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김택민이 쓴『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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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

-김택민이 쓴 『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유 있으면 8천만 겨레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중국사를 관통하는 고난에 비하면, 우리 역사 관통하는 고난은 소꿉장난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가 우리 고난 침소봉대했고 이병도 따르는 역사학자들이 계속 식민사관 대물림한다. 이병도는 을사5적 이완용 양아들이다.

한국이 951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중국 땅에서는 약 3만 번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약 2만 번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역사
맨 앞 1천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가운데 8백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12쪽)

1979년에 박정희가 지 부하한테 총알 맞아 죽었다. 그 때 나는 중3 학생이었다. 1980년에 나는 고 1 학생이었다. 40대 중후반 윤리선생님이 침을 튀기면서 우리는 못난 민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책 앞 부분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한테 9백 몇 십번을 침략 받았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윤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은 병신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좀 거시기 했다. 좀 억울했다.

중학교 때 국사 책 앞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가 위장 관구검한테 공격 받아 왕이 어디로 도망갔다. 라는 내용이 말이다. 책을 쓴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그리 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자기들이 진 전쟁에 대해 역사책 앞에서 다루지 않는다.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한테 대패한 이야기 잘 다루지 않는다. 간혹 다루더라도 아주 쪼금 다룬다.
 

김택민,『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사진출처: www.everedu.com/


 
1981년에 서울역 대일학원에 다녔다. 성문기본영어 들었다. 강사는 일본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다. 그 분이 그러시더라.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 아닙니다. 원나라한테 침략 받을 때 우리 조상 여자들이 겁탈 당했습니다. 여러분 핏속에 몽골 피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와집 처마는 새 날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너무도 많이 다른 나라한테 침략을 받아서 새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겨서 건물 처마가 새 날개 모양입니다.

그 분이 또 헛소리 하셨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유물이 석굴암이 아닙니다. 비원에 있는 아무개라는 목조건물입니다. 같이 일한 역사 강사가 그러더라. 우리 전통가옥 처마는 아래에서 볼 때 가장 웅장하게 보이도록 각도를 잡았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국사책에
일제 강점기 항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계사 책에는

오호 16국 강점기,
요 강점기,
금 강점기,
원 강점기,
청 강점기

라는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어판을 1985년에 대학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다. 일본 항목을 봤더니 1대 왕부터 몇 대왕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상식 있는 일본학자들이 몇 대까지는 뻥이라고 인정하는 내용이 버젓이 사실인 양 나왔다. 대한민국 항목을 봤더니 단군 왕검 이야기 나오고 갑자기 서기 삼국시대 이야기 나온다. 단군 왕검 이야기는 신화로 나온다. 서양인들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 볼 것이다. 열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항목은 이 나라 영문과 교수들이 영역했더구만. 당연히 원래 글은 식민사관에 쪄든 이병도 제자들이 썼겠지. 이병도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양아들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1985년에 대학생 사촌집에 갔다. 사촌한테 내가 물었다. 일제 시대와 해방초기에는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세계 맨 앞 이었는데 지금은 왜 성적이 나쁠까? 사촌이 그러더라.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식민사학자가 우리한테 심어놓은 말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인이라는 대학생 입에서 나왔다. 깝깝했다.

이래서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이 많다.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이 말이 이 땅에서 없어지는 그 날까지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책 제목 바뀜)이 책이 많이 팔려야 화이사관 식민사관 문제 풀 수 있다.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

