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시간, 고독 [시가 필요한 시간]

다섯 번째 시간, 고독

 

마리횬

 

오늘도 역시나 시 읽기 참 좋은 고독한 밤입니다. 오늘 함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고독’인데요, 외로울 고(孤)에 홀로 독(獨), 이 두 한자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중국어로는 구두(GuDu)라고 발음하고, 일본어로는 고도끄(こどく) 라고 한다고 하네요. 같은 한자를 써서 발음도 비슷한가 봅니다. 러시아어로는 아진노체스트보(Одиночество)라고 하는데, 아진(один)이란 숫자 하나(1)를 뜻하고, 뒤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추상명사형 어미 체스트보(чество)라는 어미가 붙어서 ‘혼자 있는 상태’라는 뜻이 되죠. 어느 나라에서든 고독이란 외로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고독이란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고독이 필요하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온다고 하죠?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나만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죠. 사람들 만나서 얘기 듣는 걸 좋아하고, 왁자지껄 사람들이랑 모여서 놀면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혼자 방에 돌아와서 조용히 생각도 정리하고 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틈에서는 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거나, 하루를 곱씹어보거나 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죠. 쉴 새 없이 일만 하는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도 사실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자기 개발적인 생각들을 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고독하지 않고서는 시를 쓰기도 어려울 거에요.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도 고독해 보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오늘 먼저 만나 볼 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라는 시입니다. 혹시…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가 생각나시나요? 하하.

이 시를 읽으면, 홀로 있는 것의 힘이랄까, 고독한 사람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시는 조금 길지만 천천히 한 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 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고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 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시인의 시 ‘연필로 쓰기’ 들어 보았습니다. 연필로 쓰기와 우리 인생을 대비시켜서 표현을 하고 있죠. ‘연필로 글씨를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겁니다.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로, 연필로 시를 쓰다가 시어 하나를 잘못 쓰거나 하면, 지우고 다른 단어로 고쳐 쓸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삶은 실수했다고 해서 그걸 지워내고 다시 그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연필로 쓴 시를 고쳐 쓰다가 ‘내 삶도 이러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시 한 편 쓰는 것도 정말 쉬운 게 아니죠. 물론 시인마다 좀 다르겠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게 거의 해산의 고통이랑 맞먹는, 그런 엄청난 노력으로 시 한 편이 쓰여진다고 하던데, 그렇게 어렵게 쓰여지는 시도, 쓰다가 틀리면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조차도 안되니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지워버릴 수 없는 생애를 차곡차곡 살아내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연필처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생애를 꿈꿉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간 길을 지울 수 있다는 얘기는, “떳떳했던 나의 길, 내가 살아온 진실의 길” 마저도 지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어요. 삶이 연필로 쓰는 것과 같다면, 잘못만 지우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것들도 같이 지워질 수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으세요? 잘못은 지워지면 좋겠지만, 내가 이뤄낸 성과와 명성들까지 같이 지워진다면..?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지우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럴지라도 괜찮다고 고백합니다. 잘못간 서로의 길을 고쳐서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살아왔던 길이 지워져도 좋다’ 라고 고백하고 있죠.

불가능한 것이지만 어쩌면 그 불가능함 때문에 계속해서 시를 써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은 다시 쓸 수 없기에, 이제라도 연필로 시를 쓰겠다, 시를 쓰듯 내 삶을 살겠다, 시가 곧 내 삶이다. 이러한 고백으로도 들립니다.

오늘, 고독에 관한 시 첫 번째 시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 만나 봤는데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임재범의 <비상>이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지금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그 고독을 원동력 삼아 이제 날개를 펴고 비상하리라 하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그 시간을 에너지로 삼아서 힘내시라는 의미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임재범 비상 _ https://youtu.be/5LxGzSFnucE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고독’을 주제로 함께 하고 계신데요,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여러분은 혼자 바닷가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들과 다 같이 함께 바닷가에서 한 시간 노는 것과, 홀로 조용히 한 시간 바닷가를 거니는 것에는, 똑같이 한 시간을 머무는 것이지만 아마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 두 번째 시는 홀로 바닷가에 나갔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 듣고 오겠습니다.

 

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시인의 시 ‘바닷가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홀로 나간 바닷가라고 해서 뭔가 굉장히 쓸쓸한 분위기일 것 같았는데요, 막상 시를 읽어보니 시 구절 하나 하나가 다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파도, 수평선, 일몰,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섬. 이 모든 것들은 바닷가에 가면 흔히 마주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스스로 낮추는 자의 평안’, ‘스스로 포기하는 자의 충족’, 그리고 ‘스스로 감내하는 자의 의지’를 읽어냅니다.

 

오늘 주제가 고독인 만큼, 이 시는 고독의 힘을 잘 얘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요. 돈이 많든 적든, 얼굴이 예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한 번씩은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할 때가 있고,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로울 때가 분명 있는 법이죠.

외로움이 아예 없을 순 없겠지만,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그냥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흘려 보낼 게 아니라, 자신에게 좀 더 몰입하는 시간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더 발견하는 시간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지 않으면, 아무 성찰 없이 하루를 살게 될 겁니다.

그런 고독의 시간이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곽재구 시인이 쓴 여행 에세이 중에,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이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즘 쌀쌀한 날씨 탓에 고독에 찬 밤을 보내고 계신 분들! 내 인생에 귀한 시간이 찾아왔다 생각하시고, 견뎌 내면서 힘 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들려드릴 노래로 박효신의 ‘숨’을 가져왔어요. 가사와 멜로디가 참 위로가 되는 곡입니다.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힘 없이 멈춰있던 세상에 비가 내리고, 다시 자라난 오늘, 그 하루를 살아.”

 

여러분!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다 멈춰버린 것만 같은, 겨울 같은 때가 있죠. 하지만 그 시간들이 찾아왔을 때, 오늘 하루 쉴 숨이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쉴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곁에 언제나 나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응원해주는 바다 같은 존재, 봄비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눈 고독의 힘! 꼭 기억하시면서 하루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랄게요.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박효신 숨https://youtu.be/oBKpJiVEcnU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악(樂)인열전]④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출처 : The Smiths, back in the glory days (Picture: Stills Press Agency/REX/Shutterstock) Read more: https://metro.co.uk/2017/09/21/the-smiths-30-years-since-the-split-and-still-the-best-british-band-ever-6904839/?ito=cbshare Twitter: https://twitter.com/MetroUK | Facebook: https://www.facebook.com/MetroUK/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국 밴드는 더 스미스(The Smiths)이다. 스미스는 오늘날 브릿팝(BritPop)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장르의 아버지격이 되는 밴드이다. 오늘날 ‘락’을 논하면서 ‘브릿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키델릭과 함께 브릿팝은 좋든 싫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즘 인디씬의 주류는 브릿팝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음악적 스타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브릿팝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감성이 (어쩌면 음악적 스타일보다) 후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줬다.

더 스미스는 비록 활동기간 동안 영국 이외에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블러나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브릿팝 열풍 속에서, 모두들 자신들이 제 2의 스미스라고 자처했으며, ‘스미스’라는 망령은 다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있는 인디 밴드들인 ‘잔나비’나 ‘새소년’ 역시 브릿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브릿팝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브릿팝은 오늘날까 힘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브릿팝’스러움은 ‘스미스’스러움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브릿팝의 힘은 ‘스미스’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albumism

1984년 그들의 데뷔앨범 [The Smiths]가 발표될 때만 해도 스미스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미스의 최고의 앨범을 한 장의 앨범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3집 음반 [The Queen Is Dead](1986)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밴드 스미스의 힘’은 오히려 [The Smiths]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 때문도, 사춘기 정서로 가득한 때문도 아니다. [The Smiths]의 힘은 당시 주류 팝으로부터 소외 되어왔던 ‘침묵한 다수’가 수면 위로 등장한 첫 시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복고적 측면이 강하다. 그들이 데뷔한 80년대는 락의 인기가 예전만큼 좋지 못했고, 신디의 발전으로 기타를 베이스로 한 전통적인 락 사운드가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니 마(Johnny Marr)의 징글쟁글(jingle-jangle)1) 주법은 기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미스의 노래들은 대체로 보컬이 아닌 기타를 통해 곡의 맬로디를 만들어간다. 그들의 작곡 방식은 먼저 기타로 주선율을 잡고 그 위에 보컬을 입히는 방식이다. 결국 노래이기 이전에 연주곡으로 완성된 이들의 곡에서 모리세이의 보컬은 상당히 제한된다. 하지만 모리세이의 보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보컬의 테크닉을 심하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모리세이의 보컬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덕분에 그의 혀짧은 발음과 중성적인 목소리 톤은 성숙하지 않은 유아적인 웅얼거림으로 표출된다. 찰랑거리고 밝은 기타 톤과, 아이의 투정 같은 음색, 그리고 문학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가사는 모리세이를 ‘사춘기적 주체’로 재탄생한다.

