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이정호(방송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2. 아프로디테(1)

우리는 지금까지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제 사랑과 관련한 두 번째 위대한 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 대해 살펴보자. 이 여신의 영역은 「일리아스」제5권에(428행 이하)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제우스는 분수도 모르고 지상의 전투에 간여했다가 손에 상처를 입은 귀여운 딸 아프로디테를 위로하며 이렇게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내 딸아 전쟁에 관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너는

욕정 가득한(himeroenta) erga gamoio나 맡아 보아라,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은 아레스와 아테네가 염려할 테니.

 

1.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케스토스 히마스를 걸치고 있다. 폼페이 벽화 AD 1세기경. 나폴리 고고학박물관 소장

여기서 erga gamoio를 “혼사(婚事)”라고 번역할 경우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결혼의 신이 아니다. 보통 gamos(gamoio는 gamos의 소유격)는 ‘결혼’의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전적으로 아프로디테 여신의 영역 즉 “성적 결합(die geschlechtiche Vereinig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딧세이아」의 한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2. 444 이하). 오뒷세우스는 그 부분에서 구혼자(mn?st?r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한 이타케의 불한당들)들과 음란한 짓을 저지른 부정한 하녀들을 끌고 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게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날이 긴 칼로 한 명도 남김없이 그들을 찔러 죽여라. 구혼자들이 하자는 대로 은밀하게 몸을 섞으면서 느꼈던 ‘아프로디테’를 그들이 잊을 때까지” 여기에서 여신의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성적인 쾌락이고 그것이야말로 사실 이 여신의 고유한 관심 영역이다. 그리고 “아프로티데의 일”의 의미를 갖는 아프로디시아(aphrodisia)라는 말 역시 오직 양성간의 성적인 결합에 한정하여 쓰이는 말이다.

여신의 세력범위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예는 「일리아스」의 또 다른 한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4. 214 이하) 헤라(Hera)는 제우스를 잠자리로 끌어들여 트로이아 성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로부터 제우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하지만 이 결혼의 여신은 사랑을 유혹하는 데는 별로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로디테에게 남성을 욕정에 빠트리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청하고 아프로디테는 그것을 받아들여 이른바 “아프로디테의 띠”라고 불리우는 케스토스 히마스(kestos himas)를 헤라에게 건네준다. 이러한 끈을 걸친 예로서는, 바빌로니아의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도시 키슈(Kish)와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Susa)에서 출토된 기원전 3000년경의 풍요의 여신의 나체상과, 폼페이의 벽화에 정부 아레스(Ares)와 함께 그려진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그림이 있다. 이 끈에는 영험이 확실한 마법의 무늬가 자수(刺繡)되어 있었다(kestos라는 형용사는 그것을 가리킨다). “그 안에는 애정(philot?s)과 욕정(himeros) 그리고 아무리 사려 깊은 자일지라도 그 마음을 호리는 사랑의 밀어(oaristus)와 유혹(parphasis)이 깃들어 있었다”(14. 216-7) 헤시오도스도 아프로디테의 몫으로 정해진 명예로 처녀의 밀어(partheniou oaros), 미소(meid?ma), 속임수(exapat?), 달콤한 희열(glykeros terpsis), 애정, 상냥함(meilichios)을 들고 있다.(「신들의 계보」205)

이처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비록 중첩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에로스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된 갈망이라면, 아프로디테는 그 갈망의 한 구현으로서 욕정에 불타는 erga gamoio 즉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 에로스는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서처럼 정신적인 것에로의 상승을 이끄는 힘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아프로디테를 사랑의 정신화와 연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곧 살펴보겠지만 이 두 개의 신격이 가리키는 영역은 상당부분 실질적으로 중첩이 되어 나타난다. 아프로디테 역시 활동하는 영역으로 보자면 따로 제한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2.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탄생, 퀴프로스섬에 닿은 아프로디테. 보티첼리 1485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소장

많은 신들이 그렇듯이 아프로디테도 처음부터 그리스의 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소아시아 남쪽 퀴프로스섬의 신으로서 퀴프리스(Kypri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그녀는 퀴프리스 신앙의 중심지였던 파포스(Paphos)에서 우상으로서 숭배되고 있었고 원추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역사(Historiae)」2·12) 이와 비슷한 예는 페니키아의 화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화폐에 원추형의 모습으로 새겨진 뷔블로스의 아스타르테(Astarte)신 역시 고대 셈족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이었다. 이것 또한 아프로디테가 오리엔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리스 원주민들이 대모신(Große Mutter)으로 섬기던 여신들 중 한 명이 아프로디테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아프로디테의 숭배에 오리엔트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의 주요 신들이 여명기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융합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에 충분히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무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개념상 서로 매우 가깝고 중첩되는 부분도 많아서 양자는 차츰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되었다. 호메로스는 아프로디테를 제우스와 디오네(Dione)의 딸로 그리고 있지만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에서 그녀의 탄생을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왕위 계승 신화와 연결 짓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힛타이트 신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들의 계보」에서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에 의해 낫으로 잘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니다 불사의 살점 때문에 생긴 거품으로부터 태어났다고 그려지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부분에서 아프로디테가 남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아프로티테를 ‘남근을 좋아하는 신'(philommedea)이라고도 불렀다. 탄생 후 아프로디테는 퀴프로스섬에 닿아 아리따운 여신의 모습으로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녀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모든 것들의 생식욕구를 지배하는 여신답게 여신의 날씬한 발밑에는 사방으로 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신들의 종족에게 갈 때까지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신들이 곧 에로스와 애욕의 신 히메로스(Himeros)이다. (「신들의 계보」187-202).

에로스와 아프로디테는 제사에서도 종종 일체화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5세기 때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신전에 새겨진 증언에 의하면 이 신전은 그들 두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에로스와 아프로디테의 동행은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프리즈(Ostfries)에 조각된 신들의 모임에서도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발랄한 아름다움에 빛나는 알몸 소년의 모습을 한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무릎위에 앉아 있다.

시인들이 뮈케나이의 여러 가지 호사스런 궁정 생활의 특색을 도입하여 올륌포스 신들을 시가로 그려냈을 때, 아프로디테 역시 확고한 지위를 갖는 신으로 그려졌다. 이 여신을 포함해서 올륌포스신들은 인간들처럼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도 풍기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지만 그 신들 모두는 자주 상궤를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위대하다. 아프로디테는 이다(Ida)산상에서 벌어진 미모경연(Sch?nheitswettstreit)에서 파리스(Paris)가 자신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 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그 보답으로 파리스에게 헬레네(Hel?ne)를 안겨 주고 그 후로도 줄곧 파리스를 돌봐 주고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제3권에서는 연적사이인 메넬라오스(Menelaos)와 파리스의 결투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만약 아프로디테가 수세에 몰린 파리스를 노골적으로 가로채 짙은 안개로 감싸 향기로 가득 찬 그의 방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그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호의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양모를 빗질 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마치 중매쟁이처럼 향기로운 옷자락을 흔들며 헬레네를 파리스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유혹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 담겨진 이 장면은 고뇌에 찬 한 여인의 정신적 깊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헬레네는 이미 자신이 남편 메넬라오스와 조국에 저지른 잘못을 알고 그것을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노파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인 것을 알아차리자 이내 정부인 파리스의 잠자리로 이끌고 가려는 그녀의 제의를 야멸차게 거절한다.

3.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비너스와 마르스) 보티첼리 1483, 런던국립미술관 소장

“아프로디테님! 당신이나 그를 위하여 애태우며 지켜주세요. 그러시면 언젠가는 그가 당신을 아내나 노예로 삼을 날이 올 거에요. 아무튼 나는 그리 가서 그의 시중을 들지 않겠어요. 그랬다간 모든 트로이아 여인들이 나를 욕할 거에요. 그렇잖아도 나는 마음이 한없이 괴로워요”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크게 격분하여 그녀를 거칠게 몰아 부친다. “나를 자극하지 마라, 무모한 여인이여! 내가 성내는 날에는 너를 버릴 것이며, 지금 내가 너를 격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그 만큼 너를 미워하게 될 것이고, 너는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일리아스」408-417) 올륌포스신들의 전횡은 요컨대 협박(Drohung)에 있다. 이 무서운 협박에 헬레네는 이내 겁을 먹고 어쩔 수 없이 하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트로이아 여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여신의 뒤를 따라 파리스에게 간다. 이 장면에서 만큼 협박이 극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표현된 예는 그리스 문학 전체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음울하고 무서운 장면 뒤에는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지는 또 하나의 상황을 보며 환호하는 이오니아 정신이 가득 넘쳐난다. 방안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의도대로 파리스와 헬레네가 호사로운 침대에 누워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고, 밖에서는 메넬라오스가 불구대천의 적인 파리스의 빈 투구만을 손에 쥔 채, 파리스를 찾기 위해 야수처럼 무리들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오뒷세이아」 제4권에는 텔레마코스(Telemachos)가 아버지 오뒷세우스를 찾아 가는 길에 스파르타 궁정에 들렀다가 다시 메넬라오스에게 돌아와 그의 아내이자 정숙한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는 헬레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롭게도 그리스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언제라도 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헬레네도 그 장면에서 트로이아에 몰래 잠입한 오뒷세우스를 자기가 숨겨주고 뒷바라지까지 했노라고 변명조 섞인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뒷세우스 그분이 트로이아 사람들을 죽이자….나는 마음이 흐뭇했어요. 내 마음은 벌써 오래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돌아서 있었고, 아프로디테님이 그 때 나에게 불어넣은 미혹(at?), 그러니까 내 딸과 우리 부부의 침실과 그리고 지혜로나 외모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내 남편을 버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한 채 저 땅으로 달려가면서 가졌던 그 미혹들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거든요”(260-264). 이에 메넬라오스는 언제 헬레네가 파리스와 놀아났던가 싶은 말투로 “부인, 그대가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kata moiran) 말이오”라고 말하면서 흐뭇해하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그녀 자신이 결코 결혼의 신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오뒷세이아」의 제8권에서 음유시인 데모도코스(Demodokos)가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여신의 부정한 행동이다. 그녀는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서는 따를 자가 없는 대가이지만 신체적으로는 절름발이 장애자였다. 그런데 그가 집을 떠나 있던 어느 날 당당한 체구의 전쟁의 신 아레스가 아프로디테를 찾아와 갖은 선물을 주며 그녀를 유혹하고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 한다. 헬리오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파이스토스는 화가 나서 침대 기둥 주위와 위로 도망칠 수 없는 올가미를 거미줄처럼 둘러쳐 놓았고 결국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몰래 잠자리를 같이 하려다 그 올가미에 걸려든다. 이 소식을 들은 헤파이스토스는 노여움으로 가득하여 집으로 돌아와 그 가소로운 광경을 보라고 신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그러자 부끄러워 집에 남은 여신들을 빼고 많은 신들이 그곳에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서는 모두 웃음을 금치 못한다. 이 기묘한 장면을 읽어가면서 어떤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신들의 노래에서 그 추잡함을 거두어 내고 읽을 것인가를 고민할지도 모르지만 이어지는 신들의 대화를 듣고 나면 고민 자체가 금새 무색해진다. 우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폴론(Apollon)은 남동생인 헤르메스(Hermes)에게 너는 이와 같이 강력한 사슬에 묶여 꼼짝 못한다 하더라도 침대위에서 황금의 아프로디테와 함께 자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지체 없이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라고 말하면서 “설사 이 보다 3배 이상의 많은 사슬들이 나를 감고있다 해도 그리고 신들과 모든 여신들이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는 황금의 아프로디테 옆에 눕고 싶소이다”라고 대답한다. (266-342). 그러자 많은 신들이 다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그러한 광경 앞에서 유독 포세이돈만은 웃지 않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아레스가 신들 앞에서 합당한 벌금을 낼 것이고 자기가 그것을 보증할테니 아레스를 풀어주도록 간청한다. 결국 헤파이스토스는 포세이돈의 간청을 받아 들여 그들을 풀어주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군말 없이 반대방향으로 헤어져 자기들이 살던 곳, 즉 아레스는 트라키아로,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성역인 퀴프로스섬 파포스로 돌아간다. 퀴프로스섬의 우아의 여신들인 카리테스(Charites)들은 돌아온 아프로디테를 정성껏 목욕 시키고 영생하는 신들의 살갗을 뒤덮고 있는 불멸의 기름(elaion)을 발라주고 휘황찬란하고 사랑스런 옷을 입힌다. 이와 같이 데모도코스의 노래는 신들의 속내는 물론 관능의 신 아프로디테 여신 또한 그 황홀한 광채를 털끝만큼이라도 손상하지 않은 채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다시금 드러내면서 끝이 난다.

