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에 하나 [천 하룻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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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2023, 11, 08, 입동(立冬)

     요즘 입말로 밥 먹기 전에도 길거리에서도 중얼 거린다. 세월이 흐른다. ‘평화통일 영세~ 중립코 리아~’(11자)라고. ‘나는아무 것도~ 하지않 겠다~’(11자)는 바틀비가 웅얼거리며 세상을 향해 뱉어낸 내밀한 무의식적 무의미(파라독사, 염불)가 아니다. 세상에 아무도 이 말을 주목하지 않는 점에서, 무(無) 또는 공(空)과 같다고 충고들 한다. 아니야, 그래도 이 입말을 리토르넬로(반복)처럼 중하게 여기지는 아닐지라도 한 번쯤은 반복적인 염불을 외는 이들이 있을거야. 그래 그 사람들이 만에 하나라도 매우 소중하고, 그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후렴처럼 계속하는 반복에서 혁명이 있다니까. 그 반복은 동일반복이라기보다 이질반복으로 흐른다. 그 혁명은 없는 것 같은 공집합(φ 피)에서 나온다. 그 공집합에서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우리나라에도 만에 하나, … 그러니깐 8천만명에 8천명이 되다니, 놀라워서, 만에 하나 상호소통과 공감을 리토르넬로로 ‘평화통일 영세~ 중립코 리아~’.

  만에 하나란, 길거리에 1천만 서울시민에게 한 종이비행기를 날리면 그 비행기에 맞을 확률이라고 치면, 천 명이나 된다니. 이런 논리가 세상에 적용되다니. 초월자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다니. 이런 사고에서는 점(點)과 같은 사고를 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점, 그것은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볼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문제가 아니라도 그러한 점은 차원이 없다. 선이 일차원이고 면이 이차원이라 한다. 그럼에도 점처럼 사고하는 것을 빗대어, 볼 수 없는 것임에도 원자처럼 사고하는 것을 유물론이라고들 하는데, 왜 벩송이 볼 수 없는 점(원자)을 상정하는 것을 통속적 유물론이라고 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벩송에 대한 오독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추억들”과 “기억”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억들은 원자들과 유비로 쓴 것이고 기억이 실재성이며 흐름이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소크라테스를 현실적으로 또는 사건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했던 이들은 플라톤도 크세노폰도 아니라, 퀴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라고 한다. 그는 헤라클레스를 모범으로 삼는 시나고르게스 학교를 나와 걸승처럼 흘러서 살았다. 이 퀴니코스학파를 중요하게 여긴 프랑스 철학자는 푸이예 였고, 벩송은 플라톤주의와 달리 소크라테스 계승자로서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노스를 이야기하듯이, 푸이예의 소크라테스를 이야기 한다. 이 퀴니코스학파는 ‘개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는 이들은, 마치 점이 현존이라고 사고하는 요상한 사람들이며, 점은 존재이며 현실을 사는 이를 개돼지 취급하는 극우들이다. 철학사를 잘 읽지 못해서 퀴니코스 학파를 비하 또는 빨갱이 악마로 만든 것이다. 점을 숭배하는 이들이 철학사를 잘못 읽었다고 들뢰즈가 한탄하지 않았던가. 벩송은 전도된 철학사였다고 했다.

