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비자(visa)계급을 말하다 [썩은 뿌리 자르기]

강경표(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원곡동 이야기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참을 가다보면 안산역에 도착한다. 안산역을 나와 지하도를 건너서 잘 보이지도 않는 2번 출구를 찾아 나오면 그 곳에 원곡동이 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예전에는 외국인 거리라고 하면 이태원을 먼저 떠올렸다. 코쟁이 백인들이 돌아다니는 곳, 백인이 아닐라치면 미국인이 활보하던 곳, 우리나라를 지켜준다던 미군이 놀던 곳 이태원은 그런 동네였다.

원곡동에도 외국인이 있다. 알록달록한 얼굴들만큼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곳, 노동자의 쉼터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토요일 저녁 해질 무렵이면 우즈벡 식당 노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중앙아시아 아저씨들부터 팔뚝만한 꽈배기를 몇 개씩 사가는 중국 아줌마, 식당 유리창에 붉은 글씨로 개 구(狗)자를 멋지게 써놓은 조선족 동포들, 카레 냄새가 향기로운 인도 식당과 먹기 힘들만큼 원래 맛을 고집하는 베트남 식당, 너무나 당당하게 차려입은 짧은 치마가 민망해 쳐다보기도 힘든 동남아 언니들까지 그들의 삶이 있는 그곳이 바로 원곡동이다.

힘들고 허전한 하루를 위로받기 위해 모국에 있는 가족과의 짧은 통화를 기다리며 슈퍼 앞에 차려둔 국제 통화용 전화기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고향 이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까지… 주말의 원곡동은 그렇게 활기차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새벽녘 입김을 불며 나가본 안산역 옆 공터 주차장 인력 시장은 사정이 다르다. 어슴푸레 비치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칼날처럼 나누어진 구획. 한국인, 우리의 동포인 조선족과 고려인, 그리고 외국인들. 인력시장으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 누군가 구획을 넘어 오갈라치면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들. 일용직 노동자의 경쟁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하루 품삯이 한국 사람은 일당 7만원, 동포들은 5만원, 나머지 외국인들은 3만원으로 정해지고 비싼 한국 사람보다는 말 통하는 동포들이 우대를 받는 곳, “저 힘든 일 좋아합니다, 잘 합니다”라는 색다른 억양의 큰 목소리가 몇 번 들리고 나면 봉고차들의 부르릉거림과 함께 거리는 금방 한산해 진다. 오늘도 조선족 때문에 힘센 중앙아시아인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한국 사람들은 무거운 어깨를 뒤로하고 조선족을 욕하며 자리를 뜬다. “새끼들 그냥 짱깨 땅에나 있지…”

– 비자계급

살인미수 혐의의 재미교포는 14년 동안 강남에서 학원장을 할 수 있지만 재중동포인 김산(본명 장지락)의 외손자는 7년 전부터 대한민국에서 목수로 일한다. 행정상의 착오일까? 행정상의 착오라기 하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다.

지난 해 황유복 교수(베이징중앙민족대 교수)는 “해외 거주 한인을 싸잡아 재외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크기와 색상, 재질을 구분하지 않고 구슬을 손에 잡히는 대로 꿰는 격”이라며 아예 동포와 교포를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연합뉴스 2010.10.04). 황교수는 다른 나라에서 한시적으로 거주하는 한국인은 ‘재외국민’, 거주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는 ‘재외교포’,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거주국의 시민권을 취득한 경우는 ‘재외동포’라고 부른다. 사전적인 정의 따르면 ‘동포’란 ‘같은 나라 또는 같은 민족의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고 ‘교포’란 ‘다른 나라에 아예 정착하여 그 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는 동포’를 지칭하는 말로 동포의 외연이 교포 보다는 크다. 사실 동포와 교포라는 단어는 병행해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교수가 동포와 교포를 구분하자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재미동포 재일동포라는 말은 사용해도 재중동포, 재러동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족 고려인이 그들의 이름이다. 동포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들을 동포로 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우리 정부 또한 “재외동포 참정권”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재외동포를 국적에 따라 차별할 뿐만 아니라 지원에서도 많은 차별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자 문제만 해도 재중동포?재러동포와 재미동포?재일동포가 비자를 받는 방식이 다르다. 법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동포는 대한민국에 들어오기조차 힘들다. 재미동포와 재일동포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는 단순노무를 하는 사람에게는 발급되지 않지만 이 비자 취득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있다. 재중동포나 재러동포가 받는 H-2비자는 3D 직종에 근무하는 방문취업비자로 가족을 동반할 수도 없다. 더 황당한 사실은 F-4비자를 받는 사람들은 한국어를 못해도 되지만 H-2비자를 받는 사람들은 실무 한국어 시험을 치러야 할뿐만 아니라 쿼터제로 비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H-2비자는 대상 국가의 경제적 수준을 고려하여 정해진다. 결혼을 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면 재중동포와 재러동포뿐만 아니라 원곡동에 거주하는 약 57개 나라의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비자가 H-2비자다. 그나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C-3비자(관광이나 친지 방문)로 들어와 불법으로 체류하며 이상한 기획사를 통해 E-6비자(수익이 따르는 예술 활동 및 전문 방송 연기자)를 받아 강제로 몸을 팔거나, 외국 학생 유치라는 명목으로 판매되는 유학프로그램을 통해 D-2비자(유학생)를 이용해 들어와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모르는 한국비자의 종류는 9종 94개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재외교포 포함 외국인들을 94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자 취득 자격을 살펴보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나누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 민족계급론

국적에 따른 국가의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재외동포를 바라보는 눈이 그것이다. 스스로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재미동포나 재일동포를 바라보는 눈과 재중동포 또는 재러동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지는 않은가? 또는 백인과 황인, 흑인을 보는 눈이 다르지는 않은가?

생태학의 선구자쯤으로 알려진 에른스트 헤켈은 1905년 그의 저서에서 인종과 민족을 4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1)원시 민족 또는 미개인, 2)야만족 또는 반(半)미개인, 3)문명민족, 4) 문화민족이 그것이다. 또 다른 분류인 <인종과 민족의 계통수>라는 1902년 분류표를 보면 한국계도 그 표에 포함이 되어 있다. 혹시 여러분들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몽고인종에서 분리되어 한국?일본계열이 되며 일본인 보다는 열등한 민족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중국은 몽고인종에서 분리된 인도차이나계열로 우리와는 계열이 다르지만 약간은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물론 우리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민족들도 많다. 이러한 분류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1900년대 초 당시 일본과 독일간의 친분관계와 우리나라의 사회상황을 생각해 보면 일본인 아래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현대에도 민족에 대한 이러한 차별적 분류 기준을 적용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이다. 이런 차별적인 대우가 우리에게 가해진다면? 더욱더 크게 분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가 차별적이다. 백인을 보는 눈과 흑인을 보는 눈이 다르며, 같은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본인과 동남아시아인을 보는 눈이 다르다. 물론 재미동포와 재중동포를 보는 눈도 다르다.

‘다문화 가정’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서 외국인들끼리 살면 외국인 가정일 뿐이다. 우리가 지칭하는 ‘다문화 가정’이란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에 한정된다. 그러나 백인 여자와 결혼한 한국인은 그럴듯해 보이고, 동남아시아인과 결혼한 한국인은 없어 보인다. 한국 여성이 동남아시아 남자와 결혼하면 따가운 시선은 배로 가해진다.

‘다문화 가정’에 다문화는 없고, 언어?생김새?풍습은 다르지만 우리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외국인들만이 칭송을 받는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이해해야 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면서도 다문화 가정을 꾸린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수용할 것을 교육하며, TV에 나오는 외국인들이 한국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싸늘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스스로 계급을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에 사는 한민족이 일등시민이다. 나머지는 국적과 피부색, 한민족과의 연관성,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일등시민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비자를 발급받는 순간부터 계급이 생긴다. 그 계급은 안산의 원곡동이라는 작은 동네에서조차 임금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 다시 원곡동 이야기로…

대학 초년 뭣 모르고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 다니던 시절 이문열의 <구로 아리랑>이라는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그 글이 생각나는 것은 ‘구로’라는 동네 배경과 공순이라 불리던 언니들 때문일 것이다. 소위 공순이라고 불리던 순박한 언니들의 삶을 생각해 본 것도, 내가 누리는 경제적 혜택이 대기업들의 회장 덕분이 아니라 밤낮으로 고생하며 일한 언니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 때쯤이다.

빈곤의 상징이었던 구로동과 가리봉동은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 단지로 변신했다. 그 많던 공순이 언니들은 우리의 엄마 아빠가 되어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많은 공장을 돌리던 일손은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원곡동, 안산 원곡동에는 우리의 언니 오빠들을 대신해 공장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일하는 근로자는 아니지만 우리를 대신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돌아가도록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돈을 버는 목적은 각자 달라도, 사용하는 말과 생김새?국적은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우리 경제의 바닥을 지탱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방가? 방가!’라는 영화가 있다. 취업을 하지 못한 한국인이 부탄 사람으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 겪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원곡동이다. 이 영화는 재미있지만 슬프다.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노동자에게는 민족이 없다. 노동을 통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언제나 평등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비자 발급 제도는 계급을 만든다. 아니 이미 계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제도다. 거기에 우리의 차별 섞인 눈빛까지 더해진다. 원곡동이라는 국경 없는 마을에도 계급을 가르는 비자가 있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무세이온의 올빼미]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무세이온의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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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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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간순간을 아파하며 민감하게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힙합 정신에서 미래를 본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에 안주하고 물질을 위해서 오늘을 달리고 있을 때, 지하철 어느 모퉁이를 연습장 삼아 춤추었던 사람들, 비 새는 공동 작업실에서 물을 퍼내가면서 음악 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들의 젊음과 열정이 ‘돈 벌어 먹고 살기의 쇠 창살’에 갇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진실을 느낄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 키비라는 한 힙합 음악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함께하기 바란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키비(kebee)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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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비( 2007년 앨범)힙합 인디 레이블의 아이콘인 ‘소울 컴퍼니’의 사장이자 힙합 뮤지션인 키비를 만난 건 2011년 2월 25일 저녁 6시 10분이었다.

‘소울 컴퍼니’ 위치를 설명하기 곤란했는지, ‘상상마당’ 앞에서 보기로 했다. ‘상상마당’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너는 홍대 앞에서 클럽 가지? 나는 홍대 앞에서 철학한다!’라는 모토로 철학 강좌를 연 홍대 앞 문화 공간이다. 키비는 상상마당에 미리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이지만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키비의 단정하고 반듯한 미소가 반짝였다. 처음엔 뭐라 말해야 할지 많이 걱정하고 갔는데, 환대받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무엇이든 물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마당에서 소울 컴퍼니로 가는 200여 미터의 짧은 거리 동안, 그 잠시도 놓치지 않고 몇 가지를 물었다. 대뜸 ‘어찌 그리 단정하냐?’고 물었다. 웃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힙합 공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께서 힙합 공연에 아이들만 보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시더라’ 한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 『소년을 위로해 줘』를 쓰기 전에 키비를 벌써 만났던 거냐와 주인공 소년이 키비를 모델로 했던 거냐를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은희경씨가 소설을 쓰면서 고민을 하는 글을 읽고 키비가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한다.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얘기를 나누며 잠시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어떤 여학생 둘이 내게 묻는다. 혹시 저분 키비 아니냐고. 맞다고 했더니 “꺄~” 소리를 지르며 키비에게 자기들을 소개해 달라고 한다. 불과 이들보다 1분 앞서 만난 내가 키비에 대한 기득권이 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고,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금 만나고 있는 키비의 유명함에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뮤직 비디오 화면만으로 보던 키비의 사무실, ‘소울 컴퍼니’는 가운데 넓은 공간의 사무실과, 내부의 작업실들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네모난 사무실인데 난 그 공간이 둥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누는 이야기가 둥글었던 것 같다.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은 ‘힙합을 청년 문화라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힙합을 많은 청소년이 듣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키비는 이를 인정했다. ‘오버 그라운드든 언더 그라운드든 클럽에 찾아와 듣고,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언더 그라운드 음악을 찾아 듣는 건 소수’라는 것이다. 찾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취미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청소년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단도직입적으로 키비에게 ‘오버에 못 올라갔나, 안 올라갔나’를 물었다. 키비는 이렇게 답했다.