신화 속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들의 이러한 모습들 모두 고대인들의 삶의 반영으로서 신화가 표상하고 있는 뿌리 깊은 인간 본성의 중층적 층위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아프로티데(2) 다음에 계속)

세상과 다른 꿈, 조선 선비 9인의 사상을 읽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안세환 (보령 책 익는 마을 회원)

 
인터넷 서점 새 책 코너에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라는 제목을 볼 때 당시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았던 다른 길을 걸어갔을 그들을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서 선택을 했든, 타의에 의해서 선택을 했든 그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 길을 걸어갔을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제목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5권의 새 책이 택배로 배달이 되는 시간에 마침 우리 ‘보령 책 익는 마을’ 박종택 촌장과 다른 몇 분이 오셔서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새 책들을 펼쳐 가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마을 분들은 이 책이 마음에 든다고 독후감을 쓰라고 한다. 여러 분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으로 볼 때 제목에 마음이 들었나 보다.

『나는 불온한 선비다』를 살펴보니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세상과는 다른 사상가들의 삶이 녹아져 있다. 그들의 생각이 이 책에 녹아 있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명이나 되는 인물들을 아홉 장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김시습, 서경덕, 박세당, 정제두, 이익, 유수원, 홍대용, 이벽, 최한기가 그들이다. 깊이 있는 내용을 알기 보다는 대강의 삶의 언저리를 살펴보는 수준에서 읽어 볼만한 책이다. 나는 여기에 나오는 아홉 명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김시습, 이익, 최한기 세 사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매월당은 공명과 지조 사이에서 고뇌한 ‘광인’으로 제목을 삼고 있을 만큼 지조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평가가 있다. ‘신세 망친 인간’과 ‘지조를 지킨 사람’이라는 평가이다. 전자가 주로 일상적인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지식을 담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는 21살 때(1455년)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와 슬픔에 찬 통곡으로 3일간 지내다가 공부하던 책과 원고들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리고는 유랑의 길로 들어서는데 어떤 때는 분뇨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그 후 설악산에 있는 오세암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기인의 삶을 산다. 경주 남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쓰고, 호를 매월당으로 한다. 마지막 2년은 부여의 무량사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기행을 살펴보면 어느 날 한강변을 지나다가 보니 한명회가 압구정 근처 한강변에 정자를 한 채 지어 시 한 수를 걸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시구는 이렇다.

靑春扶社稷 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붙들었고

白首臥江湖 백수와강호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있구나

이 시의 작자가 한명회임을 알게 된 김시습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붓을 들어 표현하는데, 扶를 危로, 臥를 汚로 살짝 바꾸어 놓았다.

靑春危社稷 청춘위사직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白首汚江湖 백수오강호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

정말 촌철살인의 위트가 번뜩인다.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인 노년의 한명회를 향하여 이처럼 온 세상에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인물이 김시습이다. 오늘날 이런 기개로 세상을 향하여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권력에 붙어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를 보는 김시습의 눈에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강호를 더럽히는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에 한명회가 알고는 펄펄 뛰었지만 광인처럼 지내는 김시습을 어쩌지는 못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한명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세상에서 돌아가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나보다.

매월당은 제법 많은 분량의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특히 도연명을 좋아해 그에 답하는 화도시(和陶詩)를 66편이나 남겼다. 또한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여겨지고 있다. 단편소설 정도지만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이라는 5편이 실려 있는데, 앞의 세 편은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이고, 뒤의 두 편은 지옥과 용궁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신유학이라고 하며 주자에 이르러 완성을 본 성리학을 더욱 완성시켰는데, 그의 이기론을 보면 개개의 현상만을 인정하는 이기일원론자 같기도 하고, 보편과 현상을 다 함께 보는 이기이원론자 같기도 하다. 오늘날 학자들 간에 그의 이기론을 두고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성호 이익(1681-1763)

먼저 영풍(獰風)이란 시를 보자.

野老竅窓疑不出 야로규창의불출 시골 늙은이 밖을 엿볼 뿐 나갈 엄두 못 내고

書生推沈?無言 서생추침묵무언서생들은 자다 일어나 아무런 말이 없다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엄청나게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지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하늘에서는 뇌성벽력이 일어 땅을 흔들 정도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염려는 되지만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방에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익은 관직에 나가는 청운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주어진 형식대로 쓰지 않은 것 때문에 2차 시험에 나가지 못했고, 또 친형이자 스승인 이잠이 사형당한 일이다.

그 아픔을 뒤로 하고 재야에 묻혀 농사와 교육에 종사하면서 학문연구에 몸을 바치기로 한다. 시골 초가의 방안에 앉아 그가 접할 수 있는 넓은 세계로 문을 열어 놓고 학문을 한다. 철학, 정치, 사회, 역사,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 분야가 그의 관심에 들어와 있다. 부친이 청나라 사행길에 구입한 많은 서구 관련 책들을 읽고 서구에 열려진 진보적인 유학자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의 주장 중에 6두(?)라는 것이 있다. 여섯 개의 좀이 있다는 말이다. 노비제도, 과거, 문벌중시, 잡기와 무당, (일부의) 승려(승적으로 인해 병역기피가 많았기에), 게으름 등을 말하는데 없어져야 할 사회의 악으로 보고 있다. 성호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입장에서 정책을 펴도록 주장을 한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성호사설에 들어 있다. 그에게 늘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있다. 절대적인 존경의 마음을 가진 인재들을 제자로 둘 수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이름을 떨친 윤동규, 안정복, 신후담, 권철신 등이 그의 제자였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여든셋까지 살았으니 그 시대에 장수한 셈이다.

성호사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옛 글과 자신의 글을 뒤섞어 책을 만들었기에 후대의 정약용은 올바른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런 중립적 사유가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내용이 실천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익이 제기한 부정부패, 빈부의 문제와 개선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다.

혜강 최한기(1803-1877)

혜강 최한기는 1980년대 이후에 관심과 연구가 부쩍 늘었다. 혜강의 학문은 넓고 깊다. 그가 남긴 1천여 권의 저서는 최남선이 탄복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편이다.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니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그는 개성 출신인데 ‘개성상인’과는 거리가 먼 저술가로 평생을 바쳤다. 그는 비싼 돈을 들여 북경에서 들어온 책들을 샀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을 한다.

‘가령 이 책 중의 사람이 나와 같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리라도 불구하고 찾아가야만 할 텐데 지금 나는 아무 수고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돈이 많이 들기는 한다지만 식량을 싸가지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야 훨씬 난 것이 아니겠나.’

성리학자들에게 주공이나 공자는 성역의 존재다. 그들을 비평하는 것은 금기다. 그런데 혜강은 주공이나 공자에 대해서도 반대의 입장에 설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기측체의 서’에서 오직 두 성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는 맹점을 지적한다. 나라의 풍속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데도 그들 두 사람이 남긴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변통할 줄 모른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하기는 최근인 1999년에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내었다가 유학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는가? 하물며 19세기의 사람임에랴!

그의 책 『신기통』과 『추측록』 두 권을 묶어서『기측체의(氣測體義)』라는 이름으로 중국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에서 발간이 되었는데, 이것은 수입일변도인 조선에서 중국으로 수출이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혜강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래에 대해 열려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문호가 닫혀 있었던 시대에 많은 책들을 통하여 배우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면서 시대를 앞서 나갔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자주 쓰는 용어 중에 ‘운화’란 말이 있다. 운화는 운동, 운행, 운영 정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상업에 있어서 나와 타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을 운영하는 것이 곧 이익을 보는 최상의 길이니 그 길을 따르라고 한다. 이런 시각은 비단 상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이익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도 서로 이익이 되는 보편적인 방법이 최상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무리 하며

저자는 독특한 사상의 길을 걸어갔던 아홉 명을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작은 책에 담다 보니 가볍게 그 분들의 정신보다는 삶을 이해하는 선에서 정리가 되었고, 나 또한 다 다룰 수 없어 세 분만 들어 그야말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았다. 특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e시대와 철학> 사이트에 글을 싣는다는데, 철학 쪽보다는 우리 선조들의 삶에 조명을 하게 된 셈이어서 의도에 상충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철학책 중에서 선정할 걸’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위안을 삼는다.

여러 사람들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면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정도가 문제이다. 저자의 생각과 글 속에 나타나는 의미를 내가 얼마만큼 아느냐가 관건이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읽을 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해의 정도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기며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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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넷째 글로서 이종호 님의 <나는 불온한 선비다>(위즈덤하우스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시(詩), 삶을 치유하다[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시를 만나다

 

봄바람이라고 하지만 올 봄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봄바람 속에서 나는 연일 기침을 하고 있다. 쉰 살, 천명을 아는 나이다. 윤동주는 ‘시를 쓰는 것은 슬픈 천명’이라고 노래했다. 나의 천명은 무엇인가? 천명을 알지 못하기에 나는 언제나 희망한다. 지금 내가 희망을 가지고 몰입하고 있는 분야는 시 치유이다.

문학치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 전이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의술로도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에서 매일 울고만 있을 때 외국인 간호사가 가져다 준 책이 <백설공주>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그림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지속되는 입원 생활에 지쳐 생기를 잃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갑자기 닥친 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기술적인 치료 외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시 치유를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6년 전이다. 석사 과정에서 비평을 공부하고 박사 과정에서 시를 전공하게 되면서 시에는 마음 치유의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함속에서 나를 마주 보면 나 자신이 가여워져서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체험을 통해 마음속의 슬픔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 한 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를 통해 누군가와 고통의 경험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 누군가도 시를 읽거나 쓰면서 고통의 기억들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고통을 나누는 그 길에 내가 동행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 공부는 험난했다. 시치유의 뜻을 밝혔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시는커녕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무슨 시치유냐 하며 시를 먼저 공부하든지 정녕 시치유를 공부하고 싶으면 다른 선생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 날 이후 6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에 출근해서 아무도 없는 어두운 교정을 걸어 내려오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교정에서 나무를 보며 묻는다. ‘너는 아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걸까?’ 아직까지 나무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밤보다 더 어두운 불확실성만 나를 속박해오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시를 공부한 지 이제 겨우 6년째다. 시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공부를 하며 확실하게 느낀 것은 인문학은 삶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와 녹아들 때 생명력을 지닌다. 시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여기서 나왔다.

