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화이트헤드⑥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화이트헤드⑥

 

강사 : 최종덕(상지대 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화이트헤드와 자연철학

 

서양의 철학사에 있어 전통적인 ‘플라톤(Plato)의 존재론’ 관점은 ‘기독교 철학’과 함께 보편적인 실체 개념 위에서 보편의 체계를 설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근대과학’의 정신은 보편성을 찾아가는 활동으로 이러한 정신에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사물’과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본능적 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

반면 경험론의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원인이나 결과가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인과율을 부정한다. 이것은 흄에게서 관찰되는 주장이다. 흄의 입장을 감안하면 과학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존재론을 상정하는 면이 있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관찰과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흄과 같은 경험론적 방법론을 가정해야 한다.

20세기 들어오면서 근대과학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수많은 개념의 변화로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학이 그 안정성과 확실성을 상실하면서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 1861~1947)는 뉴턴과학(전통, 근대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물질과학의 변화를 인지하고 과학의 개념이 분석의 관점에서 탈피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에 ‘유기체 철학’의 맹아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라는 책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로 자연철학의 시대와 형이상학의 시대를 연결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여섯 번째 시간에는 최종덕 교수의 안내로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가 만든 여러 새로운 개념들의 해석을 통해 화이트헤드가 2,500년의 서구사상의 흐름을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고 한 말이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고 그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이트헤드의 전공은 원래 수학이다. 1910년경에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과 만나면서 수학에 관한 책을 같이 쓰기도 하지만 1925년 이후 두 사람은 사상적 차이 때문에 결별한다. 이후 화이트헤드는 수학으로부터 물리학생물학자연과학으로 전환한다. 이것을 ‘중기 자연철학시대’라고 한다.(1913~1924, 약 10년간)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1924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데 화이트헤드가 미국으로 간 1925년 이후를 ‘후기 형이상학시대’라고 한다.

서구과학의 특징과 플라톤주의

 

▲ Process_and_realityⓒ 위키피디아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존재’ 개념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철학을 포함 신학, 예술, 사회과학 분야에까지 서구사상은 플라톤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플라톤을 넘지 않고는 현대까지의 서구사상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유럽에는 산업혁명 이후 환경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자처하던 백인들 세계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의 경우 만해도 그렇고, 완전한 존재로 진보하는 중이라고 믿었던 인간 존재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화이트헤드는 이런 것들의 핵심 원인으로 플라톤 철학의 사유체계를 지목한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적 사유구조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플라톤을 넘으려 하였다. 최종덕 교수는 화이트헤드가 수학을 연구하던 시기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1915~1925년 사이에 이런 생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 세계가 완전하게 플라톤적인 껍질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뉴턴과학(전통적 근대과학)의 특징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colorless(무색)’, ‘dry(건조함)’, ‘cold(냉정함)’의 표현은 서구 근대과학의 특징을 상징한다. 이 서구과학 낳게 한 것이 플라톤의 체계인데, 이것은 당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이런 흐름을 20세기 2차 세계대전이후에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불렀다. 모더니즘은 세 가지 서구과학의 존재론적 특징과 이것의 기반이 되는 플라토니즘과의 관계를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세상을 진정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고 이런 생각들의 기본적인 틀은 이미 19세기 말에 형성이 된다. 그러나 당시 선봉에서 2,500년의 플라톤적인 것을 뒤집을 사람을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서구과학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너무나 굳건해서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stubborn(고집이 센)’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깨부술지 솔직하게 말해보자고 나선 사람들이 니체(Nietzsche, 1844~1900), 마르크스(Marx, 1818~1883), 프로이트(Freud, 1856~1939) 세 사람이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존재’라는 개념은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존재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이 현상계는 존재의 그림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 존재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감각적인 것들은 존재의 축에 끼지도 못했다. 플라톤 존재의 5가지 속성은 ‘불변’, ‘유일‘, ‘독립’, ‘절대’, ‘무모순’의 다섯 가지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것들을 플라톤은 존재라 명명했고 이 존재가 어떤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느냐가 2,500년 서양사상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데아’, ‘헤겔(Hegel, 1770~1831)-절대자’, ‘기독교-신’,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실체’ 등등.