키비: ‘그걸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다. 음악하는 사람의 목표 지점은 각자 다르다. 유명해지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자기 음악을 제시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등이다. 나는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동기였다. 자기가 음악 생산에 다 관여할 때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을 하려는 사람에게 열린 길 중에는 기획사에 들어가는 식의 오버 그라운드 방식도 있지만, 이 중에서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것이 곧 언더 그라운드이고, 그게 인디 음악이다. 시장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청중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표현을 쓴다’라고 물었다. ‘그리고 현실의 무엇이 키비에게 시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더를 하게 했나?’라고도 물었다. 키비는 답했다.

키비: ‘22세에 창업했다. 형동생 하는 친구들이 회사를 만들어 7년 왔다. 기획사에 들어가 오디션을 보거나 데모 시디 갖고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고, 스스로 만들어봤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자기 길 가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안 하는 사람도 생겼다. 음악의 유일한 길이 기획사 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입증하는 거다. 기획사 가면 자기 음악보다 기호에 맞는 음악만 억지로 하게 된다. 같이 음악 시작했던 사람 중에 자기 색 잃고, 그렇다고 상업적 성공을 하지도 못한 친구를 보았다.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생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을 구입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유지되니까. 나는 취미로 음악을 하는 게 아니고 그게 내 삶이니까 그걸 통해 살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존립하는 거다.’

‘음악을 하게 된 시점’을 물었을 때 키비는 중학생 시절을 기점으로 꼽았다.

키비: ‘중학교 방송반 하며 힙합을 점심시간마다 틀었다. 미국 본류 힙합. 궁금해 하다, 따라 듣다, 졸업하고 나서 고교 가기 직전, 클럽 가서 너무 충격적이고 즐거웠다. 프리스타일 랩. 비트에 맞춰 하는 즉흥랩을 보며 멋있고 놀라웠다. 지금 성격도 까불지 않는데 그 때는 더 조용했다. 말하고 싶고 억눌린 것이 있었는데 그 장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었다. 뮤지션과 관객 모두에게. 나를 데리고 간 친구가 랩을 하더라. 나는 처음이어서 안 올라갔지만, 이 때 랩이라는 음악이 가슴에 들어왔다.’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키비: ‘가사 쓴 건 고2때부터인데, 첫 작품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당시 노트는 있다. 힙합은 가사량이 많고, 많을 수 있다. 메시지가 많을 수 있다.’

‘비트나 비보잉 등을 중시하는 힙합퍼도 있을 텐데. 키비는 가사에 집중하나?’를 물었다.

키비: ‘나는 처음에 힙합 문화는 몰랐고 랩이 좋았다. 랩하고 가사 쓰고 프리스타일하면서 힙합 문화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반대 경우도 있다. 힙합 문화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랩에서 라임이 중요하다, 아니다에 대해 논쟁하며, 네 라임은 1차원적이라는 둥 서로를 극단적으로 비방하며 하는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키비: ‘나는 논쟁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뭐가 옳든 그르든 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만큼의 에너지가 오간다는 게 중요하다. 사실 정답이 없다. 음악에서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하다보면 정답이라는 게 무의미하다. 누군가 정답을 만드는 순간, 그것에 대한 대안이 만들어지니 정의내리는 게 시간낭비이다. 하지만 누구든 답을 만들고 싶어 하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이 힙합씬을 활발하게 만들고 있으니 답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지 않은가?’

‘미국 힙합씬에서 배틀하다 죽이기, 디스하기, 분쟁 등의 사례가 있다. 한국 힙합씬에서는 이런 게 어떻게 드러나나?’

키비: ‘한국에서는 뮤지션, 매니아, 힙합 범주 밖에서 보는 사람들 모두 조금 오해하는 게 있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며 우리 힙합은 우리 문화 속에서 하는 거다. 흑인 문화가 그대로 우리 삶 속에 들어올 수는 없는 거다. 우리 문화와 사회적 흐름 안에 어울리는 형태로 힙합이 발전하는 거고 나라마다 다르게 발전한다. 미국 문화를 보면서 가사에 그런 분쟁 써야 해 라는 생각을 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건 그들의 철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문화와 다른 문화 토양 속에 있는데, 그런 걸 그대로 가져오는 건 이율배반 아닌가 싶다. 우리 풍토와 상황에 어울리는, 내 스스로가 편한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서정적인 랩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 문화 안에서, 우리의 흐름 안에서 형성된 내 성격에 따라 나는 음악을 해가고 있다.’

‘요즘 들어서 키비의 음악 스타일 달라졌다는 평도 있더라.’

키비: ‘그건 신경 안 쓴다. 그때그때 하려는 게 있고 앨범에서 성취하려는 것 있다. 10년 여 음악을 해왔다. 그동안 어떤 굴곡을 가졌다고 내 음악에 결론을 낸 게 아니다. 앞으로 성취해야 할 음악이 훨씬 많기 때문에 변했다는 평은 나를 흔들지 못한다.’

‘그렇게 붙들려고 하는 힙합, 힙합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코어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키비: ‘삶이다. 무슨 얘기냐면, 힙합은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더 말에 가깝다. 더 날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익히지 않은 날고기 같은 것. 힙합 음악에 내 삶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고, 삶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더 자유로운 것 같다. 물론 록도 자유다. 음악의 정신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힙합 음악 속에 담긴 자유는 겪은 삶이 있고, 겪은 삶을 삶 그대로 풀어낼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자유를 만끽하는 거다. 힙합은 다른 음악 장르보다 훨씬 더 말에 가깝다. 그래서 정제해서 만들지 않아도 분출해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이런 생각 형성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혹은 사람은 누구인가?’

키비: ‘가리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한국 사회, 한국의 말에 가장 맞는 힙합 음악을 추구하는 정신을 배웠다. 가리온의 메타 형은 불혹으로 나와 띠동갑이다. 2011년 2월 23일에 있었던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가리온이 ‘올해의 음반’, ‘최우수 힙합 앨범’, ‘최우수 힙합 노래’ 등 3관왕의 쾌거를 이뤘다. 굉장한 사건이 아닌가?’

‘키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키비: ‘지금 가르치는 사람은 있지만 내 음악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 생기지 않겠나?’

‘음악을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사람. 이전에 없었던 걸 창조하는 사람을 보면 경외의 마음을 느낀다. 글을 몇 자 쓰는 사람으로서, 글 쓰는 건 재배열의 성격도 있는 것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거니까. 그러나 음악을 창작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 느끼는 창작의 고뇌는 무엇인가?’

키비: ‘나도 무에서 나오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살지 않고는 무엇이 안 나온다. 경험했기에 음악이 나온다. 창조하는 사람은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듯하다. 모두가 많은 걸 겪으며 사는데, 그것을 관찰해내고 기록해내고 남기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자기와 맞닿아 있는 걸 접하고 느끼면 좋아하는 사람이 예술가인 것 같다. 삶이 없는 예술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 삶의 궤적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친구들과 내가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점차 나는 음악하고, 다른 친구들은 직장 혹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서로 나눌 얘기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은 예술 범주 아닌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적어지니, 서로 공감할 것이 결국 사랑밖에 안 남지 않았나 싶다. 옛날에는 사랑 얘기 질색했는데, 이제 건드릴 주제가 사랑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얼마나 삶을 살고, 겪어서 음악을 풀어낼까 하는 게 과제인데, 연애하다 상실하고, 일 안 풀려 술 먹으며, 그래 이것이 가사 소재가 되네 하며 그런 식으로라도 위안한다. 현재 창작의 고뇌라면 바로 이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조우할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는 것.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유네스코 예술가 정의가 자기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제는 먹고 살기, 정치는 공존의 문제 등 삶과 절박한 연관을 갖고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경제와 정치는 잘 못되면 누군가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고통이나 피해 유발하지 않는 무해한 방식으로, 인간이 바라는 것,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키비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인가?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키비의 고통은?’

키비: ‘사실 나는 음악을 택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음악이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통해 경제 생활도 하고 이걸 통해 세상에 내 존재 증명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무리 봐도 내가 음악을 선택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선택을 했다면 이것저것 중에 고민해서 이 길로 결정하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항상 나는 음반을 내고 있으면서도 내가 과연 음악을 할 수 있나 물었었다. 예술가라는 자의식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힘겹게 형성되었다. 나는 가수라는 직업을 가졌고 노래를 하니까 가수야가 아니라, 항상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삶을 살다보니 어느새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금까지 낸 음반이 네 장이 된다. 앞으로 더 하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소외감이 있다.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립되어 있다는 감정들. 그건 어릴 때부터 느꼈고, 그건 모든 사람이 그렇다. 고독.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 같다. 다 가지고 있는 고독. 예술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살기 때문에. 예술처럼 무해한 영역이 또 없고,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통해 무엇이 전달된다. 나 혼자에게서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가치가 전달되었다. 그런 의식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자아를 찾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것, 만드는 음악이 누군가에게 들려지니까 어떤 대상을 두고서 쓰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쓰는 가사가 아니라 나를 통과했기에 흘러나오는 것이 나의 가사이다. 이렇듯 자기에게 온전하고 충실하고 자기를 다 벗겨 놓을 수 있는 작품이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내가 위로를 받아야 그 감동이 남에게 갈 수 있다. 누가 들으면 안 된다거나, 누구에겐 불편할 수 있다고 하는 검열 장치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런 장치 때문에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건 다른 누구에게도 감동을 못 준다.’

‘정말 잘 위로 받은 느낌이 드는 가장 좋았던 곡은?’

키비: ‘‘소년을 위로해줘’이다. 20대로 넘어오며 강요된 남성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내 고민을 그대로 드러냈고, 비슷하게 고민한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대표곡이 되었고 인기를 누렸다. 인기를 위해 장치를 만든 게 아니라 고민을 그대로 얹어놓았다.’

‘또 있나?’

키비: ‘2집의 ‘백설공주’를 들 수 있겠다. 동화 ?백설공주?로 스토리텔링했다. 음반이 나온 해는 2007년인데, 아이디어는 2003년에 떠오른 걸 묵혀놨다 발표했다. 나이 드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가 궁금했다. 이 곡은 왕비가 주인공이다. 왕의 사랑을 받다가 백설공주가 나타나 사랑을 빼앗긴 그녀도 과거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텐데. 어린 소녀로 인한 그녀의 상실감에 대해 풀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니?’를 물은 게 왜 거울이었을까? 거울이 ‘백설공주’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거울은 자기다.’

대화를 하는 내내 키비의 사색의 깊이가 느껴졌다. 사색하는 뮤지션의 초상을 보았다. 끝으로 『한국 힙합-열정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소울 컴퍼니’의 ‘소울’이 ‘疏鬱’, 즉 ‘답답함을 풀어헤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키비’의 뜻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고 유쾌했다. ‘나중에 막 의미를 붙였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없더라. 사실은 스타크래프트 아이디를 만들다 옆에 있는 공룡 그림 보고 친 건데 그렇게 말하긴 뭐해 의미를 막 붙였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니까 그냥 솔직히 말한다. 우발성의 계획(contingency plan).’

