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강사수업에 수업료 차등적용으로 대학의 기만적 구조 드러내자[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3

교수와 강사, 수업료 차등적용으로 대학의 기만적 구조 드러내자[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3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호에 이어서

숭고한 이상으로 수업하고 시궁창같은 현실에 좌절하는 대학강사

셋째, 강사들은 자신들의 허위의식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강사들은 머리는 하늘의 별을 향해 있지만 몸은 시궁창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분열된 존재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정신은 한 없이 숭고합니다. 하지만 강의실을 벗어나는 순간 품위와 명예를 존중하던 그들은 한없는 굴욕감과 분노를 곱씹을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에게는 이상이 있어. 전임만 되면 이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벗어던질 수 있어”라고 자위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좌절될 때 그들은 또 다시 허탈해하고 좌절하다가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 시궁창 같은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교수들의 수족 같은 노예 역할을 하고, 또 때로는 교수나 재단이 채용을 이유로 비정상적인 금품을 요구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합니다. 생계를 위해 지식 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고, 오전에는 이 도시 오후에는 저 도시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다니며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보장받기가 힘들고, 그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면 연구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나중에는 학자로서 자긍심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미 수많은 강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아가면서 상아탑을 쌓는 무덤들이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오늘날 강사 문제는 개인의 역량과 크게 상관없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대학교육의 40% 이상을 담당하고, 수많은 연구 단체, 학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력의 60-70%가 강사와 무늬만 교수인 강의 전담, 비 정년 트랙 등 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의 대학은 그들을 사회적 루저(Loser)로 취급하고 굴욕감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의 강사들과 연구자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러한 수탈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을 꾀하려는 대학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피해 당사자인 대학 강사들이 이런 현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전국단위 토론대회 3연속 우승 – 수업의 질, 강사와 교수 간 크게 차이 없어

대학 안에서 가장 착취 받는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 들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과 허위의식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강사문제, 대학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나는 강사’라고 밝힌다고 해서, 아니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학생들이 강사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이미 학생들도 강의하는 선생이 강사인지 아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뿐이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습니다. 학생들이 강사의 수업을 들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수업료를 차별 지급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혜택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운동이 현실화된다면 강사들은 이 왜곡된 대학 현실 속에서 학생들을 참으로 위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저임금과 신분차별 속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과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지 강의실에서 만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저임금이나 신분 차별과는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배우려는 열의와 가르치려는 열정으로 만나는, 순수한 영혼과 영혼의 불꽃 튀는 만남이 있을 뿐입니다. 필자가 강의하는 대학의 토론 관련 수업에서는 수강생들이 전국 단위의 토론대회에서 내리 2년간 3연속 우승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습니다. 강사냐 교수냐는 수업의 질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야바위꾼 같은 대학들이 이런 순수한 열정을 악용해서 현재의 착취구조를 영속화하려는 기도에 있고, 이 착취 구조 하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역량을 가진 듯 당연히 이 착취의 수혜 물을 향유하고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방관하는 교수들에 책임이 있습니다.

 

대학교수, 동료 강사의 부당한 차별에 대해 분명한 책임 있어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부당 차별을 받고 있는 동료 학자이자 강사들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한정된 파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현저하게 많이 가져간다면 결과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강사들의 비참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대학의 왜곡된 착취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한다면, 이 구조의 수혜집단인 대학교수들도 큰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운동은 합리적인 시장 논리에 의해 교수들 역시 현재의 수탈 구조 하에서 그들 역시 수탈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수혜 집단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비판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양심적인 소수의 대학교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들의 양심과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들이 누리는 향유와 특권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재 대학들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도덕과 불공정의 하수인이고 협력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유지·존속한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식민지 체제의 안정과 유지에 성실하게 노력한 자들이 그 체제 하에서 고통 받던 대다수의 주민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고액 연봉, 그들이 안식년을 가서 편안하게 즐기는 여유, 그들이 우아하게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며 하는 작업의 이면에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강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점철된 고통이 있습니다. 때문에 교수들 역시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작금의 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학 사회에서는 강사들을 동료 학자로 존중하지 않고 한낱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는 철부지 부도덕한 교수들도 많습니다.

