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기차여행 [유철의 유럽방랑기] -5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유철의 유럽방랑기 /by 전임 편집주간보스니아 여행에서 놓치면 안되는 것 중 하나가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 한다. 사라예보에서 남쪽 끝, 보스니아의 유일한 해안도시 네움Neum으로 향하는 기차여행이 그 중에서 으뜸이라 들었다. 특히 사라예보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모스타르Mostar까지의 길은 놓치면 안된단다. 하루에 오직 두 편, 오전 6시, 그리고 오후 8시에만 운영하는 기차, 내 선택지는 물론 오전 기차 뿐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새벽 4시에 숙소에서 나섰다. 피곤함에 조금 게으름을 피울까도 싶었지만, 이곳을 떠나면 언제나 다시 올까 싶은 마음에, 조금 일찍 나선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마치 콘크리트 파편에 빨간 페인트로 채우듯 사라예보를 내 마음에 담는다.
사라예보 기차역,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다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이다. 역무원 하나 안보이고, 영어 안내 표지판 하나 없는 친절한 역. 주변에 영어는 오직 한 쪽 벽면을 덮은 코카콜라 광고판 밖에 없다. 어제 미리 예약해 받은 기차표도 어찌나 허술 한지 손바닥 만한 종이 쪼가리에 수기로 적힌 플렛폼과 좌석 정보가 전부다. 그러나 그마저도 온통 보스니아어인 탓에 어떤 숫자가 플랫폼 번호며, 좌석 번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두리번 거리고 있는 찰나, 한 낡아 헤져 구멍이 난 반바지, 반팔을 입은 여성이 내게 다가 왔다.
“모스타르 가니? 그럼 날 따라와.”
독일에서 왔다는 23살의 안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녀는 공부를 마치자 마자 자신에게 선물로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나 왔다고 한다. 검게 탄 피부, 그리고 허름한 옷차림이 그녀의 지난 여정을 대신 설명한다. 알바니아-코소보-세르비아를 거쳐 보스니아에 도착한 그녀는 다시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그녀의 집이 있는 마부르크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녀의 지난 두 달여 간의 여행은 이제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덜컹 덜컹’
그렇게 그녀와 지난 여행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식이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꽤나 현대적인 내부를 지닌 기차다.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보스니아 정부 주도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기차 사업권을 얻은 한 러시아 회사가 들여온 새로운 기차인데, 소비에트 당시 운영된 기차를 들여와 내부만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엉터리 라며 반발하고 있으나, 이미 이전에 운영된 기차는 그 보다도 오래된 기차였고, 그 사업권의 대가 중 하나가 철로 정비사업을 포함한 것이라고 하니.. 자본이 부족한 보스니아 정부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영화는 보스니아의 최대 이슈 중 하나다. 여전히 민족간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가운데 지난 2010년 총선에서 정치적 혼란과 반목이 이어져 EU가입 후보국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 결과 4천만 유로 규모의 EU로 부터의 지원금이 중단된 터였다. 결국 당장 돈이 없는 보스니아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하려 하지만 부패한 관료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자국내 재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민영화를 추진한 몇 몇 기업이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이 실패는 실질적인 청년실업률이 약 60%(전체 실업률 약 45%)를 기록하고 있는 보스니아에게 그나마 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체불이라는 재앙까지 덮치며, 지난 2014년 보스니아 내전 이후 가장 큰 대규모 시위를 불러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시위대들은 시민 총회를 열어 공무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여러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민영화청을 설립하여 현재의 민영화 정책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서서히 출발한 기차는 사라예보의 총탄자국 가득한 아파트촌을 거쳐, 텅빈 평야를 달리더니 산길을 오르고 내리고, 그 산들 사이를 그리고 산과 산을 잇는 다리 위를 달린다.
