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찻퐁의 아름다운 시선/이지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아피찻퐁의 아름다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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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올해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영화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쿨(Apichatpong Weerasethakul)이라는 이름도 낯선 태국 감독의 영화 [엉클 분미Uncle Boonmie :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라는 생소한 영화였다. 영화를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이 태국 감독의 이름을 외우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들뢰즈의 영화론을 전공한 필자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 감독의 영화들을 꼭 보라고 추천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들과 게으름으로 지난 봄까지 그의 영화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스쳐오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봄, 이름만 들어왔던 이 낯선 감독의 영화를 드디어 보고야 말았다. 맨 처음 본 것은 2006년작 ?징후와 세기Syndromes and a Century?였고, 이 영화를 시작으로 그의 영화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

아피찻퐁의 독특한 영화세계

 

시골의 병원에서 어떤 여의사와 그를 좋아하는 어떤 남자, 그리고 여의사가 좋아하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중반부에 이르자 배경은 갑자기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고 똑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전반부와 거의 동일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완전히 이상한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관객들이 기대할만한 어떠한 서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서사를 방해하기 때문에 편집되어 마땅할 만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엔 ‘대체 이 영화는 뭐지…’라며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영화의 매우 느린 리듬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영화 속 세상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었다.

매우 느리면서도, 묘한 리듬. 그리고 영화 속에 흩뿌려지듯 드러나 있는 정부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뉘앙스. 나중에 이 영화가 군부의 검열에 의해 몇 장면 가위질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참으로 놀랐었다. 검열 자체나 가위질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묘하고 어려운 예술 영화에 뉘앙스로 산포된 비판적 정조를 군부 당국이 알아차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자면, 태국 군부는 대체 얼마나 지적인 심미안을 가졌기에 이 영화의 비판적 뉘앙스를 해독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엉클 분미

실은 이 우스갯소리를 빌어 말하고 싶은 점은 아피찻퐁의 영화는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성취를 이루어낸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글에서는 자세한 분석을 하지는 못한다. 그저 그의 영화를 지금 이 시대에 왜 보아야 하는가만을 말하고자 한다.
하여간 필자는 [징후와 세기]를 출발점으로 아피찻퐁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2004년작 [열대병 Tropical Malady]과 2002년작 [친애하는 당신 Blissfully Yours], 그리고 2000년작 [정오의 낯선 물체 Mysterious Object at Noon]로 필자의 아피찻퐁 영화에 대한 애정은 이어졌다.

그의 영화들은 모두 독특한 구조와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열대병]과 [친애하는 당신]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영화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한 이분법적 구조를 띠고 있는데, 주로 도시와 정글의 서로 다른 삶의 모습과 흐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느린 흐름의 영화 속에는 서사와 무관한 태국인들의 삶의 모습들이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담겨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영화는 응시한다. 도시의 삶, 그리고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물 그리고 그들 모두를 끌어안는 그들의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신화적 믿음이 펼쳐진다. [열대병]의 경우 호랑이와 인간의 교감이 후반부에서 매우 강렬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제목부터 낯선 [정오의 낯선 물체] 역시 매우 새로운 방식의 구조와 리듬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허구와 실재가 서로를 넘나드는 기묘한 다큐멘터리 형식을 보여주며, 초현실주의자들의 창작방법론인 ‘우아한 시체(cadavre exquis)’ 개념에 기초하여 전개되는 독특한 개념 영화이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이어가게 하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신화로 갔다가 전쟁의 역사로 갔다가, 주변의 이야기로 갔다가, 멜로 드라마로 가기도 한다.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며 태국 시골 지방에 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이고도 역사적인 기억들과 집단적 무의식을 그들의 삶의 모습과 함께 담아낸 이 영화 역시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 삶의 어떤 부분을 바라보고 듣게 된다. 서사로 직조된 극적 효과를 갖는 어떤 이야기에 관객이 흡수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삶과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바라보고 듣게 된다. 그 느리고 묘한 그러면서도 매우 단순한 리듬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과 같은 리듬을 타고 함께 흘러가게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많은 관객들의 경우 서사와 무관한 흐름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뜬금없이 깜깜한 숲속을 헤매던 군인이 호랑이와 마주하며 교감하는 신화적인 이야기에 놀라 영화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허구도 실재도 아닌, 혹은 허구이면서 실재인 영화의 기묘한 방식에 놀라고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낯선 영화를 거부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관객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관객들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영화 방식에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보기와 듣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눈과 마음에 퍼부어지듯 쏟아져 들어왔던 헐리우드식 영화는, 아피찻퐁의 표현을 빌자면,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붙잡아 두기 위해 대략 2시간 동안 너무나도 복잡한 장치와 스펙타클을 만들어 내왔다. 코카콜라에 익숙해지듯 그런 방식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에 아피찻퐁의 영화는 정말로 ‘낯선 물체’이고, 그래서 경우에 따라선 불편하고 이상한 물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응시와 성찰

하지만 헐리우드식 영화의 속도와 볼거리에만 익숙한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마음과 의식의 리듬 속에서 그의 영화를 본다면, 그가 보여주는 태국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숲과 그들의 기억과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가서 우리도 함께 그들의 삶을 응시하게 된다. 아피찻퐁의 영화의 미덕과 관련하여 필자가 말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응시이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건, 아니면 핸드헬드로 사람들을 따라가건, 혹은 매끈한 달리샷으로 화면을 관통하건 간에 감독은 태국의 삶과 자연과 기억을 응시하게 만든다.

