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단기 집중 강좌[ⓔ시대와철학알림]

[주말 특강] 5월 18일부터 4주간…마르크스에서 지젝까지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5월 18일(토)부터 4주간에 걸쳐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에 관한 단기 집중 강좌를 실시합니다. 이번 강좌는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오월의 봄) 출간을 계기로 이뤄지는 것으로, 이 책은 지난 해 3월부터 6월까지 절찬리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 단기 집중 강좌는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에 소개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16명 중 마르크스, 레닌, 로자, 그람시, 벤야민, 알튀세르, 네그리, 지젝 등 8명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이 직접 강의합니다. 저자들의 직접 강의인 만큼 보다 충실한 수업이 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죽은 개’ 취급을 받았던 마르크스 사상은 지난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월가 점령 운동‘(Occupy Wall Street)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서 점점더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극심한 양극화와 부의 편중으로 대다수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대안으로서의 마르크스 사상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수업은 하루에 2강씩 진행이 되며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1시 30분부터 6시까지 진행됩니다.(6월 1일은 강의가 없습니다.) 총 4주 8회에 걸쳐 진행될 이번 강좌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에서부터 그람시, 알튀세, 네그리. 지젝까지 주요한 마르크스주의사상가들의 고민을 통해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성찰해 봅니다.



◆신청 안내

전체강의신청 : 개인 22만원/ 커플신청(2명이 함께 신청할시) 34만원
**전체강의 신청시 교재인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를 현장에서 드립니다.

개별강의신청 : 1강에 3만원(1주에 2강 수업이 진행됩니다.)

무통장 입금 후 메일(admin@pressian.com)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주)프레시안]
문의: 02-722-8546(담당자 민정훈)

◆강의 시간

5월 18일부터 6월 15일까지 매주 토요일 1시 반-6시 까지(30분 휴식) 2강을 연속해서 4회 집중 강의(하루에 2강씩 진행됩니다, 6월 1일은 강의가 없습니다.)

◆강의 장소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3번 출구 프레시안 1층 강의실
(3번 출구로 나와 자이갤러리(메세나폴리스 모델하우스)에서 우회전, 300미터 정도 직진, 왼쪽에 BK빌딩. 양화로 10길 49)

◆강의 일정

5월 18일(토)강사 :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1강 : 마르크스, 엥겔스 –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2강 : 레닌 – 고독한 사유가 빚어내는 혁명의 정치학

5월 25일(토) – 강사 :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3강 : 로자 – 로자는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4강 : 그람시 – 헤게모니와 주체 형성의 문제

6월 8일(토) – 강사 :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5강 : 벤야민 –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유토피아
6강 : 알튀세르 – 과학적 맑스주의를 위하여

6월 15일(토) – 강사 :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7강 : 네그리 – 낡은 봉합선을 뜯고 새 실을 잦는 철학자
8강 : 지젝진리의 정치로서 레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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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고전> 시즌3 강좌 기념 특별 야외음악회[ⓔ시대와철학알림]

?’철학자와 함께 하는 작은 음악회’ 5월 11일 정독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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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 강좌를 기념하는 특별 야외음악회를 오는 5월 11일(토요일) 오후 4시 정독도서관(서울 종로구 화동) 야외마당에서 엽니다. 이번 공연은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사회로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리고 철학이 어우러지는 한바탕 인문학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이번 공연에는 한국의 독보적 해금연주자인 강은일 교수를 비롯해 여성 콰르텟 E&I, 그리고 신예 레게그룹 레드로우 등이 참여해 클래식, 국악, 팝 등 다양한 음악을 선보입니다. 또 공연 중간에는 강지은, 이순웅, 김성우 교수 등 그동안 청춘의 고전 강연을 맡았던 세 분의 철학자들이 음악과 철학과 인생에 관해 짧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도 들려드립니다.?

이번 야외음악회에는 누구나 참석 가능합니다.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비가 오는 등 공연 당일 날씨가 안 좋을 경우에는 정독도서관 실내 대형강의실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이번 공연은 프레시안,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정독도서관, 도서출판 알렙 공동 주최입니다.?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3>강좌는 지난 1월부터 매월 2차례씩 12회 예정으로 정독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춘의 고전> 강좌는 지난 2011년 영화, 미술 등 예술을 매개로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철학을 공부하자는 취지로 시작됐으며, <시즌 1>은 영화와 함께, 2012년의 <시즌 2>는 미술을 통해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강좌 내용은 각각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으며 이중 <청춘의 고전>은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시즌 3>는 음악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강좌입니다. 오는 6월까지 매월 둘째, 넷째 수요일 오후 7시에 정독도서관에서 무료로 진행됩니다.(청춘의 고전 강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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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

-청춘의 고전 시즌 3 강좌 기념 특별공연?

-참석안내 : 야외무대이며 선착순 500명 입장입니다.

-일시 2013년 5월 11일(토요일)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

-장소 정독도서관 야외마당 (비가 올 경우 실내에서 진행됩니다)

-주최 프레시안, 한철연, 정독도서관, 알렙

-사회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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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및 강연 주제

강지은 : 건국대학교 외래교수 – 오늘 왜 우리는 바그너를 듣고 니체를 읽는가

이순웅 :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재즈, 국악, 자유로운 경계 넘나들기

김성우 :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 비틀즈,아바의 팝음악과 지젝의 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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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소개

임진모 :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평론가. 다양한 방송활동 및 저서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깊이 있는 재조명은 물론 다양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며 대중적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저서로 <가수를 말하다>,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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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 앙상블 : Ebony & Ivory의 줄임말로 세상과의 조화로움을 중요시하는 연주자들이 모여 2012년 창단된 연주팀. 이번 공연에서는 콰르텟으로 참여하며 산뜻한 봄날 오후, 클래식 선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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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일 : 한국 음악계에서 가장 개성적인 연주가로 꼽히는 강은일은 전통음악 위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해금을 통한 크로스오버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바비 맥퍼린, 팻 메시니, 요시다형제, NHK쳄버오케스트라, 등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 및 오케스트라와의 협연하였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퀸시 존스,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살타첼로, 영화감독 김기덕 등과의 작업을 통하여 해금의 대중화와 세계화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에 일조하고 있다.'동서의 화합과 세계의 조화' 라는 메시지를 음악을 통해 전달하고 있으며, 뛰어난 창작욕과 실험정신으로 국악, 클래식, 재즈, 프리뮤직 등 여러 장르의 음악과 인접예술과의 접목을 통해 해금이라는 악기의 연주 가능영역과 해금음악의 지평을 확대해 왔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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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로우 : 빨간색(RED)과 노란색(YELLOW)의 합성어 레드로우. 자메이카의 레게음악과 록음악이 뼈대를 이루고 있는 팀으로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다양한 악기와 따뜻하고 토속적인 음악색깔을 선보이며 즐겁고 밝은 노래로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레드로우를 통해 빨간색과 노란색의 순수하고 소박하며 행복한 풍경들을 관객 모두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최근 2집 앨범 <노란 오도바이>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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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와 협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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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순서

1. Opening 연주 [E & I 앙상블] : Eine Kleine Nachtmusic K525- Minuett (W. A. Mozart) or Violinconcert E BWV 1042 Allegro Assai (J. S. Bach)?

2. [강지은 교수] : 오늘 왜 우리는 바그너를 듣고 니체를 읽는가?

