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식 희망 교실은 어떻게 가능한가? 1-① [4人4色 책읽기]

윤영돈 (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핀란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차라 그런지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 펴냄)을 읽으면서 한국의 교육 현실을 반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읽는 과정에서 핀란드의 초?중학교 교실 현장에 대한 원저자(후쿠타 세이지)의 생생한 묘사가 돋보였으며,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매 항목마다 한국의 교육현장과 비교?해설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거리가 떠올랐다. 왜 우리는 핀란드의 교육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핀란드식 교육이 무한 경쟁 시대에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핀란드식 교육이 학생의 개별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핀란드의 교육적 성취가 과연 한국적 현실에서 제도적 개선 없이 교실로부터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책 제목을 풀어 쓴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은 핀란드 교육, 교실에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이 왠지 “한국의 공교육은 붕괴되고 있으나 사교육에서 핀란드식 교실혁명이 가능하다!”라고 읽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래도 책을 읽어간 순서대로 이야기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핀란드의 교실에 피어난 전인 교육의 가치

한국 사회는 숨 막히는 성적 경쟁을 촉발하는 시험사회이다. 그런데 핀란드의 교실에서는 학생들 간의 성적 경쟁이 없다고 한다. 경쟁이 없이 성적이 향상될 수 있을까. 경쟁이 없으면 성적이 향상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제고사와 같은 각종 시험을 적극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마다 서로 다른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타고난 능력과 소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교 간 그리고 학생 간 경쟁을 부추기는 표준화된 시험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시험과 같은 동일한 척도로 개별성과 다양성을 지닌 학생들을 상대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개인의 차이는 비교대상이 아니라 배려대상”으로 간주하는 핀란드에서는 의무교육 기간에 해당하는 중학교 3학년(16세)까지 상대적인 학력평가를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간의 학력 격차가 크기 않으면서,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력을 지닐 수 있다. 한마디로 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의한 사회적?경제적 신분의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교육에 의한 계급 재생산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좋은 가정의 자녀가 그렇지 못한 가정의 자녀보다 성적도 뛰어나고, 명문대 진학률도 높으며, 나아가 보다 우월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핀란드에서는 학생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핀란드의 핵심적인 교육과제가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위권 학생들을 끌어 올리되, 상위권은 제한 없이 개방한다. 특히 문제가 있는 학생을 위해서는 사회복지사, 심리전문가, 상담전문가, 특수교사 등에 의한 다각적인 교육지원이 이루어진다. 개인별 맞춤형 수업이 공교육 교실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개인별 맞춤형 수업은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암담하게 보인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나

핀란드의 교실혁명이 가능한 요인에는 다양한 수준의 여건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육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전반 핀란드는 사회민주주의를 토대로 규제완화와 분권화의 흐름 속에서 교육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가이드라인 정도를 제시하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장학관제도나 교과서 검정 제도 폐지, 표준화된 평가 지양, 학급당 학생수 조정(20명 이하).

이와 함께 교육의 권한이 학교 현장과 교사의 손에 맡겨졌다. ‘경쟁’과 ‘효율성’을 키워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흐름과는 사뭇 다른 독자노선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핀란드는 학력사회가 아니라서 명문대학을 졸업해야 사회적으로 유리하다는 인식자체가 없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고 있는 선행학습 열풍은 중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소위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문대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학문적 성취보다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간판 따기라는 것이 솔직한 답이 아닐까.

복지와 평등이라는 핀란드의 사회적 분위기는 학교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배려와 존중과 협동의 가치가 교실이라는 미시적 차원에도 꽃피고 있다. 학생의 개별성과 자발성의 가치가 개인별 맞춤형 수업에서 드러난다. 더 나아가 교사와 학생 간 그리고 학생 상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의 구성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사회 구성주의적 교육관이 실현되고 있다. 한국 교육계 역시 7차 교육과정 이래로 구성주의적 교육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교수?학습과정에 구현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노력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문대를 들어가기 위한 입시풍토와 표준화된 평가 시스템의 위력 앞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은 사회적?제도적 성숙과 함께 탁월한 교사의 수업전문성에서 그 성공 요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교사의 수업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학급당 학생 규모를 들 수 있다. 학급정원의 상한성은 초등학교는 25명, 중학교는 18명인데, 현장에서는 초등학교는 20명 미만, 중학교는 10명 남짓 되는 소규모 학급으로 운영된다. 이러한 여건과 함께 교과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인 재량권을 교사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 역시 교사의 수업전문성 발휘를 위한 중요한 여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교사들은 학생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최대한 옹호하면서, 개인별 맞춤형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의 성장을 위한 개별 평가를 실시한다. 교사의 수업전문성은 슐만(L. S. Shulman)이 언급한 바 있듯이 교과를 구성하는 학문의 내용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수업전문성은 ‘내용지식과 교수법의 합성물’로서 ‘교수학적 내용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을 의미한다.

핀란드 교사들이 석사학위 소지자로서 수업전문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한국의 교사들은 그 정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사들 중에 석사학위뿐 아니라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도 적지 않고, 현장에서 열과 성을 다해 교사의 책무를 감당하는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입학 자체가 힘든 현실에서 치열한 임용고시 경쟁을 뚫고 합격한 교사들의 실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필자 또한 대학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3차에 걸쳐 진행되는 임용고시의 수준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 첫발을 내딛은 교사들의 교육적 사랑과 열정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국 사회에서 전인 교육은 순전히 교실만의 문제일까? 필자는 사회적?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스팔트에서 꽃 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본다.

 

한국 교육의 희망이 교실에서 꽃피기 위해

핀란드 못지않게 한국의 교육 역시 3년마다 시행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분야별로 2,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문제는 그러한 학력 수준이 순수하게 공교육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교육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데 있다. 한국은 사교육비 규모가 연간 20조원이 넘는 사교육 1위 국가이다. 학업성취도는 단연 세계 최상위 국가에 속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지고, 과열된 경쟁과 입시 부담으로 인해 창의적 사고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문제해결 능력이나 리더십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2007,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지식 채널e)을 보며 한 참을 운 적이 있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학생들이 10명 중 7명이었는데, 학교 수업내용을 학원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란다. 설문에 참여한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가출 충동을 느껴보았고, 상당 부분 자살도 생각한 적이 있단다. 성적 때문에. 한 학생은 자신의 가장 큰 결점으로 ‘공부를 못 한다’고 말한다. 학습 부담으로 힘들어 하던 한 초등학생은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음악을 무시해 (…) 음악을 하고 싶은 우리들은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 (…) 왜 우리는 다 다른데 같은 것을 배우며 같은 길을 가게 하나, 왜 음악을 잘 하는데, 다른 것을 배우며 다른 길을 가게 하나요(…)” ?음악시간?(이승기) 가사의 일부이다. 표준화된 시험과 입시전형으로 인해 학생들 대다수는 자신의 강점 지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한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대체로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에 강점을 보이는 학생에게 유리하다. 그와 다른 지능에 강점을 지닌 학생들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시험일 수 있다. 음악 지능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하워드 가드너(H. Gardner) 하바드대 교수는 경험적으로 입증된 최소 8개의 지능을 다중지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바 있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학생은 신체운동 지능이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몸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학교공부는 서툴지만 자기를 싫어하는 친구를 오히려 좋은 친구로 바꿀 수 있는 학생도 있다. 이러한 학생은 인간친화지능이 뛰어나다. 같은 수업 내용이라도 학생마다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하고, 이해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에서 보여주고 있는 수업 방식은 어떤 면에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에 근거한 수업 모형과도 유사하다.

한국 사회에도 핀란드식 교실혁명을 일구어 가는 교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전인교육의 이상을 교실로부터 구현하고 있는 영웅적인 교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제도적 변화 없이 모든 교사에게 핀란드식 교실수업을 실시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교사 일반에게 요구되는 의무(duty)를 상회하는 초과의무(supererog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교실현장에서 초과의무를 수행하는 교사들에게 눈물 어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핀란드식 희망 수업이 우리 사회에서 꽃피기 위해서는 성과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국가 수준의 교육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고, 학급정원도 OECD 평균수준(21.5명, 2006년 기준)까지 줄여야 하며, 불필요한 행정 업무로부터 교사를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삼류대학 출신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기업체에서 기꺼이 고용하는 기업 문화와 소위 명문대라는 간판보다는 사람됨과 재능이 부각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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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핀란드 교실, 왜 보여주기만 해요? 1-② [4人4色 책읽기]

김윤희 (서울상도중학교 교사)
학교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을까

사실 난 이 책을 이미 2년 전에 읽었다. 당시 난 몇몇 뜻이 맞는 동료교사와 더불어 한 달에 한두 번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 당시 상황이 우리가 모여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학교가 척박해졌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식의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바람이 우리나라에까지 불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IMF 이후 경제적 안정이 중시되면서 교사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올라갔고 정년보장 62세, 철밥통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교사는 전 국민의 주적(主敵)이 되다시피 했다.