응시, 즉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그것이 지닌 상처가 무엇인지를 알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의미와 상처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싯구절을 인용해 다시 표현하자면,

오래 쳐다보다보면 사랑하게 된다.
오래오래 쳐다보면
상심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최민, [그대만 허락한다면] 中에서)

그리고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면밀히 생각하고, 성찰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성찰’이란 결국 철학자가 하려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닌가. 세상을 이해하고, 그 세상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좀 더 낫게 만들고자 성찰과 실천을 하는 것. 이것이 철학이 하고자 하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피찻퐁의 영화는 헐리우드식 폭력과 스펙타클에 눈과 영혼을 빼앗겨 버린 관객들의 영혼을 정화시켜주며,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과 그 속에 깃든 인간사의 모든 기억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사유하게끔 해준다.

들뢰즈식의 언어를 사용하여 다시 표현하자면, 아피찻퐁의 영화는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감각과 영화적 기호들을 창안하여,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그 기호들이 강제하는 사유를 창조하게 만든다. 물론 이 낯선 기호들은 우리에게 이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쉽게 허락해주지는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새롭고 낯선 기호들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거부하거나 피곤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다른 예술과 달리 영화의 경우 오락물이라는 선입견이 워낙 강해서 관객들은 익숙하고 편한 재미만을 찾으려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그의 영화를 난해하고 이상하다고 외면하는 것도 이상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언제나 우리의 익숙한 관습만을 답습해야 할까.

영화는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거나 새로운 예술적 감각을 구성해내면 안된단 말인가. 말이나 글을 통해 보여줄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바라보며 느끼고, 그러한 응시와 감응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전개해야 하는 건 소위 영상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새로운 성찰 방식이 아닐까 싶다.

아피찻퐁의 이러한 성찰과 사유방식은 올해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엉클 분미]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피어났다. 바로 며칠 전 서울에서 열렸던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CinDi)’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커다란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삶과 환상과 꿈과 존재의 모든 차원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이전 영화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관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도, 슬퍼서도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저 어떤 존재하는 생명의 리듬과 하나로 만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이유를 말한다면, 아마도 독자들 중에는 너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글로 쓰고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영화로 만들기 때문에, 이 영화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는 감독의 언급은 영화를 보며 흘렸던 내 눈물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폭력의 시대와 시선의 윤리성

난해한 예술영화라고 평가되는 외국 감독의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아피찻퐁의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영화가 새로운 사유를 촉발시키고, 영화의 개념 자체를 새롭게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흥행하고 있는 ‘나쁜 영화들’ 때문이기도 하다. 피의 향연과 난도질, 복수의 끝을 보여주는 몇몇의 한국 영화가 요즈음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평론가들의 의견과 평가도 갈리고 있는 모양이다.

폭력성 때문에 상영이 몇 차례 지연되기도 했던 어떤 영화의 경우, 왜 이런 잔혹한 영화를 만드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에 필자는 사실 화가 났었다. 현실에 그런 폭력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영해야 할 현실엔 우리가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할 다른 현실들도 분명 존재하는데, 그 감독이 대중들에게 엄청난 돈을 들여 보여주려고 선택한 ‘현실’이라는 것들은 대체 무슨 근거에서 선택된 것인가.

물론 피범벅이 난무하는 영화라고 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여주느냐 하는 ‘시선의 문제’이다. 타인의 고통을 가학적인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고, 카메라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며 모든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한 시선. 이것은 분명 ‘나쁜 바라보기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런 나쁜 방식으로 세상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세상 보는 방식도 병들어 타인의 삶의 고통에 둔감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며칠 전 앞서 언급한 영화제에서 피범벅+난도질 한국 영화를 한편 보았는데, 그 영화를 보는 내내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한 여자의 삶을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가학적으로 몰고 가서 결국은 그 여자가 모두를 죽여버린다는 설정의 영화였는데, 이 영화가 끝난 후 몇몇 관객의 박수소리에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영화가 얼마나 기존의 장르 영화의 관습과 상투성들을 짜깁기하고 뒤섞어서 영화적으로 촌스러운지는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타인의 불행과 그 불행을 관음증적으로 즐기는 시선에 동조하여 박수를 치는 관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시대가 하수상하여 끝없이 피범벅+난도질 영화가 생산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며 시대탓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모든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가. 논리와 글을 사용할 줄 안다고 모두 철학자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카메라를 사용할 줄 안다고 모두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쁜 영화에는 그것을 만드는 감독과 제작자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영화를 흥행하게 하는 관객도 나쁘다고 본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가학성과 폭력에 동참하면서, 인간이라면 자신이 사는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관객으로 아무 죄의식 없이 동화되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쁜 관객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나쁜 시대에, 저예산으로도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감독의 영화들이 소중한 것이다. 삶을 새롭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바라보고 성찰하게 해주는 영화. 좋은 영화란 바로 이런 영화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 친절하게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진들의 게재를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역시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입니다. (글쓴이)

숭고한 히스테리자 몬드리안/박영욱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숭고한 히스테리자 몬드리안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몬드리안은 헤겔주의자이다?

 

지젝에 따르면 헤겔은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이다. 히스테리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강박충동이다. 헤겔의 텍스트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겔이 거의 똑같은, 하지만 헤겔 자신에 따르면 이전의 단계보다 고양된 논리구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음을 쉽게 경험하였을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에게 반복된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이나 목적을 결코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환자는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며, 그러한 집착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소유하고 싶지만 소유할 수 없는 이성에 대한 집착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것이 히스테리 환자의 정해진 운명이다.