 

몸은 마음이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삶 속에서 욕망은 서로 충돌하며 갈등하는데, 여기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병듦을 피할 수 없고, 영원토록 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지만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보편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인간의 의식과 심리가 훼손되었을 때, 즉 살아 있는 경험이 상실되었을 때 고통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몸은 곧 마음이며 신체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인 것이다.

몸에도 감정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인 이상 증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의료사의 관점에서 보면, 16, 17세기의 서구에서는 정신 질환을 신체나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한 독소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심리적인 기능과 생리적인 기능을 구별하지 않고 과도한 감정이 질병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붓다는 집착과 욕망을 버릴 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설파했다. 붓다는 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몸의 질병을 주술사의 주문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했다. 한국 고대 사회의 제의를 살펴보면, 시와 노래를 통하여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했다. ‘제주도 영감놀이’나 ‘처용가’에서 놀이를 통하여 희극적으로 병을 치유하고자 한 고대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가 마음과 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학은 병을 치료한다. 의학에서 고통은 하나의 증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치료가 끝났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의학이 모든 고통을 치료하지도 못한다. 치료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몸의 변형이나 치료의 흔적은 한 사람의 삶을 고통 속으로 끌고 간다.

따라서 이때의 고통은 치료보다 치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치료는 진단하고 의학의 기술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지만, 치유는 돌보는 것, 안아주는 것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의학은 기술로 병을 낫게 하지만 문학은 상처받은 내면을 돌보고 안아줌으로써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고통의 경험은 분명히 개인적이며 다른 어떤 경험으로 대체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타자와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고통의 경험일지라도 개인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고통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즐거움과 달리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고통도 느끼고 아는 것이므로 의식에 주어진 것이지만 고통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고통에 의해 성찰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시는 치유 의례이다

 

시의 언어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유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감정의 변화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기억이 작용하여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체험을 떠 올리게 된다. 이 체험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봄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게 되고, 조화로운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성해 내고, 일상적인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축적된 기억과 경험을 쓰기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므로 시는 주관성과 내면성의 표현인 것이다. 시를 쓰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읽거나 쓰는 행위에서 현재 나의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가 자기만의 치유 의례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을 어릿광대로 나타낸다. 루오는 삶의 고통을 어릿광대로 묘사했고, 시인 김춘수는 “내가 비칠할 때 여러분은 날 붙잡아야 해요. 비칠하는 건 언제나 여러분이니까요” “너무 우스워서 한 가지도 우습지가 않아요” 라는 어릿광대의 말을 통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함에서 오는 고통을 노래했다.

여기에서 어릿광대는 고통 받는 개인의 은유이다. 시는 은유를 통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는 개인의 체험에 의해 다양한 감정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억압된 감정은 고통이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해온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의해 세계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전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쪽의 ‘나’와 저쪽의 ‘그’가 ‘있다’라는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거리가 있겠지만, 좀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손의 역할을 시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닫힌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릴 때 시는 창이 될 것이다.

시치유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센인들의 집단촌을 찾아갈 때,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분들을 찾아가고 있는가’라는 데에 생각이 멈추자 고요한 침묵이 나를 엄습했다.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이 나의 기억과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그림으로만 보았던 백설공주는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주었고, 상상력은 내가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올 때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았다. 어른이 되어 만난 시는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슬픔의 모습들을 비추어주며 홀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희망을 찾아서

 

정기 검진을 나온 보건소와 병원의 관계자들과 함께 마을 회관에 들어섰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외부인일 뿐이었다. 거의 한 나절을 기다려 진료가 끝났을 때 어렵게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나의 체면, 자존심 심지어 부끄러움까지 다 버렸다. 모두 무심했다. 잔뜩 경계하고 의심하는 분위기뿐이었다.

‘이미 다른 마을에서 한 번 실패했지 않았는가. 이 마을에서도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만 보였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건만 아무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손으로 적는 대신 기억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를 만났다. 지금부터 7개월 동안 있었던 할머니와의 만남을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매주 2시간씩 얼굴을 맞대거나, 한 이불 밑에 앉아서 할머니는 60년 동안의 삶을 이야기 하고 나는 들었다. 한 사람은 이야기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을 시로 구술했고, 한 사람은 옆에서 받아 적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이 분은 무척 절박했지만, 내가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실패한 이 만남도 이야기 할 것이다. 실패를 통하여 시가 모든 사람들, 모든 고통을 다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배웠다. 실패의 경험은 시치유 외의 다른 인문학적 치유가 필요함을 알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는 시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꽃잎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바람에 실려 간다. 내일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천명을 알아서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나의 희망 자체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고 죽는 삶의 과정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쌓아 두는 마음과 몸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몸과 마음이 있어 희망이 있고 희망에 의해 삶은 변화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고통이고 불완전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내적인 성찰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추구하는 지향을 지니는데, 희망의 씨앗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별빛과 같기 때문이다.

 

 

찌질하거나 어리석음에 관한 수고로운 보고서 3-① [4人4色 책읽기]

김종옥 (작가)

지구보다 훨씬 더 큰 행성에서 인간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을 한, 문명을 가진 지적생명체가 있다고 치자. 그들이 지구를 보았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꼬물꼬물 모여 살면서 집도 지었다 허물었다 하고, 먹을 걸 만들어 먹기도 하고, 무기로 서로를 죽이기도 하며 난리일 게다. 그 사는 모습이, 제 집을 짓고 먹이를 모으고 새끼를 낳고 물어뜯고 싸우는 다른 짐승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제 터전을 열심히 망쳐가면서 살기도 한다는 것이겠다.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38억년이 지나오면서 가장 고약한 종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신 지구생태계의 일원이면서도 아닌 척 고개를 외로 꼬고 스스로 꼭대기에 선 듯 행동한다. 살아온 역사가 각종의 전쟁과 정복의 저열한 역사였으니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생은 둘째치고 제 무리들하고의 공생과 조화조차 못 이루고 살아왔다고 보인다. 그래도 지구상에 나타났던 어떤 특정한 종이 존재하는 평균 기간이 대략 4백만년 정도라고 하니, 그에 비추면 우리 인간종들은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니 네 깜냥대로 계속 그렇게 거칠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는 이 밉쌀스런 인간 무리를 몰아내고 지구에 이주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서론이 길어졌다. 반복되는 어리석음에 하릴없이 농을 풀어본 것이다. 물론 정색을 하는 것보다는 농을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농과 풍자는 적어도 나는 그 속에 속해 있지 않다는 거리감이 담보될 때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반복되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스스로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더럽히고 허물어뜨리는 어리석은 일에 눈꼽만큼도 책임이 없는가. 자연이 스스로의 상처를 스스로의 손길과 숨결로 간신히 꿰매어 나가고 있을, 그걸 보면서 감탄하고 박수치고, 그러다 끝내는 그걸 느긋하게 누릴 자격이 내게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가. 태안에 가서 기름묻은 자갈 한 번 닦았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찜찜한 마음을 숨기며 바닷가 가서 몸을 담가주면, 서해안산 조개 구어 먹었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이 책 <태안은 살아있다>(동녘 펴냄)를 보면 누구라도 쉽사리 난 가해자가 아니오, 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모두는 당연하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연은, 고맙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스스로 치료사이고.

태안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바닷가로 밀려오던 무겁고 시커먼 기름띠와, 물새떼들마냥 무리지어 앉아서 기름묻은 자갈을 닦아내던 자원봉사자들의 감동 어린 장면만을 기억한다면 제2의 재앙, 제3의 재앙이 이어질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태안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책

물론 태안은 살아있다. 물론 과거에도 죽은 적이 없으니 지금도 살아있으며 미래에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에는 한 때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때는 인간이 태안 앞바다를, 갯벌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 시화호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고인물로 죽어있었듯이 태안도 그렇게 죽어서 더 이상 생명이 깃든 자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지금 태안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걸 보면서 자연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깊어서 죽은 듯이 보일 뿐이며 다만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죽은 듯 보이는 자연 안에서 정작 죽어버리는 건 사람의 삶이다.

자연이 생명을 품지 않는다면 그 어떤 영악한 생명도 그 안에서 살아낼 수 없다. 태안이 지금도 살아있는 건 사람이 기름을 걷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복구가 그만큼 놀랍도록 성실했기 때문이다. 기름을 걷어낸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자연은 그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응답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안은 우리가 ‘살려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처가 아물고 속속들이 완전히 새살이 돋아나려면, 그래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니, 그때까지 태안의 바다는 묵묵히 제 살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태안이 어떻게해서 살아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 훗날 태안의 자연이 스스로 제 몸으로 보일테니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 자기 환경을 더럽혔고, 그 바람에 자기 공동체사회가 어떻게 망가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바둑돌이 잘못 놓였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바다도 갯벌도 자기 색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그 바다와 갯벌이 품고 사는 사람 사회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일종의 자기진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보고서는 사고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치밀하게 짚어가면서, 태안의 일을 ‘태안의 기적’이니 ‘태안을 살려냈다’니 하는 무용담으로 포장하는 게 얼마나 참람한 짓인지 보여준다. 비록 바닷물빛이 돌아오고 갯벌에 윤기가 흐른다고 해도 한 번 튕겨져 나갔던 인간들이 그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 아직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공동체 사회를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계산해야 할 복잡한 목록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서 태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살아있기도 한 것이다. 박원순 이사가 ‘희망을 향한 미완의 기록’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이유도 그것이다.

태안의 죽음

2007년 12월 6일 서해바다의 기상악화가 예보된 상황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과 이를 이끄는 2척의 예인선단이 인천에서 경남 거제로 출발했다. 12월 7일 새벽 서해에는 강풍과 파도가 일었고 풍랑주의보도 내려져 있었다. 운항을 강행하던 삼성크레인선단은 새벽 5시경부터 예인력을 잃고 풍랑에 밀리기 시작했다. 근처 대산 지방해양수산청 관제실은 예인선단이 정박 중인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긴급 호출했으나 예인선단은 응답이 없었다. 드디어 새벽 7시 6분경 삼성크레인은 현대오일뱅크의 기름을 실은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원유는 사상 최대인 1만 2500여 킬로리터가 바다로 쏟아졌고, 49일간의 해상방제로 회수된 양은 그 3분의 1인 4175킬로리터였다. 시커먼 기름띠는 인근 해안선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여, 충남 6개 시 군의 11개 읍 면과, 59개 도서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부안 군산 영광 무안 신안 등 전라남북도의 연안 해안과 42개 도서를 오염시켰다. 또 김 굴 미역 양식장 820여 곳과, 조피볼락 넙치 등 종묘시설 81곳, 해수욕장 15곳이 황폐화되었다. 양식장과 어장, 숙박업소, 음식점, 유통과 운송 등 주민들의 피해 신고는 10만 건에 달한다.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 IOPC’의 엄격한 보상 기준에 따른 추정액만도 피해액이 6천억 원을 넘어선다.(국내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규모를 3조원대로 추정한다.) 태안 일대가 실로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휩쓸린’(노진철) 것이다.

