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 17-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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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 17-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

 

1) 비애감

그리스 도시 국가는 곧 민족 국가였다. 그리스 국가는 국가와 혈연, 국가와 개인 사이에 직접적 결합 또는 상호 균형을 통해 존재했다. 물론 이 균형은 서로 대립된 두 원리 사이에 서로 침범하고 다시 서로를 회복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동적인 균형이었다.

 

그리스 국가가 후기로 가면서 내적으로는 개인의 자각이 발전하면서 내적으로 개인은 국가에 대한 관습적 복종에 의문을 품으면서 국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선동한 알키비아데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외적으로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 이루어졌던 도시 국가 동맹은 해체되고,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분열에 처했다.

 

내적이거나 외적인 분열을 거쳐가면서 고대 국가는 새로운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으니, 그 첫 걸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젊은 나이로 죽음으로써 그가 맡았던 역사적 역할은 로마가 담당하게 되었다. 마침내 로마는 외적으로는 거대한 통일 제국을 형성했고, 내적으로는 만민법을 통해 개인에게 자유로운 법적 인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는 황제의 자의적인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 통일과 자유이었다. 이런 시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새로운 정신의 출현을 알렸다.  

 

그리스 국가의 분열에서 알렉산더를 거쳐 기독교 공인 이전의 로마 제국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대를 흔히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지만, 헤겔은 이 시대를 고전 시대의 몰락기로 본다. 새로운 사회가 배태되고 있던 로마 공화정 시대와 초기 로마 제국까지 고전 시대의 몰락기에 집어넣는 것은 이상하지만 로마 제국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새로운 정신이 출현하는 헤겔의 시대 구분에서는 불가피하다.

 

고전주의 시대가 전성기에서 몰락기로 전환하면서 고전적 예술 형식은 몰락하는데, 헤겔은 이런 몰락의 징조를 신상 즉 조각 입상에 어려 있는 비애감을 통해 발견한다. 조각 입상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가운데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위의 작품은 AD 130-138년 경 작품, 로마 하이드라누스 황제의 애인으로 알려진 안토니우스 상이고, 지금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다. 이 작품에서 헤겔이 말한 비애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전성기 시대의 작품에서도 고요한 가운데서도 얼핏 이런 비애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이 비애감은 그리스 신이 지닌 개별성 때문이라고 본다. 이 개별성 때문에 신들은 상호 투쟁할 수밖에 없고, 이런 투쟁 속에서 개별적인 신들 자신이 더 높은 최고의 신에 의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이 운명이 조각입상에 어린 비애감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슬픔은 그들의 운명을 형성하니 까닭인즉 그것은 무언가 한층 더 높은 것이 그들 위에 있다는 점, 그리고 특수함으로부터 그들의 보편적 통일로 향하는 이행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1]

 

2) 희극

헤겔은 고전 예술의 몰락 과정을 그리스 말기와 로마 시대로 구별하여 서술하는데, 그리스 말기 예술의 전형적 특징은 희극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로마 시대의 전형적 예술은 풍자이다. 희극이든 풍자이든 이제 예술의 핵심적 주제가 되는 것은 실체적 신이 아니라 주관적인 개인이다. 이 주관적 개인은 그 이전 시대 관습의 지배 아래 있던 개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근대의 무한한 주관성으로서 개인도 아니다. 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개별적 개인이다.

 

그리스 말기에 등장한 희극은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발전하면서 국가에 대한 관습적 복종이 해체되면서 나타나는 현실을 타락으로 생각한다. 작가는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전개되는 일상적 삶을 자기를 전도하고 자기를 해체하는 아이러니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술은 이런 일상적 삶에서 개인의 자기 전도와 자기 해체를 노골적으로 폭로하는데, 작가는 이런 폭로를 통해 자기의 주관적 자유가 자기 부정을 통해 다시 말하자면 이런 일상적 삶의 자기 파괴를 통해서 실체적 정신에 대한 복종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오염을 겪는 어리석은 현실을 밝히는 방식은 현실이 자체 내에서 자기를 파괴하는 식이다. 이는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Richtigkeit]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 이런 현실의 반영상[Widerschein]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자기에게 확고하고 지속하는 위력으로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현실의 측면에 자체 내에서 진리에 직접 대립하는 힘을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2] 

 

헤겔은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극을 다루었던 방식이라 하는데, 여기서 희극은 여전히 실체적 정신에 대한 복종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리스 정신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3) 풍자

로마 시대 가장 번성한 예술은 풍자이다. 풍자 예술에서 작가는 현실에 대립한다. 현실에서 개인은 이기적 목적과 세속적 욕망을 통해 살아간다. 작가는 고결한 덕성이라는 입각 점에 서서 그에 대립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폭로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작가가 서있는 덕성조차도 사실은 개인적 목적의 일반화로부터 나온 것이니, 세속적 현실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덕성은 실체적인 정신과 구분되는 주관적 정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대립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풍자는]… 주관으로서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주관이 추상적 지혜 속에서 선과 덕에 대한 인식 및 의지를 갖고 타락한 현재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도록 만든다. 이런 대립은 해결 불가능하니, 왜냐하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경직된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립으로부터 양 측면의 산문적 관계가 형성된다.”[3]

 

그리스 희극에서는 여전히 도시 국가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들어 있다. 하지만 로마 시대 풍자에 이르게 되면 도시 국가와 같은 실체적인 것은 사라져 버린다. 남아 있는 것은 개인적 주관일 뿐인데, 풍자가 아무리 일반적 선과 덕을 표방하더라도 주관성을 넘어가지 못한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서 예술적 형상의 의미는 이념 자체 즉 정신이었다. 이제 풍자에 이르게 되면,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예술을 통한 현실에 대한 비판은 곧 개인적 덕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관계를 산문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징주의 예술 형식은 원래 의미와 형상의 괴리에서 출발하여 양자의 유사성을 향해 나가며 유사성이 발전하면서 끝내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작가가 개인적으로 설정한 의미로 전락하면서 비유라는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반면 고전주의 예술 형식은 의미와 형상의 일치에서 출발하면서 점차 양자의 괴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제 풍자에 이르러 예술적 형상의 의미는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주관적 의식 속에 현존하는 의미[즉 덕성]로 대체되니, 여기서 고전적 예술 형식은 해체된다.

 

4) 운명

실체적 정신을 상실한 개인은 상호 대립 속에서(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개념에서 보듯이) 그 스스로 자신을 통일하는 원리를 생성한다. 그것이 곧 “내적으로 추상적이며 비형상적인 것” 즉 “필연성과 운명이다.” 그런 운명은 개별적 인격을 강제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불가해하고 비개념적인 것”[4]이다.

 

알 수 없으나 필연적인 운명의 힘은 “그 자체로는 어떤 형상화나 개성을 갖지 않은 것이다.” 운명은 로마 황제의 절대적인 자의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황제는 이런 필연적 운명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제 고전주의 시기 말기에 이르러 세속적 현실과 불가해한 운명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시대, 이런 운명은 더 이상 자기를 표현할 수 없으니, 마침내 예술은 출현하지 않는다. 헤겔은 로마를 지나가 새로운 신이 출현하면서 다시 예술이 부활하게 된다고 말한다.


[1] 미학강의 2권, 116쪽

[2] 미학강의 2, 127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3] 미학강의 2, 130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4] 미학강의 2권,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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