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슈팅 게임 썬더포스V[보고 듣고 생각하기]

?정해진 길은 없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전호근(경희대 교수)

 

#이 글은 2013년 7월 9일 한철연MT에서 진행된 강의의 강의록임을 밝힙니다.

 

전설의 슈팅 게임 썬더포스V

 

서기 2106년 인류가 만든 무인 탐사 우주선 이시바나가 명왕성 바깥 카이퍼 벨트에서 정체불명의 기체를 견인하여 돌아온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pkiyusul&logNo=20177789543

2108년 지구통합정부의 연구기관이 극비리에 조사한 결과 정체불명의 기체는 현생 인류의 기술로 만들 수 없는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전투기로 판명된다. 기체는 ‘위대한 자들이 만든 쇳덩어리[Vastian’s Steel]’라는 뜻으로 바스틸로 명명되었고 통합정부는 곧바로 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2139년 바스틸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인류는 남태평양에 바스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무인인공섬 바벨을 건설하고 인공지능 관리 시스템 가디언을 제작한다. 이 기술로 인류는 에너지 문제와 환경오염 등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다.

2145년 인류는 바스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우주 이민계획을 수립하고 제1차 우주선단을 위성궤도상에서 건조한다.

2150년 인공지능 가디언이 독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인류를 공격하여 위성궤도상의 우주선단은 조종불능상태에 빠지고 지구상의 바스틸 테크놀로지 시설은 괴멸된다. 이 전쟁에서 인류의 1/3이 희생된다.

살아남은 인류는 전투기 바스틸을 복제한 유인전투기 RVR-01 GAUNTLET을 개발하여 가디언과의 싸움에 나선다. 썬더포스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건틀렛의 조종사다. 이제 인류의 생존은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가디언이 인류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

I am cyborg humanity.

Cyborg animals.

Cyborg flowers.

A cyborg world.

And my name is the Guardian.

Soldier / Human, listen to me.

All the things created using Vasteel / that surpass human power have been destroyed by me / by you. Their number was too great, but has now been reduced to the proper level.The world will continue as it was before. The living creatures of this planet will continue to rejoice in / fear battle, and die in / live by combat. But even in a world of minor warfare, one overslight could mean…

“RVR-01 Gauntlet”…destroyed.

“RVR-02 Vambrace”….operational.

The existence of Vambrace will once again cause humanity to embrace mass death and destruction, just as Vasteel did. This I know. You know it too, do you not? Soldier / Human.

If you wish to safeguard the future of humanity, you must make sure humans can never again gain access to Vambrace…….

Soldier / Human, May fortune be with you…… (작곡: 츠쿠모 햐쿠타로 九十九百太郞)

 

어느 게임 블로거의 프로필

△ My Main NICK : RVR-12

△ 희망 :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희망직업은 음악가

△ 좋아하는 것 : 이탈리안 파스타를 포함한 면요리, 클래식, 게임음악, Thunder Force

△ 싫어하는 것 : 게맛살과 참치통조림을 제외한 모든 해산물 , NEXON, 미라클 큐브, 아카이럼

남의 취미를 함부로 욕하는 사람

△ 나의 역린이자 절대 금칙어 : 장애인

△ 내가 선호하는 장르 : 레이싱, 액션, 슈팅

△ 내가 선호하지 않는장르 : 1대1 격투액션, 명령식 RPG

△ 2012년 12월 기준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중인 게임 : 메이플스토리

△ 좌우명 한 마디 : 하고 싶은 것은 하되 끝까지 품위를 지키자. 게임은 기본적으로 매너있게!

악플러와는 일체 말을 섞지 말것.

 

어느 레즈비언 부부의 선택

아이를 원하던 레즈비언 커플(샤론 더치스노와 캔디 매컬로)이 기왕이면 자기들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갖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듣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서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을 얻었다. 사람들이 비난하자 그들은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며, 자신들과 같은 아이를 갖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청각장애라고 부르는 것을 장애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마이클 샌델,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절름발이 신도가와 정나라 자산

춘추시대 정나라의 명재상인 자산은 신도가라는 절름발이와 함께 백혼무인을 스승으로 모셨다. 스승을 뵙고 나면 자산은 항상 신도가가 먼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나갔다. 병신과 나란히 걷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산이 신도가에게 오늘은 자신이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 테니 신도가더러 한참 뒤에 나오라고 요구했다. 신도가가 까닭을 묻자 자산은 말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집정자고 신도가는 절름발이인데 어떻게 나란히 걸어 나갈 수 있겠느냐고.

놀란 신도가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온전한 다리를 가지고 온전치 못한 내 다리를 비웃는 자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끈하고 성을 내다가도 백혼무인 선생을 뵙고 나면 깡그리 잊어버리고 평화로운 마음을 되찾았다. 내가 선생과 노닌 지 19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내가 절름발이인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내가 절름발이인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대가 지금껏 나의 내면과 교유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나를 밖으로 드러나는 육체에서 찾고 있으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

자산이 깜짝 놀라면서 얼굴색을 바꾸고 태도를 고치고서 말했다.

“내가 잘못 했네.”

 

덕이 충만한 사람들의 형상[德充符]

어떤 사람의 내면에 ‘덕(德)이 가득 차 있다는 부호(符號)’가 덕충부(德充符)다. 곧 도를 체득한 사람의 내면성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자의 본뜻은 덕이 충만한 사람에 부합하는 형상이 따로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은 형상에 구애되지 아니하는 것, 형상을 초월한 형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 때문에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추하다고 여기는 절름발이나, 꼽추, 언청이 같은 불구자를 들어 그들의 입으로 도를 말하게 한다. 그로테스크한 기형불구의 인간들이야말로 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역설적 우언을 통해 장자는 외형적인 모습에 구애받고 그것을 꾸미는데 집착하는 세상 사람들의 슬픈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고 있다.

신도가와 자산의 이야기에서 자산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 곧 부(富)와 영(榮)의 상징이다. 반면 절름발이 현자인 신도가는 무가치, 곧 천(賤)과 욕(辱)의 상징이다. 장자는 이 두 사람을 초월자인 백혼무인(伯昏無人) 앞에 세워놓고, 참으로 덕이 충실한 사람은 귀천을 잊고, 미추(美醜)를 포용하고, 만물을 자신이 품에 노닐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덕충부에 등장하는 해탈자의 면목은 모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 학대받는 사람, 추한 사람, 천한 사람들이다.

장자는 덕충부의 또 다른 주인공인 곱사등이 애태타(哀??)를 절대자로 묘사하고 그의 입을 빌어 말한다. 혹은 生하고 혹은 死하고 혹은 길이 존재하고 혹은 금방 사라지는 인간 사회의 천변만화가 모두 ‘事之變, 命之行’ 곧 만상의 끊임없는 변화, 운명의 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시각각 멈춤이 없는 일체만상의 변화, 운명의 유전은 밤낮으로 우리의 눈앞에 교대로 나타나는데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규명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들을 서열화하고 우열을 나눈다. 인간 세계의 불행은 대부분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장자는 그러한 변화를 있는 그대로 내맡겨 두어야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다리가 하나인 사람도 있고 다리가 둘인 사람도 있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듣는 사람도 있다.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보는 사람도 있다. 길은 걸어 다니다보니 생긴 것이고 사물의 이름은 그렇게 부르다보니 그렇게 붙여진 것처럼. 본래 그러한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석춘이 쓴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보고 듣고 생각하기]

손석춘이 쓴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나태영(한철연 회원)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통합진보당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언론이 이승만의 3·15부정선거와 비슷한 사건으로 대서특필해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출 방법만 보더라도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 얼마든지 단순 비교가 가능하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선거라며 이승만까지 덧붙여 몰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여론몰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비례대표 순위는 어떻게 결정하고 또 했는가. ? 더러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통합진보당과 경선 규칙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과연 그러한가. 좋다. 두 당은 통합진보당과 달리 당 지도부가 당 안팎의 인사들로 임명한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 심사위에서 결정한 순위대로 모든 게 이뤄졌을까? 그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영향력으로 순위가 조정된 사람은 없는가? ? 바로 그렇기에 조중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보의 죽음을 들먹이는 사람들과 이 책이 서 있는 자리는 확연히 다르다. 진보정치 세력이 직면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또한 수구-보수세력과 민주세력은 달라야 한다.” (21, 22쪽)

 

김대중이?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은 무엇일까? 이건 후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적 문제와 연결되는 것인데, 그 시절에도 미국과의 BTI 논의가 있었는데, 한미 FTA 논의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풀어주고 시작한 ‘4대 선결 조건’을 보면서 그는 BTI 논의를 아예 접어버렸다. 실무자로 정부에 참여하면서 본 것 중에서 미국 앞에서 당당한 외교를 했던 그가 놀라웠다.” (『김대중을 생각한다』중 우석훈 글, 275쪽)

 

이랬던 김대중이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을 옹호했단 말인가? 노무현을 도와주려고?