헤겔의 대상은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초월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아예 인식의 대상에서 제거함으로써 히스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헤겔의 소유욕은 히스테리와 같은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는 절대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인식의 틀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러한 절대지는 소유하고 싶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히스테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 대상은 숭고한 대상이다.

▲ 몬드리안ⓒ위키피디아

물론 헤겔이 추구하는 대상은 실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숭고한 어떤 것은 아니다. 단지 헤겔에게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대상 자체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숭고는 그러한 덧없는(?)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 헤겔의 태도에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 1872-1844)의 작업 역시 헤겔과 마찬가지로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의 히스테리적인 집착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서 모더니즘 예술 일반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근대철학을 막장까지 끌고 간 헤겔에게서 숭고함 혹은 위대함을 느낄 수 있듯이 몬드리안의 작업 역시 모더니즘의 막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위대하다. 헤겔에게 ‘위대한’ 헤겔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몬드리안에게도 당연히 ‘위대한’ 몬드리안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추상이라는 무식하고도 억지스러운 명칭이 붙기도 한 몬드리안의 회화는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는 이름으로 요약된다. 신조형주의의 목적은 재현주의를 거부하고 이미지가 어떤 대상의 이미지가 아닌 그 자체가 즉물적인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러하다. 재현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회화의 이미지는 어떤 대상 혹은 모델을 재현한 것으로서 그 자체는 항상 어떤 것의 이미지일 뿐이다.

몬드리안에 앞서서 피카소 역시 회화를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피카소의 작업은 모델에 대한 단순한 복제를 넘어서 변형하고 왜곡하였지만, 여전히 모델에 대한 재현주의의 관점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무수한 단면으로 대상을 쪼개었지만 여전히 모델이 되고 있는 형상들 자체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신조형주의는 재현주의에 대한 완전한 단절의 소산이다. 몬드리안은 회화에서 재현된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 경우 회화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회화를 어떤 것의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즉물적인 사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회화의 이미지는 어떤 것의 환영이 아닌 존재 자체인 셈이다.

어떤 것의 이미지가 아닌 사물로서의 이미지 자체를 만드는 것이 몬드리안 작업의 핵심이다. 몬드리안에게 이는 곧 회화에서 어떠한 재현적인 암시도 배제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신조형주의를 선언한 이후 몬드리안의 작업은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재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자 하는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모더니즘의 그리드

 

흥미로운 사실은 몬드리안이 재현주의를 거부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식이 모더니즘 회화 일반의 패러다임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는 피카소의 작업이 (분석적 큐비즘 시기의 피카소)가 어정쩡하게 재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것과 달리, 그리드(grid)를 내세움으로써 재현주의를 청산하고자 한다. 너무나 잘 알려진 1920년의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구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그리드(격자)는 르네상스회화에서 모델을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장치이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모더니즘 회화에서 사용된 그리드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참고할 그림: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구성’(몬드리안, 1920)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리드는 어떤 것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리드 자체가 그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회화는 그리드로 만들어진 어떤 이미지가 아닌 그리드 자체인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회화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그리드라는 미술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크라우스는 모더니즘 미술의 그리드를 헤겔 논리학을 빌어서 설명한다. 헤겔 논리학에서 최초의 범주는 ‘존재’(Sein)이다. 이때 존재는 적어도 세계가 나타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범주로서 논리적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존재’는 단지 ‘있다’(존재)라는 규정 외에는 어떠한 규정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단지 ‘존재한다’가 아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세계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순수한 존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존재는 어떠한 규정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공허한 것이며 ‘없음’(무, Nichts)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리드는 정확히 헤겔 논리학의 ‘존재’와 일치한다. 그것은 어떤 것, 즉 어떤 조형적인 것이 있기 위한 최초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어떠한 구체적인 사물도 아닌 셈이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존재라는 범주가 사고의 형식을 추상화한 것이 아닌 존재론적 범주이듯이,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리드는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형식이 아닌 그 자체 존재론적인 위상을 갖는다. 말하자면 그리드는 조형적인 것의 존재론적 토대인 셈이다. 아마도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해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을 헤겔주의자로 자처하며 끊임없이 헤겔을 인용하였으며 자신의 작업을 헤겔 철학과 연관지었던 몬드리안에게 그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헤겔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몬드리안 또한 단번에 직관적인 통찰만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헤겔이 셸링의 낭만주의를 비꼬았던 것처럼 몬드리안 역시 낭만주의와는 달리 숭고한 가시밭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에게 그리드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드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어떤 것이었다.

가령 1920년의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구성’을 다시 보자. 이는 단순한 그리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단순한 검은색 선과 면적이 다른 사각형의 면, 그리고 기본적인 색의 배치는 적어도 조형적 차원에서 볼 때는 존재의 시원을 나타내며 어떠한 재현적인 암시도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결코 몬드리안에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생각지도 못하였던 재현적인 요소가 발견되었다. 이 그림에서 선과 면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처럼 어떤 위계질서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선은 형상을 형성하고 면은 자연스럽게 배경이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재현의 구도인 셈이다. 이러한 위계질서를 극복하지 않을 경우 재현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셈이다.

