없지만 이 분이 펴낸 『친일문학론』은 앞으로 세워질 독립기념관의 현관, 제일 눈에 띄는 위치에 진열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 개관됐기 때문에 리영희의 글은 미래시제이다.)(294쪽)

이외에도 임종국을 만든 사람들이 이 책에 많이 나온다. 선생을 사랑한 사람, 선생을 존경한 사람, 선생을 애틋하게 바라본 사람, 그들이 임종국을 만들었다. 그들이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임종국선생은 이 사회를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선생이 어려움 속에서도 친일파 청산에 나섰기 때문에 이 땅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게 되었다. 이 땅 친일파 후손들이 친일인명사전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땅 친일파 국회의원들이 친일인명사전 나오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이 땅에 깨어있는 민주시민이 있었다. 김호룡씨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네티즌 모금운동을 맨 처음 제안했다.

‘2004년 1월 8일 오후에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제작비 국민모금은 만 4일이 채 지나지 않은 12일 오전 11시 30분 이미 1억원을 넘어섰다. …

이번 캠페인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7일자 정운현 칼럼 ‘다떨어진 헌 고무신짝을 부여잡고’ 아래 독자의견으로 붙은 ‘참세상(kimhr)’이란 네티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비용을 모읍시다’라는 글이 도화선이 됐다.’(《오마이뉴스》, 홍성식, 2004. 01.12)

이 켐페인은 시작된지 열 하루만에 5억원의 사업비를 민족문제연구소에 안겨놓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7억원이 모금되었다. 그리하여 친일파 국회의원이 막았던 『친일인명사전』이 바로 이 땅에 나오게 되었다. 임종국 선생이 땅 속에서 ‘특유의 씨익 웃음’을 지으실 것 같다.

 

호방하고도 섬세한 시인 임제(林悌)선생이 황진이와 당신 직계 자손 임종국(林鍾國) 죽음을 슬퍼하며 이 시를 지었나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 송재소 씀, 한길사, 147쪽

 

나도 시간 내서 임종국 선생 묘소에 한 번 들러야겠다. 정운현이 쓴 『임종국 평전』을 한 권 들고 선생 묘소에 한 번 들러야겠다. 선생께 『임종국 평전』에 싸인 해주십사 부탁하러 당신 묘소에 한 번 들러야겠다. 독자 여러분도 그리 해주세요.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청춘의 서재]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청춘의 서재]

소율(자유기고가)

 

간소한 문장은 깊이 우려낸 녹차의 맛과 비슷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는다.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상대방의 손을 잡는 행위와 동일하다. 밑줄은 독자가 저자에게 보내는 공감, 동의, 지지, 환희, 동맹을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식이다. 당연히 좋은 책일수록 밑줄을 긋는 횟수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밑줄을 칠 문장보다 밑줄을 치지 않을 문장이 더 많을 때 밑줄을 긋게 된다. 왜냐하면 밑줄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면 길수록 밑줄은 어느새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은 우승할 확률1%인 대책 없는 80년대 삼미 야구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미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팀이기보다는 야구를 취미로 즐기는 사회인 야구 동호회 성격이 강한 팀이었다. 선수 이름도 슈퍼스타에 어울리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최강타, 전태풍, 백두산 같은 멋진 이름 대신 금광옥과 장명부 그리고 패전 전문 마무리 투수 감사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금광옥은 새로운 사과 품종 이름 같았고, 장명부는 일본의 인기 만화 데쓰노트를 한국식 이름으로 지으면 어울릴 만한 이름 같았다. 그리고 감사용은 감사용 다음에 선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다가오는 한가위엔 고객 여러분의 정성에 보답하고자 저희가 감사용 선물을 준비했어요.

슈퍼맨 망토 입고 야구를 하는 정신없는 구단답게 꼴찌는 삼미의 몫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기록은 대부분 삼미가 기록했다. 한 시즌 최다 연패, 한 시즌 최소 승률, 한 경기 최대 점수차 역전패, 한 경기 최다 병살타, 한 경기 최다 홈런 허용, 한 경기 최다 사사구 허용, 특정 구단 상대 최다 연패 등등. 하지만 박민규는 승률 1%의 꼴찌 팀 삼미에 주목했다. “승리한 경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지만 패배한 경기에서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특급 투수 크리스 매튜스의 말이다. 꼴지로 출발한 삼미는 다음 시즌에 기똥차게 변신을 한다. 최종 성적은 1위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2위였다. 그는 만화적 세계와 농담과 명랑으로 꼴찌와 실패의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개나 줘 버려! 낄낄거려도 좋고, 깔깔거려도 좋고, 데구르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데구르르 굴러도 좋은 소설이었다. 아, 재미있다 !