당시 교사에게 서열을 매겨 점수가 낮은 교사는 가차 없이 잘라내겠다는 협박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는 교사들을 위축시켰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학생들이 교사를 대하는 태도도 존경은 고사하고 신뢰조차 갖기 어려워지는 듯 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밤늦게까지 학원에 끌려다니며 學(학)은 했을지언정 習(습)은 할 시간 여유가 없었고,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분노가 쌓이는 듯했다. 학생이건 교사건 마치 건드리면 터질 듯한 그런 상태처럼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도 없는 학생들에게 남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생각됐다. 한편으로는 버릇없고 이기적인 학생들에게 화가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쓰럽기도 했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다는 자괴감과 모멸감, 저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끝없는 자기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단위학교에서나마 학교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꿔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모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교육철학과 교육사에 대한 책에서 시작해 대안교육, 학급경영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행방법 등을 배울 수 있는 책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 펴냄)이다. 이 책은 후쿠다 세이지 교수가 핀란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수십 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책인데, 역자인 비상교육연구소장 박재원 씨가 한국교육의 실정에 맞게 전문가의 해설을 덧붙여 펴냈다. 각 장의 끝에서는 전문가 해설, 한국에서 적용가능성, 우리교육의 문제점과 희망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핀란드 교실혁명의 비밀, ‘차별 없는 교육’

기초교육에 해당하는 16세까지 상대적인 학력평가도 없고,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며, 교사는 학생을 돕고 정부는 지원하고 부모는 협력하는 나라, 핀란드! 개인의 능력발달이 가정이나 지역의 환경조건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아 학교 내의 격차는 있지만 학교간의 격차는 작은 나라.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투자하고 똑같은 교육여건을 제공하면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 나라. 게다가 모든 권한을 단위학교에 위임하고 기회균등이야말로 능력을 키우는 최고의 방법임을 강조하는 나라. 이런 환상의 나라가 있다니, 책을 읽으면서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우리나라가 다양한 차이를 제도화하여 경쟁을 통해 탈락자 또는 패배자를 가급적 일찍 걸러내는 시스템이라면, 핀란드는 차이를 최소화 해 개개인의 불리함을 만회할 수 있도록 돕는 맞춤식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간의 격차를 없애고, 언제 어디서든 차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학급 안에서는 학력의 차이에 따라 개별지도가 가능한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평균학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내 눈에 인상적인 것은, 한 학급 안에서 두 학년에 걸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아이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도록 복식학급을 일반화한 커리큘럼이었다. 긴 안목으로 보면 모든 아이가 성장하게 되어있다는 전제 아래, 같은 학생이라도 과목이나 분야에 따라 적성과 능력이 다르므로, 모두 똑같은 과제를 부여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여유! 이 여유가 우리에겐 전혀 없음이 안타까웠다.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창원이’(가명)가 떠오른다! 수업시간에 늘 멍 때리고 손가락이 망가질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는 창원이도 핀란드에서라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의지가 없는지 능력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체육시간을 제외하곤 창원이가관심 갖는 수업시간은 없다. 도무지 따라잡을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고의 과정이나 지식의 활용이 중요한 것이지 양이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우리교육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의 자율성보다 제도적 개선이 먼저

핀란드 교육은 학교와 교사의 자율권을 보장하여 학교가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교사가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하는 환경이야말로 학생들의 학습을 향상시키는 밑바탕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역자도 ‘단위학교로의 권한과 책임의 이양’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주장하지 않고, 교사 개개인이 교실에서 자율적으로 우리교육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쉬웠다. 역자가 공교육종사자가 아니다보니 아무리 현장교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문을 구했다고는 해도 학교 현장과의 괴리감이 있을 수밖에!

모두에게 묻고 싶다! 교사 개개인의 노력이 학생의 의욕증진과 동기부여를 불러오고, 그것이 공교육의 신뢰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사 개개인의 노력으로 극심할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은 이 무한경쟁을 바꾸고 피폐해진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공교육과 교사에 대한 불신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오히려 우리 교육의 현주소가 선명해져 절망감이 들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교육여건과 환경을 가진 핀란드식 교육이 우리에게 과연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특히 한국식 경쟁교육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이 핀란드식 교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핀란드 교육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모든 학생들에게 차별 없이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공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세계 어느 나라이든 모두가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는 단지 희망하기에만 머물렀다는 것이고, 핀란드는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 아닌가 싶다.

 

핀란드 교육, 왜 따라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중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이 한마디 한다.

“핀란드 교육에 대해 텔레비전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러 번 봤는데, 왜 따라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좋으니까 보여주었을 거 아냐? 한 학급에 학생은 15명, 보조교사 선생님도 두 명이나 되던데! 왜 보여주기만 하는 거지?”

참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웃음만 나올 뿐. 결국 문제는 공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의 부재가 아닐까? 교육을 위한 기본 인프라는 구축해 놓지도 않고 불합리한 승진제도에 목매는 교사가 우대받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교사와 학생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모든 아이는 성장한다는 바탕 아래 개인차를 인정하고, 그래도 뒤처지는 학생에게는 특별 팀을 만들어 도움을 주고 끝까지 한 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도록 지원하는 핀란드 교육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은 30명이 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식의 수업을 하고 정착된 지식의 양으로 ‘잘 한다, 못 한다’를 판단한 뒤, 뒤떨어지는 학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낙오자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하는 체제와 다름없다. 핀란드처럼 교사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보조교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학급당 학생 수를 25명 이하로 감축시킨다면 제대로 된 공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 이후 변화가 있기는 했다. 먼저 교육청이 교육지원청으로 바뀌고, 교원평가라는 서슬퍼런 칼날도 누그러졌다. 게다가 ‘학업성취도 검사’가 ‘문화예술 체험학습의 날’로 바뀌고,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학교운동이 서울에도 불기 시작했다. 입시제도 한 쪽으로만 쏠려 있던 우리 교육이 다각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봐도 될까? 무한경쟁 교육의 문제점이 극대화되면서 혁신학교가 하나의 대안으로 나왔고, 그 혁신학교 이론과 성공 가능성을 <핀란드 교실혁명>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이 책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학생 하나 하나와 눈 마주치며 수업할 수만 있다면

얼마 전 교육과학기술부는 ‘예비교원 해외진출’과 교원자격증 소지자 가운데 ‘학습보조 인턴교사’ 1만 명을 채용해 새 학기부터 전국 초·중·고교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교사들의 업무 부담을 덜고, 학생들의 학력신장 효과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학교에는 비정규직 교사가 너무 많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은 교육에 전념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또 언어적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예비교사 수출 역시 제고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아직 우리 교육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 인프라의 확충이라고 본다. 즉 교육여건과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정규교사를 대폭 늘려서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싶다.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들면 학습 부진아를 줄이는데도 가장 효과적이리라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30명이 넘는 아이들 눈 한 번 마주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 학생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핀란드 교육이 가진 강점 중 다른 것은 놓아두더라도 학급당 학생 수 축소, 이것 하나만이라도 시행한다면 공교육의 문제점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핀란드 교실혁명>의 역자는 핀란드 교육의 성공 사례와 견줄만한 일을 우리나라 방과 후 학교로 들었는데, 그 성공 이유 또한 학생 수가 적었기에 다양한 시도와 개인별 맞춤지도가 가능하고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2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지금의 교육현장에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혁신학교들이 선두에서 우리 공교육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바람직한 새 교육모델을 만들어 적용시키고자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으며, 교사들도 그 움직임에 동참하려는 기운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과 사토 마나부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라는 책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교육에서 평등성과 효율성은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깨닫고, 우리 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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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건축학 개론 』/이지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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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영화『건축학 개론 』

 

글: 이지영 (홍익대학교 강사)

 

친구와 ‘건축학 개론’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깔깔거릴 수 있는 에피소드들, 재미난 캐릭터(남자 주인공의 재수생 친구), 대학 1학년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깔끔한 편집, 당시에 20대를 보냈던 나에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추억 속 여행을 하게 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두 시간 남짓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주인공은 너무 눈이 커졌고, 남자 주인공은 머리가 너무 커졌구나! 눈이 저렇게 두 배로 커졌으니 남자주인공이 첫사랑을 못 알아볼 법도 하겠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시절 그 공간으로 돌아간 듯 추억 속을 헤매이고 있었고, 그 추억 속 여행은 문득 문득 당시의 풋풋하고 어린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뿐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사람들의 감상평 ‘8월의 크리스마스와 번지점프를 하다를 잇는 오래도록 마음을 울릴 멜로 영화’도,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고 싶게 하는 가슴 찡한 감동의 영화’도 아니었다. ‘기억의 습작’을 듣는 건 좋았다. 원래 좋아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그뿐. 난 궁금했다. 왜 난 재미만 느낄 뿐 감동을 받지 못했을까?