 

?“25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도입을 IMF 구제금융 탓으로만 돌리는 논자들이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구제금융을 모두 갚고 심지어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김대중은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 노무현이 강행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자신은 찬성한다고 밝혔다.”(76쪽) 1970년대 김대중 경제정책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김대중을 ‘김대중’으로 만든 것은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를 제시한 그는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대안을 갖춘 진보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76쪽)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당한 이후로는 김대중 경제정책은 더 이상 진보적이지 못했다.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김대중이 미국과 양자협정 접었으면서도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 옹호했다는 사실 참 거시기 하다. 그래도 김대중은 북조선과 남한 통일에 대해서 약 40년간 힘썼다. 참 다행이다. 진보정당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진보정당 사람이라면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 폐기를 몇 십년간 외쳐야 한다. 지금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들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진보당은 패권주의 사과하라!

진보당이 민주노동당일 때 대의원대회 결과는 국민참여당과 합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주노동당은 그 명령을 어기고 민주주의 원칙 무시하고 국민참여당과 합친 사실 사과하라! 우선순위 정해서 뛰라!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물고 늘어져라!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의 당 대회를 앞두고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기정사실화하는 행태를 보면서, 또 그런 행보에 자극받아 진보신당이 당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합당을 반대하는 결정을 내리는 걸 보면서 나는 참담했다.”(72쪽)

 

노동당(진보신당)은 진보당(통합진보당)에게 ‘종북’이라 말한 것 사과하라! 『 신자유주의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세계노동운동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장석준이 ‘도로 민주노동당’ 어쩌구 저쩌구 말한다.

사과하라!

노동당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물고 늘어져라!

홍세화가 말했다.

다시 만날 수 있게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 하지 말자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때 잘한 일 참으로 많다.

물론 자주 까먹었지만 잘한 일 참으로 많다.

 

?“2 …한나라당이 추진 의사를 밝히고 있는 비정규직 임금 차별 해소는 과거 민노당(서평자 덧붙임: 정확히 민주노동당)의 핵심 정책이었다. 2004년 당시 민노당 의원 10명과 여야 의원 6명은 근로기간 및 근로시간 등의 이유로 차별을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었다.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기업 부담 등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 임금 차별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며 이 법안에 반대했었다. 민주당이 비정규직 대책의 일환으로 제시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 사유 제한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반대했던 것이다. …”(20쪽)

 

이 책 20쪽 21쪽에 민주노동당이 잘한 일 도배질 한다. 독자 여러분 이 책 사서 확인하기 바란다.

“객관적 현실은 진보정치 세력이 집권하기에 가장 토양이다.”(13쪽)

손석춘 말에 나는 적극 공감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성적표가 이렇다.

자살자 거의 세계 1위,

애 낳지 않는 비율 세계 1위,

비정규직 노동자 약 50프로,

진보정당이 여당 될 까닭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진보정당 지지율 7프로도 되지 못하는 까닭은?

영향력 약 80프로 차지하는 수구언론이 빨갱이 사냥해서,

장남 야당 민주당이 못나서,

진보정당이 실력이 부족해서, 진보정당이 사람 아우르는 길 몰라서 진보정당이 여당이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번 품은 뜻을 끈질기게 밀고 나가지 못해서 그런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생활고로 부부가 자살하며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이다.”(11쪽)

 

 

지식기술자 못남을 드러내는 책: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보고듣고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지식기술자 못남을 드러내는 책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나는 왜 『인물과 사상 1권-33권』을 다시 읽는가! 나는 서민이다. 나는 99프로이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한미자유무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내 생활이 편해진다. 내 노후가 편해진다. 내 자손들이 편히 산다. 이 땅 서민 삶이 편해진다. 그런데도 이 땅 지식기술자들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를 외치지 않는다. 저들은 그저 1프로가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적당히 하는 척만 한다. 그저 경제민주화, 복지정책만 줄기차게 외친다. 나는 말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지 않고서 두 가지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나는 지식기술자가 못나서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열 두 글자가 한데서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드러내는 책이 강준만이 쓴 『인물과 사상 1권-33권』이다. 우선 이 땅 지식기술자 못남을 철저히 알고 싶다. 그래야 이 땅에서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촛불집회를 이룰 수 있다. 우선은 저들 못남을 처절하게 알아야 겠다. 더불어 내 못남도 알아내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서 모았다. 읽는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열 받으면서. 읽는다. 이 땅 99프로는 1프로가 만든 놀이터 안에서만 놀고 있다. 벗어날 생각을 아예 못한다. 벗어날 상상도 못한다. 이정희, 홍세화, 박은지 이 세 사람이 바로 그렇다. 저들은 해야만 할 일 을 제대로 못한다. 김대중은 북조선과 남한 3단계 통일론을 약 40년에 걸쳐서 외쳤다. 세 사람은 김대중 한태 배워야 한다. 지금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외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멋있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땅 서민들은 아무 때나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피해를 본다. 10년, 30년 지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30년 정도 지나면 피해가 커져 이 땅 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바로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30년 뒤에도 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살률 거의 세계 1위, 출산률 거의 세계 꼴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이런데도 99프로가 지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30년 뒤에도 지금과 똑 같을 것이다.

강준만/ 출처: http://jtlee.khan.kr/163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 땅에서 영어 알파벳이 점령군처럼 들어와 있다. 이 땅 기지촌 지식인들이 열심히 영어 알파벳을 쓰고 있다.

‘또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나온 한 제목이 『Hegel의 實體觀』이며 그 안에 소제목이 “Hegel과 Platon의 idealism”으로 시작하고 모든 고유명사가 직접 들어와 있다. 나는 도대체 이따위 무질서한 언어전통이 어디서 그 족보를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서양철학을 하시는 분들은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보고 한문을 풀어쓰지 않을 뿐 아니라 고루하다고 투덜댄다. 그러면서 그들은 프라톤이나 칸트, 헤겔 정도의 보편화된 우리말을 버리고 알파벳을 쓰시며 위대한 철학을 하고 계시다.’(『도올논문집』, 102쪽)

얼숲(페이스북)에서 당신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분들이 이야기 나누는 상대 다수가 한국인들이다. 그런데도 자신 이름을 영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좀 거시기하다. 나태영을 영어로 쓸 때 Tae-young Na 가 아니라 Na Tae-young이 되어야 한다. 외국에서도 그리 써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그래 한국에서는 성이 앞에 나오지. 우리랑 거꾸로 하네! 거 참 신기하네!” 말할 것이다. 미국인이 한국에 오면 “How mush is it?, Could you show me the way to city hall!”이 아니라 ” “이거 얼마예요?, 시청 가는 길 알려주세요.“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이 ‘한미FTA’로 많이 쓰인다. ‘한미FTA’하면 일반인들은 그 뜻이 금방 와 닿지 않는다. 그 무시무시한 것이 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한겨레신문에서는 간혹 ‘한미자유무역협정’ 이라는 이름을 쓰는 기자가 있다. 나는 이 이름이 ‘한미FTA’라는 이름보다는 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름도 사기치는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두 글자가 너무도 좋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두 글자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응! 두 나라가 무역을 자유롭게 한다구! 좋지!” 그러는 사이에 한국과 미국 1프로는 집요하게 사기를 쳐서 자신들 욕심을 채운다.