모리세이의 ‘사춘기적 주체’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소외된 자아’를 전면으로 세운다. [The Smiths]의 화자는 성적으로 미숙한 사춘기 남자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Reel Around the Fountain”, “Pretty Girls Make Graves”)으로 대변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는 80년대 영국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영국은 한 순간에 추락하게 되고, 새로운 질서를 마주하게 된 영국의 두려움이 이 곡에서 반영된다. 이는 자신의 자책감으로 드러낸다(“You’ve Got Everything Now”, “Still Ill”). 그리고 이 자책감은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성인)에 대한 자책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혼자 살기 힘든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비난과 조소(“You’ve Got Everything Now”, “This Charming Man”),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에 대한 원망,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불만(“What Difference Does It Make?”, “I Don’t Owe You Anything”),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비하(“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를 통해 자신의 소외감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러한 더러운 세상을 한편으로 긍정하며,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Hands in Glove”). 이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동일시’에 이른다(“Suffer Little Children”). 사춘기적 주체는 이 ‘동일시’에서 등장한다. 물론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 안에 변하지 않는 ‘유아성’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출처 : UNCUT

 

라캉이 말했듯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자아는 주체로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계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언어’로서 드러내면서 동시에 (존재적 측면에서) 언어 뒤에 숨는다. (아마 라캉이라면, 정신병으로 규정하겠지만) 유아적 상태를 주체에 자리에 놓는다. 성인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상태, 사춘기적 주체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존재를 복원하는 또다른 매듭으로서 기능한다. 사춘기적 주체는 원초적 자아의 주체화이며, 나의 원초적인 모습, 남들이 보기에 찌질한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을 오히려 드러낸다. 가식을 던져버리는 행위, 자기비하를 당당하게 드러내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은 ‘비하로서 긍정함’이다. 이러한 ‘비관적 긍정’은 스미스 이후 블러, 오아시스로 이어진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성인적 숨김을 버리고 무분별한 사춘기적 드러냄은 브릿팝의 당당함의 시원이 된다.

스미스의 앨범은 ‘숨어있던 어른이 영혼’들을 위한 앨범이다. ‘어른’들은 스미스(와 모리시에의 가사)를 철부지들의 투정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미성숙’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던, ‘사춘기’라는 시기를 그자체로 삶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그 시기의 예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당당히 선언한다. 사춘기의 변덕스러움은 성인이 되면서 자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변덕스러운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즐겁다고 우울해지는 감정은 우리와 늘 함께한다. 삶에 대한 긍정과 비관이라는 이중성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그럼으로써 스미스의 음악은 ‘누구나 겪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사춘기를 살고 있을지도.

 

The Smiths – The Smiths, 1984,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kZf-GN9RcAFVQFkPaWn9At

 

The Smiths – The Queen Is Dead, 1986,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nN_prwsxZUf745SVUz88MX


1)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징글쟁글이라고 부른다.

네 번째 시간, 인내 [시가 필요한 시간]

네 번째 시간, 인내

 

마리횬

 

지난 시간에 달에 대한 시와 별에 대한 시를 읽었었는데, 지난 한 주 동안 얼만큼 밤하늘의 별과 달을 챙겨 보셨나요? 시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아마 읽을수록 뭔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읽는 건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몇 줄 정도의 시인데, 그 시 한편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할 때가 있죠. 저도 그걸 가끔 느끼곤 해요.

 저는 ‘얼마나 유명한 시인이 쓴 시인가’ 하는 것보다는, 저 스스로 먼저 공감이 되는 시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런 시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죠. 누군가에게 소개하기 이전에 제가 먼저 ‘아 좋다’라고 느껴야, 그것에 관해서 글을 쓸 때 저도 더 감정을 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각자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을 텐데, 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들, 사소한 일상들을 바탕으로 쓴 시를 선호하는 편인 것 같아요. 일상 속에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떤 작은 것들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얼마나 값진 것으로 변화 되는지를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오늘 ‘인내’라는 주제로 소개해 드릴 시 역시, 어떤 작고 소소한 것에 대한 시인데요, ‘담쟁이’에 관한 시 두 편을 가져 왔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시죠? 벽을 타고 오르고 벽면을 다 덮으면서 피는 담쟁이.

그 담쟁이와 인내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시죠?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라는 시입니다. 눈 앞에 담쟁이 넝쿨로 가득한 푸른 벽이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시를 들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담쟁이 덩굴의 독법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 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 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졸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 시인의 시 ‘담쟁이 덩굴의 독법’ 들어 보았는데요, 담쟁이가 피어 오르는 것을, 담쟁이가 벽 구석 구석 한 땀 한 땀 읽어가는 것처럼 표현을 했죠. 미세하게 한 잎 한 잎 벽을 타고 자라나는 담쟁이 덩굴의 모습을 보고 시인은 마치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담쟁이를 보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를 듣고 나니까 그렇게 노력하며 자라나는 담장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냥 ‘읽는다’라고 하지 않고, ‘지문이 닳도록’ 읽는다고 하고, 또 ‘아픈 독법으로’, ‘기어 오른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뭔가 애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담쟁이의 모습을 읽어내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습니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든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초록색 잎에 가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붉은 단풍이 드는걸 묘사하고 있는 건데, 그걸 ‘피멍이 든다’고 표현을 했어요. 벽을 오르기 위해서 인내하며 노력하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푸른 손 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서 책을 덮어야겠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모습, 이번에 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인내하고 참아내는 그런 모습이 보이죠. 다음해 새 봄이 오면 또 다시 맨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야 할 테고, 어쩌면 또다시 다 읽어내지 못한 채로 시들 테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올라가는 담쟁이의 모습. 그 모습에서 인내가 느껴지시나요?

어떻게 보면, 인간은 담쟁이보다 더 많은걸 가지고서도 조금만 힘들면 쉽게 포기해버리는데.. 이 시를 통해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담쟁이가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 상황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분들 있다면, 이 시 들으시고 조금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 봄’이 올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I Won’t Give Up>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너무 유명한 곡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백의 가사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의 ‘인생’을 놓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린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겠다’라고 고백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나혜경 시인의 시 속의 다짐과도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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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로 준비한 담쟁이 시는 도종환 시인의 시인데요, ‘담쟁이’라는 제목의 시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서 학교에서 해직된 후 무직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시기,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힘들고 막막했던 시절에 쓰여진 시로 알려져 있어요. 당시에 도종환 시인은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여러 선생님들과 모여서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때에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창 밖의 옆 건물 벽에 담쟁이 잎이 가득 붙어 있는 게 보인 것이죠. 그 벽을 보면서, ‘저 벽에는 물 한 방울 마실 곳도 없고, 뿌리를 내릴 흙도 없는데, 처음부터 저런 담벼락에서 살도록 던져진 담쟁이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시인도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담쟁이는 애초부터 그런 척박한 환경에 살도록 던져진 거니까, 어떻게 보면 담쟁이가 더 불쌍하다고도 볼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시인은 불쌍한 눈으로 담쟁이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비옥한 땅과 숲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들에 비하면, 담쟁이는 자라는 속도도 느리고 처한 환경도 훨씬 더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 모습, 인내하며 여럿이 함께 힘을 내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시인의 눈은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런 담쟁이를 보면서, ‘와.. 저런 상황에서도 담쟁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담쟁이 잎들과 손 잡고 함께 벽을 기어올라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시인은, 가지고 있던 회의 서류 뒷면에 자신의 생각을 시로 써 나갔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가 바로 이 ‘담쟁이’입니다. 그럼, 한번 시를 읽어 볼까요?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이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함께 손잡고 올라간다.

푸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저것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아까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시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담쟁이를 보고, 같은 인내와 끈기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시인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동이 또 다르죠. 앞서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 어떤 한 사람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말해주고 있었다면, 두 번째로 읽은 도종환 시인의 시는 ‘함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나도 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것을 ‘벽’이라고, ‘절망의 벽’이라고 말하며 주저앉아 있지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르잖아요? 때로는 여러 말보다도 함께 손 잡아주고, 말없이 이끌어줄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더 위로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혹 힘든 시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뭔가 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 계시다면, 이 시와 함께 위로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 한 방울 없고 뿌리 내릴 흙도 전혀 없는 벽에서도 담쟁이는 푸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힘 내세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93 Million miles>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들아 살면서 어두워 보일 때가 있을 테지만, 빛이 없는 것도 때론 필요한 법이란다. 단지 이것만 기억하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넌 언제든지 집에 돌아올 수 있단다. 모든 길이 위험한 비탈이어도 거기엔 언제나 네가 의지할 손이 있단다. 이것만 기억하렴, 네가 어디에 가든지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길이 가파르게만 보이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의지할 손이 있다는 말,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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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악(樂)인열전]③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고요함은 소리의 부재다. 침묵은 침묵의 존재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1951년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무향실을 다녀오고, 이렇게 썼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공학자한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완전한 무음 상태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무음’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였다. 들뢰즈가 “회화가 얼굴의 탈영토화이듯 음악은 목소리의 탈영토화”라고 말했듯이, 음악은 언어(라는 문법적 규칙)를 벗어난 음-기계들 생산의 과정이고, 음의 배치이다. 완전한 무음은 없다. 그때 존 케이지는 이렇게 선언한다. “음악의 종말은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존재의 원초적인 소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일정한 반복을 유지하고 심장 박동수는 최초의 리듬이다. 그 소리의 근원은 지상의 원소들의 소리이며, 리비도의 ‘울음소리’는 일체 세계의 울림이다. 그리고 이 울림은 존재 그 자체이다.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은 계속 있을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발견이 존 케이지로 하여금 〈4분 33초〉를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완전한 무음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처럼,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는 순간, 그때 우리는 침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침묵의 순간에도 미묘한 잔음들은 청각기관을 자극하고 있다. 소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침묵이라고 말하는가? 우리에게 침묵이란 없다. 단지 우리는 ‘침묵을 듣는 것’이다. 침묵도 하나의 소리인데, 비-소리로서의 소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소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소리이다. 침묵이 없다면 음악도 없다. 와인을 담아 둘 와인잔이 필요하듯, 침묵은 소리를 받아주는 그릇이고, 음악을 가능케 해주는 또 다른 소리이다.