키비와 소울 컴퍼니와 힙합인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한 잔잔한 대화였다.

– 끝으로, 지은에게

『어린왕자』에는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 얘기를 하면 ‘무슨 놀이를 좋아하나’와 같이 중요한 건 묻지 않고 ‘그 애의 나이는? 몸무게는?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나?’ 등 숫자에 얽힌 질문만 한다고 투덜거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느덧 과거의 내가 이상하게 여긴 어른의 모습대로 나의 아들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심하다. 때론 아이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할까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예술을 좋아하는 공학도나, 철학에 조예가 깊은 회사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그 고통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생각한다.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통이 있고, 고통에 대한 표현이 있고, 고통에 대한 위로가 있는 것이다.

키비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소년을 위로해 줘’로 승화되었다. 지은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그녀의 글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우리 곁에 무수한 비명과 위로가 맴돈다. 예술과 철학을 하는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이 저렇게 노래로, 작품으로 승화되어 교호하고 있다. 아들의 MP3에 담긴 곡들은 그의 비명이자, 그의 존재의 외침이다. 내 마음에도 울려 퍼지는 공감의 박동은 기성세대가 되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이다.

자, 지은. 래퍼로서 따라해.

 

눈이 부시게 온 눈을 보고

화가 나는 우리~

눈과 같던 하얀 마음

지금은 녹슨 구리~

지친 마음 위로하며

상처를 나눠 둘이~

아픈 비명 달래어 주는

노래 불러 주리~ (작사 박민미, 작곡 누구나, 노래 우리들)

자거라투스트라, 역사법칙에 내기를 걸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너 이놈, 자거라투스트라야, 감히 내기를 걸다니?

아, 니체 아부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놈아, 니가 어제 밤 술 먹고 들어와서 중얼거리지 않았더냐? 박근혜가 대통령되면 니가 백만 원 따게 되었다고 히히닥거렸지.

아, 그랬나요? 맞아요. 어떤 후배의 농간(?)에 넘어가서 그만 내기를 걸고 말았죠? 박근혜 떨어지면 그 백만 원 가지고 잔치 벌리죠 뭐.

아이고, 이 멍청한 놈, 그런 내기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게 진짜 죄악이지.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야, 박근혜가 된다는 근거라도 확실하냐?

니체 아부지, 제가 철학을 했지 어디 점술을 배웠겠어요? 그러니 그걸 어찌 제가 알겠어요. 다만 거꾸로 생각한 거죠. 지금 박근혜의 대항마로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해서 말이죠.

자거라투스트라, 너보다야 더 한심하겠니?

저야 공부하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나요? 하지만 그들은 어떤 정치적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한심해서 제가 그런 내기를 한 거죠.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도대체 정치란 무엇입니까?

야, 이놈, 내가 공자님이냐. 그리고 니가 무식한 자로(子路)이냐? 그런 식으로 묻게?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본 것이 있는 데… 말하면 니가 알까?

제가 서자이지만 그래도 아부지 아들 아닙니까? 말씀 해보세요.

니도 알겠지만 다윈 선생한테 내가 배웠지만, 진화란 일종의 자연선택이 아니냐. 자연은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상황이 변화하면 거기 맞는 변이를 선택해 지속하려 한다면서? 나머지 변이는 더 이상 쓸 데 없으니 진화의 시궁창이 속으로 내 던져지고 말지. 마찬가지 아닐까? 정치라는 것도? 정치가들도 다양한 변이를 미래의 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겠지. 그런데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될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정치인들은 전부 역사의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 말지. 정치가들은 자신이 선택될지를 모른 채 하나의 변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역사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겠지. 그게 정치가의 ‘운명’이 아닐까? 정치가는 그런 운명을 짊어지는 운명애적 존재가 아닐까? ‘아모르 파띠’, 그게 내가 늘 부르짖던 것이잖아.

아부지 말씀은 꼭 헤겔이 역사이성과 영웅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과 같네요. ‘이성의 간지’라는 말씀이죠? 하지만 정치와 자연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우여곡절과 전전반측이 있지만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는 이런 큰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바로 그 흐름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소위 역사의 전위라는 말이죠. 그런 예측적인 선택을 정치가의 ‘모럴’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의 패배는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죠.

정치는 모럴이 아니야, 운명이라는 거지.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는 아직도 역사의 법칙이란 게 아직도 있다고 믿느냐? 마르크스의 법칙이란 19세기 역사를 통해 포착한 것이지. 그때는 소위 세계라는 것이 없었어. 그저 민족국가만이 있었지. 자본주의의 민족국가적인 발전 단계였던 거지.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있는 이 단계에서, 이제 그런 역사법칙이란 의미 없지 않을까?

세계사가 성립한다고 역사법칙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네요.

거 봐라. 니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더냐.

아, 아부지, 저도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보았어요. 아부지 말이 이런 거죠? 제가 설명해 볼게요. 국제자본은 일국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국제적 차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거죠. 이런 구조 속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지구적 차원에서 분산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한쪽이 문제되면 다른 쪽에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국제자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는 거죠?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 가까운 주장이시죠?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 거야 IMF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런 단계에서 역사법칙 운운하다니 자거라투스트라야, 어는 어느 시대 사람이냐? 나보고 19세기라 하는데, 니야 말로 19세기가 아니냐?

아부지, 곰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재주를 피운다더라도 언젠가 떨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필연적인 사건이죠. 마찬가지로 국제자본이 두 손으로 5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을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는 놓치고 말죠. 5개 돌리다가 4개를 돌리더라도 국제자본이 돌아야 가겠지만, 한 개 떨어뜨린 공은 어떻게 되나요? 거기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저는 지난번 중동에서 일어난 자스민 혁명이 바로 그런 거라고 보아요. 그 중동이란 것이 국제 자본이 돌리던 공 중의 하나였는데, 그만 떨어뜨렸던 거죠. 그 사이에 혁명이 터졌구요.

글쎄다, 그게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는데, 자스민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에는 지금 군부가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사살한다 하더라.

아부지, 저는 그저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 거지, 반드시 성공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잖아요.

자거라투스트라야, 역사법칙이란 구시대 유물을 고집하려고 너무 어려운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역사에 법칙이 없다고 보면 아주 단순하잖아. 그리고 모든 이론이란 것이 단순한 거구. 역사에 법칙이 없다면 나쁠 게 무엇이 있니? 니들 철학자들이 먹고 살게 없어서 좀 안 되긴 했지만, 니들 철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우리가 머리가 아파야 하겠니?

아부지, 역사법칙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법칙이 없다면, 무엇이 역사를 지배하겠어요? 결국 힘이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힘이 정의죠.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요? 언젠가 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게 바로 종말론이라는 거야. 니들이 역사가 심판해 줄 거라는 거지. 이 세상의 부정의와 고통과 학살을 신 대신 역사가 심판한다는 주장이 바로 ‘역사법칙론’이라는 주장의 실질적인 의미가 아니냐? 역사에 종말은 없어. 그걸 모르겠니? 그건 기독교가 뿌려놓은 아편이지. 신이 아편이 아니야. 종말이 온다는 믿음이 아편이지.

아부지,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아편이 아닐까요? 아부지의 말씀은 절망이죠. 우리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이라는 아편이죠. 아부지, 사르트르는 잠들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잠 든 척 하는 거라고 말했대요. 실제로 잠 든 척하다보면 잠 들 거라는 거죠. 우울증 환자는 세상을 우울하게 보기 때문에 더욱 더 우울하게 된다고 하죠. 실제로 그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 아닐까요?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다면 실제로 역사에 법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존재를 만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놈아, 그런 놈이 왜 진다는 내기를 했단 말이냐? 진다고 믿는다면 결국 지게 될 거 아니냐? 그러니 니가 패배주의를 선동했다 하는 거야. 알겠니?

딸바보, 그 가부장성에 대하여 [배운년, 미친년, 나쁜년]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딸바보’라는 신조어가 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란다. 어떤 연예인은 ‘딸바보의 원조’라 하고 또 다른 연예인은 ‘딸바보의 종결자’라 불리운단다. 주변의 남자 선후배들 역시 딸바보 임을 자처하는 이가 많아졌다.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을 딸아이의 핸드폰 번호로 저장하기도 하고 컴퓨터, 핸드폰의 바탕화면을 딸아이의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게다가 딸 아이 사진을 서슴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며 자랑까지 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딸 관계가 남달라지고 ‘딸바보’라는 용어가 새로운 남성상을 대변하게 된 세태를 두고 가부장제가 그만큼 약화된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이제는 어머니-자녀의 관계, 모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자녀의 관계, 부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이르게 된 것이라 말해도 좋을까?

-모성과 가부장제의 변주곡

가부장제와 모성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은 거의 일반화된 논의다. 모성을 여성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하고 여성 일반에게 강요하는 것은 확실히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과 부합하며 이러한 생각에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모성을 여성억압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지나온 역사 속에서 모성과 가부장제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고 모성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제에 봉사하였던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처럼 가부장제가 모성 강조에 언제나 협조적인 것은 아니다. 그 둘의 관계 양상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모성과 가부장제는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지만 종종 갈등하고 모순 관계에 놓인다. 그래서 가부장제 질서를 위하여 모성이 포기되거나 모성의 강조가 가부장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상황을 산출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 유교 사회에서 모성은 출산-태교-자녀교육의 과정으로 이어지면서 여성들의 중요한 규범적 책무로 되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모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 모성이 강조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가부장 질서를 유지하고 공고화 하는 데 있었고 따라서 어머니-자녀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 보다는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나오는 정서(모성)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얼마나 잘 확장하였는가가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보다 부모 봉양이나 조상의 제사가 더 우선시되는 전통 유교의 정서는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 출산과 자녀 교육의 의미는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가부장제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자녀와의 친밀한 정서보다는 자녀를 기르는데 부지런히 애쓰고 그 성공을 바라는 것의 목적이 가문을 이어가며 죽은 사람을 잘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잘 봉양하려는 것에 두어져 있다.

열녀 이 씨의 이름은 아무개로 선비 김 아무개의 아내이다. 나이 스물 하나에 그 남편이 병들어 죽자 바로 머리를 풀고 짚자리를 깔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입관한 뒤에 관에 기대 곡을 하고 말했다. “장례가 끝나면 따라 가겠습니다.” 달을 넘기면서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졸곡(삼우제 뒤에 지내는 제사) 때 곡을 하며 말했다. “홀몸이 아니니 감히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일 년 뒤에 따라 가겠습니다.” 해산을 해서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로 여기지 않고 여종을 골라 그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다….“제가 복이 없어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내로서 마땅히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 저 어린 아이로 핑계를 대고 남편이 제게 말한 것을 어찌 감히 지키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불러 이마를 세 번 어루만지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니 유모와 종들이 그를 엄하게 지켰다. ··· 여종이 자리를 정돈하고 베개를 편히 하자 손을 바로 해서 배에 얹고 눈을 감고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를 내렸다. (이옥李鈺, 「열녀이씨전烈女李氏傳」)

“당신은 이 미망인을 염려하지 마시고 편안히 지하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당신이 죽으면서 남긴 부탁 때문에 차마 바로 죽지 못합니다. 당신의 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아이의 나이가 5살이 되고 그때는 아이가 혼자서도 보전할 수 있겠지요. 그날이 되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탈상이 다가왔는데 딸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시부모는 그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 채고 여종에게 지켜보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루는 여종을 시켜 딸의 약을 구해오게 하고는 지니고 있던 남편의 작은 띠로 들보에 목을 매고 죽었다. (황용한黃龍漢, 「열부함양박씨전烈婦咸陽朴氏傳」)

이와 같이 가부장제 이념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모성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기는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성 강조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모성은 무시되어야 했다. 따라서 가부장제를 강조하는 만큼 모성이 강조되는 구도를 지니지만, 또한 가부장제 강화와 부계혈통을 잇는 목적의식이 강한 그만큼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나타나는 친밀한 정서는 은폐되거나 축소되었다. 모든 여성에게 부과되는 모성이라는 본질적 의미로서의 정체성과 가족 구조의 재생산을 위해 부과되는 규범적 의미로서의 정체성은 가부장제 안에서 통합되는 상보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이 둘은 종종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또 가부장제 이념과 정서적 모성이 상충했을 때에는 가부장제 이념이 더 우선한다.

