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앞의 글(서평, 1부)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조던이 과학자로서 불굴을 의지를 갖추고 자연 속에 질서를 세워 나갔던 힘의 원천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여기서 저자의 서술은 비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가에 가깝다.

이 책에서 조던에 대한 애가는 갑작스럽게 분노로 전환한다. 이것은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첫 번째 의심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해 1905년 스탠포드 학장으로 근무할 당시이다. 스탠포드 대학 이사장인 제인 스탠포드가 사망했는데 여러 증거로 볼 때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조던은 학장으로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제인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만다.

최근 이 사건은 다시 조사되었는데 저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조던이 제인을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의심보다 더 결정적으로 저자의 평가를 전환한 것은 조던이 1920년대 전개했던 우생학 운동이었다.

우생학은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제시했다. 조던은 이런 우생학을 미국으로 전파했으며 1920년대에는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우생학의 온상이 되었다. 조던의 영향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924년 버지니아 수용소나 1928 인종 개선 재단은 모두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생학의 결과는 사회 부적응자를 강제로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후일 독일에서는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강제 불임 시술을 통해 유전적 영향을 제거하려 했다.

2)

여기서 강제 불임의 대상이 된 것은 단순히 간질환자나 정신지체인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도덕적 타락으로 지목된 창녀, 동성애자 등도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근거가 된 이론이 도덕적 타락이 유전된다는 주장이다.

버지니아 수용소장이었던 프리디 박사는 캐리 벅이란 여성을 조사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났으나, 강간당해서 양부모가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는 애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프리디 박사는 애마가 캐리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애마 역시 창녀로 이 수용소에 끌려왔다. 프리디 박사는 캐리가 수용소에서 출산한 아이 비비엔에게서도 정신적 퇴화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캐리 벅의 예를 도덕적 타락이 3대에 걸쳐 유전한 예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버지니아 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던 두 여인 애나와 메리를 만난다. 저자는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이 처리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를 되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우생학이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마침내 이 책의 근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엄격한 절차를 따르는 탁월한 과학자 조던이 이런 우생학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니다. 나치즘 역시 우생학에 기초하여 인종 청소를 하였으니, 이런 물음은 곧 나치즘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다.

3)

저자는 조던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그 단서를 찾으려 한다. 저자는 마침내 조던을 과학자로 이끌었던 그의 스승 루이 아가시의 사상에 부딪힌다. 루이 아가시는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표본실 건물 앞에 동상으로 세워놓은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이 나중에 다윈의 영향을 받아 탁월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아가시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지배되었다고 본다.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밑바닥에 있는 개념은 자연 속의 신의 계획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거슬러 올라가서, 조던이 아가시를 자연관찰 캠프에서 처음 만난 날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때 저자는 아가시의 말을 같은 캠프에 참가했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시 속에서 발견한다.

스승이 젊은이들에게 말했지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우리는 그분의 법칙에 따라

원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다네

그 무한한 존재, 시작된 적이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그분,

이름 붙일 수 없는 유일자,

우리의 모든 빛의 빛, 그 빛의 근원,

생명의 근원, 그리고 힘의 힘을

맹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듯,

우리는 이곳에서 더듬으며 찾고 있다네.

그 상형문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이는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자연 속에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아가시의 사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진화론의 태두라고 할 라마르크의 학설과 닮았다. 이 학설은 다윈의 맹목적 진화론과 구별되며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서 이제 진화의 단계는 동시에 탁월함의 단계이며 도덕적 완성의 단계가 된다. 그 단계의 최종 끝에는 인간이 있으며 이 인간의 끝에는 다시 이성적이며 기독교도인 백인종이 있다.

과학이 자연의 종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의 종 속에 신이 숨겨놓은 이런 탁월성의 단계,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가시는 이렇게 말한다.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4)

저자에 의하면 조던 역시 끝내 아가시의 목적론적 진화론, 즉 자연의 층계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자연의 층계라는 개념은 우생학의 원천이 된다. 그 대문에 조던 역시 우생학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퇴화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른 생물은 퇴화하여 자신이 진화의 단계에서 발전시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생학은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해서는 퇴화가 일어난 종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인종 청소나 강제 불임 시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조던이 스위스의 아오스타라는 공간을 방문한 기록을 발견한다. 아오스타는 가톨릭교회가 장애인을 돌보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장애인이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어느덧 커다란 도시가 되었다. 조던은 이 아오스타를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 대립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높이 평가한다. 다윈에서 모든 생물은 각자 적응하고 있는 존재니, 여기서는 어떤 층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생물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다윈으로서는 퇴화라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새로운 적응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물의 다양한 변종이 생물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제이니, 이런 변종이 생명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5)

초기에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한 조던이 끝내 다시 아기시의 목적 진화론에 빠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관해 저자는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이 책의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조던이 은 우생학에 빠져든 것은 자연의 무질서 앞에 조던이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자연이 혼돈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과학이 아무리 이 자연 속에 질서를 세우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대지진 앞에서 무너진 조던의 표본실과 마찬가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혼돈의 세계 속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버지니아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한 채 살아남은 애나와 메리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그리고 자연에 어떤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곧 민들레 법칙이라 한다. 그것이 다윈이 독자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라고 한다.

조던의 삶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이런 법칙은 작가 자신의 삶도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이제 자신을 떠난 남편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제 직시하며 새로 만난 여성과 삶을 꾸리게 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제 약간 감상적으로 되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포한다.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을 해방시키는 것”

6)

마침내 저자는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어류의 세계에서 세웠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저자는 자기의 일이 조던이 애나와 메리에게 가했던 잔인한 불임시술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의 결단 속에는 어떤 미묘한 즐거움이 흐른다.

저자는 분지학을 연구하는 캐럴 계숙 윤의 도움으로 물고기라는 존재 즉 어류라는 분류 항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산에 사는 생물을 모두 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또는 공중에 나는 생물을 모두 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물에 산다고 해서 모두 어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어류라고 말해지는 폐어, 송어, 멍게, 가자미 등은 동일한 과에 속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한다는 생각은 관념론 철학의 근본 주장이다. 물고기라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은 물고기가 마치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물고기라는 분류명을 제거해 버린다. 이로써 조던이 목숨을 걸고 확립하려면 물고기의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7)

글을 다 읽고 나서, 독자로서 나는 다시 회의에 빠진다. 우선 우생학에 대한 문제이다.

민들레 법칙, 아름다운 말이지만 저자가 기대한 만큼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가 그려 놓은 것처럼 자연의 혼돈 앞에 그런 그물망이 얼마나 버틸 것인가? 아마 그것은 대지진으로 파멸된 조던의 실험실 유리병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자가 가정했듯이 우생학이 목적론적 진화론의 결과인가? 다윈의 저서 속에 인간이 가축을 개량한 것 역시 진화의 한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자체 내에 이미 그런 우생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이런 생물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 속에 끌어들인 것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생물과 동일하다면, 우생학은 불가피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생물과 운동 법칙이 다르다는 전제 아래서만 우생학을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존재의 탁월성이나 도덕적 완성의 단계로 보는 것은 인간적 관점을 자연 속에 집어넣는 것이니 비판 받는다. 하지만 자연의 사다리를 자연 자체의 운동 법칙의 차이로 본다면, 이는 자연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연은 정말 혼돈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질서는 인위적인 것인가?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결국 니체의 철학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존 의지는 영웅의 것이고 대부분 사람은 자연의 혼돈 앞에서 오히려 니체가 경멸하는 과학적 삶, 무리 지은 삶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저자가 반대하는 삶이 결론으로 도출되지 않을까? 역시 인간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기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1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어느 물리학 교사의 말이다. 급하게 책을 구해 읽어 보니, 교사의 말이 틀림없다.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철학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번역서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LuLu Miller 저, 정지은 역, 곰 출판, .2021.12)이다. 원본이 2020년 나왔으니, 얼마 전이다. 저서의 원래 이름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논픽션이다. 구체적으로는 20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다룬다. 단순한 자서전과는 달리 저자가 과학자인 그의 삶에 물음을 던지며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을 읽기 전에 조던을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미국인인 그는 1851년 태어나 1931년 사망했다. 그는 어류를 연구했으며, 그가 발견해 명명한 물고기는 200여 종이 넘는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 거대한 어류 표본을 보관하는 건물을 지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나면서 이 건물에 이름표를 달아 놓은 유리병에 보관된 표본이 모조리 파괴된다. 물고기와 그 이름표는 서로 흩어져 일대 혼란이 벌어졌을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물고기의 이름표를 물고기의 몸에 바늘로 꿰매 놓는다. 그 후 그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과거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표본실이 건설되었다.