 

대학의 건물은 우후죽순 늘었지만 대학발전의 한 축인 강사를 위한 공간은 턱없이 부족

지금까지 강사들은 법적 지위를 개선하고 강사료 문제를 현실화시켜 달라고 부단히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강사들의 비참한 현실만을 부각시켜 그들을 루저로 만들고 시혜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강사 문제는 결코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교육의 정상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행적이고 불공정한 현실이 온존함으로써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에게 가고 있고, 대학의 미래, 사회의 미래, 나아가서는 국가의 미래에도 그대로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대학의 기형적 구조의 진실을 밝히고 대학을 혁신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왜곡된 구조의 원인 제공자라고 할 대학들이 실제로 얼마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행태를 일삼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태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도덕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대학의 건물은 30년 전에 비해 엄청 늘어났지만, 강사들에게는 최소한의 연구와 휴식 공간마저 허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의 고도성장의 당당한 주역이라고 할 강사들의 흔적은 대학 발전사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무한 희생과 무한 고통만 강요당하는 소모품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과 행복도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강사들에게는 방학 중에는 연구를 위해 필수 요소인 도서관 출입과 접속도 끊어버리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을 헌신짝 취급하는 대학들이 과연 이 땅의 인재들의 미래 교육을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학의 교직원들도 이 기막힌 현실의 부역자이자 수혜자라는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주체였던가를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더는 이런 현실을 관행으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부정의와 부도덕이 온존해 있는 한 대학은 결코 자유를 외칠 수 없고, 진리와 양심의 상아탑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대학사회는 이제 비판의 화살을 자신들의 심장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대학 사회의 힘 있는 주체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은 이 땅의 경제 발전을 위해 귀중한 인재들을 배출해왔습니다. 또 사회 민주화를 위해 대학 사회의 수많은 주체들이 용감한 목소리를 내왔고 헌신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왔습니다. 이 땅의 강사들은 이 모든 공로와 희생에 절반 이상의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쌓아 올린 대학이 지금은 사회 어느 곳보다 극심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을 감행하는, 가장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하자!”는 우리의 운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시작은 미미하겠지만, 대학과 사회의 도덕적 공분과 정의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강사 여러분들, 대학생 여러분들, 학부모 여러분들,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애쓰는 이 땅의 모든 양심적 시민들, 우리들 스스로가 이 들불을 당기는 횃불을 높이 치켜듭시다!

 

하나,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강사냐 교수냐) 실명제를 도입하자!

 

하나, 직급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지불하자!

 

 

-끝-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부도덕한 자본주의 대학의 폭리[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2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부도덕한 자본주의 대학의 폭리[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2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호에 이어서 게재합니다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프레시안사진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프레시안사진

대학들은 오랫동안 이런 부당행위들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해 왔습니다. IMF 이후 우리 사회 곳곳이 생존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도 한국의 대학들, 특히 메이저 대학들의 양적인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들어온 학생들은 4년 내내 공사 판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소음에 시달리며 학습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 대학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대학이 이런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학부모들의 고통과 저렴한 강사료로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강사들, 그리고 용역 회사로 넘겨진 학내 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들의 간판급 연구소들도 실정을 알고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대학의 모든 연구소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앵벌이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연구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강사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이 국가 기관이나 기타 등등에서 연구비 지원받는 프로젝트를 따와야만 돌아가는 형태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연구원들은 앵벌이들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서 연구 프로젝트를 따와야 합니다. 대학은 그 수수료를 펀딩 받아 운영하고, 그 연구 업적을 대학의 이름으로 자랑합니다. 대학의 대부분의 연구소들에 대학 자체적으로 지급하는 유급 연구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앵벌이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강사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대학들은 강사들을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아무런 통보 없이도 해고해버리고 대체품을 찾습니다. 강사들은 수 십 년 동안 한국 대학들의 고도성장의 가장 큰 역군을 담당해왔으면서도 그들의 공적이나 흔적은 대학의 발전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성장의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직 사회적 루저(Loser)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시장을 감시 감독해야할 공정거래 위원회 같은 교육부는 오히려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하면서 대학의 그런 관행들을 오랫동안 방치하고 두둔해왔습니다. 만약 소비자들이 그 내막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당연히 분노하고 그런 부당거래의 관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은 오랫동안 학생들의 순수한 구매 욕구를 이용해왔고, 연구와 강의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너무나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딸깍발이 서생(書生)들의 처지를 악용해왔습니다. 멍청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전 긍긍할 뿐이었습니다. 몇몇 용감한 강사들이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몸짓은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곳곳에서 문제제기도 하고 항의도 해봤지만 판매업자들이나 관리 감독청들은 외면하고 묵살해 왔습니다. 너무 큰 폭리가 그들의 도덕 감정을 막고 있기 때문에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제안을 해보고 싶습니다. 소비자가 알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시장이 자율적으로 적정 가격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것, 불공정한 대학에서 분배 정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죠.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모든 상품은 원산지 증명이라는 것이 따라가고, 하다못해 음식점에서 먹는 고기 한 점, 반찬 한 가지에도 호주산인지 칠레 산인지 아니면 중국산인지 밝혀야 됩니다. 원산지 증명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때 광우병 우려로 미국 산 소고기와 관련해 촛불 시위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는 대학의 강의에서도 강사들 강의인지 교수들 강의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주 저렴하게 고용한 강사들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당연히 저렴하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교수들의 강의에는 고 비용의 대가에 대해 당연히 높은 수준의 수업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대학의 기만적이고 야비한 술책이 불공정하고 부도덕하게 실행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산 타령을 하고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대학 당국과 교육부의 요구대로 투명하게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시장에서 부당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착취와 폭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모순이 누구에게 전가되는지를 아주 투명하게 시장 논리대로 밝혀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실라버스 직급 공개는 원산지 증명과 원가 공개를 요구하고, 차등 구매 비용에 따른 차등 지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당연한 권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요구 운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첫째는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을 공개하고 수강료를 차등화하자고 했을 때 그 혜택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인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앞서 예로 든 중국산 덤핑 물건과 달리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사들의 강의 상품은 상품 자체의 질(質)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質) 좋은 똑 같은 상품이 1/10 가격도 안 되게 팔릴 수밖에 없는 이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교육 상품의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구매한 상품이 떨이 덤핑으로 구입한 상품이고,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한 상품이라는 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대학들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말하자면, 법 이전에 상 도덕적으로 불공정하고 부당하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커피나 양탄자의 생산과정에서 아동 노동력이 심하게 착취되는 현실을 알 때, 혹은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걸치는 값비싼 모피가 동물의 고통과 희생이라는 것을 알 때 소비자들은 분노하고 불매 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와 비슷한 행태가 대학 안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가해지는 현실에 대해 대학생들도, 그리고 비싼 등록금으로 등골이 휘는 학부모들도 똑 같이 분노하고 또 개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대학 구조상 강사들이 수탈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이전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기형적인 착취 구조 하에서 강사들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똑 같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한 편입니다. 현재 자녀 1인을 4년제 대학 졸업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1억 이상이 소요됩니다. OECD 국가들 중 네 번째로 높은 한국 대학의 등록금은 가계 부채의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싼 등록금은 앞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불공정하게 책정된 것입니다. 가계부채가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현실에서도 적립금과 부동산을 산처럼 쌓아 놓고 있는 대학들이 정작 학생들의 비싼 등록금과 강사들의 저임금을 외면하는 이 기형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값 등록금 운동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요구임을 드러내줄 것입니다.

