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푸코에 이어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였다. 푸코는 실천적 관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실제 나중에 정치권에서 친노파를 만들어내는 데 일부분 기여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인데, 실천 쪽보다는 오히려 예술과 문학 비평 쪽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데리다의 사상 중에 흥미를 끌었던 개념은 무슨 ‘중심주의’이다. 그의 사상으로부터 ‘이성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 각종 중심주의 개념이 나왔다. 그의 철학은 ‘중심’ 중심주의였다. 이런 개념은 기존의 보수적 지배 사상의 비판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주로 운동권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해독되었다. 운동권 사상 역시 보수적 사상에 못지않게 이런 각종 중심주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적 비판에서 방법론적 핵심 개념은 ‘차연’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차이와 지연이라는 두 의미를 지닌 합성어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후기구조주의라는 방법론에서 필연적으로 이끌려 나오는 개념이었다. 후기구조주의에서 모든 구조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다. 그 때문에 어떤 것은 하나의 구조로 파악되는 동시 다른 구조로도 파악된다. 순수한 객관적 대상이 없으니, 두 구조는 하나의 지점에서 중첩될 뿐이며, 바로 이렇게 두 구조가 중첩되는 지점을 지칭하는 개념이 곧 차연이었다.

데리다는 머지않아 이런 차연 개념을 포기하고 레비나스 등과 같이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현상학적 본질직관 개념으로 돌아가는데, 데리다의 후기 사상은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운동권이 자기를 반성하는데 방법론적인 관점을 주었다. 데리다의 주장은 당시까지도 남아서 투쟁했던 운동권의 진영 안에 수류탄을 깐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진리이고 가치 있다고 믿지 않고서 어떻게 행동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욕망일 뿐이니, 세상은 욕망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전투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투쟁에 나설 수는 없었다.

2)

그 외에도 나는 알튀쎄와 같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책을 읽었다. 그의 중층적 결정론이나 구조적 총체성 개념은 명확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느껴졌다. 당시 한국에는 윤소영 교수와 같은 알튀쎄 주의자가 있었고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나로서는 알튀쎄의 철학이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그 밖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인 보드리야르의 책을 읽기도 했다. 그의 소비사회라는 개념이나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으나, 그는 사회학자에 가깝고 재치 있다고 생각했으나, 깊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보드리야르는 나중에 내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이렇게 나는 한 십 년 동안을 당시 유행을 좇아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다행히 학교에서 교과목 개편을 하면서 나는 내 마음대로 나의 강의 커리큘럼을 짤 수 있는 권리를 얻었기에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교과목으로 설정해서, 내가 공부하면서 동시에 강의하기도 했으니, 나의 실험적 강의를 참고 들어준 학생들에게 지금 미안하기도 하며 동시에 고맙게도 생각한다.

97년 나는 지쳤다. 마침 학교에서 안식년을 받아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유럽에서라면 무슨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다. 유럽에서 나는 97년 겨울 한국이 IMF에 빠지게 되었고 그해 년 말 선거에서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3)

IMF로 망하는 것은 어차피 예견되었던 사실이니 당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곧 김대중 선생의 당선을 알았을 때, 나는 최초로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대중 선생이 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시절, 노동운동을 배신했을 때도, 배신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그는 운동권과 그가 묵시적으로 합의한 경제적 개혁을 달성하리라 믿었다.

이 노선은 박현채 선생이 기초를 잡고 김대중 선생이 널리 알린 대중경제 노선이었다. 그것은 산업의 재편성을 통해 민족경제로 나가는 노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김대중 선생에 기대했다. 이제 정권을 잡았으니 그는 자신의 대중경제 노선을 실천하리라. 희망이 솟았다.

멀리 독일에서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나가면서 나는 이참에 어설픈 현실참여를 끝내고 학자로서의 나의 길을 다잡아 가리라고 생각했다. 독일 튀빙엔은 참 작은 대학 도시였다. 만물은 고요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5월의 들판이었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가 덮어주던 포프린 이불보에 수 놓인 꽃잎들처럼 들판에는 이름 모를 야생 꽃들이 피었다.

나는 튀빙엔 유학생들과 자주 함께 산책하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나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나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아서 하는 것은 철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철학도 자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며, 나의 철학적 자의식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자면 철학은 시대의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 실천적 철학이어야 했다.

나는 산책하면서, 내가 10년간 허겁지겁 따라갔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들을 생각해 보았다. 십 년간 그들의 철학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으나 손에 잡히는 것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고, 어떤 진리도 가치도 없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과거 운동권은 이제 소확행이라는 개념에 빠져들었다.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이었다. 소확행이란 곧 와인과 여행, 그리고 약간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런 소확행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중산층적인 물질적 자원이 필요했다. 대학교수로서 나도 이런 소확행의 분위기가 나의 온몸을 휘감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나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허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푸코나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구조주의라는 무기였다. 이 구조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칸트에 이르고, 언어학이라는 확실한 토대를 갖추고 구조주의 외에도 과학철학(예를 들어 토마스 쿤) 등에서 지지와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알튀쎄를 통해 구조주의로 전향했다.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에서 보듯이 불가피하게 상대주의와 소확행이라는 삶으로 빠지게 마련인데,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내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던 튀빙엔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던 헤겔 논리학 심포지움에 참석하였다. 나는 독일어도 잘 모르면서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는 마침 헤겔 논리학 3권 개념론 부분을 읽어나갔다. 독일 교수와 대학원생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헤겔에 관해서라면 그가 모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헤겔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 도대체 헤겔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헤겔 철학이 어쩌면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생각이었다.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것을 구조적 좌표 위에 점 찍는 것은 가능했지만 구조가 변동하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변화는 우연일 뿐이었다.

그런데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은 하나의 인식 구조에서 다른 인식 구조로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이행 구조를 밝히게 된다면, 구조가 필연적으로 변동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릎을 쳤다. 이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보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80년대 헤겔 연구에 이어서 10년 만에 다시 헤겔연구로 돌아서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박사 논문을 통해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을 밝혀 보고자 했다. 나는 튀빙엔 대학교 도서관에서 다시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으며 그 가운데 모순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에는 항상 모순이라는 개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딜레마로, 어떤 경우에는 자가당착으로 어떤 경우에는 전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정신의 이행은 모순을 통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감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논문으로 나중에 귀국한 지 2년 뒤 2000년 겨울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제목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였다.

영화 ‘타르’ – 음악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영화 ‘타르’-음악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1) 타르의 몰락

영화 ‘타르’는 레즈비언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수석 지휘자인 타르의 몰락을 그리는 영화다. 그녀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에 선 여성이다. 그녀는 줄리아드 교수이며, 자서전 ‘타르가 타르에 대해’를 출판했고, 아코디언이라는 여성 음악가를 육성하는 시민 단체를 맡고 있다.

그런 그녀를 몰락시킨, 그것도 한순간에 몰락시킨 것은 그녀의 성적 충동이다. 그녀는 이미 오케스트라의 제1 바이올리니스트인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 그 외에도 그녀는 비서인 프란체스카나, 아코디언 소속 학생인 크리스타와도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 그녀에게 러시아에서 건너온, 아직 소녀 티를 벗어나지 않은, 발랄하고 육감적인 느낌을 주는 첼리스트 올가는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필하모니의 부지휘자의 자리를 기대했던 프란체스카는 그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자 크리스타와 타르의 관계를 폭로한다. 크리스타의 부모가 그녀를 언론에 고발하자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게다가 타르가 프란체스카를 대신하여 비서로 삼아 데리고 뉴욕에 출장 간 올가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그녀는 갑작스럽게 추락하고 만다.