그는 인디아나 대학 학장(1885년)을 거쳐 스탠포드 대학 학장(1891년)을 역임했으며,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화주의자로서 미국의 전쟁 참여를 반대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인의 반열에 들어 심지어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호수와 산도 있다.

그런데 그의 삶에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그는 1906년 스탠포드 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제인 스탠포드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우생학을 미국에 도입하여 그 영향으로 1924년 버지니아 간질환자 정신박약자 수용소가 건설되어 강제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1928년 죽기 직전 그는 미국의 인종 개선 재단의 위원이 되었다. 그의 행동은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려 했던 나치의 행동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그를 새롭게 평가하는 노력이 등장하여 미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다. 저자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철학적 전기라고 하겠다.

2)

그의 생애를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 그의 삶의 문제가 금방 드러난다.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다. 그가 어떻게 부적응자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강제 불임 시술을 합법화하는 잔인한 행동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저자는 나중에 가서는 이런 문제를 깨닫게 되지만 처음에 저자가 그의 삶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오히려 다른 문제였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조던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과학자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조던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날 저자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어보았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결국, 이 자연 세계 속에 남는 것은 혼돈뿐이다. 이런 혼돈 속에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보다 더 탁월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저자의 아버지에 의하면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우리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이런 생각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형이상학자에 대항하면서 니체가 내뱉은 말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혼돈이 지배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니체가 세계의 혼돈 속에서 삶의 허무를 말했듯이 저자의 아버지 역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저자가 어릴 때 부딪혔던 것은 바로 혼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비극적인 자기파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냉혹한 세상에서 잠시 ‘웃음의 잔물결’을 던져주는 희극배우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저자가 소녀를 유혹했다고 고소되면서, 남편도 떠나고 저자의 삶은 파괴되고 만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과학자 조던의 삶을 연구하게 된다. “아무런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을 그에게서 찾고 싶었다.

3)

저자는 조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소개한다. 조던은 어릴 때 들꽃을 좋아한다. 그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는” 아름다운 아이였다.

노예 폐지론자인 그의 형이 북부 연방군에 참가했다가 발진티푸스로 죽자 그는 내적으로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그는 들꽃을 채집하여 표본을 만들거나 들꽃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보존하는데 흥미를 느낀다.

그는 1873년 루이 아가시가 페니키스 섬에서 개설한 자연관찰 캠프에 참가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한다. 그는 아가시의 도움을 어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캠프에서 그는 수잔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다윈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앞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그는 탁월한 학자가 되었다. 그의 생애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 따르던 형을 읽었고, 아내 수전도 병으로 일찍 죽었다. 나중에 다시 재혼했지만 아이 바버라도 잃었다. 그런 재앙에도 그는 굽히지 않는다.

저자는 조던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에 파괴된 물고기 표본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이런 서술을 통해 과학자로서 조던이 무질서한 자연에 대항하여 질서를 세우기 위해 벌였던 영웅적 노력의 원천을 발견하고자 했다. 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4)

저자가 일단 먼저 가정한 것은 카프카가 말한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란 곧 니체가 말한 생존의 의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는 어쩌면 인간을 계속 나가게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인 조던에서는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발견한 것, 즉 그것을 통해 조던이 자연에 질서를 세우도록 만든 힘은 오히려 두려움이라고 본다.

이 두려움을 저자는 조던이 형의 죽음에서 처음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형을 좋아했다. 그의 형은 노예 해방론자이며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가담했다. 불행하게도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어릴 때 그는 형의 죽음에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혼돈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런 두려움이 질서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이런 두려움이 자연의 파괴적 힘이 분출된 1906년 대지진 앞에서 그가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도록 만든 원천이라는 것이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만이 이 투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투쟁할 수 있게 했던 것은 또 하나의 힘은 어떤 기만이었다. 저자는 이 기만을 조던이 남긴 일기 속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은 기만이라 본다. 이는 근거 없는 어떤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근거 없는 기만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면서 삶의 투쟁을 계속하게 만드니, 이것은 자기기만이 가진 긍정적 효과라고 한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 자기기만이 과학자의 삶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니체가 말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본다면 자연 과학자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의 삶이 여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2부에서 계속)


보보스(보헤미안 부르주아) 문화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보보족[BoBos]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헤미안 부르주아를 줄여 복수 어미를 붙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작가 대비드 브룩스[D. Brooks]의 저서 ‘보보스[Bobos in pradise]’라는 책 때문에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실상 유럽에서 일찍부터 널리 쓰인 말이라 한다.

브룩스의 저서는 2000년에 발표된 것이다. 이 시기는 1980년대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성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전성기는 곧 몰락을 예고한다. 결국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는 몰락의 조짐을 드러냈다.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를 흔히 포스트모던 문화라 한다. 브룩스가 보보스라고 일컬은 문화적 현상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다룬 것과 동일한 현상을 다룬다고 보겠다.

90년대 말부터인가 우리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어 필자도 이 문화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스트모더니즘론이 이 시대 문화의 일반적 특징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혼종[混種] 현상 또는 혼성 모방 현상이다. 여러 가지 문화적 현상 가운데 일부를 빌어와 뒤섞은 문화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라 한다면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추상적인 모더니즘적인 구조에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구상적 형태를 덧붙인 건축을 들 수 있다.

저자 브룩스는 이런 다양한 혼종 문화 가운데 특히 부르주아적이면서 동시에 보헤미안적인 혼종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적 현상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 혼종 문화 현상에 보보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2)

부르주아 문화의 특징이란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것을 기본으로 한다. 초기 부르주아는 개신교적 억압 아래 욕망을 통제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이후 부르주아 전성기에 이르면 점차 부르주아의 욕망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치와 방탕이 확산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문화는 이성적 합리성 자체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1950년대 전후 복지국가 시절 전문기술 노동자층이 등장하면서 부르주아 문화는 마침내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부르주아 문화에 대립하는 보헤미안 문화란 거슬러 올라가면 1830년대 등장한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낭만주의 문화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화로 그리고 1960년대 들어와서 아방가르드 문화로 발전하면서 보헤미안적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이라면 현실 초월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은 낭만주의나 모더니즘에서는 소수의 지적이거나 예술적인 엘리트의 문화로 남았으나, 60년대 히피 세대에서는 대중적으로 확산했다. 이 시기 만연한 섹스, 대마초, 명상, 록 음악 등은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 욕망을 초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모습은 무정부적이고 자기 파괴적이었다.

이런 두 가지 문화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까지 서로 대립적이었다. 보헤미안적인 지식인, 예술가는 부르주아 삶을 경멸했으며 부르주아는 이런 보헤미안을 자기들의 안정된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질병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브룩스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 문화가 마침내 융합하면서 보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브룩스는 두 문화가 융합된 모습을 지식인과 부르주아 양편에서 추적한다. 한편에서 부르주아는 이제 보헤미안적 문화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기업가는 청바지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하며, 휴일이면 할리 오토바이를 몰고 질주한다. 이런 기업가는 몇 주간 오지나 농촌을 찾아 고통을 감내하며, 아무도 오지 않을 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원시적 삶을 체험한다.