나는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책에 밑줄을 단 한 번도 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인 내가 저자인 박민규에게 보내는 야유가 아니며 그의 문장과 서사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아니다. 첫 페이지 첫 문장 첫 음절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길게 이어질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의 밑줄이 길다. 그만큼 박민규의 서사는 압도적이다. 그 동안 주류 문단의 젠체하는 문장, 뒷짐지고 훈계만 하려는 꼰대들의 서사, 당대를 외면한 낭만적 후까시와 후일담, 징징거리는 신경 쇠약 직전의 신파, 쓸데없이 무게 잡는 우울, 이 세상 모든 트라우마의 주범은 모두 폭력적 아버지라고 말하는 뻔한 가족 서사에 진절머리가 났던 시절에 읽은 이 소설은 시시껄렁한 잡담과 명랑으로도 깊이 있는 문학의 향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작품이었다. 장정일의 소설들이 시시해질 무렵 등장한 박민규은 싱싱해 보였다. 진정한 슈퍼스타는 박민규였다.

야구란 본질적으로 실패와 어긋남의 서사이다. 3할 타자란 10번 대결해서 7번 실패하고 겨우 3번 성공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의 법칙으로 보자면 3할은 실패한 승률이다. 10번 대결해서 3번 성공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3할 타자를 훌륭한 타자라고 자랑한다. 이렇듯 야구는 백전백승의 세계가 아니고 승자 독식의 세계도 아니다. <3승 7패의 세계>이다. “7패나 했어?”의 세상이 아니라 “ 3승이나 했어!”의 세상이다. 맹추, 띨띠리, 멍충이, 해삼, 멍게, 말미잘의 세상이다.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라 !

1%의 승자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불행한 시대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등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꼴등에 대한 따스한 위로와 공감이다. 이상적인 사회란 일등이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꼴찌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시대는 한 명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 > 은 이 시대 청춘들에게 헛스윙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얼핏 이 위로는 상투적인 스포츠 서사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방점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지지에 있다. 사실 역경을 극복하고 이룬 기적 같은 성공 스토리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박민규는 성공이 아닌 실패에 밑줄을 긋는다. 7패 다음에 3승이 찾아온다고, 7패 다음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8패 뒤에 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외로워도 슬퍼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들장미 소녀 캔디가 되라고, 말랑말랑한 것은 딱딱한 것보다 더 힘이 세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채찍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이 시대의 불안은 당신 탓이 아니며 당신의 무능 또한 당신 탓이 아니다. 그런 위로의 말이 간절한 시점이다.

엄청나게 빠른 직구를 자랑하는 투수의 공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공은 딱딱한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으로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온다. 니체는 말했다. 고통이 영혼을 갉아먹을수록 웃음을 잃지 마라. 나는 당신이 헛스윙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도 돌아서서 씨익 웃었으면 한다.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은 마른 잡초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357a~367e)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357a~367e)

이한빈

 

*진도표에는 ‘글라우콘의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비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해당 부분에는 글라우콘의 정의관만이 나타나 있었을 뿐이지,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판’이라는 글자를 뺐습니다. 또 엄밀히 말해서 이건 글라우콘 자신의 정의관은 아니고, (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한)당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의관의 입장을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한 것이기에,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이라고 제목을 썼습니다.

 

1.제2권의 논의 도입부 (357a, 2권 처음 ~ 358e)

: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의 중에서,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보다 모든 측면에서 낫다(좋다)는 것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좋다’는 것일까? 글라우콘은 거기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좋은 것’에 세 가지가 있다는 점을 도출한다. “올바름이 그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올바름이 그것 자체로도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글라우콘은 가상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고, 소크라테스는 그와 반대로 올바름이 그 자체로 좋다는 입장을 취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1의 세부 내용―

 

글라우콘은 ‘좋은 것’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묻는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좋은 것이 있음을 소크라테스가 동의한다.

첫째, “그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 때문에 반기며 갖고자 하는 그런 것)”이 있다. 여기에는 기쁨, 해롭지 않은 즐거움 등이 있다. 기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로 인하여 생기지 않는다. (357b)

둘째, “그 자체 때문에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들 때문에도 좋아하는 그런 것”이 있다. 슬기로운 것이나 보는 것 또는 건강한 것 등이 있다. (357c)

셋째, “그것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보수라던가 그 밖에 그것들에게서 생기는 결과(평판을 통한 명성 등) 때문”에 수용하려 하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수고스럽긴 하지만 우리를 이롭게 한다. 그것 자체 때문이라면 기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신체 단련, 치료받음, 돈벌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357c)

소크라테스는 이 세 종류 중 두 번째 종류에 올바름이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하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글라우콘은 말한다. 그는 다수의 생각(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과는 달리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상으로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 그가 가상으로 취하는 입장에 반대하는,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다고 옹호하는 주장을 듣고자 한다.

