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

 

1) 고전 시대

앞에서 언급했지만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의 표현 기호이다. 이 정신은 마침내 절대 정신으로 발전하는데, 그 토대는 바로 국가이다. 이 국가는 사회적 상호 관계 위에서 출현한 사회 정의나 공동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개별적 의지의 통일체이니,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즉 일반의지이다.

상징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었던 동방 국가(인도, 페르시아, 이집트의 국가)나 고전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는 고전 시대 국가(앞으로 고전 국가로 통칭하기로 하자)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헤겔은 양자 사이에 근본적 차이를 설정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동방 국가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억압이 일반적이었지만 고전 국가에서는 자유가 존재했다는 데 있다. 즉 고전 국가에서는 평민의 자유가 보존되었고 이주민에게 일정한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도시 국가와 도시 국가 사이에서도 상대적 평등이 인정되었다. 물론 이런 자유나 평등은 정점에 이르렀을 때를 말하며, 그 과정에서 억압과 불평등이 존속했으나, 동방 국가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자유나 평등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평가되는 역사적 근거는 고전 시대에서 적어도 그 전성기에서는 왕과 귀족에 대한 평민의 투쟁을 통해 민주제와 공화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1] 같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이처럼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 시대가 민주제와 공화제로 나갈 수 있었던 역사적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니 생략하기로 하자.

헤겔은 고전 시대에 찬탄함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대체로 두 가지 한계가 언급된다. 우선 고전 시대에서 개인의 자유가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전 시대에서 개인은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의지인 국가에 복종했지만 그것은 근대에서와 같이 자각적으로 복종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관습적으로 형성된 민족 의식[2] 또는 위대한 영웅에 대한 감정적 신뢰를 통해서 복종했다는 것이다.[3]

또 하나 헤겔이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고전 시대[여기서는 로마 공화정까지만 다루어진다]의 도시 국가 사이에는 협력과 대립의 관계가 무상하게 변천했는데 그런 가운데 한번도 동방의 국가가 도달했던 것과 같은 통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도시 국가는 그리스에서처럼 공동의 동맹을 만들어내거나 로마 공화정에서처럼 자율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동맹 도시보다는 발전된 형태 즉 동맹 도시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의 동맹 관계조차 후일 로마 제국이나 그 이전 동방 국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통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4]

 

2) 신들의 전쟁

고전 시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런 한계 때문에 헤겔은 고전 시대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면서 여기서 개별성이 출현했으나 그 개별성은 일반성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이런 매개가 결여된 ‘직접적 결합’이라는 원리가 고전 시대 시대 정신을 규정하니 우리는 이런 특징을 예술적 표현에서 찾기 전에 먼저 종교적 표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그 점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정신적인 것을 내실로 삼고 자연적인 것은 단순한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 그리스 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리스 신은 아직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기독교 신]은 아니며 인간적 한계를 지닌 특수한 신이고,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특정 개성을 지닌 정신이라고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를 띠는 것이 그리스 신이다. 신의 정신이 아직 여기서는 스스로의 정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곳에 놓여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표현을 위한 요소에 불과하다.”[5]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징 시대처럼 동물 신의 모습이나 아니면 이슬람의 카바(흑색 돌)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신 개념에 대한 헤겔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신의 본질이 바로 인간 공동체의 의지 즉 일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에서 신이 본성은 이성적으로 자각된 것은 아니고, 감각적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자각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는 우연하다. 이런 우연성은 상징주의 시대 자연 신의 모습에서 빌어오든가 아니면 지역적으로 전래하는 신으로부터 빌어온다

하지만 그 우연성만 본다면, 전래의 상징적 신이 수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미 구 시대 신의 형태는 새로운 신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구 시대 신은 더 이상 자연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제 정신적 힘을 의미하게 된다.

구 시대 신은 자연적인 것이며 불명료하고 우연적인 것이며 환상적인 것이지만 새로운 신은 정신적인 것이며 명료한 것, 필연적인 것이고 실체적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구 시대 신과 새로운 신 사이의 투쟁[6] 또는 신의 변용[7]을 그려내고 있다.

신의 이런 차이에 관해서 헤겔은 예를 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거론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구 시대 자연신인 티탄 족의 신인데도 인간을 위해 불과 기술을 가져다 준다. 헤겔은 이 사실은 얼핏 불합리해 보이지만, 이런 신화에서 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이때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설명을 소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에피메테우스가 모든 생물에게 살아가기 위한 고유한 기술을 나누어주었는데 프로메테우스가 나중이 보니 인간에게 줄 기술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헤파이토스와 아테네로부터 불의 기술과 직조의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 사이에 끝없는 분쟁이 벌어지니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헤르메스를 통해 정의를 선사했다고 설명한다.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런 설명을 통해 볼 때 불과 직조의 기술은 아직 실체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단순한 생존의 기술, 자연의 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록 프로메테우스가 욕구의 만족을 위한 기술을 주었지만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구 시대 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8]

헤겔은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통해 구 시대 신인 프로메타우스와 새로운 신인 제우스, 헤르메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부각한다.

 

3)신과 인간

더구나 신이 지닌 우연적인 모습은 이제 정신적 힘의 표현이 되므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신은 개인적 의지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곧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라고 말한다.

신이 자기를 이런 아름다운 개체의 형상으로 드러낼 때 헤겔은 이를 “그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을 마치 상징주의 시대에 자연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범신론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자연이라는 기호를 상징적으로 즉 마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 시대 신상이 신이 현존하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헤겔은 이를 어디까지나 신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표현이란 곧 이 시대 예술을 의미하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드러내는 예술적 기호라는 의미이다. 달리 고전 시대 신상은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고전 주의 시대 신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작품으로 간주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현존으로 간주되니, 양자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서사시에서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중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 인간적 사건이 신의 행위로 설명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신의 행위는 인간의 감정을 반영한다.

헤겔은 예를 들어 호머 일리아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거론한다. 아킬레스의 친구 파틀로클로스와 트로이의 헥토르가 싸울 때, “어슴푸레한 어둠에 몸을 감춘 신(아폴로)가 혼전을 틈타 그에게 다가와 등과 어깨를 내리치며 투구를 벗겨 내고” “그의 손아귀에 있는 청동창 역시 부러뜨리며 그의 어깨에서 방패를 끌어내리고 갑옷을 벗긴다.” 이어서 호머는 비로서 에우포르보스가 창으로 파트로클로스의 뒤에서 어깨 사이를 찌를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헥토르가 신속히 다가와 창으로 복부의 약한 부분을 깊숙이 찌른다. 이런 서술을 보면 인간의 행위가 신의 행위로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서사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서로 중첩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은 호머의 이런 서술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가 특수한 사건들을 그러한 신의 등장을 통해 설명하는 모든 경우에, 신들은 인간 내면 자체에 내재하는 것 즉 그의 고유한 열정과 고찰의 힘이거나 그가 처한 상황의 일반적 힘들 즉 인간에게 닥치는 것과 이 상황의 귀결로 그에게 발생하는 것의 힘이자 근거이기 때문이다.”[9]


 

[1]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그리스 로마 사회에 대해 각기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들이 왕에 복종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에 바탕한 상하 관계에 의한 것도 … 아니고, 가부장제 지배에 의한 것도 아니고, 명문화된 법적 지배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함께 살아 가려면 …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왕은 … 개인적 위엄이 있었다.”(역사철학강의, 227쪽)

“로마에 이르러 겨우 자유라는 일반원리 또는 추상적 자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추상적인 국가와 정치와 권력을 구체적 개인 위에 두고, 개인에게 철저한 종속을 강요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 권력에 대립하는 인격을 창출한다. 인격이야 말로 법의 근본적 기초이기 때문이다.”(역사철학강의, 275-276쪽)

[2] 이 민족의식은 씨족이나 부족을 통해 형성되는 혈연적 일체감과는 구분된다. 도시국가에서 다양한 씨족, 부족은 해체되며, 그 사이에 다양한 혼인이 교차되면서 역사상 민족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아테네 민족이라든가 로마 민족 등이다.

[3]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의 다음 글을 참조로 하라.

“국민은 전쟁터에서 왕의 용병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몰려서 예속미으로서 마음에도 없이 싸우는 것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존경하는 주군을 따르는 자로서, 주군의 전공과 명예의 증인으로서 또 필요하다면 주군의 호위로서 싸운다.”(역사철학강의, 228쪽)

또는 미학강의에 나오는 다음 글도 참조하라.

‟그리스 인륜적 삶에서 개인은 독자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로웠으되, 현실의 국가에서 현전하는 일반적 관심 … 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륜의 일반성과 내적, 외적으로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는 그리스적 삶의 원칙에 적합하게 평온한 조화를 이루었으니” (미학강의 2, 27쪽)

[4] 헤겔은 그리스 사회에 대해 로마 사회가 가지는 차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로마 사회는 후일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한편으로 자유로운 인격이 출현하며, 다른 한편으로 로마법의 지배가 출현한다. 동시에 이 시대 기독교가 출현하는데, 헤겔은 그 핵심 원리를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관계에서 찾는다. 헤겔은 이런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로마가 출현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간주한다.

헤겔은 그 역사적 원인을 로마가 주변의 민족국가로부터 추방된 자 또는 도덕들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출발했다는 데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적 원인이야 어떻든 헤겔은 로마의 정신을 그리스 정신과 구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정신은 기쁨과 명랑함과 만족으로 충만한 형태를 취해 추상적 세계에 틀어박히는 일이 없다. …그 때문에 개인의 덕도 공동체 정신이 넘치는 예술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 인격과 같은 것이 거기에는 아직 없었다.”(역사철학강의, 275쪽)

그리스 시대 개인은 관습적으로 길러지는 덕성[arete]을 통해 공동체적 의지로 통합되었으나, 로마 시대 개인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니 이런 욕망을 공동체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법의 원리가 출현한다. 이 법은 강제적 힘에 의해 강요되니, 이게 바로 로마 시민의 덕성(즉 virtue)이다.

“주관의 내면성이라는 원리는 우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내용을 밖에서부터 지배자 내지 통치자의 특수한 의사라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역사철학강의, 277쪽)

그러나 헤겔은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 사이의 차이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듯 보인다. 적어도 공화정으로 나가는 시기 그리스 사회나 로마 사회는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가 제정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 시대 역사의 종합적 결과이지, 본래 내재하는 속성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떻든 고전적 예술 형식을 논하는 자리에서 로마의 예술은 후기 즉 그리스적 전성기의 해체기에 주로 다루어진다.

[5] 헤겔, 역사철학강의, 240쪽

[6] “반면 티탄들은 추방당하여 지하에 거주해야 하며 혹은 오케아노스가 그렇듯 밝고 명랑한 세계의 어두운 가장자리에 머물거나 기타 다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헤겔, 미학강의 2권, 67쪽

[7]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이제 단순한 자연욕구와 그 만족에 제한되는 인간의 행동이 뒷전에 밀려감을 발견한다. 자의식적 정신에서 발원하는 법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 옛 정의는 즉 테미스와 디케 등은 무제한적 타당성을 상실하며,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니 단순한 지역성은 비록 그것이 여전한 역할을 하지만 보편적 신의 모습으로 변신하니, 그들에게서 지역성이 그저 흔적으로 잔존할 뿐이다.”헤겔, 미학강의 2권, 69쪽

신들의 변용에 관한 구체적 예를 들자면, 포세이돈은 오케아노스와 같이 바다의 신이지만, 그에게는 트로이의 건설자이고 아테네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특성이 부여된다. 아마도 해양 무역을 보호하는 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서 헬리오스의 자취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또한 질서의 신이 된다. 에베소의 여신 디아나는 자연의 생산적 힘을 상징하는 옛 신이지만 원래 달의 신을 의미하는 아르테미스는 이제 동물을 사냥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신이 된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대지의 여신이었지만 그리스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변모한다.