성적 충동으로 한 인간이 몰락한다는 스토리만 놓고 본다면, 굳이 이 영화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2시간 40분에 걸친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이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몰락하는 타르 내면의 균열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르 내면의 균열과 더불어 음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음악의 탄생은 타르의 몰락과 교차하고 있다. 처음 음악은 마치 딩동 하는 알림 소리처럼 마음에 떠오른다. 조금 지나면 음악은 어디선가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처럼 울린다. 그녀는 메트로놈 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깨어나며, 살펴보니 메트로놈이 벽장에 감추어져 있다. 마음에 울리는 소리는 무언가 위기를 알리는 듯한데, 타르는 급히 오선지를 펼쳐 이를 음악으로 작곡해 나간다.

내면의 소리에서 음악이 탄생하는 모습은 키에슬로프의 영화 ‘세 가지 색깔-블루’에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주인공 쥴리는 내면에서 점차 확대되며 들려오는 소리를 악곡으로 작곡해 나간다. 다만 ‘블루’에서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빠진 쥴리의 내면에 조금씩 생명의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음악은 부풀어 오르는 생명감과 비례한다. 반면 영화 ‘타르’에서는 오히려 음악의 출현은 주인공의 몰락과 교차하고 있다.

2) 음악의 원천

음악과 몰락이 서로 교차하는 긴장의 정점에서 타르는 올가를 따라 어느 건물의 지하실로 내려간다. 마치 환상의 세계 속에 들어선 듯 지하실은 황폐하고 올가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타르가 지하실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섰을 때, 거기엔 희미하게 호랑이 같은 물체가 으르렁거린다. 타르는 두려움에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쓰러지면서 바닥에 얼굴을 크게 다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르는 자신이 작곡하던 음악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 블루에서와 달리 생의 희망이 아니라 죽음에의 몰락이 오히려 음악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쇼펜하우어, 그리고 그의 제자인 니체는 음악의 근원을 디오니소스적인 몰락에의 의지에서 찾았으니까 말이다.

과연 음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블루’에서처럼 생에의 희망이 음악의 원천인가 아니면, 영화 ‘타르’에서처럼 몰락에의 의지가 음악의 근원인가?

영화 ‘타르’에서 감독은 영화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떻게 보면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이 보이는 타르와의 대담을 보여준다. 여기서 타르는 다음 번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은 이 작품(특히 4장)은 죽음을 그린 것으로 보지만, 그녀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말러가 그녀의 연인인 알마에게 헌정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죽음과 사랑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는가? 영화 ‘타르’에서도 타르는 자신이 몰락을 경험하면서 작곡한 곡을 자신의 딸에게 헌정한다. 그 딸은(아마도 함께 살던 바이올리니스트의 딸인 듯한데) 타르가 유일하게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보살피는 딸이다. 여기서도 몰락에서 나온 음악이 생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죽음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동시에 사랑, 또는 생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쩌면 죽음에 의지가 곧 생에의 의지, 사랑에의 의지인 것이 아닐까?

3) 음악의 자율성

이 영화에서 음악에 대한 물음은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첫 번째 대담 장면에 이어서 다음 장면에서 타르는 줄리아드 대학교에서 지휘법을 강의한다. 여기서 타르는 음대 학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타르가 바흐를 언급하자, 학생은 바흐는 반여성적이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음악이 음악가의 개인적 삶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음악은 고유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인지 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타르는 음악은 자율적인 것이며 음악과 개인적인 삶은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논쟁 중에 타르는 자신은 레즈비언이지만 자신은 음악 속에서 항상 신을 느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이 타르의 음악이 그 자신의 몰락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면, 음악이 자율적이라는 그녀 자신의 주장과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스토리 전개 대부분은 주로 클래식 음악에 기초한다. 영화 ‘타르’에서 흥미로운 것은 처음과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대조되는 음악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처음 인트로 장면에서 오랫동안 어두운 화면을 보여주면서, 배경에 음악을 들려주는데, 아마도 아랍 쪽의 음악인 듯이 보인다. 음악은 비애적이지만 단조로운 여인의 한탄처럼 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부근에 나오는 음악은 타악기 위주의 사이키델릭한 전자 음악이다. 감독이 인트로와 마지막에 이런 음악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이런 음악을 통해 음악이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의 물음은 이렇게 종합될 수 있다. 음악은 자율적인가 아니면 삶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가? 음악은 삶 가운데 몰락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생에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음악이 지닌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헤겔의 음악론은 이런 이중성을 설명하는 데 하나의 디딤돌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헤겔은 음악은 삶에서 나온 자연적 소리를 테마로 삼아 고유한 음악적 방법으로 이를 전개한다고 본다. 이는 마치 베토벤의 교양곡 9번에서 문들 두들기는 소리가 음악적으로 전개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이 근대의 파토스적 인간을 표현한다고 본다. 이런 파토스적 인간이란 즉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오델로나 맥베스와 같은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파토스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보듯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지만, 헤겔은 이런 파괴는 오히려 개인이 실체적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해방의 길이라 한다. 몰락이 곧 해방이라는 헤겔의 주장은 곧 음악의 이중성을 설명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을까 한다.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

1)

부산에 정착해서 모처럼 책상머리에 진득하게 붙어있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여유를 이용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파해야 하겠다고 했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번역본이 없었으므로, 사전을 찾아가며 까다로운 원전을 그것도 관계대명사로 이어진 마르크스의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자본론 읽기를 가로막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방대학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교수를 혹사했다. 나는 거의 매 학기 18시간 어떤 때는 24시간까지 강의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일상적인 업무, 학생들과의 만남, 교수로서의 학내 투쟁과 대외 투쟁이 나의 초조한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나는 마르크스 자본론 3권을 쌓아 놓고, 매일 남은 페이지가 얼마인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최초의 계획은 자본론을 다 읽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헤겔 논리학의 진행 방식을 검토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론을 거의 다 읽기까지, 도무지 헤겔의 논리학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으니,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었다.

거기에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로 구 운동권은 독선적이고, 영웅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이라는 등의 비판이었다. 그런 비판의 최종 점정{點睛]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였다. 그 시가 내용만 본다면, 꼭 당시 운동권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필요는 없었으나 누구나 그의 시를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그런 비판 앞에 운동권은 고개를 숙였으며, 부끄러움 때문에 병이 들었다.

구 운동권은 길을 잃었다. 대부분, 현실 정치권으로 흡수되었으며, 일부는 명상운동으로 나갔다. 이 시기 ‘방하[放下: 내려놓다]’라는 참선이 유행했다. 나는 과거 누구보다도 급진적이었으나 그 후 방하 운동에 참여했던 어느 교수로부터 술 자리에서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더이상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무슨 잘못인지는 몰랐으나, 잘못했다는 죄책감만은 누구나 지나고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슬픔은 느끼지만, 무엇이 슬픈지는 모르는 상태와 같았다.

2)

이 시기, 구 운동권 문화를 대체하려는 듯이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으니 그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발전시킨 문화가 곧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80년대 들어 유행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에 머물러 있었고 신자유주의로 변화하기 전이었으나, 이미 서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수입된 것이다. 당혹했지만, 먼저 문화가 수입되고 나중에 사회가 변화한다는 한국문화의 일반적 발전 법칙을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삽시간에 세상을 점령했다. 우리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하는 데 현실의 변화보다, 오히려 90년대 초 부딪힌 구 운동권의 좌절감과 자기비판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운동권의 거대 담론을 부정하지는 못했으나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 구원을 느꼈으며 구 운동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끌려갔다.

어떻든, 포스트모더니즘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보다는 유희적이고 장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금욕적이고 엘리트적이었던 모더니즘 문화에 대립하면서 쾌락을 허용하고, 대중성과 상업성을 받아들이자 했다.

민족과 민중을 말하는 것은 마치 철 지난 옷을 다시 꺼내 입는 것과 같았다. 그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일상적 투쟁이 독자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여성 운동, 지역 운동, 문화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등. 이와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단체가 세워졌다. 과거에 모든 단체 이름 앞에는 ‘민중’이나 ‘민족’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름 앞에 ‘시민’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으며, 아예 ‘경실연’이라든가 ‘참여연대’라든가 하는 독특한 이름이 등장했다.