이 참담한 현실에 맞서 자원봉사자와 태안주민 등 군 관 민이 모두 팔을 걷어부치고 기름을 걷어내고 닦아내기 시작해서 사고 일주일만에 기름띠 오염 해안선의 79%가 응급방제되었다. 겨울을 지나 7개월여 이어진 방제에 자원봉사자 123만 명을 포함해 200여만 명의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해 2008년 여름에는 깨끗해진 해수욕장을 볼 수 있게 되는 기적같은 일도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의 개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건의 제목만 알고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사건의 시작도, 진행과정도, 결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게 너무 없다.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지, 무엇이 망가졌으며 무엇이 복구되었는지 아는 게 없다. 2010년까지 보상된 것이 고작 54건에 그나마 기대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160억 정도라는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도 잘 모른다.

왜 삼성은 무리한 운항으로 엄청난 사고를 쳐놓고도 법원 판결 뒤로 슬그머니 빠져 있는지, 왜 현대오일뱅크는 이중선체에 들어가는 수십억의 비용을 아끼려고 기름 유출에 취약한 단일선체구조의 선박을 쓰다가 기름을 쏟아놓고도 그 책임에 대해선 왜 아무 말이 없는지, 재난처리를 관장해야 할 정부는 왜 책임 소재 규명과 배상 및 보상에 그토록 소극적이고 무능하며, 왜 제대로 된 재난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보다 앞서 초동 대응에는 왜 그렇게 허점이 많았는지, 왜 자원봉사자의 활동은 감격에 겨워 열정적으로 보도하던 매스컴이 정작 3명의 주민이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공동체 붕괴의 현실과 그 복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지, 그 어느 것도 우리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사고 후 3년도 지난 2010년 2월에 또 한 명의 주민이 자살을 택했을 때도, 그를 쓰러뜨린 절망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다면 당연히 얻어야 할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잘못은 언제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자연재난에 이어 현재 진행형인 고통스런 사회재난도 모두 일단 잘 기억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재난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이고자 하는 이 책에는 재난의 원인과 경과, 진단이 모두 여러 각도에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경의 측면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사회공동체는 어떤 식으로 파열되었는지, 공적 재난관리 체계는 어떻게 허술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한편, 잘못된 보도로 말미암아 쇼가 되고만 자원봉사자 활동의 명암도 짚어본다. 또 재난관리의 매뉴얼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갈등 상황에는 어떤 해법이 있을지, 어떻게 공동체를 복원 할 지 등이 언급되어 있다. 글을 읽다 보면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쏟아낸 것은 1만 2천여 킬로리터의 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양이 증폭되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재앙이었음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갈등, 갈등, 갈등

사고 발생부터 태안에는 숱한 갈등이 생겨났다. 모든 단체간, 모든 개인간에 온갖 종류의 갈등이 서로 얽혀서 만들어졌으므로 실로 허베이 스피리트호 사고의 본질은 이 수많은 갈등구조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태순 씨와 이재은 씨, 노진철 씨의 보고서는 이 복잡다단한 갈등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고원인자이자 가해자인 삼성 등과 법적 공방, 정부의 책임문제, 배상문제 등을 놓고 태안 주민과 삼성, 유조선회사, 중앙정부, 태안군, 아이오피시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며, 태안 재건 방향을 놓고도 군민들과 태안군, 충남도, 정부 간에 이견이 표출되었다. 또 생계비 배분을 둘러싼 마을과 마을 간의 갈등, 통합 대책위 구성을 둘러싼 수산과 비수산 간의 갈등, 삼성과의 자매결연을 둘러산 갈등 등이 발생했다. 이쯤되면 태안 사람들이 수많은 집단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처럼 들린다.”(박태순)

“방제 방식에 대한 갈등, 사고 원인에 대한 견해 차이, 중대과실 책임, 삼성중공업의 책임 범위에 대한 갈등, 생계비의 지역별 배분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 주민 간의 생계비 배분의 형평성을 둘러싼 갈등….. 이밖에도 사고 원인 규명과 관련한 갈등, 피해 조사와 관련한 갈등, 배상액 산정과 관련된 갈등, 피해 주민 간 갈등,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 중앙정부와 삼성과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갈등, 지역개발 방식을 둘러싼 갈등, 생태계 복원 방식을 둘러싼 갈등 등이 있다. 또 함께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나갔고, 이것 때문에 이 지역사회를 뒷받침해오던 공동체 사회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잃어버린 것이다.”(이재은)

이러한 갈등의 본질은 결국 ‘돈’ 문제였고, 이것을 조정할 능력이 정부에게도, 주민에게도, 물론 사고당사자에게도 없었다는 것이 공동체 붕괴의 위기를 맞은 원인이 되었다. 복잡하고 지난한 심사와 재판과정을 거쳐야 하는 피해보상금 문제도 그렇지만,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지원비도 서로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려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차피 국고에서 지원되는 ‘눈먼 돈’인 바에야 내가 못 챙기면 남이 챙길 것이므로 양보고 염치고 차릴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치열한 내 몫 챙기기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바닥을 보아버린 주민들은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 비극은 ‘주민들 스스로 만든 갈등도 아니었고, 기름 유출 사고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으니’(박태순) 겪지 않아도 될 고통, 보이지 않아도 될 바닥을 보이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베이 스피리트 사고가 가져온 가장 큰 비극은 아마도 이것인 듯 싶다.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곳도 이 대목이다.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그에 기대어 살고 있던 사람의 공동체에도 균열이 갔다. 생태계의 파괴가 사회적 재난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태계의 파괴도, 사회공동체의 균열도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있지만, 길게 보아서 생태계가 복원되면 그에 기댄 인간 공동체도 결국에는 예전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기다리기에는 지금 당장의 상처가 너무 크고 당장의 삶이 너무 절박하다. 보상과 배상 문제, 복구 방향 등이 아직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라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오히려 앞으로 더 증폭될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위기에 놓인 마을공동체의 분열을 막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지역을 살려낼 사람은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이다.’(노진철)

그렇지만 상황이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태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희망을 본 연구자도 있다. 박태순 씨는 ‘다행스러운 것은 갈등의 주체들이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자신과 이웃을 재발견하고, 협력과 상생의 중요성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기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태안을 되돌릴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본 희망대로 태안 사고의 ‘완결판’을 만들 때쯤이면 ‘싹트고 있는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4대강, 구제역, 반복되는 악몽

몇 년 사이에 몇 조에서 몇십 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단위의 돈을 입에 자주 올린다. 허베이 스피리트 재앙이 크게는 5조대에 이르는 피해라고 하더니만, 4대강을 콘크리트로 감싸는 공사비가 십몇 조, 이십몇 조라고 하였다. 작년 겨울부터는 구제역에 들어가는 처리 비용이 몇 조란다. ‘억’도 억 소리 나게 큰 돈인데, ‘조’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문제는 이 엄청난 돈들이 결국 헛돈이라는 데 있다.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 돈이고, 들이지 말아야 할 돈이다. 구제역과 허베이 스피리트 재난에 들어가는 돈은 환경을 망친 대가로 치러야 하는 비용이고, 4대강 사업비는 어이없게도 환경을 망치는 비용이다. 세 경우 다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보다 얼마나 더 큰 비용이 단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던 시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헛돈을 메꾸기 위해 국민들은 얼마나 아까운 땀을 공연한 곳에다 흘려야 하는가.

앞장서서, 혹은 제 책무를 방기해서 크게 망쳐놓고 국민들의 땀을, 성금과 봉사를 요구하는 국가는 대체 어떤 수준의 국가라고 할까. 태안 재난에 관련한 이 중간 보고서는 약 4백여 쪽이다. 이 기막힌 수준의 국가는 4대강과 구제역으로는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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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기름유출 사고 이후 3년, 다시 쓰는 태안 리포트 3-② [4人4色 책읽기]

정한 (인천대 윤리교육과 졸업생)

 

2010년 12월 말부터 발생한 구제역 파동 11년 2월 말이 되어서야 잠잠해져 갔다. 그러나, 구제역이 퍼져나가는 건 멎어들었다 해도 구제역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 재산피해, 피해보상, 앞으로 국민들이 겪어야 할 문제들이 과제로 남았다. 국내에 네발달린 동물들은 죄다 살처분 당했고 남아난 가축들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으며 그로인해 치솟는 물가와 철철 흘러내리는 세금, 울부짖는 농가, 썩은 내 진동하는 피맺힌 매립지, 현장은 지옥과 같은 살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다. 재난의 발생,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 대규모의 재난으로 확산, 군까지 동원하여 대응하였으나 대응방침에 대한 문제, 보상에 대한 문제, 언론의 편중된 보도.

과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유사한 사고들 중 가장 큰 충격으로 남았던 것은 07년도에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 태안 기름유출사고가 그것이다. 규모의 문제도 있었으나 2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몰려간 그 사고는 우리 국민들 속에 잊을 수 없는 사고 중 하나로 기억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태안의 사고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고 자체는 잊지 못할 지라도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이며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도에 걸맞게 출판된 저서가 있다. ‘태안은 살아있다.’가 바로 그것이다. 희망제작소가 기획하여 출판된 저서는 노진철, 박진섭, 위평량 등 총 11명의 저자들이 쓴 글을 묶어 낸 것으로 태안의 문제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으며, 다양한 사진과 인터뷰 내용으로 현장의 모습을 전달한다. 총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으로 책은 다소 두껍지만 그 만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바라본 태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책의 구성 역시 하나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글을 앞에 두고 환경, 경제, 행정, 언론의 문제 및 태안 군민의 갈등, 삶의 질에 대한 분석까지 세세하게 살펴 태안의 모습을 빠짐없이 전달해 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저서에도 밝혔듯이 태안 사고와 관련된 언론의 편중된 취향은 많은 국민들이 알고 싶었던 부분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의혹과 알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점이 사실이다. 삼성과 현대, 태안 주민들의 실질적인 보상과, 그 규모, 태안은 복구가 된 건지 등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언론에서 놓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으로 외면하기 쉽고 안타까운 오해까지 생긴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들의 뇌리에는 하나의 해결된 사고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의 출판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담는다. 그렇다면 ‘태안은 살아있다.’ 저서는 사람들 기억 속에 침전된 사건을 다시 수면위로 부상시킬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태안은 살아있다’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렇게 각자의 글을 모아 만든다는 것은 혼자서 다 집필하는 것 보다 기간을 줄일 수 있고 또 깊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점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문제없이 한 책으로 잘 묶여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무리 뜻 깊고 유익한 책이라도 자신이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면 억지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약간이라도 흥미를 느끼게 하거나, 적어도 지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저서는 유사한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독자를 지치게 한다. 물론 각자 글을 쓰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고자 하는 전개부분은 사실 유사할 수밖에 없다. 즉, 태안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으며 본론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면 들어가야 한다. 뜬금없는 내용이 튀어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 놓고 봤을 때는 흥미와 집중력을 끌 수 있을지 몰라도 뭉쳐놓고 보니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자의 글을 온전히 싣는 것에 중점을 둔 모양인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두지 않아 아쉽다.