3. [E & I 앙상블] : Das Rheingold-Vorspiel 1 (R. Wagner) +Unendlich (F. W. Nietzsche)의 변주곡 (Opera ‘Carmen’ 中 Habanera (G. Bizet))?

4. [이순웅 교수] : 재즈, 국악, 자유로운 경계 넘나들기?

5. [강은일해금플러스(해금:강은일, 건반:채지혜, 콘트라베이스:고검재] :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 (Curtis Fuller 曲) ,오래된 미래, 해이야?

6. [김성우 교수] : 비틀즈/아바의 팝음악과 지젝의 팝철학?

7. [REDLOW] : 잘 가라 나의 20대여 (REDLOW), Come Together (The Beatles)?

8. 전출연진 협연 [REDLOW + E & I Ensemble + 강은일] : Let It Be (The Beatles), Dancin’ Queen(ABBA), 비단길(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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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042421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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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타령만 하지 말고, 나만의 정치 시작하자![철학자의 서재]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휠체어 한 대 열 변호사 부럽지 않다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대 정치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며, 대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례로 많이 인용되곤 한다. 얼핏 보면 클린턴의 구호는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시장은 이미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를 바탕으로 서술되는 모든 주장들은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장은 마치 블랙홀처럼 작용한다. 복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이 시장의 잣대에 의해 고려 대상이 되는가 하면 교육 문제가 시장의 논리에 파묻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물론 의식의 물신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며, 의식의 물신화는 오히려 결과에 가깝다. 의식의 물신화는 우리 삶의 문제를 시장의 결정에 맡겨 버리고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현상이 하나 있다. 비중 있는 재계 인사가 범법 행위와 연관된 피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면 휠체어에 의존한 모습을 보이거나 입원을 핑계로 사법 처리 일정을 미루는 모습이다. 형사 사건에 연루될 경우 변호사보다 의사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연해 있는 방법이다. 설명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울 것 없던 사람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고, 풀려나게 되면 모든 병이 순식간에 완치되는 기적을 너무 기뻐서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최근에는 몇몇 재벌이 재산 헌납이라고 하는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재력가인 대통령 후보까지도 대선 후 재산 헌납을 약속하기도 했다. 재산 헌납 약속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보고 초등학생들에게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면 자기 용돈을 털어 피자 사주겠다는 공약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푸념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근본적인 좌절감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현재의 삶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경제적 가치의 독점이 삶의 전 영역에 대한 독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 한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 모두 돈 잘 벌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그래서 오히려 절망스럽다.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희망은 삶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신의 책 <불안한 현대 사회>(송영배 옮김, 이학사 펴냄)에서 현대의 불안 요인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는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탈주술화(탈종교)의 경향과 더불어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둘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삶의 목표들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관한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가치가 삶의 모든 의미를 대체하고 있으며, 도구적 이성의 만연 역시 시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시장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것 역시 시장의 구조적인 메커니즘 안에서의 자유일 뿐 시장을 벗어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시장은 종교를 대체하고 이성의 기준이 되고 정치를 사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대 사회가 다시 종교적인 도덕적 지평의 회복을 통해 이러한 경향성에 저항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현대 사회의 다원성 혹은 다양성을 아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가치를 고수하는 종교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 역시 종교의 역할에로 논의를 집중하지는 않는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도덕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대의 불안을 도덕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진부한 도덕 만능주의로 경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경제 논리의 가치 독점적 전횡과 시장의 신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정치의 복원 혹은 복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다룰 수 있는 영역이며,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과 요구를 삶에 반영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의제 정치의 논리 하에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에게는 선택지를 주지도 않으면서 기업에게만 두 개의 칼자루를 쥐어주곤 한다. 사용자에게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면 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비용도 늘어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해고도 자유로우며 고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저렴한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계약의 두 주체인 사용자와 노동자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부당 노동 행위가 적발되어도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개인별로 소송을 벌이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루한 법적 분쟁이 이루어지는 사이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들은 부모님 집에 맡겨진다. 이미 국가의 법이 이런 지경에서 노동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연대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 삶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가?

 

노동 쟁의 시 적용되는 ‘3자 개입 금지 조항’은 연대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제한은 재개발과 관련된 쟁의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있다. 정부의 공권력은 항상 인정된 소유권만 보호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여하의 노력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입자와 지주들 간의 분쟁에서 지주들은 용역을 고용하는 것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지만 세입자들의 경우 자발적인 연대 세력의 도움도 금지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당연히 소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정책들과 무관할 수 없다. 토지건물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들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세입자들의 생존권은 무형적인 것이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노사 갈등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졌던 사업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재산권에 대한 보호라는 명분으로 기업이 노조에 대해 파업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행위는 정당한 노동 기본권조차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우 정치적 연대조차도 제한을 받는다면 사회적 약자의 생존은 재산권 행사자들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흔히 복지를 거론한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가난한 독거 노인들이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악용해 싼 값에 파스사고 그것을 팔아 돈을 챙겼다는 사실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인 양 보도되는 현실에서 복지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급기야는 2008년 2월부터는 파스 유가 국민건강보험에서 비급여 약물 보조제로 지정되었다. 복지 정책이 마치 부유층의 자비를 강제하고 그 덕에 사회적 약자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약자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시장주의자들의 도덕적 자부심만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고 복지 비용을 더 많이 책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비굴하게 만들어야 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공항이나 고속도로와 항만 등과 같이 공적인 예산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사회 간접 자본을 많이 이용하는 것은 당연히 기업과 부유층이다. 복지는 엄연히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동점심의 윤리나 이타심과 같은 원리로 설명되는 도덕적인 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해 줄 유효한 수단을 마련하는 단서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러한 도덕적 관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상류층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강화하고 부자들의 자선이나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 등을 촉구하는 긍정적 힘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접근은 그것을 실천하는 개인을 칭찬할 만한 근거일 뿐 시장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 지도층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선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내일 다시 그들의 자선을 기다려야 하는 사정은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테일러는 진정성이 결코 자기 결정의 자유와 끝까지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정성에 호소하는 태도가 자칫하면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등의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시민 사회의 요구나 연대 활동의 의무, 자연 환경의 필요성은 모두 정치적 행위의 영역이다. 또한 그것은 직업적 정치인들의 정치가 아닌 자기 결정의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정치를 의미한다.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정치보다 경제가 더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듯 보이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 혹은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시장에서의 삶은 인간의 정치적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각자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는 듯하지만 시장 안에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허구다. 시장 안에서는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산된다는 점에서 다원화된 기준들이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만 다원주의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정치는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을 고려하면서도 다양한 삶의 가치를 고양해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역할들은 정부 주도의 계몽이나 정책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홍보 등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는 분명 개인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 속에서 당당한 생존권의 향유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목표는 결과로서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 결정의 자유를 실천함으로써만 자기 결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아주 적게밖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과 연관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의 투표권조차도 실질적으로는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투표 시간 연장 문제도 정치권의 셈법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몇 년에 한번 주어지는 투표권의 행사는 유효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삶의 문제가 정치적 일정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와 선거 기간 사이는 대중들에게 근본적으로 정치적 실천의 휴지기에 불과하다. 정치가 정치 엘리트들의 직업적인 행위를 일컫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태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결정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이라면 정치적 실천이나 정치적 행위는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정치의 한계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로 극복되어야 한다.