2003년쯤에 민주노동당이 ‘한미매국협정’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잊어먹었다. 나는 이 이름을 자주 써먹었다. 하지만 이 이름도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1프로가 두 나라 99프로, 특히 한국 99프로 서민한테서 챙길 것을 최대한 챙기려고 한다. 돼지 똥구멍에 낀 콩나물까지도 빼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이 이름이 맞춤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이 그러겠지!

“아니! 죽일 놈들이 우리를 패죽인다구!
내 가만 있을 수 없지!
어디, 너 죽고 나죽자!”

언론인과 학자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이 열 글자를 드러내놓고 쓴다면 이 무시무시한 협정이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

강준만과 김동민이 펼치는 조선일보 제 자리 찾아주기 운동 조선일보는 반노동자 신문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68만 회원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진보정의당 노회찬이 조선일보에 아부한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반호남신문이다. 그런데도 호남 사람 다수가 조선일보 본다. 조선일보는 반통일 신문이다. 그런데도 북조선을 떠난 분들이 열심히 조선일보를 본다. 억장이 무너진다. 조선일보를 비판하기 위해서 조선일보 본다는 사람들도 많다. 답답하다. 강준만은 책을 통해서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했다. 김동민도 그리했다. 현장에서도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했다. 그래서 강준만이 김동민을 높이 산다. 강준만은 중용을 이룬 사람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blogId=bloodlee

중용은 가운데를 뜻하지 않는다. 중용은 중립을 뜻하지 않는다. 제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을 잘 이루는 보기는 우리 몸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우리 몸은 땀을 흘려서 체온을 유지한다. 그래서 중용을 이룬다.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 몸은 몸을 떨어서 체온을 유지한다.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수구세력처럼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기에 그런다. 조선일보처럼 김대중을 비판해서 그런다. 조선일보나 수구세력에게 당하는 김대중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김대중을 비판해서 강준만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저들이 거대담론만 중시하고 이 땅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저들이 진보를 외치면서도 반진보적인 신문 조선일보 월급쟁이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강준만은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을 비판한다. 말을 고친다.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다. 강준만은 편견을과 통념을 깨부수는 사람이다. 『인물과 사상 1권-33권』 이 책들을 통해서 나는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김용옥은 김대중을 비판한다. 김대중이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 해놓고 그 말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나도 김용옥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준만 책을 읽고 나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총각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결혼하겠다고 생각을 바꾸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축하해 줄 것이다. 정치가가 대통령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다시 대통령 출마하겠다고 말해서 심하게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김대중을 비판한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비판한다. 진보적인 학자들도 거든다. 나는 알게 되었다. 강준만은 더 이상 다른 주장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용케도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의 그런 주장이 꽤 설득력 있다. 강준만 글을 읽고 있노라면 강준만 얼굴과 맹자 얼굴이 겹쳐진다.

강준만은 바로 우리 이야기를,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김용옥은 우리나라 국문학 동네가 우리나라 철학 동네보다 더 뛰어나다고 부러워 한다. 박사학위 딴 석학들이 자신보다 학력이 떨어지는 고졸, 학부 출신 작가들 작품을 비평해서 국문학 동네가 뛰어나다고 부러워한다. 우리나라 철학동네 사람들은 서구 철학자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고 인용하지만 우리나라 철학자들이 쓴 글을 인용하면 자신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 등 선비들 글에는 사람들 이름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서로 이름을 걸고 서로를 비판한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수많은 나와 너가 나온다고 김용옥은 말한다. 우리나라 철학 수준을 높이려면 우리 철학자가 쓴 글을 열심히 읽고 비판해야 된다고 김용옥은 주장한다. 김용옥이 바른 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준만은 우리 땅에서 글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 사람 이름을 드러내며 그 사람을 비판한다. 비판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겠지만 김용옥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강준만이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맹자같이 냉철하고 논리적인 강준만이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를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좀 거시기 했다. 나도 한 때는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 지지율이 자신보다 한참 못 미치는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양보한 의연한 자세를 보고 나는 한 때 안철수를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2012년 4.12 총선 바로 며칠 전에 ‘당보다 인물을 보고 표를 주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안철수에 대해 가졌던 좋은 평가를 접었다. 과연 이 사람이 상식 있는 사람인가 의아해했다. 이런 안철수를 강준만이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강준만이 왜 이러지 생각했다. 영원한 무림고수는 없나보다. 강준만을 넘어서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금 자신이 1프로이고, 1프로 대변자인 박근혜가 대통령이다.

김설미향의 두 자화상[보고 듣고 생각하기]

감성적 내일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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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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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웹진의 [문화보기] 코너에 성황리에 연재를 한 [나무이야기]와 작가의 블로그http://dandron.blog.me/에 있는?김설미향 작가의 그림에 대한 단상임을 알립니다.

1. 작가의 두 자화상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 자화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자화상이다. 나무들을 자화상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이유는, 작품에는 항상 작가의 의식이 따른다는 예술 일반론에 기대어 하는 말이다.

드로잉화 자화상들은 제목도, 번호도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뼈만 남은 듯 볼 품 없다. “음, 그림이 꿈틀거리는군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아는 법, 자화상의 진가를 느끼고 감”이라는, 알쏭달쏭한 덧글을 남기고 가는 이도 있다. 나도 덧글을 따라, ‘그림이 요동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려 애써본다.

그나마 작가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의 행복하지 않은 심정을 읽을 단초가 있다. 작가는 묻는다. “나의 가족은 무엇”인가? 잠자다가도 작가는 운다. 추측으로만 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의미이다. “쓰레게 줍는 노인들에게 슬프고”, 소비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

또 다른 작가의 자화상, [나무이야기]의 그림들은 드로잉 자화상에 비해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채색이 우선 시선을 붙잡는다.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림들에 논리적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가 행복한 봄을 즐긴다. 나무는 아이들(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풀어준다. 그러나 무참히 상처받는다. 상처받고 잠이 든 나무는 동료들의 위로에 따라 다시 깨어난다(다시 생명을 얻는다). 나무는 나비들과 새들을 포함하여 자연과, 사람들과 관계한다. 아마도 자화상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을 짓누르는 형식에다가 인간의 의미를 새겨 넣는다’는 경구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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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을 읽기 위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 전반부(1-5절)에서 말하는 예술 일반론을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전 예술론과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모방이나 사실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로부터 등을 돌려,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주관인 내가 객관인 자연과 상호 교호작용을 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교호작용의 예를 서정시인의 시작(詩作) 상태를 빌려 설명한다. 서정시인에게 기쁨(해방된 욕구)과 비애(억압된 욕구)의 상태에서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 결핍된 욕구인 열망이 해방받기 위해 분출된다(니체 식으로 말하면, 욕망이 주관을 이끌어낸다). 니체를 따라,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주관의 열망이 분출되면 자연 경관이 다시 우리의 욕구를 순수한, 의식 없는 인식을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의 창작 상태는 주관적 의지와 반성적 자연 상태를 나누어갖게 된다.

예술가가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가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천국과 지옥)을 빌려, 예술가가 왜 가상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한다. 인간은 그의 토대에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그림 하반부). 그러나 매 순간 가상(상반부)이 만들어내는 욕구 충족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상인 즉 [가상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가상은 이 세계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니체의 유명한, “세계는 예술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경구가 완성된다.

