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박종성(호원대학교)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 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
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고
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
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게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
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시대에 대한 성찰: “이게 국가냐”

“정말 이건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냐”, 집회 나온 할머니의 말이다. “순실”의 시대에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민중은 자괴와 상실만을 하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에 민중들은 다시 촛불의 희망을 들었다.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00만을 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 부산, 거제,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어린이, 대학생, 노인들에 이르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 대한 촛불의 거대한 시대의 성찰이자 주권자의 실천이었다. 촛불 혁명이었다.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나니, 우리는 바로 그 탄생의 현장에 서 있다.” 괴테가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발미 전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우리는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고, 그 탄생의 현장에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 그 목소리는 다양했고, 정치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축제 분위기였다. 가정주부는 답답하여, 학생들은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도 그렇게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입학에 분노하였고 정의를 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정의(justice)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리, 각자는 각자의 공헌에 따라 분배받는 것인 분배적 원리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 공헌에 따라 분배받지 못한 정유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시민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였다. 광장의 정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유신 잔당들의 해체와 종식을 알리는 새로운 역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87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광장정치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로 남지 않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는 공적인(publica) 것(res)의 파괴이다. 공적인 것의 파괴와 사적인 것이 지배하는 국가, 바로 그런 지금의 국가(republic)에 대한 성찰이 촛불 혁명을 만든 것이다. 촛불 혁명은 탄생하였다. 그 성장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철학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은 논박보다는 촛불을 들어 통치자의 무지 자각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근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유신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폭정, 불의, 강도 짓을 일삼던 자들의 영혼, 즉 오늘날 망령, 독재의 유령은 이들의 영혼이 정화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인하여 망령은 현실에서 배회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 그것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선택하였다. 민중들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게, 곧 부, 명성, 명예의 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수백만의 민중들은 묻고 있다.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국정원 선거 개입, 교육부 국정 교과서, 한일군사협정, 부정 입학, 국정 농단, 성과연봉제 등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질문이었다. 민중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었다.
둘째, 탐욕과 시기는 나라가 망하는 두 요소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화폐였다. 요약하자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사적인 인간의 화폐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을 정치권력이 두둔하고 은폐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혈세는 사적인 인간의 부의 증대로 둔갑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치부욕”에, 곧 사적인 인간의 치부욕에 우리들의 혈세가 쓰인 것, 민중들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삶의 성찰을 통해 거대한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을 믿지 않고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Plutus)를 믿는다. 맑스는 재물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었다. 그렇다, 국정을 농단한 결과는 도덕적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질서까지도 파괴하였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경제민주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을 위한 국가는 변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플루토스를 추구하는 근대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생활원리를 눈부시게 비춰주는 화신(Inkarnation)을 자신의 황금 성배(Goldgral)로서 환영한다.”고 맑스는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화폐형태는 일반적인 등가형태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특정한 상품의 특수한 현물형태(Naturalform)로 전환되어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의 행위 때문에 특정한 상품의 배타적 기능이 되고,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한다. 화폐는 “추상적 부의 물적 현존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일은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오물을 흘리면 태어난 자본주의에서 민중들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이 권력을 갖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는 촛불 혁명이라는 광장의 정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인하여 죽어간 구의역의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발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에서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자본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에 낸 국정농단 사태, 그곳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수백만의 민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민중은 철학적이었다.

사회적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곧 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을 창출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을 정의로 보고 있다. 맑스의 진지한 고민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함께 존재함의 행복은 신자유주의와 상반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라는 사이렌의 소리는 새로운 불안한 계급들을 유혹하여 그 존재를 난파시키고 불안정한 삶으로 그들을 구속하며, 끝끝내 삶 자체를 침몰시켜버린다. 경제적 불안은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고 그러한 불평등은 불안한 자들의 불안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의 좌절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유대는 깨져 버린다. 이 시대의 철학은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바로 사회적 유대의 강화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상한 거짓말”을 대한민국에서도 확인하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의 방식에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했다. “창조경제”, “국민행복 시대”라는 고상한 거짓말, 먼저 이 고상한 거짓말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도시를 결속시킬 만큼 강력한 힘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끊임없는 고상한 거짓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약화하면서 보수단체를 이용하여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유 틀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반사회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자신의 안락인 이기주의, 타자의 고통인 악의를 버리고 타인의 안일을 원하는 동정(Mitleid)을 주장하였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루소 또한 동정(pity)을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유대는 비단 이성만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추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동정의 사회적 유대이다.
민주주의를 선점한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킨 국가의 모습에서 새로운 민주적 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증오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계열에 속하는 정념인 증오를 사회적 유대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라는 정념들의 양가성을 인정한다. 공동선에 대한 사랑, 하지만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증오이다. 촛불 혁명은 바로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회적 유대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할 것인가? 그 정념의 역량을 분출하고 시민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

결국 민주주의의 다시금 회복시켜 자본에 종속된 권력을 민중에게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참여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서 나타난 “보통 선거권”의 확대에서 드러나듯이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 주권(sovereign)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superus) 최고의 권력(power)이다. 그러나 현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불일치, 그 틈을 메웠던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에서 이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메워진 틈을 더 좁히는 일이다. 결국,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 이것을 모색하여 더욱 더 민주주의의 본래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결국 민중의 삶은 자원배분의 문제, 곧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갈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노가 투표를 통해 정부를 정당하게 해임하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민주주의에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반면에, 민주주의 질서에서는 갈등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촛불은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쟁점은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이다. 이는 마치 호남 vs. 비호남과 같은 지역적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대체하거나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민주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 대표성과 주권 원리의 불일치, 그 틈을 더욱더 메워 주체화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욱 더 자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에 계급 간의 불평등은 정치에 있어서 너무나도 강력한 정치적 갈등이므로 더욱더 지역을 넘어선 철저한 계급투표를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삶의 문제이다. 주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자원의 재분배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그야말로 민중(demos)의 권력(kratia)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촛불로 “죽 쒀서 개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민주주의를 탈(재)전유(exappropriation)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전유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될 민주주의라는 미래를 위하여, 자본이 선점한 민주주의를 재전유하기 위하여 민중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재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비전유(expropriation)할 때의 지배성의 위험을 너무나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플라톤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아라)

 