손톱만큼의 우월함으로 연대를 비웃지 마라?

자기 결정의 자유에 기반을 둔 정치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차원에서의 사회적 연대가 보장을 받아야 한다. 정당 간의 정치 공방이 아닌 엘리트 정치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공세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공세’는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닌 권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연대는 기득권에 대항해서 정치적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유일한 힘이자 수단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노예제를 200여 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요령 중에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노예들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예속적인 노예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가능성은 연대에서만 비롯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를 예방하는 유효한 수단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차별성을 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주가 소작농을 관리할 때 마름을 두거나 소작농 간에 차별을 두어 연대를 예방했듯 노예주들은 노예들의 처지에 차등을 두어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영세 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은 모두 연대를 어렵게 하고 불신을 형성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연적인 것일까? 아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도의 운영을 도움으로써 결국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마저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의도적이다. 노동자의 권익이나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 전반의 제반 문제는 외면한 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이해에만 매몰된 노동 운동은 연대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없으며 연대를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노동 운동이 노동 운동 이외의 정치적 행위 결사들로부터 불신받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의 노동 운동은 정치적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질서에 대한 편승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문제를 파업의 머리끈 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결국 집단 이기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의 도덕성 문제로 해결할 수는 없다.

연대는 연대 세력들 중 가장 열악한 처지의 세력들에게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장 받아야 한다. 이는 결과물에 대한 분배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자의 자기 결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닌 가장 시급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 우선성을 두는 연대의 조건이 확립되어야 하며, 그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 해결의 결정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관철될 때 소득 증가보다는 자연 갯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픈 어민의 삶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거주권이 유지될 것이며, 실직자의 자녀들이 상급학교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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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자본론 강독]-⑤

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자본론 강독]-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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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박종호, 신재길, 신준하, 윤지미, 최혜진

정리 : 신재길(2012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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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제2절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처음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이중성을 가진 물건으로 나타났다. 그 위 노동도 또한 이중성을 가지고 나타났다.”(자본론1상, 52p, 김수행)

노동의 이중성이란 상품의 사용가치에 만드는 유용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일반 내지 추상노동의 이중성이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이 “경제학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상동)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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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노동(구체적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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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다른 유용노동은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며, 노동일반의 표현 형태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동 – 즉 그것의 유용성이 그 생사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또는 그것의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들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노동 – 을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부른다.”(자본론1상 52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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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런 유용노동의 예로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을 든다. 재봉노동은 외투라는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고 직포노동은 아마포라는 사용가치를 만든다.

“ 재봉과 직포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형태다. 그렇지만 동일한 인간이 번갈아 가면서 재봉도 하고 직포도 하는 사회상태도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서로 다른 노동방식은 동일한 개인의 노동의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개인들의 고정된 기능이 아니다.”(자본론1상 55p, 김수행)

이렇듯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은 모두 유용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추상노동이 유용노동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가 없는 노동생산물이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 처럼 노동이 유용노동이 되지 못하면 추상노동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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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용노동은 어떤 사회제도 하에서나 인간생존의 필수적 조건이다.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자본론1상 53p, 김수행)

맑스는 재봉노동은 재봉사라는 직업이 분업체계의 일원으로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면서 유용노동은 노동대상을 사람들의 일정한 욕망에 적응시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어떤 사회에서나 필수적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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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용노동이 부(사용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저고리. 아마포 등등의 사용가치. 한 마디로 말해 상품체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자본론1상, 54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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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물적 부의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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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자연소재와 인간노동이 부(사용가치)의 형성에 동일한 정도로 역할을 한다고 보면 안 된다. 자연소재는 말 그대로 소재일 뿐으로 사용가치 즉 상품의 질료이다. 이러한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상품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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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예로 의자를 생각해보자. 의자는 그 소재 측면에서 나무에서 철로 다시 프라스틱으로 변하지만 그 의자로서의 사용가치는 동일하다. 지금은 희소한 소재로서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도 인간의 과학지식의 발달에 따라 대체물질을 만들거나 발견함으로서 그 소재로서의 역할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사용가치의 형성에서도 인간노동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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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용노동은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다양한 사용가치들[또는 상품체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노동들[유. 속. 종. 변종으로 분류된다]의 총체, 즉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이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자본론1상 53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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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분업이 발전함에 따라 유용노동의 종류도 증대하게 되며, 유용노동의 효율성은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따라 증가한다. 과거에는 천을 짜거나 옷을 만드는 일이나 모두 한사람이 다 하였으나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면 천을 짜는 직포노동과 옷을 만드는 재봉노동이 분화된다. 이렇듯 분업이 발달하면 할 수 록 유용노동의 종류도 늘어나게 된다.

이런 분업이 한 공동체에서처럼 서로 상호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해지면, 그 생산물들은 상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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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본주의하에서는 유용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한에서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가사노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사회적 보상도 받지 못하는 무상노동에 가깝다. 즉 인간생활에 필수적 노동이지만 사회적으론 무용한 노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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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 4월 월례발표회[ⓔ시대와철학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4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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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월례발표회는 맑스 슈티르너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입니다.

이번 발표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맑스가 비판했던 슈티르너의 철학을 깊이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유석 선생님께서 후배 발표의 논평을 흔쾌히 맡아주셨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즐거운 토론이 됐으면 합니다.

(발표문을 미리 읽고 싶으신 분들은 ympiao89@hanmail.net으로 22일 이후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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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유일자”와 “소유” 개념을 통한 근대성 비판

발표 : 박종성(건국대)

논평 : 서유석(호원대)

사회 : 조배준(건국대)

일시 : 4월 26일 (금)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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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는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상상적 자아(eingebildetes Ich)”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략으로 유일자(Der Eizige) 개념과 소유(Eigentum)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일자” 개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탐구를 하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유일자 개념은 “특이성 <소유>”(ownness, self-ownership)과 연결되는데, 소유 개념을 통하여 근대성에 대한 유일자의 상황과 그로부터 유일자의 지향성을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는 체제 앞에 개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민중의 욕구 역시 타율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자유를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소유’ 개념으로부터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이끌어낸다. 즉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대안적 형태로 자아의 재구성과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아의 재구성을 위한 개념으로 “유일자”를 말하고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에고이스트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슈티르너는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슈티르너는 국가, 사회, 인류라는 “고정관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담긴 허구적, 억압적,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기 위해서 여전히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유일자, 소유 개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개념을 통해 “개념들에 의해 억눌리고 경멸받고 배척당하는 것들”인 타자, 혹은 비동일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근대를 지배체제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에 대한 대립물로 제시하고 있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가 바로 “소유자”, “유일자”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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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기종’도 모르고 ‘스펙’ 쌓으면 뭐해?