예술 일반론에 더하여 리얼리즘 예술론도 잠깐 살펴보자. 까간은 [미학 강의]에서 리얼리즘과 고전 문학의 차이를 명료히 했다. 고전문학에서는 성과 속, 미와 추의 게토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는 이 게토가 무너진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 내면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미, 추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유 역시 어떤 목적 때문이다. 예술 일반론에서 예술의 목적이 가상에 대한 필요였다면 리얼리즘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 치유에 있다. “그대들,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은… 플라터너의 거친 혓바닥으로 폐결핵의 가래침을 낱낱이 핥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해악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진수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카소를 어느 화풍이라고 규정하든,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는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말들이 죽어가고, 인간이 학살당하고 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도 있고,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예술을 리얼리즘 예술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이것이 현실이다), 참 인간화된 세계는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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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김미향의 그림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자화상인 그림에 첨가된, 이해 가능한 절제된 경구들에는 풍성한 의미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물론 자연과의 교호작용, 형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무의 눈을 보자. 그(녀)는 암, 수 구별 이전의 존재로서 나비(이성이 아니다)를 쫒고, 아이들을 쫒고, 죽었다가(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살아)난다. 자연이란 원래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나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이 가능할 것이다.

우중충하고 암울한 드로잉 자화상에는 다행스럽게 귀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작가가 위로받을 양식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림은 적적성성(寂寂惺醒)하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다. 눈은 차분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들어 있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면, 눈은 아마도 맑은 갈색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눈은 맑다. 응시하는 시선이란 반성적 시선이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작가는 오늘날 가족일반에 대해 반성한다. 가족 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박범신은 이득과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 가족의 세태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느 여성은 옷 장사하는 시누이가 제사 때마다 짝퉁을 들고 와 강매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했다. 가족 관계에서조차 장사꾼의 이득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그런 장사꾼을 믿느니 차라리 창녀를 믿으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을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사회적 분배에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가족이란 내게 무엇인가? 소통하는 존재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필자는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는, [그림 6]에 기대어 작가의 의도를 과감하게 추측해 본다. “오늘은 내게 기대세요, 내일은 내가 당신에게 기댈께요.” 그림책의 나무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소명(Gerufe)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예술가가 되어 타인들(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나에게 와서 쉬라. 오늘 가족 일반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족 공동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은 또 다른 지옥이다(홍 선생님 어록). 가족은 작은 사회이다. 가족이 이득관계로 지옥이듯이 사회 역시 이득관계로 지옥이라면, 이런 사회와 가족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 예술가의 의도이다.

드로잉 자화상에 이어지는 글 속의, 작가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 반드시 짚어야 한다. 폐지줍는 노인과 몸 파는 여성들 때문에 고통받는 작가는 ‘창밖에 떨고 있는 저 개 한 마리 대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딘 것이 오늘 사회 현상임을 작가는 고발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나은 사회는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회이어야 한다.

작가가 인간으로 많은 약점을 지녔다하자(자화상에서 보듯, 수려하지 않은 외모이든, 시에서 보듯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든). 시인의 의도는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기에 그녀는 참 좋은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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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읽다가(보다가), 몸 어느 부위를 때리는 충격을 받는 것은 뎅커(Denker)로서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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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김택민이 쓴『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보고 듣고 생각하기]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

-김택민이 쓴 『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유 있으면 8천만 겨레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중국사를 관통하는 고난에 비하면, 우리 역사 관통하는 고난은 소꿉장난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가 우리 고난 침소봉대했고 이병도 따르는 역사학자들이 계속 식민사관 대물림한다. 이병도는 을사5적 이완용 양아들이다.

한국이 951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중국 땅에서는 약 3만 번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약 2만 번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역사
맨 앞 1천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가운데 8백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12쪽)

1979년에 박정희가 지 부하한테 총알 맞아 죽었다. 그 때 나는 중3 학생이었다. 1980년에 나는 고 1 학생이었다. 40대 중후반 윤리선생님이 침을 튀기면서 우리는 못난 민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책 앞 부분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한테 9백 몇 십번을 침략 받았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윤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은 병신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좀 거시기 했다. 좀 억울했다.

중학교 때 국사 책 앞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가 위장 관구검한테 공격 받아 왕이 어디로 도망갔다. 라는 내용이 말이다. 책을 쓴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그리 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자기들이 진 전쟁에 대해 역사책 앞에서 다루지 않는다.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한테 대패한 이야기 잘 다루지 않는다. 간혹 다루더라도 아주 쪼금 다룬다.
 

김택민,『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사진출처: www.everedu.com/


 
1981년에 서울역 대일학원에 다녔다. 성문기본영어 들었다. 강사는 일본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다. 그 분이 그러시더라.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 아닙니다. 원나라한테 침략 받을 때 우리 조상 여자들이 겁탈 당했습니다. 여러분 핏속에 몽골 피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와집 처마는 새 날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너무도 많이 다른 나라한테 침략을 받아서 새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겨서 건물 처마가 새 날개 모양입니다.

그 분이 또 헛소리 하셨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유물이 석굴암이 아닙니다. 비원에 있는 아무개라는 목조건물입니다. 같이 일한 역사 강사가 그러더라. 우리 전통가옥 처마는 아래에서 볼 때 가장 웅장하게 보이도록 각도를 잡았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국사책에
일제 강점기 항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계사 책에는

오호 16국 강점기,
요 강점기,
금 강점기,
원 강점기,
청 강점기

라는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어판을 1985년에 대학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다. 일본 항목을 봤더니 1대 왕부터 몇 대왕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상식 있는 일본학자들이 몇 대까지는 뻥이라고 인정하는 내용이 버젓이 사실인 양 나왔다. 대한민국 항목을 봤더니 단군 왕검 이야기 나오고 갑자기 서기 삼국시대 이야기 나온다. 단군 왕검 이야기는 신화로 나온다. 서양인들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 볼 것이다. 열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항목은 이 나라 영문과 교수들이 영역했더구만. 당연히 원래 글은 식민사관에 쪄든 이병도 제자들이 썼겠지. 이병도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양아들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1985년에 대학생 사촌집에 갔다. 사촌한테 내가 물었다. 일제 시대와 해방초기에는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세계 맨 앞 이었는데 지금은 왜 성적이 나쁠까? 사촌이 그러더라.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식민사학자가 우리한테 심어놓은 말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인이라는 대학생 입에서 나왔다. 깝깝했다.

이래서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이 많다.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이 말이 이 땅에서 없어지는 그 날까지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책 제목 바뀜)이 책이 많이 팔려야 화이사관 식민사관 문제 풀 수 있다.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

-비정기 간행물 <숨>-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많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며칠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안해가 이 글을 읽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책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다 사실인 것을. 나는 어린이(초등)학교 2학년 시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하루는 어둑 어둑한 밤에 아버지가 나와 두 살 위인 형을 데리고 논 부근 물가로 가셨다. 자전거 뒤에 다라이를 싣고 가셨다. 그 다라이에는 불에 그을려 검게 탄 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더 작은 크기로 토막내기 위해서 논가 물 있는 곳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가 이미 개고기 요리할 준비를 해 두셨다. 어머니가 개고기 토막을 큰 솥에 넣고 부글 부글 끓이시는데 냄새가 참 좋았다. 된장냄새와 함께 구수한 개고기 냄새가 참 좋았다. 요리가 다 되었는지 어머니가 개고기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어 칼로 잘게 썰어주셨다. 우리 식구는 한 점 한 점 맛나게 먹었다. 나도 맛나게 먹었다. 참 맛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개고기를 몇 번 먹었다. 커서는 보신탕 집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먹었다. 나름 친한 분을 내가 초대해서 함께 보신탕을 먹곤 했다. 최근 까지도 나는 보신탕을 먹었다. 숨이라는 무크지를 읽고 깊이 생각을 해봤다. 그 동안 내가 보신탕을 먹은 개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숨> 2권에 나와서 더 더욱 그랬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도올 김용옥교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책을 사서 읽었다. 그 분 책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왔다. 청나라 위안 스카이 이야기를 곁들여서 보신탕 이야기를 했다. 88 올림픽 한다고 줏대없이 보신탕 집을 단속하지 말고 자신있게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먹으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신탕 집이 보양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음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존경하던 석학이 보신탕을 자신있게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뿌듯했다. 나 자신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도 보신탕은 반만년 역사가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 음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신탕 문화는 야만적이라는 비난이 너무도 몰상식한 말이라고 힘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그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의사들이 수술환자에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보신탕을 권한다는 아버님 말씀도 내가 보신탕 신봉자가 되게 하였다.