각자의 글을 엮어낸다는 것은 사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저서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제를 각자 전문가의 분야에 맞게 잘 분배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서로 달라서 많은 시간동안 조율되지 않으면 전체적인 흐름을 해칠 수 있다. 특히 같은 분
야를 연구한 이들이 모여서 쓴 글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문제점이 저서 곳곳에서 눈에 띄며 그것이 책을 읽는데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의 매력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바라본 태안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는 태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행정학을 연구한 이는 태안 사고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보는지 각 분야의 보고서는 말 그대로 태안의 현 실태를 상세하게 알려줌과 동시에 태안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방향을 그려낸다. 저서를 다 읽은 독자는 마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앞에 두고 보고를 들으면서 회의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글들 간의 소통은 정말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이며 그렇게까지 자세하고 세부적인 내용까지도 독자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도 걸려 마치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독자들을 따로 상정해 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자잘한 것들은 제쳐두고 크게 보자면 그러한 구조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서 나름의 개성이며 장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고 본다.

구조가 독특하여 장점과 단점을 끌어안고 출판된 저서는 노진철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태안,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흽쓸리다’라는 제목의 글로 시작한다. 글은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 내용을 실어가며 현장감 있는 접근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방식은 단지 첫 글에서만 들어난 것이 아니라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이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마을 주민들의 고통과 분노, 고민과 절망의 감정을 손쉽게 전해 받을 수 있으며 글의 흥미를 끄는 요소로 작용된다. 또한 글은 전에 행복하고 평안했던 태안 주민의 모습과 사고 이후 절망에 휩싸인 마을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주면서 태안의 고통을 독자에게 각인시켜 나간다. 그러한 과정은 단순히 근거 없는 추측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치를 보여주어 좀 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여 객관성을 높힌다.

글은 전반적인 태안의 모습들을 객관성 있는 자료를 통해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어 섬마을 사람들의 고통이나, 태안주민의 자살문제, 피해보상과 관련된 문제 등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데 독자가 알고자 했던, 혹은 알고 있었어야 하는 문제들을 다뤄 독자를 태
안의 문제로 인도한다. 글의 끝부분에 가서는 태안 곳곳에 달린 현수막을 통해 태안 마을 주민들의 심경변화를 대변하는데 그 현수막의 글귀들이 독자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태안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이렇게 독특한 방법으로 접근한 시도는 그들의 분노와 억울함,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들까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어 독자들의 관심과 감정을 이끌어낸다.

글은 흠잡을 데 없는 짜임새로 태안의 전반적인 내용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소개한다. 태안의 사고과정부터 피해보상, 태안주민들의 심정까지, 이 글은 태안 문제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려 저서의 기둥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러나 손댈 곳이 없는 듯한 완전함은 오히려 저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분명 처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의 관심을 붙들고 소개하는데 무리가 없으나 덕분에 뒤에 실린 글들이 퇴색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글 이후 다음에 이어지는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읽었던 부분인 것 같은데…’, ‘이 내용 앞에서 본 것 같은데…’란 생각을 계속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첫 글은 태안의 전반적인 밑그림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 자체로 이미 책의 내용을 다 읽어버린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차라리 이 글을 뒤에다 배치시켜 놨으면 그러한 감각이 덜 느끼게 만들 수는 있겠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글들은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라 글 자체만으로 질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첫 글에 나오는 것이 또 무리이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러한 문제 외에도 독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할 만한 부분 중 하나인 사고에 대한 법원판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사고일지에서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선박들의 움직임이나 글에서도 밝혔듯이 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판결이 나온 건지, 또 그러한 부분에 대해 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다뤄주지 않고 간략하게 소개만 한 체 넘어간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나라의 사례를 소개해 이 판결이 불합리한 판결이라는 사실을 들어내는 측면은 불만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준다.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푸른 바다, 검은 재앙 안에 갇히다’ 박진섭 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의 글이다. 생태지평연구소에 계신 분이신 만큼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태안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기름 유출에 의한 오염과 관련해서 단순히 우리는 ‘몸에 나쁘다’라는 인식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전문적인 지식과 과거 사례들을 이용해 소개한다. 그러나 이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염되지 않았던 태안의 해양생태계를 소개하는데 이것이 단지 거대한 생태계의 보고가 황폐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다소 글의 주제를 퇴색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자는 글을 더 확대시켜 해양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언급한다. 결국 저자는 단순히 태안 생태계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무너져가는 해안생태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글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뜻 깊고 유익하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태안과 관련된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지 느닷없는 확장은 독자를 당혹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개를 보이는 글은 이 글뿐만 아니라 저서에 담긴 몇몇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금빛바다를 잃어버린 사람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의 글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재산피해규모와 같은 여러 수치들을 다양한 표를 통해 보여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태안의 모습이다. 상당히 독특하게 관점에서 전개하는데 이러한 글들은 보기 드물다. 보통 태안과 같은 문제들은
사회학자나 환경단체에서 주로 글을 써냈기 때문인데 그렇게 때문에 특별한 이 글이 독자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과연 태안의 경제발전은 가능한가? 앞으로 그들의 지역개발은? 무너져 버린 생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효율적인 피해보상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러한 내용 중 몇몇은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라 겹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의 글은 넘쳐나는 수치와 분석을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단지, 숫자에 질리지 않을 사람들 내에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숫자와 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세부적으로까지 알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대략적인 규모로 이야기 해도 저서의 의도를 해치지 않았을 것이라 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각자가 생각한 독자층이 따로 있는 듯 하여 들어난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2장으로 넘어와서 재난관리에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는 주로 행정학을 연구한 이들이 쓴 글이 모여 있는데 2장의 시작은 ‘초기재난관리의 실패’ 이재은 충북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의 글이다. 경제학을 연구한 저자와 마찬가지로 행정학을 연구한 이의 글 또한 독특한 관점이다. 물론 행정을 중심으로 바라
봤으니 대부분은 재난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했는지가 주로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는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행정학을 연구하는 저자라 그런지 글 자체도 매뉴얼 형식이다. 소제목들이 일종의 체크리스트처럼 되어있는데 그것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대응은 적절한가?’, ‘방제물자, 비축과 관리는 적절했나?’, ‘현장 지휘, 혼란스럽지는 않았나?’, ‘2차 오염가능성은 예상했나?’, ‘자원봉사자 관리는 철저했나?’ 등 이렇게 하나하나 체크해 나가는 방식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줘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빠짐없이 전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이점이 있다. 글 자체도 무척이나 깔끔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행정학자가 쓴 글이라면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은 ‘매뉴얼, 과연 현실상황에 적합했는가?’하는 점이겠다. 저자 역시 그러한 매뉴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매뉴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소개하는 것 보다 그렇게 매뉴얼이 있는데 왜 대응에서는 그렇게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지의 내용이 더 중요하고 핵심이기 때문에 구지 매뉴얼 소개에 그렇게 많은 지면을 소모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잊혀진 씨프린스호’ 이야기가 나오는데 씨프린스호의 사례를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단순한 소개로 끝난다. 씨프린스호 사고는 국내에 영향을 준 사고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사례 소개로 마무리 된다면 해외에서 일어난 여러 기름유출 사고를 소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씨프린스호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우리는 한번 겪은 사고에도 학습하지 못하고 또 큰 사고를 경험했다는 것이 초기 재난관리의 측면에서 구멍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곁들여 졌거나 좀 더 명확한 비교분석이 들어갔다면 사례소개가 이처럼 무의미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도 씨프린스호를 언급하는데 혹시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편집자가 의도해서 그 부분만 빼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뜬금없다.

다음은 ‘재난은 있어도 재난보도는 없었다’ 박동균 대구한의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쓴 글이다. 경찰행정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시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점이다. 분명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고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묻혀져 의아했던 부분을 풀어준다. 글은 간략한 사고일지의 소개 이후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가해자’로 분류된 삼성과 현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얌체적인 행동들을 고발하고, 사법당국의 엉뚱했던 수사발표 역시 푹 찌른다. 또한 해경과 검찰의 침묵을 지탄하고 그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전반부의 중립적인 태도와는 조금 달라서 시원스러운 전개가 독특하다. 왜 언론은 미담만을 전했는가. 왜 언론은 그들의 제목에서 가해자를 숨겨버렸나. 왜 분신자살과 같은 사건들의 심층적인 보도는 없었나. 필자가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11년 1월 7일자 기사에서 태안주민들은 인지세 730만원을 내지못해 자살어민 유족들의 소송이 재판에 오르지도 못한 채 끝났고 인지세를 지원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 요청 역시 기각되었다는 사실이 기사는 있어도 제대로 표면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 태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침전해 들어가고 있다.

다음은 ‘재난관리 매뉴얼’ 양기근 원광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의 글이다.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매뉴얼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간 글로, 2장 첫 글의 미비한 부분을 해소시켜 준다. 2장에서는 간단한 소개만 하고 넘어갔던 씨프린스호에 대해서도 제대로 짚고 넘어간다. 저자는 특히 기름유출사고와 관련된 모의훈련을 08년 8월 24일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훈련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는지, 매뉴얼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파고들어 가는데, 매뉴얼에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왜 그러한 문제가 있는 매뉴얼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앞으로 매뉴얼을 수정하고 그에 맞는 훈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언급한다. 누가 알았겠는가. 기름유출 사고 매뉴얼에 평온한 바다만을 상정하고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생존, 그 이상의 삶에서는 이제 태안주민들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이어진다. 그 첫 번째 글은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장의 ‘갈등관리 해법을 찾아서’인데 서로 불신의 담을 쌓아가고 있는 태안주민들에게 유익한 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 번째로, 글을 쓰는 목적을 밝힌다 하면서 ‘외부집단과 태안주민의 갈등을 중심으로 서술하지는 않겠다’거나, ‘태안의 상태를 알리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라고만 했지, 정작 무엇을 중점으로 쓰겠다는 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다. 희망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 쓴다는 것만 밝혀서는 무슨 내용이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 ‘갈등관리 해법을 통해 희망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라고 썼다면 아주 명확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제목 하나만 써두고 언급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애매한 흐름을 보이는 것은 곳곳에서 들어나는데 특히 ‘갈등이 보다 합리적 문제해결의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라던가, ‘태안은 위기상황에서 공정성과 공평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갈등이 스승 역할을 한 것이다.’ 라는 문장은 마치 ‘갈등이 필요했다’라는 의미 같다. 물론 우리가
좀 더 앞으로 내걷는 과정에 있어 갈등은 분명 큰 스승이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 말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단, 태안사고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다. 손가락 절단이나 분신시도와 같은 것을 갈등이라 보면서 위와 같은 문장을 사용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순수하다 할지라도 오해할 소지가 있다.

또한, 글의 소제목을 ‘갈등개요-갈등전개-갈등해소-갈등특징’으로 나열했는데, 갈등해소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생계비 분배문제가 갈등해소가 되었거나 갈등해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나? 그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단순히 ‘불만이 없다’라는 문장만으로 주장하기에는 민감한 문제이며, 저서의 글들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견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생계비 분배문제 이전에 생계비 지연문제 역시 갈등을 제공하여 자살자가 3명이나 나왔는데도 언급이 없다는 부분은 아쉽다. 뿐만 아니라 ‘통합조직구성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분열된 조직이 다시 통합했기 때문에 ‘훨씬 체계적, 수평적, 민주적, 투명하게. 운영될 것이다’는 주장을 하는데 근거 없이 낙관적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태안은 스스로 갈등을 해소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느닷없이 갈등해소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갈등을 해소해 나간다고 보면서도 갈등해소방법이 필요한가? 필요할 수는 있겠으나 다소 설득력이 부족한 구조는 아닌가. 사실 갈등 해소방법은 태안주민과 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글의 핵심이 된 이유는 저자가 꼭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태안의 갈등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꺼내 놓은 후 자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 바로 갈등의 해법을 이야기 하고, 갈등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 하며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 의지를 보이면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바를 엿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태안 주민들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들을 이용해 갈등을 접근해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해야 설득력이 있지 태안 자체로도 해결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다.