미셸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김정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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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 없는 ‘자기 계발’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펴냄)에서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자기 계발서 수요의 구조적인 조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근대’는 모든 개인에게 ‘입신’과 ‘출세’를 과제로 삼게 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의 개별 주체로서의 권리와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직장에서 남들과 교통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인정과 성공이라는 재화는 제한되었으므로 남들보다 나은 개인의 자원(즉 학벌과 교양 같은 상징 자본, 화법과 사교술 같은 테크닉)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같은 필요의 총칭이 ‘처세’이다. (…)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대학생이나 재테크에 열중하는 주부만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모든 ‘자기’들은 ‘자기’의 모든 것,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아보고(알기, 성찰), 관리하고(관리, 경영), 발전하게 하기 위해(계발, 자조) 노력한다.” (<1960년을 묻다>, 377~379쪽)

흔히 말하는 ‘각자도생’의 일환으로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을 읽는 셈이다. 그런데 관리하든 발전하든 간에 매뉴얼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제품 인식이 먼저이다. 무턱대고 엉뚱한 기종에 다른 매뉴얼을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인데, ‘자기 계발서’라는 실행 지침서를 적절히 사용하려면 자신의 ‘기종’부터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계발’하려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또한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낸다고 할 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1982년 버몬트 대학에서의 강의에서, 성의 금기와 제약 등을 다루면서 금기를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선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강의가 담긴 책 <자기의 테크놀로지>(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은 금지를 지키든 위반하든 간에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해야하는 의무를 갖게 됨을 들춰낸다. 그렇지만 자기 계발에 대해서도 그러할까. 우리는 각자도생을 위한 ‘자기 계발’의 강요 앞에,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먹고 살려고 하는 수 없이 내맡겨 버리는 체념은 아닐까.

 

▲(미셸 푸코 지음, 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근대 개인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요구되는 ‘자기 계발’은, 푸코의 분석을 이용하자면 ‘자기 해석‘과 관련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무엇을 어떻게 스스로 계발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가 계발된다고 해도 계발되는 것은 ‘처세’이지 자신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진리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장치가 강제되지 않는 한 진실만을 말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란 도무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줄로 알았는데 막상 성취되니 실은 그걸 원한 게 아닌 경우를 겪곤 하지 않는가.

대번에 연상되는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흔히 주제 파악을 하라는 즈음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델포이의 이 신탁은 인생에 관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기술적인 권고, 즉 신탁을 듣기 위해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네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지 말라’를 의미하였다. 다른 해설자의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신탁소에 조언을 청하러 갈 때 정말 질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을 의미했다.” (38~39쪽)

그러나 물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신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당연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960년을 묻다>에서 전형화되어 드러나듯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다.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보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이 배려해야 하는 자기란 무엇인가?”

 

푸코는 자기를 해석하는 일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주목한다. 고대에 자기인식이 자기 배려에 따른 것이며, 이때의 자기 배려란 영혼을 돌보는 행위에 신경 쓰는 일이라고 정리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몸이지 자신이 아니며, 하물며 몸이 사용하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더욱이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 누구나 의문을 갖는, 영혼을 돌본다는 게 대체 무얼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얼마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혼을 돌보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제시한 점이다. 얼핏 자신을 돌보는 건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무관심일 듯싶은데, 오히려 자신에 대한 배려야말로 정치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영혼은 신성한 요소(영혼의 원리, 혹은 본질)에 대하여 관조해야 한다. 이렇듯 신성한 관조 속에서 영혼은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기반을 설립하는 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정당한 정치 행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원리이며,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영혼이라는 신성한 요소를 관조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가가 될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배려를 추구하는 행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은 정치 활동과 결합되었다.” (48~49쪽)

한나 아렌트가 ‘말하기의 무능력, 생각하기의 무능력, 판단하기의 무능력’이 만연하는 악을 만든다고 말했듯,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규칙’을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일일 뿐 아니라 공적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의 양자택일

 

겉보기에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관심은 흔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구분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연 얼마나 현재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뤄볼 문제이다.

푸코에 따르면,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I>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영혼에 대한 인식이고, 이는 정당한 행위 혹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관조와 연관됨을 드러냈음에도 이미 고대에도 플라톤의 해결책과는 달랐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다. 말기 헬레니즘과 제정시대에 이 문제는 별도의 대안책으로 제시되었다. 즉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 (49쪽)

흔히 연상되는 자기에의 전념이 내면으로의 침잠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배려는 새로운 자기 체험을 포함한다. 자기 체험의 새로운 형식이 출현한 시대는, 내성이 점차 세분화되었던 기원전 1, 2세기이다. 글쓰기 작업과 의미심장한 관찰 사이에 연관관계가 생겨났다. 생활과 기분, 독서에 세부적인 주의가 기울여졌고, 자기 체험은 글쓰기 행위에 의해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험 영역의 문이 열린 것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 정신의 움직임, 자기 분석에 대한 (…) 세세한 관심이다.”(52쪽)

이제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는 일상생활의 “하찮고 세부적인 사항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세부사항이 바로 우리 자신-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55쪽)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의 올바른 행위나 정당한 행위를 사색하며 관조하는 일이 제거된다. 이는 로마 제정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있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면, 이제 “자신을 보다 잘 배려하려면 정치와 결별하여야 했다.” “정치 생활과 무관계한 자기 자신에의 배려의 보편성”(57쪽)이 등장한다. 이것을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는 “영구적인 의학적 배려가 되었다. 한순간의 그침도 없는 의학적 배려는 자기에의 배려의 핵심 사항의 하나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57~58쪽)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자기 배려 모델이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계발 그리고 그 대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볼 시간이다. 아마도 큰 무리 없이 ‘자기 계발’에의 몰두는 몰정치적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올바른 행위를 숙고하고 판단하며 고민하는 일은 매우 불편할뿐더러 인간관계의 갈등을 초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 개발과 원만하고 인상적인 대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에서 어떻게 올바름에 대한 고민의 틈이 있겠는가. 당장 능률적인 일처리와 협력 관계를 재고한다면, 올바름을 머릿속에 떠올릴 새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거나 그릇된 일이라는 클레임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지는 식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돌볼 만큼 한가롭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삭제할수록 일처리는 능률적이다. 정당한 행위의 관조도 없이, 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 계발’되고 있는 셈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자신의 죄를 사하고 진정한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중세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는 이미 결별한 시대에 살고 있는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도식이 성립한다면, 자기 계발되면 될수록 자기 배려와는 멀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이지만, 그것은 글쓴이의 능력을 벗어나 있는 일임을 고백하면서 다음의 문제제기를 음미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푸코가 자기를 다루는 기술의 역사 혹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역사를 탐구하게 된 것은 베버의 의문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을 진실된 원리에 기초하여 규제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금욕에 대한 이성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금욕에 승복해야 하는가?”

푸코의 의문은 이러했다.

“특정한 종류의 금기가 어떻게 특정한 종류의 자기 인식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가?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에 관하여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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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사회적’ 의미[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상품의 ‘사회적’ 의미-2강?

 

김우철(호서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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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capital)’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생활이 영위되는 사회형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또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자본’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본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해하여 이해한 다음, 그 단순한 요소들의 체계적인 조립을 통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자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최초의 실마리 개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자본의 기본적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부(富)’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은 그 자체로 일정량의 부 또는 재산을 뜻할 뿐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상품(commodity)’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분배-유통-소비의 전 사회과정을 관통하는 기본 요소로서, 사회적 부를 구성하는 ‘세포’ 형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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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의 두 요인: 사용가치와 가치

 

상품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용한 물품(또는 용역)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유용성을 가리켜 상품의 사용가치(use value)라고 한다. 하지만 상품은 사용가치 말고도 또 하나의 성질을 갖고 있는데, 바로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성질, 곧 교환가치(exchange value)를 갖고 있다. 교환을 전제하지 않는 상품은 ‘생산물(또는 생산품)’일 수는 있어도 ‘상품’이라고 불릴 수 없다.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아울러 교환가치라는 두 요인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래서 유용한 갖가지 감각적, 물질적 성질을 가리킨다. (쌀, 상의, 집 등의 사용가치) 그러나 상품의 교환가치는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자연적 성질이 아니다. 교환가치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교환가치는 우선 어느 한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양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두 개의 상품, 예를 들어 쌀과 상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쌀 20kg이 상의 1벌과 교환된다고 하면 ‘쌀 20kg = 상의 1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이 등식은 이들 상품의 교환가치가 같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쌀 20kg = 상의 1벌’이라는 이 등식은 같은 크기의 공통된 무엇인가가 두 가지 다른 사물 안에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물들의 양적 비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들이 공통의 질(質)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과연 쌀 20kg과 상의 1벌 속에 들어있는 ‘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란 무엇일까?