특히 코니치에서 모스타르로 이어지는 네레트바 밸리가 압권이다. 빗물이 석회암으로 형성된 지표면을 깎아 내리면서 만들어진 다채로운 자연환경은 절경이다. 에메랄드 빛 네레트바 강변을 따라 해발 2000m가 넘는 석회암 산들 사이로 달리는 기차, 그 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니아의 절경은 그렇게도 사람들이 보스니아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좌우로 이어지는 절경들. 그 절경의 한쪽만 보는게 아쉬웠다. 우연히도 나란히 안게 된 안나와 나는 카페가 위치한 칸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너는 중국에서 왔니?”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운 카페 칸에서 좌우로 펼쳐지는 경관을 카메라에 그리고 눈에 담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승무원 한 명이 내게 묻는다. 아주 드물게 한국인인지를 묻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럽 어디에 가든 중국인이냐고 묻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니야, 나는 한국에서 왔어. 괜찮아 나도 너희들을 구분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그는 머쓱한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네가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음.. 나도 한국 사람을 하나 알지. 박지송? 숭? 성? 축구선수 말이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승무원과 대화를 듣던 안나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묻는다.
“참, 나도 얼마전 너희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봤어. 박근혜? 맞지? 그녀의 사법 절차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변방의 작은 나라의 이미지는 이렇게 서구사회에서 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특별한 발자취로 남겨진 이들로 인상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과거에는 한국 하면 한반도 북쪽 김씨 왕조를 묻는 사람들이 대다수 였다. 요즘처럼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아니면 핵실험을 할 때면 모든 친구들이 내게 와서 그들을 묻기 일쑤였다. 그러나 요즘은 박근혜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 영국에서 테레사 메이의 인기가 추락하면서는 현역 대통령을 탄핵시킨 나라라는 점에서 부러움을, 다른 한편에서는 ‘독재’ 혹은 ‘권위주의’ 나아가 ‘부패’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된 것 같다. 물론 건조하고 시니컬하게 그러한 한국 사회에 대해 논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개’한 제 3세계의 이미지를 포착할 때면 마냥 시니컬하게 반응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2월 박근혜에 대한 헌법재판소 선고가 있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사회과학 대학 박사과정 학생들의 정례 세미나 날이자, 동시에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 토론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당시 발표 꼭지 중 하나를 맡아 ‘러시아 혁명과 한국의 촛불시위’ 라는 주제로 논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구인들에게도 어떠한 폭력사태 없이 법적 절차에 따라 현역 대통령을 탄핵시킨 것은 물론이요, 사법절차에 들어간 사례가 많지 않기에 큰 화젯거리 였다. 따라서 당시 토론회 참가자들은 탄핵국면까지 가는 과정, 그리고 정부의 부패 및 권위주의, 제 3세계의 특징 등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동유럽 출신의 대부분은 촛불시위 중 미국과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 그리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역할에 관심을 갖는 한편, 서유럽 출신들은 주로 제 3세계 국가들의 특징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던 중 한 프랑스 여학생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야. 제 3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부패 스캔들이 프랑스에서도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문제는 대안이 없어. 사회당은 부패했고, 마크롱은 자본의 대변인이야. 그렇다고 멜랑숑이 대안이 될 수 없어. 그는 이상주의자일뿐 더러, 반 EU주의자야. 물론 여기에서 르펜을 거론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해.”
내 신경을 건드린 건 다름 아닌 ‘제 3세계에서 있을 법한 사건’이라는 그녀의 표현이었다. 묘한 그녀의 발언에 나는 ‘얼마나 세련됐느냐의 차이일뿐, 너희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물론 미국도 권력과 자본의 부패는 존재할 것’이라 답했지만 착잡한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내 안에도 그러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은 변방 출신의 나에게도 그리 쉽지 않다. 그건 앞서 내가 코소보와 알바니아를 두고 그저 근거없이(물론,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하다고 바라보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은 아닐까? 그건 그저 무지에서 비롯된 우매한 나의 고백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를 하며 그리고 경치를 구경하고 달려온 길. 어느새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강하게 내리 쬐는 볕은 사라예보와 또 다른 느낌이다. 역사를 나서자 뜨거운 열기에 숨을 쉬기도 벅차다. 아직 8시밖에 되지 않았으나 30도를 넘는다. 한낮 기온이 40도를 넘는다 했으니, 조금 걱정이 된다. 짧았지만 인상깊은 대화를 나누며 길동무가 되어준 안나와 찐한 포옹 후 연락처를 주고 받고는 그곳이 독일이든, 영국이든, 한국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나라든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모스타르 하면 도시를 횡단하는 네레트바 강의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다. ‘옛 다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내전/국제전을 겪은 이들의 아픔과 화해를 상징한다.