다음은 ‘파괴된 삶을 복원하라’, 유현정 충북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의 글이다. 이 글은 저서의 부록을 제외한 모든 글을 통틀어서 가장 친근하게 접근한다. 필자가 연구하는 과정을 경험담 형식으로 풀어나가는데 저서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뷰 내용도 이용한다. 저자는 태안주민들의 삶의 질과 만족,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데 문제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다른 저서의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이지, 역시나 다른 독자층을 대상으로 쓴 것인지, 주민들의 수입을 억대라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앞의 글들에서 알려준 정보와는 틀리며 마치 태안 주민의 평균적인 소득을 말하는 것 같아 모호하다. 또한 공공근로 수입이 6만이란 이야기도 앞의 내용과는 틀리다. 세부적으로 나눠 설명하지 않고 방제비로 6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앞의 글에서는 분명 공공근로는 방제작업의 위험성 때문에 배제된 노인들에게 할당된 일이며 3만5천의 적은 수입으로 불만이 가득하다는 글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이러한 모호한 사실전달에는 문제가 있으나 6만의 일당 덕분에 5만에 구했던 주방 도우미를 구할 수 없다는 하소연 등 생활일상의 소개는 놓치고 가기 쉬운 부분이며 태안 주민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록 명확한 사실전달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태안주민들의 바로 옆에서 듣는 것과 같은 글의 흐름과 구성은 태안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지표가 되어 준다.

저서의 글들은 각자 저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서로의 통일성을 해치며 글들 간의 소통이 없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편집자의 재량이 좀 넓어서 몇몇 군데만 수정을 가했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큰 줄기는 놓치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 저자의 개성이 잔뜩 살아나 마치 저자가 누군지 안보고도 저자의 분야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독특한 느낌은 이색적이다. 좀 더 아쉬운 부분은 의료적인 분야에도 글이 있어서 태안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부작용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가 들어갔으면 하는 면이 있으나 그것은 단지 필자의 개인적인 사소한 바램이다. 이미 저서가 지닌 방대한 정보는 태안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각하여 우리가 분명히 신경 써야 할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태안문제를 다시 사회의 표면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저서는 태안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비난할 대상을 지목하거나 공격적으로 작성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객관적인 사실의 전달을 그 중점으로 두는데, 이러한 점은 저서의 신뢰도를 높이며 사회의 단결된 힘을 끌어내는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줄 것 같다. 이 저서를 시발점으로 앞으로 많은 칼럼이나 기사가 나와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구제역 파동과 함께 국민이 뭉쳐 해결해 나갈 사회적 문제로 토론의 장에 올라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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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살아나는 태안, 처절한 몸부림 3-③ [4人4色 책읽기]

김한규 (하동해설사회 생태해설가)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 6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어족자원을 터전으로 삶의 활력이 넘치던 태안반도는 순식간에 암흑 같은 절망으로 뒤덮였다. 기상악화가 예보된 상태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 크레인과 이를 예인하는 3척의 선박으로 이루어진 예인선단이 무리하게 운항하다 서해에 정박중이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한 것이다. 이 사고로 1만 5천톤의 기름이 태안 앞바다에 폭포처럼 쏟아져 밀려들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1995년 7월 23일, 여수 해역에서 좌초되어 5.035톤의 기름을 바다에 쏟아낸 시프린스호 사건의 악몽을 겪었다. 여수 앞바다의 일부 해저에서는 사막화가 우려된다는 보고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허베이 스피리트호에서 쏟아져 나온 기름은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선박 유류사고의 유출량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양이었다. 이처럼 크나큰 재앙으로 뒤덮였던 태안반도는 3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살아나고 있을까.

사고 당시 구성된 재난관리 전문가들 열 한명이 3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하여 자료로 묶은 보고서 <태안은 살아있다>가 ‘희망제작소’의 기획으로 나왔다. 생태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전공분야로 구성된 이들은, 사고와 기름유출의 배경, 환경오염과 변화, 주민공동체의 붕괴와 고통, 배상을 둘러싼 문제들을 조사하고 분석하였다. 이 보고서들에는 한결같이 바다의 기름유출사고가 자연과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해결과 복원은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구체적인 지표로 보여주고 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선박의 기름 유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1997년에서 2006년까지 10년간 선박의 기름 유출 사고를 보면 총 3,915건이 발생했고 1만 235.5킬로리터의 기름이 유출되어 바다를 오염시켰다.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가 난 서해 바다에도 1997에서 2006년까지 10년간 총 230건의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고 293.6킬로리터의 기름이 유출되었다. 한 해 평균 390건의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며, 매년 1,203킬로리터의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고 있는 실정이다.”(박진섭)라는 것이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다. 바다의 생태를 온전히 지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근원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이기심과 욕망은 생명의 근원을 죽음의 터로 바꿔놓고 있다. 특히 가장 크게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이익이 걸려 있는 원유의 수송을 둘러싼 나라들의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인간에게 하루도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기름은, 필요한 물건의 용도를 넘어 매순간 재앙의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끊임없는 재앙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선박사고의 경우 운항과실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운항과실은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한 무리한 운항에서 비롯될 것이다. 태안을 악몽으로 뒤덮은 기름유출 사고도 삼성중공업 예인선단의 무리한 운항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사고를 각오하고서라도 자본의 이해관계는 이익의 목적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한 다음에는 그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대기업의 속성이다.

태안 앞바다를 기름으로 뒤덮은 뒤에도 자본의 그런 속성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삼성중공업이 2008년 12월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손해배상 책임을 50억원으로 제한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유조선 쪽 잘못으로 피해가 커졌기 때문에 법정 한도 안에서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피해규모가 6,000억 원이 넘는데 가해자는 그 100분의 1도 안 되는 돈만 내놓겠다고 주장한 것이다.”(이재은) 결국 ‘2010년 2월 말까지 보상 청구된 주민들의 피해건수 7만2402건 중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의 사정이 완료돼 보상금이 지급된 것은 0.9퍼센트인 653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상비 책정이이나 배분을 둘러싸고 주민과 지역 사이에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책임져야 할 주체들은 뒤로 빠지고 무자비한 재앙의 고통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으로 돌려질 뿐이다.

<태안은 살아있다>는 인간의 삶에서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결코 경제적인 이익이나 가치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의 근원은 자연에 있는 만큼 자연을 이익의 대상으로 정복하고 이용하려 들 때에 결과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닥치고 있는 크고 작은 불행과 재앙의 원인이 결국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년이 지난 지금, 태안 주민들은 지금까지 갈등을 해소하고 삶의 터전을 회복하여 희망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주민들의 몫으로 남겨지는데 있다. 한 예로 사고 이후 15명의 암환자가 발생했지만 구체적인 역학조사나 대책이 별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언론도 일본의 자원봉사 기적을 보도하며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을 유도했지만 피해의 책임규명이나 본질을 충분히 파고들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은 삶의 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활에 대한 만족과 의미, 가치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태안은 살아있다>에서도 태안 주민들의 피해를 제대로 보상하고 공동체와 삶을 온전히 복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입장과 주민의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작성된 보고서인 만큼, 충분히 기억을 되살리며 고통에 참여시키고 책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이웃의 문제이며 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에 매달려 있는 인간들은 망각에 익숙해져 있다. 개인은 물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는 만으로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될 것이다.

<태안은 살아있다>는 구체적인 기억과 현재진형인 고통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되찾고자 한다. 그 희망을 피해 당사자들인 태안과 서해 주민들이 힘겹게 일궈가고 있다. 그 때 현장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우리는 어느새 그 참혹한 때를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태안을 살아있다>에 실린 보고서를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내 일상의 안일을 위해 빚진 것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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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가 씻긴 것, 태안인가 삼성인가 3-④ [4人4色 책읽기]

이정미 (동녘 편집자)

벌써 다 잊었나 ― 아직 끝나지 않은 일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전에 서둘러 안면도로 대하를 먹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차가 막혀 저녁에 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래, 가을엔 대하지.”
아무 뜻 없이 그런 말이 나왔고, 친구하고는 약속을 미루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그동안 회사에서 준비해온 지난 2007년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에 관한 기록들을 사고 3주기가 되는 12월 7일 안으로 책으로 완성해야 하는 일정이 짜여졌습니다. 그때 문득 며칠 전에 통화를 한 그 친구가 떠오르더군요.

지금 다시 봐도 불편한 ‘그때’의 장면들을 펼쳐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자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건가’ 싶었습니다. 사건 일지와 사진 자료, 보도된 기사들을 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탄식뿐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사고의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시점에서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더군요. 그저 눈으로 하는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발생 시점으로 돌아가 사고가 발생한 17시간이 집약된 일지부터 읽는 일이었습니다.

3년 전 2007년 12월 7일 새벽, 태안 청정해역으로 1만 500톤의 검은 기름이 쏟아졌습니다.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기름 유출 사고 유출량을 합한 것보다 많은 양의 기름이었다고 합니다. 태안의 바다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밀려드는 파도에도 양식장에도 갯벌과 모래사장에도 어느 곳을 가도 기름 범벅이었고, 기름 냄새로 호흡이 곤란할 지경인 그 모습들이 생생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양식업자, 어선어업인, 식당업자, 숙박업자, 맨손어업인들은 기름 유출 때문에 당장의 생활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대학 때 바닷가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시던 용돈으로 생활을 하던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와 그 가족들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나 그 마음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당시 집계로 6,000억 원 이상의 피해규모에도 불구하고 사고 가해자인 삼성중공업은 법원에 손해보상을 50억 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신청한 상태였고, 공범자인 현대오일뱅크에는 무죄가 선고된 상태였습니다. 3년 뒤, 2010년 2월 26일에는 전피해민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성정대 씨가 자살을 했습니다. 성정대 씨는 양식업 실패에 대한 절망감에다 2년 동안 지급된 보상이 청구된 주민들의 피해 건수 7만 2,402건 중 0.9퍼센트인 653건에 불과해 피해의 1퍼센트도 보상을 받지 못한 지지부진한 성과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2년 전 피해 어민 3명이 자살했던 고통스런 시절에서 무엇 하나 뚜렷하게 나아진 것이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내용과 책이 될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만 남은 이 사건을 복기하는 일,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책이 나왔다 ― 우리가 씻긴 것은 삼성이었나?

