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②-[시대와 철학]
18대 대선, 분열되고 전치된 한국사회의 자화상②-[시대와 철학]
민주화의 역설, 증오의 정치에서 희망의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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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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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민주화의 대결, 민주화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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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이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유권자 인구 구성비의 변화’였다. 그것은 20-30대가 50대 이상보다 많았던 이전 선거들과 달리 이번 대선에는 최초로 20-30대에 비해 50대 이상의 인구 구성비가 약 2% 정도 높았던 선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던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보면 50대 6.2%와 60대 0.1% 상승으로, 전체 평균 3.15%가 오른 반면 20대(8.65%), 30대(4.95%), 40대(2.4%)는 전체 평균 5.33%로, 5.0%라는 투표율 상승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30대의 노무현-문재인 지지율 또한, 2002년에 비해 각각 8.0%, 8.3% 상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에서는 단지 0.2% 차이로만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40대가 이번에는 무려 11.3%나 오른 11.5% 차이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따라서 애초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주력했던 높은 투표율과 젊은 세대의 결집이라는 선거 전략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유권자의 인구 구성비 문제를 제기하거나 나이가 들면 보수화한다는 ‘연령효과’를 들면서 이후로는 보수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현재 486세대 중 50대에 속하는 50-53세는 50대 후반의 정치적 성향과 다르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면 보수화하는 ‘연령효과’가 특정한 세대의 역사적 경험에 따른 ‘세대효과’에 의해 상쇄하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비교해 볼 때, 2012년 대선에서 20-30대뿐만 아니라 40대까지 더욱 좌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구 구성비의 변화가 아니라 50대 이후가 이런 40대 이하의 좌로의 이동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우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89.9%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50대와 더불어 50대-60대는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대 간의 정치적 성향의 분열이며 이 분열의 기점이 되는 것은 40대 이하와 50대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40대 이하는 전체적으로 좌향좌를 했다면 50대 이상은 우향우를 했다. 여기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은 소위 486세대이다. 486세대의 역사적인 정치적 경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민주화’이다. 그들은 80대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좌향좌를 한 40대 이하와 우향우를 한 50대 이상 사이의 분열은 역사적으로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역사적 경험을 보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분석들에는 이런 역사적 경험을 통한 분석이 없다. 이것은 이번 대선의 책임을 50대의 보수적 결집에서 찾는 경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50대의 보수적 결집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50대의 보수적 결집이 이번 대선 결과 그 자체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50대는 2002년 대선에서 17.8%(이회창 57.9% 대 노무현 40.1%)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25.1%(박근혜 62.5% 대 문재인 37.4%)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이전 대선보다 7.3%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20대, 30대, 40대가 각각 2002년 대선보다 8.0%, 8.3%, 11.3% 더 많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50대 이상의 보수화 경향이 40대 이하의 반(anti)보수적 경향을 압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60대 이상을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60대 이상은 박근혜 72.3% 대 문재인 27.3%로, 2002년 대선 당시 지지율 격차 28.6%(이회창 63.5% 대 노무현 34.9%)보다 무려 16.2%가 더 많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따라서 20-40대의 좌로의 상승률을 전체적으로 상쇄시키면서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이끈 세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50대가 아니라 60대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50대의 높은 투표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보아야 할 것은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가장 높은 비율로 우향우를 한 60대 이상의 보수적 결집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대선 결과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은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두 개의 코드이며 ‘민주화’에 대한 ‘산업화’ 세대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민주화’에 대해서 집단적인 반란을 꾀한 것일까? 그것은 소위 87년 6.10 이후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수동혁명’에 의한 민주화, 그리고 소위 486세대가 주도했던 김대중-노무현정권 시절의 민주화가 ‘산업화 세대’의 욕망을 민주화의 흐름 속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민주화’는 결국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 및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기간에 진행되었던 ‘민주화’가 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 그 결과로 나타난 ‘반동’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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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는 사회, 증오심에 가득 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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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년 한겨레신문 기획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손수레로 1t 트럭보다 많은 폐지를 실어 나르는 ‘1t 리어카’ 정영배(56)씨.