새로운 운동 단체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자 했으며 세상은 합의를 통해 결정되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적인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길거리에서 시위는 진정되고 법과 언론을 이용한 투쟁 방식이 등장했다. 이제 앞에 고발장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걸어가는 단체 대표의 모습이 언론을 장식했다.

2)

이러한 새로운 시민운동,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소위 자유주의 철학이었다. 갑자기 푸코와 데리다, 보드리야르의 철학이 밀어닥쳤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밀어닥칠 때는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나 역시 여기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자본론을 거의 다 읽은 단계에서 원래의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새롭게 소개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의 책을 허겁지겁 읽어 나갔다. 나는 불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아직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영어번역본을 구해 읽었다.

일단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출발점으로 하는데, 구조주의는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놓았는데,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단단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사와 주체 속에서 모든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으나 구조주의는 이런 역사의 개념이나 주체의 개념을 비웃었다. 한순간 내가 딛고 있는 받침대가 무너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구조주의는 구조의 변화만을 말했지, 이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역사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의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보였다.

나는 여전히 역사의 변화를 믿는 편이었는데, 그렇다면 구조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일단 구조 개념의 철학적 토대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구조주의에 매료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를 더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3)

처음 손에 잡았던 철학자는 푸코였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동의할 만했다. 그는 생체 권력이나, 판옵티콘의 자아 감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니,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이런 권력에 의해 우리는 지배당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매료되었던 개념은 푸코의 권력 개념보다 담론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담론을 형성하는 담론의 구조를 제시하면서 이런 담론의 구조가 권력의 지배 아래 형성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진리의 기준이나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이런 권력의 지배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 하면서, 소위 ‘지식-권력 복합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푸코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억압적 거대 권력 개념과 이데올로기 개념과 대조되면서 나에게는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푸코의 주장은 당시 확산하고 있던 다양한 분야, 독자적 운동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 운동은 각 분야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권력을 제거하려는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푸코의 사상은 프랑스와 같이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몰라도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노골적인 폭력 장치를 통해 강제적인 억압이 이루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푸코의 투쟁은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실제로 당시 처음 등장한 다양한 시민운동은 90년대 초중반에만 해도 아직은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시민 운동의 발전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되는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을 기다려야 했다. 

나의 철학일지(5)[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5)

1)

앞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관련되어 두 가지 이채로운 일 중 한 가지를 소개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제 또 하나의 이채로운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나는 많은 인문학 연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질 때, 철학연구자들보다 앞서서 이들 연구자들도 이미 자기의 분야에서 연구회를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 거의 학문의 분과마다 하나의 학회나 연구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학문이 아카데미즘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현실에 복무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진 조금 뒤 다양한 연구회 사이에 통합된 단체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합동 단체를 만드는 데 모두들 진심이었다. 합동 단체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 학술단체협희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요즈음은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단체였다. 학문간, 학제간 통합된 연구자 단체는 아마 전무후무할 것이다. 가입한 연구단체의 전체 나, 정확한 결성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

학단협이 만들어질 때 준비 모임에 후배들의 위임을 받아 내가 참석했던 것 같다. 모임을 주도한 것은 산업사회연구회의 조희연 선생이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급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를 만들려 했던 것 같은데 농업 문제 연구자인 이우재 선생이 제동을 걸면서 상당히 대중적이고 온건한 단체가 되었다. 나는 이우재 선생의 편에 들었기 때문에 조희연 선생과 여러 번 부딪혔지만, 그런 충돌이 학술단체 협의의 필요성에 대한 시대적 공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나중에 이 단체 출신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진출하면서 민교협이나 교수노조를 형성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어떻든 이 단체가 세워지면서 이른바 학문 전선에서도 하나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림시의 영향을 받아 진지전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는데, 마침내 다른 모든 투쟁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의 진지가 꾸려졌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창립총회는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열렸다. 내 기억으로는 통신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아마 강당의 규모가 500석정도 되었는데 그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철학 전공자만이 아니라 비철학 연구자나 일반 대중도 이때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주제도 기존의 철학계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주제였다. 우리는 당시 연구자들의 많은 존경을 받던 언론인 이영희 선생이나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 영문학자 백낙청 선생 등의 사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마 어마어마한 규모의 참석자가 창립총회에 모여들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역시 백낙청 선생의 사상을 연구해서 발표했는데, 그 본문 역시 어딘가 있을 텐데, 굳이 찾고 싶지는 않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기존의 철학계를 비판하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나는 누구도 하지 않던 연구를 했다. 철학계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리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철학을 호기심이나 개인적 선호에 따라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개인적인 선호로 본다면 단연 실존철학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철학에서도 올바름이라는 것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올바름 자체가 사실 철학적으로 형성된 개념이지만, 그때는 올바름이란 영원한 잣대가 있고 철학도 그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무엇이 철학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삶과 철학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올바른 철학은 올바른 삶으로 나타날 것이고, 거꾸로 올바르지 못한 철학자의 삶은 원래 그의 철학 자체 내에 그런 올바르지 못한 삶이 잉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올바른 철학의 흔적을 계승하고 싶었다. 나는 몇몇 철학적으로 올바른 흔적도 발견했다.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이름이 이때 기억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올바르지 못한 철학은 비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단순한 구도였다. 현실에 기여, 삶과 철학을 곧바로 이어버린 이런 구도는 지금 보면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때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였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에서 했던 또 하나의 작업은 북한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철학 연구도 우리 민족의 철학 연구이니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북쪽의 철학이 운동권을 통해 소개되기는 했지만, 너무 단편적이었다.

북쪽의 철학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런 철학이 전개된 과정이 이해되어야 했다. 단순히 그쪽 사회의 역사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철학이 나오기까지 많은 철학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었으리라. 그런 철학 연구자들의 연구가 이해되어야만 북쪽의 철학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쪽의 철학자가 누구인지,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침, 송상용 교수님이 안기부와 협조하고 일본의 조선대학과 연결하여 북쪽의 철학자가 발표한 논문집을 복사하여 들여왔다.

대부분의 복사는 북쪽의 학계에서 발표한 전문적인 연구잡지였다.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잡지 전체를 복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70년대 말 이후 철학 잡지는 단절되었고 80년대 후에 다시 복간된 철학잡지는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연구잡지를 철학의 분야별로 나누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기부의 도움으로 잡지를 복사해 왔으니 우리의 연구발표도 안기부에서 허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나중에 북쪽 철학에 관련된 심포지움을 열고자 했을 때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안기부에서 허용할 수 없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의 연구는 시대와 철학에 발표하기로 하고 심포지움 개최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 심포지움에서 북쪽의 사회철학적 연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발견한 잡지의 대부분의 연구는 북쪽이 아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에 머무를 때 나온 것이어서 소련이나 기타 사회주의 진영에서 연구된 내용과 크게 다른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성과는 쌓여갔으나, 현실의 운동은 점차 좌절감에 사로잡혀갔다. 80년대 말 노태우 정부 시절 3당 합당이 일어나자, 사회의 민주화는 다시 한 번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산화를 신문지상에서 보면서 나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운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속이 빈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감을 내적으로 느꼈으나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 80년대 말 고르바죠프의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전개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생계와 관련하여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나는 활로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교내 민주화가 일어나면서 학생들은 사회철학이나 근대사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새롭게 개설하였다. 마침 철학과에서 사회철학 담당교수를 뽑으려 했는데, 이때 동아대 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내려오기를 청했다.

나는 그들의 요청대로 동아대학교에 지원했다. 교내 민주화 운동이 전개된 민주적 총장이 선출된 상황이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다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말하자면 학생들이 뽑은 교수가 되었다. 68혁명 시대 파리 벵센느 실험대학에서 학생이 교수를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그런 교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그때는 있었다.