    퀴니코스를 이어 초기 스토아학자들은 철학의 어려움을 다루면서 제기한 문제거리로서, 볼 수 없는(l’invisible) 것이면서도 현재하고 있는 것이 셋 또는 넷이라 전했다. 우선 시간이고 그만큼이나 공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자이고(스토아학자들은 통속적 유물론을 그나마 인정해준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첨가할 수 있다면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문제 삼았던 프쉬케(영혼)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야 보고 느끼고 만지고 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철학사에서 모든 철학자들의 반찬거리처럼 등장하였지만, 철학사적으로 주식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철학자는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거의 없었다. 그런 이유는 점의 유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는 점이 한편 공이고 다른 한편 공은 곧 색이라고하며, 대중의 사유를 꼬이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나름의 이유(la raison)가 있었다. 유학은 신유학에서 태극이니 무극이니 하면서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도덕과 현세에서 적용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초월자를 현세에 적용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문제는 태극 즉 무극에서,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라기보다, 잘 모르는 것에서 알아가면서 있는 것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는 사유일 것이다. 다음으로 ‘양은 있는 것, 음은 없는 것’으로 분할을 현실로 삼게 되면 주역 자체가 무너질 것이다. 둘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교대와 변화의 관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묘하게 불교에 가까이 가는 것 같지만 유교는 시간과 공간에 연관이 많고, 불교는 영혼과 기원에 더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어째거나 현실 또는 현존하는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학은 사건의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고의 논리 끝까지 탐구하여 기를 원리로 삼던, 리를 원리로 삼던, 둘 사이에 구별(차이)을 분할의 방식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표면의 철학이다. 그럼에도 슬그머니 무는 사라지고 변화의 복잡성을 차이(차히가 아니다)로서 64개를 분할(구별)하고 거기에 다양한 의미와 개념을 부어넣었다(한자를 알아도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제각각이다. 서양 말로 파라독사들의 잔치인데, 너무 복잡하여 마치 실증적으로 대응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의미 있는 것 같기도 하게 여긴다). 이에 비해 불교는 없는 것 같으면서 있는 것 같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이라는 상호변전 또는 상호침투 같은 것을 인정하면서도, 분할이 없기에 각각이 없지만, 말로 하는 “찰나”에는 분할의 각각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자아(영혼)은 각각이 있지 않고 흐르니까, 각각을 말하는 “순간”에도 각각의 실질적 사태 또는 현상으로 다루기보다, 이어지며 흐르는 의식의 흐름을 다루려 한다. 둘이 아니라, 넷이 아니라 하나인데, 벩송도 말하듯이 찰나가 아니라 순간 지속이 있듯이, 진여의 흐름이 있다. 뭔가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또는 표현할 수 없으면서도 삶은 변화와 변전, 생성과 창조를 이루며 흐른다. 둘도 하나도 아닌 것, 불립문자, 개구즉착. 그리스 철학의 볼 수 없는 것(l’invisible)의 문제제기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이 문제는 서양 철학사가 어느 정도 전개되어 하나(존재)와 그에 대립으로 무(비존재)를 설정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철학사는 무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인데 비해, 신앙에 물든 자들은 무를 인정해야 논리적(로고스) 사고를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착각을 벩송이 첫째 착각이라 한다. 그러나 무는 없다. – 이점은 불교도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 그럼에도 하나의 대비로서 무는 왜 나오는가? 착각이 환상을 낳고 환상이 망상을 그리고 파라노이아를 낳는다.

   하나를 성립시키는 논리 방식에서, 여럿 속에서 하나는 뽑아내는 즉 추상하는 방식으로 나온 ‘하나는 있다’가 아니라, ‘하나는 이다’라는 것이다. 즉 추상의 하나는 현실과 실재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신앙자들은 그 하나(1)가 없으면 삶의 편리와 안전은 없어 진다고들 한다. 그들은 하나가 흐른다고 하면, 무엇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대상화에서 일반화의 방식이 나오고 일반화에서 개념작업이 그리고 개념작업을 통한 개념들에서 추상의 상징(대상)이 나오며, 이를 이데아라고 하던 에이도스라고 하던 간에, 그 상위의 상위 것은 “있다”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그 논리적 사고의 의미에서 추상은 있다가 아니라 ‘이다’이다.

   언어학에서 소쉬르가 입말에서 들리는 “기표”와 들은 것의 사유 속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의”를 설정했을 때, 기표와 기의는 사물의 실재성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개념과 상징으로서 구축된 관념(초월이라고 하든, 신이라고 하든)은 자연의 실재성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추상 또는 상징은 있다(existence)가 아니라 ‘이다(etre)’이다. 이 ‘이다’에서 ‘일 이다’ 모순의 개념화작업이 ‘일 아니다’이다. 일 있다와 일 없다는 논의도 실증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있다와 없다로 담론, 시론, 논증, 논리로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논리 적으로만 ‘하나’ 그 외의 것은 ‘아니다’ 이다. 그런데 ‘아니다’가 ‘없다’로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아니다와 없다는 전혀 다른 사유이다. 나로서는 이다 아니다는 사고(차이)에서 있다 없다는 사유(차히)에서 다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다는 맞고(진리), 없다는 틀렸다(비진리)라는 이들은 더욱 심각한 광기 즉 파라노이아에 빠진다.

   ‘이다’와 ‘아니다’는 간단히 말하면 책 이다와 책 아니다 에서, 책이 아닌 것은 책인 것보다 무수히 또는 거의 모든 것(나무, 구름 등등)이다. 즉 아니다에 속하는 것이 훨씬 많다. 그러면 ‘이다’를 ‘모든 것이 이다’고 하면, 아니다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전부다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이다’를 ‘모든 것이 있다’로 바뀌는 것을 아날로지(유비)라고 부르자. 아날로지(유비)는 이다와 있다의 차이를 연관시켜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다와 있다는 아날로지라기보다, 빗대어 겹치는 알레고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볼 수 없는(invisible) 것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아날로지 또는 여러 파라독스라 치더라고, 그 대상이 있다고 바뀌는 것은 알레고리일 것이다. 유비는 닮은 점(동상)이 있다고 여기는데 비해, 비슷함(상사)에는 전혀 다른 차히라는 것이다.

