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침몰하는 대학]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박지용(한철연 회원)

즐거운 방학, 우울한 시간강사

또! 방학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 신분인 모든이들은 방학을 기다린다. 학생들만큼이나 초등학교 선생님부터 대학교수들까지도 방학을 기다린다. 모두 방학을 즐겁게 기다린다. 방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들은 시간강사들이다. 계절학기를 하지 않고서는 강의가 있을리 만무하고 강의가 없으니 수입이 없다. 대학에서는 1년 열두 달 동안 방학이 네 달이나 된다. 그러니 시간강사들에게는 삼분의 일 이상의 정기적인 무직상태를 견뎌내는 나름의 생존기술과 지혜가 요구된다.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를 하듯이 일상적인 사회관계를 최소화해서 지출을 줄여야 한다.

대학 생태계 질서에는 정년을 보장받았거나 곧 받게 되는 전임교수들이 있고 강의만 하고 강의수당을 받는 시간강사들이 있다. 시간강사에서 전임교수의 간격은 냉혹하게 말하면 급여와 연금, 4대보험이다. 신분변동에 따른 자존감 상승 따위의 비경제적 효능은 신경쓰고 싶지 않다. 승자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보상에 패자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오랜 번데기 생활을 견뎌내 나비로 변신한 친구는 첫 달 급여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서야 전임교수가 되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야말로 경쟁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을까, 부럽다.

교육당국과 대학의 밀약에 의해서 대학 생태계의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 대학은 큰 돈 들이지 않고 전임의 머리수로 셀 수 있으면서 대학 평가에도 점수를 올릴 수 있는 OO교수를 만들어 냈다. 특임, 초빙, 연구, 객원, 강의전담 등등 그 명칭은 각양각색이지만 기본범주로는 비정년교수 혹은 비전임교수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면 통계학자마저도 한 눈으로는 전체를 이해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하다. 핵심은 간단하다. 대학평가 기준과 요건이 시시각각 바뀜에 따라서 대학의 주판이 튕겨지고 잡다한 OO교수의 직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임교수와 시간강사의 차별이 달라지지 않듯이, OO교수들은 그저 OO일 뿐이다. 오히려 뻔데기가 나비가 될 확률만 더 줄어들고 큰 뻔데기 작은 뻔데기만 많아질 따름이다.

 

큰 뻔데기에서 작은 뻔데기로, 작은 뻔데기에서 큰 뻔데기로

어릴 적 읽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뻔데기가 나비가 되어 “저 꼭대기까지 가보아도 아무 것도 없어”라고 말한 장면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이제 나비가 될 수 없다. 이 상황이 비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비들이 여전히 부럽다. 지금은 시간강사로 강요된 하안거 기간을 보내며 최소식단의 섭생과 금욕을 실천하고 있다.

대학에서 4년간 OO교수로 적힌 명함에 방학에도 급여를 받고 4대보험과 퇴직금을 받은 적이 있다. 보수에 비해 노동조건이 열약했다는 점을 다시 시간강사가 되고서야 절감하게 될 정도로 일이 많았다. 다행히 현재로서는 순수 시간강사(참으로 낭만적인 단어다)가 된 지금이나 그때나 연간 급여총액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한시적인 호황일따름이다.

2015년 3월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 여섯 명의 동료가 부당해고를 문제 삼아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사건의 피해당사자는 거의 삼배수였지만 대학이라는 특수 노동환경 탓에 어렵사리 시작한 투쟁이다. 절친한 선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었지만 말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현재 진행형인 이 싸움에서 아직 외면적으로는 그 누구와도 언쟁 한 번 없었다. 그야 말로 조용한 싸움, 싸움 같지도 않은 답답한 싸움이다. 해당 보직교수(학장)와의 협의 자리에서도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마실지 설탕을 넣을지를 물어가며 웃으며 얘기했다. 기껏해야 한겨레신문에 사건보도 기사를 하나 내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동료들과 겨우 협의를 이끌어낼 정도였다. 사건을 맡은 담당 노무사가 답답해서 화를 내기도 했다.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승소했지만 대학은 중앙노동위원회로 재심을 신청했고, 8월 말 즈음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승소하게 되었다. 주문 내용은 원직복직과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차액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노동위원회의 최종적인 행정명령에 대해 학교측은 법원에서는 달리 판단할 것이라 생각하여 행정소송을 진행시켰다. 노동위원회가 국가 행정기구이므로 행정명령의 법적인 정당성은 행정법원에서 심판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참조인의 신분이 되었다. 학교는 원고가 되고 노동위원회가 피고가 되고 우리는 피고의 참조인이었다. 노동위원회의 법률 담당자는 관례상 우리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각출하여 변호사를 샀다. 행정소송도 삼심제인 상황이므로 지방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절차적으로 이어진다. 2016년 5월, 1심에서 의외로 패소하게 되었다. 패소 판정이 나자마자 노동위원회 법률 담당자가 원고가 되어 다시 항소할 것이라는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법률적인 신분이 참조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변호사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용을 각출했다. 이제 사건은 고등법원에 접수된 상황이며 9월에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대법원에서 이긴다하더라도 주위에서는 글쎄라고 다들 말한다.

 

연대를 가로막는 것들

아내가 이전에 같이 활동했던 선배 하나가 책을 낸 적이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 해고투쟁 일지를 출간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 선배가 동지애적인 결혼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고 말했다. 순간 겁이 났지만 대범한 척 잠자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나는 내년에 오십이 되지만 내 아이는 네 살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건을 처음 시작하면서 더 많은 동료들과 뜻을 같이하고자 했다. 다들 연령대, 전공분야가 다른 만큼이나 가치관이나 판단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명백하게 해고자복직투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1년 반 정도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도 조금은 다르다. 조금 더 느슨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라는 게 쌍용자동차의 투쟁이나 현재 금속노조의 투쟁에 있기나 한 것인가?

시간강사 노동자는 강의선택의 기회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학기 말 들려오는 핸드폰에서 학교 번호가 떴을 때 통화음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고들 한다. 학과장인 선배도 미안해서 직접 전화하지 못할 것이기에 학과 조교가 강사해촉 통보를 내린다. “아, 네. 그래요?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다행히 강의를 맡게 될 영광을 안고 뿌듯한 마음으로 강의 준비를 한다. 교양강좌든 전공강좌든 철학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삶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총체로서의 삶, 굴곡있는 시간을 관통하여 충만한 삶,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아 아이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철학자의 행복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칭송한다.

