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정치하러 갑시다, 드라마 ‘시티홀’ / 윤은주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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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자, 정치하러 갑시다

– 정치 풍자 드라마 ‘시티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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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은주(숭실대 강사)

 

10급 공무원 신미래의 정치

 

도시가 온통 형형색색 플래카드 천지다. ‘나 잘났다’는 선전 문구와 포토샵으로 처리된 기괴한 얼굴이 꽉 들어찬 플래카드를 보니 드디어 선거철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선거철이 되면 너도 나도 기호 1번 ‘나 당선’이고, 나 이외는 기호 2번 ‘너 탈락’이다.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후보자들이 내놓은 화려한 정책들은 지역 주민들의 바람과는 무관한 공약(空約)이 대부분이고, 내 사탕이 더 달고 맛있다며 과대 포장을 한다.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기고 결국 생니를 드러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번 2010년 선거는 각 지자제의 장에서부터 구의원에 이르기까지 대거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대규모 선거다. 8장의 투표용지에 적힌 이름들과 그들의 공약을 제대로 연결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각 당 후보가 되기 위한 예비 후보들을 비롯해서 선거판에서 한몫 잡겠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선거 아카데미에서 실전 대비 훈련에 몰두했다. 이럴 때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언제 들여놓겠는가 싶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난장질이 세상을 굉장히 시끄럽게 만든다. 시민들이 그 열광에 그다지 호응하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 드라마 시티홀

도대체 정치라는 게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이렇게 들뜨게 만들고 미치게 만드는가?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이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K1을 방불케 하는 국회 본 회의장의 몸싸움이나 걸핏하면 당외 투쟁이라며 벌이는 업무 태만, 혹은 국민들을 위한다는데 정작 민생과는 무관한 그들의 정책들을 보노라면, 정치는 별천지에서 외계인들끼리 치고받는,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세상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치가 꼭 그래야만 할까?

작년 이맘때였다. 엄청난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국회의원과 시장의 로맨스로 포장된 정치 풍자 드라마 ‘시티홀’이 방영되었다. 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도 많은데 굳이 해묵은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티홀’은 서류 복사와 민원인들에게 커피 타주기가 주 업무였던 시장 비서실의 10급 공무원 신미래가 이러저러한 사건들로 시장에 당선되고 썩 괜찮은 시정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10급 공무원이 시장이 된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너도 나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10급 공무원이 시장이 되지 말라는 법을 없을 듯싶다.

그럼에도 ‘시티홀’에 눈을 돌리는 것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로맨스를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부정한’, 올곧은 정치 인생을 주장하는 인주시 시장 ‘고부실’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현 정치 현실을 적나라하지만 우회적으로 드러내면서 고질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드라마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드라마적 대안이라 함은 현실에서 꼭 이루어져야 할 당위성을 담보하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티홀에 빗대어 우리의 정치를 살펴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더구나 슬슬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려는 현 시점에서 썩 괜찮은 이야기이기도 할 듯싶다. 다만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노파심에 던져 본다.

‘시티홀’에서 10급 공무원 신미래는 친구가 낸 공탁금 천만 원이 아까워 선거에 뛰어든다. 생각 없는 철부지에 정치의 ‘ㅈ’자도 모르는 문외한인 그녀의 머릿속에 든 정치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현실 정치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의 대사를 빌리자면, “정당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 정 떨어지고 치 떨리는 것, 정기적으로 치사한 짓 하는 것, 정상인은 없고 치기배만 가득한 것, 정 줄만 하면 뒤통수치는 것”, 그것이 정치라고 한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딱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이런 게 정치라면 그까짓 것, 멀리 떨어져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치라는 그물망 속에서 부대끼며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보니 그냥 방관만 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발을 뺄 수 없다면 차라리 깊숙이 담그는 것이 낫다. 그렇다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정치판에 뛰어들라는 말은 아니다. 무엇인지 알아야 구경도 하고 훈수를 두듯 참견도 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하는 정치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고 그 좋은 정치를 현실에서 가능해지도록 노력해보면 좋을 듯싶다.

이야기가 오가는 정치

 

우선 정치의 사전적 의미를 챙겨보자. 정치란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련의 행위를 가리킨다. 좁게는 한 국가 내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수행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대의제 하에서는 국민들을 대신해서 정책을 기획하고 입안하며 행정적으로 실행해 옮기는 공적 행위를 가리킨다.