16c 소금이 귀했던 그 시절,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황제로 알려진 쉴레이만은 달마시아 해변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 다리 건설을 명령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인 하즈루딘이 다리를 설계에 착수한 결과, 1088개의 하얀돌, 길이 30m 폭 5m, 높이 25m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고 거대한 석조다리를 혁신적인 건축기법을 통해 건설하게 된다. 납 땜 된 철제 핀들과 달걀 흰자로만 커다란 석재들을 지탱하는 기법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던 스타리 모스트, ‘썰’에 의하면 이 기법이 실패할 것에 대해 두려워 하이루딘은 다리가 완공되기 전 도망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확인할 길을 없지만 스타리 모스트를 건설하기 전, 이와 똑같이 생긴 크리바 쿠프리야Kriva cuprija를 만든 것을 보니 그가 스타리 모스트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다리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자, 보스니아의 보물같은 존재였다. ‘모스타르’란 마을 이름의 뜻이 ‘다리의 수호자’란 뜻을 지닌 ‘모스타리(mostari)’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1993년 11월 9일 오전 10시, 400년 동안 원형을 유지하던 스타리 모스트는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스타리 모스트 동쪽 탑, 타라 탑에 위치한 스타리 모스트 박물관에서 당시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에 결국 무너지고 마는 스타리 모스트의 모습을 상영하고 있었다.(https://youtu.be/sFF1v0n6VUg)
세르비아가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있는 사이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 극우 민족주의자 프리뇨 투지만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군대(Croatian Defence Council, 크로아티아 군대가 아니라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들이 중심이 된 군대로, 최초에는 세르비아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지만 후에 극우주의와 결탁, 보스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를 앞세워 모스타르를 정밀 폭격한다.
그렇게 모스타르 서쪽 언덕 위에서 발사된 포탄은 정확히 스타리 모스트에 향한다. 그 포탄의 목표는 그들이 상정한 적도, 모스크도 아니었다. 정확히 그 다리, 스타리 모스트였다.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다리, 스타리 모스트는 한 발, 두 발 포탄을 맞으며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돌들과 철제 핀들을 하나, 둘 씩 흐르는 네레트바 강에 떨구고 만다. 그리고 다시 한 발, 두 발, 세 발. 오랜 다리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간다. 끝내 포탄을 견디지 못 한 스타리 모스트는 자신들이 생기기 이전부터 그 자리에서 흐르던 네레트바 강물에 자신을 맡긴다. 그렇게 스타리 모스트로 형상화 되어 온 산에서 온 돌들은 포탄들과 함께 강에 던져져 다시 산에 일부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400년 전, 오래된 다리가 생기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모스타르. 산도 그대로고, 강도 그대로고, 하늘도 그대로인데, 다리만 사라져 버렸다. 이 소식은 보스니아인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보스니아 정부는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라예보가 포위되어 포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적 애도의 날을 선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크로아티아 여성문학의 대표작가 슬라벤카 들라쿨리치는 묻는다.
“우리는 왜 파괴된 다리의 이미지를 보며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볼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가?”