쌀과 상의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공통의 속성은 상품의 자연적 속성일 리는 없다. 다양한 상품들이 교환된다는 사실은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 곧 자연적 속성이 남김없이 제거(=抽象)되어 공통의 속성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가 교환가치에만 주목하면 모든 상품들 사이에는 사용가치상의 어떤 차별이나 구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모든 상품을 같게 만드는 공통된 성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노동생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쌀과 상의는 둘 다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아무 차이가 없고 똑같은 사물이다. 단, 여기서 노동이라고 할 때 이 노동은 경작노동이라든가 재봉노동과 같은 유용한 물품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형태의 노동이 아니다.

구체적 유용 노동은 그 형태와 질이 서로 다르므로 상품들에 내재하는 문제의 그 공통의 속성을 설명해 줄 수 없다. 곧 구체적인 지출 형태와 무관하게 단순히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의 지출이라는 의미의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 이것만이 모든 상품들의 공통의 속성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체노동을 추상한) ‘추상적 인간노동’이 대상화, 물질화되어 있는 것이 모든 상품에 내재하는 공통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공통의 속성이 바로 가치(value)이다. ‘교환가치’는 한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가 다른 상품들과의 교환관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가치의 현상형태’를 말한다.
어떤 물적 존재는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가 있다. 천연의 초원이나 야생의 수목과 같이 그 효용이 인간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특정한 물건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사용가치 곧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이라는 절차를 통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야 한다. 상품 가치는 이와 같이 상품과 상품을 만들어낸 노동의 ‘사회성’을 실증하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가치가 없는 생산물 또는 교환에 실패한 생산물은 사회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고, 나아가 그 생산물을 생산한 노동 역시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실증한다.

이제 분명해졌듯이, 어떤 상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그 안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추상적 노동의 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물론 노동의 양은 노동 시간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크기는 결국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단 이 경우 노동시간은 개별 생산자가 실제로 소비한 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표준적인 노동조건과 노동숙련 및 노동강도의 사회적 평균도를 가지고 어느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말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의 생산성이 변함에 따라 당연히 변동한다. 노동의 생산성 그 자체는 특히 노동자의 평균적인 숙련도, 과학과 그 응용의 발전단계, 생산수단의 이용범위 및 자연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떤 상품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단축되고 그 가치도 그만큼 작아진다.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의 양에 정비례하고 노동의 생산성에는 반비례하여 변동한다.

칼 마르크스(1818 ?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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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형태의 발전

 

앞서 확인했듯이, 상품은 사용 대상인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라는 이중적인 물건인 한에서 상품이다. 상품은 자연형태(natural form)와 가치형태(value form)라는 이중 형태를 갖는 한에서만 상품이다. 문제는 사용가치의 대상성과 달리 가치의 대상성(value-objectivity)이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비틀고 세밀히 관찰해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가치물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가 순수하게 사회적 현실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성의 획득은 상품들이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가치라는 것이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로서만 나타난다는 사실 또한 자명해진다. 이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점은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가치관계에 함축되어 있는 가치 표현의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화폐의 수수께끼도 마침내 풀리게 될 것이다.

먼저 다음과 같은 단순한 가치형태에 주목해 보자.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는 y량의 상품 B의 가치가 있다

예) 쌀 20kg = 상의(上衣) 1벌
(쌀 20kg은 상의 1벌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보듯이, 쌀이라는 한 단일 상품의 가치 표현은 상의라는 다른 상품과의 가치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종류의 상품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데, 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상의는 그 표현의 재료가 된다. 전자는 능동적 역할을 하고 후자는 수동적 역할을 한다. 즉 쌀의 가치는 (상대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relative value form)로 표시되고 있고, 상의는 (쌀의 가치를 직접 표현하는) 등가형태(equivalent form)로 존재한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속해 있고 서로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이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 표현의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적인 양극이다.

어떤 상품이든 그 가치는 오직 상대적으로만, 즉 다른 종류의 상품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쌀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어떤 상품이 그것에 대해 등가형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등가형태로 등장하는 이 다른 상품은 동시적으로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극단적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가치형태의 양극인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위의 예에서 가치가 표현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쌀이라는 상품이다. 쌀 20kg의 가치가 자신과 상의 1벌의 가치관계 속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라는 양극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치 표현에서 쌀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존재를 상의라는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를 빌려 표현한다. 다시 말해, 쌀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상의라는 상품의 자연형태를 빌어 그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되는 ‘자립적’ 존재형태를 획득하고 있다.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용가치로서의 쌀은 상의와 물질적, 감각적으로 구별되지만, 가치로서의 쌀은 상의와 동등한 것이며 따라서 상의와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쌀은 자신의 자연형태와 구별되는 가치형태를 획득하게 된다.

등가형태에서 보게 되는 첫번째 특성은 사용가치가 그 대립물인 가치의 표현형태로 된다는 점이다.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 존재를 그 물질적 속성과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상품과 등등한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이 표현 자체는 그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감추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등가형태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이다. 등가형태는 어떤 상품, 곧 있는 그대로의 물적 존재가 가치를 표현하고 따라서 그 자연 형태의 모습 자체로 가치형태를 띤다는 사실에서 성립하므로, 마치 그 등가형태라는 속성을 본래부터 지닌 듯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등가형태의 수수께끼이며, 이 등가형태가 완전히 발전되어 화폐의 형태로 전개될 때에 그 수수께끼는 비로소 모든 사람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참고: 구체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추상적 인간노동의 현상형태로 된다는 점 그리고 사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노동으로 나타난 점이 각각 등가형태의 두 번째, 세 번째 특징을 이룬다.)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B가 자기 자신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표현된다.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상품 A의 가치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가치관계 속에서 상품 A의 자연형태는 사용가치의 모습으로서만 의미를 갖고, 상품 B의 자연형태는 가치형태나 가치 모습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한 상품 속에 갖추어져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대립이 하나의 외적 대립을 통해 표시된다. 즉 자신의 가치가 표현되어야 할 한 쪽의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오직 사용가치로서만 인정되고, 그 가치가 표현되는 다른 쪽의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오로지 교환가치로서만 의미를 갖는 두 상품의 관계를 통해 표시된다. 따라서 어느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그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내적 대립이 겉으로 드러난 외적 대립의 형태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어떤 사회 상태에서나 사용 대상이다. 그러나 사용물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을 그 물적 존재의 대상적 속성으로 표시하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하나의 발전단계에서만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轉化)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동시에 노동생산물의 단순한 상품형태이고, 그리하여 상품형태의 발전은 가치형태의 발전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치형태의 발전은 화폐형태를 거쳐 자본형태에 도달할 때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된다.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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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강좌의 강의록을 연재합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영향을 준 인물들을 물으신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분들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칼 맑스, 페르낭 브로델(아날 학파), 요셉 슘페터, 칼 폴라니, 일리야 프리고진(신과학 운동) 그리고 프란츠 파농.”