둘째, 이 운동은 무엇보다 대학들의 부도덕한 정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에게 법적 교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합니다. 아무런 법적 자격도 없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게 할 수 있을까요? 강사들의 강의 역량이나 학문적 능력이 미덥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대학들은 넘치는 박사 인력으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를 강사 자격의 기본 요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강사 문제가 개인의 학문적 역량과 별 상관없이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 이제는 오랜 경력 강사가 강사로 정년퇴임 한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법적 자격 부여를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1/10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용하기 위해서, 강의 외에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때나 저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맹자(孟子)는 제 아무리 좋은 명분과 허울을 두르고 있는 자들이라도 인(仁)을 해치는 자는 그저 도적에 불과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한낱 강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은 대학 강사들을 싸구려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고 착취함으로써 인(仁)을 해치는 도적이 되었고, 강사와 교수 간에 불평등과 신분차별을 구조화함으로써 의(義)를 해친 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한국의 대학들이 이런 부도덕과 불공정을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제 그들을 대학 도적이고 대학 강도로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보아도 어떻게 이런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일이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상아탑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국가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는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무한경쟁시스템에 있었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5

‘국가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는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무한경쟁시스템에 있었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5

김선이(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정독도서관 사서)

 

얼마 전, 큰 충격을 준 세월호 사고(2014.4.16)는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 국가 시스템의 구조적인 부조리가 그대로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희생자 가족뿐만 아니라 결코 잊지 못할 국가적 재앙으로 국민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세월호 사고는 분명히 인재였다.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경영체계’와 자본가와 국가가 결탁한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사고 수습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태도를 보면 자본주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대대적인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를 꾸리고 국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함께하며 ‘노란 리본달기 ’등으로 자발적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사고원인에 대한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해양수산부를 폐지하는 등 저급한 대중요법을 처방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이러한 상황에서 6.4 전국동시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세월호 사고를 선거 공세나 정쟁의 소재로 삼아 정치적 이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하는 자세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세월호 사고는 국가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국민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진도 앞바다에서의 세월호 침몰 사고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꽃망울들아, 너무 미안하다.’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 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김영곤 선생님, 안녕하세요.