그건 아마도 인간이 갖는 유한적 삶을 초월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담고 있는 영원성 때문은 아닐까. 당시 보스니아에서 민족간 통혼율이 가장 높았던 모스타르, 스타리 모스트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구혼의 장소로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그 자식과 손자의 사랑이 시작된 장소였다. 그리고 스타리 모스트에서 열리던 한 여름의 다이빙 대회는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즉 스타리 모스트가 의미하는 것은 몇 대에 걸쳐 함께 공유하는 집단의 기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름과 공존의 무게를 버틴 공간이었던 오랜 다리였을 것이다.
발칸의 호메로스라 불렸던 이안 보드리치의 대하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의 다리도 그러했다. 소설은 남쪽 무슬림 마을과 북쪽 기독교 마을을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인간들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이해와 공존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드리나 강의 다리는 역사의 증인으로 그곳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함께하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관찰자이자 그들의 삶과 함께한 친구다. 이안 보드리치는 다리에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알기 전에 다리를 알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전 다리와 먼저 사랑을 나눴다. 다리는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가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통로다.”
그런 옛 다리의 파괴는 단절을 의미하는 것 이상 아니었다. 그들이 존재하기 이전 부터 존재해 온 옛 다리가 사라지자, 네레트바 강은 잔인하게 서쪽 마을과 동쪽 마을을 갈랐다. 하나의 마을이었던 모스타르는 카톨릭 신자들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주로 살던 서쪽 마을, 이슬람 신자들인 보스니아인들이 주로 살던 동쪽 마을, 두개의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스타르가 자랑하던 다름의 공존도 함께 무너졌다.
1993년 한 번 무너져 내린 스타리 모스트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7월, 주변국들의 후원을 받아 터키 건축가들이 사료를 기반하여 그것이 건설된 방식으로 복원해 낸다. 그건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는 그리고 공존과 평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첫걸음이다.
그렇다고 스타리 모스트의 복원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닐터, 여전히 서쪽 마을과 동쪽 마을은 관념적, 실질적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학교로 나뉘어 공부하던 학교는 내전이 끝나고 어느새 하나가 되고 한 지붕 아래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 각 학생들이 오르는 계단도, 공부하는 교실도, 운동장도, 교육과정도 그리고 이들을 책임지는 교장도 둘이다. 심지어 도시 구급 체계를 비롯해 모스타르 지방정부도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두개로 운영되며, 경찰차도, 구급차도, 정치인도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에 참여한 이들 중 일부는 어떠한 형벌을 받지도 않고 여전히 모스타르에서 카페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서쪽 크로아티아계 마을 뒷산에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단순히 내전 중 사망한 카톨릭 신자들을 추모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저 그건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증오와 불신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불행은 시간과 함께 그저 그렇게 지나가거나 혹은 최소한 인간들의 망각 속에 흩어져 사라진다. 오래전 무너져 버린 다리의 돌들이 네레트바 강에 흘러 내려 갔듯이, 그 불행도 새로운 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 아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흘려 내려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오래된 다리 위에서 몇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삶은 다시 시작되어야 할 때인 듯 하다.
모스타르 동쪽 마을, 스타리 모스트가 보이는 한 켠에 조그마한 비석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 비석에 써있는 작은 글씨,
‘Don’t Forget’
그 불행을 인간의 망각 속에 흘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행을 잊는 것일 뿐, 결코 불행이 가져 왔던 참혹했던 과거를 잊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다리 위에서의 삶은 그러한 참혹했던 과거의 실수 위에서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작은 비석은 이곳 모스타르에 사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는 듯 하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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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퇴색되어 버린 시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8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퇴색되어 버린 시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모든 것은 퇴색되어 버린다.
모든 것은 동시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새롭게 변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동시에 좌절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흐른다.
모든 것은 그렇게 순환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잊혀져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모든 것은 그렇게
감각의 무덤 위로
바람이 흩어지고
흙이 흩날리고
감정의 깊이는 무덤덤해져
그렇게 슬퍼지기도 한다.
감정의 세포는
감정의 혈류를 타고
점점 차가워져
깊이는 사라진다.
2017, 9. 14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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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4분의 3 청춘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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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작은 집은
그렇게 문이 열린다.