그리드의 변형과 파괴는 회화론의 변화가 아닌 일관성의 결과

 

부주의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약간의 형태변화로만 여겨질 수 있을 뿐인 변화는 193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의 선이 아닌 두 개 혹은 세 개의 겹친 선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그는 선을 두 세 개로 겹침으로서 선과 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1932년 ‘이중선과 노란색의 구성’을 보면 화면 상단에 검은색 수평선이 두 개로 겹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검은색 수평선 사이에 낀 흰색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좁은 흰색 면일까 혹은 흰색 선일까?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선과 면의 중첩 혹은 구별짓기 자체의 파괴가 나타난다. 화면은 선과 면, 혹은 형상과 배경의 위계질서가 아닌 오로지 리듬에 의해서 구성된 단일한 화면이 되는 것이다.

*참고할 그림: ‘이중선과 노란색의 구성’(몬드리안,1932)

선과 면의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리듬만을 강조하는 그의 작업은 1940년대 이후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1942-3년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는 선과 면의 차이가 없어지고 리듬만 남는다.

많은 이론가들은 1940년대 이후 몬드리안의 작업이 신조형주의의 원칙을 파기하고 재현주의로 전향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가령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브로드웨이가의 현란한 거리를 재현한 것으로서 예전의 비재현주의 회화를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이 아닌 ‘뉴욕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등의 구체적인 거리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의 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뉴욕시, 브로드웨이 등은 그의 그림이 재현하는 대상이 아닌 그저 그가 작업한 장소를 나타낼 뿐이다. 당시 그림은 분명하게 선과 면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자 한 그의 작업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인 ‘승리의 부기우기’가 왜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1942년부터 44년 죽기 전까지 몇 번이고 이 그림을 다시 그렸지만 결국은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미완성의 작품이 말 그대로 작품의 완성도면에서 미성숙한 것이며, 몬드리안의 극히 실망스러운 말년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몬드리안이 정작 이 작품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고친 이유가 있다. 그는 재현주의를 피하고자 선과 색의 위계질서를 해체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 이 그림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어떤 시각적인 번쩍거림, 즉 시각적 환영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참고할 그림: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몬드리안,1942-3) ; ‘승리의 부기우기’(몬드리안,1942-4)

마치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이 시각적인 번쩍거림은 심지어 브로드웨이의 밤거리를 묘사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기에도 충분하다. 그에게 시각적 환영이란 곧 또 다른 의미의 재현적 구조를 암시하는 것이므로 피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시각적 환영을 피해야만 하였다. 그러지 못할 경우 그의 작업은 송두리째 실패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시각적 환영이 발생하지 않을 때까지 그림을 몇 번이고 고쳐 그려야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인 것이었다. 어떠한 것의 이미지도 아닌 사물 자체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지만 결코 죽고 나서도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몬드리안은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대상을 소유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그것에 집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몬드리안에게 회화는 단순히 하나의 표현수단이 아닌 숭고한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몬드리안의 작업은 단순히 몬드리안 개인의 성향이 아닌 모더니즘 회화 일반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모더니즘 회화는 현실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서 초월적인 숭고한 대상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 돌아오는 부메랑 효과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그것은 헤겔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헤겔은 ‘위대한’ 히스테리 환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몬드리안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위대한’ 히스테리 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을 이유로 몬드리안의 그림을 싣지 못하고 ‘참고할 그림’ 목록만 나열했습니다. 독자들의 양해와 저작권에 대한 깊은 분노의 공유를 바랍니다.(편집자)

 

가상이 실재를 삼키다, 영화 ‘아바타’/심혜련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가상이 실재를 삼키다

영화 ‘아바타’
글: 심혜련(전북대학교 교수)

 

내용을 읽고, 형식을 보다

 

1000만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개념에 불과하다. 워낙 숫자 감각이 떨어지는 나는 내가 계산할 수 있는 수의 단위만 넘어가면, 그저 ‘엄청나게 많다’라는 추상적인 문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뇌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나게 많은 수인 1000만이 요즘 영화 관객 수와 관련해서 심심치 않게 이야기된다. 어떤 영화의 관객이 1000만이 넘었네, 안 넘었네 하면서 말이다.

최근 제임스 카멜론이 오랜만에 만든 영화 「아바타」의 관객 수가 1000만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 1000만에 나도 들어간다. 심지어 두 번 들어간다. 처음에는 2D 영화로 보았다. 3D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별 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2D 영화로 본 것이다. 사실 귀찮아서였다. 나는 서울이 아닌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바타 영화의 3D 버전을 상영하는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바타를 3D로 보기 위해서는 예약 등등의 번거로운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그리고 내러티브보다는 스펙터클을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화를, 그러한 것을 무시하고 2D로 본 것이다.

그 후 다시 3D로 보았다. 동생이 3D로 아바타를 보고 나서, 영상의 충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실감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생은 스펙터클한 영상의 충격을 몸으로 체험해서, 머리가 너무 아파서 영화보고 나서 두통약까지 먹었다고 하니, 도저히 3D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아바타를 두 번 보면서, 한번은 내용을 한번은 형식을 중심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를 이야기할 때, 매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매체의 형식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체 내용과 매체 형식은 서로를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CG가 많이 사용된 영화들의 경우,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줄거리가 뻔하다, 예고편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매우 실망했다 등등의 감상은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를 본 경우이다. 한편 스펙터클이 매우 좋았다, 영상의 충격이다 등등의 감상은 형식을 중심으로 그 영화가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컴퓨터 기술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이야기 구조와 이미지와 이야기 구조의 상관 관계, 그리고 그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과 은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영화를 주로 감각과 스펙터클 등 감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 영화 아바타

영화 내용과 그 영화 내용을 구현하는 기술적 형식은 둘 다 영화를 읽고 보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내용과 형식을 분명하게 나누어 보면,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미지 없이 내러티브로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문학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 없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공허할 것이다. 스펙터클 중심의 영화들이 비판을 받거나,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평을 받는 경우가 이러한 내용 없는 이미지의 공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보았을 때, 아바타는 읽어야 할 내용도 많고, 또 형식적인 측면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도 많다. 먼저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자.