-비정기 간행물 <숨>-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많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며칠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안해가 이 글을 읽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책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다 사실인 것을. 나는 어린이(초등)학교 2학년 시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하루는 어둑 어둑한 밤에 아버지가 나와 두 살 위인 형을 데리고 논 부근 물가로 가셨다. 자전거 뒤에 다라이를 싣고 가셨다. 그 다라이에는 불에 그을려 검게 탄 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더 작은 크기로 토막내기 위해서 논가 물 있는 곳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가 이미 개고기 요리할 준비를 해 두셨다. 어머니가 개고기 토막을 큰 솥에 넣고 부글 부글 끓이시는데 냄새가 참 좋았다. 된장냄새와 함께 구수한 개고기 냄새가 참 좋았다. 요리가 다 되었는지 어머니가 개고기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어 칼로 잘게 썰어주셨다. 우리 식구는 한 점 한 점 맛나게 먹었다. 나도 맛나게 먹었다. 참 맛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개고기를 몇 번 먹었다. 커서는 보신탕 집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먹었다. 나름 친한 분을 내가 초대해서 함께 보신탕을 먹곤 했다. 최근 까지도 나는 보신탕을 먹었다. 숨이라는 무크지를 읽고 깊이 생각을 해봤다. 그 동안 내가 보신탕을 먹은 개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숨> 2권에 나와서 더 더욱 그랬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도올 김용옥교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책을 사서 읽었다. 그 분 책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왔다. 청나라 위안 스카이 이야기를 곁들여서 보신탕 이야기를 했다. 88 올림픽 한다고 줏대없이 보신탕 집을 단속하지 말고 자신있게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먹으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신탕 집이 보양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음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존경하던 석학이 보신탕을 자신있게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뿌듯했다. 나 자신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도 보신탕은 반만년 역사가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 음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신탕 문화는 야만적이라는 비난이 너무도 몰상식한 말이라고 힘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그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의사들이 수술환자에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보신탕을 권한다는 아버님 말씀도 내가 보신탕 신봉자가 되게 하였다.

<숨>, 더불어숨 출판사, 2009.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작은나무카페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그 카페에서 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 1권과 2권을 사서 집에서 쉬엄 쉬엄 읽었다. 안해가 요즈음 그런다. 내가 숨을 읽더니 여덟 번이나 그랬단다. “에이, 이 책 읽다 보면 앞으로는 보신탕 못 먹겠네.” 지인과 보신탕 빨리 한 번 푸짐하게 사 먹고 보신탕과 영원히 이별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숨에서 개와 관련된 글을 읽고 숨에 나온 이쁜 개 사진을 본 내가 더는 보신탕을 먹을 수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를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어떤 강아지를 사오시던지 강아지 이름을 재동이라고 지으셨다. 재동이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내게 안기곤 했다. 혀로 내 손을 내 얼굴을 빨곤 했다. 아직도 재동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동이 혀의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재동이 선한 눈빛이 어른거리고, 재동이가 달려올 때 내는 핵핵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금 들리는 듯하다. 재동이를 안을 때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뚜렷이.

우리 아버지가 네 형제에게 그랬듯이 나도 우리 딸 쌍둥이에게 보신탕을 먹게 했다. 어린 우리 쌍둥이가 보신탕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부모로써 쌍둥이한테 미안하다. 큰 죄를 지었다. 앞으로는 쌍둥이에게 보신탕 먹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 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충격 받으실 것을 생각하면 내가 겁난다. 무안하다. 그래도 돌이켜 보니 내 주변에서 긍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아버님이 약 15년 전부터 보신탕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절에 다니시면서 차츰 개고기를 끊으셨단다. 우리 안해도 약 3년 전부터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이제 나만 안 먹으면 된다. 다행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불량한 사장 때문에 파업하는 일꾼들이 많다. 그 분들 삶은 참 팍팍하다. 하지만 <숨>이라는 책을 읽고는 그 분들이 그래도 동물들보다는 낫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동물들은 파업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당한 짓을 해대는 인간을 상대로 시위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2010. 9. 21. 한가위 연휴 날이다. 내 삶에서 작은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내게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신탕 먹지 말자. 앞으로는 되도록 고기 식사를 줄이자. 앞으로는 되도록 적게 먹자. 달님 저를 굽어 살피소서.