끊어지지 않는 고통은
연민을 끊임없이 찾아
감정과 감정의
선과 선의
사이와 사이에
공간을 가르고
점점 점을 찍고
면을 채우고
색을 칠한다.
복잡한 선과 선은
내면을 관통하여
지루하게 수식을 만들고
부유하는 날개를 끊고
뚫리는 절벽에는
바람이 날리기도 한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남기기도 하고
하얀 얼굴을 내미는
작은 빛은 굵게, 진하게, 흐리게
드넓은 언덕과 언덕을 만들고
흩날리는 먹구름에
선을 깡충 뛰어넘어
하늘의 그려진
가시밭길 뒤늦은 청춘이
아슬아슬 걸린다.
낮으로 가는 밤길을 찾아
밤으로 가는 낮 길을 찾아
겨울의 문턱이 없는
작은 집은
그렇게 문이 닫힌다.
그렇게 시간의 흔적이
하나하나 새겨지고 있다.
2017.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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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유랑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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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가느다란 선위에 걸린
마음을 따라
공간과 공간 사이를 유랑한다.
소금 사막에도 있고
산토리니에도 있고
노르웨이 숲에도 있고
흐릿한 구름사이로
파란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랑색도 있고
회색도 있고
내 사랑도 있었다.
잃어버린 토끼도 있고
잊어버린 강아지도 있고
잊어버린 작은 강아지풀도 있고
잃어버린 청개구리도 있고
언제나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있는 것이 많다.
그렇게 보송보송
작은 기억이 조각조각
아슬아슬 걸려 있다.
2016.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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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털이 보송보송한 벌레가 아니지만 벌레 같은 현상을 보며 어렸을 때 추억이 생각납니다. 자연은 모두 내 것이었고 나의 세상이었습니다. 한때는 그랬습니다. 길을 쉼 없이 갈길 가는 털북숭이 벌레를 들여다보며 깔깔 웃고, 군집을 이룬 까만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들을 보며 즐거워하며 작고 작은이들의 신기한 우주를 만나 행복을 느꼈습니다. 넓은 들판에 파란 하늘, 흐린 하늘, 바람, 나무, 벼, 수많은 풀벌레들,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들, 산토끼, 강아지, 빨간 고추잠자리, 푸릇한 작은 잎들, 밤, 살구, 모과, 감나무가 있는 그 시간의 조각을 추억하면서 내게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많음을 잊고 살고, 추억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 안에는 많은 것들이 살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문득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은 더 크고 넓게 자랐습니다. 나의 삶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만 같은 큰 꿈도 생겼습니다. 그곳에는 산토리니도 있고 그곳에는 노르웨이도 있고 그곳에는 큰 호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공간에 현재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그들을 불러 행복한 조각조각들의 향기를 맡고 보고 만져보고 들어보는 유랑을 떠나봅니다.
Tweet섦 – 사라와 나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5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by 전임 편집주간사라와 나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어디로 가야 산을 잡고
어디로 가야 별을 찾고
푸른 새벽 별빛의 종소리에
수를 놓을까
그리지 않는 음은
별과 달로 뜨는
눈물의 가시 빛이 흐르고
누운 잠은
빛의 속삭임으로
노란 날개 짓을 하고
개는 황금 들을 날아
낡은 아침 해를 뜨고 있다.
비의 빛은 우는 듯 웃는
뜨거운 눈빛에
검은 달 휘어지는
낮 소리에 머물고 있고
검게 칠한 파도에
흰 새벽달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신기루를 발견한다.