‘내’가 아닌 ‘내’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고 싶다

그렇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 아바타를 보면, 도대체 아바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철학적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바타의 이야기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영화를 보고, 결론을 이야기하는 스포일러가 무색할 정도이다. 또 특별히 새로움을 주는 이야기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와 거의 똑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하늘 아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좀 심할 정도로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논의할 수 없는 철학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철학적 문제가 아닌 것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아바타는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무 교과서적으로 가상 현실에 대한 담론을 보여주어서 재미가 반감되는 측면이 많지만 말이다. 이미 영화 제목이 아바타인데 뭘 더 바랄 것인가?

사실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아바타는 지금 이해되고 있는 그러한 아바타와는 다르다. 아바타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보면, 아바타는 현실 세계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가상 현실에서의 자아, 또는 자신의 분신을 의미한다. 가상 현실에서의 자기의 분신인 아바타의 존재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각적 존재이다. 가상 현실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이 세계는 이미지로 구축된 세계이며, 이 세계에 사는 가상적 존재가 바로 아바타인데, 이 아바타는 링크를 통해서 가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서 가상 현실이란, 디지트라는 정보 단위를 기본으로 해서 시각적 구현물로 구축된 세계이다. 또 가상적 존재의 선택과 그 가상적 존재들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가능성으로 주어진 열린 세계이다.

그러나 카멜론이 만든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아바타는 엄밀히 말해서 가상 현실에서의 자기의 분신인 아바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아바타는 판도라 행성에 사는 원주민과 지구인과의 DNA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하이브리드적 생명체이다. 즉 시각적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인 것이다. 그것이 가상적 존재이든, 또는 하이브리드적 생명체이든 간에 아바타는 현실의 나와는 다른 존재이다. 즉 현실에 존재하는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존재하며, 또 다른 ‘나’는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기꺼이 아바타를 취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영화속 제이크 셜리가 원주민의 외향을 가진 하이브리드적인 생명체로 변화했다 해도, 이 하이브리드적 생명체도 일종의 아바타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판도라라는 행성은 인류가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대체 자원인 언옵타늄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판도라라는 행성은 영화 속에서 가상 현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이미 판도라라는 행성이 영화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인지, 아니면 가상 현실로 존재하는 공간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관객들에게 이미 판도라 행성은 가상 현실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제이크 셜리는 지구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여 하반신 마비가 된 군인이다. 그는 하반신 마비가 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단지 죽은 쌍둥이 형과 DNA가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형을 위해 만들어진 아바타와 링크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그는 아바타로 변신해 판도라 행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셜리가 아바타로 변신할 때, 그는 링크해야만 한다. 우리가 가상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그 공간에서 다른 가상적 자아인 아바타로 탄생하기 위해서 반드시 링크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링크의 과정이 끝나면 아바타를 조정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우리가 컴퓨터 게임을 하기 위해서 조이스틱, 마우스 그리고 키보드 등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제이크 셜리는 하반신 마비가 된 군인이다. 그러나 링크를 통해 접속한 또 다른 나인 아바타인 제이크 셜리는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처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의 제이크 셜리는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지만 아바타로 변신한 제이크 셜리는 판도라 행성을 껑충 껑충 뛰어다닌다. 그때 그가 느끼는 환희는 영화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휠체어를 탄 제이크 셜리와 아바타로 변신한 그의 능력이 영화 속에서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묘사된 점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바타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가상 현실이 ‘지금’과 ‘여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볼 때,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우리는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또 내가 있는 곳이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제이크 셜리는 쌍둥이 형의 아바타와 링크함으로써 내가 아닌 나에 대한 소원을 성취한다. 그리고 일종의 가상 현실로 볼 수 있는 판도라 행성에서 내가 아닌 나로 행위한다. 행위하는 의식의 주체는 현실의 제이크 셜리이다. 제이크 셜리는 링크를 위한 기계에 현실의 육체를 남겨두고 의식만이 아바타와 합체한다. 형식은 합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일종의 원격 현전이자, 원격 조정이다. 원격 현전은 가상 현실에서의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이 존재 방식을 진행하는 방식은 원격 조정이다.

원본이 복제, 그리고 가상을 선택하다

텔레비전에서 어느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광고에 나오는 인물은 하춘화라는 가수였는데, 하춘화가 자신을 흉내내는 김영철이라는 개그맨을 다시 패러디하는 내용이었다. 하춘화는 일종의 원본이고, 하춘화를 흉내내는 김영철은 일종의 복제이다. 그런데 원본인 하춘화가 자신을 흉내내는 복제인 김영철의 과장된 행동을 흉내낸다. 뭔가 뒤집혔다.