해님 제 가슴을 뜨겁게 해 주소서.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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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정(한철연회원)
이반 일리히의 상생 사회를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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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봄에 차를 팔았다. 차 안에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연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아내가 남편을 설득해 차를 판 사연이었다. 부부는 치솟는 기름 값과 교통체증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기껏해야 주말에 마트나 나들이를 할 때만 자동차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보유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 그리고 유지비와 보수비를 따져보니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했다. 세대 당 한 대의 자동차 보유를 당연히 여기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도 차로만 움직이고도 늘 시간에 쫓기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소비에 의존했다. 나는 차를 팔고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 없는 생활의 이로움을 발견하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이반 일리히(I. Illich)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리히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며 로마 가톨릭 수사였다. 그는 서양 문화의 제도들이 우리의 교육, 의료, 노동, 에너지 사용, 교통 그리고 경제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비판했다. 일리히는 인생 후반기에 얼굴에 자라는 암 때문에 고통 받았으나 전문적인 의료에 따르기보다 전통적인 방법들로 치료했다. 그는 종양에 의한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기도 했으며, 일리히는 종양이 진행 초기일 때,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했지만 종양을 제거하면 말하는 능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고 종양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일리히는 그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흥규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일리히는 『상생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이유는 극소수에게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히의 ‘도구 tools’와 ‘상생 conviviality’ 개념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리히는 “현대 기술이 관리자managers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Illich, p.?)를 ‘convivial’하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기업의 사장을 의미한다. 즉 현대 기술은 기업의 사장이 돈을 벌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리히가 정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리히에게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출의 분배”(Illich, p.?)를 다루어야 한다. 정치는 투입이 아니라 산출과 관련한다. 산출의 분배를 최대화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다. 분배의 최대화는 곧 돈 많이 버는 것이고, 그렇다면 ‘convivial’은 사장이 아니라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도구의 근본 독점을 비판하고 일리히의 ‘도구 tools’와‘convivial’ 개념을 분석한 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들을 평가한다. 일리히가 상생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 대안은 이상적이고 전 근대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는 추상적인 답에서 찾는 것은 문제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리히의 사상은 산업 도구의 근본 독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생 사회를 위한 개인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사회 개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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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본 독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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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 따르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관계를 조장하도록 응용하면 도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면서 환경을 부패시킨다. 또 도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필요가 있는 일과 기성품이 필요한 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후자의 파괴는 근본 독점을 낳는다. ‘근본 독점’이란 “하나의 상표가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제품이 지배적인 것을 의미한다.”(Illich, p.55)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들이 음료 시장을 독점하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전통 음료와 차를 음료시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자동차도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독점한다. 자동차는 도시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국은 이미 1970년대에 도시의 자동차가 도보와 자전거의 이동을 배제했고, 대만에서는 자동차가 하천 교통을 배제했다. 이와 같이 한 상표의 자동차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도보, 자전거, 배 등의 다른 교통수단이 배제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학교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에 대해 근본 독점을 확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인가 대안학교나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즉 ‘무교육자’로 낙인찍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않으면 교육 받은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료 행위도 학교 교육을 받은 의사일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리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배제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근본 독점이 생기며 이 근본 독점이 강제적 소비를 강요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또 “근본 독점은 거대 제도가 공급하는 표준 제품의 강제 소비를 수단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만든다.”(Illich, p.56) 거대 제도가 만든 강제 소비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는 곳은 병원이 아니고 가정이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산파는 아이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 드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만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모의 산후 관리도 지금처럼 큰 규모의 조리원에서 이루어질 필요 없이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서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분만을 위해서도 병원에 하루나 이틀 입원을 해야 하고, 입원 절차에는 각종 검사가 따르며 그에 대한 부담도 소비자가 진다. 이것은 의료 제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이지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있지만 그녀들은 성가시고 불편한 방송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취재에 응해야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감수해야 한다. 또 분만을 돕는 산파를 구하기도 어렵다.

장례 문화도 근본 독점을 낳았다. 멕시코에서는 한 세대 전(일리히가 책을 쓴 1973년을 기준)까지도 묘지를 파는 일과 죽은 자를 축복하는 일 외에는 모든 장례 준비를 가족이 했다. 가족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픔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모든 장례 절차는 패키지 상품이 되었고, 장의사가 하는 장례 의례는 법률로 강제해서 장의사들이 시신을 통제하는 근본 독점을 낳았다.