2017. 7. 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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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필 감독을 기억에 새기며 [유철의 유럽방랑기] -4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유철의 유럽방랑기 /by 전임 편집주간이번 유철의 유럽방랑기는 특별히 필자의 삶에, 또 많은 이들의 삶에 인연과 시선을 남긴 고 박종필 감독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글을 싣습니다. 인연이 있던 많은 분들이야 당연히 고인을 추모하겠지만, 일면식 없는 이들도 세상의 한 구석을 가까이서 함께 기록으로 남겨왔던 고인과 고인의 작업들을 조금이나마 다시 되새기고 남겨야 한다는 마음에서요. 너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고등학생 그 시절, 나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했었다. 그 영화가 바로 ‘끝없는 싸움-에바다(박종필, 1999)’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에바다 문제, 특히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투쟁을 영상으로 만들게 됐다. 그것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그 영상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바꾼 건 그 영화제의 입상이 아니라, 그 영상을 만들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사회를 조금씩 알아갔고,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됐다. 가끔은 그 사람들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투정이란 것을 나도, 그 투정을 듣는 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 사람, 내가 영상을 만들며, 이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 박종필 감독, 종필이 형이 있다. 그가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내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2000년 어느 날 신촌에서 그와 처음 만난 곳은 연대 앞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삼겹살 집이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 나누는 그런 곳. 삼겹살이라 하더라도 불판에 얹으면 금새 녹아 없어지는 1인분 2000원짜리 삼겹살이니, 이게 정말 삼겹살인지 의심스러운 그런 삼겹살이 나오는 허름한 곳이었다.
한 대학생 누나가 내게 오늘 내가 정말 좋아할만한 사람이 오니 꼭 나오라 연락에 나는 야자를 제끼고, 독서실 자리에 불을 켜 놓고서는 형 누나들과 할 소주한잔 기대하며 신촌으로 향했다.
그들과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나는 내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본 그 영화, ‘끝없는 싸움-에바다’를 만든 그 사람이라고. 그도 내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한다.
“어, 네가 그 고등학생이구나! 반갑다!”
그는 내게 고등학생 한 명이 대학교 동아리실에 무작정 찾아와 그들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동안 무척 궁금 했었다고 말했다. 뭐든지 물어 보라던 그. 그러나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는 카메라 다루는 법, 촬영, 편집할 때 주의사항,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의미하고 그리고 중요한지를 늘어 놓았다. 고등학생인 내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이다. 그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꼭 같이 작업하자.”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제스쳐, 그의 말투, 그의 젓가락질, 소주 마시는 모습,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때 당시 그가 건낸 그의 명함을 나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는 내게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영상작업을 통해 생긴 그 인연으로 노들야학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만난 종필이 형. 그는 바쁜 일이 생기거나, 촬영이 겹치거나 하면 가끔 내게 카메라를 맡기곤 했다. 그는 내게 촬영 부탁을 하면서, 그날 필요한 그림들과 내용들을 설명하다가는 결국 항상 마무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찍고 싶은 데로 찍어봐. 못 쓰면 다시 촬영하면 되지 뭐.”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3년 에바다 농아원의 문이 열리던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에바다 농아원 사태는 점차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에바다 정상화를 자축하는 잔칫날.
“야, 너 유철이 아니니? 너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지내?”
반가운 형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어색했던 나. 학생회를 한다는 핑계로, 나의 게으름으로 야학에 발걸음이 뜸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영상을 안하기로 마음 먹은 후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영상작업의 첫 대상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에서, 그 에바다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던 그와의 만남, 그러나 예전 나의 꿈에서 많이 멀어진 나. 그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불편한 것이었다. 아니, 왠지 모를 서운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형에 대한 서운함은 아니다. 그냥 내가 당시 영상을 안한다는 그런 서운함일 듯 싶다. 그런 복잡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진다.
“너는 이제 영상은 그만 둔 거니?”
최소한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질문. 베시시 웃으며 “네”라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내게 ‘왜’를 묻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물으며 웃고 대견하다며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난다.
굳이 형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형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회현장에서, 그리고 노들야학에서 쉬이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는 허름한 술집에서 종종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모처에서 우연히 갖게 된 그와의 술자리, 형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영상을 그만하기로 한거였지?”