5)

나는 부산에 내려가면서 이제부터는 학자가 되기로 했다. 한편으로 학생을 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철학 연구에 전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연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헤겔 철학이었다.

내가 다시 헤겔철학을 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 때문이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는데 자본론 앞 상품 화폐 장 속에 마르크스의 설명에 너무 매혹되었다. 그 설명은 내가 헤겔 논리학을 읽다가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변증법의 논리를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디어 헤겔의 변증법에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어 헤겔의 논리학을 자본론과 함께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철학 일지(4)[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4)

1)

역사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85년 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 때가 오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가만히 시골에서 무위 도식할 수는 없었다.

85년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회철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철학도들이 모여 작은 연구실을 마련했다. 처음엔 신림동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곧 봉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처음 했던 사업이 사전을 번역하던 것 같은데, 사전을 만들기 위해 연구실이 열린 것인지, 연구실을 열어놓으니 사전이 만들어졌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아마 후자였으리라. 그렇다면 왜 처음에 연구실을 내려 했던 것일까? 모여서 공부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때 다른 학문 영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연구자들이 모인 연구실이 세워졌으므로,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당시 운영은 어떻게 했을까? 그때의 이런저런 앞에서 말했던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 있을 텐데 그걸 열 수 없으니,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하자.

대체 무엇을 연구했을까? 모두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역사나 사회과학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했는데, 그때는 학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남은 노트들은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 관해,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한 노트들이다. 그런 것들은 철학 밖의 글이니 여기서 소개할 것은 못 된다. 철학적으로는 여전히 철학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는 이런저런 장소에서 철학 논쟁에 관해 설명했다.

이 시기에 거꾸로 나는 철학을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할 수 없었다. 방금 말했던 다양한 사회 역사 공부와 철학 소모임 활동으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생계를 위해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건성으로 했을 뿐이다. 나는 밖으로만 돌았고 집에는 밤에 늦게 들어갔다. 어쩌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곧 전환점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있었고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다시 확신시켜주는 여러 사건을 만났다.

뭐가 할까, 순진한 시절이었다. 사회 역사적 현실을 알기만 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열정이 지배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그 시절만큼 철학자가 높이 대우받았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정말 자부심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스스로 철학을 통달했다고 믿었고 남들 앞에서 자랑했으니 어리석은 치기가 지배했다. 곧 그런 치기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나, 그때는 아직 아니었다.

2)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한 달이 다가왔다. 87년 6월이었다. 매일 거리로 쏟아져 나갔고 우리 대학원생도 석 박사 과정 가릴 것 없이, 사회철학을 하든 아니든 함께 모여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도 행복했고 거리에서 만난 누구도 모두 친구였다. 길거리에서 흩어졌던 철학과 대학원 선후배를 만나면 그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해 이한열 열사 장례식으로 시청 앞 광장에 10만 군중이 모였을 때, 나는 역사의 대낮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은 역사의 신과 내가 직접 만난 순간이었다. 자유와 행복감이 물 밀려오듯 나를 덮었으니, 나는 지금도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마침내 6월 항쟁은 노태우의 항복으로 끝났으나 곧이어 7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우리가 같이 학습했던 노선 소위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좌절의 시기가 다가왔다. 믿었던 김대중 선생이 노동자 대투쟁의 정점에 재를 끼얹었다. 그는 노동자에게 자제하라는 신호를 공개적으로 보냈다. 나아가서 그는 정부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탄압을 허용하였다. 배반이라고 느껴졌다.

8월 말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 대투쟁이 한순간 꺾이고 곧바로 선거전으로 흘러갔으므로 배반이라는 느낌을 곰 씹어 볼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김대중 선생을 믿었고 나 역시 그의 배반은 선거투쟁을 위한 일시적 양보 정도로만 믿었다.

그해 정확히 언젠가는 모르겠다. 10만 명이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들으러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6월 항쟁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이후 다시 한번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같이 행진했던 후배가 말했다. 만일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면, 내 말을 따르겠노라고. 그러면서 그가 당선될지를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목청껏 김대중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배에게 어떤 말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그 후배는 나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결국, 그해 12월 겨울, 역사는 독재자의 승리로 끝났다. 80년 봄의 패배와 좌절의 지긋지긋한 감각이 다시 되살아났다.

3)

80년 봄처럼 나는 다시 철학을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어떤 까닭이었는지 소위 신 마르크스주의자의 철학 특히 알뛰쎄와 그람시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올랐다. 그것은 87년의 거대한 역사적 실험은 그동안 갈고 닦았던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로서는 알뛰쎄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더 마음에 다가왔다. 지배 계급에 대한 문화적 투쟁이 없이, 기습적인 공격이나 정치적 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의 내 마음에 설득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뛰쎄 파와 논쟁을 위해서도, 그의 주장 역시 학습해야 했다.

선거전에서 패배 이후 이런저런 학습과 활동으로 바빴지만, 내 마음에서 이미 열기는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치지 않았고 마치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앞으로 나갔다.

이즈음 사회철학 연구실은 사전 번역을 마치고 사전을 출판했다. 사전을 번역하는 데 박정호 선생을 비롯한 사회철학연구실 후배들이 무척이나 고생했다. 그들의 노고와 개인적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 대표자로서 박정호 선생의 이름을 밝힌다.

사회철학연구실은 거기서 얻은 돈으로 좀더 넓은 연구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사이 다른 대학에서도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여러 집단, 그룹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회철학 연구실은 헤겔 학회 성원과 만나, 통합을 준비했다. 두 집단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 한국철학사상 연구회라는 단체였다.

이 연구단체는 창립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철학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외국의 철학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현실에 맞는 철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배님들 역시 철학이 시대에 기여하고, 우리 철학이 세워져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는 철학계 선배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학계에서는 새로 출발하려는 단체에 대해 마땅찮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는데,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시기는 조금 늦어졌지만, 성대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 연구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졌고 곧 철학사상 연구회에 합류하면서 철학계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지방에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도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고 그들 역시 차례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가담해주었다.

이런 움직임 가운데 이채로운 게 있다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이규성 선생을 비롯하여 내가 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가담했다. 이 잡지 역시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와 같은 의식과 목적을 가졌지만, 다만 여기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 연구자는 아니었다. 고대철학, 동양철학, 분석철학 등 다양한 연구자가 사회에 관한 관심과 우리의 철학이라는 지향점에 대해 동의했다.

그들은 대개 일찍부터 교수가 되어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단체를 이루어 함께 연구하기보다는 글을 써서 잡지를 만들어 새로운 철학을 직접 제시해 보자는 생각에서 잡지(부정기 무크지를 표방했다)를 만들었다. 제목은 ‘시대와 철학’이며, 출판은 윤구병 선생이 주선하여 종로서적에서 맡아주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이 집단 역시 연구회에 가담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의 이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헤겔은 거기서 그의 시대는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는 여명의 시대라 했는데, 그 때문에 ‘사회와 철학’이라고 할 것이 ‘시대와 철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나는 이 잡지가 철학논문집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사르트르가 현대지에 발표했던 철학에세이를 좋아했다. 나는 새로 만드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이런 철학에세이로 채워지기를 기대했다. 시대와 철학은 나중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이름이 되면서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1호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수 동호인 그룹이 만들었던 시대와 철학은 1호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시대와 철학을 인수했을 때도 나는 이 잡지가 철학 에세이집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후배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오히려 철학 논문집으로 만들어 기존 학계의 논문집과 대결하자는 입장이었다. 나는 상당히 강하게 나의 생각을 내밀었으나 후배들은 나의 생각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시대와 철학은 철학 논문집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데에는 아마도 철학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의 타협은 이때부터 시작된 거다. 

나의 철학 일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3)

1)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 내가 어떤 논문을 쓴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엮어 나가려 했지만, 그 당시 도대체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는 돌덩어리를 그냥 삼키듯이 쓴 것 같다. 부끄러워서인지 그 후 다시 석사 논문을 뒤져 본 적이 없다.