    하나를 전체로 규정하는 경우는 하나를 무한으로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날로지가 아니다. 하나와 무한은 전혀 다른 차히를 지니지만, 둘 다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오류이다. 여기에서 철학이 고민하였다고 할 때, 어떤 흥미를 느끼는 집단이 고민하지 말고 하나가 곧 전체야 무한이야 면서 변증법적으로 되는 거야라고 한다. 이 집단의 사고는 알레고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집단이 전체인 하나를 신으로 여긴다. 말그대로는 자연이 즉 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다를 있다로 바꾼 이는 상징의 대상의 하나를 있다로 바꾼 것이다. 이 기이한 집단에게 고대철학을 제외하고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자들이 질식할 정도로 이어져 왔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이다.

   이런 관점이 기원후 2-3세기에 참주(황제)에 빌붙어서 주도권을 가지려하면서 요상한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왜 철학은 이런 요상한 집단에 밀려서 답하지 못했을까 하는데,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황제(참주) 권력에 짓눌려서 밀려난다. 다른 하나는 종교의 권세가 미래의 죽음이라는 공포를 심으며 억압했을 때 굴복하였다. 다른 하나는 진리의 논법이 1+1은 2이라는 이다의 논리에 대해 생성으로 대꾸해 보았자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 상식의 논리에, 실재성의 사유는 거의 질식할 정도로 지내게 되었다. 이 셋째는 그래도 끊임없이 이의 제기를 여러 번 하였지만, 번번이 황제의 권력과 종교의 권세에 밀려났는데, 예를 들어 세네카에서 있었고, 브루노에게 심했고, 갈릴레이에게 약과였다. 논리의 교육과 사변(거울효과)을 통해 권력과 권세의 편에 붙어서 암묵적으로 봉사하면서, 권위를 누리는 쪽을 택한 것이 진리는 하나라는 보편학의 양식을 추구하는 길이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사이의 갈들을 보면 그러하다. 결국은 보편학이 종교 편에 붙는다. – 벩송이 보기에 스피노자가 보편학으로 갔다면 라이프니츠가 숨통을 열었다고 본다.

   하나가 있다가 아니라 이다라는 문제제기 하기에는 각 학문들의 실증적 발달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역부족이었다. 들뢰즈 표현으로 자연의 생성과 자발성의 견해는 “질식”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파라노이아에 대해, 들뢰즈와 과타리의 스키조를 얼마나 비하시킬려고 앞장섰서 세계를 돌아다녔던 지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이라는 하나의 항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고, 2의 항에는 4가지 경우가 있고, 3의 항에는 8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요즘 MBTI도 8가지 경우를 인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미 19세기 말에 있었던 상징적 분할의 규정들이며, 이 논리적 규정에서는 자연 즉 피(φ)가없다. 또 다시 상식이 자연을 질식시키는 논법이 유행하는 듯하다.

이를 4상과 8괘에 붙여보면 간단히 아날로지가 성립한다. 전통의 유학에서 3천년을 이어온 것은 사물과 인성의 갈래(분류)들과 변화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인데, 그 내용을 한자로 읽지 못하는 세대에 성격학이 인성을 해명해주거나 규정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8가지 성격규정이나 8괘에는 이다의 논리에서 전개되었던 무가 없다는 점에서 권력과 권세에 아부했던 권위들이 했던 점과 닮았다. 8가지 분류를 수학적으로 보면 7가지는 개별적인 것이 있고 하나는 공집합이다. 그 공집합(φ피)이 실재한다고 여기면서 러셀을 수학의 여러 파라독사를 전시했다.

    다시 하나로 돌아와서 1과 φ집합에 대한 로고스 논리를 누스 사유의 측면에서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논리학상으로 1은 대상이 되고 φ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볼 수 없는(invisible) 어떤 것(φ)을 무화시켰다. 있다의 누스 사유에서는 둘 다 현존한다. 관심있는 대상(1)이 있고 관심없지만 현존하는 여러 지각작용들(φ)도 있다. 다시 말하면 몸을 지닌 자아가 있고, 자아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과정은 볼 수 없지만 현재에 내재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말한다. 보이는 것으로 신체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영혼이 있다면, 거봐 보이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철학이 되느냐고 한다. 영혼은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두뇌의 신경(AI)이 그 자리로 들어설 기세이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짓눌렸고 근세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던 누스의 사유에서 보이지 않는 것(l‘invisible, 엥비지블)을 철학의 전면으로 올린 철학자가 벩송이다. 그래 일과 같은(아날로지 상) 것으로 원자도 ‘엥비지블’하다. 공간과 시간도 엥비지블하다, 영혼도 엥비지블하다.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이다. 그 하나가 다양체이라 한다.