아래 한겨레 관련기사 참조

“[단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들에 ‘계약해지’ 일방통보 논란”
http://v.media.daum.net/v/20150909013006307?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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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진섭(자유기고가)

“민중은 개·돼지로 보면 된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주지하듯,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47) 공무원의 발언입니다. 2016년 7월 8일 저녁 한 신문사의 보도로 알려진 이 발언은 민중의 뒤통수를 제대로 내리쳤고 이튿날 내내 비난과 조롱, 풍자를 낳으며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99%의 개·돼지가 주는 세금으로 밥 처먹고 사는 놈이…”, “당장 파면해라”, “고위직 인사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할 듯”, “기득권의 비밀을 누설하다니 승진은 물 건너갔군”, “교육부 폐지하고 농림축산식품부만 있으면 되겠다. 개·돼지만 있는 나라에 교육부가 웬 말?” 등등 인터넷에는 그야말로 격분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빗발쳤습니다. 진부하지만 밤길 조심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출근길에는 각자 죽창이라도 들고 나올 기세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다릅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라도 해주시겠다면 그저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38분마다 1명꼴로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나라 민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어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2014년 궁핍한 생활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이른바 ‘송파 세모녀’를 기억하는 가슴이 따뜻한 공무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국가도, 시장도, 이웃 주민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이 사회에서 “먹고 살게 해주겠다”며 민중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노인빈곤율 49.8%를 자랑하는 이 나라에서 폐지 줍는 175만 명의 노인들 또한 갸륵하게 여기실 줄 아는 공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우며 한 달에 고작 10만~20만 원을 손에 쥐는 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언임을 저희 개·돼지들은 잘 알고 있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2년 전(2014년)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영혼들의 억울함도 잘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는 말에서 개·돼지가 당하는 죽음보다 못한 죽음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집니다. 적어도 상위 1%에 계신 고관대작들께서 잡아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저희 민중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신 발언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돼지로 봐 주신다면 적어도 저희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분명할 테니까요.

이번엔 2015년 여름 자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메르스(MERS) 바이러스가 곳곳에서 출몰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니 인수(人獸)공통 전염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메르스 사태처럼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억울하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나아가, 구제역(口蹄疫)이 창궐해도 개·돼지 같은 저희 민중을 도살 처분하지 않으실 테죠. 지금까지는 구제역만 돌면 저희가 인간 취급을 받느라 진짜 개·돼지들이 땅 속에 매몰되었잖아요. 이제 모두 개·돼지가 되었으니 개·돼지 같은 저희들이 아프면 무상으로 치료도 해주시면서 먹고 살게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경상남도 도지사께서 공공병원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이유도 당신의 발언을 접하니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위한 병원 한 개보다는 개·돼지를 위한 수많은 공공병원을 짓기 위함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이 칭찬받아야 할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10년간 저출산·고령화에서 벗어나고자 무려 152조 원을 투입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게 다 ‘내 코가 석 자’에서 비롯한 현상이거든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은 꿈도 못 꾸던 차에 단비 같은 소식을 접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제 개·돼지처럼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그동안 못 낳은 새끼도 많이 낳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벌써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나향욱 정책기획관님 덕분에 처음으로 희망이란 걸 가져봅니다. 모돈(母豚)이라고 하여 평생 애만 낳다가 죽는 어미돼지처럼 살 수 있다는 꿈이라도 가져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애도 못 낳고 일찍 죽는 불상사가 인간 세상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앞으론 저희 개·돼지 같은 민중의 출생률이 급격히 높아져 국익(國益)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저희 개·돼지는 인간처럼 자연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봤자 20년입니다. 그러니 이제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발언은 바로 며칠 전 정부에서 발표한 새로운 국가 브랜드인 ‘Creative Korea’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발상이라고 확신 또 확신합니다.

이젠 젊은이들 보고 중동으로 가라는 말도 안 나오겠죠. 네 발 달린 짐승이 무슨 수로 중동까지 간단 말입니까. 중동가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간파하시어 개·돼지로 보고 이 땅에서 먹고 살게 해주신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해당 발언이 보도되고 회자된 시점이 때마침 우리나라에서 제16차 ‘기본소득’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던 기간이었다는 점입니다(7.7.~7.9. 서강대학교). 기본소득(Basic Income)은 노동 여부, 소득·자산의 액수와 무관하게 무조건 일정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해 주는 제도로서, 누구든 기본적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이번 행사 기간에 맞춰 나온 당신의 발언은 기본소득의 정신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저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자동화 및 인공지능 등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히 대체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옛 말씀이 설득력을 잃고 있는 요즘,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면 된다”는 말씀은 ‘노동과 소득의 단절’이라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기 발령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서울시·성남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적인 복지 정책에 제동을 걸며 지방 재정에 목줄을 걸고 있는 중앙정부의 ‘기본수탈’의 정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기본소득’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임명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결혼수당과 출산수당 지급 등의 공약을 내 건 허경영 후보 못지않게 민생(民生)을 최우선으로 삼는, 아니 견생(犬生)과 돈생(豚生)을 택한 매력적인 당신에게 제 한 표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하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오늘은 간만에 네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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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는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은 건국대 철학과 전공과목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영역본을 함께 읽었던 학생이 기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정승우(건국대 철학과)

우리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과 과학 등의 발달로 인간의 권리는 계속해서 신장되고, 절대적인 재화의 양은 증가했다. 삶의 조건은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게 세탁기가 없는 삶보다 세탁기가 있는 삶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 그런데, 그것들과 비례하게 우리의 삶의 행복 또한 늘어나고 있는가? 나의 견해로, 행복의 절대량은 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시대보다 삶의 여건이 무수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보다 결코 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외부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왜 내적인 환경은 변화 혹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스펙타클의 사회” 1장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 서문은 기호가 기호화된 대상을, 복사본이 원본을 그리고 외양이 본질을 대체하는 것을 비판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또한 그와 같다. 아주 단순화 시켜, 이미지로 말할 수 있는 스펙타클이 개인의 삶 전체를 대체하고 있다. 1테제(“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에서부터 34테제(“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에 이르기까지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이 만연하고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해 서술한다.