갑자기 존 케이지의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존 케이지의 일화는 침묵 역시 음악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음악에 있어서 우연성에 해당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기침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이 모든 행동들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소리들은 연주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이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심호흡을 하며, 소리를 만들고 있다. 연주자가 내고 있는 이 소리들은 연주자의 소리이지만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침묵의 순간은 소리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고, 아이러니하게 침묵은 ‘소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King Crimson

이러한 소리의 우연성의 발견은 현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 세례를 받은 인물 중에 하나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다. 로버트 프립은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연주자로 잘 알려졌다. 킹 크림슨은 69년에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희대의 명반과 함께 등장했으며, 70년대 락의 황금기를 풍미했다. 70년대는 락의 테크닉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이고, 대부분의 락의 형식이 이 시기에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미술의 모든 실험적 방법이 아방가르드 시기에 구축되었다면, 80년대 락의 모든 실험적 방법은 프로그레시브 락 장르에 의해 완성된다. 킹 크림슨을 빼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킹 크림슨은 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로버트 프립이 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King_Crimson_members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을 제외한 멤버 교체만 20명이 넘는다. 프립의 극단적 진보성향은 그의 인간관계에서도 보인다. 그는 새로운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에 도전했고, 그것을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그 고행을 견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변화를 추구했던 그는 매번 기상천외한 음악적 시도를 했고, 그 시도들은 마니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밴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프립과 다른 멤버들이 늘 대립했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 불협화음은 그들의 음악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그의 밴드 역시 늘 우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의 진가는 킹 크림슨에 한정되지 않는다. 킹 크림슨 얘기만 해도 많지만, 이번에는 로버트 프립에 집중하기로 하자. 프립은 킹 크림슨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 중 73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명반 [No Pussyfooting]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FRIPP & ENO [No Pussyfooting]

https://youtu.be/ZwHH7XECJLg

앨범 아트 역시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거울 방 안에 있는 거울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거울인데, 그 거울 역시 반대편 거울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반대편 거울이고, 반대편의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다. 거울 속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후관계는 없고 계속 반복되는 자기복제, 모방의 모방들 밖에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거울 방은 마치 소리의 파장과 같다. 무한히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퍼져나가는 음파처럼, 거울 속 이미지들은 계속 자신을 재현하면서 확장한다. 거울을 이용한 이 앨범 아트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음들이 계속 중첩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데, 반복되고 중첩될수록 새로운 소리가 탄생한다. 우연적 음들의 배합과 자기복제. 그들이 추구하는 사운드 메이킹을 거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브라이언 이노로부터 프립은 많은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연주 기법을 발명한다. 초기의 형태는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Revox A77)를 이용하여 한번 연주된 소리를 녹음과 재생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일종의 딜레이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70년대 말부터 “Frippertronics”라는 명칭을 얻는다.

https://youtu.be/4Xjtm-RZaek – Montreal, North American tour in 1979

프립퍼트로니스(Frippertronics)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

프립퍼트로니스의 원리

 

Frippertronics는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성능이 향상되었다.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는 디지털 장비로 대체되고 각종 이펙터가 추가됐다. 이 시기부터 프립의 기법은 “Soundscape”라는 명칭을 얻었다. Soundscape 역시 Frippertronics과 마찬가지로 사운드에 반복, 연장 효과를 준다. 이 효과는 마치 넓게 퍼진 풍경(Scape)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프립은 Soundscape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Soundscape에 의한 나의 연주는 음의 지연(delay), 반복(repetition), 우연적인 효과(hazard)를 기본으로 한다. 주로 즉흥연주(Improvisation)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 청중들과 청중들에 대한 연주자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Soundscape은 기타 한 개로 수많은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가진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lr8SR_bzayk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 Bringing Down the Light

사운드스케이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92년 발표된 데이빗 실비안(David Sylvian)과 함께 발표한 이 곡은 완전히 사운드스케이프만으로 이루어졌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일품이다.

 

프립을 소개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는 저작권에 대단히 민감한데, 그래서인지 음원사이트를 통해서 그의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가 없다. 그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수고스럽게 시디를 직접 사서 들어야 한다. 21세기에 너무나도 불편하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을 어찌 말리겠는가. 혹시라도 프립에 관심이 생겨서 시디를 직접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음에 앨범은 꼭 구매하기를 추천한다.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킹 크림슨의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시작으로 Epitaph까지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권장한다. 킹 크림슨 1기를 대표하는 앨범

[Islands], 1969

킹 크림슨 2기에 해당하는 앨범이다.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시작하면서, 좀 더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시기. 킹 크림슨 앨범들 중에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던 시기이다.

[Larks’ Tongues In Aspic], 1973

3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재즈, 클래식, 헤비메탈 등등 한 앨범이 아니라 한 곡에 다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예스의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가 참여했다. 굉음과 침묵이 서로 핑퐁하듯이 왔다갔다 하는데, 킹 크림슨이 음악적 실험을 가장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시기이다.

[Red]

3기의 마지막 앨범. 여러 멤버들이 탈퇴하고 3인 체제로 낸 앨범이다. 보통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 <Starless>에서의 프립의 독주는 정말 환상적이다.

 

<프로젝트>

FRIPP & ENO [No Pussyfooting], 1973

명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와의 합작, 프립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사실상 프립의 진가는 여기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1992

제펜의 데이비드 실비앙과의 합작, 사운드스케이브가 가장 잘 드러나는 앨범

David Bowie [Heroes], 1977

동명의 타이틀곡에 프립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솔로>

[The Last of the Great New York Heart Throbs], 1978

 

[Exposure], 1979

프립의 음악세계가 나를 매혹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프립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리’에 대한 철학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소리는 왜 소음이 아니라 음악이 되는 것인가. 음악의 핵심은 반복과 변화이다. 리듬은 반복이지만, 동시의 변화이다. 우리가 반복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잠깐의 텀이 필요하다. 반복이라는 의미 안에는 움직임과 멈춤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소리 다음에 침묵. 그리고 침묵 이후에 등장하는 소리로의 변화. 이 모순적인 요소들의 순환이 바로 음악이다.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삶 역시 반복과 변화의 나열 아니겠는가. 늘 일상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가 삶을 작은 예술로 만들어주기에, 조금이라도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존 케이지와 로버트 프립. 우리는 침묵 역시 듣고 있다. 소리는 침묵 덕분에 음악이 될 수 있었다. 그 침묵은 음악의 이정표 역할이 되어준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잔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이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잠깐 찾아오는 침묵의 소리를 찾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기에서 자기와 다른 자기에로 ‘변화'(transformation)가 아닐까.

 

세 번째 시간, 밤하늘 [시가 필요한 시간]

세 번째 시간, 밤하늘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시 읽기 참 좋은 밤이네요. 최근에 저녁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죠. 이제 곧 겨울인가 싶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2년 정도 있었는데, 호주에 살 때는 밤마다 하늘에 떠 있는 별 보는 그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날씨가 쌀쌀해질수록 별이 많아졌던 기억이 나는데요, 한국에서는 밤에 하늘을 보고 별을 찾아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의 주제는 ‘밤하늘’인데요, ‘밤’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뭔가 어둡고 고독..하다고 할까? 흡사 어떤 ‘암흑기’와 같은 이미지가 먼저 다가올 수도 있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나름의 낭만과 매력이 있는 시간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나 싶어요.

오늘 주제가 밤하늘이다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예전에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한 7시 반쯤 되었던 것 같아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사이에 엄청 큰 달이 떠 있더라구요.

그 달빛에 비춰진 구름과 밤하늘이 너무 환상적이고 예뻤어요. 그래서 그 때 제가 속해있는 그룹 채팅방에다가 달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하늘의 달을 보라고 연락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혹시 있나요?

꼭 달이 아니더라도, 어느 맛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가 생각나고 ‘아, 그 사람이 여기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 분명 한번쯤은 있으시죠? 그렇게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꽤나 좋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서 나를 마음속에 떠올려준다면? 누군가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연락을 준다면! 아마도 꽤 감동을 받겠죠. 뭔가 그 사람에게 내가 특별한 대상이 된듯한 느낌이 들 테니까요. 무엇이든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잘 전달이 된다면 꽤 근사한 감동이 있을 겁니다.