불철주야, 풍찬 노숙하면서 이 땅의 대학 강사들을 위해, 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 내외분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 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은 유례없이 수탈당하는 집단이라 생각됩니다. 21세기 현대판 지식 노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고급의 노동자이면서도 가장 저급한 대우를 받고 있고, 부당 처사에 대해 아무런 항변도 못하는 무력한 집단이지요.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전임 교수들 못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대학 교원이라는 최소한의 법적 지위도 부여받지 못한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외형적 성장만 일삼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습니다. 재단의 소수 인물이 이끄는 그 괴물은 대학교수와 교직원들을 하수인으로 부리고 있지요. 그들은 하수인이면서도 기득권자라는 이율배반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요. 반면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들은 이 거대 괴물의 피 수탈 집단이고요. 학생들은 이제 4년 동안 교육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뜨내기 고객들로 취급될 뿐입니다. 대학 강사와 청소직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대 기계를 돌리는 부품이자 소모품 취급도 못 받고요. 대학 강사들은 실질적으로 대학 교육의 40%이상을 담당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무자격자입니다. 똑같이 학위를 받고 똑같이 연구를 하고 똑같이 논문을 쓰면서도 시급 알바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항의도 못하고 경력 인정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작금의 부당한 강사제도의 개선을 위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이 제안은 강사의 현실적 지위 뿐 아니라 대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반값 등록금 운동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라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 실명제를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와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 등록금을 차등 지불하자는 겁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값싼 물건과 값비싼 물건에 대해 똑 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 놓인 논리는 현재와 같은 대학의 기만적이고 부도덕한 수탈 정책을 폭로함으로써 교수와 강사 간의 형평을 찾자는 것이고, 대학교육에 기여한 강사들의 정당한 노고를 인정받자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비싼 등록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정당한 수업권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다음 세대의 학문을 담당해야할 젊은 연구자들의 학문적 전망은 더욱 더 불투명하고 불안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현재의 강사 제도와 강사료가 합법적이라고 강변하면서 후안무치를 일삼고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정의와 형평의 문제이고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입니다.