[8] 헤겔, 미학강의 2권, 61쪽 서술을 참조하라.

[9] 헤겔, 미학강의 2권, 111쪽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문성원(한철연 회원, 부산대 철학과)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앞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1. 많은 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만, 청년 시절 제게 헤겔은 무엇보다 ‘자유’의 철학자였습니다.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지요. 진보의 순서를 문명권에 따라 공간적으로 배치한 것이나 물질적·경제적 동인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 따위는 맑스 같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극복되는 시대적 한계로 여겨졌죠. 이런 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자기의식의 원리에서 출발한 자유는 산업화로서의 외화와 그것의 자주적 전유를 그 전개 형태로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 자유는 산업화와 자주를 아우르는 근본 틀로 취급될 여지를 갖겠지요.

2. 그런데 이 ‘자유’는 최근에 우리가 여러 번 목도했다시피 내용 없는 공허한 울림으로 되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자유가 운위되는 양태는 매우 자의적어서, 실제로는 자신의 좁게 겨냥된 과녁만을 노릴 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을 수습하거나 해결하는 데는 무책임하며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자유롭죠. 흔히 말하는 대로 아집과 무지와 무능의 소치라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데에는 애당초 자유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자기 중심성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합니다만, 알다시피 이때의 보편은 실상 시대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한정된 ‘보편’이죠. 게다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그런 특정한 잣대마저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덕택에 지금 우리는 권리와 법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전횡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3. 이런 모습이 자유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부정적 면모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태일 겁니다. 이념의 외화와 자기복귀라는 틀이 한 때 호소력이 있었던 건 그것이 자기 확인과 자기 확장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아직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고픈 집단이 있겠으나(아마 북한―적어도 현재의 주도적 지배층―의 경우는 여전히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드러난 숱한 문제들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주체는 단일하지 않을뿐더러 궁극적으로 단일해질 수도 없다는 것, 각각의 주체는 재현의 실패를 지시하며1 그런 실패가 계속되는 한에서 요구된다는 것, 또 주체의 자유란 이 같은 실패가 일회적이지 않게 하는 선택의 기제이고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집단적 자유의지(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를 포함해서―의 실체라는 것, 등등이 그간의 사태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일반적 결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렇다고 자유의 여지를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확실성을 보장받으려는 과도한 목적론적 구도를 포기하고 자기중심적 외화가 초래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을 충분히 경계한 채로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목표에 얽매인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자유’가 주도적 모토로 내세워질 수 있는지, 오히려 퇴행적 발상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지 않은지 의심스러워 하는 것이죠. 더러 얘기되듯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자유인가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 자유 개념의 특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2

5. 외화로서의 산업화와 자기복귀로서의 자주를 주된 계기로 삼아 지나간 일들을 꿰어보려 했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그동안 불거진 예기치 못했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일이 긴요할 겁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틀의 수립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테지요.

 

 

1. 여러 문제 가운데 제가 특히 흥미롭다고 여기는 우리 현실의 사안으로는 무엇보다 세대 문제를 들고 싶군요. 그중에서도 근래에 두드러진 세대 간의 불평등 논란이 관심을 끕니다. 세대의 문제는 시간적 추이와 관련된 문제고 그런 점에서 변화, 발전의 문제이기도 할 테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에서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일반적인 형태로 논의될 따름이었겠죠.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도 체험의 단절적 변화가 세대의 구분에 새겨지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을 한 탓에 세대 간의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2. 이제 산업화 이전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겠고, 70년대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확연히 노년층에 접어든 산업화 세대와 87년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 할 이른바 386(이 이름이 등장했던 1990년대초 당시에 386이었지 현재는 586을 거쳐 686에까지 이른) 세대,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성장기를 보낸 X, Y, Z의 알파벳 세대 등 갈수록 구분도 촘촘해지는 세대들이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죠. 여기서 특히 세기의 전환기를 어려서 겪은 이들, 대체로 1980년대 중반쯤에 태어난 Y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M(밀레니엄) 세대라고 하고, 이들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묶어서 MZ 세대라 부르는 것 같군요. 그런데 불평등과 관련한 논란의 초점은 현재 사회의 중심 세력이라 할 386세대와 2,30대 청년층을 이루는 MZ세대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3.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한국의 세대를 ‘자원 동원 네트워크’라고 이해합니다.3 단순히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이상이라는 거죠. 특히 그는 386세대가 성공적으로 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층이 되었으며, 그 다음 세대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철승 교수가 드는 386세대의 성공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어요. 첫째, 베이비 붐 세대라서 수가 많다는 점, 둘째,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균질성과 응집력을 획득했으며 학생-시민-노동조직의 연계를 이루어 내었다는 점, 셋째 이른바 세계화에 편승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는 점.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세대는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바람에 휘말리고 만 탓에―IMF 외환위기가 그 단적인 징표겠죠― 시장이 야기하는 불평등한 ‘신분의 위계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권력의 과두제화와 독점’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청년 세대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는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테죠.4

4.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와 다른 세대의 소득격차가 커져가고 있고, 세대간 정치권력의 분포 비율 면에서도 이 세대 이후 젊은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여러 통계 도표를 통해 제시합니다.5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요. 그 주된 논거는 세대간 불평등에 비해 모든 세대 내의 계급간·계층간 불평등이 더 심하며, 따라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및 갈등의 주요 원인은 세대 격차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세대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문제라는 것이지요.6 저는 이 논란에서 어떤 편을 들 만큼 우리 사회의 실증적 사실에 밝지 못합니다. 양측이 내놓는 통계들은 나름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요. 다만, 세대내의 불평등 역시 크다고 하더라도 386이라는 1960년대 출생 세대의 경제적·정치적 비중이 다른 세대가 같은 연배일 때에 비해 다소 큰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차원과는 조금 다른 결의 사태에 주목해 보고 싶군요.

5. 저출산의 문제야말로 심각한 세대의 문제이고 또 세대간의 문제가 아닐까요? 노령층을 부양해야 할 젊은 세대의 부담이 늘어난다든가 한국 사회의 소멸이 우려될 지경이라든가 하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예상되는 결과 이전에 자식 세대가 출산을 기피하게 만든 부모 세대의 책임을 먼저 문제 삼아야겠죠. 그리고 지금의 청년 세대가 처한 상황의 엄중함에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저는 이것이 앞서 말한 공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산업화가 낳은 문제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증상이 저출산이고, 여기에 대한 대책의 부재가 사회 발전 방향과 비전의 공백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윤석렬 정권의 탄생과 같은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6. 저는 몇 해 전에 저출산이 ‘생물학적 파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7 작년에는 영국의 BBC가 ‘한국은 출산 파업 중’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저출산 사태를 보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8 사전의 협의도 주도하는 조직도 없는,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집단적인 저항인 셈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청년 세대를 낳은, 그리고 현 상황을 만든 세대를 향한 (아마 오늘의 발표자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항의겠지요.

7. 산업화한 국가들 대부분이 저출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인구수가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세의 위기를 개체수 조절로 극복하는 선구적 모습을 보인다고 자위하기에는 출산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들이 너무 팍팍하고 출산율의 저하가 너무 가파릅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논의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급속한 압축 성장의 대가라는 점이죠. 극심한 경쟁과 수도권 중심의 과밀집 등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그 결과지요. 여기에 덧붙여 저는 축약된 과정 탓에 욕망에 대한 반성과 조절의 기회가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구의 68혁명에 해당하는 계기가 생략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늘어난 소득에도 불구하고 더욱 돈에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이 집약되는 오늘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386세대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비록 압축적 과정 때문에 오히려 지연된 민주화라는 과제에 치여 스스로는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8.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이 ‘어떻게’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 헤겔이라면 혹 압축적 산업화에 대립하는 계기로 탈성장을 내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탈성장 담론이 자리잡을 여지는 얼마나 될까요? 그것은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여전히 고초를 겪고 있는 한반도 주민의 일부가 그 반대의 극을 추구하기 위해 영세중립국을 내세우는 일9보다는 더 현실적인 시도일까요?

9.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에는 두 개의 원작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1983)가 직접적 원작이지만, 무라카미의 그 단편이 제목에서부터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1939)을 염두에 둔 것인 데다가, 이창동 감독 자신도 포크너의 그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영화 한 장면에 그 소설이 실린 포크너의 책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종수(유아인 분)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벤(스티브 연 분)이 그 책을 구해 카페에서 읽고 있는 것으로 나오죠. 그거야 어쨌든 이 세 작품은 다 같이 헛간(<버닝>의 경우 비닐하우스)을 태우는 걸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세 작품의 배경이 다르듯, 태운다는 행위의 의미도 조금씩 다릅니다.

10. 포크너의 헛간 불태우기는 소작농의 저항을 표현하죠. 지주에게 헛간은 대단한 재산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것도 아닙니다. 몰래 불 지르고 적당한 손해를 입히기에 적합한 장소지요. 그래서 그 일은 추적당하고 재판받는 자못 심각한 사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헛간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죠.10 적어도 그것을 태우는 소설 속의 부유한 젊은이에게는 말입니다.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헛간, 그러니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져도 별 지장이 없는 헛간을 골라두곤 마음 내킬 때 몰래 태웁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얘길 하죠. 소설에서 이 헛간은 그가 별 부담 없이 사귀는 젊은 여자와, 그러니까 있어도 없어도 좋을 그런 여자와 암시적으로 겹칩니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도 비슷해요. 돈 많고 세련된 젊은이 벤(스티브 연 분)이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와 그의 일시적 애인인 해미(전종서 분)가 겹치죠. 그런데 큰 차이는 <버닝>에서는 태우는 행위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11.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무라카미 소설의 화자(話者)와 마찬가지로 소설가(정확히는 소설가 지망생)이기는 하지만, 쿨한 분위기의 전자와 달리 농촌 출신의 투박함을 잃지 않은 청년이지요. 그래서 그는 태워짐에 분노하며 결국 태우는 자를 태웁니다. 쓸모없음을 처리하는 자를 처리하죠. 물론 영화 마지막의 이런 장면들은 종수가 쓰는 소설 속의 사태라고, 그러니까 종수의 희망이 영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어떻든 <버닝>은 이렇게 저항을 재도입하죠. 포크너가 묘사한 소작농의 저항은 이제, 사회가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적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 청년 세대의 저항이 됩니다. 이 저항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아직 그렇죠. 출산율 저하는 어쩌면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미래를 태우는 극단의 저항으로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넘겨진 쓸모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11 이것은 ‘유나바머’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선언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십수년간이나 미국 몬태나주 숲 속에 숨어 지내며 기술문명을 중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저지르다 1996년 체포되었던 인물이죠(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금년 6월 숨을 거뒀지요). 카진스키에 견해에, 특히 그의 반기술주의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문제의식에는 동조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싶어요.

2. 사실, 청년 세대의 집단적 불안감에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이전과는, 그러니까 소외되고 착취를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활동에 분명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점이 아닌가 해요. 코인에 대한 열풍도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이처럼 가치의 기준이 불확실해진 데 따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해 제가 자신 있게 답을 내놓을 처지는 아닌 것 같군요.12 저로서는 이렇게 어설프고 산만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다른 분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합니다.

3. 끝으로 덧붙이자면, 저의 이 부족한 발표에 ‘헤겔 바깥의 헤겔’이라는 제목을 붙여본 데에는 오늘의 상황이 헤겔 철학의 태생적 배경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헤겔을 넘어선 헤겔”1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아마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 특징의 발전과 연속성에 더 무게를 둔 것이겠죠. 저는 오늘날의 철학은 외부에, 바깥의 변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설명과 의미 부여의 틀을 짜나가야겠죠. 그것이 제가 주제넘게 떠올려 보는 오늘의 헤겔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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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겔 레스토랑』, 앞의 책, 469쪽 참조.

  2. 외람되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졸저 『배제의 배제와 환대』, 동녘, 2000 참조.

  3.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33쪽 이하 참조.