기업은 이제 단순히 유용한 상품,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지 않는다. 기업은 자신이 인류의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다. 기업은 온난화 등 환경 위기를 극복하며 세계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며, 자신의 상품은 이제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며 심지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실된 자연과 사랑, 그리고 영혼까지 찾아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들 보헤미안적 사업가는 기업의 경직된 조직 체계를 허물며, 조직 인간 대신에 자유로운 개인, 상호 소통하는 열린 공간을 기업 내 창출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문명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보면서 이 시대가 새로운 문명의 시대임을 예를 들어 4차 기술 혁명의 시대라든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시대임을 선지자적으로 고지한다.

브룩스는 이런 보헤미안적 사업가의 특징을 실천적 지혜, 육감적 능력을 의미하는 ‘메티스’라든가, 자기의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과 사명을 강조하는 ‘고상한 자기 중심주의’라는 말을 통해 규정한다.

4)

거꾸로 지식인(동시에 예술가)은 이제 사회를 초월해 시대의 양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분노의 심판을 내리던 선지자적 자세를 버린다. 과거 지식인은 자신의 언어나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사회적 혁명을 만들 거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지식인은 자신을 세속적 성직자로 간주했으며, 동시에 그는 사회로부터 추방되거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확신했다.

브룩스는 이제 그런 지식인 즉 인텔리겐차는 사라졌다고 본다. 터무니없이 암울한 예감에 사로잡혔던 지식인들은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공룡처럼 소멸했다.

지식인은 이제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부딪힌 문제를 풀어가는 지적인 기술자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하나의 유용한 상품이며, 대중의 갈채가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간주한다. 지식인의 가치는 이런 사회적 교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제 성공한 지식인이 지식인 스타가 등장했다. 대중적으로 판매되는 그의 상품을 바탕으로 그는 언론과 방송으로 진출하며, 심지어는 TV 연예 코너에 등장하기도 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전략 전술적으로 판단하며, 학계와 학술회의, 인적 맥락을 조직한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의 상업적 가치를 증대하기 위해 상업적 대중문화 속에 뛰어들어 그것으로 자신의 상품을 포장하며 아예 이런 상업적 대중문화를 자신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5)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의 혼종 현상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과거 보헤미안은 욕망을 극단화했다. 그들은 욕망을 억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의 만족, 쾌락을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억압의 파괴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의 억압이 부르주아적 질서 자체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욕망의 해방 가운데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보헤미안의 욕망은 곧 죽음에의 충동이었다.

부르주아에게서도 1870년대 이후 사지와 방탕이 확산했기에 마치 보헤미안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보헤미안이 죽음의 충동이었다면 부르주아는 만족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부르주아는 일시적으로 방탕에 빠졌으며 결국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배운다.

보보족의 경우는 마치 보헤미안처럼 욕망을 극단화한다. 그는 과거 부르주아가 꿈꾸지 못한 다양한 욕망에 탐닉한다. 그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욕망의 전문가이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는 전문가 수준에 걸맞은 값비싼 오디오가 있으며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자신을 커피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욕망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는 그의 건강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지만, 그의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은 과감하게 단절한다. 그는 보헤미안처럼 록 음악과 명상을 즐기지만, 보헤미안과 달리 술과 대마초에 빠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문화화하듯이 그는 자신의 욕망을 문화화한다. 그는 여느 사도 마조히스트처럼 자신의 욕망을 규칙화하며, 자신의 욕망에 진보적 이상의 색깔을 입힌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자연과 공동체, 생태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섹스는 영혼에 도달하는 수단이라 확신한다.

6)

브룩스는 서술에서는 풍자적 요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보보스 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는 이런 보보스 문화가 정보화 시대의 산물로 본다. 이 시대 지식이 대중화하면서 또한 지식이 자본화하면서 지식인 전통과 부르주아 전통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두 문화가 함께 융합하면서 보보스 문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새로운 보보스 문화는 부르주아의 야만도 보헤미안의 고고함도 버리고 지식인은 상업화하며 반면 부르주아는 욕망에 탐닉한다.

그러나 브룩스는 보보스 문화를 너무 과도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던 문화의 혼종적 특징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부르주아의 보헤미안적 문화는 일종의 기호,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그런 기호나 상징에 진지하지 않기에 그런 기호는 부르주아의 물질적 문화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지젝 역시 비판적으로 본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문화는 한편으로는 쾌락 지향적 경향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자기 통제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자기 통제적 경향을 일종의 편집증으로 해석했다. 즉 쾌락지향적 성격이 상징적 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면, 자기 통제적 측면은 아버지의 이름이 환상 속에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부르주아의 보헤미아니즘이 허위라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지젝은 보헤미아니즘이 도달하는 자기모순을 지적한 것이 할 수 있겠다. 이런 비판적 분석과 대조해 보면, 브룩스의 해석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혼종적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도 기울어져 간다. 트럼프와 같은 구시대 야만적 자본가 유형의 인물이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보보스 문화도 퇴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영화 멜랑콜리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영화 멜랑콜리아

 

1)

영화 멜랑콜리아는 감독 라스 폰 트리어의 영화이다. 60년대 프랑스에서 누벨 바그가 등장했을 때, 독일에서는 노이에 키노 바람이 불었다. 이들의 주축은 파스빈더, 헤어쪼그, 벤더스 등이다. 네델란드 출신 라스 폰 트리어도 한세대 후이지만 이들을 계승하는 작가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가 68세대와 공통의 정신적 지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아주 독특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서구 문명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그를 알리는 데 공헌한 영화인 ‘백치’는 백치를 내세워 정상인의 세계를 조롱하며, 영화 ‘도그빌’은 마피아의 보스가 자기 딸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강간당하자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징벌하는 법과 불법이 전도된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혜성(그 이름이 ‘멜랑콜리아’다)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종말에 이른다는 종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전개된다. 지구 종말은 다른 한편, 지구 문명에 대한 분노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정된 지구 종말은 실제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지구 종말적 상황은 감독이 서구 문명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심판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장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극 중 두 주인공 쥐스틴과 클레어의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쥐스틴은 지구 종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 할 필요 없어.”

2)

영화는 도입부에 이어서 주인공 자매의 이름을 따서 1부 쥐스틴(동생) 2부 클레어(언니)로 이루어진다. 구성상 두 주인공이 각기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주인공은 항상 함께하며, 오히려 1부와 2부의 구분은 다루어지는 이야기 주제에 따른다고 하겠다.

1부에서 시종일관 쥐스틴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진다. 1부를 시작하면서 거대한 리무진이 시골의 굴곡진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모습을 감독은 상당히 길에 보여주는데, 이는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서구 문명의 한계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쥐스틴은 카피라이터로서 성공적인 경력 여성이다. 이제 막 마이클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행복할 만하다. 하지만 이 결혼식을 계기로 쥐스틴은 정식적 파국에 직면한다. 감독은 쥐스틴을 둘러싼 남자들, 회사 사장,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인 마이클을 스케치하면서 쥐스틴을 파국에 빠뜨린 원인이 무엇인지를 그려낸다.

쥐스틴을 고용한 사장은 쥐스틴이 쏘아붙인 대로 “권력에 눈이 먼 옹졸한 인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혼하고서 새로 사귄 애인인 두 명의 베티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온다.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이제는 세상에 지친 여인이다. 그녀가 막 결혼하려는 마이클은 소시민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는 늙어서 함께 살 과수원 사진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쥐스틴의 갈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서구 문명의 대표적 두 축인 사회와 가족의 표면적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 뒤에는 이처럼 끔찍한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감독의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쥐스틴이 정신적 파국에 처한 것은 이런 사회적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감독은 1부에서 쥐스틴이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아버지를 붙드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은 그녀가 아버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갈망은 2부에서 행성이 지구에 다가오면서 쥐스틴이 밤에 나체로 행성과 교감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문에 행성이 다가오자 쥐스틴은 오히려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3)

2부에서는 행성이 다가와 지구와 충돌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쥐스틴보다는 오히려 클레어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녀의 남편 존은 18홀 골프코스를 지닌 대저택에 살면서 천체 관측을 즐기는 자기 과시적 또는 가부장적 인물이다. 클레어는 그런 남편 아래 살면서 결혼식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서 그려졌듯이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의무에 철저한 주부이다.