현재 대학교수 1명을 채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강사10명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7천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 교수와 시간 당 5만원의 강사가 주당 9시간을 강의하는 경우를 단순 비교해보지요. 강사의 경우는 45만*4=180만원이고, 1년을 똑 같이 강의한다고 할 경우 강사들은 한 학기 4개월이므로 1년이면 8개월이고, 따라서 1,440만원이 됩니다. 매학기 강의 확보의 불안에 시달리는 강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강사는 거의 A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의 경우 7천만 원 연봉 외에도 연구실 운영비용, 6년 강의 후 7년째 주어지는 안식년 비용, 연금과 퇴직금 정립,방학 중 연수비용, 4대 보험 그리고 입시철마다 떨어지는 특별 수당 등까지 합친다면 거의 1억4천만 원 정도로 계산해도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강사1인을 고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거의 10배 수준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트위터에 프랑스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명문 이화여대에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한 모 강사의 11년 간 총 수령액이 7천만이었다고 하던데, 이는 해당 대학 교수 1년 치 연봉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강사 10명이 교수 한 명 수준도 안 된다는 계산이 틀리지 않죠. 명문 사립대학이 이 정도이니 다른 대학은 이보다 못하면 못하지 결코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10배 이상의 수입 차이가 나는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격차는 경제적인 것뿐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경제적인 차이, 봉건시대도 아닌 21세기의 대학에서의 신분적 차별이 더 심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 차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회사의 평사원과 CEO의 연봉이 같을 수 없겠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봉 격차가 커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적용하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의 한 맺힌 구호가 나올까요? 그런데 이런 격차도 사회에서는 평균적으로 70%이고, 더 크게 잡아도 50%수준을 넘지 못하죠. 만약 특별한 사유가 없이 그 이상이 된다면 그것은 착취이고 수탈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사회에서는 똑 같은 학생들을 데리고 한 학기, 1년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똑 같은 강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무려 10배 이상의 임금 차별과 신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과 강사들의 임금 산정 방식이 다르고,또 교수들은 과 행정, 학교 행정 등의 일도 담당한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행정과 관련된 일이 현재의 임금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교수들의 행정과 관련된 일은 보직과 출세에 도움 되는 것이고, 또 연봉 외 수당도 받는 일입니다. 그것이 강사들의 현저한 부당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정도 임금 차별은 사회에서는 시급 알바 생 하고 임원들의 차이에서나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일하는 방식이나 내용, 그리고 책임 정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전혀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도 동일 대학 학생이고, 강의 내용의 수준도 강사라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들은 교양과 관련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 관리도 힘들고 성적 처리나 리포트 피드백 등을 감안한다면 소규모 전공 강의를 운영하는 교수들의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어떤 이들은 전공과 교양 수업 간에 강의 준비와 운영상의 난이도가 크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 강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저학년 교양 강의이고 그 다음이 전공 강의이며, 끝으로 대학원생들 데리고 하는 세미나 강의가 가장 쉬운 강의라는 사실은 대학 사회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런데도 강의 평가 기준을 똑 같이 적용하고, 교수들과 달리 평가가 나쁜 강사들은 바로 해고해버립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강사로 생각하고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상 학생들에게는 강사나 교수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다만 강의 내용이 좋고 들을만한가 또 들어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인가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강의와 관련해서는 임금 수준에 관계없이 똑 같이 강의하고, 대학도 유독 강의와 관련해서는 교수나 강사를 똑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하고 관련된 강의 및 평가에서는 교수와 강사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임금과 신분상에서,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큰 차이와 차별이 존재할까요??이렇게 한 치의 차이가 없음에도 교수와 강사 간의 연봉 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일 노동에 대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차별,?부당하고 불공정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 입장에서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구입한 교육 상품(?)이 이렇게 불공정하게 가격이 책정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어렵사리 구매의 자격을 얻어 고급의 매장에서 고급의 브랜드가 붙은 상품을 비싸게 구입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구매를 하는 과정은 너무 경쟁이 심해 눈물겹기도 합니다. 해서 구매가 확인되는 순간 학생들은 자신들의 현명한 결정에 대해 감격해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매한 상품이 하나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정상 가격으로 책정된 상품이지만 다른 하나는 전혀 비상식적인 방식으로(법적인 교원 자격도 부여하지 않고 달랑 4개월짜리 계약서 하나를 가지고),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집한 상품에다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 상품인 것입니다. 좀 거친 비유를 든다면 부도 직전의 회사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든 중국산 덤핑 물건을 뒷골목 시장에서 구입 해다가 신세계나 롯데 등의 고급 백화점 매장에서 고급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매업자인 대학들은 무려 1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처에 널려 있는 이처럼 싸구려 덤핑 물건들을 값싸게 사들여 자신들의 매장의 거의 40%이상을, 더 심한 곳은 70%까지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예, 거친 비유이겠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의 질(質)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격 면에서는 중국산 싸구려 수입품이나 부도 회사의 덤핑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육부는 점차적으로 강사 비율을 줄이고 교수 비중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교원 비율에 따라 대학 평가와 지원을 달리하겠다고 압박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법의 달인들인 한국의 대학들은 비 정년 트랙, 강의 전담 전임 계약직 교원들을 대거 뽑아 들여 이전에 강사가 담당하는 강의를 비슷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강의를 떠넘기고 있습니다. 명색이 대학의 전임 교수인데 월150만원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울의 종합 대학들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경우는 2학점짜리 80명 단위의 수업을 8개씩이나 강의하면서도[한 학기에 80*8=640명] 연봉이 3천이 되지 않고, 그것도 2년 지나면 재계약을 빌미로 용도 폐기시킵니다. 그러니까 대학의 입장에서는 시간 강사들에 들어가는 정도의 비용으로 무늬만 전임들을 고용할 수 있으니까 교육부 평가도 높이고 지원책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손 안대고 코푸는 야바위꾼들의 사기행위와 같은 이런 편법을 이용해서 대학들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행태를 진리의 상아탑 속에서 부끄럼 없이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교육부는 전임 비율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달리 한국의 대학에는 초빙, 외래, 대우, 강의 전담, 비정년 트랙 등 당사자들도 헷갈리는 직급이 많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시간 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이런 원천적 착취와 수탈 구조 속에서 오늘 날 한국 대학에서 강사들, 비 정년 트랙 전임들,계약직 강의 전담들의 강의 비중은 40%를 훨씬 상회합니다.) 이런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취하는 폭리를 그들의 탁월한 장사 솜씨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의 탁월한 솜씨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취이고 협잡일 뿐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사정이 아니라면 모든 시장가격에는 상품과 관련한 어느 정도의 공정 가격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다른 진열대에 있는 똑 같은 상품들에 비해 무려 1/10일 수준으로 구입해서 똑 같이 판매한다면 이것은 상도덕 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사기이자 기만입니다. 그것도 고급 백화점들과 같은 대학들이 말입니다. 만일 신세계나 롯데 백화점에서 이런 상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여론의 질타와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마트에서 직원들의 노동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불법 감시를 하다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마트에 대한 사회적 비난으로 인해 최고 책임자까지 앞장서서 사죄하는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법 이전에 도덕적 공분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가 그런 불공정과 부도덕을 묵인할 만큼 불감증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성과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는 이런 야바위꾼들의 협잡과 같은 행위들이 지금까지도 낯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학들과 그 부역자들이 과연 사회를 향해 비판과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 다음에 계속됩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不孝)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4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不孝)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4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수 백 명 고등학생들이 부모에게 불효를 범했다. 부모 가슴이 숯처럼 타 들어가게 했다. 부모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팠다. 국가는 제대로 저들의 불효를 막지 못했다. 선거개표조작으로 대통령 자리 훔친 박근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구분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박성미 감독이 말한 것처럼

‘돈은 걱정하지 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세월호에 탄 사람 모두를 구하라!’