▲ 영화 건축학 개론

함께 영화를 본 친구와 밥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우리의 결론은 ‘첫사랑에 대한 남자들의 모든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모자람 없는 영화다, 그러니 평소 멜로 안 보던 남자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그리 흥행했지’였다. 뭐 여성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영화나 드라마도 많으니, 남자들의 첫사랑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뭐가 나쁜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남편에게 구박받다가 이혼하고 나면, 출세를 하면서 연하의 꽃미남 재벌 2세 실장님들의 구애를 받는 여자 주인공들이 몇 년간 브라운관을 휩쓸지 않았던가. 그런 드라마 보면서 리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니까 라고 접고 넘어가지 않는가.) 이렇게 가끔 판타지가 충족이라도 되면 즐거운 거지. 솔직히 나 역시 매일 매일 눈 부릅뜨고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판타지를 충족하는 걸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이 영화가 꼭 나쁘고 후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영화가 함축하는 ‘팩트’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15년 만에 만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첫사랑 수연을 첫눈에 알아보지도 못한다. 뭐 가끔 떠올리며 살았겠지만, 첫사랑에 목매달고 살지 않고 나름 쿨하게 살았음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나름 쿨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그도 사실 과거엔 쿨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 그리 쿨한 인간이 많으랴. 희망사항일 뿐, 대부분의 인간들은 ‘쿨하지 못해 미안해’하며 살지 않나.) 건축학 개론 시간에 뛰어 들어온 수연에게 첫눈에 이미 호감을 느낀 승민은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숙제를 함께 하면서 수연과 가까워진다. 외모는 청순하나 성격은 나름 호탕하고 쿨한 수연은 승민과 친구와 애인의 경계선에서의 풋풋하고 파르스름한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승민은 수연이 건축과 선배(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큰 바람둥이- 그 당시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대학생)를 좋아하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어찌 고백을 하나, 어떻게 하면 수연의 마음을 얻을까를 재수생 친구와 의논하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문제의 종강 날이 왔다. 그는 수연의 자취방 앞에서 팩소주를 들이키며 수연이 나중에 살고 싶다고 그려줬던 2층집을 모형으로 만들어와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고, 수연은 종강날 나타나지 않은 그에게 삐삐를 치며 기다리다가, 선배의 권유로 술을 마시게 되어 떡실신이 된 채 선배와 함께 자취방에 도착한다. 떡실신 직전의 수연에게 선배는 키스를 시도하지만 수연은 얼굴을 피했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수연을 선배는 자취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그는 분노에 떨며 수연을 “썅년”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한참 후 그를 찾아온 수연에게 “꺼져줄래”라는 엄청 센 말을 날리고는 표표히 사라진다.

자… 이제 그의 첫사랑을 다시 되짚어 볼까? 사랑하는 여자가 떡실신 일보직전에 바람둥이 뺀질이 선배에게 겁탈을 당할지도 모르는(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순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순간을 목도한 그는 선배를 욕하며 그 상황을 막는 대신 비겁하게 피하고 나서는, 그녀를 “썅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충분히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선배가 수연에게 키스를 시도했으나 몇 번이나 수연이 그것을 거부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당연히 수연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특별한 관계가 아닌 그냥 친구라도 수연을 곤경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못 한 건지 안한 건지 하여간, 승민은 자신의 비겁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를 “썅년”으로 취급해버린다. 그리고는 방학 내내 연락하고 기다려온 그녀에게 “꺼져줄래”라고 쿨한 척하며 한마디를 날리지만, 이건 쿨한게 아니라 자신의 비겁함에 눈감으며 저지르는 싸가지 없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왜? 최소한 애인이 아닌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런 결별에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할 만큼 승민은 화가 났던 거다. 그런데 무엇에? 수연에게도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화가 상당 부분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승민은 그 두 가지의 화를 잘 구분하지 못했고 자신의 찌질함은 잊고 모든 사태의 책임을 수연에게 돌렸다. 그러니 수연을 ‘썅년’이라고 삼십대 중반까지도 호명하지 않았을까? 그 나이까지도 그렇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반성 능력이 없는 건 사실 좀 심각해 보였다.

여하튼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첫사랑이 떠나간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꺼져줄래”라는 말 대신 오히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며 떠나가는 첫사랑을 붙들고 징징거렸든, 아니면 혼자 징징거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마치 과거에 첫사랑에게 차였던 남자들의 대리 복수라도 해주듯 “꺼져줄래”라는 대사는 남자들의 판타지에 정확히 내다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15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으로까지 복수는 제법 잘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차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첫사랑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 첫사랑으로 남으니까.. 자신이 싫다고 거절한 여자는 그저 잠깐 만났다거나 뭐 별거 아닌 기억으로 남지,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다.)

수연을 보며 나는 안타까웠고 불쌍했다. 하지만 영화는 수연을 잔혹하게 밀어붙였다. 수연의 첫사랑은 실제로는 주인공 승민이었으나, 승민은 수연이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연의 캐릭터는 돈 많은 의사 남편 만나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버티다가 이혼당하고 혼자 사는, 즉 순수한 그의 첫사랑을 짓밟은 죄 값을 톡톡히 치른, (어릴 때보다 눈은 커졌지만) 성취한 것도 없는 이혼녀일 뿐이다. 왜? 과거에 “썅년”이었으니까. 지금은 술 마시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쌍욕’을 하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때 복수가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아니 아직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첫사랑을 못 잊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들 그런다. 뭐 나를 비롯하여 주변을 봐도 맞는 말 같다. 가끔 생각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전혀 첫사랑에 목을 매거나 그리워하거나 그러지들 않는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기억도 잘 안 난다. 아마 그립다면, 그리움의 대상은 그 시절의 젊음과 나의 감정이지 과거의 누군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수연은 승민을 지난 15년간 마음에 품고 그가 버리고 간 집 모형을 아직도 간직하고,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오기 까지 했다.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딱 좋은 설정이다. 게다가 수연은 나이를 먹었으나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판타지의 절정은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솔직히 첫사랑을 다시 만났는데 푹 퍼진 아줌마가 되어 있을까봐 무서워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판타지에 금 갈까봐. 충분히 이해가는 상황이다. 현재의 수연은 남자들의 판타지 로망에 너무나도 적합한 상대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까지 미혼이라면 곧 결혼을 해야 하는 그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설정일 것이다. 혹은 그녀가 유부녀라면 그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법적, 도덕적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돌싱, 즉 이혼녀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잠깐 다시 만나 추억을 되새기며 원나잇 스탠드를 하기에 아무 부담 없는 상대로 나타나 주었다. 와. 기가 막힌 판타지 아닌가. 더구나 그녀의 집을 완성해준 그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상황이다. 미국으로 가버리게 되면 그녀 쪽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다. 이혼녀 첫사랑이 다시 만나자고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이 되겠는가. 게다가 첫사랑 못지않게 아름다우며,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능력자에, 부모님마저 부유한 약혼녀와 외모와 추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승민은 지난 15년간의 수연의 마음을 확인하고, 격한 키스를 나눈 후(키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주도 외딴 집에 둘만 남아있던 밤 시간에 벌어진 상황이니 뭐 대략 짐작 가능하다.) 미국으로 ‘깨끗이’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어준 집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정착했다. 게다가 그 곳은 제주도. 조선시대의 유배지였던 그곳은 살기에는 좋은 자연 환경이지만, 정말 거기에만 산다면 죽을 때까지 외롭게 혼자 살아야 할 가능성이 99%로 보인다. 게다가 수연은 제주도에 사는 걸 싫어했었고, 서울로 탈출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던 소녀였는데 말이다. 와….정말 처절한 응징이다!!! 후덜덜. 이혼녀로도 모자라 사회적 무능력자로 패배자를 만들고, 심지어 외딴 섬에 유배까지 시켜 버렸다. 아무리 새로 지은 집이 예쁘면 무엇 하나. 거기서 평생 혼자 아버지 병간호나 하고 살면. 첫사랑 그를 못 잊는 수연의 집을 우리의 주인공 그는 주소와 위치를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다. 언제든 사실 맘만 먹으면 올 수도 있다. 이거 뭔가. 지금 조선 시대인가? 마음 내키면 한 번씩 찾을 수도 있는 첩실(?) 같은 분위기마저 난 느껴졌다. 너무 처절한 복수의 판타지 아닌가. 이 정도만으로도 복수는 처절하다.

그러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자신의 주소조차 없이 보낸 택배 상자에는 첫눈 오는 날 그를 기다리던 수연이 약속장소에 놓고 갔던 전람회 씨디가 들어있다.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자신의 기억조차 깔끔하게 털고 가는 듯 보였다. (뭐 좋게 해석해 주자면 자신도 그곳에 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오해의 해소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 씨디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키스하던 그날 밤 말했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니 씨디를 보내는 그의 행동은 과거와 수연을 모두 털어내는 일종의 이별식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승민이 보낸 ‘기억의 습작’ 씨디를 듣는 수연의 얼굴은 어떠한가. 허전함? 아쉬움? 아니, 수연의 얼굴은 아련한 추억에 잠겨드는 모습으로 엔딩! 와우! 이거 쿨한거라고 할 수 있어? 첫사랑에서 상처 좀 받았다고, 첫사랑 수연에게 이렇게까지 복수와 응징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들어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기론 남부럽지 않고, 평소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조차 이 영화는 그닥 멜로스럽게 감성에 다가오질 않았다.나를 잇는 감성멜로? 아니, 아니! 그보단 오히려 잔혹하고 처절한 복수극 판타지였다. 복수를 대놓고 하게 되면, 복수하는 자의 품격을 손상시키기 쉽고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려면 감쪽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복수를 당하는지조차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이 영화의 복수극은 바로 이렇게 교묘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영화의 광고 카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 대한 ‘썅년/놈’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사실 첫사랑의 대상은 예쁘고 잘생긴 소수에게 몰려 있었던 것이 현실 아니던가. 사실 누구의 첫사랑도 아니었던 사람들도 허다하다고 본다. 뭐 여하튼 우리를 첫사랑을 하던 시절로 불러내는 데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카피임은 인정한다. 그 카피를 보고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시절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 낭만적이고 감성이 매우 풍부한 인물로 평가받는 필자로 하여금 감동이 아닌 재미만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에 대해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과 영화 잡지를 뒤져 보아도 필자처럼 이 영화를 읽고 투덜거리는 영화평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요즈음은 첫사랑 떠올리기 열풍이라도 불고 있는 듯하다. 다들 정릉의 골목길, 710번 버스 노선 등 당시의 추억에 빠져 이 잔혹한 복수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만 뭔가 삐딱하고 곱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린 듯한 이 분위기. 그래서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이 뭔가 눈치가 보이는 듯한 상황임을 느끼고 있는 나의 이 동요하고 있는 마음상태가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문제적 지점인 듯도 싶다. 나의, 즉 개인적인 추억과 관련되는 것이면, 특히나 첫사랑처럼 아련하고 가슴시린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객관적인 반성적 사고나 비판적 시선조차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분위기 말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련했다 하여도, 찌질한 것은 찌질한 것이고, 비겁한 것은 비겁한 것이고, 제대로 자신의 못남을 맞닥뜨리지 못했었다면 시간이 지나도 찌질하고 비겁한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련한 추억으로 포장만 하지 말고 생각도 좀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과 관련하여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영화 보기 전 전람회 CD를 꺼내어 ‘기억의 습작’을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김동률의 마성의 저음이 울려 퍼지던 2012년 어느 봄날 오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있었고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그 노래의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PS. 사실 영화에 대해 이런 식의 영화평을 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저 줄거리, 캐릭터 설정에 대한 분석만 가지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비영화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나의 글에 대한 아쉬움과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밝히고 싶다. 이 영화에는 장점도 상당히 있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 같은 구성방식도 아주 깔끔하고 효과적이었으며, 첫사랑의 판타지가 과도한 낭만주의나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촌스럽게 가지 않고, 상당히 세련되고 깨끗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힘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처절한 복수극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만일 촌스럽고 후진 멜로 영화였다면 비판도 할 필요 없었을 것 같다. 그만큼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였기 때문에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교사의 변화, 일파만파의 교육혁명이 된다 1-③ [4人4色 책읽기]