-어머니/딸, 아버지-딸, 그리고 가부장제

전통 사회는 현대 사회보다 훨씬 더 가부장제적이라고 여겨지고, 그래서 모성도 더 강하게 부추겨졌다고 간주된다. 분명 이념과 질서, 가문의 영화와 존속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전통 사회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는 강조된다. 하지만 그 관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대 가족에서만큼 어머니-자녀의 친밀감과 정서적 유대가 강조되지는 않는다. 즉 현대 가족이 모성에 근거한 자녀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고 그만큼 어머니의 직접적인 보살핌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 비하면, 전통 가족에서의 어머니 역할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모성의 핵심은 어머니-자녀 관계가 남성 혹은 가부장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달려 있었고, “가부장적인 친족체계 하에서 여성은 남성의 자녀를 갖는 자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seed)라는 개념”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가 가부장제 옹호와 부계혈통 강화에 있었으므로, 아이를 남성의 소유로 계승시키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존재는 가능한 은폐되거나 축소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하게 무시되어야 한다. 출산이라는 여성의 일을 본성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수반하는 여러 가지 보살핌의 실천과 심리들을 통해 거대한 모성 이데올로기를 산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철저하게 모성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 유교 사회의 씨받이 같은 제도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공고화하기 위하여 출산과 연관한 모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모성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딸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남근을 주지 않아서라고 본다. 또 어머니-아들의 관계는 어머니 자신의 낮은 지위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아들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기대로 설명된다. 때문에 어머니-딸의 관계와는 다른 위치에 놓인다. 아들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어머니는 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위치에 있다. 이에 반해 어머니를 대신하는 자상한 아버지는 남성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다.

때때로 “나는 여성보다는 남성과 친하고 남성에게서 동료애를 더 느끼며 남성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하는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을 만난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고 힘을 북돋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사와 호의의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도 자체가 여성들의 지위를 상승시키거나 혹은 가부장제를 약화시키거나 남성과 여성의 화해 무드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는다. 딸이 아버지와 친하게 되는 상황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힘이 자리하고 있으며, 딸은 아버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남성들은 자기 아내에게는 주지 않을 도움, 사랑을 딸들에게는 아낌없이 준다. 이렇게 보면 아빠들의 딸바보 행진은 가부장을 넘어서는 길목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불과 얼음』 [청춘의 서재]

이찬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금 오늘의 청춘이 가장 애타게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따스한 위로가 아닐까. 88만원 세대의 한없이 작아진 꿈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맞서 몸부림치는 그들은 상처투성이에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인다. 오늘의 청춘은 사회와 가족의 보호망이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무거운 자신의 삶을 단지 혼자서 감당해야 할 뿐이다. 그러한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어떤 이는 생활전선을 위한 노동과 적금 통장에, 어떤 이는 미래를 위한 수험서와 처세서에 온 마음을 쏟아 붓는다. 야망을 위해 싸우던 기성세대들에 비해 자신이 쉴만한 빈 자리를 위해 싸우는 오늘의 청춘들의 모습에는 서글픔이 어려 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세상에 용감히 맞서기 위해 인문ㆍ사회 서적들을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나 자신은 그만 더욱 작아지고 만다. 위안과 자신감이 필요한 청년에게 “세상을 알아라! 이렇게 싸워라! 용기를 내라!”고 말하지만 마치 ‘긍정의 힘’을 갈파하는 목사님과 무슨 다른 말을 하는지 솔직히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라는 진심어린 충고가 우울한 이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위축된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지 가운데서 올바른 선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곁에 있어’ 주는 것일 텐데 말이다. 청춘은 너무 힘겨워 자신의 삶을 결단해나갈 기력조차 없으며, 자신의 어려움을 말할 힘조차도 없다.

그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위로할 방법은 없을까? 자신의 아픔을 말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기쁨을, 희망을, 자신의 소중함을, 자신 안에 보물이 간직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하게 만들어줄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나는 청춘에게 시를 권한다. 그 가운데서도 청춘의 생명을 테두리지어 압박하지 않고 청춘 곁에 한 걸음 뒤로 머물러,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기다려주는 시를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존을 위한 대비의 몸부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춘에게 넉넉한 여백과 여운으로 다가서는 시 한 편은 삶에 작은 빈 자리를, 작은 마음의 여유와 안식처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불과 얼음』의 첫 시는 「목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전원적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샘 치러 나가 볼까 합니다;

그저 물 위의 나뭇잎이나 건져 내려구요

(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

 

엄마소 옆에 있는 어린

송아지를 데리러 가려구 해요. 너무 어려서

엄마소가 핥으면 비틀거리지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

 

이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 무엇을 말하려 하면서도 아마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저(only)’ 말할 뿐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불과 얼음』 마지막의 해설을 훔쳐보면 프로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시는 …… 반드시 대단한 해명이 아니라 혼란과 맞선 잠정적 머무름에서 끝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란 스스로의 결정이나 결정당함 혹은 확정적인 해명에 둘러싸여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말처럼, 삶의 평온이란 해명과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가벼운 망설임과 혼란 가운데, 기대 가운데 머물러 있음 속에서 빈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첫 번째 시 「목장」 또한 저자의 대단한 해명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기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집착하기보다는 아무런 기대 없이, 들려오는 시의 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가운데 그 색채들 가운데 고요히 쉴 것을 권유한다. 이 시를 읽으며 상상 속에서 그저 기분 속에서만이라도 나뭇잎이나 건져 내는 한가로운 여유를, 오래 걸리지 않는 동행을, 비틀거리는 어린 송아지의 가냘픔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걸어 보지 못한 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

 

이 시의 생략된 뒷 부분에서 주인공은 결국 하나의 길을 택하고 그 이유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한숨지으며 이야기한다. 여러 갈래의 길에서 고뇌하는 꿈이 많은 청춘에게 이 시는 참으로 많은 공감을 전해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갈래 길들을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한 청춘에게 이 시가 동병상련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맞는 길인지 주저하고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지만 주인공의 한숨은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결코 꿈을 위한 용기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현실적인 선택이든 이상적인 선택이든 그 무엇도 우리에게 그것이 올바른 선택임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은 이 시를 읽는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곁에서 같이 걸어가 줄 뿐이다. 단지 곁에 함께 걸어가 주는 것… 불안하고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과연 곁에서 기다려주고 고독한 시간을 함께 나눠줄 친구가 있는 것일까.

이 시를 읽으면 내가 겪었던 작은 방황의 경험이 생각난다. 대학생 시절 선후배 몇 명과 함께 하는 소규모 공부 모임에 속해 있었는데, 처음으로 후배를 맞이하면서 그 모임의 운영자 자리를 맡게 되었다. 비록 몇 명만이 모인 자리이지만 회의를 진행하고 주도하는 자리를 처음 맡았던 터라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회의 자리에서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열등감으로 인한 위축감에 극도로 시달렸다. 그래서 회의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2학년 선배가 되어서 공부로나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나 내가 선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너무나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과연 학생으로서 내가 택했던 꿈을 이룰 수 있는지, 이루기 위한 준비는 아무것도 못하고 귀중한 시간만 낭비한 건 아닌지, 이러다 졸업 후 자기 앞가림도 못하게 되지나 않을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감으로 생각이 멈추고, 말을 못하고, 말을 더듬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매일 나를 지진아나 바보라고 자학하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우울증과 대인기피의 모습까지 보였던 내게 친구들과 선배들이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를 해 주었지만 그 말을 듣는 그 순간만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듯 느껴질 뿐 돌아서면 다시 원점의 불안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었다. 그나마 친한 친구가 곁에서 놀아주려 하고, 같이 밥 먹고, 집에 놀러와 같이 자고 할 때면 그 순간만은 마음의 불안이 진정되곤 하였다.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괴로움을 극복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장소는 학교 화장실 변기 위였다. 나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선후배들로부터 도망치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세상에서 도망쳐 피신한 곳은 고요한 화장실 안이었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아픈 머리를 감싸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였는데, 그 공간은 그야말로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신입생 시절부터 밖으로만 배울 것을 찾아다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고, 선배들과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이때의 화장실 안에서의 기억처럼 오로지 안으로 나 자신을 향해 스스로 찾아 나섰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괴로워하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던 순간 보았던 번뜩이는 섬광은 그 동안의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문제와 불안과 망설임을 해결하는 어떠한 방법으로서 ‘무엇’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스스로 그 ‘무엇’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경험은 바로. 말하자면. 나 ‘스스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자신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그대로, 생긴 모습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험이었다. 나는 오직 있을 뿐이지 내가 어때야 하고 어떻게 비춰질 지에 대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힘들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경험했던 그것이 어쩌면 바로 실존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실존은 책에서도, 선배들의 조언에서도, 친한 친구의 위로 가운데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안 혼자만의 불안과 고독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모습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던 시간의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에게 어떤 충고와, 어떤 길이 정말 맞는지에만 의존하던, 아니 억눌려만 있던 나였다. 내가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세상의 가르침들과 수능 문제를 풀어 대학에 들어가면서까지 나에게 부과되었던 5지선다의 ‘무엇’은 바로 나의 있는 그대로의 ‘있음’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들은 당시의 어린 나에게 그 이후부터도 미래의 자신의 삶의 길이라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따라올 것이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을 발견한 나는 포기하지 않고 세상 가운데 쓰러지지 않으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선택지를 강요하는 명령과 심문은 청춘을 더욱 아프게 한다. 청춘의 슬픔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스스로의 슬픔을 돌볼 빈 자리 가운데서 스스로 구원될 수 있다. 그 빈 자리는 청춘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그 빈 자리에서 청춘은 스스로 모두 말할 수 있다. 넉넉한 삶의 여백 가운데 청춘은 자신의 본래적인 온 모습을 대면하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창조할 기회와 용기를 얻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살아 있음은 자라날 수 있고, 살아 있음의 기쁨이 춤출 무대가 마련될 수 있다. 늦은 밤 어둠을 바라보며 입에 문 담배 연기의 적막한 시간처럼. 청춘이여! 시의 여백 속에서 삶의 여백 속에서. 한순간만이라도 나의 위안을, 나의 용기와 꿈을 되찾아보자! 그리고 시를 써보자.