그런 서로의 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 있어서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인데요, 시 먼저 읽고 이야기 나누도록 할게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문득 한가지 궁금한 게 생기죠. 과연.. 진짜로 달이 예쁘게 떴기 ‘때문에’ 전화를 한 걸까? 어쩌면 그냥 달은 핑계고, 그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달을 보고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는 건, 이미 그 사람 마음 속에 상대방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는 거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전화해서 ‘달이 너무 예쁘게 떴으니까 한번 봐봐’라고 툭 던지지만, 그 말 속에는 그만큼의 애정이 분명히 담겨 있겠죠. 그리고 이 시 속에서 그 전화를 받은 사람도, 달 얘기를 툭 꺼내는 말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딱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달이 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른다… 무슨 뜻일까요? 평소 늘 보던 달빛이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밝고 환한 달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는 건, 어쩌면 수화기 너머로 상대방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감정, 뜨겁게 느껴지는 어떤 고마움, 감동, 그리움, 그런 느낌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순간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전화로 밖에는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겠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나의 마음을 ‘달빛에 실어 보내’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이겠죠. 멀리 떨어져 있기에 더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하늘에 뜬 환한 달을 보고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고,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도 또 하나의 달이 떠오른다는 이 시적 표현은, 물리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지만, 마음만으로는 서로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느껴지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멋지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홍이삭의 ‘산 넘어 그대는’이라는 곡 소개 해드릴게요. 이 곡은 ‘차곡차곡’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가수 홍이삭과 더블베이스 연주자 송인섭이 작곡하고, 일반 구독자들이 직접 댓글로 작사에 참여해서 만들어진 곡이라고 해요. 지금 곁에 함께 있지 않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홍이삭 특유의 밝은 멜로디를 만나 아름답게 표현된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누구를 마음 속에 떠올리실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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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밤하늘이라는 주제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라는 글이었는데요, 요즘 시를 읽으면서 점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법을 좀 더 배워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가 필요한 시간’이죠!

 앞서 이야기 했지만, 호주에 가서 가장 놀랐던 게, 밤하늘에 별이 정말 많이 보이는 거였어요. 한국에서는 사실 다른 별은 잘 안보이고, 눈에 띄게 밝은 별이 딱 하나 있어서 ‘저게 북극성이다!’라고 바로 알 수 있죠. 그런데 호주는 별이 전부 다 밝으니까 뭐 하나를 딱 찾아낼 필요가 없더라구요. 낮에는 구름이 너무 예쁘고 또 밤에는 별이 너무 예뻤던 호주의 하늘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도종환이라는 시인이 쓴 시 중에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마을에 별들이 많이 뜬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시가 있는데, 호주가 딱 그런 곳인 것 같아요. 도종환 시인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제 발 밑만 쳐다보며 사는 동안, 그리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잊어가는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별들도 알았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별들도 도시의 하늘을 떠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밤이 밝을수록 별이 도시의 하늘을 떠나간다. 시적인 표현이죠. 낮이고 밤이고 바쁘게 치이는 도시의 삶, 밤에도 불을 밝힐 수 밖에 없으니 밤 하늘에는 당연히 별이 보이지 않겠죠. 시인은 그런 삶을 가리켜 ‘별들도 떠나버리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역시, 그만큼 모두 자기 사는 일에 급급해서 남을 돌아다 볼 여유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 없을 겁니다. 처음 언급했던,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도 다시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만나 볼 시는 바로 별에 대한 시입니다. 이성선 시인의 시 ‘사랑하는 별 하나’ 함께 만나 보시죠.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얗고 노란 별이 있다면, 이 땅에도 하얗고 노란 별들이 있습니다. 바로 들판에 핀 들꽃들이지요. 밤에 보는 별들과 낮에 마주하는 들꽃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누군가를 바라봐주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일 겁니다.

사람은 서로 오해도 하고 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곁에 있을 때도 있고, 곁을 떠날 때도 있죠. 하지만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런 자연을 보고 시인은 참 많은 위로를 받은 것 같습니다. 외로운 밤에 고개를 들면, 별이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주고, 세상일이 괴로워 고개를 푹 숙일 때, 그 자리에서 들꽃이 미소를 지어주며 위안을 주고 있음을 느껴냅니다. 그 흔한 별과 들꽃을 보고 위로를 받고,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시를 쓸 수 있는 이 시인의 눈이 참 부럽습니다.

이런 별과 들꽃처럼 위로와 위안이 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죠.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의 ‘나도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라는 구절은, 마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들리면서, 어떤 다짐으로도 다가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이런 위안의 존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스탠딩 에그의 <Starry Night>이라는 곡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곡은 스탠딩 에그가 호주를 여행하던 중에, 울룰루(Uluru)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쓴 곡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요. 이 노래 들으시면서 밤하늘의 별도 감상하시고, 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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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악(樂)인열전]②

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이 현(건국대 철학과)

만약 블루스가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없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이다. 블루스가 필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거나, 블루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다.1)

이번에는 블루스 음악에 대해서 좀 다뤄보고자 한다. 블루스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려운 음악이다. 그런데도 블루스는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다.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계속 듣게 되는 음악이다. 그 힘은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블루스라는 음악이 좀 그렇다. 마치 평양냉면과 같아서 처음 접하면 그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처음 듣자마자 블루스가 맞았다면, 그만큼 당신의 속이 쓰라렸다는 것이다. 그 쓰라림을 씻어 내려줄 음악이 블루스이다.

오늘의 동행자는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이다. 그는 1939년 미국 아칸소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흑인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스틸 기타의 재능을 보였고, 15살 때부터 직업적인 기타리스트 생활을 했다. 그는 19살에 나이에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 밑에서 세션 활동을 했고, 그 후에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 갔다.

 

그는 1971년 미국의 한 공영방송에서 방영한 “세계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The Best Unknown Guitarist In The World)”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킴으로써, 존 레논을 비롯하여 저명한 컨트리 뮤지션 멀 해가드(Merle Haggard)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72년 블루스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그의 데뷔 앨범 [Roy Buchanan]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앨범에는 명곡 이 실려있다.

“나는 나의 연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충분했다.”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기분이 울적할 땐 기타도 울적하고 기쁠 땐 기타도 노래를 한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연주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 로이 부캐넌

 

부캐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블루스는 감정의 격정을 연주하는 장르이다.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하다. 우리가 흔히 감정을 ‘희로애락’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우리의 분노는 한편으로 슬픔이 섞여 있고, 우리의 슬픔 역시 분노가 섞여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이 아니라, 수많은 겹침으로 얽혀 있는 아날로그이다.

블루스는 음악적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왜냐하면 블루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연주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연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블루스에서는 싱어(singer)는 없고 오직 연주자(player) 밖에 없다. 블루스는 오직 삶과 고통으로부터 빚어지는 연주(play the blues)만이 있을 뿐이다. 부캐넌의 재능도 그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요소는 맞지만, 부캐넌의 삶 그 자체가 그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삶의 깊이를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는가. 그 과정은 심히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연주자로서 그가 선택한 기타는 무엇인가. 그가 연주했던 기타는 펜더의 텔레케스터 2324모델(Fender Telecaster SN 2324), 일명 낸시(Nancy)다. 그는 텔레케스터의 선구자이다. 텔레케스터는 상당히 다루기 까다로운 기타이다. 특유의 비음 소리와 깽깽거리는 음색은 매력적이지만, 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곡의 조화를 맞추기 어렵고, 펜더사 역시 블루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낸시는 부캐넌의 특유의 심플하면서 그루지한 치킨피킹 주법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연주 시 볼륨 패드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러한 연주 방식은 음향을 통일시킴으로써 텔레케스터 특유의 음색을 잘 살리면서 곡 전체를 조화롭게 만들었다. 텔레케스터의 음색은 부캐넌 특유의 담백함을 살려주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레코드사 Polygram은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강요했다. Polygram은 그가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고, 이러한 의견 차이 때문에 레코드사와 다툼이 심했다. 그는 점차 술과 약물에 빠져들었고, 1988년 8월 14일 아내와 크게 다투다가 경찰서로 연행됐고, 유치장에서 셔츠로 목매달아 생을 마감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음악가로서는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였다. 블루스 아티스트들 중에서는 삶의 고독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제니스 조플린, 스티브 레이 본이 그러했고, 로이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루스는 고통스러운 자기 삶의 깊이를 끌어올려 드러난 그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다. 블루스에서 부르고 응답하기(Call and Response)가 음악적 핵심이다. 여기서 부르고 응답하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인 코드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블루스라는 장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삶의 고독을 소리로 조각하는 것.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 세우고 그 감정에 응답하는 것. 그래서 아티스트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빛난다. 그는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지미 페이지 등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음에도, 대중들로부터는 소외당했다. 그는 늘 외로웠고, 그에게는 누구보다 블루스가 필요했다. 자신의 고독을 위해서. 그의 고독을 연주함으로써 찬란한 고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https://youtu.be/v4e2VgycfSw

Roy Buchanan – Live from Austin TX, 1976

 

위의 1976년 텍사스 오스틴 라이브는 블루스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Roy’s Bluz>는 등장부터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로커빌리2)적 요소가 가미된 이 곡은 상당히 경쾌하면서 간명하다. 로커빌리적 요소는 백인 블루스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백인 블루스의 매력은 흑인 음악의 특징인 그루브함 위에 컨트리 특유의 간명함과 통통 튀는 감성이다.

<Roy’s Bluz>는 1972년 앨범 [That’s What I Am Here For]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라이브의 4번째 곡인 <Hey Joe>가 실려있다. <Hey Joe>는 원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곡으로서 부캐넌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헌정곡이다. 둘이 비교하면서 들어도 좋은 청음 포인트다.