표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쥐스틴과 달리 클레어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우리는 클레어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 아래 주부로서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적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그녀의 삶 어딘가 균열, 틈이 생겼으며 그녀는 이를 철저히 막으면서 살아왔다. 조금도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꼿꼿한 태도가 거꾸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균열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행성이 지구와 다가와 충돌한다는 종말적 상황이 펼쳐지자, 클레어는 더는 자신의 내적인 균열을 틀어막을 힘을 상실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 급기야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그녀 역시 강박증에 사로잡히며 정신적 파국에 이른다. 그녀는 자살에 필요한 약을 사 놓는다.

4)

정작 최종 충돌 즉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졌을 때, 클레어나 쥐스틴보다 존이 먼저 무너진다. 존은 클레어가 사 놓은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존의 죽음은 서구 문명이 내적으로 얼마나 허약한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반면 클레어나 쥐스틴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가능성은 클레어의 아들 레오와 쥐스틴의 대화를 통해 미리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바로 마법의 동굴을 짓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인디언의 텐트 같기도 하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법의 동굴에서 레오와 쥐스틴, 클레어는 손을 서로 잡고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행성 충돌과 대폭발이지만 그 환한 빛은 어쩌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마법의 동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서구 문명에 대한 감독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마법의 동굴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비합리적이지만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 ‘너의 새를 노래할 수 있어’를 보고[흐린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타인의 고통받는 얼굴에 관해

1)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이하 ‘너의 새는’)는 청년의 절망감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제목이 좀 특이한 데, 원래 비틀즈의 노래다. 노래 가사는 ‘너는 너의 새가 노래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너는 나를 갖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너의 새가 죽더라도 나는 늘 너의 곁에 있는데’라는 뜻으로 보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 사토 야스시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사토 야스시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40세 자살했으니, 남긴 작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내가 접한 것은 딱 한 권 ‘황금옷’이라는 단편집이다. 그 작품집에는 세 단편, ‘황금옷’ 외에 ‘오버 더 펜스’, ‘여름을 쏘다’가 들어 있다.

그의 작품은 많이 영화화되었다. ‘오버 더 펜스’라는 작품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그 밖에도 ‘그곳에서만 빛난다’라는 영화도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고 한다. 그가 나이 서른 무렵 1980년 경 쓴 작품인 ‘너의 새는’은 2018년 미야케 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너의 새는’은  연애 이야기이다. 여기서 세 명의 주인공이 즉 화자인 나와 사치코, 나의 룸메이트인 시즈오가 등장한다. 배경은 일본의 바닷가 작은 도시이다. 나와 사치코는 작은 서점의 알바생이다. 시즈오는 직장을 구하는 중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사람의 연애 이야기이다. 핵심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나’는 길거리에서 서점의 점장과 함께 가는 사치코를 만난다. 사치코와 ‘나’는 서로 가까워지고 ‘나’는 사치코를 자취방으로 데려온다. 나에게 무언가 기대했던 사치코는 점차 시즈오에게 기대게 된다. 시즈오가 캠핑을 가자 하자 사치코는 따라나서지만, ‘나’는 포기한다. 이미 사치코의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치코는 돌아와 ‘나’에게 시즈오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마지막에 ‘나’는 떠나는 사치코를 쫓아가서 고백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나의 삶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2)

얼핏 삼각관계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남녀 주인공의 성격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이다.

우선 남자 주인공을 보자. 화자인 ‘나’는 대학은 졸업했지만, 서점에서 알바를 한다. 그는 달리 취직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평생 알바를 할 것 같다. ‘나’는 자신이 사회로부터 밀려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나’는 성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직장에 제시간에 나가는 법도 없다. ‘나’는 일도 건성으로 하며 책 도둑을 쫓아가지 않았다는 사장의 책망을 듣고도 “자르고 싶으면 자르시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반발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조 같이 들린다.

‘나’는 세상과 고립적으로 살아간다. ‘나’에겐 다른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시즈오와는 가깝지만, 필요에 따라서 함께 살 뿐이다. 다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한에서만 가까이할 뿐이다.

‘나’에게 여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치코를 그저 함께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하거나 가벼운 육체적 관계를 맺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듯 보이지만 그것을 벗어날 생각도 없으며 이미 그것이 절망이라는 느낌조차도 사라져 그저 일상이 되었다. 남들이 그런 ‘나’를 비참하게 본다면 ‘나’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어때서?”

주인공의 이런 처지는 외적은 풍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가 전개되는 계절은 끈적끈적하고 무더운 여름이다. ‘너의 새’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9월이 되어도 10월이 되어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풍경은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 ‘여름을 쏘다’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1층 지붕에 가늘고 길게 펼쳐진 그림자 속에서 다리를 접고 쭈그려 앉아 한여름의 햇살이 기세를 누그러뜨릴 때까지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 않고 버텨 내는 것이다. 그 좁은 그림자 속에 일렬로 늘어서서”

3)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는 주인공의 절망감을 표현할 뿐 절망감에 사로잡힌 이유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단서를 찾자면 우선 작가 자신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토 야스시는 49년 출생이니 아마도 60년대 초 대학을 다녔을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 전후 체제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가장 격렬했을 때다. 그의 소설을 보면 그도 이런 운동에 약간은 가담한 걸로 보인다. 70년대 초 적군파 파문 이후 일본 학생운동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일본 주식회사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그의 절망의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토 야스시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오버 더 펜스’에서 주인공은 도쿄에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와 직업훈련을 받고 있다. 그는 무언가 작은 것이더라도 성취하려는 야망을 지닌 교관을 보면서, 도쿄에서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상사를 연상한다.

처음엔 주인공도 일본 주식회사가 감추고 있는 억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그저 일개미처럼 살아갈 뿐이다. 그 억압은 오히려 그의 아내에게 나타난다. 아내는 아이를 낳은 후 우울증을 겪으면서 심지어 아이의 얼굴을 방석으로 눌러 죽이려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내와 아이를 친정으로 데려다 준다. 얼마 뒤 아내는 장인을 통해 재출발하겠다면서 편지를 보낸다.

비로소 절망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도 사표를 내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도쿄 생활이 점점 의식에서 사라져 갔다. 겐이치와 다이시마가 물어오면 도시에서 쫓기며 살아가는 게 넌더리가 났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다 보면 그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깡그리 잊고 말 것이다.”

4)

여자 주인공 사치코도 역시 어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를 사로잡은 절망감은 사치코가 서점 주인과 맺은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사치코는 서점 주인장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가 어떤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치코는 이를 잘 안다.

사치코는 헤어지고 싶지만 헤어지는 일조차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서점 주인이 매달리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전체 맥락은 만일 헤어졌을 때 사치코 자신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사치코는 주인공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점 주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나’란 인물과의 관계 역시 어떤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사치코는 ‘나’의 그런 반응에 대해 실망하면서 다시 그런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치코는 서점에 나가지 않고 시즈오를 불러내 시즈오에게 다가간다. 시즈오는 적어도 사치코와 닮은 점이 있다. 시즈오는 아직 하늘의 별과 숲에서의 고독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치코는 시즈오를 따라 캠핑에 가고 시즈오와 연인 관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역시 사치코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고 그 점에서는 ‘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의 경우는 자신의 절망을 절망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삶일 뿐이다. 그러나 사치코는 다르다. 아직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려고는 기대를 그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치코는 고통스럽다. 사치코가 지닌 내적 고통은 사치코가 시즈오와 함께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에서 조금은 드러난다.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낸다. ‘황금옷’의 여자 주인공 아키는 이혼했다. 남자는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와 자고 다녔고 그것에 반발하듯 아키 역시 남편의 친구와 더불어 잠을 잤다. 서로 무관심한 상태에서 1년 후 헤어졌다.

그런데 아키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워 한다. 아키는 이 고통을 억누르고 있어서 평소에는 밝은 모습이다. 하지만 때로 이 고통이 그녀의 빈틈을 비집고 솟구쳐 오른다. 그런 고통은 때로는 정신적인 병이 되어 나타난다. 아키는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집에 오면 온몸을 거의 강박적으로 깨끗하게 씻는다.