김세연 (인천도림초등학교 교사)
왜 세계 사람들은 핀란드에 주목하는가?

대한민국의 교육에 만족하는 학생, 학부모,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계속 쏟아지는 교육관련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학교가 가고 싶은 곳, 즐거운 곳, 행복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교사인 나도 점점 힘들어지니 학생들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이 된다. 한동안 교육계에는 핀란드 바람이 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생성취도평가(PISA)에서 핀란드 학생들이 2000년, 2003년, 2006년 모두 다른 나라의 학생들보다 우수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도 교육복지의 나라, 교육개혁이 성공한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궁금했다. 물론 한국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세계 사람들이 핀란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 결과에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핀란드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북유럽 교육탐방의 기회가 있어 2010년 1월에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학교를 직접 방문했다. 먼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교육현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육철학을 녹여 토론을 하며 교사들이 설계안을 낸다. 국가에서는 교육과정의 큰 틀만 제시하고 모든 권한은 학교와 교사에게 준다. 단 한명의 학생도 소중히 여기고 대학입학 시험 전에는 특별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복지국가이다 보니 교육비 걱정도 없다. 누구라도 배울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보장이 된다.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교육청장이 20년간 바뀌지 않은 나라가 핀란드다.

 

Commentary – 핀란드 vs. 대한민국

우리의 교육현실을 돌아보면 절로 한숨이 나고 걱정이 된다. 사회적 합의도 없이 교육정책이나 제도를 만들고, 몇 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모양의 교실에서 똑같은 교과서로 아직도 일제식 수업을 하고 있다. 핀란드를 부러워만 할 수도 없고 핀란드 제도를 갖고 온다고 해도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 이 나라에 잘 정착할 수도 없다. 우리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핀란드 교실 혁명>은 저자 후쿠타 세이지가 수십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쓴 책이다. 핀란드 교육제도와 여러 가지 특징들이 설명되어 있고 학교 3곳을 탐방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학교탐방은 하루 종일 수업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하여 핀란드 교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이 단순히 번역만 해서 출판했다면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우리식’으로 교육을 펴기 위해서는 ‘우리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꼭지마다 한국과 핀란드를 비교한 번역자의 해설이 달려 있어 좋았다. 난 이 해설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국가 정책이나 예산 문제처럼 거창한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핀란드 교육의 좋은 점 중에서 반드시 우리가 교실에서 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내용이다.

 

교육혁명의 시작 – 교실

그 내용을 곱씹으며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 펴냄)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관점을 살펴보자.

첫째, 지식관과 학력관의 변화이다. 지금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암기하고 있는가를 두고 평가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두뇌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진짜 필요한 지식일지는 의문이다. 사회구성주의적인 학습관은 지식이 고착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편성해가는 것이라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의 목적, 가치관, 알고 싶다는 욕구 등이 중요하고 교사는 학습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PISA2009에서는 디지털을 이용한 읽기, 쓰기 능력이 처음으로 측정되었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여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육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학생들에게 동기부여하기이다. 핀란드는 학생 뿐 아니라 학부모, 교사 모두가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강요한다. 교사들은 학생의 관심과 흥미보다 내가 잘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엇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배움이 즐겁다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다른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이 일주일간의 학습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는 시간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데 교과학습과 그 외 하고 싶은 내용을 스스로 계획한다.

셋째, 협동학습을 통한 교육활동이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속에서 더욱 큰 배움이 일어난다. 경쟁은 사고력을 약화시키고 깊이 생각할 시간과 협동의 기회도 빼앗고 심각한 스트레스와 공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낳는다. 반대로 협동학습은 학생들의 사회성도 키우고 학습의 효과도 높다. 교실의 분위기와 학생들의 공부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서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방송에서 많이 나왔던 아키타 현의 기적과 사토 마나부 교수의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는 학교들을 보면 협동학습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다. 어느 학년을 가르치더라도 수업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넷째,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수업 모형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히 교수법 보다는 학습법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진보적 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에서 추진하는 혁신학교에서는 주제통합 학습, 블록제 수업, 테마 학습 등의 다양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수업은 집중력도 높고 학생들이 즐거워한다. 단순한 암기, 지식 전달만을 하는 수업을 벗어나 보자. 기존의 수업 모형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수 학생들은 낙오자가 되고 만다. 그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시켜야 한다.

다섯째, 여유를 두자.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고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통제가 들어간다. “여기를 봐라”, “책을 펴라”, “떠들지 마라” 등의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체벌을 하는 교사도 있다. 하지만 핀란드 교사들은 다르다. 학생들의 개인차를 인정하고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안다. 신기하게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천천히 수업에 참여한다. 15분~20분 정도가 되면 모두 함께하는 수업이 된다. 우리의 조급함이 더 산만한 수업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한다.

물론 평가와 입시가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면 교육의 새로운 변화는 오지 않는다. 바꾸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큰 변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변화이다. 협동학습을 이야기했지만 실제 교사들은 협동, 협력하고 있지 못하다. 교사들의 교육철학, 실천 노력, 배움에 대한 가치가 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교육주체끼리 서로 상대의 변화만 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일파만파라 했다. 교사의 변화라는 물결이 교육혁명이라는 파도를 몰고 오리라. <핀란드 교실 혁명>은 큰 변화를 향한 첫 걸음에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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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핀란드 교육이 아닌 ‘교실’을 이야기 1-④ [4人4色 책읽기]

박재원 (기획 및 번역자 / 비상교육연구소 소장)

우리나라에서 교육 이야기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최근 복지 논쟁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교육 문제만큼 꼬여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이 책은 이미 많이 읽혔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 의미 있는 서평은 새로운 서평이 아니라 이전 서평에 대한 정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일반 독자가 아니라 번역과 해설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간의 서평을 평가해보고 싶었다. 전반적으로 낮은 평점을 준 독자들에게 서운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소모적인 논쟁의 역사로 점철된 교육 분야의 책이어서 일까? ‘혹평(별 2개)’과 ‘호평(별 5개)’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혹평과 호평 사이에서

우선 해설자에 대한 평가에서 크게 엇갈린다. ‘학교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주변부에’, ‘구체적인 현실경험이 없는 이론학자’, ‘등수와 만점에 집착하는 인간’ 등의 혹평을 볼 수 있다. 반면 ‘진보적 교육운동가가 아니라 사교육의 첨병에 서 있는 사람’의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도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의 특징인 원작 뒤에 붙인 해설 자체에 대한 혹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척하는 논평에 짜증이’, ‘이건 완전 이 책에 대한 테러다.’, ‘저 해설 때문에 완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새롭고 신선한 시도다.’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호평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해설 내용에 대한 평가에서도 분명하게 갈린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실에 대한 비판’, ‘공론적인 담론하는 변이 참으로 역겹다고 느낀다.’ 가볍게 볼 수 없는 혹평이지만 아래와 같은 극찬의 호평도 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우리나라 교육과 비교하여 대안을 생각해보는 내용’, ‘우리나라도 교육현장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변명과 옹호

핀란드를 선택한 것은 다분히 선정적인 동기였음을 인정한다. 핀란드가, 특히 핀란드 교육이 워낙 잘 팔리는 인기 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이 순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부를 매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작은 속물이었지만 나중은 교육적 열정으로 채워졌다고 생각한다. 핀란드 교육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활용하여 우리 교육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했다고 생각한다.(물론 심각한 혹평들을 보면서 반성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핀란드 교육 읽기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따라할 수 없는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추구해야 할 가치로 보기도 하지만 참고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생각도 보인다. 하지만 어렵게 구한 이 책의 원작을 보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핀란드 교육 새롭게 읽기 방식’이 떠올랐다. 바로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교실을 진지하고 자세하게 관찰하는 방식이다.(이 책에는 실제로 핀란드 교실을 촬영한 사진이 많다.)