박근혜가 이리 말했으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군함 몇 척, 다이빙벨, 바지선, 크레인을 모두 동원해서 사람들을 구했을 것이다. 군함 몇 척이 동원 되었으면 세월호에 밧줄을 매달아 약 1.6키로 떨어진 육지로 세월호를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책임 묻겠다. 엄단하겠다.’ 이런 말을 해서 오히려 현장에서 구조하는 공무원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겁먹은 공무원들은 구하는 하는 시늉만 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윗물이 지혜로울 때 아랫물이 속 편하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

우리 국민 한사람을 못 지켜낸

노무현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 박근혜가 했던 말

(알카에다에게 김선일 씨가 피살당했을 때)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몰락하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3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몰락하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3

 

김성우(ⓔ시대와철학 편집위원장)

 

세월호 침몰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민낯이 드러났다.?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민주는 언제나 실현되는 이념이 아니라 구실이나 핑계일 뿐이다.?자유는 시장과 재벌의 자유로 전락하고 민주는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대로 부여된 투표권으로 나타난다.?언론의 자유는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고 관심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지금 우리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의 모든 노력과 성과를 뒤로 하고 자유와 민주의 장애물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에 포퓰리즘이 더해지면 대중독재의 파시즘이 출현한다.?자유 민주주의는 선거가 경쟁적이지만 파시즘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공세적이다.?파시즘은 이를 위해 언론과 방송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극도로 이데올로기 작업에 매진한다.?예를 들어 나치 정권의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독일인들에게 닥친 패배,?경제위기,?도덕적?‘타락’과 같은 모든 불행 뒤에는 단 하나의 악의 원인이 있다고 단언한다.?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원인은 유대인의 음모이다.?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인 유신 정부에서도?‘빨갱이의 음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미국에서도 전후에는 매카시가 부추긴?‘공산주의자의 음모’가 부시 정권에서는?‘테러리스트의 음모’가 존재했다.

이와 같이 사회적 불행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언어(순수한 시니피앙)가 바로 라캉과 지젝이 명명한?‘누빔점’이다.?지젝은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에서 프랑스의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이 된?‘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이 누빔점의 효과를 언급한다.?누빔점은 소급효과를 통해 혼란과 우연의 역사에 의미와 필연성을 부여한다.

1898년?8월?30일 프랑스 정보부(우리나라로 말하면 국정원)의 새 책임자인 앙리 중령이 체포된다.?그가 드레퓌스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기 위해 하나의 비밀문서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그는 다음날 구치소에서 자살했다.?이로써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리고 무죄가 선언될 분위기였다.?이때 하나의 신문 기사로 인해?‘기적적 반전’이 일어난다.?그 기사의 제목은?‘첫 번째 피’이고 글쓴이는?30세의 젊은 무명작가 샤를르 모라스였다.?그가 한 것은 보충적 정보를 제공한 것도 아니고 반박도 제시하지 않은 채 모든 사건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든 전체적인 재해석뿐이었다.

모라스에 의하면 자살한 앙리는 추상적인 정의보다 애국적 의무를 다한 영웅적 희생자가 된다.?유대인의?‘배신 집단’이?‘날조가 아닌 위조와 같은 작은 사법적 실수’를 물고 늘어져 프랑스의 삶의 기반을 파괴하고 군대를 무력하게 만든 것을 참지 못한 앙리는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소소한 애국적 잘못한 저지른 것뿐이다.?이제 사건의 초점은 판결의 정의나 합법성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나라의 국운이다.?결과적으로 진정한 희생자는 억울하게 기소된 유대인인 드레퓌스가 아니라?“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건 고독한 애국자인 앙리 자신”인 것이다.