    지구는 하나다 조국은 하나라고 할 때, 현존하는 실재성으로 지구와 조국은 하나이고 자아(영혼)도 하나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토아학자들의 유물론은 이런 하나라는 전체가 인간의 지성으로서는 다 알 수 없지만, 흐르고 변전하지만, 예지(누스)로서 파악하면, 있는 것(현존)이고, 이 현존에서 생명, 숨결이 나오는데, 그 갈래에 따라 각각의 사물들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하나를 우리는 온(전부), 환(환하다)현존이라 한다. 환(온)은 그 자체로서 다양체이며, 움직이고 있고 시간에서 흐르고 있다. 우리가 다 볼 수 없고, 다 생각할 수 없지만, 환은 현존한다. 지구의 사실들을 보자, 지진, 태풍, 엘리뇨, 온난화 등은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도 현존하는 삶의 상태에서 여향을 주고받으며 부딪히며 느끼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간다. 어느 때는 상호침투하고 어느 때는 배격하기도 한다. 자연이 배격하는 것은 잔인하고 냉정하다(들뢰즈가 말하는 자연 즉 여성이고 영혼 즉 여성이며, 페미니즘이다). 자연 살아있을 때 즉 생을 같이 할 때 상부상조로 온화한 것 같지만, 자연이 데려 갈때는 잔인하고 냉정하다. 누구는 봐주고 어느 인간을 살려주는 것이 없다. 자연이 온다양체이며, 생명이 환다양체이명 영혼이 다양체이다. 이것이 질료의 자기 변화이며 자발성이다. 이 다양체가, 요즘말로 화산과 지진, 날씨와 생태계 이상으로 복잡계이다.

    지구 또는 우주의 온다양체에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명(삶)은 환다양체이다. 다양체의 속에서 서로 상호침투하고,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체와 까마라드리(동지애 또는 휴마니떼르)를 만드는 것이 인류의 살아가는 양식이 아니겠는가. 허리 잘려서도 아프지 않고, 가보지도 않고서 하나가 맞다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는 권력과 권세, 그리고 그것에 침을 바르고 글을 쓰며 학문한다는 권위에 대해, 다양체는 무관의 제왕(들뢰즈 용어이다)이다. 그 속에서 인민이 토대이며 최종심급이다. 인민의 권리가 공집합의 자연 권리와 같기에 경우의 수들을 교정할 수도, 수정할 수 도 있고, 권력을 끌어내릴 수도 있고, 권세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 인민이 자연(nature 본성)으로부터 자연 권리를 지니고 있는 실재성이고 현실성이기에 저항 항거, 항쟁, 혁명은 자연권(le droit naturel)이다. 한편으로 자연은 상부상조와 공명으로 따뜻함과 은총으로 살게, 다른 한편 자연은 냉정과 잔인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인민도 파라노이아 정부도 자연사의 흐름을 느끼게 될 것이다.

(3:34, 56VKE) (4:05, 56VKF) (5:06, 56VKH)

• 덧:

영혼, 그리스어 프쉬케(ψυχή)가 로마로 넘어오면서, 아니무스(animus, 남성형)와 아니마(anima, 여성형)로 바뀌고, 라틴어에서 아니무스는 정신으로 아니마는 영혼(l’âme, 여성형)으로 쓰인다. 그리고 아니무스는 정신(l’esprit, 남성형) 또는 성령으로 유비적으로 바뀌면서 유심론으로 이어진다. 영혼은 정신에 밀려나 질식하지 않고 물질성(아페이론, 휠레)에서 나온 것으로 유비적으로 유물론과 나란히 간다. 이로부터 상층의 지배와 심층의 무화 또는 결핍(나아가 악마화, 빨갱이화, 그나마도 19세기 후반에 눈치 챈 이가 니체이다)으로 여긴 것은 플라톤주의를 유일 신앙자들이 왜곡한 것이다. 따라서 상층의 권력, 권세, 권위의 패거리를 만들면서, 상층의 하나가 있다고 하고 심층의 하나를 비하시켰고 마남사냥을 서슴없이 행했다. 인민이나 여성이 당연히 자연처럼 비하되었고, 악마화되었다(페미니즘은 자연으로부터, 생성으로부터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벩송은 아니무스(남성형)의 철학이 아니라 아니마(여성형)의 철학을, 형상(관념)이 아니라 질료(물질)의 철학을, 정신이 아니라 영혼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 자연(하나, φ피)과 신(하나, 1) 중에서 자연의 자발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사유로서 – 19세기 전반에 생물학, 후반에 의학, 심리학의 성립으로 – 자연 즉 유물론이 전개될 수 있음을 알렸다. 사람들은 벩송을 유심론(spiritualisme)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자연 권리(자연권)로부터 사유해야, 생태계, 여성주의, 인민의 사유로서 창발, 창조가 나오고, 이런 창조가 자유이다. (56VKF)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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