글라우콘은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특히 트라시마코스)들의 주장을 크게 세 단계로 전개하기로 한다. 첫째, 올바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둘째,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라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둘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온당하다. (358e)

 

2.올바름의 기원에 대한 글라우콘의 말 (358e~362b)

: 1.에서 말했듯이 글라우콘은 우선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올바르지 않는 일과 관해서 최상의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의 나쁨이 그런 일을 했을 때의 좋음보다 크기 때문에 법과 계약이 생기게 되었고, 그런 것을 따르는 것이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란 단지 그러한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 사이에 있는 것이며,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름은 그것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그만한 힘이 없기에 대접받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올바른 사람이라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면 올바르지 못한 자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 투명해지는 반지의 예) 둘째, 올바르게 보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와, 올바르지만 올바르게 보이지는 않는 자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하게 살겠는가? 분명 전자가 더 행복할 것이다. 특히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자는, 부유하고, 강력해져서 친구들은 잘되게 해주고, 적들에게는 해롭게 할 수 있다. 또한 제물을 많이 바칠 수 있게 되어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에게도 사랑받는다.

 

―2의 세부 내용―

 

(1) 글라우콘은 첫째로 올바름이 어떤 성질의 것이며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본래는 올바르지 못한 것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며, 그걸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을 당함으로서 입는 나쁨이 그것을 행해서 얻는 좋음보다 월등히 크다.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또 당해 보면서, 그런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행할 수도, 당할 수도 없도록 계약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로 인해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게 된다. 그렇게 제정된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다. 올바름이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처벌받지 않는 최선의 경우와, 그러고도 보복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358e~359c)

 

[2.(1)의 결론 주장] 올바른 것이 대접받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하고, 또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 대한 근거1] 올바른 사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상정해보면, 분명 탐욕으로 인해 올바르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359c~359d)

[근거 1의 구체화] “기게스의 반지(투명해지는 반지)”를 생각해보자. 올바른 사람이 그 반지를 갖게 되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가졌을 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359d~360d)

[위에 대한 근거2] 가장 올바르지 않은 이와 가장 올바른 이를 대비해 보자. ‘가장’ 올바르지 못한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올바른 자로 보인다. 그는 올바름에 있어 최상의 평판을 받는다. ‘가장’ 올바른 자는 올바르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가장 올바른 사람이며, 그러기를 바란다. (만약 그가 올바르게 ‘보이기’까지 한다면, 그가 올바른 사람인 것이 올바르게 보이는 것으로 인한 결과 때문인지 아니면 올바름 그 자체로 인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앞의 가장 올바르지 않은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악명을 갖고 있으며, 최악의 평판을 갖는다. 이들 중 누가 더 행복하겠는가? (360e~361e)

이 사례에서의 가장 올바른 자는 온갖 나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는 그런 일을 당한 후에, 실제로 올바르게 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깨닫게 된다. (362a~362b)

반면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자는 여러 이득을 얻는다. 첫째, 나라를 통치하고, 둘째, 가문과도 혼인하고, 혼인 시킬 수 있으며, 누구와도 거래 할 수 있다. 셋째, 올바르지 못한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어서 모든 면에서 이득을 얻는다. 적을 압도하고 능가하며, 부유하게 된다. 그로 인해 친구들은 잘 되게 해주고, 적들은 해롭게 할 수 있다. 신들에게도 많은 제물을 바칠 수 있어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들에게도 사랑을 받게 된다. (362b~362d)

 

3.글라우콘의 말에 대한 아데이만토스의 보충

: 올바르지 못함의 입장을 가상으로 취하여 한 글라우콘의 주장을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보충한다. 그건 신이 올바른 자에게는 상을 주고,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올바르지 못하지만, 부유한 자들이 주술이나 마법의 힘, 혹은 제사를 통해 그들이 받아야 할 벌을 피해가며, 오히려 올바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올바르게 산다면 단지 신의 벌을 받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통해 얻는 이익을 얻을 수 없지만, 올바르지 못하게 산다면 그런 행위를 통한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제사를 통해 신으로부터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올바름을 추구하기 보다는 올바르지 못함을 추구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단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만한 힘과 용기가 없어서 그럴 뿐이지, 그럴 능력만 된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이는 올바름을 그것으로 인해 얻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찬양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름을, 그것으로 얻게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것 자체로서 찬양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부탁한다.

 

―3의 세부 내용―

 

2의 글라우콘에 말에 대하여,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그가 보기에) 마땅히 언급되었어야 했을 것에 대해 보충한다. (362d~362e)

그는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무사이오스와 그 아들들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것들의 공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바른 자는 내세에 신들로부터 상을 받으며,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신들로부터 징벌을 받는다. (363b~364a)

하지만 그 외에도,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시인들이) 하는 언급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올바르지 못한 것이 올바른 것보다 득이 된다고 말한다. 올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력하고 가난하다면 업신여겨지며 얕보아진다. 게다가 신들도 올바른 이에게는 불행이 있게 하고, 올바르지 않은 이에게는 행운이 있게 한다. 부유한 사람은 탁발승이나 예언자들의 제사나 마법을 통해 신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수 있으며, 올바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64a~365a)