1테제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모든 것이다. 사용가치는 사라져버리고 교환가치만이 중시된다. 모든 것에 값이 측정되어 본래 목적에 대한 고려는 사라지고 오직 그 값의 규모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인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이다. 사실, 이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 권리의 신장과 함께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개인들은 소유한 자본의 양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특히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로 개인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는데, 자본을 생산할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교환가치로 내세우며 자본가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더 소유하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의 특수한 논리를 통해, 그러한 계급의 나뉨을 정당화한다.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having’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가치가 자본으로 매겨지는 사회 속에서, 인정 혹은 사회적 선망은 자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개인이 적응하는 순간, 소외가 시작된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의 과정에서 또한 소외되며,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마지막으로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된 노동자의 비참한 삶은 자본가를 선망하게 된다. 즉, 자본을 선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삶과 멀어진다. 자신과 자신의 삶의 분리, 자기 소외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개인들의 그와 같은 소외에 힘입어, 자본주의는 더욱 단단해지고 발전한다.

이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자가 발전을 하여 스펙타클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이전의 자본이 하던 기능, 목적 등은 스펙타클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다르게 말하면, 자본이 축적되어 스펙타클이 된다. 이제 ‘having’ 소유는 ‘appearing’ 보여져야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자본 혹은 교환가치로 둘러 쌓여있었듯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둘러 쌓여있다. 쉽게 말해,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지화된다. 이제 노동자는 단순히 자본을 쫓지 않고, 자본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쫓는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가상을 쫓는다. 하지만 그 가상은 동시에 물질적으로 환원된 실재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라고해서 이 세상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눈이 내려앉아 하나가 되듯, 스펙타클은 현실과 분리돼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존재한다. ‘벤츠’를 얻는 것이 벤츠를 사는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펙타클의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스펙타클은 그러한 개인의 삶을 그자체로 통합해버린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합되었듯이,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통합은 진정한 개인의 삶의 통합이 아니라 찢긴 채 분리된 삶을 단순히 획일적으로 뭉쳐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스펙타클에 의해 통합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생생한 삶이 아니라 허위의 삶이다. 왜냐하면 스펙타클 자체가 기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이 단지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노동자 혹은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까지 이르는 자립적인 존재였듯이, 스펙타클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고 자립적으로 움직이며 개인의 삶을 잠식한다. 스펙타클과 개인의 삶이 전도되는 것이다.

스펙타클에 의해 개인의 삶이 잠식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부정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 시각을 제외한 그 외적인 부분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개인의 실현은 ‘appearing’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직 시각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스펙타클을 통해서만 드러내진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일종의 지도이다. 어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서 지도를 봐야하듯이,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 개인들은 행위 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통해야한다. 스펙타클에 의한 삶의 잠식 혹은 전도는 스펙타클이 더 이상 허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벤츠’가 없이는 더 이상 벤츠는 벤츠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스펙타클이 개인의 실제 삶의 부정이라는 것 혹은 개인의 삶을 점점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펙타클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스펙타클 자체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으로서 스펙타클을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합리적 도구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결과이자 프로젝트이다. 자본은 소비를 통해 더욱 축적된다. 스펙타클은 바로 그 소비를 조장하고 정당화시킨다. 자본가는 스펙타클을 만들어서 개인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때의 욕망은 자본가에 의해 투여된 거짓 욕망이다. 개인의 실제 삶이 부정된다는 것은, 생생하게 경험되는 삶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생생하게 경험되는 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는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자본주의의 합리적 도구로 봤을 때,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는 자본가에 의해 장치된 것이므로 이는 곧 개인의 삶이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주도적 선택은 이제 소멸돼버린다. 그렇게, 개인은 점점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종국에는 개인의 삶이 산산조각난다. 이처럼 스펙타클은 권력 자체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자본주의 안에서 드러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틈 혹은 모든 문제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벌려 놓는다. 스펙타클은 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고 노동자는 더욱 더 스펙타클에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군림하며, 스펙타클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가는 과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실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에 갇혀진 의미를 초월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 일반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한편으로 이미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처럼, 물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칸트는 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을 ‘인식의 틀’을 통해 인식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여진 모든 것이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근접함의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본래 자립적이며 지배적이다. 최초로 받아들인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떠올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만들어진 그 후로는 독립적으로 사고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새로운 사람을 보고 A라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A라는 이미지는 내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볼 때 저절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에 계속해서 개입한다.
개인적 인식의 차원에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통합되어 칸트 식의 ‘인식의 틀’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미지들이 있다. 중세의 ‘신’, 근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현대의 ‘스펙타클’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인식의 틀’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마치 개인의 주체성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완벽한 주체성이란 것이 가능한가? 토마스 쿤은 과학 이론은 패러다임 속에 존재하며, 그 패러다임은 모든 과학적 탐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언급한다. 만약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진다면, 그것으로 패러다임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패러다임을 대체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인간에게 생생하게 경험되었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뿌연 연기 속에서 소외된 상태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 통합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러한 통합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결핍을 외부의 무언가로 채우려고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외로움을 생각해보자. 인간은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면서 잠시 그 외로움을 잊는다. 하지만 타인이 떠나면 다시 혼자 남게 되고 외로움은 여전하다.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다시 타인을 찾는다. 여기서 타인이 바로 통합 이미지 곧, 스펙타클이다. 스스로 존재함에 대한 불완전함 혹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외부에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외부로부터 만족을 바라는 태도, 인간의 수동성이 통합 이미지, 스펙타클의 기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자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며 그것에 지배받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다.

다시, 자본가는 스펙타클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본가조차 스펙타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들만큼은 능동적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소수의 자본가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스펙타클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자본의 이미지화인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단지 노동자에 비해 자본을 많이 가졌다는 것,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결핍을 채워줄 외적인 존재, 즉 ‘스펙타클’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발전 혹은 삶의 조건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이 무관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절대량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불완전성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해결하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이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스펙타클’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스펙타클의 사회는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펙타클은 매우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곧, 불완전한 인간의 소유욕과 비례한다. 인간은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많은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도, 자본주의를 쉽게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소유욕을 개인적 차원에서 가장 잘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자는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하는 이미지 또한 인간의 결핍, 소유욕을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having’ 소유였다. 단, 그 소유의 대상이 달라진 것일 뿐.