“이렇게 씻잖아. 그러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도로아미타불이야. 몸이 완전히 더럽혀진 느낌이 들어. 할 수 없이 다시 샤워를 하거나 이렇게 수건으로 닦는 거지.”

‘너의 새는’에서 사치코에게 이런 강박증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아마도 사치코에게도 이런 모습이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충분히 짐작된다.

5)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가 간단치 않은 것은 바로 남녀 주인공이 가진 이런 내적인 풍경 때문이다. 풍경은 공허한 풍경이다. 이런 공허한 풍경 가운데서도 이들 주인공이 오직 하나의 삶의 감각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서 발견된다.

‘너의 새는’에서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힙합 클럽에 가서 오랫동안 춤을 춘다. 그들의 춤 속에 내적인 갈망이 리듬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상당히 길게 잡아준다.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육체적인 것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금옷’의 주인공은 수영을 즐기며, 작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그려낸다.

“손발을 한껏 뻗어서 물의 감촉을 즐겼다. 이런 감촉만으로 아키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에게 이 세계는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 같은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즐겁게 헤엄쳤다. 아키를 생각했다. 그녀도 이렇게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바다에 떠 있다 보면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나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 물론 미치오의 말이 옳았다. 아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적었지만 25미터 거리의 수영장에서 헤엄치 노라면 좁아 터진 수조에서 사육 당하는 물개가 된 기분이었다.”

이들이 육체적 감각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절망이 일본 주식회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런 일본 주식회사를 넘어선 어떤 사회, 그 속에서의 삶일 것이다. 그들이 오직 기쁨을 발견하는 섹스 역시 그런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새로운 사회와 삶은 실현될 수 없다. 그들이 그런 삶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춤과 수영을 통해 얻는 감각적 즐거움이란 하나의 잔재이다. 이런 잔재는 말라비틀어진 삶의 잔재, 마치 목마를 때 콜라를 마신 듯한 느낌일 뿐이다. 막연하게 또는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느낌이 그런 것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은 카뮈 이방인의 뫼르소를 닮았다. 그들 주인공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고립된 채 뜨거운 여름 지중해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6)

이제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해 볼 때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연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처음에 담담하다가 사치코가 떠나자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가 나의 삶은 거짓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나’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전환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영화만으로는 그 전환의 계기가 불투명하다. 아마 원작인 소설을 보았다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지금까지 참조한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을 통해 그런 전환의 계기가 약간은 드러난다.

‘황금옷’에서 주인공은 아키가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아키가 약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진 것인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인공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깨어난 것이다.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의 냉담함은 여자 주인공의 고통을 통해 깨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너의 새’의 경우에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사치코가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치코가 시즈오와 함께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다. 사치코가 부르는 노래는 그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주인공인 ‘나’는 없었고 오히려 시즈오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면적 고통은 무의식적으로 주인공 ‘나’에게 각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가 화장실에서 동료가 사치코를 비난할 때 갑자기 흥분하여 동료의 머리를 벽에 처박는 장면을 보면 그런 각인의 흔적이 엿보인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 구조는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신을 보게 되며 신의 명령을 듣는다.

시대와 인간상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시대와 인간상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상도 바뀌게 마련인가 보다. 자주 정치인이 그런 인간상의 변화를 암시하는데, 미국에서 클린턴과 트럼프, 한국에서 문재인과 윤석렬을 비교해 보면 그런 변화가 느껴진다.

클린턴과 트럼프, 문재인과 윤석렬, 이렇게 대조해 놓고 보면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정책적 차이만은 아니고 그런 차이는 심지어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더 뚜렷한 것은 인간상의 차이다. 인간상으로 볼 때 클린턴과 문재인이 닮았고 트럼프나 윤석렬도 서로 닮았다.

클린턴과 문재인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면 트럼프나 윤석렬과 같은 사람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거꾸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클린턴 다음에 트럼프가 나오고 문재인 다음에 윤석렬이 나온 것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참에 시대와 인간상의 상관성을 한번 고민해 보기로 했다. 헤겔이 시대와 정신의 상관 관계를 파헤쳐 ‘정신현상학’이라는 불멸의 저서를 남겼으니, 나도 좀 흉내를 내 보아야 하겠다 싶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60년대 이전에는 내가 체험한 시대가 아니므로 생략하고, 내가 함께 살아온 60년대 이후만 보자.

2)

한때 히피족이 세상을 지배했다. 히피족은 세상에 초연하면서 낭만적 몽상에 젖어 살았다. 고독과 자유를 즐겼으며, 명상을 즐겼다. 히피족이 음악과 섹스 그리고 대마초에 빠진 것은 세상을 초탈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런 히피족이 출현한 이유로 그 시대 배경이 자주 논의된다. 50년대 말까지 서구 사회는 전후 복구를 거쳐 복지 국가를 이루었으나 그 대가는 거대한 관료 체제였다. 이런 관료 체제의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 자라난 세대가 히피 세대이니 이들이 세상을 초탈하려 했던 것도 이해된다. 권력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으니 이를 벗어나려면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60년대 서구에서 히피족이 지배할 무렵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 아래 있었다. 이들의 권력은 노골적이었다. 유신 체제, 중앙정보부, 물고문, 최루탄 등. 온갖 폭력적 수단이 사용되었다.

이런 시대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이 저항을 위해 존재했고 효율적인 저항이 필요했다. 목적을 정하고 수단을 선택했으며 가장 합리적인 수단을 위해 과학이 늘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운동도 삶도 과학으로, 술도 연애도 과학으로! 이 시대는 낭만적이라는 것처럼 경멸적 단어는 없었다. 대신 과학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등장했다. 이런 유형을 흔히 운동권이라 부른다.

3)

90년대 후반,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소위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이 시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자유화가 발전했다.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화 시대가 열렸다. 금융 자본이 등장했고 컴퓨터와 온라인이 새로운 생존 무기가 되었다. 자유로운 섹스, 불금의 광란이 벌어졌고 자동차와 영화와 바캉스가 맥주 거품과 함께 넘쳐흘렀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세계 여행을 떠났다.

이런 시대 장발을 한 히피족이나 운동화를 신은 운동권은 촌스럽게 보였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인간 유형은 흔히 ‘여피족’으로 규정된다. 어떤 학자(대비드 부륵스)는 이런 여피족을 ‘보보스족’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 여피족을 어떻게 규정할까? 여피족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있다. 드라마 ‘겨울 연가’의 주인공 배우 배용준이다. 그는 내게는 단정한 차림에 안경을 쓴 곱상한 얼굴로 기억된다. 사회보다는 개인을,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행복을, 거대한 것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으로 세련된 기호를 갖고 있다(커피와 음악 와인 등). 그는 타인에 대해 특히 여성에 대해 부드럽고 온화하며, 민주적으로 합리적으로 결정한다. 그는 새로운 첨단 기술을 장식물처럼 온몸에 걸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종교적이거나 금욕적이거나 탈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영악하기 짝이 없다. 그는 주가를 꿰고 있으며 부동산 시세에 환하다. 무엇을 팔면 돈이 되고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는지 잘 안다. 그가 늘 끼고 다니는 책은 경영학의 책이며 그가 통독하는 책은 심리학의 책이다. 그는 한마디로 이익에 침을 흘리는 스마트한 인간이다.

그런 여피족이 신자유주의 시대 30여 년을 군림해왔다. 이런 인물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풍미한 전문 기술 노동자, 대표적으로 은행인, 증권맨이 여기에 속한다. 정치적으로 이런 여피족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미국에서는 클린턴일 것이고 한국에서는 아마 문재인일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정책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인물 유형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무현은 아무래도 운동권에 가까운 인물이다. 반면 문재인은 운동권보다는 차라리  여피족에 가까운 스마트한 정치인이다. 문재인의 별명이 곧 신사 아닌가? 이재명 하면 여피족에 더 가까워진다.