핀란드 교육과 우리 교육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정치와 경제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정말 다르다. 1972년부터 91년까지 국가교육청장을 지낸 에르키 아호의 사례가 상징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은 계속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만으로도 핀란드 교육의 다른 점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잡무에 시달리는 우리 교사들에 비해 핀란드 교사들은 ‘학부모나 행정기관도 교사를 지원’(60쪽)하고 있다. 온갖 규제에 시달리는 우리 현실과는 달리 핀란드는 ‘거의 모든 권한은 일선 학교로 위임, 관리나 감시에 소요되던 불필요한 인력이 없어졌고 결과적으로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지식(교육과정)은 국가 관리에서 해방되어 학습 주체가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되었다.’(23쪽) 또한 ‘아이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도록 커리큘럼과 교재가 짜여 있다.’(95쪽)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편견이 난무하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핀란드는 ‘뒤떨어졌다든지 특수하다든지 하는 구별은 하지 않아요.’(159쪽)

하지만 핀란드 교실과 우리나라 교실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기도, 의미 있기도 하다.(물론 학급당, 교사당 학생 수의 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핀란드 교실 관찰하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고 국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터져 나올 때마다 시도되었던 교육 개혁이 계속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바로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 방향과 원칙만 제시하고 교실 현장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결과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국 교실을 개혁하지 않으면, 수업을 혁신하지 못하면 그 어떤 제도적 개혁도 공염불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핀란드 교실이다. 먼발치에서나마 핀란드 교실을 관찰할 수 있기에 막연하기만 한 수업 혁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실제로 핀란드 교실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개발한 교재 시스템을 활용하여 수업 혁신에 성공한 국내 사례가 있기도 하다.)

또한 왜 학부모들은 학교를 불신하는가, 왜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열심이지 않은가, 굳이 자기 돈을 내고 사교육을 받으려는 이유는 정말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충분히 고민하고 나름대로 진단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에도 편향과 왜곡이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바로 학교 교실의 낮은 생산성으로 인한 악순환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든다. 공교육으로 얻은 세계 최고 학력과 사교육으로 얻은 비슷한 학력에 대해 깊은 우리 교육이 천착하여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다른 교실의 분위기를 통해 우리나라 학교에서 여전한 권위주의적인 모습들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교권이 붕괴되었다고들 하는데 정말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야 하는지, 그 이상향을 핀란드 교실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흐르는 학부모와 학생 중심의 관점에 대해서도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이 공교육에 완승하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학부모와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이 학부모와 학생을 위에서 바라본다면, 사교육은 옆에서 아니면 밑에서 바라본다. 일본에서 시작된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우리나라에도 착근에 성공하면 정말 많이 달라지겠지만 핀란드 교실에서 볼 수 있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비록 사교육이기는 하지만 정말 많은 학부모, 학생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만난 경험을 통해 우리 교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학부모들의 이기심을 비난하고 입시준비에만 매달리는 학생들을 탓하지만 과연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당당할 수 있는지 늘 묻고 싶었다.

학교 교실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라도, 개인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면서라도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학교에 가면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옆에서, 밑에서 바라봐주는 사교육 현장을 찾게 되는 사정을 보듬어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접한 핀란드 교실을 통해 정말 우리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학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교육학자나 관료 또는 교사들의 시선이 아니라 정말 너무도 간절한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 핀란드 교실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 학부모가 진정으로 원하고 학생들이 환호할 수 있는 교실의 모습을 통해 더 이상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핀란드 교실을 따라하면서 우리 교실도 조금씩 바꿔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긴 해설을 달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말 핀란드와 한국 교육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육 생산성 측면에서도 더욱 그렇다. ‘시험을 위해 한 공부는 대개 낭비된다.’는 말을 떠올리면 평가제도와 경쟁풍토의 개선 없이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교실 관찰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세한 관찰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냥 한 번 해보자. 이것저것 사정을 너무 많이 알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단순해야 용감해질 수 있고 그래야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 맹목성에라도 희망을 걸어야 할 만큼 우리 교육에서 신음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교실마다 자살 대기자들이 한 두명씩 있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가?

 

엄연한 경쟁현실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교실부터 바꿔서 사교육으로 쭉 이어지는 초장시간 공부노동으로부터 조금은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교실혁명’이 우리 교실 바꾸기의 교본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소박한 문제제기에 대한 반응

본격적인 핀란드 교육 평론서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주로 별 2개를 준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해설자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문제제기에 반응한 독자들은 별 5개를 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혹평을 보면서 예비 독자들에 대한 의무감을 느낀다. 더 이상 실망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책을 보고 싶다고 느끼는 독자들 중에 아래와 같은 사람은 책을 구입하지 말고 도서관에서 빌려 해설을 빼고 원작자 부분만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현직 교사가 아님에도 학교 교실을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핀란드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핀란드 교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원작보다 많은 해설로 인해 원작의 의도가 훼손되었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

원작자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 지면중계는 정말 가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는 수월성과 평등성의 갈등을 해소시킨,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교육이 그동안 놓쳤던 교육 개혁의 또 다른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족 같은 해설자의 개입으로 인해 원작자의 기여가 축소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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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5천년 최고의 문장, 박지원, 『연암집』[연암읽기]

전호근(경희대)

『연암집』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문집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일상적인 글쓰기 주제인 서(序)·발(跋)과 시(詩)·서(書)는 물론이고, 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나 대책(對策), 소(疏)뿐만 아니라 「방경각외전(放?閣外傳)」 같은 소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장편 기행문으로 평가받는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찍이 구한말의 창강 김택영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학자들은 연암이 우리 고전문학의 최고봉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만큼 연암의 문장은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연암집』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도전이다. 지극히 아름답지만 또 지극히 난해하다. 또 하나, 당대 조선인들의 삶을 구구절절하면서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연암집은 참으로 귀한 책이다. 예를 들어 「열녀함양박씨전 병서」에서 연암은 과부의 심정을 이렇게 읊는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제 그림자 위로할 제 홀로 지키는 밤은 지새기가 어렵더라. 게다가 처마 끝에서 빗물이 방울져 떨어지거나 창가에 달빛이 하얗게 흐르며, 낙엽이 뜰에 뒹굴고 외기러기 하늘에서 울며, 멀리 닭 울음도 끊어지고 어린 종년은 세상모르고 코를 골면 가물가물 잠 못 이루노니 이 괴로움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가만히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당시 사대부뿐만 아니라 여인과 중인들에게까지 필사되어 읽혔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군왕이던 정조(正祖)조차도 연암을 글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는 뜻이다. 사실 연암은 혈연이나 정치적 계보로 치면 당시 신분사회의 최상층부에 있었던 주류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암은 당시 양반지배층의 고루하고 위선적인 관념을 선뜻 뛰어넘었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등 서얼 출신들과 마음을 터놓고 진실하게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인들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참외 파는 사람, 돼지 치는 사람도 서슴없이 자기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떠돌이 거지나 이름 없는 농부, 땔나무 하는 사람, 시정의 왈패 등 하층민이 자주 등장한다. 상하의 위계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글을 쓴 셈이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진정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연암의 빛나는 문장은 바로 그런 자유로운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의 글은 호탕함에서는 『맹자』와 견줄 만하고 신랄한 풍자와 날렵한 비유에서는 『장자』를 넘나든다. 예컨대 맹자의 논리로 성리학적 사고에 갇혀 있는 당시의 지식인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장자의 다채로운 표현을 빌어 시골 사람의 코고는 소리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중국의 고문을 모방하는 글쓰기에 얽매어 있었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연암의 글을 잡글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감각으로 양반지배층의 위선과 가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게다가 읽는 이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해박한 지식, 불한당도 여지없이 설복시키는 명쾌한 논리, 마치 눈앞에서 대상을 보는 듯 착각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 읽고 있으면 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비유 등으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의 글은 읽는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머리털이 쭈뼛 서게 하거나 목이 메이게 하는가 하면 무릎 치며 탄복하다가 종내 가슴이 아려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우쳐주기까지 한다. 오늘날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어야 할 이유다.

[월례발표회 참관기]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2011년 4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철학자들에게는 야릇한 흥분을 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철학토론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결론도 없이 끝나고,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철학적 토론에 저렇게 흥분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에게 결론이 없다거나, 생산성이 없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학자들에게 철학적인 토론은 그 자체로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준다. 그것은 마치 투우장에 나간 투우사의 야릇한 흥분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야 그런 투우를 직접 본 적은 없고 그저 영화에서나 보고 짐작하는 것이지만, 뒷다리로 버티고서 커다란 눈으로 노려보는 소 앞에서 칼을 빼들고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투우사의 긴장된 몸에는 리비도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난다. 그런 리비도가 철학토론에 나선 철학자들의 몸에서 느껴진다 해서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철학자라는 인종은 독특한 유전자를 타고 난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철학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크로포트킨은 우애 협력의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하고 더구나 요즈음은 별별 유전자가 다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일본인에게는 가미가제 유전자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번 원전 사건을 보면 그들은 모든 대안들을 굳이 다 물리치고 가미가제식 특공대를 조직해서 스파르타 300인 전사의 흉내를 낸다. 그건 가미가제 식의 행동이 그들의 유전적 본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학자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해서 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수많은 다른 길이 있었는데, 실제로 상당히 오래 그쪽으로 걸어가 본 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그저 철학토론회나 심포지엄에 참여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니, 철학 유전자의 힘이 아니라 할 수 없다.

 

2.