과연 우리는 스펙타클 혹은 통합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핍이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느냐, 실존 자체만으로 우리 삶을 만족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은 사회 구조를 끊임없이 인간 권리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바로 삶의 만족 혹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행복 혹은 만족은 외부에서 채울 수 없다. 집단 형성을 통한 혁명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능동적으로 보이는 이조차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물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모든 것을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존 자체에 대한 만족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소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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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 한병철의 ‘피로사회’로 바라본 내 자신 –

최민국(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피로감은 가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몸에 걸린 족쇄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이 피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 모든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공부도 노는 것도 전부 귀찮다. 그냥 매대에 널린 생선들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빈둥대고 싶다.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내 자신을 구박한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초라해진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 수능을 잘 보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를 채찍질 해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쳐 달려온 길에는 몇 가지 타이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길은 그 곳이 끝이었다. 그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이 허울만을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거창한 목표였던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나의 삶도 자연스레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사회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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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쩌면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주의의 피로사회’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나듯 바닥부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다하면 ‘힐링’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픈 거라면서.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나는 ‘노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됐다. 성과에 매몰된 삶을 살았던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이전에 나의 결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들을 해 가는데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사회가 제시한 목표를 따라 충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삶속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그 끝에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병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색할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 피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이상 이러한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사색이 부족해서 이렇게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사색을 통한 성찰만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일만을 하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주류에 속하는 길은 너무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사회와 기업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레이스같다.

이런 치열한 레이스 속에서 내가 여유롭고 싶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 가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 구조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것. 말로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바뀔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움직이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자신이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한 상황에서 결국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문제들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들을 알더라도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시 일상의 문제들로 눈을 돌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먼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똑바로 보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잘못된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줄 모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어떤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변화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이진섭(자유기고가)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오빠께.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이에요.
얼마 전 숙제를 하다가 오빠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스크린도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2016. 6. 2.  당신의 희생을 슬퍼하는 평범한 초등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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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당한 참담한 일입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2016. 5. 30. 국회의원 안철수 트위터 중.

 

놀랍게도, 같은 나라에 사는 두 사람이 같은 사고를 접한 후 보인 반응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생명을 돌보는 의사였던 안철수가 지금은 의료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나를 포함한 국민 전체의 생명과 안녕을 다루는 한 나라의 공직자가 된 것을 더 큰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린다.