복제는 원본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복제는 복제일 뿐이기 때문에, 원본이 있는 한, 원본이 가진 아우라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 광고에서는 원본이 자연스럽게 복제를 흉내내면서, 원본성을 해체한다.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본과 복제의 관계가 전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Benjamin)이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 작품인 사진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점이 바로 원본과 복제의 관계, 그리고 애초에 원본이 없이 재생산 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형식의 탄생이었다. 그는 원본성을 가지고 있는 전통 예술은 그것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복제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즉 원본이 존재하는 한, 원본은 원본이며, 복제품은 복제품이며, 원본이 많이 복제될수록 결코 원본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원본이 가진 권위가 더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원본은 원본이기 위해서 원본으로 온전히 남아야 한다.

그런데 원본인 하춘화가 복제인 김영철을 복제한다면, 우리는 과연 원본과 복제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영화 「아바타」에서는 원본과 복제의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원본과 복제 그리고 가상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의 핵심이 제이크 셜리가 판도라 행성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바타라는 영화는 사실 새로운 내용이 없다. 그리고 가상 현실에서의 새로운 인간 존재 방식인 아바타와 판도라라는 행성으로 등장하는 가상 현실, 그리고 그 가상 현실에 들어가고, 가상의 자아를 원격 조정하기 위한 일련의 훈련 과정들을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많은 재미를 주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내용적인 측면, 특히 철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영화에서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바로 하춘화가 김영철을 흉내내는 것처럼, 제이크 셜리가 판도라 행성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는데 있다. 원본이 복제를 선택한 것이다. 원본이 복제를 대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실재가 가상을 선택함으로써, 가상이 실재를 없애고, 가상만이 남게 된 것이다.

제이크 셜리에 판도라 행성은 시뮬라크르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원주민의 육체적 형상을 하고 있는 제이크 셜리도 시뮬라크르이다. 그에게 실제는 하반신 마비인 제이크 셜리이고, 그가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지구이다. 그런데 실제 공간인 지구를 떠나, 판도라 행성을 선택하고, 제이크 셜리의 진짜 육체도 포기한다. 판도라 행성과 그 곳에서의 제이크 셜리는 시뮬라크르, 즉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가상인 것이다.

가상 현실에서의 자신을 잘 조정할 수 있게 된 제이크 셜리에게 현실은, 돌아와야만 되는 그러나 돌아오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제이크 셜리는 점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신이 현실에서 갖지 못하는 능력을 가상 현실에서는 가지고 있고, 또 자신을 인정해 주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가상 현실이 실제 현실 보다 더 머무르고 싶은 현실이 된 것이다.

의식조차 가상의 의식이라면, 문제는 조금은 다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제이크 셜리의 것이다. 또 문제는 가상 현실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현실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를 추스르기 위해서 말이다. 가상 현실도 현실이지만, 가상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을 방기할 수 없다. 이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을 오고 가는 과정에서 제이크 셜리는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에 대한 혼란을 경험한다. 가상 현실이 훨씬 실제같고, 실제 현실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오히려 가상처럼 느껴진다. ‘가상 현실이 실제화’되고, ‘실제 현실이 가상화’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과정에서 제이크 셜리는 결단을 내린다. 즉 실제보다는 가상을 선택한다. 가상이 실제를 이긴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 실제 삶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서 원본인 제이크 셜리는 가상인 나비족 족장의 삶을 선택한다. 인간은 가상 현실에 대한 꿈을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인공 낙원에 대한 꿈은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기 전에도 늘 있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가상 현실의 실현 여부가 인간의 오래된 소망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오래된 소망은 그곳에서 정말 머무르고 싶다는 것이다. 제이크 셜리는 그것을 실현했다. 실제가 아닌 가상을 선택함으로써 말이다.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제이크 셜리를 꿈꾼다. 남루하고 초라한 현실을 벗어나 멋진 가상 현실에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가상이 실제를 집어 삼켰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가 상영된 이후에도 원본이 복제 또는 가상에 졌다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아바타의 성공에 비하면, 그들에 대한 관심은 너무도 적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 배우들이 아니라, 그들의 가상적 형태인 나비족 원주민이다. 영화 안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밖의 실제 세계에서도 가상이 실제를 집어 삼킨 것이다.

가상과 실제의 관계는 점점 그 경계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서의 주도권마저도 이제 가상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실제는 점점 가상화됨으로써, 그 실제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디지털 영화인가 디지털 이미지인가

그럼, 이제 영화의 기술적 형식에 대해 보자. 영화 「아바타」가 화제가 된 이유는 이 영화가 바로 3D 영화라는 데 있다. 그러나 3D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바타」 이전에도 3D 영화는 있었다. 그것의 발명은 거의 1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아바타」는 아마도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는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왜 새삼 3D 영화가 화제가 된 것일까? 또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아바타」의 3D 버전을 보고 영상의 충격과 감각의 충격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가상 현실과 아바타를 다룬 내용의 영화가 3D라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카멜론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아주 적합한 기술적 형식을 취한 것이다. 영화 또한 가상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전에도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 몰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묘안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모튼 하일리그(Morton Heilig)가 고안한 센소라마(Sensorama)이다.