그런데 자칭 한국 최대의 철학자 조직인 한철연의 월례 발표회에 참가했는데 도무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발표자와 사회자 그리고 회장, 딸랑 세 명이 나와서 이젠 아예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참여하니 이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해 하니, 내가 오히려 민망할 정도이다. 혹이나 이 사람들이 내가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참가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사실은 바쁜 일이 있지만 오늘 발표 주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억지로 시간 내서 참가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그것도 은근하게 풍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들 철학자들은 서로 말은 안 해도 아니 서로의 변명을 짐짓 이해하는 철하면서도 다 알고 있다. 즉 우리들은 유전적 본성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강박증에 끌려서 철학토론회에 참가한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미 세 명이라면 충분히 많은 수인데, 나까지 참가했으니, 철학토론은 봄을 맞아 푸른 리비도처럼 생기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금방 퍼진다. 철학토론의 장이 섰다는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창피하게도 당구를 치러갔던 일단의 철학자들이 부끄러운 듯 당구대를 던지고 몰려들어 갑자기 좁은 월례발표회 장은 꽉 찬 느낌을 주었다.

 

3.

드디어 박지용 선생이 논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속으로 옛날에는 굳이 논문을 다 읽지 않아도 누가 논평을 통해 정리해 주었는데, 토론을 하기에 정말 모자라는 이 아까운 시간을 논문 낭독으로 다 보내다니 하고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눈으로 따라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이라는 논문 제목이 알려 주듯이 아무리 당대의 뛰어난 철학자라도 이런 철학논문을 한 번 읽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칸트라면 나도 약간 공부했고 더구나 숭고라는 개념은 여간 흥미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여러 번 그 개념에 부딪힌 적이 있었기에 간신히 따라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중간에 맥을 놓치고 갑자기 졸음이 닥쳐와 꼬박 졸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칸트나 숭고의 개념에 무관심했다면 읽는 도중 내내 졸았을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내 앞에 앉아있던 서유석 선생도 졸았다고 고백한다. 여하튼 읽기를 마친 다음 드디어 토론의 시간이 다가왔다.

 

4.

논문의 요지는 칸트의 숭고의 개념과 관련된다. 철학자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칸트는 숭고의 개념을 미감 판단과 구분했다. 그런데 칸트는 미감 판단은 예술을 대상으로 하지만, 숭고의 개념은 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논자의 주장은 칸트의 숭고 개념을 예술적인 대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여기서 칸트의 숭고 개념이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이것이 자연의 몰형식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자연의 ‘몰형식’은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데, 이런 마비가 숭고라는 감정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한 판단 마비가 아니라 판단 마비가 주관에게 일으킨 심정이 곧 숭고이다. 논자는 이런 측면에서 칸트에서 숭고의 대상이 객관적인 어떤 성질이라는 해석도 비판하면서 또한 숭고가 객관적인 전제 없이 일어나는 주관의 어떤 감정이라는 해석도 비판한다.

이어서 논자는 이 두 가지 전제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논자는 칸트가 사용한 치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두 전제 즉 자연의 몰형식과 주관의 감정 사이의 관련을 찾아보려 한다.

논자는 이 지점에서 료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특히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을 이런 숭고한 예술로 규정했다는 데 도움을 얻는다. 논자는 여기서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 속에 시간의 발생이 표현되며, 이것이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런 시간의 발생은 칸트의 몰형식 개념과 연결되므로, 그렇다면 이를 통해 숭고가 예술적 대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칸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논자가 발표를 마친 이후 다들 한숨을 쉰다. 그 한숨은 승리자의 한숨이다. 그것은 졸린 것을 간신히 참고 견디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 아닐까? 드디어 투우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졸린 것을 참고 견딘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론에 임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은 웬 일인가? 아차, 투우장에 들어가기 위해 칼과 망토와 소를 홀리는 베일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칸트의 숭고라는 개념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말하자면 선무당이 칼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뒤 끔찍한 학살극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했던 철학자들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니 양해를 바란다.

토론을 통해 논자의 논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려고 애썼으나 다들 숭고라는 개념 앞에서 판단 마비가 생겨난 듯 했다. 토론 도중 송석현 선생이 숭고 예술의 예가 된다고 하는 바넷 뉴먼의 그림과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을 프린트 해 와서 토론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토론이 어떤 결실을 얻기에는 다들 숭고 개념에 대한 가방끈이 짧은 것 같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집에서 초연하게 앉아서 정리해본 의문을 이 자리에서 박지용 선생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6.

우선 논자의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얼까? 아무래도 숭고의 전제가 되는 자연의 몰형식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그런데 자연에 몰형식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자연의 몰형식이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선험적 인식형식에 기초한다. 이런 선험적 인식 형식을 넘어선 세계가 곧 물자체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불가능하며 만일 판단한다면 이율배반이 생긴다. 이런 물자체의 세계가 곧 자연의 몰형식이다.

우리가 자연세계 속에 이런 물자체의 세계는 직접 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자연 속에 몰형식이 출현한다면 이것은 논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현실적인 차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소시민은 돈을 셀 때 일억까지는 계산이 가능하지만 일조가 되면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런 일조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사유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유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유불가능이 논리적 사유불가능성을 대신하는 경우가 칸트에게서 숭고의 전제가 되는 몰형식의 의미이다.

논자는 이런 대신의 관계를 치환(subrep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논자는 이 관계를 설명하면서 ‘부정적인 현시’라고 규정한다. 즉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나 부정적으로 표시해 줄 수는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칸트가 이런 치환의 구체적인 예로서 우상숭배 금지의 규칙과 이시스 신전의 비명에서 발견한다고 본다.

 

7.

몰형식에 관한 논자의 주장의 핵심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을 전제하고 박지용 선생에게 몇 가지 물어보자. 기회가 되면 한철연 웹진을 이용해서 답변해 주기를 기대한다.

우선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이 왜 숭고하다는 것인지? 토론자 중에 이 그림을 보고 숭고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뿐일까? 다행히 송석현 선생이 프린트 해온 데에는 박영욱 선생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즉 이 그림에는 어떤 형식이 없는 그래서 자기 지시적인 질료만이 존재하므로 숭고하다는 것이다. 몰형식이라는 측면이 숭고와 연관된다는 것은 짐작가능하다. 하지만 그런데 왜 바넷 뉴먼의 그림에 있는 붉음이나, 사각형, 그리고 중간의 노란 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형식이 아닌가? 의문이다. 뭐 이런 의문에 대해서 내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논자는 이왕 료타르를 끌어 들였으니,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둘째로 이런 의문이 든다. 칸트의 숭고 개념이 바넷 뉴먼의 숭고 개념과 연결시키는 수단은 소위 시간의 발생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이 논자에 따르면 료타르가 그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개념이 칸트의 역학적 숭고 개념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바넷 뉴먼의 그림에서 시간의 발생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의문의 초점을 이제 논자의 핵심 주장으로 옮겨가 보자. 사유불가능하다는 것은 대상과 개념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마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칸트에게서 미감 판단은 상상력을 강화하면서 생겨나는 쾌감이다. 그것은 인식의 쾌감이나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쾌감과 구분되는 미적인 쾌감이다. 그런데 만일 상상력이 마비된다면, 거기서는 오히려 불쾌감이 발생한다. 그것은 현기증, 구토, 역겨움, 고통에 가까운 심정이다.

그런데 숭고의 감정은 단순한 구토나 고통과는 구분된다. 거기에는 어떤 쾌감이 흐른다. 그런 쾌감은 어떤 속성을 지니는 것인가? 이 쾌감은 단순한 구토나 역겨움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8.

숭고의 개념은 자주 자유의지의 실현을 통해 얻는 쾌감과 연결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욕망의 만족이 만족감(pleasure)을 야기한다면 자유의지의 실현은 리비도적인 쾌감을 준다. (칸트에게서 자유의지의 이런 리비도적 성격 때문에 칸트와 사드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숭고의 경우가 물자체가 출현하는 부정적인 현상이라면 자유의지는 물자체(이 경우는 이념이라 한다)가 실현되는 긍정적인 경우이다.

물자체의 직접적인 출현은 칸트에게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자유의지는 요청에 불과하다. 그렇게 본다면 숭고는 칸트에서 부정적인 현상으로 그친다. 그것은 역겨움과 고통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숭고의 감정에 들어있는 어떤 쾌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헤겔이나 그 이후 프로이트 라캉 등에 이르면 물자체(또는 실재계)의 부정적인 출현은 곧 긍정적인 출현인 이념(이드)의 실현과 동전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숭고에서의 역겨움은 이념의 리비도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숭고의 심정이 더 적절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숭고 개념과 관련하여 헤겔이나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을 논자가 좀 더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9.

필자가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까? 굳이 박지용 선생이 아니더라도 필자의 이런 의문에 대하여 누군가 한 수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토론이 끝난 후 오랜 만에 중국집에서 군만두와 배갈을 먹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물 밀려오듯 다가온다. 오래 전에 사라진 세계여, 이제 늙은이가 되어 밤이면 기억나지 않는 꿈에 사로 잡혀 아침이 되면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소년은 이미 늙었고,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의 감정 속에서 마시는 배갈은 정말 달다.