4)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금 비틀거린다. 2008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그 대표적인 증상일 것이다. 금융 위기 이후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미 곳곳에서 붕괴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대 미국에서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우선 생김새조차 여피족과는 거리가 멀다. 거의 돼먹지 못하게 생겼다. 언어와 행동거지도 난폭하기 짝이 없으니, 거의 조폭 수준이다. 생각과 사고도 너무 단순하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며 적은 삼킬 듯이 증오하고 자기편은 무엇이라도 좋다. 어쩌면 여피족을 반전 선택하면 이런 인물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인물을 억지로 좋게 보자면 의리의 사나이 돌쇠형이 아닐까? 아니, 단순 무식하고 저돌적인 저팔계 유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장점이 있다. 사소한 것은 제치고 크게 문제를 파악하고 집요하면서도 대담하게 이를 해결해 나간다.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또 상당한 친화력이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재주는 비상하다.

이런 인물이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 시대처럼 사랑 받는 때는 없었지 않을까? 결국, 트럼프는 클린턴의 후광 아래 있던 힐러리를 제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왜 이런 인물이 이 시대 사랑받는 것일까?

시대의 증상이 아닐까? 이 시대에 다들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짐작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로 무너지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 복원되기도 하니, 새로운 시대가 오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갈피를 알 수 없다. 니체가 줄을 타는 곡예사를 보면서 앞으로 가도 위험하고 뒤로 가도 위험하고 가만히 서 있어도 위험하다 했는데 꼭 그런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시대, 불안한 혼돈의 시대, 사람들은 트럼프와 같은 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닐까?

5)

최근 대선에서 윤석렬이 이겼다. 윤석렬의 언행을 보면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거칠고 난폭하기에 늘 구설에 시달라자만 재수 9년이라는 것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듯 두둑하기 짝이 없는 배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을 물고 늘어지고(조국 사태에서 처럼) 같은 편을 챙기는 것은 트럼프와 상당히 닮았다.  적어도 우파 통합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친화력을 말해준다. 정책적으로도 핵심 문제를 잡아내는 능력도 엿보인다. 트럼프가 클린턴의 반전 선택이듯 윤석렬은 문재인의 반전 선택이다.

초짜 정치인이 거대 야당을 접수한 데 이 기질이 작용했다. 사람들이 소확행을 주장하는 이재명보다 재수 9년의 윤석렬을 선택한 것도 이 인간상 외에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 시대가 거대한 전환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전환기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거대한 힘에 의존해 보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윤석렬의 인간적 결함을 지적한다고 그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결함을 가진 인간이기에 오히려 선택 받았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불안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신냉전시대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갈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전환기를 이해해야 한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이병창(한철연 회원)

 

지극히 혼탁한 세상이다. 서로 진흙 속에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코로나로 답답한데, 세상은 더욱 우울하다. 이럴 때는 차가운 물 한잔, 신선한 바람 한 줄기 기다려진다.

자다가 새벽에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문득 떠오른다. 성함은 생각나지 않고 별명만 생각난다. 황금박쥐 선생님이다. 그 시절 황금박쥐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모습이 황금 박쥐의 모습과 닮았다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한문 선생님이셨는데(당시에는 한문이 정규 수업 과목이었다) 한문을 무조건 외우라면서 외우지 못하면 주어 팼다. 깡 마른 선생님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한 반 오십 명 되는 학생을 모조리 주어 팼다.

그 덕분에 지금도 한문을 싫어하여 내가 남들보다 한문 실력이 떨어진 이유가 됐다. 그래도 약간 한문을 아는 것은 선생님의 덕분이니, 주어 패는 교육도 완전히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두 개의 한문 시가 지금 기억난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굴원의 ‘어부사’다. 전자는 한문으로 읽어도 리듬이 좋아서 지금도 기억한다. 후자는 그 가운데 특히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라는 구절이 입에 맴돈다.

굴원이 이 시를 지은 다음 자살했다고 들었는데,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황금 박쥐 선생님은 어린 우리에게 이 시를 가르쳐 주면서 무척이나 비감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은 박정희가 3선에 나서면서 독재를 강화하고 국민교육 헌장을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늘 세상이 혼탁할 때는 이 시가 기억나는데, 나는 지금도 그 뜻을 모르겠다. 사람이 현실에 따라서 능소능대하라는 뜻 같은데 굴원이 이 시를 쓰고 왜 자살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어부와 다른 굴원의 삶은 시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 지언정”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굴원은 산다는 것은 현실을 따라 능소능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굴원은 지식인으로서 세상 사람의 삶을 끝내 거부한 것이었을까? 일반적 해석은 이런 지식인으로서의 결기가 이 시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차라리 일신이라도 일으켜 비수를 들고 적의 팔이라도 찔러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시를 써놓고 그저 자살한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굴원은 능소능대의 삶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상에 대한 갈망은 그에게 하나의 병이 아니었을까? 이상에 대한 집착이란 허망한 병이지만 이상의 병을 앓으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헤겔의 말처럼 ‘모순과 더불어 살아가는 거’다. 굴원은 그렇게 버티다가 그 병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마침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굴원의 어부처럼 삶이란 현실에 따라 능소능대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몸은 늘 이를 따르지 못한다. 물러날 때 앞으로 나서고 겸손해야 할 때 자만에 빠진다. 기회를 놓치고서 기뻐하고 이상을 말로 떠들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그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런 고통이야 여기서 회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렇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이란 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비수를 들어 적을 찌르지도 못하고, 굴원처럼 자살을 하지도 못한다.

이상의 병을 벗어나는 다른 길은 없을까? 황금 박쥐 선생님과 같은 삶도 있지 않을까? 황금 박쥐 선생님은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우리 가운데 누군가 이 시의 뜻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않을까? 그런 조그마한 희망이 그가 우리를 그토록 주어 패면서 이 시를 가르쳤던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나로서는 황금 박쥐 선생님처럼 나를 기억할 제자를 만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경우에는 어떤 메시아적 기대감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을 구할 진인이 어디서 나올 것 같다. 혼탁한 세상이면 더욱 그런 진인이 그리워진다.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2)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앞의 글에서 ‘차이나 붐’ 1부를 소개했다. 1부의 내용은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다. 두 가지가 핵심인데, 하나는 사회주의 시대 축적된 자본과 노동력이 있어서 개혁 개방 이후 남미 식의 파국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혁 개방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 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2단계 개혁 개방 정책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마디로 박정희식 수출 정책이 중국에 이식되었다고 한다. 저임금, 저가 농산물, 저금리 정책 대출, 고환율 정책 등이 그 핵심이다.

저자 흥호펑은 이 책의 2부에서는 중국 자본주의와 미국(여기에 유럽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 즉 세계 체제의 문제에 집중한다. 월러스타인은 70년대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사이에 공존 관계를 세계 체제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도 그와 같은 세계 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세계 체제에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는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수출 기업과 미의 금융 자본이 결합한 체제이다. 중국은 미국에 못지않게 서구나 한국 일본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 그리고 남미, 중동과도 관계 한다.  저자는 중,미 관계를 핵심에 놓고 나머지 세계는 이 관계를 둘러싸고 있다고 본다. 서구(독일 등)와 아시아 국가는 중국과 경쟁하거나 중국에 부품을 제공하는 제조업 국가이며 남미의 경우 주로 원료를 공급 기지가 된다.

2)

저자는 5장에서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제조업 국가에서 금융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전환의 한쪽 축은 중국의 저가 수출이다. 중국의 저가 수출로 미국 제조업이 붕괴했다. 다른 쪽 축은 달러 기축 통화 체제이다. 미국은 그 덕분으로 금융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70년대 말 달러를 저 평가하여 제조업을 보호하려 했으나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주저앉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저가 수출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국은 쌍둥이 적자 즉 막대한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 빠지게 되었다. 이 재정 적자는 제조업 붕괴하면서 세수가 부족하게 되고, 거꾸로 실업자가 증대하면서 사회 보장 비용이 증가한 데 원인이 있다.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어떻게 파국에 처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 미스테리는 중국의 미국 국채 투자에 있다고 한다. 중국은 고 환율 정책으로 저 평가된 상품을 미국에 수출하면서 막대한 수출 이윤을 얻었는데 중국은 미국 국채에 투자하면서 획득한 달러를 미국으로 돌려주었다.