  4.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출간일은 2019년 8월 9일인데요), 조국 사태를 이 불만 표출의 대표적 사례로 연결시켰을 법합니다.

  5.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125쪽 이하, 또 70쪽 이하 참조.

  6. 대표적으로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 참조.

  7.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67쪽.

  8.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8262158001#c2b

  9. 「한반도 영세 중립화 선언」 참조.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Tw8byRcRmOEwZHZeg2TBgsPN7LBrsOaupmykENb-cgnZ74Q/viewform

  10.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 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 68쪽.

  11. 테어도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조병준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6, 111쪽.

  12. ‘만듦의 문명’에 대비되는 ‘즐김의 문명’에 대한 전망과 기대는 제가 단편적으로나마 곳곳에서 계속 피력해 온 것이지만, 이 자리에서 거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13. “Hegel beyond Hegel” ― 이것은 그의 책 『분명 여기에 뼈가 있다』(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16. 원서는 Absolute Recoil, Verso, 2014)의 3부 제목입니다.

자연 순환, 그 회귀 [천 하룻밤 이야기]

자연 순환, 그 회귀:

관습 또는 습관을 넘어설 것인가?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중.

— 2023 12 22, 동지(冬至).

 

누구에게나 삶이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단지 속는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자기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향과 관습을 이어가면서, 임의적으로 여러 갈래 길에서 하나로 밖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냉정하다. 이것을 따뜻하게 느끼는 것이 착각이다. 이런 착각과 달리 착오는 비교에서 온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는데, 또는 제 눈에 들보를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끌을 따져든다고 한다. 신체를 가진 삶은 상식[sens commun,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다섯 감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영향을 받는다. 그다음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있다고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좀 더 깊이 사유한다는 편들은 원래 영혼의 사유하는 양식(bon sens)과 신체의 느끼는 감각작용이 다른 길도 있다고 한다. 어째거나 이 둘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는 쪽이 있고, 서로가 다르게 작동하는데 어느 쪽을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고도 한다.

그런데 상식의 사유도 양식의 사유도 인간의 이기심 앞에서 무력하다고 한다. 그 이기심이 삶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권력, 권세, 권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결정은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의사결정의 기제(메카니즘)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결정권을 가진 어떤 능력을 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의 활동에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보면, 그 의지라는 것도 오래 익숙해진 습관과 같은 관례적 또는 본능적 결정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떤 본능이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인식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이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무상보시나 희생 등의 예를 들면서 인간이 행동 결정에서 의지가 본능을 넘어선다고들 한다. 의지라는 것을 설정하면서 상식과 양식과 다른 길이, 즉 의지가 인간의 내부에 능력으로서 있다고들 한다. 다른 한편 그 의지가 협박과 고문 등에 의해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과오 또는 오류 정도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강압적이 아닌 유혹과 회유에도 다른 길을 선택하기 할 때, 그것은 의지와 상관없이 지성이 계산하여 선택한 것으로,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의지를 잘만 사용한다면 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의지를 다른 어떤 능력과 달리 상위에 두고자 한다. 그 의지의 결단이 지성의 계산 없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들은 의지도 최종결단에서는 자기 지식으로서 상식과 양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단이 맹목적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자기신념이든 종교 신앙이든 지성의 영향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사건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사건의 영향 아래 더 깊은 본능에 충실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본능이 자기보존에 맹목적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서, 지성과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능을 동물적 또는 아메바적이라고 비하해버리면, 간단히 지성이 우위이고, 지성의 계산하는 판단과 달리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판단에는 의지가 작동한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신체의 감성, 의식의 지성, 그리고 삶의 판단의 의지가 따로라고들 한다. 이런 논의들도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문제는 인간이 생명체로서 자연의 흐름과 절단 그리고 자연의 순환과 재생산에 익숙했던 시절을 지나,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우선 토지와 더불어 자연생산을 위주로 하는 삶에서는 자연 순환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인간이 먹을 것을 저장하고 집을 짓고 옷을 입는다고 해도, 자연 속에서 자연생산은 자기 회귀의 길을 간다. 곡식이든 집이든 세월의 흐름에서 변질하고 소멸한다. 그 변질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생명 있는 존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싸고 자고 일어나고 하는 흐름의 과정에서 생물체들이 자기 방식대로 순환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관습대로 다양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인류가 도구를 발달시키면서 점점 더 흐름의 절단을 잘하게 되고, 또 그 절단을 고정해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안정되게 한다고 믿고 산다. 자연에서 고착적이고 고정적인 면들을 만들면서,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을 도구로 또는 대상으로 삼고, 그 자연의 자기순환과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철학사의 시작을 두고 자연의 이법(理法)에 대한 관심이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했다고들 한다. 그 이법을 아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법을 신화와 더불어 참주의 법치와 대립으로서만 생각했으나, 참주의 법률에 익숙해진 관습에 젖으면서, 이법을 따르는 것이 법률을 따르는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법을 대상에 대한 자연법이라고 여기고, 이것을 본능의 삶이라 여기면서, 법률의 영속성을 위해 지성의 체계와 원리들을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률 그 위에 신법을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이런 신법을 무한 소급하여, 자연법 이전에 신법이 있었다고 추론하는 사고가 등장하면서, 자연은 법치의 하부, 게다가 신법의 하부 중의 하부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자연을 떠나서 사회 또는 체제 속에서 권력이 우세하고, 다른 한편 법률의 권력을 넘어서 원리의 권위가 우선하다고 여기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런 전도된 방식은 이상하게도 철학사에서 기원전 300년 경에 논리학과 기하학의 체계가 성립하는 시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삼단논법의 증거하는 방식과 기하학원론의 증명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방식이다. 증거와 증명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논리학의 증거와 기하학의 증명이 언어와 도형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대상은 그래도 사물이며, 도형의 대상은 추상된 점과 선이다. 이 둘의 정합적 체계가 하나의 방향으로 여기는 것이 양식에 가깝다면, 이 두 방향이 다르지만, 평행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초기에 더는 묻지 않고서 상식에 근거하여 유비적으로 타당성만을 근거로 삼는다. 이런 상식과 양식이 사유체계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철학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삶 또는 실재성과 멀어진 것이리라. 어쩌면 철학적 사유는 이미 자기도 모르게 또는 암묵적으로, 인간이 자연보다 상위 또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자연을 대상으로 다루면서 탐욕과 오만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루는 자들이 이것을 내면적으로 아는 자들을, 사용가치가 없다는 명목으로, 열등하게 취급하였고, 다루는 자의 방식에 따라오지 않은 자들을, 자기들과 비교해 도착자들로 규정하였다.

대상을 다루는 자는 공감하며 상부상조하는 자들이 자기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법리로 배척하고 제외하려 하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먼저 억압하고 또는 공포를 심으며 협박하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우월성에 대한 다른 대처 방식으로 정복과 식민지 노예로 삼는 폭력이 있었다. 이 정복은 상대 토지에서 삶을 몰살시키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렸다고 했던가. 지배자는 더 이상 그 토지에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들고자 했다. 자연은 사용자의 논리에 속하지 않는다. 자연은 복원하고 그 토지에는 추어들과 기억을 지니고 지금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사고 체계가 있기 전에도 인간은 도시를 건설하던 시기로서 기원전 7천 년 전부터 수많은 전쟁과 소멸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은 있었지만, 소멸이 있었을까? 아니면 전쟁의 과정에서 절단을 피해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그보다 자연재해도 소멸의 한몫을 했을 것인데 흐름은 돌아서 돌아서 회귀의 과정을 걷고, 새로운 토지 위에 삶을 영위해 나간다. 긴 세월의 이야기 즉 신화와 설화로 남았다.

그런데 인종들 간에 전쟁에서 노예로 삼는다는 조건 이전에, 노예로 살기보다 죽음을, 이라고 말하며 저항했던 시대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노예보다 자유라는 용어를 역사상으로 떠올리는 것은 종족의 집단이 관습과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이 가능할 때라고 본다면, 전설 따라 이야기에서 기록상 이집트 왕조 시작의 기록으로 보아 기원전 3천200여 년 경으로 어림잡을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바빌론 3천여 년경, 중국의 3천여 년경, 인더스 문명도 마찬가지로 잡는데, 이 시대들이 정복과 투쟁의 시대였을까? 문명의 건설에서 상부상조 노력의 시대였을까?

물론 삶에 이익과 편리를 추구한다는 점을 기본으로 하면, 사냥에서 전쟁의 방식이 인종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문자 이전의 설화는 전쟁의 설화라는 점이다. 그 흐름의 절단면은 전쟁이 전부였을까? 들뢰즈는 흐름은 단절의 장애를 우회하기도 하고 밑으로 흐르기도 하고 산과 벽을 넘기도 한다고 했다. 왜 이른 리좀의 흐름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절단의 단면으로 문명의 지배로 역사가 쓰였을까? 지금도 자본제국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음에서, 값싼 노동력의 인민들은 세계를 흐르고 있다. 자본이 흐르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전쟁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면서 어느 사회집단이 부를 획득하고 지배권을 누릴 방편으로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세기 전 1차 대전에서 유럽 국가 간의 부의 경쟁에서 식민지 쟁탈전이었다고들 한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로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로, 다시 한번 교회와 왕권들이 자기들의 기반을 다지려는 방편이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1차 대전에서도 교회가 전쟁을 막기보다 부추겼다고 한다. 이런 근거로서 중국에게 전쟁을 걸게 하는 것은, 선교사의 박해를 핑계로 교회 권세의 확장에 국가권력을 끌어들인 것이라고들 한다.

‘어떻게 종교가 인민이 죽어 나가는데, 권력들의 전쟁에 동의하면서까지 교권의 권세를 누리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가’에 대한 대답으로, – 그 이야기를 하는 자는 크리스트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는 방편으로 전쟁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엄창난 부를 누리고 있으며, 그때에도 이름하여 ‘성전(聖殿)이라는 교회’의 부를 지키자는 암묵적 동의 아래 전쟁을 수행하였고, 교회의 재산은 인민에게 나누고 전쟁을 반대하자는 반대파를 제거할 때는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반(反)애국으로 몰았고, 종교 자체에서는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박해하였다는 것이다. 이 혼란한 세상을 조장하면서 이합집산으로 교회 전체의 총괄하는 부를 늘여갔다는 것이다.

13세기에 프란체스코파들이 말하듯이, 교회가 가난한 자의 천국을 말로 하기보다 교회 재산을 인민에게 환원하면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말로만 가난을 구제하고 전쟁 없는 평화를 이야기 해봤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14세기에 파리의 프란체스코파 학자들이 도미니크파 학자들에 대해 비판하다가 당했지만, 18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이 말했고, 20세기 초에 프랑스 공산당이 독일과 전쟁을 반대하면서 주장했던 것이다. 파괴는 다음 건설에서 어느 한쪽으로 부 또는 자본을 몰아주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런 방식이 산업화 이래로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어 2세기 전의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이보다 21세기 차이를 엄청나다고 한다.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전쟁과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에서, 어디에서 누가 재화의 집중화와 자본의 재영토화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제국으로서 미국이 몰락하는 중이고, 다극화의 세계를 여는 중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을 부추겼던 종교와 국가는 주구로서 하수인을 키워왔고 또한 보수화라는 이름으로 존속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권세와 권력은 여전히 탐만치에 빠져있다. 어쩌면 탐만치를 벗어나기 위해 주구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저항과 항거가 공염불이 될지도 모른다. 주구가 아니라 근원을 폭파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근원 폭파의 노력은 있어왔다. 프랑스의 샤르트르학파, 프란체스코학승들,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이어지면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토마다 다 같은 것이 아니고, 살아온 관습과 습관은 전혀 달리 살아가는 방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당연을 넘어서는 것은 인식의 차이라기보다 교육이다. 교육 자연은 자기 방식으로 흐른다는 알게 하는 것이다. 윤구병 말대로 어린 시절에는 토지 위에서의 교육이 필요하다. 윤구병의 “특별기고(2017)”는 참조할 수 있다.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흐르면서 줄기를 창발하는 것이다. 탈주로를 찾고 있다. 역사 속에서 이 많은 글과 이론들을 전개해 왔음에도, 이제도 그 글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고 있다는 한계에서 흐름은 개념도 관념도 아니라 이미지이다. 이미지를 만드는 중이다.