 

사이트 오픈 관련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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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시작하는 단계라 메뉴 구성 및 기사 배치를 비롯하여 당분간 안정화 과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모든 작업을 완료하여, 철학을 넘어 유쾌하고 비판적인 성찰이 가득한 인문학의 터전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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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신상정보에 대한 접근 문제 및 신구사이트 회원관리프로그램 호환 등의 문제로 인해 어쩔 수없이 발생한 사안이니 널리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1.4.7

‘e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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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고대 그리스 문화는 서구 지성사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제반 삶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 탐문과 조회의 토대이자 학문적 통찰 및 창조적 상상력의 보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정보는 그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기대수준에는 못미친다. 앞으로 수년간에 걸쳐 연재될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은 인류지성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문화와 관련한 총괄적인 정보 인프라의 구축을 목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역사는 물론 정치, 사회, 경제, 예술 전 영역을 다루게 될 것이다. (당연히 원전 텍스트 전체가 하루라도 빨리 우리말로 소개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가장 걸출하고 가장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담고 있는 Jacob Burckhardt의 「그리스 문화사(Griechische Kulturgeschichte)」가 전체적으로 거의 다 소개될 예정이고 그에 덧붙여 다루어지는 주제와 관련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관련 논의들이 추가로 포함될 것이다.

Jacob Burckhardt

 

그러나 위와 같은 계획이 워낙 장기간의 프로젝트인데다 주제 영역도 방대한 것이어서, 우선 그 실험적인 시도이자 서두적인 주제로서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을 몇 번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인류의 영원불멸의 주제인 에로스를 다루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서 너무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독자와 함께 떠나는 긴 여정을 에로스신의 힘을 빌려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어린 파토스로 이어가려는 필자 자신의 다짐이기도 하다.

이 논의를 위한 기본 텍스트는 Albin Lesky의 「Vom Eros der Hellenen」 (Vandenhoeck & Ruprecht in G?ttingen 1976)이고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우주론적 에로스 2. 아프로디테 3. 소년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 5. 헬레니즘기의 에로스 6.헤타이라 7. 외설로서의 에로스 8. 낭만적 열정으로서의 에로스 9. 결혼과 에로스

주제1 :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Eros)

 

1. 우주론적 에로스(1)

기원전 2세기 중반에 「그리스 여행안내기(Peri?g?sis t?s Hellados)」를 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조그마한 도시 테스피아이(Thespiai)에서 잘려져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 돌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에로스 상(agalma)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는 이전부터 아주 오래된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그런 점에서 테스피아이에서 발견된 에로스상도 결코 전승들과 무관할 수 없었다.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그가 살던 시대에도 오르코메노스 성역에 있는 카리스 여신들의 신전에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신들의 입상이 바쳐졌다고 전하면서 그러한 일이 테스피아이의 에로스 신전에서도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테스피아이 신전에서도 자연석뿐만이 아니라 두 개의 아주 아름다운 에로스상들도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펜텔리콘산의 대리석을 사용한 프락시텔레스(Praxiteles)의 에로스상과 뤼시포스(Lysipos)의 청동 에로스상이었다.

아주 오래 전 고대시대에 우상으로서 받들어지던 돌의 이미지를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은 후세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있는 안티폴리스에서 타원형의 돌이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 돌에는 “나는 아프로디테의 시종 테르폰(Terpon:즐거움을 주는 자), 여신께서 나를 바친 남자들에게 상을 내려주시기를 원한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경우 남자들이 바친 돌들은 남근(Phallos)의 상징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 경우에 비추어서 테스피아이의 에로스 상들도 그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제사의식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제사에서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주술적인 힘이 에로스라는 신격의 이름으로 그 돌에 묶여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에로스에 관한 최초의 정보를 전하고 있는 그 유명한 헤시오도스(Hesiodos)가 살았던 곳이 바로 이 테스피아이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아스크라(Askra)라고 하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시오도스는 농부이자 음유시인으로서 서구 문학사에서 명료한 윤곽을 가지고 파악되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서사시는 오늘까지 2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초의 신들 생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신들의 계보(Theogonia)」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강력한 신격을 가지고 가장 이른 단계에서 발생하는 신들의 하나로 등장한다.

“진실로 맨 처음 카오스가 생겼네. 그 다음으로

넓은 가슴의 가이아, 곧 모든 것들의 영원하고 굳건한 터전이 생겼으며

또 안개 짙은 타르타로스가 생겼으니, 넓은 길이 난 땅(가이아)의 구석에 있도다.

또한, 에로스, 불멸하는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신이 생겼는데,

사지를 풀어지게 하는 이 신은 모든 신들과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의도들을

그들의 가슴 속에서 굴복시킨다” (116 이하)

우선 우리는 흔히들 카오스를 무질서와 혼잡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 개념에 대한 오해들 중 대표적인 것들 중의 하나이다. 카오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태초의 의미는 오리엔트의 세계상에도 찾아지는 이미지이지만, 만물의 근원으로서 크게 입을 연 심연, 즉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질료적 모태이다. 이 카오스로부터 모든 것의 원천인 가이아가 생겨나고 이어서 타르타로스라고 하는 나락이 열린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에로스가 태어난다. 그런데 헤시오도스가 이와 같이 에로스를 최초의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옛날 어떤 이들은 헤시오도스가 테스피아이에서 살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헤시오도스 자신 테스피아이 지방의 에로스 숭배를 이미 잘 숙지하고 있어서, 세계와 신들의 생성을 노래하는 시 가운데에서 에로스에게 이와 같은 특권적인 지위를 주었다고 해석한다. 일종의 향토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너무 단선적이어서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계보」첫머리에서 에로스에게 부여했던 지위와 역할만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헤시오도스는 에로스를 생식의 원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신들의 계보」에는 오리엔트지방에 산재하고 있었던 오래된 관념들과 아주 유사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러한 관념들 또한 에로스에 대한 그러한 이해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뷔블로스(베이루트 부근에 있던 항구도시) 출신 헤레니우스 필론(Herennius Philon : 기원전 1-2세기)이 지은 「페니키아의 역사(Historia Phoenicia)」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 실려 있는 우주 생성에 관한 정보는 시리아 북서부지방에서 기원전 1400-1200년경의 제사 내용을 그린 신화 텍스트가 출토된 이래 오늘날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필론은 자신의 책에서 우주의 생성 초기에 생식에 대한 욕망으로서 포토스(pothos)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헤시오도스가 그리고 있는 에로스에 상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헤시오도의 에로스를 ‘생명을 낳아 유지하는 힘’으로서 우주 가운데 기능하는 가장 위대한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종의 추상적 이해이긴 하지만, 자연세계를 관통해서 작동하는 여러가지 힘들 가운데에 신적인 힘으로 직감된 것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그것이 고대인들에 의해 신화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에로스 또한 그리스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갖고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신을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 활동 영역의 폭에서 볼 때 말 그대로 “우주론적 에로스”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앞에서 인용했던 헤시오도스의 싯귀가 담고 있는 의미가 결코 이 정도로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곳에서 에로스는 “사지를 풀어지게 하는(lysimel?s)” 신으로 묘사되고 있고 또 모든 신들과 인간을 굴복 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우주론적 에로스”라기 보다는 개개의 인간 속에서 작용하여, 신들은 물론 인간 역시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이른바 “사로잡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나중에 에로스의 의미로 가장 크고도 깊게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에로스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시되는 두 개의 모티브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된다. 두 개의 모티브란 인간에게 생식의 힘은 물론 열망과 충족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축복으로서의 에로스와 그 반대로 인간 개개인을 꼼짝없이 사로잡는 정복자로서 고뇌를 가져오는 위험한 에로스이다.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는 그러한 점에서 후대 그리스인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예고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선 그 우주론적인 에로스와 관련하여 헤시오도스 이후의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탄생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더듬어 보자.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산문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은 기원전 6세기 중반 쉬로스 사람 페레퀴데스(Perekydes)가 쓴 「신학」(Theologia)이다. 남겨진 단편들만 보더라도 이미 그의 작품 속에는 고대적 전승들과 당시 새롭게 배태되고 있는 사변들이 기묘하게 서로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헤시오도스에서는 카오스조차 생성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자스(Zeus), 크로노스, 그리고 크토니에가 근원적인 힘으로서 늘 존재해왔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에 이어 세계가 탄생하는 계기가 언급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자스 즉 제우스가 에로스로 그 모습을 바꾸어 이후의 여러 것들을 태어나게 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우스가 모습을 바꾸는 이 기묘한 관념은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아마 최고의 신인 제우스조차 생성에 작용하는 힘으로서 에로스를 함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레퀴데스의 제우스는 이처럼 에로스로 변하여 여러가지 대립적인 것들로부터 세계(kosmos)를 만든 후, 그 세계를 일치와 우애로 이끈다(DK7B3).

기원전 6세기 아르고스의 아쿠실라오스(Akusilaos)는 이른바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시기의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그가 살던 무렵에는 신화와 역사가 아직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쿠실라오스는 신화적 전승에 모종의 질서를 부여하면서 헤시오도스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의 기술에서도 카오스가 최초의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곧이어 남성 원리로서 에레보스(Erebos 땅 속 어두운 곳)를, 여성 원리로서 뉙스(Nyx 밤)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성적인 구분은 생성이 단순히 순서에 따른 발생이 아닌 생식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이 다른 쌍의 결합에서 아이테르(Aither 대기)가 생겨나고 이어서 근원적인 힘의 하나인 에로스와 그 가운데에 정신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메티스(Metis 지혜)가 태어난다.