 

https://youtu.be/8mr9I7g1A7o

Roy Buchanan – Roy’s Bluz

 

https://youtu.be/fe82eYRjiBU

Jimi Hendrix – Hey Joe, 1967 Monterey Pop Festival

(상당한 명연이다. 기회가 되면 꼭 지미 헨드릭스도 꼭 다뤄보고 싶다.)

 

두번째 <Soul dressing>은 Malcolm Lukens과의 협주가 인상적이다. 블루스의 Call and Response를 잘 보여주고 있다.

 

https://youtu.be/ClRHx5FJ9yA

Roy Buchanan – Sweet Dreams

 

나머지 두 곡 와 은 그의 데뷔 앨범인 [Roy Buchanan]에 실려 있는 곡들이다. 는 그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블루스곡이지만 상당히 컨트리적인 따뜻함이 담겨 있는 곡이다. 애절한 벤딩은 분명 엄청나게 화려한 스킬은 아니지만, 마음을 녹인다. 기타는 손이 아닌 마음으로 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곡.

 

https://youtu.be/XgOLDAWu6OY

Roy Buchanan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누가 뭐라 그래도 그의 대표곡은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다. 환상적인 트레몰로와 처절한 벤딩은 사람들을 진한 감성 속으로 녹여버린다. 부캐넌의 연주 특징이라고 하면 충실함에 있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연주에는 빈틈이 없다. 그의 연주는 촘촘히 직조된 직물과 같아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을 자아낸다.

The messiah will come again

– Roy Buchanan

 

Just a smile

Just a glance

The Prince of Darkness

he just walked past

 

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

 

There was a town

It was a strange 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

It was a lonely, lonely little town

 

Till one day a stranger appeared

Their hearts rejoiced

and this sad little town was happy again

 

But there were some that doubted

They disbelieved, so they mocked Him

And the stranged He went away

and the said little town that was sad yesterday

It’s a lot sadder today

 

I walked in a lot of places I never should have been

But I know that the Messiah,

He will come again…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 저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이번엔 내가 내 방식대로 얘기해보겠다(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는 부캐넌이 자신의 방식(my way)으로 ‘세계라는 작은 마을(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에 다녀간 ‘이방인(stranger)’, 예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부캐넌이 말하는 세계, 즉 작은 마을은 ‘외로운 작은 마을(lonely little town)’이다. 그러나 홀로 찾아온 이방인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rejoiced), 그 작은 마을은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방인을 의심하고(doubted) 불신하며(disbelieved) 조롱했다(mocked). 그런데 그가 떠나자 그 마을은 점점 슬픔에 잠겼다. 외로운 세계의 찾아온 이방인 덕분에 사람들은 행복했고, 그런 이방인을 떠나 보낸 것은 그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메시아,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고 떠나버린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들이 떠나보낸 것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는 그가 영원히 떠났다고 말한다. 어둠의 왕자(The Prince of Darkness). 그는 어두운 과거로 떠나가 버렸다고(he just walked past) 말이다. 이 가사의 내용을 종교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메시아라는 매개를 통해서 결국 부캐넌은 인간의 실존적 상태, 고독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고독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부캐넌은 무엇 때문에 과거로 떠나버린 이방인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매 순간 ‘지금’을 잃어가는 고독의 순간에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늘 곁에 있는 것은 사실 없을 수도 있다.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바람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며, 잡을 수 없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 속에서 마주하는 바람은 ‘현재의 나’와 마찬가지로 예전에 다른 누군가를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이다. 즉,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바람은 ‘누군가의 과거’였다.

파울 클레 :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1920

그렇기에 과거와 지금에는 ‘은밀한 약속’이 놓여 있으며, ‘지금시간Jetztzeit’에는 앞서 간 모든 과거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깃들어 있다. 벤야민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로 여겼던 것처럼,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부캐넌에게 있어서 고독은 오히려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준비, 즉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닐까? 그리고 그 구원은 과거로부터 온 것, ‘파울 클레의 천사’ 발 앞에 쌓여있는 잔햇더미 속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잔햇더미는 우리의 마음에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안타깝게 떠나버린 이들을 가슴 속에 묻어 두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떠나 보냈다고 생각하는 메시아, 즉 구원은 어쩌면 나의 마음속에 묻어 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부캐넌은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부캐넌의 메아리가 깃들어 있다. 마음을 울리는 힘은 기억이고, 우리가 느끼는 향수병은 마음 한편에 쌓여있는 추억의 내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외롭고 힘들 때, 단 한 명이라도 그의 소리를 기억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늘 과거로부터 우리와 함께 있다. 그의 텔레케스터 소리와 함께.


1) 정성일 평론가의 <영웅본색> 평론의 패러디이다.

 

2) 1960년대 등장한 로큰롤과 힐빌리(hillbilly:컨트리송의 다른 명칭)가 결합된 형태의 음악장르이다. 로큰롤이 태동하던 초기에는 많은 컨트리가수들이 로큰롤로 진출했다. 그러면서 로큰롤에 컨트리적 요소가 많이 섞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러한 특징이 하나의 음악장르로 정립되게 된다.

두 번째 시간, 사랑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 시간, 사랑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으로 함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사랑’입니다. 음, ‘사랑’하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어떤 사랑이 떠오르시나요?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텐데, 오늘 이야기 할 사랑은 어떤 수평적이고 균형 잡힌 대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한쪽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치 남녀 간의 짝사랑과 같이 말이죠.

‘짝사랑’… 짝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뭔가 어릴 때의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르네요. 가장 처음으로 하는 첫사랑은 아마도 짝사랑일 테고,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좋아하다가 어느 새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런 ‘짝사랑’이나 ‘첫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녀간의 짝사랑도 짝사랑이지만, 부모님들의 자식사랑도 짝사랑과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만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존재는 없는데,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때로는 너무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는 게 또 자녀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간의 짝사랑의 시로도 읽히고 또 부모님의 자식을 향한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는 시가 있어서 가져와 보았습니다. 바로 김인육(1963~)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인데요, 2016년 7월에 <시가 필요한 시간> 방송에서 소개해드린 후에 드라마 <도깨비(2017)>에도 삽입이 되면서 유명해진 시이기도 합니다. 시의 내용을 들어보시면 왜 제목이 ‘사랑의 물리학’인지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럼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 듣고 오겠습니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 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네,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 듣고 왔습니다. 왜 제목이 사랑의 물리학인지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과학책에서 봤을 법한 ‘질량’이라던지, ‘부피’, ‘비례’ 같은 전혀 시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시어가 나오니까,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런 조금은 딱딱하지만 나름 익숙한 용어들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묘사를 하고 있어서 뭔가 더 잘 와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비꽃 같이 작은 크기더라도, 꽃잎같이 가벼운 것이더라도 사랑이라는 대상 앞에서는 그것의 흡입력이 지구보다도 더 크다는 이 새로운 법칙. 물리학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법칙이죠. 그래서 그냥 물리학이 아니라 ‘사랑의’ 물리학이라고 제목을 붙였나 봅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이 시와 함께 어떤 사진 한 장을 같이 본 적이 있어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아 어쩌면 이 시가 단순히 남녀의 첫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걸 느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제 막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이불을 덮고 있는 사진이었는데요, 아빠의 큰 손이 살포시 아기를 감싸고 있던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 밑에 이 김인육 시인의 시가 적혀있었는데요, 이 시에서 말하는 제비꽃 같이 조그마하지만 지구보다 더 큰 힘으로 나를 끌어당긴다는 이 존재는, 어쩌면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감정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라는 작은 존재는 부모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특별한 사랑의 대상일 테니까요. 김인육 시인의 시를 이렇게 읽으니까 또 다른 감동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강허달림이라는 가수가 직접 작사작곡하고 부른 <사랑이란>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인 가수인데요,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이란, 다 주고도 남을 사람, 사랑이란, 다시 살아야 할 이유”…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을 사랑, 내가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랑이라는 노랫말이 김인육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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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랑’이라는 주제로 들려드릴 두 번째 시는 한용운(1879~1944) 시인의 시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까닭… 사랑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보통 ‘이상형’이라고 해서,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해놓는 어떤 조건들이 있죠. 가령, 키는 어떻고, 스타일은 어떻고, 성격은 어떻고 등등. 그런 의미에서는 누굴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편으로는 누군가가 정말 좋으면, 그 사람 자체 말고 어떤 또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요즘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빠르고 쉽게 변해버리는 세대에서는 누구를 사랑할 때, ‘내가 저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왜 사랑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감정대로만 움직이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아요.