<숨>, 더불어숨 출판사, 2009.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작은나무카페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그 카페에서 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 1권과 2권을 사서 집에서 쉬엄 쉬엄 읽었다. 안해가 요즈음 그런다. 내가 숨을 읽더니 여덟 번이나 그랬단다. “에이, 이 책 읽다 보면 앞으로는 보신탕 못 먹겠네.” 지인과 보신탕 빨리 한 번 푸짐하게 사 먹고 보신탕과 영원히 이별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숨에서 개와 관련된 글을 읽고 숨에 나온 이쁜 개 사진을 본 내가 더는 보신탕을 먹을 수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를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어떤 강아지를 사오시던지 강아지 이름을 재동이라고 지으셨다. 재동이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내게 안기곤 했다. 혀로 내 손을 내 얼굴을 빨곤 했다. 아직도 재동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동이 혀의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재동이 선한 눈빛이 어른거리고, 재동이가 달려올 때 내는 핵핵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금 들리는 듯하다. 재동이를 안을 때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뚜렷이.

우리 아버지가 네 형제에게 그랬듯이 나도 우리 딸 쌍둥이에게 보신탕을 먹게 했다. 어린 우리 쌍둥이가 보신탕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부모로써 쌍둥이한테 미안하다. 큰 죄를 지었다. 앞으로는 쌍둥이에게 보신탕 먹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 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충격 받으실 것을 생각하면 내가 겁난다. 무안하다. 그래도 돌이켜 보니 내 주변에서 긍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아버님이 약 15년 전부터 보신탕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절에 다니시면서 차츰 개고기를 끊으셨단다. 우리 안해도 약 3년 전부터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이제 나만 안 먹으면 된다. 다행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불량한 사장 때문에 파업하는 일꾼들이 많다. 그 분들 삶은 참 팍팍하다. 하지만 <숨>이라는 책을 읽고는 그 분들이 그래도 동물들보다는 낫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동물들은 파업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당한 짓을 해대는 인간을 상대로 시위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2010. 9. 21. 한가위 연휴 날이다. 내 삶에서 작은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내게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신탕 먹지 말자. 앞으로는 되도록 고기 식사를 줄이자. 앞으로는 되도록 적게 먹자. 달님 저를 굽어 살피소서.

해님 제 가슴을 뜨겁게 해 주소서.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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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정(한철연회원)
이반 일리히의 상생 사회를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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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봄에 차를 팔았다. 차 안에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연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아내가 남편을 설득해 차를 판 사연이었다. 부부는 치솟는 기름 값과 교통체증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기껏해야 주말에 마트나 나들이를 할 때만 자동차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보유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 그리고 유지비와 보수비를 따져보니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했다. 세대 당 한 대의 자동차 보유를 당연히 여기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도 차로만 움직이고도 늘 시간에 쫓기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소비에 의존했다. 나는 차를 팔고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 없는 생활의 이로움을 발견하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이반 일리히(I. Illich)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리히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며 로마 가톨릭 수사였다. 그는 서양 문화의 제도들이 우리의 교육, 의료, 노동, 에너지 사용, 교통 그리고 경제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비판했다. 일리히는 인생 후반기에 얼굴에 자라는 암 때문에 고통 받았으나 전문적인 의료에 따르기보다 전통적인 방법들로 치료했다. 그는 종양에 의한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기도 했으며, 일리히는 종양이 진행 초기일 때,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했지만 종양을 제거하면 말하는 능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고 종양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일리히는 그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흥규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일리히는 『상생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이유는 극소수에게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히의 ‘도구 tools’와 ‘상생 conviviality’ 개념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리히는 “현대 기술이 관리자managers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Illich, p.?)를 ‘convivial’하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기업의 사장을 의미한다. 즉 현대 기술은 기업의 사장이 돈을 벌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리히가 정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리히에게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출의 분배”(Illich, p.?)를 다루어야 한다. 정치는 투입이 아니라 산출과 관련한다. 산출의 분배를 최대화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다. 분배의 최대화는 곧 돈 많이 버는 것이고, 그렇다면 ‘convivial’은 사장이 아니라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도구의 근본 독점을 비판하고 일리히의 ‘도구 tools’와‘convivial’ 개념을 분석한 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들을 평가한다. 일리히가 상생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 대안은 이상적이고 전 근대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는 추상적인 답에서 찾는 것은 문제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리히의 사상은 산업 도구의 근본 독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생 사회를 위한 개인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사회 개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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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본 독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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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 따르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관계를 조장하도록 응용하면 도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면서 환경을 부패시킨다. 또 도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필요가 있는 일과 기성품이 필요한 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후자의 파괴는 근본 독점을 낳는다. ‘근본 독점’이란 “하나의 상표가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제품이 지배적인 것을 의미한다.”(Illich, p.55)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들이 음료 시장을 독점하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전통 음료와 차를 음료시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자동차도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독점한다. 자동차는 도시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국은 이미 1970년대에 도시의 자동차가 도보와 자전거의 이동을 배제했고, 대만에서는 자동차가 하천 교통을 배제했다. 이와 같이 한 상표의 자동차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도보, 자전거, 배 등의 다른 교통수단이 배제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학교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에 대해 근본 독점을 확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인가 대안학교나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즉 ‘무교육자’로 낙인찍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않으면 교육 받은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료 행위도 학교 교육을 받은 의사일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리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배제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근본 독점이 생기며 이 근본 독점이 강제적 소비를 강요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또 “근본 독점은 거대 제도가 공급하는 표준 제품의 강제 소비를 수단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만든다.”(Illich, p.56) 거대 제도가 만든 강제 소비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는 곳은 병원이 아니고 가정이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산파는 아이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 드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만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모의 산후 관리도 지금처럼 큰 규모의 조리원에서 이루어질 필요 없이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서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분만을 위해서도 병원에 하루나 이틀 입원을 해야 하고, 입원 절차에는 각종 검사가 따르며 그에 대한 부담도 소비자가 진다. 이것은 의료 제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이지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있지만 그녀들은 성가시고 불편한 방송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취재에 응해야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감수해야 한다. 또 분만을 돕는 산파를 구하기도 어렵다.

장례 문화도 근본 독점을 낳았다. 멕시코에서는 한 세대 전(일리히가 책을 쓴 1973년을 기준)까지도 묘지를 파는 일과 죽은 자를 축복하는 일 외에는 모든 장례 준비를 가족이 했다. 가족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픔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모든 장례 절차는 패키지 상품이 되었고, 장의사가 하는 장례 의례는 법률로 강제해서 장의사들이 시신을 통제하는 근본 독점을 낳았다.