신이 침묵하는 시대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신이 침묵하는 시대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 이행의 시기
최근 이 나라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에 무려 200백만 명의 시민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정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그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단파 출신이라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연합을 파괴하는 그렉시트, 브렉시트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자는 불발로, 후자는 작은 미동에 그쳤다.
이 모든 사건들이 지진의 고리처럼 연이어 발생하니, 그 밑에 거대한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아직은 예진에 그치지만,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큰 지진으로 발전하게 될지 사람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과 여명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시대라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대는 설렘보다는 당혹감이, 기쁨의 노래보다는 오히려 절망의 비명이 더 크게 들리고 있다.
도대체 이런 대지진 끝에 어떤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예측은 어렵지만,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헤겔은 역사가 ‘규정적인 부정(die bestimmte Negation)’에 의해 지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앞의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의 시대를 지배했던 핵심 규정이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앞의 시대가 지닌 지배적인 규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다가오는 시대가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2) 신자유주의 경제적 위기
그렇다면 우선 신자유주의 시대부터 검토해보자. 대체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1986년 수립된 WTO체제는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 흔히 WTO체제는 자유무역 체제라 간주되며, 전 세계가 자유무역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찬양되고 있다. 소위 국가를 넘어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이 신자유주의를 미화해 왔다.
자유무역 체제라는 측면만 본다면 WTO체제가 굳이 그 이전의 국제통상체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굳이 신자유주의 시대로 새롭게 규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특별하게 규정한다면 그 이유는 WTO체제가 가진 다른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금융자본의 재갈이 풀렸다는 것이다. WTO체제는 개별 국가가 자본의 출입에 대해 가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다. 특히 국제 금융자본은 주로 개도국에게 강력한 금융개방을 요구했으니, 개도국의 자본시장 즉 증권과 채권시장이 국제금융자본의 새로운 먹이가 되었다.
그 후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 세계화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동안 은밀하게 활동을 전개하던 금융자본이 자신의 전모를 폭로하게 된 것은 그 뒤 20년이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였다. 이 사건을 통해 폭로된 금융자본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금융사기라고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금융자본은 대중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채권을 미리 할인해서 다시 자본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자본으로 다시 돈을 빌려주고, 이런 식으로 되풀이 하여 가공자본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악성채권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런 악성채권을 양성채권 속에 끼워 넣어 패키지로 팔아먹었다. 그 결과 엄청난 가공자본을 창출했으니, 모든 것의 목적은 엄청난 금융수입이었다. 이 금융수입은 제조업이 사라진 미영 금융제국의 부를 증식시켰다.
이 간단한 금융사기 뒤에는 여러 가지 부대조건이 있었다. 우선 금융자본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는 누구인가? 미영 금융자본은 이미 가진 자본으로 자국 내에서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자국 내에서 은행이 투자할 만한 성장가능성 있는 기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이 부동산 투자에 나서게 되자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되었다. 미영의 일반 대중들도 덩달아서 여유의 돈을 여기에 투자했고 나중에 가서는 금융자본으로부터 빚을 내서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 때문에 대중은 자신의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은행 역시 자신이 획득한 채권이 얼마나 악성인지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 금융자본은 대규모 이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소위 금융자본에 종사하는 노동자 역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자국의 제조업을 기피하는 동안 국제 금융제국의 국내 제조업이 몰락했다. 남은 국내용 기업의 일자리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니, 자국의 노동자를 스스로 기피했다. 그 자리를 찾아 이주노동자가 급증했다.
그럼, 미영 금융제국이 획득한 가공자본은 어디에 투자되었는가? 미영 금융자본은 자국에 투자를 기피하면서 개도국에 투자했다. 이런 투자는 제국주의 시대처럼 개도국에 직접 공장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투자는 주로 개도국의 증권 및 채권 시장이라는 자본시장에 투자되었다.
개도국으로서는 부족한 자본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자본이 저절로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개도국 자본은 쉽게 대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출산업을 육성했다. 수출산업 종사 노동자들은 성장하는 수출산업 덕분에 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국제 금융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수출 산업에 투자되는 동안 국내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하청기업화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소기업 제품은 또 다른 개도국에서 쏟아져들어 오는 값싼 제품들과 경쟁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금융제국과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소기업은 몰락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도국 자본이 일정 정도 성장하면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금융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다른 이웃 개도국에 투자되기 시작한다. 이제 개도국은 이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으로 자본이 빠져나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웃 개도국과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존의 수출 산업조차 무너지고 총체적 경제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3) 신자유주의 정치적 위기
결국 이 국제 금융사기는 언젠가 터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8년이 지났지만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 국민이 세금으로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충함으로써 일단 봉합될 수 있었으나 이제 위기는 국가로부터 착취당한 대중으로 전가되고, 경제적 장을 넘어서 정치적인 장으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브렉시트이고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다. 이런 정치적 사건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전개된 특이한 계급 대립구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대립을 일반화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전통적으로 대립의 축을 이루던 보수와 진보라는 틀이 깨졌다는 것이다.
보수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보수의 주류는 국제 금융자본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의 이단파가 등장했다. 이 파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자국 제조업의 보호, 이주노동 반대 등을 외친다. 이 이단파의 주요 지지 기반은 자국의 제조업의 부활을 꿈꾸는 몰락한 제조업 자본가 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역시 두 파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진보의 주류는 이미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의 빌 클린턴 등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하면서 주로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고급전문 노동자층에 기반을 둔다. 이에 대립해서 진보 좌파가 부활했다. 진보좌파는 몰락한 전통 제조업을 그리워하는 실직자, 남아 있는 국내용 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로 복지 담론을 중심으로 재규합된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과거 계급연합은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적 공화파와 노동계급의 연합이며 흔히 인민전선 또는 민주진보 연합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연합세력이 독점부르주아 세력과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계급대립 구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 연합이 깨졌다. 이제 새로운 계급적인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보수 주류와 진보 주류가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 옹호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반면 보수의 이단파와 진보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계급 대립구도에서는 진보좌파의 세력도 쉽게 보수 이단파의 주장에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는 아마 샌더스를 지지했던 세력이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도 한몫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브렉시트가 가결된 배경에도 노동당 좌파 즉 코빈 지지 세력이 노동당 주류인 블레어 세력에 대립해서 오히려 브렉시트를 암암리에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급 대립의 현상을 보자면, 그 바탕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변동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을 금융자본 중심으로 재편시켰다. 그 결과 국내 전통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해외로 이전했다. 금융자본 종사자에게는 초과이윤이 배분되었고 그들은 금융자본의 존속에 사활을 걸었다. 반면 전통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는 몰락하면서 이들은 차라리 인종적 색채가 다분하지만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자는 보수 이단파에 협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위기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몰락하면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지형도 변화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과거 근대 자유주의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자유의 개념에 기초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근대적 자유주의가 일정한 정도 사회현실의 법칙적 제약을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한 어떤 제한도 인정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는 파편화되면서 한 사회의 차원에서 어떤 법칙적 제약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무제한적 자유가 긍정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여러 철학적 이론이 그 사이에 발전되었다. 대표적이 논리가 바로 푸코나 데리다가 중심이 된 후기 구조주의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적 인식을 강조하면서 이 구조가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하나의 텍스트에는 다양한 구조가 중첩되어 있어서 서로 알레고리적인 관련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 진리나 가치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전기 구조주의에 남아 있던 칸트적 보편과학조차도 사라지고 만다.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이론에는 독일의 하버마스나 미국의 존 롤스가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인권에 기초하여 재구성하려 하였다. 사회적 제도는 모두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만 이런 합의가 공정하고 또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이론을 전개하고 롤스는 공정한 합의의 조건으로서 무지의 베일을 제시했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폭로되기 전에,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자유라는 개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선택은 다만 머릿속에서 그치는 자유가 아닐까?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변덕스러운 힘이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힘은 의지를 통해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 사유 자체도 지배하고 만다. 즉 욕망의 힘은 마치 그것이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원한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는 환상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런 한계는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유행하는 가운데 오히려 파시즘적인 폭력과 외적인 침략이 난무했다는 것은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라크 침략이 미국이 욕망이었으며, 백인 경관의 흑인 살해가 또 미국의 욕망이었다.

