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미학산책6-기호로서 예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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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미학산책6-기호로서 예술

 

1)

예술론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축은 모방이냐, 창조이냐 하는 축이다. 리얼리즘은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모더니즘은 예술은 환상을 창조한다고 본다.

이와 교차하는 또 하나의 축은 객관적 미학과 주관적 미학이다. 객관적 미학은 미적인 것이 자연적 성질이나 관계처럼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주관적 미학은 미적인 것은 욕망의 만족에서 얻어지는 쾌감과 구분되는 일종의 쾌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축을 긋는다면, 그것은 인식이냐 표현이냐 하는 구분이 될 것이다. 예술은 진리를 감각적으로 발견하는 것을 통해 성립한다고 보는 인지론자가 있다면, 미는 정신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 수단이라고 보는 표현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예술론을 세 가지 축으로 구획할 때, 예를 들어 칸트의 미학은 미적인 것을 주관적 감정에서 끌어내려 했다.[1] 반면 고전주의자 쉴러는 실재하는 조화와 균형이 미적인 것이라고 보는 객관적 미학자이다. 19세기 리얼리즘은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으로 보지만, 20세기 초 표현주의는 미란 진리를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볼 것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미는 존재의 진리를 직관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니, 전형적인 인지론자가 된다.

 

2)

헤겔의 미학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는 평면의 어디에 속할까? 많은 해석자는 헤겔이 실재론자나 인지론자에 속한다고 본다. 즉 이념은 감각적 작품에 실재하면서 미적 이념이 되며 우리는 직관을 통해 미적 이념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미적인 직관능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 직관능력은 이념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헤겔의 철학 어디에서도 감각적 경험과 다른 어떤 본질적 직관 능력을 가정하는 것을 볼 수 없다.

더구나 작품 속에 미적 이념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작품의 질료는 물질의 법칙에 지배 받는 것이니, 미적 이념이 실재한다면, 작품의 형식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념의 실재, 즉 그 속에 이념이 내재하는 형식이란 어떤 것인가? 결국 쉴러와 같이 조화와 같은 고전적 형식을 들 수밖에 없는데, 고전주의 시대 특히 조각 작품을 제외하고 다른 시대, 다른 예술작품은 전혀 그런 형식을 가지지 않으니, 그 모두를 예술작품에서 배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그 모두를 포괄하는 예술론을 전개하려 하니 이념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3)

이상 보듯이 헤겔을 실재론이나 인지론의 미학 평면에 집어넣기는 어렵다. 헤겔은 예술작품은 이념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예술은 이념을 표현함에 있어 사유와 순수한 정신성 일반의 형식으로가 아니라 직접 볼 수 있도록 감각적 형상으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를 가진다.”[2]

위의 구절에서 헤겔이 표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주목하라. 또한 그 표현의 방식은 구체적으로 상징이나 현상, 가상 등 기호학적인 방식이다. 예술작품 속에 이념을 파악하는 방식 역시 기호에 대한 독해적 방식이니, 이점과 관련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히려 그것은 본질적으로 물음이며 반향하는 가슴에 건네는 말이며, 심정과 정신에 던지는 외침이다.”[3]

여기서 ‘물음’이나 ‘말’, 또는 ‘외침’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자. 말이라는 단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이런 단어들은 모두 기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문학뿐만 아니라 건축이나 조각, 음악, 미술조차도 하나의 기호이다. 예술작품은 그 속에 심정을 그 의미로 담지 하고 있는 기호이며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정신은 예술작품이라는 기호를 언어적으로 독해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로서 심정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심정에서 심정으로 전달된다.

이 점은 예술이 가상이라고 할 때 그 의미에서도 충분하게 드러난다. 가상[Schein]이란 자신을 통해 다른 것이 빛남으로써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은 곧 그것이 이 다른 것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개별적 형태가 고요 속에서나 운동 속에서 전개하는 빛남[가상성: Scheinen]을 다룬다. 반면 아름다움은 욕구의 만족을 위해 합목적적이라는 사실이나,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것[Sichbewegen]에서 등장하는 전적으로 개별적인 우연성과는 무관하다.”[4]

 

4)

헤겔을 이처럼 표현주의자의 미학적 평면 속에 위치시킬 때 헤겔이 왜 자연미에 대립하여 예술미를 옹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의 다채로운 깃털은 보지 않아도 빛나며, 그 노래는 듣지 않아도 울려 퍼진다. 또한 단 하룻밤 꽃을 피우는 선인장은 그 누구의 찬미도 듣지 못하고 남쪽 지방 숲의 야생에서 시들며, 이 수풀 매우 달콤하고 황홀한 향기를 지닌 극히 아름답고도 울창한 식물군으로 이루어진 정글 자체도 역시 즐기는 사람 하나 없이 썩고 시들어 간다.”[5]

사실 자연(심지어 여기에는 인간의 현실까지 포함된다) 속에서 자주 규칙적인 것, 균형적인 것, 조화로운 것, 생동적인 것, 합목적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주의 미학자는 이런 것들을 미적인 것의 실재로 간주한다.