다른 한편 아직도 천문학과 물리학이 생물학과 심리학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있다. 물리학처럼 중심은 하나라고 쳐봐도 1초에 퍼져나간 구(공)위에 무수히 많은 점은 다양하다. 다양한 점들만큼이나 생명체들이 있다. 각 생명은 자연 자체의 여러 방향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 중에서 다른 하나에 쿼크니, 끈이니 초끈이니 하는 이야기를 붙인다. 그 끈이든 초끈이든 1초 만에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의 생명체에 관하여 말하자면 흐름의 과정이 삶인데, 그만큼 많은 시간을 흘러가야 현 생명체의 삶이다. 그 흐름이 언제 시작했으며 언제쯤 끝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미 혁명을 포기한 자이다. 들뢰즈는 혁명이 이미지라 한다. 마치 한 사람의 삶이 마감할 때 그 사람의 이미지가 있듯이, 혁명은 다른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한 시대를 마감할 때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즉 창발하는 자는 완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형성은 자연의 과정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흐름의 한 줄기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레닌을 이름으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마오쩌뚱의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의 패배가 낳은 호치민의 이름으로 베트남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미지 만드는 과정과 작동은 혁명이며, 들뢰즈에게서는 철학이다.

(3:28, 56WMA) (4:29, 56WMA)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신간안내]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 비판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한상원 지음|에디스코|2023년 9월 15일) [한철연 소식]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 비판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한상원 지음)

 

한상원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충북대 철학과 한상원 회원이 지난 2018년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후 또 한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지난 겨울 필로버스에서 진행한 『계몽의 변증법』 강독 세미나 녹취를 바탕으로 엮은 것입니다. 청중들과 소통하며 써낸 책이다보니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저자의 강연에 참석한듯 책의 내용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창립 100주년을 맞은 2023년 올해 의미있게 출간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사상의 정수를 이해하고 『계몽의 변증법』이 지닌 오늘날의 의미를 추적해 봅시다. 2023년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대중적인 해설서로 읽히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한상원 회원은 지난 9월13일부터 15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비판이론을 미래화하기’(Futuring Critical Theory)라는 제목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창립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반)정치적 정서로서 공포를 이해하기: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판이론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발표 했습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한 기사 링크를 첨부합니다.

♦ ‘오징어게임’의 역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묻다 – 비판이론 100주년 학술대회 참관기(한겨례, 2023-09-1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9088.html?fbclid=IwAR1YbvcnOFjF0zGcqWk8AsuarT9KsYnmWzBu2rq1XEd2Un3GamxrA9bb1ZU

 

아래 책 소개와 목차 안내입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해당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아래 링크참조)

 

책소개

아도르노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상원 교수가 필로버스에서 진행한 『계몽의 변증법』 강독 세미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사상가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 내지는 ‘비판이론’이라고 불린 지식인 그룹의 1세대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한상원 교수는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를 통해 『계몽의 변증법』이 지닌 오늘날의 의미를 추적하고, 우리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틀로 활용하고자 제안한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 고전이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사상의 정수를 담은 『계몽의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목차

1강 서문 & 계몽의 개념 15
책의 제목에 관하여 18 / 비판을 통한 구원 20 / 책의 발생사 23
/ 계몽의 약속과 좌절 25 / 공포와 지배 29 / 지식은 권력이다 33
/ 체계와 통일성 37 / 주술과 미메시스 40 / 우상 금지 원칙과 부정사유 43

2강 부연 설명 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47
부르주아 개인의 원형 52 / 내적 자연의 억압 57 / 자기보존의 역설 61
/ 등가교환과 희생제의 66 / 오디세우스의 모험들 72 / 자연 지배와 인간의 지배 78

3강 부연 설명 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83
어두운 사상가들 86 / 성숙과 자기보존 89 / 도덕적 폭력 96
/ 고삐 풀린 시장경제 100 / 계몽에 대립하는 계몽 104 / 전도된 칸트, 사드 107

4강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1 113
문화산업 비판의 의미 116 / 개별자의 예속 118 / 관상학적 방법: 벤야민과 아도르노121 / 뉴미디어와 K-콘텐츠 시대의 문화산업론 128 / 위대한 예술 132

5강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2 137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140 / 욕망의 억압 145 / 웃음의 폭력 150
/ 유흥의 기능 154 / 동일성 논리의 역설 158 / 개별자의 잉여인간화 160

6강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1 167
인종주의의 변증법 171 / 자유주의의 이중성 176 / 동화된 유대인들 179
/ 대중운동으로서 반유대주의 186 / 반유대주의의 정치경제학 193
/ 혐오의 발생학: 이디오진크라지와 미메시스 196 / 억압된 것의 회귀 205

7강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2 211
허위적 투사 214 / 편집증적 주체 219 / 폭력에 대한 변명 226
/ 절반의 교양인 229 / 개인과 자유 237 / 사유의 폭력성 243

8강 스케치와 구상들 251
두 개의 세계 254 / 유물론과 금욕주의 262 / 진보의 대가 264 / 대중사회 268
/ 모순들 270 / 철학과 노동분업 274 / 인간과 동물 278

♦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47260

♦ 책 소개 기사 – 저자 한상원의 기사

우리는 왜 타인을 혐오하고 분노하는가(교수신문, 2023.10.11)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353&fbclid=IwAR1Zu66U9zBTbHJJuU6-hWpf_GsZitFGMswVgyW7hZCLLWdcY5jI9oA6_qk

파국·재앙의 위기…‘비판’이 변화 이끈다(교수신문, 2023.10.09)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352&fbclid=IwAR0dV0TjMrkszywkkJMS92J_uvyEzdQjZePAPBYxOVkLNlvj9GMGTZ1ADWw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47260

 


저자 한상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 개념 연구로 석사 학위를,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아도르노의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 역사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이 있으며, 역서로 『공동체의 이론들』(공역),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역사와 자유의식: 헤겔과 맑스의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근대 사회정치철학의 테제들』, 『아도르노와의 만남』,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팬데믹 이후의 시민권을 상상하다』 등 여러 책을 공저했다. 현대사회 · 정치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최근작 :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동아시아 마르크스주의>,<동아시아 자본주의> 등 총 13종

[신간안내] 『일상이 철학이다』(이종철 지음|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2023년 9월 30일) [한철연 소식]

『일상이 철학이다』(이종철 지음)

 

이종철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2021년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란 부제로 『철학과 비판』을 출간하여 철학계에서 ‘에세이 철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하였습니다. [2021년 웹진에 실린 •연효숙 회원의 서평, •저자의 답글] 2023년에 출간된 이종철의 『일상이 철학이다』 (삶의 지평을 넓히는 에세이철학)에는 ‘에세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철학화, 철학의 일상화를 주창해 오는 저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자의 에세이철학론에 따르면 에세이철학은 일상어의 철학이며, 공유와 토론의 철학입니다. 일상의 나의 생각과 관점이 SNS에서 속풀이 단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서로 철학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장이 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주창하는 저자와 깊게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 전공자들은 물론 관심있는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아래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와 목차를 안내합니다. (아래 링크참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오늘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읽는 시대를 살아간다. “책을 안 읽는다!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는 말이 떠돈 지 이미 오래고,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출판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시대이지만, ‘글쓰기’와 ‘글 읽기’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는 인간의 활동 분야이기도 하다. 하여, 오늘날은 ‘책 읽는 사람보다 책 쓰(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전통적인 글쓰기-책 쓰기 문법에 따르면 오늘날을 ‘글쓰기가 왕성하게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종 SNS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글을 읽고, 쓴다. 책을 종이책에, 신문을 종이신문에만 한정하지 않으면, 종이책 독서나 TV 시청이 줄어든 대신 넷플릭스나 유튜브 시청이 늘어난 것까지를 아우르면, ‘정보 습득으로서의 독서’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지속적이며, 현대인의 삶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오늘날이야말로 읽고 쓰기의 르네상스, 진정한 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책 읽기’와 ‘글쓰기’의 개념과 범위가 달라진 만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의 범주와 용도도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실제로 오늘날 인문학은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문-사-철’을 포함한 정통인문학에서부터 실용적인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분야를 넘나들고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가 무제한, 무가격으로 공급되면서,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하고, 쓰고,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교육 수준의 향상되면서, 좋은 글, 의미 있는 글쓰기에 대한 욕구와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에세이철학’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요구에 따른 새로운, 어쩌면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철학하기를 주창하여, 철학을 일상화하고, 나아가 일상 즉 생활세계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 만나는 사람, 겪는 사건, 떠오르는 생각 하나하나를 철학적 수준에서 재음미하고, 그것을 글로써 정리(집필)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의 일상화가 필요한 이유는 생활과 괴리된 철학-학문은 의미 없으며,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생각 없는 삶’의 위험천만함을 설파했듯이, 철학하지 않는 삶이란 위험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의 활동이 철학 활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할 때,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을 헤매는 현대인에게 철학적인 삶, 삶의 철학화가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강단에서 철학을 교육해 온 저자가, 은퇴 이후 ‘에세이 철학하기’의 관점에서 그동안 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표해 온 글들을 한데 모으고, 단행본으로 편집한 것이다. 에세이철학에 ‘대하여’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로써 에세이철학‘을’ 실현하고 실행하는 글쓰기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단행본’의 의미와 ‘편집’의 의미가 더해짐으로써, 에세이철학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책이 되고 있다.

1부는 ‘일상과 철학’을 주제로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생활세계를 대상으로 철학하고 생활에 즉한 철학을 함으로써,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하자!”는 에세이철학의 본령을 보여준다. 철학자로서의 저자에게 다가오는 일상의 사건들의 의미를 일상에 내맡겨 버리지 않고, 그 속에 깃든 철학적 의미를 길어올리는 글들이다. 특히 저자가 새롭게 직면하는, 그리고 우리 사회가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고령화 시대에, 에세이철학의 의미와 가치를 다각도로 논설한다.

2부는 ‘영화’를 철학적 사유 대상으로 삼아 철학(사유)을 전개한다. 영화뿐 아니라 유튜브나 넷플릭스 드라마 등이 그 안에 다양한 철학적 토론과 논의의 소재를 담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좋은 영화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이 되고, 한 권의 책은 하나의 도서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에세이철학에서는 중요한 비유로 삼을 수 있다.

3부는 한국 사회와 정치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구한다. 정치와 사회의 일들이란 곧 일상 이상의,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에세이철학은 정치, 사회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가져오는 일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주체적인 삶을 누리는 인간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혜롭게,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정치사회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기술을 엿볼 수 있다.

4부는 도구와 기술에 관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에세이철학의 발상이 주로 소셜미디어에서의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 AI에 기반한 디지털 혁명, 챗GPT 등으로 가속화하는 세계의 ‘탈인간중심주의’ 등이 인간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 그 속에서 인간이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인간다움의 실체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5부는 ‘한글과 역사’라는 주제로, 저자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문, 즉 쉬운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관점에서는 에세이철학의 핵심 주제가 되는 한글과 우리나라를 중심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세계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한다고 할 때, 이 지역의 국가 특히 우리나라가 어떻게 자기 자리를 잃지 않고,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또 어떻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자주성과 공존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지, 에세이철학의 심화가 이루어진다.