섬세한 삶의 감각을 찾는 연습 7-② [色 다른 책읽기]

박혜정 (산책자 에디터)

두툼해도 단숨에 읽히는 책이 읽는가 하면, 얄팍해도 읽는 도중 읽기를 멈추어 가며 생각에 잠기게 되는 책이 있다. <무미 예찬>을 만들고 있을 때에는 교정지를 보고 있다가도 문득 눈을 들어 허공을 보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구체적인 생각을 몰아간 것은 아니었다. 교정지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느슨한 행간과 넉넉한 여백, 전체적으로 건조하면서도 색이 적은 담채화처럼 적당한 물기가 있던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유가 내 눈길도 어떤 ‘생각 사이의 여백’으로 향하도록 했던 것이다.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인 <무미 예찬>은 그런 책이었다.

사실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는, 학부 졸업 정도의 교양 수준에다 당시 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초보편집자에게는 제법 어려운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도 <무미 예찬>은 그보다 묵직하고 사회적인 에쎄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를 만든 후에 시작한 책으로 앞의 책들보다는 미학적이고, 지식보다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즉 편집자로서의 나와 독자로서의 나 양쪽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와 주었던 책이다.

‘에쎄essais’ 시리즈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에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양한 에쎄가 존재하지만 누군가에게 에쎄 시리즈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목부터가 ‘에쎄Les Essais’인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예로 들곤 한다. 어느 인류학 연구 논문 못지않은 학술적 성과를 담고 있는 <슬픈 열대>는 “내가 이 일을 결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라는 지극히 내밀한 어조의 수필 문체로 시작된다. 자신의 감정, 지식, 경험들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문체로 서술했기에 담고 있는 내용들이 논문이나 보고서만큼이나 단단하게 쌓아올려지는 지적인 에세이, 그것이 에쎄라고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에세이’라고 하면 인생사나 감상을 주로 표현한 부드럽고 감성적인 글들(또 다른 수필의 분류로 따지자면 ‘미셀러니’ 정도의 글)을 떠올리기 때문에 ‘에쎄’라는 단어도 종종 그런 선상에서 이해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에쎄 시리즈’라고 해서 읽기 편한 수위의 책으로 생각하고 골랐는데 왜 이렇게 학술적인가라는 독자의 불만을 간혹 듣곤 한다. 글의 형식에 대한 개념이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그런 불만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편집자로서 간단히 웃어넘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런 불만을 감안하고 보았을 때, <무미 예찬>은 약간 유화되어있는 한국 독자의 ‘에세이’ 개념에도 제법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참신한 시선을 보여주는 프랑수아 줄리앙을 소개할 때 ‘푸른 눈을 가진 동양학자 중 가장 독보적인 학자’라는 표현을 쓴다. 서양인이 동양에 대한 책을 썼다고 생각하면, 오리엔탈리즘이 가미된 편견이나 열광이 아니면 정말이지 성실하고 딱딱한 학술 연구 외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차츰 버리게 되었다. ‘동양 문화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라는 생각보다는 ‘동양 문화에 속하지 않은 눈으로 보니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들을 본다’ 는 생각이 강해진 것이다. 사실 동양 문화에 속해있다고 해도 속도감 넘치고 자극이 가득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저 의식만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중국 문화의 면면들이 던져준다. 현대인이 너무도 당연시 하는 것, 개성과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진부한 덕’, 즉 ‘중용’을 담백한 삶의 태도라는 형태라고 해석해낸 대목은 중용이라는 개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준다.

불어로는 ‘맛없음,싱거움fadeur’ 으로 번역되는 ‘담淡’의 개념은 불어에서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어 저런 대체어를 썼을 정도로 서양에서는 낯선 개념이었을 테지만, 프랑수아 줄리앙은 그 개념을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미, 담백함의 풍경은 정말로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아주 가까운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급스러우면서도 가장 소박한 모든 풍경 속에 ‘담’이 있다.

나로서는 이 책에 종종 등장하는 ‘물 맛’이니 ‘흰 돌을 삶아 먹는’ 중국 선인들의 이미지에서 담담하고 산뜻한 흰색에 대한 여러 가지 글들이 떠오른다. 일단 박완서가 <개성사람 이야기>에서 쓴 흰색에 대한 글. “어머니는 버선만 보고도 어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개성사람 버선은 옥시설처럼 희고, 서울사람 버선은 푸르뎅뎅하게 희고, 일산·금촌사람 버선은 불그죽죽하게 희다고 했다. 옥시설은 어머니가 완벽한 흰색에 바치는 최고의 찬사인데,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소설가인 강경애도 손빨래를 하며 흰 옷을 더욱 희게 빨아내는 데 크나큰 희열을 느낀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다보면 흰색을 넘어 담백한 심상에 대한 글들도 떠오른다. ‘슴슴한’ 국수를 사랑한 백석의 시,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고 하는 피천득의 <수필>로 생각이 이어진다.

현대의 풍경을 둘러보아도 ‘담’을 느낄 수 있다. 아파트에 질린 현대인들은 흰 문종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문살의 그림자가 가장 큰 인테리어 요소이며 가구로 가득차지 않아 아름다운 한옥의 아름다움에 다시 집중하곤 한다. ‘슈퍼 노멀’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가장 표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이 탁월하다는 것 역시 의식하고 있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가 가장 단순한 스타일과 옅은 화장을 고수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가?

이 책의 원제 Eloge de la fadeur를 거의 그대로 옮긴 <무미 예찬>이 큰 고심 없이 자연스럽게 가제에서 최종 제목으로 결정된 것도 알려 두고 싶다. 문화적인 사안이든 정치적인 사안이든, 시쳇말로 ‘까는’ 행위가 ‘쿨한’ 트렌드가 되어버린 시대에 무언가를 예찬하고 있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제목에 ‘예찬’이라는 단어가 붙은 책이 제법 많다. 미셸 투르니에의 <예찬>부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프란츠 카프카의 <여행자 예찬>에 이르기까지 멋진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 <무미 예찬>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陰?禮讚>인데, 한국판은 <그늘에 대하여(눌와, 2005)>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일본 문화가 곳곳에서 그림자와 그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을 해석한 글이 있는 책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수준 높은 미학을 맛볼 수 있는 ‘동양의 에쎄’ 라 할 만하다.

<무미 예찬>은 중국 문화에 대한 책이지만 담백한 취향과 삶에 관한 포괄적인 책으로 더 다가온다. 싱거움이나 비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이 모든 자극을 단호히 떨쳐버리라거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라는 방햐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가장 감지하기 어려운 맛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에,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우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음식에서 배어나오는 미묘한 맛을 즐기는 사람을 미식가라고 한다. 자극적인 맛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둔하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금방 파악할 수 있는 뚜렷한 자극만 추구하는 둔한 사람을 진정한 삶의 향유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넓게 퍼져 있는 동시에 가장 미세하게만 느낄 수 있는 맛, 가장 까다로우면도 가장 폭넓은 삶의 취향을 찾는 감각을 이 책을 통해 연습해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허공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박혜정 (산책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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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일곱 번째 책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펴냄)으로, 김익균(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안세환(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박혜정(산책자 편집자)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바깥에 대한 사유와 초월하지 않는 담백함 7-① [色 다른 책읽기]

김익균 (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서구적 세계의 바깥으로서 중국

『무미예찬(無味禮讚)』의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이 책의 존재를 모르는 동안에도 나는 이 책을 요청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어떤 면이 독자인 ‘나’를 자극한 걸까?

책을 읽을 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책읽기 행위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람 즉 저자와 독자(리뷰어)의 만남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짧으나마 통성명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책의 저자인 프랑수아 줄리앙은 프랑스의 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고 중국학을 전공했다. 나는 남한에서 성장했으며 남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국문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남한의 정체성은, 중국의 영향을 장기지속 해온 동시에 서구화와 식민화의 복잡한 체험으로 교착된 ‘조선’의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어낸 산통의 과정, 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남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로 나는 해방 이후 혹은 한국전쟁 이후의 십여 년간의 서정주 시를 공부하고 있다. 해방 이후에서 사일구 이전까지 서정주의 시가 얻은 국민적인 호응과 부침의 과정을 살펴보면 당대 남한의 ‘세계감’을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시 프랑수아 줄리앙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후에 중국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중국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서양 전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각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옮긴이의 설명을 좀 더 참조해 보면 프랑수아 줄리앙이 속해 있는 서구적 세계의 바깥이란, “언어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서양과 무관하게 형성된 독자적인 세계인바 인도-유럽 언어권의 바깥, 서양 역사 및 문화의 영향권 바깥-따라서 인도나 이슬람 문화는 제외되었다-그리고 연구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 전통을 지닌 세계”였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이 곧 중국이었다는 것이다. 서구가 그동안 행한 중국에 대한 탐구가 신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제국주의자의 시선이 중첩된 어떤 것이었다면 프랑수아 줄리앙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덧붙이고 있는 셈이다.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하나의 ‘세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프랑수아 줄리앙이 ‘서구적 세계의 바깥’으로 생각하는 ‘중국’의 특징을 그대로 남한의 그것으로 연상하거나 동양 삼국의 잃어버린(혹은 되찾아야 할) 과거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수아 줄리앙에게 바깥인 것은 ‘우리’에게도 바깥이며, 50년대의 서정주에게도 바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근대적 신분제 하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즉 근대의 노동자 혹은 소비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인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개진한 담(淡)의 원리는 지금-여기에 있는 실체(혹은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 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서구적 세계의 바깥’의 잠재태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단적으로 말해서 이 세계는 중국이나 동양 삼국이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소유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무미(無味)’라고 옮겨진 단어는 중국어의 ‘담(淡)’에 부여된 가치를 괄호친 의미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불어로 ‘fadeur’라고 옮겼고 한글로는 담백하다,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영어로는 ‘blandness’라고 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라고 한다. 담은 “특수한 시각(문체론적 심리적 윤리적 시각 등등)이 아니라 전체적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중국인들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하나의 ‘세계’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세계가 지금 존재하는 실체인가는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경험이 서구적 근대의 세계를 상대화 하는 개연성을 제공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가령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이 상반된 두 가지 현실이며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모방이라는 생각, 천구(天球)들의 음악이든 천사들의 음악이든 간에 음악이 다른 어떤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서구적 세계관은 ‘담(淡)의 가치가 주도하는 세계’ 쪽에서는 낯선 것이 될 것이다. 담(淡)의 세계에는 현실 세계와 그 너머의 바깥이라는 구분이 없다. “섬세함의 정도 차이” 즉 감각이 지각할 수 있는 것과 정신이라는 좀 더 예민한 ‘기관’이 요구되는 것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비가시적인 것들이 서구에서처럼 초월적 세계에 속하지 않고 연속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철학에는 존재론이 없다. 내가 보기에, 고대 중국 사상을 (그리스 사상과 대비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무미 혹은 담(淡)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맛의 성질은 그 특수한 성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퍼져나가는 힘에 있다.”

“무미의 미덕은 우리의 정신을 사물의 더 근본적인 국면과 일치시키는 데 있다. 어떤 맛도 다른 맛보다 특별히 더 우리를 유혹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작용하는 모든 잠재태들 가운데 ‘대등한’ 균형을 유지하며 -그것이 제(齊)이다-존재에 내재하는 논리로 하여금 스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다.” “담(淡)의 기초는 그저 엷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강인함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인바, “담은 감지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초입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그것은 감지할 수 있게끔 드러나는 즉시 그 초월적인 조화로움으로 돌아간다. (…)담은 사물들이 차별화되지 않는 것 속으로 돌아갈 때, 사물들이 그 변별적 특성들을 잃어버리고 차이를 흡수하며 혼돈을 향할 때 비로소 그것들에 대해 말한다. 담은 측량할 수 없는 성질이자, 그래서 필연적으로 덧없으며(…) 일체의 체계적 모색을 피하며, 손을 잡아 붙들 수도 없다.”