이미 1950년대 하일리그는 영화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가상적 존재감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적 체험을 주고자 했다. 즉 그는 단지 시각적 체험에서 벗어나, 관객이 영화 속의 인물과 똑 같이 느끼고, 움직이며,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그러한 입체적인 영화를 시도했다. 바로 4D로 상영된 아바타가 바로 하일리그가 언급한 ‘미래의 영화’인 것이다. 이를 본 관객들은 하일리그가 언급한 미래의 영화가 주는 그 감각 체험을 한 것이다. 하일리그가 미래의 영화를 언급하면서 강조했던 것은 가상 세계에 마치 현전하고 있는 듯한 존재감만은 아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1인칭 경험이다. 물론 1인칭 경험은 지각을 확장하고 몰입감을 증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미래의 영화는 바로 디지털 영화라는 형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디지털 영화가 가지는 특징은 관객을 수동적인 관객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이러한 영화에서 관객은 스펙터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관객’이 아니라, 스스로 이미지를 조작하고 스스로 이미지에 관여해서 이미지와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용자(user)’에 가깝다. 이는 영화가 단지 확장된 지각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스스로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제임스 카멜론은 영화를 기술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가 만든 지금까지의 영화들, 예를 들어서 「어비스」와 「터미네이터」는 그 당시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의 영화를 시기별로 보면, 바로 그 자체가 CG 기술의 발전사이다. 그가 만든 영화가 CG를 전제로 해서 만든 영화라고 해서 그의 영화를 디지털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디지털 영화는 단지 감각의 확대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관객의 특징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바타」에서 관객의 특징은 변화하지 않는다. 즉 여전히 관객은 부동의 관객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용자가 될 수 없다. 단지 이전의 부동의 관객보다 많은 스펙터클을 경험할 수 있는 부동의 관람객일 뿐이다. 부동의 관객의 적극성은 수용 차원에서만 허용된다. 이 관객은 결코 생산의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제임스 카멜론의 영화는 단지 CG를 활용한 디지털 이미지일 뿐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디지털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상 기술의 발전을 아주 영리하게 자신의 영화에 활용한 제임스 카멜론이기에 그의 다음의 영화는 ‘부동의 관객’이 아니라, 인터페이스를 스스로 조작하는 ‘사용자로서의 관객’을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을까? 영화 속의 제임스 셜리가 실제를 포기하고 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모든 관객들에게 주기 위해서 말이다.

 

자, 정치하러 갑시다, 드라마 ‘시티홀’ / 윤은주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자, 정치하러 갑시다

– 정치 풍자 드라마 ‘시티홀’ –
?
글: 윤은주(숭실대 강사)

 

10급 공무원 신미래의 정치

 

도시가 온통 형형색색 플래카드 천지다. ‘나 잘났다’는 선전 문구와 포토샵으로 처리된 기괴한 얼굴이 꽉 들어찬 플래카드를 보니 드디어 선거철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선거철이 되면 너도 나도 기호 1번 ‘나 당선’이고, 나 이외는 기호 2번 ‘너 탈락’이다.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후보자들이 내놓은 화려한 정책들은 지역 주민들의 바람과는 무관한 공약(空約)이 대부분이고, 내 사탕이 더 달고 맛있다며 과대 포장을 한다.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기고 결국 생니를 드러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번 2010년 선거는 각 지자제의 장에서부터 구의원에 이르기까지 대거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대규모 선거다. 8장의 투표용지에 적힌 이름들과 그들의 공약을 제대로 연결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각 당 후보가 되기 위한 예비 후보들을 비롯해서 선거판에서 한몫 잡겠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선거 아카데미에서 실전 대비 훈련에 몰두했다. 이럴 때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언제 들여놓겠는가 싶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난장질이 세상을 굉장히 시끄럽게 만든다. 시민들이 그 열광에 그다지 호응하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 드라마 시티홀

도대체 정치라는 게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이렇게 들뜨게 만들고 미치게 만드는가?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이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K1을 방불케 하는 국회 본 회의장의 몸싸움이나 걸핏하면 당외 투쟁이라며 벌이는 업무 태만, 혹은 국민들을 위한다는데 정작 민생과는 무관한 그들의 정책들을 보노라면, 정치는 별천지에서 외계인들끼리 치고받는,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세상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치가 꼭 그래야만 할까?

작년 이맘때였다. 엄청난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국회의원과 시장의 로맨스로 포장된 정치 풍자 드라마 ‘시티홀’이 방영되었다. 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도 많은데 굳이 해묵은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티홀’은 서류 복사와 민원인들에게 커피 타주기가 주 업무였던 시장 비서실의 10급 공무원 신미래가 이러저러한 사건들로 시장에 당선되고 썩 괜찮은 시정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10급 공무원이 시장이 된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너도 나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10급 공무원이 시장이 되지 말라는 법을 없을 듯싶다.

그럼에도 ‘시티홀’에 눈을 돌리는 것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로맨스를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부정한’, 올곧은 정치 인생을 주장하는 인주시 시장 ‘고부실’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현 정치 현실을 적나라하지만 우회적으로 드러내면서 고질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드라마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드라마적 대안이라 함은 현실에서 꼭 이루어져야 할 당위성을 담보하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티홀에 빗대어 우리의 정치를 살펴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더구나 슬슬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려는 현 시점에서 썩 괜찮은 이야기이기도 할 듯싶다. 다만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노파심에 던져 본다.