6부는 저자의 전공 영역으로서, 평생에 걸쳐 체험해 온 대학과 교육 문제점을 일반 대중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관심사이자 한국사회 문제의 출발점이며, 내일의 한국사회의 희망의 출발점이기도 한 한국 대학의 현실은 개혁이 필요한 상황임을 직격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 외에도 앞으로의 모든 글쓰기 활동을 ‘에세이철학’의 관점에서 전개함으로서 철학의 일상화, 일상의 철학화라고 하는 비전과 과제에 천착해 가고자 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 시민들에게 중요한 동기부여와 가치창발의 계기가 되리라 믿으며.

목차

제1부_ 일상과 철학

일상과 도(道) 자율과 강제

실존적 아포리아(aporia) 운수 좋은 날

한국인의 내로남불 위험한 상상

고령화와 한국 사회의 대응 고령화 시대의 삶의 기술―1

고령화 시대의 삶의 기술―2 내가 바라는 엉뚱한 소망들!

습관 페이스북과 라이프니츠

제2부_ 영화와 비평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깨달음 <가을비 우산 속에>와 <안티고네>의 갈등 해법

<거래>(Arbitrage)와 빼어남의 악덕 <1911, 신해혁명>과 북한 체제

<십계>와 기독교의 본질 <필라델피아>와 이반의 사랑―1

<필라델피아>와 이반의 사랑―2 통쾌하지만 씁쓸한 영화 <암살>

<아임 얼라이브>와 좀비들 세상 <페르시아 수업>과 우연, 언어, 이성, 인간, 기억

제3부_ 사회와 정치

5월에 부침 민란과 직접민주주의의 전통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방정책 미국 사회의 흑백 차별과 기독교 근본주의

제4부_ 도구와 기술

글과 글쓰기 SNS와 공간의 소멸

소확행과 블루투스 음성 인식 기술과 글쓰기

기술과 인간 AI 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

제5부_ 역사와 문자, 그리고 한글

고대사 연구와 문헌 순혈주의와 동종교배

역사의 변곡점과 역사적 주체의 대응 역사 청산

불행했지만 자랑스러운 한국의 최근세사 반사대주의

사무라이와 일본 우익의 전통 한국과 일본, 역사

중국과 소국 콤플렉스 문자와 기록

문체와 사유 한글과 성경

한글날을 생각하며―1 한글날을 생각하며―2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 별의 이미지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 운초 김부용을 그리며

제6부_ 한국의 대학과 교육

공자와 공부 질문이 왜 중요한가?

언어와 학문 주권 의학 교육과 인문학

한국의 인문학 교육과 유학

♦ 출처: 알라딘: 일상이 철학이다 (aladin.co.kr)

♦ 서평: 박찬운의 아브라카다브라: 신간 “일상이 철학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회를 만드는 길-  https://chanpark.tistory.com/entry/%EC%9D%BC%EC%83%81%EC%9D%B4-%EC%B2%A0%ED%95%99%EC%9D%B4%EB%8B%A4?fbclid=IwAR1Cx5CikzMMVreSgPq18Bfo1aPLF2ECddsfjrATnqNUTgLXoaiiF-XIr3w

♦ 이종철의 브런치 에세이 모음: https://brunch.co.kr/@35a0b96c4e334fd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start=short&ItemId=324954590&fbclid=IwAR27Hs6U8WY7gRFWQ-40Zpt3LRdFGWVIlhWI4AEywiTZpE9jqDRARTajRMI


저자 이종철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하고,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현재 연세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브레이크 뉴스’와 ‘내외신문’ 컬럼리스트와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고, 네이버 프레미엄 서비스에 정기적으로 기고를 하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에세이철학’을 철학의 독립 장르로 만들기 위한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등이 있으며, J. 이뽈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외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 접기

최근작 : <일상이 철학이다>,<철학과 비판> … 총 12종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1)

앞에서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다리를 살펴보았다. 호퍼의 다리는 결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호퍼에게 이 다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리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것이며,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죽음과 같은 강물을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어디로 건너가는 것일까? 그림에서 호퍼가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곳은 다름 아닌 집이다. 1909년의 ‘왕궁 다리’나,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보이듯이 그 집은 주로 망사르 지붕을 한 집으로 나타난다.

 

2)

망사르 지붕이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지붕이다. 이 망사르 지붕은 19세기 말 부활하여, 제국주의 양식의 일부가 되어, 이 시기 상류층의 저택이나 호텔에서 차용되었다. 아마도 미국에서도 시골 농장주나 도시 부르주아의 저택이 주로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망사르 주택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고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두 창문을 제외하고는 굳게 닫혀 있어서, 매우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09년 ‘왕궁 다리’ 그림이 그려질 시기만 해도, 이 왕궁으로 가는 다리는 안정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주택으로 접근하지만 그 힘은 너무 과도하여 이미 지나친다.

 

20년대 이르면 이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냉혹하게 차단되고 마니, 이 시기 이후 집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도 고립되면서 마치 꿈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화면의 하단을 가로지르며 녹슨 철로와 둔덕이 지나가면서 그 너머에 있는 집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 너머 망사르 지붕을 주택은 시각적으로 약간 왜곡되어 있다. 전체의 왼편보다 오른쪽 편이 약간 확장, 돌출하여 있다. 시선이 오른쪽 위쪽에 놓여 있는 듯한데, 반면 햇빛이 그림의 왼쪽으로 들어오면서, 시선의 방향과 충돌한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이층의 햇빛을 받는 쪽의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다. 전체적으로 녹슨 철로의 붉은 색과 대조되는 망사르 지붕의 짙은 녹색은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집은 아마 현실 속에 실제로 있는 집 같지 않다. 주택의 이런 왜곡된 모습은 어쩌면 환상 속에 있는 듯하다.

 

3)

1927년 그려진 ‘도시’라는 그림에서 화면의 오른쪽 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망사르 지붕을 한 호텔이다. 이 호텔은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는 텅 빈 광장이 있고 행인의 모습은 지극히 축소되어 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1950년대 세워졌을 법한 빌딩, 수평적인 빌딩과 수직적인 빌딩이 교차한다. 이런 빌딩은 오른쪽의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빌딩이나 망사르 호텔의 어느 창문도 검고 닫혀 있어 그 안을 볼 수 없다. 다만 호텔의 2층 시선이 가는 바로 앞의 창문은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색으로 차양이 내려져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그림의 전체 색조는 대체로 우중충하게 탈색된 듯하여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을 준다.

 

호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망사르 주택(저택이나 호텔)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형태상 아름다움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호퍼가 여러 번 반복하여 이런 집을 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집은 아마도 사회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망사르 지붕의 집은 아마도 미국 시골의 농장주나 도시의 중소 부르주아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이 급속하게 자본주의화하면서, 과거 농장주와 중소 부르주아는 몰락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니, 호퍼에게 아마도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퍼 그림 전체에서 목가적인 향수가 주제로 된 적은 없으니, 이런 사회적 관점도 적절한 해석이 되지는 못한다.

 

이 집이 호퍼에게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호퍼의 그림에 접근하는 통로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단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히치코의 영화 사이코이다.

 

그의 영화에도 망사르 지붕을 한 주택이 출현한다. 언덕 위에 고립적으로 솟아 있는데, 이 집은 아래쪽 모텔의 주인인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다. 남자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유골을 지하실에 보존한다. 그리고 그 일정한 때가 되면 스스로 자기 어머니로 변신한다. 그 때란 곧 그가 외부의 다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낄 때이다. 그는 자신이 욕망을 느낀 여자를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해한다.

 

영화에서 히치코크는 실재계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 남자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주택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망사르 지붕의 집이 호퍼를 사로잡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실재에의 고착이 아니었을까?

 

3)

집이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집은 고향이며, 어머니이고 유년의 시절이고 자궁이다. 그렇다면 호퍼도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한 부르주아 또는 농장주의 저택에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이고,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 호퍼가 살았던 집은 그의 그림 ‘퓨리턴’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집이다. 단순한 맞배 지붕으로 이루어지고 백색의 나무 판넬로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도 호퍼가 이렇게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망사르 집의 특징은 아무래도 지붕 밑 다락방에 있을 것이다. 약간 상상해 보자.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단층 기와집이었다. 부엌의 위쪽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에서 다락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지만, 나는 학교 시절 자주 책을 들고 혼자 다락방에 올라 책을 읽었다. 주로 소설책이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고요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을 생각해 보면,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호퍼가 심리적으로 꽂힌 이유도 짐작되지 않을까?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집은 호퍼에게는 곧 실재이다. 그는 이런 실재계의 흔적을 전반적으로 황량하게 보이는 집에 암시했다. 그것은 유독 눈길을 끌도록 하는 붉은 색 굴뚝이나 밝은 색깔의 차양이다. 호퍼는 때로는 과잉적으로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차단되어 다가가지 못한다. 이 집은 끊임없이 호퍼를 매혹하며, 차단된 저 너머에서 그에게 손짓한다.  호퍼의 의식이 접근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그것은 즉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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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토리엄의 곁에서 [톡,톡,씨네톡]

모라토리엄의 곁에서

 

박근형(전북대 철학과 대학원)

 

함박눈이 쏟아지던 1월 초, 거실에 상추를 심었다. 흐린 겨울날이 계속되면서 우중충해진 집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신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미 다육식물 등의 화분이 있었지만, 식물 키우는 재미를 느끼려면 한 달이면 쑥쑥 자라서 따먹을 정도가 된다는 상추가 제격이지 싶었다. 큼지막한 화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배양토를 붓고 씨앗을 심은 뒤 물을 흠뻑 주었다. 새싹이 돋을 때만 해도 초록이 주는 설렘에 기대가 만발했다. 그러나 웬걸. 날이 한참 따사로워진 4월 말에도 상추는 이제 겨우 엄지손톱 크기만큼 자랐을 뿐이다. 성장이 멈추어 버린 상추를 두고 나는 20대의 어느 날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2014년 개봉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이하 <다마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코후 스포츠샵 딸내미 다마코와 사진관 아들내미 히로시는 코후 스포츠샵의 벤치에 늘어지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올해 23세인 다마코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곁에서 놀고먹으며 1년을 보낸 상태다. 여름이 끝나면 아버지에게서 독립해야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농구부 활동을 하는 중학생 히로시에게 다마코는 주전이 될 수 있을지 여부와 여자친구와의 안부를 묻는다. 히로시는 주전 선발 여부는 “미묘”하며, 여자친구와의 관계는 “자연 소멸”했다고 답한다. 그는 내일 다마코를 다시 만날 것처럼 간단한 인사로 떠나고, 홀로 남은 다마코는 기지개를 켠다. 그녀는 자연 소멸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며 웃으며 프레임을 벗어나고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거창한 것 없는 이 2분 18초간의 엔딩 장면에 87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줄곧 이야기한 것이 압축되어 있다. <다마코>는 말한다. ‘사계절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듯, 청춘의 모라토리엄도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

모라토리엄은 본디 국가나 지자체가 빌린 돈에 대해 상환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젊은 세대가 충분히 경제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사회적 진출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학생이나 무직 상태로 남아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마코>는 다마코가 놓인 모라토리엄의 시작과 끝을 잔잔히 담는다. 그녀의 모라토리엄은 구직활동은 제대로 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일갈에 “지금은 아니야!”라며 버럭 대들면서 현시되고, 여름이 끝나면 독립하라는 아버지의 통보에 ‘좋은 아버지 합격’을 주면서 ‘자연 소멸’한다.