이러한 세계의 특징을 프랑수아 줄리앙은 상당히 풍부한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듯이’ 사례들을 살펴볼 수 있다.(동양인 혹은 남한의 독자들이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라는 고자세로 이 책을 읽는다면 프랑수아 줄리앙이 공들여 탐색해 보이는 ‘새로운 세계’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 “예스런 담백함에는 진정한 맛이 들어있다. 대제사의 탕에 간을 맞출 필요가 어디 있으리요.”라는 구절을 읽으며 예스러운 취향에 대한 호불호를 거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탕의 담백한 맛이 진정한 맛으로 인정되는 세계의 가치관과 철학의 체계를 이해하고 지금-여기 남한은 그 체계 바깥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담백한 맛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주장은 강하게 논증되기보다는 풍부한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지고 있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례들에서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일 것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지적했듯 “음미(吟味)”라는 말이 갖는 읽기와 먹기 사이의 유사성은 “(서구의 지적 시각에서처럼) 의미를 해독하기보다 그에게 외적으로 주어지는 물질성(즉 텍스트를 이루는 말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바깥인 중국은 바깥이 없는 세계다?

『무미예찬(無味禮讚)』(혹은 프랑수아 줄리앙)의 출발점은 고대 중국이 프랑수아 줄리앙이 속한 세계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의 판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판명하다고 전제한 것들이 과연 그러한지 묻는 것은 논외로 한다면, 역으로 ‘우리’에게 그것이 판명한가를 묻는 일이 요청된다. 서구는 우리의 바깥인가? 혹은 고대 중국은 우리의 바깥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프랑수아 줄리앙이 ‘발견한’ 중국은 바깥이 없는 세계라는 점일 것이다. 서구의 바깥에 대한 프랑수아 줄리앙의 탐구는 바깥이 없는 세계로서의 중국을 산출한다. 그렇다면 담(淡)의 체계인 중국적 사유에서 바깥은 사유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프랑수아 줄리앙이 발견한 세계는 서구적 방법으로 만든 서구의 대립항이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밀고나가는 것은 전공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도록 하고 나는 남한의 건국 과정에서 나온 ‘우리’의 탐색이 『무미예찬(無味禮讚)』과 어떻게 서로 비출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싶다. 그 시기에 서정주는 『귀촉도』, 『서정주시선』, 『신라초』를 내놓은바 ‘국민시인’ 혹은 ‘시의 정부’, ‘부족 방언의 족장’ 등으로 호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서정주가 모색한 이 시세계는 현실의 긴장, 갈등, 고통이 없는 세계로 비판받아 왔다. 비판자들은 시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를 요구했는데 그것은 고통의 너머에 놓인, 발견해야 할 이데아로서의 세계에 대한 전제와 분리되지 않았다. ‘저기’가 없다면 ‘여기’의 고통은 선명한 이미지를 갖지 못하는 것이 서구적 근대 미학이지 않은가.

이에 비해 서정주가 해방 이후 ‘신라의 내부에 대한 한 모색’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근대의 미적 세계 바깥에 대한 모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주는- ‘우리’가 그렇듯이- 어떤 혼동 속에서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주가 간혹 역사적 실체라는 허상에 얽매였다면 그것은 ‘판명한 바깥’에 대한 프랑수아 줄리앙의 자의식과 맺는 모종의 차이를 생산하지 않느냐고 나는 묻고 싶다. 물론 그 차이를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배운 논리를 적용해보면 이 차이는 서구적인 안과 밖의 차이가 아닌 중국적인 ‘담’의 중심과 가장자리의 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서정주(와 청록파)로 대변되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대한민국 건국의 중추가 되었던 세대가 탐구한 세계이다. 그것은 일본에 의해 형성된 식민지 근대화를 30년 안팎의 한 생애를 통해 체현한 1910년대 생인 세대가 그 세계의 바깥을 꿈꿨던 경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주는 건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구적 가치에 대한 환멸이 심화되고 서구의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탐색하려고 노력했다. 간혹 고대사를 실체화하는 오류에도 빠져 가면서, 서정주는 서구적 가치와 유불선의 가치 그리고 더 옛날의 샤머니즘(서정주의 용어로는 영통과 혼교)을,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를 통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시로 체현하려 했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학자로서 그리고 판명한 바깥에 선 자의 강점을 가지고 그려낸 담(淡)의 세계는 50년대 극동의 한 시인이 그려낸 ‘신라의 내부’와 서로 비추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담의 세계 바깥에서 담의 세계를 그려보는 프랑수아 줄리앙과 이미 담의 세계 바깥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순간적으로 망각하며 시를 통해 담의 세계로 들어가 보는 서정주의 모색은 담의 세계를 재구하기 위해 마주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담(淡)의 체계에서는 현실의 바깥으로 나가는 초월이 없다’고 요약해 본다. 내가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는 남한의 50년대에 서정주 (세대)와 신세대의 시적 정신을 초월(의 고통)이 없는 세계의 모색과 초월을 단행하려는 고통의 실천 사이에 두는 내 문제의식에 새로운 자극을 줬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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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일곱 번째 책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펴냄)으로, 김익균(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안세환(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박혜정(산책자 편집자)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제2차 인문학 페스티벌”(8. 20-21), 대천 해수욕장에서 책읽기 잔치 열려

작년 2010년에 처음으로 열린 <인문학 페스티벌>에 이어 올 해에도 보령(대천)에서 보령 책익는 마을(촌장 박종택)의 주최 주관으로 <제2차 인문학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2010년에는, 박인희(안양대 강의교수)의 김명진(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 이진남(숙명여대 교수), 류호철(안양대 강의교수), 이정모(과학저술가),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종필(고등과학연구원), 편상범(고려대 강사), 전중환(경희대 교수), 이재현(동덕여대 교수), 이명현(천문연구원 연구원), 강양구(프레시안 기자)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는 물론 과학, 종교,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의가 한창 휴가철인 8월 13-14일 이틀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당시 인문학 페스티벌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시민과 학생이 세미나룸을 가득 채웠고, 아침부터 하루종일 계속되는 강의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의 열기는 내내 뜨거웠다.

처음에는 몇 명의 독서모임으로 출발한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팀으로 이루어져 매월 저자를 초청하여 모두가 읽고 강의와 토론을 하는 <저자초청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2010년부터는 집중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강의와 토론의 축제로서 <인문학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올 해에는 2010년에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페스티벌의 성격을 약간 변화시켜, 저자토론회와 접목시켜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참여하기로 정해진 강사진은, 김주일(정암학당 연구원)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를 비롯, 최시현(소설가), 장시복(경제학자), 이종수(문학저술가), 김태권(만화가) 등이 자신의 저술을 중심으로 강의하고 토론하는 축제가 마련하고, 8월 20-21일 이틀에 걸쳐 대천 한화콘도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아래의 글은 ‘보령 책익는 마을’의 황선만(보령 책익는 마을 전 촌장)이 <제1차 인문학 페스티벌>을 마친 후에 <보령신문>에 기고한 글 “2010보령 인문학페스티벌을 마치고”을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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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뻘 되는 친척분은 내게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직장은 잘 다니고 있는지, 사는 집은 어떤 곳인지, 아이들은 공부를 잘 하는지, 돈 벌이는 괜찮은지 등등 친척 어른으로서 궁금한 점이 많았는가 보다. 그런데 헤어지면서 하시는 말씀이 날 잠시 머뭇거리게 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잘 살아야 되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야 돼! 알뜰하게 돈 잘 벌게.”

우리네 생활 속에서 의례적이고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고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공과 돈이 등치관계라는 주장은 교과서에만 등장하지 않을 뿐 우리네 삶의 공간에는 도그마와 같은 명제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문화행사도 돈벌이가 되어야 하고, 국회의원도 돈을 벌 줄 알아야만 한다. 청소년들의 공부의 목적은 명문대를 가는 것이고, 그것도 고액 연봉의 직장으로 취업 잘되는 학과를 가는 것이다.

인문학 페스티벌이 만들어진 의도 속에는 그런 고민이 들어있다. 우리네 장롱 속에 숨어버린 것 같은 ‘가치’라는 단어를 꺼내서 펼쳐들고 다양한 무늬의 ‘성공’의 길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몇몇 학자와 저자를 모시고 책익는마을의 조촐한 토론회를 생각했는데 횡재수가 온 것이다. 참여하겠다는 분이 12명이나 기별이 온 것 아닌가. 그동안 저자초청 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10여 차례 진행해온 우리들은 별 이의없이 ‘보령시민들과 함께하는 만남의 장’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뿔사! 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12명의 강의를 넉넉하게 배치할 수가 없었다. 몇 분은 오시지 말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기간을 하루 이틀 더 늘릴 수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1시간 강의 10분 휴식에 12시간 연강이라는 수험생 시간표가 나오고 말았다.

게다가 제목을 붙이는 것 또한 고민거리였다. 도대체가 한 단어로 표현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겸연쩍은 일이지만 12강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주제를 포괄하는 단어를 생각했고 그 결과물이 인문학 페스티벌이었다. 책익는 마을의 저자초청토론회가 ‘인문학’ 중심이었고 우리들의 월별 선정도서 또한 그러하기에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구미를 확, 땡겨왔다. 그리고 인문학페스티벌이라는 제목만 읽어보고 찾아올 위인이 어디있겠는가. 이야기 주제와 강사프로필이 있으니 사전에 생각해볼 여유는 충분할 것이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에게 사전에 자세히 안내하는 차원에서 강사의 소속, 저서, 강의주제, 자세한 시간 안내까지 포스터, 전단지 등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듣고 싶은 강의만 들어도 상관없으니 주제와 강의시간을 살펴서 원하는 강의시간별로 참석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넣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을 맞춰서 원하는 강의에 참여했는데, 12강을 계속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떤 강의시간에는 넓은 세미나실에 보조의자까지 채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에 일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귀한 시간들을 아낌없이 배려하는 것을 볼 때 시민들의 지적 욕구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참여자는 보령시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인천, 수원, 부여에서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고, 익산과 천안에서도 다녀갔다. 또 어떤 사람은 보령시 홈페이지에 난 홍보를 보고 대구에서 올라와 1박2일 동안 꼬박 강의실을 지켰다.

강사들도 행사의 의도에 공감해서인지 자신의 강의시간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청중으로 앉아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참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약간은 우려했던 과학 관련된 강사들의 강의내용도 행사의 제목을 의식해서인지 순수자연과학에 치우치지는 않았다. 솔직히 이날의 인문학페스티벌이 전공학자들의 세미나도 아니고 이른바 대중강연 아닌가. 아무리 수준을 맞춘다하여도 주제에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부족할 터이고, 어떤 청중에게는 넘칠 것 아닌가. 배정된 시간이라도 넉넉했다면 좀 나았겠지만 강의시간표를 받아든 누구라도 예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강사들이 자신의 강의 앞뒤에도 자리를 지켜주어서 관심있는 사람들과의 개별적 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흐믓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책익는마을의 저자초청 토론회처럼 선정도서를 읽은 사람에 한해 참가하고 30분 저자의 강의에 90분 질의응답으로 이어지는 토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런식으로 그렇게 많은 강사들을 만날려면 우리들 일상을 참으로 많이 할애해야 했을 것이다.

1박2일 동안 이어진 릴레이 강의를 듣고 다소 피곤해진 몸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연세 지긋한 한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유익한 시간들이었어. 우리가 젊어지는 느낌이었고 행복했어.”