나는 1년 석사를 마치고 결혼도 하고, 다행히 경남대에 자리를 얻어갔다. 그 뒤 2년 반 동안 경남대 있었으나, 박사 과정 수업 때문에 마산에서 서울까지 매번 고속버스를 타고 오르내렸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무엇을 공부했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일단 접어두고 그에 앞서 헤겔의 논리 자체를 이해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강의와 박사 과정 수업 사이 혼자서, 조금씩 공부해 나갔으나, 이건 정신현상학보다 더 어려워 별 진척은 없었다.

헤겔의 논리학을 읽다가, 헤겔이 미적분학에 관해서 논한 부분을 발견했다. 약 100페이지에 걸친 상당히 긴 부분인데, 펠릭스 마이어 출판사사에서 헤겔 전집을 새로 발간하면서 이 부분은 제거해 버렸다. 다만 논리학 뒷부분에 일종의 이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어 놓았으니, 펠릭스 마이너 사에서는 이 부분의 진위를 약간 의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당시 라슨 판 논리학을 읽었는데 여기서는 이 부분이 본문 다음의 추가[Zusatz] 부분에 실려 있어, 일단 이 부분이 헤겔의 논리학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당시에는 펠릭스 마이어 판본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 부분이 헤겔의 말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이 부분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나는 이때 헤겔의 미적분학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나로서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아마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게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 헤겔은 미적분을 다루면서 하나의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미적분 계산이 엄밀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계산 자체는 엄밀하지 않는데도 미적분학이 자연을 해석하면서 얻어낸 결과는 성공적인데, 헤겔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려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미적분학을 이해해야 했고, 나아가서 헤겔의 수 개념 자체를 이해해야 했다. 헤겔의 수 개념을 이해하자니, 러셀의 수 개념이 생각났고 헤겔의 수 개념과 러셀의 수 개념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혀야 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을 통해서 어떻게 미적분학이 출현하며 마지막으로 헤겔의 제기했던 물음 대로, 왜 미적분학의 계산이 엄밀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 자연 해석에 무리가 없는지를 알아야 했다.

나로서는 굉장히 힘들게 공부하고, 굉장히 장황한 논문을 작성했다. 아마 지금 이런 논문을 썼다면 어디에도 실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아직도 헤겔의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시 읽지 못했다. 다만 헤겔의 사유에서 미적분학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만 어렴풋하게 느낀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셸링을 통해 헤겔로 전해지면서 미적분학은 헤겔 논리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논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단서를 얻은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2)

이 글을 쓰면서 과거에 내가 남긴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 처음 나온 삼보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문서를 작성했다. 나중에 이 문서들은 따로 보관했던 것 같다. 아마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었던 것 같다. 지금도 데이터베이스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띄울 수는 없다. 그때 사용했던 프로그램이 폭스프로라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이 프로그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86 시대 프로그램이니 혹시 구하더라도 현재 컴퓨터에 구동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방안이 나서기까지는 당분간 기억에 의존해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박사 과정 수업을 들으러 마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 사이 대학원에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다. 이 세대는 이미 학부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를 상당히 학습하고 올라온 세대였다.

당시 차인석 교수님이 사회철학을 강의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을 소개했다. 주로 하버마스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시고 대학원에서도 하버마스의 책 인식과 관심 등을 제자들과 함께 읽었던 것 같다. 새로 대학원에 입학한 후배 세대는 차인석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삼아 사회철학을 주로 연구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찾으려 하기보다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찾아내려 했다. 나는 이들과 약간 생각이 달랐다. 마르크스에게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반면 이 후배 세대들에게 마르크스의 철학 즉 유물론이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관심 또한 시대와 사회에 관한 관심이 철학적으로 우리를 서로 가깝게 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후배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마르크스의 철학 책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인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자는 선동이 등장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누구도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원전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후배가 차인석 교수님의 댁에 그 책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때부터 차인석 교수님이 대학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강독하도록 만들려는 유혹이 시작되었다. 어느 해 연말인지 새해 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의 댁을 방문해서 자리를 펼쳤다. 우리는 교수님에게 올해는 이 책을 강독하시는 게 좋지 않겠냐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강박 아닌 압박을 가했으니, 교수님이 알고 넘어 가주신 것인지, 아니면 교수님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해 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기로 했다. 덕분에 그해 봄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이 가진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을 복사본으로 한 권씩 얻게 되었다. 교수님은 이 복사본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 복사본에 번호를 매겨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받은 복사본은 4번이고, 현재도 그 4번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했을 때 대본으로 삼았던 책이 바로 이 4번 복사본이다.

이제 대학원에서 우리의 관심은 더 풍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헤겔 변증법, 하버마스와 같은 사회철학,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 등이 풍성하게 논의되었다. 지금도 이 후배들 모습이 선하다. 그들은 헤겔은 지독하게도 싫어했으나, 선배로서 나에게는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헤겔을 버릴 수도 없었다.

3)

수업을 들으러 서울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교의 게시판과 벽 등 곳곳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읽는 것이었다. 그 대자보를 읽는 것은 시대적 현실을 아는 통로였다. 좀더 관심을 가지면 소위 문건이라는 것을 구해 볼 수 있었다.

여러 흥미로운 문건이 있었고 이런 문건을 통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토론과 더불어 새로운 운동 단체가 출현했으니, 이런 토론과 단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보았고 거기에 희망을 보았다. 그때 출현한 문건이나 대자본 내용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굳이 불필요하리라.

84년도 말경으로 기억한다. 특이한 문건을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독특한 철학적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게 바로 품성 또는 심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품성, 심성이라는 개념은 유물론적인 연원을 가진 개념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을 잇는 개념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실존철학의 세대였고 이 시대 철학이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인간을 심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심정을,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심정을 철학에 끌어들였다. 나는 대학 시절 빠져들었던 심정의 철학과 새로이 등장하는 심성, 품성의 철학이 친연성을 지닌 개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심성과 품성 개념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개념은 우선 그 유래가 낭만주의적 철학에서 있는 것 같았으며 더욱이 심성과 품성은 매우 영웅주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유물론적으로 당파성의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현실주의적 측면과 충돌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이 개념이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 자신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있는 만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간 혁명의 개념은 당파성 개념과 달리 계급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의 심정적 실천적 의지의 측면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 개념은 결코 영웅주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개념이 등장하면서 대학과 지식인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앞에서 83-4년도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더불어 철학 논쟁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런 철학적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무언가 커다란 역사적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질 때 날게 되니, 올빼미가 날았다면, 이미 황혼 즉 여명이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철학 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2)

1)

80년 봄은 논쟁으로 무르익었다. 복학생 그룹과 재학생 그룹의 논쟁, 이는 정치적으로는 즉각적인 정치 투쟁이냐, 대중적인 학내 민주화냐 하는 논쟁이었고, 철학적으로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었다.

나는 현실주의자의 비판을 내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옳았지만 낭만주의자로서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는 가운데 나는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선물로 준 석사 졸업 논문을 읽었다. 그 논문 제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헤겔 정신현상학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설명한 것이었다.

석사 논문이니 아주 간략한 것이지만, 나는 이 논문의 내용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헤겔은 이 주노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 노예가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리고 노예가 어떻게 해방되는가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려냈다.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주인은 자유를 얻었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노예는 자유를 잃었다. 향락에 빠진 주인은 거꾸로 노예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고, 거꾸로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를 전복시키는 계급투쟁은 알다시피 물질적인 차원에서 힘의 관계이었다. 그런 힘의 관계에서 무언가 결여된 듯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주어졌다. 헤겔에서 주노 관계의 전복은 정신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이런 정신적 투쟁이 마르크스의 물질적 계급투쟁보다 나에게는 더 깊고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독일어 원본인 훗셀의 ‘선험적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내가 헤겔에 전념하게 된 데에는 그해 광주 이후의 정신적 공황 상태가 있어야 했다.