<다마코>를 처음 접했던 20대 후반의 어느 시기, 나는 다마코보다 훨씬 긴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감상평은 “유예”에 방점을 찍었고 나도 그랬다. 꿈이 있다는 핑계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놓고 그 꿈조차 유예하고 있던 날들이 있었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도, 포기할 용기도 나지 않아 모든 걸 회피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은 남아있어서 어영부영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시기였다. 부모님이 어려운 마음으로 전세자금을 지원해 준 노량진의 원룸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가건물이었다. 여름에는 비가 샜고 겨울에는 세탁기와 변기가 얼었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다. 20대 중반의 두 자매가 반나절 만에 구한 집이었으니 좋은 집일 리 만무했다. 학자금 대출도 없었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계셨으니 경제적인 사정이 어렵다고는 할 수 없고, 그저 미래가 궁핍했던 시기였다. 와중, 아르바이트 구직구인 앱을 통해 노량진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평일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슈퍼는 주말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면 되었다. 노량진의 아침은 새벽 시장만큼이나 이르게 시작해서, 유명한 강사의 수업을 앞자리에서 듣고 싶으면 수험생들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강의실 앞에 번호를 적은 노트 등을 놓는 방식으로 줄을 미리 서 놓아야 했다. 그들은 카페에서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몇 시간씩 공부를 하므로, 공부하기 좋은 카페들은 ‘음료 주문 시 4시간까지 착석 가능’ 등의 문구를 미리 표기해 두었다. 노량진 마트나 슈퍼에서는 초코파이 1개 200원, 두루마리 휴지 1개 500원, 커피 믹스 스틱 1개 100원, 이런 식으로 생필품을 쪼개 팔았다. 그러면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은 공시생들이 그것들을 사 갔다. 천이백 원에 세 개인 휴지를 사지 않고 오백 원에 하나인 것을 사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해의 겨울은 길었다. 슈퍼 안까지 햇빛이 들 리는 만무하니 집에서도, 슈퍼 안에서도 모든 시간이 항상 밤 같았다. 고독을 이겨보려고 유튜브에서 철학 강좌를 검색해서 틀어두었더니 공시생들이 나도 같은 공시생인 줄 알고 음료수와 인사를 건네는 일도 더러 있었다. 몇백 원짜리 간식도 셈해서 사야 하는 처지를 알기에,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기꺼이 받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격려는 언어로 구체화되지 못한 일련의 연대 행위이자 동질감의 표현이었다.

엔딩크레딧이 오른 후 다마코가 취업을 할 수 있을지, 코후 스포츠샵을 떠나 어디로 갈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아빠로만 존재할 것 같았던 아버지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수용할 수 있고, 피하고만 싶었던 동창생에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다마코>는 밑도 끝도 없는 유예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무책임한 힐링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힐링은 순간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 개선에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힐링에는 힘이 없다. … 끝없는 위로만을 보내며 우리 청춘을 같은 자리에 유예시킨다. 스스로의 연민에 빠진 청춘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마비된다. 나는 ‘아프니까’ 라고. ”1 애초에 다마코는 스스로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다마코>는 주관적인 서정을 형성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위로와 양보를 해주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인생과 몫이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다마코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므로, 아버지는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그녀의 도약과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지원할 수 있는 분명한 한계선을 제시한다. 태생적으로 재원과 권력 구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 내 헤게모니에서 백수인 다마코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합격” 선언을 통해 삶을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다마코>는 ‘고달픈 청춘’이라는 소재가 빠지기 쉬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을 피해 가는 영리한 영화다. 기지개와, 앵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행위는 새로운 시작의 직관적인 메타포다. 좁은 방에 누워있던 장면으로 시작한 <다마코>는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닫힌 구조의 외부에서 모라토리엄의 종기를 맞이한다.

그리하여 <다마코> 이후에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는 청춘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인가? 최근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취업난 속에서 학자금 상환 개시 소득에 이르지 못한 저소득 청년 수는 갈수록 늘어가고 있으며, 취업 후 상환을 시작했다가 중도에 감소하는 바람에 상환이 중단된 사례는 2017년(4만 7천여 명)에 비해 2021년(9만 8천여 명)에 2배 가까이 늘었다.2 개인적인 공감은 이러한 국가 전반적인 경제·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갖기에는 미약한 수단이다. 한국 현대 수필 문학에 대해 비평하고 반성한 <수필의 자폐성을 넘어서>에서는 현대수필의 문제점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꼽았으며, ‘외적 사물, 사건, 현실을 자아의 몽롱하고 주관적인 내면으로 끌어와 ’주정主情‘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하였다.3 비단 현대 수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시 등 모든 예술 작품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직언이었다. 창작자뿐 아니라 수용자 역시 <다마코>를 자기 경험이나, 가족 및 주변인에 투사하고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그친다면 이 또한 ‘세계의 자아화’에 불과할 것이다.

사계절을 거치면서 다마코의 영역은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가을’ 파트의 등장인물은 다마코와 아버지뿐이며 카메라 역시 집 밖을 벗어나지 않지만, 계절이 진행되어 갈수록 다마코의 관계의 영역은 확장되고 등장인물도 증가하며 공간적 배경도 다채해진다. 우리의 경계도 이처럼 조금씩 확장되어 가야 한다. 나에게서, 가족과 주변인에게로, 동시대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사회와 역사로. 청년뿐 아니라 여러 이유로, 여러 부분에서 누군가는 모라토리엄을 겪고 있다. <다마코>에서 청년 취업률의 감소, 캥거루족의 증가 등의 사회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청년기의 모라토리엄은 왜 발생하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의문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개인의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많든 적든 그것은 시대적 악몽을 그림자처럼 지니기 때문이다.”4

8년가량의 세월이 지나 <다마코>를 다시 감상하는 지금, 이번에는 ‘기다림’에 포커스를 둔다. 새해 전날 다마코는 엄마의 전화와 결혼한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고 다마코의 아버지는 그런 다마코의 독립을 기다린다. 이런 류의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애정이다. ‘기다림’은 다른 방향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영화였다면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생략되었을 법한 장면을 <다마코>는 편집하지 않았다. 다마코가 자전거를 타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장면, 무료하게 떡을 먹는 장면, 아버지가 보일러 석유를 교체하는 장면… 카메라는 묵묵히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기다린다. 기승전결에 필수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듯이,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모라토리엄의 이 순간마저 언젠가는 추억하게 될 것이라는 듯이 <다마코>는 그런 장면도 애정을 담아 기록한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기다림이라는 상태는 느리다는 행위에 잇따르고, 느림은 근본적으로 사유를 낳게 되어있다. 영화가 기다림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 너머를 사유하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다마코>는 느린 호흡으로 배우와 상황 곁에 서있다. 카메라는 역동적인 로우앵글이나 하이앵글로 장면을 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정면각에 가까운, 아이레벨숏으로 촬영된 것은 극적인 드라마가 아닌, ‘당신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일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라는 연출된 메시지로 읽힌다. 눈높이를 맞추고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소소한 안부와 일상을 주고받는 것. 그 겨울 노량진에서 건네받았던 음료수에 담겨있던 마음을 돌이켜본다. 확장할 수 있는 힘은 공감에서 비롯하여 연대에서 출발한다. 다마코의 이야기를 나의 경험담과 겹쳐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 내게 건네주었던 격려를 잊지 않고 다른이에게 전해주는 것, 누구나 유예기를 겪을 수 있으며 그럴 수도 있다고 공감해 주는 것, 그렇게 손을 맞잡고 나면 한 발짝 더 나아가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그런 마음들이 모이면 반드시 “좀 더 괜찮은 세상”의 실마리가 되리라고 믿는다.

퇴근하면 나는 제일 먼저 상추를 찾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컸는지, 새싹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언젠가는 자랄 것이라고 믿는 마음으로 마른 흙을 적셔준다. 몇 달 만에 이제야 싹을 틔우는 씨앗도 있다. 너무 일찍 자란 싹은 줄기가 웃자라 힘이 없지만 느지막이 기지개를 켠 싹은 작은 몸뚱어리를 흙에 단단히 박았다. 잎사귀 색도 웃자란 싹보다 훨씬 선명하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시기를 보낼 수는 없다는 삶의 진리를 늦게 움트는 상추 새싹에서 만난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중시하였다. 그는 “삶이란 마치 조각모음과 같”아, “일관된 자기 모습을 구성하기란 무망”한 일이라고 보았다. “일관된 모습이 없으니 후회스런 삶이 있을 까닭이 없다. 모든 삶이 예외 없이 존귀할 따름이다.”5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2월 월례발표회 “지성과 공동체: 민주주의와 시민적 집단지성의 가능성”(발표: 한상원)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기획은 2022년 9월에 실시한 한철연 회원연구분야 설문조사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회원들이 제안해주셨던 한철연 중점연구주제(1. 정치사회철학, 2. 여성철학, 3. 한국근현대철학, 4. 생태철학, 5. 대중교양철학)를 중심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2023년 월례발표회의 시작은 정치사회철학입니다.

이번 2월 월례발표회에는 발표자 1인, 토론자 2인이 참여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2월 월례발표회

주 제 : 지성과 공동체: 민주주의와 시민적 집단지성의 가능성
발표자 : 한상원(충북대학교)
토론자 : 김종곤(건국대학교), 한길석(중부대학교)
일 시 : 2023년 2월 27일 오후 7시 – 9시
방 식 : zoom 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qtznR3uYrJw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2 수호자들의 생활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15d-416b]

*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그곳에서 거론된 수호자들이 통치자들의 지도하에ἡγουμένων 어떤 곳에 진을 치고στρατοπεδεύσασθα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지를 간략히 언급한다. 우선 수호자들이 진을 쳐야 할 곳은 법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내부자들을 최대한 통제하고κατέχω 외부 적들의 침입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는ἀπαμύνω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돈벌이 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사람들이 아닌 군인στρατιωτικός들에게 적합한 숙소οἴκησις로서 혹한과 혹서에 충분히 버틸만해야 한다.(415d-e)

* 돈벌이하는 사람들과 군인들은 다르다. 양치기ποιμήν들에게는 양 떼의 보조자인 개κύων들이 제멋대로이거나ἀκολασία 배고픔 또는 다른 나쁜 습성으로 인해 개들이 가축πρόβατον들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드는 것은 늑대λύκος를 닮은 개를 키우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끔찍하고δεινός 부끄러운αἰσχρός 일이다.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ς이 시민πολίτης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σύμμαχος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δεσπότης을 닮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φυλακτέον 정말로 훌륭하게 교육을 받아 스스로도 최대의 경계심εὐλάβει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416a-b)

* 이에 글라우콘은 ‘수호자들이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꼭 그렇다는 것은 단언할 수διισχυρίζεσθαι 없지만, 수호자들이 자신들끼리는 물론 자신들이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온순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416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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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416c)은 단순한 앎을 넘어서 실천을 수반하는 능력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교육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우리말 ‘운전을 할 줄 안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간직하는 그런 수준의 앎을 위한 교육은 아직 제대로 된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교육의 구체적 내용은 나중 7권에서 다루어진다. 그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의 교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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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기술되고 있는 생활 방식은 통치자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통치자 자신들을 포함한 수호자들 전체의 생활방식이다.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생활방식 역시 나라의 수립단계에서 대략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서 5권 이후에 가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된다. 우선 수호자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생활하게 될 거처의 요건부터 언급된다. 진을 쳐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처는 말 그대로 병영이자 군사 요새이다. 안으로는 내부자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들의 거처가 이러한 까닭은 이들이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힘을 가진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본분은 양치기를 보조하는 개의 역할과 같다. 여기서 통치자들은 양치기들로, 수호자들 즉 군인들은 개로 비유되고 양떼와 가축들은 시민들로 늑대는 참주로 비유된다. 무엇보다도 개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또는 기타 나쁜 습성으로 양 떼들 즉 시민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민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들 즉 통치자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 즉 참주 같은 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이 참주 같은 자들을 닮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 스스로도 경계심을 갖도록 정말로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수호자들이 머물 거처의 요건 으로서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가 언급되고 있고 둘째로 나쁜 습성들로 시민들을 해치지 않도록 수호자들에 대한 다각적인 감시가 언급되어 있으며 셋째로 수호자들끼리는 물론 시민들에게 온순하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필수 조건임은 단언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수호자들이 천성적으로 훌륭하게 태어났고 그 후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고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보전하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길로 비껴나 나쁜 습성을 가질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란을 일으켜 참주 같은 사람까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부자들이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언급은 그러한 내란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수호자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나쁜 습성이 생겨 공동생활에서 이탈할 수도 있으므로 처음부터 공동생활의 거처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고려는 물론 그러한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의 적합성까지도 함께 고려되었던 것이다.