그렇다면, 이런 것을 알고, 어떤 식으로 살아야 인생을 훌륭하게 마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는 영리한 젊은이는 무엇을 택하겠는가? 그는 실제로는 올바르지 않지만, 올바른 듯이 ‘보이도록’ 살아야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올바르지 않으면서도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잖은가? 그러나 정치적 결사, 당파나 대중 연설, 법정 변론을 통해 남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며, 제물을 바쳐서 신들로부터의 벌을 피할 수 있기에 문제없다. (365a~366a)

올바른 사람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올바르지 않은 일을 통해 얻는 이득은 얻을 수 없다. 반면 올바르지 못한 이는 그런 일을 통해 이득을 얻으며,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제물을 바쳐서 신들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올바르고자 하겠는가? 아무도 자발적으로 올바르게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르게 하려는 사람들은 단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용기나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도 만일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힘만 갖는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올바르지 못함을 비난하거나 올바름을 찬양하는 데 있어, 그로 인해 얻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가치를 근거로 찬양한 적은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방식으로, 즉 올바름을 그로인해 얻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찬양할 것을 부탁한다. (366a~367e)

이상 국가 건립을 통한 정의 개념 확립(367e ~ 434d), 국가 수립의 기본 원리(369b ~374e)

2012.05.12.

플라톤 <국가> 발제

지 미 정.

 

2012.05.12.

지 미 정.

플라톤의 정의관: 이상 국가 건립을 통한 정의 개념 확립(367e ~ 434d)

1.올바름을 구조하는 방법과 이득과 관련된 진실

1)“우리가 착수하려는 탐구 과제는, 내가 보기에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사람의 일거리인 것 같으이.”…“그러니까 우리는 유능하지도 않은 터이니, 이 문제의 탐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이 내겐 생각되네.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더러 작은 글씨들을 먼 거리에서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즉 똑같은 글씨들이 어디엔가 더 큰 곳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 먼저 이것들을 읽고 난 다음에 , 한결 작은 글씨들이 이것들과 혹시 같은 것들인지를 살피게 된다면, 이는 천행으로 여겨질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368d~368e)

2)“그러니까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그런 다음 한결 작은 형태의 것에 있어서 올바름을 마찬가지로 검토해 보도록 하세나.”(369a)

2. 국가 수립의 기본 원리(369b ~374e)

1)소크라테스의 논변1: 필요에 따라 성립한 국가

(1)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한 가지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사람들에겐 많은 것이 필요하다. 즉 많은 사람이 동반자 및 협력자들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 생활체’(synoikia)에다 우리가 ‘나라’(도시국가:polis)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369b~369c)

(2)나라를 수립하는 일은 우리의 ‘필요’(chreia)가 하는 일이다. 나라는 이처럼 많은 여러 가지 것의 마련을 위해 농부, 집 짓는 사람, 직물을 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다 제화공이나 아니면 신체와 관련되는 것들을 보살피는 또 다른 사람을 보탤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 한도의 나라’(최소 필요국:he anankaiotate polis)는 넷 또는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다.(369d~369e)

(3)각 부류의 사람들이 생산하게 되는 물건들을 나라 안에서 서로들 나누기 위해 ‘협력(공동) 관계’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다. 우리한테 시장과 교환을 위한 표인 화폐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더불어 소매상의 출현과 임금 노동자의 출현도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371b~372a)

2)소크라테스의 논변2: 성향에 따른 기술자가 필요한 국가

우리 각자는 서로가 그다지 닮지를 않았고, 각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에 매달리게 된다. 어떤 일을 더 잘 해내게 되는 것은 한 삶으로서 여러 가지 기술에 종사할 때가 아니라 한 삶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할 때이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의 적기(適期:kairos)를 놓쳐 버리게 되면, 그 일은 완전히 망치게 될 것이란 것도 분명하므로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kataphysin)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이다. 하지만 이 나라를 수입품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그런 곳에다가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나라의 생산품은 자신들을 위해서 충분할 만큼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을 또한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이 나라에서는 더 많은 농부들과 장인들이 필요하다. 더구나 각 종류의 물건들을 수입하며 수출할 또 다른 심부름꾼(봉사자)들이 필요 한데, 이들이 무역상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무역상들도 필요하며 무역이 해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해상 운송에 정통한 또 다른 많은 사람이 추가로 필요하다.(370b~371b)

3)소크라테스의 논변3: 준비된 사람들의 생활 방식

그들은 빵과 포도주, 의류와 신발을 만들고 집을 짓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다. 깨끗한 공간에서 그들의 아이들도 잘 먹이고 즐겁게 교제하며 가난이나 전쟁을 유념하여 재력을 넘게 자식을 낳지도 않는다. 또 그들은 요리를 위해 소금과 올리브, 치즈도 가질 것이며, 후식으로 여러 과일과 포도주도 마시며 평화로움 속에서 일생을 보내다 고령에 죽으면서 그와 같은 인생을 후손에게 남긴다.((372b~372d)