일리히는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집 짓고, 죽은 자를 묻는 일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사람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상품에는 제한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풍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가능한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부여”(Illich, p.58)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대신해 ‘더 좋은’ 무엇과 우리의 능력을 교환할 때 근본 독점은 성립한다. 근본 독점은 가치를 산업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새 것들’의 희소성과 소비 수준에 따라 사람을 계급화 하는 틀을 만든다. 근본 독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가치 있는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켜 특권을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를 제한하여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최근에 장례 대행업체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고가의 장례 예식 상품을 유족에게 권한다. 부자가 아니고는 이용할 수 없는 고가의 장례 예식은 결국 서비스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또 다른 특권 의식을 낳으며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서비스 자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독점은 다원적으로 진행해 강제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파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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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생 도구?
1) 도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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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게 도구의 범위는 넓다. “나는 (…)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 생산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 체계도 포함시킨다.” (Illich, p.22)

일리히에게 ‘도구 tools’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한 장치인 ‘수단’을 의미한다. 그는 합리적으로 고안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술 도구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결혼 법 같은 의도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고안물도 도구에 속한다.

일리히에게 ‘도구’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인 기계는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로 만들지만,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는 개인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다.(Illich, P.10) 동력 도구 가운데 몇 가지는 인간 에너지의 증폭기 역할을 한다. 가령 소가 쟁기를 끌지만 사람도 소와 함께 일하고 그 성과는 인간과 동물의 힘이 결합해 얻어진다. 전기톱과 기중기도 같은 방식이다. 반면에 제트기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에너지는 제트기 출력에 의미 있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트기는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 인간을 위해 일하는 ‘산업 도구’며 인간과 함께 일하는 소, 쟁기, 전기톱, 기중기는 ‘상생 도구’라 부른다. ‘상생 도구’는 사용하는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최대의 기회를 부여한다. 도구는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상생을 진작시키는데 전화는 구조적으로 상생 도구다. 왜냐하면 관료는 사람들이 전화하면서 이야기한 개인 비밀을 간섭하거나 보호할 수는 있어도 전화로 서로 말하는 내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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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교육강좌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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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과 처절한 죽음스콧 니어링은 중년 나이까지 교수로서 열정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사람이다. 늙어서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서 자연 속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간 사람이다. 100세까지 모래 살다가 스스로 밥 굶고 죽은 사람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한없이 살다간 사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한을 안고 자살하신 분들이 구천을 헤매신다. 한국이 오이시디 국가 가운데서 자살률이 2위와 큰 차이나는 1위이다. 전 세계에서는 1, 2위와 비슷한 3위이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31.4명이다. 2007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자살방지위원회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나는 꼴이라고 말이다. 60대 자살률은 그 두 배이다. 이 분들의 죽음은 스콧 니어링의 죽음과 너무나 대조된다. 이 분들의 죽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분들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사회 구성원을 챙겨주지 못한 병든 사회가 죽인 살인이다. 이분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할 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오건호 지음, 책세상 펴냄

국민연금은 생명줄이다.국민연금이 단단했다면 우리나라 60대 자살률이 참혹한 수준으로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연금 혜택을 많이 받아야할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서민들이 오히려 국민연금에 강하게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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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여러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높은 소득 재분배의 효과를 지닌 사회복지의 기둥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연금에 가장 많이 저항하는 저소득,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게다.’(8, 9쪽)

국민연금은 생명체이다.국민연금 정책은 완벽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다. 큰 틀은 정해졌지만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꿀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이 국민연금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국민연금이 이룰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60대 자살률 수치도 달라질 것이다.