중국의 수출 이윤의 미 국채 투자는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다. 우선 미국은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국채를 통해 ➀ 정부 지출을 유지했다. 또한, 국채 금리를 낮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은행은 저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은 ➁ 국민에게 신용 대출을 강화하면서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둔 과잉 소비 체제를 이루게 된다.

국채 투자로 달러가 환수 되면서 미국은 달러가 고 평가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날 인플레이션은 ➂ 싼값으로 수입되는 소비 상품으로 막을 수 있었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저자 자신의 견해라기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경제학에서 일반화된 주장으로 보인다. 이런 일반화된 주장은 80년대 이후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은행 대출은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금융 자본과 미국 고급 기술 노동자 사이의 유착 관계의 원인이 된다. 미 국민 특히 고급 기술 노동자는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은행 대출을 통해 부채 파티를 즐겼으니 그 결과가 곧 2000년대 초반 전개된 부동산 투기였다. 이런 틀로부터 신자유주의 시대를 주도한 민주당 클린턴 체제가 충분히 설명된다.

3)

경제학에서 일반화된 주장은 주로 신자유주의 체제 가운데 미국 측에 대한 분석에 한정되었다면 저자 흥호펑의 설명은 이 체제의 상대편인 중국 측에 집중된다. 중국 측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으니 저자의 설명은 이런 관점에서 굉장한 도움이 된다.

이제 중국 측으로 가 보자. 저자의 물음은 여기에 있다. 즉 중국은 미 국채 투자를 왜 지속하는가? 국채 투자는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조공에 불과한데도 중국이 이를 지속하는가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그 하나는 수출로 벌어 들인 달러를 미 국채에 투자함으로써 ➀ 위안화 가격 상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안화 상승은 저가 수출 전략을 파탄시키는 것이다. 인위적인 위안화 저 평가 방식(페그제)은 미국의 압력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중국은 달러를 미국으로 되돌려주는 미 국채 투자 정책을 수용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국채 투자로 미국은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출과 신용 대출을 지속하면서 ➁ 중국의 수출품에 대한 수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런 중국의 미 국채 투자를 통해 중국의 수출 기업과 미국의 금융 자본은 공생할 수 있었고 이런 공생 관계가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가 지속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는 이런 저가 수출 체제가 중국 내부에서 어떤 문제점을 불러 일으키는가를 설명한다. 이런 문제점은 2부 4장과 6장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그 문제점을 여러 통계 자료를 통해 논증하려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논증을 빼고 간단하게 그 결과만 들어보기로 하자. 박정희 식 수출 체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저자에 의하면 저가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은 두 가지 한계에 부딪힌다.

첫째는 저 임금, 저 농산물 가격, 고 환율 등으로 국내 소비 감소로 내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다. 한편으로 기업의 채산성 악화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 지출로 재정이 고갈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상황은 악화하는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보장 정책이 대폭 후퇴한다. 그 결과 20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대규모 노동자 저항이 일어났다.

둘째는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수출은 구미의 점차 수요 부족(예를 들어 2008년, 2013년 미국과 유럽 경제 위기에서처럼)과 신흥 개발 국가 사이의 경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위기 시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 투자로 위기에 처한 부실 기업을 지원했으나 덕분에 기업은 저가 수출로 이윤을 낳지 못하니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은 80년대 노동자의 저항과 90년대 IMF위기에 처한 우리로서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악화된 노동자 상황, 부실한 기업이라는 이중 위기가 낳는 증상이 부동산 투자이다.

저평가된 위안화로 중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니 이 때문에 부동산 투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은행은 부실에 시달리는 기업보다 부동산에 투자된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지만, 점차 악화하는 노동자 상황은 대출을 갚을 수 없으니 부동산 투기는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초 현실적으로 사치스러운 지방 정부 건물, 중복되는 지하철 노선, 불필요한 공항, 수요가 없는 고급 아파트, 쓸모없는 건축물이나 시설 등, 유령 도시나 유령 쇼핑몰 등을 들고 있는데, 저자는 이 현상 자체가 중국 경제 성장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서문에서 잠시 언급했던 헝다 사태는 단순한 부실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저가 수출에 한계에 부딪히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4)

중국은 저가 수출 정책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는 없었다. 우선 199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게 바로 2003년 후진타오 정부이다.

후진타오는 내륙 개발과 농산물 수매가 인상, 새로운 노동 계약법을 실시하여 국내 불평등을 축소하고 국내 수요를 증가시켜 내부 성장을 확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이런 정책은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로 중국의 수출이 축소되자, 황급히 중단되고 말았다.

2012년 새로 등장한 시진평 정부는 후진타오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런 개혁 정책의 효과에 대해 회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의 결론을 무조건 수용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이런 회의적인 관점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중국의 공산당 내부의 민주주의 과정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서방 언론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시진평의 독재 체제가 강화된다고 하지만 실제 이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의 결과인 노동자 상황 악화와 부실 기업을 해소하려는 정치적 노력의 결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요즈음은 좀 뜸해졌는데, 작년 년 말에 언론은 중국 부동산 기업 헝다의 파산 위기를 연속해 보도했고 세계의 이목이 일시에 헝다 사태로 집중했다. 일개 기업의 부채 규모가 자그마치 약 3000억 달러라니, 놀랄 만하다. 이 정도는 중국 총 경제 규모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어디 이게 헝다에만 한정된 일일까?

2012년 경인가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도시마다 엄청난 규모로 아파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는데 그 많은 아파트 대부분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속으로 의아했지만, 중국은 큰 나라니 무한 세계 앞에서 유한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이 무력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헝다 사태를 보니 중국 역시 무한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

헝다 사태를 계기로 중국 사회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찾았다. 이때 우연히 눈에 뜨인 책이 ‘차이나 붐’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 훙호펑의 2015년 저서이다. 부제 ‘왜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구입해 읽었다.

훙호펑은 1980-90년대 후기 식민 시대의 홍콩에서 성장했으며 외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친중국적이었으나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비판적 입장으로 전환했다. 그는 그 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현재는 존스 홉킨스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지금까지 두 가지 연구 프로젝트에 종사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중국의 정치적 근대성의 기원과 특수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산물로 ‘중국 특색의 저항’(2011) 책을 저술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 경제 부흥의 기원과 핵심 동학을 규명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이 책이다.

2)

이 책은 서문과 결론에서 보듯이 두 가지 논제에 도전한다. 하나는 등소평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오직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결과이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적 유산이 중국 자본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식으로 몰락하지 않은 주요 지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에 반해서 저자는 중국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어서 상호 의존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중국과 미국에 상호 이익을 줌으로써 세계 경제를 지탱하고 있으니, 그는 미국의 몰락은 중국의 몰락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전체적 관점은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라는 개념으로 보인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 체제 속에 공생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저자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는 관점도 그와 유사하다.

3)

이 책 전체는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1부에서 그는 명, 청 시대 이미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음에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탐구하고, 이어서 사회주의 시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서술한다. 이 부분은 역사적 서술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당장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사회주의 시대 이루어진 경제적 유산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성공시켰다는 그의 주장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유산으로 축적된 자본[국유 기업과 시설]과 우수하고 훈련된 노동력 그리고 자율적 정부를 들고 있다. 이런 유산 때문에 중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1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그는 이런 중국의 개혁 개방을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의 입장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일부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주로 지방에 있었던 기존의 사회주의적 국유 기업(또는 집체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시작했다.

사회주의 시대 농촌에 저장되어 있었던 과잉 인구가 노동자로 제공되었으며, 인플레이션 아래서 기업은 시장 가격과 국정 가격이라는 ‘쌍궤제’를 통해 국정 가격으로 물자를 공급 받아 시장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이윤을 축적했다.