* 이 점은 플라톤 역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수호자들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이기적 본성을 드러냈다는 데에 방점이 있지 않고 인간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플라톤에게 인간의 본성은 건국신화에도 보이듯이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르며 그에 따라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달라 천성적으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 돈을 좋아하거나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뉜다. 다만 건국신화가 동시에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나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선대와 다른 천성을 갖고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다른 소질과 욕망으로 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들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이미 교육을 받은 어른들까지도 스스로의 천성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플라톤은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조차 어느 순간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변질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순수해도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한, 본성이 훼손되는 위기에 늘 둘러싸여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후천적인 영향에 휩쓸려 영혼의 가장 저급한 물질적 욕구 부분의 지배를 받게 될 경우, 본래의 본성을 상실한 채 결과적으로 모두가 물질적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을 사회관계의 외화로서 규정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서 다양한 소질과 본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상국가가 타락하여 인간 모두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면 그때는 다다익선이 최선이 되어 정치체제 또한 다수결에 따른 민주정이 도래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분별력을 상실한 채 선동정치가들에 이용되면서 결국에는 참주정을 초래하는 근본 바탕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 끊임없이 치열하게 올바른 배움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서 이성적 영혼의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의 지배가 확립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인간은 거꾸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회복하면서 궁극에는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본래의 이상적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국가 수립 자체가 그러한 거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내적으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잃지 않도록 이성적 영혼의 힘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되 외적으로도 인간의 본래의 천성과 자연적 소질의 다양성을 변질시키는 위협들에 대한 대처 수단도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거처의 요건들은 그러한 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적절한 방어책으로 제시된 것이고 올바른 교육은 자신의 천성적인 소질과 고유한 욕망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본성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다.

* 물론 글라우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단언διισχυρίζεσθαι이 시사하고 있듯이 교육이 이러한 성장과 발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내외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상존하고 인간의 본성에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부정적 양태들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발로라고 보는 관점들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을 마치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인 양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에 대한 분별력 있는 이해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천성과 욕망을 어떻게든 해체되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내려는 인간 영혼의 본질적 측면, 즉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에게 수호자들은 비록 부정적인 영향을 겪을 수는 있을 지라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지성과 명예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천성과 욕망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배양하고 보전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호자들은 통치를 통해 여타의 욕망을 가진 다른 계층 사람들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온순하게 대할 수 있도록 배움을 통해 늘 지적인 긴장 상태에서 최대한 경계심을 유지함과 동시에 올바른 교육과 실천을 통해 영혼의 이성 부분을 지속해서 배양하고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 이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의 존재론과도 연결된다. 존재론의 기저에는 절대적 모순으로서 존재와 무가 자리한다. 존재는 자체적 존재로서 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에 따라 타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존재 세계는 자체적 존재로서 각기 일자의 속성을 갖는 이데아들의 세계이다. 이데아들은 무에 둘러싸여 있어 각기 일자이자 자체 존재로서 변화를 겪지도 운동도 하지 않는 영원불변 부동의 존재 세계이다. 우주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우주 영혼의 상태로 관여되어 있어 영혼의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원운동을 하면서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완벽하게 구현하는 생명체이자 결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와 같이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순수성이 우주 영혼과 달라 영혼에 있어 일정 부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되 타자성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타자와 관계 맺음을 겪으며 변화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결국 신체는 사멸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존재자들 또한 인간의 사고가 갖는 모순율에 의해 인간의 개념적 사고 속에서만 형식적 자기 동일성을 가질 뿐 실제로는 물질적 무규정성(apeiron)에 따라 끊임없이 관계 맺음을 겪으며 생성 소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무규정성에 연원하는 해체와 소멸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데아에 관여된 영혼의 힘으로 그 해체와 소멸을 거슬러 우주와 같은 조화와 공존의 삶을 갈망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원초적 모델이자 현실 구제론의 이론적 토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우주 영혼과 달리 물질적 무규정성을 완벽히 지배할 수 없기에 각기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에 따라 일정 정도 우주적 삶에 다가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적 조화를 상실하여 짐승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인간의 삶은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신체의 죽음 이외에 운명적이거나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 목적론이나 운명론 내지 결정론은 플라톤과 거리가 멀다. 다만 인간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적 삶을 향한 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훌륭함을 가르는 기준은 각 개인에 있어 특히 수호자들에 있어 영혼의 자기 고양의 능력(dynamis)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여럿 들 간의 조화와 공존을 파괴하고 경쟁에서 이겨 자기만이 우뚝 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능력이고, 반대로 플라톤이 강조하는 능력은 자기다움을 최대한 발휘하되 자기와 다른 타자들과 조화와 공존을 능히 관철하는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서 포용적이고 이타적인 능력이다.

[416C-417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τις νοῦν이라면 이 교육에 더해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수호자들이 되는 데 지장도 주지도 않고 다른 시민들에게 못된 짓도 유발하지 않을 여건으로서 숙소 및 다른 재산οὐσία들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수호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거주하며 생활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416c-d)

* 1) 수호자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사적인 재산’ἴδιος οὐσία을 소유해서는κτάομαι 안 된다. 2)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떠한 숙소나 곳간ταμιεῖον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전사들한테 필요한 만큼의 적합한 것ἐπιτήδειος들은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로서 일 년간 쓰기에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를 다른 시민들한테서 받는다. 4) 수호자들은 숙영하는 사람들처럼 공동식사συσσιτία를 일상으로 하며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416d-e)

* 이런 연후에 소크라테스는 특히 수호자들은 금화나 은화를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들은 이미 영혼 안에 신들로부터 받은 금화χρυσός를 언제나 갖고 있어서 별도로 인간적인ἀνθρώπειος 금화와 은화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신적인θεῖος 금화의 소유κτῆσις를 사멸하는 불경한 금화의 소유와 섞어서 오염시키는 것은 전혀 경건하지 못하다ἀνόσιο.(416e-417a)

* 그럼에도 만약 수호자들이 땅과 집과 화폐를 소유한다면 그들은 수호자가 아니라 가정관리자와 농부가 될 것이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동맹군이 아니라 적대적인 주인이 되어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며, 계략을 꾸미기도 하고 계략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평생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ἔξωθεν 적들보다도 내부의ἔνδον 적을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며, 그때는 이미 그들 자신도 나라도 파멸ὄλεθρος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417a-b)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숙소와 생활 방식에 대한 이러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사항들이 법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4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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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식사συσσιτία(416e)는 스파르타의 상위 계급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의 생활방식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도는 스파르타인들의 내적 결속과 공동체 정신을 위해 기원전 8세기 뤼쿠르고스 체제에서 확립된 이래 기원전 5세기 멸망기까지 지속했다. 스파르티아타이에 속하는 남성들은 만 7세 이후 우리가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부르는 일종의 집단적 군사 교육으로서 아고게(agōgē)를 받아야 했다.

* 수호자들은 시민들로부터 생활필수품 정도만 보급을 받았다. 그것을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의 활동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고 나름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의 욕구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나름의 소질에 기초한 인정 욕구는 동일하며 그러한 소질을 잘 성취하여 얻게 되는 행복감 또한 동일하다. 수호자들은 비록 재산에서는 생활필수품 정도만 소유하지만, 그들은 다른 계층과 달리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명예라는 특전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공평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수호자들의 공동생활과 사유 재산의 금지는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실제 동서양 역사 전체를 보면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과 불교 수도자 전통에서 그와 비슷한 생활방식이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하물며 중동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교일치 차원에까지 급진화 되어 종교 수도자들이 정치 지도자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정치 수도자 집단을 구성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이 정치 권력의 편중과 관련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 그대로 논의되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그 구상의 대원칙만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단순 매도할 수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과 재력의 결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은 시대 현실에 부합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택되면서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여기서는 수호자들의 계층이동에 있어 하향 이동만 언급되어 있어나 상향 이동도 함께 열려 있다.(415c)

* 권력자들인 수호자들의 거처와 생활 방식에 대한 내용이 모두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언급 또한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단지 인치에만 의존하는 정치체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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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수호자들을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처의 요건을 언급한 후에 곧바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으로서 가히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사유 재산의 금지를 선언한다. 수호자들에게는 땅과 집, 화폐의 소유는 물론 사적 공간도 금지되며 금화나 은화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지된다. 이에 글라우콘도 크게 놀라 그러한 정도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과연 수호자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의심을 표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도 시민 모두의 행복을 지향하는 원칙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나중에 5권에 가서 이러한 의심에 더해 처자 공유와 가족 해체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들이 더해지면서 소크라테스는 더 힘들고 복잡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과 논쟁이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도 이 부분 역시 그 구체적 난관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유 재산의 금지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사유 재산의 금지 선언에 대한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의 몇 가지 평가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다뤄보고자 한다.

* 우선 오늘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수호자들에 대한 사유 재산의 금지 는 앞서 수호자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근원적 이기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영향으로부터 수호자들의 타고난 이타적 본성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재산의 사적 소유는 외부의 나쁜 영향들 가운데에서 가장 심대하고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나라가 맞이하는 가장 큰 위해로서 외적의 침입 이상으로 내부의 분열을 꼽고 있다. 특히 나라의 권력층과 부유층들의 사적 소유에 대한 욕망이 그 분열과 내란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사적 소유가 인정되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도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417b) 그리고 내부의 분열은 나라는 물론 개인의 파멸도 포함하고 있다.(417b) 그래서 나라의 수호자들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는’(464c) 사람들이어야 하고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464d) 해야만 한다.