사보험 연금은 1천원 내고 850원 받는다. 국민연금은 1천원 내고 2천원에서 2천 5백원 사이 받는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수준 되면 2천 5백원 받을 것이고, 지금처럼 우리나라가 사회복지정책을 확고하게 펼치지 못하면 2천원 받을 것이다. 아니 2천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대부분 납부한 보험료보다 2배 이상의 연금액을 수령한다.’(76쪽)‘심각한 일은 대다수 국민이 국민연금과 사보험 중 사보험이 가입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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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사보험보다 유리한 점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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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민연금의 연금수령액은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실질가치로 지급된다. 이는 사보험의 연금액 기준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계속 국민연금에 가입한다면, 62세가 되는 2027년(서평자 주: 2033년부터 연금 개시자는 65세부터)부터 매월 43만 원을 받을 예정이다.’ ‘국민연금에서 밝히는 미래 연금액 43만 원은 사보험의 137만 원과 동일한 금액이다.’(60,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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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서 덧붙일 내용이 있다. 이 책을 쓴 오건호는 62세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오건호보다 몇 살 더 어린 세대는 2033년부터 연금 개시 나이가 65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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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지속가능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은 재정추계 기간이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설정한 재정추계 기간 70년이 지나치게 길다고 비판했다.’ ‘외국의 재정추계 기간은 60~75년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연금의 역사가 짧고 연금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속히 변하는 곳에서는 가능한 한 기간을 짧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민주노총은 신규 가입자의 가입 연령(24~27세)과 평균수명(84세)을 고려할 때 60년이면 재정추계 기간으로 충분하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10년이라는 차이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만약 재정추계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안정화를 위한 필요보험료율은 정부안에 비해 3.1%P 낮아진다. 즉 정부가 급여율 60%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한 필요보험료율 19.85%가 16.75%로 줄어들고, 급여율을 50%(서평자 주: 2008년 50프로에서 매년 0.5% 인하하여 2028년 급여율 40%로 낮추기로 확정)로 인하할 경우 필요보험료율은 15.9%에서 12.8%로 더욱 완화된다.’(100, 101쪽)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민주노총 주장대로 재정추계를 70년이 아니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예상 시점이 더 늦춰질 것이다. 가입자가 내야할 보험료율도 낮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에 의해서 느끼는 일반인들 두려움도 많이 누그러뜨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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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출산율은 너무 낮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을 단단하게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팍팍한 사회에서 그 누가 아이를 많이 낳고 싶겠는가. 이 사회에서 복지정책이 잘 펼쳐지면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이 든든하게 이 사회 구성원 노후를 지켜준다면 또한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높이면 국민연금 재정은 더 든든해질 것이다. 보험료율 9프로를 선진국처럼 18프로로 높여갈 필요가 있다. 천천히 높여갈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선 가입자 당사자가 싫어할 수 있다. 직장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 절반을 기업주가 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크게 저항할 것이다. 기업주들은 노동자 노후가 편해져야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국민연금 수익비가 높아서 국민연금 재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으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4대강 사업처럼 해만 끼치는 행정에 많은 예산을 쓰는 일을 없애야 할 것이다. 남북화해를 이루어 국방비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이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납세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루어진 부자감세를 원래 수준으로 돌려놔야 한다. 더하여 부자증세를 이뤄내야 한다. 그 다음 사회 전체 구성원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증세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다른 구성원들도 세금 더 내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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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과 기초 노령연금

2007년에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프로로 낮췄다. 국민연금 보험금을 낮췄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기초노령 연금을 만들었다. 65세 이상 노인 70프로가 기초노령 연금으로 월 9만 4천 6백원을 받는다. 박근혜가 대통령 공약으로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이 기초노령 연금으로 20만원 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된 후에 국민연금 기금 일부의 돈으로 모자라는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우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2011년 국민연금 1인당 수급액이 월 26만 원이다. 공무원연금의 12% 수준이고, 사학연금의 9% 수준이다. 그걸 헐어서 기초 노령연금 재원으로 쓴다? 너무 황당하다. 2011년 공무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18만 원이다. 거액의 퇴직수당을 제외한 수급액이 이 정도이다. 2009년 군인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35만 원이다. 2011년 사립학교교직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98만원이다. 민주당은 특수직연금 받는 사람도 기초노령연금 20만원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홍헌호는 민주당 주장을 비판한다. 나도 홍헌호 주장에 동의한다.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국민연금 대상자보다 높은 액수의 연금을 받는다. 굳이 그 분들이 기초노령연금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은 모자라는 재정을 국민세금으로 메운다. 국민연금은 이 세 연금보다 관련 당사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공평성 차원에서 옳지 않다. 아직 고령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당장은 국민연금에 쌓인 돈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몇 십 년 뒤에 국민연금 받을 대상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에서 돈을 빼 내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아랫돌 빼내서 윗돌 막으려 하면 그 집은 반드시 무너진다. 장기적으로는 적자로 돌아설 수도 있는 국민연금에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할 때가 닥친다. 이명박 정부 때 부자감세 했던 것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서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워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낮춰서 기초노령 연금을 만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 중 일부를 기초노령연금으로 쓴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지닌 약점과 강점이 책은 2006년에 나온 책이다. 국민연금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뀐다. 2013년 에도 국민연금 운영방식이 바뀔 것이다. 그럼 이 책이 나온 뒤에 두 번 운영방식이 바뀐다. 이 책이 바뀐 운영방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한계이다. 가장 큰 한계는 이 책에서 오건호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모두 합칠 것을 과감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말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오건호가 이 책 고쳐서 다시 내게 된다면 국민연금하나로 운동을 다뤄주길 기도한다. 오건호가 건강보험하나로 운동 펼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닌 강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민연금의 큰 틀을 이 책은 알려주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왜 연대임금인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왜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들어야 하는 지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2004년에 일어난 국민연금 반대 운동에 대해서 글쓴이 오건호는 반대만 하지 않는다. 일부 내용은 옳다고 인정한다. 물론 틀린 내용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말한다. 정부가 잘못한 내용도 차분하게 짚어낸다.이 책은 얇다. 값도 싸다. 5천 9백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한 권씩 사 읽기를 권한다. 바뀐 내용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고서 사보험 연금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우선 이 책을 꼭 사 읽기 바란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은 서민은 반드시 이 책 사 읽기 바란다. 이 책이 널리 읽히면 60대 자살률이 많이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시는 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책값은 단 돈 5천 9백원이다.