묻고 싶다. 우리 사회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에 왜 초등학생이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반면 공공의 업무를 보살펴야 하는, 나아가 대권을 꿈꾸고 있는 공직자는 왜 저 모양인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안철수 의원이 말이 맞긴 맞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그렇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금수저 밑에 들어가서 위험한 일도 척척 해내야 컵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논리에 맞게 땅콩 서빙도 눈치껏 잘 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집에서 태어나면 위험수당을 받기 위해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해외 근무를 자진해야 하며, 제대 후에는 고객님께 따끈따끈한 치킨을 전해드리기 위해 오토바이 위에서 목숨 걸고 총알 배달을 해야 한다. 질환이나 장애가 있어 더 이상 식당 일도 못 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집에서 번개탄 피워놓고 마지막 숨을 쉬어야 한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지 않아도 되며 자살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맞는 말을 한 안씨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안씨가 비난을 받는, 또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공직자로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컵라면 먹을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업무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지점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라고 했으면 그 다음엔 “이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또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씨는 뭐라고 했는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 거란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금번과 같은 사고로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승인한다는 내용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헐~, 생활을 위해 일하면서 그 일 때문에 생활 이전에 생존부터 위협받는 아이러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공직자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의 말은 ‘억울하면 너도 출세해’ 또는 ‘세상은 그냥 요지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건 무력한 세인들 간에나 하는 말이지, 정치인이 세인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저러한 냉소와 조롱의 정서가 사그라지도록 하는 역할이 정치이고 정치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험한 일들을 덜 위험하도록 만들어 가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공직자다. 그러기에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며 밥도 거를 정도로 바쁘고 위험한 일을 자연발생적인 전제로 두고 이는 그 개인이 선택한 것이니 그 결과도 고스란히 개인이 안고 가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정치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당연하다.(미주*) 고대 그리스 시절보다 세상이 좋아져서 비난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제대로라면 이런 자들은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맞다(잠재적 대권 주자? 어이가 없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추구하는 효율성과 수익성의 원리로 조직된 사회의 그물망에 숨통이 조인 한 생명을 떠나보낸 일반 시민들조차 이번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의 참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공직자가 저 따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걸 공직자 이전에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여당의 태도 또한 기가 막히다. 새누리당은 금번 구의역 사고를 끌어들여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 구의역 사고는 파견이 아닌 ‘원청-하청’ 구조와 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파견법이 개정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파견법 개정안이 친(親)기업 입장에서 파견 노동자 양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파견 역시 전형적인 간접 고용 방식으로 ‘원청-하청’ 방식 이상으로 심각한 ‘책임지지 않음’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구의역 사고와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파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어불성설이며 기만 중의 기만이다. 도대체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제 정신인가? 유가족의 통곡과 분노, 초등학생의 눈물이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제 정신이라면 구의역 사고 이후 파견법 등을 비롯해 노동 환경 전반을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는,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를 되풀이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공직자의 업무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요지경>은 대중이 정치인들을 향해 겨누는 조롱의 화살이지, 정치인이 대중에게 감히 내뱉을 말이 아니다. 정치인은 그저 말없이 조용히 행동하면 된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이와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말이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두 볼에 흐른 눈물이 이번만은 아닐 터.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인 공직자를 둔 우리 사회에 눈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있으며 그 눈물이 마른 곳은 있을까. 눈물은 세월호 침몰과 메르스 방역 실패에 따른 무고한 죽음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동안(아니 훨씬 이전부터) 독성 가습기 살균제는 확인된 통계로만 266명의 숨통을 끊어 놓았고, 울산-거제 벨트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는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의 칼부림에 손쓸 틈도 없이 비명에 갔고, 구의역에서는 한 청년이 자신의 몸과 시민의 안전을 맞바꾸며 기득권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온 몸으로 피를 쏟았고 그의 어머니는 온 몸으로 눈물을 토했다. 매일 전쟁을 치러내야 하는 이 삶과 죽음의 매트릭스를 아비규환 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은 지옥불반도 헬조선이 맞다. 사회가 그야말로 작살이 나고 있는 와중에도 이 나라 최고의 공직자라는 사람은 해외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그 곳에서 빼놓지 않고 K-Pop 공연을 관람한다. 심지어 손을 흔들며 환한 표정을 짓는 여유를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의 환한 미소 앞에 평범한 초등학생의 궂긴 표정이 겹쳐 보인다.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그렇다. 초등학생조차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속한 이 사회가 나에게 850원 어치 컵라면조차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이 돈벌이 논리에 신음하는 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천박한 헬조선임을. 나아가 ‘지금 초등학생인 나도 몇 년 후엔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근거 있는 상상과 우려를 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2016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키워가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 언제 짓밟힐지 모르는 불안한 꿈이기에 꿈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 간다. 애초부터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삶이 결국엔 공허하다는 걸 깨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였을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이미 꿈꿀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의 많은 초등학생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밤 12시까지 공부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더라.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이라고 운을 띄우며 시작한 저 편지의 주인공 역시 밤늦게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서울의 초등학생은 아닐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등학생도 글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공직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충격을 넘어 이들이 공직자 중에서도 소위 ‘별 중의 별’이라는 사실이 공포를 더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더 밝은 빛을 발하는지 경쟁하느라 바쁘다. 지상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하늘의 별’이 되도록 방치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늘 같은 별’이 되어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사이 지상에선 누군가는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지하에 묻힌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하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라고 연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이러니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공직자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멈춰 서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와 권한이 있다. 공직자는 수시로 지상으로 내려와서 필요하다면 지하까지 강림하시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저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아래 편지 내용에 잘 드러난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나는 단지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안철수 너는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넘어 공직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새누리당의 파견법 개정 시도를 꼭 본 것 마냥 평범한 초등학생의 깊은 우려와 따끔한 충고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이 살고 있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인 이곳에서 만 2살짜리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살아갈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이비인후과 문을 열고 들어온 만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좁은 공간에서 잘도 뛰어 논다. 좋다고 할머니 품에도 안긴다. 아프긴 해도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문득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명을 달리한 19살 청년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 청년도 저렇게 즐거워하며 또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엄마랑 할머니랑 살을 부대끼며. 유가족이 된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어머니 볼에 뽀뽀를 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끈끈했던 그래서 단단해보였던 20년의 시간은 단 한 순간에 파편화되었다. 자본의 냉정한 논리 하에 그동안의 뜨거웠던 살점들은 무참히 뜯겨져 나갔다. 그 곳에 더 이상 사람의 살‘정(情)’과 ‘오감(五感)’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차가운 공구들과 아직 뜯지 않은 컵라면, 나무젓가락, 그리고 라면 국물을 떠먹기 위한 스테인리스 숟가락만이 쓸쓸히 그리고 온전히 돌아왔다. 나를 보고 웃는 그 2살짜리 아이가 우연히 그리고 다행히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여전히 반복되는 어이없는 언니/오빠/형/누나들의 죽음을 보며 위와 같은 편지를 계속 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밤 12시에 학원 숙제를 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저 편지를 쓴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은 여전히 평범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2살 아이든 초등학생이든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넓은 의미에서 사람 살만한 사회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를 위해 공직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여유가 있든 없든 이미 우리의 죽음은 그것과 무관하다. 여유가 있으면 있어서 죽고, 없으면 없어서 죽는다. 컵라면도 먹을 여유 없이 죽어라 일만 하다 실제로 죽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여유를 보이다 죽음을 당하기도 하며 좋은 공기를 마시려다 되레 살균제를 흡입하여 죽기도 한다. 그러니 안씨가 흙수저의 처지를 모르고 금수저만 옹호한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안씨는 금수저 흙수저를 떠나 자연인(사람)에겐 관심 없다. 오직 법인(자본)의 성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노조가 생기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고 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람의 입 구멍과 콧구멍은 닫혀도 회사 문은 절대로 닫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안씨다. 구의역 사고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는 연대하지 못하는 무력한 노동을 강요한 폭압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트윗글에서도 보듯 안씨는 이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소수의 탐욕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희생이라는 비인간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심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4·13 총선 직후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로 등장한 안철수 정당(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처리하려 한 법안 중의 하나가 새누리당이 만든 파견법 개정안임을 아시는지. 노동하는 사람이 다 죽어 나가면 결국 회사도 문 닫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그땐 입 구멍 콧구멍 걱정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로봇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오감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 따위 트윗글이나 날리는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에게 우리가 표를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눈꼽만큼도 없다. 정치인이 할 일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몸과 살을 가진 존재로서 ‘쓰레기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실업/빈곤/질병/재난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오는 인생 리스크를 줄여주는 일이다. 이를 ‘사회안전망’이라고 하는데 ‘회사안전망’에만 주력해 온 안씨가 들어나 봤을지…

하긴 자신의 인생 리스크를 관리할 줄도 모르고 정치판에 뛰어든 철없는 안씨에게 무슨 기대를 하랴. 장차 정치판에서 죽게 될 안씨에게 미리 조문을 해본다.

“안씨, 당신도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주*)  2014년 서울 지하철 1~4호선의 스크린도어 장애 신고 건수는 1만 2천여 건으로, 일 평균 30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 강북 49개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도어 전체를 4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수리 시작 전에 다른 곳으로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리하지 못할 경우 해당 직원이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고 하니 2인 1조는 언감생심. 혼자 작업을 해도 항상 초과근무를 했고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다는데 이런 업무를 개인이 원해서 선택했다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공구 가방 들고 이 역사 저 역사로 불려 다니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850원 짜리 컵라면 하나 겨우 먹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인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런 자가 정치인으로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며 그 정치인이 바이러스인지 백신인지도 분간 못하는 유권자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치명적 결함이다. 안씨는 공직자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병리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사회적 백신’을 만들어 보급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스스로 바이러스가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애초부터 백신의 탈을 쓴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는지 모른다.