일리히는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집 짓고, 죽은 자를 묻는 일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사람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상품에는 제한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풍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가능한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부여”(Illich, p.58)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대신해 ‘더 좋은’ 무엇과 우리의 능력을 교환할 때 근본 독점은 성립한다. 근본 독점은 가치를 산업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새 것들’의 희소성과 소비 수준에 따라 사람을 계급화 하는 틀을 만든다. 근본 독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가치 있는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켜 특권을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를 제한하여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최근에 장례 대행업체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고가의 장례 예식 상품을 유족에게 권한다. 부자가 아니고는 이용할 수 없는 고가의 장례 예식은 결국 서비스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또 다른 특권 의식을 낳으며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서비스 자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독점은 다원적으로 진행해 강제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파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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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생 도구?
1) 도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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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게 도구의 범위는 넓다. “나는 (…)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 생산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 체계도 포함시킨다.” (Illich, p.22)

일리히에게 ‘도구 tools’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한 장치인 ‘수단’을 의미한다. 그는 합리적으로 고안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술 도구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결혼 법 같은 의도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고안물도 도구에 속한다.

일리히에게 ‘도구’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인 기계는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로 만들지만,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는 개인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다.(Illich, P.10) 동력 도구 가운데 몇 가지는 인간 에너지의 증폭기 역할을 한다. 가령 소가 쟁기를 끌지만 사람도 소와 함께 일하고 그 성과는 인간과 동물의 힘이 결합해 얻어진다. 전기톱과 기중기도 같은 방식이다. 반면에 제트기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에너지는 제트기 출력에 의미 있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트기는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 인간을 위해 일하는 ‘산업 도구’며 인간과 함께 일하는 소, 쟁기, 전기톱, 기중기는 ‘상생 도구’라 부른다. ‘상생 도구’는 사용하는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최대의 기회를 부여한다. 도구는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상생을 진작시키는데 전화는 구조적으로 상생 도구다. 왜냐하면 관료는 사람들이 전화하면서 이야기한 개인 비밀을 간섭하거나 보호할 수는 있어도 전화로 서로 말하는 내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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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교육강좌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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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과 처절한 죽음스콧 니어링은 중년 나이까지 교수로서 열정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사람이다. 늙어서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서 자연 속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간 사람이다. 100세까지 모래 살다가 스스로 밥 굶고 죽은 사람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한없이 살다간 사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한을 안고 자살하신 분들이 구천을 헤매신다. 한국이 오이시디 국가 가운데서 자살률이 2위와 큰 차이나는 1위이다. 전 세계에서는 1, 2위와 비슷한 3위이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31.4명이다. 2007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자살방지위원회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나는 꼴이라고 말이다. 60대 자살률은 그 두 배이다. 이 분들의 죽음은 스콧 니어링의 죽음과 너무나 대조된다. 이 분들의 죽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분들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사회 구성원을 챙겨주지 못한 병든 사회가 죽인 살인이다. 이분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할 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오건호 지음, 책세상 펴냄

국민연금은 생명줄이다.국민연금이 단단했다면 우리나라 60대 자살률이 참혹한 수준으로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연금 혜택을 많이 받아야할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서민들이 오히려 국민연금에 강하게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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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여러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높은 소득 재분배의 효과를 지닌 사회복지의 기둥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연금에 가장 많이 저항하는 저소득,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게다.’(8, 9쪽)

국민연금은 생명체이다.국민연금 정책은 완벽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다. 큰 틀은 정해졌지만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꿀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이 국민연금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국민연금이 이룰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60대 자살률 수치도 달라질 것이다.

사보험 연금은 1천원 내고 850원 받는다. 국민연금은 1천원 내고 2천원에서 2천 5백원 사이 받는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수준 되면 2천 5백원 받을 것이고, 지금처럼 우리나라가 사회복지정책을 확고하게 펼치지 못하면 2천원 받을 것이다. 아니 2천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대부분 납부한 보험료보다 2배 이상의 연금액을 수령한다.’(76쪽)‘심각한 일은 대다수 국민이 국민연금과 사보험 중 사보험이 가입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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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사보험보다 유리한 점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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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민연금의 연금수령액은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실질가치로 지급된다. 이는 사보험의 연금액 기준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계속 국민연금에 가입한다면, 62세가 되는 2027년(서평자 주: 2033년부터 연금 개시자는 65세부터)부터 매월 43만 원을 받을 예정이다.’ ‘국민연금에서 밝히는 미래 연금액 43만 원은 사보험의 137만 원과 동일한 금액이다.’(60,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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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서 덧붙일 내용이 있다. 이 책을 쓴 오건호는 62세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오건호보다 몇 살 더 어린 세대는 2033년부터 연금 개시 나이가 65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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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지속가능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은 재정추계 기간이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설정한 재정추계 기간 70년이 지나치게 길다고 비판했다.’ ‘외국의 재정추계 기간은 60~75년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연금의 역사가 짧고 연금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속히 변하는 곳에서는 가능한 한 기간을 짧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민주노총은 신규 가입자의 가입 연령(24~27세)과 평균수명(84세)을 고려할 때 60년이면 재정추계 기간으로 충분하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10년이라는 차이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만약 재정추계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안정화를 위한 필요보험료율은 정부안에 비해 3.1%P 낮아진다. 즉 정부가 급여율 60%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한 필요보험료율 19.85%가 16.75%로 줄어들고, 급여율을 50%(서평자 주: 2008년 50프로에서 매년 0.5% 인하하여 2028년 급여율 40%로 낮추기로 확정)로 인하할 경우 필요보험료율은 15.9%에서 12.8%로 더욱 완화된다.’(100, 101쪽)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민주노총 주장대로 재정추계를 70년이 아니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예상 시점이 더 늦춰질 것이다. 가입자가 내야할 보험료율도 낮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에 의해서 느끼는 일반인들 두려움도 많이 누그러뜨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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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출산율은 너무 낮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을 단단하게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팍팍한 사회에서 그 누가 아이를 많이 낳고 싶겠는가. 이 사회에서 복지정책이 잘 펼쳐지면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이 든든하게 이 사회 구성원 노후를 지켜준다면 또한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높이면 국민연금 재정은 더 든든해질 것이다. 보험료율 9프로를 선진국처럼 18프로로 높여갈 필요가 있다. 천천히 높여갈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선 가입자 당사자가 싫어할 수 있다. 직장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 절반을 기업주가 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크게 저항할 것이다. 기업주들은 노동자 노후가 편해져야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국민연금 수익비가 높아서 국민연금 재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으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4대강 사업처럼 해만 끼치는 행정에 많은 예산을 쓰는 일을 없애야 할 것이다. 남북화해를 이루어 국방비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이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납세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루어진 부자감세를 원래 수준으로 돌려놔야 한다. 더하여 부자증세를 이뤄내야 한다. 그 다음 사회 전체 구성원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증세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다른 구성원들도 세금 더 내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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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과 기초 노령연금