* 사유재산권의 금지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은 20세기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의 이상 국가를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공산주의의 선구적 모델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특히 사유재산을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자들에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정치체제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데는 최소한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결정적으로는 사유재산의 금지가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 가운데 수호자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 정작 생산자 계층에게는 사유 재산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수호자 계층은 계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작은 최소 집단에 불과하지만(428e), 이상 국가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집단은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생산자 계층이다. 덧붙여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산 및 제작, 유통과 관련한 경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사적인 계약은 물론 과세의 규칙과 항만의 조례 등 시장 상거래의 세칙 또한 존재한다.(425c-d) 나아가 토지와 생산 시설 및 수익, 경영의 권리를 포함한 생산 수단 역시 사적 소유가 가능하고 노예조차 부분적으로 사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물론 경제 정책은 일종의 통치와 관련한 업무로서 수호자 계층에 의해 결정되지만, 플라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빈부의 격차를 조정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수호자들의 주요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의 수호를 위한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빈부 격차의 조정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정부의 주요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경제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헌법(제 119조 2항)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다 준 적도(適度) 이상의 국부의 창출 및 영토의 확장은 반대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한 국부의 창출 자체를 제한하는 조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423a-c 참고) 플라톤 역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규모의 함선 제작이 은광의 발견과 그것의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대에 있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들에 대한 사적 소유의 금지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의 금지 대상이 이상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수호자라는 최소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호자 집단이 이상 국가 전체 인구 비중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을 차지하는지는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비록 나라의 방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수가 천 명뿐일지라도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423a)과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 당대의 인구가 최소 21만 명에서 30만 명(V. Ehrenberg)이었음을 고려하면 수호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5%에서 1% 정도에 불과하다.(참고로 아테네 전체 인구 중 30-35%가 노예였고 아테네 경제가 기본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상 국가에도 노예가 있다. 플라톤 역시 노예 노동이 일상화된 시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아테네와 달리 노예를 최대한 이방인 전쟁 포로들에 한정하려 했다.(469c)) 그리고 아테네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으로 구성된 중갑 보병(hoplites)의 수가 3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가운데는 경보병 및 함대 노수병들은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 3000명 정도이고(A. Andrews) 그들만이 공적 목록에 전사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 그들을 수호자 계층의 수로 추정한다 해도 그 비중 또한 1.5%에서 3%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 수치들은 순전히 추정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수호자 계층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20세기 소련 공산주의를 비롯한 전체주의 및 독재 국가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권력층의 사리사욕 때문에 멸망했음을 고려하면 권력층의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아예 봉쇄하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그러한 나라들과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호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수호자들의 권력의 합목적성이 시민이 이익에 한정되어 있고 복수의 철학자들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데다[<법률>에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사정관들이 최상위 권력자들의 하나로 위치하고 최고 통치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위원으로 포함되어 있다.(945e947c. 961a)] 수호자들에게는 명예 이외에 어떠한 사적 소유나 이익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권력을 철저히 사적 소유의 수단으로 삼은 현대의 전체주의 독재자들과도 원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굳이 말한다면 계급 차이 자체를 배격하는 공산주의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역할 간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의 선구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 그런데 사적 소유가 분열의 원인이 된다면 이상 국가에서 사적 소유가 가능한 생산자 계층은 내적으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내란 대부분은 생산자 계층 내부의 분열에 기인하기보다는 권력자들이 부유층과 결탁하여 시민의 부를 착취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지려는 권력자들의 욕구 때문에 내분이 생겼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내란의 여지는 평생 올바른 교육으로 단련된 철인 통치자들의 이성적 조화 능력을 통해 사전에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아는 현대인에게 플라톤의 구상은 여전히 현실성 없는 시대착오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절대 권력의 피폐상을 경험했으며 대화편 곳곳에서 그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켈리아에서 참주정의 적나라한 실체를 몸소 경험한 것을 비롯해 아테네에서도 오죽하면 30인 참주정을 겪으며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 같은 정치체제로까지 보인다고 고백했을까.(<편지들> 324d) 이점에서도 권력과 재력의 분리는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를 기초 지우는 대원칙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오로지 정치와 지성의 결합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플라톤은 어떠한 이론적 실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철인 통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지고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멸망해 가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현실 정치 참여 대신 골방에 처박혀 거의 집착이라 할 정도의 이상을 향한 그의 집요함은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정치적 참혹상에 대한 세계사적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마치 그가 미래를 내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의 원대한 이상은 서구 정치철학사를 관통하여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참혹한 정치적 절망을 겪은 사람들에게 결코 꺼질 수 없는 횃불로 되살아나 결코 꺾일 수 없는 희망의 푯대로 우리들의 열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실천을 추동하고 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변혁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제3권 끝, 이어서 제4권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427c) 계속]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상편. ‘더 이상 우애 정신은 없다 – 포스트 코로나 시기를 앞두고 우애적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1940년 영국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1963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72년 시드니대학 정치이론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페이트만은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성이론과 정치이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수이며,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1988년에 출간한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페이트만이 시드니대학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을 때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최초로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exual contract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보다 더 간략하다. 이 책의 내용은 페이트만이 미국과 호주에서 열었던 여러 강연과 토론을 바탕으로 하고, 참고 자료들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스탠포드대학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수집하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프린스턴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1

이 책은 홉스, 칸트, 로크, 루소 등의 근대철학 텍스트들에서 쉽게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룬 부분들을 골라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페이트만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여러 가지 계약들에 관한 논의들이 정치이론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논의를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피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통적 정치이론과 현대적 정치이론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페이트만이 여성이론 분야에서,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정치이론 텍스트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이유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진 지속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역사의 굴곡에서조차 없앨 수 없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열망은 아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넓게 조망하고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속적이고 존속적인 시간에 담긴 것이었다.

Carole Pateman(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Political Science, Distinguished Professor)  https://ucla.academia.edu/CarolePateman

페이트만에 따르면, 너무 잘 알려진 토머스 홉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정작 여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철학 및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 논의들이 배제되었던 1970~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의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입장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보였다. 정치학이나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도 낯설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사회계약설에 대항하는 입장을 내세우는 시도는 더욱 낯설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여성이 시민사회에서 혼인계약을 할 수 있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를 내세우지만, 여성이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는 사회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는 신민(臣民)이라고 간주하는 실질적인 계약과 시대 및 사회적 한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2 홉스의 시민 계약론도 남성중심주의를 이상적으로 규정한 점에서 볼 때, 기존의 근대 철학자들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와 시민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예속이 교환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루소는 시민을 자발적으로 지배하고 예속하는 사회계약설을 제시하는데, 시민의 지배 및 예속권이 가지는 자발성은 결국 사회계약을 교의적으로 만들어버렸고, 실질적이고 자유로이 실천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시민의 권리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진부한 논의로 치부되거나 더 나아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3 로크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을 구분하고, 계약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이트만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혼인계약은 매춘계약이나 고용계약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예속하는 수단이었고, 사회계약은 결국 인류사와 함께 지속되어온 성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적 계약은 가내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후에 새로이 등장한 형제계약에 속한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권력이 중심되는 가족구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에도 영향을 주는 형제계약이다. 따라서, 형제계약에 속하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사회에 예속되는 개인의 신분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가부장제 계약은 항상 국가,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에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임금에 의한 노예계약과 시장사회주의에서 수많은 페미니즘운동을 일으킨 신체상의 소유권 등이 그 예이다. 사회계약에 대한 노동자나 시민의 예속과 복종의 관계는 언제나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다. 사회계약의 전반에 걸쳐 계약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은 가부장제에 있다. 그렇지만, 푸코가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계약이 사법제도나 교육상의 훈육, 통제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과 같이 페이트만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루고 다양한 법적 계약 관계를 주제로 삼지만, 특정한 계약법을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계약과 성 계약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상호대립관계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평등한 상태로 태어나고,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모든 인간을 토대로 사회계약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 계약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커다란 차이가 남겨져 있다. 은연중이든 의식적이든, 편협적이든 포용적이든, 상징적이든 실재적이든 간에, 사회계약에서 자유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남성으로 상징하고, 예속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질서라는 것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인간의 원초적 계약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 차이인 것이다.

17~18세기 국가와 시민, 정부 간의 사회계약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성적 계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괄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성인은 시민이 되고 결혼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또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성인이 획득하는 자유에 여성을 소유하는 것도 해당해 있다. 페이트만이 내세우는 여성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계약도 성적 계약에 기초해 있고, 시민이 얻는 자유도 이러한 성적 계약으로 인한 가부장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계약 형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사회계약뿐만 아니라 성적 계약까지도 원시적 자연이자 자유라는 의견이 오래된 편견으로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법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닌 오래된 파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왜 가부장제를 문제시 여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아버지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형제애로 탈바꿈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남성의 성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 사회계약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에는 애인이나 연인을 가리킬 때에 사랑(amour)에서 비롯되는 연인(amant)의 표현 외에 우정(amitie)에서 비롯되는 ‘한 명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뜻하고, 엉(윈) 쁘띠(뜨) 아미로 발음하는 표현인 ‘un(e) petit(e) ami(e)’가 있다. 한 명의 친구를 프랑스어로 표현하면, un(e) ami(e)인데, 이 어휘에서 ‘petit(e)’와 같은 형용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petit(e)가 ‘작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정답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에 ‘친밀한 감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된 이유는 주니어(junior)와 같은 ‘막내 형제’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애인을 가리키는 ‘쁘띠(뜨) 아미’는 마치 맏형이 막내동생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 등에서 연유한다. 즉, 성적 계약에 기초한 애인을 표현하는 어휘는 가족애적인 가부장제가 우애적인 가부장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 혁명기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나의 연인’과 같은 어휘에는 혈연관계를 뜻하는 형제애의 맥락과 의미가 비어있는 채 잔여물로 남아 있다. 근대 형제애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계약은 고용계약, 매춘계약을 포함한 성적 계약으로 간주되어서 사회계약에 속한 결혼 계약과 구분된다.

페미니즘에서 연구한 가부장제에 관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특성으로 인해, 페이트만은 사회적 결사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개인이 신체를 자유로이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회적 결사란, “시민들끼리의 개인적 우애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도모하는 집단으로서의 복수 형태인 우애‘들’을 의미한다.”4 이 용어는 남성 중심적인 비밀결사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모든 계약은 재산이나 권리의 상호교환과 이에 따른 평등이 전제해 있다. 그러나 한쪽이 “잠재적인 재산이 되면 불평등하게 된다.”5 재산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하므로, 잠재성을 전제로 한다면, 반드시 현실화되는 실재가 동반한다. 이것은 물질에 이미 담겨 있는 가치상에서의 평등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상상적인 신체로만 여기고, 실재적 신체를 가상화하는 관계에 제한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 이상 합법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잠재성은 어느 행위가 현실화되는 가능성(계기나 준원인 등)을 의미하는 한에서의 가상성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진 남편이 현실에서 실재적인 아내의 신체를 특정한 가상 세계의 도구로 삼거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만큼 아바타나 메타버스, 인터넷게임 등으로 가상화되어 있는 경우에 가상 남편이 가상 세계에서 연장된 현실의 실재적 아내에게 실질적 행위를 하는 경우 등, 전혀 현실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적인 가상 세계에 의해 선택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언어와 행위의 실질적인 영향력 등의 경우에 남녀의 성적 차이는 가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적 성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성차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법적 지위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소유하는 권리를 가상과 실재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박탈당하는 경우는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경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신체 소유권 문제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형제애를 토대로 한 형제계약에서 비롯된다. 이 계약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자본경제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본경제는 남녀 간의 형제애를 이상적인 모델로 규정하여 현실과 신화 간의 간격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남성에게는 오이디푸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여성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뿜어져 나온다. 근대 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은 언제나 신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자 보편적인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프랑스어로 fraternite라고 하며, 우애 혹은 형제애라는 의미도 가진다.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이념인 박애 정신은 근대 시민사회 시민들끼리 강하게 유대하도록 이끌어 오늘날에는 관용 정신(똘레랑스)으로 불린다. 박애 이념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 정신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애나 형제애 정신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사회계약, 특히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 매춘계약, 고용계약, 노예계약 등은 여러 유형의 가정폭력과 성범죄, 각종 중범죄,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난민수용의 문제 등을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관용 정신이든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화국 및 민주주의를 형성한 주요 정치이념마저도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민주주의 공화국을 향한 혁명의 길로 이끌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민중이 되어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 정치이념은 더 이상 사회통합의 계기가 아니라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에 대해 살펴보았다. 페이트만은 이 책에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성적 계약을 논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내세웠다. 그녀는 다양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념을 연구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에 대한 개념과 범위 규정,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고찰, 사회적 권력의 구조화 문제, 사회의 보편성인지 특수성인지의 여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여성성과 관련한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고찰 등과 같은 연구 과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연구는 현대 여성들의 사법 판결권을 개혁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자 작업이다. 4년 전 현 인류에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현대적 우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통계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가 약 670만 명이 넘고,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시민들의 경제 및 사회활동이 줄어들자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크게 감소하여,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아 길거리 문화가 사라질 위기가 처해 있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은 사회의 양극화 구조가 심각해지고, 기존의 산업 패러다임이 해체된 가운데 일자리를 얻거나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늘고 있다. 2023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17세기 근대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과 시민의식, 인권사상, 자본주의 경제사회 등이 300년 넘게 이어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계약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새로이 깨닫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사회는 또 다른 정치적 의무이자 권리, 자유를 실천하고, 논의를 확장 및 발전시키는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다.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교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는 이제 허물을 벗었다. 우리는 신종바이러스의 발견과 감염경로, 방역 대책, 예방진료,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 및 이와 관련한 신기술들을 경험하면서, 진부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근대 사회계약설을 재고찰하게 되었다. 끝내 사회계약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기만한 성적 계약의 진면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성적 계약은 시민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간에 어떠한 성(性)이라도 띠며 살고 있음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이 이 책에서 강조한 형제애적 가부장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고려해야 할 논의이다.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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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