4)글라우콘의 물음1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 ‘돼지들의 나라’를 수립하고 계셨다면, 바로 이런 것들로 그것들을 살찌우지 않으셨겠습니까?”소크라테스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반문하자 “관습대로죠. 그들은 고생을 견디어 내려고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 침상에 기대 누워서, 식탁에 차린 식사를 하며, 또한 요새 사람들도 먹는 것과 같은 요리와 후식을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372e)

5)소크라테스의 논변4: ‘호사스런 나라’가 성립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

‘호사스런 나라’의 성립 배경을 고찰하면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도대체 어떻게 나라에서 자라나게 되는지를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참된 나라’는 ‘건강한 나라’다. 어떤 이들에게는 방금 설명한 나라의 생활 방식으로는 만족감을 주지 못할 수 있다. ‘염증 상태의 나라’를 알아보면, 그들은 의식주만을 필수품으로 여기지 않고 온갖 종류의 것들을 갖춰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한층 더 크게 만들어야 하며, 그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으며 규모와 수에서 확장과 충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부류의 사냥꾼과 예술가, 음송인, 배우들, 합창 가무단원들, 연출가들, 기구를 만드는 사람들, 또 여인들을 위한 소품을 만드는 사람들과 봉사자, 즉 교육을 위한 유모들, 보모들, 시녀, 이발사, 일반 요리와 고기 요리를 위한 요리사가 필요하다. 추가로 돼지 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 밖에 온갖 가축이 필요하며 그 수요가 있는 한은 그렇다. 이 같은 방식으로 살다보면 의사가 필요할 것이고 영토 역시 그들을 먹여 살리기엔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다. 이로 인해 이웃 나라의 땅을 일부 떼어내야만 하고 그들 역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를 벗어나 재화의 끝없는 소유에 자신을 맡기면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한다. 그 다음엔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 말하지 말고 전쟁의 기원을 발견했다는 것만 말하자. 나라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나쁜 일들이 생길 경우에 그 단서는 그런 것들이다.(373a~373e)

6)소크라테스의 논변6: 전쟁의 겨룸도 기술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술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전쟁과 관련된 겨룸은 기술적인 것이다. 제화 기술이 전술보다 더 신경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한 가지 일만 허용했는데 이건 각자가 타고난 적성에 맞는 일이며 이 일이야 말로 적기를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해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이야말로 훌륭히 해내야 하는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일에 능하려면 그 일을 어려서부터 해오지 않고 부차적인 일로 취급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 무기와 장비를 들었다고 해서 전투에 유능한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도구가 그를 장인이나 운동선수로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도구는 그 각각의 지식을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렇다면 수호자들의 일(기능)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반면,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요하는 일이다.(374b~374e)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청춘의 고전 시즌2]-③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③

??? 일시: 2012. 4. 28.?(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Negation, 否定)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

??

강연:? 김성우 교수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계’와 ‘치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물음을 듣고 혹시 누군가 바로 ‘흐르는 시간’과 ‘녹아내리는 치즈’를 연상해냈다면, 그는 어쩌면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화가, 달리만큼 창조적인 상상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 치즈 한 조각,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는 치즈의 하얀 맛과 녹아 흐늘거리는 촉감, 시기와 때마다 돌고 도는 하루해와 수적으로 반복되는 1년, 2년… 이렇게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세계, 그리고 입과 손으로 당연하게 느껴지는 감각 세계를 함께 담아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간의 ‘정지’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시계), 즉 기억된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림에서 흐느적흐느적 흘러내리듯 늘어진 시계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시간 모습을 넘어선다. 생각의 단편인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마치 그림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기억되겠지만, 그때의 기억된 시간은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머지않아 내용을 잃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사막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4월 28일, 김성우 올인고전학당 소장은 이렇게 기억과 시간의 초현실적인 모습을 담은 달리의 그림을 갖고 상상마당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달리의 그림을 이성의 한계를 넘은 “능동적 상상력으로 포착한 예술”이라고 평하고 있다.

?

어떤 상상력이 달리에게 능동적 예술의 힘이 됐을까?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무질서한 조합을 보여준다. 김성우 교수가 꼬집어내었듯 이 그림은 이성의 통제 없이 창작자 위주로 그린 것이지 사실 세계를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 밀로의 <비너스> 여신상처럼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너스 여신상은 사실미에 바탕을 두면서 아름다운 인간을 8이라는 미적 비율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역시 별의 사실적인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빛나는 별의 색감은 그러면서 가슴에 박히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인물묘사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 빛의 효과를 이용해 우리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정감을 전달한다.