도대체 내가 왜 이틀 동안 아니, 준비해온 한 달 동안 생업도 소홀히 하면서 왜 그렇게 달뜬 나날을 보냈을까. 책익는 마을 회원들은 또 무슨 이득을 보자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나누고 후원금까지 내면서 달려왔을까. 직장에서 휴가를 내면서까지 참여했다는 낯선 청중들은 또 어떤 열정이 있기에 그런 용기를 내었을까. 그 자리는 흔히 만나는 ‘금융자산관리법’ 강의도, 돈 많이 번 유명인사의 ‘인생 성공법’ 강의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진중하고 고리타분해서 우리가 학창시절에 얼핏 스쳐갔을 뿐 대체로 거들떠보지 않는 어려운 주제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 열정을 지적인 욕구,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고미숙은 『호모쿵푸스』에서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에게 ‘책읽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해야하는 시대이기에,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 끝!’이라고 하는 세상이기에 나는 행복해지는 조건으로 인문학적 독서를 소망한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의 성적을 다 늙어서까지 외고 다니면서 자신의 두뇌가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들을 흔히 만난다. 또 학교 때 성적이 안 좋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책과는 인연이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만나곤 한다. 모두가 잘못된 성장기가 만들어준 허상이다. 한 번 책을 함께 읽고 터놓고 만나보라. 나이도 학력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도 전제하지 말고 책을 놓고 함께 토론해보라. 권위와 잘난체를 소거하고 함께하는 공부가 얼마나 따스한 인간애를 샘솟게 하고 행복한 기운이 넘쳐나게 하는지를 경험해보시라. 우리나라 근대적 사유의 물꼬를 튼 연암 박지원은 13살 연하인 박제가와 평생 벗으로 함께했다. 책을 읽는 공부는 누구나가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다양한 무늬를 한 역동적 행복의 길을 만날 수 있다.

2010보령 인문학 페스티벌은 보령 시민들의 그런 공부를 향한 열정을 확인하는 계기에 다름 아니었다. 평생교육이라해서 실용적 기능을 배우는 것 만이 어찌 평생교육이겠는가. 아니, 우리는 대학에서까지 기업에서 요구하는 기능 중심의 스펙 쌓기 공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성인사회에 독서가 필요하다. 사회인으로 시작하는 그 시점이야말로 비로소 진짜 공부를 해야하는 출발점이다. 마지막 강의를 듣고 일어서는 그 순간에 내 마음속에는 읽고 싶은 책이 여러 권 떠올랐다. 또 이틀 동안 특별한 기능을 익히지도 않았고 대단한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지만 뿌듯한 기운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보령신문 2010년 8월 24일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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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e시대와 철학>에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를 연재하는 보령 책익는 마을의 인문학 축전이 인문학과 삶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시민 축전으로 자리매김되기를 바라며, 이에 소식을 알립니다.

일시 및 장소 : 2011년 8월 20-21일 대천 한화콘도 세미나실

참고 문의 및 연락처 : 017-432-9558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thinders

주술은 나의 일상에 숨어있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박종택 (보령 책익는 마을 촌장)

 

방사능비가 내리는 아침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그건 희곡의 제목이고 나는 날씨에 따라 변하는 존재로 아침에 눈을 뜨기 전에 비가 오는지의 여부 정도는 몸으로 느낀다. 그것은 때로는 슈퍼컴퓨터와 인공위성에 의지한 일기예보 보다 정확하다. 늙어서 그렇다고?

개구리가 많았던 시절, 개구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울고, 제비가 낮게 날면 농부들은 논의 물고를 터놓았고, 어머니는 아침에 종달새가 높이 나는 것을 보고는 2km 거리에 있는 학교로 향하는 나의 등하교 길을 걱정하지 않으셨다. 기상과학을 공부하지 못한 나의 어머니와 농부들의 예측이 미신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개구리의 피부가 습도에 민감하고 대기의 기압에 따라 새와 헬리콥터의 비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비를 느끼며 일어나서 일본 원전사고와 오늘 강우의 연관성에 관하여 인터넷을 검색한다. 결론은 ‘인체에 해롭지 않으니 비 맞지 마십시오.’라는 전문가의 유능한 견해다. 어느 신문사를 막론하고 본질 보다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기사화 할 뿐이다. 넝마를 시간과 돈을 주고 구매하는 현실이다. 물론 나는 넝마를 돈 주고 사지는 않지만 가끔은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아이가 응아가 급하다고 할 때마다, 그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며 신문을 활짝 편다. 물론 이쯤에서 오감을 넘어 예지 능력과 예감이 발달한 분이라면 식사직전에는 이런 ‘응아’ 이야기가 나오는 글은 절대 읽지 않으리라 믿는다. 각설하고 화장실에 앉아 배설의 쾌락을 만끽하며 시원한 결정을 내린다. 강우에 의한 방사능 피폭의 유무에 관계없이 하루 종일 불안해할 수도 있는 아이 엄마의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아이의 유치원 등원을 거부한다. 오늘 하루 더불어 놀아줄 아이들과 집단놀이가 사라지게 됨을 예감한 아이가 아빠에 집착하며 출근을 저지한다. 나는 자본주의와 느림의 미학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아이의 미래를 위하여 전쟁놀이를 선택한다. 점보블럭으로 성을 쌓고 나는 도깨비 가면을 쓰고 아이는 파워레인저 가면을 쓴 뒤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던 두 시간 동안의 전쟁에서 아이를 두 번 울리고 밥상 앞에서 평화협정을 제안한다. 경제 논리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나의 행동은 혀를 찰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오늘 아침의 두 시간은 훗날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며 회고할 때 감미로운 행복으로 기억되는 좋은 시간이리라 믿는다.

 

점심시간에 본 미술작품에 대한 소고

친구와 함께 방사능 낙진이 우려되는 빗속을 뚫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살림집을 개조한 식당의 방을 보니 사방에 집주인이 취미로 그렸다는 그림이 가득하다.

함께 한 친구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교단에 섰다가 미술입시학원을 운영했던 관계로 이야기 소재가 궁색하지 않다.

“이 분은 대범한 사람은 아닐걸. 여백을 두려하는 것을 보니 소심하고 꼼꼼하되 사람은 좋을 것 같아.” 라고 말을 건넨다.

“학식이 많지는 않으나 시골 선비 같은 사람일걸. 정통 미술을 가르치려면 힘 좀 들어야 할 걸.” 하고 말을 받는다.

잠시 후 음식을 내어 온 주인장의 얼굴을 살펴보니 아까 둘이서 나누었던 대화와 다를 바 없이 ‘굽히지 않되 불친절 하지는 않은 소박한 분’이시다. 점심을 맛있게 들고 나서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료증과 명분 없는 봉황무늬 새겨진 감사패 무리를 살펴보고 밖으로 나온다.

친구가 끽연을 즐기는 사이 어제 마신 주님의 은총으로 발길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을 살펴보니 생각해서 꾸민 물건들이 치워 버려야 시원 할 상황이다. 이 식당에 걸린 여백 없는 그림들과 주인에게서 느낀 인상, 오직 한 기관에서 발행한 수많은 수료증, 화장실의 불필요한 물건들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점심시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생물학적 시각으로 보이는 그 자체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차를 몰고 식당을 벗어나면서 오만방자하게 오늘날의 미술을 들었다 놓는다. 기능은 있지만 예능은 없고, 학력은 있으되 학식은 없고, 수업은 있으되 교육은 없는 자들이 미술교육의 전방에 서서 유해한 방사능을 살포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현실의 출처는 미대 입시제도에서 그 근본을 찾고 싶다. 홍익대 미대가 수년전부터 입시 제도를 변경하기는 했지만 미대 입시의 실기고사는 석고 데생이 중심이다.

오늘날 석고 데생으로 미대 입시를 치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밖에 없다. 미대 지망생들은 고등하교 내내 석고상만 바라보다 대입 실기고사를 치르게 되고 대학은 석고 데생의 숙련공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양성된 기능공이 강단에 서게 되면 ‘美術’의 개념부터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술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뛰어난 상상력과 발상의 참신함이지 기능이 아니다. 기능은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전시장에 서서 <무제>라는 제목 앞에서면 경멸과 분노를 느낀다. 그 작품을 제작한 본인도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도를 품고 진행되었는지를 모른다면 핵물리학자가 방사능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정신병자가 변기를 묶어 끌고 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만든 사람도 무엇인지 모르는 <무제>에서 관람자가 뭔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은 정신적 피폐를 불러오는 악성 방사능이다. 그림 자체에 제작 의도와 의미, 그리고 상징이 결여 되어 있다면 미술작품이 벽면의 벽지만도, 화장실 벽의 타일만한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왜 대개의 사람이 미술에 관해서라면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 젓게 만드는가?

실제로 미술이 우리의 일상적 삶의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미술만큼 눈에 보이도록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예술이 없는 데도 미술은 뜻 모를 개념들과 추상적 관념만이 난무할 뿐이다. 각종 전시회도 그들만의 잔치로서 유파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축하를 받고 그들의 찬사를 듣는 행사일 뿐이다. 일반인들에게 곤혹스런 그림을 걸어 놓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은 잔칫집에 오기 전에 먹을 것을 싸서 오든가 굶으라는 논리다.

 

내 주변 그림과의 주술적 소통

점심식사로 목구멍에 풀칠을 한 후, 나의 직업인 풀칠을 위하여 작업장으로 돌아온다. 나는 현재 표구(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장황, 장배, 표장, 배첩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어(死語)에 가깝다.)와 액자(이것도 일본말이다.) 제작으로 인해 진정한 풀칠을 하며 산다. 고객이 그림 선택의 조언을 구하면(어차피 듣지 않을 것이면서), 자신의 눈을 믿고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선택하기를 권한다. 라이벌인 부자 친구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은 잊으라고 권한다. 그 친구가 돈이 많은 것이지 안목이 높은 것은 아니니까.

 

그럼 전시장에서 그림을 감상 할 때 어떻게 보아야 잘 보는 것인가?

아내를 고를 때 옆집 남자의 눈으로 고르고, 남편을 고를 때 위층 여자의 시선으로 골랐는가? 마음으로 보라, 자기중심으로 보라, 내 영혼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라. 좋은 것은 좋고,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모든 작품에 동일한 시간을 배려하지 말라. 모든 친구와 똑같이 친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시간을 할애하며 살고 있는가? 마음이 이끄는 작품에게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자. 이성이 마음에 들 때 혼자서 끙끙 앓으며 바라만 보았는가? 친구나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가? 전시장에는 큐레이터와 작가라는 친구가 그대를 돕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다.

 

그림 구매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옷을 구매할 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게 된다. 그 옷을 입으면 단아해 보이기 때문에, 또는 듬직해 보이기 때문에, 섹시해 보이기 때문에, 경쾌해 보이기 때문에, 세련되어 보이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선택의 까닭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옷이란 편하고 따뜻하기만 하면 돼’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이 옷 색상은 더워 보여, 이 옷 스타일은 추워 보여’ 정도는 따져보기 마련이다.

그림 구매도 말 그대로 구매다.

우리는 과시용으로 더운 나라에 살면서 밍크코트를 구매하고 3,000켤레의 구두를 사서 모았던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즐기고 느끼기 위하여 그림을 구매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이 가장 현명한 감식안이다.