한용운의 시를 들어보면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이유,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이유. 이 시는 부모님께 읽어드려도 정말 좋고, 아내나 남편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가 고백하기에도 너무나 좋은 시입니다. 한용운의 시 ‘사랑하는 까닭’ 듣고 오겠습니다.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 들어보았습니다. 너무 멋진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한다’는 말에서 홍안(紅顔)이란, ‘붉은 얼굴’ 즉 ‘젊고, 잘생기고 늠름한 모습’을 말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의 홍안만을 사랑한다는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나의 잘 갖춰진 멋진 모습만을 사랑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시에서의 ‘당신’은 ‘나’의 젊고 늠름한 모습뿐만 아니라 늙고 초라한 백발까지도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곧 나의 밝은 모습만을 좋아하지만, ‘당신’은 ‘나’의 눈물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당신’의 사랑이 이 시의 화자인 ‘나’에게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으로 다가왔을지, 이 시의 어조를 통해서 느낄 수 있죠.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 속에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역시 가족, 부모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사랑일겁니다. 나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죽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이 시의 마지막의 구절은, 어떤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까지 보여주는데요, 이 정도로 깊이 나를 사랑해 줄 존재.. 여러분 마음 속에는 누가 떠올랐을지 궁금해지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양희은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계절이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내 마음도 바뀔까 두렵’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그대’가 있어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 속에서의 ‘그대’는 한용운의 시의 ‘당신’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말, ‘그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그대들, 부모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사랑을 담아 들려주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마음 속에 떠오른 그 누군가에게 이 시와 노래를 나눠보시면 어떨까요? 그럼, 저는 2주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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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성性스러운 성가聖歌 제프 버클리 [악(樂)인열전]①

[악(樂)인열전]

연재를 시작함에 앞서
처음, 이 연재 의뢰가 들어온 지는 꽤 오래됐다. 작년 초겨울인 거로 난 기억한다.
계속하여 미루다가 드디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그동안 나의 게으름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추어인 내가 음악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말 할 수 있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내 역량 안에서 음악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한 음악’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은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체험’이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음악은 내가 보고 있는 세계를 바꿀 힘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매번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지만 <예스>와 함께한 아침은 웅장했다. 그리고 점심시간마다 <리암 갤러거>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 잡생각을 실내화 마냥 던져버렸고,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친 마음을 <빌 에반스>가 대신 울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걷는 길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나에게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해준 동행자들이었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그 동행자들을 손쉽게 고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나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을 나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이어폰을 꽂고 있을 때만큼은 나와 동행자 단 둘뿐이며, 어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유일한 순간이며,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다.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여행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나만 느꼈던 그것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마다 후기를 적는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본 연재에서 나의 경험들을 전달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동행자들, 그중에서 처음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새로운 친구 한 명 소개받는 느낌으로 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성性스러운 성가聖歌 제프 버클리

이 현(건국대 철학과)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1966.11.17~1997. 5. 29)

처음 소개할 동행자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제프 버클리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다. 나에게는 정말 음악을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특히 제프 버클리를 좋아했다. 항상 버스 뒷 구석에 그 친구랑 나란히 앉자 한쪽씩 이어폰을 끼면서 같이 이 노래를 들었었다.
“들으면 행복하면서 너무 슬퍼”
그 친구의 평이 너무 인상 깊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제프가 나의 곁에 있게 된 것이

Jeff Buckley – Hallelujah
https://youtu.be/y8AWFf7EAc4

<가사>
Well I’ve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Well it goes like this:
The fourth, the fifth, the minor fall and the major lift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Hallelujah(X 4)
Well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a
She tied you to her kitchen chair
And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Hallelujah(X 4)
But baby I’ve been here before
I’ve seen this room and I’ve walked this floor
You know, I used to live alone before I knew ya
And I’ve seen your flag on the marble arch
And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X 4)
Well there was a time when you let me know
What’s really going on below
But now you never show that to me do ya
But remember when I moved in you
And the holy dove was moving too
And every breath we drew was Hallelujah
Hallelujah(X 4)
Maybe there’s a God above
But all I’ve ever learned from love
Was how to shoot somebody who outdrew ya
And it’s not a cry that you hear at night
It’s not somebody who’s seen the light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X 12)

노래 자체는 매우 단조롭다. 기타와 보컬 단 두 가지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에 감미롭고 절제된 기타선율과 제프의 담백하고 절절한 보이스는 곡 전체를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고, 그 모습은 마치 성령의 빛으로 가득한 성당 내부와 같다. 성당 안쪽은 텅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친 빛들 덕분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당은 밝지 않으면서 어둡지 않다. 비어있으면서 가득 찬 공간. 성(聖)적 공간은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다.
원래 이 노래는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1984년에 발매한 그의 앨범 Various Positions의 B면 1번 수록곡이었다.

Leonard Cohen – Hallelujah
https://youtu.be/ttEMYvpoR-k

이 곡을 낸 이후 존 케일(John Cale),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밥 딜런, 본 조비 등등 다양한 커버들이 나왔다.

John Cale – Hallelujah
https://youtu.be/-gi3J8nPKPE

Rufus Wainwright – Hallelujah
https://youtu.be/PBo-n_17XU0

Bob Dylan – Hallelujah
https://youtu.be/u7JrHD6YAto

Bon Jovi – Hallelujah
https://youtu.be/RSJbYWPEaxw

레너드 코헨은 이 곡을 작사하기 위해서 수년간 고민을 했다고 한다. 가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구절만 80개의 초고를 썼으며, 성(聖)적이고 성(性)적인 가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얼핏 보면 성(聖)스러움과 성(性)적인 것은 정 반대에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신성은 금기의 매혹적 양상”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에 있으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Ecstasy of St. Teresa, Bernini. 1598-1680>

많은 커버 중에 가장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커버는 제프의 커버이다. 코헨으로부터 ‘원곡보다 뛰어난 리메이크’라며 찬사받은 바 있다. 1997년 발매된 Grace의 6번 트랙인, 이 커버는 사실상 곡의 주인이 레너드가 아니라 제프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테크닉의 훌륭해서? 아니면 그의 타고난 목소리 때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곡에 대한 해석이다. 제프는 이 곡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할렐루야는 숭배하는 사람, 우상, 신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가 아니에요.” “하지만 오르가슴의 할렐루야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성가(聖, 性-歌)는 관능적인, 환희의 노래이다. 정말로 우연하지만, 이 둘이 한국어 발음에서 같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Halleluja”는 무엇을 위한 송가인가? 제프가 연주한 ‘비밀스러운 코드’(secret chord)는 ‘사랑’을 위한 소리이다. 성(聖, 性)인 사랑은 모두 자신을 뛰어넘어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얻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어쩌면 완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늘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노래에 대해서, “당신은 노래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할렐루야의 가사는 곡 씹으면 씹을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노래는 (제프의 말했던 것처럼) 사랑, 오르가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엌 의자에 묶어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서에서 머리카락은 영광을 상징하고 그런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몰락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몰락임과 동시에 상승하는 순간. 엑스터시의 순간이다. 사랑의 순간은 바로 이 순간 아닐까? 당신을 추구하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말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나를 버리는 순간이며,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픈 것이 아닐까?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사랑은 승리의 행진은 아니에요. 그것은 차가운데다 부셔져 있지요. 할렐루야

제프 버클리는 1966년 1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팀 버클리와 메리 귀베르사이에서 태어났다. 팀 버클리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메리 귀베르와 이혼했고, 메리는 이후 재혼하여 제프는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제프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스코티 무어헤드(Scotty Moorhead)로 개명하기도 했었다. 팀 버클리와는 8살 때인 1975년에 다시 만났는데, 이것이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만나고 얼마 뒤 팀 버클리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제프는 버클리라는 성을 되찾았다.

Halleluja가 수록된 <Grace>는 1994년에 발매된 그의 첫 정규앨범이자, 마지막 정규앨범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 ‘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요절했다. 1997년 5월 29일 친구와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부르며 울프 강을 걷다가 갑자기 옷을 다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다. 친구가 한눈판 사이 제프는 사라졌었고, 이후 수색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6월 4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Grace>는 얼터너티브 포크 록의 정수로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 ‘팀 버클리’도 엄청난 천재였지만 그는 그를 한 편으로는 뛰어넘었다. 제프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정규 데뷔 이전까지 시네(Sin-é)를 비롯한 뉴욕의 클럽들을 돌며 레드 제플린, 밥 딜런,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레너드 코헨 등의 커버 곡들을 연주하면서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러면서 다른 아티스트의 곡을 자신의 색채로 버무리는 연습을 꾸준히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제프의 커버는 원곡자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습 과정을 거쳐 첫 자신의 소리를 담은 것이 였다. 1994년 첫 데뷔 당시 그는 롤링 스톤 매거진에서 “어떤 곡을 가져다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이제 그 수업은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자신이 생긴 것이다.

그의 매력은 독특한 감수성이다. 묘한 슬픔과 거침이 함께 공존한다. 그의 째지한 리듬감 덕분에 슬프지만 절대 처지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 울림은 거기에 깊이감과 우아함을 입혔다.
첫 번째 트랙 [Mojo Pin]이 그의 보컬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다. 속삭인 듯하면서 절규하는 그이 보컬은 앨범의 시작부터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타이틀 곡인 [Grace]는 다이나믹한 전개와 게리 루카스(Gary Lucas)의 기타가 일품이다. 서로 다른 기타 2대를 다른 리프로 구성했는데, 그 위에 버클리의 보컬 기교가 극한까지 이르렀다. [Lover, You Should`ve Come Over]는 그의 자작곡으로서 도입부의 오르간 소리가 인상적이다. 포크의 감성을 제프만의 감성으로 잘 표현했다. 의 곡의 구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은지 알 수 있다. [Last goodbye]와 [So Real]은 전형적인 포크 록의 형태를 띠고 있고, [Corpus Christi Carol]은 중세 교회 성가를 편곡해서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가 하면, [Eternal Life]과같이 헤비메탈 스타일의 곡도 있다.