2)

80년 봄은 짧게 끝났다. 5.17 광주에서 자행된 군부의 폭력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이후로 아무도 다시는 웃음을 웃을 수 없었다. 젊음의 찬란함은 사라졌고 정신적 공황이 지배했다.

학교가 문을 닫은 여름 내내 나는 패배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다시 술에 빠져들었다. 8월이 지나면서 어느날 아침 술에 깨서 나는 더는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때 나는 다시 선배의 논문에서 읽었던 헤겔의 주노 관계를 떠올리게 되었다. 거기서 정신적인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나도 헤겔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이 되면서 개학을 하게 되고 다시 대학원 연구실에 선후배들이 되돌아왔다. 당시 학교까지 집이 너무 멀었다. 무려 3시간이 걸렸으니, 나는 어느 선배와 대학원 연구실에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급기야 곤로와 담뇨를 가져왔고, 심지어 굴비 한 두름도 창문에 걸어 놓았다. 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에서만 학교를 나섰다.

이때 어떤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제안했다. 그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했던 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그 후배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 레닌이 말했는데, 헤겔의 변증법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헤겔의 논리학 책을 읽자고 했다.

그는 학부에서는 하이데거 역사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광주 이후 헤겔로 전향했다. 나와 철학적 이력이 비슷하였기에 우리는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 내에서 헤겔을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직접 연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이고 그 고유한 철학은 헤겔의 철학이니, 철학도는 마땅히 헤겔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모임이 유지된 논리였다.

헤겔을 읽는 모임의 수는 많지 않았다. 마침 어느 교수님이 해외 안식년을 떠난 후라, 교수님의 방이 비었다. 헤겔 논리학을 읽자는 후배는 그 교수님이 매우 아끼는 제자였다. 귀국한 교수님은 자신의 연구실이 담배꽁초와 술 냄새로 뒤범벅된 것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후배를 자신의 마음에서 추방하여 버렸다.

헤겔을 공부하면서 지도교수도 바뀌게 되었다. 다행히 역사철학을 하시던 이상철 교수님이 우리를 맡아 주셨다. 지금도 간염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이상철 교수님의 온화한 얼굴이 기억난다. 교수님이 좀 더 오래 살아 계셨다면 그 후 우리가 겪었던 많은 혼란을 그래도 덜 겪지 않았을까?

3)

9월 찬바람이 들면서 우리는 더욱 진지해졌다. 오직 헤겔만 안다면 역사를 들어 올릴 지렛대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아적인 신념으로 우리는 헤겔을 읽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겔을 전공하신 교수님도 없었다. 이상철 교수님도 역사철학을 전공하실 뿐, 헤겔을 아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턱대고 우리끼리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하루 내내 헤겔을 붙잡고 있었지만, 하루에 한 페이지도 못다 읽을 때가 많았다. 조금만 읽으면 졸려서 책상에 엎드려 잤고, 깨어나서는 우리의 부족한 머리 때문에 역사가 지체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으나 어디서 헤겔을 이해하는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헤겔 원전을 읽다가 도저히 안 되니, 헤겔의 해설서를 찾았다. 당시 많은 학생이 아마도 우리와 유사한 이유에서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니 이런저런 헤겔 해설서가 영인되어 판매되었다. 헤겔의 해설서는 주로 서독에서 연구한 업적이었으며, 헤겔의 원전만큼이나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헤겔을 이해하는 데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해설서는 헤겔을 관념론자로서 해석하려는 딜타이, 가다머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인데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발견하려는 우리의 의도와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런 점에서 서독에서 흘러나온 헤겔의 해설서를 불신한다. 그러니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이해가 되든 안 되는 헤겔의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 씩 읽어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이때 도움을 주신 분이 임석진 교수님이었다. 임석진 교수님의 박사 학위 논문을 번역한 후배가 매개되어, 임석진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유학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교수님은 마침 자신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을 번역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우리가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여러 번 술자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헤겔이 책을 놓고 함께 세미나를 하거나 한 적은 없다. 누구는 이런 모임을 일컬어 일차 헤겔 학회라 하면서 나중에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헤겔 연구자들이 조직한 헤겔 학회와 구분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학회라는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으며, 그저 교수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하면서 헤겔연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나 충고와 격려를 들었을 뿐이다.

4)

헤겔을 연구하는 것은 내적인 어려움만은 아니었다. 외적인 어려움도 있었는데, 우리의 약간 비밀스러운(사실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으나,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모이거나 공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헤겔 공부는 곧 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교수님들이 무척이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헤겔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운동권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밀히 학습하곤 했으니, 그런 모임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우리는 학내에서 갑작스럽게 긴장된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기 위해 헤겔을 연구한 것은 맞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연구한 것은 아니다. 이런 긴장된 시선에서부터 학내에서 여러 불편한 관계가 출현했으나, 그런 것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철학적으로 더 문제는 당시 철학계를 지배한 아카데미즘이었다. 한국 철학계에서 아카데미즘은 60년대 후반 귀국한 철학 교수, 주로 당시 유럽에 번성하던 언어철학을 공부한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국내에서는 국내 박사 학위 과정이 제도화하면서, 아카데미즘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 대학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소위 졸정제 때문) 많은 학자가 등장한 것도 이런 아카데미즘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아카데미즘이 강조했던 것은 철학적 언어를 엄격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었고, 철학적 연구를 논쟁의 방식을 통해 전개해야 한다는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을 연구하던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식의 아카데미즘에 대해 반발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에서 역사와 삶을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힘을 발견하려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는 오히려 시적인 무게를 지닌 것이어야 했으며, 철학적 연구는 역사를 들어 올리는 힘을 지닌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시간이나 논문 발표 시간에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던 철학 교수님들과 우리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는 교수님들도 나름대로 철학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들은 선배 세대들이 전개했던 소박한 철학 인생관에 가까운 철학에 반발감을 느껴 철학을 이런 소박함에서 구원해 철저한 학문으로서 철학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에 경도한 철학교수는 그들의 선배들이 지녔던 인생관적 철학의 소박함을 다시 부활하려는 듯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의 철학 일지(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1)

1)

나는 최근 정신현상학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책을 냈다. EBS에서 주간하는 시리즈, 고전 해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신현상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청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자면, 전체를 꿰뚫는 줄기를 잡아서 내용을 단순화하여야 했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대체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 어떤 잭인가?

정신현상학은 정체를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절대정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헤겔 자신이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정신이 무엇인가? 대체 이 문제에 부딪히면 종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정신현상학의 전개과정은 헤겔 자신의 세계사의 과정과 그렇게 쉽게 상응하지 않으니, 과연 정신현상학이 역사적 과정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혼란은 절망감을 낳는다. 대체 내가 머리가 나빠서 헤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헤겔이 미친 철학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점차, 대체 내가 왜 정신현상학을 놓지 못하고 대학원 시절인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간이나 붙잡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헤겔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철학자의 비난을 한몸에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크스도 헤겔을 비난한다. 그는 스스로 변증법에 관해서는 헤겔을 계승했으나 이런 변증법을 헤겔의 관념론으로부터는 구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현대에 이르면 헤겔은 이른바 동일성의 철학자로 비난된다. 그런 말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인 아도르노와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가 헤겔을 비판한다. 현대 분석철학에 이르면 헤겔은 언어의 마술에 사로잡힌 둔중한 철학자일 뿐이다.

나는 헤겔을 하면서 주변에 이런저런 철학을 하는 사람을 만나, 이런 비난을 듣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헤겔을 놓지 않았다. 물론 나는 40년간 헤겔만 공부한 것은 아니다. 나는 헤겔의 이해에서 절망감이 들 때마다, 헤겔을 내던지고, 다른 철학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연구한 대표적인 철학자만 해도 마르크스, 프로이드와 라캉, 영화 철학 등 상당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다시 헤겔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남들이 누구나 인정하고 거의 비난 조 또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하는 헤겔주의자인데, 대체 나를 헤겔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만든 그 힘이 대체 헤겔 그리고 정신현상학 어디에서 있단 말인가?