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윤지영(명지대 강사)

 

법륜의 말은 구토를 일으킨다. 자신의 우울증의 근간이 가족 내 성폭력에서 기인하며 그 안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뒤엉켜 있음을 어렵게 토로한 이에게 법륜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법륜의 손쉬운 답에 대한 비판에 앞서, 먼저 내담자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 짧은 글귀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 ⓒ뉴시스

내담자의 글귀는 근친상간 성폭력의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기반이며 심리적, 물질적 쉼터이자 안전망이라 여기던 가정이 한순간에 위협적 공간으로 바뀌었을 때, 심리적 물리적 약자인 아이는 이 상황을 감내하거나, 아니면 폭로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아이의 발언은 헛소리나 망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치부되어 간과되어진다.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는 가족에 대한 신화를 통해 행복의 패러다임을 정초해 왔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단위가 폐쇄적 불소통의 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란 공적 영역과 분리되어야할 내밀한 사적 영역이자 혈연으로 맺어진 비영리적 자연적, 순리적 관계로 이상화됨으로써, 가족 구조 내의 위계성과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함구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친상간 성폭력에 대해 폭로하는 이는 영구한 단위여야 할 가족을 해체해 버리는 내부적 위협 요소로 인식되어진다. 그러하기에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이의 발화 위상은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내담자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발화할 기회조차 박탈되어 침묵 속에 방치되어야 했다. 아버지의 가해와 어머니의 방관 속에서 내담자는 행복과 위로의 원천으로 이상화된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현실적 가족의 피폐함의 간극 안에서 혼동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긴 침묵과 자기 혐오로 점철된 시간의 강을 건너 어렵게 말하기 시작한 내담자는 다시금 가족들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침묵의 법이 법륜에 의해 부활되었음을 볼 것이다.

침묵의 법에 의해 봉인되었던 뒤엉킨 고통과 몸의 기억들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법륜의 요지다. 마약중독의 예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마약 중독의 원인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읽어내는 단순함을 보인다. 납치와 강제적 마약 투여란 폭력적 실태에 노출된 개인이 어떻게 그 엄청난 트라우마를 감당하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없이 마약중독이라 결과물만을 보고 이를 개인의 의지 부족이라 진단하는 것은 스스로가 제시한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왜 상습적 마약 복용을 통해 그가 도피하고자 하는 고통은 무엇이며 그 고통은 단순히 생리학적 뇌의 일부분의 중독 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 신체적 상흔을 스스로가 자해하는 방식은 아닌지 등에 대한 질문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대로 된 트라우마의 예에 대한 이해도도 없이 법륜은 마약 중독에서 근친상간 성폭행의 문제로 이야기를 비약해 버린다.