5) 박근혜 정권의 몰락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이란 신자유주의 경제적 붕괴를 알리는 경고이다. 이 경고는 신자유주의의 축이라할 금융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에서도 출현했으니, 그것이 곧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배 아래 한국은 소위 수출 산업 중심으로 또한 10대 산업(전자, 자동차, 조선 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수출 산업은 국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이윤율을 달성하기 힘들어졌다. 이미 국제금융자본은 한국의 증권, 채권 시장을 버리고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한국은 성장하는 중국산업과의 경쟁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에 밀어닥친 구조조정, 해고의 바람이 바로 그 증상이라 하겠다.
이런 수출산업의 위기는 노동자의 대량실업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정치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차적 현상이 지난 총선에서 영남수출산업 벨트에서 새누리당의 몰락이었다. 영남의 대체세력인 민주당은 수출산업을 옹호하는 노동자층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리고 수출산업 중심 발전에서 배제된 중소기업과 농민 역시 한미 FTA 이후 지속적으로 분노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국민의 당이 부상한 기반이다. 이 두 세력은 모두 재벌 중심 새누리당 세력에 반발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와 반대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상호 대립적이니 분열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지진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하나 거대한 지진이 폭발했으니, 그게 바로 이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라 하겠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는 엽기적인 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한 감정적 원인에 속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이다. 사태의 본질은 재벌이 생존을 위해 권력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그만큼 재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이 벌린 그 이상한 문화산업이란 것도 사실은 10대 수출산업의 몰락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호도하기 위한 권력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제 한계에 처한 수출산업은 이미 획득한 부를 달리 사용할 데가 없었다. 이 부는 거의 대부분 부동산으로 투자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대 부동산 거품은 생활비용을 앙등시켰으니, 이미 대중은 여름에 전기값조차 지불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런 여러 원인들이 겹겹이 충첩된 가운데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국민의 이런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라 하겠다.
차라리 박근혜 개인의 실정이나 최순실의 국정농단 때문에 박근혜가 몰락했다면 이는 일시적이고 정권의 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위기가 근본적으로 한국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순한 정권교체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6) 철학의 시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무도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 금융자본의 국제적 지배라는 체제는 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금융자본의 지배가 사라진 이후, 과연 브렉시트나 트럼프가 원하듯이 국제 금융제국은 자국의 산업, 제조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렉시트를 포기하고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체제 아래서 재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 포르투갈, 이태리는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때는 복지담론으로 우르르 달려갔다가, 또 한때는 안철수 식 공정성장이 각광을 받다가 또 한때는 다시 박정희 식 경제개발이라 해서 이명박, 박근혜를 향해 달려갔다. 그 어느 것도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없으니, 국민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는 과거 20세기 초 반복되는 경제공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시대와 마찬가지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시대는 바로 묵시록에 예고된 신이 침묵하는 시대이다. 이 침묵 그리고 그 앞에서의 절망감은 항상 파시즘의 온상이 된다. 이미 브렉시트나 트럼프를 보면 파시즘적인 인종주의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박근혜 정부 초기에 국민들에게 종북몰이라는 현상으로 이런 절망감이 표출된 바가 있다.
다행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 기회는 보수가 정권을 잡은 브렉시트나 트럼프와 달리, 민중이 주도가 된 혁명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남유럽 국가들처럼 다시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때야말로 다가오는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는 철학자와 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B급 문화와 B급 철학 [피켓2030]

아래 글은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최근 출판한 [B급 철학](알렙, 2016)을 읽고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보내온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고 싶으신 분들도 언제든 대환영이니 원고를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게재하고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도 드립니다.


권유리(건국대 건축학과 2학년)

2014년 1000만 관객을 이끌어낸 <겨울왕국>. 이 애니메이션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와 엘사의 테마곡 ‘Let it go’는 이미 아이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들의 이런 공감을 이끌어 냈는가? 이처럼 질문을 갖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첫걸음이다.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 집안일과 회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주인공 ‘엘사’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부르는 ‘Let it go!’는 그들의 억압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대신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엘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엘사’라는 캐릭터는 [피로 사회](한병철 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안 되는 ‘규칙사회’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성과사회’로 전환된 사회에서 느끼는 현대인들의 단절감, 우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감하며 때론 멀리 떨어진 입장에 서서 캐릭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신도 모르게 제시한다.