세월호를 기억하며[4.16]

4.16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너와 내가 타지 않은 세월호에

가슴이 타지 않은 세월호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망각의 강을 건너

그래서 회피하고 싶은 공간을 어지럽히고

무차별하게 밟히고 또 밟혀서

잊혀진 꽃이 된 내 안의 붉은 꽃은

너와 내가 탄 세월호에

가슴이 타는 세월호에

고통으로 짓이겨 세월의 꽃을 밟는다.

모두가 타는 가슴으로 피어나는 세월은

우주 끝을 돌아 돌아 다시오는 세월

 

세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줘

깜깜한 어둠이 차오르는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간절히 찾아 헤매던 그 손길

이미 흐려지고 잊혀지고 지워져 가는 꽃들

 

붉은 꽃들, 날개를 피어 우주의 한 줄기 빛으로 피어나줘

 

 

 


세월호를 기억하며 2016-3-28

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이지영(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첫사랑은 그것이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때에 아름답다. 그것의 과거 시제가 현재를 침범할 때,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비루한 현재만 부각된다. 피천득은 <인연>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철학 웹진에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드라마들에 등장하는 이상 징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첫사랑은 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못지않은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치병, 출생의 비밀, 재벌가 실장님 등이 등장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짜증섞인 반응에 비교한다면, 첫사랑은 늘 모두를 설레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단골 소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몇년 간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첫사랑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예전과는 좀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첫사랑 드라마 <겨울연가>의 경우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십여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 다만 거의 서른이 된 주인공들이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의 에피소드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놀라워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절이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부 시절의 일들도 매우 어렴풋하게 중요한 몇몇 장면들만 기억날 뿐, 그렇게 생생한 강도로 선명하게 디테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몇 년만 지나도 요새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뭐, 기억력의 경우 개인차가 심할 수 있을테니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드라마들은 뭔가 수상하다. 첫사랑의 나이가 아주 어려졌다. 첫사랑인지 아닌지도 잘 분간하기 힘들만큼 어린 시절, 초등학교나 심지어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로 연령대가 낮아졌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그녀는 예뻤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15년만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몇 달 전 방영되었던 <킬미 힐미>에서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만나서 함께 지내던 아이 둘이 트라우마로 둘 다 그 시절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뭔가의 끌림으로 다시 시작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방영되었던 비슷한 소재의 다중인격을 다룬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도 10대 초반 시절의 강렬한 인연이 바탕이 되어 성인이 된 주인공들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현재 방영중인 조선 건국을 다룬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이방원 (유아인) 과 러브라인을 형성하게 되는 분이 (신세경)의 인연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주인공들의 사랑 (<풍선껌>, <너를 사랑한 시간>,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경우에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첫사랑 아니면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인연이 성인이 된 이들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요소로 등장한다. (작년 드라마 <힐러>의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도 아마 당장 기억나지 않는 드라마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이야기를 시작하기엔 충분할 만큼 많다.

고백하건대, 나는 드라마 매니아이다. 거의 종류를 막론하고 왠만한 건 다 본다. 영화 철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온갖 드라마들을 매일 본다고 이야기하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유치하고 식상한 클리쉐들로 가득 찬 수준낮은 드라마를 아방가르드한 영화를 연구하는 인간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곤 한다. 사실 드라마는 나에게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복잡한 철학적 미학적 논의들과 피곤한 세상사를 잊게 해주는 마취제이자, 머리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비워서 다시 일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치하고 빤한 클리쉐들도 나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즐거운 드라마들이 이상한 징후들을 내뿜으며 나에게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첫사랑 판타지가 꼭 미취학 아동 시절, 아니면 최소한 청소년기 이전에 이루어져야만 그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시절의 첫사랑은, 요즘 아이들의 조숙함을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때묻은 사랑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중년의 사랑이나 노년의 사랑은 뭐란 말인가. 흉측하게 때묻은, 순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냥 그런 너저분한 남녀상열지사란 말인가? 아, 이건 뭔가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이 넘실거린다. 개개인에게 있을법한 원형적인 첫사랑의 기억은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이에 대한 집착은 ‘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 역시 어차피 일종의 정신병 아닌가. 이런 개운하지 않은 기분은 그저 이 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중년이나 노년을 배제하고 있다는 그런 에이지즘(Ageism)적 차별 때문일까 라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첫사랑에의 집착은 그렇다고 보기엔 도가 지나치고 뭔가 더 이상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원인을 말했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피상적인 인간 관계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대상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맞는 말일 것 같다. 이런 측면 역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어투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뭔가 그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말해야겠다.