고통의 원인을 찾기 보다, 그 고통을 키워낸 자신을 다스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해법은 모든 폭력 양상을 개인의 마인드 컨트롤의 문제로 축소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성폭행은 하나의 망상일뿐이며 피해자 자신의 정신수양 문제로 극복가능한단 법륜의 말은 억압과 차별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보수 담론이다.세상은 아무래도 안바뀌니 당한 너가 입다물고 없었던 일로 쳐라는 논리는 고통의 개인화를 통해 구조적 폭력성을 은폐한다. 즉 억압의 부조리성을 폭로하는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부조리에 분노하는 이를 망상가로 만들어 침묵케 하는 것이 여태껏 폭압적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아니었는가? 더없이 기득권 유지적 발언을 수양으로 포장하지말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직시,그 감당하기 힘들고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이다. 어디서 고통이 기인한 지도 모른 채, 어떻게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것이야말로 고통을 더욱 더 비대하게 키우는 도피의 방식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죄와 반성, 어머니의 방조에 대한 설명을 내담자는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러한 정면충돌의 방식에서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 가족사의 특이성에 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폭력 양상이 구조적인 가족의 위계질서에서 발생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근친상간 성폭력이 빈번히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은폐되어져 버리고 마는가. 왜 어머니는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나, 이는 경제적 의존성과 생존 기반의 물적 토대를 남편이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는가. 가족은 왜 해체되어선 안되는가. 피해자와 방관자, 가해자란 뒤틀린 관계성이 가족이란 이름 아래 유지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바로 내담자가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아닌가.

다시 말해 내담자가 겪은 이 트라우마가 미친 몇몇 개인의 가족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신비화가 강화될 수록 가족 내의 부조리와 폭력 현상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륜은 고통의 기억과 몸을 속세의 헛된 망상으로 치부하는 초월적 태도로써 내담자가 수십년간 고투해 오던 실존적 고통과 몸부림을 헛된 몸에 새겨진 망상더미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더욱 키우게 할 수 있는 상담 방식이다.

나아가 권력을 지닌 이-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저질러도 하위주체인 자식은 그저 감사하란 말은 권력 구조의 폭력양상을 재생산하게할뿐이다.구조에 내재한 부조리 자체를 허상으로 만듦으로써 세상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어린 비명들을 비가시화하는것은 종교적 해탈이 아니라 폭력적 수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구조적 폭력 구도를 건드리기 보다, 개인적 차원의 마인드 컨트롤로 구원을 찾으라는 말은, 아직도 이 사회가 가족 신화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가족은 신비롭고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공적 영역의 분리를 통해 신성화되어야 하고 침묵되어야 할 성전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거하고 일상의 미시 정치학이 발휘되고 협상되고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이 가정 내의 폭력이 사회적 폭력의 일부이며 가족이란 사적 단위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가족이 지옥이 되었을 때 대안적 공동체가 폭력 구도에 노출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비명과 고함에 귀기울일 지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법륜의 말은 고통의 초월이란 종교적 맥락에서 읽혀야 하며,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는 다른 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겠다. 그 초월이란 위치의 강요가 과연 내담자와 같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또한번의 침묵의 법의 시행이며 그들을 자신 안으로 유폐시키는 감금 방식이라 생각하진 않는가.

‘만셰이아’,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심찬희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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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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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찬희(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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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한철연 신년회 문화행사로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를 초청 상연하였고, 상연 후 감독과 함께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