여기에 저항한 것이 니체 계열인데 화이트헤드는 ‘변화’ㆍ’운동‘하고 ‘상관적’이며 ‘상대적’인 틀을 가지는 것을 플라톤의 존재개념에 대체해야하는 새로운 존재개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고 했다.

19세기 물리학은 확장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통계적인 확률의 측면이 강화되었는데 화이트헤드는 19세기 물리학을 바라보며 플라톤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음을 인식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의 경우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지구와 달 사이의 역학관계를 설명한 것인데 알고 보면 태양계의 수많은 행성들의 사실적 존재는 무시해버리고 이론적 틀의 상황설정을 ‘이상화’시킨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빗대어 플라톤의 존재는 ‘이상화된 존재’라고 했다. 또 열에너지 개념 있어 공기 단위 안의 분자량 6×10²³ 개의 수많은 분자들이 서로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이것은 이상화 시킬 수도 없다. 방법은 분자들이 벽에 부딪히는 압력을 통해 확률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열에너지 개념과 같은 것들은 플라톤적 존재론과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뉴턴과학 전통의 영향 아래의 서구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고 화이트헤드는 이 새로운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론’을 주장한다.

현실적 존재의 운동성이라는 것은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용어 ‘파악(prehension)’으로 표현한다. 주체가 대상을 볼 때 대상이 운동 중이라면 나의 간섭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과정(process)’이라는 개념 속에 ‘운동’, ‘상관’, ‘상대’, ‘통계’, ‘확률’, ‘분할‘의 개념을 설명하려 했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 量子力學 )’을 도입한다.

– 원자상태 이하의 세계가 ‘양자역학’이다. 누가 볼 때마다 결과 값이 달라진다는 것은 파동함수로 증명해 낸다. –

‘대상(object)’은 뉴턴의 입장에서는 상호간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은 ‘색깔(colorless)이 없고’, 자연 대상은 감정이 없어 ‘dry’하다. 이상적 상황을 설정하고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객관적 관찰이다. 객관적인 것은 누가 관찰해도 결과 값이 같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객관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설명할 때는 ‘양자역학’을 얘기한다.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사물을 관찰할 때 관찰자가 사물에 간섭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성을 가지고 운동하지 않는 고정된 존재는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

 

화이트헤드는 근대고전과학과 뉴턴과학을 비판하기 위해 오류상황을 설정했다. 최종덕 교수는 그것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얘기를 풀어낸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느 마을에서 해마다 너무 울창하여 두렵기까지 한 검푸른 숲에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다고 치자. 그 숲 속에는 아무도 들어가 본적이 없다. 그러나 고전적 진리의 전통은 확실한 것을 찾으려면 현실세계에서의 감각적인 공포를 피해야 가능하다. 겁이나 누구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숲 속에 한 남자가 용감히 들어갔다. 이 자는 누구인가? 이성을 상징한다. 공포를 회피하지 않는 이성주의. 이로부터 우리의 과학은 발달했다. 그래서 서구를 발전시켜 온 모더니즘, 그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두 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철학자들은 모더니즘으로는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의견에 모두 합의했다. 서구의 언어는 모더니티로 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대상을 설명하려면 어찌 할 줄을 모른다. 갈 길을 잃은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숲은 외경심을 가지게 하는 숭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다. 숭앙과 공포는 꼭 같이 간다. 그래서 과거 권력자들은 숲을 정확히 묘사하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죽이는 짓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헛갈리는 거다. 사실 우리는 그 숲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같은 감성을 느끼거나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보면 인간에게는 아마 두 가지 언어가 있을 것이다. 시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가 그것이다.”

