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방문을 환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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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방문을 환영하며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나라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대한민국의 흥보 효과를 생각하고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시한 야권은 대한민국의 부정의를 알리고 세월호 문제를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에 대해 별로 호의적인 사람도 아니고, 또 일 개인을 영웅처럼 숭배하는 분위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황 방문을 그저 외국의 한 사절이 오는가보다 하는 정도로 데면데면하게 생각한다.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부도덕하고 불평등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탈리아 정치의 암적 존재인 마피아를 파문하고 또 한없이 고통받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교황의 모습은 종교 지도자 이전에 인간적으로도 존경할만하다.

 

나는 모든 것을 물질의 운동으로 믿는 소박한 유물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체 유심조를 순박하게 믿는 유심론자도 아니다. 아마도 유물론과 유심론의 절충이거나 양극단의 화합을 요구하고 중용을 찾는, 그래서 대개는 건전한 이성의 봉쌍스에 기대는 사람 정도가 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배척하지도 않고, 숭배하지도 않는다. 또 종교를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종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인간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Lebensform)으로 이해해도 좋다. 나의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때로는 모든 종교에 대해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거리 유지에 도움이 된다. 내 수업을 듣던 어떤 신심이 굳은 학생은 나의 이런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한 번은 창조 과학과 전도와 관련된 책 두 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종교에 한번 젖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내 학생의 부모인 목사에게 내 딸을 좀 인도해 줍사고 데려간 적도 있다. 내 딸도 한 1년 열심히 다니더니 나를 닮아서 그런지 그 다음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산을 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다름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탐방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명 산천의 도처에 있는 웬만한 절들은 다 가봤고, 사찰마다 미묘한 분위기와 풍경의 차이 등을 좋아한다.

 

내가 결정적으로 유물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종교의 발생과 진화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나는 종교를 결정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한다. 하나는 종교의 초월과 관련한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종교가 던지는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우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는 바울의 고백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통렬히 고백하고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아침 이슬과 같고 파도 거품과 같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종교는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감각적이고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의 이 삶에 대한 우리의 단단한 시야를 끌어 올려 저 너머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현실 도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러한 초월에 대한 자각은 현재의 삶을 보다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에 대한 자각, 초월에 대한 의식은 현재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고, 또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를 깨우쳐준다. 모든 상대적인 것들 너머의 어떤 절대자는 이런 유한자들의 불평등과 부정의, 부도덕 등을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하나의 지침이다. 맑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폄하하고, 과학적 실증주의나 유물론이 비등할 때마다 종교를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이라고 부정해왔지만, 종교가 갖는 이런 초월에 대한 인간의 지향성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고등 종교의 메시지는 한 결 같이 사랑과 자비 등과 같이 더불어 사는 인간들 간의 관계의 덕목을 중시한다. 이런 사랑과 자비는 빈부와 남녀,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이점에서 본다면 종교는 근대의 평등이나 인권 사상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평등과 인권의 사상을 선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할 때 전한 사랑의 메시지는 현실 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혁명적 메시지이다. 신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불평등한 신분과 권력관계를 넘어서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예수의 모습이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구원과 희망, 혹은 해방의 선지자로 보였고, 기존 권력의 지배자들에게는 반역을 꾀하는 혁명가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불교의 자비의 정신, 혹은 유교의 인(仁)의 사상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모든 고등 종교는 이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다른 어떤 조건이나 제약, 차이 등을 넘어서 서로 더불어 사는 지혜를 깨우쳐 주고 있다. 나는 현실 세계 안에서의 종교의 가장 큰 얼굴은 사랑 그 자체라고 본다. 그런데 꼭 근본주의가 아니라도, 종교의 이름을 걸고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를 우리는 부지기수로 본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서 하나의 권력이 되고, 이 권력 다툼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종교는 내면의 확신을 지지해주고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강하고 무서울 수 있다.

 

사실 종교가 현실 권력으로 변질되는 데는 종교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예수나 석가, 혹은 마호메트나 공자와 같이 최초의 선지자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는 사랑과 진리, 그리고 초월 등의 메시지는 선지자 자신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선지자가 죽고 나서 그의 메시지가 후대로 전달될 만큼의 생명력을 갖추려면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선지자를 따르는 제자들 집단이다. 이런 제자들 가운데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있고, 이 제자들의 제자들도 있을 것이다. 순전히 스승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이런 제자들 혹은 신자들의 집단이 후대로 가면서 전문화된 사제 집단으로 관료화될 수 있다. 그 다음 선지자가 죽고 나면 그의 가르침의 원형을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일종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인데, 이것은 경전으로 완성된다. 경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렇게 정립된 교리가 초기 선지자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대변하는지의 여부는 다를 수도 있다. 교리가 만들어지고 사제집단이 형성되면서 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동시에 필요하다. 성당이나 교회, 그리고 사찰이 그 경우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등 종교가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제도화되는 과정에서는 이 세 가지가 필수적으로 구비되는 것이다. 즉 선지자의 순수한 가르침이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화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종교의 세속화라 할 이런 모습을 실정성(Positivit?t)이라 표현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실정성은 최초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현실 권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교리는 도그마(Dogma)로 화석화되고, 사제집단은 관료화된 기생집단이 되며, 교회는 세속 세계의 부와 권력의 집산지가 된다. 다시 말해 종교의 본질 중의 하나인 초월과 사랑의 정신을 망각한 채로 세속 권력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부패한 종교는 종교를 가장한 현실 권력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등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번에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열광하는 데는 교황이 보여준 종교의 본래 정신과 본질을 그에게서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은 바티칸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비판하고 경고한다. 오늘날 대안 없이 절대 강자들의 놀음 터로 변한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논리에 대해 그는 거침없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비판하고, 흔히들 말하는 낙수효과나 파이효과에 대해 “그릇과 파이만 키운다”고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 벌써부터 교황의 이런 행보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교황을 마르크스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로 낙인찍고 있다. 종교의 본래 정신으로 현실 자본주의나 기타 사회적 모순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얻어낸 제정분리와 탈 주술화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중세 화를 염려하기도 한다. 물론 교황식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비신자인 일반인들까지 교황을 반기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현실권력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종교의 참다운 정신인 만인 평등의 정신과 사랑을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교황의 거침없는 행보에서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교황의 정신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 땅의 곳곳에서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서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위정자들과 고삐 풀린 한국식 신자유주의가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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