정해져 있는 결말과 흔한 스토리, 한회만 봐도 앞뒤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상속자들>을 보자. 안방에 앉아 동생과 보고 있자면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 속 상황에도 분개하며 “재는 왜 저래?”, “친아빠 맞아?” 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이런 단순한 질문 속에서 우리는 공자의 ‘효 사상’과 연결고리를, 또 ‘부의 추구’에 대한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아 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중매체를 접할 때 주체가 아닌 하나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은 기괴한 스토리와 암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수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과 이를 막기 위해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만화 속 캐릭터들에게 정의와 선(善)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언제라도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에 떠는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은 소수들에 의한 철저한 지배이다.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설정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며 계속해서 이 애니메이션을 찾는 이유는 일본과 한국인 속에 잠재되어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황제군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격의 거인>은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있는 피해의식을 자극한다.

지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동안 문화는 대부분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즉 부르주아 계층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는 기술, 미디어, 언론, 오락, 드라마, 영화 등의 발달로 문화는 훨씬 더 널리 보급되었고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산유물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클래식과 오페라, 전통음악은 고급문화로,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는 깊이가 덜한 문화로 무의식중 인식된다.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과 쇼펜하우어, 헤겔을 찾는다면 지적인 대화이고, 어제 저녁에 보았던 드라마를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수준 낮은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문화에 A급과 B급으로 나눌만한 척도가 있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문화는 다름의 차이일 뿐 더 우월하고, 더 낮은 문화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시뮬라시옹’의 프레임으로 우리를 이끌어 다양한 공감과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만화와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를 문화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따른다. 바로 ‘자기화’의 과정이다. 대중문화는 좁게는 자신을 넓게는 대중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이 거울을 바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왜?”라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문화는 필자의 말처럼 햄버거 포장껍데기처럼 단순 소비될 수밖에 없다.

8997779680_1

자세한 책 안내는 위 그림 클릭!

시위, 짧은 수기 [피켓2030]

정승우 작가


종로3가역에서 내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나는 동대문운동장에서 5시반쯤 5호선으로 갈아탔다.
5호선은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가족 단위도 많았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모습들이 여럿 보였다. 종로 3가역에 가까워질 쯤, 광화문역은 많은 인파로 복잡하니 종로3가역에서 미리 하차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곧, 종로3가역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많은 사람들 때문에 종로3가역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암묵적 줄을 지어 차례차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내 바로 앞에는 한 젊은 가족이 있었다. 여자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고, 남자는 큰 배낭용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고 있었다. 역 밖으로 나왔을 때도, 그들은 내 앞에서 계속 걸어갔다. 남자의 걸음은 꽤나 빨랐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뒤쳐졌다. 그러면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소리를 쳤고, 남자는 그제야 걸음을 늦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또 다시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앞만 보고 계속 걸었다.

광화문 사거리로 가는 대로에 나왔을 때, 이는 꽤나 진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넓은 공간을 사람이 걸어가는 것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걷는다는 건 꽤나 짜릿했는데, 불현 듯 예전에 했던 생각이 났다. 대학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매일 집 근처 공원에 산책을 갔었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2차선이었고, 나는 겁도 없이 중앙선 위를 걸었다. 물론, 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나는 그 2차선 위를 걷는 동안, 왜 차들한테 이 넓은 공간을 빼앗겨야 하는 건가 불만을 가지며, 언젠간 차가 하나도 없는 아주 넓은 도로 위를 걷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넓은 도로를 걸었다.
차도를 걷는다는 건 생각해보면 일종의 싸움이다. 차도라는 말은 그 자체로 사회를 드러낸다. 규칙과 질서와 복종. 차도라는 것은 차들만이 다닐 수 있는 도로이고 그 위를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것을 막는 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편의와 안전을 위한 규칙이다. 어쨌든, 사회에서 만들어진 규칙과 질서는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혼이 난다. 다시 말해, 벌이 뒤따른다. 규칙과 벌이 합쳐지며 복종이 있게 되고, 재미있게도 그 뒤에 탈주에 대한 갈망이 들어선다. 그 탈주는 마땅한 탈주일 수도 있고, 탈주 그 자체를 위한 탈주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든, 탈주는 짜릿하다. 고등학교 시절 수능을 준비하며 수많은 문제지를 풀었다. 어느 날은 그 문제지들을 앞에 두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슬펐다. 나는 검정색 볼펜을 가지고 펼쳐져 있는 문제지의 한 쪽 페이지를 마구 그어댔다. 그 페이지는 마구잡이로 그어진 선들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게 됐다. 그리고 나는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나는 탈주를 했던 것이다.
그 만큼의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위로 가는 그 차도 위의 나의 걸음은 은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 길 위를 걷고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여진 탈주는 이제 더 이상 탈주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하나의 새로운 길이 됐다.