모라스에 의한 새로운 누빔점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적인 논쟁의 장이 다시 구성되면서 여기에서 정의와 법치는 사라지고 애국심과 매국적인 음모만 남게 된다.?진보 진영은 분열되고 보수 진영은 단결한다.?보수적인 포퓰리즘이 등장하고 반유대주의가 증가한다.?이데올로기의 장에서 이렇게 누빔점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다.?이러한 모라스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유신 잔당의 공안세력과 국정원이 주도하여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종북 세력의 음모’라는 새로운 누빔점을 지난 일여 년 동안 열심히 세우려고 노력했다.?이들의 노력은 성과를 거의 거두는 듯했다.?올해?6월 지방선거에서 야당도 안보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월호가 침몰했다.?공안세력이 장악한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여전히 종북 세력의 음모에 휘말려 청와대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열을 조장한다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세월호 침몰은 단순한 사고나 실수가 아닌 기존의 이데올로기 장을 뒤집는 폭발력이 있는?‘사건’이다.?사건이란 바디우가 말하듯이 기존 존재 질서에 균열을 내는 진리의 도래이다.이 진리는 불편한 진리이다.?이번 사건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봉된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시스템의 문제점과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라는 화장 안 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그렇게 애써서 작업한 공안세력이 역공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사건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살 길은?‘국가개조’가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에서 공안세력을 내쫓고 감세와 규제쳘폐의 기조에서 벗어나 공약대로 경제민주화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즉,?정권의 혁신과 정책의 기조의 환골탈태가 필요한 것이다.?만약 박근혜 정부가 사건의 도래로 알려진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공안세력의 보수적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누빔점을 다시 설정하려고 노력한다면 간헐적으로 들리기 시작한?‘하야’?목소리가 진짜로 커질 것이다.?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박근혜 정부는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보수적 포퓰리즘을 버리고 언론의 자유와 법치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도 제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2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2

유현상(숭실대학교 강사)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희들을 외면한 어른들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쉽게 용서받은 자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껏 항상 누군가를 외면하면서 살아온 자들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희들을 외면한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반성하지 않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 나라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다.
이 땅은, 이 나라는 너희들에게 희망이 아니었고 삶의 터전도 아니었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용서와 화합을 외치는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용서는 책임회피의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화합은 은폐와 망각의 염원일 뿐이다.
이 땅은, 이 나라는 부끄럽게도 그러한 용서와 화합의 덮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너희들을 예전부터 외면해왔다.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너희들의 미래를 착취하면서 살아 왔다.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백성을 압살한 대통령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황금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외면한 정치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그들의 나팔수들을 너무 쉽게 용서했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남아 있는 우리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
사무친 원한을 품고 우리들을 매서운 칼바람으로 다그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수많은 꽃들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꽃들을 짓밟을 것이다.
부디 남아 있는 우리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너무나 아까운 그대들이여!
미안하다. 그대들을 그 어두운 곳에 그 차가운 곳에 버려두었구나.
정녕 미안하다. 그러나 부디 용서하지 마라.
이 땅의 누구에게고 용서의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분노하게 하라. 내일 또 다른 꽃들이 버려지고 짓밟힐 것이다.

외면당한 꽃들이여!
부디 너희들을 잃고 비탄에 잠긴 너희 부모들을 위로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디 용서하고 위로하라.
그들은 너희가 차가운 바다에서 버려지는 동안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으며,
너희들을 진정 그리워하는 그들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

외면당한 꽃들이여!
살아 돌아온 꽃들이여!
이 땅의 수많은 꽃들이여!
죄스런 삶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용서하지 말라!
바라건대 대한민국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