2008년 이집트 카이로와 아스완 등지를 혼자 여행하던 윤주영 감독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 불리는 만셰이아에 이끌린다.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약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삶의 터전인 만셰이아는 카이로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도시 빈민들이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셰이아의 매력에 이끌린 감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아랍어로 적은 종이를 들고 이곳의 거주민들에게 대답을 구하고자 했다. 의사소통 안 되는 외국인의 이런 행동이 거주민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감독에게 아랍어의 벽을 넘어 거주민들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헨드와 제납 자매였다.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그리고 만셰이아의 거주민들에게도 역시 막연한 죽음보다는 매일의 구체적인 생존이 훨씬 절박하다는 이유 때문에 감독이 얻게 된 답은 죽음에 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감독은 2년 후 캠코더를 들고 혼자서 다시 헨드와 제납 자매를 방문하여 그들과 매일 함께 생활하며 영화를 제작했으며, 다큐의 많은 부분은 출국하기 며칠 전에 겨우 허가를 받아 촬영한 헨드, 제납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상영에 앞서 영화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한철연 회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상영 후 먼저 죽음이라는 큰 주제와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여성주의적인 내용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질문이 있었다. 영화가 이집트 여성들의 척박한 삶을 부분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감독이 선호하는 영화의 제목은 ‘죽은 자들의 도시’보다는 ‘만셰이아’다. 죽음이라는 단어 때문에 만셰이아에 이끌리게 되었지만,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은 만셰이아라는 장소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겪은 경험들이었다. 감독은 영화와 ‘죽음’의 연결고리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헨드와 제납의 대답에서 찾는다. 자매는 삶의 시작을 결혼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결혼은 또 죽음과 연결된다. 결혼은 이들에게 돈과 발(足), 즉 자유인 것이다. 결혼을 통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 같은 삶을 시작하게 해 줄 좋은 결혼이 없다면 죽음을 통해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죽음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삶이 불가능한 곳, 혹은 살만한 삶의 바깥이다. 헨드와 제납의 경우 그것은 결혼 바깥의 삶을 의미한다. 만셰이아에서 두려운 것은 흔히 보는 죽음이 아니라 전기와 수도가 없는 것, 그래서 신이 자신들을 돌아 봐 주지 않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 Mansheia(죽은 자들의 도시)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

죽음에 대해 물었으나 얻은 것은 죽음에 대한 답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었다. 이렇게 감독의 질문들은 예상하지 않은 답을 얻기도 하고, 혹은 대답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감독은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를 위해 3개월여를 기다렸고, 그 시간 동안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자매는 각자 감독과 단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삶의 답답한 부분들, 깊은 내면의 이야기들을 자매는 들려주었다고 한다. 겨우 인터뷰 승낙을 받은 것은 귀국을 3일 앞둔 날이었다. 하지만 제납이 비슷한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새벽에 울면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낸 것과는 달리, 헨드는 카메라 앞에서 침묵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는 감독 스스로 비하인드가 더 많다고 말하는 영화를 만들게 했다.

자매는 이집트 여성들의 삶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히 거의 강제적인 여성 할례, 그리고 처녀성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그중 흥미로운 부분은 결혼 첫날밤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하는 풍습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처녀성을 중시하는 풍습은 30년 전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을 때, 화면 바깥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가 인터뷰를 멈춘다. 촬영은 중단되었고, 얼마 후 인터뷰가 다시 시작된다. 똑같은 인물이 인터뷰를 하고, 방금 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처럼 이집트에서 처녀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있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웃음?) 감독은 같은 인물의 상반되는 인터뷰 장면을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고 평했는데, 이 중단된 인터뷰 장면은 그런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렵게 승낙 받은 인터뷰가 감독의 기대치대로 진행되지 못했을지라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의 나레이션은 거의 없다. [만셰이아]는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지만, 함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캐묻거나 들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헨드나 제납이 들려주는 것들 외에는 어떤 일들이 있어왔는지를 알 수 없다. 상반된 내용의 인터뷰를 하며 공공연한 진실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공모하는 자의 은밀한 웃음 혹은 비웃음이나 자조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이와 함께 할 때, 웃을 때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연기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다. 헨드와 제납이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지금 카메라 앞에서 들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결혼 바깥의 삶이 죽음과 등치될 만큼 그들에게는 지금의 결혼 제도, 아버지의 법과 웃으며 공모하는 것이 살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 감독은 언어의 벽에 부딪치다 헨드와 제납을 만나게 되었고, 만셰이아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 보다는 수도와 전기, 온수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더 친숙하다는 사실은 헨드, 제납 자매와 만셰이아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닿게 했다. 그리고 친구로서의 윤주영 감독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영화가 침묵 앞에서 멈추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간극에 이르게 했다. 카메라는 멈췄지만 결코 쿨한 태도로 멈추지 못하고, 서성이는 듯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 침묵 앞에 선다. 윤 감독이 친구로서 헨드와 제납의 삶에 깊이 다가간 것처럼, 앞으로 감독의 카메라도 자신과 타인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더 들려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