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와 정신분석 9-숲[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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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9- 숲

 

30년대 호퍼는 여행 중 갈 길을 잃은 채 멈추어서 자기 속에 파묻힌 여성을 그린다. 또한 이 시기 그가 그린 많은 그림에서 숲이 등장한다. 이 숲은 집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마치 집을 뒤덮을 듯 무시무시하다. 집의 안 밖에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자기들 뒤에 숲이 덮쳐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언뜻 보면 평화롭게 보인다.

이 그림은 1939년 그려진 ‘케이프 코드 저녁’이라는 그림이다. 케이프 코드는 호퍼가 자주 여행 갔던 바닷가인데, 이 그림에서 호퍼가 청교도적 집이라고 했던 집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있다. 두 남녀는 호퍼와 조를 연상시킨다. 여성은 살 집이 있는 두툼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다. 남자는 다음에 소개할 것이지만 고독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가운데 개와 더불어 마치 성상에서처럼 안정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남자는 개에게 무엇인가를 던지면서 개와 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운데 개는 마치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다. 여자는 남편이나 개를 바라보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어둡고 푸른 숲이 군사처럼 집으로 다가오고 있다. 머지 않아 이 숲이 고요한 그들을 집어삼키지 않을까 두렵다.

 

2)

이 시기 호퍼가 그린 여러 그림에 공통적으로 저 으스스한 숲이 등장한다. 위의 그림보다는 좀 이른 1935년 그려진 그림 ‘황혼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에서는 앞의 그림에서 집과는 다른, 마치 공공건물로 보이는 집이 등장한다. 양식상 제국주의 시대 건물로 보이는 이 건물은 석조로 이루어져 위엄을 자랑한다. 여러 창문이 열려 있고 어떤 창문에서는 여인이 창문 아래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앞의 그림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는 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으나, 아직 그 정체는 알려지지 않아 오히려 평화롭게 보인다.

어떤 창문은 열려 있지만 불이 꺼져 있다. 그림의 정면에 나오는 창문은 아마 거리 풍경을 반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모습인데, 이제 저녁 노을의 바랜 노란 색 빛이 비치고 있다. 그 빛은 약간 감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집 너머에 어둡고 푸른 숲이 다가오고 있다. 그 으스스한 그림자는 오른쪽 계단을 내려 걸어 올 것 같다.

 

3)

이 시기 그려진 호퍼의 그림에서 집을 덮쳐오는 숲은 여러 해석을 낳는다. Renner는 호퍼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면서 호퍼의 그림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상의 두 그림에서 집이 문명을 의미한다면 숲은 자연을 의미한다. 이런 해석은 호퍼를 루소적인 자연을 동경하는 낭만적 화가로 그려낸다.

역사적 해석도 가능하다. Schmit는 이 그림이 1930년대 미국을 덮친 공황의 우울함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호퍼가 미국의 자화상을 그려낸 사실주의적 작가로 설명한다.

하지만 렌너의 경우 숲이 지닌 으스스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슈미트의 경우, 공황이 덮친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로운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집을 덮쳐오는 숲은 호퍼 자신의 욕망 구조를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 그림들은 같은 시기 그려진 고독한 여인의 모습과 함께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시기 호퍼의 욕망 구조에서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20년대 호퍼의 욕망 구조는 신경증적인 상태에서 상상적 동일화의 상태로 변형되었다. 다시 이 시기 호퍼의 욕망 구조는 라캉이 실재계라고 말한 심적 구조로 변화한다고 볼 수 있다. 덮쳐 오는 숲, 긿을 잃은 여성의 고독은 이런 실재계적 증상의 표현으로 보인다.

 

4)

이 으스스한 숲은 호퍼의 그림에 긴 여운을 남긴다. 1940년 그려진 ‘주유소’라는 작품을 보자.

이 그림에서 인적이 드문 길 가에 작은 주유소가 있다. 주유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인물은 넥타이까지 맨 단정한 모습인데 집의 크기에 비추어 보면, 이게 정상적 인간의 크기이다. 그는 머리가 벗겨 있고 약간 피곤하고 늙은 듯한 꾸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도로는 주유소 앞을 바싹 다가가 지나치고 있고, 하늘은 아직 밝지만 이미 저녁의 황혼 빛이 거리를 덮치고 그 거리를 다시 벌써 어둠에 잠긴 으스스한 숲이 거리 자체를 뒤덮고 다가오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주유기다. 거의 집의 높이 만한데, 정말로 저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호퍼가 분명 과장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주유기의 붉은 색깔은 거의 도발적일 정도니, 언뜻 보아도 팔루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주유기의 모습과 대응하는 것은 집 속에서 비추어지는 아주 밝은 빛이다.

이 그림에서 덮쳐 오는 으스스한 숲에 대해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이 붉은 주유기기 밝은 빛에 싸여 있다. 1920-30년대 그림에서는 이런 저항적인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1910년대 초 우람한 다리에서 보았던 과잉적인 분위기가 되살아 나는 것 같은데, 그때처럼 신경질적인 모습은 아니다. 이미 무언가 내적 힘이  호퍼에게 찾아온 듯한 분위기이다.  이런 변화는 40년대 들어 호퍼의 그림 속에 뚜렷하게 등장한다. 그런데도 불구하여 여전히 30년대 초에 그려진 으스스한 숲이 덮여 오는 듯한 모습의 흔적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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