헤겔이 이를 자연미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이것이 미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헤겔은 이런 자연미가 예술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제 그 이유를 들어보자.

우선, 자연 속에 내재하는 미적인 것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즉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한 그것은 어떤 다른 것의 기호가 아니며, 예술을 이념의 기호로 간주하는 헤겔에게서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물론 예를 들어 시인이 자연 속에 들어가 그 생동적인 아름다움을 신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예술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자연 자체가 예술이 아니라 시인의 눈에 그런 자연이 예술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6]

또한 헤겔에서 예술은 무한하고 자유로운 것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자연 속에는 조화로운 것, 생동적인 것을 넘어 심지어 합목적적인 것조차 출현하지만, 자연에서는 동물적 삶에서 보듯이 아직 무한하고 자유로운 것이 출현하지 않는다. 무한하고 자유로운 것은 즉 자기 관계하는 것[대자적인 것: fuer sich] 다시 말해 자기를 타자화하고 이 타자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은 인간 정신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만이 자기를 자립적인 대상으로 실현하기 때문이다.[7]

인간의 정신이 이처럼 무한하고 자유로운 것을 산출할 수 있으므로 오직 인간에게서만 예술이 출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기호가 된다는 것 즉 다른 것의 가상이라는 관계는 이와 같은 무한하고 자유로운 정신의 활동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5)

예술에 관한 헤겔의 기호적 독해는 유명한 비유를 낳았다. 헤겔은 플라톤의 아래와 같은 시구를 인용한다.

“그대가 별을 볼 때, 오 나의 별이여, 나는 하늘이 되어 수천 개의 눈으로 그대를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면”[8]

여기서 플라톤은 자신의 애인을 수천 개의 눈이 되어 바라보고 싶다고 하는데, 헤겔은 예술을 이런 수천 개의 눈에 비유했다. 왜냐하면 눈이 곧 영혼이 드러나는 기관이고 눈을 통해 그의 영혼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거기서 이념이 드러나며 그것을 통해 이념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미적인 것이 실재한다는 입장에서는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보다는 자연 자체 속에 진정한 의미에서 미적인 실재가 출현한다고 보며, 따라서 예술가는 가능한 한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에 내재하는 미적 실재를 포착해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실재론적 입장은 대체로 예술은 자연의 모방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헤겔은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고 단언한다.[9] 왜냐하면 예술은 이념의 가상 즉 기호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호는 정신의 내부에서 산출되는 것 즉 창조된 것이다. 예술이 하나의 기호이라면, 미적인 것이 굳이 자연을 모방할 필요가 없으며, 모방과는 무관한 예술 형식도 존재한다. 예술 가운데 특히 건축과 음악이 그렇다. 건축은 재료를 축조하며 음악은 음을 구성할 뿐이다.


 

[1] 칸트는 이런 미적인 감정은 욕구의 충족을 통해 얻어지는 만족과 구분한다. 후자는 대상의 감각적 질료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지만 미적인 감정은 대상의 형식 자체로부터 얻어진다. 그는 대상의 일정한 형식 자체가 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형식으로부터 반성적 판단 과정을 통해 미적 감정이 발생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성적 판단은 일정한 대상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어떤 종별적인 통일성 즉 조화와 균형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헤겔, 미학강의 1, 107쪽

[3] 헤겔, 미학강의 1, 106쪽

[4] 헤겔, 미학강의 1, 174-175쪽

[5] 헤겔, 미학강의 1, 107쪽

[6] “하지만 이러한 다만 감각적일 뿐인 직접성으로 인해 생동적인 자연미는 그 자체를 위해 혹은 그 자신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으로 생산된 것도 또한 미적 현상을 위해 생산된 것도 아니다. 자연미는 오로지 타자에 대해 즉 우리에 대해 미를 이해하는 의식에 대해 아름다운 것이다.”(헤겔, 미학강의 1, 173쪽)

[7] “동물적 삶은 삶으로서는 비록 이념이지만 그것은 무한성과 자유를 자체에서 표현하지 않으니, 이것이 나타나려면 개념은 자신에 합당한 실재를 완전히 관류하여 그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대상화하고 또한 거기서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등장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서 개념은 진정 자유롭고 무한한 개별성으로서 존재한다.”(헤겔, 미학강의 1, 208쪽)

[8] 헤겔, 미학강의 1, 212쪽

[9] “예술의 진리는 소위 자연의 모방이라는 것이 제한적으로 지향하는 단순한 정확성이 아니며, 외면은 내면과 조화해야 하니, 이 내면은 내면 그 자체로서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또한 바로 이를 통해 외면 속에 자신을 자신으로서 현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헤겔, 미학강의 1,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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