2007년에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프로로 낮췄다. 국민연금 보험금을 낮췄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기초노령 연금을 만들었다. 65세 이상 노인 70프로가 기초노령 연금으로 월 9만 4천 6백원을 받는다. 박근혜가 대통령 공약으로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이 기초노령 연금으로 20만원 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된 후에 국민연금 기금 일부의 돈으로 모자라는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우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2011년 국민연금 1인당 수급액이 월 26만 원이다. 공무원연금의 12% 수준이고, 사학연금의 9% 수준이다. 그걸 헐어서 기초 노령연금 재원으로 쓴다? 너무 황당하다. 2011년 공무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18만 원이다. 거액의 퇴직수당을 제외한 수급액이 이 정도이다. 2009년 군인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35만 원이다. 2011년 사립학교교직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98만원이다. 민주당은 특수직연금 받는 사람도 기초노령연금 20만원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홍헌호는 민주당 주장을 비판한다. 나도 홍헌호 주장에 동의한다.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국민연금 대상자보다 높은 액수의 연금을 받는다. 굳이 그 분들이 기초노령연금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은 모자라는 재정을 국민세금으로 메운다. 국민연금은 이 세 연금보다 관련 당사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공평성 차원에서 옳지 않다. 아직 고령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당장은 국민연금에 쌓인 돈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몇 십 년 뒤에 국민연금 받을 대상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에서 돈을 빼 내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아랫돌 빼내서 윗돌 막으려 하면 그 집은 반드시 무너진다. 장기적으로는 적자로 돌아설 수도 있는 국민연금에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할 때가 닥친다. 이명박 정부 때 부자감세 했던 것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서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워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낮춰서 기초노령 연금을 만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 중 일부를 기초노령연금으로 쓴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지닌 약점과 강점이 책은 2006년에 나온 책이다. 국민연금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뀐다. 2013년 에도 국민연금 운영방식이 바뀔 것이다. 그럼 이 책이 나온 뒤에 두 번 운영방식이 바뀐다. 이 책이 바뀐 운영방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한계이다. 가장 큰 한계는 이 책에서 오건호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모두 합칠 것을 과감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말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오건호가 이 책 고쳐서 다시 내게 된다면 국민연금하나로 운동을 다뤄주길 기도한다. 오건호가 건강보험하나로 운동 펼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닌 강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민연금의 큰 틀을 이 책은 알려주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왜 연대임금인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왜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들어야 하는 지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2004년에 일어난 국민연금 반대 운동에 대해서 글쓴이 오건호는 반대만 하지 않는다. 일부 내용은 옳다고 인정한다. 물론 틀린 내용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말한다. 정부가 잘못한 내용도 차분하게 짚어낸다.이 책은 얇다. 값도 싸다. 5천 9백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한 권씩 사 읽기를 권한다. 바뀐 내용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고서 사보험 연금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우선 이 책을 꼭 사 읽기 바란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은 서민은 반드시 이 책 사 읽기 바란다. 이 책이 널리 읽히면 60대 자살률이 많이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시는 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책값은 단 돈 5천 9백원이다.

‘만셰이아’,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심찬희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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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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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찬희(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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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한철연 신년회 문화행사로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를 초청 상연하였고, 상연 후 감독과 함께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

2008년 이집트 카이로와 아스완 등지를 혼자 여행하던 윤주영 감독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 불리는 만셰이아에 이끌린다.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약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삶의 터전인 만셰이아는 카이로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도시 빈민들이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셰이아의 매력에 이끌린 감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아랍어로 적은 종이를 들고 이곳의 거주민들에게 대답을 구하고자 했다. 의사소통 안 되는 외국인의 이런 행동이 거주민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감독에게 아랍어의 벽을 넘어 거주민들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헨드와 제납 자매였다.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그리고 만셰이아의 거주민들에게도 역시 막연한 죽음보다는 매일의 구체적인 생존이 훨씬 절박하다는 이유 때문에 감독이 얻게 된 답은 죽음에 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감독은 2년 후 캠코더를 들고 혼자서 다시 헨드와 제납 자매를 방문하여 그들과 매일 함께 생활하며 영화를 제작했으며, 다큐의 많은 부분은 출국하기 며칠 전에 겨우 허가를 받아 촬영한 헨드, 제납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상영에 앞서 영화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한철연 회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상영 후 먼저 죽음이라는 큰 주제와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여성주의적인 내용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질문이 있었다. 영화가 이집트 여성들의 척박한 삶을 부분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감독이 선호하는 영화의 제목은 ‘죽은 자들의 도시’보다는 ‘만셰이아’다. 죽음이라는 단어 때문에 만셰이아에 이끌리게 되었지만,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은 만셰이아라는 장소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겪은 경험들이었다. 감독은 영화와 ‘죽음’의 연결고리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헨드와 제납의 대답에서 찾는다. 자매는 삶의 시작을 결혼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결혼은 또 죽음과 연결된다. 결혼은 이들에게 돈과 발(足), 즉 자유인 것이다. 결혼을 통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 같은 삶을 시작하게 해 줄 좋은 결혼이 없다면 죽음을 통해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죽음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삶이 불가능한 곳, 혹은 살만한 삶의 바깥이다. 헨드와 제납의 경우 그것은 결혼 바깥의 삶을 의미한다. 만셰이아에서 두려운 것은 흔히 보는 죽음이 아니라 전기와 수도가 없는 것, 그래서 신이 자신들을 돌아 봐 주지 않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 Mansheia(죽은 자들의 도시)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

죽음에 대해 물었으나 얻은 것은 죽음에 대한 답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었다. 이렇게 감독의 질문들은 예상하지 않은 답을 얻기도 하고, 혹은 대답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감독은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를 위해 3개월여를 기다렸고, 그 시간 동안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자매는 각자 감독과 단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삶의 답답한 부분들, 깊은 내면의 이야기들을 자매는 들려주었다고 한다. 겨우 인터뷰 승낙을 받은 것은 귀국을 3일 앞둔 날이었다. 하지만 제납이 비슷한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새벽에 울면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낸 것과는 달리, 헨드는 카메라 앞에서 침묵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는 감독 스스로 비하인드가 더 많다고 말하는 영화를 만들게 했다.

자매는 이집트 여성들의 삶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히 거의 강제적인 여성 할례, 그리고 처녀성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그중 흥미로운 부분은 결혼 첫날밤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하는 풍습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처녀성을 중시하는 풍습은 30년 전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을 때, 화면 바깥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가 인터뷰를 멈춘다. 촬영은 중단되었고, 얼마 후 인터뷰가 다시 시작된다. 똑같은 인물이 인터뷰를 하고, 방금 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처럼 이집트에서 처녀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있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웃음?) 감독은 같은 인물의 상반되는 인터뷰 장면을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고 평했는데, 이 중단된 인터뷰 장면은 그런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렵게 승낙 받은 인터뷰가 감독의 기대치대로 진행되지 못했을지라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의 나레이션은 거의 없다. [만셰이아]는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지만, 함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캐묻거나 들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헨드나 제납이 들려주는 것들 외에는 어떤 일들이 있어왔는지를 알 수 없다. 상반된 내용의 인터뷰를 하며 공공연한 진실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공모하는 자의 은밀한 웃음 혹은 비웃음이나 자조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이와 함께 할 때, 웃을 때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연기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다. 헨드와 제납이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지금 카메라 앞에서 들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결혼 바깥의 삶이 죽음과 등치될 만큼 그들에게는 지금의 결혼 제도, 아버지의 법과 웃으며 공모하는 것이 살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 감독은 언어의 벽에 부딪치다 헨드와 제납을 만나게 되었고, 만셰이아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 보다는 수도와 전기, 온수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더 친숙하다는 사실은 헨드, 제납 자매와 만셰이아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닿게 했다. 그리고 친구로서의 윤주영 감독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영화가 침묵 앞에서 멈추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간극에 이르게 했다. 카메라는 멈췄지만 결코 쿨한 태도로 멈추지 못하고, 서성이는 듯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 침묵 앞에 선다. 윤 감독이 친구로서 헨드와 제납의 삶에 깊이 다가간 것처럼, 앞으로 감독의 카메라도 자신과 타인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더 들려주길 기대한다.

 

한국과 미국 1프로가 일으킨 쿠데타를 막자! 강은희의『위험한 거래』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한국과 미국 1프로가 일으킨 쿠데타를 막자!

– 강은희 저,『위험한 거래,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강은희 책은 쉽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이 나라 서민이 살 수 있습니다.” “한미에프티에이 어려운데 누가 알아요? 누가 관심 갖겠어요?”