월러스틴은 세 영역에서 세계체제 분석에 관하여 글을 썼습니다.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지식의 구조가 그 세 영역입니다. 다음과 같은 책들이 이 각각의 세 영역에 대응합니다. <근대 세계체제 3부작>, <유토피스틱스, 21세기를 위한 역사적 선택들> 그리고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들>.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시안

·『세계체제 분석』(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_ 이광근 옮김_ 당대)


이 소책자는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부터 세계화와 이에 대한 반작용인 테러리즘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 체제로서 이해하는 월러스틴의 연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입문서이다. 세계체제 분석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상자들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하여 부상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이다. 사회 현실은 신과학 운동에서 말하는 복잡성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 세계체체 분석이다.

·『자유주의 이후』(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_ 강문구 옮김_ 당대)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이에 대해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 사건들은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그 자신의 논리 때문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궁지에 몰렸다. 자유주의는 인권의 정당성과 민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공개되면 이익을 많이 얻지 못하거나 손해 보는 계급들에게 이 체제는 정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체제의 정당성이 사라진다면 체제는 존속하지 못한다. 이러한 위기는 총체적인 것으로, 이를 극복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만들 새로운 역사 체제는 아마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체제는 아닐 것이다.

1. 월러스틴에 따르면 긴 16세기(1450-1640년)에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이후 세 번의 역사적 전환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1) 16세기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2) 1789년 프랑스 대혁명, 3) 1968년 세계 혁명(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 즉 중도 자유주의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 여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콩종크뒤르(국면)적인 역사적 전환점으로 1) 1989년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몰락(실은 자유주의의 몰락의 반증), 2) 2008년 美國發 세계 금융 위기가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려면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거한 개항,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민주화운동과 1961년 5?16군사정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IMF외환위기 등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들입니다.

2.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는 법칙정립적인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개성서술적인 실증주의적 역사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구조와 역사의 변증법의 결과로 나타난 주기(cycle) 개념으로 19세기 사회과학의 기본 전제인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며,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근대 세계체제(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론입니다.

3. 역사와 관련된 네 가지 시간 개념이 있습니다. 부수적이고 진정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실증주의적 사건적인 또는 에피소드적인 역사와 신화에 불과한 영원불변의 구조 대신에 역사적으로 장기 지속하는 구조적 시간과 그 구조 안에서의 중기적 주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조적 시간으로는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로 대변되는 근대 세계체제의 탄생과 소멸의 기간이 대표적이고, 주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에는 콘트라티에프 주기(50-60년 동안의 상승과 하강의 두 국면으로 이루어진 장기 파동 주기)가 대표적입니다.

4.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재규정(맑스로 다시 돌아가기)을 시도하여 임금노동 중심의 생산 일변도와 교환관계라는 유통 중심의 일면적 분석을 넘어서 제3세계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핵심적인 생산과정과 주변적인 생산과정으로의 분업으로 세계체제를 분석함으로써 국민국가중심의 분석틀에서 벗어납니다. 상품이 독점적일수록 핵심에 속하고 경쟁적일수록 주변에 속하게 됩니다. 독점적일수록 자본가에게 돌아갈 잉여가치의 몫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를 시장과 동일시하고 않고 독점과 동일시합니다. 자본주의는 반시장입니다.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는 자유 경쟁 시장이란 ‘인민의 아편’에 불과하고 현실의 시장은 그런 모습을 띠지 않습니다.

5. 근대 세계체제의 구조적 위기는 기존 체제에서 지구적인 잉여가치를 공유하는 인구의 수가 팽창되어 자본가들이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기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는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미국의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혁명을 빌미로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르고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보수주의자의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모순을 해결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 대신에 현실적인 역사적인 대안체제를 성찰함으로써 (물적인 불평등의 해소라는) 역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유토피아학이 있어야 합니다.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알렙

 

아프리카 연구에서 세계체제 분석으로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 Wallerstein)은 195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아프리카 연구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진 것은 전공과는 무관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발상과 ‘근대 세계체제’라는 개념 덕분이었어요. 이 개념들은 1968년에 일어난 세계 혁명*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1958년부터 대학 강단에 섰고, 1968년 세계 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면서 아프리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아프리카 신생국들에 대한 연구인지라, 항상 신문 표제(신문이나 잡지 기사의 제목)를 뒤쫓아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시사적인 성격이 강한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더욱 깊이 있는 역사적 시야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때 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국가들도 신생국 시절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신생국이던 시대의 서유럽 국가들을 연구해야겠다는 발상을 하게 된 거죠. 대략 16~17세기, 곧 근대적 국가 구조가 형성되던 시대 말이에요. 이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적인 관점에서 근대 세계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동성을 밝혀 낼 수 있었던 겁니다.

한편 그가 연구에 몰두한 때는 정치적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어요. 게다가 1968년 일련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서방 세계에서 대규모 사건이 최초로 터진 곳이 바로 컬럼비아 대학이었습니다. 파리의 학생 봉기보다 한 달 앞서 일어났지요. 학생들이 내세운 주된 쟁점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베트남 전쟁 문제였는데, 대학이 국방부와 다른 정부 기관을 위한 베트남 전쟁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등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는 거였어요. 둘째는 인종 차별과 관련된 내용으로, 컬럼비아 대학이 흑인 지역 사회가 사용하는 공원 땅을 사들여 체육관을 지었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수들이 재빨리 모임을 만들어 중재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이때 월러스틴은 이 모임의 공동 의장이었습니다. 일주일 뒤 학교 당국은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이 학생들을 대학 건물에서 내쫓으면서 그들의 더 큰 분노를 불러왔죠.

학생 운동 사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월러스틴은 컬럼비아 대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예일대 석좌 교수이자 뉴욕 주립대 산하의 ‘경제, 역사 체제 및 문명들의 연구를 위한 페르낭 브로델 센터’(뉴욕 주립대 빙엄턴 캠퍼스에 위치)의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죠.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현대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프랑스 아날학파 세계 사회 학회(ISA)’의 회장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 ?1968년 세계 혁명- 1968년에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이들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베트남전 같은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드골 정부에 항의해 400여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68 혁명의 영향으로 체제가 흔들린 드골 정부는 이듬해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패배했다.
** 아날학파- 1929년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처음 만든 역사 잡지 〈경제 사회사 연보〉(Annales d’histoire ?conomique et sociale, ‘아날’은 연보라는 뜻임)를 중심으로 모인 역사학자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근대 전통 역사학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해 생활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여, 1970년대 이후 세계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사회 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월러스틴이 1968년에 일어난 대규모 사태를 ‘세계 혁명’이라 부른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미국을 비롯해 서유럽과 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벌어졌죠. 형태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되풀이되는 두 가지 공통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구(舊)소련’이, 외견상으로는 대단한 적대자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공모 관계라는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둘째는 반항하는 모든 사람의 주된 과녁이 자유주의적 보수(우파)가 아니라 ‘공산주의적 진보(좌파)’라는 점이었죠. 곧 1968년의 혁명 세력은 구(舊)진보 세력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았어요. 구진보는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한 거죠.