파르메니데스는 고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플라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요즈음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그는 사유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절대 불변의 존재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를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서사시 운율인 헥사메트로스 운율로 이루어진 그의 단편에 나타난 그의 우주론에 따르면 세계를 지배하는 여신이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고안해낸 것이 다름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섞이게 하는 힘으로서 에로스”였고(DK28B 12, 13) 플라톤 역시 「향연」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178B).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2,7.1072b)에서 이와 관련하여 “부동의 운동자”의 운동 원리(arch?)를 에로스로 언급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에로스를 아르케로 상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실재 세계에 있어서의 활동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사람들로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를 거론하고 있다.(984 b23)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인 엠페도클레스 또한 모든 생성과 소멸, 혼합과 분리의 원리로서 사랑(Philotes)과 불화(Neikos)를 끌어들이고 있는데 (DK31B17), 풀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책「에로스에 대하여(Erotikos)」에서 이 엠페도클레스의 필로테스가 바로 에로스임을 밝히고 있다.(756D).

이처럼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신이거나 그러한 신들로부터 태어났다는 관념은 철학자들은 물론 시인들의 저작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삽포(Sapph?)는 에로스를 우라노스와 게(G?) 사이에서 또 다른 곳에서는 우라노스와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 기술하고 있고 알카이오스(Alkaios)는 에로스가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Iris)와 서풍의 신 제퓌로스(Zephyros)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풍과 사랑의 결합은 흥미롭게도 오리엔트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물며 셈족에서는 그 두 가지가 ruah라는 하나의 말로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시모니데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를 에로스의 부모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딧세이아」에 있는 이 두 신들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의 세번째 합창곡(stasimon)에 나오는 아래의 노래는 고전기의 전성기에도 “세계를 지배하는 에로스”라는 관념이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에로스, 싸움에서 질 줄을 모르는 이여

에로스, 재물을 결딴내는 이여

처녀의 볼 보드라운 살결 위에서

밤샘을 하고

바다 위를 떠돌거나

들판의 인가들을 찾아드는

불사의 신도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사람조차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그대에게 사로잡혀 미쳐 날뛸 뿐 (781-790)

 

<다음에 계속>

누구나 불안한 시대의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그야말로 불안의 시대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모두 열심히 일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삼키며 덩치를 키워왔다. 신자유주의는 그 결정판이라 할 만 하다. 서점에 널린 자기개발서에는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장밋빛 미래가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말하는 승리의 방정식 뒤에는 ‘경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른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속에, 패배자들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목표를 이루더라도 당장 승리한 현실을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연히 승리자도 불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 편에는 패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을 위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실패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경쟁률 증가를 멈출 줄 모르는 공무원 입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불안’의 시대에 ‘안정’은 점점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꿈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서 당장의 생활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을 열심히 만들고 좋아하는 글을 써도 힘겨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꿈’ 역시 ‘돈’에 따라 줄을 세운다. 사람들은 꿈을 좇는 그들이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돈 안 되는 일에 미쳐 있는 철없는 사람들로 취급할 뿐이다.

이는 TV의 드라마만 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상위 몇%에 해당하는 재벌과 그들의 가족은 이미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지 오래이다. 행복의 열쇠를 ‘돈’이 쥐고 있는 한, 드라마 속의 재벌가 주인공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활수준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불안을 단숨에 제거할 사람은 재벌가의 사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보통사람들이 재벌을 만날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 불안의 원인

불안은 불확실한 요인에서 비롯된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불확실한 요인들을 변덕스런 재능과 운, 고용주와 그들의 이익, 세계경제 등으로 나누어 말한다. 재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운도 마찬가지다. 운은 찾아올 수도 있고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의 생계는 고용주가 지급하는 소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고용주는 이익을 추구하려 하고, 이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개인의 생계는 불안해진다. 고용주도 불안하기는 똑같다. 세계 경제의 불안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니 불안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불안의 해결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시장 기능에 의존하여 복지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이미 사회는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가정은 구성원을 보살피는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무조건적인 경제 성장의 추구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현 정권의 대선 홍보문구였던 747 공약은 이미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상당수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군 가파른 성장이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무엇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인지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의 복지국가 담론의 열풍은 이렇게 불안이 팽배한 사회에서 보편적인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담겨있다.

– 사회복지의 개념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

복지란 무엇일까? 글자만 살펴보면 그냥 ‘행복’이고, 사전에서도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한다. 복지제도의 대상은 누구일까? 당연히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가치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다.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이다. 위켄덴(E.Wickenden)의 정의를 보면 더 명확하다. “사회복지는 주민들의 안녕에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질서가 더 잘 기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보조 조치들을 확실하게 해주거나 강화시켜주는 법들, 제도들, 혜택들과 서비스를 포괄한다.”

정치의 근본이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충족이라는 견해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도 존재했다. 제나라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창고가 가득차면 예절을 알게 되고, 입고 먹는 것이 족하면 영욕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나는(군주는)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가난과 비천함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한다. 백성들이란 자신이 죽고 후대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이 수명을 누리고 후대를 잇도록 화육해야 한다.”(“倉?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民惡憂勞, 我佚樂之. 民惡貧賤, 我富貴之. 民惡危墜, 我存安之. 民惡滅絶, 我生育之.” 『管子』 「牧民」) 정치의 주체가 군주로 한정되어 있던 춘추 시대 인물의 말이지만 현대의 복지국가론에 비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절이나 명예도 우선 기본적인 삶을 충족되고 나서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최소 조건은 먹고 사는 문제의 충족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예기』에서 공자는 유학의 이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큰 도(道)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공(公)으로 여긴다. 현인을 뽑고 능력자에게 일을 주어, 믿음을 키우고 화목을 닦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말년을 잘 마칠 수 있게 하고 젊은이는 잘 쓰일 수 있게 하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과 장애인은 모두 부양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남자는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게 한다… 이것을 대동이라고 한다.” (“大道之行也, 與三代之英, 丘未之逮也, 而有志焉.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是謂大同.” 『禮記』「禮運」)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이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소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학의 이상향은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이나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행복도 이 세상에 있고, 불행도 이 세상에 있다. 대동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맹자의 말은 한결 더 구체적이다. 그는 백성들에 대해 “일정한 수입(恒産)이 없으면 평상심(恒心)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관중의 말과도 유사하다. 선비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삶이 충족되지 않으면 평상시의 마음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맹자는 누구나 같은 넓이의 농지를 분배받아 경작을 하고 세금을 내는 형식의 정전론(井田論)를 내세워 기본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균등 분배와 조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맹자가 제시한 이상향은 모든 법도가 잘 이행되었던 주(周)나라를 내세워 한 말이다. 그러나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임무는 오늘날 복지국가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의 담당자가 군주에서 의회 정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최근 복지의 선별과 보편 논쟁은 가치보다는 재원 확보의 측면에 더 중심이 쏠려 있다. 선별과 보편은 다른 말로 풀어보면 차별과 평등 문제이다. ‘선별’이라는 말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 만든 제도라도 사각지대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기준에 의한 ‘자격미달’은 상황에 따라 커다란 박탈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복지의 뜻이 행복이라면 행복을 누려야할 권리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서구의 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구에서 ‘복지국가’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나치 독일의 ‘전쟁국가’ 또는 ‘권력국가’와 대비하여 연합국 측의 전후 재건 목표로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서 발생하는 빈곤문제 해결에 관한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구빈법을 제정했고, 19세기 말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막고 중상층 노동자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결국 복지제도의 시작은 기존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보수언론들은 이 사실을 들어 복지의 원조가 보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지제도가 시작되는 시점만을 살폈을 뿐, 현대적인 의미의 복지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현대 복지국가는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민주의는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수정주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뒤 그 틀을 갖추었고,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결성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념적 좌표를 세웠다. 선거와 민주 등 기존 장치들을 사회주의 실현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혁명을 앞세우는 사회주의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민주의는 노동운동의 확대?발전과 더불어 발전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 한국의 복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국의 복지 상황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앞서 말한 서구의 사례와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복지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노동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IMF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분배와 관련된 복지정책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OECD 가입국 가운데 GDP 대비 복지예산 비율은 여전히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복지는 장기적으로 보편복지 시스템을 지향할 필요가 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의 기반이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지 논쟁에서 어떤 정책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그들 각각의 지향과 방법을 살펴야 가능하다. 첫째 재정 확보 방법을 명확하게 살펴야 한다. 물론 현재 국가재정 구조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도 복지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보편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증세에 대한 부분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똑같은 공약인데, 재정확보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면, 현재 보편 복지론을 공격하는 주요 근거인 일본과 남미의 복지병 사례를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우리는 겉으로는 ‘친서민’을 외치면서 실상은 전혀 다른 정권을 경험하고 있다. 진정한 포퓰리즘은 허울뿐인 복지다.

둘째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개혁에 대한 의지를 살펴야 한다. 현행 복지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바로 복지 전체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반드시 조세 개혁과 다른 구조적인 문제의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증세도 기존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강행하게 되면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고 당장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늘어난 세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제도의 개혁은 기존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보완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맹자는 노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일과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넘는 일에 빗대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경우(不爲者)와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不能者)를 구분했다. 한국 정치는 해방 이후 줄곧 일부 편중된 정치세력의 주도 아래 역사를 거듭해왔고, 그래서 다른 형태의 정치 경험은 매우 부족하다. 게다가 당장 먹고살기 급급하기에, 정치판을 연예계 가십거리만도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맹자의 말은 당시 통치권자인 군주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허망하게 앉아만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경험만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현실에 체념하면서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결국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도 우리에게 달려 있고, 연대로 힘을 실어주는 일 역시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북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노동 운동의 결집과 세력화였다는 점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