반면 달리의 그림은 수학적이거나 고전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미의 맛을 보여준다. 눈감은 사람,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바다와 땅, 사막, 고정된 사각형 모양의 대지, 그 위를 역설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시계의 시간밖에 없다. 친숙한 사물들이 묘사되지만 서로 다른 맥락들이 만나 ‘시간의 운동’이라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성우 교수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적인 신비스러움을 자극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화가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달리의 그림을 두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감상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의 무의식 세계를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그림이 1931년도 작품임을 고려하면, 이때는 무의식이론의 거장 프로이트가 이미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은 때이고, 그의 정신분석학연구가 세계?역사적으로 인정받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 정권의 수립으로 정신분석 서적출판 금지처분이 아직 내리기 전이기도 하다. 즉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생과 사가 무수히 교차하는 전쟁의 폭풍이 지나기 전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천재라고 부른 달리(1904-1989), 그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적 창작력은 그럼에도 그가 지켜보았던 전쟁의 아픔과 인간사의 비극 내지는 정치적 허무와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인다. 달리는 오히려 정치적 현실과 무관한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는 “예술은 사실주의의 거울이 아니다. 그래서 창 없이도 사회를 표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꿔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생계 요구는 물론 필연이지만, 진정한 예술은 이데올로기나 상황에 좌우되는 사회적 창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사회 그 자체, 거시적으로 삶 근저에 놓인 인간사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론적, 역사적 존재이다. 단순한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난해한 예술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 예술 그 자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의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김성우 교수는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그의 말처럼 “자율성과 사회적 사실 사이”에서 생겨나는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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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1903년에 태어난 아도르노는 시대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 있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어서 미국으로 이주를 가야만 했고 전쟁이 끝나고서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하였다. 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시대와 철학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과 『미학이론』(?sthetische Theorie 1970, 미완성)을 저술하였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학이란 칸트나 헤겔이 보여준 것보다 좀 더 예술적인 것이었다. 칸트는 물리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승화시켜 창조적으로 규칙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리켜 예술적 재능이라고 하였다. 독일에 쾰른 성당이나 이탈리아에 두오모 성당은 제한된 양의 길이와 넓이를 초월한 수학적 건축미로 탄생한 것이다. 또 바티칸에 피에타상(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은 힘의 숭고미를 역학적으로 보여준다. 산과 바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건축이나 조형의 예술미는 본래의 형식을 무제약적으로 넘어서는 숭고미에 속한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미적 판단력이 자연미를 시공간적 형식을 통해 인식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념적으로 느끼고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구상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칸트의 이러한 관점은 이후 아도르노의 예술철학 형식미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예술성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이미지화이다. 아도르노의 견해로 이 미적인 능력은 조건과 한계를 넘고 넘어 또 새롭게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부정'(Negation, 否定)의 원리에 기인한다. 대상이나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예술적 창조력은 바로 이 부정의 과정, 비동일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은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가 얘기했듯 명확하게 헤겔 변증법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변증법이란 예컨대 씨앗이 새싹을 내고, 자라서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정-반-합의 방식으로 정신도 처음에 단순한 존재의 상태에서 점차 생성변화의 상태로 그리고 완성된 상태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윽고 다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말하자면 헤겔 변증법이다.

아도르노 변증법은 나와 타자,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개인과 사회, 과거와 미래 등등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차이’로 인정하는 데에 그 독창성이 있다. 각각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기존의 것에 대한 관계를 통찰함으로써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 틈을 본 것이다. 변화 자체의 조건을 수용하는 아도르노는 그래서인지 인간과 자연을 도구화, 사물화의 대상, 즉 변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합리적인 이성에 치중되거나 광적인 파시즘(나치주의)은 인간의 왜곡된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김성우 교수가 말한 바로는 “사물을 정복하거나 노예화하는 것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음악, 춤에 지나치게 동화, 동일화”되는 것은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매몰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리의 경우 그의 특이한 콧수염, 그가 보여주었던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퍼포먼스, 때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전위예술 등은 미메시스 충동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한 자연미는 달리의 추상화 중에서도 특히 <기억의 지속>에서 생생히 구현되었다. 그림 속에 시계를 비롯한 여러 요소의 조합은 아도르노의 “흩어져 있는 것들의 비폭력적인 종합(Konstellation)”을 가리킨다. 달리의 모방적 자율성은 분명 예술의 무사회성이다. 또한, 그림 속 시계의 존재와 움직임은 마치 화해를 위해서 화해에 대한 모든 기억의 흔적마저 지우는듯하다. 규정된 사회, 규정된 삶과 현실에 대한 규정적인 부정, 이러한 아도르노의 예술관이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김성우 교수는 이번 강연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와 아도르노의 미학의 연결점에서 그가 강조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러므로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꽃처럼 붉은 울음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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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이사는 수 없이 다녔다. 아니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살다가 떠나가라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울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산의 집단촌은 초가집이었지만 방이 있었고, 비도 피할 수 있었다. 거친 식량이었지만, 관청에서 나오는 배급품도 있었기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의 원성에 못 견뎌 한센인들은 흩어져 다른 지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순서는 정확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지명을 다시 말하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 옮겼다. 60년, 50년 전에 다니던 데는 가물가물한다. 험하대이.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서러움을 세상이 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할머니는 울산 집단촌을 나와 부산으로 온 것은 기억하지만, 부산의 첫 지명은 기억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듯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부산에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은 그리 큰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센인들이 모여 산다는 말이 돌자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때로는 가족이 들어와 함께 살면서 마을의 규모는 커져 갔다. 울산에서도 그러했지만, 마을이 커지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 주변 사람들의 핍박은 거세진다.