닭대가리[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

닭대가리[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세월호 사고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의 안전관리, 재난관리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오른다. 사실 2시간 가까이 두 눈 멀뚱이 뜨고서 수 백 명이 탄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구경만하는 나라에서 재난시스템을 말한다는 게 우스을 지경이다. 허둥지둥 대처 시스템의 맨 위에 있는 청와대는 한 술 더 떠 재난 안전청을 만들겠다고 하고, 언론들은 안전관리 매뉴얼 타령만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다보면, 나는 이들이 정말 닭대가리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과연 이들이 이 사회의 최고 엘리트층이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인가 싶을 정도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들만 불쌍할 뿐이다. 지금 그런 관리청이 없어서 대처를 못하고, 매뉴얼이 없어서 허둥지둥거리는가? 수 십 년 동안 민방위 훈련을 하고 있지만 유사시 그것이 얼마나 형식적이었는가를 뼈저리게 알지도 모른다. 안전 관리나 생명 보호는 단순히 기술이나 기구의 문제가 아닌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와 철학의 문제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식민지도 경험하고 전쟁도 경험하고 보릿고개도 경험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에게 아마도 안전과 생명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살율과 재해사고율, 교통 사망율이 OECD 1위이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다. 우리 스스로 위험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다보니 더 이상 내 새끼들을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는다는 징표이다. 이런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바뀌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지 모른다. 재난 사고가 생길 때마다 온갖 호들갑을 떨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그냥 망각해버린다. 일종의 푸닥거리를 하는 느낌이다. 정부는 온갖 재난 대책으로 도배하고, 언론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속보 경쟁만 하고, 국민은 분향소를 찾아 눈물 흘리는 것으로 면죄의식을 한다. 일종의 거대한 현대판 제의와도 같다. 이 제의는 무엇보다 사회적 망각을 감싸줌으로써 시간이 흐르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우리 모두가 이 푸닥거리의 공범이 아닌지 모를 일이고, 그래서 우리들 모두가 닭대가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전에 [소방관이 된 철학교수](F. 맥클러스키, 이 종철 역, 북섬, 2007)라는 책을 번역한 책이 있다. 이 책은 철학교수가 지역 소방관 활동을 자원봉사하면서 겪은 생생한 체험을 철학자의 눈으로 성찰한 책이다. 긴급 재난 활동가로 유명한 한비야가 추천한 탓에 한 때는 베스트셀러의 목록에도 오르고, 전국 소방관들의 필독서라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이 책의 말미에 썼던 역자 후기 일부의 문제 상황은 지금 읽어봐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모름지기 소방관들은 그 파괴의 현장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인내와 헌신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접근하기 꺼리는 곳으로 뛰어들어 파괴의 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영웅들이다. 미국에서는 청소년이 바라는 직업의 1순위에 올라 와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방관의 이미지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가끔씩 티비 화면을 통해 큰 불을 끄다 순직한 소방관들 이야기를 보다 보면 그것은 기껏해야 고되고 위험해서 젊은이들이 지원하려 하지 않는 3D 업종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화재나 재난은 일순간에 한 가정이나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고, 날마다 화재 현장에 뛰어 들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활동이 없다면 우리의 재산과 안전을 누가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화재 현장에서 생사를 가늠하는 전투를 벌이면서 인명 구조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드물게 전쟁 상황에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영웅적 전투가 이 사회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고 있음에도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낮다는 점이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 중의 상당 부분은 소방 활동을 표피적으로만 보도하는 대중 매체에 기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저변에서 묵묵히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배려가 낮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 경향에 기인한다. 또한 소방 현장에서 남다른 경험을 겪는 이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일반인들이 공감하는 형식으로 전달하는 작품이 드물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에 형제 소방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외화 [백드래프트]나 사이코 방화범과 소방관의 심리전을 다룬 방화 [리베라메]같은 영화는 일반인들이 소방관들의 위험하고 영웅적인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의 철학교수가 10여년을 묵묵히 자원 소방관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체험을 기록한 이 글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의 여지가 있을뿐더러 소방관들과 그들의 고난의 현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지금 와서 하나 더 덧붙이자면 비용이고 경제논리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고와 재난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불필요한 우연적 비용 정도로 생각하고, 관련 인력도 사정이 어려울 경우 정리 대상 일순위이다. 신자유주의에 세뇌된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안전관리에 관련된 규제부터 풀어버린다. 기업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노후 선박을 들여와 증개축을 한 것도 모자라 과적을 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먹이 사슬로 얽힌 관리 감독청은 감독의 책임을 로비 비용이나 접대로 눈감아 버린다. 이들에게 국민과 승객의 안전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이다. 그동안 사고가 안 난 것이 우연인지 모르겠다. 세월호의 경우, 지난 한 해 안전과 관리된 선원 교육비용은 54만원인데 반해 접대비용은 6천만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6,800톤급 선박의 항해 책임자가 1년 계약직이고 선원들의 절반 이상이 고용 1년이 안 된 계약직이라고 한다. 선내 서비스를 담당하는 대부분의 승무원들도 계약직이다. 승무원들의 연봉도 타 선사의 2/3 정도뿐이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비용을 절감해서 거둔 수익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유병언 일가가 십 몇 년 사이에 청해진과 그 계열사로부터 무려 천억을 거두어갔다고 한다. 결국 걸레 짜듯이 쥐어 짜가지고 소수의 고액 연봉자들의 배를 채워 주는 셈이다.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울러 다수가 이런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소수의 탐욕자들의 삶과 지위가 과연 안전할 수 있는가? 과연 이것이 세월호만의 문제이고,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은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이번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리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개인이나 사회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있다. 이러한 목표나 가치를 개인은 좌우명이라 하고, 학교는 교훈이라 하고, 회사는 사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구호화하여 붙여두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목표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고, 대한민국에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목표나 가치는 당연히 [헌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 존재인가?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 자신의 목표를 선언문 형식으로 낭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역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즉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는, 즉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할 존재다. 행정부 수장의 목표가 그러하다면, 대통령 소속이면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국가정보원법] 제2조) 국정원의 목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분명히’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마땅히 그 수장과 담당자를 질책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의 임무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현 정권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만행은 대통령 개인의 목표나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목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리고 전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으로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사실 아닐까. 그러한 선거 부정은 자신의 목표인 민주주의 수호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적절한 말이나 대응이 없다. 이것은 임무 방기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와 목표를 짓밟은 행동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수수방관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 대통령이 방조하지는 않았나 의심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행정부의 수장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자기 직속 기관이 될 조직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리고 당선 후에도 그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수호와 달성을 위해 노력하리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심화된다면 대다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이상을 스스로 수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호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타도! 박근혜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