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이 실재를 삼키다, 영화 ‘아바타’/심혜련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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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가상이 실재를 삼키다

영화 ‘아바타’
글: 심혜련(전북대학교 교수)

 

내용을 읽고, 형식을 보다

 

1000만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개념에 불과하다. 워낙 숫자 감각이 떨어지는 나는 내가 계산할 수 있는 수의 단위만 넘어가면, 그저 ‘엄청나게 많다’라는 추상적인 문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뇌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나게 많은 수인 1000만이 요즘 영화 관객 수와 관련해서 심심치 않게 이야기된다. 어떤 영화의 관객이 1000만이 넘었네, 안 넘었네 하면서 말이다.

최근 제임스 카멜론이 오랜만에 만든 영화 「아바타」의 관객 수가 1000만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 1000만에 나도 들어간다. 심지어 두 번 들어간다. 처음에는 2D 영화로 보았다. 3D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별 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2D 영화로 본 것이다. 사실 귀찮아서였다. 나는 서울이 아닌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바타 영화의 3D 버전을 상영하는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바타를 3D로 보기 위해서는 예약 등등의 번거로운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그리고 내러티브보다는 스펙터클을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화를, 그러한 것을 무시하고 2D로 본 것이다.

그 후 다시 3D로 보았다. 동생이 3D로 아바타를 보고 나서, 영상의 충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실감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생은 스펙터클한 영상의 충격을 몸으로 체험해서, 머리가 너무 아파서 영화보고 나서 두통약까지 먹었다고 하니, 도저히 3D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아바타를 두 번 보면서, 한번은 내용을 한번은 형식을 중심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를 이야기할 때, 매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매체의 형식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체 내용과 매체 형식은 서로를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CG가 많이 사용된 영화들의 경우,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줄거리가 뻔하다, 예고편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매우 실망했다 등등의 감상은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를 본 경우이다. 한편 스펙터클이 매우 좋았다, 영상의 충격이다 등등의 감상은 형식을 중심으로 그 영화가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컴퓨터 기술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이야기 구조와 이미지와 이야기 구조의 상관 관계, 그리고 그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과 은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영화를 주로 감각과 스펙터클 등 감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 영화 아바타

영화 내용과 그 영화 내용을 구현하는 기술적 형식은 둘 다 영화를 읽고 보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내용과 형식을 분명하게 나누어 보면,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미지 없이 내러티브로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문학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 없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공허할 것이다. 스펙터클 중심의 영화들이 비판을 받거나,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평을 받는 경우가 이러한 내용 없는 이미지의 공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보았을 때, 아바타는 읽어야 할 내용도 많고, 또 형식적인 측면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도 많다. 먼저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자.

‘내’가 아닌 ‘내’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고 싶다

그렇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 아바타를 보면, 도대체 아바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철학적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바타의 이야기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영화를 보고, 결론을 이야기하는 스포일러가 무색할 정도이다. 또 특별히 새로움을 주는 이야기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와 거의 똑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하늘 아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좀 심할 정도로 유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논의할 수 없는 철학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철학적 문제가 아닌 것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아바타는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무 교과서적으로 가상 현실에 대한 담론을 보여주어서 재미가 반감되는 측면이 많지만 말이다. 이미 영화 제목이 아바타인데 뭘 더 바랄 것인가?

사실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아바타는 지금 이해되고 있는 그러한 아바타와는 다르다. 아바타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보면, 아바타는 현실 세계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가상 현실에서의 자아, 또는 자신의 분신을 의미한다. 가상 현실에서의 자기의 분신인 아바타의 존재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각적 존재이다. 가상 현실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이 세계는 이미지로 구축된 세계이며, 이 세계에 사는 가상적 존재가 바로 아바타인데, 이 아바타는 링크를 통해서 가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서 가상 현실이란, 디지트라는 정보 단위를 기본으로 해서 시각적 구현물로 구축된 세계이다. 또 가상적 존재의 선택과 그 가상적 존재들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가능성으로 주어진 열린 세계이다.

