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설미향의 두 자화상[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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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내일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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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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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웹진의 [문화보기] 코너에 성황리에 연재를 한 [나무이야기]와 작가의 블로그http://dandron.blog.me/에 있는?김설미향 작가의 그림에 대한 단상임을 알립니다.

1. 작가의 두 자화상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 자화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자화상이다. 나무들을 자화상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이유는, 작품에는 항상 작가의 의식이 따른다는 예술 일반론에 기대어 하는 말이다.

드로잉화 자화상들은 제목도, 번호도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뼈만 남은 듯 볼 품 없다. “음, 그림이 꿈틀거리는군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아는 법, 자화상의 진가를 느끼고 감”이라는, 알쏭달쏭한 덧글을 남기고 가는 이도 있다. 나도 덧글을 따라, ‘그림이 요동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려 애써본다.

그나마 작가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의 행복하지 않은 심정을 읽을 단초가 있다. 작가는 묻는다. “나의 가족은 무엇”인가? 잠자다가도 작가는 운다. 추측으로만 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의미이다. “쓰레게 줍는 노인들에게 슬프고”, 소비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

또 다른 작가의 자화상, [나무이야기]의 그림들은 드로잉 자화상에 비해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채색이 우선 시선을 붙잡는다.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림들에 논리적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가 행복한 봄을 즐긴다. 나무는 아이들(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풀어준다. 그러나 무참히 상처받는다. 상처받고 잠이 든 나무는 동료들의 위로에 따라 다시 깨어난다(다시 생명을 얻는다). 나무는 나비들과 새들을 포함하여 자연과, 사람들과 관계한다. 아마도 자화상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을 짓누르는 형식에다가 인간의 의미를 새겨 넣는다’는 경구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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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을 읽기 위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 전반부(1-5절)에서 말하는 예술 일반론을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전 예술론과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모방이나 사실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로부터 등을 돌려,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주관인 내가 객관인 자연과 상호 교호작용을 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교호작용의 예를 서정시인의 시작(詩作) 상태를 빌려 설명한다. 서정시인에게 기쁨(해방된 욕구)과 비애(억압된 욕구)의 상태에서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 결핍된 욕구인 열망이 해방받기 위해 분출된다(니체 식으로 말하면, 욕망이 주관을 이끌어낸다). 니체를 따라,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주관의 열망이 분출되면 자연 경관이 다시 우리의 욕구를 순수한, 의식 없는 인식을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의 창작 상태는 주관적 의지와 반성적 자연 상태를 나누어갖게 된다.

예술가가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가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천국과 지옥)을 빌려, 예술가가 왜 가상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한다. 인간은 그의 토대에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그림 하반부). 그러나 매 순간 가상(상반부)이 만들어내는 욕구 충족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상인 즉 [가상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가상은 이 세계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니체의 유명한, “세계는 예술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경구가 완성된다.

예술 일반론에 더하여 리얼리즘 예술론도 잠깐 살펴보자. 까간은 [미학 강의]에서 리얼리즘과 고전 문학의 차이를 명료히 했다. 고전문학에서는 성과 속, 미와 추의 게토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는 이 게토가 무너진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 내면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미, 추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유 역시 어떤 목적 때문이다. 예술 일반론에서 예술의 목적이 가상에 대한 필요였다면 리얼리즘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 치유에 있다. “그대들,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은… 플라터너의 거친 혓바닥으로 폐결핵의 가래침을 낱낱이 핥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해악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진수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카소를 어느 화풍이라고 규정하든,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는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말들이 죽어가고, 인간이 학살당하고 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도 있고,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예술을 리얼리즘 예술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이것이 현실이다), 참 인간화된 세계는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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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김미향의 그림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자화상인 그림에 첨가된, 이해 가능한 절제된 경구들에는 풍성한 의미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물론 자연과의 교호작용, 형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무의 눈을 보자. 그(녀)는 암, 수 구별 이전의 존재로서 나비(이성이 아니다)를 쫒고, 아이들을 쫒고, 죽었다가(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살아)난다. 자연이란 원래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나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이 가능할 것이다.

우중충하고 암울한 드로잉 자화상에는 다행스럽게 귀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작가가 위로받을 양식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림은 적적성성(寂寂惺醒)하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다. 눈은 차분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들어 있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면, 눈은 아마도 맑은 갈색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눈은 맑다. 응시하는 시선이란 반성적 시선이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작가는 오늘날 가족일반에 대해 반성한다. 가족 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박범신은 이득과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 가족의 세태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느 여성은 옷 장사하는 시누이가 제사 때마다 짝퉁을 들고 와 강매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했다. 가족 관계에서조차 장사꾼의 이득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그런 장사꾼을 믿느니 차라리 창녀를 믿으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을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사회적 분배에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가족이란 내게 무엇인가? 소통하는 존재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필자는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는, [그림 6]에 기대어 작가의 의도를 과감하게 추측해 본다. “오늘은 내게 기대세요, 내일은 내가 당신에게 기댈께요.” 그림책의 나무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소명(Gerufe)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예술가가 되어 타인들(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나에게 와서 쉬라. 오늘 가족 일반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족 공동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은 또 다른 지옥이다(홍 선생님 어록). 가족은 작은 사회이다. 가족이 이득관계로 지옥이듯이 사회 역시 이득관계로 지옥이라면, 이런 사회와 가족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 예술가의 의도이다.

드로잉 자화상에 이어지는 글 속의, 작가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 반드시 짚어야 한다. 폐지줍는 노인과 몸 파는 여성들 때문에 고통받는 작가는 ‘창밖에 떨고 있는 저 개 한 마리 대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딘 것이 오늘 사회 현상임을 작가는 고발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나은 사회는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회이어야 한다.

작가가 인간으로 많은 약점을 지녔다하자(자화상에서 보듯, 수려하지 않은 외모이든, 시에서 보듯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든). 시인의 의도는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기에 그녀는 참 좋은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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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읽다가(보다가), 몸 어느 부위를 때리는 충격을 받는 것은 뎅커(Denker)로서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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