대체 뭘까? 가끔씩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현듯 ‘그 이상한 기운’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왜 지금 알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때문이었다. 99 퍼센트의 국민을 좌파로 몰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을 좌편향 빨갱이로 몰고 있으며, 국정화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이 황당하고 끔찍한 메카시즘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점이 바로 나로 하여금 ‘그 이상한 기운’을 파악하게 만들었다. IMF 이후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경제 침체와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보수화를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고 있듯 현 정권은 역사의 시계를 1970년대로 되돌리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우리집 아이의 표현을 빌자면, ‘박근혜의 공약대로 전국민을 대통합시키고 있다’고 할 만큼 보수와 진보를 넘어 모두가 반대하는 문제임에도 강행시키는 저 대담함은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추친력 아니던가. 모두가 다 아는 이런 시국에 나는 왜 첫사랑 드라마들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첫사랑에의 집착이라는 전국민적 정서가 혹시 박정희에 대한 첫사랑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대통령이라는 중요한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박씨 왕조의 공주로 인식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를 선택한 국민들의 선택은 박정희의 경제 성장에 대한 첫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현재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여자가 대통령으로 뽑힌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 아닌가. 결국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이다. 박정희라는 첫사랑에 대한 집착이 결국은 박근혜 정권이라는 시대착오적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정치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첫사랑이라는 과거의 판타지에 대한 집착이 현재를 갉아먹는 것이 2015년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니. 이 첫사랑 판타지에 대한 집착은 더 이상 순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것은 병이다. 특히나 10세 이전의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현재의 이상한 기운 속에서 박정희라는 판타지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생각하니, 그저 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점잖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집착이 너무나도 강해서 이는 음란한 도착증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10세 이전에 만났던 첫사랑 꼬마아이는 그 사이 많은 세상 풍파를 겪으며 더 이상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며 나 역시 그 때의 내가 아니다. 6-70년대 경제를 살렸다는 (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그냥 군말없이 일단은 인정하기로 하자.) 박정희 정권이 가고 우리나라 경제를 둘러싼 상황은 그때의 상황과 조금도 같지 않다. 이러한 모든 중요한 세상사의 변화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기억 속 판타지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시체애호증(necrophilia)이나 소아성애자(paedophilia)의 변태적 도착증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징그럽다. 소아성애증 말이 나온 김에 최근의 아이유 ‘제제’ 논란이 떠오른다. 아이유의 해석이 소아성애를 부추기므로 음원을 폐지하라는 사람들이 3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다. 소아성애증의 대상이어야 하는 아이유가 그 시선의 관계를 뒤집자 광분하는 꼴이라니.. 진정 사회에 해로운 도착증 환자들은 저기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럼 과거는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대상인가? 아니다. 우리는 늘 그 과거의 영향권 하에서 살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과거는 현재의 우리를 규정한다. 과거는 그저 아무 쓸데 없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굳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논의들을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과거는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를 규정하는 막강한 존재론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거를 현재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면하고 인식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니면 과거사이든 간에. 왜 우리 사회는 지금 과거를, 그것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과거를 현재에 아주 음란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되었는가. 이 무슨 징그러운 반복강박인가. 어린 시절의 첫사랑에의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강박적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그 원인 역시 과거에 있다. 지금껏 우리는 과거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개념을 조금 이용한다면, 과거에 대해 제대로 된 애도(mourning)를 하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첫사랑을 잃고 엉엉 울며 소주잔에 의지하는 것만이 애도는 아니다. 데리다에게 애도란 그저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애도란 과거를 현재에 불러내어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 과거와는 다른 변화된 미래를 여는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과거를 정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은, 조선시대식 어휘로 표현한다면 역모를 꾀한 것이고 이는 3대를 멸해야 하는 중죄이거늘, 우리는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챙긴 부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군정기의 혼란과 미국의 이익 때문에 시작이 되었건, 일본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던 전직 일본군이 나라를 18년이나 통치했던 이유 때문이었건, 그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바로 그 자손들이 이제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를 맑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하여 유지하고 강화할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는 그 어떤 현재의 반대보다도 강력한 현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시계를 4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 닥터 후(Doctor Who)의 타임머신 타디스(Tardis)도,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의 드로리안(Delorean)도 없는데 우리 모두가 원치않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 하수상한 도착적 정권은 전 국민을 원하지도 않았던 시간여행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의 시간을 어떻게 1970년대가 아닌 2015년으로 재조정할 것인가. 데리다가 말하는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은 대체 어떻게 열 수 있다는 말인가. 뻔한 답이지만 우리의 과거를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세탁하고 싶어하는 얼룩진 과거를 제대로 활짝 펼쳐서 김치국물 얼룩 하나까지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대우 (doing justice)를 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마도 페티쉬라 할 수 있을만한 첫사랑에 대한 도착적 정신병은 음란함의 정도를 넘어 우리 나라 자체를 거대한 폐쇄 정신 병동으로 변하게 만들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는 박씨 가문의 인물들을 현재까지 두 번 만났다.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떠올린다면, 우리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인 세번째 만남은 결코 성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네버엔딩스토리0416[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3

 

네버엔딩스토리0416

 

 강지은(편집주간)

일 년이 지났다. 진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시간만 자꾸 흐른다.

세월호는 아직 차가운 바다 밑에 있는데 정부는 돈으로 모든 일을 수습하려고 한다.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될 것이다. 결코 세월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2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나태영(한철연 회원)

 

18대 대선 기간 동안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가 부정 댓글을 무수히 많이 달았다. 이 사건이 수류탄 터진 경우라면 18대 대선 선거 개표조작은 핵폭탄 터진 경우이다. 하지만 선서 개표 조작은 여론화 되지도 못한다. 소수 촛불 시민들만이 여론화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대한민국 전체 투표권자들 이 연극배우가 되었다. 왜 그런가? 201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 하루 전 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컴퓨터에 박 근혜가 51.6프로 득표한다는 내용이 저장되었다. 저들이 박 정희가 저지른 5.16 쿠데타 연상하도록 51.6프로로 득표 조작을 했다. 저들은 이 땅 유권자를 조롱했다.

투표함 열기 전에 개표 방송 했다.무수히 많은 보기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의 보기만 들겠다.

보기

강원도 춘천시 제 1 투표구 투표수: 2,924매강원도 춘천시 선관위 투표지 분류를 끝낸 시각: 2014년 12월 19일 저녁 9시 24분강원도 춘천시 선관위원장 공표 시각: 2014년 12월 19일 저녁 7시 40분투표함 열기 1 시간 32분 전에 개표 방송 했다.

신 상철은 말한다.

“선거 개표조작 당사자가 박 근혜에게 내가 당신이 대통령 당선되게 해 주겠소 말한 다음에 대통령 당선 시켜주면 박 근혜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이 51.6프로로 대통령 당선되게 해 주겠소 말한 뒤에 그런 결과를 내면 박 근혜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명박과 박 근혜와 전 중앙선거관리 위원장 김 능환은 국기문란죄로 처벌 받아야 한다.

그래도 이 땅 언론인, 진보정당 사람들, 지식기술자들은 침묵한다. 박 창신 신부가 이 내용을 담은 책 『제18대 대통령 부정선거백서』를 가슴 아래에 들고 시국 선언했어도 이 땅 언론인, 진보정당 사람들, 지식기술자들은 침묵한다.

이들은 칼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한테 회초리 맞아야 한다.

선거 개표조작을 막지 않으면 새누리당 인간들은 지들이 선거에서 불리할 때마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전 날처럼 계속 선거 개표조작 할 것이다.