Mojo Pin
https://youtu.be/Svo7LZbnUVw

Grace
https://youtu.be/A3adFWKE9JE

Lover, You Should`ve Come Over
https://youtu.be/HxfE6PJmGS8

Last goodbye 

https://youtu.be/3MMXjunSx80

So Real
https://youtu.be/EcaxrqhUJ4c

Corpus Christi Carol
https://youtu.be/pRyHLrsqO0c

Eternal Life
https://youtu.be/7eiqlE98bPI
(앨범 자체가 명반이기에 전곡을 한번씩 다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의 노래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늘 사랑이었다. 가사 전체가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유행처럼 퍼진 염세주의를 거부했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마냥 행복하고 밝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이별을 포함한 사랑”이었고, “얻을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마냥 행복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냥 행복하지 않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버티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늘 양가적이다. 그렇기에 제프의 사랑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태도는 기쁨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사랑의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임에 가깝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면서 너무 슬픈 것처럼 말이다.

다음에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라캉의 사랑’의 쓴 장 알루슈는 그의 책에서 ‘사랑하기 혹은 사랑받기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스스로를 축축하지만 불타오름 없이 연소되는 장작으로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 시간, 청춘 [시가 필요한 시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문화&세상보기 [시가 필요한 시간] 입니다. 이 연재는 저자 마리횬이 선정한 시 두 편과, 함께 들으면 좋을 두 곡의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특히 호주 한인방송에 출연했던 마리횬이 직접 낭송한 시를 들어보면 시의 의미와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복잡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앞으로 2주에 한 번 마리횬이 안내하는 시의 오솔길을 따라 사색하는 여유를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시간, 청춘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시 좋아하세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쁘고 정신 없는 하루를 살고 있죠. 좀처럼 ‘나’를 위해서 쉬어줄 수 있는 시간을 찾기가 힘든 요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페이지를 읽는 시간만큼이라도 시 한편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차분히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의미로 시와 노래가 함께 하는 ‘시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코너를 기획해 보았는데, 어떠신가요?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시죠?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처음 시간인데요, 여러분께 들려드릴 주제는 ‘청춘’입니다.

     청춘(靑春)!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제목의 책도 생각나고, 요즘 같은 때에는 왠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말인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도전정신’이랄까? 뭐든지 시작해도 될 것만 같은 그러한 느낌이 불끈 솟아오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 중 누군가는 지금이 자신의 청춘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또 어떤 분들은 ‘아, 나의 청춘의 때는 이미 지나갔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그런 모든 분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의 시가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 울먼(Samuel Ulman, 1840-1924)의 ‘청춘’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맥아더 장군 덕분입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필리핀 마닐라에서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으로 근무했던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집무실에 이 시를 걸어 놓으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송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이 시를 오늘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는데요, 맥아더 장군도 좋아했었고 또 김대중 대통령도 좋아했던 시, ‘청춘’. 한 번 들어 볼까요?

 

청춘

                                       사무엘 울먼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장미 빛 뺨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에 달려있다.

 

청춘,

그것은 인생의 깊은 곳에서 샘솟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이다.

 

청춘은 스무 살의 청년에게도 예순 넘은 노인에게도 있는 것.

그 누구도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理想)을 잃어버릴 때에 비로소 늙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단지 우리의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고뇌, 공포, 자기불신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티끌로 만들어 버린다.

 

예순 살이든 열여섯 살이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경이에 대한 이끌림,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동경,

삶에 대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대와 나의 가슴 한 가운데에 어떤 안테나가 있어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그대는 영원히 젊으리라.

 

영감이 끊어지고 그대의 영혼이

냉소의 눈에 덮여 비관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비록 스무 살이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영원한 청춘이다.

 

네, 사무엘 울먼의 시 ‘청춘’ 읽어보았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라는 시의 첫 시작부터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지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에 비로소 늙는다는 말, 그렇기 때문에 예순 살의 노인이라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무 살의 청년일지라도 열정과 이상이 없다면 그는 청춘이 아니라는 이 시인의 말은 큰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에게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이 있으신가요? 여러분 마음 속에 불타는 열정이 있습니까? 유약해지려는 마음을 굳게 다잡을 수 있는 용기, 안일해지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모험심이 있나요? 지금 이 순간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을 붙잡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청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는 사무엘 울먼이 젊었을 때, 문자 그대로 ‘청춘’일 때 쓴 시가 아니에요. 이 시는 그가 80세가 다 되었을 노년에, 정확히는 78세의 나이에 쓴 시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시에서 말한 ‘80세의 노인이어도 청춘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춘의 힘과 열망을 계속 붙들지 않으면 아무리 스무 살이어도 늙은이와 다름이 없다는 시 구절은, 20-30대에게도 도전이 되지만, 혹 중년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메시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시인이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78세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말년에 정의 내리고 있는 ‘청춘’이기에 그 또한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이 시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곡은, 윤종신 작사 작곡의 김도향이 부른 <시간>이라는 곡이에요. <시간>은 2005년도에 발매된 곡인데,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에서 박재정군이 리메이크 해서 부르면서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곡입니다. 이 노래에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에 후회와 아쉬움이 있지만, 지나온 매 순간이 그러했듯 지금이 나의 최고의 시간이기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리라’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김도향씨가 이 노래를 예순 살의 나이에 불렀는데, 연륜이 담긴 그의 목소리로 이 노랫말을 들으니, 묘하게 사무엘 울먼과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꼭 한 번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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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청춘’이라는 주제로 함께하고 계신데요, 두 번째로 나눌 시는 유안진 시인(1941~)의 시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입니다. 앞서 사무엘 울먼의 시는 ‘우리 모두가 바로 청춘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었는데, 이번 시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요? 이 시는 뭔가 힘든 시기를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시인이 건네주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안진 시인의 시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듣고 오겠습니다.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유안진

 

고목(古木)도 젊어지는

오뉴월 초록 세상에는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신록을 따라 녹음을 따라

푸를 대로 푸르러 푸른 숨결 차 올라서

뜨겁게 달궈지고 거칠 대로 거칠어져서

도무지 겁나는 것이 없는

무더위와 폭풍과 장대비의

그 열정 그 광기 그 고통이 휘몰아쳐 줘서

젊음이란다.

 

꿈과 이상으로 밀고 가는 힘과 용기란다

지혜의 태반이란다

감당 못할 시련이란 없는 법이란다.

 

유안진 시인의 시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듣고 왔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만 같아 보이던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봄이면 꽃이 피고, 다 늙어버린 고목(古木)도 5월이나 6월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초록 잎으로 푸르러지죠. 매년 때가 되면 가지마다 나뭇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어 오르는 것을 보는데, 참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나무는 어떻게 그렇게 매년 다시 푸르게 피어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나무가 그냥 푸르러지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무더위를 늘 견뎌내기 때문에, 그리고 폭풍과 장대비를 늘 오롯이 맞아내기 때문에 다시 푸르러질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뜨겁게 달궈지고 거칠 대로 거칠어져서

도무지 겁나는 것이 없는

무더위와 폭풍과 장대비의

그 열정 그 광기 그 고통이 휘몰아쳐 줘서

젊음이란다

 

나무와 들풀이 태양의 뜨거움과 장대비를 맞아야만 다시 푸르러 지듯이, 곧 ‘청춘’이 되듯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떤 고통과 인내와 훈련들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기에 혹은 청춘이 되기 위해서라면 겪어야 하는 과정이며, 그런 것들을 ‘견뎌 내는 것’이 바로 ‘젊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비록 나이가 들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버텨내고 인내한다면, 다시 말해 ‘꿈과 이상으로 밀고 가는 힘과 용기’가 당신에게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청춘일 겁니다.

오늘 첫 시간으로 함께 해 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힘이 될 것 같은 노래, 이승렬의 <날아>라는 곡 준비했습니다. 드라마 <미생>의 주제곡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노래 들으시면서 또 하루의 ‘청춘’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청춘을 응원하며 오늘 첫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2주 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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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下) [톡,톡,씨네톡]

이 글은 2018년 5월 9일 이대 철학과 영화제에서 상영한 <토지와 자유>를 보고, 20분 정도 스페인 혁명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예스터데이’ 뒤풀이 자리에서 간략하게 토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

 

이규성(한철연 회원,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2. 무정부주의와 가장 현실적인 욕망

 

무정부주의는 원래 민중의 협동심과 공감능력을 믿는 성선설을 선호한다. 특히 개체의 자발성과 활력을 강조하며, 생명에 대한 외경심도 존중한다. 자발성을 누르는 모든 권력을 비난한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초월적 지배자나 권력 혹은 제일 원리를 의미하는 아르케(arche)를 부정한다는 反권력주의(Anarchism)를 의미했다. 이에 비해 레닌주의는 민중의 혁명성을 찬양하면서도, 자발성의 한계를 강조하고, 합리적 조직능력과 지도력을 갖춘 주체적 의식성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를 퇴행적 부패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토지와 자유》에 나오는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에는 두 이념 간의 사상적 차이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과도 교류한 한국 민족 해방군 일 천명{지도자는 대한독립군 총재인 大倧敎 宗師 서일(徐一, 1881~1921)}이 이르쿠츠크에서 공산주의 군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를 강요받아 교전 끝에 반절이상 사상자가 발생하고, 후퇴하는 중 만주 군벌 친일 마적 떼의 습격으로 거의 괴멸되자 자결한다.(자유시 사변).