이런 고민을 밝히기 위해 나는 내가 헤겔을 왜 공부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헤겔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하는 일지를 작성해 보려 한다. 나의 철학의 일지가 되겠으나, 여기에 무슨 인생의 모험과 같은 인생샷은 없고 그저 머리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번민만 나열될 뿐이니 흥미는 없을 것이지만, 후일 헤겔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번잡한 얘기라도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2)

헤겔주의자로서 내가 탄생한 것은 1980년 봄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에 처음 입학학 신입생이고 한참이나 어린 후배들과 더불어 대학원에서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교정은 박정희 사후 전두환이 군부 권력을 틀어쥐고 국가 권력 장악을 위해 음모를 꾸밀 때였다. 그때 대학 교정에서는 전두환의 음모를 깨닫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막을 힘은 없었다. 학생들이나 재야 지식인들은 전두환의 음모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섰으나, 그것은 전두환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그해 4월이 되자 학생들의 저항 움직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저항의 시위는 가속화되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 나는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공부하려 했다. 나는 대학 시절 학부 졸업을 후셀의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읽고 썼으며,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현상학을 가르치시던 윤명노 교수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하였기에 그분의 밑에서 현상학을 공부하려 하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원에서는 윤명노 교수님을 대신하여, 한전숙 교수님이 현상학 강좌를 개설했기에 한전숙 교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현상학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진리를 직접 인식할 수 있다는 본질 직관이라는 개념에 있었다. 현상학은 이런 본질 직관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언어 의미론으로 들어가서 의미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가르쳤는데, 당시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 딱 거기에 들어 있었다.

내가 이처럼 현상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 시절부터 실존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니체의 책을 발췌하여 만든 ‘초인의 철리’라는 책)을 읽었고 대학 시절에는 조가경 선생의 실존철학을 옆에 끼고(당시 나의 영문과 친구는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서 나도 흉내 내려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름다운 말에 심취했다. 내 마음속에서 저런 언어가 막힌 것 없이 술술 자유롭게 흘러나오기를 기대했다.

또 나는 문학자로서 사르트르를 흠모했으며 사르트르처럼 살아보려고 밤 새벽까지 술을 먹고, 오전 늦게까지 자기를(당연히 모든 아침 수업은 땡땡이다) 반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르트르처럼 호텔에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는 사르트르가 ‘현대’라는 비평지에 발표한 철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중간 상태의 글을 좋아했다. 그가 쓴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나의 성서이었고 ‘존재와 무’라는 그 두꺼운, 엉터리 번역 책(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이다)을 이해하려고 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끝에 역시 실존철학의 기본적 방법론은 현상학이니 현상학을 이해하기만 하면 모든 게임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현상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3)

그런데 그해 4월 교정이 시위로 흔들리면서 우리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점심 때면 교정을 산책하면서 다양한 대자보를 읽었고 저녁이면 술자리를 가지면서 시국과 철학에 대해 이런저런 논쟁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이미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저항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인 후배들과 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선배 층은 후배 층의 너무 세속적인 말투에 충격을 받았고 반면 그 후배 층으로부터 낭만주의자라는 비난을 뒤집어썼다.

그때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를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후배 층이 나에게 낭만주의라는 비난을 했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즈음해서 낭만주의의 한계를 점차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배 층의 비판은 이런 나의 자각이 마음의 표면으로 솟아오르게 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나는 나를 그렇게 비판한 후배 층에게 속으로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70년대 초반 학번이다. 우리 학번은 내가 대학 4학년 시절 75년 김상진 열사의 의거를 기리는 저항의 봉화를 올렸으나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나의 대부분 친구들음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다행히 그런 군홧발을 피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졸업했고 군에 들어갔다. 그 일년 동안 나의 마음은 비참함으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재 정권에 대한 무기력감에서 나는 한편으로 절망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 나는 술주정뱅이로 전락했다. 거의 매일 아침에서 저녁까지 나는 술집에 앉아 있었다. 수업은 전폐했고 생활을 위해 대학 4년 내내 끊을 수 없었던 아르바이트는 심지어 술을 먹고 가기도 했으니, 매번 쫓겨나다시피 했고, 다행히 다시 또 얻었다.

나는 지금도 대학 졸업식이 생각난다. 나는 부모님은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 같으나 나는 매정하게 졸업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드리지 않았다. 그때 졸업식에 박정희가 참석한다고 해서 보이코트 운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침부터 술에 취해 졸업식장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은 행복했다. 꽃다발을 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당시 대학 졸업생의 취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는 많은 가족과 애인을 데리고 있었다. 나의 세상에 대한 절망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날 벤치에 앉아서 졸업식을 하는 학생을 보면서 나는 내가 졌다고 생각했고 나는 무엇을 더하기도 싫었고 이 세상에 남아 있기도 싫었다. 나는 76년 대학을 졸업하자 군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79년 5월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때까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논리는 사르트르나 실존철학의 참여 개념에서 나왔다. 그 관성에서 현상학을 공부하기로 했지만, 참여 개념에 기초한 낭만주의적 저항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참여에 기초한 저항 개념과 다른 논리를 깨달을 수는 없었다. 그때 형은 낭만주의자요 하는 비판은 얼어붙은 내 마음의 빙판을 깨트린 것이다.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2)

4)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도 변화하게 된다. 작가는 원망감을 지니면서 냉소했던 아버지에게서 어릴 때 친밀했던 아버지를 되찾게 된다. 이런 태도의 변화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곧 작은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이다.

작품 속에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이 등장하여 잘못하면 지리멸렬할 수도 있었던 소설을 구해준 것은 바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와 아버지의 작은 아버지의 관계가 서로 뒤얽히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일 것이다.

작은아버지의 에피소드는 이야기 초반, 중반, 결말에 흩어져 등장하면서 상승하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처음 등장하면서 작은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주망태였다. 작품 중반에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작은아버지는 면 당 위원장인 아버지를 토벌군에게 자랑하면서 오히려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 죄책감이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으로 변한 것이다.

작품의 끝에 작은아버지가 다시 등장하여 아버지의 유골을 껴안고 울면서 마침내 둘은 화해하게 된다. 그런데 작은아버지와의 관계의 발전은 딸인 작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매개하고 있다. 이 매개가 소설의 2/3 부분에서 출현하면서 소설적 갈등의 전환점을 이룬다. 그 매개는 곧 작가의 가출사건이다.

작가 역시 아버지에 대해 원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원망감은 아버지 때문에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되는 데, 작가는 그 때문에 공부를 폐기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나날을 보낸다. 아버지가 계곡 너럭바위에서 작가가 읽던 소설책을 낫으로 베어버리자 작가는 그 길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이때 작은아버지가 어떻게 안 것인지(아마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지 않았을까?) 자전거를 타고 작가를 따라와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만 작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때 작은아버지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족 또는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길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으로서 삶의 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아버지도 이미 그런 탈출을 모색했지만 그래서 끝내 버리지 못했고, 아버지도 다른 빨치산과 달리 구박받을 줄 알면서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작가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 가족이라는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이런 뿌리를 운명애처럼 인수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다시 되돌아선다.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쉰내를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느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 듯도 했다.”

정겹기도 하고 역겹기도 한 것이 곧 사람으로서 삶이다.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자신의 결혼식이 취소된 사건을 다루는데, 남편 될 사람이 부모의 강압으로 가족이냐 여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작가는 자신이 결단을 내려 결혼을 취소함으로써 담담하게 모든 운명을 인수한다.