이러한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통 주제는 그의 표현대로 하면 ‘세계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geoculture, 전 지구적으로 대부분 받아들여지는 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인종주의, 성차별)를 들 수 있어요. 이는 과거의 인종 혐오주의나 가부장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제체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실제로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의 세계 지도를 보면, 아주 많은 나라에서 진보를 대표하는 공산당 아니면 사회 민주당,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권력을 잡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1968년의 사태는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잡아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거나 다름없었죠. 이로써 자유주의적 합의를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현실에서는 사라진 구(舊)자유주의가 다시 신(新)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출현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자유방임주의와 시장 제도를 통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은 1968년 이전만 해도 미국 학계의 우스갯거리였어요. 그런데 1970년대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대하더니 1976년에는 노벨 경제학상까지 주었죠. 그 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프리드먼과 관점을 같이하는 경제학자들이었어요.

결국 1980년대 말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에 부활한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월러스틴은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진보 세력이 새로 대두할 공간도 열렸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제기한 ‘세계체제 분석(world-systems analysis)’ 작업이 호응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였죠.

월러스틴은 『세계체제 분석』에서 30년 동안 계속해 온 자신의 작업을 총괄적으로 요약하면서, 자신에게 제기된 비판들에 대해 간략하지만 종합적으로 반대 입장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적 합의의 바탕을 이루는 일련의 지적 개념들이 기존의 사회 과학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회 과학을 ‘탈사고(unthink)’ 해야 한다고 말하죠. 탈사고란 기존의 지배 관념들로부터 사회 과학을 해방시키자는 의미로, 진보적 사회 과학의 출발점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계체제 분석’ 작업에서 월러스틴은 무엇보다도 분석의 단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어요. 종전에는 하나하나의 민족 국가를 분석의 단위이자 별개의 실체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각각의 나라가 일종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 중심적인 발전 단계론에 알맞은 전제였죠. 낮은 계단에 있는 비유럽 국가들이 위에 있는 서유럽의 선진국을 학습하면서 위쪽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거였어요. 이러한 생각은 근대화 또는 선진화 논리의 핵심이 됩니다.

이와 달리 월러스틴은 어떤 국가들이 아래 있는 건 다른 국가들이 다른 곳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아래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곧 위아래가 모두 하나의 체제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므로, 국가 단위의 분석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연구했어요. 더 나아가 세계체제에는 경제 외에 그 나름의 정치적인 구조, 곧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가 있고 주도권(hegemony)의 발흥과 쇠퇴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죠. 이와 더불어 그는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 운동들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1세기의 역사적 선택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월러스틴은 우리에게 정치적 실천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죠. 이와 관련해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 러시아 태생의 벨기에 과학자로, 197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음)의 ‘복잡성 연구(complexity studies)’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연구를 자연 과학, 곧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지식 운동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이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작업에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지를 연구했습니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한 체제 또는 체계가 균형 상태로부터 멀리 움직여 갔을 경우 체계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아니, 못한다기보다 진동이 너무 커져서 분기(分岐, bifurcation)가 일어납니다. ‘분기’란 과학자들의 전문 용어인데, 갈라지면서 이쪽으로 갈 수도 저쪽으로 갈 수도 있어서 어느 쪽으로 갈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쪽이나 저쪽으로 약간의 힘이 더해지기만 해도 아주 그리로 가게 되는 거죠.

월러스틴은 현재 세계체제가 위기와 혼란의 상황을 맞았다고 진단하고 있어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목격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에 대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 )의 영화 같은 공습은 물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투기 세력 등 곳곳에서 높은 수준의 폭력이 자행되고 있죠. 따라서 우리는 이런 체제의 위기 속에서 분기의 두 방향 가운데 어느 곳으로 진행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월러스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 동시에,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이 뜻하는 바입니다.

 

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 아무도 믿지 않는 말잔치의 풍경

 

작년의 대선 결과가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 그 이후에도 일련의 정치적 ‘꼬락서니’들을 넋 놓고 보아야만 하는 우울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봄’ 기운은 참으로 간절했었다. 그런데 연일 계속되던 북한의 ‘악다구니’와 그것을 교묘히 활용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은 이 ‘꽃샘추위’가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2013년 봄 연일 계속된 한반도 긴장 국면이 그 정점을 찍고 서서히 ‘대화 재개와 신뢰 구축’이라는 예정된 각본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잠재우는 거짓말과 남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증폭시키는 거짓말이 서로 교차하며 이익을 얻는 집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짓말 잔치의 풍경이 지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파국’으로 치달을리가 없다고 모두 암묵적으로 전제했던 이 위험한 ‘쇼’의 각본은 사실 상호의 이익이 어느 수준을 넘어섰을 때 ‘불장난을 멈춘다’는 연출자들의 보이지 않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이 정도 수위에서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모두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내부세력을 단속하고 강성 군부를 통해 독재 리더쉽을 과시했으며, ‘핵 보유’와 도발의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점진적 개방과 투자를 위한 협상력을 강화했다. 남한의 박근혜 정부는 이 ‘북풍’을 통해 ‘낯 뜨거운’ 직무수행 능력을 덮어버리고, 뒤숭숭한 민심을 불안감과 외부 관심으로 얼기설기 솎아 내고 안보상황을 유리하게 환기했다. 물론 개성공단의 위기가 남북한 경제에 실제적으로 미치는 파급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양자가 서로 큰 부담 없이 다음 절차를 위해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공고한 군산복합체 지배계층은 최신 무기를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모터쇼’를 성황리에 열었으며, 북한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방어하는 향후 ‘칭얼대는 아이 달래고 혼내기 액션’을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북한이 쏟아내는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언사들은 실상 그들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 ‘위험한 악동 코스프레’는 고립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의 일부일 뿐이다. 물리적 전쟁으로 결코 승리할 수도 없고, 전면전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의 군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호기롭고도 가련한 무기-핵무기를 빌미로 한 심리전쟁, 말의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당국의 언사가 호전적이면 호전적일수록 그 말의 진정성은 떨어지고 현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무슨 사고만 터지면 ‘북한의 소행이다’라고 몰아가는 남한 정부와, 중국조차 믿을 수 없는 무기력한 힘의 대결에서 거짓말을 남발해서라도 작은 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몸짓은 어쩐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북한 지배층의 위악(僞惡)의 포즈는 남한 지배 권력의 위선(僞善)적 포즈와 쌍을 이루어 전후 한반도의 인민들을 통치하는 가장 중요한 기만 술수였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한반도의 이 기묘한 호혜적인 관계는 2013년, ‘3대 세습권력’과 ‘독재자의 딸’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갖고 있는 상호 필요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다시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사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모두 원하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하고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이미지를 연출하면서도, 인민들로 하여금 마치 그 말과 이미지가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게 만드는 ‘연극적인 상황’이 아닌가. ‘거짓에 의해 지속되는 공동체’가 남과 북에서 모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도록 한반도의 현대사는 모질게 흘러왔다. ‘능수능란한 사기꾼은 속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이 오용되면 위험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기표가 함의하는 바를 모르고 ‘속은’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스스로 ‘속고 싶어서’ 그녀를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면 향후 제도권 정치를 통한 삶의 개선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show’를 쑈인줄 알면서 그것을 적절한 수위에서 소비해주는 것과, 쇼가 아닌 삶과 역사의 문제를 쇼처럼 관람하고 방관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미 숱하게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속아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끝내 자기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이려 들것이다. 말 같지 않은 말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고유한 세뇌 효과를 얻기 마련이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이다. 탈출구 없는 불안한 민중들이 상징조작과 선동의 효과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출 때의 참혹한 광경을 우리는 이미 20세기 전반의 파시즘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2. 불신시대의 언어와 무기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와 경제 두 영역의 교차지점을 꿰뚫는 핵심적인 테제이다. 또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지도자 마르코스의 메시지는 이제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지금-여기 상황에 적용된다. 진실을 거의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전체주의 체제 독재자의 말은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한다. 늘 속셈을 숨기면서도 국가와 민족, 국민과 국익을 주워섬겨야 하는 선출된 권력자의 말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축한다. 자신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확신에 찬 어조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내뱉는 것은 이제 국회의원에게도 필수적인 자질이 되었다. 필자는 “음란물의 유통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 중에 “누드사진”을 검색했다고 뒤늦게 수습하는 새누리당의 어느 중진 의원을 보면서 시궁창 똥물을 뒤집어 쓴 ‘공공언어의 무덤’을 목도했다.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말이 가장 의심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대의민주제 정치가의 기본적인 레토릭마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을 보면, 혹시 그들이 쏟아내는 말은 스스로의 권위를 자해하는 무기이거나 스스로의 수준을 까발리는 풍자의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새 대통령이 정성들여 쓴 수첩에서 비밀스럽게 나온 비리 인사(人事)들이 만들어내는 저 지리멸렬한 가관을 보라.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보장’이라는 대선 공약(公約)을 첫 번째 보건복지부 장관인 그녀의 최측근이 “그것은 선거 캠페인용 문구”였다고 말하는 ‘셀프 공약(空約) 인증’을 보라. 실상 재벌과 부자들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 작정이면서도 선거에서는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고, 서민들과 노인들에게 어떤 식이든 복지 떡고물을 나눠주는 액션을 취해야 하지만 결코 재벌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을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딜레마에 빠진, 구중궁궐 홀로 고고하고 불쌍한 ‘근혜 언니’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이 청와대 발(發) 불신지옥-퇴행의 정치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허허.