최종덕 교수의 말을 정리해 보면 뉴턴의 근대과학 이후의 현대인은 그 숲의 모양을 상상만 하지 숲으로 막상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사랑을 할 때는 시적 언어를 써야하고 과학적 대상을 파악할 때는 과학적 언어를 써야하는데 이것을 헛갈려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연애에 있어 스펙을 분류하는 정량화된 과학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 연애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것도 이를테면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과학적 언어, 시적 언어는 호불호 대상이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이 문제이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내면적 성찰’ +’비판적 실천’인데 어느 하나만 기필하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현상들을 대입시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의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성으로 들어가게 되면 유기체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60조개 세포 하나하나는 서로 무관하지 않고 상관적이다. 그 세포 하나하나는 전체와 ‘섭동(攝動, 의미를 교환)’하고 있다. 기존의 무기체 철학에서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 근거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 세포와 세포들이 현실적 존재로서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큰 상위 존재와 상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이며 이것이 ‘유기체 철학’의 큰 배경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 화이트헤드ⓒ 위키피디아

플라톤에게 있어 창조는 신의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고백록』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전의 시간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한다. 이것을 묻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존재론과 기독교 철학의 전통의 바운더리는 신이 창조한 세계 안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금기시한 질문을 정면에서 되묻고 있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고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는 ‘일자(一者, oneness)’만 존재한다. 일자인 신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다자(多者)’가 형성된다> 이것이 전통적인 플라톤-기독교 철학의 흐름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정반대로 여러 구체적인 존재인 ‘a’-‘b’-‘c’-‘d’-‘e’가 만나서 ‘f’가 되고 또 ‘a’-‘b’-‘c’-‘f’-‘z’-‘t’가 만나 ‘u’가 되는, 다자로부터의 또 다른 다자의 탄생을 얘기한다. 서로 교통하면서, 이른바 ‘togetherness’를 형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합생(合生)’이다. 예를 들어 펜-종이-연필 이런 것들이 문구라는 명칭으로 설명되듯이 새로운 연구적 대상이 만들어진다. 다자가 모여 일자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서 유기체철학의 가장 큰 개념은 ‘합생’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란 개념, 또 창조성 개념 등이 나온다. 이미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낳는 것을 ‘과정의 생성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창조를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있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것이다. 과정의 생성성은 1910년대에는 ‘becoming’을 썼지만 지금은 ‘prehension’이란 영어표현으로 그 개념이 정착되었다.

화이트헤드의 실재론과 ‘영원적 대상’

 

실재론의 영역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실재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19세기 후반에서 말하는 실재론과 유사하다. 몇몇 현상학자와 실재론자들이 착시의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이데아계에 있다거나, 예를 들어 ‘1+2=3’이라는 명제를 가정할 때 이 둘을 더한다는 관계성의 이데아가 있다는 따위의 가설이 그것이다. ‘더한다는 것’도 구체적이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실재적이라는 말은 곧 구체적이라는 의미이다.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를 구성하는 존재가 ‘불변’, ‘유일’, ‘독립’, ‘절대’, ‘무모순’이 아니라 운동성과 상관성으로 된 존재라는 것이고 그 실재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 ‘영원적 대상(객체)’이다. 화이트헤드는 ‘영원적 대상’을 생명체에 비유한다. 생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신진대사를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내부의 자기목적성을 가진다. 자기목적성이 ‘영원적 대상’을 생명이도록 만드는 기능을 한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할 때는 신의 의지대로 창조했을 것이고 신의 청사진 설계도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학에서 신의 디자인대로 모든 것이 운동하고 신이 설계한 목적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플라톤-기독교적 존재론의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의 동력 전부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플라톤적인 세계관과는 무관하게 모든 존재 개체(영원적 대상)는 어떤 절대적 개체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내부의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생각한 신은 현실적 존재의 하나이다. 신도 수많은 ‘영원적 객체’ 중 하나인 것이다. 신도 신 만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인간 개인 ‘철수’가 내부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산다면 ‘신’도 또한 ‘합목적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실재적인 생명성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부분-부분은 모두 내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② 부분-부분은 전체와 ‘합생(통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세포 하나하나는 별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내적으로 상관된다. 상관성의 핵심은 자기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고 부속인 존재가 또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있다.(창조성)

화이트헤드의 ‘초월체(superject)’개념과 합목적성

 