갑작스러운 질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머뭇 하고 있는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형, 저는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당장이 비참하고 또 억울한데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너무 잔인해요. 평생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요.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나는 대학에 입학 후부터는 카메라를 결코 들지 않았다. 물론 몇 번 시도하기도 했으나, 열정과 분노만이 가득한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그리고 그 현장에서 같이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의 외치는 구호와 분노를 기록해야 하는 작업. 그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그들과 부둥켜 안거나 혹은 같이 울기보다는,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는 작업. 내게 그런 작업들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그 수 많은 사건들에 벽을 치는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그런 말도 안되는 내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서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유철아, 우리에겐 각자의 몫이 있는 것 같아. 네가 해야할 역할과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너는 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가 각자 해야만 할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의 변명과 변명 속 어딘가에 묻어 있는 서운함, 아마 형은 그 서운함을 알아 차린 듯 싶었다. 내가 영상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겠다는 것을 형은 이미 알아 차렸던 것 같다. 그때 그의 말이 무척 위로가 됐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느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같잖게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국을 떠났다. 그러던 지난해, 초여름. 정말 오랜만에 양재동에서 형과 만났다. 다른 동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그러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형과의 술자리에 나는 추억 팔이 삼매경에 빠졌다. 신촌에서 불판에 얹으면 녹아 없어지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그리고 질겨서 결국 씹다가는 결국 그냥 이를 삼켜야 했던 돼지 껍데기를 안주 삼아, 빡빡머리 고등학생 앉혀놓고 소주 따라주던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 추억팔이. 형은 내게 그 때 나와 함께 촬영 다니던 여학생하고는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냐며 뜬금포를 날렸다. 이에 나는 질세라 거 형의 연애사로 응수하며 ‘우린’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고, 노들이야기를 하고..
함께 술자리를 하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떴지만 한참을 형과 소주를 기울였다. 둘의 혀가 조금씩 꼬여가던 찰나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할까?”
당시 두 번째 허리 수술을 한지 얼마 안됐던 터라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형과 함께 탄 택시. 형은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유철아, 건강해야 해. 유학생활 힘들겠지만 건강관리 잘하고, 들어오면 또 한잔 하자.”
그렇게 나는 다음에, 진짜 다음에 꼭 한 잔 할 것을 약속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결코 내리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소주 한 잔 더 하자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놀려주었을 텐데.. 건강 꼭 챙기시라 이야기 했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허망 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이렇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는 길 조차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 후회마저 허망하다.
종필이 형, 이제 정말 형을 볼 수 없는 거야? 전 형이 언젠간 꼭 같이 작업하자는 말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가긴 어딜가요.. 아직도 저는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힘드네요. 특히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아직도 형에게 투정만 늘어 놓네요. 아직도 형 앞에선 제가 철부지 고등학생인 것 같아요. 그냥 지금 형이 그리운건 어쩔도리가 없네요. 보고싶어요.. 형.. 그저 형이 가는 길에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 괴롭네요.
형이 아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그냥 이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 날 양재동에서 형에게 한 말, 다시 하고 싶었어요. 내가 꿈을 키워가던 시절, 당신은 내게 영웅이었고, 지금도 형을 보면 설렌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건 정말 형이라고 말이에요. 결국 전하지 못한 이말 이렇게나마 남겨요. 그곳에서 라도 이 글 읽어주세요.
이제 정말 형을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네요. 아니, 보낸다는 건 말이 안되겠죠? 그냥 가슴에 묻는 것이겠죠. 호식이 형을 가슴에 묻은 것처럼.. 아마 가슴에 묻은 형들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으로 계실 것이고, 지치고 힘들 때 내 삶의 원동력이 될거에요.
형, 종필이 형! 조심히 가요. 먼 훗날 꼭 저승에서 약속한 소주 한 잔 기울여요. 그 때까지 건강히 계셔요..!
현재 유튜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고 박종필 감독의 영화 다시 돌아보기가 진행 중이니 꼭 보시는 것도 추모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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