‘시티홀’에서 10급 공무원 신미래는 친구가 낸 공탁금 천만 원이 아까워 선거에 뛰어든다. 생각 없는 철부지에 정치의 ‘ㅈ’자도 모르는 문외한인 그녀의 머릿속에 든 정치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현실 정치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의 대사를 빌리자면, “정당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 정 떨어지고 치 떨리는 것, 정기적으로 치사한 짓 하는 것, 정상인은 없고 치기배만 가득한 것, 정 줄만 하면 뒤통수치는 것”, 그것이 정치라고 한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딱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이런 게 정치라면 그까짓 것, 멀리 떨어져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치라는 그물망 속에서 부대끼며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보니 그냥 방관만 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발을 뺄 수 없다면 차라리 깊숙이 담그는 것이 낫다. 그렇다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정치판에 뛰어들라는 말은 아니다. 무엇인지 알아야 구경도 하고 훈수를 두듯 참견도 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하는 정치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고 그 좋은 정치를 현실에서 가능해지도록 노력해보면 좋을 듯싶다.

이야기가 오가는 정치

 

우선 정치의 사전적 의미를 챙겨보자. 정치란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련의 행위를 가리킨다. 좁게는 한 국가 내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수행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대의제 하에서는 국민들을 대신해서 정책을 기획하고 입안하며 행정적으로 실행해 옮기는 공적 행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정치란 것이 꼭 그런 행정적 절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정치란 말은 국가 권력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인과 국민은 권력과 정책에서 부딪치기도 하지만 같은 동네 주민으로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기도 한다. 또한 살아가면서 간혹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 말은 꼭 권력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한 상황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한다는 긍정적 자세를 의미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 것만 챙긴다는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만큼 ‘정치’라는 말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과 관련된 일련의 모든 행위들을 정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란 사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무관심의 영역에도 수수방관의 영역에도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넓은 의미로 정치를 확대시켜 보자. 정치(政治)라는 한자를 풀이해보면, 정(政)은 바르다는 정(正)에 채찍질한다는 복(?)자가 합쳐진 것이고 치(治)는 물 수(?)변에 기르다는 의미의 태(台)가 합쳐진 글자다. 그렇게 보면 정치란 바르게 채찍질 하는 것이고 물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농경사회에서의 치수가 국가의 근본이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이 그 전제가 될 듯싶다. 특히 치수(治水), 즉 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단지 농사를 잘 짓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사는 것이 정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런 정치를 하려면 자연에 속한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날씨가 변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어야 하고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런데 사회가 변화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 다시 말해서 자기 것만 강조하고 주변의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그 예로 핵심적 정치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4대강 사업을 들 수 있다. 4대강 사업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주요한 정책적 문제이긴 하지만 논의의 핵심이 사업의 실행여부에 있지 않으니 잠시 미뤄두고, 기저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해보도록 하자.

이 사업의 문제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무시하고 정책적으로만 몰고 갔다는 점이다. 환경 관련 단체의 의견, 4대강 주변 지역주민들의 의견, 그 문제보다 더 시급한 정책이 필요한 분야의 의견,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당리(黨利)에 휩쓸려 무모하게 정책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의견을 무시한 채 자기고집만 챙기려는 정치가 삐거덕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이 일어났을까?

이제 정치는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의 장으로 확대된다. 정치인들만큼 행동보다 말이 빠른 사람들은 없다. 그들의 무기는 말과 글이다. 직접 가서 확인하기보다는 분홍색 보자기로 싼 정보뭉치에 의존하고 그것을 어떻게 말로 풀어서 상대를 설득시킬 것인가 고민한다. 그런데 말과 글은 그들만의 무기가 아니다. 말과 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기이다. 하지만 말과 글이 날카로운 무기가 되려면 문제에 대한 숙고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서 그것을 말이나 글을 통해 상대에게 밝히는 것, 그것이 바로 의사소통이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정치 혹은 공적 영역이다.

이처럼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적 상황, 즉 서로 의견을 이야기하는 행위를 정치라고 규정한 이는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그러한 다양한 존재들이 모여 이 세계를 유지해나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행위는 단지 언어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하고 세계를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정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정치는 나를 있게 해주는 행위이며 세계를 이끌어가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말과 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를 닫고 눈을 닫아 사람들의 말과 글을 무시하는 정치적 상황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사는 동네가 잘 운영될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눈 뜨고 귀 열고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약만 앵무새처럼 떠들어댄다. 듣지 않으려 작정한 사람들이 제대로 민심을 읽어낼 수 있을까? 자신의 지역구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까? 그들은 “나는 발로 뛰어다니며 직접 확인합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지역민들의 말에는 귀 기울지 않는다면 이 얼마다 황당한 아이러니인가?

물론 정치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도 문제이다. 머릿속으로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쓸데없는 것이며 누가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상황은 마찬가지가 될 뿐이다. 서로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시티홀’의 신미래 시장은 발품을 팔며 항상 귀를 열어 놓았다. 시장 비서실에서 민원인들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면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커피 취향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다는 점도 기억했다. 그 다름으로부터 꼭 필요한 것들을 모아 하나씩 시행해 나갔다. 물론 드라마니까 가능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런 시장이 있는 지역이 있다면 ‘정말 살 만한 곳이야. 아, 좋다! 나도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하겠지만 그런 곳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 편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100% 똑같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민심을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시정에 반영한다면,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정치가 달라지고 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지지 않을까.

신미래 시장은 진짜 정치를 ‘정성껏 국민의 삶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뜻대로 정치를 해줄만한 대리인을 뽑는다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번 6?2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제발 사람들의 아픈 곳을 보듬어주고 숨 쉬게 하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뽑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 그럼 이제 눈 뜨고 귀 열고, 정치하러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