사고 시점부터였으니 상당히 긴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구성된 재난관리 전문가 조직이 사고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해 201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구자들이 애정을 가지고 태안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며 연구한 자료를 모은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이 정리되었습니다. 책은 사회학자, 생태학자, 경제학자의 눈으로 분석하는 일, 행정학자들이 모여 초기 재난관리의 실패를 반성
하고, 소방행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 그리고 사고 이후 주민들의 생활과 갈등과 건강 등을 충분히 기록했습니다. 사회적 재난이 번지면서 마을공동체를 위협하는 갈등 상황을 분석하는 일을 마치고 해결 방향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벌써 다 잊었나 봅니다. 제가 태안을 방문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도 그때의 그 사건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 늦은 외침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못했고, 막상 책의 실물을 본 사람들의 소감도 ‘사고가 벌써 3년이나 지났어?’ 정도였습니다. ‘30만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으로 씻긴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은 태안이 아닌 삼성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괘씸한 건 삼성의 태도였습니다. 마을 몇 곳을 찾아 마치 큰 혜택이나 주는 듯 자매결연을 하고 자신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을 뿐 실질적인 보상은 나몰라라하고 있으니 말이죠. 푸른 바다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모든 주민들의 삶이 기름 재앙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진정한 생태계의 복원은 인간 공동체가 함께 복원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안의 파괴된 삶이 복원될 때 비로소 생태계의 치유와 다른 문제들이 함께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삼성은 법원 판결 뒤로 숨어 우리의 망각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사고 이후 지금 태안은 예전의 아름다움과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지만, 주민생활의 완전한 복구는 미진하기만 합니다. 생활 터전을 잃어버리고 이웃을 잃은 상처와 서로간의 불신으로 공동체가 무너지는 등 상흔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이 살아남아 계속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반성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재앙을 극복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더 큰 관심과 응원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태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덧붙이는 말 ― 만든 책, 만들어지는 책

뒷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들면서 ‘책의 운명’과 ‘책의 외연’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아 이곳저곳에 작업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었습니다. 원고에 참여한 재난관리 전문가들과 환경운동연합의 도움으로 많은 자료가 있었지만 좀 더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헌데 도움의 손길을 뻗치자마자 신기하게 손을 맞잡아 주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태안에 내려가 자원봉사를 하며 사진과 영상을 기록으로 남긴 대학생들, 지역신문을 만들며 태안살이를 하고 계신 분 등 많은 분들이 기꺼이 자료를 보내주셨습니다.

특히 지역신문 《태안시대》에서 보내준 현재 되살아난 태안 푸른 바다의 모습은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암담한 사고의 기록부터 사람들의 힘으로, 자연의 복원력으로 회복해가는 지금의 모습까지 담을 수 있어 책은 좀 더 풍부해질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책의 판매량을 두고 책의 운명을 운운하는데, 책의 운명이란 게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이번 작업은 제게 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한 고마운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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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2)

번역자 :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인간들에게 부여하는 여러 가지 유익을 열거한다. 우선 생명 자체가 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놓은 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생명보다 달콤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은 누구에게서 비롯된다 하겠습니까? 바로 나로부터 입니다. 인간 종족을 혹은 생산하고 혹은 번성케 한 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따님인 팔라스의 창도 아니며, 구름을 모으는 유피테르의 방패도 아닙니다. 실로 눈짓 하나로도 올륌포스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드는 신들의 아버지이며 인간들의 왕이신 유피테르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틈틈이 행하기 위해는, 다시 말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과 같은 번개를 내려놓고, 매번 모든 신들을 기겁케 하는 티탄족의 근엄한 표정을 지우고,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표정의 가면으로 가엽게도 자신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신들에 매우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세 배 혹은 네 배, 아니 원하신다면 육 백배나 지독한 스토아 철학자를 한 분 지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분도 또한, 염소들이 가진 것과 흡사하면서도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턱수염은 그대로 둘지라도, 자존심은 분명 꺾어야 할 것이며, 이마의 주름살은 펴야 할 것이며, 강철 같은 원칙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나마 바보스러운 짓을 하며 미치광이 짓을 하지 않고서야, 요약하자면 나를, 그러니까 나를 따르지 않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철학자가 아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왕 여러분과 내 어찌 평소대로 탁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묻거니와, 머리통, 얼굴 낯짝, 젖가슴, 손가락, 귓불따귀 등 이런 의젓한 사지육신에서 신들이나 혹은 인간들이 생산되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웃지 않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아랫녘 샅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산출자입니다. 이곳이야말로 경건한 성지요, 세상만물이 진실로 삶을 획득하는 샘일진대, 어찌 피타고라스의 사원소 (四元素)에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이 늘 하는 방식대로 먼저 결혼생활의 불편함을 심사숙고하였다면 아니 도대체 혼인의 재갈을 자발없이 덥석 입에 물 남자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만약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를, 양육의 번거로움을 알았는지는 그만두고 최소한 짐작이라도 하였다면, 남자를 받아들일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명이 결혼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이렇게 결혼은 나를 시중드는 ‘경솔’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결국 생명이 내게, 무엇보다 내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기 바랍니다. 또 출산을 일단 경험한 여자들이 새로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내 시종 ‘망각’이 능력을 드러내 발휘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 여신을 생명의 시작이라 떠들어대지만, 정작 베누스 여신 본인은 내 조력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의 역량이 십분 발휘되지 않으며 그저 헛손질만을 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술에 취하고 웃음이 가득한 나의 놀이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 잘난 맛에 취한 철학자들이며, 오늘날 이들을 대신해서 사람들이 수도사라고 부르는 자들이며, 자줏빛 관복을 걸친 군주들이며, 경건한 사제들과 그보다 세 번 더 경건한 교황들도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들이 노래하는 신들 모두가, 넓은 품을 가진 올륌포스 산마저도 그들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많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내가 생명의 씨앗이요 원천이며, 삶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생명이 살아가면서 접하는 편리한 것들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묻거니와, 여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어떠합니까? 삶에서 쾌락을 제거해버린다면, 삶을 도대체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박수를 보내주니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쾌락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만큼 현명한, 아니 어리석은, 그러니까 내 뜻은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스토아 철학자들도 결코 쾌락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감추고 짐짓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는 수많은 비난 욕설을 퍼부으며 쾌락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지만,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고 나면 그들만 홀로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 맹세코 내게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 우신이 삶을 위해 마련한 청량제와도 같은 쾌락이 없다면, 인생 어떤 부분을 두고도 침울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끔찍하지 않고,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적임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바쳐도 모자랄 저 유명한 시인 소포클레스인 듯합니다. 그는 나에 관해 저토록 아름다운 찬사를 지었는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관해 그럼 이제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밝혀봅시다.

우선 인간이 살아갈 한뉘 인생 가운데 그 초입이 모두에게 무엇보다 행복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때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젖먹이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가졌기에 우리는 아이들과 입 맞추고 아이들을 얼싸 안고 호의로써 돌보아주는가 하면, 심지어 원수지간인 사람마저 유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려 깊은 자연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정성들여 심어준 천성인바, 순진무구함의 어리석음이 발산하는 매력입니다. 이에 끌려 사람들은 즐거움이라는 일종의 보상만으로도 양육의 고생을 잊을 수 있으며 돌봄에서 비롯되는 서로간의 애정을 극구 칭송합니다. 유년기에 이어 다음으로 다가오는 소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환영을 받으며, 이를 모두가 얼마나 환한 표정으로 기뻐하며, 얼마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격려하며, 얼마나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소년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묻습니다.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면 어디겠습니까? 내 덕분으로 소년은 얼마나 덜 영악하며 그리하여 얼마나 덜 싸움을 벌입니까? ‘순식간에’라고 말해야 거짓말을 면할 터이니 말하자면, 순식간에 소년은 몸집과 기골이 장대해지고 세상사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성인남자의 기색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어 기려하던 영광은 시들고 힘차던 활기는 주저앉고 불타던 매력은 싸늘해지고 넘치던 열정은 사그라집니다. 하여 소년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멀어져 갈수록 인생의 생기는 더욱더 줄어드는데, 이렇게 ‘짓누르는 노경’에 이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고통스런 노령에 다다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커다란 고통을 불쌍히 여겨 다시 한 번 인간을 돕지 않았다면, 참아내기 어려운 노령을 인간들이 견뎌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시인들의 노래에 따르면 신들이 제 모습을 바꾸는 변신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여하히 돕곤 하였던 것처럼, 나도 꼭 그렇게 변신으로써 마침내 관에 들어갈 지경에 이른 사람들을 가능한 한 유년기로 돌려보냅니다. 하여 이를 두고 사람들이 노년을 ‘제 2의 유년기’라고 부르곤 합니다. 더불어 내가 쓰는 변신의 방법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것을 숨김없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노인들을 내 시종 ‘망각’이 연원하는 샘 ? 망각의 강은 행복의 섬에 위치한 샘에서 시작되며, 흔히 저승에 흐른다는 망각의 강은 겨우 작은 지천에 지나지 않습니다 ?으로 데리고 가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노인들은, 망각의 샘물을 길게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심씩 영혼에 가득하던 근심걱정이 씻기면서, 다시 유년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영원한 현자, 소로우와의 만남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임명옥 (보령 책 익는 마을 회원)

 

방문객이 되어 길을 떠나다

나는 방문객이 되어 그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를 방문하려 했을 때 사실 내 마음은 덜컹거리거나 삐걱거리고 우글우글 끓거나 오글거렸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자아와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아가 만나서 갈등하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깨어 있는 삶과 본질적인 삶을 추구했으며, 말과 글로써 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살다 간 그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월든 호숫가로 이끌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이라 여겨지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모험과 실험 정신을 가지고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 찬 인생길을 선택했다. 극심한 고통과 근심, 과도한 노동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들에게 그리고 집의 노예, 재산의 노예, 일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자급자족과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해 보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고향인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햇볕이 화사하게 내리쬐어 만물을 회생시키는 이 최초의 봄날 아침, 숲으로 들어선 나는 월든 호수 근처에서 개구리와 거북이의 마중을 받는다. 월든 호수는 웅장하지는 않지만 수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묘사대로라면 여름날 청명한 날씨에는 청색빛, 폭풍우가 부는 때는 청회색빛, 사방이 눈으로 덮였을 때는 초록빛을 띤다. 호수에는 강꼬치고기, 메기, 퍼치, 피라미, 황어, 기름종개, 송어, 장어가 서식하고 봄과 가을에는 물오리와 기러기가, 여름에는 횐가슴제비가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소로우에게 월든 호수는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친밀하며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이자 대지의 눈이다.
소로우,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다

소로우는 1845년 3월 말 경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마을에 통나무로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 혼자 힘으로 봄과 여름 내내 집을 지었다. 숲에 있는 호두나무와 소나무를 자르고 베고 깎는 일은 그에게 즐거운 노동이었다. 기둥과 서까래를 다듬고 굴뚝을 만드는 일은 그에게 재미있는 놀이였다. 점심으로 그는 버터 바른 빵을 싸 갔는데 송진이 묻은 손으로 만진 빵에서는 소나무 향이 풍미를 더 했을 것이다. 28달러의 비용으로 거주할 공간을 완성했는데, 그 비용은 그 당시 하버드 생이 학교에 내야 할 일 년 치 월세보다 더 싼 비용이었다. 즉, 소로우는 적은 돈으로 평생 살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나는 그의 오두막 집 문을 두드린다. 그는 노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이 가져 오는 맑으면서 풍부하고, 깊으면서도 예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진지하면서도 신중해 보였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 온 방문객을 성의껏 맞아 주었다. 그의 집은 폭이 약 3m, 길이가 4m 50cm, 높이가 2m 40cm 정도로 몇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작고 아담한 크기이다. 집 안에는 탁자 하나, 침대 하나, 의자 세 개, 책 몇 권, 그릇 몇 개 정도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벽난로를 놓았고 창문과 출입문이 있다. 소로우에게 주거 공간이란 기본 요건만 갖춘 간소한 집을 의미한다. 살아가는 데 필수품인 것들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릇이 몇 개 없으니 찬장이 필요 없고, 옷도 몇 벌 없으니 장롱도 필요 없다.