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씨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운동 공로자에게는 보상을 해주는데 왜 자신처럼 평생 열심히 일하다 다치고 병든 이들은 충분히 돌봐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다. 특히, 그들은 1970년대 경제적 빈곤을 온 몸으로 때우고 살아온 세대이다. 1970년대 중반, 그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수출의 역군’으로, ‘산업화의 기수’로 바꾸면서 그 스스로 대한민국 국가 건설의 주체로 만들어왔다. 그것은 명백히 가해자 국가가 심어 놓은 환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동을 자본으로 바꾸어 경제 권력으로 바꾼 것은 국가였으며 그들은 그 국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벌이 대한민국의 최고위층 권력이 되어갈 때, 그들은 더욱더 가난해졌다. 하지만 그 때 유신독재국가는 그렇게 그들을 불러 세웠으며 그들 또한, 그 어려운 삶의 고통을 이 환상을 통해서 이겨냈다. 그 환상이 승리의 환호성으로 바뀐 것은 전두환 정권 때였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은 대한민국 사상 처음으로 무역수지를 적자에서 흑자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당시의 경제성장률은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능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1970년대였으며 그들은 전두환의 푸념과 달리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워놓은 것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87년 6.10민주항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화는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유화와 더불어 ‘시장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우파 시장주의-신자유주의 좌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거쳐 온 그들이 40-50대가 되었을 때, 그리하여 비로소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안정적 삶의 기반을 찾고자 했을 때, 그들을 인내하게 하며 견디어 내게 했던 ‘미래’는 더욱더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1997년 IMF는 ‘정리해고’의 광풍으로 되돌아왔으며 정보화 사회는 더 이상 구시대의 저임금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환상은 분노와 증오가 되었다. 내가 세운 나라, 내가 만든 경제적 풍요.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그것을 누리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
자동화와 정보화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잉여인간에 불과했다. 무너진 자존심.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 그들은 이미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화려한 쇼윈도를 펼쳐 놓은 상품들의 스펙타클한 세계를 즐기기에도 그들의 욕망은 너무 낡고 추했다. 1990년대 한국의 자본주의는 대중소비사회로 이동했으며 그 소비를 전유한 세대는 X세대였다. 대중가요의 주요한 소비층은 10대가 되었으며 문화적 감각의 향유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어쩌면 그렇게 1970년대의 ‘산업화’ 세대의 반란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징후는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지하철 노약자 석에서 이루어지는 노인들의 젊은이에 대한 테러는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 대한민국’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더 많은 상품들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면서도 오직 능력 있는 자들, 스마트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세력은 다름은 김대중-노무현정권이었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민주당과 함께 이미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구세력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정치는 여전히 한나라당(새누리당) 대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의 양당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무현정권의 실패와 더불어 ‘구 민주당 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는 급속히 떨어졌었다.
그러나 ‘노무현전대통령의 투신’과 민주노동당의 ‘진보단일후보’ 노선은 10% 내외의 지지율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었던 구 민주당 세력을 기사회생시켰다. 지난 지자체와 총선에서 사람들은 진보단일후보가 아니었다면 구 민주당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의회 진출에 성공했으며 나름대로 지자체에서도 성과를 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성공은 구 민주당 세력인 노무현정권에 대한 냉정한 정치적 평가와 청산에 대한 역사적 단절을 없애버리는 대가를 지불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투신’은 그에 대한 인간적 애도의 물결로 바뀌었으며 정치적 과오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사라졌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애도마저도 2011년 총선 직후 벌어진 통합진보당 사태는 소위 ‘진보’라는 세력에 대한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그것이 50대 이상의 결집을 불러왔다. 그들은 그 동안 ‘민주화’라는 명분 앞에서 밀리고 있었으나 그 이후 자신의 왜곡된 욕망과 ‘산업화’ 세대들의 ‘비도덕성’을 ‘증오심’에 근거한 정당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이번 대선 결과는 대한민국 사회가 극심한 정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사실상 ‘계급이 없는 계급투표’, ‘여성이 없는 여성투표’로 귀결되었다.
노후의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노인들, 하우스푸어-렌트푸어인 50대들은 그들의 생존적 불안감을 ‘민주화세력’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무상보육, 무상급식’과 같은 ‘보편적 인권’의 권리에 오히려 분노했으며 새누리당이 제시하는 허구적인 ‘차별적인 복지’의 구호에 말려들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한국 사회에서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청춘을 보냈으나 ‘민주화’와 더불어 여성의 권리에 눈뜨기 시작한 여성들은 박근혜후보의 여성대통령 구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20대 여성은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산업화 시대’의 여성이 지니고 있는 정서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40대와 50대의 여성은 충분히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못한 한국의 남성들과 달리 박근혜의 ‘여성’대통령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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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