 

스페인 내전은 1934년 선거에 의해 민주 세력이 집권하자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 가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 지원에 힘입어 일으킨 쿠데타로 시작한 내란이다. 우익 세력은 군부와 왕당파 및 스페인 가톨릭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모두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나치즘), 이태리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친화적. 이에 비해 민주 공화파(스페인 인민전선)는 개혁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코민테른 산하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으로 구성. 타국의 급진주의 행동가들도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국제여단을 구성. 사회주의자인 헤밍웨이도 기자이자 전투원으로 참전. 스페인 내전은 거의 모든 현대적 이념들이 각축하는 가운데,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혁명운동. 그것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2차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스페인 사회혁명의 중심에는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스페인에서 꽃피었던 신념의 추종자들, 곧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혹은 국가 없는 공산주의를 믿는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경찰, 왕실, 돈, 세금, 정당, 가톨릭교회, 사유재산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았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상호부조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본능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본능을 자유롭게 펼침으로써 공동체와 작업장을 민중이 직접 운영하면 된다고 믿었다.”1)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근대국가 폐지라는 무정부주의 이상을 채택하지만, 과도기로 설정된 당 중심의 국가체제를 인정한다. 혁명 초기에 레닌은 국유화를 통해 토지를 재분배하고, 시장경제를 용인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이를 자본주의적 길이라고 명명). 모든 평의회(소비에트)는 당 정치 위원회에 종속되어야 했다. 후에 국가 주도로 집단농장화를 강제 시행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목표를 이탈한다. 이에 따라 스탈린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당이 지배하고, 과도하게 정치화된 국가체제는 ‘전체주의적 관료주의’(트로츠키)를 닮게 되어, 급진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무정부적 혁명 이념이 물물교환을 인정할 정도로 순진하여, 복잡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실화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왜곡된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을 수정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스페인을 달군 뜨거운 혁명의 시대가 이처럼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부를 공유하고, 공장도 노동자들이 소유하며, 토지의 주인 또한 농민이고, 비록 아직은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방식일지라도 예전에 비해서는 한층 직접적이 된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요컨대 이상주의자들이 1세기 넘게 꿈꿔온 세계가 펼쳐진 시대였기 때문이다.”2) 소규모 연합체들의 연합체를 국가로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는 1910년대 이회영, 신채호, 유자명, 백정기 등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광복 이후 건국 방략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가 현존하고, 정치적 공포가 남아있는 한, 현실에서 완전히 주어질 수 없는 것일지라도 백일몽처럼 나타나 실천적 사상을 이끌어 갈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바다’의 푸른 정신을 가지고 반동세력(상어)이 뜯어 먹어 가시만 남은 청새치(이념)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강건한 실천을 상징하는 사자의 꿈을 꾼다. 현실적 실패는 있어도 이상을 향한 의지는 패배를 모른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메시지는 《토지와 자유》의 메시지와 유사하다. 《전쟁과 평화》에서의 톨스토이가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한 것도 초월적 지배 권력이 민중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진실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 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망은 조직 권력에 대한 충실과 분리된다.

사진출처: 다음영화 https://t1.daumcdn.net/cfile/151C254B4DB580F433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산하대지[山川]의 생명을 바탕 삼은 심성은 자유주의도 레닌의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민중적 생명 공생주의를 지향한다. 친일파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아 무상으로 재분배하는 서희를 통해 땅은 재물이 아니라 상생을 위한 일시적 공유물이라는 동학사상이 재천명된다. 생명의 사회적 실현[氣化]은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생명주의 윤리이자 불교적 연민을 현세에서 구현하는 심미적 진실이었다. 恨의 정서는 악행으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부정당한 인생을 다시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진실을 품은 긍정의 정서이다. 이 또한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의 생명 사상과도 상통한다. 유토피아를 향해 진격하는 세르반테스의 행동주의 정신인 돈키호테도 대지 품에서 공생하던 황금시대를 꿈꾸고, 그것을 부분적이나마 실현하는 제자 산초 판사를 남기고 죽는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산초 판사들이라 할 수 있다.

 

장발장의 고난과 사업을 통해 자본주의의 윤리적 책무를 강조하는 빅톨 유고는 레미제라블의 1장에서 라이프니츠와 같은 카발라적 생명철학으로 ‘지렁이와 소크라테스의 동일성’을 설파하고, 민주 공화파의 정치해방과 사회적 연대성을 옹호한다. 초인의 초월성[차이성]만을 본 니체와 하이데거는 다수성과 평등한 동일성의 진리를 대중적 가축 떼의 사상으로 폄하한다. 이에 비해 동학의 초인은 민중의 고통과 같아지는 내재적 동일성을 실현한다. 즉 생명에 대한 내적 자각과 세속성의 분별을 극복한 내외(자아와 세계)의 통일성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인위적으로 고립시킨 자아의 자명성에 근거한 철학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한다>는 민중적 지성을 발전시킬 필요성이 나온다. 스페인 내전기의 공화파의 자유를 향한 욕망은 부조리한 현실에 사는 모든 사람의 ‘희망’(스페인 내전을 다룬 앙드레 말로 소설의 제목)이다.

 

1905년 러시아 2월 혁명 전의 짜르 체제에서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을 유대인에 전가하는 상황에서 무고하게 살인자로 몰린 야콥 복(Yakov Bog)의 재판과 저항을 그린 소설 《수리공The Fixer》(국내 번역: 김재현 옮김, 〈키에프의 신화〉, 한신문화사, 1987. 광주항쟁 직전에 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음)은 스피노자 철학을 밤 세워 읽고 자신의 수난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적 변화를 경험한다. 정치적인 것을 자신과 관계없는 특정 인간에 한정하던 이전의 비정치적 관점이 아무도 정치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인간 조건을 인식하게 된다. “모두가 유대인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존재로 변화하여, 저항의 길을 가는 자유의 꿈을 꾸게 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의 전신인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신체적 욕망이 공포와 슬픔이라는 수동성에서 기쁨이라는 능동적 구조로 변화되고, 아울러 이성을 통해 타인과의 유익한 관계를 확산해 가는 관계의 사상을 인식함으로써 자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설파한다. 공포와 슬픔은 폭정과 이를 축복하는 종교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리스 유물론을 시로 표현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6~55)의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우주는 생명의 여신 비너스의 령으로 충만한 생명계임을 주장, 원자들은 그 안에서 존립)의 기본 주장이며, 이 명랑성의 회복은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인성론의 목표였다. 야곱 복은 감옥 속에서 자신의 내적 변화의 귀결을 간수장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의 목적은 타인을 위해 자유를 창조하는 것이다(The purpose of freedom is to create it for others).”(《The Fixer》, Penquins Book, p. 286. / 〈키에프의 신화〉, 304쪽). 이제 철학은 자유에의 욕망을 도덕적 양심의 근원적 실재로 보는 관점을 우리의 역사적 교훈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거지도 발로 차면서 발을 주면 받지 않는다 했다. 이 부정의 의지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 현실일 것이다.

 

【참고】 로베스피에르는 개인들의 정치적 자유의 이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적 사회관계에서 농민과 노동자는 엄연히 노예상태로 존속했다. 사회주의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당시의 경제적 사회관계가 민주주의의 대의에 심각한 장애가 되며, 평민이 상공업자의 지배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 혁명은 군사독재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가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단두대로 사라진 다음, 귀족과 대 부르주아가 지배력을 회복하게 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예언은 들어맞게 된다. 그의 사후 이를 깨달은 사람들이 생기는데 바쿠닌과 같은 무정부주의자,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동영역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갖는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사회 이상(사회주의)을 <경제해방> 혹은 <사회해방>으로,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정치해방>으로 하는 두 해방의 이념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민주화를 목표로 갖는다. 전자는 기존 사회주의의 장점을 발전시키고, 후자는 기존의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성취한 민주주의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사회적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구체적 민주주의로 불렀다. 레닌도 그것을 사회 민주주의로 불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민주주의를 진부한 부르주아 사상으로 몰고, 사회주의와 대립시키는 왜곡이 일어나 양자는 분리되게 되었고, 사회 민주주의는 유럽의 점진적 사회당의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 퍼진 레닌주의는 경제해방과 정치해방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론과 당 조직론을 더 한다. 그러나 이 레닌주의 체제는 파리코뮌의 자유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근대국가인 억압적 기계 장치로 보일 수 있었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중국혁명사에서도 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의 민주주의 요구는 우경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오늘의 시진핑 체제에 이르기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무정부주의 전통이 강한 카탈로니아 지역과 그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는 무정부주의와 러시아와 연결되어 조직화되어 있는 공산주의자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말은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공통된 것이지만, 레닌주의는 당 권력의 군사적인 수직적 합리성에 대한 신앙 때문에 물리적 혁명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국가 권력형 범죄를 양산했다. 레닌의 사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고한 관료주의 국가 범죄 때문에 정신적으로 패배한 이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코뮌은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불렸는데, 위로부터의 조직화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민간 급진주의가 문화혁명 기간에도 나타났다. 모택동과 보수적 당권파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민간 급진주의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시회주의에 이르는 과도적 단계로 활용한다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따르는 현 중국 체제는 유교부흥 운동과 결합되어 관료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심각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역시 정치민주화를 넘어서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의지는 자유에의 욕망을 가진 개인들의 연합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1) Adam Hochschild, 이순호 옮김,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갈라파고스, 2016, 80쪽.

2) 위의 책, 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