18대 대선 선거 개표 조작을 문제 제기한 한 영수(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노조 위원장)와 김필원은 감옥에 갇혀 있다.감옥에 갇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니라이 명박, 박 근혜, 김 능환 세 인간이다.

장자가 기가 막혀!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1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요구하는 문제는 나에게는 진리에 대한 칸트와 헤겔의 대립을 연상케 한다.

 

칸트

칸트

1.2. 그들은 말한다. 진상 조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필요하다.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특별법 속에 정립해야 한다.

 

1.3. 칸트는 말한다. 진리를 알 수 있느냐의 문제는 먼저 인식 주체인 우리 자신의 능력 여부를 알아야 한다. 주체의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가 진리 탐구의 전제이다. 그런데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경험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모른다면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다.

 

2. 헤겔은 칸트의 이런 물음을 간단히 일축한다. 내가 수영 능력이 있는지 없는 지는 직접 물 속에 들어가봐야 한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수영 능력이 가능한지 안 한지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레닌도 비슷하게 말한다. 말을 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말을 타봐야 안다고…물 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말을 타보지도 않고 가능한지 안 한지를 따지는 것은 공허한 형식주의 논쟁이다.

 

2.1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물 속을 들어가봤다고, 이미 말을 타봤다고. 조사권만 가졌던 과거사 진상조사위가 무기력하게 벽에 부딪혀 보지 않았냐고. 그래서 더 ‘성역없는’ 수사권이 필요하지 않는가고.

 

2.2 과거사 진상 조사위하고,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특검이 동일한 것인가?

 

2.3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초헌법적이라는 발상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반민특위가 가져보지 않았냐고.

헤겔

헤겔

 

2.4 반민특위는 그런 ‘성역없는’ 수사권으로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들은 경험을 경험했는가?

 

3.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면서 ‘성역 없는’ 조사권과 수사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칸트의 후예라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들에겐 애시당초 참사의 진상은 알 수 없는 X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조건의 가능성 여부만이 관심사인지 모른다. 가능성의 조건이 그들에게는 동시에 진상규명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실제 수사를 하면서, 재판을 하면서, 대책을 수립하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진상에 대한 접근은 형식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진상 조사를 하면서 드러나는 내용의 문제가 아닌가?

 

3.1 그들이 말하는 ‘성역없는’이 법리로 가능한가? 모든 ‘성역’은 정치 논쟁, 정치 투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3.2 한 시인은 말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집에다 싸움판을 벌여놓고 가출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제기된 문제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나선다. 그들이 ‘신비’에 정통한 듯이 행동하는 것도 그곳에서는 안심하고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완전한’ ‘진실한’ 등 일련의 형용사들의 간계를 조심하지 않은 까닭에, 젊은이들의 정신이 정체하거나 부패하는 수가 있다. 힘겨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지구력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용사들을 미끼로 문제를 농담으로 유인해들이는 것이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4. 아마도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능성의 조건만을 따지면서 벌이는 무한한 스콜라적인 신학 논쟁, 말하자면 공허한 정치 투쟁이 본질인지 모른다. 이들은 문제를 푸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 목소리를 키우고, 맹주 역할을 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5. 헤겔은 비판한다.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식을 도구로 간주하는 형식주의일 뿐이라고. 하지만 인식이라는 사고의 도구는 인식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에 관한 법률 조항도 현실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1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이 정신의 힘이다. 이러한 머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바꾸는 마법의 힘이다.(헤겔)

 

6. 인식의 이런 선험주의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세상 안에서, 아니 세상 밖에서라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 (칸트 도덕 형이상학 기초) 이 착한 마음은 현실의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만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무감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행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양심의 윤리이다. 하지만 그가 따르는 도덕법칙은 얼마나 공허한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내 마음 속의 의심할 수없는 양심! 엄숙주의와 자폐증, 또 이런 선은 얼마나 추상적이고 독단적인가?

 

7. 헤겔은 말한다. 양심과 추상적 선의 무기력을, 엄숙한 도덕적 주체의 공허함을…이 공허함과 부정성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노예의 종속 상태로 자신을 비하시키게 될 객관성에의 동경을…그들은 어떤 확고한 지주나 권위를 붙잡고자 한다(헤겔)! 교황을 열광하던 그 마음과 그 태도들을 보라.

 

8. 이제 우리는 더는 그런 공허한 형식주의, 도덕적 엄숙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9. 마르크스는 말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생명력을 실천에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을 떠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리학적인 문제이다.”(포이에르바하 테제)

 

10. 노자는 말한다. “挫其銳(좌기예)하며, 解其紛(해기분)하며, 和其光(화기광)하며, 同其塵(동기진)이니라.”(도덕경)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헤치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진흙 구덩이 속에 함께 하라고…그렇다.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는가?

 

11. 이들의 말은 모두 한결같다. 직접 현실로 뛰어 들라고, 그 현실 속에서 풀어 헤치라고, 그 현실 속에서 확인하라고. 그 현실 속에서 바꾸라고…벌써 세월호 참사가 몇 개월이 지났는가?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끊이지 않는 형식주의 논쟁, 도덕적 엄숙주의, 종교적 순결 외에 우리는 무엇을 확인했는가? 그 끝은 어디로 가는가?

 

12.다른 시인은 말한다. “이 비정한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 많은 진단과 분석, 나라를 개조하자던 다짐들은 어디로 가고…증오와 불신과 비어들만 거리마다 넘치는가”(도종환, 광화문 광장에서) 혹시 그들은 이제 이처럼 희망을 상실한 비탄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우리는 스스로 만든 관념의 노예가 되려 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혹시 우리들은 파리통 속에 빠진 파리들이 아닌가? (비트겐슈타인)

 

13. 특검은 구성도 못했는데, 정작 검찰과 법원은 수없이 조사하고 판단들을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판단들을 내렸다가 나중에 다 다시 뒤집으려는가?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의 판단…무한한 퇴행!

 

14. 나는 나의 이런 말들이 질주하는 욕망의 비계 덩어리들, 영혼이 없고 창이 없는 독단의 황제를 두둔하는 말로 곡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미워한다. 나의 말들은 다만 내 친구들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어서 사라진 어린 영혼들이 안식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사고를 싫어하고, 오직 편들기에만 열중하는 시대에 나도 내 말이 무익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