20161126_180331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대개 삼삼오오였다. 큰 깃발을 들고 무리를 지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냈고, 활기들이 컴컴한 도로 위에 가득했다. 혼자인 몇몇도 있었다. 그들은 조용했다.
사진을 찍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었다. 아주 웅장한 파티가 있고, 그 파티는 초대 받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그 파티에 초대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초대권은 귀족들에게만 보내지고, 평민들은 그런 귀족들을 부러워한다. 아주 큰 파티가 있다. 그곳은 입장권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다. 하지만, 그 파티는 인간만이 참여할 수 있다. 그 파티에 참여한 이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에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때론 그 자부심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법이다. 이 파티에는 초대권이나 입장권 같은 것이 없으니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찰칵. 사람들은 그 모습을 서로 칭찬해준다. 그 옆을 조용히 지나가는 뫼르소.
4.19혁명, 5.18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역사가 된 이 날들은 교과서에 남았다. 그리고 나는 3인칭의 시점으로 그것을 들여다본다. 피가 그려져 있고, 정의가 적혀 있다. 그 위에 내려앉은 숭고함을 본다. 그리고 역사로 불릴지 모르는 한 시위. 나는 그 시위의 현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종로3가역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은 져있었다. 컴컴했고 그래서 촛불들은 더 빛나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손에 촛불이 들려있었다. 정의의 여신의 손에는 저울이 들려있고, 저항하는 이들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있다. 옳고 그름의 측량을 위해 저울이 필요하듯, 저항을 위해 촛불이 필요하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광화문에 갈 때 촛불을 사서 가야하느냐고 물어봤다. 친구는 광화문에 가면 다 있다고만 말을 하고 끊었다. 촛불을 사가야 하는 거 아닌가했던 내 생각을 무색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팔고 있었다. 문득,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그들을 쫓아선 안 된다. 사람들은 촛불을 필요로 하고, 때문에 촛불을 파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배고픈 누군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먹을 것을 팔아야 한다. 그 날 광화문 광장은 시위를 하는 곳이었다. 시위를 하는 데에는 필요로 하는 것이 많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것들을 팔아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촛불을 팔고, 사람들은 촛불을 산다. 그 촛불이 사람의 손에 들리면 어느 순간 그것은 저항이 된다. 그렇다고 장사꾼들이 저항을 판 것은 아니다. 촛불이 한 사람에게 들리는 순간 바로 저항이 되는 것은 또 아니다. 저항이 되려면 어떤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튼, 장사꾼들은 촛불을 팔기 위해 그곳에 온다. 그리고 그곳은 예수의 말대로 한편의 강도의 굴혈이 된다. 강도의 굴혈이 단 한 명의 장사꾼의 등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즉, 광경이 되어야 한다. 장사의 광경이 만들어질 때, 그 순간 강도의 굴혈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광경의 힘은 대단한 것인데, 촛불을 저항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 이 광경이다.

20161126_183129


광화문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거리 가운데에 무대가 설치돼 있고, 그곳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거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나는 틈을 비집고, 앉은 사람들의 무리로 들어갔다. 뒤에서는 서있는 사람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광화문 사거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앉아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광경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이 하나의 광경을 만든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촛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빛이 있었다. 한 곳에 모여진 수많은 빛은 하나의 빛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때, 저항이 드러났다.
광경이 된다는 것은 아주 신비로운 것이다. 부분들이 사라지고 전체만이 남는다. 마치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되듯이. 숲은 나무로 이루어져있지만, 숲이 보이면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이 모이고 한 개 한 개의 촛불들이 모여 그 광경을 만들었지만, 광경이 되는 순간 그 한 명과 그 한 개의 촛불은 사라진다. 언제, 무엇이 작은 것들을 하나로 묶어 광경으로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광경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고 인식된 광경은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광경은 물리적 거대함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단 한 명에 의해 광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대우주만큼이나 소우주도 존재한다. 다만, 한 명에 의해 광경이 만들어지는 것은 꽤나 힘들다. 그것은 낯설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한 명’들을 만나고 그들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본다. 그 시각의 변화가 그 한 명을 광경으로 인식하게 하거나 혹은 그 시각의 변화 자체가 광경이다. 나는 이 조그마한 광경을 찬양한다. 그것은 일상 그리고 매일의 변화이다. 큰 광경은 사람들이 그 광경이 벌어지는 장소를 벗어나버리는 순간 잊히기 십상이다. 아무튼 광경은 대단하고, 그 날의 광화문 사거리는 대단한 광경이었다.


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보이는 것은 다시 나무였다. 삼삼오오 모인 나무다. 삼삼오오라는 것은 굉장히 애매하다. 이것은 통합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개인은 차라리 어딘가로 새로이 들어가기 쉽지만, 일부의 무리가 어딘가로 새로이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이 집회가 통합이라기보다는 응집으로 보였다. 파편화들의 응집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이 파편화된 개인을 그대로 뭉쳐버린다고 하지만, 스펙타클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집합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적으로 통합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본래, 마구잡이의 모습으로 뭉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나로 보였던 그 빛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삼삼오오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른 삼삼오오의 빛이 있고, 서로서로는 너무나 남이다.

6시가 조금 지나고 광화문 사거리 가운데에 설치된 무대 위에서 누군가 사회를 봤고,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자유발언들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집회의 뚜렷한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금방 따분해졌고, 들고 온 파이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조금 있으니 다시 사회자가 올라와 여러 설명을 했고 모금 활동이 벌어졌다. 앉은 무리들 사이사이로 모금함을 들고 여러 사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지폐를 내밀었다. 내 옆에는 한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 아주머니도 팔을 뻗어 그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려고 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손모양이 이상했다. 가만 보니 그 손은 돈을 가리고 있었다.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아주머니는 아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쓰레기를 주우시는 분도 사람들 틈 사이로 지나다니셨다. 큰 쓰레기봉투를 들고 사람들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이 건네는 쓰레기를 그 안에다 담았다. 사람들은 그 분이 걸어 다닐 길을 알아서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모두가 선량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그 분이 지나가시다 실수로 잡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놓쳐 쓰레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아주 솔선수범하며 그 쓰레기들을 주어 다시 그 봉투에다 담았다. 나는 박수를 쳤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었다. 많은 농담들이 오갔고, 자유발언은 계속해서 진행됐다. 그곳에 피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대체 여기에 교과서에서 본 숭고함이 어디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커에서는 자유발언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내 주위에는 단지 삼삼오오의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삶을 아름답게 봐야할 필요가 없듯이 정의 또한 숭고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교과서도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더 가운데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숭고함이 여기에 쭉 있었네.’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길가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건물이 하나 보였다. 광화문 사거리에 붙어있는 그 건물은 우습게도 면세점이었다. 아니, 평소라면 우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만큼은 그 건물이 너무 우스웠다. 아니, 사람들이 우스운 건가? 집회가 우스운 건가? 사회가 우스운 건가? 소란스러운 그 광화문 사거리의 우리들과 그 옆에 우뚝 솟은 면세점이라니. 나는 그 건물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놓아두며 여기 있는 우리도 어느 정도는 뻔뻔하다. 자유발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면세점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내 바로 앞에는 우연히도, 지하철역을 나올 때 내 앞에 있었던 바로 그 가족이 있었다. 아니, 남편은 없고 여자와 아이 그 둘이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마 정의를 외치기 위해 사거리 중심으로 뛰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는 그를 놓쳤으리라. 나는 갑자기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탈주를 위해 온 그 곳을, 나는 다시 탈주하고 싶었다. 삼삼오오와 면세점 그리고 덩그러니 놓인 여자와 아이, 이 잡다(雜多)에 의해 나는 탈주하고 싶었다. 나는 뫼르소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찾을 수 없다. 뫼르소는 찾아내고, 기댈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내가 되어야 할 인물이다.