내가 둘레 분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미매국협정은 사실 어렵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한미매국협정 하면 우선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든다. 전문가들만이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미매국협정 때문에 당신들이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볼 것이 불을 보듯 한데도 그렇다.
강은희 지음,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위험한 거래』, 책이 있는 마을, 2012.
강은희는 많은 사람들이 한미매국협정을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크게 의식한 듯하다. 강은희는 1장과 2장에서 먹거리 문제를 다뤘다. 독자들이 한미매국협정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배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장에서 강은희는 재벌이 먹거리 시장, 즉 골목상권까지 차지하려는 사실을 정확히 다룬다. 재벌이 전국 편의점 대다수를 차지한다. 골목에 있던 구멍가게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대신에 재벌 편의점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재벌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소업체들이 편의점에 삼각김밥등을 댄다. 삼각김밥은 중소업체가 창조한 상품이다. 재벌들은 편의점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자체 생산한다. 많은 중소업체들이 망한다. 재벌은 또 그치지 않는다. 카길, 몬산토로부터 값싸게 질 낮은 먹거리 재료를 사 온다. 그 재료에는 유전자변형 식품도 들어있다. 재벌들은 최소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내려고 안달한다. 이 땅 사람들 건강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강은희는 재벌이 먹거리 시장을 흙탕물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 재벌이 한미매국협정을 왜 옹호하는 지를 아주 쉽게 독자한테 알려준다. 이 땅 서민들이 질 나쁜 먹거리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알려준다.

서민들은 앞으로 비싼 의료비를 어찌 감당해야 하나?

 

‘위내시경 한국 4만원, 미국 100만원. 대장내시경 한국 5만원, 미국 160만원. 맹장수술 한국 30만원, 미국 900만원. 승모판치환술 한국 180만원, 미국 5700만원. 슬관절치환술 한국 50만원, 미국 6600만원’(마포의료생협 소식지, 2011년 3월)

지금 한국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전 세계의 국민건강보험제도와 견주어 볼 때 상당히 좋은 제도이다. 더 보완할 점이 있지만 좋은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최근에 피부과에 간 적이 있다. 병원에서 진찰 받고 주사 맞는데 한 5천원 냈다. 약국에서 3일치 약 사는데 한 3천 원 냈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적은 돈을 냈다. 위 인용 글에서 보듯이 미국에서는 현실적으로 꿈 꿀 수 없는 일이다. 3일치 약 값이 3천원인 까닭은 그 약이 복제약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약이었다면 몇 배 더 비쌀 것이다. 열 배 이상 비싼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맹장수술 받는데 40만원이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르다. 9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이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10년, 20년, 3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맹장 수술비가 미국 수준이 될 것이다. 내가 늙어서 겪게 될 현실이다. 우리 자식들이 겪게 될 현실이다. 한미매국협정이 시작되었으니 의료민영화는 이루어질 것이고 약값과 의료비가 오르는 것은 서럽지만 일어날 사건이다. 그렇다고 병 없이 살 수 있을까? 질 나쁜 먹거리를 먹는 서민들이 병 없이 살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노인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우리 집에서 겨울에 내는 도시가스비가 한 달에 13만원이다. 우리보다 집이 더 큰 경우에는 당연히 도시가스비가 더 나올 것이다.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은 노인들에게 한 달 13만원은 큰돈이다. 그래서 노인들 중에는 도시가스를 쓰지 않고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그나마 전기세가 적게 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지 않고 지속되면 노인들이 겨울에 전기장판조차도 쓰실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최근 1년 사이에 전기세가 두 번이나 올랐다. “최근 한국전력공사는 전기요금 인상안을 또다시 제출했다. 벌서 일년 사이에 세 번째다. 한국전력공사 이사회는 지난 5월 16일 전기요금을 평균 13.1%에 달하는 인상안을 의결한 뒤 지식경제부에 제출했다. 작년 2011년 8월과 12월에 각각 4.5%와 4.9%를 인상한 뒤 5개월 만에 또다시 인상안을 제출한 것이다.”(226쪽)한미매국협정이 시작 되었으니 한전 민영화가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다. 전기세가 오르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오르는 폭도 더 가파를 것이다. 전기세가 너무 오르면 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이 88만원세대들도 겨울에 난방비를 아끼려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21세기에 바로 이 땅에서 20세기 초중반, 19세기 이 전에 일어났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계삼은 말한다. “석유가 이제 한 세대만 지나면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작은책> 2012년 3월호, 94쪽) 앞으로 30년 또는 40년 뒤에는 석유자원이 지구상에서 바닥날 것이다. 만약 이 말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전기세는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를 것이다. 2003년 폭염 때 프랑스에서는 노약자 약 1만5천명이 돌아가시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름 폭염 때 전기세 아끼려고 에어컨 설치 못하는 노인,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한미매국협정은 재앙이다.

한국 헌법은 개밥의 도토리일까?맞다. 한국 헌법은 개밥의 도토리이다. 미국 주법이 제일 힘세다. 한미매국협정문은 그 다음으로 힘세다. “대법원이 2007년 1월 12일 법무부에 보낸 의견서를 보면 ISD 제도의 문제점은 주권의 침해 가능성, 중개청구 대상에 사법부의 재판이 포함되는 문제, 국가의 공공정책 왜곡 문제, 중재절차의 투명성 문제, ISD가 주로 미국투자자들의 보호 장치로 기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143 – 144쪽) 그래서 몇 몇 뜻있는 사람들은 한미매국협정 국회 날치기 통과를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ISD 즉투자자 국가 소송제는 이 땅 서민들한테 재앙이다. 나라를 뛰어넘는 자본이 국제분쟁위원회에 이 나라 전기, 철도, 수도 등등에 관련해서 한국을 상대로 제소하면 백이면 백 한국 정부가 저들에게 벌금을 물어줘야 한다. 저들에게 한국 헌법을 들이대면 저들은 비웃을 것이다.

“ISD는 미국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존해주기 위해 국가의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고 국가의 복지정책에 심각한 재정적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중재재판’을 담당하는 세계은행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국제금융기구이다. 중재 결과는 대부분 투자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외국 사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145쪽) 한미매국협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될 때 민주당(2012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87명 가운데 47명은 출판기념회 참석했다. 민주노동당과 일부 민주당 국회의원만이 한나라당(2012년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몸싸움을 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김선동은 온 몸을 던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윤봉길 의사한테서 회초리 맞아야 한다

 

▲ 위험한 거래, 강은희 지음, 책이 있는 마을 펴냄

농업을 우습게 본 노무현과 이명박은 윤봉길 의사한테서 회초리 맞으면서 배워야 한다. 나라를 뛰어넘는 식량자본 카길과 몬산토가 윤봉길 선생 말을 더 잘 따른다. 서럽고도 슬픈 현실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 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생산에 기대지 않은 것이 없느니만치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 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 중에서- (‘고인돌’출판사 사장인 정낙묵 명함에서 다시 가져옴)

일본은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 맺을 때 일본 농업을 확실히 보호한다. 라고 송기호는 말했다. 한국은 일본한테서 배워야 한다.

우리 아버지한테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내가 어린이(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논에서 거머리 잡는 방법이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다르다. 일본 사람은 깡통을 허리에 매고 잡은 거머리를 깡통에 넣는다. 한국 사람은 (잠시 아버지가 웃으며 말을 멈춘다.) 잡은 거머리를 같은 논 저 쪽으로 던진다. 저 쪽으로 휙 던진다.

지금 한국 땅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되지 않고는 절대로 복지정책을 펼 수 없다.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한미매국협정이 이번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한다.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 이정희만이 홀로 한미매국협정 폐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2012년 4.11 총선 전에는 전국에서 들끓었던 한미매국협정 반대시위가 지금은 왜? 일어나지 않을까. 이 땅 진보정당 책임이 크다. 이 땅 시민단체 책임이 크다. 이 땅 지식인, 언론인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위험한 거래』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자. 한미매국협정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 이 책을 선물하자.

한미매국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폐기한 후 천천히 연구해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다시 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천덕꾸러기처럼 무시당해 온 이 땅 농민을 구해야 한다. 나라를 뛰어넘는 자본으로부터 이 땅 공공부문을 지켜내야 한다. 그들로부터 이 땅 99프로를 지켜내야 한다.

2003년 폭염 때 프랑스에서 노약자 약 1만5천명이 돌아가신 사건을 잊지 말자!

한국 자살률이 2012년 지금 세계 1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국에서 한미매국협정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