구걸도 힘들었고, 마치 한센병이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것처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비한센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한센인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했다. 그들은 주거 공간이 다르고, 주거지가 많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도 같은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비한센인들에게 한센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를 넘어 없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거기서 용호동으로 갔제. 그래도 거(용호동)가 괜찮았다. 좀 살았던 것 같네.” ‘좀 살았던 것 같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사셨어요?” “아매 2~3년 살았제. 하모. 그때는 마이 살았던 거제.” 용호동에서는 양계를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밤낮없이 일만 했다. 바닷가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한센인들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2. 세상이 그런 기라

 

2004년도에 우연히 용호동 한센인 집단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45도에 가까운 경사로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 판잣집들은 철거 중이었다. 지금은 부산 용호동을 대표하는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하여 한센인들의 집이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그날 나는 보았다.

창문 대신 비닐이 쳐져 있는 집들의 대부분이 반쯤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륙도가 보이는 그 곳 바닷가에서 노인 대여섯 명이 무표정하게 우리 일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산과 집단촌 사이에 나 있던 도로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방문들이 부서져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참으로 처참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그때 용호동 바닷가에서 보았던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던 그 노인들은 전기도 수도도 끊어진 그 곳에서 바다만 보고 있었다. 노인들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햇살뿐이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이 그러했으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을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비켜서지 않고 바다를 보고 지은 집들에는 한센인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던 척박한 환경이어서 한센인들은 집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 밑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서 천막을 하나씩 지어 내려 간 것이 바닷가에까지 닿았을 게다. 세상이 바뀌어 그 곳이 천혜의 자연을 지닌 산책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오래 전에 강제로 쫓겨 와 살기 위해 구걸하고 한편으로는 닭을 키우고 비탈을 개간하여 천막을 판자로, 다시 판자의 일부가 스레트로 바뀌었지만,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연은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곳은 이제 부자들이 도시의 오염을 벗어나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한센인들은 그 곳을 떠나 다시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용호동은 왜 떠나셨어요?” “휴우, 거기는 살기가 괜찮았다. 바람이 마이 불고 추워도, 산나물 있제, 계란 팔제. 계란은 파는데 남는 기 너무 없는 기라. 그래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았제. 그기 그렇다. 처음에는 그렇다가 좀 있으모 꼭 말썽이 생기는 기라.”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 나중에 들어 온 사람, 일 안 하고 잘 묵는 사람, 세상이 그런 기라.”

 

3. 아픈 줄 모른께 그리 살았제

 

할머니는 최초의 정착인이 아니었다. 이미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에 할머니가 들어갔으므로 내부의 갈등으로 떠나야 할 사람도 할머니와 함께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닭을 키워 계란을 팔았으나, 직접 시장에 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자연히 외부에서 계란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을 내부에서 그 중개인을 상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의혹에 의한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좀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갈등 끝에 시시비비가 붙었고, 일의 잘잘못을 떠나 공동체는 분열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용호동을 떠나야 하는 쪽이었다. 같은 한센인이지만 그 갈등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은 용호동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람들끼리 나뉘어져 정착한 곳으로 현재도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어 보였다. 할머니를 만나기 이전에 먼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을 방문했었다. 그 곳에서는 개인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다. 나와의 만남을 가져보겠다는 사람도 마을 대표의 한 마디에 연락처도 없이 뒤돌아섰고, 나는 마을 안으로 아예 들어서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부산의 또 다른 지명은 신암이었다. 신암이라는 지명은 기억하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었다. 단지 많이 힘들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신암에서 강제로 이주 당해 간 곳이 을숙도였다. 할머니는 을숙도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을숙도에서의 생활은 몸은 고단했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한센인들이 이주하기 전부터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한센인들은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며 생업에 열중했기 때문에 마주 칠 일이 거의 없었다. 섬이었지만 누군가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한센인들은 어떤 일이든 했다. 원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집중한 반면, 한센인들은 섬에 지천으로 널린 갈대와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었다. 갈대와 싸리나무는 젊은 남자들도 맨 손으로 꺾어 다듬기 어려운 식물이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불편한 손으로 갈대와 싸리나무를 꺾어서 구부리고 다듬어 빗자루로 엮었다.

그 빗자루는 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 갔다. 함께 사는 것은 거부했지만, 한센인들이 만드는 빗자루는 다른 빗자루보다 견고하고 성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도 한센인들이 뭍으로 직접 나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작은 나룻배에 싣고 강 가운데로 가면 뭍에서 나룻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넘겼다. 그 길만이 당시 을숙도에 살고 있던 한센인들의 생계수단이었다.