시간은 대략 8시정도였고, 사람들은 여전히 광화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반대로 걸었다.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다. 여러 번의 집회와 그 집회에 참여한 이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해주는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 이 모든 것들이 변화가 이미 일어났음을 보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나는 나의 집회를 열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혹시 나의 집회에 참여할 동료들을 찾을 수 없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수기이기 때문에, 나는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20161119_204307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원하는가? [피켓2030]

건국대학교 철학과 사회철학반 일동: 이동구, 이윤하, 서동기

2016년 11월 4일

 

2016년 11월 4일의 이른 새벽, 저희 사회철학반은 철학과 학술제를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작성을 중지하기로 했습니다. 학문과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 현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최순실-박근혜로 이어지는 국정농단 사태는 단순히 그들 개인의 도덕성과 판단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가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가치에 대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 사회철학반은 우리 사회를 향해 철학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고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 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출판, 1부 <세 변화에 대하여> 中 –

camel-692648_640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희는 질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 것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최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사건에 국민들의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핵심적 권한들을 최순실씨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지금 모든 분노는 최순실씨를,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올바르게 향하고 있을까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만든 대통령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잘 사는 삶은 곧 부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선택하였고, 이는 곧 ‘부자가 되는 것=잘 사는 삶’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들을 지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또한 ‘부자가 되는 것, 풍요로운 삶=잘 사는 삶’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삶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우리의 그 대단한 꿈, 청춘, 행복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공무원이 되기를, 안정적 직장을 갖기를 꿈꾸고 우리의 자식들과 친구들에게 성공신화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성공한 자들을 보십시오. 무당의 말을 받아 적고 있던 고시 출신의 청와대 엘리트 행정 관료들을 보십시오. 새파란 아이들 300명이 죽었는데도, 뉴스에 나오는 게 지겹고 노란리본이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혹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합니다.

누군가는 이 혼란한 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결단으로 거국중립내각을, 또 어떤 이는 다음 대선 주자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어쩌면 이 혼란을 수습할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 나타난 인물들이 만약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오늘의 절망적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좌절과 분노를 되풀이하고, 또 다른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가요?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구원자를 기다려왔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구원자가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보다, 구세주를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훌륭한’ 인물들에게 삶을 맡겨왔습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대단한 자유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자유란, 어떤 기업에 들어가든지 정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희망퇴직을 당해 치킨집을 차릴지 고민할 자유거나, 비정규직으로 내일의 불안을 견뎌내며 어떤 컵라면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어떤 스펙을 쌓을지 고민할 자유들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는 명분하에, 금전적 성공과 안정적 삶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요? 정작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하며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유밖에는 남아 있는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정념에 이끌리고, 정념에 예속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도 실상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통한 자유가 아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욕망을 통해서만 자유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방해하는 사소한 것들에 분노합니다. 카드를 거절하고 현금지불을 요청하는 업주,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이, 자꾸만 비싸지는 물가,  성심껏 써낸 자소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기껏해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업주와 알바생, 젊은이, 물가, 면접관들을 향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분노가 과연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초라한 분노가 생겨난 까닭은 작은 몫이라도 얻어내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알바생과 업주, 젊은이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바로 그 구세주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작은 일들에 다투고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땅한 몫은 탐욕스러운 구세주들이 차지해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당한 처우를 당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나약한 ‘개, 돼지’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탐욕스러운 구조를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모인 스포츠 경기장을 상상해보십시오. 멋진 경기와 훌륭한 기예를 펼치는 선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경기는 그런 스타플레이어들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일까요? 경기장을 진정으로 완성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하고 바라보는 관중들입니다. 관중들이 없다면, 경기는 남들보다 조금 특출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몸짓일 뿐입니다. 관중들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선수들은 인정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힘을 통해 구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성장과 성공에 동의했고 그들을 지탱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동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힘겹게 얻어낸 87년의 승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임을 제도적으로 확인해낸 업적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헌법은 우리가 국가의 주권자이며, 그 권력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시위를 한다고 해도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허무와 회의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시국을 구원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는, 또 다른 최순실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우리는 그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짐이 실리기를 바라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어떤 자유여야 하는지,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우리가 추구하고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상상합시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의 상상들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면 단호하게 저항해야 합시다. 다시, ‘상상력에게 권력을!’ (L’imagination au pouvoir !)

 communism-1295052_640

 

불의의 시대 [시대와 철학]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불의의 시대라 계절도 더딘가 싶더니 어느덧 겨울이 문턱이다. 예전 이맘때면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가난한 이들의 창에는 서리가 하얗게 서려왔다. 그러나 추운 계절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겨울이 깊으면 봄을 기약하는 낭만이 있었고 가난한 삶에도 따뜻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 어느 구석에도 겨울의 낭만은커녕 봄이 올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바로 푸른 기와집에서 귀신과 작당하는 너희 때문이다.

 

너희는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

옛날의 간신은 군주를 속였는데 지금의 간신은 백성을 속인다.

옛날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마소로 여겼는데, 지금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개돼지로 여긴다.

옛날의 무당은 뒷문으로 드나들며 주문을 외웠는데 지금의 무당은 정문으로 드나들며 연설문을 고친다.

옛날의 어두운 군주는 충신을 죽였는데 지금의 어두운 군주는 아이들과 농민을 죽인다.

 

이러니 지금의 간신이 옛날의 간신만 못하고 지금의 탐관오리가 옛날의 탐관오리만 못하고 지금의 무당이 옛날의 무당만 못하고 지금의 어두운 군주가 옛날의 어두운 군주만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는 너희의 말은 거짓이 아니더냐. 내말이 틀렸느냐?

 

자고로 나라가 망하려면 귀신의 말을 듣는다했다. 그래, 너희의 귀에 귀신이 소곤거리는 말은 들리고, 자식과 부모를 잃고 찢겨진 가슴, 피눈물로 울부짖는 민초의 모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두말 할 것 없다. 당장 너희 모두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그 자리는 백성의 아픔을 돌보기 위해 있는 자리다. 그러니 너희 같이 무능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귀신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이제 이 땅의 백성은 드러내놓고 너희를 죽이려 할 것이고 너희가 믿는 귀신조차 어둠 속에서 너희를 죽이고자 모의할 것이다. 신라 때만 최치원이 있는 줄 아느냐?