얼핏 보면 자기 목적성이라는 것이 칸트의 합목적성과 헛갈릴 수 있다. 목적은 ‘내재적 목적성’과 ‘외재적 목적성’이 있는데 칸트의 합목적성은 외재적 목적성이다. 그러나 내재적 목적은 ‘자기 합목적성(self-organiz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명이 기계와 다른 중요한 점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조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합목적성과 등치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prehension’하는 ‘주체(subject)’가 있는데 그것을 자신만의 용어로 ‘superject(초월체 혹은 자기 초월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초월체가 ‘prehension’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사건에 있어서 주체와 행위는 항상 같이 있어야 성립된다고 보는 점이다. 언어의 영역에서 볼 때 주어와 동사가 함께 있어야 성립되는 것과 같아서 주어(주체)만 따로 존재하는 방식은 성립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나는 빗속을 걷는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비오는 날, 빗속을 걸어가는 것은 내가 주체이지 비가 주체는 아니다. 비가 오든 말든 내가 거기에 없으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불교의 화엄사상에도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또 나를 의미하는 주어 하나만 가지고 문장이 성립할 수는 없고 사건이 성립할 수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어(주체)와 관련한 동사 행위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 ‘a’, ‘b’, ‘c’가 있을 때 ‘a’가 ‘나는 빵을 먹는다’는 문장이 성립할 때 ‘b, c는 그만큼 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 성립이 가능해진다. ‘a’의 행위는 또 다른 ‘b’, ‘c’의 상태(행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합목적성에 맞는다는 것은 ‘a’, ‘b’, ‘c’ 모두 배고프지 않게 그 양이 대충 맞아떨어진다는 말이다. 외재적 목적을 부정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작동하는 방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외재적 목적은 없지만 내재적 목적은 ‘superject’가 자기 합목적성을 가지는데 큰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 태생이 같은 균일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표현에 의하면 ‘uniformity’라고 한다. ‘oneness’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uniformity’라는 말은 자연의 ‘제어성’을 뜻하고 ‘oneness’란 말은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세계의 통일성을 말한다. 어쨌든 주어진 목적성은 아니지만 자기 제어가 되는 통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이 목적성에 자기 갈 길을 가지만 마구잡이로 가지는 않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의 힘

 

▲ 최종덕 상지대 교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생성은 유기체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 힘은 어디서 나올까? ‘superject’는 ‘subject’의 포괄적인 개념이다. ‘subject’가 달성되면 또 다른 ‘subject’가 만들어 진다. 생명이 가진 존재의 순환 논리이다. 존재론에 있어 존재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묻는다면 플라톤은 이데아, 기독교는 신에서 나온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이 자생성의 힘이 어디서 나온다고 딱 꼬집어 정확히 말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최종덕 교수는 답변한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존재는 순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우리가 시간을 너무 공간화 시켜 분절된 시간으로 말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와 ‘prehension’하는 주체를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도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 중의 하나가 되겠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의 범주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기체만이 아닌 과학적 대상인 무생물도 유기체의 범주로 본다.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subject’는 서로 수평적이다. 이분법적 존재론에서는 ‘존재’가 현상계의 대상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우리 삶의 정치에 접목시켜 보면, 플라톤과 기독교적인 체계의 논리는 물론 동양도 마찬가지지만 ‘존재’는 대상을 지배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사회적 절연체를 형성한다.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어야 권력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현실적 존재’와 ‘영원적 대상’을 연속성의 상관관계로 본다. 그래서 상부의 어느 한쪽이 하부를 구조적으로 지배한다는 정당성이 생길 수 없다.

사실 화이트헤드는 정치적인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이후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이 정치와 연결시켜 이렇게 해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존재들 사이의 연속성을 ‘nexus(결합)’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권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자체를 전체에 편제시킨다는 개념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강의 말미에 “『화엄경(華嚴經)』 마지막에 나오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어린 구도자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도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선재동자가 구도과정에서 여러 높고 낮은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며 얻은 깨달음도 결국에는 어떤 절대 불변하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라, ‘보현행(普賢行)’이라는 실천의 한 과정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화엄의 본뜻임을 상기 해보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