사회주의 시대 노동자를 보호해 왔던 사회 보장 제도가 이 시기 폐지되면서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료와 기업의 유착 관계가 발전하면서 부패가 증가했다.

저자는 이 때문에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천안문 사태의 두 축이었던 학생과 노동자가 분열했다 한다. 학생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관료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노동자는 정부의 저임금 정책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 정책을 회복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양자의 분열 때문에 천안문 사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5)

저자는 1992년 등소평의 남순 이후 2003년 장택민이 물러나기까지가 개혁 개방의 두 번째 단계라 한다. 오늘날 중국의 사회 경제를 지배하는 기본 틀이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때 중국은 미국 금융회사의 조언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➀ 국유 기업을 개혁하여 수출 기업화 했으며 ➁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사영 기업이 출현했다. ➂ 호구제를 폐지하여 싼값으로 무제한 노동자를 공급했으며 복지 체계를 완전히 해체했다. ➃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저가 농산물 정책을 실행했다. ➄ 국유 은행의 저금리 대출,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값싼 상품을 해외에 수출했다. ➅ 정치적으로 대학 졸업자, 기업가를 당으로 흡수했으며, 수출 기업이 존재하는 연안 지역 출신이 당을 지배했다.

이상의 정책을 본다면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한국의 군부 독재 시대 수출 산업화 정책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주로 차관의 형태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으나 중국의 경우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에 의존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중국은 이상과 같은 개혁으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했다. 중국은 해외 금융 자본과 국내 과소 소비[저임금, 값싼 농산물]에 기초하여 저가 상품을 생산하여 미국과 서구로 수출했으며 여기서 쌓인 막대한 수출 이윤을 다시 미국의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두고 낮은 인플레이션과 저금리를 통하여 과잉 소비 체제를 형성했으며, 그 결과가 미국 부동산 투자였다. 부채를 통해 형성된 미국 금융 자본은 다시 중국의 수출 기업에 투자되어 미국 금융 자본에 높은 이윤을 주었다.

6) 여기까지가 1부의 주요 내용이다. 지금까지 서술된 주요 내용은 개혁 개방 정책이 전개된 역사적 과정이다. 이에 대해 필자로서는 충실하게 소개할 뿐 옳고 그름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헝다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의 주요 기업이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부채에 기반한 성장이란 신흥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부족한 자본을 마련하는 길은 곧 부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채는 성장을 통해 갚아나가야 한다. 남미의 경우는 외자 도입을 통해 개발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부채 위기로 파산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이 문제를 2부에서 다루고 있다. 2부의 주요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4) – 날뛰는 여인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은 여러 단편이 모인 작품이다. 이야기, 논문, 콩트 등이 결합한 이 작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낭만 문학의 이념인 보편 문학의 개념에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작품 속에 포함된 많은 단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아마도 책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방랑자들’이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아누쉬카이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그녀가 모스크바 지하철 입구, 케르베로스의 개(즉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가 지키는 입구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아누쉬카의 아들은 유전적 질병으로 거동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은 아누쉬카와 그의 남편이 체르노바에서 방사선을 쏘였기 때문에 얻은 질병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는 남편을 돌본다.

그녀의 남편은 감옥에 갔다 온 모양이다. 아들 병의 원인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던 모양이다. 그 뒤 남편 역시 침대에 누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낸다.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단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밤에는 “형태를 읽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이런 밤에 아누쉬카는 꿈을 꾼다. “목을 자른다든지, 사랑하는 이의 몸을 핏물에 담근다든지…”하는 꿈이다. 아누쉬카에게 이것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작가의 관심은 아들이나 남편, 사회에 있지 않지만, 사회적 문제가 이 단편 전체에 절망적인 분위기로 깔려있다. 작가는 오직 아누쉬카의 내면에만 주목한다.

2)

아누쉬카는 일주일에 하루는 휴가를 얻는다. 그 하루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자기의 아들과 손자를 돌본다. 아누쉬카는 그 하루에 약국에 들르거나 음식물을 사거나 하는데, 그날 그녀가 어기지 않고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마음껏 우는 일이다.

그녀는 대개 대성당에 가서 기도하면서 운다. 그녀는 꼭 아버지같이 인자한 모습을 지닌 성상 앞에서 운다. 그녀가 울기 위해서는 주변이 고즈넉해야 하지만 성상의 눈이 그녀를 반드시 지켜보아야 한다.

그날도 휴가를 얻어 평소 가던 대성당에 갔지만, 그날따라 관광객이 많아서 아누쉬카는 울음을 터뜨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누쉬카는 도시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이번에는 성상의 모습이 “물에 빠진 사람의 얼굴” 같았기에 도대체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누쉬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성상을 올려보던 아누쉬카는 성상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성상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에 꽂히면서 그녀의 먼 곳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마치 뭔가를 체험한 듯했고, 무언가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충격이었지만 어두운 절망적 느낌이 아니었다. 이 느낌을 작가는 “몸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어떤 맑은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서술한다. 아누쉬카에게 어떤 근본적 전회가 일어난 것이다.

끝내 울음을 울지 못한 아누쉬카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서 집 앞에 도착했지만 돌연 멈추어 선다. 다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앞으로 걸어간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그녀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로 돌아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녀는 울음을 울지 못한 상태에 시달리며 마침내 현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하철의 지하 세계에 산다. 매일 이런저런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면서 끝없이 움직인다. 아누쉬카는 노숙자, 아니 방랑자가 된 것이다.

3)

물에 빠진 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공포로 악을 쓰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닐까? 성상의 얼굴이 아누쉬카에게 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성철 스님이 10년 면벽 수도 끝에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피투성이의 세계였다고 한다. 아누시카 역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 세계 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아무런 “생각도, 근심도, 기대도, 희망도 없었기에, 그것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아누쉬카가 지하철 노숙자의 세계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그녀는 덕지덕지 옷을 껴입고 있다. 머리는 수건과 모자로 둘러싸고 지하철역 앞에서 8자를 맴돌면서 입으로는 욕을 쏟아낸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아누쉬카는 날뛰는 여인에게 다가가 밤이면 함께 머무른다.

그리고 어느 날(몇 달이 지났는지를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에 청년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는 말을 몰고 온 처녀도 있다. 이 청년들을 보면서 아누쉬카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들이 그의 아들 피에티아[‘피에타’와 같은 말로 보인다)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무겁고 고통스럽다. 그녀의 안에서 피에티아가 부풀어 오르고 점점 자라났다. 아마 다시 그를 출산해야 할 것 같았다. … 피에티아가 어느 틈에 그녀의 폐에 달라붙고 목구멍까지 솟았다. 흐니느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누쉬카가 지켜보던 중, 무리 속의 한 처녀가 말이 도망치려 하자, 채찍으로 등을 내리친다. 그것을 보고 아누쉬카와 날뛰는 여인이 달려간다. 그리고 짓눌린 목구멍을 짜내어 소리친다. “(말을) 내버려 두라고!!”

이것은 니체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니체는 토리노 시장에서 채찍을 얻어맞는 나귀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니체는 정신적 어둠 속에 살았다고 한다.

4)

청년들과 싸움을 벌인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갔으나 곧 방면된 아누쉬카는 마침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만 이어지는 단편에서 날뛰는 여인이 무슨 욕을 했는지가 나온다. 날뛰는 여인의 말이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은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세상의 지배자와 싸우는 힘은 움직임에 있다. 작가가 소설 방랑자에서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통해 아누쉬카가 집과 아들과 남편을 모두 떠나 지하의 세계로 간 이유가 설명된다. 밤의 세계, 지옥의 지배자, 케르베로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누쉬카로 하여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과 울음의 터뜨리는 것 사이의 연관이 무엇일까? 주인공에게 마침내 때가 다가온 것인가? 때 즉 카이로스 말이다.

올가 토르카추크의 신비한 철학이 시종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아뉘시카는 울음을 터뜨릴 때를 얻었지만 나는 철학의 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