그러나 카멜론이 만든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아바타는 엄밀히 말해서 가상 현실에서의 자기의 분신인 아바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아바타는 판도라 행성에 사는 원주민과 지구인과의 DNA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하이브리드적 생명체이다. 즉 시각적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인 것이다. 그것이 가상적 존재이든, 또는 하이브리드적 생명체이든 간에 아바타는 현실의 나와는 다른 존재이다. 즉 현실에 존재하는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존재하며, 또 다른 ‘나’는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기꺼이 아바타를 취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영화속 제이크 셜리가 원주민의 외향을 가진 하이브리드적인 생명체로 변화했다 해도, 이 하이브리드적 생명체도 일종의 아바타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판도라라는 행성은 인류가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대체 자원인 언옵타늄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판도라라는 행성은 영화 속에서 가상 현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이미 판도라라는 행성이 영화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인지, 아니면 가상 현실로 존재하는 공간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관객들에게 이미 판도라 행성은 가상 현실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제이크 셜리는 지구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여 하반신 마비가 된 군인이다. 그는 하반신 마비가 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단지 죽은 쌍둥이 형과 DNA가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형을 위해 만들어진 아바타와 링크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그는 아바타로 변신해 판도라 행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셜리가 아바타로 변신할 때, 그는 링크해야만 한다. 우리가 가상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그 공간에서 다른 가상적 자아인 아바타로 탄생하기 위해서 반드시 링크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링크의 과정이 끝나면 아바타를 조정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우리가 컴퓨터 게임을 하기 위해서 조이스틱, 마우스 그리고 키보드 등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제이크 셜리는 하반신 마비가 된 군인이다. 그러나 링크를 통해 접속한 또 다른 나인 아바타인 제이크 셜리는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처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의 제이크 셜리는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지만 아바타로 변신한 제이크 셜리는 판도라 행성을 껑충 껑충 뛰어다닌다. 그때 그가 느끼는 환희는 영화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휠체어를 탄 제이크 셜리와 아바타로 변신한 그의 능력이 영화 속에서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묘사된 점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바타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가상 현실이 ‘지금’과 ‘여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볼 때,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우리는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또 내가 있는 곳이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제이크 셜리는 쌍둥이 형의 아바타와 링크함으로써 내가 아닌 나에 대한 소원을 성취한다. 그리고 일종의 가상 현실로 볼 수 있는 판도라 행성에서 내가 아닌 나로 행위한다. 행위하는 의식의 주체는 현실의 제이크 셜리이다. 제이크 셜리는 링크를 위한 기계에 현실의 육체를 남겨두고 의식만이 아바타와 합체한다. 형식은 합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일종의 원격 현전이자, 원격 조정이다. 원격 현전은 가상 현실에서의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이 존재 방식을 진행하는 방식은 원격 조정이다.

원본이 복제, 그리고 가상을 선택하다

텔레비전에서 어느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광고에 나오는 인물은 하춘화라는 가수였는데, 하춘화가 자신을 흉내내는 김영철이라는 개그맨을 다시 패러디하는 내용이었다. 하춘화는 일종의 원본이고, 하춘화를 흉내내는 김영철은 일종의 복제이다. 그런데 원본인 하춘화가 자신을 흉내내는 복제인 김영철의 과장된 행동을 흉내낸다. 뭔가 뒤집혔다.

복제는 원본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복제는 복제일 뿐이기 때문에, 원본이 있는 한, 원본이 가진 아우라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 광고에서는 원본이 자연스럽게 복제를 흉내내면서, 원본성을 해체한다.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본과 복제의 관계가 전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벤야민(Benjamin)이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 작품인 사진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점이 바로 원본과 복제의 관계, 그리고 애초에 원본이 없이 재생산 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형식의 탄생이었다. 그는 원본성을 가지고 있는 전통 예술은 그것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복제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즉 원본이 존재하는 한, 원본은 원본이며, 복제품은 복제품이며, 원본이 많이 복제될수록 결코 원본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원본이 가진 권위가 더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원본은 원본이기 위해서 원본으로 온전히 남아야 한다.

그런데 원본인 하춘화가 복제인 김영철을 복제한다면, 우리는 과연 원본과 복제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영화 「아바타」에서는 원본과 복제의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원본과 복제 그리고 가상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의 핵심이 제이크 셜리가 판도라 행성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바타라는 영화는 사실 새로운 내용이 없다. 그리고 가상 현실에서의 새로운 인간 존재 방식인 아바타와 판도라라는 행성으로 등장하는 가상 현실, 그리고 그 가상 현실에 들어가고, 가상의 자아를 원격 조정하기 위한 일련의 훈련 과정들을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많은 재미를 주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내용적인 측면, 특히 철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영화에서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바로 하춘화가 김영철을 흉내내는 것처럼, 제이크 셜리가 판도라 행성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는데 있다. 원본이 복제를 선택한 것이다. 원본이 복제를 대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실재가 가상을 선택함으로써, 가상이 실재를 없애고, 가상만이 남게 된 것이다.

제이크 셜리에 판도라 행성은 시뮬라크르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원주민의 육체적 형상을 하고 있는 제이크 셜리도 시뮬라크르이다. 그에게 실제는 하반신 마비인 제이크 셜리이고, 그가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지구이다. 그런데 실제 공간인 지구를 떠나, 판도라 행성을 선택하고, 제이크 셜리의 진짜 육체도 포기한다. 판도라 행성과 그 곳에서의 제이크 셜리는 시뮬라크르, 즉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가상인 것이다.

가상 현실에서의 자신을 잘 조정할 수 있게 된 제이크 셜리에게 현실은, 돌아와야만 되는 그러나 돌아오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제이크 셜리는 점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신이 현실에서 갖지 못하는 능력을 가상 현실에서는 가지고 있고, 또 자신을 인정해 주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가상 현실이 실제 현실 보다 더 머무르고 싶은 현실이 된 것이다.