5)

작가가 집을 나서려다 돌아선 것이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정점이다. 이 정점 이후 작가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친밀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되살리게 된다. 작가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모습을 회상한다. 어느 날 밤에는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면서 아버지는 그곳이 응암동 외삼촌 집이라며 거기 외삼촌이 보인다고 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아버지가 말한 외삼촌을 찾는다. 작가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멀리 아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응암동 외삼촌의 모습을 찾으려는 딸의 모습을 그려낸다. 딸이 아버지 등 위에서 까치발을 하고 엉덩이를 들어 고개를 내밀어 “어디, 어디”하고 찾는 모습이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 응암동이란 곧 아버지의 말을 통해 작가에게 전해진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이제 사상적인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사람으로서 삶이 살아가는 구례와 같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았으나 작가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이 유토피아의 대강을 그려내고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곧 클레멘타인의 노래이다. 딸을 홀로 남겨두고 금을 캐러 갔던 아버지는 금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딸은 이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회한을 담은 이 노래는 작품 속에 반어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 의미는 곧 자기를 버려 두고 금을 캐러 떠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원망[怨望]과 금은 없더라도 아버지가 자기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딸의 원망[願望]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통해 새로운 세대인 노랑머리를 한 소녀에게 전해진다. 작가는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이제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가 약속한대로 미용사 시험에 합격하면 술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 구례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아버지가 필요하다. 딸을 결코 홀로 버려 두지 않는 아버지 말이다. 그런 규범은 거꾸로 자식에게도 요구된다. 자식 역시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인 충직함이 요구된다.

이런 충직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윤학수의 에피소드이다. 윤학수는 지역사회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아버지가 겪은 빨치산의 투쟁사를 연구한다. 그런 학수가 어느 날 아버지의 뺨에 손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동네 경로당으로 쫓아간다. 그러면서 작가의 표현대로 불학무식한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손댄 사람을 찾아 혼내려 한다. 아버지는 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학수를 집에 불러 술잔을 내려준다. 학수는 이제 자식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6)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아버지의 위장 자수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산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새벽 불빛이 켜진 동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위장 자수를 하기 위해 산을 내려 갔을 때 “세상은 환한 불빛으로 아버지를 맞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환한 불빛은 곧 작가가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보았던 응암동의 아른거리는 불빛일 것이다. 이 불빛은 곧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인 구례를 의미한다. 거기에는 혈육의 쉰내가 정겹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게 피어나는 곳일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즉 사람으로서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삶을 그동안 무겁게 뒤덮고 있던 원망감을 벗어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을 괴롭힌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야 한다는” 작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한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7)

많은 독자가 작가의 작품에서 감동하는 것은 작가가 제시하는 사상으로서 삶에 대립하는 사람으로서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사상과 사람은 대립하는 것일까? 사상이 사람을 떠나서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게릴라가 민중에서 고립되어서는 한 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사상을 떠난다면, 그런 삶이란 어쩌면 고여서 서서히 썩어가는 연못과 같은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딸을 혼자 두지 않는 아버지나, 불학무식하게 충직한 아들의 이면을 작가는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상의 통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작가가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1)

1)

제목에 나온 ‘해방일지’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착각한 것 같다. 작가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해방일지’란 해방 시기에 작가의 아버지가 겪은 경험을 적은 것으로 이해했다. 작품을 읽다 보니, ‘해방일지’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작가가 겪은 경험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여기서 해방이란 아버지가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이란 사슬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일 텐데, 아버지의 삶을 묶어 놓았던 사슬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작품의 전반부에서 빨치산이었던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혁명가로서의 진지함을 평생 잃지 않는다. 작가의 아버지는 평생 이념을 지키며, 전봇대처럼 꼿꼿하게 살다가 끝내 전봇대에 부딪혀 뇌진탕으로 돌아가신다. 작가의 어머니는 사회주의를 “가난한 자가 인간 대접을 받는 사회” 정도로 이해하면서도 성스러운 신념으로 간직하는 데 그것은 풋사랑에 지나지 않는 첫사랑을 평생 기억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작가의 냉소적 시각은 두 빨치산의 혁명적 사상이 지닌 허점을 놓치지 않는다. 작가의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며 사회주의 사상을 몸으로 겪기보다는 문자를 통해 배운 의식만 앞선 사회주의자다. 이런 아버지는 농사를 짓지만, 노동은 건성으로 하며 평생 정치적인 관심을 잃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 국졸이지만 그 당시로 본다면 지적인 인텔리에 속한다. 부모님의 대화는 필수적인 것을 빼놓으면 대부분 정세 판단이나 과거 빨치산 체험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이런 아버지에게 그래도 장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유물론적 솔직함에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자기의 딸인 작가의 외모를 평가하면서 하의 상 정도로 평가한다. 작가 자신은 아버지 평가 덕분에 평생 외모에 관한 관심을 버리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해 졌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 아버지가 “사람 살이에 아주 중요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놓친 것 같다”라고 평가한다.

이런 빨치산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고립되어 있다. 이 고립된 모습은 빨치산을 아버지로 둔, 장례식장 황 사장과 그 아버지의 동지였던 어머니의 포옹을 작가가 그려낸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너무 신랄해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2)

작가는 빨치산의 딸로서 사회로부터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이 때문에 부모를 원망한다. 작가는 가능한 한 부모와 사회, 모두에서 떨어져 살고자 하면서 소설가가 된다.

작가는 평생 사회주의자가 아닌 아버지를 알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장례식을 겪으면서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흩어져 있다가, 장례식을 거치면서 하나로 모여들어 마침내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다.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은 마치 볼레로의 음악처럼 조금씩 더 크게 나타난다. 처음엔 아버지의 지게에 꽂혀 있는 “빨갛게 익은 맹감과 연자주빛 들국화”의 형태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동네 자청 머슴으로서 온갖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영자의 암내를 치료하게 하여 결혼할 수 있게 해주며,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경희가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구해주기도 한다.

마침내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은 아버지가 살려준 순경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는 빨치산 시절 보급 투쟁에서 다락에 숨은 순경을 순경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목숨을 구해주었다. 후일 순경은 빨치산에 가담하겠다고 아버지를 찾아왔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쫓아 보내고 만다. 후일 다시 만난 순경이 그렇게 쫓아 보낸 이유를 묻자 아버지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 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작가는 이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들어왔다고 하면서, 처음으로 딸로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 본다.

3)

아버지의 옛날 모습은 곧 사회주의 사상의 혁명 전사로서 모습이었다. 이제 새로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으로서 모습이다. 작가는 두 아버지의 모습을 사상과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여기서 작가는 사상과 사람을 대립시키면서 사회주의자가 사상에 사로잡혀 사람을 놓친 것이 아닌가 비판한다. 작가는 거꾸로 사람이야 말로 뿌리에 해당하며, 사상은 그런 뿌리에서 나온 가지에 불과하고 이런 가지는 아무리 잘려 나가도 뿌리는 영원히 남아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런 뿌리를 작가는 구례라는 장소를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었으며 빨치산으로서 전장이었고 또 체포 이후 남들과 달리 돌아온 고향이다. 이곳은 아버지와 같은 빨치산도 살고 그런 빨치산을 토벌한 우익 박한우 선생과 같은 사람도 살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해 다리를 잃고 아버지 같은 사람에 대해 원망감을 지닌 목발 짚은 노인도 산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후손들도 아버지의 전쟁에 유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육사에 입학하지 못한 장손자 길수 오빠, 빨치산을 아버지로 둔 황 사장, 어머니의 레포였던 여 동지의 딸인 떡집 언니, 아버지를 존경하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박동식, 아버지의 전쟁을 역사로 기록하려는 지역사회연구소 연구원 윤학수,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로서 아버지에 원망감을 지닌 작은아버지 등이 모여 산다. 이 속에는 아버지가 자신의 첫 부인의 남동생이나 여동생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어머니 첫 남편의 동생이 아내와 더불어 찾아오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 구례는 마치 인연의 끈이 촘촘하게 엮여 있으면서 사람으로서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장소이다.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견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

이 속에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