하지만 정치란 것이 꼭 그런 행정적 절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정치란 말은 국가 권력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인과 국민은 권력과 정책에서 부딪치기도 하지만 같은 동네 주민으로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기도 한다. 또한 살아가면서 간혹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 말은 꼭 권력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한 상황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한다는 긍정적 자세를 의미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 것만 챙긴다는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만큼 ‘정치’라는 말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과 관련된 일련의 모든 행위들을 정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란 사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무관심의 영역에도 수수방관의 영역에도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넓은 의미로 정치를 확대시켜 보자. 정치(政治)라는 한자를 풀이해보면, 정(政)은 바르다는 정(正)에 채찍질한다는 복(?)자가 합쳐진 것이고 치(治)는 물 수(?)변에 기르다는 의미의 태(台)가 합쳐진 글자다. 그렇게 보면 정치란 바르게 채찍질 하는 것이고 물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농경사회에서의 치수가 국가의 근본이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이 그 전제가 될 듯싶다. 특히 치수(治水), 즉 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단지 농사를 잘 짓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사는 것이 정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런 정치를 하려면 자연에 속한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날씨가 변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어야 하고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런데 사회가 변화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 다시 말해서 자기 것만 강조하고 주변의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그 예로 핵심적 정치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4대강 사업을 들 수 있다. 4대강 사업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주요한 정책적 문제이긴 하지만 논의의 핵심이 사업의 실행여부에 있지 않으니 잠시 미뤄두고, 기저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해보도록 하자.

이 사업의 문제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무시하고 정책적으로만 몰고 갔다는 점이다. 환경 관련 단체의 의견, 4대강 주변 지역주민들의 의견, 그 문제보다 더 시급한 정책이 필요한 분야의 의견,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당리(黨利)에 휩쓸려 무모하게 정책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의견을 무시한 채 자기고집만 챙기려는 정치가 삐거덕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이 일어났을까?

이제 정치는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의 장으로 확대된다. 정치인들만큼 행동보다 말이 빠른 사람들은 없다. 그들의 무기는 말과 글이다. 직접 가서 확인하기보다는 분홍색 보자기로 싼 정보뭉치에 의존하고 그것을 어떻게 말로 풀어서 상대를 설득시킬 것인가 고민한다. 그런데 말과 글은 그들만의 무기가 아니다. 말과 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기이다. 하지만 말과 글이 날카로운 무기가 되려면 문제에 대한 숙고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서 그것을 말이나 글을 통해 상대에게 밝히는 것, 그것이 바로 의사소통이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정치 혹은 공적 영역이다.

이처럼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적 상황, 즉 서로 의견을 이야기하는 행위를 정치라고 규정한 이는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그러한 다양한 존재들이 모여 이 세계를 유지해나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행위는 단지 언어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하고 세계를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정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정치는 나를 있게 해주는 행위이며 세계를 이끌어가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말과 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를 닫고 눈을 닫아 사람들의 말과 글을 무시하는 정치적 상황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사는 동네가 잘 운영될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눈 뜨고 귀 열고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약만 앵무새처럼 떠들어댄다. 듣지 않으려 작정한 사람들이 제대로 민심을 읽어낼 수 있을까? 자신의 지역구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까? 그들은 “나는 발로 뛰어다니며 직접 확인합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지역민들의 말에는 귀 기울지 않는다면 이 얼마다 황당한 아이러니인가?

물론 정치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도 문제이다. 머릿속으로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쓸데없는 것이며 누가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상황은 마찬가지가 될 뿐이다. 서로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시티홀’의 신미래 시장은 발품을 팔며 항상 귀를 열어 놓았다. 시장 비서실에서 민원인들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면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커피 취향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다는 점도 기억했다. 그 다름으로부터 꼭 필요한 것들을 모아 하나씩 시행해 나갔다. 물론 드라마니까 가능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런 시장이 있는 지역이 있다면 ‘정말 살 만한 곳이야. 아, 좋다! 나도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하겠지만 그런 곳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 편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100% 똑같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민심을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시정에 반영한다면,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정치가 달라지고 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지지 않을까.

신미래 시장은 진짜 정치를 ‘정성껏 국민의 삶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뜻대로 정치를 해줄만한 대리인을 뽑는다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번 6?2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제발 사람들의 아픈 곳을 보듬어주고 숨 쉬게 하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뽑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 그럼 이제 눈 뜨고 귀 열고, 정치하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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