“김선생, 말도 마라. 온 손은 상처투성이고 피도 마이 났다. 피 나는 줄도 모르고 했다. 한참 하다 보면 그것들(갈대와 싸리나무) 군데 군데 피가 묻어 있는 기라. 그래 보모 온 손에 피라. 아픈 줄 모른께 그리 했제. 아팠으면 그리 했겄나” 한센인들이 돈을 벌어 삶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이 빗자루를 만드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 했다.

 

4.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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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쓸쓸한 얼굴을 보며,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톱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인 화자가 낙동강 하구 명지의 조마이섬에 사는 건우네 집을 가정방문하여 알게 된 조마이섬의 내력과 그 섬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가는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마이섬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지배했고, 지금은 유력 인사가 사유지로 하려는 곳이다. 갈밭새 영감은 정부에 의해 이주해 온 한센인들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쫓아내다가 팔을 다쳐 흉터도 지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살았으나 아무도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한 몇 안 되는 조마이섬 사람들을 대신하여 갈밭새 영감이 유력 인사와 싸웠으나 결국은 감옥으로 가고, 건우는 학교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내가 들려주는 소설을 집중하며 듣던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릎을 탁 치며 “그긴 갑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의 무대인 조마이 마을은 처음 듣지만,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반색을 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건과 유사한 내용의 소설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강한 호기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긴 갑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가. 요쯤(여기쯤)은 바다고 또 한 쪽은 땅인디, 한센 환자들이 거기 살려고 했제. 그런데 주민들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너거가 왜 오노 하고 막았다. 살라고 하는 한센 환자들하고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들 하고 크게 싸웠제.” 할머니가 사는 을숙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사건은 한센인들 사이에 회자되었기에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를 그 사건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회상하는 그 강변에서 한센인들과 주민들과의 투쟁은 처절했다. “환자들이 거서로 천막을 쳐놓고 살았던 모양이라. 천막을 쳐 놓고 집에 대창을 해가지고 싸우다가 안 되가 저거가(원주민이)…….그래가 술로 받아가지고……. (한센인들에게)술로 얼마나 먹여 놨던가, 한센 환자들이 술 먹고 그 마 잤삤어. 자는 여개(사이에) 그 사람들(원주민)이 와가지고 (천막에)불로 붙였어. (한센인들을)다 죽여 삘라고 불로 붙였는데 그서 튀나오는 사람 창 갖고 찔러 죽이고, 온 가족들하고 그 식구들하고 저쪽에 있고, 요쯤을 점령하면 (한센인)가족들도 욜로 올 수 있는 기라.”

할머니는 그 사건을 설명할 때, 두 팔을 벌려 한쪽팔로는 “요쯤은 바다고”, 다른 팔로는 “한쪽은 땅이고”라는 몸짓으로 그 강변의 지형이 길쭉했음을 온 몸으로 나타냈다. “그래 갖고 젊은 청년들 마이 죽었다. 그때 그래 많이 죽고 그래 갖고 요새 겉으면 한센 환자들 얼마나 많은 줄 아나 그냥 안 있다. 데모를 하든가 무슨 수를 내도 몇 만 명 되는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 되논께네……말도 못하고, 그리 되니까네 군수도 말로 못 하겠다 쿠고.”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어도단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는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하면서 긴 한숨을 쉬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많은 한센인들이 죽었고 다쳤지만, 어떤 보상도 없었다.

요산 김정한은 <모래톱 이야기>의 조마이섬이 가상의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다와 인접한 실제 낙동강변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산은 곳곳을 직접 다니며 알게 된 사실들을 사회 비판적인 안목으로 소설화한 작가이다. 어쩌면 낙동강 주변을 탐색하다 한센인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있었던 참혹한 사건을 듣고 <모래톱 이야기>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모래톱 이야기>가 발표된 196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실제 사건을 그대로 소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조마이섬에서의 한센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소설적 장치로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그 강변의 정확한 지명을 묻는 나에게 “생각이 날락말락 한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고. 하기사 나도 쫓기는 건 매 한가진데”라며 기억을 애써 더듬었지만, 그 당시의 사건만 정확하게 되풀이 했다.

 

5.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

 

젊은 한센인들이 살기 위하여 투쟁하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 사건은 그대로 시간 속으로 묻혀 갔다. 할머니는 끝내 그 곳이 낙동강 어디쯤인지 아니면 부근 다른 지역인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나, 사건의 정황은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이 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시인 서정주는 오래 전 항간에 떠도는 말들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아 세간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한센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묘사했다. 비한센인들은 그들의 관념에 사로잡혀 한센인들을 배척했다.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세인의 어리석음은 ‘오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구분지어 나누어 버린다. ‘나’아니면 ‘너’가 되는 것이다. ‘우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됨을 애써 모른 척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을 그어 관용과 이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병든 몸으로 시간을 헤쳐 나온 생명의 강인함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상념에 잠긴 옆모습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 많은 한센인들의 슬픔을 만나고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그들의 작은 소망을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빛 아래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었던 그들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소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