 

hocus-pocus-469282_640

상실의 절망을 환상의 횡단으로 [시대와철학]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10년간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집권한 뉴라이트 계열의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10년간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시대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는 기존의 보수주의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하며 대기업과 금융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이다. 뉴라이트의 이러한 면모는 MB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신탁적 표현인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말로 대변된다.

 

MB 정부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투기 붐이 만든 환상적 매트릭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초거대 인공지능이 광대한 컴퓨터 네트워크로 만든 가상 세계에 대한 명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트릭스는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전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을 배터리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설정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온 국민의 부동산 욕망이 MB 정부를 지탱하는 에너지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환상을 연장하고 싶은 노장년층과 보수층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매트릭스였던 것이다. 물론 인간 박근혜는 생물학적인 존재자로서도 아니며 검증된 사회적인 인물로서도 아닌, 영화 <향수>에 나오는 절대 향수와 같은 숭고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 영화에서 절대 향수는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즉, 스타 철학자 지젝이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한 ‘오브제 프티 아’(작은 대상 a)인 것이다. 지젝 식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박근혜는 도올 선생이 그렇게나 외친 스펙을 통한 지도자로서의 능력 검증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한계와도 무관한 환상적인 매트릭스가 된다. 물론 이러한 매트릭스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에 새누리당과 아울러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들이 지대하게 기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이 공모하여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위해 MB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에게 새로운 환상의 매트릭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대단히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이어서 이를 방어할 방패막이 필요했다. 그래서 종북과 안보는 현 정권의 마법적인 부적이 되었다. 이 부적을 내세워 국가의 공익과 국민의 안전은 뒤로 한 채, 권력의 사유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국가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심각하게 마비되고 현 정부가 극도로 무능한지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국민은 국가의 부재를 느끼며 ‘각자도생’이라는 웃기도록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서 옥시 같은 회사의 가습기 살균제로 소중한 아이들이 죽어가도, 폭스바겐 같은 회사의 연비조작으로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차별과 착취의 비정규직이 늘어가더라도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세월호 사건 때나 농민 백남기 님의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한, 궁극적인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이나 실무 책임자들도 유가족과 국민에게 슬픔과 책임감을 표하기는커녕, 책임 회피를 위해 비정한 태도로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드디어 최순실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가 터지면서 온 국민이 설마설마하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던 현 대통령의 트라우마적인 리얼한 민낯에 직면하고 말았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매트릭스에서 분리되어 인간이 배터리가 되어 매트릭스에 봉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이를 ‘리얼(실재)이라는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만나게 되는 진실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무의미한 폭력적인 야만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치유란 환상에서 벗어나 불편한 진실인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환상의 횡단과 아울러 프레임의 재구성이나 변형을 추구한다. 환상은 주체의 욕망을 유지하는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이란 리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란 환상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그동안 숭고한 대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본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환상을 제거해버리면 현실까지 상실되고 만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시대’는 이러한 상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환상은 제거가 되지 않는다. 횡단이 요구된다. 환상을 횡단하는 것은 헤겔 식으로 표현하면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원인대상을 먼저 상실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는 숭고한 대상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가 부정의 과정이다.

 

본래 상실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므로 슬픈 사건이다. 상실의 시대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어 국가가 더는 국민의 안전망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통치 권력의 무능이 드러나고 통치자의 권위가 사라짐과 아울러 국민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숨짓고 절망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상실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절망한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배신과 몰락을 경험한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상실을 순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의 부정성을 견디며 박정희 시대라는 환상을 횡단하고 환상의 기존 프레임을 다시 변혁하고 재구성해야 함을 지적한다.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박근혜 대통령과 그 리얼한 사막인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과 관련된 기존 제도와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라는 프레임에 지배받지 않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통치의 방향과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시대라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숭고한 대상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에 공모한 공모자들에 대한 준엄한 사법적 처벌과 역사적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과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존의 숭고한 매트릭스의 배터리인 우리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구화의 욕망, 상업화의 욕망, 부동산 투기의 욕망, 승자독식의 욕망, 차별적 구별 짓기의 욕망 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상실의 시대가 꼭 나쁘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의 뉴라이트적인 욕망이 공모한 환상의 매트릭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실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이랴! 이제 문제는 뉴라이트라는 욕망이다.

matrix-434036_640

진실은 저 너머에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Mulder, Where are you?” (멀더, 어디에요?)

“Scully, The Truth is Out There.” (스컬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요.)

 

30대 이상은 위 대사를 모를 리 없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The X-Files>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우리나라에서는 KBS가 수입하여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안방에 날라다 주었다. <The X-Files>는 FBI 수사관인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스컬리(질리언 앤더슨)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미해결 사건 등을 추적하는 X-File이라는 부서에서 겪는 일을 줄거리로 하는 TV 시리즈물로,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매회 오프닝에 스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문구이자, 남자 주인공 멀더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마주할 때마다 되뇐 말이 바로 ‘The Truth is Out There(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다.