 

야심한 밤, 칼을 빼어든다

방사능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밤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집어 든다. 수일 전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음)을 사훈으로 정했는데, 서예작품 보다는 독특하게 서각작품으로 걸고 싶다는 주문이 있었다. 그 주문에 따라 표피적인 감각과 알량한 수준의 손재주로 나무를 판다. 내 얄팍한 생각으로는 나무속에 숨어 있는 글을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서각작품인데, 나의 재주는 글씨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파내는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나의 감각과 감성이 부족하니 마부작침의 자세로라도 각을 해야 할 텐데 시장논리가 작용하여 도끼를 가는 것이 아니라 도끼날만 갈고 만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작품의 상업성, 작품의 환금성이라는 단어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보고 작가가 아닌 잡가(雜家)라 부른다. 고객에게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고 가액(價額)과 임금을 받는 상업성이 뚜렷한 잡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 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어차피 요즘 세상은 작품의 질과는 별 상관없이 풍부하고 번뜩이는 상상력과 감각적 문장을 구사하고, 세련되고 현란한 말재주를 소유한 사람이 작가여.”

“예술은 하나의 형식이나 내용으로 정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예술의 불확실성이 또 다른 예술적 행위를 이끄는 원동력이야.” 하며 내 귀도 못 알아들을 소리를 내 입으로 중얼거린다.

각이 끝나고 아크릴 물감을 짜기 시작한다. 원래 의도는 금분을 사용할 예정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시장성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몰아낼 시간이다. 간단히 날려 칠하고 인테리어 수준으로 마무리 한다. 이 때 쯤 목소리를 높여 중얼거려야 한다.

“의뢰하신 분께서 원청회사가 부도나는 통에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시고 ‘이번이 마지막 재기의 기회일 것 같다’고 했으니 기를 돋우는 주술적 의미에서 강렬한 빨강색을 써 봤어.”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 한다. 그런데 왜 이 순간 ‘예술은 사기다.’ 라는 백남준씨의 말이 떠오르는 거지? 그건 그렇고 어제 술 마신 것이 24시간도 넘었는데 왜 서각 하는 내내 방귀가 계속 나오는 거야? 일본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의 영향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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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김융희 지음, <예술, 주술적 세계와의 소통>(책세상 펴냄>에 관한 박종택 책익는 마을 촌장의 글입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1)

플라톤고대 그리스에서 소년 사랑이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에로스가 개인들의 사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년 사랑은 분명 전사 공동체로서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엘리트 그룹들의 내적 연대와 자기 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공동체의 보존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소년 사랑을 구성하는 관능적 요소들과 정신적인 요소들 사이의 긴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서서히 와해되었고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더욱 통속화되었다.

플라톤(기원전 429-347)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은 이러한 시대적 국면에서 소년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에로스의 관능적 측면을 비판하고 에로스를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즉 철학으로 승화시키려는 플라톤의 고뇌어린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늘 그러하듯이 자기 생각을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들을 먼저 제시하게 한 후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형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다만 「향연」은 형식면에서는 다소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약간의 도입부 대화를 거쳐 바로 해당 주제에 대해 다른 대화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유독 이 대화편에서는 옛날에 대화를 들었던 사람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다소 복잡한 이야기 전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영화에서 창틀을 끼어 과거 시점을 현재와 병존시키는 기법과 유사한데, 플라톤이 도입부를 왜 그와 같이 복잡하게 설정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향연」에서 종국적으로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에로스의 비의적(秘儀的)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죽은 후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에 대해 세간에 퍼져있는 오해를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그의 입을 통해 불식시키고,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작품 구성상의 기법이라고도 해석한다.

플라톤의 「향연」파퓌로스 필사본 일부

「향연」은 플라톤의 첫 번째 시켈리아 여행(기원전 390년)과 두 번째 여행(기원전 366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향연」의 작품상 설정 연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이다.「향연」은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아가톤(Agath?n)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참석자들이 벌인 에로스에 관한 연설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경연이 있었던 레나이아(l?naia) 축제가 기록상 기원전 416년에 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향연 즉 심포지온은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이 모여 술을 나누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귀족남성들이 모여 경연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놀았던 일종의 특권층의 오락모임이자 술자리였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가 전날의 축제에서 이미 통음을 하였던 까닭에 술자리 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하자고 모두 동의하고 통상 자리를 같이 하던 피리 부는 소녀들과 여인들까지 물리친다. 이처럼 「향연」에서의 향연(symposion : ‘drinking together’의 의미)은 처음부터 ‘술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말(logos)을 나누는 자리’로 규정되고 각자가 펼칠 연설의 주제 또한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의 제안에 따라 에로스에 대한 찬미로 정해지고, 연설의 순서 또한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른쪽 순으로 펼치기로 합의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에로스에 관한 일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을 한다.(177d) 이 부분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知)’를 늘 강조해 왔는데 이 부분에서는 에로스에 대해서만은 잘 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도입부에서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의 최종 청취자로서 일반대중을 상정하였듯이, 사랑에 대해서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함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에로스가 어떤 지식 내지 결론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자체’라는 점에서 그렇게 발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도기 그림)

이렇게 해서 에로스에 대한 찬미 연설이 시작되고 파이드로스(Phaidros)가 그 첫 번째 주자로 나선다. 그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탄생(Theogonia)」을 인용하여 에로스를 태초의 신들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신으로 내세우면서, 에로스가 가장 좋은 것들의 원인이므로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소년 사랑이다. 그러면 소년사랑이 가장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추한 것을 멀리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민감함과 명예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없이는 국가든 개인이든 크고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없다. 요컨대 소년 사랑은 추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덕과 명예를 추구하게 하여 나라를 위해 전투에 나가서도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게 만든다. 파이드로스는 여기서 소년 사랑이 결국 나라를 잘 운영하는 방법 및 전투수행능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178e)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파이드로스는 이 부분에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앞에서 살핀 테바이 신성부대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실제로 테바이 신성부대의 창설은 이 향연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파이드로스의 에로스에 대한 연설은 전사 공동체 사회에서 소년 사랑에 대해 기존에 확립된 교육적 동성애의 전통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의 연설은 다소 상투적이고 소년 사랑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사례들도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한 알케스티스(Aik?stis)의 경우는 이성애 관계이고, 아킬레우스의 경우(아이스퀼로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에라스테스로 나온다)도 에로메노스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록 신이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더 소중한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에로스를 품는 자, 즉 에라스테스의 경우는 아니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일반적인 견해와 동떨어져 있다. 이처럼 파이드로스의 에로스론은 기성의 상식을 대변하지만 대부분의 상식이 그러하듯 근거가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늘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무턱대고 끌어들인다.

그 다음 연설자로 나오는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소년 사랑의 이중성을 간과한 채 기성의 관점에서 단순히 찬사만 늘어놓는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에로스에는 범속의 에로스(pand?mos eros)와 천상의 에로스(ouranios eros)가 있는데 이 중 전자는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고 영혼(psych?)보다 몸(s?ma)을 사랑하며 그저 ‘일을 치러내는 것'(exergazesthai : 이 문맥(181b)에서는 성행위를 뜻함)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출생이 제우스와 디오네(Di?n?)의 딸인지라 저급한 이성애도 추구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소년 사랑이 종래의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전통에서 벗어나 성적 충동이 이끄는 대로 이성애건 동성애건 닥치는 대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타락한 현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교육적 동성애로서 소년 사랑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천상의 에로스란 단순히 소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nous)을 갖기 시작할 때의 소년을 사랑하며 늘 덕(aret?)으로 이끄는 사랑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천상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에라스테스에게 소년이 살갑게 대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에라스테스가 아름다운 소년 애인을 취하려고 벌이는 그 어떤 행위도 그것이 설령 노예노릇처럼 비쳐질지라도 결코 추한 것이 아니며, 소년이 최대한 훌륭한 에라스테스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끌며 그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키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오히려 무능한 나라 또는 참주정(tyrannis) 치하에 있는 나라일수록 이러한 일들을 추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년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기게 될 대단한 생각(pronemata megala : 높은 사리분별력)과 강력한 친애 및 연대감을 참주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이곳에서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이러한 천상의 에로스가 아닌 범속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돈이나 권력으로 소년 사랑을 구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소년들의 부모들도 아이들을 감독할 보호자를 두어 어른들과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급기야 소년 사랑이 공공연히 추한 일로 비난받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므로 소년 사랑의 전통이 제자리를 잡아 소년 애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살갑게 대하는 일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게 하려면 이제 소년 사랑에 관한 법(nomos)과 지혜 사랑(phiosophia) 및 다른 덕에 관한 법이 같은 곳에서 함께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184d) 그렇게 될 때에만 에라스테스는 에로메노스를 위해 사리분별 및 기타의 덕을 가르칠 수가 있고, 에로메노스는 에라스테스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통해 지혜를 습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에로메노스가 에라스테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charizesthai : 신체적 애무를 포함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에는 파이드로스가 간과하고 있는 아테네 사회에서의 소년 사랑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천상의 에로스에 대한 찬미를 통해 소년 사랑의 정신적 측면을 현실적으로 되살려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파이드로스와 마찬가지로 소년 사랑에 수반하는 육체적 관계를 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살갑게 대하는 것은 이상적인 여러 가지 동기들과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세 번째 연설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s) 차례지만 그가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에뤽시마코스가 대신 나선다. 에뤽시마코스 역시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를 둘로 구분한다. 그러나 앞의 연설자들처럼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에로스는 모든 동물과 땅에서 자라는 것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다 있는 것이다.(186a) 이처럼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우주적 에로스로 확장시킨다. 인간이건 우주 자연이건 어디에나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가 있으며, 그에 따라 좋은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과 나쁜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적대적인 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이고 나쁜 에로스는 그것들을 부조화시켜 더욱 적대적으로 만든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마치 활(toxon:현악기를 켜는 활)과 뤼라가 서로 부딪치면서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의술은 몸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epist?m?)이고, 시가술(mousik?)은 음의 조화와 리듬을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고 천문학은 계절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 그리고 예언술(mantik?)은 신들과 인간들의 친애를 만들어 내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186c-188d) 이처럼 에뤽시마코스에게서 에로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내적인 조화를 관장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기술(techn?)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습득해야할 자연학적 원리의 성격을 갖는 에로스이다. 에뤽시마코스는 이러한 에로스야 말로 ‘절제와 정의’(앞뒤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생뚱맞게 인용되어 있다)로써 일을 이루어내는 에로스이고 우리에게 신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주는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188d)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 강한 친애(philia)와 연대(koinonia)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명예(tim?)와 덕에로 이끄는 정서적 성격의 힘이라고 한다면,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는 마치 동양 유가의 도(道)와 성(誠)을 연상시키듯 우주 자연으로까지 확장된 우주론적 에로스로서 대립된 힘들로 구성된 일체의 것들을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로 이끄는 원리적 성격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들 모두의 주장은 향연의 전체내용을 이끌고 가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창작된 것으로서, 당대 지식인들의 에로스론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평가를 반영하면서 장차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통해 표명될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구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상의 세 사람의 연설이 끝난 후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이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등장인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그는 기원전 423년에 상연된 「구름(nephel?)」이라는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으로 조롱했던 사람이다.(218-226) 그래서 플라톤은「변명(Apologia)」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의 그러한 짓이야말로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19c)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연설자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일단 겉으로 보면 플라톤은 마치 역사적 아리스토파네스를 그대로 옮겨 놓기라도 하듯이 우화를 인용하며 이끌어가는 아리스토파네스 고유의 익살과 페이소스를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의 연설은 에로스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안티테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아마도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비판의 표적이자 반동의 디딤판으로 삼아「향연」의 절정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을 통해, 다시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보거나 능멸하지 못할 정도로, 에로스를 저 빛나는 정신의 세계로 하늘 높이 도약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에로스란 무엇이었을까?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2)”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