▲ 3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이?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이처럼 ‘거짓말’이 일상이고 진정성이 예외가 된 정치권력의 언어가 탐욕만이 승리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의 언어와 쌍둥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된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기 힘든 이 사회를 풍자하며,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공유하는 우스개 소리도 당연히 출현했다. 개그콘서트의 ‘현대레알사전’에서는 어휘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되는 현실의 진짜(real)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 코너에서는 “직장인들에게 회식이란?” “‘사장님, 회식비로 차라리 월급이나 올려주세요’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 다른 뜻으로는 사장님이 카드만 주고 가셨으면 하는 것”이라고 폭로하며 시청자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한편 최근에 필자가 인터넷에서 재미있게 본 어느 댓글에서는 현실을 이렇게 조롱한다. “자유주의란? 돈에 구속당하는 것. 신자유주의란? 돈에 더 구속당하는 것.” 물론 원장님의 지침에 따라 편향된 정치적 댓글을 다는 것이 주된 업무인 국정원 일부 직원들에게는 언어의 의미와 변용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말이 가진 해방의 힘은 제거되고 구속력만이 작용할 뿐이다.

이제는 ‘텅 빈 개념’이 된 민주주의, 주권이라는 말이 그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불신 관계가 더욱 강화한다. 특권층과 기업을 위한 조치가 국민들을 위한 조치로 둔갑하는 사회에서 ‘점령당한 방송사’의 뉴스를 볼 때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국가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신봉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 신앙인과 대화할 때만큼이나 답답해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대의 고사성어를 잊을만하면 상기시키는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을 보며, 인민들은 공권력이 집행하는 정의(正義)와 국가가 보장하는 생존에 대해 기대감을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당당히 외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는 오직 돈만 믿는다.”

더 많이 누리고 가진 자의 말일수록 믿을 수 없는 시대, 서로의 말이 말 같지 않아 말이 무기력한 사회, 음모론과 증권가 찌라시가 존중받는 시대, 곧 말뿐인 시대. 그래서 믿을 거라곤 내 재산밖에 없는 피곤한 사회, 돈이 있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이지만 어쨌든 돈이 무기인 사회, 곧 너도나도 ‘힐링’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서 잠이라도 푹 자고 싶은 프로포폴 권하는 사회. 불신-불안-공포가 대중의 가장 강력한 정서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수단이 된 시대. 이것이 작금에 들어 더욱 퇴행할대로 퇴행한 저잣거리 정서이자 대중이 가진 시대정신의 실체라고 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인식일까.

 

3. 불감증: 소통이 어려운 사회의 질병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이런 말을 남기고 자살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전교 1등’이라고 언론에 보도된 학생의 유서를 보았다. 이 유서에는 공표된 말과 실제 현실의 괴리가 심한 우리 사회의 가장 처절한 단면이 예리하게 드러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보장된다는 행복한 미래에 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만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현재를 만드는가. 그 권위 있는 말이 사실과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갈 때, 말은 거품이고 성적만이 실체인 학교에서 조숙한 그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타인과의 정서적 교류나 연대가 몰가치하며 불필요한 것으로만 폄하될 때 우리 내면은 얼마나 쪼그라드는가.

서로 다른 저마다의 생각은 효율과 성장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강요했던 ‘박통시대’의 시즌2가 그의 딸에 의해 도래했다. 전인교육, 감성교육 이런 말은 이제 중등교육 현장에서 구호로 외쳐지기도 민망해졌다. 공교육에서 외면한 역사교육, 시민교육으로 대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감수성도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다. 필자는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가고 있는 젊은 파시스트들이 이런 현상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부터 서열화와 폭력이 상식이 되면 민주(民主)와 다양성은 낯설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진다.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그렇게 훈육되고 있는데 학교폭력이 어찌 학교와 부모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이 사회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이미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자신은 감당하기 싫은 고통과 폭력을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갈 한반도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작년 대선 이후 가속화된 ‘늙은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젊은이, 젊은이를 믿지 못하는 늙은이’의 사회가 도착할 터널의 끝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에 담긴 파시즘적 상황보다 더 끔찍하다. 남한 내부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남과 북이 서로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각 영역의 광장들이 쉽게 열릴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한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서로의 이익이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이 아니라, 먼저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짓’이 일상이고 ‘진실’이 예외적인 상황이 되면 말 자체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고립감을 키우는 개인적 정서의 문제라면, 불감증-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공공의 문제를 공적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만드는-은 사회적 정서의 문제이다. 말의 힘이 무너진 시대에는 어차피 합리적인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시민의 정치력이 쇠퇴하고 공공의 문제에 대한 불감증이 커지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힘을 가지는 관계, 즉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확산된다면 사람들의 약속과 상호연대는 보다 강력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들은 비로소 자율성과 감수성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사회의 한 조건은 공적으로 뱉은 말이 자발적인 권위를 갖출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서로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을 뱉은 자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 말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행동으로 실현하고 그 관계의 망들이 서로 엮여져 그것이 가장 강력한 권력이 되는 정치, 아니 그런 말과 말의 선순환 관계가 일상이 되는 사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거짓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