탁자는 책상이자 식탁이고, 집은 거실이자 침실이자 부엌이다. 커튼은 자연이 만드는 채광이 있으니 필요 없고, 창문을 통해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으니 그림이 필요 없고, 자고 일어나면 온 숲 속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로 음악이 필요 없다. 나는 그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는다. 그의 집에는 의자가 세 개인데 하나는 고독을 위해서, 두 개는 우정을 위해서, 세 개는 사교를 위해서, 라고 그는 설명해 준다. 나는 그가 새벽마다 근처 샘가에 가서 떠 왔을 물 한 잔을 대접받는다. 물이야말로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음료라는 생각이 소로우의 오두막집 음식문화이다. 술은 그다지 고상한 음료가 아니고 아침의 희망을 한 잔의 뜨거운 커피로 꺼버리고 저녁의 희망은 한 잔의 뜨거운 차로 꺼버리기에 커피와 차도 불필요한 음료라는 게 소로우의 덧붙여진 설명이다.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즐기는 나로서는 무색하고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기호식품은 생필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을 직면하고자 하는 그에게 기호식품은 사치품일 텐데, 나로서는 “이것마저 포기해야 해요?” 라고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은 맑고도 향기롭다. 자연과 숲이 물속에서 교감하고 체화되어 순수함을 만들어 낸 듯하다.

소로우, 참다운 농부가 되다

소로우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오까지는 대부분 콩밭을 가꾸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콩밭을 매면서 소로우는 자문한다. ‘나는 콩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이며, 콩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급자족해야 하는 그에게 콩밭 가꾸기는 그의 직업이 되어 심고 김매고 수확하고 도리깨질하고 추리고 팔고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오직 호미 한 자루와 두 손으로만 일을 한다. 말과 소, 개량된 농기구들을 이용하지 않고 비료와 거름을 주지 않는다. 그의 농사일을 돕는 조수들은 단지 이슬과 비, 지력과 태양빛, 공기 그리고 새들의 노랫소리이다. 그렇게 하고도 그는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말한다.

“농사가 한때는 신성한 예술이었다. 지금은 농업의 여신이나 대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지 않고 지옥의 황금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 때문에……. 토지를 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은 불구가 되고, 농사일은 품위를 잃고 농부는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 .”
“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식사를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빵으로 만들어 먹거나 쌀로 죽을 끓여 먹거나 감자를 먹는다. 때로는 월든 호수에 나가 송어나 메기를 잡아 오기도 한다. 한번은 그에게도 육식에 대한 본능이 있어서 숲에서 우드척을 사냥했는데 육식을 먹기 위한 과정이 감자를 먹는 과정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이 소모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는 감자나 옥수수 가루, 쌀을 먹는 게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책상 위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비롯한 고전 몇 권이 놓여 있다. 그는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거처는 사색을 하기 위한 곳일 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하기 위한 곳으로도 어느 대학보다 낫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데,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신탁이다……. 기록된 말은 역사적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예술작품이다.”

간소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오전에 김매기나 독서나 글쓰기를 다 끝마치고 월든 호수에 몸을 담근 후 소로우는 가뿐해진 몸과 마음으로 오후에는 마을에 산책을 나간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거나 숲에 있는 새와 다람쥐를 관찰하듯 우거진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 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러 마을로 향한다. 어느 날 그는 마을에 갔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소로우로서는 인간을 가축처럼 매매하는 국가는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한 국가에는 세금도 낼 수 없었기에 세금 납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국민’보다 ‘인간’이 중요하고, ‘법’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했다.

아직 흑인노예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소로우는 흑인노예제라는 야비한 제도에 빠져 있는 천박한 국민들과 악랄한 노예주인 남부의 농장주와 새로운 노예를 생산해 내는 북부의 공장주들을 함께 비판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삼는 것도 비판했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노예 감독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노동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간소한 옷과 집, 소박한 음식과 단순한 삶을 살게 되면 자기 인생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주인으로 자주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본질과 진실을 찾아 가는 삶

소로우는 2년 2개월 동안 문명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실험해 보고 이 책 『월든』을 탄생시켰다. 그의 정신세계는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지만, 그의 문장은 자연에 대한 예찬과 아름다운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소로우는 자신이 살고 있던 19세기를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하고 천박하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탐욕을 따르기보다는 절제된 삶, 소박하고 간소하며 단순한 삶을 추구했고, 진정한 문명인으로서 일과 돈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여유롭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삶을 추구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나 돈, 명예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인생을 깊이 있게 사유하면서 순결함과 고귀함, 진취성과 용기, 선행과 겸손, 너그러움과 신뢰, 정직함과 모험을 사랑했고, 숲에서 호수에서 천국을 발견했다.

소로우의 집에서 나와 나의 집으로 향하면서 내 마음 속이 여전히 오글거림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그가 말하는 인생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이다. 본질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져서, 그 길을 찾기가 어려워져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착잡하기도 하고 19세기와 21세기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라고 변명을 해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을 찾아가는 삶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로우가 말한 대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끊임없이 노력하지 말고,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게 진실과 가까운 삶일 것이다. 나는 소로우와의 만남을 통해 앞으로의 내 생이 지금보다 더 간소하고 소박해지기를, 그래서 자연과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살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소로우식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이 가증스럽고 허황되며, 탐욕스럽고 몰염치한 21세기에 사는 것보다는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서 있거나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어떠한 힘도 나를 막을 수 없는 그런 길을 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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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셋째 글로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강승영 옮김, 이레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

 

1. 우주론적 에로스(2)

우주를 생성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오르페우스교에서도 발견된다. 빌라모비츠(Wilamowitz-Moellendorff)처럼 신비주의 일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인들의 생활에 미친 의의마저도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물론 오르페우스(Orpheus)는 변방 트라키아의 신이고 또 그와 관련한 문헌들에는 후대에 자의적으로 덧붙여진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오르페우스교 역시 구제 신앙과 정화의 방법을 공유하고 있는 당대의 여러 유사 교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교는 그러한 오르페우스 관련 여러 교파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그것이 갖고 있는 몇 개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멀리 아르카익기(die archaische Zei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서 세계의 생성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는「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Rhapsodia Theogonia)」라는 시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물론 로마 제정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거의 헬레니즘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 속에는 그 시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들을 수록하고 있고 그것을 입증하는 주목할 만한 증거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아리스토파네스 (출처:www.historyforkids.org)

 

기원전 414년 즉, 오르페우스교가 민간의세속적인 기복제사로 변질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던 시대에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희극 「새(Ornithes)」를 상연했다. 이 작품의 파라바시스(parabasis: 코러스가 작가의 이름으로 관객을 향해 말하는 부분)에는 흥미롭게도 새로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새들의 코러스가 인간들에게 새의 기원을 가르치면서 새가 신들 보다도 오래된 존재라고 노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코러스는 인간을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만든 한갓 작은 인형이나 그림자와도 같은 무상한 족속으로 그리고 있다. 그 작품의 693-99행을 보자.(천병희 역 참고)

태초에 카오스와 밤과 검은 에레보스와

넓은 타르타로스가 있었고, 대지도 하늘도 없었소. 에레보스의

끝없이 넓은 품속에서 검은 날개의 밤(Nyx)이 최초의 무정란을 낳자

거기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움을 일깨우는(potheinos) 에로스가 나오니

등은 황금날개로 빛나고 빠르기가 회오리바람처럼 빨랐지요

에로스가 날개달린 카오스와 밤에 동침해 넓은 타르타로스에서

우리들 새 종족을 부화하여 처음으로 햇빛 속으로 데리고

올라왔지요. 에로스가 모든 것을 섞기 전에는 불사신의 종족은

없었소. 상이한 것들이 서로 섞이자 하늘과 오케아노스와

대지와 온갖 축복받은 신들의 종족이 생겨났지요. 이렇듯

우리는 모든 불사신들보다 훨씬 연장자들이라오. 우리가

에로스의 자손이라는 것은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오(693-704)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오르페우스교의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은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살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의 것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속에 얼버무려지듯 포함된 오르페우스교의 시는 헤시오도스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알에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오래된 오르페우스교의 관념은 헤시오도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또 바로 그 알에서 에로스가 나왔고 그 에로스가 세계 생성의 주된 원천으로서 카오스와 만나 이 후의 모든 생식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극 중에서 새들이 이 신들의 계보를 왜곡해서 자기들의 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담한 착상이다. 그러나 새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에로스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매우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새는 에로스와 같이 하늘을 날아 에로스가 그러하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좋아한다.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성인 남성들이 매력적인 소년을 손에 넣기 위해 프로포즈를 하면서 작은 새를 선물로 주었다. 그 시절의 도자기 그림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많이 발견된다. 결국 형태가 없는 카오스조차 새들의 어머니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로부터 훨씬 뒷시대인 기원전 3세기 어쩌면 그 이후의 시대에 쓰여진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 「오르페우스 찬가(Orphei hymni)」가 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이 예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여섯 번째 노래는 오르페우스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프로토고노스(Protogonos: 최초에 태어난 사람)에게 바쳐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또 세계의 기원으로서 알이 나오고 프로토고노스도 그 알에서 부화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프로토고노스는)…

황금의 날개를 자랑하며

숫소의 소리를 갖고 태어났다

신들과 인간들의 기원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은 이 프로토고노스에게 다양한 신격을 부여했는데 위의 싯귀 몇 줄 뒤에는 프로토고노스가 다름 아닌 에로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에로스의 우주론적 지위를 더듬어 보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에로스를 노래하고 있는 그 책의 58번째 찬가를 보면 이미 우리의 귀에 익숙한 울림이 들려오고, 그 속에서도 에로스신의 우주론적 성격이 쉽게 발견된다.

이른바 신화적 사유를 넘어 자연학과 철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만물의 아르케로 떠오를 지수화풍이 이미 그 에로스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불멸의 신들도 사멸하는 인간들도 갖고 노는 자….

세계 생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

하늘의, 바다의, 땅의,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낳는 바람의

(3 이하)

이와 같은 에로스의 우주론적인 관념은 신화의 시대에서 자연학의 시대를 거쳐 이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오랜 기간 남아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루키아노스(Lukianos)는 무용을 예찬하는 「춤에 대해서(Peri och?se?s)」라는 책에서 별들의 윤무(Reigen)에 작용하는 춤의 여신을 이야기하면서 그 여신이 태초의 우주 생성기에 태고의 에로스와 동시에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9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에로스에 대한 헤시오도스적인 관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여러 종류의 그리스·이집트의 마술관련 문서(Zauberpapyri)들에서도 시대도 출처도 다양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뒤섞여 있긴 하지만 그곳 역시 여기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성격의 에로스가 등장하고 있다.(Preisendanz 교정본, IV 1748)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세상 모든 것의 생식을 주관하는 자”, “우주를 만들어내는 자”, “빛을 가져오는 자”로 그려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바다로부터 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Pelagios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든 사물이나 신들이 바다로부터 발생했다고 하는 관념이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에로스의 우주론적 성격에 관한 우리의 짧은 논의를 괴테의 「파우스트(Faust)」 제2부 “고대 발푸르기스의 밤(klassischen Walpurgisnacht)” 끝부분에 나오는 세이렌(Seir?nes)의 노래 한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여자의 얼굴을 한 새로 나온다.

세상 모든 것들의 시작 에로스, 그 에로스가 지배하도록

– So herrsche denn Eros, der alles begonnen.

 

(2. 아프로디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