2016년 8월 26일, 검찰 출두를 앞둔 롯데 그룹 부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수사 기관과 이를 감추고 싶은 또는 감추어야만 하는 자 간의 대결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모습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했던가. 그의 죽음으로 진실도 함께 묻혔다. 언론에서는 스스로 몸을 던진 망인을 두고 ‘충신(忠臣)이다. 의리 있다’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한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 하나만큼은 정말 깍듯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실을 묻어두고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행동을 미덕 또는 충성으로 여기는 사회, 또 그런 사람에게 뒤늦게 최대한 예우를 해주는 사회, 이것이 그 옛날 우리가 배운 동방예의지국의 실체인가 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 위에 서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지켜져야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지켜질 수는 있는 것일까. 또 누구를 위한 진실일까 등등. 위와 같은 언론의 태도로 보아 부회장이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해서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말 못하는 기계처럼 양심선언이라도 했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실제 사례가 있으니 굳이 위 사건을 가지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5년 노회찬 의원이 들추어낸 이른바 ‘삼성 X파일’과 2007년 김용철 변호사(당시 삼성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 도청 녹취록 ‘X파일’에 등장하는 ‘삼성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죄로 기소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는 이후 빵집(뚜레쥬르)을 운영하기도 했다.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했으며 이들의 비위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동방예의지국에서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예의 없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여정이다. 과연 어떤 진실이기에 그들은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면 그래서 필사적으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면 그런 진실 위에 쌓아온 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어 온 ‘진실’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지금 자신의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런 모순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는 바다에서 올라오지 않는 이유도 동방예의지국의 고유한 분위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누설하려는 자들이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현상은 세월호 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을 잃어도 참는 게 미덕이고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게 예의다. 덕성도 예의도 없으니 ‘진실한’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만약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론에서는 유족들을 유공자 수준으로 끌어올려 일제히 찬사를 보낼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롯데 사태에서 보았듯이 진실을 저 너머에 고이 묻어준 대가로, 통 큰 결단으로 사회를 살렸다면서. 2010년 천안함 사건의 진실도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2013년 1월에 제기된 18대 대선 부정 개표 소송을 떠안은 대법원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2014년 소위 ‘성완종 리스트’ 의혹도 흐지부지되어 몸통들은 처벌받지 않고 덮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진실도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기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건국절 논란도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1948년으로 정하겠다는 건 무엇을 위함일까. 또 누구를 위함일까.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뿌려졌기에 이를 모조리 거둬들이려는 것일까. 1948년을 나라의 기점으로 주장하며 진실을 수거하려는 자들은 일각에서 일제강점기에 항일과 친일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조짐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차단하려 한다. 1948년 이전 이 땅에 자신과 조상들의 행적에 관해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 팔 걷어붙이고 막으려는 것이다. 롯데와 삼성이 보여주듯,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보듯. 여기에 딴죽을 걸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매를 맞고, 진실을 수호한 자는 영광을 얻는다. 여기서 진실이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이 사실은 늑대였다는 점이다. 가해자이면서 가증스럽게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그들의 진실이란 그런 것. 전 국민이 알면 경천동지할, 그래서 지우고 싶은 이 ‘진실’ 위에 시멘트 반죽을 붓고 한 층이라도 더 올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진실 앞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모습은 저 멀리 재벌권력이나 정치권력에서 보듯 대규모의 조직적 차원으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장삼이사인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다를 바 없다. 대학 강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면 학교 측은 물론이요 동료·선후배 강사들까지 손가락질하며 그를 내친다. 내부 문제를 밖에 알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분란을 일으킨 죄로 핀잔을 듣고 왕따를 당한다. 웃기지 않은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준 동료 강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성원 전체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는데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를 욕하고 발로 차는 모습이. 그러면서 학교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치 쥐새끼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 같다. 쥐가 고양이에게 예의를 갖추는 이러한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진실을 폭로하는 쥐는 가혹한 뒤탈을 감수해야만 한다. 노회찬 의원이나 김용철 변호사, 세월호 유족처럼. 혹은 예의를 갖추고 진실을 지켰다는 공로로 자자손손 명예를 독차지할 수 있는 여정을 택할 수도 있다. 롯데그룹 부회장처럼. 이도 저도 싫다면 살아 있는 머리에 진실을 가둔 채 입 다물고 사회가 강요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진실’로 무장한 길을 걷다보면 우연히 ‘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진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거리 곳곳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며 어느 날 백화점이 붕괴되고 한강다리가 끊기기도 한다. 자신을 녹색으로 드러낸 4대강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모두 스스로 민낯을 드러내며 대국민 사기극임을 커밍아웃한다. 다른 쪽에서는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솔한 현실에 기초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강남의 10억 원짜리 집과 아무도 살지 않는 10원짜리 집은 무엇이 다른가. 그 집이 10억이라는 건 진실인가. 지진이 나서 무너지는 꼴을 봐야 그제야 깨닫는다. 10억짜리 집이나 10원짜리 집이나 다 같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먹고 자고 싸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 다 같은 집이라는 사실을. 경매에서 1억 2천만 원에 낙찰된 900g의 송로버섯은 정말 1억 2천만 원인가. 전쟁이 발발해 먹을 게 귀해지면 땅콩 한 알도 1억 2천만 원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발 딛고 서 있는 진실이란 고작 이와 같은 것이다. 지키면 지킬수록 모래성처럼 점점 약해진다. 이런 걸 지키겠다고 이 난리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사회,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요, 진실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진실을 수호해보지만 종국엔 무너지면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조리와 몰상식, 비합리와 오류로 가득한 볼품없는 그 민낯 말이다. 이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바로 곁에 있기도 하다. 진실은 아무 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국의 한 고속도로가 차량 정체로 꽉 막힌 적이 있었다. 교통경찰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결국 맨 앞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시범 운행 중인 무인차가 한 대 있었으니… 범인은 무인차였다. 무인차가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킨 탓에 고속도로가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 그렇다면 그동안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태 사람차가 속도를 위반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무인차가 ‘저 너머에 있던 진실’을 고속도로로 끌고 와 스스로 예의 없는 공익제보자가 된 것. 인정에 손발이 묶인 사람이 못 하는 양심선언을 인공지능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낸다. 이렇듯 뭔가 일이 터져야 그간 꾹꾹 눌려왔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무리 애써도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맴돌던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진실’을 들춰내 보여준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 세상의 토대가 되어 온 온갖 추한 ‘진실’을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할지 모른다. 양심선언은 인공지능의 태생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이와 같은 양심선언은 추한 진실과의 조우를 통해 인간인 나 자신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규정 속도를 위반한 운전자 각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저 너머로 진실을 던져보지만 동시에 내 안에 동일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듯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듯 보이지만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젠장,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필자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적 가게에서 쥐포, 껌, 사탕 등을 훔친 적이 있다. 몇 번 있다. 당시엔 CCTV가 없던 시절이라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다. 당시에 누가 이를 알고 가게 주인에게 이른다고 했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물어뜯어서라도. 마치 롯데처럼, 삼성처럼, 정부처럼, 학교의 비정규직 강사들처럼, 황우석 박사처럼. 진실이 밝혀지면 무너지는 나의 모습과 대면해야 하니까. 나 역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puzzle-1152792_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