의식조차 가상의 의식이라면, 문제는 조금은 다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제이크 셜리의 것이다. 또 문제는 가상 현실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현실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를 추스르기 위해서 말이다. 가상 현실도 현실이지만, 가상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을 방기할 수 없다. 이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을 오고 가는 과정에서 제이크 셜리는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에 대한 혼란을 경험한다. 가상 현실이 훨씬 실제같고, 실제 현실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오히려 가상처럼 느껴진다. ‘가상 현실이 실제화’되고, ‘실제 현실이 가상화’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과정에서 제이크 셜리는 결단을 내린다. 즉 실제보다는 가상을 선택한다. 가상이 실제를 이긴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 실제 삶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서 원본인 제이크 셜리는 가상인 나비족 족장의 삶을 선택한다. 인간은 가상 현실에 대한 꿈을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인공 낙원에 대한 꿈은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기 전에도 늘 있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가상 현실의 실현 여부가 인간의 오래된 소망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오래된 소망은 그곳에서 정말 머무르고 싶다는 것이다. 제이크 셜리는 그것을 실현했다. 실제가 아닌 가상을 선택함으로써 말이다.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제이크 셜리를 꿈꾼다. 남루하고 초라한 현실을 벗어나 멋진 가상 현실에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가상이 실제를 집어 삼켰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가 상영된 이후에도 원본이 복제 또는 가상에 졌다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아바타의 성공에 비하면, 그들에 대한 관심은 너무도 적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 배우들이 아니라, 그들의 가상적 형태인 나비족 원주민이다. 영화 안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밖의 실제 세계에서도 가상이 실제를 집어 삼킨 것이다.

가상과 실제의 관계는 점점 그 경계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서의 주도권마저도 이제 가상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실제는 점점 가상화됨으로써, 그 실제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디지털 영화인가 디지털 이미지인가

그럼, 이제 영화의 기술적 형식에 대해 보자. 영화 「아바타」가 화제가 된 이유는 이 영화가 바로 3D 영화라는 데 있다. 그러나 3D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바타」 이전에도 3D 영화는 있었다. 그것의 발명은 거의 1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아바타」는 아마도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는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왜 새삼 3D 영화가 화제가 된 것일까? 또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아바타」의 3D 버전을 보고 영상의 충격과 감각의 충격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가상 현실과 아바타를 다룬 내용의 영화가 3D라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카멜론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아주 적합한 기술적 형식을 취한 것이다. 영화 또한 가상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전에도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 몰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묘안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모튼 하일리그(Morton Heilig)가 고안한 센소라마(Sensorama)이다.

이미 1950년대 하일리그는 영화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가상적 존재감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적 체험을 주고자 했다. 즉 그는 단지 시각적 체험에서 벗어나, 관객이 영화 속의 인물과 똑 같이 느끼고, 움직이며,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그러한 입체적인 영화를 시도했다. 바로 4D로 상영된 아바타가 바로 하일리그가 언급한 ‘미래의 영화’인 것이다. 이를 본 관객들은 하일리그가 언급한 미래의 영화가 주는 그 감각 체험을 한 것이다. 하일리그가 미래의 영화를 언급하면서 강조했던 것은 가상 세계에 마치 현전하고 있는 듯한 존재감만은 아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1인칭 경험이다. 물론 1인칭 경험은 지각을 확장하고 몰입감을 증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미래의 영화는 바로 디지털 영화라는 형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디지털 영화가 가지는 특징은 관객을 수동적인 관객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이러한 영화에서 관객은 스펙터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관객’이 아니라, 스스로 이미지를 조작하고 스스로 이미지에 관여해서 이미지와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용자(user)’에 가깝다. 이는 영화가 단지 확장된 지각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스스로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제임스 카멜론은 영화를 기술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가 만든 지금까지의 영화들, 예를 들어서 「어비스」와 「터미네이터」는 그 당시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의 영화를 시기별로 보면, 바로 그 자체가 CG 기술의 발전사이다. 그가 만든 영화가 CG를 전제로 해서 만든 영화라고 해서 그의 영화를 디지털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디지털 영화는 단지 감각의 확대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관객의 특징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바타」에서 관객의 특징은 변화하지 않는다. 즉 여전히 관객은 부동의 관객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용자가 될 수 없다. 단지 이전의 부동의 관객보다 많은 스펙터클을 경험할 수 있는 부동의 관람객일 뿐이다. 부동의 관객의 적극성은 수용 차원에서만 허용된다. 이 관객은 결코 생산의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제임스 카멜론의 영화는 단지 CG를 활용한 디지털 이미지일 뿐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디지털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상 기술의 발전을 아주 영리하게 자신의 영화에 활용한 제임스 카멜론이기에 그의 다음의 영화는 ‘부동의 관객’이 아니라, 인터페이스를 스스로 조작하는 ‘사용자로서의 관객’을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을까? 영화 속의 제임스 셜리가 실제를 포기하고 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모든 관객들에게 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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